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철연에서 현재 운영되는 연구분과의 분과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분과 소개나 분과 세미나 결과물, 또는 분과 개인들의 글을 올리는 공간입니다.

베티 프리단(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3. <여성성의 신화>, 베티 프리단(上)

“가부장제가 만든 신화의 허울을 벗겨내다.”

 

김은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당신이 돌아보고 얼마나 먼지, 또 당신이 얼마나 왔는지 알게 되기 전까지는 얼마나 멀리 가야할지 알 수 없는 법이다…지금 수백, 수천 명의 여성들이 그러는 것처럼, 1963년에 어느 여성이 이 책이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고 말하며 처음으로 『여성성의 신화』에 사인을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나는 이렇게 적어줬다. “새로운 길 위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용기를!” 이 길에서 다시 돌아갈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신의 전 생애를 변화시켰고, 분명 내 생애도 변화시켰다. ”

 

  • 1942년 스미스 대학 입학생과 모나리자 스마일

 

1950년대 미국 동부의 웨슬리 대학을 배경으로 한, ‘모나리자 스마일’이라는 영화가 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줄리아 로버츠가 호연을 한, 영화의 주인공 캐서린 왓슨은 미술사 교수로 새로 부임해온다. 하지만, 왓슨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미래가 열린, 학생들의 인생 목표가 결혼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결혼 이외의 다른 삶의 가능성을 그들에게 제시하려 한다.

당시의 대학은 ‘결혼이 최고의 학생을 만든다’라는 표어를 걸고, 여학생을 완벽한 주부로 가는 길로 이끄는 예비 결혼 학교의 기능을 자처했다. 이 교육을 거치면서, 여성은 가정과 직업 중 전자를 선택하는 것이 자신의 미덕이자 의무라고 여기었다. 영화에서 왓슨은 학생들의 지성과 감성 그리고 잠재력을 일깨우고, 이러한 노력은 영화 결론부에 결혼 외에 다른 가능성을 긍정하는 학생들로 결실을 얻는다. 그러나, 영화에 등장하는 학생 중 하나는 법대로 진학하는 대신 결혼을 선택하며 말한다. “당신이 믿는 삶을 나까지 원해야 한다고 말하지 말아요. 내가 원하는 삶은 결혼이에요. 원하는 삶을 선택해야 한다고 한 건 당신이 아니었나요?” 결혼이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삶이라고 되받아치는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 1921. 2. 4. – 2006. 2. 4.)『여성성의 신화』는 시작된다. 바로 영화속 학생과 마찬가지로, 베티 프리단을 비롯한 많은 미국의 여학생들은 졸업 후 결혼을 선택했다. 그 역시 잘 재단된 드레스를 입은, 한 손에는 책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프라이팬을 들고 있는 재원이었다. 멋진 남편의 배우자이자, 귀여운 아이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며, 완벽한 가족의 꿈을 그렸다. 하지만 십여 년이 흐른 뒤, 프리단은 『여성성의 신화』를 통해서 영화 속 결혼을 선택한 그 여성으로 대변되는 많은 여성들의 인생 설계가 정말로 자유로운 선택인 것인가? 그리고 지금 행복할까? 라고 반문한다.

베티 프리단은 10주년 기념판 서문에서 솔직하게 다음과 같이 쓴다. “이 책을 쓰기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여성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책을 쓰고 난 후 일생은 달라졌다. 프리단이 말한 것처럼 “내가 이 책을 썼다는 것 자체가 참 믿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내 생애 전체가 이 책을 쓰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 식탁 위에서 글을 쓰다

 

베티 프리단은 일리노이주 피어리어에서 신문기자를 하다 전업주부가 된 어머니 미리엄과 보석상인 아버지 해리 골드스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전학년 올 A라는 훌륭한 성적으로 스미스 대학을 우등 졸업한, 프리단은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한다. 대학원 졸업 후 그는 심리학과에서 특별연구원 지위를 제안 받았으나 거절하고, 뉴욕에서 노동 전문 기자로 활동한다. 프리단 역시 경력단절의 아픔을 겪었다. 두 번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해고되고, 그 후 여러 잡지에 프리랜서로 글을 기고하지만, 전업 주부가 된 것이다. 프리단은 1957년, 그의 일생을 바꾼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미국의 전형적인 중산층 주부의 삶을 살았다. 모교인 스미스 대학의 15주년 기념 동창회 사업의 일환으로 졸업생 동문 조사를 요청받은 것이다. 프리단은 대학 동창을 대상으로, 졸업 후 변화한 그들 삶에 대한 심층 면접 작업에 착수한다.

면접을 진행하던 당시, 프리단 역시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자신의 열의 없는 삶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프리단은 심층 면접을 통해서 남성과 마찬가지로, 공적 영역에 참가할 수 있는 교육을 받았으나, 소위 ‘미국 정상 여성’의 이미지와 맞추기 위해, 가정에서 머물 수밖에 없는 여성들, 가정과 사회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성들을 포착한다. 프리단은 그들 중 다수가 주부로서의 생활에 그다지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의 발견은 프리단으로 하여금 다음 질문으로 나아가게 한다. “교육을 받았지만, 왜 여성들은 자신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가. 남편의 아내나 아이의 어머니가 아니라 사람 그 자체로 활동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왜 여성들이 갖는가.”

프리단은 전업 주부의 삶을 살아가면서, 동시에 위에 대한 답을 얻고자 근 5년간 독학으로 도서관을 찾아가 자료를 찾고 여성성의 신화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프리단은 스미스대학 동창생들의 설문조사를 시작으로 고등학생과 대학생, 기혼 여성들을 심도 깊게 인터뷰하고, 각종 매체의 기사와 광고, 전업주부 결혼생활을 추적하면서 방대한 양의 취재와 자료 조사를 실시한다. 또한, 잡지와 광고에 대한 이론과 심리학 저서들을 분석하면서, 사회가 여성들을 어떻게 억압하고 있는지 밝혀낸다.

이 때 그는 사회가 제시한 여성성에는 아내, 어머니로서 여성적 경험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러한 여성성은 여성들이 가정 말고는 아무것에도 관심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경고한다. 다시 말해, 여성은 정치, 예술, 과학, 크고 작은 사건, 전쟁과 평화 등 어느 것에도 자신을 동일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성은 남성만이 주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소위 여성성에 담긴 의미를 분석하면서, 프리단은 자신이 여성성의 신화에 사로 잡혀, 거짓된 삶을 살아왔음을 자각한다.

여성성을 분석하고 그에 대해 글을 쓰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조롱하고 비난했지만, 프리단은 무시하고, 집안일을 하지 않을 때 외에는 항상 글을 썼다. 식탁 위에서 글을 썼고, 거실 소파에서도 글을 썼다. 아이들을 돌보고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글쓰기를 잠시 멈출 때에도 머리 속에서 이어 쓴 후 아이들을 위한 시간을 마치고, 재운 후에 작업을 계속했다.

이제는 여성학의 고전이 된 『여성성의 신화』는 원래 책의 형태가 아니라 르포 형식의 기사로 기획되었다. 하지만, 어떤 잡지도 프리단의 기사를 게재하지 않으려 했다. 그저, 노이로제 있는 주부들에 대한 특수한 이야기로 치부할 뿐,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삼는 잡지에서 적절하지 않다고 여겼다. 여성 잡지 조차, 자신의 세계의 근간인 여성성의 신화를 위협하는 프리단의 글을 거절했다. 하지만, 『여성성의 신화』이 출간되자, 여러 가지 우려와 달리, 초판 발행 3000부가 순식간에 매진되었을 뿐 아니라, 260만부가 넘게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된다. 판매 지수는 갱신되었고, 프리단은 스테디셀러 작가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우선, 『여성성의 신화』는 당시 미국에 결혼한 여성의 40%가 10대였던 1960년대 미국 여성상에 대한 최초의 실증적인 기록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또한, 방대한 연구는 여성들이 겪는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을 최초로 명백하게 드러냈다. 게다가 이 책은 ‘여성성’이라는 이미지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여성에게 부과되는지 그 과정에 대해 충실히 설명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은 당시로는 급진적인 주장을 감히 선언한다. “남편과 아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책은 행복한 현모양처란 없고, 여성은 남편과 육아에서 벗어나 사회적 활동에 뛰어들어 실질적 성평등과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고 강하게 말한다. 책의 울림은 컸고, 수많은 여성들의 삶과 의식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면서, 제2세대 페미니즘 운동의 위대한 서막을 알렸다.

 

  • 여성성의 신화: ‘더 없이 행복한 주부는 왜 그리 불행한가?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 도입부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등장한다. “왜 교외의 크고 멋진 저택에서 네댓 명의 아이를 기르고 남편을 내조하며, 세간의 인식대로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야 할 주부들이 불행하다고 느끼는가?” 왜 더 없이 행복한 주부는 그토록 많은 죄책감에 시달리며, 자기 자신에 집중하는 순간 이기적이라고 자신을 여기는가? 왜 여성은 자신의 욕망을 죄악시하는가?

프리단이 주요하게 관심을 둔 중산층 백인 주부들은 소위 안정적이고 평온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온통 공허감과 권태감이 있고, 주부들은 자신의 삶을 불행하다고 여겼다. 프리단은 당시 여성들이 가정주부로서 겪고 있던 내면적 갈등을 자세히 묘사한다. 교외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집에서 살면서, 직장으로 떠나는 남편을 배웅하고, 아이를 학교로 보내고 난 후, 모두 떠난 빈 집에서 홀로 앉아 “이게 정말 행복일까?”라고 회의한다. 마음의 상태와 눈에 보이는 현실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주부들은 더더욱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더더욱 힘든 것은, ‘자신이 선택한’ 이 아름다운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이 불행은 아무에게나 발설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마음과 현실 사이의 갈등은 오랫동안 침묵의 영역에 머물렀을 뿐 아니라, 여성들을 더욱 더 고통스럽게 했다. 베티 프리단은 미국의 많은 여성들이 이 고통을 겪고 있음을 발견하고,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에 널리퍼진 여성들의 고통을 오직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들’로 명명한다.

그렇다면,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들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성성이라는 허구적 신화 때문이다. 당시 미국에 만연해 있던 허구의 이미지, 즉 여성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기르고 남편을 내조하면서 만족을 느낀다는 것은 통념일 뿐이다.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선택으로 결혼했고, 그러한 여성성을 추구한다고 말했지만, 이는 사실상 어떤 신화에 불과한 것이다.

프리단이 책 제목으로 쓴 ‘여성성의 신화’란 결국 말 그대로 실재로는 존재한 적 없는, 여성성과 무관한 그저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신화를 지칭한다. 이러한 여성성의 신화는 각종 매체, 광고, 교육, 학자들이 작위적으로 만들어 낸 현대식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를 의미한다. 오직 남성 중심적인 학계와 매스미디어가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신화로 만들고 사회 전반에 통용 시켜 여성에게 주입한 것이다. 이 여성성은 그 능력과 상관없이, 여성을 재생산 기관으로만 간주하는 사회가 만들어 냈다.

신화의 힘은 강력하다. 여성들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인생 여정 외의 다른 미래를 상상하지 못했다. 주부이자 어머니로서 사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배운 여성들은 학업을 이어가거나 직업을 가지는 일 없이 이른 나이에 결혼하여 가정주부로 살았다. 이 신화의 강력한 위력 속에서, 주부들은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집안일을 하고 자식과 남편을 뒷받침하는 삶을 살면서 동시에 괴로워했다. 또한, 맞벌이로 일하는 여성들은 자신이 일을 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엄마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죄책감을 느겼다. 이 신화는 프리단의 시대뿐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렇기에, ‘여성성’을 사회가 아무리 찬양한다 하더라도, 여성들은 그 ‘여성성’으로 인해 더 억압받고 원인 모를 고통에 시달린다. 프리단은 더 이상 그러한 여성성의 신화로 인해 여성들이 고통받을 필요가 없음을 강력하게 주창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성은 ‘내가 누구이며, 내가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그것을 죄라고 느껴서는 안 된다. 여성들은 남편과 아이를 넘어서 자기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기를 원하는 것을 이기적이라고 느낄 필요가 없다.”

 

  • 1950-1960년대 미국 여성들

 

그렇다면, 왜 당시 미국 여성들은 사회가 강요한 여성성의 신화를 의심하지 않은 채 받아들이는가? 밀이 여성의 종속을 쓸 당시만 해도, 미국 여성은 영국 여성의 지위에 비해 훨씬 진보한 여성의 권리를 획득했고, 참정권과 재산권 역시 다른 나라 여성들에 비해 먼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참정권 운동이 끝난 후, 오랜 기간 동안 미국여성운동은 구심점을 찾지 못한 채 표류했다. 여성문제를 제기할 중심을 상실한 미국 여성들은 더 이상 여성운동을 지속시켜 나가지 못했다.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1950년대 아이젠하워 시대의 미국은 데이비드 리스먼이 “고독한 군중”으로 칭한, 순응주의적인 미국 시민들의 사회였다. 이들은 사회에 복종하는 존재들로 자신을 자리 매김한다. 이 시기에, 미국은 ‘풍요한 사회(Affluent Society)’로 불렸고, 뉴딜 정책과 제2차 세계 대전을 통한 경제 성장과 소득의 재분배의 효과로 넓은 중산층이 양산이 된다, 이들 중산층은 동질화(homogenization)된 미국적 가치의 상징이기도 하다.

거대한 기업 조직과 관료 조직이 사회를 지배 하면서, 청년들은 순종적인 소시민을 소망하고, 안정된 직업, 전원 주택, 퇴직 계획과 같은 개인의 안전에 관련된 문제에 주로 관심을 가지는 ‘조용한 세대’가 된다. 이 조용한 세대는 다수의 생활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과 같은 대중 매체의 발달은 이 청년 세대의 욕망을 조직하는데 일조한다. 1960년 초 미국 사회에서 텔레비전 보급은 전체 가정의 90%에 이르게 되었고, 텔레비전이 영상으로 전달하는 메세지는 어린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국민의 모든 계층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미디어의 영향이 본격화되면서, 소비자들의 새로운 욕망을 만들고, 소비자들의 기호를 조작한다. 이와 더불어, 교육의 대중화 역시 사회의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비할 수 있는 사회 적응의 수단을 제공하는 도구로 작동하는데, 그 과정에는 여남의 데이트 방법, 여남 고정적 젠더 역할, 정상 가족의 가치 같은 것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1950년대와 1960대 초 분위기에서, 미국 사회의 여성 위치는 이전의 여성 해방 운동 시기와는 다를 수 밖에 없었다. 1930년대 미국은 경제 공황을 겪으면서 기혼 여성 취업을 금지하는 입법을 추진했지만, 동시에 전쟁시기에는 여성들의 노동력을 요구했다. 그 사이 많은 여성들은 경제 참여와 가정복귀의 악순환을 경험한다. 이에 따라 기혼여성이 가정 밖에서 일을 하는 것은 남성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라는 인식이 전반적인 사회적 분위기로 자리잡았다. 전 후, 순응주의적 사회 분위기에서 중산층 여성들은 사회 안정의 보루인 가정을 꾸리는 존재로 제시되었으며, 대중문화는 참된 양육자인 가정의 어머니의 역할만을 여성에게 강조할 뿐이었다. (이창신 저(2004), 미국 여성사, (주) 살림출판사)

이러한 환경이 빚어낸 시대에 살아가는 여성은 자신의 임금은 남성보다 낮고, 임신과 출산을 할 경우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자기 아이에게 모유 수유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좌절한다. 여성은 “하루를 살아도 아름다운 여성으로 살겠어요”라고 말하는 광고를 자신의 욕망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여성들은 시달리고 있고, 결코 이렇게 사회가 선전하는 여성성 덕분에, 행복할 수는 없다.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유림의 정신으로 독립의 길을 걷다, 심산 김창숙 [길 위의 우리 철학] – 19

김세리

 

조선에 한 선비 있으니

벽옹 김창숙이라.

머리는 희었으되

마음은 일편단심

나라 구하려는 생각

그것 말고 무어 있을까.

차라리 독립을 위해

죽은 귀신 될지언정

신탁통치 노예는 절대로 되지 않으리.

인생이란 언젠가

죽게 마련

죽으면 죽었지

욕되게는 살지 않으리.

 

김창숙(金昌淑,1879∼1962)이 노년에 쓴 「신탁 통치」라는 시이다. 자신의 의지, 털끝하나 굽히지 않겠다는 결의가 칼날 같다. 나라의 운명이 어지러운 시절 그는 머릿속에는 오로지 ‘조국’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떳떳한 죽음을 선택하는 기개, 수많은 불의를 물리치고 오직 조국의 앞날만을 걱정하는 애국심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적어도 직접적인 외세의 압력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시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쩌면 이해 불가의 일들이 아닐까? 아니 시대를 뒤집어 내가 그 시절을 살았던들 그러한 용기와 기백을 가질 수 있었을까. 시대의 어른으로서 민족의 정신적 기둥으로 삶을 살아간 그를 찾아 떠난다.

 

칼날 같은 정신으로 한결같은 그 길위에

_심산 김창숙 기념관 (서울특별시 서초구 사평대로 55)

 

한국 역사에는 애국의 길을 걸었던 수많은 선각자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대의와 정의를 위하여 그들은 스스로 무자비한 혹한의 시간을 선택했다. 그들의 희생으로 지금의 우리가 이렇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늘 고마움을 잊지 않아야겠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잊은지 오래며 알지도 못하는 경우가 태반일 것이다.

구국운동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가족의 인연은 물론이며 사적인 소유 모든 것, 뿐만 아니라 자신 스스로를 온전한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다. 김창숙 또한 그러하다. 파란굴곡의 시대를 살며 그의 심장은 오로지 나랏일을 위하여만 뛰었다. 다른 우국지사들과 다른 면이 있다면 유학자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선비로서 학문과 인간적 도덕성을 갖추고 세속의 영화를 탐하지 않고 죽는 그날까지 청렴과 지조를 지켰다.

우선 그의 일대기가 한곳에 담아져있는 심산 김창숙 기념관 돌아보기로 한다. 기념관은 그의 고향인 경북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1974년 심산기념회에 의해 건립)와 서울 서초구 반포동(2011년 서초구에 의해 건립) 두곳에 있다. 서초동 기념관은 반포공원과 서초구민체육센터와 이웃해 있고 기념관에서도 자체적으로 여러 가지 문화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발길이 잦은 편이다. 기념관 입구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그의 동상이 마주한다. 무궁화 꽃에 둘러싸여 무릎에는 서책을 놓아두고 조금은 편안하게 앉아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다.

무궁화는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서책은 유학을 상징하는 것일 게이다. 평생을 나라의 일로 달리다가 끝내는 모진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었지만 동상이나마 편안하게 앉아계신 모습이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여러 행적을 보여주는 사진 속 표정이나 그의 필체를 통해서 한걸음 한걸음 그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 본다.

 

심산 김창숙 동상

김창숙 기념관 내부 모습

 

‘파리장서(長書) 운동’은 김창숙의 대외적 활동의 첫걸음이었다. 1919년 3월 1일 발표된 독립선언서에 유림 대표가 한 명도 없음을 보고 심산은 “망국의 책임을 져야 할 유교가 이번 독립운동에 참여치 않았으니 세상에서 고루하고 썩은 유교라고 매도할 때에 어찌 그 부끄러움을 견디겠는가?”라고 통탄하였다. 유교의 나라에서 유림이 민족대표에서 빠진 것을 치욕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열국 대표들에게 호소해서 국제 여론을 환기시켜 우리의 독립을 인정받도록 한다면 우리 유림도 독립운동의 선구가 됨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라고 보고, 전국의 유림대표를 규합하여 연명으로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만들어 보낼 계획을 추진하였다. 우선 영남 유림의 영수(領袖)인 곽종석에게 알려 협조를 구하며 파리장서의 작성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 동지들을 파견하여 유림대표들의 지지와 동참을 호소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호서유림도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거의 같은 동기와 목적에서 장서를 작성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려고 준비하는 중임을 알게 되어 양측은 공동으로 파리장서를 제출하기로 하였다. 137명의 유림대표들의 연명으로, “한민족은 불행히도 그간 일제의 간악한 침략으로 인하여 현재는 노예적 상태에 있지만, 역사적 전통과 현실적 역량에 있어서 충분히 독립자존의 능력을 갖추고 있으므로 인간 및 만물을 통한 독립생존의 원리에 비추고, 또 강화회의에서 실현코자 하는 민족자결원칙에 입각하여 우리 한민족에 대해서도 자주독립을 보장하라”고 요구한 파리장서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이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도록 결정하였다.

김창숙은 137명의 연명으로 작성된 장서(長書)를 품고 극비리에 중국 상해로 출국했다. 상해에서 동지들과 의논 끝에 독립청원서를 영역(英譯)하여 이미 파리에 가 있는 김규식(金奎植)에게 보내 회의에 제출하게 하고, 김창숙은 중국과의 외교 활동을 위해 상하이에 남았다. 그리고 이 장서를 인쇄하여 중국의 정계와 언론계, 각국의 대사·공사·영사관 그리고 해외 교포들의 거류지와 국내 각 지방 향교에 빠짐없이 우송하였다.

이런 움직임을 인지한 일제(日帝)는 곧 국내 유림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활동을 벌여 500여 명을 체포하였는데, 이것이 이른 바 ‘제1차 유림단 사건’이다. 이는 독립운동에 있어서 유림의 참여라는 의의를 넘어 국내 민중운동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이 독립을 절실하게 염원하고 있음을 세계만방에 전파하였다.

 

혁신유림계의 선각자

_성균관(서울 종로구 성균관로 31)

 

성균관 명륜당

 

유학(儒學)의 산실로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인 성균관(成均館). 성균관은 단순히 교육만을 담당하는 기관은 아니었다. 유학의 역사에 공헌한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향사(享祀) 역할이 교육 못지않은 중요한 기능이었다. 그래서 성균관 건축은 이른바 전묘후학(前廟後學)이라는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앞쪽에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향사 공간을 앞쪽에 마련하고[대성전(大成殿)] 그 뒤로 교육 공간[명륜당(明倫堂)]을 배치하였다. 명륜당 앞뜰에는 행단(杏壇)을 상징하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우뚝하니 서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곳에서 머물렀는지 나뭇잎 하나하나에 시간이 모인 듯 거대하고 울창하다. 지금의 우리들에겐 한가하고 여유로운 문화유산이지만, 이곳은 율곡, 다산, 단재에 이어 심산 그리고 지금의 우리에 이르기까지 역대적 발자취가 켜켜이 모아져 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김창숙의 유학 정신 또한 이곳이 본향이고, 때로는 의미를 쇠퇴했던 성균관을 바로 잡기 위하여 그는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투쟁의 시절, 온갖 모진 압박과 수난을 버티었던 정신의 모태는 유학 정신의 힘이었다.

명륜당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과 유림의 지도자 김창숙

촬영일: 1948.09.09 서울 성균관, 제공: 우리역사넷

 

 

1927년 12월 재판에서 나석주의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사건의 주동자로서, 살인미수, 치안유지법, 폭발물 취급령 위반 등의 죄목으로 14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이 때 당한 혹독한 고문으로 두 다리가 마비되어 하반신이 불구된다. 이후 평생토록 앉은뱅이로 삶을 보내 ‘벽옹(躄翁)’이란 별호를 얻게 된다.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던 김창숙은 병이 악화되어 1929년 5월 대구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러나 병세가 심해 고향으로 옮겼으나 대구지장법원 검사장에 의해 곧 재수감되었다. 그는 오로지 정신력으로 이 시기를 이겨내는데, 몸 성치 못한 와중에도 『자서종요(字書綜要)』를 편찬하였으며, 『육경(六經)』 · 『이정전서(二程全書)』 · 『이학종요(理學宗要)』 등을 읽고 사유하며 천인성명(天人性命)의 심오한 이치를 연구하여 마음의 안정을 구하였다.

옥중 생활 중에도 자신의 의지를 꺾는 일이 없었으니 1933년 새로 부임한 전옥이 김창숙에게 절하기를 강요하자, ”내가 옥에 들어온 지 이미 6~7년이 되었지만 옥리를 보고 머리 한번 까딱하여 절한 일이 없다. 나는 위협으로 내 뜻을 변할 사람이 아니다. 내가 너희들에 대해서 절하지 않는 것은 곧 나의 독립운동의 정신을 고수함이다. 대저 절은 경의를 표하는 것인데 내가 너희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라고 하며 끝내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당시 안창호와 여운형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이감되어 김창숙과 함께 수감되었다. 당시 쓴 시이다. 창자가 찢어지는 듯한 그의 애절한 마음이 전해진다.

 

7년 세월 이미

죄수로 몸져 누웠으나

나의 본 자세를 지킴은

나쁘지 않았어라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으라니

어찌 차마 말하랴

분통의 눈물이

창자를 찢는구나!

 

교육을 통한 민족정신 고취.

_성균관대학(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25-2)

 

1945년 가을. 김창숙은 옥중에서 광복을 맞이한다. 이후 정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유학의 근대적인 발전에 힘을 쏟게 된다. 시대에 맞는 새로운 유교문화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며, 일본이 왜곡시킨 유교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 하였다. 일제에 의해 유린되었던 성균관의 복구는 물론이요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인재육성을 위한 성균관대학의 설립에 뜻을 두게 된다. 물론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재정이 필요하였고, 당시 열악한 상황에서 재정을 모으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김창숙은 성균관대학의 설립이 나라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균관은 곧 우리나라의 유학을 높이 장려하던 곳이다. 유교가 쇠퇴하면 국가도 따라서 망하고 나라가 망하면 국학도 역시 망한다. 지금 학생 몇몇 사람이 강개하여 유학을 부흥할 뜻이 있어 명륜전문학원을 개인적으로 세웠으나 재정이 궁핍하여 유지할 방법이 없어서 길가에서 호소하다가 장차 해산하게 되었으니 어찌 우리 유교인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진실로 건국의 대업에 헌신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우리 유학문화의 확장에서 시작할 것이다. 진실로 우리 유학문화를 확장하고자 하면 마땅히 성균관대학의 확립으로써 급무를 삼을 것이다. 진실로 성균관대학을 창립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우리 전국 유교인의 힘을 합함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다. 장차 전국 유교인이 합치느냐 못하느냐는 성균관대학이 성립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있고 장차 성균관대학이 설립되느냐 못하느냐는 건국 대업이 늦느냐 빠르냐를 점칠 것이다.『심산유고(心山遺稿)』

 

성균관대학교 심산 김창숙 동상

 

그는 유학의 가치가 나라 운명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기에 교육의 장을 마련할 수 있는 학교 설립의 일은 무엇보다도 절실하고 급박한 일이었다. 우선 그는 학교 설립을 위한 재원을 만들기 위해 향교 재산을 추심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잘못된 관리 규정을 철폐하고, 향교 재산을 회수하고자 하였다. 1946년 6월 28일 성균관대학기성회(成均館大學期成會)를 발족하고, 집행위원회를 구성하였고 그해 9월 25일에 성균관대학을 정식으로 인가받게 된다. 물론 교과과정에 유학과 철학을 각 과에서 기본으로 공부하도록 필수 교양과목으로 지정하였다.

교육은 그 시대에 할 수 있는 최고의 애국운동이었다. 김창숙은 “오늘날 우리의 유교정신은 옛 봉건시대의 진부한 사상을 그대로 답습하려는 것이 아니오, 또한 외래사상이나 문화를 무조건 배척하거나 숭배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직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가장 좋은 점만을 절충하여 우리의 고유한 유교정신에 귀납 함양시키려는 바이다.”라고하여 구태의연하고 답답한 교육이 아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현실적인 교육을 추구하려는 명백한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말뜻을 가만히 곱씹어 보노라면, 그의 정신 바탕이 유교였기 때문에 그것을 천명하는 것이지, 조국과 민족에게 그것조차 걸림돌이 된다면 과감히 버릴 수 있는 그런 과단성 있는 인물임이 틀림없다. 즉, 그가 원하는 것은 건강한 나라 땅에 건강한 정신의 우리사람들이 사는 것이지, 그 우위의 어떤 절대적인 것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정문 왼편에서 당당한 그를 만날 수 있다. 하늘을 향해 쭉 펴 올린 오른팔은 우리가 함께 가야할 지향점을 표명하는 듯 힘차고 강렬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듯한 도포자락은 어떠한 불의에도 대항하여 박차 오르는 의지의 기상이다. 그는 그렇게 그 자리를 비가오나 눈이오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한결같은 의지의 사람으로 남았다.

 

여전히 빛나는 백절불굴(百折不屈) 정신,

_심산 김창숙 묘역 (수유리 산 127-4)

 

심산 김창숙의 묘역

 

1955년 무렵부터 독재 권력과 그 주구들에 의해 소위 성균관 및 성균관대학의 분규가 확산되어 심산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1960년 4·19혁명 직후 성균관에서는 심산을 다시 모시려했으나 이미 기력이 쇠퇴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대표에 추대되기도 하였으나 5·16으로 그마저 무산되었다. 성균관대학에서 물러난 심산은 곤궁한 생활 속에 여관과 병원을 전전해야 했다. 심산의 곧음과 청렴한 삶의 태도는 대학을 세우고 학장·총장을 지내고서도 셋집에서 여생을 보내게 만들었다. 세인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안되고 안타까울지언정, 유학의 정신에서 보자면 대의를 이루고 정의를 지표삼다가 빈곤하게 사는 삶은 그저 당연한 일이다. 물론 그리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심산은 1962년 5월 10일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84세를 일기로 서거(逝去)하였다. 투철한 선비정신의 소유자요, 불요불굴(不撓不屈)의 위대한 저항 자세와 과감한 행동주의(行動主義)의 표상이었던 심산이 세상을 떠난다. 5월 18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사회장으로 거행된 장례식 후 서울 수유리 산 127-4 묘지에 안장되었다. 묘역은 고요하고 가끔씩 지나는 새들이 지저귈 뿐이다. 격동의 시대를 살았고 지고지순한 마음으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고, 나아갈 바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고 움직였던 그. 시대의 참 어른이 존재한다는 것은 든든한 마음줄과 같은 것. 그래서 그 어려운 시절을 함께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김창숙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전통적 원칙을 지켜나갈 때 비로소 대의명분이 세워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마음(心)’에 의한 행동주의, 그리고 시대적 의리에 의한 대의명분론.

평생을 백절불굴(百折不屈) 정신으로 살아낸 떳떳한 유림의 표상.

 

심산 김창숙의 생전 모습

 

 

기고자: 김세리(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다산 정약용의 소통과 관련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 분과에서 동학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으며, 다도(茶道)철학과 오감(五感)을 통한 인간미감(人間美感)을 연구 중에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김정철
  10. 현상윤, 최초의 근대적 체제의 조선사상사를 짓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0: 윤태양
  11. 구도와 구세의 길, 운명적 불화 – 한용운 [길 위의 우리 철학] – 11: 송인재
  12. 태백산에서 최후를 맞은 서양철학 1세대, 박치우 [길 위의 우리 철학] – 12: 조배준 
  13. 시대정신을 찾는 여정의 첫 발걸음: 신채호와 서울 [길 위의 우리 철학] – 13: 진보성
  14. 큰 이룸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간 삶의 철학자, 도산 안창호 [길 위의 우리 철학] – 14: 배기호
  15. 밑바닥에서 진리를 찾은 이- 장일순 [길 위의 우리 철학] – 15: 구태환
  16. 서재필과 개화운동, 계몽을 통해 근대를 꿈꾸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6: 박영미
  17. 이항로의 위정척사, 당신들만의 진리 [길 위의 우리 철학] – 17: 구태환
  18. 한국 현대 철학의 주목받지 못한 변방, 함석헌 [길 위의 우리 철학] – 18: 유현상

한국 현대 철학의 주목받지 못한 변방, 함석헌 [길 위의 우리 철학] – 18

유현상

 

둘리네 동네의 어느 골목

가느다란 봄비가 내리는 날 도봉구 쌍문동으로 향했다. 그런데 쌍문역 4번 출구로 나와 조금 걷다보니 이곳이 바로 둘리네 동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갑자기 생각난 것은 아니고 ‘아기공룡 둘리’에 나오는 희동이가 길 안내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 동네는 8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무대이기도 했다. 사실 쌍문동은 지나가기만 했지 돌아다녀 본 것은 처음이다. 둘리를 보니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지만, 한편 생각해보면 개성 없이 확장된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지역을 알릴만한 소재의 빈곤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해서 서운한 감정도 생긴다.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다. 쌍문역에서 800미터 정도 거리에 있다고 희동이가 알려주었다. 그곳은 개성 없이 확장된 서울의 여느 주택가와 다를 바 없는 골목에 자리하고 있었다. 가는 길에는 목적지를 찾느라 주의 깊게 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돌아오는 길에 보니 골목 어귀에 고만고만한 규모의 분식집들이 여러 개 보이는 것이 조금 다른 풍경이었다. 요즘에는 학교 근처에도 문구점이나 분식집이 그저 한두 개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가보다. 그러고 보니 완만한 골목 맨 윗자리에는 유치원부터 초·중·고등학교가 다 몰려 있었다. 정의여중고 입구 교차로에서 정의여중고 방향의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 조금 올라가다 오른쪽 작은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니 목적지가 나타났다.

평안북도 용천이 고향이니 함석헌(1901~1989)의 생가 등을 찾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하니 그의 삶의 흔적은 그가 마지막에 살았던 곳에서나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설령 통일이 된다고 해도 북한 지역에서 그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을 듯도 하다. 다만 그가 다녔던 평양고보 자리나 평안북도 정주에 있던 옛 오산학교 자리나 나중에 확인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그의 마지막 거처는 지금 ‘함석헌 기념관’으로 변경해서 운영되고 있다. 원래 함석헌은 용산 원효로의 있는 작은 집에서 오랫동안 거주하였다. 지금 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집은 차남 함우용 내외의 집이었다. 도봉구는 이곳을 2015년 9월 함석헌 기념관으로 개관하였다. 친지들의 도움으로 6.25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원효로 작은 집이 욕심 없이 소박한 삶을 살았던 함석헌을 보여준다면, 서울의 변두리 끝자락 쌍문동의 집은 강단철학에서 외면받아 온 한국 철학의 변방을 상징한다고 한다면 다소 지나친 생각일까?

 

(사진 1. 함석헌 기념관 )

 

우선 들어간 곳은 맨 아래 층에 위치한 작은 전시실 ‘씨ㅇ·ㄹ 갤러리’였다. 전시 내용은 ‘붓글씨로 만나는 함석헌’ 전이었다. 함석헌이 남긴 글의 내용을 여러 사람이 붓글씨로 표현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함석헌은 워낙 많은 글과 시를 남겨 그의 글귀나 시를 소재로 서예전을 기획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쉬운 발상이라고 생각되었다. 사전에 조사해 본 바에 따르면 ‘씨 갤러리’에서는 다양한 기획의 함석헌 관련 전시를 하는 모양이었다. 뿐만 아니라 주민들을 위해서는 무료 대관도 해준다고 되어 있었다. 왠지 내부 통로를 이용하는 것은 정식 방문을 하는 느낌이 안 들어서일까 위로 향하는 내부 계단이 있었으나 굳이 바깥으로 나가 정문 출입구로 향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작은 마당에 들어서니 기념관 안내판이 있었고 2층 현관 옆에는 함석헌의 묘비가 있었다.

 

(사진2 – 함석헌 묘비, 함석헌 기념관)

 

원래는 경기도 연천에 있던 묘를 2006년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할 때 묘비는 이곳 기념관으로 옮겼다고 안내하고 있다. 2층은 안내 데스크와 전시를 위한 공간이다. 전시공간에 들어서자 맞은 편 벽에 제일 먼저 연보가 펼쳐져 있다. 이어 안쪽으로 들어가니 거실이었을 공간에 육필원고와 함석헌이 발행한 ‘씨의 소리’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더 안 쪽 방은 영상전시실이었는데 이곳에서는 함석헌의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들의 영상 자료를 계속 상영하고 있다. 함석헌이 사용한 방에는 자그마한 앉은뱅이 책상에 성경책이 자리를 하고 있다. 그렇지! 그는 스스로 한국교회의 이단자임을 자처하였지만 평화운동가이자 시인인 함석헌은 무엇보다도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종교사상가였다. 그의 소박한 책상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성경이었다.

 

(사진 3 – 함석헌 서재의 성경책, 함석헌 기념관 )

 

저항과 사상혁명의 길

함석헌의 고향인 평안북도 용천은 일반인들에게는 2004년 용천역 폭발사건으로 더 잘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함석헌이 고향의 참사를 들었더라면 참담한 심정을 금치 못하였으리라. 일본의 패망에 뒤이은 한반도의 해방은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에게 그러하듯 고난의 끝이 아닌 새로운 고난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것은 함석헌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북한 지역에 진주한 소련군은 함석헌에게 반공세력에 대한 정탐 요구를 했다. 이를 거부한 함석헌은 소련군에 의해 두 차례 더 옥고를 치른 후 북한에서의 삶을 뒤로 한 채1947년 3월 가족들을 두고 홀로 월남한다.

소련군의 탄압을 피해 월남했건만 그 이후의 삶 역시 함석헌에게는 녹록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도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가 제 자리를 잡지 못하였으며, 그의 삶 전체는 독재와 타락한 문명에 대한 저항으로 채워지게 된다. 함석헌이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보이기 시작한 계기는 5ㆍ16군사 쿠데타 이후였다. 영국과 미국 등지에서 퀘이커리즘에 대한 연구를 마치고 1963년 독일에 들러 안병무를 만나고 난 후 귀국한 함석헌은 본격적으로 5ㆍ16군사 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의 부당성을 알리는 강연 활동을 한다.

1970년에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독재정권과의 싸움을 계속했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해 박정희정권만이 아니라 비겁과 나약에 빠진 지식인들과 언론을 거침없이 질타했다. 1971년 7월부터 1988년 5월까지는 오랜 동안 노자와 장자에 대한공개 강좌를 열기도 했고, 1973년부터는 여기에 더해 퀘이커리즘과 성경을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어 교육 활동에 함썼다. 비록 기독교적인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었지만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고 개방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었던 함석헌은 1967년에 이르러서야 그 전부터 호의를 갖고 지켜 본 퀘이커교도가 된다. 하지만 퀘이커리즘에 대한 연구는 그 전부터였다. 그가 퀘이커 교도가 된 계기는 한국 기독교 사회에서의 고립되었던 자신의 상황 때문이기도 하고 인류 평화와 사회 정의 실현을 중시하는 퀘이커리즘의 정신 때문이기도 하다.

1970년대의 함석헌의 주요 활동은 반유신 활동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974년 11월에는 김대중, 윤보선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협의화 공동의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76년 3월 1일에는 김대중, 윤보선, 안병무, 이문영, 이태영, 이우정, 서남동, 문익환, 문동환 등과 더불어 박정희의 퇴진을 주장하는 이른바 ‘3ㆍ1 구국선언’ 등에 참여해 또 다시 옥고를 치르게 된다. 박정희 정권과의 투쟁 가운데서도 함석헌은 당시 열악한 노동 환경에 처한 노동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앞장서기도 했다.

군사독재와의 싸움은 박정희가 죽고 난 후에 5공화국에서도 이어진다. 비록 전두환정권에 의해 씨알의 소리와 같은 비판적 잡지와 언론이 폐간되기도 했으나 강연 등의 활동은 계속 이어갔다. 또한 고령의 나이에 그의 활동이 그 이전과 같을 수는 없었지만 권위주의 독재 정권하에서 수많은 민주 인사들에게 그는 정신적인 버팀목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함석헌의 저항의 정신은 종교를 절대화하려는 태도에도 항거한다. 그에 따르면 종교도 절대화하는 순간 거짓이 돼버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자꾸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이 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적 삶은 끊임없이 절대적 진리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데, 상대적 시간에 머물면서 현재를 절대화하는 것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이다. 현재를 절대화하는 것은 ‘뜻’에 근접할 수 없다. 그러한 삶은 생의 역동성을 유지할 수 없다. 진리를 향해가는 박진성이 결여된 종교에 불과한 것이다. 종교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은 ‘나’라는 과거의 자아가 마치 본래적 자기라는 것을 규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 생성하면서 참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 자기가 죽어야 한다는 것은 참나를 찾아가는 길인 것이다.

항거는 곧 나는 스스로 나이고자 하는 데서 나온다. 사람은 인격이므로 무엇을 다 한대도 인격의 자주성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인격의 자주성은 자연의 경로라 할 수 있다. 자연의 경로는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또한 씨앗이 썩어 새싹이 움트기 위해서는 자신을 덮고 있는 흙과 돌에 항거하고, 병아리는 자신의 둘러싼 껍질에 저항해야만 한다.

 

(사진 4 – 1965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 때의 함석헌, 함석헌 기념관)

 

함석헌은 「씨ㅇ·ㄹ혁명의 꿈」(1980)에서 자신의 철학을 ‘씨ㅇ·ㄹ철학’으로 소개했다. 씨ㅇ·ㄹ이라는 말은 알맹이나 핵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근원이나 본질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과 비판은 유신시대에로까지 이어지는데, 그의 비판의 칼날은 유신을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5·16 군사쿠데타가 있기 이전에 발생한 4·19혁명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4·19실패의 원인에 대해 학생이 시작했지만 민중의 혁명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그 실패는 결국 민중의 죄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여기서 말하는 민중 즉 사람이란, 함석헌 자신의 표현대로 하면 ‘맨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학생이나 군인이나 다 맨 사람 위에 덧 입혀진 옷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사람 아닌 학생, 군인, 정치인 등등의 정체성은 어떤 특정한 입장에 있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맨 사람이 아니고 자신이 입은 정체성으로 만나면 제도에 그 자리에 붙게 된다고도 한다. 함석헌은 특권 없는 제도는 없으며, 혁명은 제도를 없애는 것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군인이 일으킨 혁명, 학생이 일으키는 혁명은 참 혁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이 함석헌의 생각이었다.

맨 사람이 아닌 특정한 입장을 가진 사람에 의한 혁명은 순전한 자발성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제도화된 입장에 따른 이해관계는 행동을 강제하는 경향을 지니게 마련이다. 비단 외적인 강제에 의한 행동만이 아니라 내적인 강제 역시 자발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법이다. 우리가 노예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제도나 법률에 의해 타인의 강제에 따른 노예가 된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이해관계나 입장에 의해서만 행동한다면 그것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내 삶에 대해서 내가 주체로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함석헌이 그래서 참다운 혁명은 사상의 혁명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민중이 자각할 수 있도록 하는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민중 스스로 자신이 삶의 주체로 서야 한다는 것이 사상 혁명의 내용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함석헌의 실천은 씨의 소리발간으로 구체화 된다. 씨의 소리발간은 독재 정권에 대한 함석헌의 정치적 저항이자 언론운동이기도 했다. 즉 그것은 독재에 대한 투쟁이었고 민중의 사상 혁명을 이끌기 위한 선동이었다. 함석헌은 자신이 말하는 민중이 주체가 되는 삶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대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러한 변화의 의미와 성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대 변화란 그래서 하는 생각이다. 변(變)도 화(化)도 다 달라진다는 뜻인데 변은 달리짐 중에서도 갑자기 달라짐을 가리키는 말이다. 변자(變字)밑에 있는 ‘文’이 그것을 표시한다. 그것은 작대기를 들고 두들기는 것을 그린 것이다. 즉 힘을 넣어서 급히 달라지게 만든다는 뜻이다. 거기 더해 화(化)는 질적으로 아주 전의 모습이 없이 달라짐,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화학적인 변화를 뜻한다. 화의 한편인 ‘인’은 사람이라는 인(人)자인데. 이쪽의 ‘匕’는 인을 뒤집어 놓아서 죽은 것을 표시하는 자다. 죽으면 아주 달라진다. 우리말로 되졌다는 말이다.”

 

사실상 함석헌이 말하는 변화란 현재의 삶의 방식과 의식에 대한 근본적인 전복, 즉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혁명은 씨의 스스로함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생명의 원리를 스스로 함에 있다고 본 함석헌의 사유는 다분히 노장의 세계관을 연상시킨다. 노장 사상은 인간의 도덕적 질서를 강조하는 유가 사상과는 달리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추구하며 인위적인 삶보다는 자연에 따르는 삶을 강조한다. 여기서 자연은 저절로 그러한 세계이자 질서를 의미하는 것이다. 오산학교 시절부터 이어져 온 노장 사상에 대한 관심은 함석헌의 사상이 씨에로 귀결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함석헌은 도덕경에서 인위적이지 않은 도의 길을 강조하는 데에 주목하였다. 또한 이상적인 통치자란 씨들이 생활에 최소한의 간섭만 하기 때문에 씨들은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통치자라고 보았다. 그러는 가운데 씨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함’의 방식으로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함’은 자연이고 함석헌에게 자연은 필연이었다. 따라서 민중들인 씨들에 위한 일대 변화 역시 필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연은 자유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고, 자유는 스스로(自)가 스스로의 까닭(由)인 것이다. 따라서 함석헌이 말하는 사상 혁명이란 스스로(自)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씨ㅇ·ㄹ이 스스로 함에 의해 실천할 수 있는 까닭은 근본적으로 씨은 생명의 자발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자발성이라 함은 생명의 원동력을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그 자체로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자발성은 외부의 강제를 배척하는 원리이다. 오랫동안 백성, 신민, 국민 등으로 불린 민(民)은 자발성의 주체가 아닌 다스림의 대상이었다면 씨은 제도와 문명에 귀속된 것이 아닌 자유롭고 자발적인 삶의 주체를 은유하는 것이다.


(사진 5- 씨ᄋᆞᆯ의 소리, 함석헌 기념관)

 

함석헌이 주장하는 저항의 또 다른 의미는 선악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도덕적 투쟁이다. 그는 인격이란 자유하는 것이라고 보고 자아의식을 가지고 자주하는 의지로써, 내 뜻대로 내 마음껏 나를 발전시켜 완전에까지 이르자는 것이 인격이다. 이러한 자유에는 한이 없다는 것이 함석헌의 생각이다. 선악의 문제가 도덕적 개념이기는 하지만 함석헌에게 그것은 보통의 윤리의 의미가 아니다. 생명의 선악이요 존재의 선악이다. 함석헌은 선을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이라고 보고, 악은 그 자유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저항의 철학」 이라는 글에서 함석헌은 “인격은 선악의 두 언덕을 치며 물살을 일으켜 흘러나가는 정신의 흐름이다. 물이 언덕은 아니요, 인격이 선악도 아니다. 그러나 흐름은 두 언덕을 쳐서만 있는 것이요, 인격의 발전은 선악의 싸움을 해서만 있다. 선이 무엇인가?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이요. 악이 무엇인가? 그 자유를 방해하는 것밖에 다른 것 아니다. 사람은 악과 맞서고, 뻗대고, 걸러내고, 밀고 나가서만 사람이다.” 라고 하였다. 따라서 함석헌의 자유는 생명의 자연스러운 경로를 방해하는 일체의 억압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의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더욱 강력한 해방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함석헌의 사유는 우리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참고할만한 중요한 인문적 성찰의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그의 사유 안에는 모든 제도적 억압에 대한 저항만이 아니라 문화적인 억압에 대한 저항 의식이 담겨 있다.

 

(사진 6 – 비폭력저항주의자 함석헌, 함석헌 기념관)

 

4.19 묘역에서

함석헌 기념관을 둘러보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주민자치공간으로 꾸며진 곳을 빼고는 1시간 남짓 걸리는 시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인근에 있는 수유리 국립 4.19민주 묘역에 들러 보았다. 문득 함석헌의 묘지를 대전 현충원으로 옮긴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함석헌이 마지막으로 머물러 기념관이 된 곳 인근에 자리한 4.19묘역이 더 적절했을 성 싶기 때문이다. 대전에는 서훈 취소가 되어 마땅한 인사들의 무덤도 즐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함석헌은 과연 그런 자들과 머물기를 바랬을까?

평일이고 비가 조금씩 와서 그런지 참배객 등의 방문자들은 많지 않았다. 그 나마 몇몇 사람들은 그 옷차림새로 보아 인근 지역 주민들로 보였다. 4.19 기념탑에서 개인적인 간단한 참배를 하고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4.19 당시의 각종 자료와 화보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 유독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초등학생들의 시위참가를 기록한 사진이다. 함석헌은 4.19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맨 사람의 혁명이 아니었고 학생의 옷을 입은 혁명이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 새삼 떠올랐다. 당시 초등학생들의 시위사진을 보면 함석헌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게 된다. 말이야 초등학생들이지 그들이 무슨 학생의 옷을 입었으며 왜 맨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인가? 4.19혁명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함석헌의 지적은 4.19를 주도한 학생들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미완의 혁명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 것은 아니었을까?

 

(사진 7 – 4.19에 참가한 초등학생의 시위, 4.19기념관)

 

 

기고자: 유현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김정철
  10. 현상윤, 최초의 근대적 체제의 조선사상사를 짓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0: 윤태양
  11. 구도와 구세의 길, 운명적 불화 – 한용운 [길 위의 우리 철학] – 11: 송인재
  12. 태백산에서 최후를 맞은 서양철학 1세대, 박치우 [길 위의 우리 철학] – 12: 조배준 
  13. 시대정신을 찾는 여정의 첫 발걸음: 신채호와 서울 [길 위의 우리 철학] – 13: 진보성
  14. 큰 이룸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간 삶의 철학자, 도산 안창호 [길 위의 우리 철학] – 14: 배기호
  15. 밑바닥에서 진리를 찾은 이- 장일순 [길 위의 우리 철학] – 15: 구태환
  16. 서재필과 개화운동, 계몽을 통해 근대를 꿈꾸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6: 박영미
  17. 이항로의 위정척사, 당신들만의 진리 [길 위의 우리 철학] – 17: 구태환

에이드리언 리치(下)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2.  <피, 빵, 시>, 에이드리언 리치(下)

“위치의 정치학을 향하여”

 

정유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미국 산타 크루즈(Santa Cruz) 길가에 그려져 있는 에이드리언 리치 초상화)

 

  • 니카라과 혁명과 흑인 페미니즘

1980년대 들어서면서 미국의 페미니즘은 다음과 같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다. 첫째, 무엇보다도 미국의 페미니즘 운동은 로널드 레이건의 집권 이후 1980년대 내내 언론·종교·대중문화·정치 등의 영역에서 페미니즘 운동에 반발하는 백래시(backlash)에 시달렸고 낙태를 둘러싼 이슈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이 가장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둘째, 냉전 체제 속에서 국제적인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미국 정부의 타국에 대한 내정 간섭은 국제적인 정세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미국 여성들과 남미 여성들의 국제적인 연대 또한 위태로워졌다. 특히 1979년 7월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 Frente Sandinista de Liberacion Nacional)은 혁명을 통해 니카라과의 소모사(Somoza) 독재정권을 타도했지만, 니카라과의 좌경화를 우려하며 남미를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기를 원하였던 미국 정부는 니카라과 내 반혁명세력인 콘트라(Contra)를 지원하였으며 그 결과 1980년대 내내 니카라과는 내전에 시달려야 했다. 무엇보다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에서 니카라과 여성들은 무장봉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독재정권뿐만이 아니라 가부장제로부터 해방된 사회를 건설하는 기획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반혁명세력과 이를 지원하는 미국정부에 대항할 수 있는 페미니스트들 간의 국제적인 연대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였으나 80년대 페미니즘의 백래시에 시달리던 상황에서 미국의 페미니즘은 니카라과 혁명이라는 이슈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했다.

셋째, 미국의 페미니즘은 내부적으로 여러 분파들로 나뉘었고, 무엇보다도 제2물결 여성운동에 참여하였던 흑인여성들이 흑인운동 내에서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운동 내에서도 흑인 여성들은 주변화되어 있다는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흑인여성들에게 젠더와 인종 문제는 중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에 단지 백인 중산층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흑인 여성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의 시간 속에서 1984년 에이드리언 리치의 「위치의 정치학을 향하여(Notes toward a Politics of Location)」가 발표되었다. 이 글에서 리치는 페미니스트가 말하는 ‘우리’가 누군지, 그리고 ‘우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여성들이 단일한 정체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질문함으로써 여성운동의 위기에 응답하고자 하였다.

(니카라과 혁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여성들)

 

  • 타자와 몸의 위치성

미국이 니카라과 내전에 깊이 개입되어 있는 상황에서 에이드리언 리치는 단지 “여성으로서 나에게 국가는 없다”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을 피력했다. 오히려 리치는 “여성으로서 나에게는 국가가 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미국의 국가주의에 동조하고자 함이 아니다. 오히려 지도 위에 그려진 미국이라는 공간에서 태어나고 자라나며 그 속에서 정체성을 만들어 나간 자신에게도 미국이 관여하고 있는 니카라과 내전과 그 내전이 일으키는 비참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리치에게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는 것은 곧 타자에 대한 자신의 책임성을 인식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때의 위치는 단지 물리적인 위치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위치는 언제나 역사적으로 구성된 공간이었으며, 위치의 역사에는 타자들의 역사도 포함되어 있다.

여성으로서 나에게는 국가가 있다. 즉 여성으로서 나는 단지 정부를 비난하거나, 혹은 “여성인 나의 조국은 전 세계다”라고 3번 말한다고 해서 국가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민족적 충성심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리고 국민국가가 지금으로서는 오히려 다국적 기업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얻는데 이용하는 구실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지도 위의 한 장소가 어떻게 또한 여성으로서, 유대인으로서, 레즈비언으로서, 페미니스트로서 내가 만들었고 또 만들려고 애쓰고 있는 역사의 한 장소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나는 흑인 미국 시민들의 글에서, 그들의 행동, 연설, 설교들에서 내가 그들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있는 한 위치의 지점인 나의 백인성이라는 의미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또한 오늘날의 쿠바 여성들이 쓴 시를 읽으면서부터 누가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나의 시각 및 생각의 방식을 형성했던 하나의 위치, 또한 내가 책임질 수 있는 하나의 위치로서 북아메리카인이라는 의미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나는 작고 가난한 나라이자 빈곤을 뿌리뽑기 위해 4년을 바친 사회인 니카라과를 여행하고 있었다. 니카라과와 온두라스의 경계선이 되는 언덕 아래에서 나는 등 뒤로 북아메리카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무게, 미국의 군사력, 미국의 엄청난 화폐 전횡, 미국의 매스미디어 등을 육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즉 내가 반체제 인사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권력의 부츠를 한껏 치켜올린 미국인의 한 성원으로서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느낄 수 있었으며, 우리가 남아메리카 전역에 드리운 차가운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다.

지도 위에서 내 몸이 놓인 위치를 인식하는 것은 곧 몸 자체에 대한 질문, 즉 내 몸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 몸은 어디에 있으며, 내 몸은 무엇으로 보이는가와 같은 질문을 요구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들여다보는 순간 몸은 단일하게 구성되어 있지 않으며 특이하고 다양한 것들의 집합체임을 발견할 수 있다. 몸에는 변형되고 변색되고 손상되고 손실된 부분, 그리고 쾌락을 느끼게 하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또한 몸의 피부색, 임신의 흔적 여부, 중산층으로 치과의 진료를 받은 치아의 흔적들은 내 몸이 특정한 역사의 지형을 지나왔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지형은 단일하지 않다. 여성으로서뿐만 아니라 백인으로서, 유대인으로서, 레즈비언으로서 다양한 정체성들이 혼합되어 있는 흔적들이 몸에 새겨져 있다. 이처럼 몸을 통한 사유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 단지 성별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인종, 계급, 그리고 섹슈얼리티의 관계 안에서 복합적으로 구성되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끔 한다.

위치의 정치. 나의 몸에서 시작한다 하더라도, 나는 처음부터 그 몸이 하나의 정체성 그 이상을 갖는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내가 산부인과 병원에서 세계로 옮겨질 때, 나는 여자로 간주되고 여자로 취급받지만, 또한 백인으로 간주되고 백인으로 취급받는다. 그 사람이 흑인이든 백인이든 모두가 나를 그렇게 취급한다. 한 명의 흑인 아이가 인종과 성별에 의해 위치지어지는 것만큼이나 분명한 것은 내가 인종과 성별에 의해 위치지어진다는 것이다. 비록 백인 정체성이 지닌 의미가 백인은 우주의 중심이라는 가정에 의해 신비화되었을지라도.

(여성운동에 참여하는 흑인여성들)

 

  • 정체성에 대한 인식에서 차이에 대한 인식으로

이 글에서 에이드리언 리치는 더이상 여성이라는 단일한 정체성에 대한 믿음이 지속되기 어려운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여성들의 공통성에 대해 얘기할 수 있었으며, 전세계의 모든 여성들의 고양된 의식과 함께 해방된 세상을 창조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시기에 에이드리언 리치는 더 이상 ‘우리’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오히려 미국의 페미니즘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우리’라고 말하는 경향은 미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자의 경험을 삭제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타자를 대신하여 말할 수 있다는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에이드리언 리치는 자신의 몸에서, 지도 위의 위치에서,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에서 많은 차이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여성운동을 지탱해온 ‘우리’, 그리고 단일한 정체성으로서의 ‘여성’은 더 이상 존재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오히려 타자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또 다른 기제임을 확인한다. 오히려 차이들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타자에 대한 인식 속에서 우리 또한 특정한 위치 속에서는 억압 기제의 일부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갖는 것을 에이드리언 리치는 페미니즘 위기의 시기 속에서 새로이 발견한 페미니즘의 방향으로 이해했다. 이런 점에서 에드리언 리치의 「위치의 정치학을 향하여」는 제2물결 페미니즘 이후를 고민하는 페미니스트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으며, 주디스 버틀러, 찬드라 모한티, 로지 브라이도티 등 많은 현대의 페미니스트 사상 속에 에이드리언 리치의 언어와 고민들이 스며들게 되었다. 그녀에게 ‘우리’를 상실하는 것, 더이상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공통되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신념과 희망의 상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우리’의 상실을 “계속 나아가기 위한 투쟁으로서, 그리고 책임을 향한 투쟁”의 토대로 만들고자 하였다. 페미니즘이 단일한 ‘우리’의 정체성으로 확립될 수 없으며, 타자에 대한 책임을 수반해야 한다는 그녀의 생각은 페미니즘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그녀의 생각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증명되고 있다.

 

  • 두 편에 걸친 에이드리언 리치의 글 어떠셨나요?
  • 다음으로는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가 연재됩니다.

에이드리언 리치(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1.  <피, 빵, 시>, 에이드리언 리치(上)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존재”

 

정유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1970년 5월 1일 뉴욕에서 열린 ‘제2차 여성연합대회(Second Congress to Unite Women)’에는 전에 없던 긴장이 감돌았다. “연보라색 골칫거리(Lavender Menace)”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은 스무 명의 여성들이 행사장 앞에서 소란을 피우며 훼방을 놓았다. 이 여성들은 주류 페미니즘 운동이 레즈비언들을 차별하는 것에 대해 큰소리로 항의하였다. 티셔츠에 적힌 “연보라색 골칫거리”라는 글귀는 미국에서 제2물결 여성운동을 선도적으로 이끌던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이 레즈비언 운동을 비난하며 연보라색 골칫거리(Lavender Menace)라고 이름붙인 것을 겨냥한 것이었다. 베티 프리단과 그녀가 회장으로 있던 전미여성기구(NOW, 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는 여성의 평등권을 보장받기 위한 운동을 진행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이 시기에는 남녀평등 헌법 수정안을 국회에 통과시키기 위한 운동이 가장 주요한 이슈였다. 따라서 전국여성단체의 운동을 주도하던 회원들 중 일부는 레즈비언들이 젠더 이슈보다는 섹슈얼리티를 의제로 내세우는 것이 오히려 여성운동이 확장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주류 페미니즘과 레즈비언 페미니즘이 서로 대립각을 세우는 가운데에서 에이드리언 리치의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존재(Compulsory Heterosexulity and Lesbian Existence)‘이 1980년 <기호들(Signs)>지에 발표되었다. 이 글은 발표와 동시에 논란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이성애를 여성 억압의 주요 원천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레즈비언 페미니즘에 주요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연보라색 골칫거리(LAVENDER MENACE)”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항의하는 여성들

 

여성 억압의 원천으로서 강제적 이성애

에이드리언 리치는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에 대한 여성들의 내재적인 욕망을 자연적인 것으로 주어진 것으로 가정하거나 의문시하지 않은 데에 문제를 제기한다. 실제로 많은 여성들은 남성과의 결혼이 아무리 불만족스럽고 억압적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인생에서 불가피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리치가 보기에는 이성애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이자 제도이며, 여성 억압의 근원이다. 남성적 권력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제어하면서 유지된다. 캐틀린 고프(Kathleen Gough)를 인용하면서 에이드리언 리치는 남성적 권력의 작동 방식을 다음과 같이 나열한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부정하고, 강제적으로 섹슈얼리티를 남성에게 향하도록 하는 것, 여성들의 생산력을 제어하기 위해 여성들의 노동을 명령하고 착취하는 것, 여성들의 아이들을 통제하고, 그녀들에게서 아이들을 빼앗는 것, 여성들을 신체적으로 구속하고, 여성들의 운동을 막는 것, 여성을 남성들 사이의 거래의 대상으로 사용하는 것, 여성들의 창조성을 속박하고, 사회의 지식과 문화적 성과의 거대한 영역에 여성들이 진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억압의 형태는 단지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불평등과 재산 소유의 문제로만은 해명되지 않는다. 따라서 에이드리언 리치는 페미니스트들이 여성해방에 이르기 위해서는 단지 남성과 동등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이성애라는 제도에 대해 의문을 던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페미니즘에 있어 ‘대부분의 여성은 선천적으로 이성애자이다’라는 가정은 이론적으로 정치적인 장애물이다. 이러한 가정은 계속 유지되고 있는데 왜냐하면 레즈비언 존재가 역사에서 누락되어 왔으며 질병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며, 레즈비언을 고유한 존재로 보기보다는 예외적인 존재로 보기 때문이며, 만약 당신이 자유롭고 ‘선천적인’ 이성애자로 생각한다면 여성에게 이성애란 ‘선호’가 아닐 수 있고, 오히려 강제적으로 부여되고 관리되고 조직되고 선동되고 유지되어온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애를 하나의 제도로 이해하는 데 실패하는 것은 자본주의라고 불리는 경제적 시스템 또는 인종주의라는 계층 질서가 육체적 폭력과 허위의식을 포함한 다양한 힘들에 의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성애가 여성의 ‘선호’나 ‘선택’이라는 것에 의문을 던지는 한 걸음을 내딛는 것, 그리고 이어지는 지적이고 감정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것은 이성애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페미니스트에게는 특별한 용기를 요구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가져다주는 보상은 매우 클 것이다. 그것은 자유로운 생각, 새로운 길로의 탐험, 거대한 침묵으로부터의 균열, 인간적 관계에 대한 새로운 확신과 같은 보상을 가져다 줄 것이다.”

 

레즈비언 존재(lesbian existence), 레즈비언 연속체(lesbian continnum)

강제적 이성애라는 제도 내에서는 레즈비언이라는 존재가 비가시화되고 삭제된다. 이런 가운데에서 레즈비언의 존재를 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리치는 레즈비언주의(lesbianism)이라는 용어보다는 “레즈비언 존재”“레즈비언 연속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레즈비언 존재라는 말을 통해 리치는 레즈비언이 역사적으로 존재해왔다는 것과 더불어 레즈비언 존재의 의미가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레즈비언 연속체라는 말을 통해 단지 여성이 다른 여성에서 성적으로 이끌리는 것뿐만 아니라 한 여성의 인생이나 역사 속에서 여성들과 동일시해왔던 경험까지로 레즈비언의 의미를 확장시키고자 한다. 이처럼 확장된 의미에서 레즈비언 연속체는 여성들이 우애와 즐거움을 나누는 일상적인 관계의 영역까지 확대된다. 따라서 여성들이 스스로를 레즈비언으로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여성들은 가부장제 속에서는 비가시화되고 삭제되고는 하는 레즈비언 연속체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레즈비언 연속체의 발견을 통해 여성들은 여성들을 서로서로 북돋아줄 힘을 발견하고 해방의 가능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모든 여성들이 레즈비언 연속체로 존재할 가능성-여자아이가 엄마의 젖을 빠는 것에서부터, 엄마가 된 여성이 어렸을 적 엄마의 모유 냄새를 회상하면서 아이에게 젖을 물릴 때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에 이르기까지, 버지니아 울프가 묘사한 클로이와 올리비아의 관계처럼 함께 실험실을 공유하는 두 여성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여성들이 90세에 죽어가는 여성을 쓰다듬어주고 어루만져주는 것에 이르기까지-을 깨닫는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레즈비언과 동일시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가 레즈비언 연속체의 안과 밖을 오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레즈비언과 페미니스트를 연결하기

후에 에이드리언 리치는 이 글을 썼던 동기에 대해서 “레즈비언과 페미니스트 사이의 틈을 연결하는 다리를 그려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언급했듯 주류 페미니즘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을 오히려 자신들이 일궈나가는 정치적 목표에 방해가 되는 존재로 여겼으며, 레즈비언 페미니즘은 주류 페미니즘이 여성해방으로 나아가기는커녕 남성들이 일궈낸 제도 속으로 편입해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을 불만으로 여겨 갈등이 첨예해지는 상황이었다. 이 갈등 속에서 페미니스트이자 레즈비언이었던 리치는 레즈비언의 의미를 확장하여 페미니스트들도 포괄할 수 있는 레즈비언의 의미를 구성하고자 하였으며, 가부장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레즈비언과 페미니스트의 공통적 목표로 설정하였다.

물론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시도였다. 레즈비언의 의미를 여성과 여성들 사이의 일상적 관계 형성, 그리고 심지어 아이와 어머니의 관계로까지 확장시키는 바람에 레즈비언의 고유한 정치적 의미는 오히려 약화되었으며, 레즈비언과 페미니스트를 공통의 젠더 이슈로 연결시키면서 남성 게이와 레즈비언의 동맹 또한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리치의 글은 여전히 현재적이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공적인 사회에서 배제하는 것, 성역할을 고정시키고 임금차별하는 것 외에도 여성이 여성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금지하는 것을 통해 기능한다는 그녀의 주장은 현재에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에게는 언제나 여성을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며, 언제나 사랑해 왔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을 통해 새로운 사랑, 대안적 사랑의 가능성을 여는 것 또한 우리시대의 페미니즘에게 깊은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존재’가 수록된 에이드리언 리치의 산문 모음집 <피, 빵, 시(Blood, Bread, and Poetry)>

 

에이드리언 리치의 페미니즘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존재’가 이 발표되던 1980년에 에이드리언 리치는 만 51세였고, 세 아이의 엄마였으며, 동시에 레즈비언이었다. 1950년대까지 최상위 교육을 받은 지성인이자 유명한 여성 시인으로서 에이드리언 리치는 아내와 엄마로서 충실한 삶을 살고자 하였지만 그렇게 노력하면 할수록 공허함과 무기력함에 시달렸었다. 그러던 중 1966년에 리치의 가족이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리치는 반전운동, 시민권 운동, 그리고 무엇보다 페미니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하면서 리치는 자신의 고립감과 우울감의 원인을 가부장제와 연결시켜 이해하게 되었고, 마침내 남편을 떠났다. 이후 자메이카 출신의 소설가인 미쉘 클리프(Michelle Cliff)와 레즈비언 연인관계를 지속하였다. 뛰어난 시인이었지만 가정이라는 삶 속에 갇혀 있던 그녀에게 페미니즘은 정치적 문제이면서 동시에 어떤 삶을 살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런 점에서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존재’라는 에세이는 그녀의 삶의 전환을 보여주는 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글은 우리에게 여전히 다양한 사랑의 가능성이 가부장제로 인해 보이지 않고 가려져 있으며, 이 숨겨진 사랑의 발견이 우리에게 더 많은 만남과 창조성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이항로의 위정척사, 당신들만의 진리 [길 위의 우리 철학] – 17

구태환

 

1.

두물머리에서 북한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북한강 지류인 벽계천(檗溪川)이 흐르는 계곡이 나온다. 이 계곡을 따라 한참 들어가면 말 그대로 ‘궁벽한’ 마을이 나온다. 지명이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인 이곳은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가 태어나고 죽은 곳으로서, 그의 생가가 남아 있고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그는 61세에 강원도 홍천의 삼포라는 곳으로 잠깐 이사했을 때와,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있던 해에 중앙 정계의 부름으로 한양에 기거했던 때를 제외하고는 평생 이곳에서 생활했다.

이항로생가 전경

 

독자들은 학창시절에 이항로에 대해서 한번쯤은 이야기를 들어봤을 것이다. 조선말기의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과 운동의 거두로서 말이다. ‘옳음을 지키고 사악함을 배척한다’는 이 구호는 비장함마저 풍기는데, 실제로 그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비타협적인, 꼬장꼬장한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일까? 생가라고 찾아온 필자 앞에 서있는 거대한 기와집들이 생소하기만 하다. 물론 이러한 느낌이 부유함에 대한 필자의 왜곡된 시선 때문일 수도 있다. 꼿꼿한 선비라고 반드시 궁핍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읊조리듯이 당시 지배층의 부는 일반 백성의 고혈이 농축된 것이 아니던가. 더구나 물산이 풍족할 리 없는 이런 국벽한 시골에 이처럼 거대한 기와집이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거슬린다.

 

2.

이항로는 1792년 2월13일 옛 지명 양근군(楊根郡)에 속한 이곳에서 처사 이회장(李晦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7세 되던 해 반시(泮試)에, 18세에 한성시(漢城試)에 합격했으나 이미 이른 나이부터 관계의 진출을 단념하고, 학문에 몰두했다. 그 결과 22세에 이미 스승을 따르지 않을 정도[不由師承]로 뛰어난 학자가 되었고, 그의 주변에는 수많은 제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그에게 유일한 스승은 중국 송대의 주희(朱熹)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주희에 대한 태도는 다음 언급에서 잘 드러난다.

“하는 말마다 모두 옳은 사람이 주자(朱子-‘주희’에 대한 존칭)이다. 하는 일마다 모두 옳은 사람이 주자이다. 주자는 공자 이래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이때부터 나는 주자의 글을 읽고 그의 뜻을 추구했다. 나는 주자의 말이 아니면 감히 듣지 않았고, 주자의 의도가 아니면 감히 따르지 않았다. … 다른 이들이 저렇다고 하는데 주자가 이렇다고 하면 나는 다른 이들의 견해를 버리고 대신 주자의 견해를 따랐다.”

조선시대의 지배 이념이 성리학이었고, 따라서 성리학의 완성자 주희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은 조선시대의 학자들에게 일반적인 것이었다. 그들의 주희에 대한 태도는 신앙에 가까웠으며, 이항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위정척사’에서 ‘옳음을 지킨다’는 것은 주희의 사상을 견지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주희가 완성한 성리학에서는 우주만물이 원리로서의 이(理)와 질료로서의 기(氣)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원리로서의 이는 절대선(絶對善)으로서 그것이 인간에게 부여된 것이 인간의 선한 본성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선한 것은 아니니, 그 이유를 질료로서의 기에서 찾는다. 기는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니지만, 그것이 맑은가 탁한가에 따라 그 안에 포함된 원리로서의 이가 잘 드러나는가 그렇지 못한가가 결정된다. 기가 맑아서 이가 잘 드러나면 선한 인간이, 반대로 기가 탁해서 이가 잘 드러나지 않으면 불선한 인간이 된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에 부여된 선한 이, 즉 본성을 잘 보존해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을 이루는 기를 끊임없이 맑게 수련해야 한다. 그러한 수련의 결과가 이 사회를 지배할 자격을 갖는 군자(君子)이다. 따라서 지배층으로서의 군자는 종교인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할 존재이며, 조선시대의 지배층 사대부에게는 이러한 삶이 요구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理)를 기반으로 해서 인간이 따를 도덕률이 나오는데, 그것이 흔히 삼강오륜(三綱五倫)이라고 한다. 이처럼 성리학적 도덕률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제어 수단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있는 이의 발현이다. 따라서 이러한 삼강오륜을 거부하는 것은 사회적 지탄 대상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우주의 원리를 거스르는,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또한 우주의 원리인 이가 인간 사회의 변화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즉 이(理)는 불변하는 원리이다. 따라서 불변하는 이에 기반한 삼강오륜은 인간에 내재된 도덕률이기 때문에, 이것을 어기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이항로가 말하는 ‘위정’이란 바로 이러한 삼강오륜의 도덕률을 수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척사’에서 말하는 배척해야 할 ‘사악함’은 이러한 삼강오륜을 거부하는 기독교 세력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문물이다. 즉 기독교 세력이 군신(君臣), 부자(父子), 남녀[부부夫婦], 장유(長幼)의 구분을 무너뜨리니 이들은 짐승과 같은 무리이고, 이러한 무리들이 입은 옷, 타고 온 배, 이들이 사용하는 물건 등은 모두 짐승의 것이다. 따라서 이항로에게 위정척사란 단순히 기존의 학문사상적 체계를 수호를 넘어서는 것이다. 짐승의 삶으로부터 인간의 삶을 지키기 위한 저항인 것이다.

 

3.

청화정사

 

생가의 계단을 올라 문을 지나자 담에 둘러싸인 아담한 방이 나온다. ‘청화정사(靑華精舍)’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생가가 청화산의 서편에 자리 잡았기 때문에 그는 ‘화서(華西)’라는 호를 사용하였고, 자신이 기거하는 방을 이처럼 이름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독서와 사색을 하고, 자신을 찾아오는 선비, 제자들과 함께 학문에 대해, 그리고 당시 시국에 대해 담론했을 것이다.

 

노산사

 

다시 문을 나와 왼편(동쪽)으로 가면 사당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노산사(蘆山祠)이다. 김평묵, 최익현, 유인석 등 그의 제자들이 스승 이항로를 기리며 지은 사당으로서, 원래의 것은 6.25 때 불타고 후일에 다시 지은 것이다. 여기에는 이항로만이 아니라 그가 존경했던 주희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영정과 위폐가 모셔져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항로는 주희를 추앙했는데, 그와 함께 송시열도 매우 존숭하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벽계천이 흐르는 생가 주변을 ‘벽계구곡(檗溪九曲)’이라 하였다. 중국 복건성(福建省) 출신인 주희가 무이산의 계곡을 노래한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송시열이 본떠서 자신이 은거하던 괴산의 계곡을 ‘화양구곡(華陽구곡)’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이항로는 바로 이들을 본뜬 것이다.

특히 송시열은 병자호란 이후에 ‘존중화양이적(尊中華攘夷狄-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친다)’을 주장하던 이이다. ‘중화’란 중국인들이 자기 문화의 위대성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조선의 사대부들은 공자, 맹자, 주희로 이어지는 유학의 정통 문화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다. 이러한 중화문화는 한족인 명나라에 의해 계승되었는데, 오랑캐 만주족인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차지하게 되어 중국에서는 중화문명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송시열을 비롯한 당시 사대부들의 인식이었다. 더구나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우리를 구원하였고, 그러한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는 병자호란 때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줬으니, 마땅히 우리는 명나라를 존숭하여 청나라를 징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가 망한 마당에 중화문명은 우리 조선에만 남아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 특히 조선의 유학자 사대부들에게는 이러한 중화문명을 수호할 임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책임 의식은 이항로에게도 그대로 이어진다.

 

4.

노산사는 야트막한 동산 위에 놓여 있는데, 그 사당 앞에는 동산 위라고 보기에는 제법 넓은 마당이 있다.

이항로의 제자들은 매월 이항로의 집이나 명승지, 사찰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갈수록 제자의 수가 많아졌다. 그래서 앞에서 본 ‘청화정사’에는 많은 제자가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고, 결국 그의 나이 56에 이곳에 야외교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처럼 궁벽한 곳에 왜 그리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까? 당시에 한양에서 온다고 했을 때, 배편으로 북한강을 거슬러 올라와야 하고, 그후에도 육로로 상당히 험한 산길을 넘어야 했을 텐데 말이다. 가슴에 학문에 대한 열정, 옳음을 지키려는 열정을 가지고 모인 수많은 학자들이 모여 스승의 강의를 경청하고, 질문하고, 토론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일까. 이 장소의 이름이 제월대(霽月臺)이다. ‘제월’은 ‘비가 막 갠 뒤에 부는 상쾌한 바람과 비가 막 갠 뒤에 나타난 깨끗한 달’을 가리키는 ‘광풍제월(光風霽月)’의 줄임이다. 비온 후의 달처럼 깨끗한 마음을 가진 제자들과 만나, 깨끗한 마음으로 진리를 나누는 곳에 참 어울리는 이름이라 할 것이다.

 

제월대

 

그런데 ‘제월대’라는 글이 새겨진 돌에서는 별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러한 의문은 이곳을 내려가 생가 서쪽에 자리한 ‘기념관’에 들러서야 풀렸다. 원래의 돌이 기념관에 모셔져 있었고, 이것은 모조품인 것이다. 아마도 비바람에 훼손될까 우려하여 그렇게 한 것 같다.

 

5.

다시 서울로 발걸음을 돌린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가 한양에 간 것은 병인양요 때이다. 그 이전에도 조선의 중앙 정부에서는 그에게 여러 차례 관직을 내리지만, 그는 나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자국 선교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는 핑계로 한강의 양화와 서강까지 군함을 몰고 와서 시위를 하는 프랑스의 행태에 75세의 이항로는 결국 정부의 부름에 응하고, 노구를 이끌고 한강에 나가 시찰하기도 한다.

벽계구곡을 떠나 한양 나들이를 했을 때, 그의 눈에는 무엇이 보였을까? 한강에 버티고 선 낮선 배[異樣船]는 그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아마도 그 배는 짐승같은 놈들의 배로만 보였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는 저 배가 왜 이곳에 왔는지, 그리고 저 배와 우리 배의 차이가 무엇인지, 저들이 어떻게 저처럼 거대한 배를 그리도 빨리 움직일 수 있는지, 더 나아가 저러한 기술이 조선에 어떠한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지는 않을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름과 틀림은 분명히 다르다. 다름의 반대말은 같음이고 틀림의 반대말은 옳음이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하기에 길게 이야기하면 구차해진다. 하지만 이 다름과 틀림의 문제가 간단하지 않게 다가올 때도 있다. 틀림이란 옳음과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옳음의 범위가 좁은 이에게는 이 세상의 일들이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것보다는 틀린 것이 많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것들 중에서 틀리지 않은 것이 있음을 인지하기도 하며, 그 순간 그 사람은 지적, 인격적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옳음에 대한 굳건한 확신을 가진 이는 그 옳음의 기준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 아니 바꿀 수 없다. 그들은 상대가 왜 나와 다른 행동을 하고 다른 사고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평생동안 하나의 진리를 추구하고, 그 진리를 참이라고 믿는 삶에 대해서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와 다른 생각과 행동에 대해 이해해보고자 하는 노력도 없이 자신의 것만이 옳다는 사고는 매우 위험하다. 아무리 광풍제월의 맑고 깨끗한 의도를 가졌다 하더라도 이러한 사고는 자신과 다른 이를 배척한다. 이러한 태도는 현재에도 우리 세계에도 존재한다. 종교, 사상, 인종, 성적 취향이 자신과 다른 이를 틀렸다고 규정하고 배척하는 경우가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당신의 진리만이 참인가?

 

기고자: 구태환(상지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최한기의 인체론과 관련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 분과에서 동학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으며, 배타적 소유권에서 벗어난 ‘인권’의 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김정철
  10. 현상윤, 최초의 근대적 체제의 조선사상사를 짓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0: 윤태양
  11. 구도와 구세의 길, 운명적 불화 – 한용운 [길 위의 우리 철학] – 11: 송인재
  12. 태백산에서 최후를 맞은 서양철학 1세대, 박치우 [길 위의 우리 철학] – 12: 조배준 
  13. 시대정신을 찾는 여정의 첫 발걸음: 신채호와 서울 [길 위의 우리 철학] – 13: 진보성
  14. 큰 이룸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간 삶의 철학자, 도산 안창호 [길 위의 우리 철학] – 14: 배기호
  15. 밑바닥에서 진리를 찾은 이- 장일순 [길 위의 우리 철학] – 15: 구태환
  16. 서재필과 개화운동, 계몽을 통해 근대를 꿈꾸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6: 박영미

슐라미스 파이어스톤(下)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0. <성의 변증법>, 슐라미스 파이어스톤(下)

 

이지영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 프로이드의 오해와 진실 가족이라는 이름의 권력 구조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와 착취는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에 기인한 가장 유구한 역사를 가진 억압이자 모든 억압의 근본 구조이다. 따라서 노동, 인종, 동성애자 등의 소수자 억압의 문제는 먼저 여성 억압의 문제가 해결될 때에만 참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파이어스톤은 그 장구한 시간 동안 여성이 남성에 지배를 받아온 장소인 ‘가족’을 먼저 탐색한다. 그는 치명적 오류에도 불하고 프로이드가 이전까지 누구도 보지 못했던 진실을 파악한 사상가임에는 틀림없다고 추켜세운다. 프로이드는 마침내 성sex 즉 섹슈얼리티가 인간 삶의 핵심적 문제임을 파악해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드가 아들과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쟁탈전을 다룬 ‘가족 극장’을 문명화의 본질 동력으로 보고 심리학의 측면에서 이를 다룬 것은 완전하게 헛다리짚은 것이다. 이는 문명의 본질 동력도 아니며 원본능의 심층 심리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권력’의 문제다. 가부장적 가족 및 사회 안에서 작동하며 행사되는 ‘권력’의 사회 맥락 문제다.프로이드는 이것을 보지 못했다.

아들은 어머니를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경쟁하다 힘센 아버지가 사랑의 도구인 페니스를 거세하리라는 거세 공포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에로스적 사랑을 스스로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가부장제 가족 안에서 아버지는 집안의 권력자이며 모두를 지배한다. 그는 가족들을 부양하는 대신 성을 포함하는 여성의 온갖 서비스, 자식들의 존경과 복종을 당연한 대가로 취한다. 어머니는 자식을 낳을수록 더 무력해지며 남편에 대한 경제적 예속은 더욱 심화된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지배당하고 자주 학대당하는 어머니에 대한 깊은 애착을 거두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어머니의 감옥 같은 닫힌 세계를 벗어나 드넓고 자유로운 아버지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머니를 외면한다. 아들은 어머니를 애처롭게 생각하지만 그녀를 벗어나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사람, 아버지의 분신이 되어야만 한다. 어머니 또한 아들을 딸보다 더 사랑한다. 아들에게 끌리는 에로스적 원본능 때문이 아니라 가족 밖 넓은 세계로의 진출을 애초에 사회 구조적으로 차단당한 딸은 자신의 답답한 운명을 그대로 답습할 것이기 때문이다. 딸에겐 별다른 희망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들은 마침내 자유와 권력을 얻을 것이다. 아들은 어머니의 깊은 한숨과 오랜 고통에 대한 보상이자 대리 만족의 대상이다. 이것이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진실이다. 이와 같은 구조는 족외혼이 성립됨에 따라 강화된다. 종족의 여인이 아니라 다른 씨족의 여성을 사랑할 것. 여성은 교환되고 이성애는 공고화된다. 동성애가 병적인 것으로 진단받는 것은 프로이드의 진단처럼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족외혼의 이성애만을 정상으로 수용하고 강제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부장적 가족은 여성 억압과 재생산의 핵심 도구이자 아동 및 성소수자 억압의 근원이다.

 

  • 아동 억압

 

가부장제 가족은 가족 밖 사회에서 벌어지는 온갖 지배와 차별의 근원이다. Read more

슐라미스 파이어스톤(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9. <성의 변증법>, 슐라미스 파이어스톤(上)

 

이지영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1960년대에 시작된 소위 ‘여성주의 제2 물결’을 대표하는 이들 중 한 명이다. 그는 1945년 캐나다 오타와에서 유대인 부모의 여섯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이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몬태나주 캔자스시티에서 자라났다. 격동의 60년대에 워싱턴대학교를 졸업한 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ArtInstitute of Chicago)에서 회화를 공부하였다. 1960년대는 한국 전쟁 후 잠시 소강 상태를 보였던 동서 냉전이 다시 격렬해져 당시 소련과 미국 사이의 대립이 핵전쟁 불사의 일촉즉발의 상황을 연출하던 시기였다. 특히 미국이 주도했던 베트남 전쟁은 60년대 내내 미국을 괴롭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냉전의 위협과 길고긴 전쟁에 회의감을 느낀 청년세대는 기성 세대의 권위주의에 격렬하게 저항하는 새로운 청년 문화를 형성했다. 68운동, 프라하의 봄, 반전 운동, 인권 운동, 흑인 해방 운동, 학생 운동에서 우드스톡 페스티벌로 대표되는 히피 문화에 이르기까지 그 양상은 무척이나 다양했다. 20대를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보내며 학생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던 경험은 파이어스톤으로 하여금 모든 사회 문제 중에서 ‘페미니즘의 문제를 여성들의 최우선적 과제로 볼 뿐 아니라 더 큰 혁명적 분석에 있어서도 가장 중심적인 문제로 바라보는 급진적 페미니즘(radical feminism)’으로 이끌었다.

이 시대 서구의 젊은 여성들은 여타 사회 운동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나 모든 사회 운동에서 여성 문제는 주변부적이고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당하거나 더 나쁘게는 “여성”에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외면당했던 것이다. 예컨대 “자신의 억압을 중심으로 하는 풀뿌리 운동 조직, 피 흘리는 대중에 기반할 필요성, 지도력과 권력 놀음의 종식”을 내세웠던 흑인 운동조차도 이 중요 원칙을 여성들에겐 적용하지 않았다. 흑인 운동에서 흑인 여성은 단지 보조자였고, 발언권이 적거나 없었으며, 흑인 남성들은 흑인 여성 위에 군림하고 명령했다. 여성들은 자신들이 억압받고 있었기 때문에 억압받는 이들의 처지에 누구보다도 크게 공감하고 이들의 해방 운동에 헌신할 수 있었으나 그 운동들은 정작 여성 자신의 해방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파이어스톤의 기념비적 저작 『성의 변증법』에 잘 녹아있으며 이 책의 근본 정신의 토대를 형성했다.

 

  • 페미니즘 제 1물결, 자유주의 페미니즘을 넘어 여성 억압의 본질적 구조로

 

파이어스톤은 『성의 변증법』 서두를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성적 계급(class)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리가 깊다. 그것은 약간의 개혁이나 여성의 노동 세력으로의 완전한 통합에 의해 해결될 수 있는 피상적 불평등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파이어스톤은 여성을 하나의 계급이라고 선언한다. 여성의 억압에서의 해방은 약간의 개혁 즉 파이어스톤 당대까지 지속되었던 자유주의 페미니즘의 슬로건이라 할 수 있는 “남성과 동등한 법적 대우를, 여성에게 참정권, 취업권, 재산권을!”이라는 슬로건의 실현으로 쟁취될 수 없는 것이었다. 여성 참정권 운동을 대표적 실천 운동으로 손꼽을 수 있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여성들이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남성과 동등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여성에게 남성과 동일한 법적 권리, 교육의 기회 등이 주어져야 하며 이에 따른 결과로 남성과 동등하고 자유롭게 자신의 삶의 문제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세기 서구에서 시작된 이들의 희생적 실천 운동이 여성의 지위 향상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으나 이들은 남성을 인간의 이상적 기준으로 생각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참정권 등이 실현되자 여성 운동은 1960년대가 오기까지 오랜 침묵의 시간을 맞게 된다. 여성은 남성의 정치 운동의 부수적 역할을 맡아 남성 기득권 강화에 기여하거나, 여성의 직업으로 특화된 남성 보조적인 하위 직업에 종사하며 착취당하거나, 가정에서 어머니 모성의 가치 있음을 실현시키기 위해 분투하면서 갈팡질팡했다. 앞서 미국 흑인 인권 운동의 예를 들어 살펴보았듯 여성이 참정권 등을 얻고 고등 교육을 받게 되었다고 해서 여성의 지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법적 지위의 문제와 무관하게 일상의 모든 곳에 뿌리 깊게 스며들어 있는 여성 억압은 정치, 사회, 문화 전방위적 분야에서 계속되고 있었다.

파이어스톤은 이와 같은 사정이 이전 여성주의 운동이 여성 억압의 문제에 피상적으로 접근한 까닭이라고 파악한다. 여성 억압은 단지 이상적 지향점을 설정하고 그것을 성취한다고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맑스-엥겔스가 그러했듯 변증법적 유물론의 과학적 분석 방식을 통해 억압의 본질을 파악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만 하는 것이다. 파이어스톤은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에서 여성 억압의 문제를 다룬 것이 불충분한 시도였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를 ‘생산 양식과 교환 양식의 변화, 사회의 계급 분화와 계급간의 투쟁’을 통해서 설명하면서 여성의 억압에는 이런 경제적 여과기라는 틀에 걸맞는 방식을 통해서만 접근했던 것이다. 지배 계급과 노동 계급, 이들 두 계급의 투쟁사라는 역사 분석은 불충분하다. 이 기저에 존재하는 것은 남성 계급과 여성 계급 사이에 존재하는 지배와 착취라는 보다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억압의 역사다. 따라서 다만 여성이 노동의 전면에 나서고 온갖 법적 권리를 얻는다고 해서 여성의 진정한 해방이 올 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 여성 억압의 근본 원인 생물학적 조건, 생식능력과 육아

 

노동 계급에 대한 착취보다 오래되고 고질적인 것은 여성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다. 이것은 남성 계급과 여성 계급의 생물학적 차이에 기인한다. 아이를 낳고 키운다는 생물학적 차이, 아이를 임신하기 위한 기관 발달이 무력을 약화시키고 임신과 육아의 긴 시간 더욱 더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는 이 자연적 사실이 인간 최초의 불평등 구조의 핵심이다. 이러한 기능의 차이는 여성의 생식 능력을 숭배하는 드믄 곳에서조차 남성의 여성 착취와 지배를 필연적으로 발생시킨다. 생물학적인 관계로 이루어진 한 가족에는 이처럼 자연 본질적 불평등한 힘의 분배가 내재해 있다. 남성과 여성의 자연적 생식 차이는 모든 계급 제도의 전형이자 최초의 노동 분업의 형태이다. 또 맑스-엥겔스가 파악한 인간의 역사로서의 노동 계급과 지배 계급의 투쟁의 역사, 그 악의 근원인 사유 재산 제도의 자연적 근거이자 권력욕의 근원이다. 여성의 생물학적 조건에서의 해방 없이 여성의 진정한 해방은 물론이거니와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평등, 해방은 불가능한 꿈인 것이다.

생물학적 힘의 불균형이 여성의 필연적 패배를 의미하지 않는 것은 인간이 물리적 힘의 지배를 그대로 수용하는 동물이 아니란 점에서 지당한 것이다. 인간은 정의(justice), 도덕 관념과 자연 과학의 발전을 통해 동물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벗어나는 길을 걸어왔다. 만일 물리적 힘의 지배라는 자연의 질서를 그대로 옳음으로 수용하고 그것이 곧 정의였다면 인간은 여전히 노예제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리라. 그리고 자연의 잔혹한 질서의 인간적 개편에 자연 과학의 발전이 엄청난 기여를 해왔다는 것은 맑스-엥겔스의 유물 사관의 하부-상부 구조의 변화 분석 또한 입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는 맑스-엥겔스가 그들의 불충분한 변증법적 유물사관을 통해 인간의 해방을 위해 생산 수단의 노동 계급의 점유를 말했던 것처럼 여성의 해방을 위해서는 생식 수단을 여성이 완전히 점유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서재필과 개화운동, 계몽을 통해 근대를 꿈꾸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6

박영미

 

독립문, 자주독립의 열망

독립문역사거리, 사통팔달의 분주한 길 남쪽에 멀찌감치 서서 사방을 돌아보면 북쪽에는 북한산이 양쪽으로 안산과 인왕산이 들어온다. 시선을 조금 내리면 바로 앞에 고가도로에 가려 한 눈에는 볼 수 없는 독립문이 있다. 길을 건너 가까이 가본다. 독립문 뒤로 서재필 동상, 독립관, 3.1운동 기념탑, 그리고 서대문형무소가 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외세의 침탈에 저항한 우리 역사의 흔적과 기억이 모두 모여 있다. 그곳은 중국 사신을 맞이한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관을 건립하며 자주독립 열망했던 근대의 꿈이, 일본에 항거한 독립운동가들이 모진 고초를 겪었던 서대문형무소라는 식민지의 좌절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과거의 독립문, 현재의 독립문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은 1896년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곧바로 독립문과 독립관 건립을 계획했다. 독립관은 모화관慕華館을 보수해서 사용하고, 독립문은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세운다는 것이다. 모화관은 조선시대 명과 청의 사신을 영접하던 곳으로 갑오개혁이후 사용하지 않아 폐가가 되어 있었고, 영은문은 바로 모화관 앞에 있던 것으로 1895년 철거되어 돌기둥만 남아 있었다. 독립문은 서재필이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 따 설계해서 1897년 11월 준공되었고, 1979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독립문 독립관 독립공원의 건립은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파들이 제안했지만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이루어졌다. 19세기 말 안팎으로 거세게 흔들려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조선의 운명을 붙잡고 싶었던 조선인들의 의지와 열망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이 문은 다만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러시아로부터 그리고 모든 유럽 열강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1896년 6월 20일자 독립신문 영문판 ‘The Independent’ 사설)

 

 

서재필과 <독립신문>, 계몽의 꿈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독립문을 건립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독립신문>이 있었다. <독립신문>은 19세기 말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에 맞서 문명개화와 자주독립을 주장하고, 근대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던 서재필이 주도하여 탄생시킨 근대적 신문이다. 서재필(徐載弼, 1864~1951)은 7세 무렵 양자로 입적된 뒤 양어머니의 뜻에 따라 서울로 유학을 떠난다. 외숙인 판서 김성근의 집에 머물면서 북촌의 양반 자제들과 교류하였고, 1880년 무렵 13촌 아저씨뻘인 서광범을 통해 김옥균을 소개받았다. 1884년 김옥균이 주도한 갑신정변에 가담했고 실패하자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때 국내에서 가족들은 역적으로 몰려 자살하거나 참형되었고, 아들도 보살피는 사람이 없어 죽게 된다. 이후 서재필은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시민권을 획득했다. 1895년 귀국을 요청받아 돌아 와 개화파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독립신문>을 창간한다. “나는 우리나라 독립을 오직 교육, 특히 민중을 계발함에 달렸다는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우선 신문 창간을 계획하고 당시 내무대신인 유길준에게 그 사정을 말하였더니 자기 개인의 힘으로는 할 수 없으나 국고에서 5,000원을 지출하겠다는 승인서를 받았다. 이것을 토대 삼아 우선 인쇄기를 일본 오사카에서 구입하기로 하고 장소는 정동 미국 공사관 뒤 정부 소유의 빈집을 사용하기로 했다.”(김도태, <서재필박사 자서전>)

 

독립신문 창간호

 

1896년 4월 7일 창간된 <독립신문>은 국문판 3면과 영문판 1면 총 4면, 주 3회 발행, 한글전용 띄어쓰기 언문일치를 실행한 최초의 민간신문이었다. <독립신문>은 창간호 논설에서 창간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1 불편부당하고, 2 양반 상인의 신분차별이나 지방차별이 없이 전 국민을 평등하게 다하며, 3 전국 인민을 공평하게 대변하고, 4 정부정사를 백성에게 알리고 백성의 실상을 정부에 알리어 정부와 백성 사이에 의사소통을 시키며, 5 한글전용과 띄어쓰기를 시행하여 일반국민이 모두 신문을 읽도록 하고, 6 신문가를 저렴하게 하여 일반국민이 구독할 수 있도록 하며, 7 부정부패와 모든 불법행위를 고발하고, 8 영문판을 발행하여 한국의 사정과 한국민의 입장을 세계에 알리며, 9 국민에게 나라 안 사정을 알게 하고, 10 국민에게 외국 사정을 알게 하는 것이다.

 

국민의 계몽을 목표로 한 <독립신문>의 발행부수는 처음 300부에서 곧 500부, 1898년 초에는 1500부, 그해 말에는 3000부로 급증했다. 당시의 구독방식은 지금과는 달리 신문 한 부를 여러 사람이 돌려 읽고 사랑이나 시장에서 낭독하는 것이었으므로 한 부가 최소한 200명에게 읽혔을 것으로 추측하면 그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독립신문>은 1899년 12월 4일 폐간될 때까지 1 국민의 의식과 사상의 ‘개화’, 2 자주독립과 국가이익의 수호, 3 국민의 민권 신장과 수호, 4 한글 발전에 공헌, 5 부정부패 고발, 6 독립협회의 기관지 역할, 7 세계와 한국의 연결과 한국인 시야의 세계적 확대 등에 기여 했다. 무엇보다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독립신문>의 한글전용 채택이다. 계몽의 내용이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1910년대 후반 동일하게 국민 계몽의 목표를 설정하며 중국의 신문화운동을 이끌었던 <신청년新靑年>이 가장 주력했던 것도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를 사용하자는 백화문白話文 운동이었다. 이러한 취지의 <독립신문> 국문판을 창간부터 책임진 사람은 주시경이었다.

 

독립신문사터(배재학당 근처 표지석과 신아빌딩)

 

독립문을 둘러본 뒤 길 독립신문사의 흔적을 보고 싶다면 마을버스 종로05를 타보자. 독립문 건너편에서 출발한 마을버스는 인왕산 둘레 한양성곽까지 올라간 뒤 내려오며 사직공원 뒤편의 단군성전을 지난다. 그렇게 고불고불 작은 길과 큰 길을 지나 강북삼성병원에 하차해 길을 건너면 정동길이 시작된다. 정동길을 두리번거리며 걷다가 신아빌딩이 보이면 배재학당 방면으로 걸어 올라가자.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옆 배재정동빌딩 뒤편에 ‘독립신문사터’라고 쓰인 표식이 있다. 그런데 이곳이 실제 독립신문사 자리였는지는 논란이 있다. 걸어 왔던 길 초입에 있는 신아빌딩 근방에 독립신문사가 있었다는 다른 의견도 있기 때문이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근대 시민의 길

<독립신문>의 발행 이후 독립문 등의 건립이 자주독립의 의지를 천명하는 상징적 실천이었다면, 독립협회의 창립과 만민공동회의 개최는 <독립신문>의 취지에 부합하는 근대적이며 구체적인 실천이었다. 서재필의 제안하고 여러 개화파 지식인집단이 참여한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2일 창립한다. 독립협회가 독립문 독립관 독립공원의 건립을 추진하던 초기에는 관료들이 주도를 했지만 1897년 8월 29일 첫 토론회를 시작으로 점차 시민들이 표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독립협회의 토론회는 국민 계몽에 관한 주제뿐 아니라 정부 정책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포함되었다. 따라서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지원하던 정부도 입장을 바꿔 서재필의 해고와 <독립신문>의 폐간을 시도하였다. 토론회는 매주 일요일 3시 독립관에서 개최하고, 논쟁적 주제를 선정해서 찬성과 반대 연사 각 2명이 발표를 하며, 회원들은 토론자로 참가하고 회원이외의 방청인도 참관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분야의 문제를 주제로 모두 34회 개최되었으며 제8회 토론회부터는 약 5백 명씩 참여하여 열띤 토론을 했다. <독립신문>의 국민 계몽이라는 목표는 독립협회의 토론회를 거치면서 근대 시민의 탄생과 성장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1898년 2월 서재필과 윤치호는 독립협회의 운동을 계몽운동으로부터 민족독립을 지키기 위한 사회정치운동으로 전환한다. 첫 번째 작업으로 황제에게 강국들이 나라를 넘보고 내정을 간섭하여 우리나라를 속국으로 만들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므로 국민과 함께 단결하여 밖으로는 자주독립을 굳게 지키고 안으로는 과검하게 내정개혁을 단행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그리고 3월 10일 종로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한다. 최초의 만민공동회에는 서울 시민의 약 17분의 1인 1만여 명이 운집하여 러시아의 침략정책을 규탄하였다. 이 민중대회에서 미전 쌀장수 현덕호가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연사들의 연설을 들은 민중들은 박수로서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12일에는 독립협회가 주최하지 않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만민공동회가 동일 장소에서 개최되었는데 그 수는 더 많아져 수만 명의 민중들이 운집하였다. 이후 독립협회는 의회설립을 추진한다. 근대적 정치제도의 건설에 대한 논의와 운동이 본격화된 것이다. 10월 28~29일 관민공동회를 거쳐 의회설립법이 제정 공포되었지만, 의회가 설립되기 하루 전날인 11월 4일 황제에 의해 개혁정부의 해산, 독립협회 해산과 간부들의 체포 명령이 내려지면서 의회설립의 꿈은 좌절된다.

 

만민공동회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었던 곳은 지금의 광화문과 종각역 사이 종로구 서린동이다. 만민공동회가 열리면 종로의 상인들은 가게문을 닫고 참여했으며, 밥장사는 장국밥을 술장사는 술을 가져왔고, 부자와 거지 가리지 않고 기부금을 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낯설지 않고 눈앞에 선하게 그려지는 것은 역사의 반복 때문일 것이다. 2016년 가을에서 2017년 봄까지 이어졌던 촛불집회는 만민공동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1898년 12월 1일자 <독립신문>의 사설은 당시 보름 넘게 철야투쟁을 하던 민중들을 “만민들이 충분忠憤을 이기지 못하여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며 무한 고생한다”고 묘사했다. 그해 겨울 우리도 120여 년 전 민중들의 열망과 분노로 가득 찼던 그 길 위에 그렇게 서있었다.

 

 

격변의 조선을 각자의 철학으로 지나다

“어제는 멀고 오늘은 낯설며 내일은 두려운 격변의 시간이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각자의 방법으로 격변하는 조선을 지나는 중이었다.”

 

요즘 방영되는 드라마의 한 구절이다. 19세기 한국의 사상지형을 설명하기에도 적절한 말이다. 19세기 사상의 하나는 동학으로부터 동학농민운동에 이르는 민중적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초기 개화사상으로부터 갑신정변-갑오개혁-독립협회에 이르는 계몽적 개화의 흐름이며, 또 다른 하나는 앞의 두 가지 모두를 거부한 전통적 위정척사의 흐름이다. 이들을 ‘흐름’이라고 표현한 것은 1850~60년대부터 1900년 초까지의 각각의 사상 안에서도 변화가 매우 컸으며, 단일한 하나의 사상으로 규정하거나 체계화되지 못한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이중에서 철학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것은 첫 번째이고 가장 주목받지 못한 것은 두 번째이다. 앞선 시대와의 사상적 연관을 찾기 어렵다, 새로운 철학적 내용이 없다, 외세 의존적인 태도로 실제 많은 친일인사를 배출했다는 감정적 배제 등이 그 이유였다. 필자가 개화사상에 가졌던 오랜 편견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이 19세기 격변의 조선을 각자의 ‘철학’과 방법으로 지나온 흔적이며 역사일 것이다. 오랜 편견을 버리고 갖게 된 생각은 그들이 지나온 시간과 길을 읽고, 정리하고 그런 후에 평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이다. 내가 찾고 있는 우리의 근대와 현대는 그렇게 지나온 시간과 길들에 의해 촘촘히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고자: 박영미(한양대 철학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17세기 이후 중국과 한국의 근대에 대한 모색과 사상적 연관을 연구하고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김정철
  10. 현상윤, 최초의 근대적 체제의 조선사상사를 짓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0: 윤태양
  11. 구도와 구세의 길, 운명적 불화 – 한용운 [길 위의 우리 철학] – 11: 송인재
  12. 태백산에서 최후를 맞은 서양철학 1세대, 박치우 [길 위의 우리 철학] – 12: 조배준 
  13. 시대정신을 찾는 여정의 첫 발걸음: 신채호와 서울 [길 위의 우리 철학] – 13: 진보성
  14. 큰 이룸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간 삶의 철학자, 도산 안창호 [길 위의 우리 철학] – 14: 배기호
  15. 밑바닥에서 진리를 찾은 이- 장일순 [길 위의 우리 철학] – 15: 구태환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下)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8. <여성들과 공동체의 전복>,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 (下)

 

이승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주부들을 계급에 외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한, 계급투쟁은 매순간 모든 지점에서 지연당하고 좌절당하며, 또한 자신들의 행동의 완전한 범위를 찾아낼 수도 없다. … 가사노동이 생산적 노동의 은폐된 형태임을 폭로하고 규탄하는 것은 여성 투쟁의 목표와 형식 모두에 관한 일련의 문제를 제기한다.”

 

  • 핵가족과 그것의 정치경제학

 

그렇다면 이렇게 여성들의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비생산적 노동’으로 간주되고, 그에 따라 부불노동으로 처리되는 것은 어떻게 형성되고 정당화되게 된 것일까? 왜 오늘날에도 여전히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조차 가정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늘 가사노동이 당연한 것으로 떠넘겨지는 것일까? 달라 코스타는 그 이유를 역사적으로 형성된 ‘자본주의적 가족’에서 찾는다. 그녀에 따르면, 자본주의 이전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족은 주로 농업생산 및 수공업생산에 공동으로 참여했던 데 반해,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변화된 생산양식은 이전의 봉건제적 가족공동체를 돌이킬 수 없는 형태로 붕괴시키면서 현재와 같은 핵가족 형태를 고착시켰다. 생산의 장소를 농촌의 가족공동체에서 도시의 공장 및 사무실로 이전시키는 사회의 공간적 재배치가 진행되는 동안, 여성, 어린아이, 노인, 장애인 등은 이전까지는 필수적으로 생각되었던 그들 노동의 지분과 그러한 노동참여에 따른 상대적인 권력을 상실했다. 자본은 도시로 떠밀려온(물론 그들은 기존의 가부장제로부터, 농노나 노예 신분으로부터의 기쁨에 찬 해방을 맞이한 것도 사실이다) 이들 중에서 선별한 인간인 남성을 가족으로부터 떼어내 공장과 사무실의 임금노동자로 전환시키고, 그들에게 나머지 가족 전체의 생계의 짐을 지웠다. 이렇게 농노제에서 자유로운 노동력으로의 이행은 우선 남성 프롤레타리아트를 여성 프롤레타리아트와 공간적·기능적·이데올로기적으로 분리시켰고, 곧이어 학교제도를 통해 그들로부터 그들의 아이를 분리시켰다. 농촌공동체의 생산과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가부장 남성이 자유로운 임금 소득자로, 그 다음 그들의 자녀들이 예비노동자이자 학생으로 변형되는 동안, 갈기갈기 찢어진 가족 내에는 성별 및 세대간 분리에 따른 뿌리깊은 소외가 자라난다.

이처럼 자본은 가족구조를 재편함으로써 남성 및 아이들을 여성들과 분리시키고, 그들에게 남성과 아이들을 위한 뒷바라지, 즉 무상의 재생산노동인 가사노동의 과업을 할당했다. 이제 가정에서의 모든 일은 여성의 책임이 되며, 자본주의적 생산순환을 안정적으로 유지시키기 위해서라도 그녀들은 반드시 가정에 남아야만 한다. 자본은 이러한 가족형태에 의지함으로써, 자신의 이윤생산에 성공하고, 또 계급과의 대결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사서비스를 받아 잘 다려진 옷을 입고 충분한 식사를 하고 나타난 공장 노동자들은 그렇지 않은 자들보다 더 많은 생산능력을 발휘해 줄 것이며, 그들이 일하면서 얻은 육체적 피로감과 상실감을 사랑으로 채워줄 사람이 가정에 늘 있을 것이며(단 자본의 관점에서는 이 사랑조차 새로운 노동력의 생산을 가능케 할 삽입섹스로 고정되어야 한다), 그들이 은퇴하면 잘 훈련된(이른바 ‘가정교육을 잘 받은’) 아이들이 나타나 공장과 사무실의 빈자리를 메워줄 것이며, 또 그들이 일하다 다치고 불능상태에 처했을 때면 가정과 여성이 떠맡아줄 것이며, 그래도 일손이 부족할 때라면 집안에 유폐되어 ‘무능력’의 이미지가 덧씌워진 여성들이 상대적으로 저임금을 받으며 일해줄 것이며, 마지막으로 이 모든 비참한 착취상황에 대한 불만을 가족 내부의 갈등으로 극적으로 전환시켜줄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와 아내가 불행한 것은 남편이 쥐꼬리만큼만 돈을 벌어와서이다.’ ‘남편과 아이가 불행한 것은 집안일을 소홀히 한 아내와 엄마 때문이다.’, ‘부모가 불행한 것은 그들 가족 전체를 계급이동 시켜줘야 할 아이가 공부도 못하고 툭하면 학교에서 말썽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등등. 즉 이런 이유로 여성들이 집안과 가족에 머물러 있어야만, 그들이 무상의 노동을 해야만 자본은 자신의 정상적인 생산순환 및 이윤생산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달라 코스타의 ‘자본주의적 가족 비판’은 여성의 자유로운 사회진출이나 그에 따라 직장 내 유리천장을 없애는 것이 여성투쟁의 과제로 보는 ‘자유주의적’ 관점을 경계하면서도, 동시에 여성투쟁을 계급투쟁의 종속변수로 보는 ‘사회주의적’ 관점이 은폐시킨 자본의 정치경제학을 그 근본에서부터 비판할 논거를 제공해준다.

 

“노동계급 여성의 해방이 그녀가 가정 밖에서 일자리를 얻는 데 있다는 점을 옹호하는 이들은 문제의 일부를 보지만 해결하지는 않는다. [공장의] 일관 작업대로의 예속이 부엌 싱크대로의 예속으로부터의 해방은 아니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또한 일관 작업대의 예속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며, 여성들이 어떻게 착취되는지 모른다면 남성들이 어떻게 착취되는지를 정말로 알 수 없다는 점을 다시 증명하는 것이다. … 가족이 자본주의적 노동 조직화의 바로 그 기둥임을 완벽히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가족을 단지 상부구조로 간주하고, 변화를 위해서 오로지 공장들에서의 투쟁 단계들에만 의존하는 실수를 범한다면, 우리는 계급투쟁에서의 기본적인 모순 그리고 자본주의적 발전에 기능하는 모순을 항상 영구화하고 악화시킬 절름발이 혁명으로 옮겨갈 것이다.”

 

  • 여성들의 힘과 대안적 정체성

 

이 점에서 달라 코스타는 글을 쓸 1970년대 당시의 운동의 한 형태였으며 현재에도 하나의 구호로 사용되는 “가사노동에 임금을!” 투쟁을 지지 및 옹호하는 한편 그것이 가진 한계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려 했다. “가사노동 임금에 대한 요구는 처음부터 하나의 토대이자, 여자가 당하는 억압·종속·고립을 그것들의 물질적 기초인 여자가 당하는 착취로 곧장 연결시키는 데에 본질적인 매력이 있는 하나의 관점”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투쟁이 여성으로 하여금 집에 평화롭게 있으면서도 국가가 지급할 임금을 순진하게 손놓고 기다리게 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으며, 또한 이 투쟁이 여성운동의 다른 형태들과 결합되지 않은 채 제기되거나 또는 자본주의 사회의 핵가족 제도를 근본적으로 문제삼지 않는 한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여성의 노예적 삶을 더욱 공고히 할 위험, 즉 여성의 역할을 가사노동에 고정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사노동임금 투쟁의 목표는 단지 이런 노동을 덜, 적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노동을 부여받은 여성의 주부화를 박살내는 쪽에 맞춰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투쟁의 출발점은 “가사노동을 어떻게 더 효율적으로 하느냐가 아니라 이러한 투쟁에서 주인공으로서의 위치를 어떻게 찾느냐에 즉 가사노동의 더 높은 생산성이 아니라, 투쟁에서의 더 높은 전복성”에 두어져야 한다.

달라 코스타는, 맑스가 그러했듯, 이러한 여성들의 전복적 투쟁이 가능한 근거를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그 노동의 형태와 성격 속에서 찾고자 했다. 즉 여성들이 벌이는 “사회적 투쟁의 가능성은 가정에서의 여성노동이 지닌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성격”에서 나온다. 그것은 그녀들에게 “대안적인 정체성”을 제공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때 ‘대안적인 정체성’, ‘사회적 투쟁의 가능성’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즉 자본주의적 생산체계와 가족체계는 여성을 무엇으로 생산하는가? (1) 마녀-되기와 악녀-되기. 여성 주부들은 집안의 벽 안에 구금되어 그녀들에게 부여된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여성성’을 재차 강제당하는데,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노동조직화의 전체 구조를 보게 만든다. 즉 자본과 남성 노동자들이 공장 내에서의 적대를 중단하고 동맹관계를 회복하는 곳인 가정에서 여성들은 늘 ‘어디 나다니지 말고 집에만 있어!’, ‘몸가짐을 똑바로 해’, ‘집안 일을 완벽하게 해내라!’와 같은 명령을 듣곤 하는데, 이것은 구금된 여성들 자신으로 하여금 자본과 남성노동자의 은밀한 연합이 자신의 신체를 겨냥해서 이뤄지고 있음을 파악하게 만든다. 사랑스러운 아내, 영웅적 어머니, 조신한 딸로 그녀들에게 부과되는 이미지는 여성투쟁이 집중되고 또 그녀들이 위반할 수 있는 한계 지점이 어디인지를 알려준다. (2) 가족관계 바깥의 자율적 개인. “여성들은 아내나 어머니로서만 자신들의 남편과 아이를 만나기를, 즉 그들이 바깥세상에서 집으로 돌아온 뒤에 갖는 식사시간에만 만나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 자본주의적 조직화의 모든 영역이 여성의 가정주부화를 전제하는 그만큼, 가정 바깥의 모든 장소들은 여성들에 의한 투쟁의 기회를 제공한다. 즉 공장 회합에서, 반상회에서, 학생총회에서, 심지어 취미모임들에서 여성들이 남성을 어머니 대 아버지나, 아들 대 딸이 아니라 한 명의 독립된 인격체로 만나고 대면하면서 공통 관심사를 다룰 때, 그들은 가정 내에서의 종속된 권력관계를 해체할 가능성을 제공한다. (3) 질 오르가즘의 신화를 파괴하는 사랑의 기계. 여성들이 회사나 공장에서, 노동자총회에서 단지 육체적으로 피곤하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밤에는 잠자는 것 외에 사랑을 하고 싶기에 야근을 금지해야 한다”고 요구할 때, 그것은 노동의 사회적 조직화에 맞서 여성으로서 그녀 자신의 독자적인 이해관계를 진전시키는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좌파 정당들과 노동조합들은 사랑을 계급의 이해관계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개인들의 낭만적 영역으로 치부해왔다. 하지만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남성들이 아니라 왜 여성들이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계급의 전체 역사에 새로운 빛을 던지는 계기를 준다. 따라서 이때의 사랑은 출산과 육아를 벗어난 사랑, 따라서 삽입성교에 구속되지 않는, 강제된 이성애에서 자유로운 개인들의 사랑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4) 생산에서 배제된 자들의 연합. 자본주의적 가족체계 내에서 남성들과 청소년들이 가족들로부터 분리되고, 그들이 근대적 훈육기관들에서 자본의 명령에 익숙해지는 동안, 여성들, 노인들, 장애인들과 같은 자본주의적 생산회로에서 배제된 이들은 자신들의 연합을 강화시킨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시간과 장소에서 어린아이들, 노인, 아픈 사람 등과 시간을 갖기를 원한다.” ‘시간을 갖기를 요구하는 것’, 이것은 단지 자본의 판매시장 확대를 의미하는 가사노동의 자동화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것은 생산회로에서 배제되었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생산회로를 떠받치고 있는 여성들이 투쟁의 주도권을 쥐고 자본과 국가를 향해 다른 모든 배제된 사람들과 함께 사회적 부를 재전유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자신들과 분리된 노동자 남성 및 학생으로서의 청소년들과의 재통합을 추진하는 시초적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 노동거부와 공동체의 전복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자본주의적 생산회로와 가족구조는 여성의 사회적 투쟁의 잠재력을 극도로 팽창시킨다. 자본주의는 부불노동으로서의 여성의 가사노동에 의존해 자신의 거대한 이윤생산체계를 지탱하고, 재생산한다. 이런 점에서 달라 코스타는 여성운동의 투쟁방향과 목표를 좀더 혁명적으로 수립하기 위해, 이 거대한 생산회로의 중심부에 있는 가사노동과 바로 그 경계선 내에서 벌어지는 일을 확인하고자 했다. 여성들은 가정 바깥에서든 안에서든 항상 일하며, 바로 이렇게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바로 그 노동의 성격, 그 노동의 수행과정이 여성의 혁명적 잠재력을 끊임없이 팽창시키는 것이다. 자본은 자본주의 이전에는 한 덩어리로 생산했던 가족적 생산체계를 해체하고 그들 중 일부를 공장과 학교체계로 분리시켜 표면적인 착취관계를 확립했으며, 그 과정에서 모든 생산의 밑바닥에 여성의 부불노동이 뒷받침되게끔 하는 착취와 이윤의 안정된 판을 형성했다. 바로 이 숨겨진 노동, 그림자 노동이 없다면, 자본은 이윤은커녕 현재와 같은 사회형태로의 도약조차 이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달라 코스타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점에 있다. 즉 자본주의를 전복할 수 있는 혁명의 비밀은 바로 이 근본적 밑바탕, 가사노동이면서 재생산노동인 이 잉여가치 생산의 원천인 여성 자신의 노동에서 찾아져야 한다.

심지어 오늘날 이 노동은 이제 숨겨진 노동이 아니라, 표면적으로도 생산관계 전체의 전면으로 부상되었다. 노동의 여성화, 노동의 정동화, 노동의 가사노동화, 그리고 인간 자체, 주체성 그 자체를 생산하는 노동의 삶정치화는 이제 산업자본을 넘어서 오늘날의 인지자본주의 내에서, 임금관계 안팎 모두에서 가장 핵심적인 생산능력이 되었다. 자본은 과거에는 부불노동의 당사자인 여성들에게만 요구했던 것을 이제 남녀 모두에게 예외없이, 심지어 자본 자신의 운동에게조차 명령한다. 지금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라! 너 자신이자 타인인 저 특이한 인격체이자 감성적이고 정동적인 존재를. 모든 이에게 친절한 인간이 되어라!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고 타자에게 사랑받으며, 타자를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 되어라!라고. 이 점에서 바로 우리의 시대, 인지자본의 시대에서, 달라 코스타의 혁명적 페미니즘은 다른 어떤 혁명이론도 능가할 가장 근본적이고 해방적인 선언이 된다. (끝)

 

  •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 편은 여기까지 입니다.
  • 다음으론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편이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