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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7-배타적인 선언 판단 형식에 관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7-배타적인 선언 판단 형식에 관해

1)

정언 판단 형식이나 가언 판단 형식도 이미 실체성을 전제로 한다. 정언 판단 형식에서 실체는 우연한 개체들이 이루는 무차별한 전체 즉 ‘외적인 개별성’의 관계이다. 가언 판단 형식에서는 두 존재 사이의 관계가 정립된다. 그러나 이 관계는 다만 부분적이며 아직 두 존재에 대해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헤겔은 이런 관계를 ‘부정적 동일성’의 관계라 한다.

이런 가언 판단 형식에서 하나의 존재는 이미 다른 존재에 대해서 특정한 것이다. 즉 A의 존재는 B의 존재를 전제로 ‘B가 아닌 것’으로 규정된 것이다. 가언 판단 형식에서 두 대립하는 규정성 사이의 관계가 출현했지만, 아직 두 대립하는 것은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A가 존재하면, B가 존재하게 되니, 이런 관계는 부분적이며, 여기서 무수히 많은 다양한 관계가 출현한다. A는 C와 관계하며, 또는 D와 관계하고 B는 F와 관계하면서 무수한 관계의 네트워크가 펼쳐진다. 정언 판단 형식에서 각 존재가 무차별한 것(객관 논리학에서 ‘실재성’, ‘실존’에 해당)이었으나 가언 판단 형식에서는 각 존재는 추상적인 특수성(객관 논리학에서 ‘유한성’, ‘현상’에 해당)을 의미한다.

이런 가운데 경험을 통해 배타적 관계가 출현한다. 이 배타적 관계는 A이거나 -A인 것의 관계이다. A는 이제 ‘-A가 아닌 것’ 즉 -(-A)로 규정되니, 규정성이 다시 정립된 것 즉 ‘정립된 규정성’이다.

이때 A와 -A 사이에 다른 것은 없으며(배중율) 그 결과 A와 -A가 전체, 총체성을 이룬다. 이처럼 배타적 선언지의 형태를 지닌 판단 형식이 곧 선언 판단 형식이다. 전형적인 예를 들자면, 생물체에서 암수의 관계이다.

이 선언 판단 형식에 이르면 주어인 일반적 유로서 본질은 술어의 총체성으로서 실체로 실현된다. 양자 사이에는 “개념의 동일성으로서 일반성”이 출현하니, 각자는 “개념 속에 정립된 특수성”이다.(논리학 2부, GW12, 80)

“규정성이 갖는 직접성을 통해서 규정성의 각 계기가 구별된 것으로서 존재하며, 동시에 그런 특수성은 규정성의 관계를 이루는 규정성의 통일을 통해 그 규정성의 총체성으로서 존재한다.”(논리학 2부, GW12, 80)

2)

이런 배타적 선언지의 판단 형식은 주어는 구체적 일반성이며, “단순한 형태 속에 있는 유”이다. 술어는 마찬가지로 유이지만, 이 일반적 유는 이제 “구별된 규정의 총체성” 즉 실체이다. (논리학 2부, GW12, 80)

양자의 관계는 동일한 유가 다른 방식으로 출현한 것이므로 그것의 내포와 외연은 동일하다. 다만, 그것이 출현하는 개념의 형식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즉 주어에서 유 즉 ‘일반성’이라는 개념 형식을 가지지만, 이는 ‘자기 내로 반성된 일반성’이다.

반면 술어에서 유는 자기를 구체적으로 실현한 것이니, 이는 ‘특수성’이지만, 이 특수성은 서로 대립하는 특수성으로 분화되며, 유의 전체 영역을 전개하면서, 이 대립하는 특수성은 대립 속에서 통일된다. 즉 술어는 “주어의 전체 영역을 그러나 특수성의 대결 속에서 보존하는” “특수성의 총체성”이다. (논리학 2부, GW12, 80) 이런 술어는 곧 유[Gattung]가 분화된 종[Art]의 관계이다.

“즉 한번은 유의 단순한 규정성으로서 다른 한 번은 바로 이 동일한 규정성이 자기가 구별된 것들로 전개되는 것을 통해 나타난다. 그러한 방식으로 유는 종의 특수성이 총체화된 것이며 이 총체성이 곧 유의 일반성을 이룬다. 특수성이 전개되면 술어를 이룬다. 특수성은 주어의 전적으로 일반적인 영역을 포함하지만, 동시에 이 일반적 영역을 특수성의 대결 속에서 포함하는 한에서 주어보다 더 일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논리학 2부, GW12, 80)

선언 판단 형식에서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헤겔은 이중적으로 규정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무엇이면서 동시에 무엇이 아닌 것“[sowohl als]이다. 즉 선언 판단 형식은 주어이면서 동시에 술어이다. 여기서 주어와 술어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동일성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즉 객관적 일반성은 그 특수성의 총체성에서 자신을 완전히 보존한다.

그러나 이 선언 판단 형식은 다른 한편 술어의 측면에서 보면 상호 대립을 표현한다. 그것은 ‘무엇이거나 그것과 다른 것이거나, 그 중간은 없는 것’[entweder oder] 이다. 여기서 각자는 특정한 구별이며, 서로 부정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러므로 주어인 일반적 유는 “규정된 특수자의 통일로서 통일”(논리학 2부, GW12, 81)이다.

3)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왜 일반적 유가 이와 같은 배타적인 선언지의 형태로 출현하는가이다. 헤겔에서 일반적 유가 개체의 추상적 일반성이라면, 이 유가 실현된 종은 서로 무차별하다. 이런 경우 선언지는 경험적인 선언 판단 형식을 이루며, 이런 선택지 사이에는 내적인 분류의 원리가 결여한다.

이 선택지는 그저 경험적으로 발견되는 것일 뿐이며 그 사이에는 배타적 선택성[entweder oder]의 관계는 없다. 비록 여기서 선택지가 완전하더라도 이 완전성은 경험적인 것이며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헤겔에서 선택지가 ‘부정적인 통일’의 관계 속에 있으면, 이런 선택지는 개념 규정에 따라서 보면 자기를 부정한 것을 다시 부정하는 것으로서 개별적 선택지는 이런 전체 속에 자기를 해소하면서, 그런 선택지 전체는 자기 내에서 완결된 것 즉 실체이며, 그것의 총체는 일반적 유를 이루는 것이다. 이때 분류의 원리는 일반적 유 자체에 내재하는 필연적 원리가 된다.

“경험적인 선언 판단 형식은 본래 배타적으로 선택적[entweder oder]임을 언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종은 다만 어떤 주관적 완전성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타적 선택은 그 선택지 이상의 것을 배제하며 자기 내에 들어 있는 총체적 영역을 완결한다. 이 총체성은 그 필연성을 객관적 일반자가 지닌 부정적 통일 속에 갖는다. 이 객관적 일반자는 개별성을 자기 내에서 해소하고 구별된 종을 규정하고 관련시키는 단순한 원리인 한에서 개별성을 자기 내에 내재적으로 갖는다. 그에 반해 경험적 종을 구별하는 것은 어떤 우연성이며 이 우연성은 외적인 원리거나 따라서 유의 원리가 되지 못하며 이를 통해서 또한 유에 내재하는 규정성이 되지 못한다.”(논리학 2부, GW12, 81)

추상적인 유의 예로서 헤겔은 색깔을 ‘빨간색, 녹색, 노란색 등’으로 구분하는 것을 든다. 이런 구분은 상이한 것일 뿐, 부정적 통일의 관계를 지니지 않는다. 반면, 색깔을 명암으로 구분할 때 이 구별은 대립을 통해 규정되는 것 즉 부정적 통일의 관계를 지닌 것이며 따라서 명암은 일반적 유로서 색깔을 분류하는 내적 원리가 된다.

4)

일반적 유가 이처럼 배타적 통일로 되는 이유는 유가 분화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립하기 때문이다. 즉 A에서 P가 나오면 원래 A는 -P가 되니, 그 결과 A는 P와 -P로 즉 배타적으로 분화된다.

예를 들어 동물에서 인간[P]이 분화되면, 인간이지만 출발점에서 서서 여전히 ‘동물성을 지닌 인간[-P]’과 분화된 인간성이 발전하면서 ‘인간적으로 된 인간[P]’이 출현하게 되는 것과 같다.

“주어와 술어의 구별은 개념의 구별이며, 그러한 술어 속에서 나타나는 종의 총체성은 마찬가지로 이런 개념의 구별 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그러므로 선언적 선택지의 서로 대립하는 규정은 이런 개념의 구별을 통해 생겨난다. 그런 선택지는 개념의 구별로 환원되니, 왜냐하면 선언적으로 분지하고 부정적인 통일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이런 개념의 구별이기 때문이다.”(논리학 2부, GW12, 82)

“개념 자체는 이를 통해 또한 직접적으로 그것이 전개하는 선택지 가운데 하나[즉 -P]이며 그러나 다른 선택지는 이 일반성을 그 특수성 속에 해소한 것이거나 개념이 규정한 것으로서 규정성[즉 P]이니 바로 그 속에서 일반성이 총체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논리학 2부, GW12, 82-83)

이런 배타적 통일의 관계는 대립적이거나 모순적일 수 있는데, 본질론에서 헤겔은 반성 규정을 다루면서 대립이 어떻게 모순으로 나가는가를 설명했다. 대립은 예를 들어 흑백과 같은 것이며, 여기서 양자의 관계는 아직 배타적임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반면, 이런 대립하는 것 가운데 양자의 배타성이 드러나면서 모순적인 것이 된다.

개별적인 선택지가 우연적이고 그 통일은 주관적이라면 이 원리는 일반적 유에 대해 외면적이니, 이때 일반적 유는 개별 선택지에 대해 최근 유가 되지 않는다. 반면, 일반적 유가 ‘배타적 통일’로 분화하면, 이 일반적 유는 개별 선택지에 대해 반드시 최근 유가 된다. 왜냐하면, 이 일반적 유가 자기를 분화한 것이 곧 개별 선택지이기 때문이다.

“어떤 유가 종으로 선언적으로 분지하는 것이 아직 이런 형식[배타적 통일]에 도달하지 않았다면, 이것은 자기를 개념의 규정성으로 고양하지 못했으며 그 개념으로부터 출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한다.”(논리학 2부, GW12, 83)

4)

선언 판단 형식은 이미 말했듯이 개념의 이중적인 분지이다. 우선 그것은 주어와 술어로 분지하며, 술어는 다시 배타적인 선택지로 분지한다. 주어는 단순한 규정이며 술어는 서로 대립하는 구별의 총체성이다.

판단은 주어와 술어의 관계이다. 추론은 판단 형식과 판단 형식의 관계이다. 선언 판단 형식에서 주어의 일반적 유와 술어의 실제 즉 구별된 것이 이루는 총체가 합일한다. 그러므로 판단의 운동은 끝난다. 개념의 구별된 규정성이 마침내 다시 통일로 환원되면서 개념이 회복된다.

처음 판단에 들어가기 전 개념의 계기는 아직 분화하지 않는 내적 계기이었다. 개념의 계기가 분화하면서 판단이 성립되었다. 판단의 운동을 통해 분화된 개념의 계기가 다시 통일되니, 개념이 회복되었지만, 이는 단순한 주관적 개념이 아니라 개념이 정립된 것이다.

“이제 판단 형식의 계사인 이 통일성 속에 양극단은 서로 동일함을 통해 몰락하니, 이를 통해 그 통일성은 개념 자체가 되며 사실 여기서 개념은 정립된 것이 된다.”(논리학 2부, GW12, 83)

개념이 정립되면서 개념과 주관과의 관계가 출현하니, 그게 바로 개념 판단 형식이다. 개념 판단 형식은 판단에서 추론으로 이행하는 매개 과정이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6-필연[관계] 판단 형식[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6-필연[관계] 판단 형식

1)

반성 판단 형식에서 전칭 판단 형식이 보편 판단 형식으로 이행하면서 정언 판단 형식이 된다. 보편 판단 형식이나 정언 판단 형식은 일반적 유를 주어로 하는 것이므로 동일한 것을 말한다. 다만 그것이 등장하는 맥락에 따라 구별된다. 전자는 반성 운동의 운동 결과이며, 후자는 필연성 범주가 전개되는 출발점이다.

헤겔은 필연성 범주[판단 형식]이라 했지만, 이는 칸트에서는 관계 범주에 해당하는 것과 같다. 헤겔이 이를 ‘필연성’이라 이름 붙이면서, 양상 범주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필연 판단‘과 오해될 여지가 있다. 물론, 흔히 말하는 필연 판단은 헤겔에서는 자명한[확증, apodiktisch] 판단이니, 헤겔에서는 구별된다.

헤겔이 왜 이렇게 이름 붙였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헤겔은 흔히 질의 범주라 부르는 것은 현존 범주라 했다. 헤겔에서 질이 곧 현존이기 때문이다. 양의 범주라 부르는 것은 반성 범주라 했는데, 질이 반성하면서 양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흔히 관계 범주라 부르는 것은 필연성인데, 이 필연성은 판단의 필연성이고 즉 판단에서 구별된 주어와 술어가 합일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가 관계 범주라 부른 것도 주어와 술어 사이의 관계가 논해지기 때문이니, 명명의 방식에서 차이는 있지만, 의미상 크게 다르지 않다.

필연성 범주의 일반적 형식은 주어는 일반적 유를 의미한다. 이 주어는 다시 술어의 일반적 토대가 되는 것이다. 반면 술어는 반성 범주에서 유지되어 온 지각적 일반성이 그대로 넘어온다.

그런데 반성 범주에서 술어의 일반성은 우선 내포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즉 그것은 개별적 속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필연성 범주에서 술어의 일반성은 이제 외연적인 의미를 지니면서 우연적 실존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일반적 유가 실현된 개별자를 말한다.

이 우연적 실존이 서로 무차별하게 모인 집단이 곧 ‘실체[Substanz]’이다. (앞에서 본질론 실제성 편에서 ‘실체와 우연’의 관계가 상기해 보라.) 여기서 개체 사이의 구별은 어떤 원리가 없으며, 다만 우연히 일어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이 실현된 개별자이다. 이 우연한 실존의 이면이 실체이다. 우연하게 출현한 생명이 모인 자연 생태계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2)

필연 판단 형식의 출발점에 등장하는 것은 정언 판단 형식이다. 그것은 일반적 유를 주어로 하고 일단 단순한 속성을 술어로 한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장미는 가시가 있다’라는 명제를 들 수 있다.

여기서 내포적으로 ‘가시가 있다’라는 술어는 외연적으로는 ‘가시가 있는 것’이라는 하나의 실존을 의미한다. 그것은 ‘가시가 있는 식물’ 이다. 주어인 장미는 그것이 속하는 일반적 유[‘식물’]에 속하는 하나의 실존이 된다. 술어가 지닌 외연적 의미가 드러나면서 정언 판단 형식의 본래적 의미가 드러난다.

여기서 주어인 ‘장미’는 아직 그 본질적 내용을 드러내지 않았다. 주어는 다만 일반적 유를 지칭하는 이름이며, 술어인 ‘가시가 있다’라는 술어의 내용을 규정하기는 하지만, 이 규정은 아직 일반적 유의 고유한 본성 즉 종차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주어의 규정성[이름]를 통해서 주어는 술어에 대립해서 특수한 것으로 된다. 이런 주어의 규정성은 처음에는 아직 우연적인 것이다. 주어와 술어는 형식이나 필연적인 것으로서 규정성을 통해 관계하지 않는다. 따라서 필연성은 아직 내적인 것으로서 존재한다.”(논리학 2부, GW12, 78)

그러므로 여기서 주어와 술어의 관계는 필연적이지 않으며 다만 서로 외면적으로 관계한다. 정언 판단 형식에서 서로 구별된 주어와 술어에서 다시 현존 범주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내재화의 운동이 일어난다. 현존 범주에서 술어인 일반성이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발전했듯이 이제 주어와 술어는 관계는 외면적인 것에서 내면적인 것으로 발전해야 한다.

“객관적으로 일반적인 것이 자기를 규정해서 즉 자기를 판단으로 정립하면, 이 객관적으로 일반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그 자신으로부터 반발해서 나온 규정성 자체와 동일성의 관계 속에 있으니, 즉 이 반발한 규정성은 본질적으로 단순히 우연적인 것으로 정립될 수 없다.”(논리학 2부, GW12, 78)

현존 범주에서 내재화의 운동은 경험적으로 일어난다. 반면, 필연 범주에서는 주어가 이미 일반적 유이므로 이 유가 자기를 실현하는 것을 통해서 내재화의 운동이 일어난다. 이 관계의 필연성은 이미 일반적 유에 내재하며, 다만 이 필연성이 정립되면서 주어와 술어의 동일성이 회복될 것이다.

3)

현존 판단 형식의 긍정, 부정, 무한 판단 형식은 객관 논리학의 질의 범주 즉 실재성, 유한성과 무한성에 상응했다. 반성 판단 형식은 객관 논리학의 양의 범주에 상응했다. 양에서 정량, 척도와 척도 관계가 단칭 판단, 특칭 판단, 보편 판단의 형식이 된다.

가언 판단 형식은 본질과 개체의 관계이므로 객관 논리학에서 본질론에 나오는 현상 범주와 상응한다. 여기서 실존, 현상, 실체의 범주가 판단 형식으로는 정언 판단, 관계 판단, 선언 판단이 된다.

이런 주관 논리학과 객관 논리학 사이의 상관성에 관해 우리는 헤겔이 사용하는 용어를 통해 짐작할 뿐인데, 다행스럽게도 필연성의 범주와 관련해서는 그 상관성을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정언 판단에서는 실체성의 개념 형식이 출현하듯이 가언 판단에서는 인과성의 개념 형식이 출현한다. …가언 판단에서는 자립적인 측면의 관계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오히려 본질적으로 하나의 동일성이 지닌 계기로서만 존재한다.”(논리학 2부, GW12, 79)

위의 글에서 헤겔은 객관 논리학 본질론과 필연성 범주와의 상응성을 밝히고 있는데 다만 그 차이를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즉 본질론에서 현상의 인과적 관계는 한편으로 현상이 직접적인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 관계가 출현한다는 이중성을 지닌 것이었으나, 이제 필연성의 판단 형식에서는 관계의 측면들이 더는 직접성을 지니지 않고 다만 그 관계의 계기로서만 출현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언 판단 형식에서 ‘A가 있으면 B가 있다라’고 하면서, 그 관계만이 명시된 것을 말할 것이다.

이런 필연성 판단 형식에서 가언 판단 형식이나 선언 판단 형식은 더는 존재라는 계사를 통해 판단이 결합하지 않는다. 여기서 계사는 가언이나 선언과 같은 논리적 결합사인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런 논리적 결합사 때문에 일반 논리학은 이런 판단 형식을 추론의 영역에 속하는 복합적인 판단에 집어넣는다. 그러나 헤겔은 이런 논리적 결합사로서 선언이나 가언의 형식은 연언과 부정으로 환원할 수 있고 이 연언과 부정은 판단의 계사인 존재의 의미이므로, 이런 형식도 판단에 집어넣는다.

4)

정언 판단의 형식은 일반적 유가 곧 우연한 개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연한 개체 밑바닥에 일반적 유라는 본질이 있는 한, 우연한 개체들은 관계하고 있다. 이런 관계는 경험을 통해 단계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이 최초로 드러나는 것이 가언 판단 형식이다.

현존 판단 형식에서 술어인 일반성이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발전하는 것이 경험의 발전을 따라 일어났듯이 여기서도 술어인 우연한 개체들 사이의 필연적 연관성이 경험의 발전에 따라 드러난다.

우선 그 관계는 우연한 개체들 사이의 일반적인 관계이다. 이 관계를 통해 정언 판단 형식은 가언 판단 형식으로 이행한다. 가언 판단 형식은 ‘A가 있으면, B가 있다’라는 형식이다. 이런 가언 판단 형식에서 A의 존재는 그 자신의 존재를 넘어서 B의 존재를 의미하므로 A와 B 사이에 필연적 연관이 정립된다.

정언 판단 형식은 하나의 판단이지만, 사실 그 밑에는 실체 전체에 관련된 판단이 전제되어 있다. 정언 판단 형식에서 A의 존재나 B의 존재는 우연적이며 그 밑바닥에는 실체적 연관이 있지만, 이 연관은 사실 무차별한 것의 연관이다. 그러므로 ‘장미는 가시 있는 식물이다’라거나 ‘국화는 형기가 강한 식물이다’라거나, ‘수선화는 우아한 식물이다’라거나 등이다. 이는 무차별한 선언[‘이거나’)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이런 판단 형식은 ‘공허한 형식을 지닌 명제’(논리학 2부, GW12, 79)이다. 이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집단 즉 실체[‘식물’]는 외적이니

반면, 가언 판단 형식에 이르면, A의 존재나 B의 존재는 각기 그 자체로 자립적인 구체적 존재가 아니며 다만 서로 맺고 있는 관계만이 표현된다. 정언 판단 형식에서 감추어져 있던 관계가 여기서 정립되면서 드러난다.

여기서는 A의 존재나, B의 존재는 이런 관계에 내재하는 가능성으로서 주어진다. 즉 A가 만일 존재한다면, 가언 판단의 형식에 따라서 B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가언 판단은 A가 있다거나 B가 있다는 것을 포함하지 않고, 오히려 다만 하나가 있으면 다른 것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양극 자체가 아니라 양극의 연관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정립되며, 차라리 이런 필연성 속에서 각자는 자기에 못지않게 타자를 존재하게 하는 것으로서 정립된다.”(논리학 2부, GW12, 79)

5)

헤겔은 이런 가언 판단 형식에서 계사가 ‘존재’라는 계사가 아니라 논리적 결합사로서 ‘가언’의 형태를 취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가언 판단은 그런 한 차라리 [복합] 명제의 형태를 갖는다. 마치 특칭 판단이 무규정적인 내용을 지닌 것이듯이 가언 판단은 무규정적인 형식을 지닌다. 왜냐하면, 그 내용은 주어와 술어라는 규정 아래서 관계하지 않기 때문이다.”(논리학 2부, GW12, 79-80)

헤겔은 이 구절에서 가언 판단 형식이 복합명제의 형태를 취하는 까닭을 무규정성 때문이라 한다. 앞에서 특칭 판단 형식에서 주어는 몇몇이며, 여기서 정확한 수가 밝혀지지 않아서 무규정적이었다. 가언 판단 형식이 무규정적인 것은 논리적 결합사 가언을 선언으로 전환하면 잘 알 수 있다.

‘P이면 Q이다’라는 것은 ‘P가 아니거나 Q이다(-P or Q)’로 환원된다. 그러면, 여기서 P가 아닌 것은 무수히 많은 것이니, 이런 점에서 헤겔은 가언 판단 형식이 무규정적이라고 한다. 가언 판단 형식은 현존 판단 형식에서 부정 판단 형식이나 반성 판단 형식에서 특칭 판단 형식과 같이 무규정성을 지닌 것이다.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서 계사 존재는 주어, 술어가 한정적일 경우에만 될 수 있다. ‘아니다’, ‘또한’, ‘또는’은 논리적 결합사인데, 주어나 술어가 비한정적일 경우에 적용된다. 그러므로 부정 판단 형식, 특칭 판단 형식, 가언 판단 형식이나 뒤에 나오는 선언 판단 형식은 존재가 아니라 논리적 결합사를 통해 관계를 표현한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5-보편[Universelle] 판단 형식[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5-보편[Universelle] 판단 형식

1)

특징 긍정 판단 형식은 특칭 부정 판단 형식으로 이행하며, 이 특칭 부정 판단 형식은 다시 보편[Universell] 판단 형식으로 이행한다. 헤겔이 말하는 보편 판단 형식은 일반적으로 전칭[Allheit] 판단 형식이라 불리는데, 그 의미는 다르다.

왜냐하면, 전칭 즉 모든 원소의 집합은 여전히 개별자를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보편 판단 형식이라 할 때는 이 전체가 일반적 유로 즉 본질로 규정되면서 하나의 구체적인 개별자가 되기 때문이다.

특칭 판단 형식은 자체 내에 이미 부정성을 지닌 것이므로 즉 ‘몇몇이 그러하다’면, ‘몇몇은 그러하지 않다’라는 것이 전제된다. 부정이 특정한 부정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특칭 긍정 판단 형식에서는 ‘그러한 몇몇’에 대해서 ‘그러하지 않은 몇몇’은 처음에 감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러하지 않은 몇몇’이 특칭 부정 판단 형식을 통해 정립되면서 동시에 ‘그러한 몇몇’과 ‘그러하지 않은 몇몇’이 전체 집합 즉 모두[Allheit]를 이룬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2)

여기서 ‘그러한 몇몇’은 한정적인 집합이지만, ‘그러하지 않은 몇몇’은 비한정적인 집합이다. 그 수는 끝까지 셀 수 없으며 그 전부가 경험될 수 없으니, 전체 집합은 사실 수적으로 무한성을 지닌다.

전체 집합이란 그때까지 그 자신이 경험한 전체를 의미하는 주관적이며 경험적인 일반성이며, 특칭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개별자가 직접적인 것으로 전제되어 있으니, 이런 전체 집합은 개별자에 다만 외면적으로만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객관적 전체 집합에 도달한다는 것은 다만 당위이며 과제이고 실제로 도달하는 것은 무한히 진행하는 악 무한에 지나지 않는다. 전칭 판단 형식은 이런 악무한을 표현하는 형식이다.

“개별자가 직접적인 것으로 전제되고 따라서 눈앞에 있는 것으로 발견되고 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한, 이 개별자에서 반성은 마찬가지로 외면적이다. 왜냐하면, 반성은 이 개별자를 모두로 모아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별자는 이것[Dieses]인 한에서 이런 반성에 대해 전적으로 무차별하므로 일반성과 그런 개별성은 결합되어 통일될 수 없다. 그러므로 경험적으로 주어지는 모두는 과제이며 당위로 머무르니, 그런 당위는 존재로 서술될 수 없다.”(논리학 2부, GW12, 75)

물론, 경험과학에서는 경험적 일반성을 암암리에 객관적 전체 집합으로 가정하기도 한다. 그 전제는 지금까지 밝혀진 것들과 대립하는 성질을 지닌 어떤 것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런 경험적 일반성은 진정한 의미에서 전체 집합 즉 일반적 유라고 할 수 없다.

3)

그런데 헤겔은 이런 경험적 일반성이 일반적 유에 도달할 가능성을 찾는다. 그 가능성을 헤겔은 수학적 귀납법을 통해 설명한다. 이를 헤겔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실상 이항 함수가 이미 범항 함수가 된다. 이런 경우에 그 방법이나 규칙은 하나의 항이 다른 항에 의존한다는 것에만 관계하며, 여러 항이 각자 가지에 앞선 항에 의존한다는 것은 특기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계속해서 하나의 동일한 함수가 밑바닥에 놓여 있다.”(논리학 2부, GW12, 74)

간단히 말해서 임의의 어떤 항(n)에서 P가 성립하고 그다음 항(n+1)에서 마찬가지로 P가 성립하면, 전체에서도 P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헤겔은 이런 경우 P의 집합에 속하는 원소가 진정으로 전체 집합이 아니더라도, P를 통해 규정되는 전체 집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수학적 귀납법에 관해서는 자주 드는 예지만, 도미노 놀이가 거론된다. 임의의 도니노가 넘어지면서 다음 도미노가 넘어진다면, 모든 도미노가 넘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집합 P는 통해 규정되는 일반적 유는 수학적 공간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수학적 귀납법은 양적인 것에서 성립하며, 양적인 것은 일자의 반복이니, 양과 양 사이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이미 전제된다. ‘경우에 따라서’ 즉 양적인 것에 성립하는 수학적 귀납법을 헤겔적 의미에서 일반적 유에도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헤겔적 의미에서 일반적 유는 즉 하나의 본질이 자기를 개체를 통해 실현하는 것이다. 그것은 개체의 재생산을 통해 출현하는 일반적 본질이며, 그러므로 개체에 내재하는 일반적 유이다. 헤겔은 이런 일반적 유가 어떻게 출현하는가를 존재론의 3편 척도 관계에서 보여주었다.

3)

사실 헤겔에서 단칭에서 특칭으로 이행하는 것은 단순히 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과정은 곧 하나의 정량에서 정량의 관계 또는 비례로서 척도가 등장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개별자가 모인다는 것은 단순히 집합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개별자가 모인다는 것은 동시에 서로 관계한다는 것이며 단칭에서 특칭을 거쳐 보편에 이르는 과정은 이런 개별자 관계에서의 변화를 통해 일어난다.

단순한 하나의 정량에 머무르는 것은 그저 개별적으로만 존재하며 집합을 이루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동일한 일자의 반복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동일한 일자는 아무리 많이 있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개별자로서 일자가 존재하는 것이다.

반면, 정량이 서로 관계를 이루면서, 이 척도는 이제 동일한 것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출현하게 된다. 예를 들어 물체에는 비중이나 강도가 서로 다른 것들이 있다. 이런 서로 다른 물체가 비중의 집합이나 강도의 집합을 이룬다.

이처럼 척도가 다른 것은 단순히 수적인 차이 즉 양적인 차이만은 아니다. 두 정량이 관계하면서 양은 다시 질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비중이 다르고 강도가 다른 것은 그것을 통해 여러 가지 성질의 차이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런 비중을 지닌 것의 집합이나 강도를 지닌 것의 집합이 비로소 특칭 판단 형식이 될 수 있다.

나아가서 척도는 하나의 계열을 이루는데, 두 가지 척도 계열이 서로 관계하면서 척도 관계가 이루어진다. 예를 들자면 단백질 복합체와 같은 것이 된다. 이 단백질 복합체는 한편으로는 수평적으로 결합체[펩타이드 결합체]의 계열이 형성된다. 다른 한편으로 단일 펩타이드 결합체의 중심에 수직적인 축이 형성되어 이런 펩타이드 결합체가 사슬을 이루면서 그것에 수직하면서 동시에 평행하는 곁사슬의 계열이 형성된다.

그 결과 이중 나선이 출현하면서 아미노산과 같은 생명체의 근본 구조가 된다. 이런 척도 계열의 복합체 즉 척도 관계는 자기를 재생산하는 가능성을 지니면서 진정한 의미에서 본질이 된다. 이런 본질이 일반적 유를 이룬다.

그러므로 단칭 판단 형식에서 보편 판단 형식으로 이행은 단순히 개별자가 수적으로 증가하는 과정이 아니다. 이는 곧 개별자가 서로 관계하여 정량에서 척도로, 척도에서 척도 관계로 발전하는 과정을 전제로 한다.

“이를 통해 발생하는 일반성이 유이다. 이 일반성은 자기 자신에서 구체적인 것이다. 유는 주어에 내재하지 않으며 또는 개별적인 성질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말해 주어가 지닌 하나의 성질이 아니다. 유는 모든 개별화된 규정성을 그것의 실체적 순전성 속에서 지양한다. 유는 이런 자기와의 부정적 동일성으로 정립되므로 본질적으로 주체이지만, 그 술어에 더는 포섭되지 않는다.”(논리학 2부, GW12, 76)

4)

보편 판단 형식에서 일반적 유는 이렇게 개별자가 독특한 방식으로 관계하는 것 즉 관계 규정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일반성이며, 개별자에 내재하는 본질이다. 이렇게 본질이 실현된 개별자를 헤겔은 개체라 한다.

이런 보편 판단 형식에서 주어인 일반적 유는 속성으로서 술어와 구별된다. 일반적 유는 본질을 말한다. 반면 술어는 지각적 일반성으로서 주어인 개체에 내재하는 것이다. 일반적 유는 두 대립하는 척도 계열의 결합체이므로, 이는 하나의 속성으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이에 대립하는 속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일반적 유는 하나의 속성을 넘어선 것이다. 여기서 판단 형식의 운동이 다시 시작하니, 이 운동은 곧 일반적 유에 적합한 방식으로 술어 즉 본성이 출현하는 것이다. 이런 운동이 필연성의 범주에서 일어나는 판단 형식 운동이다.

“주어가 객관적 일반성[일반적 유]으로 규정되면서 술어는 그런 관계 규정 아래 또는 총괄하는 반성 아래 귀속하는[Subsumiert] 것을 중지한다. 그런 술어는 이런 일반성에 대립하여 오히려 하나의 특수자다. 주어와 술어의 관계는 전도되며 그런 한 [반성] 판단 형식은 우선 지양된다.”(논리학 2부, GW12, 76)

앞에서 부정적 무한 판단의 형식이 긍정적 무한 판단 형식으로 바뀌면서 이 긍정적 무한 판단이 곧 단칭 판단 형식이 되었다. 긍정적 무한 판단 형식이나 단칭 판단 형식은 같은 것이지만, 그것이 언급되는 맥락이 다르다.

마찬가지로 객관적인 전체 집합으로서 전칭 판단 형식이 보편적 판단 형식으로 바뀜으로써 이 보편적 판단 형식이 곧 필연성 판단 형식의 출발점인 정언 판단 형식이 된다. 양자는 같은 것이지만, 맥락이 다르다. 보편 판단 형식은 주어가 반성하여 도달한 결과를 의미하며, 정언 판단 형식은 그것의 술어가 하나의 특수성에서 실체라는 집단에 도달하는 맥락에서 언급된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4-반성[양] 판단 형식에 관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14-반성[양] 판단 형식에 관해

1)

현존(질) 판단 형식의 끝에 부정적 무한 판단 형식이 긍정적 무한 판단 형식으로 이행한다. 이 긍정적 무한 판단 형식이 곧 반성 판단 형식 또는 양의 판단 형식의 첫 번째 형식인 단칭 판단 형식이다.

반성 판단 형식에서 주어는 여전히 그대로이다. 그것은 손으로 지시되는 어떤 개별적인 것이며, 술어 규정성의 밑바닥에 놓여 있는 것이다. 술어는 추상적인 일반성에서 자기 관계하는 일반성 즉 개별성(단순성)으로 이행했다.

이 개별성이란 곧 주어에 내재하는 필연적 속성을 의미한다. 이 속성은 내포에서는 단순하며 개별적이지만, 외연에서는 하나의 개별자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개별자 일반 즉 유에 속하는 일반성이다. 흔히 이를 추상적 공통성이라고 한다.

헤겔은 이를 “구별된 것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로 된 것으로서 결합한 일반자” 또는 “다양한 성질이나 실존의 상호 결합[Sich-Zusammennehmen]”으로 규정한다. 더 간단히 “결합한 일반성”, “반성된 그 자체 존재”이다. 예를 들자면, “이 사람은 죽는다”라든가 “이 물체는 경도가 강하거나 탄성이 크다”(논리학 2부, GW12, 71-72)와 같은 명제이다.

이런 일반성은 아직 사물에 고유한 본성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고 이른바 지각적 일반성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일반성(내적 일반성) 아래에는 여전히 직접성(추상적 일반성, 질)이 전제되어 있다.

“사실 이런 일반성은 더는 질적 판단에 속하는 추상적 일반성은 아니지만, 여전히 그 일반성이 유래한 직접적인 것에 대해 관계하여 그런 직접성을 부정하기 위해 자기 밑바닥에 놓는다. 개념은 현존을 규정하여 관계 규정으로 즉 다양한 실존 속으로 그 규정 자체가 펼쳐지는 것[공통성]으로 된다. 그 결과 사실 진정으로 일반적인 것은 내적인 본질이기는 하지만, 아직 그 본질은 현상 속에 있으며 그것이 지닌 상대적인 성격이나 그것이 징표에 그친다는 사실 때문에 그것은 여전히 그 자체로 자기에게 나타나는 일반성은 아니다.”(논리학 2부, GW12, 71)

2)

현존 판단 형식에서 운동은 술어 편에서 일어났으며 외적인 일반성이 내적인 일반성으로 발전했으니, 이는 곧 내재[화]의 운동이다. 이제 반성 판단 형식에서 운동은 반대로 술어의 개념 규정성은 고정되어 있고 주어에서 개념 규정성이 변화하게 된다.

반성 판단 형식의 처음에 등장한 것이 단칭 판단 형식인데, 여기서 주어는 개별자이지만, 술어는 여러 사물에 속하는 공통성, ‘그 자체 존재’이기에 주어인 개별자는 외연적으로는 술어인 ‘그 자체 존재’ 아래서 하나의 ‘실존하는 것이며 현상하는 것’ 즉 ‘우연적 존재’이다.

현존 판단 형식에서 술어는 외연적으로는 일반적이지만, 내포적으로는 개별적이어서, 그것은 ‘어떤 일반성’ 즉 속성이며 개념 규정상으로는 특수성이다. 마찬가지로 이제 반성 판단 형식에서 주어는 외연적으로 개별적이지만, 내포적으로는 여러 속성의 결합인 일반성이니, 이런 점에서 마찬가지로 특수성이다. 그것은 ‘임의의 어떤 개별자’ 즉 여럿[Eininge]이다.

그 때문에 반성 판단 형식에서 운동이 시작된다. 여기서 “술어가 밑바닥에 놓여 있는 것이며, 주어는 이 밑바닥에 놓인 것[술어]에 대해 측정되어야 하며, 그것에 상응하게 규정되어야 한다.”(논리학 2부, GW12, 72) 이 운동은 이제 주어의 편에서 일어나는 운동이며 이 운동을 통해 주어는 개별자를 넘어서 특수성을 거쳐 일반적인 유로 발전한다. 주어가 일반적 유로 발전하는 것은 곧 외연에서 개별자가 일반적 유에 포섭되는 운동이다.

이렇게 주어가 일반적 유에 이르게 되면, 보편 판단 형식이 성립하게 된다. 단칭 판단 형식에서 주어인 개별자는 사실 내포적으로는 이미 일반자인데, 이 일반자가 곧 여러 대립하는 속성의 상호 통일이며, 자기를 통해 개별자를 산출하는 본질을 의미한다.

이 본질이 보편 판단 형식에서 자립적으로 출현하면서 주어인 일반적 유가 된다. 이 일반적 유는 “현상의 다양성을 거쳐나가면서도 자기를 유지하는 본질 규정”(논리학 2부, GW12, 72)이며, 거꾸로 개별자는 이 유가 실현된 것일 뿐이다.

반성 판단 형식의 끝에 주어가 일반적 유로 규정되면서 주어와 술어의 균열이 다시 출현한다. 술어는 여전히 내적 필연성이니, 아직 주어의 일반적 유에 해당하는 본질적인 것에 이르지는 못한다. 그 때문에 또다시 새로운 판단 형식 운동이 생겨난다. 그것이 필연적 범주에서의 운동이다.

3)

반성 판단 형식에서 이런 운동은 객관 논리학에서 양의 범주가 발전하는 것과 상응한다. 양의 범주는 정량에서 양의 관계인 척도로, 그리고 다시 척도가 서로 관계하는 척도 관계로 발전한다. 이런 발전 끝에 마침내 본질이 출현한다.

양의 범주의 이런 발전을 반성 판단 형식의 발전에 비추어 보면, 처음 정량은 단칭 판단 형식에 해당한다. 정량이란 일반자인 양적인 것이 실현된 개별적인 것이다. 그것은 크기를 지닌 개별자거나, 무게를 지닌 개별자일 뿐이다.

정량의 관계로서 척도는 양적인 것에서 처음 질적인 것을 출현하게 한다. 이 질은 이 양적인 것을 특정하게 만드는 것이니, 이런 특정한 것들이 특칭 판단 형식의 주어를 이룬다. 마침내 척도 관계에 이르면, 이 척도 관계는 개별자를 재생산하는 본질이다. 그러므로 척도 관계는 일반적 유를 이루며 보편 판단 형식의 주어가 된다.

반성 범주에서 주어가 개별성에서 특칭으로 그리고 보편으로 발전하는 것은 단순히 주어의 외연에서 양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오히려 자연에서 양적인 것이 질적인 발전이 일어나는 것에 상응한다.

모든 양적인 것이 이렇게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양적인 것 가운데 일부만이 즉 척도만이 특칭 판단 형식에 이르며, 그 가운데서도 다시 척도 관계 또는 유기체적 관계를 지닌 것만이 보편 판단 형식에 이른다.

4)

반성 판단 형식의 운동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이 단칭 판단 형식이다. 이 단칭 판단 형식의 형식은 “개별자는 일반자이다”(논리학 2부, GW12, 72)인데, 긍정 판단 형식의 형식과 유사하지만, 의미는 다르다. 긍정 판단 형식의 형식에서 술어는 추상적 일반성이지만, 단칭 판단 형식에서 술어는 반성된 일반성, 즉 내재하는 필연적 속성을 의미한다.

이런 단칭 판단 형식에서 주어는 이미 반성된 일반성에 속하는 개별자이므로, 주어는 단순한 지시어로 지칭되지 않으며 지시되는 동시에 그것의 일반성 유가 표시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단칭 판단 형식의 주어는 예를 들어 어떤 고유한 이름인 ‘카이유스’가 아니라 ‘카이유스와 같은 것’ 즉 ‘이 사람’이어야 한다.

단칭 판단 형식에서 지시사가 일반적 유를 가리킨다는 것은 단순히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결과만이 아니라, 단칭 판단 형식의 형식 자체에 의해서 즉 술어가 구체적 일반성이니까 주어는 그런 일반성의 예가 되므로 그런 내용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단칭 판단 형식에서 아직 개별자가 속하는 일반적 유가 직접,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 일반적 유는 다만 간접적으로만 또는 모호하게만 자기를 드러낼 뿐이다. 그러므로 ‘이것[사람]은 가사적이라’고 할 때 ‘이것’에는 이미 ‘사람’이라는 일반적 유가 들어 있지만, 이는 암시될 뿐이다.

“따라서 몇몇에는 더 일반화하는 내용이 부가되니, 말하자면 인간이나 동물 등이다. 이것은 경험적인 내용일 뿐만 아니라 판단의 형식상 규정된 내용이다. 이 내용은 즉 일반적인 것이니, 왜냐하면 몇몇이라는 것은 일반성을 포함하고 동시에 반성된 개별성 밑바닥에 놓여 있으니 이 일반성은 개별자로부터 분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좀 더 상세하게 보자면, 반성된 개별성은 또한 일반적 본성이거나 인간이나 동물의 유이므로 이런 일반성은 반성 판단의 결과를 예고한다.”(논리학 2부, GW12, 73)

5)

이런 단칭 판단 형식에서 주어인 개별자는 이미 그 자신이 어떤 개별자의 집단, 일반적 유에 속하는 하나일 뿐이다. 이 개별자는 다만 그 유에 속하는 원소의 한 가지 예로서만 언급될 뿐이다. 그러므로 단칭 판단 형식은 사실 이미 특칭 판단 형식이다.

‘이것은 빨갛다’라는 질적 긍정 판단 형식 형식에서 술어는 사실 개별적이다. 그 ‘빨간색’은 이것이 지닌 ‘개별적인 빨간색’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추상적 일반성은 외적인 일반성이므로 동시에 추상적 개별성이다. 그러나 단칭 판단 형식에서 술어는 이미 반성된 일반성이다.

술어인 그 반성된 일반성은 주어인 개별자에서 실현되지만, 이 일반성이 이미 여럿에 속할 가능성을 지닌 내재적 일반성이므로 다른 개별자에 속할 가능성이 열려 있다. 그러므로 반성된 일반성이 실현되는 집합은 이미 여러 개별자다.

예를 들어 ‘이 사람은 죽는다’라는 단칭 판단 형식에서 ‘죽는다’는 술어는 내재적 일반성이다. 그러므로 ‘죽는 것’은 이미 여러 존재자에 공통적인 것이다. 따라서 주어인 개별자 즉 ‘이 사람’은 술어인 ‘죽는 것’이 포함하는 원소의 한 예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단칭 판단 형식은 특칭 판단 형식으로 이행한다.

이미 단칭 판단 형식에서 주어인 ‘이것’은 일반적 유라는 것이 암시되지만, 거기서는 아직 정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특칭 판단 형식에 이르면 주어인 ‘몇몇’은 어떤 일반적 유에 속하는 몇 가지임이 정립된다. 그러므로 특칭 판단은 단순히 ‘몇몇’이라 할 수 없고 이미 어떤 유가 전제된다. 즉 ‘몇몇 사람’이든가 ‘몇몇 사물’이든가 등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이것[Dieses]은 본질적으로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그 일반적 형식에 따라서 본다면, 일반적으로 말해 긍정 판단인 것은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러나 반성 판단은 단순히 긍정적인 판단은 아니므로 부정은 술어에 직접 걸리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술어는 주어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어가 가변적인 것이며 규정돼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부정 판단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의 이것이 아닌 것이 반성의 일반자이다.’”(논리학 2부, GW12, 72-73)

이런 특칭 판단에서 주어가 개별자에서 여러 개별자로 확대했을 때, 이 여러 개별자는 단순히 아무 개별자나 끌어모으면 되는 것은 아니다. 원숭이, 장미, 종이… 등 서로 무관한 것을 아무리 끌어모은다고 해도 특칭 판단이 되지 않는다.

특칭 판단이 되려면 술어인 일반적인 속성을 지닌 것이어야 하며, 이런 일반적 속성을 지닌 것이기 위해서는 양적으로 단순한 정량이 아니라 정량의 관계를 통해 출현하는 척도를 지닌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단칭 판단 형식에서 특칭 판단 형식으로의 이행은 이런 정량의 발전에 따른 것이다.

6)

특칭 판단 형식은 단칭 판단 형식에 이미 잠재된 특칭성이 정립된다. 특칭 판단 형식의 주어는 특수성이다. 그러므로 그 형식은 ‘특수성이 일반성이다’라는 형식이다. 여기서 특수성은 개별자가 몰락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자가 유지된 채로 그것을 확대하는 것이다. 이런 개별성의 확장은 외적 반성에서 일어나며, 예를 들자면 이 특수성은 ‘몇몇[Einiges]’이다.

특칭 판단 형식의 형식은 ‘몇몇의 것[사람이나, 사물]은 그러하다[속성]’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미 주어인 ‘몇몇’은 일반적 유를 전제로 하고 나아가서 그런 일반적 유의 일부라는 사실이 암암리에 전제되어 있다.

그러므로 특칭 판단 형식에서 ‘몇몇의 것이 그러하다’라면, 그 판단 형식은 이미 자기 속에 ‘[앞의 것과 다른] 몇몇의 것은 그러하지 않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즉 특칭 긍정 판단 형식은 특칭 부정판단 형식을 함축하며,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몇몇 사람이 행복하다면, 이는 몇몇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 함축된다.

여기서 부정은 계사에 걸려 있지만, 전적인 부정이 아니다. 그것은 현존 판단 형식에서와 마찬가지로 특정한 부정이다. 그러나 현존 판단 형식 부정이 술어에 걸린다. 반면, 여기서는 부정이 주어에 걸려 있다. 그러므로 특칭 부정 판단 형식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앞의 것과 다른] 몇몇 개가 아닌 것은 그러한 것이다’라고 해야 한다. 여기서 주어에 걸린 부정이 계사로 이전되면서, 특칭 부정 판단의 형식 ‘몇몇의 것은 그렇하지 않다’라는 형식이 만들어진다.

“몇몇의 개별자는 반성에 속하는 일반자다라는 [특칭] 판단은 처음에는 긍정적인 판단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판단은 마찬가지로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몇몇이라는 것이 일반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 일반성에서 보자면 이 몇몇은 포괄적인 것으로 고찰될 수 있을 것이지만, 이 몇몇이 특수성인 한에서 이 몇몇이란 그런 일반성에 마찬가지로 적합하지 않다. 주어가 단칭 판단의 이행을 통해 획득했던 부정적 규정은 위에서 제시된 것처럼 또한 관계의 규정 즉 계사의 규정이다.”(논리학 2부, GW12, 73)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9(IX)권 후반부 ~ 10(X)권[건국대학교 다자인多字人]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9(IX)권 후반부 ~ 10(X)권

 

 

건국대학교 다자인多字人

 

 

  1. <형이상학> 9(IX)권 후반부(9장~10장)

앞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태가 정의상으로, 시간상으로, 존재론적으로 가능태에 앞섬을 기술했다. 9장에서는 가치의 측면에서도 현실태가 가능태보다 더 우월함을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현실적인 활동은 훌륭한 능력보다 더 좋고 고귀하다. 왜냐하면 어떠한 능력을 가진 것은 반대의 능력 또한 함축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것은 처음부터 현실태로 있으므로, 나쁜 것이 포함될 수 없다.

10장은 있음과 참 간의 관계를 다룬다. ‘있는 것’과 있지 않은 것’은 참과 거짓의 의미로 쓰일 수 있다. 참과 거짓의 문제는 대상들의 결합과 분할에 따른 것이다. 결합된 것을 결합되었다고 하는 사람은 참을 말하지만, 대상들과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잘못을 범하고 있다. 따라서 판단은 사물들에 대한 결합과 분리의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과 거짓은 무언가를 결합하거나 분리할 때 발생하는 복합적 판단이다. 따라서 단순한 것은 참 거짓의 구조에 속하지 않는다. 합성되지 않은 실체의 경우에는 모두 가능적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있기에 잘못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1. <형이상학> 10(X)권(1장~10장)

 

10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 개념으로부터 있음, 동일, 다름, 차이 등의 개념들을 구체화한다. 하나에는 크게 4가지 뜻이 있는데, 이는 각각 본성적으로 연속적인 것, 전체를 이루는 특성한 형상, 수적으로 분할불가능한 개별자, 그리고 종적으로 분할불가능한 학문적 하나이다. ‘하나이다’는 ‘분할불가능하다’는 것, 무엇보다도 각 유, 주로 양의 첫째 척도임을 뜻한다. 따라서 양을 갖는 것은 모두 하나에 의해서 인식된다. 그러므로 하나는 수인 한에서 수의 원리이다. 모든 것에서 척도와 원리는 하나이자 분할불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높은 수준에서 ‘하나임’은 일종의 척도이며, 따라서 무제한적인 뜻에서나 하나인 한에서 하나는 분할불가능하다.

 

2장에서는 하나와 있음의 관계성을 다룬다. 하나와 같은 보편자는 실체일 수 없으며, 있는 것 자체도 여럿과 떨어져 있는 하나로서 실체일 수 없다. 왜냐하면 있는 것과 하나는 가장 보편적으로 모든 것에 대한 술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있는 것’과 ‘하나’는 똑같이 여러가지 뜻으로 쓰이지만 같은 개념은 아니다. 그럼에도 어떤 점에서는 ‘있는 것’과 ‘하나’가 동일한 것을 가리키는데, 이 둘은 여러 범주들에 대해 똑같이 적용되고 어떤 범주 안에 있지도 않다. 따라서 ‘하나이다’는 ’어떤 것이다’와 다른 것이 아니다.

 

3~5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 개념을 통해 여럿, 동일, 다름, 차이, 모순 개념을 구체화한다. ‘하나’와 ‘여럿’은 분할가능성을 기준으로 하여 대립한다, 분할되어 있거나 분할가능한 것은 다수이며. 분할불가능하거나 분할되지 않는 것은 하나라고 불린다. 동일은 하나에 속하고, 다름과 비동일은 다수에 속한다. 이때 ‘아님’은 ‘동일함’과 대립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서로 동일하거나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차이’와 ‘다름’은 서로 다르다. 차이가 있다는 것은 바로 그 기준이 되는 동일한 것이 먼저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차이는 동일한 종이나 유 안에서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반대 또한 일종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차이는 많고 적음의 정도를 가질 수 있는데, 이 중 가장 큰 차이를 ‘반대’라고 한다. 종적 차이는 반대자들이 극단을 형성하며, 극단에 있는 것들 사이의 간격이 가장 크므로 종차의 간격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차이가 상반성이라면 반대로서의 마지막 차이 또한 그러하다. 따라서 여럿은 하나에 반대되는 것일 수 없다. 여럿은 하나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많은 하나들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반면 모순은 가장 강한 결여다. ‘A이다’와 ‘A가 아니다’라는 관계는 동시에 성립할 수 없으므로, 여기에는 중간이 없다. 모순의 중간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반대자들 사이에는 중간이 있을 수 있으므로 모순과 반대는 같지 않다.

 

 

6장에서는 하나와 여럿 사이의 대립관계에 대해 다룬다. 하나와 많음이 무제한적으로 대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하나도 그저 수가 적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많음에 대립하는 것은 수가 적은 것인데, 다수인 둘의 경우에도 수가 적은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수가 적은 것이 다수일 수 있다면, 그리고 많음이 하나와 무제한적으로 대립한다면 하나도 다수에 해당한다는 의미가 되어버린다. 따라서 하나는 무제한적으로 많음과 대립한다고 볼 수 없다. 또한 많음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데, 첫째는 양이 많은 것이고, 둘째는 수가 많은 것이다. 이 중 분할가능한 것들에 대해서는 수가 많다는 의미만이 사용되는데, 이 경우에만 많음은 하나와 대립한다. 왜냐하면 수가 많음을 표현할 때, 하나는 많음을 이루는 수들에 대한 척도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와 많음의 대립은 척도와 척도에 의해 측정되는 것 사이의 대립과 같다.

 

7~9장에서는 반대관계에 대해 다루고 있다. 반대자들은 그 사이에 중간자가 있는 것이다. 이 중간자들은 필연적으로 반대자들로부터 유래해야 한다. 이에는 3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중간자는 중간자를 갖는 것들과 동일한 유에 속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중간자는 변화하는 것이 변화의 과정 중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중간자는 어떤 대립자들 사이에 있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한쪽의 대립자를 출발점으로 해서 이 대립자들의 본성에 따르는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중간자들이 동일한 유이고 반대자들 사이에서 성립한다면, 중간자는 필연적으로 반대자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반대자들은 합성체가 아닌 원리들인 반면, 중간자들은 한쪽의 반대자에서 다른 쪽으로 변화하는 것이므로 양쪽의 반대자들의 일부를 갖는다. 따라서 중간자는 모두 합성적이며 반대자들로 이루어진다.

 

종이 다른 것은 어떤 유 안에서 서로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동일한 것 안에 서로 다른 둘에 대한 술어와 부수적인 의미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 유이기 때문이다. 이 서로 다른 것은 하나의 공통적인 것 안에 있으므로 이 다름은 같은 유에 속한 다름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반대일 것이다. 왜냐하면 반대자들은 동일한 유에 속하기 때문이다. 즉, 종적인 차이가 있다면 그 둘은 같은 유에 속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반대 중에 종을 나누는 반대와 종을 나누지 않는 반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차이는 반대가 종을 나누는 그 유의 고유한 속성인지 아닌지에 따라 구별된다고 설명한다. 서로 다른 이름이 붙거나 복합체의 경우에도 반드시 이들이 각각 다른 종에 속하는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정식에서 반대가 있음이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각 개체의 경우에는 최종적이고 불가분적인 것이기 때문에 하위 종으로 나뉘지 않는다.

 

10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불멸하는 것과 가멸하는 것이 반대자가 아니며 서로 다른 유에 속함을 밝힌다. 반대자들은 서로 형태가 다르고, 가멸적인 것과 불멸적인 것은 서로 반대자이기 때문에 가멸적인 것과 불멸적인 것은 그 부류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가멸성과 불멸성은 부수적인 뜻에서 다른 것에 속할 수 없는데, 부수적인 뜻에서 소멸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멸성과 불멸성은 그것이 속하는 대상의 필연적으로 속한다. 또한 가멸적인 것에 있어 가멸성, 불멸적인 것에 있어 불멸성은 그것의 실체이거나 실체 안에 속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둘 모두 어떤 것 안에 필연적으로 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멸적인 것과 불멸하는 것은 대립적인 서로 다른 실체 안에 속하는 것으로 드러나므로, 둘은 서로 부류가 다를 수밖에 없다.

 

(끝)

『논어』 속 이상적 인간상의 비교 (2) [건국대학교 논어 강독팀]

<논어> 속 이상적 인간상의 비교

—인자(仁者)와 지자(知者) 그리고 군자(君子)를 중심으로—

 

건국대학교 동양철학전공 석사과정 오서진

 

 

(이어서)

 

 

2.2. 인자(仁者)와 지자(知者)

일반적으로 인자는 어진 사람, 지자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풀이되며 덕목의 종류만 다를 뿐 ‘어떠한 덕목을 갖춘 자’라는 점에서 인자와 지자는 동일하다. 그리고 한국어로 ‘어질다’와 ‘지혜롭다’는 엄밀하게는 다르겠으나 의미상 상당 부분 겹치는 부분이 있어 보인다.

인자와 지자에 대한 궁금증은 앞선 「옹야」(雍也) 편의 인자와 우물의 예시 구절과 연결된다. 앞선 구절에서 인자는 단순히 맹목적으로 인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리 분별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즉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이해하는 상황 파악 능력과 외부에 휘둘리지 않는 판단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파악 능력과 판단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의 속임에 쉽게 넘어가고, 재아의 말대로 인을 찾기 위해 우물 안으로 들어가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자가 답하길 군자(인자)는 ‘남에게 속을 수는 있어도 그로 인해 부덕한 행위를 하지는 않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인자는 덕을 추구하면서도 사리 분별을 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갖춘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자는 곧 지자인가? 인자와 지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옹야」(雍也) 편에서는 인자와 지자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지자(知者)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한다. 지자는 활발하고 인자는 고요하다. 지자는 즐겁게 살고 인자는 오래 산다.”

 

공자에게 지자는 물을 좋아하는 이미지인 듯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논어 내에서 물에 대해 언급한 구절은 거의 없으며 물의 특성에 대한 언급 역시 보이지 않는다. 대신 지자에 대해서는 몇몇 구절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지(知)에 대한 언급은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덕목으로서 지(知)는 단순히 정보나 지식의 보유를 넘어서 그것을 실생활에 적절히 적용하고 활용할 줄 아는 단계까지도 포섭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지자는 단순히 박식한 사람이 아니라 지식을 축적하고 활용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위 구절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인지와 지자를 묘사하는 내용은 「리인」(里仁) 편에도 등장한다.

 

공자 초상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불인(不仁)한 사람은 곤궁한 데 오래도록 살지 못하며, 안락한 데 오래도록 살지 못할 것이다. 인자(仁者)는 인을 편하게 여기고, 지자(知者)는 인을 이롭게 여긴다.”

 

앞선 「옹야」(雍也) 편의 구절에서 인자는 오래 산다고 언급한다. ‘수(壽)’에 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으나 전반적으로 인자는 안정적이고 흔들리지 않는 이미지인 듯하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누구보다 인을 잘 실천하기로 알려진 안회(顔回)의 경우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즐거움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안회가 곤궁한 상황을 잘 견딜 수 있던 이유가 인에 있다면 인은 수용 혹은 포용에 관한 덕목일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지자라면 똑같은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까? 아마도 인자와 마찬가지로 지자 또한 곤궁에 처했어도 근심하지 않고 삶을 유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결과는 비슷해도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접근 방식에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인자가 상황에 녹아드는 방식이라면 지자는 상황에 따른 합리적인 대응법을 도출하는 방식이다.

인자가 인을 편하게 여기는 까닭은 인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아니라 삶의 방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의식하지 않아도 호흡하고 눈을 깜빡이는 것처럼 인자에게 인은 말 그대로 숨 쉬듯 자연스러운 것이다. 반면 지자에게 인은 여러 가능성 중 하나이다. 위 구절에서 지자는 인을 이롭게 여긴다고 하지만, 인보다도 더 합리적인 대안이 있다면 지자는 인을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인자와 지자의 차이는 다름 아닌 삶의 모습 그 자체에 있을 것이다. 인자가 좋아하는 산은 작은 요소들이 수없이 모여 거대한 하나를 이루며 그 모습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인자의 삶은 짧은 시간과 작은 사건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꾸준한 실천을 통해 가꾸어지며, 그렇게 해서 쌓인 경험들은 서로 단단하게 연결되어 쉽게 모습을 바꾸거나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고 해서 산이 되지 않으며, 한 그루의 나무가 없다고 해서 산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지자가 좋아하는 물은 고정되지 않고 붙잡히지 않으며 변화무쌍하다. 그러나 물은 일정한 길을 터주면 그 길을 따라 흐르고, 결국에는 한곳으로 모인다. 지자의 삶은 얽매임이 적고 변하기 쉽지만, 그만큼 적응에 능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을 것이다. 인자, 지자에 대한 공자의 비유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는 없으나 공자가 두 인간상을 구분한 것은 두 개가 완벽히 겹치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3. 결론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자와 군자의 관계이다. 인자와 군자는 모두 유가의 바람직한 인간상이자 추구해야 할 인간상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러나 인자가 인(仁)의 덕목을 갖춘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군자는 여러 덕목을 갖추어야 할 사람으로, 자신을 단속하는 것은 물론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단속할 책임과 역할을 진 위치에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따라서 군자는 인자에 비해 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다. 비록 인자와 군자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점은 군자에게 인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이다. 군자라면 응당 인을 품고 그와 함께 살아야 한다. 인자가 곧 군자는 아니지만, 군자는 인자의 면모 또한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어쩌면 인자는 잠재적인 군자일 수도 있겠다. 이에 관해서는 다른 기회에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둘째, 인자와 지자의 관계이다. 인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 인자와 지자는 구분된다. 인자는 인을 삶의 방식(태도)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인자에게 인을 실천하는 것은 계산에 의한 것이 아니며 더 큰 이익을 위해서 또는 강요를 받아서도 아니다. 상대방을 진심으로 대하고 상대의 마음에 다가가려고 애쓰는 태도가 체화된 사람이 인자이다. 반면 지자에게 인은 유용한 수단이다. 기본적으로 지자는 지적 호기심이 강하고 그것을 채우는 데 능하다. 또한 지식을 쌓는 데 그치지 않고 실생활에 잘 적용하며 문제해결 능력이 뛰어나다. 인을 삶의 구심점으로 살아가는 인자와 달리 지자는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며 인은 그 가능성 중 하나이다. 섣부른 결론을 내리자면, 지혜로운 인자와 어진 지자는 있을 수 있지만, 인자이면서 동시에 지자인 사람은 있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인자와 지자는 삶의 방식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인자는 넓은 외길을, 지자는 좁지만 여러 갈래의 길을 걷는다. 그렇다고 해서 인자와 지자가 대립하거나 대척하는 관계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논어에서 논의된 맥락에 따르면 두 인간상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

이상으로 인자, 지자, 군자에 대한 나름의 소견을 정리해 보았다. 글을 매듭지을 때가 되어서야 논의의 엉성한 부분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인지와 군자의 관계 그리고 인자와 지자의 관계를 분석해 보았는데, 군자에 대응하는 인자와, 지자에 대응하는 인자는 서로 다른 맥락 속에서 의미를 구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같은 개념이라도 맥락과 의도에 따라 함축하는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다시 배운다. 또한 큰 개념들을 다루는 과정에서 섬세하게 논의되지 못한 내용이 많아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유가의 핵심 개념인 인(仁)을 한정된 맥락 속에서 좁은 의미로 해석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부족한 부분은 앞으로의 활동을 통해 보완해 나가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 인과 의에 관한 맹자의 구절을 소개하며 마무리한다.

 

“인(仁)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요, 의(義)는 사람의 바른 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