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단상: 추상화와 양적인 것의 차이
1)
현대 철학에서 가장 비난받는 개념 중의 하나가 곧 양적인 것이라는 개념일 것이다. 양적인 것에 대한 비난은 현상학 계열에 속하는 하이데거뿐만 아니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아도르노, 베르그송이나 들뢰즈 등에서 자주 발견된다.
양적인 것에 대한 비난의 출발점은 아마도 과학주의 때문일 것이다. 과학기술은 대규모 산업의 원동력이었으며, 나치즘의 기계적 학살의 수단이었고, 포드 테일러 시스템과 같은 사회 통제의 방식의 모델이었다.
과학주의를 극복하려는 시도는 과학의 토대에 양적인 것이 있다고 보면서, 양적인 것을 거부하게 되었다. 이런 양적인 것은 대체로 추상화(양화)의 결과 나온 일반적인 것으로 파악되며, 그것에 대립하는 개별적인 것, 직접 경험되는 것, 질적인 것에 대한 찬송으로 귀결되었다.
2)
양적인 것이 일반적인 것인가? 추상화의 결과 일반적인 것에 이른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 추상적 일반성이 곧 양적인 것일까? 추상화를 통해 과연 양적인 것에 이른다는 주장은 이제 상식이 되어 버린 주장이지만, 그것이 상식인 만큼 간단하게 간파될 수 있는 거짓이다.
조금만 반성해보라. 여러 종류의 꽃들을 추상해서 꽃의 일반 개념이 만들어진다. 이 꽃의 일반 개념이 양적인 것인가? 이 일반 개념이 외연 상 많은 개별자가 들어 있기는 하지만, 이 꽃의 개념[내포] 자체가 양적인 것은 아니지 않을까?
일반적 개념 속에 들어 있는 개별 사례[즉 외연]가 수적으로 여럿이라 할 때 이때 개별자는 일반적 개념의 한 예로서 다루어진다. 이때 이 개념의 사례를 수적으로 세는 것은 이 개념과 무관한 주관의 외적인 반성에 속한다.
이런 반성이 사물 자체에 외적인 주관의 반성에 속한다는 사실은 서로 무차별한 사물을 수적으로 셀 수도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방에 있는 물건들을 세어본다. 비트겐슈타인의 방에는 책상이 있고, 의자가 있고, 식탁이 있고, 침대가 있다. 총 네 개가 있다. 나의 방에는 이보다 많다. 그 외에도 티비가 있고 컴퓨터가 있고 핸드폰이 있다. 그러므로 나의 방에 속한 사물의 수는 비트겐슈타인의 방에 속한 사물 수보다 많다.
이처럼 외적 반성을 통해 사물을 수적으로 셀 수 있다. 그 외연의 수는 양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일반적 개념의 내포와는 무관하다. 그런데도, 양적인 것이 추상화를 통해 나온다는 주장은 다름 아닌 추상화의 결과인 개념 자체가 양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전혀 다른 차원을 뒤섞은 오류다.
3)
양적인 것의 기초는 차라리 하나[일자]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나를 발견한 철학자는 파르메니데스이고, 이 파르메니데스의 하나를 받아들여 발전시킨 철학자가 다원론자이며, 이 다원론자는 하나가 여럿으로 나누어진다고 보며, 이 여럿의 차이는 다름 아닌 공간의 크기(또는 형태의 차이)에 있다고 하면서, 양의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파르메니데스의 하나에서 마침내 양적인 것이 출현한 것은 우연일까? 어쩌면, 하나의 개념이 곧 양 개념의 출발점이 아닐까? 어째서 일자가 양적인 것의 출발점이 되는가?
양적인 것이란, 서로 양적인 관계를 갖는 것을 말한다. 동어반복처럼 보이지만, 이 말에는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다. 양적인 것은 같은 것의 반복이다. 같은 것이 반복되지만, 서로 구별되므로 여기서 여럿이 나온다. 그러나 반복되는 것이 같은 것이므로 그것은 하나로 통일된다. 이렇게 구별되고 여럿이라는 점에서는 불연속적이며 하나의 반복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연속된다.
이런 이중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을 때 그것을 우리는 양적인 것이라고 규정한다. 양적인 것은 이런 이중적 성격을 지닌 것들의 정의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런 이중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 물질의 모양이며 무게다.
4)
파르메니데스가 하나라는 개념을 발견하기 전에, 먼저 아페이론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아페이론은 서로 대립하는 것의 통일성이다. 그것은 무엇이라 규정될 수 없기에 아페이론이라 한다. 보통 ‘무규정성’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그러나 아페이론을 뒤집어 생각해 보자. 무엇이라 규정될 수 없으므로 그것은 하나로 통일된 것이 아닌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므로 이것일 수도 있고 저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파르메니데스의 하나는 아페이론을 뒤집어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파르메니데스의 하나는 그 때문에 이중성을 지닌다. 그것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만, 그 이면은 아페이론이므로 이미 여럿으로 분열된 것이다. 파르메니데스의 하나라는 개념에서 다원론자가 출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원론자는 파르메니데스의 하나의 이면이 곧 여럿이므로, 여기서 이 하나이면서 여럿인 것의 성격은 양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던 것이 아닐까? 흔히 다원론자는 파르메니데스의 일원론을 구하기 위해 현상과 타협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어쩌면 하나 자체가 이미 그런 아페이론을 함축하고 있으니 다원론자는 파르메니데스의 필연적 결과가 아닐까?
5)
하나이면서 여럿인 것은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한편으로 그것은 하나이고 통일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충만한 것이며 연속적인 것이다. 다른 한편 그것은 이미 여럿으로 나누어져 있고 무규정적으로 비어있고 불연속적인 것이다.
연속적이며 충만한다 의미에서 그것은 물질이며 불연속적이며 비어있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공간이다. 물질과 공간은 양적인 것이 지닌 서로 다른 측면을 부르는 말이니, 원래 물질과 공간은 구분되지 않는다. 양자는 양적인 것이 지닌 서로 대립하는 두 측면일 뿐이다.
원자론자 데모크리토스가 원자는 여럿인데, 공간적 크기 즉 형태를 갖는다고 말했던 것은 이 양적인 것이 지닌 불연속적이고 여럿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후예인 에피쿠로스에 이르러 원자가 다시 충만한 연속적인 측면을 지니면서 무게를 지닌다고 말한 것은 원래 양적인 것이 지닌 연속적이고 하나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공간은 충만해 있으니 그 충만한 측면이 곧 물질이다. 물질의 이면은 비어 있고 무규정적이니 그 물질의 이면이 곧 공간이 아닌가? 물질과 공간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물질이 있으면 공공간이 있고 공간이 있는 만큼 물질이 있다.
양적인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며 그것은 대립물의 통일인 아페이론과 그것의 이면인 하나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가 이런 성격을 지니므로 양적인 것은 연속성과 불연속성 두 가지 성격을 즉 물질과 공간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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