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하는 것에 관해(2): 지속에서 힘으로, 다시 본질로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지속하는 것에 관해(2): 지속에서 힘으로, 다시 본질로
1)
양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은 다르다. 추상적인 것은 일반적인 것이지만, 양적인 것은 하나에서 나온다. 이 하나는 대립물의 통일이다. 그러므로 양적인 것은 하나와 여럿, 연속과 불연속의 통일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연속과 하나만을 진정한 실재로 인정하고 불연속과 여럿은 가상으로 간주했다. 데모크리투스는 연속과 하나의 이면에 불연속과 여럿이 있으므로, 양적인 것에 크기의 차이가 있다고 보았다. 그 결과 원자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이는 거꾸로 불연속적인 여럿도 단순히 부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그 때문에 허공의 실재 가능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데모크리투스는 결국 양적인 것의 이중적 측면을 인정하면서 이중적 측면을 각기 원자와 공간에 나누어서 할당했다. 그 결과 불가분적 원자의 이면은 여럿 즉 크기 차이를 지닌 것이며, 텅 비어있는 공간의 이면은 하나의 연속성을 지닌 실재가 된다. 원자든 허공이든 각자 대립의 통일이 된다.
그러면, 데모크리투스야말로 헤겔적인 변증법의 선구자가 아닌가? 그런데도 일반적으로는 원자와 허공을 서로 단적으로 대립하는 측면에서 즉 연속과 불연속, 실재와 공허로만 보는데, 그러면 데모크리투스의 철학 전체가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2)
양적인 것이 지닌 이중적 측면을 분리해서 따로 놓는 것은 베르그송도 마찬가지다. 베르그송은 제논의 역설에 관한 연구를 통해 연속과 하나를 진정한 실재로 보면서 불연속과 여럿은 가상으로 보는 관점을 받아들인다.
그는 이미지와 관념을 구분한다. 우리의 의식이 지닌 관념은 여전히 여럿이며 불연속적인 것이니, 그는 그런 의식적 관념에 더 기초가 되는 원초적인 관념 즉 직접적인 관념 즉 이미지가 있다고 보면서 이런 원초적, 직접적 이미지는 진정한 실재로서 연속적이며 하나라는 특성을 지닌다고 본다.
이미지가 지닌 이 연속적 하나의 측면은 이미지가 지닌 강도 또는 충만성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전통적으로 물질적인 것이 지닌 충만성을 그는 이미지에 부여하니, 이제 이미지가 곧 물질적인 것이 된다.
의식적인 관념은 진정한 실재로서 원초적 이미지를 선택적으로 추상화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니 공간적인 것이다. 이런 공간적인 것은 여럿이며 불연속적이니, 이런 측면은 흔히 관념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차이는 공간적인 차이다.
이런 관념의 공간적 차이가 의식 바깥에 투영되면서 우리가 흔히 현상 세계라고 말해지는 세계가 만들어진다. 그것은 마치 영화 속에서 이미지가 실재하는 현실인 것처럼 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공간적인 특성을 보여주지만, 진정한 실재의 세계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미지 역시 의식 바깥에 투영될 수 있다. 이렇게 이미지가 투영된 세계가 진정한 물질 즉 생명의 세계이다. 이 생명은 연속적이며 하나인 세계다. 전 우주는 하나이고 연속적이다.
3)
그런데 베르그송조차도 연속과 하나의 측면과 불연속과 여럿의 측면이 서로 이면을 이룬다는 점을 부정할 도리가 없었으니, 결국 진정한 이미지는 원자처럼 연속적인 하나이면서도 개체적[individual]인 차이를 지니는데, 그에게서 이런 차이는 데모크리투스처럼 양적인 차이가 아니라, 라이프니츠가 말한 것처럼 표상의 차이, 질적 차이에 해당한다.
그것은 불연속적이며 여럿인 다양한 관념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그것이 선택적으로 추상화된 것이더라도 그 출발점이 연속적이고 하나인 이미지이니 여기서 공간적인 관념조차 연속적이고 하나인 측면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 관념의 두터움, 무게, 편집적인 고정성이 공간적인 측면이라면, 관념의 유동성, 빠른 질주의 본능이 그 지속성의 측면이 아닐까?
결국, 베르그송조차 연속과 불연속, 하나와 여럿의 이중성, 양면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런 점에서 데모크리투스와 마찬가지다. 다만 데모크리투스가 원자라고 말한 것을 베르그송은 이미지라고 말했을 뿐이며 데모크리투스가 의식이 아닌 물질의 세계에서 물질과 공간을 구분했다면, 베르그송은 관념의 세계에서 원초적 관념 즉 이미지와 파생적 관념을 구분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베르그송과 라이프니츠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베르그송의 이미지는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다. 그것은 연속적이며 하나 즉 총체적인 것(또는 지속)이며, 동시에 개체적인 것이고 질적 차이(또는 표상의 차이)를 지닌다.
4)
실재의 두 측면은 양면을 이루니 이 양면은 통일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은 없는가? 데모크리투스나 베르그송처럼 결국 양면성을 서로 다른 것으로 나누는 방식 외에 다른 길은 없는가? 여기서 힘이라는 개념을 끌어들이면 어떻겠는가?
사실 베르그송 자신이 이미 힘을 끌어들인다. 즉 ‘엘랑 비탈’이다. 이 생명의 비약적 힘은 새로운 질을 창조하는 힘인데, 이는 질적 차이인 한에서 비약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이 힘은 하나로 통일된 연속적인 힘으로 우주 만물에 충만한 하나의 생명력이다.
베르그송 철학에서 연속과 통일이 질적 차이를 지닌다는 데서 필연적으로 전제될 수밖에 없다. 질적 차이가 연속되려면 이런 비약하는 힘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이 말한 이미지의 세계가 물질의 세계에 투영되면서 엘랑 비탈의 생명 세계가 이루어진다. 엘랑 비탈은 곧 이미지의 힘일 것이다.
그러나 베르그송에서 불연속적인 여럿 역시 자기의 힘을 지닐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것은 연속적이고 하나인 것을 오히려 분열시키고 여럿으로 만드는 힘이다. 왜, 베르그송은 엘랑 비탈에 반대되는 고정시키고 추상화하는 힘을 생각하지는 못하는가? 이런 고정시키고 추상화하는 힘은 지성의 힘이라 여겨지는데, 이미지의 힘에 대응하는 것이 엘랑 비탈이라면, 이 지성이 힘에 대응하는 물질적 세계의 힘은 없을까? 뉴턴적인 관성의 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5)
이제 연속과 불연속, 하나와 여럿이라는 대립적 측면을 설명하기 위해 서로에 대립하는 힘을 등장시켜 보자. 양면은 서로 대립하면서 타자에 대해 힘을 발휘한다. 연속의 측면은 여럿을 하나로 통일하는 힘이 된다. 불연속적 측면은 하나를 여럿으로 분열하는 힘이 된다.
실재의 두 측면을 이렇게 두 대립하는 힘을 통해 이해하는 데 헤라클레이토스 철학의 진정한 힘이 있다. 그는 다원론자가 연속과 불연속의 두 측면을 실재의 양면성으로 결합하려 했던 반면, 그는 이 두 측면을 힘이라는 개념을 통해 통일하려 했다.
실재의 두 측면을 이렇게 통일하는 것은 동양철학에서도 마찬가지다. 동양철학에서 음양은 실재의 두 측면을 힘으로써 설명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물론, 많은 사람은 음양이라는 힘에 어떤 질적 성격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음양은 하나로 통일하는 힘과 여럿으로 분열하는 힘으로 보기보다는 남성적 힘이나 여성적 힘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전기력이 처음 등장할 때와 마찬가지다. 전기는 구체적 질적 성격을 지녀 수지 전기나 유리 전기 등의 이름이 붙여졌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전기력은 단순히 대립하는 힘으로 간주되었으며 따라서 플러스 전기와 마이너스 전기라는 대립성만을 인정하는 이름으로 전환했다.
마찬가지로 음양이라는 힘도 동양철학의 발전에 따라서 점차 구체적 질적 성격은 제거되고, 단순히 대립하는 힘으로써 즉 통일하거나 분열하는 힘으로서 파악되기 시작했다.
두 대립하는 힘의 통일이라는 개념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넓게 퍼져 있는 개념이다. 서양 철학에서는 헤라클레이토스에서 흘러나와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토아학파를 거쳐 근대 헤겔로 이어진다. 동양철학에서는 음양 사상에서 흘러나와 성리학 이후 유학의 근본 개념이 되었다.
6)
사물의 본질이 무엇인가는 철학의 가장 근본적 문제였다. 철학은 소크라테스 이래로 이 고유한 본질을 발견하고자 했는데, 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받은 플라톤은 이데아라는 개념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데아라는 개념은 아직 추상적 일반성에 머무르고 만다.
사물의 모습은 서로 대립하는 성질이 공속하는 것이니, 이를 설명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본질이라는 개념을 찾아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은 개별자[제일 실체] 속에 들어 있는 일반자[제이 실체]인데, 이 모순적인 성격을 해소하기 위해 그는 이 일반자에 힘을 부여했다. 즉 그힘은 일반자이면서 자기를 개별자로 산출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일반자 속에서 신의 모습을 찾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가 기독교나 이슬람의 신개념의 원형이 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오히려 헤라클레이토스의 불의 개념이나 생명체의 생명을 상기하는 철학자들이 출현했으니, 그들의 최종 후예가 곧 헤겔이다.
헤겔은 본질을 생명으로 보았다. 생명의 유적 본질은 자기를 개별자로 재생산하는 가운데 자기를 유지하는 것이다. 개체 속에는 두 가지 힘이 있다. 즉 생성하는 힘과 소멸하는 힘이다. 소멸하는 힘은 여럿으로 해체하는 힘이며 생성하는 힘은 하나로 통일하는 힘이다. 생명의 유적 본질은 개체 속에 소멸하는 힘과 생성하는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재생산된다.
이 균형은 결코 멈춰있는 부동의 균형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는 것을 통해 유지되는 균형이다. 그것은 마치 헤라클레이토스가 불이 생성하는 힘과 소멸하는 힘의 통일이며 이런 통일이 끊임없이 운동하는 가운데 균형을 이룸으로써 로고스가 생긴다는 주장과 같다.
7)
마침내 우리는 재생산을 통해 지속한다는 본질이라는 개념에 이르렀다. 앞에서 우리는 추상적인 것과 양적인 것을 대립시켰다. 이제 양적인 것은 다시 본질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본질이 곧 철학의 원리가 아닐까?
오늘날 개체주의자와 상대주의자는 양적인 것과 본질 개념을 철학에서 제거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서 양과 본질이란 추상적인 일반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은 추상적 일반성이 아닌 하나이며, 본질은 이 하나가 여럿을 통해 재생산되는 것을 의미한다.
개체주의자와 상대주의자가 비난하는 것은 동일성의 철학인데, 그 동일성은 추상적 동일성이다. 그러나 진정한 동일성은 재생산을 통해 지속하는 본질의 자기 동일성이니, 이 자기 동일성이 없다면 개체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개체란 곧 본질이 재생산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은 자주 추상적 동일성에 기초한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자연과학을 그렇게만 본다면 화학이나 생물학의 발전을 설명할 수 없지 않을까? 자연과학도 생물학에 이르면 차라리 자기 동일성으로서 즉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본질을 통해 설명되어야 하지 않을까?
추상적 동일성이 나치즘이나 기계적 자연과학의 원천이라고 하더라도 그 때문에 과학 전체를 비난할 수는 없지 않을까? 왜냐하면, 과학의 진정한 바탕은 자기를 재생산하는 본질 개념에 기초하는 것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Feel free to contribu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