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격차에 관한 단상(자본론 에세이3, 「2장: 교환과정」) [내가 읽는 『자본론』]

임금 격차에 관한 단상

 

김보경(경희대 사회학과)

 

임금격차는 왜 존재할까? 나는 고등학생 때 이것이 늘 궁금했다. 우리는 자라면서 대기업 회장이 동네 미용사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도록 교육받았다. 그래서 학생들의 장래 희망은 언제나 CEO, 의사 또는 교수가 미용사보다 많았다. 하지만 대기업 회장이 얼마나 ‘멋진’ 일을 하기에 우리 동네 미용사 언니보다 몇백억 배의 연봉을 받고 대학교수는 왜 비정규직 강사보다 아홉 배가량 더 많은 돈을 버는 걸까?

나는 머리카락이 반곱슬이라 1년에 두 번은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펴줘야 하는데, 머리카락이 반곱슬이라는 것은, 비가 올 때 「해리 포터」 속 ‘해그리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잘 빗기지도 않고, 제멋대로 엉켜서 머리카락이 자주 빠지기도 한다. 머리를 펴는 비용은 미용실에 따라 제각각이다. 머리 길이에 따라 10만 원 안팎이다. 반곱슬이 아닌 사람들은 이 가격을 두고 겨우 미용실 가는데 10만 원이나 쓰냐며 깜짝 놀란다. 그러면 나는 새로 한 머리 때문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죄인이 된 것처럼 조금 부끄러워진다. 하지만 지난달 다시 한번 미용실을 찾으면서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었다. 미용실이 나의 사치일지는 몰라도, 사람들이 내가 발견한 것에 대해 들으면 ‘겨우’ 미용실에 큰돈을 썼다고 뭐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림1. 해그리드. 출처: https://thewiki.kr/w/%EB%A3%A8%EB%B9%84%EC%9A%B0%EC%8A%A4%20%ED%95%B4%EA%B 7%B8%EB%A6%AC%EB%93%9C

 

먼저,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머리를 펴는 작업이 얼마나 복잡하고 힘든 작업인지, 그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해야 할 것 같다.

 

1) 머리를 감기고 말린다.

2) 약품을 발라 모발을 연화(軟化)하는 작업을 한다.

3) 다시 머리를 감기고 말린다.

4) 매직기로 머리를 한 가닥 한 가닥씩 붙잡고 쫙 펴준다.

(이 단계가 제일 오래 걸리고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단계이다. 머리카락이나 두피를 태우지

않으면서도 곱슬기가 남아 있지 않도록 펴줘야 하기 때문이다.)

5) 머리가 펴진 상태가 고정될 수 있도록 과산화수소수를 머리에 발라 중화한다.

6) 또다시 머리를 감기고 말린다.

 

인터넷에서는 15단계로 설명하고 있지만1, 여기서는 분량상 생략한다. 총 3시간이 넘게 걸리는 과정이다. 세 시간 동안 미용사가 내 머리를 펴는 손짓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펴보면서 나는 일종의 경이로움을 느꼈는데, 바로 이것이 진정 살아있는 노동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미용사의 손이 가위질, 빗질, 다림질에 분주하게 움직였고 내 머리카락은 그런 미용사의 손안에서 계속 변화했다. 물론 우리는 날마다 모든 곳에서 타인의 노동을 경험하고 또 직접 노동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생생한 노동으로 와닿은 것은 어쩐 일에서인지 그때가 처음이었다. 중간단발인 나는 7만 9천 원을 지불했다. 아깝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그 가치만큼의 살아있는 노동을 직접 내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임금은 노동의 가격이다. 자본주의 사회로 진입하면서 인간은 자신의 노동으로 먹고사는 게 아니라 자신의 노동을 상품으로 삼아 타인에게 판매함으로써 먹고살게 되었다. 이렇게 노동자는 상품소유자가 되고, 고용주는 노동의 구매자가 되었다.

문제는 이거다: 어떤 인간의 노동이 다른 인간의 노동보다 몇억 배의 가치를 가지는 게 합리적일까? 같은 종류의 노동이면 이를 판단하는 게 조금은 쉬울 것이다. 예를 들어 곰돌이 눈에 단추를 끼우는 일에서 하루에 100개의 단추를 끼운 사람이 70개만 끼운 사람보다 임금을 더 많이 받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정규직 철도 노동자의 임금과 대기업 회장의 임금 격차는 합리적인가?

자본론 제2장의 핵심은 화폐(어떤 상품의 가격)가 두 상품 사이를 이어줄 뿐, 상품의 객관적인 가치를 반영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화폐는 두 상품이 교환되기 위해 복잡한 관계 도식을 깔끔하게 정리해주는 역할만 하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노동 그 자체는 우리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 우리의 노동이 다른 누군가에게 판매되어 화폐가 수중에 들어와야 비로소 우리의 노동은 제 역할을 했다고 본다. 예컨대 누군가가 신발공장에서 노동한다면, 그것은 신발을 얻기 위해서가 아닌 신발을 만들어 번 돈으로 쌀을 사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노동의 목적은 노동의 산물인 신발을 다른 상품인 쌀과 교환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여기서 생길 수 있는 문제는 쌀을 파는 사람에게는 신발이 필요 없을 수도 있다는 거다. 그래서 화폐가 등장하게 되었다. 화폐는 서로 다른 노동의 가치를 통일된 단위로 치환시킨다. 쌀을 파는 사람이 내가 만든 신발을 원하지 않아도, 다른 누군가에게 내 신발을 판 화폐로 쌀을 살 수 있다. 그래서 사실 화폐는 우리의 생활을 아주 편리하게 해준 셈인데, 애초에 질적으로 서로 다른 노동의 가치가 단순화되면서 그 사이에는 물신이 끼어들 자리도 생겨버렸다.

그림 2. 1923년, 지폐에 풀을 발라 벽지로 이용하는 남성. 출처: http://historicphotographs.blogspot.com/2013/04/using-banknotes-as-wallpaper-during.html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감자 하나의 가격은 500억 마르크, 빵은 한 조각에 800억 마르크였다고 한다. 당시 벽지 가격도 너무 올라서 사람들이 벽지 대신 지폐를 벽에 발라야 할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얼토당토않은 가격이다. 이전에는 감자 하나에 1마르크(현재 약 0.5유로에 해당하는 가격)도 안 했을 텐데 무려 500억 마르크라니.

이렇게 특정 상품의 가격은 그 상품이 놓인 경제 관계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 변화할 수 있다. 화폐가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증거다. 화폐 형태로 임금을 받는 살아있는 노동도 그래서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거나 지나치게 과평가되는 일이 발생한다. 임금에는 살아있는 노동의 가치만이 아닌 각종 사회적 믿음과 제도들에 대한 환상들도 은근슬쩍 개입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 그리고 이들 임금의 차이는 실질적으로 살아있는 노동의 차이는 아니다.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 이유는,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가치가 낮은 노동을 하거나, 더 빈약한 비중의 살아있는 노동을 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나누면서 비정규직 안에 포함된 노동이 언제라도 대체될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체 가능성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은 더 낮은 가치의 노동으로 취급되어 임금을 최소한으로 받는 것이 정당화된다. 사회에서 사람들 간 경쟁을 존속시키고 값싼 노동력을 얻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다. 같은 종류의 노동을 하는 정교수와 시간강사의 임금 격차가 심한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샤넬 가방이 홍대 수제 가방 장인이 만든 가방과 다른 점은 브랜드의 여부뿐이다. 그리고 앞선 글에서 이미 우리는 그러한 명품이 환상임을 다뤘다. 사회가 특정 개인에게 주는 타이틀, 그리고 그로 인해 마치 엄청난 가치가 그 사람에게 부여되는 것과 같은 느낌도 역시 모두 환상이다.

갑질의 기원도 바로 여기에 있는데, 최근에 있었던 경비원 폭행 사건이나 조금 더 오래된 ‘땅콩회항’ 사건을 통해, 사회가 붙여준 타이틀(지위)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착각을 심어주는지 확인할 수 있다.

갑과 을은 어떤 사회에서나 존재해 왔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갑과 을은 지위와 임금의 차이로 결정된다. 왕권 시대에 왕들은 신의 은총을 받아 고귀한 인간이라고 스스로 박박 우길 수라도 있었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갑’들은 자신들의 특별함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이들은 다른 노동자에 비해 눈에 띄게 많은 살아있는 노동을 하는 것도 아니며, 신의 은총도 받지 않았고 마법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갑에게 있는 거라곤 ‘갑’이라는 이름뿐이다. 앞서 자주 이야기했듯, 다양한 직업으로 나타나는 갑이라는 타이틀은 살아있는 노동 위에 씌워진 거품일 뿐이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줄일 수 있겠다. ‘갑의 지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갑의 노동이 아닌 사회시스템이다.’

백번 양보해서 갑이 을보다 더 많은 노동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갑이 을보다 더 나은 존재라는 근거나, 몇억 배나 더 되는 임금을 받을 근거는 없다. 하지만 갑은 자신이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을 당연하다고 믿고, 을을 부리길 좋아한다.

나는 모든 노동이 신성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노동의 착취를 정당화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노동이 우리 삶의 큰 부분이며 우리가 타인의 노동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임금노동이 공동체를 개개인으로 쪼개놓고 경쟁하도록 부추기긴 했지만, 여전히 사회를 하나의 공동체로 붙들어주는 것이 나와 타인의 노동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노동이 다른 이의 노동보다 훨씬 더 특별하거나 가치가 떨어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갑과 을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마르크스 역시 내 생각에 동의하리라 생각한다. 생존을 위한 노동이 도리어 생존을 위협하는 사회상에 비통해했기에, 마르크스는 물신의 허울을 걷어내어 노동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살아있는 노동이 진정 보답받기를 꿈꿨을 것이다.

자본론을 읽고 화폐가 주는 가치가 환상임을 깨달아도 우리는 수많은 ‘신’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에서도 신은 우상의 숭배를 끊임없이 경고하고 백성에게 고난을 주어야만 했다) 임금 격차가 노동의 가치의 차이를 반영한다는 환상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으리라. 자본주의 사회가 유지되는 한 임금 격차는 항상 있을 것이고 갑의 횡포도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회는 지(知)와 행(行)의 간극을 좁히고자 노력한다.

지난여름 독일에 사는 친구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자기 언니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언니가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서 독일에서 변호사 플랫폼에 들어가 일을 하고 있는데, 일의 양도 엄청나게 많고 돈도 어마어마하게 많이 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임금의 50%가 다 세금으로 나간다는 얘기도 함께 알려줬다. 처음에 눈이 동그래져 이야기를 경청하던 아빠와 나의 표정이 ‘50% 세금 대목’에서 조금 김이 새는 것처럼 보였는지, 친구는 세금으로 절반이 빠져나가도 열심히 일한 만큼의 돈은 남아서 괜찮다고, 우리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살아있는 노동’이란 단어를 이 글에서 몇 번이나 언급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만큼 살아있는 노동이 본질로서 임금에 반영되고 나머지 물신은 벗겨내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노동자가 생존을 넘어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만큼의 임금이 보장되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인간답기 위해 노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지난 5월에는 또 다른 친한 친구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친구는 우리가 촛불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혁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 되어 감옥에 수감 되었고 정권이 바뀌었지만, 그러한 움직임이 가능했던 이유는 개개인의 이해관계와 얽힐만한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며 (박근혜를 대신할 보수는 많다) 사회 본질이 전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촛불혁명이란 단어가 왠지 늘 불편했지만, 왜인지는 정확히 모르고 있던 탓에 친구의 말을 듣고 속이 시원했다. 그렇다. 진정한 혁명이란 반드시 본질에 변화를 일으켜야 하는 법이다. 수개월 동안 많은 시민이 광화문 거리로 나온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움직임이 혁명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를 더 깊이 들여다보고 바꿔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교육과 주거의 불평등, 갑질 등 수많은 사회문제는 결국 다 임금 격차라는 문제로 귀결된다. 임금 격차가 완화될 때 비로소 진정한 촛불혁명이 완성될 것이다. 이것이 불가능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1. https://kjsi0203.wordpress.com/2008/07/24/%EB%B3%BC%EB%A5%A8%EB%A7%A4%EC%A7%81-%EC%9D%B4%EB%A1%A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