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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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상한?‘존재’와?‘무’가 아니고 흔해빠진?‘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2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자,?자,?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들었어요.?그러나 지금 우리가 따져 보려는 건 어느 낱말의 울타리 속에 더 많은 것들이 들어가느냐가 아니고 낱말이 지닌 틀이 어떻게 달라지는가이니까,?잠깐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금만 더 제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제가 알고 싶었던 건?‘있는 것’이라는 낱말이 그 안에 담길 수 있는,?더 그릇이 큰 낱말이 따로 있느냐는 것입니다.?그러니까?‘사람’보다는?‘동물’이 더 그릇이 큰 낱말이고, ‘생물’보다는?‘있는 것’이 더 그릇이 크지요??그럼?‘있는 것’?다음에?‘있는 것’까지 담을 수 있는 더 그릇이 큰 낱말이 있나요,?없나요?”

“글쎄요??없는 것 같은데요.”

학생들의 시큰둥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면,?이제 이 그릇이 가장 큰 괴물 단지〔논리학에서는 이것보다 더 울타리가 넓은 낱말이 없다고 해서 잔뜩 어려운 말로?‘존재라는 개념은 최고의 유개념(類槪念)이다.’라고 게거품을 무는데,?그런 말은 잊어버리고〕?‘있는 것’이라는 낱말에만 주의를 기울여 봅시다.?그리고 여러분 말대로?‘있는 것’이라는 이 괴물이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라고 칩시다.?그런데 여럿의 가장 작은 수(이것을 여럿[多]의 최소 단위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는 몇이지요??그렇습니다.?둘이지요??하나,?둘의 둘.?그러면 이제?‘있는 것’이 두 마리라고 치고 그놈들을 나란히 놓아 보기로 할까요?”

그림1

그림1

“앞에 있는?‘있는 것(ㄱ)’과 뒤에 있는?‘있는 것(ㄴ)’이 서로 다른 것이 되려면 떨어져 있어야 하겠지요??만일에 이 두 놈이 한데 붙어 있으면 우리는 두 마리라고 할 수가 없잖아요??그런데 이 두 마리가 떨어져 있으려면 둘을 떼어 놓는 무엇인가가 사이에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여러분과 저 사이에 공간이 있듯이 말입니다.”

학생들은 제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럼,?앞에?‘있는 것(ㄱ)’과 뒤에?‘있는 것(ㄴ)’을 갈라놓는 이 금은?‘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학생들은 갑자기 어리둥절해진 것 같았습니다.

“‘있는 것’이요.”

한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있는 것’이라고요??그럼?‘있는 것(ㄱ)’, ‘있는 것(금)’, ‘있는 것(ㄴ)’?죄다‘있는 것’이네요.?구별이 안 되네요.?따라서?‘있는 것’?두 마리를 갈라 놓는 금도?‘있는 것’이라는 괴물이라면 이 괴물을 구태여 셋이라고 할 필요가 없지 않겠어요??죄다?‘있는 것’이니?‘있는 것’은 하나이지요.”

야바위 노름에서 잠시 딴전을 피우다가 헛짚었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학생이 얼른 대답했습니다.

“그럼, ‘없는 것’이요.”

“그럴까요??그런데?‘없는 것’이 뭐지요??그거 그냥 없는 것 아니에요? ‘없는 것’이니까 없지요??그럼?‘있는 것’?둘을 갈라 놓을 수 있다는 금은?‘없는 것’이네요.?그러니까 금은 없네요.?따라서?‘있는 것’이라는 괴물은 여전히 하나로 있네요.”

학생들은 야바위 노름에서 호주머니를 죄다 털려서 빈털터리가 된 풋내기 도박꾼처럼 씩씩댔습니다.

“이건 제가 꾸며 낸 야바위 노름이 아니고,?서양 고대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라는 사람의 생각입니다.?그 사람은 이 세상에는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는데 있는 것은 이렇게 모두 달라붙어서 하나로 있다고 주장했어요.?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 나라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예요.?특별히 철학을 공부하지 않은 두메 산골 할머니에게 물어 봐도?‘그래,?이 할멈은 학교 문턱도 밟아 보지 못해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제 잉,?그래도?‘있는 것이 없네.’?이 말이?‘하나도 없네.’라는 말이라는 것까지 모르까 잉.?그것이 뭣이 그렇고롬 어렵다고 그래들 해쌓는지 모르겠어 잉.’?하고 대답할 것입니다.?그러니까,?있는 것이 없어지면 조금씩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도 남김없이 깡그리 없어진다는 건데,?그것은 있는 것이 하나로 뭉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조금씩 떼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뒤이어 저는 파르메니데스라는 괴짜가?‘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다.’는 말까지 했다는 것도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선생님,?서양 철학의 특징 하나는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지고 까닭을 밝히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그런데 파르메니데스인지 허여무레데스인지 하는 자가 그렇게 주장한 까닭이 뭡니까?”

한 학생이 당돌하게 묻더군요.?그래서 믿거나 말거나라는 생각으로 이렇게 대답했지요.

“우리는 흔히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른다고 믿고 있잖아요??그런데 파르메니데스인지 누르무레데스인지 하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과거란 뭐냐??그것은 이미 없는 것이다.?또 미래란 뭐냐?그것은 아직 없는 것이다.?이미 없거나 아직 없거나,?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따라서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그러니 시간이라는 게 있을 게 뭐냐?있는 것은 현재뿐이다.’?어때요??그럴 듯하지 않나요??그럴 듯하지 않다고요?”

그러니 별수 있나요??저는 자기 선생의 이 이상한(?)?이론을 뒷받침하려고 갖은 애를 다 썼던 파르메니데스의 제자 제논(Zenon)까지 들먹여야 했습니다.

“파르메니데스가 시간이 없다고 하자 사람들은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그게 말이나 되느냐고 들고 일어섰어요.?그러자 제논이 나섰지요.?제논이 그 사람들에게 한 이야기는 대강 이런 것이었어요. ‘당신들 말대로 시간이 있다고 치자.?그러면 시간의 최소 단위가 있을 것 아니냐??그 최소 단위를 시간의 원자로 치고 그것을 순간이나 찰나라고 부르기로 하자.?그런데 그것이 시간의 가장 작은 구성단위이니까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것이어야 하겠지.?그리고 시간은 그 구성단위들이 보태져서 생겨난 것이겠지.?그럼 내가 여기에 그림을 하나 그려 보마.

그림2

그림2

이 그림에서 한 칸 한 칸은 시간의 최소 단위인 찰나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치자.?그림의?ㄱ은 정거장을 나타낸다.?그리고?ㄴ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오는 기차를 나타낸다.?이 기차는 한 찰나에 정거장 한 칸을 지나간다.?ㄷ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들어오는 기차를 나타낸다.?이 기차도 마찬가지로 한 찰나에 정거장 한 칸을 지나간다.?ㄴ과?ㄷ의 한 칸 한 칸도 마찬가지로 한 찰나를 나타낸다.?두 찰나가 지나면 이 두 기차는 동시에 정거장에 들어와서 그림?3과 같이 바뀐다.

윤구병 그림 1-3

정거장?ㄱ을 중심으로 보면?ㄴ과?ㄷ은 두 찰나에 모두 정거장에 들어왔다.그러나?ㄴ과?ㄷ을 비교해 보자.?그러면?ㄴ과?ㄷ은 두 찰나에 네 칸을 서로 지나 왔다는 것을 볼 수 있다.?우리는 앞에서 시간의 최소 단위는 찰나이고,기차는 한 찰나에 한 칸밖에 갈 수가 없다고 했다.?그런데 이게 웬일인가?두 찰나가 네 찰나로 둔갑한 것이 아닌가??다시 말하면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다고 믿었던 시간의 최소 단위가 둘로 쪼개진 것이다.?따라서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시간의 최소 단위가 있다는 말은 헛소리고,?시간의 최소 단위가 없으므로 그 최소 단위들이 모여서 이루는 시간도 없다는 게 맞는 이야기다.?그렇지 않은가?’?제논은 공간이 없다는 것도 비슷한 방법으로 증명하려고 들었어요.?파르메니데스는 그저?‘공간이 있다면 여기,?저기라는 말을 쓸 수 있어야 하는데 잘 아다시피 여기는 저기에 없는 것이고 저기는 여기에 없는 것이다.?그런데 없는 것은 없으므로 저기 없는 것인 여기도 없고,?여기 없는 것인 저기도 없다.’는 식으로 말했는데,?제논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공간은 일정한 크기를 가진 것이 놓인 자리이거나 일정한 크기를 지닌 빈 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런데 크기를 가진 것은 쪼개질 수 있다.?우리가 크기를 가진 것이 있다고 말하려면 크기를 이루는 최소 단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여기에 일정한 크기를 가진 줄〔line〕이 하나 있다고 치자.?그리고 우리가 머릿속에 칼을 가지고 있어서 그 줄을 쪼개고 또 쪼갠다고 치자.?크기를 가진 것은 아다시피 무한히 쪼개질 수 있으니까 우리는 이 줄을 무한히 쪼개 갔다고 보고,?그 결과로 크기의 가장 작은 알맹이를 얻었다고 하자.?그런데 그 크기의 가장 작은 구성 단위는 크기가 없거나 크기를 가진 것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만일에 그 가장 작은 구성 단위가 크기를 가지지 않은 것이라면 크기가 없는 것을 무한히 더해 봤자 거기서 크기가 있는 것이 나오지 않는다.?마치 수학에서?0을 아무리 보태 보았자?0밖에 안 되는 것처럼.?반대로 만일에 그 가장 작은 단위가 크기를 가지고 있고 모두 꼭 같은 크기를 지니고 있다면 크기를 가진 것을 무한히 더하면 처음에 가정했던 일정한 크기를 지닌 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긴 줄이 나오게 된다.?이 두 가지 모순되는 결과가 나오는데 어떻게 크기의 가장 작은 단위가 있다고 할 수 있겠으며,?크기의 최소 단위를 찾을 수 없는데 어떻게 크기로 이루어진 공간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이렇게 해서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은 시간과 공간마저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말았지요.”

그러고 나서 저는 마치 제가 파르메니데스라도 되는 것처럼 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여러분은 없는 것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나요?”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느냐고요??왜 못 해요??황금산,?우주마왕,?춘향이와 이 도령,?이렇게 우리는 현실에 없는 것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잖아요?”

“그것은 없는 것에 들어가지 않아요.?상상 속에 있든지,?소설 속에 있든지 그것도 있는 것은 있는 것이에요.?아예 없는 것,?흔히 허무라고 하잖아요?그런 것을 생각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글쎄요.?그건 생각할 수 없는데요.”

한 학생이 마지못해 뾰로통하게 대답하더군요.

“그러면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말할 수도 없지요??그렇지요?”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예.”

학생들이 불만스럽다는 듯 대답했습니다.

“정말 우리는 없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나요?”

저는 다시 다짐을 했습니다.

“예에―.”

모두 고삐에 묶인 소처럼 대답을 길게 뺐습니다.?자,?이렇게 해서 우리는‘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다.?시간도 공간도 없는 것이다.’라는 파르메니데스의 덫에 치이고 말았습니다.?마침 서양 중세 철학사 시간이었기 때문에,?그리고 저는 그리스 철학이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중세 철학자(신학자라고 해도 무리는 없겠지요.)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꺼낸 참이기에 내친김에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파르메니데스인지 까마무레데스인지 하는 괴짜와 그 사람 제자인 제논인지 남의 논인지 하는 자의 세 치 혀끝에 녹아나 시간도 공간도 없는 곳,?모두가 달라붙어서 하나가 되어 버린 있는 것만 있는 세계까지 와 버리고 말았습니다.?이 하나뿐인 있는 것,?시간도 공간도 없으므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영원한 세계에 있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유일신?‘하나님’입니다.?시간이 없으므로?‘하나님’은 영원하고,?공간이 없으므로?‘하나님’은 여기나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루 있는 것,?곧 편재하는 것입니다.따라서 중세 신학자들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신은 히브리의?‘하느님’이 아니라 그리스의?‘하나님’인 파르메니데스의 있는 것,?곧 하나입니다.”

제 말이 얼마나 맞아떨어질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그러나 저를 가르치신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은 플라톤의 정신적인 부모이고,?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정신적인 자식인데,?중세 철학자들,그 가운데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사람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기둥으로 삼아 자기들의 신학을 세웠다고 하니,전혀 터무니없는 생각은 아닐 듯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시간도 공간도 없고,?따라서 이것,?저것도 없고,?과거도 미래도 없다면,?이 세상도 말짱 헛것이겠네요.”

제 이야기를 듣던 학생 하나가 한숨을 포옥 내쉬면서 이렇게 뇌까렸습니다.

“물론이지요.?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것을 현상 세계라고 하는데,?시간과 공간에 얽매여 있는 이 세상은 말짱 덧없는 그림자 같은 것입니다.”

“되게 허무하네요.”

“어떻게 생각하면 그렇지요.?중세 기독교 신학에 젖어든 많은 기독교도들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을?‘헛되고 또 헛되도다.’?하고 중얼거리는 것도 파르메니데스의 탓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어요.?그러나 여러분,?그렇다고 해서 파르메니데스나 제논을 허무주의자나 허무 사상을 퍼뜨리고 다닌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돼요.?여담이지만 제논에 대해서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제논이 살던 엘레아에 네아르코스라는 독재자가 있었는데,제논은 네아르코스의 독재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지하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그런데 어쩌다 들통이 나서 제논은 동료들과 같이 붙들리게 되었다는 겁니다.?그런데 네아르코스의 혹독한 고문에 못 이겨 다른 동료들이 전부 자백을 했는데도 제논은 끝까지 동료들을 팔지 않고 버텼대요.?그리고 제논을 죽이기 전에 네아르코스가 직접 고문을 하면서 이제 그만 털어놓으라고 하자 네아르코스에게?‘아직도 나는 내 혀의 주인이다.’라고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고는 자기 이빨로 제 혀를 끊어서 네아르코스의 얼굴에 내뱉었다고 합니다.”

한참 지껄였다고 생각했는데,?이제 보니?‘있는 것이 없다.’는 말에서만 곁가지를 친 셈이군요.?그러면 다음으로?‘없는 것이 있다.’는 말로 넘어가기로 하지요.?이 말은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우리를 거짓의 세계로 이끌어 가는 함정입니다.?그리고 어느 면에서는 파르메니데스의 말이 사실이기도 합니다.?구태여 파르메니데스를 들먹이지 않더라도,?있는 것을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것이 참말이고,?없는 것을 있다고 하거나 있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것이 거짓말이 아니던가요??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제까지 우리는?‘없는 것은 없다.’라고 하면서,?따라서 없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말할 수도 없다고 하면서 줄곧 없는 것이라는 말과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지 않았습니까??그러고 보니,?없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니라,?없는 것을 빼면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없는 것을 생각하고 말할 수 없다는 없다라는 말을 쓸 수 있게 되었을까요??이 세상 어딘가에 없는 것이 있는 것이나 아닐까요??왜냐하면 우리의 생각 속에 있는 것은 세상에 있는 것을 되비추고 있다고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없는 것을 생각하고 없다는 말을 할 수 있다면 이 세상 어딘가에 없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따라서?‘없는 것이 있다.’는 말을 단순한 거짓말로 돌려 버릴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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