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급은 어떤가요? [내가 읽는 『자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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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시급은 어떤가요?

 

김필진(경희대 철학과)

 

나는 지금, 집 근처 24시 카페에 앉아있다. 끝없이 밀려드는 손님들의 커피를 타는 와중에도 쉬지 않고 홀을 치우는 저 알바생분은 아마 새벽 파트타임 알바인지 매일 밤 내게 커피를 건넨다. 너무도 분주한 그가 안쓰러워질 때쯤 문득 이 곳에 일하는 알바생들은 과연 근로의 대가로 얼마를 지급받는지 알고 싶어졌다. 곧장 ‘알바천◯’에 접속해 확인한 결과, 이 곳에서 근무하는 알바생들이 1시간에 받는 급여는 놀랍게도 법정 최저시급인 8,590원이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사실 필자도 알바를 꾸준히 해왔다. 학교 앞 고깃집, 오목교역 앞 디저트 카페, 그리고 가장 최근까지 근무했었던 경희대 정문의 어느 회덮밥 집까지,., 알바 근무가 얼마나 고된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저 알바생이 최저시급을 받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된 순간 마음이 아팠다. 저렇게나 열정적으로 걸레질을 하는 데도 최저시급을 받는다니,,, 그렇다면 저 열정적인 노동의 대가를 과연 얼마로 책정해야 합리적이고 정확한 수치라고 할 수 있을까? 시급을 1만원으로 인상하면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커피 한 잔에도 정성을 쏟는 저 알바생분의 노력과 열의는 과연 어떻게 평가해야 정당한 것일까?

현재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노동력이 상품으로 취급 받는다. 뭐 이 지점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그 값어치이다. 21세기 현재, 세계 주요 국가들은 고용주가 노동력을 구매할 때 노동자에게 지불해야할 시급의 최저 기준을 법으로 정해놓고 있으며, 이후의 가격 책정 및 가격의 변동과 흥정은 자본주의 하의 여타 상품과 같은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즉 주류경제학의 기본적 메커니즘으로서 ‘효용가치설’을 기반으로, 수요-공급의 원리에 충실한 법칙성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력을 판매하려는 이들이 많아지면 노동력의 가치는 하락하고, 반대로 노동력을 판매하려는 이들이 줄어들면 노동력의 가치는 상승한다. 현실 속 노동력의 값어치 책정은 그것으로 끝이다. 그 이상의 어떠한 법칙도, 가치 척도도 없으며, 수요와 공급에 따라 화폐화 된 노동력의 값어치가 변화할 뿐이다. 내가 노동하는 강도와 양, 방식과 메커니즘은 그대로인데, 저 알바생분이 제공하는 커피의 질도, 양도, 맛도 그대로인데, 외부의 상황에 따라 우리의 시급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다. 무언가 납득하기 어렵지 않은가? 우리가 판매하고, 또 직접 행함으로써 판매가 완료되는 우리 상품 ‘노동력’의 값어치가, 별개의 외부상황에 의해 그 가격과 가치를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근본적인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는 이러한 미심쩍은 현실에, 나는 적지 않은 의문을 품는다. 우리가 알바 근무를 지속하고자 한다면, 그에 앞서 해결해야할 몇 가지 핵심적인 의문이 있음은 명백하다. 나아가 오늘의 논의를 빌어 필자와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보잘 것 없는 우리 같은 알바생들이 이런 거대하고 복잡한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선, 먼저 첫째로, 경제적인 ‘가치’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인지에 대해 충분히 고찰해야할 것이다. 이어서 ‘가격’과 ‘가치’의 관계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시급에 관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는 어떻게 다뤄져야하는지를 생각해봐야한다.

늘 그래왔듯,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서 『자본』을 꺼내어 이 의문들에 관한 실마리를 찾아본다면, 놀랍게도 늘 그랬듯 힌트가 될 만한 내용들이 눈에 들어온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의 저서 『자본』Ⅰ-상 제1편 제1장에서 우리의 의문들과 관련된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그들은 제1편 제1장 ‘상품’에서 가치의 형성과정과 상품의 본질에 대해 탐구한다. 또 제2장 ‘교환과정’과 제3장 ‘화폐 또는 상품유통’에서는 앞선 논의에서 형성된 가치가 화폐형태로 거래되는 과정과 상품의 교환과정 및 화폐의 본질적 의미에 대해 다룬다. 먼저 제1장에서 그들이 심도 있게 고찰하는 가치 및 화폐 형성의 역사적 맥락을 토대로 우리의 첫 번째 의문 속 ‘경제적 가치’의 형성과정에 대해 자세히 탐구해보고자 한다. 사실 그들의 서술을 그대로 인용하기에는 문체가 너무나도 난해하고 그 내용 역시 현학적이기에, 필자가 읽고 느낀 바를 바탕으로 논의를 이어갈 생각이다. 필자가 잘못 이해한 것인지는 몰라도, 본문의 이해하기 힘든 표현 방식 속의 근본 원리와 핵심적 내용은 비교적 명료하고 이해 가능한 수준이었다. 따라서 읽고 이해함에 큰 무리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경제적 가치’의 형성을 역사적인 흐름에서 고찰하려면, 우리는 응당 과거의 시점으로 돌아 가 봐야한다. 물물 교환이 성행하던 원시 사회에서 상품이나 시장, 가치와 같은 개념은 성립하지 않는다. 당대의 사람들은 우연적 만남을 통해 물물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물건의 교환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이는 우연의 형태로 단순한 개별적 형태이며, ‘경제적 가치’의 [제1형태]라로 칭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내가 교환하고자 하는 물건의 가치는 오로지 다른 사람의 물건에 의해 표현되고, 이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암시한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거래를 전문으로 다루는 시장에 나가서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우연적 교환을 이어갔기에 물건의 정확한 가치를 책정하기란 쉽지 않았다. 다만 이들이 서로 간의 교환을 승인 할 때의 척도는 분명히 존재했을 것인데, 본인이 가지고 온 물건에 들인 노력과 정성을 어림잡아 상대방의 노력과 정성에 비교하는 과정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우리가 벼룩시장 같은 곳에서 물물교환 할 때도, 내가 공을 많이 들인 소중한 물건을 상대방의 노력과 정성이 조금도 들어있지 않은 거저주운 물건과 바꾸고 싶지 않은 것은 상식이다.

거래가 조금 더 활발해지면 앞선 단계를 넘어선 두 번째 가치형태가 등장한다. 앞서 말했듯, [제1형태]에서는 상대방의 물건으로만 내 물건의 가치를 어림잡을 수 있었다. 그러한 수동적인 과정이 반복 되어 특정한 이들이 특정한 물건을 지속적으로 교환과정에 내놓는다면, 물물교환 장에 나온 모든 이들은 그 특정한 물건을 통해 자신들의 물건의 가치를 어림잡게 된다. 이를테면 매번 손수 만든 아메리카노 커피를 가지고 나오는 이가 있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의 물건과 교환 될 수 있는 아메리카노 커피의 양을 고려해 자신의 물건에 대한 가치를 어림잡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때 그 특정한 물건은 등가물로서 기능하는 셈이다. 이 상황을 [제2형태]라고 할 수 있겠다.

이어 물물교환 단계를 넘어서 지속적으로 교환의 장이 형성되고, 교환과정과 가치의 형태가 조금 더 발달하면, 앞선 등가물이 일반적 등가물로 기능하게 된다. 즉, 앞서 우연적이며 상이한 개별적 교환 사건들의 종합으로, 사람들이 물건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게 해주던 등가물이 그 기능을 보편적인 차원으로 확대하는 것이다. 예컨대, 교환에 참여하고자 하는 이들이 생산과정 전반에서부터 비단과의 교환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물건을 생산하며, 비단의 양으로 자기 물건의 가치를 예측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더불어 교환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자신의 물건을 비단과의 교환관계 속에서 파악하게 될 것이다. 만약 이 같은 상황이 비단(일반적 예시) 생산의 활성화와 맞물려 시간적, 공간적으로 크게 증대된다면 비단은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일반적인 등가물로 기능을 하게 된다. 비단이 노력/정성의 양, 그리고 ‘가치’를 어림잡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나아가 사람들은 자신들의 물건을 제작한 이후 비단에 비추어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뒤집어, 일반적 등가물로서의 비단을 얻는 상황을 먼저 고려하며 자신의 물건을 만들게 된다. 가치의 이러한 형태가 [제3형태]이고, 비단이 금과 같은 본격적인 화폐 형태로 변모하는 순간부터 [제4형태] : ‘화폐 형태’로 변화한다.

이러한 가치의 형성 및 발전 과정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선 이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상품’이란 무엇인지가 분명해진다. ‘상품’의 개념을 탐구하는 입장에서, 사람들이 비단(일반적 예시)을 염두에 두고 물건을 만들어 이를 실제로 비단(혹은 화폐)과 교환하는 상황은 매우 인상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교환을 위해 물건을 만들고, 거래 과정을 통해 이를 실제로 교환하게 되면, 그 물건은 비로소 상품이라고 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상품은 사회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유용성이 필히 요구된다고 할 수 있겠다.

더불어 필자의 위 서술은 한 가지 비밀을 더 암시하고 있다. 바로 상품에 내재된 가치가 두 종류라는 것이다.  —지금 내가 앉아있는 카페 의자가 매우 불편하다고 느끼던 찰나이기에, 이 의자를 예시로 삼아 보겠다.—  의자도 분명 상품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의자도 질적으로 상이한 두 종류의 가치를 내포한 것이다. 첫째로 그것은 ‘사용가치’다. 이는 의자의 기능과 관련된 것으로, 앞서 말한 상품의 사회적 유용성에 기인한 ‘쓸모’이며, 각 물건에 따라 기능적 특수성을 띤다. 의자는 사람이 앉아서 활동할 수 있게 해주는 기능을 제공하면서 자신의 ‘사용가치’를 드러낸다. 두 번째로, 의자는 ‘가치일반’을 내포하고 있다. ‘가치’ 혹은 ‘가치일반’이란 의자의 교환(거래)이 가능케 하는 가치를 의미한다. 비록 조금 불편하지만, 이 의자 역시도 분명히 상품으로서 거래와 교환의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척도로? 무엇을 근거로? 무엇을 기준으로 이 의자는 교환될 수 있었을까?

‘경제적 가치’의 형성 과정은 바로 그 척도로서의 ‘가치일반’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과정의 양상이 달라졌을 뿐, 물물교환 시절부터 화폐형태의 등장까지, 교환의 장에 나온 이들이 항상 고려했던 것은 물건 제작에 투여한 노력과 정성이었다. 즉 의자가 교환될 수 있게 하는 척도이자 기준으로서의 ‘가치일반’은 노력과 정성, 다시 말해 의자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투여된 ‘노동일반’의 양인 것이다. 이 의자를 판매한 이가 의자를 만드는데 투여한 노력에 걸맞은 가치를 돌려받기 희망한다는 사실은 굉장히 상식이고 자명한 것이다. 요컨대, 상품 속에는 두 가지 형태의 ‘가치’가 내포되어 있으며, 교환과 거래를 가능케 하는 ‘가치일반’은 상품에 투여된 노력, 상품에 체현되어 있는 ‘노동일반’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고 결론을 지을 수 있겠다. 사실 이는 우리의 첫 번째 의문에 대한 핵심적 해답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가 ‘경제적 가치란 무엇인가?’라고 묻자 『자본』은 가치의 형성과정에 관한 역사책을 펼쳐들며 ‘노동일반이요!’라고 대답하고 있었다.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 위에 약간의 첨언을 얹어보자면, 상품에 이질적인 두 개의 가치가 내재되어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마찬가지로 인간의 노동 역시 두 가지 상이한 측면을 가지게 된다. 의자만의 특수한 기능, 즉 사용가치(유용성)를 만드는 특수한 실제적 노동과, 교환의 척도가 되는 가치일반을 창조하는 노동일반이 서로 구별되는 것이다. 노동 역시 두 측면으로 분화되며, 노동일반과 그 속에서 창조되는 가치일반은 추상적 / 관념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반면 앞서 말했듯, 특수한 실제 노동과 이를 통해 만들어지는 사용가치는 특수하고 구체적인, 또 실질적인 유용성의 형태를 띠게 되는 셈이다.

‘경제적 가치’란 노동에서 나온다는 역사적 고찰과 함께 첫 번째 의문이 어느 정도 해결된 것 같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보자. 그렇다면 화폐의 양으로서의 가격과 가치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무의식중에 상품의 가치를 가격으로 평가하곤 한다. 이는 올바른 판단이 맞을까? ‘이디◯ 커피’의 아메리카노가 지닌 가치는 3,200원의 가격으로 온전히 표현되고 있다고 해도 괜찮을까? 앞서 언급한 [제3형태], 일반적 가치형태에서는 등가물 자체가 ‘일반적 등가물’로 변하며 모든 상품들의 통일적이고 보편적인 가치표현의 재료가 된다. 즉 앞선 예시에서 아메리카노 커피(또는 비단)는 일반적 등가물이 되며 다른 모든 상품과 직접 교환할 수 있는 [직접적·사회적 형태]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메리카노 커피(일반적 등가물)를 제외한 다른 모든 상품이 이와 같은 성격을 얻지 못하기에 이뤄진 상황으로, 그러한 상황에서만 형성 가능하다. 일반적인 가치형태에서의 이 아메리카노 커피의 역할은 모든 상품들이 차지할 수 있다.

사회적 타당성과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고 일반적 타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일반적 등가물’의 지위를 역사적으로는 ‘금’이 차지해왔다. 나아가 ‘금’처럼 자기의 현물형태가 사회적으로 독점적인 등가형태가 되는 특수한 상품 종류는 ‘화폐 상품’으로 설명할 수 있다. 금이 화폐의 역할을 해온 것이다. 금은 자신에게 체현된 노동일반의 양을 척도 삼아 다른 모든 상품들을 견줄 수 있게끔 하는 특수한 역할을 도맡아 왔다. 위의 언급에서 가치의 [제4형태]는 바로 ‘화폐형태’였다. 이는 금이 일반적 등가형태를 취하는 구체적 상품으로 정해졌다는 점만을 제외하고는 [제3형태]와 다른 것이 전혀 없다. 일반적 등가형태가 최종적으로 상품으로서 금이라는 특수한 현물형태를 통해 화폐형태로 전환된 것이 [제4형태]이다. 화폐의 기능을 하는 금에 의해 표현되는 단순한 형태가 바로 ‘가격형태’이며, 길고 긴 역사적 과정 속에, 드디어 우리가 오늘날 마주하는 ‘가격’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아메리카노 커피에 붙은 3,200원이라는 가격표를 이제 해명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화폐는 금이 아니며, 금과는 질적으로 매우 상이해졌다. ‘금’은 화폐로 기능을 시작함과 동시에, 스스로에게 투여된 사회적 노동일반의 양을 통해 가치의 척도를 대변하는 기능을 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주고받는 5만원권 속 신사임당은 사회적 노동일반의 양을 대변하지 않으며, 노동일반으로서의 ‘경제적 가치’의 척도는 더더욱 아니다. 또 어떤 가치(사회적 노동일반)를 직접 담아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화폐는 자신이 직접 가치(투여된 노동일반의 양)를 지님으로써 가치의 척도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관념적으로 가치를 대변할 뿐이며, 가치의 관념적 도량형의 역할만을 도맡게 되었다. 이 같은 역사적 변천 속에 사람들은 화폐(혹은 금)가 본래 어떤 가치(가치의 척도로 기능할 수 있는 신비한 성질)를 품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환상에 빠지기도 했다.

분명한건 오늘 내가 건넨 3,200원과 3,200이라는 수적 표현은 실제로 어떤 실질적 가치일반(노동일반)의 양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관념화된 척도로서 ‘3,200원’이라는 가치의 관념적 양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커피의 대가로 지불한 3,200원은 실제 ‘경제적 가치(=노동일반의 응고량)’의 양이 아니라 관념적 ‘가격 형태’이며, 가치와 가격은 엄격한 의미에서 구분된다. ‘가격 형태’가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은 가치일반의 양과 투여된 노동일반의 양을 정확히 표현해낼 수 있음에 기인했지만, 이제 우리는 화폐와 그 가격형태를 그저 관념적 척도로 사용하고 있다. 즉 가격이 상품에 투여된 가치(노동일반)의 양을 정확히 대변해준다고 보기 어려운 셈이다. 더군다나 21세기 자본주의 속 상품의 가격 형태는 수요 공급의 주류경제학 논리에 따라 수시로 변모한다. 똑같은 가치를 담은 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내일 새벽에는 갑자기 달라진 ‘가격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우리가 가졌던 첫 번째 의문, 즉 ‘경제적 가치’의 원천에 대한 궁금증은 ‘노동일반’이라는 개념을 깨닫게 했고, 나아가 이는 ‘가치’와 ‘가격 형태’의 근본적인 의미 차이와 맥락의 구분을 암시한다. 우리가 두 번째로 묻고자 했던 ‘가치’와 ‘가격’의 관계 역시도 어느 정도 해명이 된 것 같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우리의 시급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살펴보자. 우리의 시급은 어떻게 판단해야할까? 논의의 서두에서 얘기했듯,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력’은 여타의 상품들과 다를 바가 없는 하나의 상품으로 작용한다. 알바 시급에 대한 논의를 좀 더 명료히 하려면 시급의 대가로 우리가 사장님들에게 판매하는 이 ‘노동력’이라는 상품에 대해 더 고찰해봐야 할 것이다. ‘노동력’이 하나의 상품이라면, 앞서 말했듯, 다른 상품들과 같은 방식으로 그 속에 내재된 가치를 평가해야할 것이다. 우리는 이전에 상품의 경제적 가치를 무엇으로 해명했는가? 바로 ‘인간노동일반’이다. 즉 아메리카노 커피에 투여된 인간의 추상적 노동일반의 양이 그 가치를 표현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상품으로서의 ‘노동력’ 역시 같은 방식으로 그 가치를 측정해야한다. 다소 난해하고 우습기도 하지만, 우리의 논리와 그 정합성에 의거했을 때. 상품 ‘노동력’의 가치는 그 생산과정에서 투여된 ‘노동일반’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

사실 필자도 이러한 논의를 처음 접했을 때 굉장히 낯설고 해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습게도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는, 우리가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투입한 ‘노동일반’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현학적이고 사변적이어서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것이다. 실제 사례를 통해 설명해보자. 오목교역 24시 이디◯ 커피의 알바생분이 사장님에게 판매한 ‘노동력’의 가치는 알바생이 상품 ‘노동력’을 위해 준비한 모든 노동 및 노력에 따라 달라진다. 알바생은 오늘의 근로를 위해 잠을 잤을 것이고, 기본적 생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에너지를 쏟기도 하며 나름대로의 노동을 이어왔을 것이다. 밥이나 배달음식을 먹고, 샤워를 하거나, 보다 말끔한 모습을 위해 이발도 하며 머리 손질에 공을 들였을 수도 있다. 이 모든 시간이 이디◯ 커피 사장님이 구매한 알바생의 ‘노동력’의 가치를 형성한다. 알바생분이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판매를 위해 그 생산과정에서 준비한 모든 노동과 그 시간만큼의 노력의 합은 그의 상품 ‘노동력’의 가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선뜻 이해하기 힘든 사유 방식이지만, 눈을 감고 조금만 고민해보면, 우리의 마지막 의문을 명쾌히 해결해줄뿐더러, 노동력과 시급의 관계 전반에 대한 탁월한 해답이 떠오를 것이다. 그 해답은 ‘노동력’이라는 상품만이 지닌 특수한 성질에 대한 인지에서 출발한다. ‘노동’은 인간의 본성적, 본질적 행위일뿐더러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판매 과정에서 더욱 특별한 성질을 드러낸다. 이디◯ 커피 알바생분은 자신이 판매한 상품 ‘노동력’의 가치만큼의 대가를 급여로 지급받고, 실제로 노동을 함으로써 ‘노동력’의 판매를 이행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그 스스로 가치를 지닌 상품으로서 거래가 되는 한편, 구매자의 상품 사용과정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내게 된다. 가치의 근원은 노동이고, 상품 ‘노동력’은 판매자의 (구매자를 위한) 실제 노동 이행을 통해서 상품 교환의 거래가 완료되기 때문이다.

이디◯ 커피 새벽 알바생분(‘노동력’의 판매자)은 걸레로 테이블을 닦는 등 노동을 이행함으로써 시급의 대가를 지불하는 동시에, 새로운 가치를 사장님에게 만들어 제공하는 셈이다. 시급의 양은 알바생분이 판매한 ‘노동력’ 상품의 가치와 같은 크기, 같은 양일 것이다. 하지만 저 분(알바생)은 자신이 지불받은 시급, 즉 자신이 판매한 ‘노동력’의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창조하고 있다. [‘노동력’을 판매한 대가 = ‘노동력’을 생산하기 위해 준비한 알바생분의 노동시간 = 시급이 제공해야하는 가치의 양]인 상황에서, 알바생분은 자신이 판매의 대가로 돌려받은 가치의 양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해봐도, 우리가 알바를 할 때, 그 날 알바 근무를 위해 ‘노동력’을 준비(생산)한 시간만큼만 당일 근로를 이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제 일함으로써 그 판매를 완료하기 위해 우리가 전날 종일 준비했던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구매자의 사용 과정에서 자신이 지닌 가치보다 더욱 큰 가치를 만들어내는 셈이다. 상당히 어렵고 복잡한 논의이나 간단히 말하면, 커피숍의 알바생분이 자신의 ‘노동력’을 위해 이전에 투여한 노동시간보다 단 1시간이라도 더 많은 양의 노동을 근로 과정에서 행하는 순간 잉여가치의 형성과 이에 대한 착취가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지점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 먼저, 화폐 형태(가격 형태)로 표현되고 있는 알바 시급이 수십만 알바생이 판매한 ‘노동력’의 가치를 정확히 표현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두 번째로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자본주의적 노동 상황 속에서는 어떠한 알바생도, 아니 어떠한 노동자도, 사장님에게 제공하기 위해 준비한 상품 ‘노동력’ 속에 녹아있는 (준비과정/생산과정 속)노동시간 만큼만 근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구조적으로, 일하기 위해 준비한 시간보다 더 일할 수밖에 없다. ‘경제적 가치’가 ‘노동일반’에서 창조되는 한, 자본주의적 분업-생산체계는 알바생들과 노동자들이 만드는 ‘가치’를 조금이라도 착취할 수밖에 없는 ‘자본’의 형이상학적 메커니즘을 기저에 두고 있는 것이다. 오늘밤, 내가 본 것만 해도 수십 개의 아메리카노 커피를 탄생시킨 저 장인은, 만약 자신이 판매한 ‘노동력’의 가치만큼의 시급을 돌려받았다고 해도, 그 가치의 배에 달하는 양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있다.

출처 http://www.korea.kr/news/policyNewsView.do?newsId=148863481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어렵고 난해했던 논의와 우리의 세 번째 의문에 대한 복잡한 고찰을 이쯤에서 줄이고, 다시 새벽녘의 이디◯ 커피에 앉아보자. 사실 어느 가게든 요즘의 알바 시급은 최저시급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대부분이다. 논의의 초반에 알아본 것처럼 저 알바생분들 역시 2020년 기준 법정 최저시급은 8,590원선에서 자신의 1시간의 ‘노동력’을 판매하고 있을 것이다. 근 몇 년간 법정 최저시급은 꾸준히 증가했다. 그러나 우리의 이전 논의에 따르면, 이는 정말 납득이 어려운 상황으로 풀이될 수 있다. 우선 몇 년째 꾸준히 이 카페를 방문하는 입장에서, 작년 말에도 저 알바생분은 근무를 했고, 오늘 밤과 비슷한 수준의 서비스를 내게 제공했으며, 지금 현재도 예년과 비슷한 양의 노동을 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 알바생분은 2019년에는 8,350원에 자신의 1시간 ‘노동력’을 판매했고, 올해 들어 지금은 8,590원에 자신의 1시간 ‘노동력’을 판매하고 있다.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최저시급이 오름과 동시에 저분이 ‘노동력’ 판매를 위해 더 많은 시간 노력을 쏟아 붓기라도 한 것인가? 그러면 모든 노동자들은 최저 시급의 인상과 동시에 ‘노동력’ 생산에 더 많은 노동을 투여하는가? 둘 모두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저 분은 예년과 비슷한 수준의 가치를 지닌 ‘노동력’을 생산함에도, 이 대가로 시급만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다. 이는 보통 정치권에 의해 결정된 정치적 의사결정이며, 실제로 ‘가치’가 거래되는 양상과는 무관하다. 대체 어떤 가격표가 알바생들의 ‘노동력’에 담긴 가치를 제대로 대변해줄 수 있는 것인가? 8,350원? 8,590원? 아니면 9,000원? 알바생분의 1시간 ‘노동력’ 가치의 ‘가격 형태’는 대체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어떻게 책정되는 것인가? 정치권에서는 대체 무슨 근거로, 무슨 권리로, 노동자들이 판매하는 ‘노동력’의 값어치와 그 기준 척도를 좌지우지하는 것일까?

사실 나는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이 의문들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아직 알바생들이 판매한 ‘노동력’의 ‘가치’를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지 그 적확한 답을 찾지 못했다. 더불어 ‘가치’의 거래 현장과는 무관한 상품 ‘노동력’의 법적 ‘가격 형태’ 책정에 대해 정치권으로부터 어떠한 해명도 듣지 못했다. 설령 시급의 ‘가격 형태’가 알바생 및 노동자들의 ‘노동력’이 지닌 가치와 정확히 동일한 값으로 구성된다고 하더라도, 앞서 말한 것처럼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에서는 노동자가 추가로 생산하게 되는 잉여의 가치가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이에 대한 자본의 착취 역시 필연적인 수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필자는, 그리고 우리는 아직 ‘가치’의 정확한 표현 방법에 대한 명쾌한 답을 찾지도 못했고, 정치권과 제도권으로부터 우리의 문제들을 조정할 권한을 돌려받지도 못했다. 기껏해야 대학생 신분인 알바생들이 이토록 커다란 ‘가치’의 문제와 ‘착취’의 문제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사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는 ‘해야만 하는 것’에 집중하고 싶다. 적어도 이 글을 읽은 알바생들은 ‘가치’의 본질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착취는 왜 발생하는지, 또 우리의 시급은 무엇 때문에 문제가 되는지에 대해 진지한 문제인식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필자는 거대한 구조적 모순 앞의 알바생들이 끊임없이 고민하고 고뇌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화폐와 가치에 관한 사회적 환상에 휩쓸리지 않고, 8,590원 속에 숨어있는 착취의 알고리즘을 포착해야한다. 어떠한 구체적 방식으로 ‘가치’의 참된 의미를 표현해낼 수 있을 것인지 줄기차게 고민해야할 것이다. 우린 이미 ‘경제적 가치’가 무엇인지 알았고, 우리 내의 시급 속에서 그것이 어떻게 호도되는지에 대해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 해내야할 과제들 역시도 분명해졌다. ‘경제적 가치’에 대한 올바른 인지를 바탕으로 자본주의적 생산 과정이 지니는 구조적 착취의 모순을 이해하고 분노해야할 것이다. 그 모든 저항과 문제제기의 시발점은 파란 모자의 이디◯ 커피 알바생의 통장으로 입금되는 시급 8,590원에 있다. 당신의 시급은 어떠한가? 오늘 당신의 시급은 안녕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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