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가치를 재구성해 보자[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⑤

노동 가치를 재구성해 보자-6, 7강

 

이재유(건국대 외래교수)

 

제6강. 노동 가치를 재구성해 보자(1)

?

1. 노동 가치론을 둘러싼 논쟁

 

(1) 아담 스미스(Adam Smith)

아담 스미스는 이전의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내적 연관에 대한 탐구를 노동가치설의 토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는 스미스의 『국부론』 서문에서 잘 나타나 있다. “부는 국민이 매년 소비하는 생활필수품과 편리품이고, 그것은 매년 국민의 노동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적 토대를 통일적으로 파악하고, 체계적으로 이론이 구축되었던 것은 아담 스미스에 와서이다. 스미스는 이전의 중상주의, 중농주의가 단편적으로 파악하였던 상업노동, 농업노동이 부의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일반이 부의 가치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스미스는 처음부터 일관성 있게 상품 가치에 대한 분석을 행하지는 않았다. 즉 상품의 가치는 그 생산에 필요한 노동의 시간으로 정해진다는 명제를, 가치는 산 노동의 일정량을 살 수 있는 상품의 양 또는 상품의 일정량을 살 수 있는 노동의 양으로 결정된다는 명제와 혼동하였다. 전자는 스미스가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 특히 원시사회에서 노동자는 상품가치의 전액을 자기 노동의 보수로 받게 되며, 따라서 상품의 가치는 노동임금과 같게 됨을 자본주의 사회의 그것과 등치시키기 때문에 나온 가치 규정이었다. 그러나 후자는 임금과 잉여가치라는, 자본주의에서만 나타나는 특수한 경제 형태를 설명하기 위해서 나온 가치 규정이었다. 전자로서는 임금과 잉여가치의 발생을 설명하지 못하지만, 후자로서는 이들의 발생을 해명할 수 있다.

아담스미스,표지. 출처: anticap.wordpress.com

이러한 상품가치에 대한 이중적 혼란은 잉여가치론에서도 유사하게 드러난다. 잉여가치는 전자의 가치 규정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고 오로지 후자의 가치 규정에서만 나온다. 일단 스미스는 노동자가 원료에 부가한 가치는 두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데, 노동자에게 속하는 임금(노동의 가치)과 자본가에 속하는 이윤(잉여가치)이 그것이다. 그래서 스미스는 이윤이 노동자가 그에게 지불된 임금과 동일한 양의 노동량을 초과하여 원료에 부가한 노동의 부분 즉 잉여노동임을 솔직히 나타내었다.

“노동자가 원료에 부가하는 가치는 (……) 두 개의 부분으로 분해된다. 즉 일부분은 그 노동자의 노동임금을 지불하고, 다른 부분은 그 고용주가 전대한 원료와 노임과의 전 자본에 대한 이윤을 지불한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151쪽)

다시 말하면 이러한 잉여노동이 잉여가치의 기원임을 스미스는 분명히 밝혀 두고 있다. 또한 이윤, 지대가 모두 잉여가치의 분신임을 명확히 하였다.

“노동은 그 자신 노동으로 분해하는 가격 부분의 가치를 측정할 뿐만 아니라, 지대로 분해하는 가격 부분, 이윤으로 분해하는 가격 부분의 가치도 또한 측정하는 것이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153쪽)

그러나 스미스는 잉여가치와 이윤, 지대를 직접적으로 동일시하는 오유를 범하고 있다. 하지만 잉여가치와 이윤, 지대는 동일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잉여가치가 이윤으로 전화될 때에는 상이한 자본의 생산 부문에 걸쳐 이윤율의 평균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윤과 잉여가치는 상이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잉여가치에서부터 이윤으로 나아가는 내적 연관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제 그는 상품의 가치를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상품의 가치는 노동임금, 이윤, 지대의 합이라고. 스미스는 이 부분에서 또 다시 노동의 가치를 노동력의 가치와 일치시키며, 따라서 이윤, 지대가 노동 가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본, 토지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따라서 스미스는 그가 애초에 발견하였던 가치 명제를 스스로 버리게 되었다.

(2)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

리카도는 스미스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스미스에게서 보이는 이중적 혼란을 일소하고 자본주의적 경제 체제의 내면적 분석을 보다 고도로 발전시켰다. 리카도는 자신의 저서 『정치 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에서 노동에 의한 가치에 대한 스미스의 이중적 혼란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는 (가치의) 표준 척도로서 어느 때에는 곡물을, 또 다른 때에는 노동시간을 들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노동시간은 어떤 물품을 생산하는 데 투하한 노동량이 아니라, 그 물품이 시장에서 지배할 수 있는 노동량인 것이다. 그는 마치 이것들이 두 개의 동일한 표현인 것처럼 (……) 논하고 있다.” (데이비드 리카도, 『정치 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 7쪽)

“한 상품의 가치, 또는 그 상품과 교환될 어떤 다른 상품의 양은 그 상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상대적 노동량에 좌우되는 것이지, 그 노동에 지불되는 보수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데이비드 리카도, 『정치 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 5쪽)

리카도는 상품 가치의 크기는 그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에 의해 결정된다고 규정한다. 그런데 발달된 자본주의 생산에서는 가치의 외화 형태인 생산가격이 자본의 경쟁을 통해 가치와는 다르게 나타난다. 리카도는 여기서 성립하는 생산가격이 어디까지 노동량에 의한 상품가치 규정과 부합하는지, 또 양자 사이의 모순이 무엇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가치와 생산가격을 조화시키려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생산에 직접 투여된 노동량뿐만 아니라 기계나 건물 등의 고정 자본에 포함된 노동도 똑같이 가치결정의 요인이 되며, 따라서 그 속에 사용되는 고정자본의 비율에 비례하여 얻어지는 이윤양의 차이 때문에 가치와는 달라진 생산가격이 성립한다. 또한 이러한 이윤양의 차이 때문에 나타나는 임금의 등락이 상품가치 자체의 변동의 요인이 됨을 리카도는 설명하고 있다. 즉 임금의 등귀는 필연적으로 이윤의 하락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가치가 노동량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하는 것과 모순된다. 물론 리카도는 임금의 등락이 상품가치에 끼치는 작용이 그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의 변동이 가져오는 결과에 비하여 비율적으로 가볍기 때문에, 가치의 법칙은 여전히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노동시간과는 독립된 제 영향력이 가치 그 자체에 작용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가치법칙의 폐기밖에 되지 않는다. 이러한 잘못은 리카도가 단순한 상품가치의 결정으로부터 잉여가치나 이윤이, 또한 일반적 이윤율이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설명하지 않고, 애초부터 일반적 이윤율, 즉 생산가격의 존재를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3) 칼 마르크스(Karl Marx)

마르크스는 상품가치의 근원, 실체가 노동이라는 점을 밝혀낸 것이 스미스와 리카도의 커다란 공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마르크스 역시 스미스나 리카도와 마찬가지로 노동이 모든 상품 가치의 근원임에 동의한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이 만들어 낸 모든 상품들과 구별되는, 상품을 만들어 낸 창조주이자 주체이며, 이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인간의 주요 특성이 바로 ‘노동’ 자체이고, 이러한 사실로부터 인간 노동 자체를 다른 모든 상품처럼 시장에서 판매할 수 없으며, 다만 이러한 노동의 구현체로서의 노동력(다른 모든 상품들도 노동의 구현체이다)이 다른 모든 상품들처럼 시장에서 판매될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이 깨닫지 못했다고 마르크스는 말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는과의 가치를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노동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질 수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노동력은 이 노동력을 만들어 내는 창조주, 주체로서의 인간과 현실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특수한 상품이다. 다시 말하자면 시장에서 판매되긴 하였지만 아직 추상적이고 가능적인 형태에 머물러 있는 노동력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으로 되기 위해서는, 즉 노동력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간의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인간의 노동을 마르크스는 ‘인간의 살아 있는 노동’이라 하는데, 노동력과 기계, 원료 등을 결합하여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 내고, 이는 종전보다 더 많은 가치를 만들어 내는데, 이 새로운 가치 부분이 바로 잉여가치이다. 그렇게 해서 잉여가치는 바로 자본, 지대에서 나오는 것(스미스, 리카도)이 아니라 바로 인간 노동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주는 임금은 노동의 가치가 아니라 노동력의 가치이다.

또한 단순가격과 생산가격이 시장의 경쟁이라는 개념을 통해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아래의 도표를 보면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자.

? C(기계) V(노동력) S(잉여노동) C+V+S(단순가격) P(이윤) C+V+P(생산가격) P-S
자본가 Ⅰ 90 10 10 110 20 120 +10
자본가 Ⅱ 80 20 20 120 20 120 0
자본가 Ⅲ 70 30 30 130 20 120 -10

<표1>: 같은 부문의 자본들 간의 경쟁을 바탕으로 시장에서의 가격경쟁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그 때문에 발생하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암시하고 있는 표.

C(불변자본, Constant capital):기계, 공장부지, 원료 등을 뜻하는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없는 자본을 뜻한다.
V(가변자본, Variable capital):노동자의 노동력을 뜻하는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자본을 뜻한다.
S(잉여노동 또는 잉여가치, Surplus)
C+V+S:단순가격으로서 하나의 상품을 만드는 데 들어간 비용을 뜻하는데, 시장에 나오기 전의 그 상품의 가치를 나타낸다.
P(이윤, Profit):시장에서 그 상품이 팔렸을 때 실제 남는 이윤을 뜻한다.
C+V+P:생산가격으로서 단순가격이 시장에서 가격 경쟁을 통해 현실화된 가격이다.

표에서 자본가Ⅰ,Ⅱ,Ⅲ 모두 하나의 상품을 만드는 데 총 100원(C+V)을 투자하고, 잉여가치율(S`=V/S)이 모두 100%라고 가정한다. 이때 상품은 단순가격으로 팔리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들의 경쟁에 따라 단순가격들의 평균으로 120원에 팔리게 된다. 그러면 자본가 Ⅰ,Ⅱ,Ⅲ 중 자본가Ⅰ이 가장 많은 이득을 취한다. 즉 단순가격에 10원의 이득이 더 붙는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자본가Ⅱ이고, 그 다음에는 자본가Ⅲ이다. 자본가Ⅱ는 단순가격과 생산가격이 같고, 자본가Ⅲ은 단순가격에서 -10원을 손해보고 있다. 가격경쟁에서 자본가Ⅰ이 우위를 점하면서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고 있다.

그런데 우위를 점하고 있으면서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는 요인이 무엇일까? 그것은 자본가Ⅰ이 자본가Ⅱ,Ⅲ보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도(C/V)가 높다는 것이다. 자본의 유기적 구성도가 높다는 것은 가변자본이 적어진다는 것, 즉 노동자의 임금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적어지고, 불변자본이 많아진다는 것, 다시 말해 사람이 일하던 것을 기계로 대체한다는 것이며, 그 기계의 효율을 최대한 높여서 노동 강도를 엄청나게 강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구조조정’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그런데 가변자본이 줄어든다는 것은 곧 가변자본에 의하여 생겨난 잉여가치(S)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잉여가치가 줄어든다는 것은 이윤율(S/C+V)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 이윤율은 경제성장률 지수의 척도이다. 위 표에서 보다시피 자본Ⅲ의 이윤율은 30/100인데 자본Ⅰ의 이윤율은 10/100이다. 서구선진국의 경제성장률이 1~2%대에 머무르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이윤율 저하 경향은 자본의 이윤 증대를 꾀한 결과이며, 이는 곧 노동력을 감소시킨다. 그리고 이 노동력의 감소는 다시 이윤율의 저하 경향을 가져와서 자본의 이윤 증대를 꾀하게 되며, 다시 노동력을 감소시킨다. 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순환과정은이다. 노동력의 감소는 노동자의 임금 전체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는 것이며, 비정규직과 실직자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순화과정이 계속 되풀이되면서 대다수 일하는 사람들의 삶은 피폐해지고 황폐해진다.

2. 노동의 가치와 소외, 가치와 가격

 

1) 노동의 가치와 소외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과을 구분해야 한다는 점이다. 소외가 발생하는 것은이 아니라 물적인 형태로서의으로부터 발생한다.

노동력이란 자연과의 관계, 나아가 사회적 관계를 실현시키는 인간의 구체적 실천활동 일반이 아니라, 자본가와 관계 맺는, 즉 자본에게 종속되고 착취되는 관계로서 노동자가 판매하는 상품의 실체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노동은 자연과의 관계, 나아가 사회적 관계, 즉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실현시키는 인간의 구체적인 실천적이고 변혁적인 활동일 뿐만 아니라 자신과 세계를 변혁시키는 실천활동이다.

2) 가치와 가격
가치란 자본주의 하에서의 역사적 개념으로서 모든 인간관계를 상품관계로 변환시키는 척도이다. 그리고 이때의 가치는 노동의 가치가 아니라의 가치이다.

“상품 시장에서 화폐소유자와 직접 대면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노동자이다. 후자가 판매하는 상품은 그의 노동력이다. 노동은 가치의 실체이며 또 내재적 척도지만 그 자체는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자본론』번역본(김수행 역), 726~7쪽)

이 노동력의 가치는 그 자체로 인간 노동의 소외 형태이다. 왜냐하면 인간 삶의 목적이 이 가치에 종속당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이 가치로서는 인간 자신의 삶의 목적을 실현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노동력 가치의 현상 형태가 가격인데, 가격은 구체적으로 임금의 형태로서 우리 눈에 나타나게 된다. 가격 또는 임금은 노동력의 가치와는 다르게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경쟁 개념이 도입되기 때문이다. 또한 임금은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이것도 동일 부문의 노동자의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경쟁을 통해 이루어진다)과 직접적으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자면 최저임금제는 바로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에 근거해 책정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노동력의 가치의 현상 형태인 가격 또는 임금은 인간 노동이 소외된 형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개별 노동자의 임금인상에 매달리거나 생산성을 담보로 하는 임금인상은 인간 노동 소외를 더욱 부채질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제7강. 노동의 가치를 재구성해 보자(2)

1. 자본주의 경제의 양면성

자본의 이익을 최대한 늘리면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은, 제레미 리프킨(『노동의 종말』의 저자)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중적인 측면을 가지게 된다. 먼저 긍정적인 측면으로는, 과학기술이 발전하게 됨에 따라 이전에는 인간의 노동을 통해 이루어졌던 일들이 기계로 대체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시기에는 모든 나라에서 노동자가 거의 필요 없는 농장과 공장 및 사무실이 등장하게 될 것이며, 아주 정교화된 지식 분야에서만 소수의 엘리트 노동자만이 노동을 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는 죽어라 일하기를 강요당하는 산업사회의 노예노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부정적인 측면으로는,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게 됨에 따라서, 인간이 노동할 수 있는 노동시간이 급격하게 줄어들 것이며, 이는 전반적으로 노동자의 일자리 수가 엄청나게 줄어듦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것은 노동자가 계속 일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임금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을지가 불분명해짐으로써 생계가 아주 불안정해지고, 이는 곧 경제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음을 뜻한다. 이는 현재에도 필요할 때만 노동자를 쓰는“노동 유연화 정책”, “구조조정 정책”과 맞닿아 있다.

 

2. 분배, 교환의 기준 1-리프킨(노동시간)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제레미 리프킨은 경제적 측면에서의 이러한 모순을 경제에만 맡겨 두어서는 더 많은 고통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측면에서 정부의 강력한 개입을 통해 이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게 된다. 하나는 실업에 따른 범죄 계층의 증가에 대응한 경찰력의 증가와 감옥의 증설이고, 다른 하나는 제3부문의 일자리 창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이 두 가지 중에서 두 번째를 위하여 시장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제레미 리프킨이 말하는 제3부문의 영역은 사회?문화적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공식적, 비공식적인 비영리적 활동을 포함하는 영역이며, 이 영역에서 사람들은 공동체적 유대와 사회적 질서를 창출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영역은 경제적 이익(자본의 이익)을 창출하는 시장의 영역과 대립되는 모든 비영리적 자치 활동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활동 영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적 자산으로서 이 활동 또는 이 활동의 결과물, 그리고 정부의 재원이 이 이 영역에서 어떻게 분배, 교환되고 소통될 수 있는가이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기준으로 분배, 교환되고 소통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것들에는 시간은행(time bank), 타임 달러(time dollar) 등의 제도가 있다.

이 제도의 운영 방식은 다음과 같다. 어떤 특정인이 자진해서 자신의 전문적인 활동(노동)을 한 시간 제공하면, 한 시간 달러의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이 보상은, 여러 전문적인 활동들이 서로 질적으로 아주 다를지라도, 한 시간 달러로서 동등하게 이루어진다. 즉 각 활동(노동) 시간은 기여한 바의 특징과 종류에 관계 없이 동등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레미 리프킨이 말하고 있는 이 제도 운영 방식은 사실상 본질적으로 시장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위의 자본의 생성(시장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과정에서 보았듯이, 질적으로 서로 다른 노동 생산물이 교환되는 기준 역시도 1시간, 2시간 등으로 표현되는 자연 시간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시장 영역과 대립되는 제3부문 영역 사이의 교환, 분배 소통 방식의 기본적인 구조는 동일하기 때문에 이 두 영역 사이의 차이점이 사라진다. 이는 곧 위에서 말한 부정적인 측면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깊어질 수 있는 위험성이 많아질 수 있음을 뜻하게 된다.

이 제도는 19C에 J.그레이, P.J.프루동, R.오언 등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주장되었던 노동화폐 제도와 유사하다. 노동화폐는 금을 화폐로 사용하지 않고 노동시간을 화폐단위로 하여 노동자 자신들의 노동과 노동생산물이 국립중앙은행을 매개로 교환되는 제도이다. 즉 몇 시간 노동을 했는가 하는 증명서로서의 노동화폐를 국립중앙은행이 발행하고, 이 노동화폐를 다시 중앙은행에 가서 자기가 필요한 물건으로 교환한다는 것이다. 이 제도는 오언에 의해 실행에 옮겨져 1832년 노동화폐로 노동생산물을 교환하는 국민평형노동교환소가 설립되었지만 3년을 못 넘기고 실패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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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분배, 교환의 기준 2-맑스(각자의 필요)

이렇게 노동시간을 기초로 분배, 교환되는 방식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제의 기본 구조이다. 그런데 이 구조에서는 내가 1시간을 열심히 일했다고 해서 1시간의 보상을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노동시간은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이기 때문이다. 이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은 과학기술의 발달 정도, 숙련 정도, 교육을 받은 정도 등에 의해 결정된다. 이 중에서 중요한 것은 교육을 받은 정도인데, 왜냐하면 과학기술에 어느 정도 정통하고 있으며, 숙련되었는가를 객관적으로(수치상) 알려 줄 수 있는 것이 교육을 받은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 교육을 비롯해 더 좋은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애를 쓰며, 이는 곧 사교육비의 엄청난 증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리프킨이 말하고 있는 시간은행 같은 경우는 성공할 확률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시간은행에서의 시간 역시도 결국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으로 환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교수의 노동 1시간과 블루칼라 노동자의 노동 1시간이 결코 같을 수 없다는 생각이 사람들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일자리가 줄어들어 노동자의 생계가 엄청 위협받음과 동시에 부익부빈익빈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이 존재한다. 이 다른 방식은 다름 아니라 맑스가 말하는 “각자의 필요에 따라”, 즉 각자의 욕구에 따라 분배, 교환, 소통되는 방식이다. 이 방식 속에서는 그 누구도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방식을 대단히 현실과 동떨어진, 유토피아적이고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이미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의 방식에 움터 있다. 친구들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 연인, 동아리 등등의 관계에서 말이다.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이익이나 손해 등을 따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관계 속에서 각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고받는다. 그러므로 이 방식은 현실에서 실현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이 방식을 어떻게 의식적으로 사회 전체에 적용시킬 수 있는가이다. 그렇지만 이것도 실현가능함을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국내적으로 보면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에 가면 서로가 서로에게 먹을 것과 담요, 음료수 등을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주고받는다. 서로에게 격려와 희망, 연대의 벅참을 주고받는다.

국외로 보면 쿠바, 베네수엘라, 볼리비아 등이 민중무역협정(PTA)(미국을 축으로 하는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해서 만든 협정)이라는 것을 체결하였다. 자유무역협정은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이것은 화폐의 양으로 나타난다)에 따라 분배, 교환, 소통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민중무역협정은 각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자의 양에 따라 분배, 교환, 소통하는 방식이다. 쿠바는 베네수엘라로부터 석유를, 볼리비아로부터 천연가스와 콩을, 베네수엘라는 쿠바로부터 의사를 비롯한 선진 의료제도를, 볼리비아로부터는 천연가스와 콩, 밀을, 볼리비아는 쿠바로부터 의사를 비롯한 선진 의료제도를, 베네수엘라로부터는 석유 등을 필요한 만큼 서로 주고받는다.

우리가 노동하는 것은 각자가 필요한 것을 얻고 충족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것이 바로 노동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분배 형식으로서의 노동시간이 문제가 아니라이 문제이다. 분배형식으로서의 노동시간은 결국 자본주의의 무정부적인 생산의 기초가 된다. 그렇지만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는 생산양식, 즉 계획 생산 양식은 자본주의의 무정부적인 생산 양식의 대안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