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돼지와 이데올로기, 그리고 물신성 [내가 읽는 『자본론』]

개돼지와 이데올로기, 그리고 물신성

 

김필진(경희대 철학과)

 

2016년 여름, 대한민국 교육부의 어느 정책기획관은 교육부 직원들, 언론사 기자들과 함께 식사자리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그가 했던 발언은 아직도 유행어처럼 우리 주위에서 종종 회자된다. “민중은 개돼지로 취급하면 된다.” “신분제를 공고화 시켜야 한다.” 그의 발언에 모티브가 된 것은 영화 ‘내부자들’에 등장하는 원로 언론인 이강희의 명대사였다. 극 중 이강희는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대중들은 개돼지입니다. 거 뭐 하러 개돼지들한테 신경을 쓰시고 그러십니까?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 영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대사가 21세기 대한민국의 행정부 관료 입에서 실제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 드라마틱한 현실에 많은 대중들은 자신이 개돼지 가축임을 비꼬듯 자처하며 해당 정책기획관을 향한 비판을 쏟아냈다. 법과 제도를 손봐야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이 사건은 세간의 엄청난 비난에 직면했다. 저들은 왜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새삼스레 말 한마디에 화가 난 것일까? 국민과 민중들이 개돼지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비슷한 맥락의 위 두 대사는 아마 대한민국 민중의 우매함을 비아냥대는 권력의 ‘근거 있는’ 농담이었을 것이다. 언제나 기득권은 물질적 정신적 양 측면에서 국민들의 정서와 사고를 지배하고 그 표출 양상을 예상하여 통제 정도를 조절하고 있기에 ‘근거’가 충만한 자신감이라 칭할만하다. 이들의 발언에 담긴 의미와 맥락은 분명하다. 그들이 민중 위에 군림하고 있음을 직간접적으로 시사하며, 대다수의 국민들을 보며 느끼는 우월감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발언들이 담고 있는 의미는 거짓된, 혹은 잘못된 사실을 기반으로 한 것인가? 그래서 잘못된 팩트에 국민들이 화가 난 것일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나는 국민들을 개돼지 취급하게끔 하는 사회 구조가 실재한다고 믿는다. 국민들은 자신들이 노골적으로 가축 취급당한 것에 화가 난 것일 뿐이며 이강희와 교육부기획관의 자신감이 전제한 지배 구조가 실재함을 어렴풋이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오늘, 대중들을 한낱 가축으로 전락 시키는 구조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대중들이 정말 가축이라도 된 것 마냥, 자신들을 개돼지 취급하는 사회에 순응하고 살 수 밖에 없도록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inistry_of_Education(South_Korea).jpg

 

나는 이 의문을 해소해줄 첫 실마리를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사유 속에서 찾고자 했다. 이 글을 읽는 당신께 묻고 싶다. 혹 ‘이데올로기’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사실 중고등학교 사회 시간에 교실에만 있었다면 한번쯤 들어봤을 법한 단어가 바로 ‘이데올로기’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이데올로기의 의미를 사상이나 이념의 일반적인 의미와 등치시켜 이해한다. 하지만 내가 설명하려는 이데올로기는 그렇지 않다.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주의의 용례에서 부정적 의미를 내포한다. 정확히 말하면, ‘이데올로기’라는 개념은 사회적 모순의 발달에 따라 실재를 ‘전도’시켜 사회적 모순을 은폐하고 왜곡시키기 위한 관념적인 것들을 의미한다. 즉 ‘허위의식’ 정도로 압축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데올로기’라는 단어가 부정적 뉘앙스를 기저에 두는 까닭은, ‘이데올로기’가 모순을 은폐함으로써 모순의 재생산에 기여하고 지배 계급의 이익창출을 돕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개념은 프랑스의 유물론자들 및 포이어바흐의 종교비판에 영향을 받아, 헤겔의 전도된 국가 개념과 종교에 관한 개념을 비판하는 데에서 그 본격적인 시발점을 구축했다.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에 의해 이론적 개념으로 부상했으며, 사회적/정치적/경제적/윤리적 측면 등 다양한 외연을 띠며 사용되었다.

‘이데올로기’는 대중들이 그들 자신을 향한 ‘개돼지 대우’의 토양으로서 근본적 사회 모순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이데올로기’는 권력의 도구로써 손색이 없는 셈이다. 마르크스의 분석에 따르면 근현대적 시점에서는 궁극적(본질적) 실재의 현상 형태인 자본주의적 사회가 바로 이데올로기 형성의 기본 조건이라고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데올로기’로서, 또 ‘이데올로기’를 이용함으로써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는 ‘전도’ 작용을 매개하게 된다. 이 세상의 실재와 그 본질적 관계들을 실제로 떠받치는 것은 생산의 영역이다. 허나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는 본질적인 관계들을 은폐하고 현상 형태일 뿐인 자본주의 사회를 중심으로 관념 체계를 형성, 설파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 같은 ‘이데올로기’에 눈이 멀어 자신들의 의식 또한 전도시키게 된다. 후기 자본주의 속 강대국이자 선진국을 자처하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태어난 나. 나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온 몸으로 마주하며 살아왔다. 우리가 개돼지가 될 수밖에 없는 이 구조를 안개처럼 가리는 바로 그 ‘이데올로기’ 말이다.

한편 바로 그 생산의 영역으로서 경제적 부분에 관하여 우리는 착취 계급과 피착취 계급이 존재함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게 바로 이 사회의 99%를 개돼지로 만드는 구조적 메커니즘과 직결되기에 그렇다. 더불어 우리는, 경제적 생산성을 향한 집착이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적 원리이자, ‘개돼지’계급과 이들을 착취하는 계급이 계속적으로 ‘갈등-공존’하게하는 기본적인 알고리즘임을 짚고 넘어가야한다. 즉 이 사회의 근본적 계급 구조와 이를 망각하게 하는 ‘생산성’에 관한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대중들이 가축 취급을 받는 이유를 보여주는 셈이다.

이데올로기는 사회의 본질적 구조와 계급에 대한 인식을 방해하며,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원리들을 미화하고 은폐하고자 한다. 사실 필연적인 결과다. 자본의 증식 욕구는 많은 척도들을 경제적 척도로 일원화 시켰고, 경제적/물질적 성공에 대한 열망은 곧 ‘생산성’과 ‘효율’에 대한 집착과 그 이데올로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무한한 욕구의 생성과 이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사람들을 현혹했다. 나도 노력하면 대중들을 들쥐 취급할 수 있는 달콤한 자리에 오르는 희망이 샘솟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구조의 문제 따위는 고이 접어 장롱에 넣어 두게 되었을 것이다. ‘생산성’과 ‘효율성’으로 집약되는 이데올로기는 그러한 정치적(권력적) 욕구의 성취와 경제적 성공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 위에 놓여있었던 것이다. 기득권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은, 다음 세대로부터 ‘어찌 하면 더욱 큰 생산성을 이끌어 낼까’라는 고민에 대한 답이 ‘경쟁’이라는 것을 필연적으로 내면화하고 있었다. 한정된 가치를 가지려면 싸우고 갈등하여 승리하고 쟁취하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경쟁’에 착수한 이들은 사실 자신들 모두가 나눠가지고도 남을만한 양의 재화와 가치가 이 세상에 존재함을 깨닫지 못한 채, 그 전쟁에 뛰어들었다. 더욱이 ‘경쟁’의 이데올로기는 이 같은 ‘참전’을 성실한 삶으로 포장하기 시작했다. 전시 상황에서 그 누가 ‘개돼지적’ 사회구조에 대해 고민하랴. ‘이데올로기’라는 안개는 본질을 가리는 데에 완전히 성공한 것이다. 앞서 언급한 마르크스의 설명처럼, ‘경쟁’은 실재의 전도와 관념의 전도를 매개하는 자본주의적 모순의 대표적 ‘이데올로기’ 중 하나일 뿐이다.

권력과 기득권은 이 밖에도 여러 측면의 ‘이데올로기’들을 통해 대중의 분노와 의문을 통제하고 자본주의적 ‘경쟁’에 경도되게 만들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득권의 이 모든 관념적 유인책에 현혹되어 자신들을 개돼지로 만드는 자본주의적 계급 구조를 인지하지 못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개개인의 관념 속에서 자신의 인간적 가능성과 속성을 망각하게 되었다. 이제 남은 건 자본주의 경쟁 사회 속의 부속품이 된 개별 인간들뿐이었다. 가축의 삶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자본주의적 삶은, 일반 대중에게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다.

기득권에 서기 위한 경쟁은 민중들 내에서 갈등을 야기하며, 일종의 시합의 장을 만든다. 앞서 언급했듯이 ‘경쟁’의 이데올로기는 이 과정 속에서 주인과 가축으로 나뉘는 사회구조의 본질에 대한 대중들의 이해를 방해하고 은폐한다. ‘잉여가치 착취’의 구조와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작용에 관한 대중의 지각을 막는 것이다. 대중들의 관념을 전도시키는 셈이다. 민중들은 자신의 현실을 망각하고 민중계급/노동계급 내부에서의 갈등과 경쟁 및 혐오와 차별을 이어간다. 기득권과 자본가들은 이들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는 영원히 가축일 수밖에 없음’을 느끼지 못하도록 이들 내부에 끊임없이 갈등과 혐오와 경쟁을 유발시킨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젠더갈등, 소수자혐오 등도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적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들 모두는 연대해야하며, 개나 돼지가 아님을 다 함께 소리 높여 외쳐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자본주의와 무한경쟁시대가 주는 달콤한 유혹에 눈이 멀어 지속적으로 기득권의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고 나아가 확산시키고 있다.

‘이데올로기’는 생각보다 정교하다. 마르크스는 경제적 문제에 관한 가장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또 다른 개념을 등장시키며 보다 자세히 설명한다. ‘물신성’이 그것이다. 『자본』의 제Ⅰ권 제1편 제1장 4절에 ‘물신성’ 개념을 언급한다. 같은 의미를 지니는 ‘물신숭배’는 영어로는 fetishism으로 풀이된다. 간단히 말해 이것은 인간의 사회적 특성을 물건의 내재된 속성인 것처럼 은폐하여, 물건에 소유자의 인격을 투영하거나 물건 그 자체에 인격성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물신성은 이를 가능케 하는 물건의 내재된(것처럼 보이는) 초자연적 힘을 의미한다. 이는 경제적 영역에 집중적으로 적용되는 커다란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프리카의 종교적 특성을 설명한 프랑스의 드브로스의 저작은 데이비드 흄의 영향과 더불어 마르크스가 ‘물신성’이라는 개념을 포착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 물신숭배(fetishism)의 직접적 어원은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가 사용한 ‘페티쉬’라는 개념인데, 그 의미 또한 같은 맥락 위에서 대상을 상징하는 물건에 성적 욕망을 느끼는 감정과 관계한다.

『자본』을 통해 제시되는 두 가지 물신성은 ‘상품 물신성’과 ‘화폐 물신성’이다. 상품 물신성은 노동생산물이 ‘상품 형태’를 띨 때 발생한다. 이는 상품 형태가 사회적 생산관계를 은폐하여 사람이 아닌 물건들이 관계를 맺는 상황처럼 보이게 만든다. 상품생산자는 생산관계의 물화(물질화, 물건화)를 마치 어떤 한 상품이 생산관계에 의존하지 않고도 다른 대상물과 교환될 수 있는 신비로운 능력을 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러한 능력은 마치 물리적 속성처럼 상품이 본래 가지는 성질처럼 느껴진다. 즉 ‘상품 물신성’은 상품에 인격을 투영해 사람이 상품 대하기를 실제 인격체처럼 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화폐 물신성은 금이 화폐로 변한 역사의 과정을 알지 못한 채, 화폐(금) 자체에 가치가 내재된 것으로 오해할 때 발생한다. 즉 어떤 특정한 일반적 등가물 상품이 화폐(금)가 되게 하는 사회적 관계의 발달을 인지하지 못하고, 거꾸로 모든 상품이 금으로 교환될 수 있게 하는 금의 화폐적 속성이 금의 본성 자체에 내재되었다고 믿는 오해가 화폐 물신성을 야기한다. 화폐 물신성도 마찬가지로, 화폐 자체에 인격과 능력이 부여되어 화폐 그 자체가 인격화, 목적화되는 현상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이 같은 물신성의 두 양상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크게 낯선 현상은 아닐 것이다. ‘이데올로기’, 특히 ‘물신성’은 계급적 구조가 현대인들을 개돼지로 만드는 현실을 가장 여실히 증명하는 동시에, 대중들이 이를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대중들은 온갖 ‘이데올로기’에 휩싸여 실재의 생산관계와 사회의 본질적 메커니즘을 망각할 뿐만 아니라, ‘물신성’과 같은 온갖 어리석은 환상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여기까지의 내 글을 읽고, ‘그래서 이 글은 민중이 개돼지가 맞다’는 걸 말하려 쓴 것 아니냐는 언짢음이 생길지도 모른다. 실제로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인간이 이 모든 구조에서 벗어날 능력을 잠재하고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완전히 상이한 견해를 보이며 갈등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민중이 구조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개돼지임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고자 이 모든 이야기들을 엮은 것은 아니다. 단지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통념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정밀하게 작용하는 지를”, “왜 우리가 개돼지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는지를”, 또한 이 글을 읽음으로서 단 한 사람의 대중이라도, 우리가 언제든 레밍이 될 수 있는 이 모든 사회적 구조를 자각하기를 바라며 글을 쓰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오늘 하루 누군가에게 가축 취급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난 멸시받고 괄시받는 99%의 세계인이 언젠가는 이 모든 구조적 불의를 알아채고 함께 그것에 대항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레밍도, 개도, 돼지도 아닌 존엄하고 가능성 넘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