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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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상한?‘존재’와?‘무’가 아니고 흔해빠진?‘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1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지금부터 제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이른바 서양에서?‘존재론(存在論?: ontology)’이라고 부르는 철학의 한 분야에 대한 것입니다.?이 분야는 전통적으로 존재와 무를 다루는 분야로 알려져 있습니다.?존재(存在)와 무(無)라니!?여기에서 잠깐 제가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한 이야기를 끼워 넣겠습니다.

“여러분,?장 폴 사르트르라는 프랑스 철학자를 잘 아시지요?”

“예,?그분 소설가이기도 하지요?”

“그렇습니다.?그런데 그분이 비교적 초기에 썼던 유명한 철학책이 있습니다.?그 책 이름을 아는 분 계십니까?”

“예.”

“뭐지요?”

“《존재와 무》?아닙니까?”

학생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습니다.

“존재와 무라??대단히 어렵고 심오한 말인 것 같은데,?여러분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이런 말 자주 씁니까?”

“가끔 씁니다.”

“그럼,?여러분들 가운데서 지난 한 주일 동안 날마다 한 차례 이상 존재나 무라는 낱말을 입 밖에 내본 사람이 있으면,?한번 손을 들어 보시겠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지난 한 주일 동안 이 낱말들을 한 번도 써 본 기억이 없는 학생이 있으면 손을 들어 보십시오.”

강의실에 앉아 있던 학생들 거의 모두가 쭈뼛쭈뼛 손을 들었습니다!?이것은 바로 제 강의를 듣는 철학과 학생들과 저 사이에 있었던 일입니다.?제 강의실에서나 있었던 특수한 경우일까요??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그러면 사르트르가 붙인 원래 제목을 써 보겠습니다.?《Letre et le Neant》입니다.?이 프랑스 말을 토박이 우리말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L’etre et le neant =?있음과 없음(또는 임과 아님)입니다.?다시 물어 보겠습니다.?여러분 가운데 있다,?없다,?이다,?아니다라는 말을 빼고 단 일 분간이라도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자신이 있는 분은 한번 손을 들어 보십시오.”

제?‘존재론’?강의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저는 칠판에 문장 하나를 썼습니다.

“사람은 개와 다르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지금 쓴 글은 우리가 보통 하는 말을 옮겨 적은 것입니다.?이 말을 참과 거짓이 구별되는 문장,?곧 논리학에서 말하는 명제(命題?: proposition.?참 끔찍한 말이기는 합니다만 논리학 책을 보면 이런 낱말이 나옵니다.)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은 개가 아니다.”

학생들이 외쳤습니다.?저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 적었습니다.

사람은 개와 다르다. (일상 언어)?→?사람은 개가 아니다. (참말,?논리적 명제)

“그런데 왜 우리는?‘사람은 개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그것을 참말이라고 하지요?”

제가 물었습니다.

“사람은 개와 다르게 생겼잖아요.”

“개는 네 발로 걷고 사람은 두 발로 걷잖아요.”

“개는 냄새를 잘 맡는데 사람은 그렇지 못하잖아요.”

“…….”

강의실이 온통 시끌벅적해졌습니다.

“잠깐,?사람과 개가 서로 다르니까 사람은 개가 아니라는 말은 아까 나왔던 말이고,?이제 한 단계 더 높여서 이른바?‘존재론’답게 말해 봅시다.?다시 말해서?‘있다’, ‘없다’는 말을 써서 사람이 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 보자는 거지요.”

여기까지 이르면 학생들은 거의 잠잠해지기 마련입니다.?저는 칠판에 이렇게 썼습니다.

일상 언어의 차원?:?사람은 개와 다르다.

논리 언어의 차원?:?사람은 개가 아니다.

존재 언어의 차원?:?사람에게 있는?(어떤)?것이 개에게는 없고,?사람에게 없는?(어떤)?것이 개에게는 있다.

“여기에서 보다시피?‘같다’, ‘다르다’는 말은?‘이다’, ‘아니다’는 말로 바꿀 수 있고,?또 이 말은?‘있다’, ‘없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다시 말하자면,?우리 둘레에 있는 서로 다른 온갖 것들을 가르는 기준이 있음과 없음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저는 네 개의 문장을 칠판에 써 내려갔습니다.

1.?있는 것이 있다.

2.?있는 것이 없다.

3.?없는 것이 있다.

4.?없는 것이 없다.

“자,?이 네 개의 글 가운데 어느 것이 참말이고 어느 것이 거짓말입니까?”

학생들은 문장 네 개를 꼼꼼히 뜯어보고 있더니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구별하기 힘든데요.”

“왜,?왜 그렇지요?”

“글쎄요.?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문장은?‘ㄱ은?ㄴ이다.’나?‘ㄱ은?ㄷ이 아니다.’라는 틀을 가지고 있잖아요.?그러니까?‘사람은 동물이다.’나?‘사람은 개가 아니다.’와 같이?‘이다’, ‘아니다’로 앞에 있는 말과 뒤에 있는 말이 이어져 있어야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알 수 있는데,?이 문장들은 그냥 있다,?없다로 끝나잖아요.?그래서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알쏭달쏭한데요.”

“맞습니다. ‘저기 사람이 있다.’나?‘여기에는 아무것도 없다.’?같은 말은 그 말만 보아서는 그것이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따라서 이런 말은 일반적으로 논리적인 명제라고 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이렇게 모른다는 말이 참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저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칠판에 적혀 있는 이 네 마디 말들은 모두 뜻이 있는 말인가요??다시 말해서 여러분은 이 말들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나요?”

“예,?알아들을 수 있겠는데요.”

“그럼 지금부터 우리 그 뜻을 한번 캐 보기로 하지요.”

학생들과 제가 머리를 짜내서 캐낸 뜻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1.?있는 것이 있다.?→?달리 이 말을 바꿀 필요가 없다.?이를테면 우리는?‘있는 것은 있고,?없는 것은 없는 거야.’라고 할 때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다.

2.?있는 것이 없다.?→?하나도 없다. (눈여겨볼 낱말?: ‘하나’)

3.?없는 것이 있다.?→?빠진 것이 있다. (눈여겨볼 낱말?: ‘빠진 것’)

4.?없는 것이 없다.?→?다 있다. (눈여겨볼 낱말?: ‘다’)

자,?여기서부터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첫 번째 말이야 그냥 넘어갈 수 있다 치더라도 두 번째부터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이 어떻게 해서?‘하나도 없다.’는 뜻을 지니게 될까??배운 도둑질이라고 저는 서양 고대 철학자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의 생각을 빌려 이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있는 것은 하나일까요,?여럿일까요?”

제가 이렇게 물었더니,?학생들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습니다.?틀림없이?‘저 선생 어떻게 된 거 아냐?’?하고 머릿속으로 내 머리를 향해 손가락을 서너 바퀴쯤 돌렸음직한 표정들이었습니다.

“에이,?선생님도!?있는 것은 당연히 여러 개지요.?저도 있고 선생님도 있고,여기 책상도 있고,?가방도 있잖아요.”

“잠깐,?잠깐만요.?제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제가 조금 설명을 하고 나서 다시 묻지요.?저기 있는 예쁜 여학생,?학생은 여자가 분명하지요?”

와그르르 웃음소리.

“요즈음에는 겉모습만 보아서는 도무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때가 많아서 한 말이니 노엽게 듣지 말아요.?그럼 제가 칠판에 몇 개의 낱말을 적어 볼 테니까 이 낱말들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알아맞혀 보세요.”

여자―사람―동물―생물―있는 것

학생들은 이 낱말들을 연결시켜 문장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여자는 사람이다. (여자 수보다 사람 수가 더 많다.)

사람은 동물이다. (사람 수보다 동물 수가 더 많다.)

동물은 생물이다. (동물 수보다 생물 수가 더 많다.)

생물은 있는 것이다. (생물 수보다 있는 것 수가 더 많다(?))

“어때요,?한 방 먹으셨지요??있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잖아요.?있는 것이 하나뿐이라니 말이나 돼요?”

아이고 골치야.?그야말로 제가 여우처럼 제 꾀에 넘어가고 만 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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