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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존재와 시간」읽기 25절~32절 [건국대학교 다자인多字人]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읽기  25절~32절

 

 

제4장 더불어 있음과 자기 자신으로 있음으로서의 세계–안에–있음. “그들” (25절~27절)

 

4장은 1. 일상적 현존재의 ‘누구’에 대한 실존론적 물음의 단초를 실마리로 하여(25절), 2. 일상적 현존재가 처해 있는 실존론적 구조인 더불어 있음과 공동현존재를 분석한 뒤(26절), 3. 일상적 현존재가 누구인지에 대해 “그들[세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27절).

 

제25절 현존재는 누구인가 하는 실존론적인 물음의 단초

현존재는 그때마다 각기 나 자신인 존재자이며, 존재는 각기 ‘나의’ 존재이다. 그렇다면 “현존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는 ‘나’라고 답하면 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곧 현존재라는 자명성만으로 그 현존재가 ‘누구’인지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이 확정되지는 않는다. 이때의 ‘나’는 모든 변화의 밑바탕에 놓여 있는 주체, 즉 어떤 동일성에 대한 지시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때 ‘나’는 “이것은 바로 나의 존재다”라고 가리키는 구속력 없는 형식적 제시일 뿐이다. ‘나’라는 말은 어떤 동일성을 지시하기는 하지만, 그 안에 누가 들어 있는지까지 정해 주지는 못한다. 실제의 현상적인 존재연관 속에서 ‘나’는 오히려 자신의 “반대”, 즉 ‘나 아닌’ 모습으로 드러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존재의 주체가 누구인가는 존재론적으로 문제일 뿐 아니라 존재적으로도 은폐된 채 남아 있다. 일상 속에서 현존재 자신에게조차 자신의 ‘누구’가 열어밝혀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물음은 단순히 내면을 들여다보거나 “Ego qui sum”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물음은 어떻게 접근되어야 하는가? 현존재는 오직 실존하면서만 자기 자신일 수 있다. 그러므로 현존재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경우(자립성)와 자기 자신이 아닌 방식으로 존재하는 경우(비자립성)는 모두 현존재의 실존방식으로부터 실존론적으로 해명되어야 한다. “나”라는 동일한 실체가 언제나 밑바탕에 있다는 말로는 이 문제의 답이 되지 않으며, 현존재의 ‘누구’는 실존 속에서 밝혀져야 한다. 인간의 실체는 영혼과 육체의 종합으로서의 정신이 아니라 실존이기 때문이다.

 

 

제26절 타인들의 공동현존재와 일상적인 더불어 있음

현존재는 ‘누구’인가는 일상적 현존재에서부터, 그리고 현존재의 근본구성틀인 세계-안에-있음에서부터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가장 가까운 주위세계를 생각해보자. 수공업자는 도구와 더불어 그 “작품”이 그를 위해 행해지고 있는 타자도 함께 만난다. 손안의 것에는 이미 그것을 사용할 누군가가 지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타인은 나중에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도구의 지시구조를 통해 처음부터 함께 열어밝혀진다. 현존재로서의 타인과 내가 그 안에 존재하는 세계는 처음부터 공동의 세계이다. 타인이 도구도 사물도 아닌 이유는, 타인이 나(현존재)와 동일한 존재방식, 즉 “da”를 나와 더불어 공유하기 때문이다.

타인은 나를 제외한 여타의 사람들이 아니라, 나도 그 속에 같이 속해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현존재의 세계는 공동세계(Mitwelt)이고, 안에-있음은 더불어 있음(Mitsein)이며, 타인의 세계내부적인 자체존재는 공동현존재(Mitdasein)이다. 먼저 ’나‘가 확립된 뒤 ’나‘와의 대립을 통해 타인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타인도 배려하는 주위세계 안에서 함께 발견된다. 그래서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그 자체에서 공동존재이다. 현사실적으로 타인이 지각되지 않을 때에도, 현존재의 혼자 있음 역시 더불어 있음이며, 타인은 더불어 있음 안에서만 결여될 수 있다.

더불어 있음 또한 염려(Sorge)의 현상에서 해석된다. 손안의 것과의 왕래가 배려함(Besorgen)이었다면, 타인의 공동현존재는 심려(Fürsorge)의 대상이다. 심려에는 두 극단이 있다. 타인 대신 뛰어들어(einspringen) 그를 의존적으로 만들거나 지배하는 심려, 그리고 타인에 앞서 뛰어들어(vorausspringen) 그가 그의 염려 안에서 투명해지고 염려를 향해 자유로워지도록(für sie frei) 돕는 심려다. 배려함을 이끄는 것이 둘러봄(Umsicht)이라면, 심려를 이끄는 것은 고려(Rücksicht)와 관용(Nachsicht)이며, 이들은 무정함(Rücksichtlosigkeit)과 눈감아줌(Nachsehen)으로 결손될 수 있다.

 

 

제27절 일상적인 자기 자신으로 있음과 “그들”

26절에서 보았듯 일상적 현존재는 서로 함께 있음이다. 그런데 타인과 더불어 무언가를 배려하는 가운데에서는 늘 타인과의 차이를 신경쓰는 염려, 즉 거리감이 존재한다. 뒤처지면 따라잡으려 하고, 앞서면 그 자리를 지키려 한다. 이 때문에 현존재는 일상적 서로 함께 있음에서 타인의 통치 아래 서 있게 된다. 타인들이 일상적 현존재로부터 그 존재를 빼앗고, 타인들의 임의가 일상적 존재가능성들을 좌우한다. 그런데 나 자신 또한 그 “그들”에 속하는데, 이는 우리가 남들이 즐기고 보고 판단하는 대로 따라 똑같이 그리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로써 26절 끝의 물음, 곧 일상적 현존재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주어진다. 그것은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자기 자신도, 모두의 총합도 아닌 중성자(Neutrum)로서 “그들”, 즉 세인(das Man)이다. ‘그들’은 거리감, 평균성, 평준화로 이루어진 “공공성”을 통해 모든 세계해석과 현존재해석을 규제한다. 이는 사태에 깊이 파고들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차이에 무감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 안에는 책임질 그 누구도 없으므로, ‘그들’은 현존재의 부담을 덜어주면서 지배를 공고히 한다. 일상적 현존재의 “누구”는 결국 ‘아무도 아닌 사람’이다.

 

그러나 이를 존재의 격하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들’ 은 현존재가 그 안에서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로 있게 되는 존재양태이기 때문이다. 일상적 세인이야말로 우리가 실제로 가장 자주, 가장 강력하게 그 지배를 받는 “실재하는” 현상이다. ‘그들’은 실존범주의 하나이며 근원적인 현상으로서 현존재의 긍정적인 구성틀에 속한다. 일상적 현존재의 자기는 본래적인 자기와 구별되는 그들-자기이며, 본래적인 자기 또한 ‘그들’의 변양태로 이해되어야 한다.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

 

제5장 안에–있음 그 자체 (28절~38절)

 

제28절 안에–있음에 대한 주제적 분석이 가지는 과제

지금까지 세계의 구조계기와 일상적 현존재의 ‘누구’를 밝혀 왔다면, 이제 안에–있음의 현상으로 다시 논의를 이끌어가야 한다. 안에-있음은 공간적 내재성도, 주체의 속성도 아닌 현존재 자신의 본질적인 존재방식이며, 세계-내-존재로 구성되는 현존재는 그 자체가 항상 자신의 “거기(Da)”이다. “나는 여기 있다”의 “여기”는 독립적으로 성립하지 않고, 손안에 있는 “저기”를 향해 거리를 없애고 방향을 잡으며 배려하는 존재로서만 이해된다. 이러한 실존론적 공간성은 다시 세계-안에-있음에 근거하며, “여기”와 “저기”라는 장소규정은 오직 하나의 “Da” 안에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안에-있음 그 자체, 즉 ‘거기에’의 존재에 대한 설명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가. ‘거기에’의 실존론적 구성. 나. ‘거기에’의 일상적 존재와 현존재의 빠져 있음

 

가. ‘거기에’의 실존론적 구성

제29절 처해 있음으로서의 거기에–있음

존재론적으로 “처해 있음”이라 부르는 것은 존재적으로 가장 일상적인 <기분>, <기분 잡혀 있음>이다. 현존재는 언제나 어떠한 기분 속에서 자기 자신과 세계를 경험한다. 기분은 좋음, 나쁨뿐 아니라 침착함, 불쾌감, 무(無) 기분까지 포함하며,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으며, 어떤 상태로 되어지는가”를 드러내 존재를 그것의 ‘거기에’로 데려온다. 기분 잡혀 있음 속에서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떠맡겨진 존재자로서 열어밝혀져 있다.

 

현존재는 대개 존재적-실존적으로 기분에서 열어밝혀진 존재를 피한다. 그러나 피함 자체에서도 ‘거기에’는 열어밝혀져 있다. 어떠한 기분에 처해 있기 때문에 피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러한 “현존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하이데거는 그의 ‘거기에’로 내던져져 있음이라 칭하며, 이는 ‘떠맡음의 현사실성’을 암시한다. 현사실성은 눈앞에 있는 것의 사실성이 아니라 실존 속으로 받아들여진 현존재의 존재성격이며, 직관에서는 발견될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기분은 인식이나 의지보다 더 근원적이다. 처해 있음은 현존재를 그의 내던져져 있음에서, 우선 대개는 피하는 돌아섬의 방식에서 열어밝힌다. 기분은 이미 세계-안에-있음을 전체로서 열어밝혔고, 무엇으로 향함을 비로소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처해 있음은 세계, 공동현존재, 실존이 동일근원적으로 열어밝혀져 있는 실존론적 근본양식의 하나이다.

 

또한 처해 있음에는 세계에 열어밝히면서 의존해 있음이 놓여 있다. 현존재가 다른 존재자와 관계하려면 먼저 세계가 처해 있음을 통해 열어밝혀져 있어야 한다. 처해 있음은 현존재를 존재론적으로 성격규정할 뿐 아니라, 그 열어밝힘 때문에 실존론적 분석론에서 원칙적인 방법적 중요성을 지닌다.

 

제30절 처해 있음의 한 양태로서의 공포

공포는 세 측면에서 분석된다. 대상, 상태, 원인의 측면이다. 먼저 공포의 대상, 즉 <두려운 것>은 그때마다 손안의 것, 눈앞의 것, 공동현존재의 존재양식을 가진 것으로서 세계내부적으로 만나게 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유해함의 사용사태 양식을 띠고, 특정한 방면에서부터 와서 특정한 주변영역을 겨냥하며, “섬뜩한” 것이다. 아직 가까이 있지 않지만 가까워 오고 있으며, 이 가까워 옴에서 위협의 성격을 갖는다. 그냥 지나갈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 오히려 두려움을 증대시킨다. 그 다음으로, <두려워함 자체>는 그렇게 성격규정된 위협적인 것이 자신에게 닥치도록 놔두는 자유롭게 내줌이다. 미래의 악을 먼저 알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함이라는 처해 있음 속에서 세계가 이미 두려운 것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 때문에> 공포를 두려워한다고 할 때의 그 ‘ 때문에’, 즉 두려움의 원인은 바로 현존재 자신이다. 현존재만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문제시할 수 있기에 두려워할 수 있다.

 

따라서 두려움은 언제나 현존재를 그의 ‘거기에’ 있음에서 드러내준다. 두려움은 위협해오는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와 위협받는 안에-있음을 똑같이 근원적으로 열어밝히며, 따라서 처해 있음의 한 양태이다.

 

제31절 이해로서의 거기에–있음

처해 있음과 더불어 <이해>가 근원적으로 “거기에”의 존재를 함께 구성한다. 처해 있음은 그때마다 나름의 이해를 가지며, 이해는 언제나 기분 잡힌 이해이다. 따라서 <이해> 역시 기초적 실존범주이다. 인식양식이라는 의미의 이해는 이 일차적 이해의 실존론적 파생체일 뿐이다. 이 근원적인 <이해>는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향해 존재하는 방식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 때문에’ 안에서 실존하는 세계-안에-있음이 그 자체로서 열어밝혀져 있으며, 이 열어밝혀져 있음이 이해”이다. 현존재는 지금의 모습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가능성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이해를 통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가 아니라 ‘누구일 수 있는지’, ‘어디에 있을 수 있는지’의 방식으로 자신을 파악한다.

 

이는 <이해>가 <기획투사>라는 실존론적 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해는 현존재의 존재를 유의미성과 ‘그 때문에’에게로 기획투사한다. 기획투사는 현사실적인 존재가능의 여지를 지칭하는 실존론적 존재구성틀이다. 현존재는 그의 존재가능에서 “아직 아닌” 바로 그것으로 “존재”하며, 그가 되거나 되지 못하는 그것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네가 무엇인 바로 그것이 되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이해>가 “~수 있음”의 형식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가능하다.

 

현존재는 우선 대개 그의 세계에서부터 자신을 이해한다(비본래적 이해). 그러나 이해는 자신을 일차적으로 ‘그 때문에’ 안으로 던질 수도 있는데, 이때 현존재는 그 자신으로서 실존한다(본래적 이해). 다만 이는 주체나 개인, 인격으로서가 아니다. 또한 비본래적 이해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기획투사의 한 실존론적 변양태이다.

<이해>는 기획투사성격에서 현존재의 <시야>를 만들어 낸다. 그중 일차적으로 그리고 전체에서 실존에 관계되는 시야를 <투명성>이라 하며, 하이데거는 이 말로 잘 이해된 “자기인식”을 가리킨다. 현존재는 세계 곁에 있음, 타인과 더불어 있음에서 투명하게 된 한에서만 “자신을 본”다. 이렇게 <처해 있음>과 <이해>는 세계-안에-있음의 근원적인 열어밝혀져 있음을 성격규정한다. 현존재는 기분 잡혀 있음에서 가능성들을 “보고”, 그 가능성들을 기획투사하며 열어밝힘에서 이미 기분 잡혀 있다.

 

제32절 이해와 해석

현존재는 이해로서 자신의 존재를 가능성에게로 기획투사하며, 이해의 기획투사는 스스로를 형성할 고유한 가능성을 가진다. 이 형성을 <해석>이라 한다. <해석>에서 이해는 자신이 이해한 것을 이해하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해석>은 이해된 것을 알게 됨이 아니라 이해에서 기획투사된 가능성들을 정리작업함이다.

 

<의미>는 앞서 가짐, 앞서 봄, 앞서 잡음에 의해 구조지어진 기획투사의 ‘그리로(의미 지평)’이며, 거기에서부터 어떤 것이 어떤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의미는 오직 현존재만이 “가진다”. 그래서 오직 현존재만이 의미 있거나 무의미할 수 있다. 가령 볼펜이 의미를 자기 안에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어떤 도구로 이해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의미>라는 개념에 대한 이러한 원칙적인 존재론적-실존론적 해석을 확고하게 견지할 경우 현존재적이지 않은 존재양식의 모든 존재자들이 전혀 의미와 무관한 것으로, 본질적으로 의미가 전혀 없는 것으로 개념파악되어야 한다.

 

해석에는 이미 앞서 가진 이해가 필요하고, 이해는 다시 해석을 통해 깊어진다. 그래서 이해와 해석이 서로를 전제하며 맴도는 순환이 생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를 피해야 할 악순환이나 불완전함으로 “느끼는” 것은 이해를 근본적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현존재는 아무 전제 없는 백지 상태에서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 세계와 자신을 어느 정도 이해한 채로 존재하며 그 위에서 해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해>에서의 <순환>은 결함이 아니라 의미의 구조에 속하며, 현존재의 실존론적 구성틀, 즉 해석하는 이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문제가 되는 존재자는 이러한 존재론적 순환구조를 가진다. 다만 <순환>이라는 표현 자체는 눈앞에 있음의 존재양식에 속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순환은 이해의 구조를 드러내는 표현일 뿐, 이것으로 현존재를 “순환”이라고 존재론적으로 성격규정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계속)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9(IX)권 후반부 ~ 10(X)권[건국대학교 다자인多字人]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9(IX)권 후반부 ~ 10(X)권

 

 

건국대학교 다자인多字人

 

 

  1. <형이상학> 9(IX)권 후반부(9장~10장)

앞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태가 정의상으로, 시간상으로, 존재론적으로 가능태에 앞섬을 기술했다. 9장에서는 가치의 측면에서도 현실태가 가능태보다 더 우월함을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현실적인 활동은 훌륭한 능력보다 더 좋고 고귀하다. 왜냐하면 어떠한 능력을 가진 것은 반대의 능력 또한 함축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것은 처음부터 현실태로 있으므로, 나쁜 것이 포함될 수 없다.

10장은 있음과 참 간의 관계를 다룬다.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은 참과 거짓의 의미로 쓰일 수 있다. 참과 거짓의 문제는 대상들의 결합과 분할에 따른 것이다. 결합된 것을 결합되었다고 하는 사람은 참을 말하지만, 대상들과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잘못을 범하고 있다. 따라서 판단은 사물들에 대한 결합과 분리의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과 거짓은 무언가를 결합하거나 분리할 때 발생하는 복합적 판단이다. 따라서 단순한 것은 참 거짓의 구조에 속하지 않는다. 합성되지 않은 실체의 경우에는 모두 가능적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있기에 잘못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1. <형이상학> 10(X)권(1장~10장)

 

10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 개념으로부터 있음, 동일, 다름, 차이 등의 개념들을 구체화한다. 하나에는 크게 4가지 뜻이 있는데, 이는 각각 본성적으로 연속적인 것, 전체를 이루는 특성한 형상, 수적으로 분할불가능한 개별자, 그리고 종적으로 분할불가능한 학문적 하나이다. ‘하나이다’는 ‘분할불가능하다’는 것, 무엇보다도 각 유, 주로 양의 첫째 척도임을 뜻한다. 따라서 양을 갖는 것은 모두 하나에 의해서 인식된다. 그러므로 하나는 수인 한에서 수의 원리이다. 모든 것에서 척도와 원리는 하나이자 분할불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높은 수준에서 ‘하나임’은 일종의 척도이며, 따라서 무제한적인 뜻에서나 하나인 한에서 하나는 분할불가능하다.

 

2장에서는 하나와 있음의 관계성을 다룬다. 하나와 같은 보편자는 실체일 수 없으며, 있는 것 자체도 여럿과 떨어져 있는 하나로서 실체일 수 없다. 왜냐하면 있는 것과 하나는 가장 보편적으로 모든 것에 대한 술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있는 것’과 ‘하나’는 똑같이 여러가지 뜻으로 쓰이지만 같은 개념은 아니다. 그럼에도 어떤 점에서는 ‘있는 것’과 ‘하나’가 동일한 것을 가리키는데, 이 둘은 여러 범주들에 대해 똑같이 적용되고 어떤 범주 안에 있지도 않다. 따라서 ‘하나이다’는 ’어떤 것이다’와 다른 것이 아니다.

 

3~5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 개념을 통해 여럿, 동일, 다름, 차이, 모순 개념을 구체화한다. ‘하나’와 ‘여럿’은 분할가능성을 기준으로 하여 대립한다, 분할되어 있거나 분할가능한 것은 다수이며. 분할불가능하거나 분할되지 않는 것은 하나라고 불린다. 동일은 하나에 속하고, 다름과 비동일은 다수에 속한다. 이때 ‘아님’은 ‘동일함’과 대립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서로 동일하거나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차이’와 ‘다름’은 서로 다르다. 차이가 있다는 것은 바로 그 기준이 되는 동일한 것이 먼저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차이는 동일한 종이나 유 안에서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반대 또한 일종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차이는 많고 적음의 정도를 가질 수 있는데, 이 중 가장 큰 차이를 ‘반대’라고 한다. 종적 차이는 반대자들이 극단을 형성하며, 극단에 있는 것들 사이의 간격이 가장 크므로 종차의 간격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차이가 상반성이라면 반대로서의 마지막 차이 또한 그러하다. 따라서 여럿은 하나에 반대되는 것일 수 없다. 여럿은 하나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많은 하나들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반면 모순은 가장 강한 결여다. ‘A이다’와 ‘A가 아니다’라는 관계는 동시에 성립할 수 없으므로, 여기에는 중간이 없다. 모순의 중간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반대자들 사이에는 중간이 있을 수 있으므로 모순과 반대는 같지 않다.

 

 

6장에서는 하나와 여럿 사이의 대립관계에 대해 다룬다. 하나와 많음이 무제한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하나도 그저 수가 적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많음에 대립하는 것은 수가 적은 것인데, 다수인 둘의 경우에도 수가 적은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수가 적은 것이 다수일 수 있다면, 그리고 많음이 하나와 무제한적으로 대립한다면 하나도 다수에 해당한다는 의미가 되어버린다. 따라서 하나는 무제한적으로 많음과 대립한다고 볼 수 없다. 또한 많음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데, 첫째는 양이 많은 것이고, 둘째는 수가 많은 것이다. 이 중 분할가능한 것들에 대해서는 수가 많다는 의미만이 사용되는데, 이 경우에만 많음은 하나와 대립한다. 왜냐하면 수가 많음을 표현할 때, 하나는 많음을 이루는 수들에 대한 척도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와 많음의 대립은 척도와 척도에 의해 측정되는 것 사이의 대립과 같다.

 

7~9장에서는 반대관계에 대해 다루고 있다. 반대자들은 그 사이에 중간자가 있는 것이다. 이 중간자들은 필연적으로 반대자들로부터 유래해야 한다. 이에는 3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중간자는 중간자를 갖는 것들과 동일한 유에 속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중간자는 변화하는 것이 변화의 과정 중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중간자는 어떤 대립자들 사이에 있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한쪽의 대립자를 출발점으로 해서 이 대립자들의 본성에 따르는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중간자들이 동일한 유이고 반대자들 사이에서 성립한다면, 중간자는 필연적으로 반대자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반대자들은 합성체가 아닌 원리들인 반면, 중간자들은 한쪽의 반대자에서 다른 쪽으로 변화하는 것이므로 양쪽의 반대자들의 일부를 갖는다. 따라서 중간자는 모두 합성적이며 반대자들로 이루어진다.

 

종이 다른 것은 어떤 유 안에서 서로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동일한 것 안에 서로 다른 둘에 대한 술어와 부수적인 의미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 유이기 때문이다. 이 서로 다른 것은 하나의 공통적인 것 안에 있으므로 이 다름은 같은 유에 속한 다름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반대일 것이다. 왜냐하면 반대자들은 동일한 유에 속하기 때문이다. 즉, 종적인 차이가 있다면 그 둘은 같은 유에 속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반대 중에 종을 나누는 반대와 종을 나누지 않는 반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차이는 반대가 종을 나누는 그 유의 고유한 속성인지 아닌지에 따라 구별된다고 설명한다. 서로 다른 이름이 붙거나 복합체의 경우에도 반드시 이들이 각각 다른 종에 속하는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정식에서 반대가 있음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각 개체의 경우에는 최종적이고 불가분적인 것이기 때문에 하위 종으로 나뉘지 않는다.

 

10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불멸하는 것과 가멸하는 것이 반대자가 아니며 서로 다른 유에 속함을 밝힌다. 반대자들은 서로 형태가 다르고, 가멸적인 것과 불멸적인 것은 서로 반대자이기 때문에 가멸적인 것과 불멸적인 것은 그 부류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가멸성과 불멸성은 부수적인 뜻에서 다른 것에 속할 수 없는데, 부수적인 뜻에서 소멸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멸성과 불멸성은 그것이 속하는 대상의 필연적으로 속한다. 또한 가멸적인 것에 있어 가멸성, 불멸적인 것에 있어 불멸성은 그것의 실체이거나 실체 안에 속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둘 모두 어떤 것 안에 필연적으로 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멸적인 것과 불멸하는 것은 대립적인 서로 다른 실체 안에 속하는 것으로 드러나므로, 둘은 서로 부류가 다를 수밖에 없다.

 

(끝)

『논어』 속 이상적 인간상의 비교 (2) [건국대학교 논어 강독팀]

<논어> 속 이상적 인간상의 비교

—인자(仁者)와 지자(知者) 그리고 군자(君子)를 중심으로—

 

건국대학교 동양철학전공 석사과정 오서진

 

 

(이어서)

 

 

2.2. 인자(仁者)와 지자(知者)

일반적으로 인자는 어진 사람, 지자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풀이되며 덕목의 종류만 다를 뿐 ‘어떠한 덕목을 갖춘 자’라는 점에서 인자와 지자는 동일하다. 그리고 한국어로 ‘어질다’와 ‘지혜롭다’는 엄밀하게는 다르겠으나 의미상 상당 부분 겹치는 부분이 있어 보인다.

인자와 지자에 대한 궁금증은 앞선 「옹야」(雍也) 편의 인자와 우물의 예시 구절과 연결된다. 앞선 구절에서 인자는 단순히 맹목적으로 인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리 분별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즉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는 상황 파악 능력과 외부에 휘둘리지 않는 판단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파악 능력과 판단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속임에 쉽게 넘어가고, 재아의 말대로 인을 찾기 위해 우물 안으로 들어가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자가 답하길 군자(인자)는 ‘남에게 속을 수는 있어도 그로 인해 부덕한 행위를 하지는 않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인자는 덕을 추구하면서도 사리 분별을 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갖춘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자는 곧 지자인가? 인자와 지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옹야」(雍也) 편에서는 인자와 지자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지자(知者)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한다. 지자는 활발하고 인자는 고요하다. 지자는 즐겁게 살고 인자는 오래 산다.”

 

공자에게 지자는 물을 좋아하는 이미지인 듯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논어 내에서 물에 대해 언급한 구절은 거의 없으며 물의 특성에 대한 언급 역시 보이지 않는다. 대신 지자에 대해서는 몇몇 구절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지(知)에 대한 언급은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덕목으로서 지(知)는 단순히 정보나 지식의 보유를 넘어서 그것을 실생활에 적절히 적용하고 활용할 줄 아는 단계까지도 포섭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지자는 단순히 박식한 사람이 아니라 지식을 축적하고 활용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위 구절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인지와 지자를 묘사하는 내용은 「리인」(里仁) 편에도 등장한다.

 

공자 초상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불인(不仁)한 사람은 곤궁한 데 오래도록 살지 못하며, 안락한 데 오래도록 살지 못할 것이다. 인자(仁者)는 인을 편하게 여기고, 지자(知者)는 인을 이롭게 여긴다.”

 

앞선 「옹야」(雍也) 편의 구절에서 인자는 오래 산다고 언급한다. ‘수(壽)’에 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으나 전반적으로 인자는 안정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이미지인 듯하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누구보다 인을 잘 실천하기로 알려진 안회(顔回)의 경우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즐거움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안회가 곤궁한 상황을 잘 견딜 수 있던 이유가 인에 있다면 인은 수용 혹은 포용에 관한 덕목일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지자라면 똑같은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까? 아마도 인자와 마찬가지로 지자 또한 곤궁에 처했어도 근심하지 않고 삶을 유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결과는 비슷해도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접근 방식에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인자가 상황에 녹아드는 방식이라면 지자는 상황에 따른 합리적인 대응법을 도출하는 방식이다.

인자가 인을 편하게 여기는 까닭은 인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라 삶의 방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의식하지 않아도 호흡하고 눈을 깜빡이는 것처럼 인자에게 인은 말 그대로 숨 쉬듯 자연스러운 것이다. 반면 지자에게 인은 여러 가능성 중 하나이다. 위 구절에서 지자는 인을 이롭게 여긴다고 하지만, 인보다도 더 합리적인 대안이 있다면 지자는 인을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인자와 지자의 차이는 다름 아닌 삶의 모습 그 자체에 있을 것이다. 인자가 좋아하는 산은 작은 요소들이 수없이 모여 거대한 하나를 이루며 그 모습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인자의 삶은 짧은 시간과 작은 사건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꾸준한 실천을 통해 가꾸어지며, 그렇게 해서 쌓인 경험들은 서로 단단하게 연결되어 쉽게 모습을 바꾸거나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고 해서 산이 되지 않으며, 한 그루의 나무가 없다고 해서 산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지자가 좋아하는 물은 고정되지 않고 붙잡히지 않으며 변화무쌍하다. 그러나 물은 일정한 길을 터주면 그 길을 따라 흐르고, 결국에는 한곳으로 모인다. 지자의 삶은 얽매임이 적고 변하기 쉽지만, 그만큼 적응에 능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을 것이다. 인자, 지자에 대한 공자의 비유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는 없으나 공자가 두 인간상을 구분한 것은 두 개가 완벽히 겹치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3. 결론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자와 군자의 관계이다. 인자와 군자는 모두 유가의 바람직한 인간상이자 추구해야 할 인간상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인자가 인(仁)의 덕목을 갖춘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군자는 여러 덕목을 갖추어야 할 사람으로, 자신을 단속하는 것은 물론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단속할 책임과 역할을 진 위치에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따라서 군자는 인자에 비해 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다. 비록 인자와 군자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점은 군자에게 인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다. 군자라면 응당 인을 품고 그와 함께 살아야 한다. 인자가 곧 군자는 아니지만, 군자는 인자의 면모 또한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어쩌면 인자는 잠재적인 군자일 수도 있겠다. 이에 관해서는 다른 기회에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둘째, 인자와 지자의 관계이다. 인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 인자와 지자는 구분된다. 인자는 인을 삶의 방식(태도)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인자에게 인을 실천하는 것은 계산에 의한 것이 아니며 더 큰 이익을 위해서 또는 강요를 받아서도 아니다. 상대방을 진심으로 대하고 상대의 마음에 다가가려고 애쓰는 태도가 체화된 사람이 인자이다. 반면 지자에게 인은 유용한 수단이다. 기본적으로 지자는 지적 호기심이 강하고 그것을 채우는 데 능하다. 또한 지식을 쌓는 데 그치지 않고 실생활에 잘 적용하며 문제해결 능력이 뛰어나다. 인을 삶의 구심점으로 살아가는 인자와 달리 지자는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며 인은 그 가능성 중 하나이다. 섣부른 결론을 내리자면, 지혜로운 인자와 어진 지자는 있을 수 있지만, 인자이면서 동시에 지자인 사람은 있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인자와 지자는 삶의 방식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인자는 넓은 외길을, 지자는 좁지만 여러 갈래의 길을 걷는다. 그렇다고 해서 인자와 지자가 대립하거나 대척하는 관계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논어에서 논의된 맥락에 따르면 두 인간상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

이상으로 인자, 지자, 군자에 대한 나름의 소견을 정리해 보았다. 글을 매듭지을 때가 되어서야 논의의 엉성한 부분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인지와 군자의 관계 그리고 인자와 지자의 관계를 분석해 보았는데, 군자에 대응하는 인자와, 지자에 대응하는 인자는 서로 다른 맥락 속에서 의미를 구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같은 개념이라도 맥락과 의도에 따라 함축하는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다시 배운다. 또한 큰 개념들을 다루는 과정에서 섬세하게 논의되지 못한 내용이 많아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유가의 핵심 개념인 인(仁)을 한정된 맥락 속에서 좁은 의미로 해석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부족한 부분은 앞으로의 활동을 통해 보완해 나가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 인과 의에 관한 맹자의 구절을 소개하며 마무리한다.

 

“인(仁)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요, 의(義)는 사람의 바른 길이다.”

 

(끝)

스티븐 샤비로의 『기준없이』 1장. 「기준 없이」[신유물론 분과]

 

스티븐 샤비로의 『기준없이』 1장. 「기준 없이」

 

한철연 신유물론 분과 세미나 리뷰

 

 

먼저 신유물론 분과에 관한 소개를 간단히 하려 한다. 신유물론 분과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세미나 분과 중 하나로, 2021년 공무 모임을 시작하였고 참여 인원이 늘고 모임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면서 2023년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 정식 분과로 등록했다. 이현재 회원(이하 호칭 생략), 박민미, 현남숙이 먼저 공무 모임을 제안하였고, 이후 참여 시기는 다르지만 이승준, 정유진, 이지영, 정희수, 서영화, 최종덕, 김선영, 손미아 회원이 합류하였고, 현재 서영화 회원이 분과장을 맡아 모임을 이끌고 있다. 신유물론 계열로 분류되는 학자들의 책을 주로 읽고 있지만 세미나 구성원의 추천이 있으면 그밖의 주제나 텍스트에도 열려있다. 각자 전공이나 관심사가 달라 생태주의, 과학철학, 여성주의, 존재론, 문화철학의 바탕 위에서 신유물론의 이론적 지도를 파악하고 각자의 연구에 접목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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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샤비로, 『기준없이: 칸트, 화이트헤드, 들뢰즈, 그리고 미학』, 이문교 옮김, 갈무리, 2024.

 

 

이 텍스트는 신유물론과 분과에서 올해 들어 함께 읽은 책 중 하나이다. 영문학 배경을 가진 학자인 스티븐 샤비로(Steven Shaviro, 1954~)의 『기준 없이: 칸트, 화이트헤드, 들뢰즈, 그리고 미학」은 여러 소주제들도 구성되어 있다. 샤비로에 따르면, 화이트헤드와 들뢰즈는 모두 칸트의 이러한 미학을 급진적인 방식으로 수용한다는 친연성이 있다. 그는 화이트헤드와 들뢰즈의 칸트 해석을 참조하여 칸트의 3대 비판서 중 『판단력 비판』의 ‘취미판단’을 단순한 미적 대상을 위한 판단을 넘어 세계를 이해하는 일반적 방법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한다.

통상 세계 이해의 영역에서 칸트의 미학적 판단(반성적 판단)은 학적 판단(규정적 판단)에 비해 사소하게 여기거나 예외적으로 취급되어 왔다. 하지만 샤비로는 이러한 기존의 인식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미학적 사례들이 기존의 규범들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규범들조차 개별 사례들을 종합함으로써만 가능해지기 때문이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기준 없이: 칸트, 화이트헤드, 들뢰즈, 그리고 미학』의 제1장 「기준 없이」에서 샤비로는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어떻게 하면 유효한 기준과 비판적 기준을 확립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차라리 “어떻게 하면 혁신과 변화를 막는 그러한 기준과 표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이다(p. 60) 샤비로에게 기준(criteria)이란 칸트의 3대 비판서 중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에 등장하는 ‘규정적 판단력’을 의미한다. 샤비로는 이러한 기존의 기준의 문제를 대신하여 『판단력 비판』의 취미판단이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고 말한다. 취미 판단은 개념에 메이지 않고 대상을 단칭적으로 포착하며, 고유한 맥락과 상황에 맞는 세계 파악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샤비로는 미적 판단 중에서도 취미판단에 더 주목한다. 그는 칸트 미학에 관한 대부분의 논의들이 미에 대한 분석을 보수적이라 치부하고 탈근대적 관심에서 숭고 분석에 집중해 왔다고도 비판한다. 미적인 것에 관한 칸트의 이론은 실제로는 정동과 독특성에 관한 하나의 이론이며, 또한 그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판단 형식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학은 더 이상 인식론과 윤리학의 규칙들에 대한 예외가 아니라, 바로 그것들의 실천을 위한 근거가 된다(p. 9).

규칙에 포섭되지 않는 단칭 판단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샤비로의 접근은 기존의 칸트 연구 전통에서는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샤비로는 이러한 관점이 오히려 오늘날의 중요한 쟁점들을 다루는 데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고 전망한다. “칸트, 화이트헤드 그리고 들뢰즈의 연계 속에서 발견한 비판적 심미주의는 현대 예술과 미디어적 실천들, 기술적 실천들(특히 뇌 과학과 생물 발생학 분야에서의 최근의 진전들),그리고 문화이론과 맑스주의 이론( [증략] 생성 혹은 자기-조직 시스템의 역할에 관한 이론, [중략])에서의 논쟁들을 해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전망한다(pp. 25-26).

샤비로의 프로젝트가 성공적일지 또한 어떤 시대적 통찰을 줄 것인지는 책의 나머지 장들과 그의 다른 저작들을 함께 살펴보며 지속적으로 탐구해 나가야 할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7(Ζ)권 후반부 ~ 9(Θ)권 전반부(2)[건국대학교 다자인 多字人]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7(Ζ)권 후반부 ~ 9(Θ)권 전반부(2)

 

(이어서)

 

2. 『형이상학』 8(Η)권 (1장~6장)

8(Η)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적 실체들에 대한 논의를 이어 나간다. 모든 감각적 실체는 질료를 가지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질료 또한 실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인데, 왜냐하면 대립적인 변화 모두의 근저에 놓여있는 어떤 기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화들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생성과 소멸이 수반되지는 않는데, 어떤 것이 있는 장소가 바뀐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생성하거나 소멸한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체와 질료가 일반적으로 실체라 일컬어지지만, 이것이 아직 가능적 실체이기 때문에, 감각적 실체 중 무엇이 현실적인 실체인지에 대한 문제가 남아 있다. 있는 것들이 그 합성구조에 따라 있거나, 결합에 따라, 혹은 다른 방식으로 있기 때문에, 질료가 다르면 그것의 현실태가 다르고 정식이 다르다는 논의는 분명하다. 한편, 문지방에 대하여 ‘방과 방 혹은 안과 밖을 경계 짓는 물건’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현실적인 문지방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고, 앞선 질료와 더불어 말한다면 돌로 이루어진 복합실체를 말하게 된다. 이로써 감각적 실체가 있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1) 질료는 가능적 실체이고, (2) 형상(형태)은 현실적 실체이며, (3) 이 둘이 결합한 복합실체가 있다. 결론적으로 현실적 실체는 바로 형상이다.

3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어떤 이름을 부를 때, 이 이름이 합성실체를 가리키는지 아니면 현실태나 형태를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은 때가 있음을 지적한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이 형상과 현실태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현실태로서의 집은 합성구조(즉 형태)이지 이 합성구조에 속하게 되는 벽돌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4장과 5장은 질료에 대한 논의를 심화하고 있는데, 우선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적 실체에 대하여, 각 사물엔 그 고유한 질료가 있음을 논한다. 예를 들어 ‘이것’의 질료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것’이 불이나 흙으로 이루어져있다고 답해서는 안 된다. 모든 질료들이 궁극적으로는 불이나 흙으로 환원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사람의 질료 또한 불과 흙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불과 흙이 사람의 고유한 질료라고는 말할 수는 없다.

6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나 수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한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르면 복합실체를 이루는 첫 번째 부분들은 질료와 형상이다. 최종적인 질료와 형태는 동일한 것이자 하나이고, 감각적 실체가 하나인 이유는 질료와 형태가 하나이기 때문에 차이를 찾으려는 노력은 헛수고이다. 질료로부터 형태로의 운동에는 제작자 이외의 다른 원인이 없다. 한편, 질료를 가지지 않는 것들은 모두 본성적으로 그 즉시 하나인 것이다.

 

 

3. 『형이상학』 9(Θ)권 전반부 (1장~8장)

9(Θ)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태’와 ‘현실태’ 개념을 중심으로 존재론적 탐구를 수행한다. ‘가능태’와 ‘현실태’는 본래 변화 및 운동을 설명하는 개념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개념들의 사용 범위를 넓혀 자신의 존재론적 탐구에 도입한다. 먼저 그는 가장 주도적인 뜻에서의 ‘가능태’에 대해 규정한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뒤나미스’(가능태)는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 “다른 것 안에 또는 다른 것인 한에서의 자기 안에 있는 변화의 원리”이다. 따라서 ‘뒤나미스’란 어떤 작용을 할 수 있는 능력(능동적 능력), 어떤 작용을 받을 수 있는 능력(수동적 능력), 어떤 힘이 가해질 때 변화를 겪지 않는 능력, 어떤 작용이 잘 이루어지는 능력 모두를 일컫는 말로 이해된다.

운동 및 변화의 원리들은 어떤 경우 생명이 없는 것 안에 내재하고, 어떤 경우 생명이 있는 것들, 즉 영혼이나 영혼의 이성적 부분 안에 있다. 이성을 동반하는 능력은 동일한 것이 반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양면성을 지닌다. 가령 의술의 경우 본성에 따라 다루는 것은 건강이지만, 부수적인 뜻에서는 질병을 다루기 때문에 질병과 건강을 함께 만들어낼 수 있다. 반면 비이성적 능력은 단 하나의 결과만을 낳는다는 단순성을 지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메가라 학파의 “참으로 있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주장, 즉 가능태 혹은 능력을 부정하는 주장을 반박한다. 메가라 학파의 주장에 따르면, 집을 짓고 있지 않은 사람은 집을 지을 능력이 없다는 불합리한 결과가 도출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메가라 학파의 주장이 결국 운동과 생성을 부정하게 된다고 비판한다. 어떤 능력이 있다고 하는 것은, 지금 현재 그것을 행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적 존재에서 현실적 존재로 이행하는 것에 아무런 불가능한 점이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아리스토텔레스가 운동과 관련된 능력, 즉 가능태에 대해 중점적으로 논의를 진행해 왔다면, 6장에서 그는 현실태에 대해서 그것이 무엇이고 그 본성이 어떤지를 규정한다. 먼저 그는 ‘가능적’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지 않은 방식으로 어떤 대상이 주어져 있을 때, 그것이 바로 현실태라고 말한다. 예컨대 집을 지을 수 있는 자에 대해 집을 짓고 있는 자, 잠자는 자에 대해 깨어있는 자, 눈을 감았지만 시력이 있는 자에 대해 보고 있는 자 등등의 예시에서 앞의 것은 가능태에, 후자의 것은 현실태에 분류된다.

이후의 논의는 “가능적인 것보다 현실적인 것이 앞선다”는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 가지 측면, 즉 정식(로고스)과 시간과 실체에서 현실태가 가능태에 앞선다고 말한다. 첫째, 가능적인 것은 그것의 정식 안에 이미 현실적인 것을 포함한다. 능력은 어떤 ‘현실적 활동’을 행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가능적인 것이다. 둘째, 시간의 관점에서 씨앗은 곡식에 선행한다는 점에서 가능적인 곡식으로써 씨앗이 곡식에 선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씨앗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해보면, 그것들에 시간적으로 앞서서 다시 곡식이 현실적으로 있어야 한다. 이처럼 종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시간적으로도 현실적인 것이 가능적인 것에 앞선다고 말해야 한다. 셋째, 현실적인 것은 실체에서의 선행성 또한 갖는다. (1) 먼저 생성 과정은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인데, 이런 과정 뒤에 오는 것은 앞에 오는 것보다 더욱 완전하다. (2) 또한 모든 생성이 어떤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진행된다고 할 때, 현실적인 것은 목적으로서 이 생성의 과정 전체 가장 앞에 놓인 시초이다. (3) 질료가 가능적으로 있는 것은 그것이 형상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즉 현실적인 것과의 관계에서 가능적이라고 일컬어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4) 모든 현실적 활동은 목적이거나 목적에 가깝다. 그런 뜻에서 활동은 단순한 가능성이나 능력에 앞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제 영원한 것들을 논의에 끌어들여, 보다 주도적인 뜻에서 현실적인 것이 갖는 선행성을 논한다. 영원한 것들의 경우, 그것들은 실체의 측면에서 가멸적인 것들에 앞서며 영원한 것은 결코 가능적으로 있지 않다. 또한 가멸적인 것들이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거치면서도 이 세계 자체는 유지되는데, 이는 바로 태양의 운행이나 천체 운동과 같은 영원한 운동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화 속에 있는 것들은 이 불멸하는 것들을 모방할 뿐이다.

 

(끝)

『논어』 속 이상적 인간상의 비교 (1) [건국대학교 논어 강독팀]

『논어』 속 이상적 인간상의 비교

—인자(仁者)와 지자(知者) 그리고 군자(君子)를 중심으로—

 

 

건국대학교 동양철학전공 석사과정 오서진

 

 

    1. 서론

『논어』에는 여러 인간상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예시로 군자(君子)가 있다. 『논어』 내에서 군자는 타의 모범이 되는 사람으로서 다양한 덕목을 갖추고 있으며 또한 백성을 이끌 책임이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흔히 ‘성인군자’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군자는 유가(儒家)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이자 이상적인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로서 추구해야 할 인간상이다.

그런데 『논어』에는 군자 이외에 인자(仁者) 그리고 지자(知者)와 같은 인간상이 등장한다. 직관적으로 봤을 때, 군자는 이미 인자와 지자의 면모를 모두 갖춘 것처럼 보인다. 군자가 이상적이고 모범이 되는 인간상을 나타낸 것이라면 훌륭한 성품과 덕성 그리고 지적 역량을 모두 갖추고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어』의 구절들을 살펴보면 때로는 군자가 인자와 지자를 포함하는 것처럼, 또 어떨 때는 군자, 인자, 지자가 각각 별개의 개념처럼 보인다.

한 개념은 다른 개념과 명확히 구분되며 문장 몇 줄로 정의 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사고방식은 중국 고대사상에 접근하는 바람직한 방식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 개념이 함축하는 의미 그리고 그 개념이 다른 개념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들여다보는 과정을 통해 사상가의 주장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것이다. 본문에서는 강독 모임 중 더 알아보고 싶었던 인자, 지자, 군자의 의미에 대해 모임에서 다룬 내용을 중심으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고자 한다.

공자 초상 이미지

    2. 본론

2.1. 인자(仁者)와 군자(君子)

우선 인자와 군자의 관계에 대해 의문이 생긴 구절은 「옹야」(雍也) 편에 있다. 공자의 제자 재아(宰我)는 공자에게 인자에 대해 질문한다.

 

재아가 물어 말했다. “인자는 누군가 그에게 ‘우물 안에 인(仁)이 있다’고 말하면 그 말에 따릅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군자는 (우물 앞까지) 갈 수는 있어도 (우물에) 빠질 수는 없다. 속일 수는 있어도 해칠 수는 없다.”

이 구절을 읽고 가장 먼저 든 궁금증은 ‘재아는 인자에 대해 질문했는데 왜 공자는 군자로 대답했는가?’이다. 마치 인자가 곧 군자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아니면 재아의 질문 의도를 파악한 공자가 일부러 ‘군자’라는 표현을 썼을 수도 있다. 혹은 일상 대화이기 때문에 생긴 사소한 표현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인자, 군자 등의 개념 자체가 맥락에 따라 유연하게 사용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여러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겠으나 분명한 점은 인자와 군자는 아주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두 인간상 모두 『논어』에서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바람직한 삶의 방향성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인자가 곧 군자는 아니라는 근거가 『논어』 내에 있다. 「헌문」(憲問) 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자이면서 인하지 못한 사람은 있을지언정 소인으로서 인한 사람은 아직 없다.”

위 구절에 따르면 군자 중에는 인자가 아닌 경우가 있다. 반면 소인(小人)이면서 동시에 인자인 경우는 없다. 다시 말해 군자는 인자인 경우와 인자가 아닌 경우로 나뉘고, 소인은 인자가 아니다. 즉 군자이면서 인자가 아닌 경우가 있으므로 인자와 군자는 동격으로 볼 수 없다.

위 구절처럼 군자와 소인을 비교하여 언급하는 내용은 『논어』 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리인」(里仁) 편을 보면 “군자는 덕을 마음에 두고 소인은 땅을 생각하며, 군자는 법도를 지키려 하고 소인은 이익만을 바란다.”,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라는 구절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구절들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군자가 철저하게 소인과 대비되는 인간상이라는 것이다. 소인이 땅(재물)을 생각할 때 군자는 덕을 생각하고, 소인이 이익을 바랄 때 군자는 법도를 지키려 한다. 또 소인이 이(利)에 밝을 때 군자는 의(義)에 밝다. 군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덕, 법도, 의는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이자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필요한 가치이다. 소인이 사리사욕을 챙기는 인물이라면 군자는 집단을 바로 세우는 인물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군자는 인자와 구분된다. 군자는 덕이 충만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책임과 역할을 진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군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인 의(義)는 다른 어떤 덕목보다도 사회 정의와 관련이 깊다. 의는 몫의 분배와 규범에 관한 덕목이다. 올바른 기준에 따라서 재화나 지위를 나누고,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규칙과 제도를 제정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또는 지키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의(義)의 실현이다. 그러므로 의를 행한다는 것은 제 가족을 보살피고 이웃을 돕는 일상적인 일보다 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의 일일 수밖에 없다. 공자 이전 시기에 군자는 신분이 높은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었고 공자 역시 군자를 일반적인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는 사용하지 않은 듯하다. 군자는 자신과 공동체 모두를 바르게 이끌 책임이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인자와 다르다.

그러나 인자와 군자는 여전히 공유하고 있는 지점이 많다. 군자는 잠재적 인자이다. 이 말은 모든 군자는 인자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군자와 의가 분리 불가능하듯 인 또한 군자가 품고 살아야 할, 소홀히 해서는 안 될 덕목이다. 그러므로 인자와 군자는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기 어렵지만, 유가 사상에서 추구하는 인간상을 설명하는 데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조각들이다.

 

(계속)

『논어(論語)』「옹야(雍也)」의 여러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3) [건국대학교 논어 강독팀]

『논어(論語)』「옹야(雍也)」의 여러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3)

 

 

건국대학교 철학과 학부 김종범

(이어서)

 

– 「옹야」20

 

아래 인용은 「옹야」20의 원문과 스터디 시작 전 스터디 구성원들이 미리 번역해온 문장이다.

 

子曰:「知之者不如好之者,好之者不如樂之者。」(자왈:「지지자불여호지자,호지자불여락지자。」)

재국: 선생이 이르길, “앎이 있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 좋아하는 이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

종범: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며 좋아하는 사람이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수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 「알기만 하는 자는 그것을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그것을 즐기는 자만 못하다.」

 

「옹야」20의 번역에서 공유하고자 하는 부분은 ‘지지자(知之者)’와 ‘호지자(好之者)’, ‘락지자(樂之者)’의 의미이다. 『논어』 안에서 단계적으로 좋음과 나쁨을 설명하는 부분은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본고에서는 그 기준을 마음과 형식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구절은 「위정(爲政)」7, 「팔일」3, 4, 「양화(陽貨)」11이다. 네 구절 모두 형식만을 지키고, 마음이 없는 것에 비하여 실제로 마음이 있는 것이 더 낫다고 공통으로 평가하고 있다. 또한 그 이면에는 실제로 마음이 있으면서, 형식을 지키는 것이 가장 좋다는 암묵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대응하여 ‘지지자’와 ‘호지자’, ‘락지자’를 해석한다면 ‘지지자’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방법만을 알 뿐 알고 있는 그것을 실제로 행할 마음은 없는 사람인 것이다. 다음으로 ‘호지자’란 좋아하는 그것을 행할 마음이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음을 잘 쓰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락지자’란 즐기는 그것을 행할 마음도 있으며, 그것을 잘 행할 방법 또한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공자 초상

이러한 해석은 ‘지지자’와 ‘호지자’, ‘락지자’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에 도움을 준다. 또한, 『논어』 안에서 다른 구절들과도 크게 모순이 되는 부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올바른 해석이라고 확언하기에는 부담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로 『논어』 안에서 단계를 들어 설명하는 부분은 위의 예시가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계씨(季氏)」9에서 공자는 네 가지 단계를 통해서 사람의 단계를 표현하는데 태어나면서 아는 자가 가장 위이고, 배워서 아는 자가 다음, 어려움이 있어 배우는 사람이 그다음, 어려움이 있지만 배우지 않는 자가 가장 아래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공자의 설명에 따른다면 ‘지지자’와 ‘호지자’, ‘락지자’는 충분히 다른 해석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논어』 안에서 ‘지(知)’와 ‘호(好)’, ‘락(樂)’이 앞서 설명한 단계에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인가?”라는 점이다. 적어도 ‘지’는 『논어』 안에서 방법만 아는 상태를 지칭하는 단어로만 사용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논어』 안에서 ‘지’는 72단락에서 117번 사용된다. 이 중 ‘지자(知者)’와 ‘지지자(知之者)’로 그 사용을 줄이면 ‘지자’는 「이인」2, 「옹야」23, 「자한(子罕)」29, 「헌문(憲問)」28, 「위령공」8, 「양화」24에서 그리고 ‘지지자’는 「술이(述而)」20, 「계씨」9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지지’가 사용된 것을 확인해보겠다. ‘지지’의 사용은 크게 4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다. 첫 번째는 ‘인자(仁者)’와 ‘지자’를 대비하여 인자를 높이고 지자를 낮추는 방식으로 서술한 것으로 「이인」2와 「옹야」23이 이에 해당된다. 두 번째는 ‘지자’와 ‘인자’, ‘용자(勇者)’를 병렬로 서술하여 이 셋의 특징을 서술한 것으로 「자한」23과 「헌문」28이 이에 해당된다. 세 번째는 지자를 단독적으로 서술하는 것이며 지자를 높이고 있다. 「위령공」8이 이에 해당된다. 마지막은 제자의 발화 안에서 ‘지자’가 나온 것으로 이때 ‘지자’는 살피는 지혜로 여기는 사람으로 엄연히 말하면 아는 사람으로 ‘지자’가 사용된 것이다. 「양화」24가 이에 해당된다. 첫 번째의 방식으로 「옹야」20의 ‘지지자’를 이해한다면 ‘지지자’를 방법만 아는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에 근거가 될 수 있으며,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방식으로 「옹야」20의 ‘지지자’를 이해한다면 ‘지지자’를 방법만 아는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한 반례가 될 수 있다.

 

다음으로 ‘지지자’가 사용된 것을 확인해보겠다. 두 구절에서 공통으로 확인할 수 있는 표현은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이다. 이는 주로 ‘태어나면서 아는 자’로 해석되며 「술이」20에서는 공자가 ‘생이지지자’가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고, 「계씨」9에서는 ‘생이지지자’가 가장 높고 그 아래로 순서대로 ‘학이지지자(學而知之者)’ 즉 배워서 아는 자, ‘곤이학지(困而學之)’ 즉 부족해서 배우는 사람, ‘곤이불학(困而不學)’ 즉 부족하지만 배우지 않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지지자’의 해석은 ‘지지자’를 방법만 아는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의 근거가 되는 방법으로 해석을 할 수도 반대로 그 해석의 반례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해석에 근거가 되는 방식으로 이해한다면 ‘생이지지자’라는 것은 태어나자마자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닌 방법만을 아는 것으로 풀이하는 것이다. 즉, ‘생이지지자’ 또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그 이후에 노력이 필요하다. 반례가 되는 방식으로 생각하자면 ‘생이지지자’는 태어나자마자 성인의 경지에 다다른, 즉 이미 마음과 방법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지지자’ 중에서도 이미 마음을 다 갖춘 상태를 말할 수 있으며 이는 ‘호지자’와 ‘락지자’와는 구분되는 ‘지지자’의 특징과 모순되는 것이다.

 

– 글을 마치며

 

이렇게 『논어』 「옹야」13, 18, 19, 20의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 논해보았다. 이 글을 읽으면서 그동안 『논어』를 읽으면서 고민해보지 않았을 부분에 대한 것을 보고 새로운 시각을 경험했을 수도 있고, 혹은 이미 독자가 해보았던 생각일 수도 있으며, 이 글에서 독자의 견해에서는 동의할 수 없는 주장이 있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수많은 감상에도 불구하고 본고에서 전하고자 했던 『논어』가 단순한 격언 모음집이 아니라는 감상만큼은 전달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 글이 독자들의 『논어』 읽기에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수 있기를 바란다.

(끝)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7(Ζ)권 후반부 ~ 9(Θ)권 전반부(1) [건국대학교 다자인多字人]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7(Ζ)권 후반부 ~ 9(Θ)권 전반부(1)

 

건국대학교 다자인多字人

 

『형이상학』 7(Ζ)권 후반부 (7장~17장)

 

7(Ζ)권의 7~9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생성에 대한 분석을 전개함으로써 형상이 생성 과정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생성 자체의 원인임을 밝히고자 한다. 우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성의 3가지 유형, 즉 본성적 생성, 기술적 제작, 그리고 자생적 생성을 구분한다.

 

본성적 생성이란 본성에서 시작해서 생겨나는 것들의 생성이다. 이때 생성의 출처를 질료라고 하고, 생성의 작용인은 형상이라는 뜻에서의 본성이며, 생성의 결과물인 목적인은 일반적으로 실체라고 불리는 것으로 사람, 식물 등의 것들이다. 반면 기술적 제작은 기술, 능력, 사고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기술적 제작에서 형상은 제작하는 자의 영혼 속에 있다. 자생적 생성은 그 자체로 최종적인 동시에 생겨나는 것의 부분으로 있는 것으로, 예를 들어 제작과는 달리, 건축가의 개입 없이 돌로부터 어떤 것이 생성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유형들의 생성 모두에서 먼저 주어진 것, 즉 질료는 생성의 가능성 자체를 조건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생겨나는 것의 정식에 있어서도 질료는 속해야만 하는가? 생겨나는 것들을 그 질료의 이름에 따라 부를 때 우리는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것으로 된’이라 부른다. 생겨나는 것들은 그 질료에 따라 정식화되지 않으며, 생겨나는 것의 정식은 질료 외의 다른 요소로부터 형성될 필요가 있다.

 

생성의 원인인 형상 자체는 생성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형상 역시 생성을 통해 생겨나는 것이라 가정했을 때, 형상인을 형상인의 생성 원인으로, 즉 형상인의 질료인, 형상인, 작용인으로 다시 나눌 수 있을 터인데 이런 결론은 무한 퇴행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10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분들에 대한 정식이 전체에 대한 정식에 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규명한다. 만약 전체에 대한 정식이 부분들에 대한 정식들에 의해 구성된다고 가정했을 때, 부분들에 대한 정식은 전체에 대한 정식에 앞설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손가락이라는 동물의 부분이 동물이라는 전체로부터 따라 나오는데, 손가락은 동물과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지만 동물은 손가락과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11~12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대상의 정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정식이 정의라고 할 때, 그것은 어떻게 하나인가? 실체는 ‘이것’, 즉 어떤 것 하나인 바, 정의는 실체를 말하므로 정의 역시 병렬적 나열이 아니라 하나여야 한다. 정의에는 유와 차이(diaphora)가 있다. 이때 유가 그 유에 속하는 종들과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질료적이며, 정의는 차이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종적 차이는 유를 규정한다. 차이가 없는 것들에 이를 때까지 차이의 차이(tēn tēs diaphoras diaphoran)에 따른 분할은 진행되어야 하는바, 차이들의 수만큼 종의 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로 마지막 차이(teleutaia diaphora)는 각 사물의 실체이자 정의이고, 형상이며, 정의는 마지막 차이로 규정되는 정식일 것이다.

 

13~16장은 보편자와 개별자의 정의 가능성을 탐구함으로써 실체에 대한 논의를 구체화하고 있다. 보편자는 실체일 수가 없는데 이는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그러하다. 첫째로, 실체는 고유하고 다른 것에 속하지 않아야 하지만, 보편자는 특정한 개체들에 대하여 있으며 그와 분리될 수 없다. 둘째로, 보편자는 여럿에 대해 술어가 되기 때문에 여러 개체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그러나 실체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이다. 한편으로 개별자는 정의될 수 있는가? 개별자로서의 복합체는 생성하고 소멸하기 때문에, 개별적인 감각적 실체들에 대해서는 정의도 없고 논증도 없다. 개별자는 질료적 우연성 때문에 정의될 수 없으므로, 실체의 정의는 복합실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질료 없는 형상에 대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형상들이 실체라고 한다면, 이는 합당하다.

 

17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앞선 논의들로부터 실체에 대한 규정을 이끌어 내며 7권을 마무리 짓고 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어떤 것이 그 자체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탐구할 수 없으나, “무엇 때문에 어떤 것이 그러한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탐구할 수 있다. 고로 탐구 대상은 질료를 특정한 것으로 만드는 원인으로서, 질료들을 ‘어떤 것’으로 있게 하는 형상이다. 그리고 그러한 원인이 곧 실체인 것이다.

(계속)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1권, 3권, 4권의 3장까지(2) [건국대학교 다자인多字人]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1권, 3권, 4권의 3장까지(2)

 

건국대학교 다자인多字人

 

 

(이어서)

 

  1. <형이상학> 3(B)권

 

<형이상학>의 3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탐구되는 학문과 관련하여 이 학문의 물음 즉, 철학이 물어야 하는 주제가 어떤 주제들인지를 나열한다. 이 물음들은 철학적 난점들 즉, 아포리아(Aporia)들로 제시되며, 이는 형이상학이라는 학문의 어려움과 탐구 주제를 보여준다. 로스(W. D. Ross)의 구분에 따르면 아포리아들은 총 15개가 제시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1) 하나의 학문이 네 가지 원인을 모두 다룰 수 있는가? 2) 공리들을 다루는 것은 실체에 대한 학문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떤 학문이 그것들을 다루는가? 3) 하나의 학문이 모든 실체를 다룰 수 있는가? 4) 실체에 대한 학문은 실체에 속하는 부수적인 것들도 함께 다루는가? 5) 감각적이 아닌 실체들도 있는가? 그렇다면 그 종류는 얼마나 되는가? 6) 유들이 사물의 첫째 원리들인가, 아니면 사물들에 내재하는 부분들이 첫째 원리들인가? 7) 유들이 원리들이라면, 최상의 유들이 그런가 아니면 불가분적이 그런가? 8) 개별적인 것들과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이 있는가? 9) 첫째 원리들은 각각 종이 하나인가 아니면 수가 하나인가? 10) 가멸적인 것들과 불멸적인 것들의 원리들은 같은가? 11) 있는 것과 하나는 실체들인가 아니면 속성들인가? 12) 수학의 대상들은 실체들인가? 13) 감각물들이나 수학의 대상들뿐만 아니라 이데아들도 있는가? 14) 첫째 원리들은 가능적으로 있는가 아니면 현실적으로 있는가? 15) 첫째 원리들은 보편자인가 개별자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물음들을 이전 철학자들의 논의들을 참조하면서 이 물음들이 단순하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아포리아에 빠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형이상학>의 3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아포리아들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지 이 물음들과 관련하여 여러 난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그친다. 그럼에도 이 아포리아들은 <형이상학>에서 큰 의미가 있는데, 왜냐하면 여기서 말해지는 아포리아들이 책이 탐구하는 학문 즉 형이상학의 범위와 문제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

 

  1. <형이상학> 4권(Γ) 3장까지

 

4권에서는 드디어 본격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과 논증이 펼쳐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먼저 형이상학을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서 탐구하는 학문’으로 규정하면서, 있는 것인 한에서 있는 것의 첫째 원리와 최고의 원인들을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고 말한다. 이때, ‘있는 것’이라는 말은 다의적이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선 ‘있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를 정리하면서 철학이라는 학문을 설명한다. 있는 것은 실체와의 관계에 따른 하나의 원리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가령, 실체도 있는 것이고, 양태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원리를 지닌 것들은 저마다 그 원리를 따르고, 그것과 관계된 것으로 말해지는 것들을 탐구하는 하나의 학문이 있다. 이러한 실체 자체와 그 관계를 통해 다의적으로 있는 것 모두를 탐구하는 학문이 철학이다.

 

하나의 유에는 하나의 학문이 할당되고, 하나의 학문은 할당받은 유와 그 유에 속한 종들에 관한 분과들을 종으로 지니기 때문에, 철학은 있는 것의 유에 속한 종들만큼의 분과들을 그 종으로 지닌다. 따라서 있는 것의 유와 하나의 유는 서로의 유에 속한 종들이 일치하며, 하나의 유에 속하는 종들을 탐구하는 것 또한 철학과 그에 속한 분과들의 몫이다. 따라서 하나의 유에 종으로 속하는 동일성과 동질성 그리고 그것들에 반대되는 다름과 이질성 또한 철학의 탐구 주제에 속한다. 반대자들은 동일한 원리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같음과 다름 그리고 실체를 다루는 학문을 고찰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은 철학자의 일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첫 번째 뜻에서 있는 것, 즉 실체를 탐구하고, 하나와 여럿,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반대자들, 그리고 있는 것과 실체에 속하는 부수적인 것들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을 탐구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논증의 첫째 공리 즉, 모순율을 탐구한다. 언뜻 수학에 몫인 듯 보이는 공리에 대한 이 물음은, 이 공리가 특정한 유에만 고유하게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철학의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공리들에 대한 고찰 역시 보편적으로 있는 것과 첫째 실체에 대해 고찰하는 사람이 할 일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공리를 모순율로 제시하며 모순율에 대해서 모든 원리 중에서 가장 확고한 원리에 대해서는 잘못을 범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고 무전제적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것이 있으면서 동시에 있지 않을 수는 없고, 반대되는 것들이 동시에 동일한 것에 속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모순율은 여타의 모든 공리들에 대해서도 그것들의 원리이다.

 

(끝)

『논어(論語)』「옹야(雍也)」의 여러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2) [건국대학교 논어 강독팀]

 

『논어(論語)』「옹야(雍也)」의 여러 해석 가능성에 대하여(2)

 

건국대학교 철학과 학부 김종범

 

(이어서)

 

– 「옹야」18

아래 인용은 「옹야」13의 원문과 스터디 시작 전 스터디 구성원들이 미리 번역해온 문장이다.

 

子曰:「質勝文則野,文勝質則史。文質彬彬,然後君子。」(자왈:「질승문칙야,문승질칙사。문질빈빈,연후군자。」)

재국: 선생이 이르길, “본질이 꾸밈을 이기면 너무 거칠고, 꾸밈이 본질을 이기면 너무 사치스럽다. 꾸밈과 본질을 겸하여 아름답게 빛나면, 그 후에 자연히 군자답다.”

종범: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바탕이 색을 이기면 곧 야인이다. 색이 본질을 이기면 사관이다. 색과 본질이 겸비되고 겸비된 후에야 군자인 것이다.

서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바탕이 무늬를 이기면 촌스럽고 무늬가 바탕을 이기면 사치스럽다. 무늬와 바탕을 모두 겸비하여 빛나면 그러한 후에 군자라고 본다.”

수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 「본질이 (먼저) 훌륭하면 곧 문장은 질박해지고(수수해지고), 문장이 (먼저) 뛰어나면 곧 본질이 화사해진다. 겉모양의 아름다움과 속내가 서로 잘 어울리는, 후자야말로 군자의 모습이다.」

 

「옹야」18에서 크게 논할 수 있는 부분은 한 가지가 있었다. 이는 ‘야(野)’와 ‘사(史)’의 해석에 대한 것으로 ‘야’를 야인 혹은 촌놈으로 해석하고 ‘사’를 사관으로 해석할 것인지 혹은 ‘야’를 거칠다, 촌스럽다, 질박하다 등으로 해석하고 ‘사’를 사치스럽다, 화사해진다 등으로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부분이다. 전자로 해석하면 ‘야’와 ‘사’를 인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며 후자로 해석하면 ‘야’와 ‘사’를 용언으로 이해한 것이다. 아래에서는 『논어』 안에서 ‘야’와 ‘사’가 실제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확인해보도록 하겠다.

먼저 ‘야’의 사용이다. 『논어』 안에서 ‘야’가 직접적으로 사용된 부분은 「옹야」18 이외에 두 부분이 있다. 하나는 「선진(先進)」1이다. 「선진」1에서 ‘야’는 전자의 해석인 인물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야’ 단독으로 사용되지 않고 ‘야인(野人)’으로 사용되며 『논어』 안에서 ‘야’가 인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음을 뒷받침하기에는 부족하다. 다음으로 ‘야’가 사용된 부분은 「자로(子路)」3이다. 「자로」3에서 ‘야’는 후자의 해석인 용언으로 사용되었다. 『논어집주(論語集註)』의 내용을 따르면 ‘야’는 ‘비속(鄙俗)’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된 것이다. ‘야’의 용법을 확인한 결과에서는 어느 한쪽이 더 확실한 해석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음은 ‘사’의 사용이다. ‘사’ 또한 『논어』 안에서 직접적으로 사용된 부분은 「옹야」18 이외에 두 부분이 있다. 하나는 「위령공(衛靈公)」7이다. 「위령공」7에 나온 ‘사’는 전자의 해석인 인간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정확히는 『논어집주(論語集註)』의 내용을 따르면 ‘사’는 「위령공」7에서 ‘관명(官名)’으로 사용되었다. 다음으로 ‘사’가 사용된 부분은 「위령공」26이다. 「위령공」26에서 ‘사’는 「위령공」7과 같이 전자의 해석인 인간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사’의 용법을 확인한 결과에서는 ‘사’는 관명 혹은 사관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주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고 이는 전자의 해석에 근거가 될 수 있다.

‘야’의 용법에서는 두 해석 중 무엇이 더 정합적인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사’의 용법에서는 인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한 전자의 해석이 더 정합적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두 해석 가능성을 평가하자면 ‘야’와 ‘사’를 인간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한 전자의 해석이 더 정합적이고 뒤에 나오는 군자를 고려해보았을 때 문장의 통일성도 더 높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반대로 ‘야’와 ‘사’를 용언으로 해석한 후자의 해석은 ‘야인’과 ‘사관’이라는 현대인은 『논어』 안에서 사용된 그 특징을 이해하기 까다로운 단어를 용언으로 풀어서 설명하면서 그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실제로 「옹야」18 ‘야’와 ‘사’에 대한 해석은 한국의 여러 『논어』 번역서에서도 그 해석의 방법이 갈리는 것으로 보인다.

 

 

 

– 「옹야」19

 

아래 인용은 「옹야」19의 원문과 스터디 시작 전 스터디 구성원들이 미리 번역해온 문장이다.

 

子曰:「人之生也直,罔之生也幸而免。」(자왈:「인지생야직,망지생야행이면。」)

재국: 선생이 이르길, “사람이 직하게 살면, 불행한 삶이 아니다.”

종범: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의 삶이 곧으니 바르지 않게 사는 것은 요행히 면한 것이다.

수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 「살아있는 자의 삶이란 곧게 하는 것(바르게 살도록 하는 것)이고, 망자의 삶이란 (살아있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며 용서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논어』 한국어 번역본은 종범과 유사하게 번역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장에서는 수진의 번역을 공유하고자 한다. 수진은 ‘망지생(罔之生)’을 망자의 삶, 즉 죽은 사람의 삶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는 앞선 ‘인지생(人之生)’과 대응 구조를 염두에 두고 해석한 것이다. 이 해석에 따른다면 공자가 이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의 마땅히 해야 하는 일에 대한 서술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즉, “살아있는 사람은 바르게 살고, 죽은 사람은 (제사를 받음에 있어서) 은혜를 베풀면서 용서해야 한다.”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상당히 흥미로운 번역이지만 몇몇 문제점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문제점은 이 번역이 『논어』 안의 다른 구절과 모순되어 보인다는 점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은 「선진」11과 「옹야」22이다. 「선진」11에서는 산 사람을 섬기지 못하고 삶을 모를 때 어찌 귀신을 섬기고 죽음에 대하여 알 수 있겠는가에 대하여 말한다. 다음으로 「옹야」22에서는 사람의 ‘의’에 힘쓰며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자는 귀신에 대하여 알 수 없는 것, 혹은 공경하되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 그리고 핵심적으로 실제 살아가는 삶에 비해 덜 중요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논어』라는 텍스트 안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의무를 강조하는 부분은 많이 찾을 수 있지만 망자의 의무를 논하는 부분은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진의 번역이 의미를 지니는 부분은 「옹야」19의 문법적 구성을 보았을 때 앞과 뒤를 대응 구조로 해석할 수 있는 적어도 문법적으로는 편하게 도출할 수 있는 해석이기 때문이다. 『논어』를 처음 번역하는 사람이 한 번은 고민해보아야 할, 다른 번역을 선택한다고 하더라도 그 번역이 더 합당함을 주장하기 위해 『논어』 전반의 구성을 고민해볼 수 있는 해석이라고 생각되기에 이렇게 그 번역을 공유하며, 그 정합성에 대하여 논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