있는 것이 아니면 없는 것이라고?[철학을다시 쓴다]-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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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것이 아니면 없는 것이라고?[철학을다시 쓴다]-③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이쯤에서 내가 첫 강의에서 한 말로 되돌아가기로 하지요. 같은 말을 되풀이하자는 뜻에서가 아니라, 딴 이야기를 하자는 뜻에서요.

다 아는 뻔한 말인데도 굳이 상기시켜 드렸듯이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은 하나도 없다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 말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가장 큰 단위로 여기는 우주도 없습니다. 또 없는 것이 없다는 말은 다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 말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가장 큰 단위로 여기는 우주가 하나가 아니라 무한히 여럿이 됩니다.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은 빠진 것이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 말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가장 큰 단위로 받아들이는 우주는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있는 것이 있다는 말은 하나가 있다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 말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가장 큰 단위로 받아들이는 우주는 하나입니다.

이 네 마디 말은 저마다 존재론이나 우주론의 주춧돌로 쓸 수 있는 것들입니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말로 주춧돌을 놓느냐는 개별 상황이나 집단 상황의 반영일 수도 있고, 시대가 요청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이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이나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을 주춧돌로 삼기 꺼리고 그 쪽으로 돌려지는 생각을 거짓으로 못 박아 자꾸만 외면하려는 데에 까닭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의식 안에 자리잡고 있고, 자꾸 자맥질시켜 물 속에 잠기게 하려고 해도 끊임없이 의식의 표면에 떠오르는 이 불길한 말에 끝까지 귀를 막을 수는 없지요.

더 솔직히 말할까요? 의식이 몰아내고자 하는 이 어둠의 소리는 사실 의식 활동의 숨은 전제들입니다. 없는 것이나 없다는 말을 빌리지 않으면 의식은 한 걸음도 발길을 떼 놓을 수 없습니다. 있는 것만 있는, 하나만 있는 세상에는 의식이고, 감각이고, 추억이고, 기대고, 행복이고, 불행이고, …… 그야말로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를 살려 내기 위해서도, 단위를 설정하고 법칙을 세우기 위해서도 이 세상의 삼라만상을 질과 양으로, 시간과 공간으로 나누고 그 나누어진 것을 다시 하나로 통일시키기 위해서도 없는 것이 있어야 하고, 있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있는 것을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것이 참말이고, 있는 것을 없다고 하거나(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이 거짓말인데, 참말이 참말로 들리는 것은 거짓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멀쩡하게 있는 것을 없다고 우긴다고 해서 없어지나요?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는 세상에는 있을 것도 없고, 없을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의식은 하나로 이어진 물의 흐름을 지난날의 물방울, 지금의 물방울, 앞날의 물방울로 나누어 고정시킨 뒤에 물방울 저마다에 있었던, 있는, 있을이라는 딱지를 붙입니다. 거꾸로 없었던, 없는, 없을이라는 딱지를 붙이기도 하지요. 그러면 지금부터 이 딱지 이론을 조금 가까이서 눈여겨보기로 할까요?”

“선생님께서 앞 강의 시간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론’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고백을 장황하리만큼 길게 인용하신 것이 혹시 이 딱지 이론을 펼치기 위한 전제는 아니었나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과 연관되는 딱지 이론의 대가이니까요. 아다시피 아우구스티누의 시간은 살아 있는 시간(참된 운동)이 아니라 의식 속에 고정된(매장된) 시간 의식입니다. 이 점에서는 그 전통을 이어받은 후설(Husserl)도 마찬가지지요. 이 이론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모든 살아 움직이는 것을 움직이지 못하게 핀으로 고정시키는 의식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를 이미 없는 것으로 미래를 아직 없는 것으로 못박습니다. 그러니까 있었던 것은 이미 없는 것이고, 있을 것은 아직 없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지금 있는 것? 그것은 이미 없는 것과 아직 없는 것을 이어 주는 흔들리는 접점 노릇을 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거꾸로 말하면 이미 없는 것도 아니고, 아직 없는 것도 아니고,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에드문트 후설(1859~1938) 출처: www.kitabinomurgasi.com

아우구스티누스의 과거, 현재, 미래를 없음과 연관지어 살펴보는 것도 흥미 있을 겁니다. 있음과 연관지어 있었던 것, 있는 것, 있을 것이 저마다 과거, 현재, 미래를 가리킨다면, 여기에 짝이 되는 없음의 계열은 없었던 것, 없는 것, 없을 것이 되겠지요. 여기에서 없었던 것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그것은 이미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없을 것은 아직 있는 것을 가리키겠지요? 없는 것은 이미 있는 것과 아직 있는 것 사이를 이어 주는 흔들리는 접점 노릇을 합니다. 그러니까 없는 것은 여기에서 이미 있는 것과 아직 있는 것을 한편으로는 갈라놓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이어 주는 징검다리 노릇을 하는데, 있는 것과 대비시켜 이야기하자면 이미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 있는 것도 아닌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말장난 같다고요? 아닙니다. 나는 지금 여러분들을 붙들고 말장난을 할 겨를이 없습니다. ‘길은 멀고 마음은 급하고’라는 말이 내 심정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지금부터 우리는 시간 축을 중심으로 우리의 의식 속에서 토막 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기능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본디 공간이 없는데 여기저기가 어디 있으며, 본디 시간이 없으니 과거가 따로 있고 현재가 따로 있고 미래가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마는 우리의 의식이 분별지를 요구하니 당분간 그 요청에 순응하기로 합시다.”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이렇게 말하면서 저는 숨이 가쁘고 두려웠습니다. 제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음울하고 불길한 경고의 소리가 울려 왔습니다.

‘너는 지금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려 하고 있다. 사유와 추론이 이루어지는 의식 공간에 한 발짝만 들어서도 의식의 칼날 아래 토막 나고 산산이 저며져서 형체조차 찾을 길 없는 것을 제물로 삼아 네 이론을 정당화하려고 하고 있다니, 바로 이런 오만을 경계하여 옛날 불가(佛家)에서 한 말이 있지 않더냐. 개구즉착(開口則錯). 입만 벙긋해도 틀린다. 차라리 입을 다물려무나.’

어쩌면 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직관지의 영역에 속하는 것을 시간과 공간으로 파편화한 분별지의 영역으로 끌어내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시간과 공간의 문제를 논하다니요? 이것은 작은 그릇 안에 큰 그릇을 담으려는 것이나 좁쌀 안에 우주를 집어넣으려는 시도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요, 시위를 떠난 화살이었습니다.

“자, 지금 우리는 시간 축 속에서 토막 난 운동의 시체들을 보고 있습니다. 이 여섯 토막 난 시체, 그야말로 육시처참한 시체의 부위들을 하나하나 들어 볼까요? 이것은 있었던 것, 이것은 그 짝이 되는 없었던 것, 또 이놈은 있는 것, 그 짝인 이놈은 없는 것, 그리고 이 무엇인지 모를 만큼 뭉개져 버린 것은 있을 것, 그리고 이 흉측하게 생긴 놈은 없을 것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한 배에서 태어난 놈들인데, 그리고 본디 하나였던 몸인데, 이렇게 의식이라는 백정이 토막 내 놓으니까 저마다 다른 놈인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이제부터 시체 해부 시간인데 어떤 놈부터 분해를 할까요? 시간의 흐름을 따라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가자고요? 할 수 없지요. 여러분들의 의식이 그렇게 한 방향으로 고정되어 있으니, 그리고 한 방향으로 고정된 시간의 회로를 유일한 흐름인 것으로 알고 있으니 그 요구를 따를 수밖에요.

우리는 앞에서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시작된 서구 철학의 오랜 전통을 짐짓 받아들여 과거는 이미 없는 것으로, 미래는 아직 없는 것으로 쳤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있음과 없음과 연관하여 정말 과거가 이미 없는 것이고, 미래가 아직 없는 것인지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있었던 것과 연관하여 과거를 살펴볼까요? 있었던 것은 아까 내가 말했듯이 이미 없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있었던 것을 이미 없는 것으로만 볼 수 있을까요? 지난 날 있었던 것이 지금도 있을 수 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창 밖의 저 관악산이 지난날부터 있었던 것이고, 지금도 있는 것이고, 내일도 있을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있었던 것은 이미 없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지금 있는 것, 앞으로도 있을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러니까 있었던 것의 테두리는 이미 없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지금 있는 것과 앞으로 있을 것까지 담을 수 있는 크기를 가졌다는 말이지요.

이와 연관되는 자세한 이야기는 뒤로 돌리기로 하고 이번에는 있었던 것과 짝을 이루는 없었던 것을 살펴보지요. 앞에서 짐짓 없었던 것은 이미 있는 것이라고 단순화시켜 규정했지만 지금도 없는 것이고, 앞으로도 없을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네모난 동그라미라는 말을 뒷받침할 수 있는 형상은 지난날에도 없었던 것이지만 지금도 없는 것이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있었던 것과 없었던 것에는 저마다 있음과 없음의 결이 동시에 숨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있음과 없음으로 추상의 최종 단계에서 나누어지는 원초적 관계가 어떤 때는 있었던 것으로 또 어떤 때는 없었던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실체화의 오류’(이런 식의 거만한 표현을 싫어한다는 것은 전에 한 번 이야기했지요?)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있음과 없음은 있었던 것에도 없었던 것에도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과거를 이미 없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있었던 것을 이미 없는 것으로, 그리고 없었던 것을 이미 있는 것으로 단순 규정하고 더 넓은 테두리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것만큼이나 섣부른 일이지요. 비록 우리의 의식이 이런 단순화를 통해서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 큰 힘을 얻기는 하지만요.

과거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현재와의 연관 속에서만 드러납니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독립된 테두리 안에 들어 있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관계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데, 관계가 없으면 관계항도 없습니다. 관계항이 먼저고 관계가 나중이 아니라 관계가 먼저고 그 관계를 의식 공간에서 분석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관계항을 놓게 되더라는 이야기이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야기하자면 있음과 없음도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있는 것은 이 둘의 관계이고, 우리의 의식이 분석의 최종 단계에서 이 두 항을 실체화하는데, 여기에 따르는 위험이 너무 커서 서구 존재론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함정에서 벗어난 철학자가 아직 한 사람도 없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겁니다. 그러니 어찌 나라고 해서 이 함정에서 쉽사리 비켜 서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어요?

우리가 지난날이다, 과거다, 있었던 것이다,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못박는 그 무엇은 스스로 아직도 흐르고 있고, 또 앞으로도 흐를 것이지만 우리 의식은 그것을 고정시켜 완고하게 기억 속에 가두고자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억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요동치고 반란을 일으키는 과거의 모습을 직관하는 힘을 점점 잃어 가고 있습니다. 과거는 추억과 반성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그렇게 되어 어쩔 수 없는 그런 것이 아니고 스스로 움직여서 현재와 미래의 모습까지도 바꾸어 낼 힘을 지닌 살아 생동하는 그 무엇입니다. 그러니 과거가 이미 없는 것이라느니, 우리의 의식, 우리의 기억, 우리의 영혼 속에 간직되어 있어서 우리 머리나 몸에 간직된 정보를 통해서만 현재나 미래에 힘을 미칠 수 있다고는 말하지 맙시다. 과거는 있음과 없음이라고 실체화되어 고정된 그 어느 것이 아니라 그 나름으로 현실을 구성하는 함과 됨의 영역입니다.”

“잠깐, 잠깐만요.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지금 증명되지 않는 수사로 우리를 현혹하고 계시는데, 과거가 그 나름으로 살아 흐른다느니,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발휘하고 있다느니, ‘함’ 곧 능동의 힘과 ‘됨’ 곧 수동의 힘을 지닌 무엇이라느니 하는 말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한 학생이 벌떡 일어나더니 저에게 대들듯이 따져 물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넘나듦은 우리의 의식, 우리의 말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특별한 현상은 아니지요. 이를테면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지난 추석에 말이야. 고향에 갔는데, 차에서 내리니까 어떤 사람이 서 있어. 많이 본 얼굴이야. 가까이 가서 보려고 하니까 그 사람이 고개를 돌리지 뭐야. 그제야 기억이 났지. 어렸을 때 내가 무던히도 골려 주었던 초등학교 동창이야.’ 이 말 속에서, 그리고 그 말을 하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자연스럽게 넘나듭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우리의 의식 속에서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유전 정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생명체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과거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미래입니다. 과거가 거미의 꽁무니에서 실을 빼내 거미줄을 치고, 벌에게 밀랍을 만들게 하여 정교한 육각형 집을 짓습니다. 죽어 없어진 저 하늘의 별은 몇억 광년을 가로질러 이 하늘에서 저렇게 찬란히 빛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그럴 것입니다. 땅 속에서 뿜어 나온 과거의 불은 현재 저렇게 큰 바위로 웅크리고 앉아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언젠가 부스러져 바닷속으로 흘러가서 밑에 깔렸다가 압력이 점점 커지면 다시 한 번 불길로 뿜어 오를지도 모릅니다.

나에게 그런 힘이 주어질지는 모르지만 더 엄밀한 증명이 필요하다면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지요.”

그 학생은 못내 불만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지만 저는 그 학생에게 ‘자네의 그 표정을 만드는 힘도 자네의 과거일세.’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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