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철연에서 현재 운영되는 연구분과의 분과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분과 소개나 분과 세미나 결과물, 또는 분과 개인들의 글을 올리는 공간입니다.

존 스튜어트 밀 (下)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존 스튜어트 밀은 여성이 직업을 선택하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즉 ‘공적 영역’ 진출의 자유와 자격을 논한다. 여성이 (사적 영역인) 가정에 머무는 것은 여성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혹은 그것이[여성이 공적 영역에 진출하는 것이] 부정의하기 때문이 아니라, 대다수 남성들이 가정 내에서 여성이 집안일에만 전념하고, 가정 내에서 여성의 복종이 유지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 전체가 아니라 남성의 배타적인 이익을 위해 지속되어 온 관습이다. 그리고 공적 영역에서의 여성의 배제는 여성에 대한 억압일 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해악이다.

인류의 절반이 스스로의 책임 아래 각자가 원하는 대로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평등한 도덕적 권리를 부인하는 것은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또한 여성의 투표 행사 권리는 모두가 마땅히 가져야 할 최소한의 자기보호의 수단을 가진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헌법의 역할은 사람들의 신탁에 있어 필요한 모든 안전장치와 제한으로 선거권을 보호하는 것이며, 법적 보호를 받는 모든 사람은 누가 어떤 법을 만드는지 알고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밀은 여성이 공적 책임을 맡지 못할 이유가 없음을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공직은 ‘자격 있는’ 사람이 맡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여성이든 공개경쟁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그런 일을 할 ‘자격이 있다.’ 그러므로 단지 몇몇 여성이라도 그 자리에 대한 자격이 인정될 경우, 그런 가능성을 막는 것을 어떤 것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또한 밀은 여성의 교육 받을 권리를 주장한다. 그는 남성들 사이에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정신적 차이는 그들의 교육과 상황 차이에 의해 비롯되는 것일 뿐이라는 점에서, 남녀 간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생각 역시도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여성은 남성과 달리 언제나 억압의 상태에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본성이 심각하게 왜곡되고 훼손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여성의 본성을 남성의 본성처럼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도록 놓아둔다면, 그리고 만일 인간 사회의 조건이 남녀에게 공통으로 줄 수 있는 것 외에 어떤 인위적인 성향도 여성에게 가하지 않는다면, 남녀의 성격과 능력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남녀의 차이조차 자연적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후천적인) 상황에 의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또한 밀은 만약 여성이 실제로 열등하다고 하더라도, 약점 있는 남자 또한 많은데, 그들은 [여성과 달리] 적절한 교육을 받을 수 있고 그에 의해 교정될 수 있음을 지적하며, 여성도 남성과 같은 교육을 받아 교정될 수 있다면, 여성 역시 남성이 할 수 있는 어떤 일이라도 완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밀은 여성의 종속의 부당함을 주장하고 여성 해방을 논했던 최초의 남성 철학자이다. 그 자신은 자신의 성별 때문에 종속의 경험이 없음에도, 그토록 여성 해방을 주장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밀은 여성의 종속이 여성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해악을 끼치며, 여성이 자유로워지면 인류 전체는 진보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여성이 자유로워짐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혜택은 당연히 여성의 사적 행복이다. 인간은 타의에 이끌려 사는 것보다 합리적 자유에 따른 삶을 살 때 행복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무제약적인 자유가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의무감에 따라 그리고 자신의 양심과 일치하는 사회적 제약에 따라 스스로의 행동을 규율하는 자유를 일컫는다. 또한 각자의 능력을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대로 발휘하는 것도 행복의 한 원천이다.

나아가 여성이 자유로워진다면 남성의 도덕적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밀이 살았던 당시의 남녀 관계는 오히려 남성들에게 도덕적 해악을 끼친다. 정당한 근거 없는 남성의 여성 지배는 모든 이기적 경향, 자기 숭배, 옳지 못한 자기 선호에 중요한 자양분이 된다. 왜냐하면 실정법이 단지 남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본인보다 우월한 여성들까지도 포함해] 인류 절반보다 우월한 자리에 올라갈 권리가 있음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밀은 이런 믿음이 개인으로서 그리고 사회인으로서 남성의 삶 전체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우려한다. 다른 하나의 성 전체 위에 있다는 느낌과 그들 중 한 여성에 대한 사적이고 개인적인 권위의식이 합쳐지면, 자신의 성취가 아니라 우연적인 이점을 자랑하는 최악의 종류의 ‘자부심’을 느끼게 되고, 이 악덕이 그들과 동등한 다른 남성들과의 관계에서 도전 받아 억제된다면, 그들은 그것을 인내해야 할 의무가 있는 위치의 사람들에게 분풀이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밀은 여성 해방이 사회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 근거로 밀은 그 당시의 도덕과 정치에 있어서 원리를 들어 그의 주장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정의의 원칙의 적용 범주는 행위자가 아니라, 행동만이 존중 받는 것이다. 어떤 신분의 사람인지가 아니라, 무엇을 하는가가, 즉 출생이 아니라, 공적만이 모든 권력과 권위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원칙과 당시의 남녀 관계는 모순적이다. 양립 불가능한 이 두 원칙 중 부정의, 즉 특정 개인이 타인에 대해 지속적인 권위를 지니는 것을 허용하는 것에 봉사하는 원칙을 폐기하지 않는다면, 정의의 원칙을 세우려는 교육과 문명의 모든 노력은 허사일 뿐이다. 여성의 억압, 즉 세계가 소유하고 있는 재능의 반을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심각한 세계의 손실이며, 여성에게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재능의 양을 늘리는 것은 인간사를 위해 유용할 것이다.

 

  • 『여성의 종속』의 이후,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

밀은 자신의 도덕론의 주체와 대상을 명시적으로 여성에게까지 확장할 것을 주장한 최초의 남성 철학자이다. 그는 개인의 자유는 다른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사회 전체의 행복을 늘리기 때문에 이롭다는 공리주의적 관점과 행위자가 아니라 행위만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정의의 원칙을 바탕으로, 여성의 권리 보장과 제도적 차별을 없앨 것을 강조했다.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도’ 같은 인간으로 고려해야 함을 호소한다. 밀 이후에 ‘포스트 페미니즘’ ― 접두사 ‘post’(이후)와 ‘페미니즘’이 결합하여 ‘요즘 시대에 여성차별이 어디 있느냐, 페미니즘은 낡은 유물이다, 페미니즘이 필요한 시대는 이미 끝났다’는 안티 페미니즘적인 맥락에서 사용되는 말 (이와 전혀 다르게, 원래는 포스트 식민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포스트 구조주의 등에 영향을 받은 페미니즘 흐름의 한 경향을 일컫는 말이다) ― 이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여성의 공적 영역에의 진출은 확대되었고, 헌법은 여성의 모든 권리를 보장하며, 적어도 제도상으로 여성이 할 수 없는 일은 이제 없다. 기혼 여성들 또한 이제는 배타적인 자신만의 재산을 가질 권리와 결혼 관계를 그만둘 권리를 가지며, 이혼할 때 아이 양육권은 협상으로 분배된다. 어쩌면 밀이 기대한 ‘차별’ 없는 세상이 도래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82년생 김지영’의 일생을 들여다보면, 밀이 기대한 차별 없는 세상에서 여성의 일생은 그 당시의 여성들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은 김지영 씨가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어디에나 갈 수 있도록, 그녀의 성별이 그것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녀의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정작 뭔가 하려고 하거나, 어디 가려고 할 때, 이제 ‘맘충’이라는 비난, ‘여자 직업으로 선생님만 한 게 있는 줄 알아?’라거나 ‘그냥 얌전히 시집이나 가’라는 말,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회사에서도 부담스러워’ 한다는 소리와 마주친다. 차별의 시대는 이제 혐오의 시대가 되어, 여전히 여성의 억압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처럼 여성 해방에 있어 법 혹은 제도의 역할은 한계가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자유 실현을 위한 기존 제도에의 도전은 다른 방식으로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남성과 똑같은 ‘인간’으로서 여성의 동등한 권리/기회 보장을 넘어서, 페미니스트들은 사소하고 주관적인 경험으로 생각되어 온 여성의 경험에 ‘성희롱/성폭력’ 등으로 명명하여 하나의 사회 문제로 제도 내에 기입했고, 고용이나 채용 등에서 여성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는 ‘적극적 조치’를 제도적으로 실행할 것을 요구했다. 모든 인간을 동등한 주체로 볼 것과 모든 인간의 (표현의) 자유를 강조한 밀이 이러한 도전들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밀이 『여성의 종속』 서두에서 여성 억압을 유지하는 제도의 유일한 근거로 제시한, 여성을 지배하고자 하는 남성의 ‘강렬하고 뿌리 깊은 감정’을 제거하기 위한 시도로서, 그는 이러한 도전들의 유효함을 인정하지 않을까?

 

  • 두 달에 걸쳐 두 편으로 연재된 존 스튜어트 밀에 관한 글 잘 읽으셨나요?
  • 다음 달(6월)에는 미셸 푸코에 관한 글이 연재될 예정입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밑바닥에서 진리를 찾은 이- 장일순 [길 위의 우리 철학] – 15

구태환

 

1. 원주역과 장일순의 얼굴

열차가 정차하는 역에는 그곳을 거치는 사람들만큼 많은 사연이 쌓이게 마련이다. 전국적으로 도로망이 촘촘해진 지금에야 열차보다 편리한 것이 고속·시외버스이지만, 예전에 큰 도시로 가는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은 열차였다. 그리고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열차 시간을 알아보고 좌석까지 예매하지만, 예전에는 열차 시간을 알아보거나 열차표를 예매하기 위해서, 그리고 벗이나 자녀를 배웅하고 맞이하기 위해서 가야 할 곳이 열차역이었다. 이래저래 열차역에는 많은 사람이 모이게 되고, 그 많은 사람들은 대상으로 한 식당, 여인숙 등이 주변을 차지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곳의 상인이나 여객들을 노린 깡패, 소매치기, 사기꾼들도 적지 않았다. 한 마디로 열차역과 그 주변은 온갖 인간 군상의 집결지였다.

 

 

<원주역 전경 (출처: 저자)>

 

 

원주역도 다른 도시의 역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오가고, 상권이 형성되고, 소매치기, 깡패 등이 순박한 시골 사람들을 노리기도 했던 곳이다. 적어도 대학생인 필자가 치악산에 가기 위해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처음으로 원주역에 도착했던 1980년대 후반 당시에는 그랬다. 그 이후 원주를 다녀갈 때에 열차를 이용했던 기억은 별로 없다. 한참 후에 필자는 원주에 있는 대학에 강의를 다니게 되었고, 간혹 원주역에서 열차를 이용하게 되었는데, 역의 승강장에서 무위당(无爲堂) 장일순(張壹淳, 1928~1994)을 만나게 되었다. 한때(2013년~2016년) 원주역의 승강장 벽에 그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장일순 벽화 (출처: 저자)>

 

 

장일순은 자신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원주역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들과 어울렸다고 한다. 그러한 어울림은 많은 일화를 낳았고, 그러한 일화들은 그의 인간에 대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 중 하나가 떠오른다.

 

원주역을 지나던 아주머니 한 사람이 딸의 결혼 비용을 소매치기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황한 아주머니에게 주위 사람들이 이곳에서는 어려운 일을 장일순이라는 사람에게 상의하면 해결되기도 한다고 알려주었고 그녀는 그를 찾아가 하소연한다. 사정을 들은 그는 원주역 주변 일대를 돌면서 그 소매치기를 찾아내고 결국 소매치기한 돈을 받아 아주머니에게 돌려줬다는 일화다. 참 영화 같은 이야기이다. 장일순이 그 동네를 주름잡던 깡패 두목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힘을 쓰는 사람도 아닌 그가 어떻게 소매치기를 설득했을까?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 후 장일순은 그 소매치기를 다시 불러 술 한 잔 대접했다고 한다. 이 이유인 즉 피치 못할 사정으로 당신에게 소매치기한 돈을 돌려받았지만, 결국 내가 당신 영업을 방해한 것이니 미안하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사건은 사람을 대하는 장일순의 태도를 알 드러내준다. 그대가 도둑일지라도 나는 그대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는다는 태도, 그리고 나는 그대를 인간으로, 그리고 소매치기라는 당신의 직업을 생업으로 인정한다는 태도 말이다. 타인 위에 군림하고 가르치려 하지 않는 태도 말이다.

 

 

2. 생애

장일순은 원주에 세거한 집안에 태어나 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원주에서 보냈고, 원주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의 유소년기를 살펴볼 때에 필자의 시선을 끄는 인물이 몇 있는데, 특히 그의 조부와 모친은 예사롭지 않으면서도 예전의 우리 주변에서 간혹 볼 수 있는 현명한 이들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조부 장경호(張慶浩)는 가족들에게 “밥 한 그릇을 우습게 봐서는 아니 되느니! 온 우주가 힘을 합해야 그게 만들어지지 않더냐. 쌀 한 톨이라도 버리는 짓은 큰 죄를 저지르는 일이야.”라고 하면서 땅에 떨어진 한 알의 곡식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 장사를 통해 상당한 부를 축적한 그의 조부가 이처럼 한 알의 곡식도 아끼는 행동은 자린고비의 그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조부는 걸인이 오면 상을 차려 대접하도록 하는 등 결코 자신만의 호의호식을 위해 곡식을 아끼거나 자신보다 가지지 못한 자를 무시한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집에는 수많은 묵객들이 드나들었고, 그의 어머니 역시 시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걸인 상을 차릴 때에도 정성을 다하였고, 소작농에게는 더운밥을 대접하고 자식들에게는 찬밥을 주는 그런 이였다.

 

원주에서 소학교를 마친 장일순은 서울의 배재중학교를 졸업하고 경성공업전문대학(서울대 공대의 전신)에 입학하지만 ‘국립대학 설립안’에 반대하다가 제적당하고 원주로 내려온다. 하지만 주위의 권유로 다시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했지만, 4학년인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학업을 중단하고 원주로 돌아온다. 그후 교육에 뜻을 두어 당시의 성육고등공민학교를 인수하여 1954년 대성중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봉직하는데, 교사 부족 때문에 교사로도 활동한다.

 

그는 1958년과 1960년에 모순된 현실 사회를 바꾸기 위해 국회의원에 입후보하지만, 현실 정치 현실에 대한 지나친 낙관과 정치적 탄압으로 인해 두 번 모두 낙선하고 만다. 그런 그는 1961년 5.16 쿠데타 직후에 평소 주장하던 중립화 평화통일론을 빌미로 체포되어 3년 동안 옥고를 치르게 된다. 외세를 배제하고 남북한 당사자가 만나 평화통일을 협의하자는 주장이 북한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출소 이듬해에 대성학원 이사장에 복귀하여 교육 사업에 몰두하고자 하지만, 박정희 독재정권은 그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사회안전법’ 등으로 그의 모든 활동을 감시하고 방해했으며, 결국 1965년 대성학교 학생들이 굴욕적인 한일외교 반대운동으로 구속되자, 장일순은 학생들의 석방을 조건으로 이사장직을 포기하게 된다.

 

독재정권의 이러한 부당한 탄압 때문에 현재 우리가 장일순의 사상을 파악하는 데 한 가지 애로점이 생기게 된다. 일찌감치 군사독재정권으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지목된 그는 자신의 글로 인해서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피해가 미칠까봐 저어하여 글을 남기지 않은 것이다.

 

이후 그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관심을 집중하여, 망가져가는 농촌과 광산촌을 살리기 위한 신용협동조합 운동에 펼치게 되고, 1971년 이후에는 지학순 주교와 함께 민주화 운동의 조력자로서 역할을 했다. 이러한 민주화 운동의 조력자로의 그의 역할로 인해서 박정희에서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정권 시절의 많은 민주인사들이 정권의 탄압을 피해 원주에 와서 장일순에 몸을 의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의 협동조합운동은 ‘원주소비자협동조합’의 설립으로 드러나며, 특히 현재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한살림 생협’의 창립에 많은 공헌을 했다. 생산자와 소비자를 잇고, 결국 생산자와 소비자, 나아가 땅과 생명을 살리는 운동에서 차지하는 장일순의 역할은 지대했다고 평할 만하다.

 

병든 세상을 고쳐보고자 평생을 노력한 그에게도 못된 병이 찾아왔으니, 1991년 위암이 발병하여 결국 1994년에 그 ‘병을 모시고’ 이 세상을 등졌다.

 

 

3. 걸어다니는 동학

암을 앓으면서 “병을 모시고 간다”던 장일순은 자신의 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자연도, 지구도 암을 앓고 있고, 자연 전체가 암을 앓고 있는데 사람도 자연의 하나인데 사람이라고 왜 암에 안 걸리겠어요. 그러니까 큰 것을 나한테 가르쳐주느라고, 결국은 지금 뭐냐 하면 너 좀 앓아봐라 하고 그러시는 것 같아요.”

 

누군가가 ‘진리는 단순하다’고 했다. 사람들이 ‘진리’라고 이야기하면 대단히 거창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의 삶의 참된 이치가 진리이고, 결국 진리는 우리 삶 속에 녹아있고, 우리는 진리 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모르고서 말이다. 지구의 급격한 환경 변화, 그러한 변화의 급격함에 적응하지 못하는 우리의 몸, 그 결과 드러나는 내 몸의 이상 현상인 병은 서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고, 그것은 참된 이치이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먼저 아는 것은 내 몸이다. 그런데 우리는 가장 가까운 내 몸이 아는 것을 무시하고 다른 고차원적인 것에서 진리를 찾는다. 장일순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것 아니겠는가?

 

사람이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이 병들면 사람도 병들 수밖에 없다는 장일순의 사고는 예전부터 있어왔지만, 가까이에서 그 연원을 찾자면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을 떠올릴 수 있다. 인간과 만물은 모두 한울님을 모신 존재이고 만물과 내 몸에 깃든 한울님은 같은 존재다. 그리고 만물을 아우르는 하늘과 땅은 만물을 낳았으니, 내 부모와 한 몸이다. 따라서 최시형은 나막신을 신은 아이가 뛰어다니는 것을 마뜩치 않게 생각한다. 나막신이 딸각거리며 땅을 울리면 땅에 깃든 한울님, 내 부모가 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울님, 내 부모가 상하면 그 자식인 우리 역시 상하게 된다. 만물과 나는 천지라는 같은 부모의 품에서 생장하는 존재이니, 천지가 병들었는데 내 몸이 병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장일순은 ‘국대안 반대 투쟁’으로 제적당해서 원주로 내려왔을 때 먼 친척형인 오창세를 통해 해월 최시형을 접하여 그의 사상에 심취하게 된다. 상당히 젊은 나이에 접하게 된 것이다. 그후 그의 사상 행적 곳곳에서 최시형의 흔적이 보이는데,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 송골의 최시형이 관군에게 체포된 곳에 기념비를 세우고 직접 글씨를 남긴다.

 

특히 그는 만물이 한울님을 모신 존재라고 한 최시형의 사상에 심취한 것 같다. 사람만이 아니라 곡식 한 알, 돌멩이 하나, 벌레 하나도 한울님이니, 이러한 한울님을 무시하고서 멋대로 개발하는 행위는 한울님을 해치게 되고, 결국 인간 역시 살아갈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한울님을 어떻게 섬겨야 할까?

 

장일순은 ‘알뜰함’을 꼽는다. 수많은 농부의 땀과 하늘과 땅이 일체가 되어 한 사발의 밥이 나오는데, 그 밥을 소중하고 알뜰하게 다뤄야만 남는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한 사발의 밥을 알뜰하게 다뤄서 이웃과 서로 나누는 것이 ‘한살림’ 정신이라고 강조한다. 음식에도 한울님이 있으니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한울님을 영접하는 행위라고 강조한 최시형의 생각을 그러한 한울님이 깃든 음식을 알뜰하게 다뤄 주변 사람과 함께 먹음으로써 모두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데에까지 확장했다고 할 수 있다. 한울님이 깃든 음식을 많다고 해서 허투루 낭비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이러한 생각은 자연을 무한정 착취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고 그것을 인간의 의도에 맞게 개발하고 변형함으로써 더욱 풍요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4. 밑으로 기는 자세

자연을 인간의 이용과 지배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태도에 대한 그의 비판은 타인에게 군림하지 않는 그의 사상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가 제자들에게 항시 했던 말 가운데 하나는 “기어라”이다. 장일순 자신 앞에서 기라는 것이 아니라 남과 맞서서 내가 잘났다고 내가 힘있다고 우기지 말고 남들 밑에 처하라는 말이다. 이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제자 한 사람이 얼큰하게 취한 상태에서 길을 걷다가 장일순을 만났다. 그는 술김에 선생님께 치기를 부려 “선생님은 맨날 저희보고 기어라, 기어라 하시지만 당신께서는 언제나 저희에게 대접만 받지 않습니까”라고 따졌다. 이러한 제자의 치기어린 투정에 대한 장일순의 답변은 그 자리에 납작 엎드리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 제자는 술이 확 깼을 것이다. 그의 말이 알맹이 없이 입으로만 뱉어내는 것이 아님을 드러내는 일화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타인 발밑을 기라는 그의 말은 무슨 의미일까? 많은 이들은 장일순의 이러한 사고의 연원을 『노자』에서 찾으며, 필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의 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무위당’도 노자에서 차용한 것이며, 장일순의 구술을 제자 이현주가 풀어냈다고 하는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라는 책이 있는 것도 주지되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기어라’와 관련되는 노자의 대표적인 언급은 “가장 선한 것은 물과 같다(上善若水)”고 했다. 이러한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스스로의 공을 뽐내지 않는다. 그리고 산에 있는 물은 아래로 흘러 계곡에 모인다. 노자는 이처럼 물이 모이는 계곡의 신은 죽지 않는다고 하면서 계속의 신을 오묘한 암컷의 생식기에 비유하는데, 이러한 암컷의 생식기에서는 만물이 탄생한다. 노자는 이 말을 통해서 남들 위에 군림하려고만 하고 남 밑에서 기고 싶어 하지 않는 세태를 비판했다. 이러한 세태와는 달리 물은 모두가 싫어하는 밑으로 흐르면서도 만물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타인과 다투고 그 위에 군림하고자 하면, 결국 모두가 다칠 뿐이다. 중요한 것은 다툼이 아니고 함께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타인에게 군림하려는 태도는 어디에서 오는가? 장일순은 그 태도가 자신을 내세우는 데 있다고 본다. 그리고 자신을 내세우는 것은 자신을 채우기 때문이라고 한다. 노자의 말처럼 비어있어야만 다른 무엇인가를 채울 수 있다. 즉 다른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를 성장시키는 것이다. 그러할 때 비로소 우주 만물과 그에 속하는 나와 우리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기어라’ 역시 만물과의 함께 삶을 추구하는 고민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5. 그의 자취

모든 사람,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는 몹쓸 병과도 함께 살아가고자 한 장일순의 자취를 파악하는 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그는 의도적으로 글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한 사람의 사상을 파악하기 위해서 반드시 그가 남긴 글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 역사에서 성인으로 숭상되는 공자, 소크라테스, 석가, 예수 가운데 누구도 글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말과 행동은 제자들을 감복시켰고, 그 제자들이 스승의 말과 행동을 글로 남겨서 아직도 우리는 그 성인들의 위대한 사상에 젖어 있는 것이다. 장일순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의 사상 행적은 우선 제자들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의 서화도 우리에게 그의 사상의 단편을 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는 어렸을 적에 할아버지의 묵객 가운에 한 사람인 차강(此江) 박기정(朴基正)에게 서예를 배웠는데, 글을 쓸 수 없는 처지인 그에게 서화는 자신이 생각을 펼치는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사람의 얼굴 모습을 한 ‘의인란(擬人蘭)’은 일품이라 할 것이다.

 

<장일순 서화 (출처: 저자)>

 

 

윗 사진의 그림은 장일순의 대성학교 제자와 그의 부인이 운영하는 식당에 걸려 있는 것이다. 단아한 얼굴 모습을 한 꽃과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곧게 선 꽃대, 그리고 휘어져있지만 강한 생명력을 함유한 듯한 두 이파리는 그 그림의 주인공인 제자의 부인과 꼭 닮아 있다. 이 그림에는 삶의 역경을 견뎌내면서 자신의 길을 꿋꿋이 가는 사람에 대한 장일순의 무한한 애정이 담겨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흔적은 그의 활동 공간에서 잘 드러난다.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생명체를 살리고자 설립하거나 설립에 도움을 준 협동조합은 이미 전국적인 단위로 확산되었고, 많은 이들이 협동조합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원주 중앙동에 위치한 ‘밝음 신협’은 그 가운데 하나로서 그곳에는 아담한 규모이긴 하지만 ‘무위당 장일순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장일순의 고거 (출처: 저자)>

 

 

그리고 그의 흔적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곳이 1955년에 장일순이 스스로 지었다는 봉산동의 집이다.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을 이곳을 여전히 그의 부인이 지키고 있다. 안뜰에 잡초가 뒤섞인 온갖 생명체를 안고 소박하게 자리하고 있는 이 집은 자연을 인간을 위한 도구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같은 생명을 가진 존재로 보는, 그래서 그 위에 군림하지 않는 장일순의 모습이 아닐까. 그는 봉산동 집을 나서 원주천 제방을 따라 원주역까지 걸어다니곤 했다고 한다.

 

<무위당길 표지판 (출처: 저자)>

 

 

이 봉산동 집 부근의 작은 길에는 ‘무위당길’이라는 명칭이 붙여져 있다. 혹자는 이처럼 작고 초라한 길에 장일순처럼 큰 스승의 이름이 부여된 것이 불만스러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자 한 그에게 큰 길을 선사하는 것은 오히려 모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중요한 것은 이 작은 길에서라도 그의 삶과 그의 정신을 기억하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것 아닐까 한다.

 

 

기고자: 구태환(한국철학사상연구회)

최한기의 인체론과 관련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 분과에서 동학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으며, 배타적 소유권에서 벗어난 ‘인권’의 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김정철
  10. 현상윤, 최초의 근대적 체제의 조선사상사를 짓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0: 윤태양
  11. 구도와 구세의 길, 운명적 불화 – 한용운 [길 위의 우리 철학] – 11: 송인재
  12. 태백산에서 최후를 맞은 서양철학 1세대, 박치우 [길 위의 우리 철학] – 12: 조배준 
  13. 시대정신을 찾는 여정의 첫 발걸음: 신채호와 서울 [길 위의 우리 철학] – 13: 진보성
  14. 큰 이룸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간 삶의 철학자, 도산 안창호 [길 위의 우리 철학] – 14: 배기호

큰 이룸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간 삶의 철학자, 도산 안창호 [길 위의 우리 철학] – 14

 

배기호

 

도산공원 가는 길

 

춘분, 추분과 더불어 낮과 밤의 길이가 동등한 날에 이른 점심을 먹고 도산 안창호의 자취를 찾아 집을 나섰다. 바깥은 안창호가 살았던 시대만큼이나 우울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은 날씨. 걸음을 돌려 우산을 챙겨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평일 한낮인데도 지하철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3번 출구를 통해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챙겨와 다행이라고 여긴 것도 잠시, 바람이 세차게 불어 우산이 이리저리 춤을 추는 탓에 온전히 앞을 보며 걷기가 힘들었다. 이윽고 빌딩숲 인공협곡이 만든 순간적인 강풍에 우산이 뒤집혀 살 하나가 부러지기까지 했다. 나의 허약한 3단 우산은 강한 바람을 버텨낼 힘이 없었던 게다. 그렇게 조금 먼 길을 돌아 도산대로를 거쳐 도산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도산공원 입구 (출처: 저자)>

 

도산공원과 도산 안창호 기념관의 의미

 

도산공원(서울 강남구 도산대로45길 20)은 1973년 11월 10일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던 안창호의 묘소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던 부인 이혜련 여사의 유해를 옮겨와 합장하면서, 도산이 ‘우리나라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바친 위대한 애국정신과 민중 교화를 위한 교육정신을 국민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자 조성’된 근린공원이다. 전반적으로 아담한 크기의 도산공원은, 근린공원답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산책로와 체육시설, 휴게시설 등도 갖추고 있는 모양새다. 매일 24시간 개방되어 있으며 입장료는 없다.

<도산과 이혜련 여사의 합장묘 (출처: 저자)>

 

도산공원은 이 땅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안창호의 자취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조성한 곳이다. 다시 말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안창호를 우리의 마음에 새길 필요성은 있지만, 우리 주변에는 그의 행적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장소나 공간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특별히 한 곳을 정해 그를 기리는 장소로 만든 것이다. 넓게는 도산공원이 그러한 곳이고, 좁게는 도산공원 안에 자리한 도산 안창호 기념관이 바로 그러한 공간이다.

 

도산 안창호 기념관은 안창호가 태어난 지 120주년을 기념하여 1998년 11월 09일에 개관한 건물이다. 입장료는 없으며, 01월 01일과 설날, 추석에만 휴관이다. 다만 관람시간은 인터넷 정보와 안내 책자 및 현장 안내문이 조금씩 다르게 기술하고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대체적으로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 정도까지 개방을 하는 듯 보이지만, 원활한 관람을 위해서는 방문하기 전 미리 개방 시간을 확인하는 것이 좋겠다.

<도산안창호기념관 (출처: 저자)>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니 다소 쌀쌀했던 날씨 탓에 움츠러들었던 몸과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안내나 관리를 하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관람하고 있는 사람은 한 명. 기념관 처지에서는 아쉽겠지만, 온전히 몰입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설레기까지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생하는 관계자들의 노고에 감사하며 본격적으로 도산 안창호의 삶으로 들어가 본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뜨다.

 

안창호는 1879년 11월 09일 평남 강서군 초리면 칠리 봉사도(일명 도롱섬)에서 아버지 안흥국과 어머니 황씨 사이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다 1894년 서울에 와서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설립한 구세학당(밀러학당)에 입학하여 신식학문을 배우면서 기독교에 입교한다. 구세학당에서 보고 배운 것은 안창호에게 여러모로 많은 영향을 미친 듯하다. 구세학당을 졸업한 후 독립협회에 가입하면서 그의 민족운동가·개화사상가·교육자·독립운동가로서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자신과 이 땅이 처한 현실에 대한 냉철한 판단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비로소 형성된 것이다.

 

안창호의 삶은 일제시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빼고서는 말할 수 없다. 1910년 경술국치 이전에도 일제의 내정 간섭 및 만행은 있었고, 안창호는 이를 심각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당시 우리 민족의 가장 급선무는 진정한 독립이고, 독립을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하며,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미국의 문명과 부강함을 배우고 본받아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그는 1902년 결혼 후 일본을 거쳐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유학을 떠난다.

 

도산(島山)이라는 호는 이때 생겼는데, 배를 타고 가면서 태평양 한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하와이를 보고서 스스로 지어 붙였다고 한다. 우리말로 하면 섬뫼인데, 섬은 고립과 고독을 의미하고 뫼는 우직함을 상징한다고 본다면,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결심한 바를 끝까지 지켜나가겠다는 의지를 그 속에 담은 셈이다. 그러나 이왕이면 하와이가 아닌 독도나 제주도, 마라도를 보고 그렇게 붙였다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드는 것은 나뿐일까.

 

그러나 이 시기는 일제의 시커먼 야욕이 빠르고 치명적이게 우리 민족의 목을 조여오고 있는 때였다. 그야말로 국운이 바람 앞의 등불, 거센 비바람에 맞서는 허약한 우산 신세였다. 도산은 “나라가 없고서 한 집과 한 몸이 있을 수 없고, 민족이 천대받을 때 혼자만이 영광을 누릴 수 없다”라고 한 자신의 말을 실천이라도 하듯이 국내에서의 국권회복운동을 결심하고 1907년 02월 귀국한다. 이때부터 국내외 각지를 오가는 그의 힘겹고도 숭고한 여정이 시작된다.

 

<도산안창호기념관 전시실 (출처: 저자)>

 

 

힘을 길러야 한다!

 

도산은 우리 민족에게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이 옳은 것이라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하면서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목적은 두말 할 것 없이 진정한 ‘독립’이다. 그리고 독립이 옳은 것은 전 인류의 최종적 목적이 ‘전 인류의 완전한 행복’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도산은 엉뚱하게도 행복의 실마리를 ‘문명’에서 찾고 있다. 개개인이 긍정적인 ‘개조’를 통해 서구 열강의 발달된 ‘문명’을 배우고 습득하는 ‘노력’을 지속한다면 우리도 ‘행복’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다. 다분히 개화·계몽적이다 못해 사대주의적 발상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 보면 그의 현실적인 판단력을 엿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전 인류의 행복은 모든 사람이 실제로 동등한 선상에 있거나 감성적으로 그러하다고 느낄 때에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도산이 보기에 우리 민족은 이미 불행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리고 그 불행의 시작은 뒤떨어진 문명에 있다고 봤다. 그렇기에 보다 일찍 문명을 받아들인 일제에 의해 더 이상 짓밟히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과 동등한 문명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동등한 문명, 곧 동등한 힘을 가지기 위한 개개인의 개조와 그에 대한 노력을 부단히 해야만 결국 동등해질 수 있고, 진정한 독립을 할 수 있으며, 이 땅의 올곧은 주인으로서 우뚝 설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도산은 힘을 기르지 않고 “한갓 요행과 우연을 바라보고 한번 떠들기나 하면 독립이 될까, 혹은 육혈포질이나 작탄질이나 하면 독립이 될까, 혹은 어떤 나라에 호소나 잘 하면 독립이 될까하고 어련한 가운데서 호도하게 시간을 보내며 방황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가석하기가 한이 없”다고 말한다.

 

도산은 우리 민족이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먼저, 선진문명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교육과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위해서 자금을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개개인이 영원한 책임감을 가진 진정한 이 땅의 주인이 됨과 동시에 서로 간의 믿음에 기반을 둔 합동과 협동을 주문했다. 그러면 정의(情誼)로운 사회가 될 것이라고 본 것이다.

 

특히, 도산은 독립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두고 서로 믿고 모이어 합동적으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봤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을 지도자로 내세워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에 대해 도산은 “어떠한 협동이든지 그 협동 중에 앞선 사람은 곧 지도자의 자격을 가진 자”라고 하면서 “지도자의 자격은 비교문제로 생”긴다고 말한다. 각자가 남을 시기하는 태도를 버리고 우리 민족을 위하여 지도자를 찾아 세울 참된 뜻으로 냉정한 머리를 가지고 살피고 따지면 지도자의 자격을 가진 사람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지도자가 될 후보군들이 다 협잡하고 싸움만 일삼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 중에 협잡과 싸움을 적게 하는 사람을 지도자로 내세우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산의 생각에는 “위인이란 별 물건이 아니요 위인의 맘으로 위인의 일을 하는 자가 위인”이라는 그의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신이나 성인(聖人)과 같이 완전한 사람은 없다는 전제가 깔린 듯하다.

 

결론적으로 도산은 “무조건 허영만 표준하여 지도자라고 인정하지 말고 먼저 그 사람의 주의와 본령과 방침과 능력을 조사한 후에 그 주의와 본령이 내 개성에 적합하고 그 주의에 대한 방법과 능력이 나와 다른 사람보다 앞선 것을 본 후에 지도자로 인정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살피는 방법은 사회에 떠돌아다니는 요언비어(妖言誹語)에 의하지 말고 그 사람의 실지적 역사와 행위를 밝게 살필 것”을 들고 있다. 또한 지도자를 택할 때 마음가짐은 “친소 원근과 차당 피당의 관념을 떠나서 전 군중의 이해를 표준하고 공평 정직한 맘으로 할 것”을 말한다. 도산의 이처럼 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견해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바다. 그런데 당시에도 요구되는 바였고 지금도 요구되는 바라는 말은, 뒤집어 생각하면 당시에도 가능하지 않았고 지금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기에 씁쓸할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도산의 길과 우리의 길

 

도산은 1937년 06월 28일 이른바 동우회 사건으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1월 10일에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도산은 12월 24일 오랫동안 앓고 있던 병이 심해져 보석 출감하여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지금의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러나 약 3개월 뒤인 1938년 03월 10일 00시 05분에 간경화 등의 합병증으로 서거한다. 도산은 자신을 심문하는 일본 검사에게 “대한민족 전체가 대한의 독립을 믿으니 대한이 독립될 것이요, 세계의 공의가 대한의 독립을 원하니 대한이 독립될 것이요, 하늘이 대한의 독립을 명하니 대한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마치 1945년 08월 15일의 광복을 예언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그날을 함께 하지 못했다. 하지만 병을 앓고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도 독립에 대한 그의 희망과 동지들에 대한 믿음은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고 우리에게 전해지는 듯하다.

 

도산 안창호는 민족주의와 개화사상에 기반을 둔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곧 철학자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길을 더듬어 보면, 그 어떤 심오한 철학적 개념이나 명제만큼이나 철학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과 민족, 나아가 인류에 대한 진지한 사색과 성찰을 바탕으로 현재의 문제를 인식하고, 문제의 원인을 찾아 분석하며,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적절한 판단을 한 다음, 최선을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실천하고, 그에 대한 책임도 기꺼이 졌다. 이것이 철학이 있는 삶이 아니라면 무엇이 철학이 있는 삶이겠는가? 도산이 걸었던 길에 이제 우리가 서 있다. 지금 우리는 스스로에게 과연 진정한 독립을 이루었는지 물어야 한다.

 

 

기고자: 배기호(한국철학사상연구회)

순자의 철학사상을 연구해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자판기 커피를 들고 벤치에 앉아 멍하니 있기를 좋아한다. 잡기에 능하며 가끔 공부도 한다. 사람의 일, 정치에 관심이 많다.

 

 

존 스튜어트 밀 (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에서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페미니즘 이론과 사상을 발전하고 확대하는 데에 기여한 철학자와 그 저서를 소개하는 글을 연재합니다. 한 달에 두 번씩 [매달 초, 중순] 연재할 예정이며, 매달 한 철학자와 그 저서를 다룰 것입니다. 많은 기대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 및 업로드 담당 – 서누)

 

 

서양 근대철학의 이상은 인간에서 시작한다. 그 이상은 인간의 능력으로부터 출발해, 세계를 향하고, 인간에게로 되돌아온다. 모든 인간의 평등에 대한 사상들이 이때부터 생겨났다. 그런데 여기에는 큰 약점이 있었다. 그 ‘인간’에 여성은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예컨대,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1632-1704)는 모든 인간에게 사유 재산을 가질 권리가 있음을 강조했지만, 실제로 영국에서 여성의 재산권이 온전히 보장된 것은 1882년 재산법 통과에 이르러서였다. 또한 ‘사회계약론’으로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한 장 자크 루소(1712-1778)는 자연 상태의 인간은 모두가 평등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의 저서 <에밀>에서 자연적 본성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의 이성 능력이 다르고, 그 차이에 따른 양성의 역할이 다르다고 말했다. 루소에 따르면, 여성은 본성적으로 도덕적 자유를 성취할 만한 정신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시민사회의 구성원 즉 시민으로서의 자질이 결여되어 있다. 루소는 남녀의 차이를 자연적인 것으로 설명함으로써 여성에 대한 차별 대우를 정당화했다. 그리하여 루소가 주장한 ‘천부 인권’은 여성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었다. 한편 프랑스 대혁명 이후, 1789년 프랑스에서 라파이예트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발표했고, 같은 해 남성 시민들에게 비로소 ‘보통 선거’에 가까운 투표권이 주어졌다. 그러나 프랑스 여성들이 투표를 통해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은 무려 1944년에 이르러서였다.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이 <여성의 종속>을 저술하던 19세기의 영국에서 위와 같은 성차별은 제도뿐만 아니라 생활양식 전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여성은 생물학, 심리학 등 다양한 학문분야에서 주로 남성과의 차이에 의해 규정되었으며, 이러한 차이는 역할 분리로 나타났다. 자본주의 발전과 더불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분리가 뚜렷해지면서, 남성은 공적 영역에서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하고, 여성은 순결한 존재로 사적 영역을 지키면서 남성을 위안하고 돌보는 역할만을 맡아야 했다. 그럼에도 19세기 후반, 20여 년간 여성 문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여성의 고등교육 기회 확장, 여성 노동시장의 증가, 투표권이나 산아제한에 대한 캠페인 등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반드시 수행해야만 한다는 전통적 관점에 대해 여성들이 자각하고 도전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밀은 ‘남성에의 여성의 종속’은 문명사회의 원리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며 남성과 다를 바 없는 여성의 완전한 자유와 평등의 쟁취를 목적으로 <여성의 종속>을 쓴다. 그리고 여성 억압은 여성을 지배하고자 하는 남성들의 강렬하고 뿌리 깊은 감정 외에 정당한 이유나 근거 없이 이루어져 왔다는 것을 지적한다. 특히 그는 ‘모든 인간의 평등’이라는 이념이 확산되어 점차 철폐돼 가던 노예제와, 그에 반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여성 억압을 비교하면서 사회에 탄원한다.

밀에 의하면 자유와 평등의 추구는 선험적 진리이며, 공공의 이익(general good)을 위한 경우가 아니라면 어떠한 법적 차별도 용납할 수 없다. 그런데 ‘남성의 여성 지배’라는 제도는 이러한 선험적 진리에도 어긋나며, 공공의 이익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도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다른 대안, 예컨대 ‘여성의 남성 지배’나 ‘두 성의 동등한 지배’가 시도된 후에 적극적인 비교를 통해 판단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남성의 여성 지배’라는 원칙은 힘센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한다는 강자의 법칙 외에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러나 문명과 도덕이 발전한 사회에서 강자의 법칙은 인간사회를 규율하는 원리로서 적절하지 않으므로, 이마저도 ‘남성의 여성 지배’의 정당한 근거가 될 수 없다.

한편 여성은 지배 받아야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논거로 남성의 여성 지배를 정당화하는 사람도 있었다. 밀은 일반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은 정말로 ‘그러한 것(본성)’혹은 ‘그러해야 하는 것(당위)’이 아니라, 관습적인 것이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라고 역사적 사례를 들어 반박한다. 봉건 시대에 귀족의 평민 지배는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이제는 모두가 정당하게 인정하는 일반 시민(당시의 농노)의 정치 참여는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고대의 스파르타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한 신체적 훈련을 받았고, 이를 통해 당시의 사람들은 여성과 남성의 신체적 능력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남성의 여성 지배’는 여성의 자발적 동의에 의한 것도 아니다. 밀이 <여성의 종속>을 저술하던 당대에는 ‘남성의 여성 지배’에 부당함을 느끼며 직접 자신들의 경험과 생각을 글로 쓰는 여성들이 많아지고 있었고, 선거권 운동과 더불어 교육권, 노동권 보장을 획득하려는 정치적 집단들이 조직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성은 어떠해야 한다는 지속적인 세뇌와 정치적 운동에 참여했을 때 우려되는 남편의 학대 때문에, 여권 운동에 동참하지 않는 여성들이 더 많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면서, ‘남성의 여성 지배’는 여성의 자발적 동의에 의한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여성의 전반적 지위가 내려가느냐 올라가느냐를 따져보는 것이 한 민족 또는 한 시대의 문명 발전 정도를 가늠하는 가장 정확하고 확실한 방법이다.”

밀은 앞선 논의들을 종합하며 불평등한 권리의 구조는 인간 발전의 전 과정, 즉 역사의 흐름과 인간사회의 진보적 경향, 그리고 미래와 조화롭지 않으며 필연적으로 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현대와 낡은 과거를 가르는 기준은 인간이 출생조건에 의한 억압에서 벗어나 능력과 기회를 이용하여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 자신의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지는 문제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당사자가 스스로 해결하도록 놔두는 것이 발전을 이루는 사회의 기준이 된다. 그러나 단지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법과 제도에 의해 불이익을 받는 경우는 현대의 사회 원리에 어긋나는 거의 유일한 사례이며, 현대 세계의 진보적 흐름과 대립되는 것이라고 본다.

특히 밀은 당대의 결혼 제도가 여성에게 전적으로 불(합)리한 제도임을 자세히 밝힌다. 결혼한 여성의 법적 지위를 살펴보면 [노예제와 같은 법적인 신분 차별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남편의 노예와 다름없다. 아내는 결혼식 단상에서 남편에게 평생의 복종을 맹세하고 나면, 평생을 통해 그것을 지켜야 한다. 여성은 남편이 시키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며, 남편의 허락 없이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나아가 아내는 어떤 것도 소유할 권리가 없다. 상속을 통한 것이든, 노동을 통한 것이든. 여성이 어쩌다 재산을 가지게 되더라도 그것은 결혼과 동시에 사실상 남편의 소유가 된다. 아내의 것은 무엇이든 남편의 것이 됨으로써 ‘법 안에서 한 사람’이 되지만, 그 규정은 반대로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남편만이 자녀에 관한 법적 권리를 갖는다. 여성은 남편의 대리로서가 아니면,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

 

(영화 ‘서프러제트’ 中, 여권 운동에 참여하여 가정을 잘 돌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아이를 다른 집에 입양 보내는 주인공 모드의 남편. 여기에서 모드는 반대할 권리가 없어 아이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모든 남성이 여성을 노예처럼 부리고,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들이 실제 결혼생활에서 받는 대우와 상관없이 이 제도는 그 자체로 부조리하다. 이 제도를 악용할, 사악한 남성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이 제도에 의해서 목격되는 불평등은 정당한 것이 아니며 잠재적 폭압을 합법적으로 유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제도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선한 사람들이 아니라 악한 사람들을 염두하고 만들어져야 한다. 모든 남성은 결혼하는 순간 남편으로서의 완전한 법적 권력이 부여되고 보장되지만, 남편들 중 그 누구도 결혼 전에 절대권 행사에 적합하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고 법도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두 사람 중 어느 한 쪽은 관계를 취소할 수 없는데, 이들의 자발적인 결합에서 한 사람이 절대적인 주인이 되는 것은 옳지 못하며, 특히 법이 누가 주인이 되어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더욱 바람직하지 못하다.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아이리스 영 (下)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정의란 무엇이며, 부정의란 무엇일까? 억압당하는 집단은 부정의를 겪고 있다고 주장하며, 정의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억압이란 무엇이며, 누가 어떻게 억압당한다는 것일까? 아이리스 매리언 영은 <차이의 정치와 정의>에서 유명한 ‘억압의 다섯 가지 모습들’을 제시한다. 영은 철학에서 논의되어 왔던 기존의 정의론을 비판하면서, 정의와 부정의는 분배 문제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되며, ‘억압’과 ‘지배’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억압이란 “사회 구성원의 일부가 사회적으로 인정된 환경에서 좋은 기술들을 익히고 사용하는 것을 막는 제도적 과정 체계”(p.99.)를 뜻한다. 이는 사회 구성원들의 자기-표현(self-expression)과 관계된다. 한편 지배는 “사람들이 어떤 행위를 할지 결정할 때 참여하지 못하게 금제하거나 막는, 또는 행위조건들을 결정하는데 참여하지 못하게 금제하거나 막는 제도적 조건들”(p.99.)을 말한다. 이는 사회 구성원들의 자기-결정(self-development)과 연결된다. 영은 이런 억압과 지배를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정의라고 주장한다.

물론 영이 분배 부정의, 즉 재화나 지위에서의 불평등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배 문제는 정의의 필요조건일 수는 있어도, 충분조건일 수는 없다. 분배의 문제가 정의의 전부라고 간주하게 되면, 우리는 그러한 불평등한 분배 부정의를 낳은 생산조건과 제도적 맥락, 노동 분업의 문제, 의사결정 권력 문제, 문화의 문제를 보지 못하게 된다. 또한 분배에만 주목할 경우, 분배와 관련될 수는 있지만 그보다는 더 포괄적이고 구조적인 ‘억압’이라는 문제는 도외시된다.

억압이라는 용어는 우선 전통적으로 독재국가에서 탄압받는 시민들을 일컬을 때 사용되거나, 제국주의 식민지 국가나 공산국가들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영에 따르면 억압은 심지어 발전된 서구 자유주의 국가에서도 존재하며, 반드시 억압하는 자가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억압은 제도적인 조건이기에 단순히 사회적 지위나 생산관계로 인해 누군가가 특권을 얻고 누군가는 차별을 당하는 상황 자체도 억압이 된다.

억압이라는 용어가 부정의의 문제의 핵심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은 주로 신 사회 운동, 즉 사회주의 이후의 다양한 정체성 운동인 페미니즘, 게이/레즈비언 해방운동, 아프리카계 미국인 운동, 환경 운동의 약진 덕분이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억압을 경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영은 이러한 현실 운동의 주장들에서 출발한다. 주로 이들이 억압을 개선하거나 종식해달라고 요청할 때, 어떤 억압의 양상들이 출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영은 이러한 억압을 다섯 가지로 분류하면서, 이 억압당하는 집단들은 착취, 주변화, 무력화, 문화제국주의, 폭력이라는 억압을 체계적으로 겪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 ‘착취(exploitation)’는 “일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목적(의도)에 따라서, 그리고 이들의 이익을 위하여 그 통제 하에서 자신들의 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 즉 “사회집단의 노동 산물이 타 집단에게 이득이 되도록 이전되는 항상적 과정”(pp.123-124)을 일컫는 용어로, 물론 맑스에게 빚을 지고 있는 용어이다. 그러나 영은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착취 문제를 넘어서 여성의 에너지가 남성으로 이전되는 ‘젠더 착취’로 착취 개념을 확장시킨다. 젠더 착취에는 두 가지 양상이 있는데, 예컨대 여성이 보수를 받지 못하고 가사 노동을 하게 되는 것처럼 물질적 노동의 과실이 남성에게 이전되는 것과, 성애화 된 직종에 종사하거나 직장에서 긴장관계를 누그러뜨리는 노동에 종사하게 되는 것처럼 여성의 정서적, 성적 에너지가 남성에게 이전되는 것이 있다. 영에 따르면 이런 착취는 단순히 노동 산물이나 에너지에 대한 착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착취하는 집단은 착취를 통해서 부나 이윤뿐 아니라 권력을 소유하게 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둘째는 ‘주변화(marginalization)’로, 이는 “노동 시스템이 사용할 수 없거나 사용하지 않으려는”(p.131) 것을 일컫는다. 청년 실업이나 노인, 신체 장애인과 정신 장애인, 재취업에 실패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주변화로 인해 고통 받는 집단에 해당된다. 주변화를 경험하는 집단은 불안정한 고용과 실업으로 인한 고통, 그리고 복지에 의존한다는 비난 등으로 인해 의미 있는 노동과정에 참여하지 못한 채 생존의 위기에 내몰리는 억압을 경험한다. 따라서 영은 “어쩌면 주변화야말로 가장 위험한 억압 형태일지도 모른다”(p.132)고 설명한다.

세 번째, ‘무력화(powerlessness)’는 “간접적 의미에서의 권한이나 권력조차도 전혀 가지지 못하는 것”, “명령은 무조건 따라야 하지만 명령을 내릴 권리는 거의 갖지 못하는 상태에 처한 것”(pp.137-138)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의사결정에 민주적으로 참여할 권력 자체가 박탈당한 상태이기 때문에 무력화인 것이다. 예컨대 비전문직 노동자들은 고소득 전문직 노동자들에 비해 업무에서의 자율성이 거의 없고 독자적인 판단을 내리기가 불가능하며 상급자의 지휘나 감독만을 받기 때문에 자신의 일에 대한 전문성이나 통제력을 가지지 못한다. 공사장의 인부는 전기 기술자, 건축 기술자 등 숙련 노동자에 비해 천시당하거나 권한을 갖지 못한다.

네 번째 억압은 ‘문화 제국주의(cultural imperialism)’이다. “지배 집단의 경험과 문화를 보편화하고 유일한 규범으로 확립하는 것”(p.142)으로서, 이는 지배 집단이 자신들 역시 특수한 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관점이나 견해가 보편적인 것인 양 강요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예컨대 백인 이성애자 남성들이 흑인이나 여성들은 열등하다는 레테르를 붙이거나 동성애자들은 난잡하다는 식으로 표지를 붙이는 방식이다. 이러한 피억압 집단을 향한 지배 집단의 편견이나 선입견이 보편적인 문화로 제시됨으로써, 피억압 집단의 관점이나 정체성은 배제되고 차별 당하게 된다.

마지막 억압은 ‘폭력(violence)’로서, 영에 따르면 폭력은 단순히 개별 행위자의 행위가 아닌, 사회적인 맥락에서 비롯될 수 있는 체계적인 속성을 가진다. “폭력이 개인적으로 저지르는 도덕적 잘못이라는 점을 넘어서서 사회 부정의의 한 현상이 되는 것은 폭력이 가지는 체계적 속성, 즉 폭력이 사회적 실천으로서 존재한다는 점이다.”(p.148) 다시 말해, 특정한 제도와 사회적 실천이 특정한 집단의 구성원에 대한 폭력 행위를 부추기고 관용하고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사회적 환경(맥락)이 결국 그 폭력을 재생산하기 때문에,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체계적 폭력(systematic violence)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을 성폭행하거나 동성애자를 구타하는 행위에는 그러한 행위들을 방조하고 묵인하는 제도적이고 사회적 맥락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이렇게 억압의 다섯 가지 양상을 통해 영은 지금까지의 분배 중심의 정의론이 문화 제국주의나 폭력과 같은 억압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이런 억압들은 ‘사회집단’으로서의 약자들에게 가해진다는 특성이 있다. 영은 집단을 단순히 이런저런 속성들로 자의적으로 분류할 수 있는 집합체(aggregate)나, 혹은 가입과 탈퇴가 비교적 자유로운 공식적인 결사체(association)으로 바라보는 기존의 정의론은 개인이 집단 이전에 있다는 자유주의적인 인간관을 전제한다고 비판하면서, 이처럼 개인들의 묶음들로 집단을 바라보는 관점은 피억압 집단이 발생하게 된 사회․역사적 맥락을 도외시함으로써 억압을 강화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기존의 정의론은 억압당하는 사회집단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누락시킴으로써 차이를 은폐해 왔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집단이 다 억압 받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미국에서 가톨릭 신도들은 독특한 관행과 상호 친밀성을 가진 특유한 사회집단이기는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억압받는 집단은 아니다. 영에 따르면 “한 집단이 억압 받는지 여부는 다섯 가지 조건(착취, 주변화, 무력화, 문화제국주의, 폭력) 중 한 가지 조건이나 그 이상의 조건들을 충족하는지에 따라 정해진다.”(p.120). 예컨대 영의 ‘억압의 다섯 가지 조건’을 고려해 봤을 때, 사회집단으로서의 ‘남성 집단’은 인종, 성적 지향, 계급이나 학벌 등으로 차별받을 수는 있어도, 적어도 남성으로 억압을 경험한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영은 이처럼 억압에 대한 다섯 가지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사회집단들이 경험하는 다양한 억압들을 범주화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어떤 제도나 정책이 이 억압의 범주들 중 하나를 강화한다면, 그것은 부정의한 것이 된다. 영은 이 기준들을 통해 차이를 가지는 사회집단들이 경험하는 억압을 제거해 나가는 정의를 주장한다. 동일성을 통해 차이를 없애기 보다는, 차이를 의식하고 이를 인정하는 것이 좀 더 정의롭다는 것이다. 예컨대 그녀는 젠더 중립적인 정책보다는 젠더 의식적인 정책을, 집단들의 의사가 반영되는 참여 민주주의로서의 집단 대표제(group representation), 소수자 우대 정책 등을 제시한다. 차이를 고려하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분배를 넘어서는 쟁점들을 정의에 수용하라는 영의 이런 주장은, ‘급진 민주주의(radical democracy)’ 개념을 통해 여성, 동성애자, 장애인 등의 사회집단 간 차이를 민주주의에 수용할 것을 주장하는 무페와 라클라우의 정의론, 분배/인정의 이원론적인 정의관을 주장하는 프레이저의 정의론, 좋은 삶을 정의에 포함시킬 것을 주장하는 역량(capability) 접근법인 누스바움의 정의론과 같은, 분배 정의론이 오히려 차이를 무시하고 억압을 강화하는 지점을 비판하는 다른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들의 입장과도 공명하는 듯하다. 영은 물론 이런 차이가 본질적이거나 영속적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차이를 가질 뿐 아니라 억압당하고 있는 집단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현실이다. 결국 영의 입장처럼, 추상적인 원칙이나 동질적이라고 가정되는 시민 공중이라는 망상에 근거할 것이 아니라, 억압당하고 있는 집단들에게 가해지는 부정의를 제거해 나가는 것이 진정으로 ‘정의’가 아닐까?

 

(두 편으로 연재된 영에 관한 글 잘 읽으셨나요-? 4월에는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예속>에 관한 글이 연재될 예정입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맑스분과 보고서] 우리는 지금 『공산당 선언』을 다시 본다

 

우리는 지금 『공산당 선언』을 다시 본다

 

이순웅

 

 

 

 

처음에는 『선언』을 다시 한 번 정독해보고 싶었다. 암울했던 시기, 그래서 젊은 피가 더 끓었던 시기에 『선언』의 몇몇 구절은 우리를 흥분시키기까지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자본주의 질서는 이런저런 부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정화능력을 지닌 채 건재한 상태이고 지배질서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다. 이런 때일수록 고전으로 돌아가 치열하게 살았던 혁명가들의 고뇌와 투쟁을 성찰해보자는 제안이 『선언』을 다시 집어 들게 했다.

 

그런데 곧 우리들의 관심은 ‘읽기’에서 ‘번역+풍부한 해설’로 바뀌었다. 젊은 시절 그럭저럭 잘도 넘어갔던 구절들에 자꾸 눈길이 멈춘다. 예전처럼 쉽게 넘어가지질 않는다. 심지어는 어렵게 느껴지기까지. 그동안 우리는 지식을 축적했고 지적으로도 더 성숙해졌을 텐데 어찌된 일일까?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던 구절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알고 있다고 단정했던 것들을 다시 보니, 잘 모르겠다. 아는 만큼 보이지만 아는 만큼 안 보이기도 한다. 알면 알수록 잘 모르겠는 부분이 새롭게 등장하는 것이다. 『선언』은 생각보다 어려운 책이었다.

 

게다가 당시의 노동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비판받을 만한 면모까지 있다는 사실은 ‘진보’를 꿈꾸는 이들에게 『선언』을 경전 읽듯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우쳐준다. 우리는 『선언』을 다시 읽으면서 우리들의 무지를 일정부분 고백해야 했고 『선언』을 새롭게 재해석해야 스스로도 만족할 수 있는 지점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였다.

 

우리가 번역 대상으로 삼은 책은 1848년 독일어판이 아니라 1888년 영어판이다. 영어판은 독일어판이 나온 지 40년 후에 나온 것으로서 그동안 변화한 사회상을 반영하려고 은근히 노력한 흔적이 있으며 맑스 사후에 엥겔스의 생각을 더 반영한 부분도 있다. 예를 들면 사회역사를 일종의 자연사적 과정으로 보려는 시각을 한층 더 강조한 사람은 맑스가 아니라 엥겔스라는 평이 있는데, 이러한 평을 가능하게 하는 구절을 하나 발견하기도 했다. 독일어를 영어로 옮기면서 주어를 아예 바꿔버린 것이다. 엥겔스의 의지가 작용했음이 분명하다. 번역자는 사무엘 무어이지만 엥겔스가 수정에 관여하기도 하고 따로 각주를 달기도 했기 때문이다. 주어가 뒤바뀐 이 문장은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 합법칙적 역사발전 단계’ 등의 사회역사관이 가진 문제점을 비판할 때 맑스보다는 엥겔스에게 혐의점을 두었던 이들에게 확신을 심어줄 수 있는 좋은 근거 자료가 될 것이다.

 

 

 

번역에다가 ‘풍부한 해설’까지 더하는 것으로 읽기의 방향을 바꾸자 예상하지 못했던 어려운 상황과도 마주해야 했다. 번역어 선택부터 문장표현, 해석·해설상의 차이 때문에 번역이 논쟁으로 이어져 진행 속도가 매우 더디었다. 우선, 책 제목에서부터 이견이 생겼다. Manifesto of the Communist Party가 ‘공산당 선언’이냐 ‘공산주의 당 선언’이냐 ‘공산주의자 당 선언’이냐 하는 문제였다. 이미 있었고 현재 있는 공산당의 공식 명칭이 ‘Communist Party’이므로 일단은 ‘공산당’으로 하기로 했다. 가장 많이 알려진 대중적 명칭이 ‘공산당 선언’이란 점도 한몫을 하였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당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정당이 아니라 일종의 ‘비밀 결사체’ 같은 것이었다는 점은 환기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미 20여 종 내외의 해석판이 나온 상태였다는 사실도 새로운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해설까지 덧붙인 번역서는 그리 많지 않았다. 훌륭한 번역과 해설도 있어 참고자료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부분을 여기저기에서 발견했지만 이들을 모으고 보완하는 일은 여전히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는 우리들 사이에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우리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구호를 번역하면서도 논쟁을 해야 했다. 1848년 독일어판에서는 ‘Proletarier’이었으나 영어판에서는 이를 ‘Working Men’으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Proletarians’라고 해도 될 텐데 왜 ‘Working Men’으로 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Men’에는 인간이라는 뜻이 있기 때문에 문제 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단어가 ‘남성’이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에 문제시할 수도 있다. 1888년 당시에는 부인노동과 아동노동도 많았기 때문에 이 번역어는 당시의 노동현실을 반영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남성주의 또는 남성우월주의를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른바 ‘부인 공유제’에 관한 애매모호하고도 지나치게 절제된 표현은 그만큼 해석의 여지를 많이 남겨둔다. 맑스나 엥겔스 같은 당시의 혁명가들이 가진 속물적이고도 ‘마초’적인 여성관으로 볼 수도 있고, 결혼 제도를 넘어서는 혁명적인 관점을 제시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선언』은 일반적인 논문이 아니다. 당 강령으로 작성된 ‘선언문’이므로 여기에는 압축과 비약이 있다.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행간에 숨은 뜻까지 그때그때 다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선언』은 맑스가 초안을 쓴 ‘맑스와 엥겔스의 공저’로 알려져 있는데, 엥겔스가 먼저 문답식의 초안을 쓴 적이 있다는 것, 그리고 맑스가 맡아서 썼을 때는 의인동맹을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재편한 샤퍼의 검열 내지는 교열이 있었다는 것 등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샤퍼의 ‘간섭’을 의식하면 『선언』은 ‘온전히’ 맑스(엥겔스)의 것도 아닌 셈이다.

 

『선언』이 세상에 나온 시기는 ‘공산주의’라는 이상적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일종의 결사체를 만들고 자신들의 생각을 글의 형식으로 정리해서 최초로 공표해보려고 한 때였다. 당시에는 맑스, 엥겔스에게 그다지 권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만큼 『선언』을 만들 때는 생각이 다른 여러 분파를 아우를 필요가 있었다. 『선언』은 타협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맑스와 엥겔스가 고집했을 만한 부분은 어디이고 양보한 부분은 어디일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유의미한 일일 것이다.

 

『선언』이 갖는 현재적 의미를 말해보는 것도 우리의 관심사 중 하나이다. 맑스와 엥겔스가 현실에 입각해 실천해보려 했던 맑스주의는 국가주의와 아나키즘 사이에 있었다. 아나키즘을 지향하면서도 국가적 역할을 무시하지 않았던 그들은 국가주의자는 물론이고 아나키스트와도 대결해야 했다. 국가 해체로 가는 길목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다고 여겼던 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 레닌의 사회주의 실험은 이들이 가졌던 생각을 현실에 옮겨본 것이기도 했다. 『선언』에 담겨 있는 국가주의적 요소나 국제주의적 요소는 여러 정파를 아우르려는 맑스와 엥겔스의 정치적 계산이기도 했지만 당시의 사회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기도 했다. 세계화 시대지만 국가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는 오늘날, 『선언』은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를 목도한 오늘날의 진보진영에게 일종의 방향지시등을 제시하는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앞으로 우리는 『선언』을 번역하고 해설하면서 만들어낸 결과물들을 차례차례 웹진에 게재할 것이다. 완성도를 높일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지만 장담할 수는 없다. 채워야 할 빈 공간이 가끔씩 발생할지도 모른다. 독자들의 비판과 조언은 우리가 가진 문제점을 해결하고 한계를 극복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아이리스 영 (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에서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페미니즘 이론과 사상을 발전하고 확대하는 데에 기여한 철학자와 그 저서를 소개하는 글을 연재합니다. 한 달에 두 번씩 (매달 초, 중순) 연재할 예정이며, 매달 한 철학자와 그 저서를 다룰 것입니다. 많은 기대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 및 업로드 담당: 서누)

 

 

3. <차이의 정치와 정의>, 아이리스 매리언 영(Iris Marion Young) (1949 – 2006) (上)

 

유민석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영은 정의와 사회적 차이를 연구한 저명한 미국의 정치철학자이자 시카고 대학 정치학과 교수로, 1990년 저작 “정의와 차이의 정치(Justice and the Politics of Difference)”에서 지금까지의 정의론을 분배 중심 정의론으로 비판하며 ‘차이의 정치’를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는 존 롤즈의 “정의론”으로 대변되는 평등 지향적인 자유주의적 정의관이나, 로버트 노직의 자유지상주의 정의론, 그리고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와 같은 공동체주의적 정의관이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의 정의관은 주로 파이를 어떻게 분배할지 혹은 플루트는 누가 차지해야 하는지와 같은 부나 재화, 지위 등의 분배 문제에만 관심을 두거나, 철로에서 누구를 구해야 하는지와 같은 일어날 법 하지 않은 극한상황(도덕적 딜레마 상황)에서의 도덕추론을 따지는 데에만 관심을 뒀을 뿐, 성소수자가 당하는 억압이나 여성들이 느끼는 차별과 같은 매우 첨예한 사회적 문제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를테면 롤즈의 유명한 ‘원초적 입장’이나 ‘무지의 베일’ 같은 가상의 장치들은 물론 공정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를 정초하기 위한 것이지만, 기본적으로 일상에서 소수자들, 약자들이 느끼는 억압, 차별의 문제와는 동떨어져 있는 듯하다. 과연 ‘정의의 두 원칙’이 억압당하는 자들의 현실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페미니스트 정치철학자, 영은 이런 정의관을 예리하고 통렬하게, 조목조목 비판한다. 정의/부정의에 대한 문제는 분배가 아닌, ‘지배’나 ‘억압’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분배 중심의 정의론이 대체 무슨 문제라는 것일까? 영에 따르면, 사회 정의에 대한 사유를 사물, 자원, 소득, 부와 같은 물질적 재화의 할당 또는 사회적 지위, 특히 직업의 분배에만 집중하는 경향은, 분배 문제에 버금가게 중요한 ‘의사결정 권력 및 절차’, ‘노동 분업’, ‘문화’에 대한 문제들을 무시하고 간과하게 한다.

예컨대 시민이나 노동자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기업이나 국가의 의사결정이 민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그 결정 과정에서 누군가 배제되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뤄지는 경우, 그런 의사결정 권력 및 절차의 문제는 비록 비-분배적인 것이지만 부정의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많은 여성들이 돌봄 노동과 가사 노동에 쏠리게 되는 현상과 같이, ‘누가 노동을 할지 그리고 누가 어떤 노동을 하게 되는지’에 관한 노동 분업 역시 분배적인 것을 넘어서는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여성이나 동성애자가 미디어에서 편견에 의해 비하되고 혐오당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분배와는 무관하지만 심각한 부정의라고 할 수 있다.

영은 기존의 분배 중심 정의관이 개인주의적이며 이성 중심적이고 남성 중심적이라고 비판한다. 롤즈의 정의론에서 알 수 있듯이, 원자적이고 불편부당한 개인을 전제하거나 동질적인 공중을 강조하는 식이다. 특히 영은 포스트 구조주의와 페미니즘의 입장을 끌어온다. 기존 정의론들의 기저에는 일종의 근대적 이성 중심주의와 사회존재론이 깔려있다는 것이다. 이성과 정신을 지닌 백인 이성애자 남성은 감성과 신체의 영역을 여성, 동성애자 등과 같은 ‘타자’에게 속한 것으로 전가시킨다.

이로써 아이리스 영은 ‘동질적 공중’을 전제하는 정의관을 비판하며, 다양한 사회 집단이 경험하는 억압을 인정하는 ‘이질적 공중’을 내세우는 ‘차이의 정치’를 그의 정의론으로 제시한다.

정의에 관해서는 크게 이상적인 정의의 원칙이나 가상적인 계약을 제시하는 초월론적 접근법과 현실의 부정의를 발견하고 제거해 나가는 내재적 방법이 대비된다. 영은 후자의 방식을 택한다. 현실을 분석하고 규범적인 진단을 하는 비판 이론 전통, 상호주체성과 신체와 감정을 복권시키는 페미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통찰,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실의 피억압 집단들의 투쟁과 운동에서 얻은 교훈을 결합하여, 영은 다양한 차이를 가지는 피억압 집단들로 이루어진 이질적 공중들의 차이의 정치를 주장한다.

이러한 영의 주장은 실은 20세기 후반에 폭발적으로 급증한 신 사회 운동, 즉 맑스주의 이후의 여성 운동, 게이레즈비언 운동, 흑인 운동 등 현실 운동에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이들 신 사회 운동은 모두 억압과 부정의에 대한 요구를 주장하면서 등장하였다. 이들은 모두 단순한 사람들의 무리인 ‘집합체’나 자발적인 ‘결사체’와는 다른,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억압을 당하는 ‘사회 집단’으로서의 특징을 가진다.

그동안의 정의론은 분배 중심적이었으며, 이와 다르게 부정의의 문제는 지배와 억압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이러한 차이의 정치의 도전에 대해 정치철학적으로 과연 어떤 답변을 해야 할까? 아니, 질문을 달리 해보자면, 부/재화의 보다 공정한 소유나 분배에 대한 논의가 정의의 문제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한국 사회는, 여성이 돌봄 노동과 성별화 된 노동에 종사되는 노동 분업의 문제, 시민들이 관료화된 행정조직의 의사결정에서 배제되는 문제,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이 혐오당하거나 구타당하는 문제, 즉 차이의 정치의 도전에 대해 준비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울스턴크래프트 (下)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에서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페미니즘 이론과 사상을 발전하고 확대하는 데에 기여한 철학자와 그 저서를 소개하는 글을 연재합니다. 한 달에 두 번씩 (매달 초, 중순) 연재할 예정이며, 매달 한 철학자와 그 저서를 다룰 것입니다. 많은 기대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 및 업로드 담당: 서누)

 

 

2. <여권의 옹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下)

 

김은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여권의 옹호, 초판본>

 

 

  • 여성 교육의 평등권을 주장하다

 

“최근 여성 교육에 관심이 높아졌지만 아직도 여성은 경박한 존재로 간주되고 있고, 풍자나 교훈으로 여성을 교육하려는 작가들은 여전히 이들을 비꼬거나 동정한다. 여성은 몇 가지 기예를 익히면서 어린 시절을 허송하고 관능적인 심미안을 기르고, (그 외에는 다른 출세할 방도가 없는 관계로) 자기보다 나은 상대와 결혼하겠다는 욕망을 추구하느라 심신의 힘을 잃어간다. 이 욕망은 여성을 일종이 동물로 전락시키기 때문에, 결혼한 여성은 옷을 차려입고, 화장하고, 아양을 떠는 등 그야말로 아무 생각 없는 어린아이같이 행동하게 된다. 하렘에나 적합할 이 나약한 여성이 과연 현명하게 가정을 이끌고 자기가 낳은 가엾은 아이들을 제대로 길러낼 수 있을까?”

울스턴크래프트는 18세기 근대 계몽 사상가들이 주창한 이성과 인간에 대한 전망에 깊은 신뢰심을 갖는다. 문명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루소와 달리, 그는 문명의 발전을 막는 것은 권력의 부패일 뿐 역사의 발전을 신뢰하고 인간 평등의 보장을 희구한다. 인간 이성에 대한 전적인 확신을 통해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이성을 갖고 있으며, 여성이 복종해야 할 대상은 아버지나 남성이 아니라 인간 고유의 이성으로 제시한다. 그는 여성의 정신이 남성의 정신과 조금도 다르지 않으며, 따라서 여성도 이성을 지닌 온전한 인격체로 주장한다.

따라서 울스턴크래프트는 남성과 똑같이 여성에게도 이성과 인권이 있으며 이를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교육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제시한다. 울스턴크래프트에 따르면, 여성들의 날카로운 감각을 남자들을 유혹하는 데 사용할 것을 가르치는 잘못된 교육은 무엇보다도 사회에 아무런 기여 하지 못한다. 여성다운 부드러움과 순종만을 강요하며 여성을 사회적인 인간이자 자립하는 존재로 만들지 않는 기존의 여성교육은 문제가 있다.  또한, 울스턴크래프는 가정교사에 전적으로 의지 하거나 혹은 기숙학교에 보내는 등 기존의 교육체제가 가지는 문제점들 역시 조목조목 지적한다. 교육에 대한 대안적 정책 역시 내세우는데, 가정 교육과 공공교육의 구별 없는 국립 통합제 학교 설립을 제창하기도 한다.

이러한 울스턴크래프트의 주장은 여성에게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부여할 것으로 나아간다. 그는 근미래를 내다보며, 앞으로는 여성들도 정부에서 대표자로 일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기 한다. 그리고 여성들이 단순히 가정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의사, 산파, 간호사 등의 사회적 활동을 할 것이며, 회사 경영, 농업 종사, 장사와 판매 역시 할 것이라 제시하면서, 공적인 공간과 직업의 선택에서 여성 역할을 강조한다.

무엇보다도 『여권의 옹호』에서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에게 호소한다. 그는 여성이 스스로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갖고 독자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이성을 갈고 닦아 발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불합리한 기존의 사회상을 개선하고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성이 교육을 통해 자신의 인권을 회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 여권의 옹호가 지닌 영향, 한계 그리고 교차성

 

당대의 상황으로 인해  『여권의 옹호』에 담긴 주장은 바로 실행되지 못한다. 그러나 울스턴크래프를 비롯한 초기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사상은 여성을 둘러싼 다른 약자들과 연대하면서 영향을 확대한다. 페미니즘 사상은 여성으로 하여금 가부장제에서 자신의 처지와 노예의 지위를 견주어 생각하고, 이로 말미암아 당대 여성들은 그 누구보다 노예 폐지론에 찬성한다.

특히  『여권의 옹호』에 찬동한 중산층 여성들은 노예의 노동이 야만적인 설탕 사업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후, 노예무역을 중지시키고자 직접 나선다. 가정 살림에 관여하는 여성들은 1791년 노예 폐지론자들이 조직한 설탕 불매운동에 참여한다. 노예들이 일하는 재배장의 환경에 경악한 여성들은 가정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주부이자 티타임의 주재자로 설탕 소비를 줄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국제적으로 중요한 강력한 정치 운동으로 승화된다.

확실히 당시 여성의 지위로 인해, 불매 운동을 조직한 여성들은 청원서에 서명하거나 의회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능동적 역할을 담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가족의 식료품을 구입하는 책임을 지닌 가정의 경영자로서 그들은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설탕 소비의 주체였기에 그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미국 독립혁명 당시 차 불매 운동을 벌인 미국 여성들의 역할에 감명을 받은 영국 여성들은 설탕 불매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불매 운동이 크게 유행한다. 설탕 불매운동에 그치지 않고 여권의 옹호의 주요한 주장은 이후 참정권 운동으로 번지면서 실제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여권의 옹호』에서 밝힌 울스턴크래프트 의견은 중상층 여성만을 위한 운동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그는 여성의 활동의 공적 확장을 주장하나, 참정권에 대해서는 짧게 언급한 후 지나간다. 게다가 울스턴크래프트는 대체로 개인주의적 시민 도덕 양성에 목적을 두어 교육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온건적 노선을 표명한다. 무엇보다도  『여권의 옹호』는 성도덕과 가족제도에 있어서 여전히 영국 중상층의 통념과 관습을 따른다. 성역할 구분에 문제를 제기 하나, 인간의 표준을 여전히 남성으로 규정했을 뿐 아니라,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여성의 영역을 가사, 육아로 한정한다.

무엇보다도  『여권의 옹호』는 중간계급 여성만을 자신의 주요한 독자로 삼는다. 울스턴크래프트에 따르면, 중간계급은 귀족처럼 허영으로 부패하지 않았고 노동자 계급처럼 빈곤의 무게에 압도당하지 않았다. 독자층을 중간계급으로 설정한  『여권의 옹호』는 상류층을 따라하는 중간계급 여성의 허영을 주요하게 비판하며 건전한 시민으로서 중간계급의 여성의 자리매김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결국  『여권의 옹호』가 상정하는 이상적 여성은 이성의 발달을 위해 교육과 정신 수양에 힘쓰고 자녀를 올바른 시민으로 양육하는 어머니이자, 가정과 사회 공동체에 이바지 하는 성실한 동반자이다. 이러한 여성은 보수적 입장을 대변할 뿐 아니라 대다수의 여성 노동계급을 배제하고 그에 기반 하여 중간계급 여성의 성장을 도모한다. 이러한 점에서 울스턴크래프트 입장은 다른 페미니스트들에게 비판을 받는다. 백인 중상층 이성애자 여성을 여성의 표준을 설정하는 초기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이 기준 밖에 있는 주변화된 여성들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음으로써, 또 다른 차별을 야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을 통해서, 페미니즘은 동일한 여성이 아니라 다양한 여성들에 대해서 논의하기 시작한다.

특히 주목해 볼만한 논의는 “인종과 섹스의 교차로를 탈주변화하기: 차별금지 정책, 페미니즘 이론 그리고 반인종주의 정치 관한 흑인 페미니즘의 비판(Demarginalizing the Intersection of Race and Sex: A Black Feminist Critique of Antidiscrimination Doctrine, Feminist Theory and Antiracist Politics)”에서 제시한 킴벌리 크렌쇼(Kimberle Crenshaw)의 교차성에 관한 분석이다. 크렌쇼는 흑인 여성의 경험을 왜곡시키는 단일 축(single-axis) 분석과 흑인 여성 경험의 다차면성(multidimensionality)을 대조한다.

크렌쇼는  단일 축에 따른 틀(framework)이 주로 집단의 특권층에 기대어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이 그러한 것처럼, 살아있는 여성의 경험을 단일 축의 범주로 묶어버릴 경우에, 인종차별과 성차별에 대한 개념과 이해 그리고 개선책에서 조차 흑인 여성을 지워버린다. 크렌쇼에 따르면, 인종 차별은 특권적 흑인 남성의 관점에서, 성차별의 경우에는 특권적 여성에 맞추어져 다루어진다. 이는  흑인 여성을 페미니즘 이론과 반인종주의 정책 담론에서 몰아낸다. 그러나 배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미 확립된 구조에 그저 흑인 여성을 포함시킨다고 해결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흑인 여성으로서 겪는 차별에 주목하는 것이다. 흑인 여성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차별을 경험한다. 흑인 여성으로 겪는 교차적 경험은 인종주의와 성 차별을 합한 것보다 훨씬 크다. 크렌쇼는 교차로에서 네 방향으로 오가는 차량의 예를 통해 교차성을 설명한다. 교차로를 통과하는 차량과 마찬가지로, 차별은 한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고 다른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다. 교차로에서 일어나는 사고는 어떤 방향에서 이동해서일 수도 있고, 때로는 모든 방향에서 이동하는 경우 때문일 수도 있다. 흑인 여성은 교차로에 있기 때문에, 성 차별이나 인종 차별로 인해 차별을 당할 수 있다.

흑인 여성은 때때로 백인 여성의 경험과 유사한 방식으로 차별을 경험한다. 또한 때때로 그들은 흑인들과 매우 유사한 경험을 공유한다. 그러나 흑인 여성은 빈번하게 인종에 기초한 차별과 성에 근거한 차별이라는 두 가지 차별을 동시에 경험한다. 이 경험은 인종 차별과 성 차별의 합계가 아니라 분명히 “흑인 여성”에 대한 차별이다. 흑인 여성의 경험은 차별 담론이 제공하는 일반적인 범주보다 훨씬 광범위하다. 그러나 기존의 범주적 분석은 흑인 여성의 요구와 필요를 담은 경험을 무시한다. 흑인과 여성의 교차성을 고려하지 않은 분석은 흑인 여성이 인종과 여성 모두에서 종속화 되는 특정한 방식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여권의 옹호』가 출판된 지 몇 백 년이 지난 현재 여성의 교육권과 참정권은 법적으로 보장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권의 옹호』는 현재 진행중이다. 교육의 평등권이 실재적으로 달성되지 않은 나라도 여전히 많고, 교육 이외에도 그가 제기한 질문들 중 여전히 미완으로 남은 과제가 많다. 예리한 통찰력과 역사에 대한 폭넓은 시각으로 오늘날에도 독보적 가치와 현재적 울림을 잃지 않는 비전을 울스턴크래프트는 제시한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도 유효한 『여권의 옹호』의 혁명적 통찰은 당시 여성 차별의 문제를 성별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라, 정치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신분이나 경제력의 차이의 억압과 함께 하는 사회 구조적 문제의 일부로 이해하고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점에 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여동생에게 남긴 편지에서 스스로 표현한 바와 같이 “닦인 길을 밟아가기 위해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며, 삶에서 그가 한 선택들은 당대의 사회적 규범과 충돌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불행 속에서조차 자신의 존재를 그렇게 강렬히 느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에 대해서 버지니아 울프가 한 다음의 말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내가 죽는다든지, 나 자신을 잃어버린다는 건 차마 상상할 수 없어요. 내가 존재하길 그친다는 건 불가능해요.’라고 외쳤던 그는 서른여섯 살에 죽었다. 하지만 그는 한을 풀었다. 그가 죽은 뒤 130년 동안 수백만의 사람이 죽고 잊혀졌지만, 우리는 지금도 그의 편지를 읽고, 그의 논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녀의 실험, 그중에서도 가장 큰 결실을 맺었던 고드윈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당당하고 열정적으로 인생의 정수를 휘어잡았던 울스턴크래프트를 생각한다. 그러니 그는 분명히 일종의 불멸을 얻은 셈이고 여전히 우리와 더불어 생생하고 살아있고 따지고 실험하고 있다.”

 

 

(두 편으로 연재된 울스턴크래프트 글 잘 읽으셨나요? 3월에는 영(I. M.  Young)의 <차이의 정치와 정의>를 담은 글이 연재될 예정입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울스턴크래프트 (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에서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페미니즘 이론과 사상을 발전하고 확대하는 데에 기여한 철학자와 그 저서를 소개하는 글을 연재합니다. 한 달에 두 번씩 (매달 초와 중순) 연재할 예정이며, 매달 한 철학자와 그 저서를 다룰 것입니다. 많은 기대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편집 및 업로드 담당: 서누)

 

1. <여권의 옹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 (1759-1797) (上)

 

김은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나는 여성이 처한 비굴한 의존 상태를 위장하기 위해 남성이 선심 쓰듯 내뱉는 귀엽고 여성스러운 어구들과, 여성의 성적 특징으로 간주되어온 나약하고 부드러운 정신, 예민한 감성, 유순한 행동거지 등을 거부하고, 아름다움보다 덕성이 낫다는 걸 밝히려고 한다. 남자든 여자든 한 인간으로서 자기만의 개성을 만들어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목표이므로, 모든 것이 이를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 가부장제에 핍박받는 여성들을 목격하다

 

여권의 옹호의 저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1759년 영국 런던 근교의 스피털필즈에서 에드워드 울스턴크래프트의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사회생활 실패의 울분을 어머니에게 폭력으로 푸는 아버지와 모습과 불행한 부모의 결혼 생활을 목격하면서 남자에게 여성을 종시키는 불합리한 결혼제도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당시 여성은 결혼과 함께 모든 법적 책임과 권리를 남편에게 양도하게 되었기에, 폭력 앞에서 저항할 길이 없었다. 기혼 여성은 채무의 책임은 없었지만 대신 계약서에 서명도 할 수 없었고, 소송도 불가능했으며 심지어 법률적 효력이 있는 유언을 남길 수도 없었다. 당연히 그 어떤 경제활동도 불가능했고 가정의 모든 경제권만이 아니라, 유산으로 물려받은 아내의 재산과 함께 자식마저도 모두 법적으로 남편에게 속해 있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이러한 여성의 비참한 처지를 어머니의 경우만이 아니라 아버지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찍 결혼한 동생 일라이저마저도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것을 목도하면서, 사회경제적으로 남편에게 의탁하는 여성의 고달픈 처지와 결혼 생활의 비참함을 재확인한다. 그는 일라이저를 탈출시켜 자신이 돌보았고, 여성이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경제력과 교육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낀다. 이러한 각성은 울스턴크래프트를 경제적으로 독립적이면서 교육받은 여성으로서 삶을 살도록 만든다. 그는 가정교사와 귀족 부인의 비서로 일하고, 이후 1784년 이슬링턴에 여학교를 설립한다.

학교 경영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첫 저작인  『여성 교육론』 저술 후 런던에서 머물다 혁명의 와중에 있는 프랑스로 건너가 계몽주의 세계를 몸소 체험한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삶은 당시의 통념과 관습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역동적이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파리에서 만난 미국인 길버트 임레이(Gilbert Imlay)와 결혼하지 않은 채 첫딸을 낳는다. 그러나 임레이의 새로운 애인으로 파탄이 난 관계는 울스턴크래프트를 절망하게 만들었다. 그는 강물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다행히 선원들의 구조로 살아난다. 그리고 몇 개월 후에 울스턴크래프트는 영국인 아나키스트 철학자 윌리엄 고드윈(William Godwin)을 만난다.  울스턴크래프트와 고드윈은 평등한 관계를 실험하고 실천했으며, 두 번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그들은 결혼한다.

울스턴크래프트의 본격적인 저술 활동은 1788년부터는 런던의 저명한 출판업자 조지프 존슨이 발간하던 당대의 대표적인 급진주의 계열 잡지 『어낼리티컬 리뷰』에 서평, 번역문, 에세이 등을 기고하면서 시작된다. 토머스 페인, 윌리엄 고드윈, 윌리엄 블레이크 등 당대의 진보적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존슨의 출판사에 근무하는 동안 첫 소설 『메리』와 『창작 동화집』을 저술한다. 그 중 울스턴크래프트를 유명하게 한 책은 바로  1792년 출간한 『여권의 옹호』이다.

『여권의 옹호』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세상에 이름을 알린, 울스턴크래프트는 프랑스 혁명과 공포정치를 직접 경험한 후 『프랑스 혁명의 기원과 진전에 관한 역사적·도덕적 견해』를 저술한다. 영국으로 돌아온 뒤 1796년에는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에서의 짧은 체류 동안 쓴 편지』를 펴낸다. 그러나 그의 저술 활동은 더 이상 계속될 수 없었다. 울스턴크래프트는 두 번째 딸을 출산한 뒤, 열흘 후에 불행히도 산욕열로 세상을 떠난다. 남겨진 울스턴크래프트의 딸 역시 세계 문학사에 이름을 남겼는데, 그는 바로 『프랑켄슈타인 : 현대의 프로메테우스(Frankenstein : or, The Modern Prometheus)』의 작가 메리 셸리(Merry Shelly)이다.

 

 

  • 이성(reason)에 남녀는 없다

 

1792년  『여권의 옹호』는 단 6주 만에 쓰였다. 울스턴크래프트는 1789년 혁명 후 프랑스 의회에 제출된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 페리고르의 1971년 프랑스 제헌국민의회의 대한 보고서를 읽고 탈레랑의 교육 법안에 반대하는 이 책을 쓰기로 결심하였다. 교육 법안은 공화국의 모든 소년에게 국민교육을 시행한다는 내용을 담았지만, 교육의 대상에 소녀는 포함되지 않았다.

인간의 이성과 권리에 대해 그 어느 시기보다도 진보적이었던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여성에 대해서는 기존의 습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8세기에 계몽주의가 부르짖던 ‘인간의 권리’라는 말 속에 인간은 오로지 ‘남성’만을 의미했다. 당대 가장 진보적이라 불린 로크나 루소 같은 사상가들조차도 여성은 자연적으로 남성보다 약한 존재이기에 남성과는 절대로 평등해질 수 없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진보적 남성 지식인들이 주장하는 인권의 범위 속에 여성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여성은 그저 남성의 보호 아래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성이나 인권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남성 지식인들 중 아무도 여성이 남성과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던 것이다.

그러나 급진적 민주주의자인 울스턴크래프트는 인간에게는 누구나 이성과 불멸의 영혼이 있고, 이성을 지닌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계몽주의적 신념을 가졌다. 그 누구보다 계몽주의 사상사인 울스턴크래프트는 남성만을 인간으로 상정한 계몽주의의 한계를 계몽주의로 맞섰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책을 통해 남성 계몽주의 지식인들의 사회개혁 이론 속에 배제한 여성문제를 논쟁에 포함시키면서, 여성도 인간이며 당연히 누려야 할 인권이 있음을 주장한다.

책에서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을 남성의 보조적 역할로만 보는 기존 사회의 관념에 도전하고 비판한다.

“나는 루소부터 그레고리까지 여성교육과 풍속에 대해 글을 써온 모든 작가들은 분명히 여성을 더 부자연스럽고 나약한 존재, 그래서 사회에 더 무익한 존재로 만드는데 일조해왔다고 단언하는 바이다.”

울스턴크래프트는 여러 사상가를 비판하고 최초의 엄마인 이브를 나약하게 그린 밀턴을 향해 “유순한 가축 같은 존재로 살아가라니, 그런 모욕이 어디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또한 그는 여성을 이렇게 수동적인 존재이자 같은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루소를 비롯한 많은 사상가들의 여성 비하의 풍조를 정면에서 조목조목 분석하며 문제시 한다.

특히 울스턴크래프트는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루소의 『에밀』을 “여성의 매력을 찬미하면서도 그들을 억압하는 저 해로운 책”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열등한 이성을 지닌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는 것이 곧 자연법”이라는 루소의 의견에 반대한다. 『에밀』에서 루소는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 서술하면서 여자아이의 교육에 대해서도 다룬다. 에밀은 시민으로 성장을 고무 받는 반면 소피의 교육은 이후 성인으로 성장할 에밀의 배우자인 이상적 부인을 목표로 한다. 소피는 인내심과 수동성을 특징으로 지니고 주어진 환경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적응을 잘하는 존재로 설명된다. 루소는 소피를 스스로 생각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심신의 약함을 알고 자연의 목소리를 따르고 오직 사랑하는 남자의 생각에 자신을 의탁하는 존재로 제시한다.

처음에 『여권의 옹호』는 익명으로 출간되지만, 폭발적인 반응과 책의 유명세에 응답하며, 울스턴크래프트는 2판에서 자신의 이름을 밝힌다. 하지만 호응만큼이나 반발도 거세 울스턴크래프트를 ‘사색하는 뱀’, ‘페티코트를 입은 하이에나’라 부르기도 했다.

 

(하편에서 계속됩니다-)

시대정신을 찾는 여정의 첫 발걸음: 신채호와 서울 [길 위의 우리 철학] – 13

 

1880년 겨울 지금의 대전에서 태어났고 세 살부터 청주에서 자란 신채호는 어린 시절부터 그 지역의 전통적 지식문화의 세례를 듬뿍 받고 자랐다. 몰락한 사대부 집안이었지만 엄격한 유학적 기풍을 고스란히 지닌 가문 분위기도 여기에 한몫했다. 조정에서 정3품 벼슬까지 지낸 할아버지에게 전수받은 한학으로 학문의 맛을 본 신채호는 열 살에 행시(行詩)를 짓고 열네 살 즈음에는 사서삼경을 독파할 정도로 공부에 제법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고 한다. 이웃마을의 문중 어른들에게 한학을 더 배우기도하고 신기선과 같은 이름 난 관료형 학자에게 수학하기도 한 신채호는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교한다. 비록 가난하긴 했지만 신채호의 이른바 학창시절은 한 지역의 인재가 출세가도로 가는 엘리트 코스에 다름 아니었다. 같은 지역 출신의 애국지사로 유명한 신규식·신백우와 더불어 산동(山東)의 삼재(三才)라 불렸다고 하니 얼마나 주위의 큰 기대와 성원을 받았을지 가히 짐작이 간다.

 

<단재 신채호 생가지 풍경, 대전광역시 중구 단재로229번길 47> 출처 : 필자

 

그러나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다. 고령신씨 신숙주의 후손으로 청주 상당산(上黨山) 동쪽에 모여 살았기에 산동대가(山東大家)라 불리는 신 씨 집성촌 사람이었던 신채호는 서울에 올라가서 가문의 영광과 보장된 자기 성공의 길을 놔두고 다른 길을 걸었다. 그 계기는 오히려 제도권 전통 교육의 최고 산실이었던 성균관에 입교한 것이 원인이었는지 모른다.

 

성균관에 들어간 신채호는 후일 자신의 전기 『단재전』을 짓는 변영만, 조소앙 등 신학문과 새로운 사조에 열중했던 학우들과 어울리면서 의병활동 지도자로 이름 높았던 이남규, 김연성, 애국계몽사상가 유인식 등에게 배운다. 새로운 시각과 관점으로 일본을 포함한 제국주의 외세가 침탈하는 현실을 자각하면서 역사를 보는 눈이 뜨였다. 우승열패의 신화로 점철 되던 구한말 대한제국 처지에서 사회진화론에 대한 관심은 구습·적폐를 버리고 신사조를 바라던 지식인층의 입장으로 일면 이해할 수 있다. 개화자강론에 관심을 보였고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했던 신채호는 성균관에서 외출 나올 때면 어김없이 서대문에 있던 독립관을 찾았다고 한다. 가장 급진적 자유·민권운동이었던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동했고 만민공동회의 철야시위에 참여했다가 연행되어 잠시 투옥되기도 한다. 이 때가 성균관에 갓 입학한 1898년 가을과 겨울 사이였다. 이 경험은 신채호에게 앞으로의 삶을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잠시 청주에 학당을 설립하여 신규식, 신백우 등과 애국계몽·신교육 운동을 벌이기도 한 신채호는 1905년 26세의 나이로 성균관 박사에 임명된다. 이 당시 박사라는 직함은 지금의 교수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다음날 이를 사직한다. 신채호는 전통적 학자의 전형이 되는 것을 거부했다. 성리학적 도덕주의와 세계관에 대한 믿음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이미 동아시아 내에서 배신당한 뒤였고 다이내믹하면서 잔인하게 전개되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무시하고 성균관 박사자리에 앉아있기에는 눈에 보이는 망국의 현실이 가시덤불과 같았을 것이다. 그 시절 그가 투신한 것은 기존 유학자의 길이 아니라 현실을 똑바로 인식하여 시대정신의 정화를 구현하는 길이었다. 신채호가 보기에는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최신 정보와 다양한 국내외 사조에 접근할 수 있는 언론인을 직업으로 택한 신채호는 1905년 『황성신문』 논설위원으로 초빙된다. 1904년 청주에 산동학당을 만들어 활동하던 중 며느리를 보기 위해 청주를 찾은 『황성신문』 사장 장지연과의 만남이 인연이 되었다. 신채호는 자기 연고지에서 소박하나마 뜻을 펼치려 했지만, 1900년대 초 서울에서 신채호의 활동을 기억하는 이들은 다시 그를 서울로 불렀다. 지금도 종각 지하철역 5번 출구에는 『황성신문』 옛터 표지석이 서 있다. 을사늑약이 이루어진 1905년은 사람들이 ‘을씨[사]년스럽다’는 말을 만들어 낼 정도로 침통하고 침울한 때였다. 한 국가 공동체가 당한 치욕의 시간을 민중은 그렇게 불러 기억했고 신채호는 펜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황성신문사 옛터, 서울시 종로구 서린동 33 (종각역 5번 출구 앞)> 출처 : 독립기념관

 

신채호의 『황성신문』 시절은 그리 길지 않았다.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에서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을 고발한 것을 빌미로 『황성신문』이 발행정지 당하자 신채호는 1906년 양기탁의 추천으로 대한제국시기 최대 항일신문인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기자를 맡아 다시 언론활동을 시작한다. 1907년 말부터는 본격적으로 논설을 기고한다. 지금의 종로구 수송동 조계사 뒤편, 목은영당 옆이 『대한매일신보』가 있던 자리다. 이 시기 언론인으로서 신채호의 의기(義氣) 넘치는 논설은 절정을 이룬다.

 

당시 신채호의 사상전개의 중심은 민족 개념에 대한 확립에 있었다. 1908년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민족’을 역사의 주체로 명명한다. 일찍이 우리에게 동포, 종족이란 개념은 있었지만, 민족(nation)이란 개념은 없었다. 민족은 근대적 개념이다. 신채호는 망국 앞의 나라가 위기에 우뚝 서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우리 역사에서 사대의 대상인 중국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화주의를 벗어나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역사를 관조하는 것은 현실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가장 중요한 작업이었다. 또한 이것은 세계질서가 된 사회진화론의 극복이기도 했다.

 

전근대적인 사대주의와 중화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조선 상고사에 대해 주체적으로 재해석을 가할 필요가 있었다. 1910년 이후 중국으로 건너간 신채호가 상고사에 몰두한 이유이다. 낭가(郎家)사상에 대한 연구는 우리 민족정신에 대한 고유성의 확보 시도였고, 이와 연계하여 1908~1909년 사이에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 최영 등 우리 역사의 상무적 영웅들을 소설을 통해 현실로 소환한 것은 시대의 한계를 돌파하는 강력한 힘을 민족의식으로서 요청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 논설에서 “이십세기 신동국의 영웅”을 두고 ‘국민적 영웅’이라는 뜻으로 설명하였고, 사회 전반의 각각 영역에서 활약하는 다수의 소영웅을 지칭하였다. 그리고 그 영웅들은 “이십세기 신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국민국가 출현의 바람과 세상을 이끄는 주체로서 신국민은 초기 신채호 사상에서 민족과 함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대한매일신문사 창간 사옥 터 표지석, 서울시 종로구 수송동 85 (목은영당 옆)> 출처 : 독립기념관

 

그런데 신채호는 1909년 『대한매일신보』 「제국주의와 민족주의」에서 “영토와 국권을 확장하는 주의”가 제국주의라 규정하고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다. 이것을 처음 언급한 사람은 일본의 아나키스트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이다. 신채호는 그의 저서 『기독말살론』을 한문으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보통 신채호가 아나키즘을 실천에 옮기려 한 시기는 1921년으로 알려져 있는데, 위 논설의 시기를 보면 이러한 사조를 처음 접한 것은 중국으로 망명하는 1910년 이전이라고 할 수 있다. 신채호는 중국 신문 『진보(震報)』에서 “일본에 오직 고토쿠 슈스이 한 사람만이 있을 따름”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고 1929년 재판정에서 진술할 때도 고토쿠 슈스이의 저서를 읽은 후부터 무정부주의(아나키즘)로 기울기 시작하였다고 발언한 적이 있으니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 아나키스트의 길을 걷게 되는 최초 영향이 고토쿠 슈스이로부터 있었음은 사실로 보인다.

 

일본을 강도로 규정한 아나키스트 신채호는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길의 정점에서 제국주의는 민중을 억압하는 ‘야수의 유린’이기에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민중 스스로 생의 본능에 의거하여 자유의지에 의해 자유행동’으로 폭력혁명과 무력투쟁에 매진해야함을 지지했다. 1923년 의열단장 김원봉의 요청으로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에는 이런 그의 사상이 잘 드러난다.

 

신채호의 서울살이는 1910년 중국 청도로 망명하기 전까지 이어졌는데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활동하던 1907~1909년 사이 ‘민족’에 대한 언급이 많이 보이지만, 경술국치 이후 신채호가 중국으로 망명한 1910년부터 현저히 감소한다. 국민국가 실현의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사라진 희망은 그의 자취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삼청동 신채호 옛집 터,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2-1번지> 출처 : 네이버 지도

 

신채호가 서울에 마지막으로 거주하던 집터는 지금의 삼청터널 가는 길 끝자락 삼청동 2-1번지에 있다. 변영만은 『단재전』 첫머리에서 이 집을 방문한 광경을 적고 있다. 신채호가 아내의 모유가 부족하자 독수리표 연유를 사다 주었는데 아내 풍양조씨가 아들 관일(貫日)에게 잘못 먹여 체한 병이 났다. 이것 때문에 화가 난 신채호는 집 앞 개울에서 연유통을 모두 도끼로 찍어버려 삼청동 개울물이 모두 우윳빛으로 변한 처참한 광경이 묘사되어 있다. 이후 변영만이 다시 방문했는데 그의 아들 관일이 사망한 뒤였다. 이에 신채호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관일이 마침내 백홍(白虹)이 되었어.” ‘흰 무지개가 해를 뚫고 지났다’는 이 말은 자식 잃은 슬픔을 표현한 것이 분명하지만 한편 앞으로 나타날 비상한 사건의 복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1909년 이 일을 빌미로 조강지처와 이혼한 신채호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중국으로 떠난다. 떠나기 전 삼청동 집을 팔기 위해 집문서를 넘겨야 하는데 이마저 분실하여 『대한매일신보』 1910년 4월 19일자에 집문서를 분실 광고를 낸다. 신채호 서울살이의 마지막은 이렇게 안타깝게 끝나는데, 알고 보면 이는 대한제국의 운명과 같은 것이었다. 그 당시 많은 인사들의 운명 역시 그러했겠지만 신채호의 시대정신을 찾는 여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시작되었다. 지금도 삼청동 신채호의 옛 집터는 휑한 시멘트 공터로 남아있다.

 

<『대한매일신보』 1910년 4월 19일자 신채호가 올린 광고> 출처 : 연합뉴스

 

기고자: 진보성(한국철학사상연구회)

동양철학을 전공했고 남명 조식으로 박사논문을 썼다. 한철연 분과모임에서 한국의 근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한 이후 전통철학과의 관계에 대해 관심이 많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김정철
  10. 현상윤, 최초의 근대적 체제의 조선사상사를 짓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0: 윤태양
  11. 구도와 구세의 길, 운명적 불화 – 한용운 [길 위의 우리 철학] – 11: 송인재
  12. 태백산에서 최후를 맞은 서양철학 1세대, 박치우 [길 위의 우리 철학] – 12: 조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