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철연에서 현재 운영되는 연구분과의 분과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분과 소개나 분과 세미나 결과물, 또는 분과 개인들의 글을 올리는 공간입니다.

낸시 초도로우(下)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8. <모성의 재생산>, 낸시 초도로우 (下)

 

김상애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아주 어린아이는 자신의 의지대로 몸을 가눌 수도, 스스로 음식을 섭취할 수도, 심지어는 스스로 잠을 청할 수조차 없는 매우 취약한 상태에 있다. 즉 문자그대로 스스로 생존할 수 없다. 이 시기 어린아이는 자신을 돌보는 이를 필요로 하지만, 자신과 환경, 그리고 자신과 자신을 돌보는 사람(주로 어머니)을 구분하지 못한다. 어머니 없이는 생존하지 못함에도, 아이는 자신과 분리된 존재인 어머니가 자신을 ‘돌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잘’ 돌본다면, 어린아이는 자신이 전능하다고 느낀다. ‘잘’ 돌보는 어머니는 아이에게 극도로 헌신하며 아이의 생리적인 욕구와 정서적인 욕구를 재빠르게 알아채고, 섬세하게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머니와 아이의 일차적인 관계는 가장 안정적이고 완벽하며 모든 사랑의 토대가 된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이처럼 어머니와 아이의 초기관계가 특별하고,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이와 같은 경험이 이후 부모노릇에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다.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가 특별하고 매우 중요하다면, 자녀 양육이 자신이 어렸을 때 경험한 완전하고 충만한 관계를 어머니가 되어 재구성하는 것이라면, 모든 어머니는 아이와의 관계에서 완벽한 사랑을 느껴야 한다. 그런데 왜 어떤 어머니는 육아우울증에 걸리는 걸까? 초도로우는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다루는 정신분석학적 설명을 강하게 비판한다. 어머니-아이 관계의 절대성은 아이에게나 적용된다는 것이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이에게 어머니는 관계와 사회의 전부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머니-여성은 아이 외에도 다른 사람과 다른 관계를 맺고 있으며, 가정 밖의 사회에 또한 속해 있다. 자신을 돌보는 사람 없이는 아예 생존이 불가능한 어린 아이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느끼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성인 여성이 자신의 아이에 대해 느끼고 경험한다고 보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어머니-아이 관계의 절대적 중요성이 상호적이지 않다는 점 외에도,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 그리고 어머니의 역할이 이 초기관계로부터 비롯된다고 기술하는 정신분석학은 문제적이다. 어째서 여성만이 양육하는 ‘어머니’가 되는지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족스러운 돌봄을 받은 경험이 이후 부모노릇에 영향을 미친다면, 부모를 가졌던 모든 이들이 부모노릇을 하고 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주로 여성만이 아이를 돌보는 부모노릇을 한다. 남성 또한 틀림없이 자신을 돌본 부모를 가졌음에도 말이다.

초도로우는 여자아이만이 자라서 ‘어머니’가 되는 현실을 분석하기 위해 여자아이의 심리발달과정에 주목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여자아이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남자아이와 정확하게 대칭적으로 해소한다. 그 결과로 여자아이는 여성으로서 젠더정체성과 남성을 향한 이성애 지향성을 획득한다. 하지만 여자아이의 이와 같은 오이디푸스콤플렉스 극복기는 초도로우가 지적하듯, 매우 비약적이며 단순한 설명이다.

 

  • 여성-어머니의 돌봄으로 인한 대상관계경험의 젠더화

 

대상관계이론은 인생 초기에 만나는 가장 가까운 타인과의 애착과 분리의 경험이 자아 내에 대상 이미지를 형성하며, 이렇게 자아에 내면화된 대상과의 관계가 훗날 타인과의 대인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강조한다. 초도로우는 대상관계이론의 설명을 빌어, 어머니와 자신이 분리된 주체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시기에서부터 성인 여성으로 성장하고 ‘어머니’가 되기까지 여자아이의 심리발달과정을 다시 쓴다.

초도로우에 따르면 고전적인 오이디푸스콤플렉스의 내용과는 달리, 여자아이 또한 남자아이 못지 않게 어머니에게 집중적으로 애착하며, 그 관계에 등장한 아버지를 경쟁자로 본다. “양성의 아이들 모두에게 일차적 사랑과 동일시의 대상은 어머니이고 아버지들은 나중에, 다른 방식으로 그 관계 구도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기 진입 이전, 즉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에 아버지가 등장하기 이전의 ‘전오이디푸스기’에서부터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의 심리발달과정은 다르게 진행된다. 프로이트는 이 차이가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었다고 보았다. 하지만 초도로우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심리발달과정이 다른 이유를 비대칭적인 부모노릇에서, 그리고 아이의 심리발달과정에 매개되는 부모의 양육 태도, 감정과 무의식에서 찾는다.

모자관계와 모녀관계를 다룬 여러 임상자료들을 통해 초도로우는 어머니가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를 대하는 방식이 다름을 지적한다. 기존의 정신분석학은 어린아이의 심리발달이 타고난 충동들에 의한 것이라 설명하지만, 아이의 심리발달에는 돌보는 이의 느낌과 무의식이 개입한다는 것이다. 초도로우가 다루는 임상자료들에 따르면, 어머니는 아들을 자신과 분리된 타인으로 경험하고,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아들을 어머니 자신과 분리하도록 권한다. 반면에 어머니는 자신 또한 어머니의 딸이었기에 자신의 딸을 분리된 타인이라기보다는 자기자신의 확장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전오이디푸스적 경험은 남자아이가 명확한 자아 경계를 발달시키도록, 여자아이는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자아 경계를 발달시키도록 장려한다. 그리하여 이 대상관계적 경험은 남자아이는 독립적인 남성적 남성이 되도록, 여자아이는 관계적인 여성적 여성이 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결국 어머니노릇은 아이를 양육하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어머니노릇)의 재생산 능력을 포함한다. 이 재생산은 일차적 양육을 감당하는 특정한 심리적 능력과 태도를 지닌 여성과 그것이 없는 남성을 생산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 딸은 어머니를 사랑했다


전오이디푸스기를 거쳐 여자아이는 자신의 성애적 지향을 어머니에게서 아버지로 바꾸는 오이디푸스기에 진입한다. 하지만 앞서 강조했듯, 아버지는 어머니의 애착을 깨뜨릴 만큼 충분히 중요한 대상으로 봉사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자아이는 오이디푸스기를 거치는 와중에도 어머니에 대한 의존, 애착, 공생의 관계를 지속시킨다. 새로운 관계의 대상으로 등장한 아버지는 어머니와의 관계에 단순히 추가되는 오이디푸스적 애착일 뿐이다. 이에 따르면 여자아이가 어머니로부터 아버지로 돌아서게 되더라도, 이는 자신에게 페니스를 주지 않은 어머니가 미워서, 혹은 어머니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경쟁상대로 간주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여자아이는 어머니에 대해 양가감정을 갖는데, 한편으로 여자아이는 어머니를 여전히 특별히 중요한 대상으로 사랑하고, 다른 한편으로 여자아이는 어머니의 사랑을 획득하고 싶지만, 어머니가 이미 이성애자임에 대해 좌절한다. 이에 반해 아버지는 어머니에게서 얻지 못하는 성애적 사랑을 여자아이에게 제공하며,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만한 페니스를 소유한 사람이다. 결국 이와 같은 심리과정을 거쳐 여자아이는 어머니에게서 아버지로 돌아서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여자아이의 오이디푸스기는 아버지와 딸의 문제인 만큼이나, 전오이디푸스기에서 연장된 어머니와 딸의 문제이기에 결코 단순하지 않으며,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해결한 이후, 새로운 성적 자극이 등장하기까지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의 섹슈얼리티는 특별히 문제되지 않는다. 이 시기를 정신분석학에서 ‘잠재기’라고 부르는데, 초도로우에 따르면 이 잠재기에 아이들은 가족 안의 삶과 더불어 학교나 또래집단 등 가족적 삶의 바깥에서 생활하면서 의식적으로 학습하고 역할을 훈련한다. 잠재기 이후, 보다 더 비가족적인 관계의 세계에 진입하는 청소년기의 여자아이는 또 다시 위기와 갈등에 직면한다. 남자아이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잘 해결했기 때문에 가족 외부의 세계에 쉽게 진입한다. 반면에 이 시기 여자아이는 해소하지 못한 전오이디푸스기와 오이디푸스기의 갈등을 지속한다. 게다가 청소년기는 여자아이가 월경을 시작하고, 남성과 교제를 하는 등 여성이 되는 것의 모든 사회학적, 심리학적 문제들과 맞닥뜨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때 어머니는 딸의 발달하는 섹슈얼리티에 대해 관심을 갖고 개입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자아이는 어머니-여성과 의식적으로 동일시하면서도, 동시에 어머니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양가감정을 갖는다. 어머니에 대한 애착과 거부의 양가성에서 동요하면서, 여자아이들은 어머니 대신에 사랑하고 동일시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공유하는 단짝을 찾거나, 남성을 향한 성애를 선택하면서 이성애적 결단을 내리는 것으로 해결책을 찾게 된다.

 

  • 서로를 재/구성하는 가족관계와 경제관계

 

“우리는 노동의 성별분업을 성 불평등과 분리할 수 없다. 노동의 성별분업과 여성의 아이 돌보기 책임은 남성 지배와 연결되고 남성지배를 낳는다.”

 

초도로우는 딸이 ‘어머니’가 되는 가족 내의 구조가 가족 외에서 젠더가 사회적으로 조직되는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그가 책 전반에서 강조했듯, 어머니가 아이에게 일차적으로 중요한 대상이 되는 까닭은 아버지의 부재 때문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가족 부양을 위해 가정 밖에서 노동하기 때문에 가정에 부재한다.

뿐만 아니라, 전오이디푸스기, 오이디푸스기, 청소년기를 모두 거쳐 성인기에 진입한 남성과 여성은 남성을 남성으로, 여성을 여성으로 사회화시키는 노동시장의 가족 외 제도에 속하게 된다. 노동시장이라는 사회는 여성을 일차적으로 아내와 어머니로 규정하고, 여성의 일을 “정서적 일”로 정의하는 반면, 남성은 일차적으로 보편적인 직업적 용어로 규정한다. 이는 단지 서로 다른 정의를 할당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남성적 활동을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우월한 것으로, 그에 반해 여성적 활동은 열등하고 남성의 활동만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규정한다. 이처럼 자본주의적 노동 세계와 가족 내적 삶은 서로를 재/구성하면서 남성지배적 가족과 사회를 재/생산한다.

 

  • 대안을 상상하기 – ‘어머니노릇’에서 ‘부모돌봄’으로, 그리고 사회적 돌봄으로

 

가족 내에서 돌보는 어머니와 가족 외에서 역할을 다하는 아버지, 어머니의 돌보는 성향을 닮아 아이와 남편을 돌보는 ‘어머니’가 되는 딸과 아버지를 닮아 독립적이고 사회적인 성인이 되어가는 아들. 낸시 초도로우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같은 장면을 보았다. 같은 장면을 보았음에도 이에 대한 분석과 이를 통해 이끌어낸 통찰은 매우 다르다. 초도로우는 <모성의 재생산> 초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 책은 여성주의적 노력의 하나이다. 그것은 어머니노릇을 사회적 조직과 젠더 재생산의 중심적인 구성요소로 보고, 어머니노릇의 재생산을 분석하는 것이다.”

초도로우는 자신의 글이 어머니의 배타적인 자녀 양육에서 출발하는 젠더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된 각종 젠더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한 여성주의적 개입임을 강조한다. “왜 여성이 일차적 돌봄을 제공하는 자인가? 왜 일차적 돌봄을 제공하는 자는 여성인가?”라는 질문은 “여성-어머니라는 성별 분업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라는 그 다음 물음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초도로우는 부모의 젠더와 성역할, 이성애적 섹슈얼리티의 결정론적, 목적론적 심리발달과정을 기술하는 정신분석적 체계들을, 여성주의적 관심과 더불어 아들과 딸을 가진 어머니를 상담하여 얻어낸 임상 사례들을 통해 반증한다. 그럼으로써 기존의 정신분석학이 자연화하고 낭만화한 어머니의 역할과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를 세대를 거쳐 재생산되는 구성된 것으로 역사화하고, 젠더 정체성 획득과 이성애적 섹슈얼리티는 본능적 충동이 아니라 학습되는 것임을 지적했다.

그러나 초도로우의 논의는 기존의 정신분석학이 전제하는 어머니, 아버지, 자녀로 이루어진 가족 구조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또한 그가 이론적 배경으로 삼는 정신분석학과 대상관계이론은 인간의 정신구조와 심리발달이 어린시기에 결정적임을 전제하기에 문제적일 수 있다. 그리고 초도로우는 후에 여성을 관계적인 사람으로, 남성을 독립적인 사람으로 본질화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정신분석학이 치료를 위해 개발되었다는 점을 상기해보자. 정신분석학은 인간의 정신구조와 심리발달이 5세 이전에 핵심적인 방식으로 형성되지만, 삶의 경험으로부터 변화될 수 있고 분석적 과정을 통해 바뀔 수 있음을 전제한다. 바로 이 점에서 초도로우는 자신의 개입점을 명확히 한다. 만약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가 어린아이와 일차적 관계를 맺는다면, 다시 말해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자녀 양육에 헌신한다면, 그리고 양육에 있어서 아이의 젠더와 무관하게 아이를 대한다면, 아이가 젠더 이데올로기를 답습하지 않는 성인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초도로우는 가족 외에도 아이가 사회화되는 여러 핵심적인 과정들을 다루면서, 그 과정들이 어린 시절 형성된 정신구조가 공고해지는 계기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정상’과 ‘비정상’적 젠더정체성과 섹슈얼리티를 나누고, 학습시키는 제도들 또한 정신구조와 심리발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그러한 제도에 개입하고, 수정하는 것 또한 불평등한 젠더이데올로기를 종식시키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초도로우 자신은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아이로 구성된 정신분석학적 가족 모델에 한정해서 연구를 진행했다는 한계를 인정한다. 하지만 그의 분석은 이성애적 핵가족 모델 안에서 여성의 배타적인 ‘어머니노릇’에 대한 문제제기일 뿐만 아니라, 다른 형태의 가족모델과 다른 형태의 양육이 가져다 줄 다른 형태의 젠더관계에 대한 상상이기도 하다.

 

  • 낸시 초도로우의 <모성의 재생산>은 여기까지 입니다.
  • 다음으로 연재될 책은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입니다. 많은 기대와 관심 바랍니다. 🙂

낸시 초도로우(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7. <모성의 재생산>, 낸시 초도로우(上)

 

김상애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부모parents’는 아버지와 어머니로 구성된다. 아버지는 아이의 남성 부모parent를, 어머니는 여성 부모parent를 의미한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잉태와 출산의 과정 이후에도 다르게 지속된다. 다시 말해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단어는 단지 부모의 성별을 지시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의 특정한 역할까지 규정한다는 것이다. 특히 “누군가가 어머니이다 라고 말할 때는 누군가가 아버지이다 라고 말할 때와는 다른 어떤 의미가 덧붙여진다.” 낸시 초도로우(1944. 1. 20 – )<모성의 재생산>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왜 어머니는 여성인가?, 부모노릇의 모든 활동들을 일상적으로 하는 사람이 왜 남성이 아닌가?”

낸시 초도로우 뿐 아니라, 많은 페미니스트 학자들이 여성의 ‘돌봄’을 페미니즘의 중요한 문제로 다루었다. 돌봄의 역할이 주로 여성에게 할당되며, 돌봄은 여성화된 활동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여러 여성주의 윤리학자들은 자기 입법적인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도덕 주체를 가정하는 비관계적인 도덕 모델을 비판하고, ‘여성적’ 활동으로 간주되어 가치절하된 돌봄에 적절한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도덕적 패러다임을 전환시키고자 했다. 돌봄을 포함한 여성의 재생산 노동을 ‘노동’으로 규정하고, 이를 자본주의의 착취적 본성과 연결지어 분석하고자 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노력도 적지 않다. 초도로우는 이들과는 다르게, 어쩌면 조금 도전적인 관점으로 돌봄, 특히 어머니가 아이와의 관계에서 수행하는 돌봄에 접근한다. ”어머니 노릇”이 젠더를 재생산하는 핵심적인 장치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돌봄에 높은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거나 임금을 지급하는 등의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여성-어머니가 아이를 돌보는 한 불평등한 젠더관계는 유지될 것이다.

 

  • ‘어머니’와 ‘어머니노릇’


어머니mother라는 단어는 어머니라 불리는 사람의 젠더, 섹슈얼리티, 가족구성, 가족 내 역할을 내포한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어머니라면, 대개 이성애자 여성이고, 아이가 있을 것이며, 아이에게 어머니로서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이 다양한 수준에서 “여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고 질문하는 이론이라면, 이 문제의식에 어머니가 빠질 수 없다.

초도로우는 젠더재생산의 핵심이 ‘어머니’라는 명사가 아닌 동사로서 ‘어머니노릇’이라고 보았다. 어머니를 어머니로 만들며, 여자아이를 잠재적으로 어머니와 같은 여성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어머니노릇’이라는 것이다. <모성의 재생산>의 원제인 <reproduction of mothering>에서 ‘mothering’이 바로 이 ‘어머니노릇’이다. 초도로우가 문제삼는 ‘어머니노릇’은 특히 어린 아이가 자신이 독립된 인간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완전히 수동적인 상태일 때 어머니가 아이에게 제공하는 돌봄이다. 어머니노릇의 구체적인 활동은 아이와 접촉하며 애착을 형성하는 것에서부터 아이를 먹이고 재우는 아이의 생리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까지 다양하다. 초도로우는 이러한 어머니노릇으로 인해 여성의 삶, 여성에 대한 이데올로기, 남성성, 젠더 불평등, 그리고 특수한 형태의 노동 권력들이 재생산된다고 보았다.

 

  • 이론적 배경 – 정신분석학과 대상관계이론


초도로우는 “어린 아이가 생의 초기에 경험한 어머니와의 관계가 젠더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정신분석학과 대상관계이론을 이론적 배경으로 삼는다.

정신분석학을 처음으로 이론화한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 5. 6 – 1939. 9. 23)는 인간의 정신과 행동이 전적으로 의식적이지 않다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인간의 정신적 삶은 의식적 사유뿐만 아니라, 무의식적 정신 활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의 행동은 언제나 목적과 동기를 의식적으로 파악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인간의 의식적 사고를 ‘말하기’ 그리고, 무의식적 정신을 ‘꿈’과 연결짓는 것처럼, 정신분석학 안에서 의식은 사회적 활동으로, 무의식은 의식화, 언어화할 수 없는 개인적 정서로 이해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생물학적 유기체에 다름 아닌 상태, 즉 사회화된 의식적 주체가 되기 이전의 어린아이가 ‘가족’이라는 최초의 사회에서 성적 욕망의 억압을 경험하면서, 자기 자신을 부모라는 대상에 동일시하는 과정을 통해 사회화된 의식적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을 상세히 다룬다. 이 때 사회화/의식화 과정의 가장 중요한 목적과 결과는 젠더화된 주체를 생산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설명에 따르면, ‘정상적’ 사회화 과정을 거친 아이는 이성애적 섹슈얼리티를 지향하는 남성적 남아가 되거나 여성적 여아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 발달은 유아의 타고난 성기적 본능에 따라 생물학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초도로우는 프로이트가 인간 무의식의 영역을 발견하고, 인간의 정신발달이 가족 구조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밝혀낸 공헌을 인정한다. 또한 인간의 섹슈얼리티가 생애 초기에 조직된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에도 어느정도 동의한다. 그러나 초도로우는 인간의 타고난 충동들이 자연적으로 행동과 발달을 결정한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며, 인간의 타고난 충동들은 오히려 관계를 획득하고 보유하는 과정에서 조작되고 변형된다는 대상관계이론을 따른다.

대상관계이론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서 발전된 정신분석학의 방법론이다. 대상관계이론의 핵심은 초기 어린 아이의 관계적 경험이 심리적 성장과 성격 형성에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대상관계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에는 자신이 다른 인간과 맺는 관계성이 매우 중요하게 작동한다. 물론 프로이트 또한 정신적 삶의 모든 요소는 관계적 경험의 영향을 받는다고 언급한 바 있지만, 대상관계이론은 프로이트가 본능이라 가정하는 것도 양식화되고 구성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초도로우는 “부모노릇을 통해 전달된 사회구조, 특히 젠더구조가 어린 아이의 내면에서 무의식적 과정을 통해서 승인되고 변형되며, 아이의 정서적 삶을 발달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대상관계이론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간 대상관계이론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젠더에 따른 대상관계적 경험들의 차이와 이로 인한 심리발달의 차이에 주목한다.

 

  • 어머니와 딸을 중심으로 정신분석학을 다시 쓰다

 

정신분석학의 주인공은 사실상 아들과 아버지이다. 다시 말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주인공이 ‘오이디푸스’라는 그리스 비극의 남성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처럼, 정신분석학은 어린 아이였던 남자아이가 사회적 주체로서 남자어른이 되는 과정을 기술한다. 아이의 발달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설명에서 어머니는 아버지가 상징하는 ‘사회’에 진입하기 위해 아이가 극복하고 버려야할 ‘의존성’으로 간주된다.

앞서 말했듯, 사회적 주체가 되는 과정은 젠더화된 주체가 되는 과정이며, 이는 자신과 같은 젠더인 부모와 동일시하고, 젠더가 반대인 부모에 대한 사랑에서 확장된 이성애를 발달시키는 과정이다. 프로이트는 이 과정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과정에 진입하기 이전,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는 섹슈얼리티와 젠더정체성이 특정되지 않은 상태이며 모두 어머니와 애착을 형성한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과정을 거치면서 남자아이는 어쩔 수 없이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지만, 여자아이는 어머니를 미워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포기한다. 이 과정에서 페니스는 매우 중요한 매개물이다. 남자아이의 경우, 어머니와 형성하고 있는 애착관계에 아버지라는 인물이 중요하게 개입한다. 아버지의 등장으로 남자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지속한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페니스를 상실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고, 점차 아버지의 권위에 복종한다. 그리고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면 이 권위를 획득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반면에 여자 아이는 자신이 페니스를 결여하고 있다는 열등감을 갖는다. 그리고 자신을 이러한 상태로 낳아준 어머니를 미워하고, 그리하여 여자아이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어머니에서 아버지로 바꾼다.

일반적으로 현대 자본주의 핵가족 모델에서 아버지는 가정 외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어머니는 가정 내에서 주된 역할을 담당한다. 프로이트가 저술하던 당대에는 이같은 젠더분업이 더 뚜렷했다. 그렇다면 프로이트는 어째서 대체로 가정 외부인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던 아버지가 어린아이의 심리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가정하는 것일까? 그리고 페니스의 결정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남자아이의 심리발달모델을 여자아이에게 대칭적으로 적용하려는 무리한 시도로, 프로이트는 여자아이의 젠더정체성 발달을 비약적이고 단순하게 마무리한다. 이와 같은 비판과 더불어 초도로우는 어린아이의 심리발달과정을 어머니와 딸을 중심으로 다시 쓰면서, 정신분석학이 상대적으로 덜 주목한 오이디푸스기 이전 과정, 즉 전오이디푸스기를 재이론화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下)편에서 계속-

마사 누스바움(下)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6. <혐오와 수치심>, 마사 누스바움(下)

 

유민석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 숨기고만 싶은 치부

 

인간은 누구나 취약하고 부족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걸 인정하는 것은 곧 자신이 부족하고 완벽하지 않은 불완전한 사람이라는걸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날까봐 꼭꼭 숨기고 덕지덕지 봉합한다. 잡힐까 두려워 머리만 풀숲에 쳐박는 꿩처럼 그렇게 위장하고 은폐한다.

혹시라도 남들 앞에 자신의 이런 치부가 발각되거나 드러나기라도 하게 된다면, 많은 경우엔 강렬한 수치심이 동반되게 마련이다. 이런 수치심은 자존감을 무너뜨리리게 되고 온전한 인격을 형성하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개인의 정체성과 인간 관계를 비롯한 삶의 전반에 위협을 초래하게 된다.

이처럼 수치심은 우리를 압도하면서도 위태롭게 만들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1947.5.6~)은 저서 『인간성으로부터 숨기: 혐오, 수치심, 그리고 법Hiding from Humanity: Disgust, Shame and the Law』(국역: 『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 조계원 옮김, 민음사, 1995)에서 이러한 파괴적인 감정인 수치심을 예리하게 분석한다. 본 글에서는 먼저 수치심에 대한 누스바움의 설명을 살펴보고, 그리고는 수치심이 법과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지, 그리고 수치심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지에 대해서 논의해보고자 한다

 

  • 편안한 자궁, 비극적인 출생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었을 때 생기는 고통스러운 감정”인 수치심은 개별 인간의 삶의 발달과정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형성된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수치심은 전지전능함과 완전함, 그리고 편안함을 바라는 유년기의 욕구 속에 이미 자리잡고 있다. 유아는 점차 성장하면서 자신의 유한성, 부분성, 거듭된 무력감을 깨닫게 되는데, 이 때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과 동시에 과도한 욕심과 기대가 두드러지는 존재라는 깨달음 안에 있는 일정한 긴장을 해소하는 일시적인 방법이 수치심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유아기에서부터 형성되는 수치심을 ‘원초적 수치심’이라고 일컫는다. 이 원초적 수치심은 불가피하면서도 다소 보편적인 감정이지만, 그만큼 위험하며 삶의 어느 단계에서는 극복되어야 할 감정이다. 그런데 어떤 외적인 계기로 인해 원초적 수치심을 제어하거나 극복하지 못하고 강화된 채로 존속된다면, 자신과 타인에게 매우 위험한 감정이 된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유아는 태아 상태에서 자궁 속에 있을 때는 불필요한 자극이 없고 자동적으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에 편안함과 완벽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출생의 순간부터 비극이 발생하게 된다. 엄마의 편안한 자궁과 달리, 세상은 유아에게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은 온갖 고통스러운 자극과 매정함으로 가득차 있고, 돌봄 제공자는 항상 원할 때 자동으로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않는다.

이런 풍경은 다양한 고전들 속에 그려지고 있다. 이를테면 출생을 거센 파도에 난파되어 낯선 땅위에 표류한 선원에 비유하는 루크레티우스의 시라던지, 노동할 필요도 없고 강에서는 젖과 꿀이 흐르며 날씨는 따뜻하고 대지는 풍요로운 곡식들로 넘쳐나는 황금시대를 이야기하는 헤시오도스의 신화라던지, 인간이 둥근 모습을 하고 있고 힘이 엄청났으며 신과 겉이 강했다가 제우스의 저주를 받아서 둘로 갈라지게 되었다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신화 이야기는, 완벽한 세상인 자궁 안에 있다가 출생과 동시에 비극적인 세상으로 나오게 되는 유아의 모습을 은유한다.

유아는 예전처럼 세상이 완벽하게 자기 뜻대로 통제되지 않는다는 것을, 따라서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며 전지전능하지 않고 결핍되고 부족한 인간이라는 깨닫게 되면서 원초적 수치심을 갖게 된다. 따라서 원초적 수치심은 완전한 자아 이상을 바라는 나르시시즘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들키기 않고 감추기 위해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숨어버리고자 하는 방어적인 감정이다. 이런 원초적 수치심은 유아기 이후에도 잠복되어 있게 되며, 이제 부끄럽다고 여겨지는 특성들, 즉 부족하거나 결핍되거나 완벽하지 못하거나 의존적이라는 특성들은 수치스러운 것들이 되어 억압의 대상이 되고 파괴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 수치심을 옹호하는 사람들

 

그런데 수치심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도덕적으로 잘못된 짓을 저질러 놓고도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로 인해 사회가 무질서해지소 타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수치심은 좋은 감정이며, 심지어 사회가 법을 통해서 수치심을 주는 형벌을 권장할 필요마저도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공동체주의 사상가 아미타이 에치오니(Amitai Etzioni, 1929. 1. 4 ~)나 법학자 댄 케이헌(Dan Kahan)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케이헌은 노상방뇨를 한 사람에게 직접 길바닥을 솔로 북북 문지르게 한 처벌을 옹호하며, 성매매를 한 사람의 신상을 신문에 공개해야 하고 심지어 음주운전자거나 범죄자임을 알리는 표시를 자동차에 부착해야 하며 얼굴에 낙인찍는 형벌을 복원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이러한 수치심을 주는 처벌들은 범죄에 대한 강력한 억제 효과와 처벌 효과가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미혼모, 약물중독자, 범죄자 같은 일탈적인 사람들에 대한 이런식의 수치심 주기는 사회 질서와 도덕적 가치 구현에 매우 유용하기 때문에 권장되어야 할 좋은 수치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누스바움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이유를 근거로 수치심 처벌에 반대한다. 그 이유는 첫째,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모욕을 주기 때문에 인간 존엄성을 해친다. 둘째,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국가의 사법적인 절차가 아니라 인민재판이 된다. 셋째,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잘못된 대상을 처벌하거나 처벌의 정도를 명확히 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다. 넷째,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억제 효과가 없으며 오히려 대상을 소외시킴으로써 더 범죄로 몰아넣는 역효과를 지닌다. 다섯째, 수치심을 주는 처벌은 시민들을 사회적 통제 아래에 둔다.

 

  • 낙인찍히는 존재들

 

무엇보다도 이러한 사회적 수치심 처벌은 주로 역사적으로 억압당해온 집단에 부과되어왔다. 예컨대 옆에 있기만 해도 수치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낙인찍히거나 수치심을 부여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특성들을 상기시키는 사람들은 낙인과 배제의 대상이 되곤 한다. 주로 사회적으로 비정상적이라고 간주되는 존재들, 예컨대 여성이나 동성애자, 범죄자 등이 그런 낙인과 수치심주기의 대상이 되어온 것이다.

누스바움은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형벌과 같은 스티그마나 여성의 치마에 대한 역사등의 고찰을 통해서, 불완전하고 비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집단들에게 수치심을 주어왔다고 들려준다. 예컨대 여성의 신체는 남성에게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것이기 때문에 성차별적인 사회는 여성들의 패션과 치마 길이를 통제해 왔으며, 범죄나 동성애자는 그 자체로 수치스러운 존재들이지만 겉으로는 그들의 그런 특성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런 표지를 얼굴에 문신으로 새겨넣음으로써 누구나 인식하게끔 자행되어왔다.

앞에서 원초적 수치심을 다룰 때 이야기됐던 것처럼, 주로 장애인이나 여성, 동성애자같은 사회적 약자들은 비정상적이거나 약하고 불완전하다고, 즉 수치스러운 특성을 지녔다고 간주됨으로써, 원초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대상이 되어 투사되는 것이다. 그런 낙인을 부여함으로써 그들과 다른 나는 정상적이며 완벽하다고 위안을 삼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야한 옷을 입다니 천해보인다”, “니가 짧게 입고 돌아다니니 그런 일을 당하지”같은 ‘피해자 비난하기’victim blaming나 ‘창녀 수치심주기’slut shaming를 생각해보자. 여성의 몸을 드러내는 것은 수치스러운 것으로, 경박한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나이든 여성이 예쁘게 꾸미는 것도 수치스럽고 주책맞은 일로 취급하기도 한다. 반면 남성들의 경우엔 감정을 드러내거나 눈물을 보이거나 약해보이는 것은 남자답지 못한 것, 여성스러운 것이므로 수치스러운 것이기에 억누르라는 문화 속에서 성장한다.

누스바움은 이렇게 감정이나 친밀성을 억누르면서 수치스럽게 여기는 이런 사회에서는 남성들이 솔직한 감정의 표현과 타인과의 감정 교류나 공감과 연민의 문제에서 어려움을 겪을 공산이 크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당연히 여성적인 것에 대한 비하의 맥락 안에 놓여 있기에 ‘여성혐오자’가 될 가능성도 있다. 여성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욕망, 여성이 자신의 통제 밖에 놓여 있는 독립적인 개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 채, 통제되지 않는 여성을 향해 분노와 적대를 표출하는 것이다.

 

  • 좋은 수치심도 있을까?

 

이처럼 수치심은 신뢰할 수 없고 매우 위험한 감정이며, 특히 그것이 사회적으로 억압당해온 집단에게 부여될 경우엔 더더욱 위험한 낙인이나 예속으로 기능할 위험이 있다. 그런데 좋은 수치심도 있을까? 누스바움에 따르면 도덕적인 분개나 도덕적 반성에서 기인하는 수치심이나, 아니면 성취한 목표에 대한 열망의 독려 차원에서의 수치심의 경우엔 어쩌면 위에서 언급한 차별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수치심에 비해서는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그녀는 이러한 수치심을 ‘건설적 수치심’ 또는 ‘생산적 수치심’으로 일컫는다. 예컨대 작가이자 활동가인 바버라 에렌라이히(Barbara Ehrenreich, 1941. 8. 26~)가 자신의 저서에서 이야기한, 노동자들이 극심한 빈곤과 주거 및 고용 불안, 열악한 노동 조건에 시달리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이에 무관심한 탐욕스러운 미국 사회를 향해 수치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변한 것과 같은 수치심이 그런 종류의 건설적인 수치심일 수 있다.

누스바움은 이러한 수치심은 누군가를 낙인찍지 않기 때문에 괜찮은 수치심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이런 도덕적 반성을 일깨우는 건설적 수치심이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첫째,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규범에 호소해야 하며, 둘째, 나르시시즘(완벽한 자아 이상에 대한 사랑)적인 요소가 없어야 한다고 경고한다. 수치심은 자칫하면 비정상에 대한 낙인과 배제로 기능하기가 쉽기 때문에, 이런 수치심의 경우에도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 수치심과 혐오가 없는 사회

 

수치심을 주지 않는 사회를 만드려면 어찌해야 할까? 누스바움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취약한 비정상성을 하나 이상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녀는 어빙 고프만(Erving Goffman, 1922. 6. 11~1982. 11. 19)의 사회학적인 논의를 끌어들여 인종, 장애, 계급, 지역, 학벌, 외모, 성별, 성적지향 등에서 모두 완벽한 ‘정상적인’ 사람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또한 타인의 보살핌을 필요로하고 서로 상호의존할 수 밖에 없는 존재다. 무엇보다도 나이가 들면 누구나 노인이 되고 장애인이 되며,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다. 물론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며, 자신의 이런 취약성과 불완전성을 숨기려하고, 이를 환기시키는 사람이나 집단에게는 수치심을 투사하는 방식으로 낙인을 찍고 모욕을 준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는인간의 취약함과 인간다움을 인정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보호해주는 사회다. 이 점에서 그녀는 모든 인간의 평등한 존엄성과 상호의존성, 그리고 다양한 다원성을 인정하는 존 롤즈(John Rawls, 1921. 2. 21~2002. 11. 24)식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옹호한다. 롤즈에 따르면 모든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는 공공복리 같은 목적을 이유로 수단화 되어서는 안되며, 우리는 서로 타인의 종교, 세계관, 생활방식과 같은 ‘포괄적 교설’(comprehensive doctrin)을 존중해줘야 한다.

누군가는 동성결혼이 도덕적이나 종교적으로 옳지 않으며 수치스럽다고 생각하거나, 여성의 자유로운 옷차림이나 성적인 표현이 도덕적으로 문란하고 수치스럽고 정숙하지 못한 일이라고 통제하고 싶어할 수도 있다. 그런 포괄적 교설은 개인이 가질수는 있지만, 그것이 사회의 법과 제도의 기초가 되어서는 안된다. 특정한 누군가의 세계관이나 종교가 정치나 법의 영역에 들어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롤즈는 그런 모욕과 수치심은 자유주의가 보장하고자 하는 시민의 존엄성과 배치된다고 보았으며, 이를 중요한 문제로 보았기 때문에 ‘자존감의 사회적 기반’(social base of self-respect)가 정의로운 사회가 신경써야할 가장 중요한 기본적 사회재(primary social goods)라고 이야기했다.

롤즈의 이런 자유주의는 누스바움의 수치심에 대한 주장과 공명한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타인을 그렇게 통제하고 싶어하는 그런 도덕관이나 세계관은,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열등함을 참지 못하는 원초적 수치심이 잘못된 사회적 편견에서 강화된 경우일 수 있다. 누스바움은 이처럼 법이나 제도에 수치심이 들어와서는 안되며, 그럴 경우 낙인에 취약한 사회적 약자들이 주로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누스바움의 말처럼 인간은 모두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존재이며, 타인의 보살핌을 필요로 한다.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서로 다른 차이를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상호존중과 존엄성을 구축하는 자유주의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 다시 말해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Avishai Margalit, 1939. 3. 22~)의 주장처럼 모욕을 주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수치심과 혐오로부터 보호받는 사회를 만드는 길이지 않을까.

자유의 길을 찾아 혁명의 길을 간 행동가, 이회영 [길 위의 우리 철학] – 20

 

진보성

 

노블리스 오블리주와 이회영의 삶

우리 근현대사에서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가장 잘 실천한 인물을 찾아본다면 아마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1932)이 아닐까 생각한다. TV프로그램이나 언론에서 ‘육형제의 독립운동’이라는 주제로 자주 다루어졌는데, 바로 이회영 집안 형제들 얘기이다.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불리며 대대로 귀족의 삶을 살았던 경주이씨 상위 1%의 사람들이 600억 넘는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쾌척하고, 온 가족이 압록강을 넘어 망명하면서 고난의 삶에 스스로 앞장 선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를 두고 임진왜란 때 국난극복에 크게 공헌했던 백사 이항복의 10대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불변의 진리 덕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러나 고귀한 귀족의식이라던가 진짜 보수라는 칭사(稱辭)로 이회영과 그 형제들의 삶을 단평(短評)한다면 그 진정성이 외려 애처로워질 것 같다. 이회영의 삶은 가문의 명예나 유림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후대의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고 귀족적 영웅으로 박제된 자신을 원한 것도 아니었을 테니, 한 사람의 진정성을 몰라주면 그 사람의 지난 삶은 애처로워지고 만다.

‘우당 이회영 길’ 입구 안내 표지판, 사진출처 : 필자

그의 삶을 온전히 보기 위해 일단 그 삶의 자취를 찾아보는 길을 나섰다. 서울 종로에 자하문 터널 가는 길에는 우당기념관이 있어 그가 살아온 자취를 전방위로 확인할 기회를 제공한다. 여러 자료들을 열람할 수 있었지만 한 인물을 느끼기 위해서는 유적지로 발걸음이 옮겨지기 마련이다. 이회영은 서울 저동(苧洞), 지금의 중구 명동1가에서 태어났다. 이회영이 태어난 곳은 인터넷 지도검색을 통해 쉽게 찾을 수 있다. 명동성당에서 내려다보이는 한국 YWCA연합회 건물을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왼편으로 난 골목이 이회영의 옛 집터로 들어가는 입구다. 이 골목 입구에는 ‘우당 이회영의 길’이라는 안내 표지판이 있다. 중구청에서 “우당 이회영 선생 탄생 150주년을 맞아, 2017년 9월 20일에 명예 도로로 ‘우당 이회영 길’을 지정하였다.”고 쓰여 있다. 건물을 따라 조금만 들어가면 건물 바로 옆 작은 쉼터로 조성된 화단에 그와 여섯 형제의 집터였음을 알리는 표석과 이회영의 흉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회영 가문은 이 자리를 중심으로 명동 일대 대부분의 땅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육형제 중 둘째인 이석영은 아버지 이유승의 사촌형이자 영의정을 지냈던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는데, 당시 이유원은 양주에서 서울에 이르는 방대한 대토지의 소유자였다. 이 때 물려받은 재산이 이회영 형제의 막대한 재력이 되었고 결국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등 독립운동의 초석을 세우는데 쓰이게 되었으니 쓰임만큼은 타인을 위해, 핍박받는 이웃의 생명과 자유를 위한 공유물로 쓰인 셈이다.

좌 : 이회영 집터 표석과 흉상 – 서울시 중구 명동1가, 우 : 쌍회정 터 – 서울시 중구 퇴계로6길 36(일신교회) *쌍회정은 아래 글 참조. 사진출처 : 필자

이런 의식이 나오려면 이른바 혁명적 성향과 맹렬한 과감성이 필요하다. 육형제 중 넷째였던 이회영은 어린 시절 이런 성향이 두드러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회영의 제자이자 독립운동 동지인 이관직은 이회영이 소년 시절부터 혁명적 소질이 풍부해서 일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자기 집안의 종들을 자유민으로 풀어주는가 하면, 밖에서는 남의 집 종들에게도 말을 높였다는 일화가 그렇다. 이런 당돌함의 배경에 어떤 영향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의 자유만큼 타인의 자유도 존중하고 공감하는 인간적 정감의 매력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후 보이는 신분제도에 대한 반대는 여기서 출발했다. 익숙한 질서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 그래서인지 그의 학문 성향도 옛 경전을 공부하기 보다는 새로운 서구 지식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았다고 한다. 이런 성향은 청년 시절 양명학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던 배경으로 보인다. 성리학이 계급적 질서의 옹호차원에서 이해되며 현실을 타개할 어떠한 희망도 찾을 수 없는 학문으로 인식될 때 양명학의 지행합일적 주체의식은 자기 안의 양지(良知)를 현실을 자각하고 개혁할 수 있는 중심핵으로 삼는다. 학술을 통한 능동적이고 자신감 있는 자기의 탄생이다. 이회영에게 양명학은 곧 자기 행동의 준거였다. 박은식 같은 인물이 참담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양명학을 자기 학문의 중심으로 삼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파격적 삶의 행보 : ‘시대의 모순에 반역하다’

이회영은 일찌감치 과거에 급제한 아우 이시영과 달리 관직에 나가는 것을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엄중한 시기에 관직은 중요하지 않았다. 부패한 관계(官界)에 대해서는 혐오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기도 했고, 나중에는 아예 출사를 거부했다. 그의 이런 출처관(出處觀)은 『논어』에 ‘천하에 도(道)가 있으면 나타나 벼슬하고, 도(道)가 없으면 숨어야 한다’, ‘나라에 도(道)가 있을 때는 가난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며, 나라에 도(道)가 없을 때는 부귀한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의식과 일치한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옛 것을 거울삼아 현실을 인식하고 자기 행위를 통제하는 실천의 폭을 확장한다. 위정척사론자들이 봉건적 사회문화의 자장 위에서 익숙한 것을 ‘지키거나’, 아니면 ‘숨거나’·‘부끄러워’하는데 그쳤지만 이회영은 시대의 변화에 맞게 처신하여 그의 다섯 사촌 형제들을 삭발하여 신식 학교에 보내거나 그가 20세 전후 되던 시기에는 과부가 된 여동생을 전격적으로 재가시켰다. 봉건적 사회 잔재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다.

이회영의 행보에서 상동교회(감리회)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현재 상동교회는 서울 중구 남대문로 30(남창동 1-1)에 있지만 당시 상동교회는 지금 자리 건너편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자리에 있었다. 상동교회는 상·천민이 중심이었던 교회였는데 이회영은 1904년 서울 상동청년학원 학감이 되어 청년교육에 힘쓴다.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유나 계기에 대한 단서는 명확히 보이지 않고, 몇몇 설이 있으나 소개할 만한 사료적 근거는 희박하다. 추측컨대 신채호의 1910년 논설이지만 「이십세기 신국민」(『대한매일신보』)에서 “20세기 신국민적 종교의 가치” 운운하며 기독교에 대해 호의적인 견해를 밝힌 사례도 있는 만큼 국민의 정신을 일깨울 종교적 구심점으로 그 기능성을 인정받기도 했고 마침 신학문에 관심이 많던 이회영이 반일운동에 앞장섰던 많은 우국지사들과 회합이 가능한 장소로 여겼기에 자연스레 귀의한 것으로 사료된다.

좌 : 예전 상동교회 자리.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 서울 중구 남대문로 39(남대문로3가 110) 한국은행, 우 : 현재 상동교회.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30(남창동 1-1), 사진출처 : 필자

이회영이 양명학을 공부하며 관심을 두었던 지행합일의 실천적 주체의식은 성경에서 말하는 만인 평등이나 자유에 대해 강조한 내용들과도 충분히 잘 어울리게 해석되는 시대 배경 또한 존재한다. 이 역시 그를 공명시켰을 수 있다. 여기서 이회영은 상민출신 전덕기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친교를 맺는다. 이 둘은 함께 헤이그 특사 파견에 관여하거나 1907년 4월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이동녕·양기탁 등과 함께 비밀리에 신민회를 조직하는 비밀 결사 활동을 이어간다. 이런 활동의 장소가 교회였다는 점, 그리고 이에 그치지 않고 명망 있는 사대부 집안에서 기독교에 귀의했다는 것 자체가 당시에는 매우 혁신적인 일이었다.

좌 : 현재 상동교회 입구 벽면 부조, 우 : 현재 상동교회 역사 전시관. 정면 좌측 큰 초화상화가 전덕기 목사, 우측 옆에 스크랜턴 선교사, 맨 우측 아래 이회영 선생 초상이 보인다. 사진출처 : 필자

 

한국 아나키즘의 선구

이회영은 유자명처럼 사회주의 이론을 미리 학습하거나, 신채호처럼 언론계에 투신하여 신사조를 받아들인 후 지속적인 집필 과정에서 학문을 연마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회영은 당시 독립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에 주도면밀했고 무엇보다 실천과 행동을 중시한 인물로서 스스로 학술문헌을 남기거나 자기 철학과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두지 않았다. 전면에 나서거나 어떠한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던 성향도 저술에 신경 쓰지 않은데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쉬운 점은 그래서 이회영의 철학사상을 확언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철학사상의 중심이 양명학에서 기독교 사상으로, 망명 후에는 아나키즘이 그에게 영향을 주었고 실천의 동력으로 삼았던 학문이라는 사실이다.

이회영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아나키즘의 선구로 불린다. 물론 당시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서구에 바탕을 둔 아나키즘의 전개와는 다르게 아나키즘을 이해했다. 이는 당시 억압적 국가로서 강도의 위치에 있던 일본에 의한 식민지배의 한국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즘의 무정부주의적 정신과는 다르게 모두 민족과 민중, 그리고 국가의 독립이라는 매우 이질적인 목표를 아울러 공유하고 있었다. 아나키스트라는 이름에 민족주의자의 성격이 혼합되어 있는 것이다.

이회영 역시 그랬다. 이러한 특징은 이을규의 『시야 김종진전』에서 단편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이 의식적으로 무정부주의자가 되었거나, 무정부주의로 전환했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한국의 독립에 대한 자신의 사고와 방책이 사상적 견지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의 주장과 상통할 뿐이라는 의견을 피력한다. 이러한 면은 신채호가 1929년 공판에서 자신이 무정부주의에 기운 것은 책에서 얻은 이론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인간적 요구”에 의했다는 주장과 유사하다.

이와 관련하여 이회영은 1918년 고종의 망명을 계획했던 적이 있는데, 이를 두고 일부 사람들이 보황파(保皇派)나 복벽주의자라고 비판하자 신분제도 등 봉건적 제도에 반대했던 자신의 과거 사례를 거론하면서도 동시에 운동의 목적이 독립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어서, 사심 없는 공정한 민족적 양심을 지닌 이 독립운동이 무정부주의라고 한다면 “한국의 독립운동은 무정부주의 운동이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자기 스스로가 이념에 포섭되었다고 평가하기 보다는 자발적 이해의 장에서 아나키즘과 만났음을 강조한다. 이 지점에서 한국 아나키즘의 기원은 앞서 말한 민족과 연계된 바탕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민족적 상실의 탈환과 인간의 궁극적 자유를 향한 민중적 의지가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다. 한편 이회영은 김종진과의 대담에서 조소앙과 만남 시 공산주의의 민중에 대한 정치적 지배성을 우려했던 것처럼 무정부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점을 지적하고 독립된 한국에서도 무정부주의적 자유평등의 원칙은 그대로 지켜져야 할 것을 강조한다. 또 상호부조론을 인정하면서 국가를 초월하는 자유협동체의 인류적 이상의 청사진을 제시한다. 이러한 이회영의 아나키즘에 대한 생각은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910년 망명 이후 북경 시절 이회영의 거처는 상해와 만주에서 온 독립운동가들이 한번 씩 거쳐 가지 않았다면 이상할 정도로 망명가들이 자주 들렸던 곳이었다.

좌 : 우당 이회영 초상, 우 : 우당기념관 – 서울 종로구 필운대로10길 17(신교동 6-22) 유니온빌, 사진출처 : 필자

 

종속적 삶이 아닌 자유로운 삶을 위해

1914년 5월 30일 하와이 교포신문 『국민보』에 이회영은 자신의 공화주의적 이상을 피력하는 내용으로 「한국은 어떠한 인물을 요구하는」라는 논설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는 “대영웅이 대국민 같지 못함”은 역사적 격언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영웅이 건설한 나라는 길이 가지 못하지만 국민이 합동하여 세운 국가는 운명이 장구하다”고 힘주어 얘기한다. 현실의 모순을 타개하는 힘은 몇몇 거대한 영웅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사민이 평등함을 인식하는 각각의 개인들이 곧 영웅이며 자각된 그들이야 말로 자유로운 민중으로서 연합을 이루어 독립과 자유를 쟁취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회영 자신이 치열하게 사상적 고민을 전개했던 아나키즘은 사실 그 이전부터 자기 안에서 배태되는 일정한 낌새가 있었다. 그는 민중의 자유와 평등한 세상을 바라던 이상을 파괴하는 강도들에게는 무력투쟁으로 대응했다. 정치적 조직의 구성에 반대하여 임시정부와 인연을 맺지 않았던 이회영은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의열단형성에 실질적인 산파 역할을 했으며 항일구국연맹과 비밀 결사체 흑색공포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내가 남에게 지배 받고 싶지 않으니, 나도 남을 지배하지 않음’이라는 이회영의 원칙은 이성적으로 당연히 사람다운 사람의 길을 간 것이었고 아나키스트가 실천하며 살아가는 길이었다. 일상세계에서 자기 원칙을 지키며 살아간 인물이 통속적 세상에서 희귀한 영웅의 면모로 비춰지는 것은 그리 온당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자취 중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쌍회정을 찾아봤다. 쌍회정은 이회영의 10대조인 이항복의 집 앞에 있던 정자다. 현재 남산자락 서울 중구 퇴계로6길 36에 있는 일신교회 자리에 정자가 있었음을 알리는 작은 명판만이 남아있는데, 이마저 도로 시설물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맨 위 사진 참조) 후에 이석영 소유가 된 이 곳에서 이회영은 동생 이시영은 물론 이상설·여준·이동녕 등 동지들과 신·구 학문을 공부하고 의기 넘치는 토론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회영의 사상적 계보는 성리학에 대한 비판을 이어 자기 공부의 중심을 양명학적 지행합일에 두었고, 반일운동의 기점에서 기독교적 만민평등과 이상적 자유의 추구, 그리고 민족운동의 연장선에서 민중의 자유연합체를 구상하는 아나키즘으로 그 실천적 면모를 발전시키고 있다.

아는 것을 실천하는 지행합일의 정신을 가장 중시 했던 이회영은 한 번도 쉬지 않고 민족을 위해, 민중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행동했다. 여기에는 반드시 그의 관념적 사고가 바탕 되었겠지만 그것을 알 수 있는 이회영의 직접적인 문장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와 족적에는 반드시 그 철학과 사상의 흔적이 남고 그 지점을 이으면 하나의 철학사상의 지도가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어떻게 보면 그의 실천적 행동가의 삶을 학술의 영역에서 정리한다는 발상이 온전치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지도를 통해 종속적인 삶이 아닌 주체적 인간으로서 온몸을 던져 살다간 한 인물의 궤적을 파악해서 시대정신의 전범으로 삼는 것은 꽤 괜찮은 일이다.

한편 지금도 이회영의 삶은 우리에게 온전히 다가와 있는 것 같지 않다. 수많은 수식어와 찬사가 따르지만 독립운동가와 우국지사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그 삶의 정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목도한다. 지금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세상의 문제를 돌아보는데 도움이 되는 그의 선각적 교훈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할까. 그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미래지향적 발상은 지금도 그 가치와 의미가 충분히 통한다. 그러나 그의 길을 따라가 본다는 것은 무리수이며 낭만적 상상에 그친다는 자조가 있다. 이 자조는 이 땅의 사람들이 바라보는 이 시대의 자화상일 뿐이다. 우리 스스로가 그린 자화상을 두고 옛 이회영과는 형편이 다르니 그것은 지금 갈 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회영의 진정성을 알기 위해서는 그의 생생한 출처(出處)에 좀 더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 그 삶을 우리가 온전하게 안을 수 있다. 그의 지난 삶이 지금 시대에 외롭고 애처롭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급선무다.

 

기고자: 진보성(한국철학사상연구회)

동양철학을 전공했고 남명 조식으로 박사논문을 썼다. 한철연 분과모임에서 한국의 근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한 이후 전통철학과의 관계에 대해 관심이 많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 김정철
  10. 현상윤, 최초의 근대적 체제의 조선사상사를 짓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0 : 윤태양
  11. 구도와 구세의 길, 운명적 불화 – 한용운 [길 위의 우리 철학] – 11 : 송인재
  12. 태백산에서 최후를 맞은 서양철학 1세대, 박치우 [길 위의 우리 철학] – 12 : 조배준
  13. 시대정신을 찾는 여정의 첫 발걸음: 신채호와 서울 [길 위의 우리 철학] – 13 : 진보성
  14. 큰 이룸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간 삶의 철학자, 도산 안창호 [길 위의 우리 철학] – 14 : 배기호
  15. 밑바닥에서 진리를 찾은 이- 장일순 [길 위의 우리 철학] – 15 : 구태환
  16. 서재필과 개화운동, 계몽을 통해 근대를 꿈꾸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6 : 박영미
  17. 이항로의 위정척사, 당신들만의 진리 [길 위의 우리 철학] – 17 : 구태환
  18. 한국 현대 철학의 주목받지 못한 변방, 함석헌 [길 위의 우리 철학] – 18 : 유현상
  19. 유림의 정신으로 독립의 길을 걷다, 심산 김창숙 [길 위의 우리 철학] – 19 : 김세리

마사 누스바움(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5. <혐오와 수치심>, 마사 누스바움(上)

 

유민석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페미니스트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1947.5.6~)은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철학적 작업을 일구어온 철학자이다. 그녀의 관심사는 주로 고대 철학, 정치철학, 페미니즘, 윤리학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녀가 연구한 주제의 일부만을 거론해봐도 장애인, 동물에 대한 윤리, 생명윤리, 시민 교육, 전지구적인 사회 정의에까지 걸쳐 있다. 특히 그녀는 인간의 취약성에 대한 고찰, 혐오나 수치심 같은 인간의 감정과 정동에 대한 연구, 그리고 여성철학에서는 여성의 자율성이나 성적 대상화나 성노동에 대한 연구 등으로 유명하다. 사실 이 모든 철학적 문제의식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오래된 철학적 물음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녀의 대표적인 저서중 하나인 『인간성으로부터 숨기: 혐오, 수치심, 그리고 법Hiding from Humanity: Disgust, Shame and the Law』(국역: 『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 조계원 옮김, 민음사, 1995)에서는, 우리를 지극히 취약하게 만들면서도 압도적으로 휘감아버리는 대표적인 감정인, 혐오와 수치심을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혐오는 페미니즘이 많은 관심을 두는 주제였다. 줄리아 크리스테바(1941.6.24~)혐오(aversion)에 대한 고민이 그러하고, 마사 누스바움의 혐오(disgust)에 대한 고민이 그러하다. 이 글에서는 누스바움의 수많은 저서들 중에서 ‘혐오’와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다룬 저서인 『혐오와 수치심』을 중심으로 그녀의 혐오에 대한 사유를 전달해보고자 한다. 먼저 감정(emotion) 일반에 대한 누스바움의 논의를 살펴본 후에, 혐오라는 감정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들여다보기로 하겠다.

 

  • 감정의 비밀

 

마사 누스바움은 먼저 두려움이나 분노, 혐오와 같은 감정들은, 배고픔이나 목마름 같은 욕구(appetite) 또는 우울함이나 짜증같은 기분(mood)과는 다르다고 설명한다. 감정은 욕구나 기분과는 어떻게 다른걸까? 먼저 욕구는 내 의지와 다르게 불가항력적으로 찾아온다. 예를 들어 피곤함이나 배고픔 같은 욕구를 생각해보자. 이 욕구들은 인간이 살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본능에 가까운 것들이다. 그러나 감정은 보다 섬세한 측면이 있다. 예컨대 남편의 가정폭력을 두려워하는 여성은 고통이나 무력감 같은 기분을 동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어떤 대상,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믿음과 평가를 동반한다.

먼저 감정은 대상(object)을 갖는다. 북핵과 전쟁에 대한 두려움, 최순실과 국정농단에 대한 분노, 가족에 대한 사랑이나 세월호 참사에 대한 연민을 생각해보자. 이 모든 감정들은 각각 구체적인 명확한 대상들을 가지고 있다. 불법촬영물에 대한 여성들의 공포와 두려움은 불법촬영물이라는 대상을 가지고 있으며, 성범죄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분노는 성범죄라는 대상을 향한다. 철학자들은 이런 대상을 갖는 감정의 특성을 지향성(intentionality)이라고 설명한다. 마음은 마음 바깥의 어떤 대상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대상 없이 발생하는 우울함 같은 기분과 달리, 연민이나 혐오 같은 감정은 구체적인 대상을 향한다.

감정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바로 믿음(belief)이 감정의 본질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누스바움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가져온 페르시아인들에 대한 아테네인들의 분노를 예시로 든다.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이 아테네를 약탈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향해 분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편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여성은, 남편이 자신을 죽이거나 상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인해 두려움이 증폭되는 것이다. 아이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의 슬픔을 떠올려보자. 그 어머니 역시 아이가 사망했다는 믿음으로 인해 슬픔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 믿음은 사실관계가 틀린 거짓된 믿음일 수도 있다. 예컨대 아이가 사망하지 않았는데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거나 착오에 의해 그런 말을 전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틀린 믿음을 갖게 되었다 하더라도 어머니의 슬픈 감정에는 영향을 줄 수 있다. 또한 믿음은 근거없는 부당한 믿음일 수도 있다. 예컨대 화성 외계인의 침공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화성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할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에 이 사람의 믿음은 분명 근거없는 믿음일 것이다. 또한 우리는 칫솔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두려움을 갖지는 않는다. 잃어버리면 사면 되기 때문이다. 치아 농양이라는 질병에 대한 두려움 역시 부당한 믿음이라고 누스바움은 설명한다. 이 질병은 조기에 발견되면 치료가 가능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생소한 이 질병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누스바움에 따르면 감정에는 대상에 대한 가치평가가 들어있다. 예컨대 친구나 가족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생각해보면, 친구나 가족이라는 존재는 한 개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에 그 슬픔이 극심할 수 밖에 없다. 반면 우리는 먼 외국인의 사망 소식에는 그렇게 별다른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예컨대 중국에서 지진이 발생해서 사망한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슬픔을 느끼진 않을 것이다. 동일한 감정도 대상에 대한 가치평가에 따라서 그 양상이 다른 것이다. 마찬가지로 외모에 대해 많은 가치평가를 두고 있다면 외모에 대한 모욕적인 발언에 대한 분노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감정의 특성, 즉 감정이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도 감정이 비이성적이거나 비합리적인 것이 아닌, 합리적인 이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시사한다. ‘믿음’은 플라톤의 저서 『메논』이나 『테아이테토스』에서 보듯이, ‘앎’과 함께 전통적으로 중요한 철학적인 인식론의 주제였기 때문이다. 또한 믿음에는 거짓된 믿음이나 부당한 믿음이 있다는 것은 이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역시 간파했던 사실이였다. 예컨대 페르시아인들을 향해 분노하는 아테네인들의 경우, 사실은 아테네에게 해악을 끼친 사람들은 페르시아인들이 아니라 스키타이인들이였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아테네인들은 거짓된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혹은 페르시아인들이 고의가 아닌 미비한 피해를 끼쳤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아테네인들은 정당화되지 않는 근거없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이처럼 믿음이 감정에 필수요소라는 누스바움의 논의는, 감정에 있어서 판단이나 이성의 중요성을 시사해준다. 아테네인들은 가짜뉴스를 듣고서 부당하게 페르시아인들에 대해 혐오나 분노의 감정을 가지게 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는 쥐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소한 것에 두려움을 갖는 것이라고 비판했고, 세네카 또한 식당에서 상석에 앉지 못했다고 화를 냈던 자신을 반성했다고 한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누스바움은 따라서 감정에 있어서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교통체증에 대해 쉽게 화를 내는 사람, 혹은 어둠을 무서워하는 아이에게는 감정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실 플라톤은 이미 유명한 영혼 삼분설에서, 영혼이 이성과 기개 또는 분노(thymos), 그리고 욕구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고 말한 바 있다. 플라톤은 이를 각각 몸의 머리, 가슴, 배의 부분과 연결시킨다. 오로지 본능에만 충실하는 욕구와 달리, 기개는 이성의 도움을 받아 이러한 욕구에 저항하도록 사용될 수 있다. 물론 기개가 욕구와 한편이 되어 이성을 따르지 않게 될 수 도 있다. 감정이 욕구와 다르며, 이성의 인도를 받기도 하고 받아야 한다는 것은 이미 고대철학에서도 사유되었던, 오래된 인류의 지혜인 것이다.

 

  • 혐오스러운 혐오

 

우리는 무엇을 혐오하는가? 누스바움은 우리가 원초적으로 혐오하는 대상이 있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우리는 종이, 금잔화, 모래는 혐오하지 않지만, 신체 배설물과 부패한 음식은 혐오한다. 치즈는 냄새가 고약하다고 해서 혐오하지 않지만, 대변은 혐오한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나’라는 속담처럼, 심지어 대변과 형태마저 유사한 된장은 혐오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설탕은 혐오하지 않지만, 바퀴벌레에서 설탕맛이 난다 하더라도 혐오할 것이다.

앞에서 감정은 대상을 갖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혐오의 대상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서 떨어져나간 부산물들(예컨대 토사물이나 대소변)이거나, 인간의 불완전성과 동물성을 떠올리게 하는 물질들(동물이나 시체)이라는 것이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이러한 대상들은 인간에게 불완전성과 유한성, 동물성을 환기시키면서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혐오의 대상들은 두 가지 법칙, 즉 ‘접촉의 법칙’과 ‘유사성의 법칙’을 따른다. 먼저 접촉의 법칙이란, 혐오의 대상이 다른 대상과 접촉될 경우 다른 대상마저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예컨대 죽은 바퀴벌레가 떨어졌던 쥬스 잔의 경우, 우리는 그 쥬스 잔이 아무리 깨끗하게 세척되었다 하더라도 기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전염병이 있는 사람이 입었던 옷 역시, 살균 소독되어 전염병과 무관하게 세탁되어 있다 하더라도 기피한다는 것이다. 또한 유사성의 법칙이 있다. 즉 원래의 혐오의 대상과 유사한 다른 대상 역시 혐오하게 되는 법칙이다. 예컨대 개똥 모양으로 만든 쵸콜렛의 경우, 왠지 꺼림칙하게 된다. 살균한 파리채로 휘저은 수프의 예시도 그렇다. 만일 파리채로 수프를 휘저었다면 그 수프 역시 마시기가 힘들 것이다. 새로 산 빗으로 휘저은 음료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리 그 빗이 공장에서 막 나온 새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으로 휘저은 음료 역시 마시기가 거북할 것이다. 이런 예시들은 혐오가 작동하는 법칙들을 잘 보여준다.

다음으로 누스바움은 혐오와 위험, 혐오와 비정상, 그리고 혐오와 분노를 구분한다. 예컨대 독버섯은 위험한 대상이지만, 우리는 독버섯을 혐오하지는 않는다. 또한 돌고래는 바다에 사는 포유류이기 때문에 비정상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돌고래를 혐오하지는 않는다. 혐오의 대상들은 이것들과 달리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인간의 유한성과 동물성을 환기시키는 존재들로, 나를 오염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초래하는 것들이다.

 

  • 혐오스럽다고 감옥에 보내야 할까?

 

누스바움은 다른 감정들과 달리 혐오는 특히 매우 불안정한 감정이기 때문에, 법이나 도덕의 판단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따라서 혐오를 불신의 눈초리를 가지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혐오를 옹호하는 철학자들과 법학자들을 비판한다. 예컨대 생명윤리학자인 레온 카스(Leon Kass, 1939.2.12~)는 혐오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특정한 혐오감이 인류의 지혜를 드러내는 감정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생명복제에 대한 직관적인 거부감 같은 것이 그것이며, 그런 혐오는 생명복제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인류의 지혜의 지표라는 것이다. 그러나 누스바움에 따르면 혐오는 편견에 기반한 감정이 되기 쉽기 때문에, 인종간 결혼이나 동성결혼법에 대한 혐오로 악용되면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억압과 박해에 이용되어왔다고 주장한다.

누스바움은 앞에서 다루었던 배설물이나 동물의 시체 같은 ‘원초적 혐오’와, 동성애자나 장애인에 대한 혐오 같은 ‘사회적으로 매개된 혐오’를 구별한다. 원초적 혐오는 위생과도 관련되어 있고 진화의 산물일 수 있기에 그렇게 위험하지 않으며 인간 삶과 떼어놓을 수 없는 반면, 사회적으로 매개된 혐오의 경우엔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 같이 매우 위험한 혐오다. 특히 사회적인 혐오는 주로 해당 사회의 문화적 편견의 영향을 받으며, 주로 그 사회의 소수자와 약자를 향한 투사적인 성격을 가진다. 원초적 혐오가 사람에게 귀속되어 그 대상이 혐오하는 자의 유한성과 동물성을 환기시킨다는 이유로 낙인이 찍히고 혐오를 당하는 것이다. 예컨대 동성애자 남성은 이성애 남성을 오염시킬 수 있는 전염성을 지닌 존재로 취급당하기 때문에 기피당하며, 역사적으로 여성 역시 역사적으로 유약하고, 끈적거리며, 유동적이고, 냄새나는 존재로 취급당해 여성의 몸이 오염된 불결한 영역으로 상상되어 왔다고 설명한다.

이런 사회적 혐오 혹은 혐오의 정치는 동성애자들의 성관계를 처벌했던 ‘소도미 법’(Sodomy Law)나 군대 내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을 금지했던 ‘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Don’t ask, Don’t tell) 정책 등에도 반영되어 있다.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가 공적인 영역인 법과 정치로 침투한 것이다. 누스바움은 존 롤즈(1921.2.21~2002.11.24)의 정치적 자유주의를 따라, 공적인 영역에 사적인 감정이나 선입관이 진입해서는 안되며, 존 스튜어트 밀(1806.5.20~1873.5.8)을 따라 오로지 타인에게 피해를 끼친 행위들만 법적으로 처벌해야 하지,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로 동성애자들의 성관계나 알콜 중독, 약물 중독을 처벌해서는 안된다는 ‘해악 원칙’(harm principle)을 지지한다. 해악 원칙이란 오로지 타인에게 해악을 낳은 행위만이 도덕적으로 그른 행위이며 법적으로도 제재할 수 있는 행위라는 원칙이다. 이러한 누스바움의 주장은 결국 ‘해악 원칙 대 불쾌 원칙이냐’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불쾌 원칙’(offense principle)이란 해악을 낳지 않았다 하더라도 처벌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철학자 조엘 파인버그(Joel fineberg, 1926.10.19~2004.3.29)가 주장한 원칙이다. 누스바움은 혐오를 법이나 도덕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불쾌 원칙을 당연히 반대할 것이다.

예컨대 지적 장애인이나 게임 중독에 걸린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불쾌감 혹은 혐오감을 줄 것이다. 온 몸에 문신을 한 사람은 어떤가? 보기만해도 혐오스러울 수도 있다. 그런데 보기에 혐오스럽다는 이유로 게임 중독에 걸린 사람이나 문신을 한 사람들을 감옥에 보내도 되는 것일까? 뚱뚱해서 불쾌감을 주는 사람은, 특이한 헤어 스타일과 옷차림을 한 사람은 또 어떤가?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인권탄압일 것이다. 한국에서도 과거에 그런 적이 있었다. 부랑자들, 미니 스커트를 입은 여성들, 장발을 한 청년들을 단속하고 적발한 역사가 있었다. 아직도 군형법에는 동성애 장병들을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 존재한다. 퀴어문화축제에 대한 많은 이들의 반감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누스바움의 혐오에 대한 통찰을 따라 혐오는 많은 경우 사회적인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며, 사회적 약자들을 탄압하는 도구로 악용되어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혐오는 잘못된 믿음에 기반한 이성적이지 않은 편견인 것이다.

베티 프리단(下)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4. <여성성의 신화>, 베티 프리단(下)

“두려움을 떨치고, 평등을 이룩하기 위한 변화로 나서자 ”

 

김은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 프로이트와 마거릿 미드를 비판하다

 

“프로이트의 사상은 교육받은 현대 미국 여성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또 다른 초자아를 만들었다. 바로 여성들로 하여금 과거의 이미지에 사로잡히게 하고, 여성의 선택과 성장을 방해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게 하는 새로운 ‘당위성’의 폭정이었다.”

 

그렇다면 이 신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베티 프리단은 미디어의 영향력을 짚으며, 대부분 남자로 이루어진 여성 잡지 편집자가 행복한 가정주부의 이미지를 이상적인 모습으로 선전하고 전파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신화 형성에 가장 크게 일조한 것은 학계의 이론이었다. 프리단은 특히 대학교육의 교과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두 명의 사상가를 겨누어 비판한다. 그 두 사상가는 지크문트 프로이드와 마거릿 미드이다.

페미니즘 운동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중반까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여기지 않는 편견이 여전히 존재하고, 과학 교육 민주주의 정신에 의해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 편견의 이론적 근거를 프로이트주의로 삼기 시작한다. 프로이트 심리학은 여성 해방 운동 이데올로기의 한 부분이고, 해방된 여성의 관념에 기여했기에, 여성들은 오래된 굴레를 반박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시몬느 드 보부아르(1908. 01. 09 – 1986. 04. 14)도 지적하듯이, 프로이트의 이론은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에 권위를 부여하여 여성의 본능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베티 프리단은 『여성성의 신화』에서 프로이트 이론의 시공간적 한계를 지적하며, 그 이론을 상대화할 것을 주장한다. 프로이트는 여성성의 본질에 남근 선망(penis envy)이라는 이름붙인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빅토리아 시대의 빈이라는 지역에서 계급적으로는 중상층 여성 환자를 남성의 시선에서 관찰한 산물이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이론은 실제로 그가 왜 그런 식으로 그 시대의 여성을 진단했는지에 대한 설명 없이 무비판적으로 프로이트가 설명한 여성성을 마치, 초시공간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프로이트가 보편적인 인간성의 특질로 묘사했던 것은 19세기말 어느 유럽 중산층 남자와 여자의 특성”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프로이트 이론의 주요한 전제가 자기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안나 프로이트에 따르면, 프로이트가 자라난 가정 환경에서 그의 어머니는 아름다웠고 자기 나이보다 두 배나 많은 남자와 결혼하여 평생 복종하며 살았다. 프로이트의 아버지는 유대 집안의 독재적 권위로 집안을 다스린다. 프로이트의 어머니는 이러한 환경에서 첫 아들 지크문트를 특별히 사랑한다. 프로이트 역시 어머니의 사랑과 아버지를 질투했던 경험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고, 이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부른다. 프로이트 자신이 어머니의 태양이기에, 프로이트의 욕망에 따라 집안은 배치된다. 누이의 피아노 연습 소리가 연구 방해된다고 투덜거린 후, 피아노가 치워지고 음악가의 꿈을 소망한 누이의 기회는 사라진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상황을 여성의 입장으로 보지 않고, 남자의 지배를 받는 것을 여성의 본성으로 여긴다. 프로이트의 부인인 마르타 역시, 그의 소망대로 사랑스런 어린아이와 같이 자랐고, 그러기에 프로이트가 결혼한다. 그는 배우자의 미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젊고 귀여운 애인, 언제가지나 늙지 않고 한주 정도만 늙은 것 같아야 하며, 모든 신랄함의 흔적을 재빨리 지울 수 있는 여성”이어야 한다. 결국 프로이트의 이론은 소년의 눈으로 시작되어 결국엔 남자의 눈으로만 설명되는 것이다.

프리단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미국에서 프로이트 이론의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까닭에 관해, 현실에 나타나는 문제에 대한 쉬운 해결책을 바랐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실상 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로이트 심리학은 인간의 이상행동에 대한 분석의 틀 그리고 전쟁의 상흔이 빚어낸 고통에 대한 치유로 제시되고, 문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는 안전한 도피 통로이자, 미국의 새로운 종교가 된다. 이에 따라 여성성의 신화는 “이른바 전문가들의 판단이나 대중잡지를 통해 미국 여성의 생활”에 파고든다. 과학적 종교인 프로이트의 이론은 여성의 역할에 관한 이론의 근거로 자리 잡고 ‘여성성의 신화’를 공고히 하면서, 여성을 그 스스로는 미래를 개척할 수 없는 가부장제에게 보호받아야 할 유약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단정한다.

프리단은 마거릿 미드 역시 문화 인류학을 프로이트 이론의 틀에 끼워 맞추어 연구했다는 점에서 비판한다. 마거릿 미드는 “왜 우리는 기술이 발달했는데도 미국의 여성들은 석기 시대로 후퇴하는가”라는 의문을 품는 글을 신문에 실지만, 본인의 저작이 그러한 풍토에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미드는 인류학 연구의 성과를 통해 프로이트 이론을 보편인류의 특성으로 자리잡게 하는데 일조하고, 남성성과 여성성의 기원을 성립시킨다. 생산성의 측면을 남성적인 것, 자궁을 수동적 수용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즉, 미드는 현대의 상태나 과거 상태를 당위적 상태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프리단은 미드의 이론을 비판하며, 아기를 갖는 것이 인간성의 성취의 절정이고, 생식이 인간 생활의 중요하고 유일한 것이라면, 왜 자궁 숭배가 없는지 되묻는다.

프로이트의 여성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마거릿 미드의 관점을 잘못 받아들인 결과, 50-60년대 미국 여성의 이미지는 한정적인 협소한 틀거리 안에 갇히고 말았다. 교육자들은 이러한 이미지가 ‘정상적인 여성상’이라고 말하며 여학생들 에게 천체를 관찰하거나 새로운 과학 기술을 개발하라고 격려하는 대신에 좋은 아내와 어머니가 되도록 교육한다. 그리하여 여성들은 자신의 능력을 부정하고 다양한 삶의 기회를 스스로 제한하는 결과를 맞는다.

 

  • 가정이라는 이름의 안락한 포로수용소

 

결국 이러한 신화는 미디어가 아름답게 포장하는 안락한 미국 중산층 가정이라는 이상적 이미지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프리단은 이 가정을 안락한 포로수용소라고 주장한다. 가정을 포로 수용소로 설명하는 이유는 실제로 포로수용소에 갇힌 사람들과 가정 주부가 유사한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프리단은 “정신 분석자이자 교육심리학자인 브루노 베텔하임이 1939년 다하우 집단수용소와 부겐발트 집단 수용소에서 죄수로 수감되어 있을 때 했던 연구”를 언급한다.

나치 포로수용소에서 수감자는 수용소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자신의 죽음에도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포로 수용소는 수감자들을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도록 강요하고 개성을 포기하도록 하면서 특성이 없는 존재로만 살아가도록 강요한다. 수용소는 수감자에게 수용소 세계만을 유일한 현실로 만들고 원초적인 육체적 욕구만을 충족시키도록 한다. 이로 인해, 수감자들은 스스로 결정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을 잊어버린다. 이 조건은 미국 주부들에게 자아 정체성 상실시키는 조건과 비슷하다. 포로들과 마찬가지로 미국 주부들도 새로운 상황에 대항하는 능력이 사라지면서, 수동적인 존재로만 머물면서 주체적 의식을 갖지 않는다. 이는 약한 자아만을 유지한 채 관계성에서 단절된 이기심에 곧장 빠질 뿐 아니라, 적극적인 목적이나 야망, 이익을 잊어버리고 추상적인 사고에 대한 무력하며, 바깥세상을 향한 활동에서 후퇴한다.

또한, 베티 프리단은 50-60년대 아이들의 정서장애가 증가하는 현상과 가정이란 포로수용소에 갇힌 주부들의 상관관계를 지적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어린이 가 여성성의 신화에 의해 무기력해진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면서 상호파괴적인 공생으로 나아가고, 이는 다시 여성성의 신화를 통해 악순환으로 구축된다. 특히 소녀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 소녀들은 학교와 현실에서 치루는 시험을 기피하고, 결혼하면 결국엔 진정한 목적과 만족을 이룰 것이라는 약속에 순응하면서 이른 나이에 결혼하도록 선동하는 사회에 따른다. 소녀들은 어린애 수준에 멈춘 채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 하지만 이러한 어머니에게 자라난 아이 역시 개성을 갖춘 존재로 자라기 보다는 환상 속으로 머물 뿐 아니라, 그 딸 역시 또 다시 최악의 희생자가 된다. 프리단은 다음과 같은 예시를 제시한다. 남들 보기에 번듯하고 부유한 삶을 살며 남편이 대기업의 높은 직위에 있는 가정 주부는 딸을 자신에게 수동적으로 의존하게 하고 자기와 동일시하게 만든다. 남편은 바쁘다는 명목하에 사회적 지위와 자신의 직업적 성취에 몰두할 뿐이다. 그럴수록 가정주부는 아이들의 삶에 집착하고, 특히 이 주부에게 딸은 일종의 사물, 즉 또 다른 자아 의탁의 대상에 불과하다.

“가장 나쁜 것은 제가 제 배로 낳은 아이들을 질투한다는 것입니다. 전 아이들을 미워합니다. 아이들에겐 앞으로 자기들의 삶이 있지만, 전 이미 끝나버렸기 때문입니다.”

프리단은 이렇게 수동적인 의존에 갇힌 주부와 아이들 사이에 통제할 수 없는 폭력이 증가하는 징조를 목격한다. 해결책은 어머니들에게 아이들을 더 사랑하라고 촉구하는 것을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여성들로 하여금 가정과 아이들에게 완전히 헌신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여성성의 신화의 역설을 직시하게 해야 한다. 또 한 여성들이 더 여성적이 되도록 촉구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이는 아이들과의 관계에 더 나쁜 영향을 미친다. 아이를 더 수동적으로 성장시키는 의존성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여성이 자기 능력을 완전히 사용하도록 사회는 용인해야 하며, 여성이 완전한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고무해야 한다. 이는 오로지 여성성의 신화를 일소함으로써만 가능하다. 프리단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여성은 남성의 성적인 존재이자, 자식의 어머니로서만 존재할 수 없다. 남편이나 아들을 통해 삶의 목적을 이루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성취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여성들의 모습이 필요하다. 이는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풍기는 병적 징후로부터 벗어나는 첫 걸음이 된다.

 

  • 주입된 여성성에서 벗어나, 2세대 페미니즘의 포문을 열다

 

프리단이 『여성성의 신화』에서 전달한 메시지는 여성운동의 기폭제가 된다. 1966년 폴리 머레이, 케이틀린 클라렌바흐, 도로시 헤너 등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30명의 여성들이 전미여성기구(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 NOW)를 설립한다. 창립 멤버중 한 명인 프리단은 NOW의 창립 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이 창립 선언문은 “모든 여성을 위한 진정한 평등”을 요청하고, “평등하고도 경제적인 성장”에 대한 모든 장애물을 제거할 것을 요구한다.

프리단은 미국 최대의 여성운동 단체인 전미여성기구(NOW)를 비롯, 전미낙태권행동리그(NARA), 전미여성정치회의(NWP)의 창립자가 되어, 낙태, 출산 휴가권, 승진과 보수에서의 남녀평등을 위한 운동을 펼친다. 『여성성의 신화』의 저 자에서 더 나아가 페미니즘 운동가로서 베티 프리단은 우뚝 서면서, 직장에서의 성차별 폐지와 임신중단권 운동, 여성에 대한 폭력 반대 운동, 여성의 권리 향상 운동 등을 펼친다.

베티 프리단 덕분에 정치인들이 여성의 불만을 인식하기 시작하고, 1963년 여성의 상태를 검토하기 위하여 임명된 위원회는 불평등의 종식을 건의한다. 이에 대한 입법이 뒤따랐으며, 1963년에 디 이퀄 페이 액트 오브 1963(The Equal Pay Act of 1963, 1963년 임금 평등법)은 여성은 동일 노동에 대해서 남성과 같은 임금을 받는다고 명시한다. 프리단의 문제제기는 성평등적 교육 확대와 직장 내 법 ·제도 개선으로까지 이어져 여성의 사회진출을 늘이는 데 이바지한다.

NOW의 전 의장이기도 한 킴 간디는 프리단의 책에 관해, “삶의 실질적인 다른 무언가를 꿈꾸던 여성의 사고를 열어주었으며, 그런 생각들을 비밀스럽게 숨기고 살아온 여성들에게 자신 외의 다른 여성들도 더 나은 삶을 꿈꾼다는 것을 알려주었다”고 평가한다.

제2물결 페미니즘의 파도의 제일 높은 마루에 있는 나우는 미국 여성운동의 역사와 함께 한다. 나우의 활동가인 테리 오닐은 미즈와의 인터뷰에서 “나우는 항상 다양한 중요한 이슈의 현장에 있었으며 지금도 그렇다”면서 “페미니즘이 미국의 규범(norm)이 되도록 돕는 역할”이라고 말한다. 나우는 미국에서 연방대법원이 헌법에 의해 낙태를 처음 인정했던 1973년 ‘로우 대 웨이드’와 ‘도우 대 볼튼’ 소송 현장뿐만 아니라, 1975년 신용기회균등법, 1978년의 강간피해자보호법과 임신차별금지법 등 중요한 양성평등 헌법수정안(ERA)의 법안 통과의 자리에 함께 한다. 1986년부터는 여성의 재생산권 확보를 위한 운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다른 여성단체들과 연합하여 매년 3월 미 전역에서 100만 명 이상이 참여하는 ‘3월 여성 인권을 위한 행진’을 조직한다.

또한 나우는 1971년엔 성소수자(LGBT) 지원을 공식 발표하며 성소수자 인권 투쟁을 공식 선언한 첫 단체이기도 하다. 나우는 여성운동을 위한 전국 조직 결성을 최초로 시도한다. 중앙 조직이 지침을 결정하고 각 지역 지부들이 나우를 지원한다. 이러한 방식은 자연스럽게 전국으로 여성운동이 확산되도록 하는 것이다. “지역의 활동(actions)이 운동(movements)을 만든다”고 설명할 수 있는 이 방식의 성과로, 오늘날 나우는 50개 주 전역에 500개 이상의 지역 및 대학 지부를 두고 있다.

 

  • 여성성의 신화의 성과와 그 이후

 

“역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앨빈 토플러

“이 책은 1963년 현대 여성운동에 봉화를 올림으로써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사 회조직을 영구히 바꿔버렸다” -뉴욕 타임즈, 베티 프리단 부고 기사 중-

사회가 여성성이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여성들을 인간이기 이전에 ‘여성’으로 만들고 억압하는지 밝혀낸 『여성성의 신화』는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논픽션 책 중 하나로 인정받는다. 여성 운동의 선구자였지만 프리단에게도 일정 한계가 존재한다. 프리단은 『미즈』(MS)를 창립한 여성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을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끄나풀이며 미모를 무기로 여성운동을 독식하는 스타 페미니스트’라 공격할 뿐 아니라, 레즈비언 페미니즘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급진적인 여성 운동가 수잔 브라운 밀러는 그를 ‘가망 없는 부르주아’로 비판하기도 한다.

또한 그의 이론과 행동은 가정과 직장일을 모두 완벽하게 해내는 ‘수퍼우먼’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자가당착적이다. 인종, 성적 지향성, 계급 등의 여성 내부의 차이를 무시하고 프리단 자신과 유사한 여성들의 문제에만 착목한다는 점에서 ‘중산층 백인여성 중심’의 페미니즘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는 1981년 저서인 『두 번째 단계』에서 『여성성의 신화』가 가정과 가족에 대해 너무 신랄한 분석을 했다는 비판을 수용하기도 한다. 그는 이 저서에서 “우리의 실패는 가정에 대한 우리의 간과에 있다”고 서술하여 자신의 첫 번째 저서의 주장을 뒤집기도 한다. 더 나이가 든 뒤에는 건강과 젊음에 몰두하면서 페미니즘을 등진 채 노인 문제를 다룬 책 『노년의 샘』(1993)을 쓰면서 죽음에 대한 혐오, 젊게 사는 비법을 전파하기도 하면서 논쟁에 휩싸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는 출간 이후 다양한 논의 를 끌어냈을 뿐 아니라, 그 영향력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한국어판 해제를 쓴 여성학연구자 정희진은 다음과 같이 쓴다.

“이 책이 출간되고 나서 5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여성성의 신화』는 지구상 ‘모든’ 여성들이 교육, 법, 고용, 경제적 지위 등 공적 영역에서 평등을 획득하는 ‘그날’까지 유효하다. … 이 시대 여성들의 근본적 고민은 여전히 남성과의 불평등 때문이다. 단지 ‘선택’이 다양해졌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우리를 출발선에 다시 세운다.”

프리단의 이후 행적과 상관 없이 『여성성의 신화』는 이름 붙일 수 없던 여성들의 문제를 해명하고, 페미니즘 운동의 방향성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변하지 않는다.

 

  • 2회에 걸쳐 연재된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는 여기까지 입니다.
  • 다음으로는 마사 누스바움의 책이 연재될 예정입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

베티 프리단(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3. <여성성의 신화>, 베티 프리단(上)

“가부장제가 만든 신화의 허울을 벗겨내다.”

 

김은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당신이 돌아보고 얼마나 먼지, 또 당신이 얼마나 왔는지 알게 되기 전까지는 얼마나 멀리 가야할지 알 수 없는 법이다…지금 수백, 수천 명의 여성들이 그러는 것처럼, 1963년에 어느 여성이 이 책이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고 말하며 처음으로 『여성성의 신화』에 사인을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나는 이렇게 적어줬다. “새로운 길 위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용기를!” 이 길에서 다시 돌아갈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신의 전 생애를 변화시켰고, 분명 내 생애도 변화시켰다. ”

 

  • 1942년 스미스 대학 입학생과 모나리자 스마일

 

1950년대 미국 동부의 웨슬리 대학을 배경으로 한, ‘모나리자 스마일’이라는 영화가 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줄리아 로버츠가 호연을 한, 영화의 주인공 캐서린 왓슨은 미술사 교수로 새로 부임해온다. 하지만, 왓슨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미래가 열린, 학생들의 인생 목표가 결혼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결혼 이외의 다른 삶의 가능성을 그들에게 제시하려 한다.

당시의 대학은 ‘결혼이 최고의 학생을 만든다’라는 표어를 걸고, 여학생을 완벽한 주부로 가는 길로 이끄는 예비 결혼 학교의 기능을 자처했다. 이 교육을 거치면서, 여성은 가정과 직업 중 전자를 선택하는 것이 자신의 미덕이자 의무라고 여기었다. 영화에서 왓슨은 학생들의 지성과 감성 그리고 잠재력을 일깨우고, 이러한 노력은 영화 결론부에 결혼 외에 다른 가능성을 긍정하는 학생들로 결실을 얻는다. 그러나, 영화에 등장하는 학생 중 하나는 법대로 진학하는 대신 결혼을 선택하며 말한다. “당신이 믿는 삶을 나까지 원해야 한다고 말하지 말아요. 내가 원하는 삶은 결혼이에요. 원하는 삶을 선택해야 한다고 한 건 당신이 아니었나요?” 결혼이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삶이라고 되받아치는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 1921. 2. 4. – 2006. 2. 4.)『여성성의 신화』는 시작된다. 바로 영화속 학생과 마찬가지로, 베티 프리단을 비롯한 많은 미국의 여학생들은 졸업 후 결혼을 선택했다. 그 역시 잘 재단된 드레스를 입은, 한 손에는 책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프라이팬을 들고 있는 재원이었다. 멋진 남편의 배우자이자, 귀여운 아이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며, 완벽한 가족의 꿈을 그렸다. 하지만 십여 년이 흐른 뒤, 프리단은 『여성성의 신화』를 통해서 영화 속 결혼을 선택한 그 여성으로 대변되는 많은 여성들의 인생 설계가 정말로 자유로운 선택인 것인가? 그리고 지금 행복할까? 라고 반문한다.

베티 프리단은 10주년 기념판 서문에서 솔직하게 다음과 같이 쓴다. “이 책을 쓰기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여성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책을 쓰고 난 후 일생은 달라졌다. 프리단이 말한 것처럼 “내가 이 책을 썼다는 것 자체가 참 믿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내 생애 전체가 이 책을 쓰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 식탁 위에서 글을 쓰다

 

베티 프리단은 일리노이주 피어리어에서 신문기자를 하다 전업주부가 된 어머니 미리엄과 보석상인 아버지 해리 골드스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전학년 올 A라는 훌륭한 성적으로 스미스 대학을 우등 졸업한, 프리단은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한다. 대학원 졸업 후 그는 심리학과에서 특별연구원 지위를 제안 받았으나 거절하고, 뉴욕에서 노동 전문 기자로 활동한다. 프리단 역시 경력단절의 아픔을 겪었다. 두 번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해고되고, 그 후 여러 잡지에 프리랜서로 글을 기고하지만, 전업 주부가 된 것이다. 프리단은 1957년, 그의 일생을 바꾼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미국의 전형적인 중산층 주부의 삶을 살았다. 모교인 스미스 대학의 15주년 기념 동창회 사업의 일환으로 졸업생 동문 조사를 요청받은 것이다. 프리단은 대학 동창을 대상으로, 졸업 후 변화한 그들 삶에 대한 심층 면접 작업에 착수한다.

면접을 진행하던 당시, 프리단 역시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자신의 열의 없는 삶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프리단은 심층 면접을 통해서 남성과 마찬가지로, 공적 영역에 참가할 수 있는 교육을 받았으나, 소위 ‘미국 정상 여성’의 이미지와 맞추기 위해, 가정에서 머물 수밖에 없는 여성들, 가정과 사회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성들을 포착한다. 프리단은 그들 중 다수가 주부로서의 생활에 그다지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의 발견은 프리단으로 하여금 다음 질문으로 나아가게 한다. “교육을 받았지만, 왜 여성들은 자신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가. 남편의 아내나 아이의 어머니가 아니라 사람 그 자체로 활동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왜 여성들이 갖는가.”

프리단은 전업 주부의 삶을 살아가면서, 동시에 위에 대한 답을 얻고자 근 5년간 독학으로 도서관을 찾아가 자료를 찾고 여성성의 신화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프리단은 스미스대학 동창생들의 설문조사를 시작으로 고등학생과 대학생, 기혼 여성들을 심도 깊게 인터뷰하고, 각종 매체의 기사와 광고, 전업주부 결혼생활을 추적하면서 방대한 양의 취재와 자료 조사를 실시한다. 또한, 잡지와 광고에 대한 이론과 심리학 저서들을 분석하면서, 사회가 여성들을 어떻게 억압하고 있는지 밝혀낸다.

이 때 그는 사회가 제시한 여성성에는 아내, 어머니로서 여성적 경험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러한 여성성은 여성들이 가정 말고는 아무것에도 관심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경고한다. 다시 말해, 여성은 정치, 예술, 과학, 크고 작은 사건, 전쟁과 평화 등 어느 것에도 자신을 동일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성은 남성만이 주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소위 여성성에 담긴 의미를 분석하면서, 프리단은 자신이 여성성의 신화에 사로 잡혀, 거짓된 삶을 살아왔음을 자각한다.

여성성을 분석하고 그에 대해 글을 쓰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조롱하고 비난했지만, 프리단은 무시하고, 집안일을 하지 않을 때 외에는 항상 글을 썼다. 식탁 위에서 글을 썼고, 거실 소파에서도 글을 썼다. 아이들을 돌보고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글쓰기를 잠시 멈출 때에도 머리 속에서 이어 쓴 후 아이들을 위한 시간을 마치고, 재운 후에 작업을 계속했다.

이제는 여성학의 고전이 된 『여성성의 신화』는 원래 책의 형태가 아니라 르포 형식의 기사로 기획되었다. 하지만, 어떤 잡지도 프리단의 기사를 게재하지 않으려 했다. 그저, 노이로제 있는 주부들에 대한 특수한 이야기로 치부할 뿐,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삼는 잡지에서 적절하지 않다고 여겼다. 여성 잡지 조차, 자신의 세계의 근간인 여성성의 신화를 위협하는 프리단의 글을 거절했다. 하지만, 『여성성의 신화』이 출간되자, 여러 가지 우려와 달리, 초판 발행 3000부가 순식간에 매진되었을 뿐 아니라, 260만부가 넘게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된다. 판매 지수는 갱신되었고, 프리단은 스테디셀러 작가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우선, 『여성성의 신화』는 당시 미국에 결혼한 여성의 40%가 10대였던 1960년대 미국 여성상에 대한 최초의 실증적인 기록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또한, 방대한 연구는 여성들이 겪는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을 최초로 명백하게 드러냈다. 게다가 이 책은 ‘여성성’이라는 이미지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여성에게 부과되는지 그 과정에 대해 충실히 설명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은 당시로는 급진적인 주장을 감히 선언한다. “남편과 아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책은 행복한 현모양처란 없고, 여성은 남편과 육아에서 벗어나 사회적 활동에 뛰어들어 실질적 성평등과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고 강하게 말한다. 책의 울림은 컸고, 수많은 여성들의 삶과 의식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면서, 제2세대 페미니즘 운동의 위대한 서막을 알렸다.

 

  • 여성성의 신화: ‘더 없이 행복한 주부는 왜 그리 불행한가?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 도입부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등장한다. “왜 교외의 크고 멋진 저택에서 네댓 명의 아이를 기르고 남편을 내조하며, 세간의 인식대로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야 할 주부들이 불행하다고 느끼는가?” 왜 더 없이 행복한 주부는 그토록 많은 죄책감에 시달리며, 자기 자신에 집중하는 순간 이기적이라고 자신을 여기는가? 왜 여성은 자신의 욕망을 죄악시하는가?

프리단이 주요하게 관심을 둔 중산층 백인 주부들은 소위 안정적이고 평온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온통 공허감과 권태감이 있고, 주부들은 자신의 삶을 불행하다고 여겼다. 프리단은 당시 여성들이 가정주부로서 겪고 있던 내면적 갈등을 자세히 묘사한다. 교외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집에서 살면서, 직장으로 떠나는 남편을 배웅하고, 아이를 학교로 보내고 난 후, 모두 떠난 빈 집에서 홀로 앉아 “이게 정말 행복일까?”라고 회의한다. 마음의 상태와 눈에 보이는 현실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주부들은 더더욱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더더욱 힘든 것은, ‘자신이 선택한’ 이 아름다운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이 불행은 아무에게나 발설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마음과 현실 사이의 갈등은 오랫동안 침묵의 영역에 머물렀을 뿐 아니라, 여성들을 더욱 더 고통스럽게 했다. 베티 프리단은 미국의 많은 여성들이 이 고통을 겪고 있음을 발견하고,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에 널리퍼진 여성들의 고통을 오직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들’로 명명한다.

그렇다면,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들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성성이라는 허구적 신화 때문이다. 당시 미국에 만연해 있던 허구의 이미지, 즉 여성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기르고 남편을 내조하면서 만족을 느낀다는 것은 통념일 뿐이다.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선택으로 결혼했고, 그러한 여성성을 추구한다고 말했지만, 이는 사실상 어떤 신화에 불과한 것이다.

프리단이 책 제목으로 쓴 ‘여성성의 신화’란 결국 말 그대로 실재로는 존재한 적 없는, 여성성과 무관한 그저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신화를 지칭한다. 이러한 여성성의 신화는 각종 매체, 광고, 교육, 학자들이 작위적으로 만들어 낸 현대식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를 의미한다. 오직 남성 중심적인 학계와 매스미디어가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신화로 만들고 사회 전반에 통용 시켜 여성에게 주입한 것이다. 이 여성성은 그 능력과 상관없이, 여성을 재생산 기관으로만 간주하는 사회가 만들어 냈다.

신화의 힘은 강력하다. 여성들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인생 여정 외의 다른 미래를 상상하지 못했다. 주부이자 어머니로서 사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배운 여성들은 학업을 이어가거나 직업을 가지는 일 없이 이른 나이에 결혼하여 가정주부로 살았다. 이 신화의 강력한 위력 속에서, 주부들은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집안일을 하고 자식과 남편을 뒷받침하는 삶을 살면서 동시에 괴로워했다. 또한, 맞벌이로 일하는 여성들은 자신이 일을 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엄마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죄책감을 느겼다. 이 신화는 프리단의 시대뿐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렇기에, ‘여성성’을 사회가 아무리 찬양한다 하더라도, 여성들은 그 ‘여성성’으로 인해 더 억압받고 원인 모를 고통에 시달린다. 프리단은 더 이상 그러한 여성성의 신화로 인해 여성들이 고통받을 필요가 없음을 강력하게 주창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성은 ‘내가 누구이며, 내가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그것을 죄라고 느껴서는 안 된다. 여성들은 남편과 아이를 넘어서 자기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기를 원하는 것을 이기적이라고 느낄 필요가 없다.”

 

  • 1950-1960년대 미국 여성들

 

그렇다면, 왜 당시 미국 여성들은 사회가 강요한 여성성의 신화를 의심하지 않은 채 받아들이는가? 밀이 여성의 종속을 쓸 당시만 해도, 미국 여성은 영국 여성의 지위에 비해 훨씬 진보한 여성의 권리를 획득했고, 참정권과 재산권 역시 다른 나라 여성들에 비해 먼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참정권 운동이 끝난 후, 오랜 기간 동안 미국여성운동은 구심점을 찾지 못한 채 표류했다. 여성문제를 제기할 중심을 상실한 미국 여성들은 더 이상 여성운동을 지속시켜 나가지 못했다.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1950년대 아이젠하워 시대의 미국은 데이비드 리스먼이 “고독한 군중”으로 칭한, 순응주의적인 미국 시민들의 사회였다. 이들은 사회에 복종하는 존재들로 자신을 자리 매김한다. 이 시기에, 미국은 ‘풍요한 사회(Affluent Society)’로 불렸고, 뉴딜 정책과 제2차 세계 대전을 통한 경제 성장과 소득의 재분배의 효과로 넓은 중산층이 양산이 된다, 이들 중산층은 동질화(homogenization)된 미국적 가치의 상징이기도 하다.

거대한 기업 조직과 관료 조직이 사회를 지배 하면서, 청년들은 순종적인 소시민을 소망하고, 안정된 직업, 전원 주택, 퇴직 계획과 같은 개인의 안전에 관련된 문제에 주로 관심을 가지는 ‘조용한 세대’가 된다. 이 조용한 세대는 다수의 생활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과 같은 대중 매체의 발달은 이 청년 세대의 욕망을 조직하는데 일조한다. 1960년 초 미국 사회에서 텔레비전 보급은 전체 가정의 90%에 이르게 되었고, 텔레비전이 영상으로 전달하는 메세지는 어린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국민의 모든 계층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미디어의 영향이 본격화되면서, 소비자들의 새로운 욕망을 만들고, 소비자들의 기호를 조작한다. 이와 더불어, 교육의 대중화 역시 사회의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비할 수 있는 사회 적응의 수단을 제공하는 도구로 작동하는데, 그 과정에는 여남의 데이트 방법, 여남 고정적 젠더 역할, 정상 가족의 가치 같은 것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1950년대와 1960대 초 분위기에서, 미국 사회의 여성 위치는 이전의 여성 해방 운동 시기와는 다를 수 밖에 없었다. 1930년대 미국은 경제 공황을 겪으면서 기혼 여성 취업을 금지하는 입법을 추진했지만, 동시에 전쟁시기에는 여성들의 노동력을 요구했다. 그 사이 많은 여성들은 경제 참여와 가정복귀의 악순환을 경험한다. 이에 따라 기혼여성이 가정 밖에서 일을 하는 것은 남성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라는 인식이 전반적인 사회적 분위기로 자리잡았다. 전 후, 순응주의적 사회 분위기에서 중산층 여성들은 사회 안정의 보루인 가정을 꾸리는 존재로 제시되었으며, 대중문화는 참된 양육자인 가정의 어머니의 역할만을 여성에게 강조할 뿐이었다. (이창신 저(2004), 미국 여성사, (주) 살림출판사)

이러한 환경이 빚어낸 시대에 살아가는 여성은 자신의 임금은 남성보다 낮고, 임신과 출산을 할 경우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자기 아이에게 모유 수유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좌절한다. 여성은 “하루를 살아도 아름다운 여성으로 살겠어요”라고 말하는 광고를 자신의 욕망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여성들은 시달리고 있고, 결코 이렇게 사회가 선전하는 여성성 덕분에, 행복할 수는 없다.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유림의 정신으로 독립의 길을 걷다, 심산 김창숙 [길 위의 우리 철학] – 19

김세리

 

조선에 한 선비 있으니

벽옹 김창숙이라.

머리는 희었으되

마음은 일편단심

나라 구하려는 생각

그것 말고 무어 있을까.

차라리 독립을 위해

죽은 귀신 될지언정

신탁통치 노예는 절대로 되지 않으리.

인생이란 언젠가

죽게 마련

죽으면 죽었지

욕되게는 살지 않으리.

 

김창숙(金昌淑,1879∼1962)이 노년에 쓴 「신탁 통치」라는 시이다. 자신의 의지, 털끝하나 굽히지 않겠다는 결의가 칼날 같다. 나라의 운명이 어지러운 시절 그는 머릿속에는 오로지 ‘조국’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떳떳한 죽음을 선택하는 기개, 수많은 불의를 물리치고 오직 조국의 앞날만을 걱정하는 애국심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적어도 직접적인 외세의 압력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시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쩌면 이해 불가의 일들이 아닐까? 아니 시대를 뒤집어 내가 그 시절을 살았던들 그러한 용기와 기백을 가질 수 있었을까. 시대의 어른으로서 민족의 정신적 기둥으로 삶을 살아간 그를 찾아 떠난다.

 

칼날 같은 정신으로 한결같은 그 길위에

_심산 김창숙 기념관 (서울특별시 서초구 사평대로 55)

 

한국 역사에는 애국의 길을 걸었던 수많은 선각자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대의와 정의를 위하여 그들은 스스로 무자비한 혹한의 시간을 선택했다. 그들의 희생으로 지금의 우리가 이렇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늘 고마움을 잊지 않아야겠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잊은지 오래며 알지도 못하는 경우가 태반일 것이다.

구국운동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가족의 인연은 물론이며 사적인 소유 모든 것, 뿐만 아니라 자신 스스로를 온전한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다. 김창숙 또한 그러하다. 파란굴곡의 시대를 살며 그의 심장은 오로지 나랏일을 위하여만 뛰었다. 다른 우국지사들과 다른 면이 있다면 유학자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선비로서 학문과 인간적 도덕성을 갖추고 세속의 영화를 탐하지 않고 죽는 그날까지 청렴과 지조를 지켰다.

우선 그의 일대기가 한곳에 담아져있는 심산 김창숙 기념관 돌아보기로 한다. 기념관은 그의 고향인 경북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1974년 심산기념회에 의해 건립)와 서울 서초구 반포동(2011년 서초구에 의해 건립) 두곳에 있다. 서초동 기념관은 반포공원과 서초구민체육센터와 이웃해 있고 기념관에서도 자체적으로 여러 가지 문화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발길이 잦은 편이다. 기념관 입구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그의 동상이 마주한다. 무궁화 꽃에 둘러싸여 무릎에는 서책을 놓아두고 조금은 편안하게 앉아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다.

무궁화는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서책은 유학을 상징하는 것일 게이다. 평생을 나라의 일로 달리다가 끝내는 모진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었지만 동상이나마 편안하게 앉아계신 모습이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여러 행적을 보여주는 사진 속 표정이나 그의 필체를 통해서 한걸음 한걸음 그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 본다.

 

심산 김창숙 동상

김창숙 기념관 내부 모습

 

‘파리장서(長書) 운동’은 김창숙의 대외적 활동의 첫걸음이었다. 1919년 3월 1일 발표된 독립선언서에 유림 대표가 한 명도 없음을 보고 심산은 “망국의 책임을 져야 할 유교가 이번 독립운동에 참여치 않았으니 세상에서 고루하고 썩은 유교라고 매도할 때에 어찌 그 부끄러움을 견디겠는가?”라고 통탄하였다. 유교의 나라에서 유림이 민족대표에서 빠진 것을 치욕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열국 대표들에게 호소해서 국제 여론을 환기시켜 우리의 독립을 인정받도록 한다면 우리 유림도 독립운동의 선구가 됨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라고 보고, 전국의 유림대표를 규합하여 연명으로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만들어 보낼 계획을 추진하였다. 우선 영남 유림의 영수(領袖)인 곽종석에게 알려 협조를 구하며 파리장서의 작성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 동지들을 파견하여 유림대표들의 지지와 동참을 호소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호서유림도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거의 같은 동기와 목적에서 장서를 작성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려고 준비하는 중임을 알게 되어 양측은 공동으로 파리장서를 제출하기로 하였다. 137명의 유림대표들의 연명으로, “한민족은 불행히도 그간 일제의 간악한 침략으로 인하여 현재는 노예적 상태에 있지만, 역사적 전통과 현실적 역량에 있어서 충분히 독립자존의 능력을 갖추고 있으므로 인간 및 만물을 통한 독립생존의 원리에 비추고, 또 강화회의에서 실현코자 하는 민족자결원칙에 입각하여 우리 한민족에 대해서도 자주독립을 보장하라”고 요구한 파리장서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이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도록 결정하였다.

김창숙은 137명의 연명으로 작성된 장서(長書)를 품고 극비리에 중국 상해로 출국했다. 상해에서 동지들과 의논 끝에 독립청원서를 영역(英譯)하여 이미 파리에 가 있는 김규식(金奎植)에게 보내 회의에 제출하게 하고, 김창숙은 중국과의 외교 활동을 위해 상하이에 남았다. 그리고 이 장서를 인쇄하여 중국의 정계와 언론계, 각국의 대사·공사·영사관 그리고 해외 교포들의 거류지와 국내 각 지방 향교에 빠짐없이 우송하였다.

이런 움직임을 인지한 일제(日帝)는 곧 국내 유림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활동을 벌여 500여 명을 체포하였는데, 이것이 이른 바 ‘제1차 유림단 사건’이다. 이는 독립운동에 있어서 유림의 참여라는 의의를 넘어 국내 민중운동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이 독립을 절실하게 염원하고 있음을 세계만방에 전파하였다.

 

혁신유림계의 선각자

_성균관(서울 종로구 성균관로 31)

 

성균관 명륜당

 

유학(儒學)의 산실로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인 성균관(成均館). 성균관은 단순히 교육만을 담당하는 기관은 아니었다. 유학의 역사에 공헌한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향사(享祀) 역할이 교육 못지않은 중요한 기능이었다. 그래서 성균관 건축은 이른바 전묘후학(前廟後學)이라는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앞쪽에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향사 공간을 앞쪽에 마련하고[대성전(大成殿)] 그 뒤로 교육 공간[명륜당(明倫堂)]을 배치하였다. 명륜당 앞뜰에는 행단(杏壇)을 상징하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우뚝하니 서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곳에서 머물렀는지 나뭇잎 하나하나에 시간이 모인 듯 거대하고 울창하다. 지금의 우리들에겐 한가하고 여유로운 문화유산이지만, 이곳은 율곡, 다산, 단재에 이어 심산 그리고 지금의 우리에 이르기까지 역대적 발자취가 켜켜이 모아져 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김창숙의 유학 정신 또한 이곳이 본향이고, 때로는 의미를 쇠퇴했던 성균관을 바로 잡기 위하여 그는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투쟁의 시절, 온갖 모진 압박과 수난을 버티었던 정신의 모태는 유학 정신의 힘이었다.

명륜당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과 유림의 지도자 김창숙

촬영일: 1948.09.09 서울 성균관, 제공: 우리역사넷

 

 

1927년 12월 재판에서 나석주의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사건의 주동자로서, 살인미수, 치안유지법, 폭발물 취급령 위반 등의 죄목으로 14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이 때 당한 혹독한 고문으로 두 다리가 마비되어 하반신이 불구된다. 이후 평생토록 앉은뱅이로 삶을 보내 ‘벽옹(躄翁)’이란 별호를 얻게 된다.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던 김창숙은 병이 악화되어 1929년 5월 대구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러나 병세가 심해 고향으로 옮겼으나 대구지장법원 검사장에 의해 곧 재수감되었다. 그는 오로지 정신력으로 이 시기를 이겨내는데, 몸 성치 못한 와중에도 『자서종요(字書綜要)』를 편찬하였으며, 『육경(六經)』 · 『이정전서(二程全書)』 · 『이학종요(理學宗要)』 등을 읽고 사유하며 천인성명(天人性命)의 심오한 이치를 연구하여 마음의 안정을 구하였다.

옥중 생활 중에도 자신의 의지를 꺾는 일이 없었으니 1933년 새로 부임한 전옥이 김창숙에게 절하기를 강요하자, ”내가 옥에 들어온 지 이미 6~7년이 되었지만 옥리를 보고 머리 한번 까딱하여 절한 일이 없다. 나는 위협으로 내 뜻을 변할 사람이 아니다. 내가 너희들에 대해서 절하지 않는 것은 곧 나의 독립운동의 정신을 고수함이다. 대저 절은 경의를 표하는 것인데 내가 너희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라고 하며 끝내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당시 안창호와 여운형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이감되어 김창숙과 함께 수감되었다. 당시 쓴 시이다. 창자가 찢어지는 듯한 그의 애절한 마음이 전해진다.

 

7년 세월 이미

죄수로 몸져 누웠으나

나의 본 자세를 지킴은

나쁘지 않았어라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으라니

어찌 차마 말하랴

분통의 눈물이

창자를 찢는구나!

 

교육을 통한 민족정신 고취.

_성균관대학(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25-2)

 

1945년 가을. 김창숙은 옥중에서 광복을 맞이한다. 이후 정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유학의 근대적인 발전에 힘을 쏟게 된다. 시대에 맞는 새로운 유교문화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며, 일본이 왜곡시킨 유교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 하였다. 일제에 의해 유린되었던 성균관의 복구는 물론이요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인재육성을 위한 성균관대학의 설립에 뜻을 두게 된다. 물론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재정이 필요하였고, 당시 열악한 상황에서 재정을 모으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김창숙은 성균관대학의 설립이 나라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균관은 곧 우리나라의 유학을 높이 장려하던 곳이다. 유교가 쇠퇴하면 국가도 따라서 망하고 나라가 망하면 국학도 역시 망한다. 지금 학생 몇몇 사람이 강개하여 유학을 부흥할 뜻이 있어 명륜전문학원을 개인적으로 세웠으나 재정이 궁핍하여 유지할 방법이 없어서 길가에서 호소하다가 장차 해산하게 되었으니 어찌 우리 유교인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진실로 건국의 대업에 헌신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우리 유학문화의 확장에서 시작할 것이다. 진실로 우리 유학문화를 확장하고자 하면 마땅히 성균관대학의 확립으로써 급무를 삼을 것이다. 진실로 성균관대학을 창립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우리 전국 유교인의 힘을 합함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다. 장차 전국 유교인이 합치느냐 못하느냐는 성균관대학이 성립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있고 장차 성균관대학이 설립되느냐 못하느냐는 건국 대업이 늦느냐 빠르냐를 점칠 것이다.『심산유고(心山遺稿)』

 

성균관대학교 심산 김창숙 동상

 

그는 유학의 가치가 나라 운명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기에 교육의 장을 마련할 수 있는 학교 설립의 일은 무엇보다도 절실하고 급박한 일이었다. 우선 그는 학교 설립을 위한 재원을 만들기 위해 향교 재산을 추심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잘못된 관리 규정을 철폐하고, 향교 재산을 회수하고자 하였다. 1946년 6월 28일 성균관대학기성회(成均館大學期成會)를 발족하고, 집행위원회를 구성하였고 그해 9월 25일에 성균관대학을 정식으로 인가받게 된다. 물론 교과과정에 유학과 철학을 각 과에서 기본으로 공부하도록 필수 교양과목으로 지정하였다.

교육은 그 시대에 할 수 있는 최고의 애국운동이었다. 김창숙은 “오늘날 우리의 유교정신은 옛 봉건시대의 진부한 사상을 그대로 답습하려는 것이 아니오, 또한 외래사상이나 문화를 무조건 배척하거나 숭배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직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가장 좋은 점만을 절충하여 우리의 고유한 유교정신에 귀납 함양시키려는 바이다.”라고하여 구태의연하고 답답한 교육이 아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현실적인 교육을 추구하려는 명백한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말뜻을 가만히 곱씹어 보노라면, 그의 정신 바탕이 유교였기 때문에 그것을 천명하는 것이지, 조국과 민족에게 그것조차 걸림돌이 된다면 과감히 버릴 수 있는 그런 과단성 있는 인물임이 틀림없다. 즉, 그가 원하는 것은 건강한 나라 땅에 건강한 정신의 우리사람들이 사는 것이지, 그 우위의 어떤 절대적인 것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정문 왼편에서 당당한 그를 만날 수 있다. 하늘을 향해 쭉 펴 올린 오른팔은 우리가 함께 가야할 지향점을 표명하는 듯 힘차고 강렬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듯한 도포자락은 어떠한 불의에도 대항하여 박차 오르는 의지의 기상이다. 그는 그렇게 그 자리를 비가오나 눈이오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한결같은 의지의 사람으로 남았다.

 

여전히 빛나는 백절불굴(百折不屈) 정신,

_심산 김창숙 묘역 (수유리 산 127-4)

 

심산 김창숙의 묘역

 

1955년 무렵부터 독재 권력과 그 주구들에 의해 소위 성균관 및 성균관대학의 분규가 확산되어 심산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1960년 4·19혁명 직후 성균관에서는 심산을 다시 모시려했으나 이미 기력이 쇠퇴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대표에 추대되기도 하였으나 5·16으로 그마저 무산되었다. 성균관대학에서 물러난 심산은 곤궁한 생활 속에 여관과 병원을 전전해야 했다. 심산의 곧음과 청렴한 삶의 태도는 대학을 세우고 학장·총장을 지내고서도 셋집에서 여생을 보내게 만들었다. 세인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안되고 안타까울지언정, 유학의 정신에서 보자면 대의를 이루고 정의를 지표삼다가 빈곤하게 사는 삶은 그저 당연한 일이다. 물론 그리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심산은 1962년 5월 10일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84세를 일기로 서거(逝去)하였다. 투철한 선비정신의 소유자요, 불요불굴(不撓不屈)의 위대한 저항 자세와 과감한 행동주의(行動主義)의 표상이었던 심산이 세상을 떠난다. 5월 18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사회장으로 거행된 장례식 후 서울 수유리 산 127-4 묘지에 안장되었다. 묘역은 고요하고 가끔씩 지나는 새들이 지저귈 뿐이다. 격동의 시대를 살았고 지고지순한 마음으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고, 나아갈 바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고 움직였던 그. 시대의 참 어른이 존재한다는 것은 든든한 마음줄과 같은 것. 그래서 그 어려운 시절을 함께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김창숙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전통적 원칙을 지켜나갈 때 비로소 대의명분이 세워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마음(心)’에 의한 행동주의, 그리고 시대적 의리에 의한 대의명분론.

평생을 백절불굴(百折不屈) 정신으로 살아낸 떳떳한 유림의 표상.

 

심산 김창숙의 생전 모습

 

 

기고자: 김세리(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다산 정약용의 소통과 관련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 분과에서 동학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으며, 다도(茶道)철학과 오감(五感)을 통한 인간미감(人間美感)을 연구 중에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김정철
  10. 현상윤, 최초의 근대적 체제의 조선사상사를 짓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0: 윤태양
  11. 구도와 구세의 길, 운명적 불화 – 한용운 [길 위의 우리 철학] – 11: 송인재
  12. 태백산에서 최후를 맞은 서양철학 1세대, 박치우 [길 위의 우리 철학] – 12: 조배준 
  13. 시대정신을 찾는 여정의 첫 발걸음: 신채호와 서울 [길 위의 우리 철학] – 13: 진보성
  14. 큰 이룸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간 삶의 철학자, 도산 안창호 [길 위의 우리 철학] – 14: 배기호
  15. 밑바닥에서 진리를 찾은 이- 장일순 [길 위의 우리 철학] – 15: 구태환
  16. 서재필과 개화운동, 계몽을 통해 근대를 꿈꾸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6: 박영미
  17. 이항로의 위정척사, 당신들만의 진리 [길 위의 우리 철학] – 17: 구태환
  18. 한국 현대 철학의 주목받지 못한 변방, 함석헌 [길 위의 우리 철학] – 18: 유현상

한국 현대 철학의 주목받지 못한 변방, 함석헌 [길 위의 우리 철학] – 18

유현상

 

둘리네 동네의 어느 골목

가느다란 봄비가 내리는 날 도봉구 쌍문동으로 향했다. 그런데 쌍문역 4번 출구로 나와 조금 걷다보니 이곳이 바로 둘리네 동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갑자기 생각난 것은 아니고 ‘아기공룡 둘리’에 나오는 희동이가 길 안내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 동네는 8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무대이기도 했다. 사실 쌍문동은 지나가기만 했지 돌아다녀 본 것은 처음이다. 둘리를 보니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지만, 한편 생각해보면 개성 없이 확장된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지역을 알릴만한 소재의 빈곤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해서 서운한 감정도 생긴다.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다. 쌍문역에서 800미터 정도 거리에 있다고 희동이가 알려주었다. 그곳은 개성 없이 확장된 서울의 여느 주택가와 다를 바 없는 골목에 자리하고 있었다. 가는 길에는 목적지를 찾느라 주의 깊게 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돌아오는 길에 보니 골목 어귀에 고만고만한 규모의 분식집들이 여러 개 보이는 것이 조금 다른 풍경이었다. 요즘에는 학교 근처에도 문구점이나 분식집이 그저 한두 개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가보다. 그러고 보니 완만한 골목 맨 윗자리에는 유치원부터 초·중·고등학교가 다 몰려 있었다. 정의여중고 입구 교차로에서 정의여중고 방향의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 조금 올라가다 오른쪽 작은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니 목적지가 나타났다.

평안북도 용천이 고향이니 함석헌(1901~1989)의 생가 등을 찾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하니 그의 삶의 흔적은 그가 마지막에 살았던 곳에서나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설령 통일이 된다고 해도 북한 지역에서 그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을 듯도 하다. 다만 그가 다녔던 평양고보 자리나 평안북도 정주에 있던 옛 오산학교 자리나 나중에 확인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그의 마지막 거처는 지금 ‘함석헌 기념관’으로 변경해서 운영되고 있다. 원래 함석헌은 용산 원효로의 있는 작은 집에서 오랫동안 거주하였다. 지금 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집은 차남 함우용 내외의 집이었다. 도봉구는 이곳을 2015년 9월 함석헌 기념관으로 개관하였다. 친지들의 도움으로 6.25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원효로 작은 집이 욕심 없이 소박한 삶을 살았던 함석헌을 보여준다면, 서울의 변두리 끝자락 쌍문동의 집은 강단철학에서 외면받아 온 한국 철학의 변방을 상징한다고 한다면 다소 지나친 생각일까?

 

(사진 1. 함석헌 기념관 )

 

우선 들어간 곳은 맨 아래 층에 위치한 작은 전시실 ‘씨ㅇ·ㄹ 갤러리’였다. 전시 내용은 ‘붓글씨로 만나는 함석헌’ 전이었다. 함석헌이 남긴 글의 내용을 여러 사람이 붓글씨로 표현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함석헌은 워낙 많은 글과 시를 남겨 그의 글귀나 시를 소재로 서예전을 기획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쉬운 발상이라고 생각되었다. 사전에 조사해 본 바에 따르면 ‘씨 갤러리’에서는 다양한 기획의 함석헌 관련 전시를 하는 모양이었다. 뿐만 아니라 주민들을 위해서는 무료 대관도 해준다고 되어 있었다. 왠지 내부 통로를 이용하는 것은 정식 방문을 하는 느낌이 안 들어서일까 위로 향하는 내부 계단이 있었으나 굳이 바깥으로 나가 정문 출입구로 향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작은 마당에 들어서니 기념관 안내판이 있었고 2층 현관 옆에는 함석헌의 묘비가 있었다.

 

(사진2 – 함석헌 묘비, 함석헌 기념관)

 

원래는 경기도 연천에 있던 묘를 2006년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할 때 묘비는 이곳 기념관으로 옮겼다고 안내하고 있다. 2층은 안내 데스크와 전시를 위한 공간이다. 전시공간에 들어서자 맞은 편 벽에 제일 먼저 연보가 펼쳐져 있다. 이어 안쪽으로 들어가니 거실이었을 공간에 육필원고와 함석헌이 발행한 ‘씨의 소리’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더 안 쪽 방은 영상전시실이었는데 이곳에서는 함석헌의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들의 영상 자료를 계속 상영하고 있다. 함석헌이 사용한 방에는 자그마한 앉은뱅이 책상에 성경책이 자리를 하고 있다. 그렇지! 그는 스스로 한국교회의 이단자임을 자처하였지만 평화운동가이자 시인인 함석헌은 무엇보다도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종교사상가였다. 그의 소박한 책상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성경이었다.

 

(사진 3 – 함석헌 서재의 성경책, 함석헌 기념관 )

 

저항과 사상혁명의 길

함석헌의 고향인 평안북도 용천은 일반인들에게는 2004년 용천역 폭발사건으로 더 잘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함석헌이 고향의 참사를 들었더라면 참담한 심정을 금치 못하였으리라. 일본의 패망에 뒤이은 한반도의 해방은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에게 그러하듯 고난의 끝이 아닌 새로운 고난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것은 함석헌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북한 지역에 진주한 소련군은 함석헌에게 반공세력에 대한 정탐 요구를 했다. 이를 거부한 함석헌은 소련군에 의해 두 차례 더 옥고를 치른 후 북한에서의 삶을 뒤로 한 채1947년 3월 가족들을 두고 홀로 월남한다.

소련군의 탄압을 피해 월남했건만 그 이후의 삶 역시 함석헌에게는 녹록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도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가 제 자리를 잡지 못하였으며, 그의 삶 전체는 독재와 타락한 문명에 대한 저항으로 채워지게 된다. 함석헌이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보이기 시작한 계기는 5ㆍ16군사 쿠데타 이후였다. 영국과 미국 등지에서 퀘이커리즘에 대한 연구를 마치고 1963년 독일에 들러 안병무를 만나고 난 후 귀국한 함석헌은 본격적으로 5ㆍ16군사 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의 부당성을 알리는 강연 활동을 한다.

1970년에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독재정권과의 싸움을 계속했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해 박정희정권만이 아니라 비겁과 나약에 빠진 지식인들과 언론을 거침없이 질타했다. 1971년 7월부터 1988년 5월까지는 오랜 동안 노자와 장자에 대한공개 강좌를 열기도 했고, 1973년부터는 여기에 더해 퀘이커리즘과 성경을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어 교육 활동에 함썼다. 비록 기독교적인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었지만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고 개방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었던 함석헌은 1967년에 이르러서야 그 전부터 호의를 갖고 지켜 본 퀘이커교도가 된다. 하지만 퀘이커리즘에 대한 연구는 그 전부터였다. 그가 퀘이커 교도가 된 계기는 한국 기독교 사회에서의 고립되었던 자신의 상황 때문이기도 하고 인류 평화와 사회 정의 실현을 중시하는 퀘이커리즘의 정신 때문이기도 하다.

1970년대의 함석헌의 주요 활동은 반유신 활동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974년 11월에는 김대중, 윤보선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협의화 공동의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76년 3월 1일에는 김대중, 윤보선, 안병무, 이문영, 이태영, 이우정, 서남동, 문익환, 문동환 등과 더불어 박정희의 퇴진을 주장하는 이른바 ‘3ㆍ1 구국선언’ 등에 참여해 또 다시 옥고를 치르게 된다. 박정희 정권과의 투쟁 가운데서도 함석헌은 당시 열악한 노동 환경에 처한 노동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앞장서기도 했다.

군사독재와의 싸움은 박정희가 죽고 난 후에 5공화국에서도 이어진다. 비록 전두환정권에 의해 씨알의 소리와 같은 비판적 잡지와 언론이 폐간되기도 했으나 강연 등의 활동은 계속 이어갔다. 또한 고령의 나이에 그의 활동이 그 이전과 같을 수는 없었지만 권위주의 독재 정권하에서 수많은 민주 인사들에게 그는 정신적인 버팀목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함석헌의 저항의 정신은 종교를 절대화하려는 태도에도 항거한다. 그에 따르면 종교도 절대화하는 순간 거짓이 돼버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자꾸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이 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적 삶은 끊임없이 절대적 진리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데, 상대적 시간에 머물면서 현재를 절대화하는 것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이다. 현재를 절대화하는 것은 ‘뜻’에 근접할 수 없다. 그러한 삶은 생의 역동성을 유지할 수 없다. 진리를 향해가는 박진성이 결여된 종교에 불과한 것이다. 종교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은 ‘나’라는 과거의 자아가 마치 본래적 자기라는 것을 규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 생성하면서 참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 자기가 죽어야 한다는 것은 참나를 찾아가는 길인 것이다.

항거는 곧 나는 스스로 나이고자 하는 데서 나온다. 사람은 인격이므로 무엇을 다 한대도 인격의 자주성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인격의 자주성은 자연의 경로라 할 수 있다. 자연의 경로는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또한 씨앗이 썩어 새싹이 움트기 위해서는 자신을 덮고 있는 흙과 돌에 항거하고, 병아리는 자신의 둘러싼 껍질에 저항해야만 한다.

 

(사진 4 – 1965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 때의 함석헌, 함석헌 기념관)

 

함석헌은 「씨ㅇ·ㄹ혁명의 꿈」(1980)에서 자신의 철학을 ‘씨ㅇ·ㄹ철학’으로 소개했다. 씨ㅇ·ㄹ이라는 말은 알맹이나 핵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근원이나 본질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과 비판은 유신시대에로까지 이어지는데, 그의 비판의 칼날은 유신을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5·16 군사쿠데타가 있기 이전에 발생한 4·19혁명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4·19실패의 원인에 대해 학생이 시작했지만 민중의 혁명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그 실패는 결국 민중의 죄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여기서 말하는 민중 즉 사람이란, 함석헌 자신의 표현대로 하면 ‘맨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학생이나 군인이나 다 맨 사람 위에 덧 입혀진 옷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사람 아닌 학생, 군인, 정치인 등등의 정체성은 어떤 특정한 입장에 있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맨 사람이 아니고 자신이 입은 정체성으로 만나면 제도에 그 자리에 붙게 된다고도 한다. 함석헌은 특권 없는 제도는 없으며, 혁명은 제도를 없애는 것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군인이 일으킨 혁명, 학생이 일으키는 혁명은 참 혁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이 함석헌의 생각이었다.

맨 사람이 아닌 특정한 입장을 가진 사람에 의한 혁명은 순전한 자발성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제도화된 입장에 따른 이해관계는 행동을 강제하는 경향을 지니게 마련이다. 비단 외적인 강제에 의한 행동만이 아니라 내적인 강제 역시 자발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법이다. 우리가 노예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제도나 법률에 의해 타인의 강제에 따른 노예가 된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이해관계나 입장에 의해서만 행동한다면 그것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내 삶에 대해서 내가 주체로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함석헌이 그래서 참다운 혁명은 사상의 혁명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민중이 자각할 수 있도록 하는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민중 스스로 자신이 삶의 주체로 서야 한다는 것이 사상 혁명의 내용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함석헌의 실천은 씨의 소리발간으로 구체화 된다. 씨의 소리발간은 독재 정권에 대한 함석헌의 정치적 저항이자 언론운동이기도 했다. 즉 그것은 독재에 대한 투쟁이었고 민중의 사상 혁명을 이끌기 위한 선동이었다. 함석헌은 자신이 말하는 민중이 주체가 되는 삶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대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러한 변화의 의미와 성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대 변화란 그래서 하는 생각이다. 변(變)도 화(化)도 다 달라진다는 뜻인데 변은 달리짐 중에서도 갑자기 달라짐을 가리키는 말이다. 변자(變字)밑에 있는 ‘文’이 그것을 표시한다. 그것은 작대기를 들고 두들기는 것을 그린 것이다. 즉 힘을 넣어서 급히 달라지게 만든다는 뜻이다. 거기 더해 화(化)는 질적으로 아주 전의 모습이 없이 달라짐,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화학적인 변화를 뜻한다. 화의 한편인 ‘인’은 사람이라는 인(人)자인데. 이쪽의 ‘匕’는 인을 뒤집어 놓아서 죽은 것을 표시하는 자다. 죽으면 아주 달라진다. 우리말로 되졌다는 말이다.”

 

사실상 함석헌이 말하는 변화란 현재의 삶의 방식과 의식에 대한 근본적인 전복, 즉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혁명은 씨의 스스로함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생명의 원리를 스스로 함에 있다고 본 함석헌의 사유는 다분히 노장의 세계관을 연상시킨다. 노장 사상은 인간의 도덕적 질서를 강조하는 유가 사상과는 달리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추구하며 인위적인 삶보다는 자연에 따르는 삶을 강조한다. 여기서 자연은 저절로 그러한 세계이자 질서를 의미하는 것이다. 오산학교 시절부터 이어져 온 노장 사상에 대한 관심은 함석헌의 사상이 씨에로 귀결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함석헌은 도덕경에서 인위적이지 않은 도의 길을 강조하는 데에 주목하였다. 또한 이상적인 통치자란 씨들이 생활에 최소한의 간섭만 하기 때문에 씨들은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통치자라고 보았다. 그러는 가운데 씨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함’의 방식으로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함’은 자연이고 함석헌에게 자연은 필연이었다. 따라서 민중들인 씨들에 위한 일대 변화 역시 필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연은 자유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고, 자유는 스스로(自)가 스스로의 까닭(由)인 것이다. 따라서 함석헌이 말하는 사상 혁명이란 스스로(自)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씨ㅇ·ㄹ이 스스로 함에 의해 실천할 수 있는 까닭은 근본적으로 씨은 생명의 자발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자발성이라 함은 생명의 원동력을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그 자체로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자발성은 외부의 강제를 배척하는 원리이다. 오랫동안 백성, 신민, 국민 등으로 불린 민(民)은 자발성의 주체가 아닌 다스림의 대상이었다면 씨은 제도와 문명에 귀속된 것이 아닌 자유롭고 자발적인 삶의 주체를 은유하는 것이다.


(사진 5- 씨ᄋᆞᆯ의 소리, 함석헌 기념관)

 

함석헌이 주장하는 저항의 또 다른 의미는 선악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도덕적 투쟁이다. 그는 인격이란 자유하는 것이라고 보고 자아의식을 가지고 자주하는 의지로써, 내 뜻대로 내 마음껏 나를 발전시켜 완전에까지 이르자는 것이 인격이다. 이러한 자유에는 한이 없다는 것이 함석헌의 생각이다. 선악의 문제가 도덕적 개념이기는 하지만 함석헌에게 그것은 보통의 윤리의 의미가 아니다. 생명의 선악이요 존재의 선악이다. 함석헌은 선을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이라고 보고, 악은 그 자유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저항의 철학」 이라는 글에서 함석헌은 “인격은 선악의 두 언덕을 치며 물살을 일으켜 흘러나가는 정신의 흐름이다. 물이 언덕은 아니요, 인격이 선악도 아니다. 그러나 흐름은 두 언덕을 쳐서만 있는 것이요, 인격의 발전은 선악의 싸움을 해서만 있다. 선이 무엇인가?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이요. 악이 무엇인가? 그 자유를 방해하는 것밖에 다른 것 아니다. 사람은 악과 맞서고, 뻗대고, 걸러내고, 밀고 나가서만 사람이다.” 라고 하였다. 따라서 함석헌의 자유는 생명의 자연스러운 경로를 방해하는 일체의 억압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의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더욱 강력한 해방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함석헌의 사유는 우리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참고할만한 중요한 인문적 성찰의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그의 사유 안에는 모든 제도적 억압에 대한 저항만이 아니라 문화적인 억압에 대한 저항 의식이 담겨 있다.

 

(사진 6 – 비폭력저항주의자 함석헌, 함석헌 기념관)

 

4.19 묘역에서

함석헌 기념관을 둘러보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주민자치공간으로 꾸며진 곳을 빼고는 1시간 남짓 걸리는 시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인근에 있는 수유리 국립 4.19민주 묘역에 들러 보았다. 문득 함석헌의 묘지를 대전 현충원으로 옮긴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함석헌이 마지막으로 머물러 기념관이 된 곳 인근에 자리한 4.19묘역이 더 적절했을 성 싶기 때문이다. 대전에는 서훈 취소가 되어 마땅한 인사들의 무덤도 즐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함석헌은 과연 그런 자들과 머물기를 바랬을까?

평일이고 비가 조금씩 와서 그런지 참배객 등의 방문자들은 많지 않았다. 그 나마 몇몇 사람들은 그 옷차림새로 보아 인근 지역 주민들로 보였다. 4.19 기념탑에서 개인적인 간단한 참배를 하고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4.19 당시의 각종 자료와 화보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 유독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초등학생들의 시위참가를 기록한 사진이다. 함석헌은 4.19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맨 사람의 혁명이 아니었고 학생의 옷을 입은 혁명이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 새삼 떠올랐다. 당시 초등학생들의 시위사진을 보면 함석헌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게 된다. 말이야 초등학생들이지 그들이 무슨 학생의 옷을 입었으며 왜 맨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인가? 4.19혁명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함석헌의 지적은 4.19를 주도한 학생들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미완의 혁명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 것은 아니었을까?

 

(사진 7 – 4.19에 참가한 초등학생의 시위, 4.19기념관)

 

 

기고자: 유현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김정철
  10. 현상윤, 최초의 근대적 체제의 조선사상사를 짓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0: 윤태양
  11. 구도와 구세의 길, 운명적 불화 – 한용운 [길 위의 우리 철학] – 11: 송인재
  12. 태백산에서 최후를 맞은 서양철학 1세대, 박치우 [길 위의 우리 철학] – 12: 조배준 
  13. 시대정신을 찾는 여정의 첫 발걸음: 신채호와 서울 [길 위의 우리 철학] – 13: 진보성
  14. 큰 이룸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간 삶의 철학자, 도산 안창호 [길 위의 우리 철학] – 14: 배기호
  15. 밑바닥에서 진리를 찾은 이- 장일순 [길 위의 우리 철학] – 15: 구태환
  16. 서재필과 개화운동, 계몽을 통해 근대를 꿈꾸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6: 박영미
  17. 이항로의 위정척사, 당신들만의 진리 [길 위의 우리 철학] – 17: 구태환

에이드리언 리치(下)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2.  <피, 빵, 시>, 에이드리언 리치(下)

“위치의 정치학을 향하여”

 

정유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미국 산타 크루즈(Santa Cruz) 길가에 그려져 있는 에이드리언 리치 초상화)

 

  • 니카라과 혁명과 흑인 페미니즘

1980년대 들어서면서 미국의 페미니즘은 다음과 같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다. 첫째, 무엇보다도 미국의 페미니즘 운동은 로널드 레이건의 집권 이후 1980년대 내내 언론·종교·대중문화·정치 등의 영역에서 페미니즘 운동에 반발하는 백래시(backlash)에 시달렸고 낙태를 둘러싼 이슈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이 가장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둘째, 냉전 체제 속에서 국제적인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미국 정부의 타국에 대한 내정 간섭은 국제적인 정세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미국 여성들과 남미 여성들의 국제적인 연대 또한 위태로워졌다. 특히 1979년 7월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 Frente Sandinista de Liberacion Nacional)은 혁명을 통해 니카라과의 소모사(Somoza) 독재정권을 타도했지만, 니카라과의 좌경화를 우려하며 남미를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기를 원하였던 미국 정부는 니카라과 내 반혁명세력인 콘트라(Contra)를 지원하였으며 그 결과 1980년대 내내 니카라과는 내전에 시달려야 했다. 무엇보다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에서 니카라과 여성들은 무장봉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독재정권뿐만이 아니라 가부장제로부터 해방된 사회를 건설하는 기획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반혁명세력과 이를 지원하는 미국정부에 대항할 수 있는 페미니스트들 간의 국제적인 연대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였으나 80년대 페미니즘의 백래시에 시달리던 상황에서 미국의 페미니즘은 니카라과 혁명이라는 이슈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했다.

셋째, 미국의 페미니즘은 내부적으로 여러 분파들로 나뉘었고, 무엇보다도 제2물결 여성운동에 참여하였던 흑인여성들이 흑인운동 내에서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운동 내에서도 흑인 여성들은 주변화되어 있다는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흑인여성들에게 젠더와 인종 문제는 중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에 단지 백인 중산층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흑인 여성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의 시간 속에서 1984년 에이드리언 리치의 「위치의 정치학을 향하여(Notes toward a Politics of Location)」가 발표되었다. 이 글에서 리치는 페미니스트가 말하는 ‘우리’가 누군지, 그리고 ‘우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여성들이 단일한 정체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질문함으로써 여성운동의 위기에 응답하고자 하였다.

(니카라과 혁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여성들)

 

  • 타자와 몸의 위치성

미국이 니카라과 내전에 깊이 개입되어 있는 상황에서 에이드리언 리치는 단지 “여성으로서 나에게 국가는 없다”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을 피력했다. 오히려 리치는 “여성으로서 나에게는 국가가 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미국의 국가주의에 동조하고자 함이 아니다. 오히려 지도 위에 그려진 미국이라는 공간에서 태어나고 자라나며 그 속에서 정체성을 만들어 나간 자신에게도 미국이 관여하고 있는 니카라과 내전과 그 내전이 일으키는 비참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리치에게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는 것은 곧 타자에 대한 자신의 책임성을 인식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때의 위치는 단지 물리적인 위치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위치는 언제나 역사적으로 구성된 공간이었으며, 위치의 역사에는 타자들의 역사도 포함되어 있다.

여성으로서 나에게는 국가가 있다. 즉 여성으로서 나는 단지 정부를 비난하거나, 혹은 “여성인 나의 조국은 전 세계다”라고 3번 말한다고 해서 국가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민족적 충성심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리고 국민국가가 지금으로서는 오히려 다국적 기업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얻는데 이용하는 구실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지도 위의 한 장소가 어떻게 또한 여성으로서, 유대인으로서, 레즈비언으로서, 페미니스트로서 내가 만들었고 또 만들려고 애쓰고 있는 역사의 한 장소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나는 흑인 미국 시민들의 글에서, 그들의 행동, 연설, 설교들에서 내가 그들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있는 한 위치의 지점인 나의 백인성이라는 의미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또한 오늘날의 쿠바 여성들이 쓴 시를 읽으면서부터 누가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나의 시각 및 생각의 방식을 형성했던 하나의 위치, 또한 내가 책임질 수 있는 하나의 위치로서 북아메리카인이라는 의미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나는 작고 가난한 나라이자 빈곤을 뿌리뽑기 위해 4년을 바친 사회인 니카라과를 여행하고 있었다. 니카라과와 온두라스의 경계선이 되는 언덕 아래에서 나는 등 뒤로 북아메리카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무게, 미국의 군사력, 미국의 엄청난 화폐 전횡, 미국의 매스미디어 등을 육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즉 내가 반체제 인사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권력의 부츠를 한껏 치켜올린 미국인의 한 성원으로서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느낄 수 있었으며, 우리가 남아메리카 전역에 드리운 차가운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다.

지도 위에서 내 몸이 놓인 위치를 인식하는 것은 곧 몸 자체에 대한 질문, 즉 내 몸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 몸은 어디에 있으며, 내 몸은 무엇으로 보이는가와 같은 질문을 요구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들여다보는 순간 몸은 단일하게 구성되어 있지 않으며 특이하고 다양한 것들의 집합체임을 발견할 수 있다. 몸에는 변형되고 변색되고 손상되고 손실된 부분, 그리고 쾌락을 느끼게 하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또한 몸의 피부색, 임신의 흔적 여부, 중산층으로 치과의 진료를 받은 치아의 흔적들은 내 몸이 특정한 역사의 지형을 지나왔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지형은 단일하지 않다. 여성으로서뿐만 아니라 백인으로서, 유대인으로서, 레즈비언으로서 다양한 정체성들이 혼합되어 있는 흔적들이 몸에 새겨져 있다. 이처럼 몸을 통한 사유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 단지 성별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인종, 계급, 그리고 섹슈얼리티의 관계 안에서 복합적으로 구성되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끔 한다.

위치의 정치. 나의 몸에서 시작한다 하더라도, 나는 처음부터 그 몸이 하나의 정체성 그 이상을 갖는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내가 산부인과 병원에서 세계로 옮겨질 때, 나는 여자로 간주되고 여자로 취급받지만, 또한 백인으로 간주되고 백인으로 취급받는다. 그 사람이 흑인이든 백인이든 모두가 나를 그렇게 취급한다. 한 명의 흑인 아이가 인종과 성별에 의해 위치지어지는 것만큼이나 분명한 것은 내가 인종과 성별에 의해 위치지어진다는 것이다. 비록 백인 정체성이 지닌 의미가 백인은 우주의 중심이라는 가정에 의해 신비화되었을지라도.

(여성운동에 참여하는 흑인여성들)

 

  • 정체성에 대한 인식에서 차이에 대한 인식으로

이 글에서 에이드리언 리치는 더이상 여성이라는 단일한 정체성에 대한 믿음이 지속되기 어려운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여성들의 공통성에 대해 얘기할 수 있었으며, 전세계의 모든 여성들의 고양된 의식과 함께 해방된 세상을 창조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시기에 에이드리언 리치는 더 이상 ‘우리’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오히려 미국의 페미니즘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우리’라고 말하는 경향은 미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자의 경험을 삭제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타자를 대신하여 말할 수 있다는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에이드리언 리치는 자신의 몸에서, 지도 위의 위치에서,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에서 많은 차이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여성운동을 지탱해온 ‘우리’, 그리고 단일한 정체성으로서의 ‘여성’은 더 이상 존재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오히려 타자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또 다른 기제임을 확인한다. 오히려 차이들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타자에 대한 인식 속에서 우리 또한 특정한 위치 속에서는 억압 기제의 일부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갖는 것을 에이드리언 리치는 페미니즘 위기의 시기 속에서 새로이 발견한 페미니즘의 방향으로 이해했다. 이런 점에서 에드리언 리치의 「위치의 정치학을 향하여」는 제2물결 페미니즘 이후를 고민하는 페미니스트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으며, 주디스 버틀러, 찬드라 모한티, 로지 브라이도티 등 많은 현대의 페미니스트 사상 속에 에이드리언 리치의 언어와 고민들이 스며들게 되었다. 그녀에게 ‘우리’를 상실하는 것, 더이상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공통되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신념과 희망의 상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우리’의 상실을 “계속 나아가기 위한 투쟁으로서, 그리고 책임을 향한 투쟁”의 토대로 만들고자 하였다. 페미니즘이 단일한 ‘우리’의 정체성으로 확립될 수 없으며, 타자에 대한 책임을 수반해야 한다는 그녀의 생각은 페미니즘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그녀의 생각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증명되고 있다.

 

  • 두 편에 걸친 에이드리언 리치의 글 어떠셨나요?
  • 다음으로는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가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