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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8-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에서 실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8-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에서 실체

1)

앞에서 절대자의 펼침[Auslegubng]에 관해 말했다. 헤겔은 이 펼침은 하나의 가상으로서 절대자가 자기를 실현하는 운동에서 매개가 된다고 한다. 이 매개는 우선 절대자가 자기를 속성으로 드러내고 이 속성이 다시 자기를 부정하는 양상으로서 전환하는 것을 말한다.

사실 여기서 하나의 개체는 다른 개체와 대립하면서 상호 결합하여 실체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관계는 논리적으로 이렇게 파악된다. 즉 절대자는 자신의 함축된 대립한 속성을 펼쳐서 그중 한 속성을 현존으로 정립한다. 예를 들자면, 종적 실체는 자기를 분화하여 암컷이나 수컷을 산출한다.

여기서 개체를 그 형식[기능]에서 본다면, 곧 속성이다. 각자의 형식은 절대자를 토대로 하므로 이미 다른 형식과 통일 속에 있다. 왜냐하면, 이 형식은 통일적인 종적 본질에서 분화된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속성은 표면적으로 독립적인 형식이지만, 잠재적으로는 이런 통일성 속에 있다.

그러므로 속성은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속성은 한편으로 고유한 분화된 형식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결여를 지니고 자기를 해소하는 것이다. 속성은 절대자의 순전한 동일성에 비추어본다면 무실한 것으로 부정되니, 무실하며 유한한 것이다.

“총체성은 절대적인 동일성으로서 정립된다. 또는 속성은 절대자를 자신의 내용과 존립으로 삼는다. 속성의 형식 규정은 이 속성을 속성으로 만드는 것이지만 따라서 또한 정립[부정]되어 있으며, 직접적으로 단순한 가상으로 존재한다. 즉 부정적인 것으로서 부정적인 것이다. 펼침이 이런 속성을 통해 얻는 긍정적 가상은 이 펼침이 한계 속에 있는 유한한 것을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의 존립을 절대자 속에서 해소하고 이 절대자를 속성에 이르기까지 확산하는 가운데 다시 이것이 속성이라는 사실을 그 자체로 지양한다. 그러므로 이 펼침은 속성과 그것이 전개하는 구별 활동을 단순한 절대자 속에 침몰시킨다.”(논리학, GW11, 373-374)

2)

하나의 속성이 자립적인 개체로 분화한다. 이 과정은 앞에서 형식이 내용을 거쳐 실존으로 되는 과정에서 설명되었다.

이제 이 속성이 현존하는 개체를 보자면, 한편으로 이 개체는 실존이므로 자립적이고 타자에 무차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개체는 “절대자의 탈자적 존재”이며 “절대자가 존재에 속하는 가변성과 우연성 속에서 상실되는 것”이다. (논리학, GW11, 374)

그러나 다른 한편, 속성의 통일성은 개체 속에 결여한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즉 자기와 대립하는 것을 결여를 통해 지시하며 그 자체는 자기를 보완하는 타자가 결여한 어떤 것을 지니고 있다.

속성이 개체화하면서, 속성의 통일성은 개체의 결여로 등장하는데, 바로 이 결여가 개체의 내적 목적으로서 제시된다. 이런 내적 목적이 처음에는 각자에게 자연적 욕망으로 출현한다. 이런 욕망은 아직은 자각되지 않은 본능적 욕망이다.

예를 들어, 암컷이나 수컷은 평생 타자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개체로서 암컷이나 수컷은 종의 재생산과 무관하며 결국 개체로서 곧바로 소멸하고 마는 것이다.

3)

개체의 내면에서 욕망이 있는 한 개체는 자신에 결여한 타자를 추구한다. 개체는 이제 다른 개체와 결합하면서 자기가 결여한 욕망을 충족하는데, 여기서 개체들의 상호 관계로서 실체가 출현한다. 헤겔은 이 실체를 “그 형식에서 자기 내로 복귀한 절대자” 또는 그 “형식이 내용과 동일하게 된 절대자”(논리학, GW11, 374)라고 한다.

결여한 타자와 성공적으로 관계하고 결합하게 된다면, 개체는 더는 개체가 아니라 개체는 자기 부정성을 통해 가상이 된다. 이런 가상이 곧 양상이다. 부정의 부정을 통해 가상은 절대자로 되돌아간다. 이를 통해 가상은 곧 “절대자가 스스로 빛나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자가 반성하면서 전개하는 고유한 운동”이다.(논리학, GW11, 375)

“그러나 양상 즉 절대자의 외면성은 이런 것[가변적이고 우연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외면적인 것으로서 정립된 외면성이니, 단순한 종류나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가상으로서 가상이거나 형식의 자기 내 반성이다. 따라서 양상은 자기 동일성으로 되고, 이는 곧 절대자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절대자는 양상 속에서 절대적 동일성으로 정립된다. 절대자가 절대자의 본래 모습으로 되는 것은 그 자기 동일성이 자기 관계하는 부정성으로서 또는 가상으로서 정립된 가상으로 될 때이다.”(논리학, GW11, 375)

헤겔은 이런 절대자의 실현을 ‘외화’[Aeusserung]와 구별한다. 외화는 자신의 타자 속에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노동을 통한 형상화에서 보듯이 이런 외화는 타자의 한계에 부딪힌다.

그러나 여기서 절대자의 실현은 개체가 내적으로 결여한 것을 다른 개체를 통해 충족하는 것이다. 이 관계는 상호적인 것이며 따라서 이는 개체의 실현이 아니라, 절대자 자체가 감추어진 자기를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니, 즉 “자기를 자기 자신에 대해 절대적으로 계시[Menifestieren]하는 것이다.” 즉 최초의 추상적 동일성으로서 절대자가 구체적인 동일성으로서 절대자로 즉 ‘절대적인 절대자’로 드러나는 것이다. 헤겔은 이런 ‘절대적 계시’를 실제성이라 한다.

그러나 처음에 자립적인 개체는 내적으로 타자에 대한 욕망을 느끼지만, 현존에서 타자와의 만남은 우연적이다. 내적 총체성으로서 절대자가 실현된 총체성 즉 실제성으로 되는 절대자의 계시는 아직은 우연적인 것 또는 추상적인 필연성에 머무를 뿐이다.

4)

이상에서 헤겔에서 절대자, 속성, 양상 사이의 삼위 일체적 관계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절대자[실체], 속성, 양상은 근대 초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철학의 근본 틀이었다. 그러므로 헤겔은 주석에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실체, 속성, 양상 개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스피노자에서 실체는 ‘자기 원인’이라는 개념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본래 자기를 산출하는 것이며 그 본질 속에 실존을 포함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서 실체가 지닌 생산적 성격을 능산적 자연이라는 개념으로 구정하거나 또한 무한성 개념을 통해 이해한다.

“스피노자가 실체에 관해 제공하는 개념은 자기 자신의 원인이라는 개념이다. 즉 실체는 그 본질 속에 실존이 포함된 것이다. 다시 말해 절대자의 개념은 그 개념을 발전시키는 출발점이어야 하는 타자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런 자기 원인 개념은 심원하고 올바르며 학문에 앞서서 직접 가정되는 정의이다.”(논리학, GW11, 376)

스피노자는 무한성은 무한히 크거나 작은 것과 같은 현재 속에 존재하지 않고 피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스피노자는 무한성이 현재에 존재할 수도 있다고 하면서 예를 들어 하나의 원이 다른 원 속에 있을 때 그 두 원의 차이는 무한한 소수 계열(ψ)로 이루어지는 수이지만, 구체적으로 두 원 사이라는 한정된 크기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런 무한성 또는 자기산출의 입장에 서면 실체는 두 대립한 것의 상호 작용으로 나타나며 이런 점에서 여기서 긍정적인 것은 항상 자기 부정적인 것으로 된다.

5)

헤겔은 스피노자가 나중에 실체에 관한 올바른 출발점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외적 반성에 머물러 있어서 실체에 관한 그의 생각은 모순적인 성격을 드러낸다고 한다. 그것은 그가 실체를 모든 규정성이 사라진 무규정인 것으로 파악하는 데 있다. 그는 이런 실체를 절대적인 것으로 삼아서 모든 규정된 존재는 겉으로 자립적인 것으로 보이더라도 실체 속에 몰락하고 마는 유한한 존재라고 보았다.

실체 자체는 아무런 규정이 없는 순수한 자기 동일성이지만, 외적 반성의 관점에 서면 무한히 많은 규정이 출현한다. 외적 반성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지성이며 다른 하나는 표상이다. 전자는 인간의 지성이더라도 신적인 관점이며 후자는 유한한 인간의 관점이다.

이제 지성의 관점을 통해 실체를 보면, 실체의 속성이 나온다. 여기서 지성은 인간의 지성이지만, 신적인 지성이므로, 사실 속성은 실체를 신 자신의 관점에서 본 것이고 따라서 이 속성은 실체의 자신이 산출하는 규정성이고 본질적인 규정성이다.

그러나 인간의 실제로 존재하는 지성은 유한한 것일 수도 있으니, 이 경우 지석이 파악한 것은 속성이라기보다 양상에 속하게된다. 그러므로 인간 지성이 파악한 실체의 두 속성은 올바른 것이고 실체에 내적이라고 가정할 근거는 없다. 지성의 이런 이중성 때문에 스피노자는 오락가락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전체[인식] 운동은 절대자 밖에서[즉 인간적 지성에서] 일어난다. 사실 절대자 자체는 사유[신적 지성]이기도 하며 그런 한 이 운동은 절대자 속에서만 일어난다.”(논리학, GW11, 377)

신적 지성에서 절대자의 속성은 무한하나, 인간 지성의 관점에서는 오직 두 가지만이 실체의 속성으로 규정된다. 그것이 곧 사유와 존재이다. (헤겔은 왜 하필이면 이 두 가지인가를 반문하면서 이는 스피노자가 아마도 경험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으로 생각한다.) 이 사유와 존재는 동일한 실체를 지성의 관점에서 본 것이므로 내용은 동일하면서도 형식은 무관하니, 이 때문에 사유와 존재 사이에는 서로 평행하는 상응 관계가 존재한다.

양상은 이런 속성을 다시 지성이 아닌 표상의 관점에서 본 외적 반성이다. 이는 “실체가 타자에 의해 감염된[Affection] 상태이니 그 규정성은 타자 속에 있으며 타자를 통해 파악된 것이다.”(논리학, GW11, 377) 그 결과는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것이며 실체 앞에서 전적으로 무실한 것이다.

6)

그러나 본질적인 속성이든(지성이 인간적 지성인 한), 우연적인 양상이든 스피노자에서는 외적 반성에 속하므로 이는 실체 자체의 순수한 동일성에 비추어본다면 한계를 지닌 것이며 부정되는 것일 뿐이다.

헤겔은 스피노자가 모든 규정성을 부정성으로 파악한 것은 위와 같이 자기 부정적인 것으로 파악할 여지를 남겨놓았으나 그 자신은 이런 자기 부정성으로 나가지 못하고 다만 유한성으로서 부정성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러면 실체의 규정성은 실체의 자기산출이 아니라 외적 반성에서 나온 것이며 실체 앞에 부정되는 것으로 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규정성이거나 질로서 부정성에 머무른다. 그는 이 부정성을 절대적인 즉 자기를 부정하는 부정성으로 인식하는 데까지 나가지 못한다. 따라서 그의 실체는 그 자체 절대적 형식을 포함하지 못하며 형식에 대한 인식은 내재적인 인식이 아니다.”(논리학, GW11, 376)

그러나 이런 순수한 동일성으로서 실체 자체도 사실은 외적 반성을 통해 나온 것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헤겔은 스피노자가 실체 자체를 파악하면서도 자기 원인이라는 올바른 관점에서 외적 반성에 다시 미끄러짐으로써 사유에서 혼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7)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가 단초적으로 제시한 자기 원인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자기산출과 자기 내 반성이라는 개념을 확립한다. 그는 자기산출의 능력을 지닌 실체를 모나드라고 규정한다. 라이프니츠는 이런 자기산출 능력을 표상 능력이라 규정한다.

모나드는 자기산출의 능력은 무한하니, 각각의 모나드는 그 자체가 총체성을 내적으로 지니고 있으나 개별 모나드는 특정하게 자기를 산출하니, 이 점에서 다른 모나드와 구별된다. 왜냐하면, 실체가 자기를 산출하면, 그 산출된 규정은 다른 것과 다르며, 각자 독립적이고 서로 무차별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산출 능력이 무한하므로 모나드는 수적으로 무한하다.

“이때 모나드는 또한 규정적이며, 다른 것으로부터 구별되고, 그 규정성은 특수한 내용이나 표명[Menifestation]의 종류나 방식에 속한다. 모나드는 본래 그 실체상 총체성이지만, 그 표명에서는 그렇지 않다.”(논리학, GW11, 373-374)

모나드는 총체적 산출 능력을 가지므로 하나의 규정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규정에서 다른 규정으로 끊임없는 이행 속에 있다. 모나드는 폐쇄적이므로 이런 이행은 외부의 힘에 의해 촉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내에서 일어나는 자발적인 운동이다.

하나의 모나드와 다른 모나드가 자의적으로 특정한 규정을 산출한다면, 이런 모나드 사이에 대립된 규정이 나타나서 서로 충돌할 수 있다. 그러면 우주는 충돌 속에서 소멸하고 말 것이므로, 우주가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은 모나드와 모나드 사이에 조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모나드 사이의 조화는 결코 모나드 자신에 의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모나드 밖에서 모나드를 조화하도록 조절하는 존재를 상정하는데 그것이 곧 신이다. 이 신이 본래 모나드를 조화하도록 만들어놓았으므로 이 조화는 이미 예정된 것이다.

“모나드의 이 제한성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정립하거나 표상하는 모나드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한계 즉 모나드의 본래 존재에 속하거나 모나드와 다른 본질을 통해 정립되는 예정 조화이다.”(논리학, GW11, 378)

8)

헤겔은 라이프니츠가 모나드의 표상 능력을 통해 자기를 산출하며 자기 내로 복귀하는 운동을 설정한 것은 탁월한 생각이라 한다.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가 단초적으로 제시한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는 개별 모나드에 머물러 모나드 사이의 조화를 설명할 수 없었으므로 다시 외부에 존재하는 신을 끌어들이게 되었다. 라이프니츠에게 신은 연극에서 나오는 기계 신과 같은 것이다.

헤겔에서 실체는 개체들의 집단이지만, 이는 단순히 개체들의 집합을 의미하지 않고, 서로 대립하는 개체의 상호 작용을 통해 성립하는 집단이다. 대표적 예가 암컷과 수컷으로 이루어진 집단이다.

이 집단이 논리적으로 선취되면, 절대자가 되며 여기서 절대자는 서로 대립하는 속성의 통일로서 무한한 절대자이다. 이 절대자가 자기 분화하여 하나의 속성이 등장한다. 이 속성은 라이프니의의 모나드처럼 하나의 속성이지만, 그 내용은 총체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형식은 절대자를 토대로 즉 자신의 내용으로 삼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 개별 속성이 하나의 실존인 개체로 출현하면, 이 개체 속에 속성의 총체인 절대자는 결여로서 남게 된다. 그러므로 개체에는 타자에 대한 욕망이 출현한다. 개체는 이런 욕망을 충족하면서 자기의 완전한 총체성을 회복한다. 이런 의미에서 개체는 부정성을 지닌 존재이며 이 개체의 자기 부정을 통해 절대자가 실현된다. 이렇게 절대자로 되돌아가는 개체가 곧 양상이다.

라이프니츠에서 모나드는 완전한 총체성이다. 그러나 헤겔에서 개체는 내적 통일을 결여한 욕망하는 존재이다. 전자에서는 개체와 개체가 관계할 이유가 없으나 후자에서는 개체는 타자와 관계해서만 절대자로 되돌아갈 수 있다.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7-절대자의 펼침과 계시[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7-절대자의 펼침과 계시

1)

본질론 3편 ‘실제성’ 편에서 1장은 ‘절대자’를 다룬다. 이 1장은 양상의 운동을 추상적 개념에 따라 다루는 장이다. 이 운동은 2장 실제성 장에 이르러야 구체적으로 또는 실재적으로 전개될 것이다. (추상적 개념이란 곧 직접적인 것, 개별적인 것이므로 여기서 다루어지는 절대자 개념은 2장 처음에 등장하는 우연성 개념과 일치한다.) 1장에서 다루는 절대자의 운동은 개념적으로 세 가지 계기로 이루어진다. 즉 절대자, 속성[Attribut], 양상[Modus]이다.

종적 개체는 자기를 재생산하는 가운데 종적 본질을 지속하여 생산한다. 종적 본질이 자기를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종적 개체가 다른 종적 개체와 관계해야 한다. 즉 암, 수의 결합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암수의 개체가 종의 집단을 이룬다. 이런 종의 개체가 이루는 집단이 헤겔에서 ‘실체’라 불리는 것이다.

이 관계를 이제 논리적으로 설명하자면, 결과가 선취된다. 즉 결과로 실현된 실체는 처음에 내적인 실체로 있었다. 이것이 곧 절대자다. 이 절대자는 개념적으로 보면, 아직 개체로 분화되기 이전의 것이므로 추상적인 동일성에 해당한다.

여기서 ‘본질’ ‘종적 본질’이라는 개념과 ‘실체’ 또는 ‘절대자’라는 개념이 혼란을 일으킨다. 단순한 유기체에서 개체가 자기를 재생산하는 가운데 재생산되는 것이 본질이다. 복잡한 유기체에 이르면 ‘본질’을 재생산하는 것은 암수 개체의 관계이다. 복잡한 유기체에서 재생산되는 본질을 따로 구별하기 위해 ‘종적 본질’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인간에 이르면, 사회가 등장한다. 이 사회는 개인의 상호작용을 통해 지속적으로 재생산된다. 그러나 이 사회는 더는 종적 본질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경우 ‘유적 본질’이라는 말이 사용되는데, 종적 본질에서 개체의 상호 관계는 자연적이며 무의식적이다. 반면, 유적 본질 즉 실체에서 개체의 관계는 의식적이며 합목적적이다.

절대자의 실현으로서 ‘실체’라는 말은 생물체의 종적 본질과 인간의 유적 본질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헤겔이 ‘실체’라 할 때는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개체들의 집단을 의미하고 ‘절대자’는 이런 집단을 형성하는 출발점이 되는 목적 즉 내적 본질을 의미한다.

2)

이런 내적 실체 즉 절대자는 순수한 자기 동일성이므로 아직 “아무런 술어도 지니지 않은” 공허한 것이며, 그러나 앞으로 “모든 술어를 지닐 수 있는” 잠재적으로 풍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런 절대자의 모습을 ‘가장 명백한[formellste] 모순’이라 한다. 헤겔에서 모순은 곧 운동을 의미하므로 절대자는 자기에 고요하게 머무르지 못하고 운동으로 나가게 된다.(논리학, GW11, 370)

절대자 즉 내적 실체는 추상적인 동일성이다. 아직 무엇으로 규정되지 않았다. 이 실체는 자기를 분화하여 속성으로 출현한다. 헤겔은 내적 실체의 분화를 ‘펼침'[Auslegung]이라 한다. 보통 ‘해석’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 단어는 본래 내적인 것을 밖으로 펼쳐놓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때로 이것은 씨를 뿌리다, 산종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영어로는 ‘explicate’라는 의미인데 ‘implicate’에 대립한다. 이런 말은 라틴어에서 ‘접다’라는 의미를 지닌 ‘plico’에서 유래한다. 그런 의미에서 ‘explicate’는 접은 것을 펼친다고 볼 수 있는데, 헤겔이 펼침[Auslegung]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맥락에서 사용된다.

헤겔에서 절대자의 펼침[Auslegung]이란 곧 실체가 개체로 분화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달리 말해서 실체가 자기의 씨를 이리저리 뿌려놓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헤겔은 절대자의 펼침을 단순한 외적인 반성을 통해 등장하는 규정성[Bestimmtheit]과 구별한다. 외적 반성은 절대자 밖에서 사유가 절대자에 관계하는 것이다. 절대자는 순수한 동일성이므로 사유는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으로 이를 규정할 수 있으나, 그런 규정은 모두 절대자에게 외적으로 머무르는 것이어서 부정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술어를 부정하거나 이와 같이 정립하는 것은 외적 반성에 속하는 한, 이런 부정이나 정립은 명백히 비체계적인[unsystematische] 궤변[Dialectik]이며 이 궤변은 약간의 노력으로도 많은 규정을 여기서나 저기서 파악하고 마찬가지로 아주 적은 노력으로도 한편으로는 그 규정의 유한성과 부정성을 지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절대자가 그 반성 앞에 총체성으로 아른거리고 있으니 이 절대자는 모든 규정을 내재하고 있다고 언표한다. 그런데도 이 반성은 지금 말한 긍정과 앞서 말한 부정을 진정한 통일로 고양할 수 없다.”(논리학, GW11, 370)

우리는 이 절대자 즉 내적 실체를 다양하게 반성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생물체는 이런저런 기능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분류된다. 예를 들어 동물은 방어나 공격의 기능을 통해 분류될 수도 있다. 어떤 동물은 발톱을, 어떤 동물은 이빨을, 어떤 동물은 독을, 어떤 동물은 지혜를 이용하여 자기를 방어하고 또는 적을 공격한다. 이런 분류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비체계적인 궤변’일 뿐이다. 이런 분류는 진정을 절대자 즉 내적 실체를 규정하지 못한다.

3)

우리는 사유를 통해 즉 반성을 통해 절대자에 접근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반성이 절대자에 대해 단순히 외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절대자에 내적인 것으로 되면, 즉 주관적인 반성이 아니라 객관적인 반성이 되면, 비로소 이때 반성을 통해 규정된 것은 곧 절대자의 주름이 펼쳐진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 외적 반성이 어떤 경우에 절대자의 펼침으로 발전하는가? 헤겔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절대자의 규정은 절대적 형식이지만, 그 동일성을 이루는 계기는 단순한 규정성인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 동일성은 그것의 계기 각각이 자기 자신에서 총체성이고 따라서 그 [절대자가 지닌 순수 동일성의] 형식에 무차별하면서 전체의 완전한 내용이다.”(논리학, GW11, 371)

“거꾸로 말하자면 절대자는 절대적 내용이니, 그 자체로 무차별한 다양성인 그 내용은 자신에서 부정적인 형식 관계를 지니면서 이를 통해 그 다양성은 다만 순수한 동일성이 된다.”(논리학, GW11, 371)

이런 구절을 통해 보자면, 절대자는 형식적으로 보면, 순수한 동일성이지만, 내용 속에서는 대립하는 속성의 무구별적인 통일이다. 그 속에 포함된 하나의 속성은 전체를 이루는 하나의 계기, 동시에 그 자체로 다른 계기를 이미 포함한 전체, 총체성이다.

이런 점에서 속성은 총체성으로서 전체 내용을 갖지만, 하나의 계기로서 개별적 형식이다. 이 형식은 서로 무차별한 것이다. 속성에서 총체적 내용은 감추어져 있으며, 표면에 등장하는 것은 개별적인 형식으로서 속성이다.

그러나 내용상 이미 전체이므로, 이 개별적 속성은 타자와 관계하는 가운데 자기 부정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이런 아직 이런 자기 부정성이 드러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내용을 통한 통일성은 아직 감추어져 있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설명은 기독교의 삼위일체라는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기독교에서 삼위 즉 성부와 성자, 성령은 각기 전체 신의 한 계기로서 그것은 자립적 총체이지만, 동시에 자기 부정성을 통해 전체로 복귀한다. 또한, 하나의 속성이 배후에 총체성을 지닌다는 것은 라이프니츠가 말한 모나드 개념을 연상시킨다. 모나드는 내용상 총체적이지만, 개별적인 속성을 표상한다.

이와 같이 절대자에 대한 반성이 낳은 규정이 하나의 계기이면서 총체성으로 되는 경우 이제 그 규정은 바로 절대자에 관한 펼침이 된다. 이러한 점은 생물체의 기관이 고유한 기능을 지니면서도 유기체적 전체 속에 분리되지 않으므로 다른 기능을 담당할 능력을 지니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두뇌의 국소화를 생각해 보자. 두뇌의 한 부분은 전체적인 통일 속에 있으므로 고유한 기능을 지니면서도 다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4)

속성이 자체 내에 이미 내적인 통일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제 이 내적 통일성이 드러나게 되면, 속성은 겉보기에 자립적 독자성을 유지하지 못하며, 이런 내적 통일성 속으로 몰락하면서 자기 부정적인 것으로 된다.

만일 속성이 단지 “그 자체로서 타당성을 지닌[자립성을 지닌] 형식적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는 외적 반성에 속한다. 절대자에 대한 외적 반성에서는 그 내용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며 우연한 것으로서 잡아채진 것이다.

“이런 반성은 절대적 동일성 속에 지양되면서 절대적 동일성에 내적으로 머무르고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절대적 동일성에 외면적인 것으로 된다.”(논리학, GW11, 371)

반면, 이런 펼침에서 그 펼쳐진 속성은 ”절대자의 내적 필연성을 통해 규정된 것“(논리학, GW11, 372)이다. 헤겔은 이런 경우 개별 계기를 ‘투명한 가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가상은 곧 자기 부정적인 것으로서 동시에 자립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상은 무가 아니라 “절대자가 그 속에서 빛이 나는 것”이며 투명하므로 “절대자를 자기 자신을 통해 꿰뚫어 볼 수 있게 한다.” 그런 가상에는 “절대자에 대립하는 구별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것을 통해 빛이 나는 것에 의해 흡수되는 매체”다.(논리학, GW11, 372)

그러므로 절대자의 펼침은 하나의 운동이다. 그 운동은 순수한 동일성으로서 절대자에서 출발해서 다시 절대자로 되돌아가는 것인데 처음의 동일성은 추상적인 절대자이며 이렇게 운동을 통해 도달한 절대자가 절대자로서 절대자[Absolue-Absolute]이다.

그것을 매개하는 것이 곧 속성이다. 처음 속성은 자립적인 형식이 되면서 오히려 절대자를 은폐하게 된다. 그러나 속성 속에 감추어진 통일된 내용이 드러나면서 속성은 자기를 부정하고 절대자를 비추어 주게 된다. 즉 속성은 가상으로 전락한다.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6-관계 범주에서 양상 범주로의 이행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6-관계 범주에서 양상 범주로의 이행

1)

논리학 본질론 2편 ‘현상’ 편의 핵심은 법칙 개념이다. 법칙 속에 관계 맺는 두 요소가 곧 현상이다. 이 ‘현상’ 편은 ‘실존’(1장)에서 ‘현상(2장)’ 그리고 ‘관계(3장)’로 나가는데 이는 범주 또는 판단 형식에서 본다면 관계 판단 형식에 속한다.

‘현상’ 편은 전체적으로 물체(실존)에서 성질의 관계(법칙)가 발견되고 나가서 유기체적 상호 관계(내외 관계)가 발견되는 경험적 인식 과정과 상응한다. 그래서 ‘실존’은 정언 판단 형식에 해당하고, ‘현상’은 가언 판단 형식에 해당하며 그리고 ‘관계’ 그 가운데 특히 내부와 외부의 관계가 곧 선언 판단 형식에 해당한다. 이런 경험적 인식 과정의 발전 때문에 현상 편은 존재론에서 질의 생성을 다루는 2편 ‘현존’ 편과 3편 ‘대자 존재’ 편과 상응한다.

‘현상’ 편 끝에 등장하는 내부와 외부의 관계는 곧 내부가 외부로 실현되는 과정이며, 이런 실현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현상’ 편은 끝나고 본질론의 마지막 편인 ‘실제성[Wirklichkeit]’ 편이 시작된다.

2)

이 실제성 편에서 다루는 핵심은 양상[Modus] 개념이다. 즉 가능성, 실제성, 우연성, 필연성의 개념인데 3편 2장에서 다루어지는 이런 양상 개념은 한편으로는(3편 1장에서는) 절대자 즉 실체 개념과 연관해서 다루어지며, 다른 한편으로는(3편 3장) 실체 관계, 인과 관계, 상호 작용 관계와 관련된다. 이 3편 실제성 편 전체가 전개되는 구조를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위의 구조를 보면, 마치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의 형태가 개념의 계기가 되는 과정과 같다. 논리학에서도 이런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다만, 정신현상학에서는 사선에 해당하는 것이 역사적 형태이었고 반면 수직선에 해당하는 것이 논리적 계기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선에 해당하는 것이 논리적 계기이고, 수직선에 해당하는 것이 역사적 형태이다. 즉 논리적 과정이 역사 속에 투영되어 있다.

이런 전개 방식은 논리학 존재론의 영역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인데, 본질론에 이르면 앞에서 현상 편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논리의 전개는 표면적으로는 논리적으로 전개되지만, 배후에 경험을 매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런 구조는 이런 경험이 매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존재론에서는 그런 경험이 배후에 감춰있었으나, 본질론은 본질과 개체라는 상호 반성 관계를 통해 전개되므로 비로소 여기서 그런 감춰진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성 편에서 논리적 범주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중심축은 우연성(추상적 필연성)에서 실재적 필연성(실재적 우연성)을 거쳐 절대적 필연성으로 나가는 길이다. 그 이유는 곧 내부가 외부로 실현되는 방식 때문이다. 이 과정은 내부가 외부로 우연하게 실현되는 생물체에서 주체가 매개하면서 내부를 필연적으로 실현하는 인간으로 이행하는데, 내부가 외부로 실현되는 과정은 자기를 실현하는 주체의 탄생을 예고한다.

여기서 핵심 개념이 되는 우연성, 필연성 등이 곧 양상 범주이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실제성 편은 양상 판단 형식에 따라서 발전한다. 헤겔은 이런 양상 개념을 존재론에서 나오는 양의 개념으로 재해석한다. 우연성은 양적으로는 단칭 판단이다. 실재적 필연성은 특칭 판단에 해당한다. 마지막 절대적 필연성은 전칭 판단에 해당한다. 본질론 2편 현상 편은 존재론에서 양 개념의 발전을 다루는 존재론 2부에서 나오는 논리적 범주(정량, 척도, 척도 관계)가 반복된다.

3)

여기서 까다로운 번역 문제가 있다. 일상적 용법과 헤겔의 용법이 구별되기 때문이다. 독일어 ‘Wirklichkeit’ 는 일상적으로는 현재 이루어져 있는 것[영어: actual]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니 흔히 ‘현실’로 번역한다.

그러나 헤겔에서 ‘Wirklichkeit’는 본질이 실현된 것이라는 의미에서 사용되니,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능태’와 구별되는 ‘실현태’라 할 때의 의미를 지닌다. 그 때문에 ‘Wirklichkeit’는 ‘참된 것’이라는 의미로도 새겨진다. 헤겔이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라” 할 때 이 ‘현실적인 것’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참된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될 때 올바로 이해될 것이다.

필자는 독일어 ‘Wirklichkeit’는 우리 말로 ‘실제성’에 더 가깝다고 본다. 우리가 “실제로 그래”라고 말할 때 ‘실제성’에는 진실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앞으로 이를 ‘실제성’으로 번역하고자 한다. 실제에서 제[際]는 세계라는 의미이며, 따라서 환상이나 가능한 세계 구별된 세계, 진짜의 세계를 의미한다.

헤겔에서 ‘현존’[Dasein], ‘실존’[Exsitenz]과 ‘실제성’[Wirklichkeit]는 본질이 어느 만큼 실현된 것인가에 따라서 구별된다. 혼동되지 말아야 할 것은 헤겔이 사용하는 실재성[Realitaet] 개념이다. 이는 아마도 영어 ‘reality’에서 독일어로 받아들여진 말로 보이는데, 헤겔에서는 관념성[Idealitaet]에 상대적으로 규정된 말이다.

이 두 가지 개념 쌍 즉 현존과 실제성, 실재와 관념은 구별 기준이나 맥락이 다르다. 흔히 ‘실재성’과 ‘관념성’은 의식 밖의 것[대상]과 의식 내의 것[의식]으로 구별하지만, 헤겔은 이런 구별을 위해서는 ‘표상’[Vorstellung]과 ‘대상’[Gegestand]이라는 말을 따로 사용한다. 반면, ‘실재성’은 ‘타자에 관계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반면 ‘자기 관계하는 것’ 즉 대자 존재는 ‘관념성’으로 규정된다.

헤겔에서 단순한 ‘실재성’은 자주 ‘대상’과 뒤섞여 사용되지만, 모든 실재하는 것이 의식 밖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또한, 실제성은 본질이 실현된 것이고 타자 속에서 자기 관계하는 것이니, 실재성과 관념성의 통일로 규정된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하는 것은 영어 때문이다. 영어로 ‘reality’이라는 말은 의식 밖의 ‘실재’와 ‘진실’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포함한다. (실재성을 헤겔처럼 타자 관계로 규정하는 사람은 없다.)

헤겔의 영어본은 ‘Realitaet’과 ‘Wirklichkeit’를 전부 ‘reality’로 번역한다. 그 때문에 헤겔 영어본은 헤겔에 관해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영어에서 관념적인 것[idea]에 대응하는 것은 객관적인 것[object]이 있으니 구별해서 번역하면 좋았을 것이다.

유사한 언어로 영어 ‘actual’이란 말이 있다. 이는 아마 라틴어 ‘actu’에서 나온 말인데, 이는 ‘이미 생겨난 것’, ‘정해진 것’이라는 의미이며, ‘사실’이라는 말과 같다. 독일어에서는 ‘Tatsachlich’로 번역된다. 우리 말로는 ‘현실적’ ‘사실적인 것’으로 번역된다. 필자가 ‘Wirklichkeit’를 굳이 통요된 번역인 현실적이라고 번역하지 않는 것은 그렇게 번역하면 헤겔의 ‘Wirklichkeit’가 이런 ‘actuality’란 의미로 오해되기 때문이다.

우리 말로 ‘실재’, ‘실제’, ‘사실’은 좀 혼란스럽게 석여서 사용되지만, 헤겔의 번역을 위해서는 아래처럼 구별해서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실재’는 ‘Realitaet’에 대해 ‘실제’는 ‘Wirklichkeit’에 대해 ‘사실’은 ‘Tatsache’, ‘Fact’등에 대한 번역어로 사용하고자 한다. 그런데 헤겔이 자주 ‘Wirklichkeit’가 일상적인 의미로 사용하니, 그럴 때는 ‘현실’로 번역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4)

실제성 편의 출발점은 절대자라는 개념이다. 갑자기 절대자라는 개념이 튀어나와 당황스럽다. 절대자란 곧 일상적으로는 신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읽어 보면 여기서 절대자는 실체라는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헤겔은 이 1장 절대자 장에서 절대자, 속성, 양상이라는 개념 쌍을 다룬다. 이런 개념들은 철학 전통에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가 실체 개념을 다룰 때 등장했던 개념이고 이 장의 주석에서 헤겔도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의 실체 개념을 분석하니, 그가 이들의 실체 개념을 염두에 두고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내부와 외부의 관계가 실체, 속성, 양상 개념으로 이행하는 과정은 무엇인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내부와 외부 관계에서 유기체 조직을 매개로 종적 본질이 내부이었고 종적 개체들의 분화된 집단이 곧 외부이었다.

내부와 외부가 합일에 도달하는 경우란 곧 종적 본질이 개체가 배타적(부정적) 통일 관계로 분화될 경우이다. 구체적으로는 생물체의 종이 암, 수 집단으로 구별될 때를 말한다. 개체가 배타적 통일을 이루지 않는 집단에서는 그 분류 기준은 종적 본질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다. 예를 들어 영양 획득 기능에 따른 분류는 상이성의 집단을 이룰 뿐이니, 그 기능은 종적 본질에 해당하지 못한다.

이렇게 내부와 외부가 합일에 도달할 때 마침내 헤겔은 이제 실체 즉 절대자가 등장한다고 한다. 이 절대자는 곧 자기를 실현한 본질이다. 즉 내부의 본질은 자기를 배타적으로 분화하여 완전히 서로 통일된 외부 집단이 된 것이다.

“내부와 외부의 이런 통일이 절대적으로 실현된 실제성[Wirklichkeit]이다. 그러나 이 실제성은 처음에는 절대자 자체이다. 왜냐하면, 이 실제성은 그 속에서 형식[내부와 외부의 차이로서 형식]이 지양되고 외부와 내부라는 구별이 공허한 그러나 아직은 외적인 구별이 되는 통일로 정립되기 때문이다.”

5)

실제성 편 1장에서 거론되는 ‘절대자’는 종적 본질이 우연하게 실현된 집단, 즉 내부와 외부가 우연하게 통일된 것이니, 이는 양상 판단 형식(헤겔은 이를 개념 판단 형식이라 부른다)으로는 현실성의 판단이다. 헤겔은 이를 ‘추상적인 필연성’으로서 ‘우연성’이라 부른다.

앞으로 이런 우연성이 지양되고 본질이 필연적으로 실현되기에 이르는 과정이 이제 이 실제성 편에서 전개될 것이다. 2장에서 ‘실제성’이 다루어지는 데 여기서 핵심은 ‘실재적인 필연성’이고 이는 판단 형식으로는 가능성의 판단 형식이다. 마지막 장인 ‘절대적 관계’ 장의 핵심은 상호 작용이며 이는 판단 형식으로는 ‘필연성’(헤겔에서는 절대적 필연성) 판단이다.

헤겔은 우연성에서 필연성으로의 이행 과정을 절대자의 ‘외적 반성’이 ‘자기 내로 복귀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이 자기 내 복귀는 절대자를 우연히 실현되는 것에서 필연적으로 실현되는 것이니, 전자는 실현 자체가 외적인 것이고 후자는 실현 자체가 절대자에 내적인 것이다.

“[외적] 반성은 이 절대자에 대해 외적인 것으로서 관계하는데도 절대자는 이 외적 반성을 마치 그것이 자기의 고유한 운동인 것처럼 고찰한다. 그러나 이 반성은 본질적으로 이런 것[고유한 운동]이므로, 이 반성은 부정적으로 자기 내로 복귀한다.”(논리학, GW11, 369)

명분 없는 시대, 솔선하여 바로잡는 힘 [삶 사회 세상보기〔회원칼럼〕]

명분 없는 시대, 솔선하여 바로잡는 힘

※ 이 글은 《인천일보》의 오피니언면 [춘추세평]에 게재된 2026년 3월 30일자 기사를 저자와 언론사의 허락으로 본 웹진에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진보성(한국방송통신대학교)

 

미국의 이란 공격으로 인한 전쟁 상황은 명분이 사라진 채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의 뻔뻔하고 잔혹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아, 매우 염려되고 한편으로는 불쾌하기까지 하다. 트럼프는 이란의 핵무기 개발로 인한 지속적인 위협을 차단하고 이란의 국민에게 자유를 얻게 해주겠다는 말을 내뱉고 있으나 그것이 거짓말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거짓 명분으로 기워진 누더기 같던 윤석열 김건희 집권 시기를 경험했던 우리로서는 지금의 혼란한 세계정세의 영향으로 회복 중이던 대한민국이 다시 정체되지는 않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내란 세력들이 여전히 잠복해 있다는 불안감도 여전하다.

불안한 세계 정세 걱정에 얼마 전 손에 잡은 책이 <논어>이다. “정치란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공자가 정치를 묻는 질문에 대답한 짧은 말이다. 그의 언행록인 <논어>에는 바로잡는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바로잡음(正)은 분명 바로 잡을 대상이 있어야 성립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바로 잡을 대상과 사안에만 주목하고 정작 바로잡는 주체는 소홀히 여기는 경우가 많다.

공자는 바로잡으려는 주체가 먼저 바로잡혀 있어야 올바름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대가 올바름으로 솔선한다면 누가 감히 올바르지 않겠는가?” 결국 올바름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바로잡으려는 주체가 스스로가 올바른 태도를 잃지 않는 항상성이 유지되어야 한다.

바른 말(정언·正言)도 마찬가지이다. 정치인이나 행정가의 직임에 있는 자들이 내뱉는 말은 이른바 정언이 되어야 한다. 많은 경우 이들의 말은 유권자나 지역주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또는 정치적 셈법으로 과잉되어 부풀려지는 예도 있다. 그래서 이들이 내뱉는 말의 문구가 그 자체로는 매우 건전해 보인다 해도 내뱉은 말을 정치적 행위로서 실현할 의지가 없고 실천성이 모자란다고 판단된다면 그 말은 정언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공자는 만약 자기가 정치 일선에 나가게 된다면 “반드시 명분을 바로잡을 것(정명·正名)”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는 거짓 명분을 내세워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치는 전쟁을 부당하다고 비판했다. 전쟁의 명분을 공적인 사안과 연결된 문제라고 강변하나 실은 사적인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꼼수가 숨어있기에 부당한 것이다.

최근 뉴스에서 미국이 이란을 공격한 전쟁통에 트럼프의 두 아들이 드론 제조업체에 투자하여 막대한 이익을 본다는 기사를 봤다. 전쟁을 주도하는 대통령의 일가가 자국의 국방부가 큰 자본을 들이는 사업에 발을 들이는 것이 과연 정당한 일인가. 이 전쟁의 부당함이 뻔히 드러나 보이는 상황에서 윤석열의 무죄를 주장하는 한국의 극우 유튜버들은 트럼프의 호르무즈해협 파병 요구에 적극 응해야 한다고 소리치고 있다. 그리고 마치 이들의 선동에 호응하듯 국민의힘 일부 국회의원들은 즉각 파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나섰다. 미국과 이란의 전쟁이 우리에게 미칠 악영향은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도 발생한다.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이 대목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27년간 살아온 자가를 매물로 내놓은 일을 떠올리는 것은 뜬금없는 일이 아니다. 명분 없이 혼돈과 비정상이 횡행하는 시기에 잘못된 것을 솔선하여 바로잡으려는 의지를 행정부 수반에게서 보게 된 사실은 분명 인상적인 일이다. 명분은 이렇게 만들어져야 한다.

출처 : 인천일보 https://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319848&page=2&total=102

볼떼르의 관용, 루소의 혁명 [천 하룻밤 이야기]

볼떼르의 관용, 루소의 혁명

2026 07 23 대서(大暑): 이때부터 배 위에 수건한 장으로 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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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사상사에서 프랑스에서는 중세 암흑기라고 부르지 않고, 새로운 사색(통감)의 시대라고 부르면서, 철학과 사상의 생성이 있었다고 한다. 통감은 중국의 자치통감에 비해 느리지만, 프랑스에서는 파리학파와 샤르트르학파의 영향으로 등장한 프란체스코학파는 알베르투스와 토마스 아퀴나스학파와 달리 실재적이고 구체적인 사실들을 다루어야 한다고 하면서, 신학적 담론들을 경험적이고 과학적인 연관들을 예로 들어, 여러 논의 방식들을 제기하고, 그 방식들에서 합리적이고 시험 가능한 담론으로 평결하였다고 한다. 법정과 달리 사상에서 이런 평결론이 파리 대학에 영향을 주어 프란체스코파가 대학의 교과목을 장악할 정도였다. 꽁트는 12세기에서 13세기의 이 시기를 프랑스에서 중요한 문예부흥기라 보았다. 그럼에도 교회권력은 마남사냥을 하면서, 아퀴나스를 주축으로 삼아 지금까지도 파리대학은, 마치 사문난적의 주장처럼, 아퀴나스파가 현재도 주축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시기는 종교의 시대였고 변혁기였는데, 토지를 너무 많이 소유한 있는 사찰에 대해 개혁을 하려는 신흥불교가 있었고, 다른 한편 변역의 주역이 될 유학자를 길러낸 이색(李穡, 1328-1396)이 있었다. 이 변역기는 새로운 불교든 유교 수입이든 ‘달리 생각하기’가 도래하면서 일어난 것이다. 서양사에서는 평결의 시대에 유명론을 낳았고, 우리에게는 통치체제의 기반을 위한 주자학(신유학)의 수입인 셈이다.

*

변역(變易)기로서 서양사상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시기는 18세기 인데, 일제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또는 윤석열에 경도된 자들이 ‘계몽’이라고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1700년대를 “빛들세기”라고 하고 앵들로색슨에서는 계몽기라 한다. “빛들 세기” 이전에 평결의 시대에는 화두가 신이었다. 그 신과 연관으로부터, 하늘 또는 이데아가 추상관념으로 실재하느냐를 선문답처럼 다루었는데, 교회는 변증법적 통일을 하려고 하나의 동일성, 완전성으로 가야만 한다고 했었다. 이에 비해 이상성과 관념성이 이름뿐이라고 하면서, 사실들에 대한 선문답에서 대답하는 이들마다 각자가 다른 측면에서 보기 때문에 여러 견해들이 등장하고, 이를 합의 또는 협약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기에, 추론의 과정을 거쳐서 평결을 내렸다. 아마도 사법상의 처리는 하나의 체계로서 귀결이 필요하겠지만, “하나”라는 체계 속에서 진리를 주장하는 이들이 설치면, 다양한 견해들이 마남사냥 시대에는 입을 닫는다(입틀막이다).

하나의 진리를 주장하는 이들은 하나 이외 다른 것을 말하는 이들을, 예를 들어 갈릴레이나 브루노의 마남 사냥처럼, 종교재판에 부치거나, 일상의 백성들에서 먹고 살 것이 있다고 고집을 피우는 이들을 또는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말을 듣지 않는 과부들을 마녀사냥으로 몰아붙이고 그 재산을 교회가 차지했다고들 한다. 중세 같은 폭압과 강압 속에서 그래도 ‘니르고자 홀배’ 있었던 백성 또는 인민은 심층(深層)으로 흐른다. 이런 저항이 조직화될 수 없었던 시절이다. 조직화라는 글쓰기는 라마르크와 꽁트 이후이다.

“빛들 세기”에는 빛이 화두였다. 신의 계명도 빛으로 전달한다고 설교하였지만, 인민은 빛이 교회에는 성직자에게만 비추는 것이 아니라 온세상에 골고루 비춘다는 것을 잘 느끼며 산다. 그래 알어(알았어), 나는 빛을 쬐러 저 들판과 산으로 가 볼 것이야, 이미 경험이 있었다. 페스트가 창궐했던 14세기 중반(1347-1351)에 신의 기적과 은총을 입으려 교회안에 갔던 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잘 알았다. 자연에서 바람이 불고, 신선한 산 중에 모여 시간을 보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남긴 것이 데카메론(1353)이라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이시기에, 우리나라에서 불교의 왕사들이 탐진치(貪瞋癡)에 빠진 시기였다.

표면 밑으로 흐르는 심층의 조직화는 프랑스 대혁명과 둘째 혁명을 거친 1830년에서야 인민들에 의해 본격화되고 제반과학이 제각각으로 발달한다. 그런데 중세를 지나 백성이 표면 위로 오르기 전에, 그래도, 프랑스에서는 백성의 ‘니르고자 홀배인’ 프랑스 입말로 글쓰기를 하였다. 몽테뉴에서부터 데카르트에 이르러 프랑스 입말로 사상과 철학을 이야기했다. 왜 이 때일까, 유일신앙의 추론이 자연의 추론에 비해 억지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와 더불어 믿음의 체계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에 대해 풍자한 에라스무스가 있었고, 프랑스에서는 문학자 라블레가 있었다. 그리고 성직자도 귀족도 아닌 평민 신분들이 또는 몰락한 진보지식인이(실학 선비 같은 이들이) 세계의 중요한 사상들과 추론의 진리들을 프랑스어 번역하였다(제일 덕본이가 무학이었던 루소였다). 이런 100여년을 지나서 백성이 제 입으로, 제 삶의 터전의 이야기를 제 머리(영혼)로 표출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체계를 가진 이들은 이런 이야기를 중구난방이라 했을 것이고, 벩송을 표현의 빗대어 용어를 빌어 오면, 삶은 당연히 “우여곡절”을 겪는다.

“빛들세기(1700년대)”라는 명칭은 나중에 붙인 이름이지만, 자연을 다루는 이야기는 이미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가 전개했고,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인 데카르트는 기하학, 굴절광학, 기상학을 저술들에서 빛을 여러 방식으로 다루었다. 이런 학습에 들어가기 위한 방편으로 그는 ‘서문’으로 짧게 프랑스어로 “방법서설”을 썼다. 빛의 직진과 경로(궤적) 굴절도 자연의 것이었다. 그 종교가 숲속에 악마(데몬) 또는 요술사(마녀)가 살고 있다는 것이 거짓말이라고 한 것은 루소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였다. 그는 고아가 되어 방황하다가 숲속에서 지내기도 했는데, 숲 속에는 밤에 악마 또는 간을 빼먹은 마녀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루소(1712-1778)의 청소년 시절이 1730년대이다.

“빛들세기”라는 것이 괜히 나온 소리가 아니다. 신은 모든 이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푼다고 하는 것이, 중세의 유명론으로 보면 말 뿐이라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그 종교를 믿지 않은 이들에게 어떻게 했는지는 ‘전설따라 오만리’에 퍼져있다. 빛은 말(유명)이 아니고 실재이다. 이 실재를 신이 창조했는지, 자연이 발산하는지를 선문답하듯이, 머리(오성, 지성, 이성)로 추리나 추론하여 토론할 필요가 없다. 자연에서 사실로서 경험하고 실험하여 보여주면 될 일이다. 인간은 머리에서 사유의 추론보다 더 많고 더 재미있는 사실들을 끄집어낸다. 이것은, 마치 빛의 무한한 확산처럼 무한한 경우들을 제시하듯이, 악마의 장난이 아니라는 자연의 자기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었다. 이 흥미로운 시대인 1730년대에서 인민의 대혁명이 일어나는 시기까지의 과정이 나로서는 철학사에서 매우 흥미로운 것이라고 죽 여겨왔다. 그런데 들뢰즈/과타리가 “1730년대”를 서술한 이야기를 처음 읽었을 때 당황했다. 이야기가 철학일 될 수 있을까하는 추론하는 머리에서는 회의를 느꼈다. 이 알량한 추론이 얼마나 세뇌 받은 교육인지를 깨닫게 되는 데는 사실 오래 걸렸다. – 간단히 이야기하면 삐아제, 뒤르껭, 프로이트, 푸꼬, 라깡, 스피노자 등의 추론적 사고를 오랜 시간 공부를 하면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하였고, 이로서 앵글로색슨사고에서 벗어나면서, 달리 읽기와 달리 생각하기로 들뢰즈/과타리를 읽으면서 무지 재미를 느꼈다. 각설하고.

들뢰즈/가타리가 『천개의 고원』을 썼는데 두세 번 읽으면서, 이 두 철학자가 철학사 또는 사상사를 달리 썼다고 느꼈지만 왜 일까? 일단 이들은 철학사를 서술하는 방식을 편년체로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철학사일까 하는 질문을 받았는데, 내가 그에게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그냥 편하게 이야기 해보라, 그러면 당신도 두 저자처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더 중요한 것이 있다.동서양을 막론하고 편년체 역사는 왕조사를 중심으로 한다. 그 왕조사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만 상부의 견해들(공론장이라고들 하지)이다. 말하자면 심층(백성, 인민)의 이야기들 중에 간혹 왕조사가 필요한 것만 끼워 넣었을 뿐이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역사관에 대한 관점을, 왕조사에서 인민의 역사으로 바꾸기 이전에 중요한 인물이 있다. 미슐레이다. 그는 왕정역사를 연구하다가 루부르 궁 옆에 있는 혁명자료실에 들어갔다. 정돈된 역사서들의 반대편에서, 먼지가 쌓이고 낱장으로 이런 묶음과 저런 묶음으로 켜켜이 쌓여 있는 종이들이 아우성을 치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이 종이들이 혁명과정에 인민이 혁명공안위원회에 보낸 자술서와 의견서, 즉 소원수리였다. 미슐레가 방향을 바꾸면서 역사서술의 새로운 방향이 생겼다고 한다. 아날학파이다.

역사에 대한 통감(거울 비쳐보기)은 12세기에 있었다고 했었다. 역사의 과정에 대한 대조와 비교를 하는 것도 인류사에서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이다. 성직자들에 의해 쓰여지던 왕조사의 시기가 끝난 것은 루이 14세(1638-1715)의 이후이다. 권력자가 또는 성직자가 아무리 자비로운 시혜를 베푼다고 해도, 그것은 강압과 명령, 인민의 피를 빠는 것이라는 한 것을 대중이 알아채기 쉽게 글쓴이는 니체였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그런 ‘사회 전체가 감옥’이라고 쓴 이는 루소이다. 루소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 1730년대를 생각해보면, 인물이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역사(시대)가 인물을 만든다. 그 인물이 두 저자 표현으로 용출선이다.

*

이 두 저자, 들뢰즈/과타리의 이야기, 즉 1730년대의 이야기는, 모든 방면에서 모든 사유에서, 거대한 풍선 위의 찍힌 수많은 점들과 같은 이야기들이 백성들 사이에 흐르고 돌고 있었다. 새로운 사유, 상상, 공상 등이 저 밑바닥에서부터 꾸물꾸물 솟아올라 풍선의 가장자리에 그림들을 그렸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편에서 플라노메네 아이티아를 유모, 필연 모태, 자발성(원인) 등으로 표현한 것도 안에서 솟아나는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 어쩌면 유몽인(1559-1623)의 『어우야담』에 이어 김천택의 『청구영언(1728)』은 이런 이야기의 일부를 모았을 수도 있다. 세계사에서 인류는 그즈음에서 용출선을 내보였다. 탈주선이라고 하는 용어는 기존의 불판(귀족과 성직자의 놀이판, 하버마스의 공론장)에서 벗어나야하기 때문에 쓴 표현이리라.

『천개의 고원: 자본주의와 스키조프네니(1980)』의 제10장, 1730년: 강렬하게-생성, 동물-생성, 지각 불가능하게-생성에서, 얼마나 많은 자연의 생성작업과 같은, 즉 플라노메네 아이티아의 표면으로 분출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지 읽어 보아야 할 것이다. 인류의 기나긴 의식 안에서 기억은 흐른다. 그 기나긴 기억 속에서 겹겹이 쌓여있어 이리저리 엉켜있던 추억들이 분출한다. 그 분출에는 순서가 있지 않다. 이것을 배치하고 배열하는 논리적 추론이 필요하다. 백과전서파는 인민들이 읽기 좋게, 게다가 합리적 추론으로, 배열하는 작업을 했으리라. – 우스게 소리 루이 18세가 취미가 열쇠 만들기인데, 백과전서에 상세하게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다가, 왜 이 책이 금서가 되었는지를 장관에게 거꾸로 물었다는 것이다. – 인민은 작업할 줄 알았고, 상층은 금지할 줄 알 뿐이었다.

제10장 안에서 다룬 내용들의 제목만 보아도 흥미롭다. 물론 이것이 철학이 되느냐고 하는 이들도 있다. 천국과 부활은 철학이 되고? – 어느 박물학자의 추억들(Souvenirs d’un naturaliste), 어느 베르그송주의자의 추억들 (Souvenirs d’un bergsonien), 어느 마법사의 추억1(Souvenirs d’un sorcier I), 어느 마법사의 추억들 2 (Souvenirs d’un sorcier II), 어느 마법사의 추억들 3(Souvenirs d’un sorcier III), 어느 신학자의 추억들(Souvenirs d’un théologien), 어느 스피노자주의자의 추억들1(Souvenirs à un spinoziste), 어느 스피노자주의자의 추억들 2(Souvenirs à un spinoziste II), 어느 <이것임>의 추억들(Souvenirs d’une heccéité), 어느 판 짜는 자의 추억들(Souvenirs d’un planificateur), 어느 분자의 추억들(Souvenirs d’une molécule), 비밀의 추억들(Souvenirs du secret)의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서, 저자들은 자연이라는 다양체에서 생성들을 이야기 할 것이다. ‘추억들과 생성들, 점들과 블록들(Souvenirs et devenirs, points et bloc)’, 점 체계들과 다선 체계들의 대립(Opposition des systèmes poctuels et des systèmes multi-linéaires), 음악, 회화, 생성들(La musique, la peinture et les devenirs),음악 되기(Devenir musique) 등을 제시한다.

추억들은 순서 없이(서수가 아니라 기수처럼) 마치 터전의 상황에 따라 기호로서 등장한다. 왜 이 시대의 백과전서파들이 사실들에 대해 연대적 배열과 달리, 항목들을 정하여 페이지처럼 작성에 따라 언제든지 다시 배열할 수 있다고 생각했겠는가? 사실들의 언어적 배열로서 추론도 있지만, 수학적 계열도 경의 수에 대한 조합도 논의 되는 시기였다. 이들 협력자들 중에는 수학자들이 많다. 게다가 뷔퐁과 같이 생물학적 발생의 계열이 있다고 하는 것도 수학의 계열에서 빌려왔다고 하고, 이런 발상으로부터 라마르크에 이르러 변형론(진화론)을 제시할 것이다. 이 많은 이야기가 철학사와 연관이 있을까?라고 아직도 걱정하는가!

통감(사변, 거울비추기) 시대와 평결의 시대를 지나서, 입말이 소통되는 “빛들세기”에 다양체의 발현을 보았던 것은 아마도 에밀 브레이어의 『철학사』(1934)”에서 일 것이고, 그는 이 시기를 재미있는 표현으로 “요상한 것들의 박물관”이라고 했다. 인간의 역사는 여러 갈래 중에서, 각 나라는 자기 터전에 맞게 사실들과 사건들을 배열하고 배치한다. 그런데 표현된 배열과 배치 이전의 수많은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의 기억 속에 흐르고 있다. 언제 불쑥 나올 때, 추억의 지층을 마치 지각변동처럼 표면으로 솟아나게 하는 것이다.

“빛들 세기”의 이야기를 로고스(추론)에 맞게 정리하는 과정이 디드로를 중심으로 하는 그 시대의 진보 지식인들이었다. 그래도 역사적으로 그 시대의 화해와 불화의 중요 인물은 볼테르와 루소였다. 하나는 상층에게 관용을 부탁했고, 다른 하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민에게 심층의 자발성을 발휘하자고 했다. 디드로의 소설은 프랑스에 알려지기 전에 괴테에게 알려질 정도로, 이 시대의 프랑스어 입말의 소통은 심층에서 나와 표면에서 세계로 확산되는 시기였다. 라틴어가 아닌 그런 입말이 소통되는 데는 거의 200여년이나 걸렸고, 이에 힙입어 제3신분이 등장하고 인민의 혁명 그리고 인민의 제헌의회의 법률을 만드는 것이 대혁명이다.

우리도 통감의 시대를 거쳤으나, 새로운 시대를 열 변역(變易)의 시대를 제대로 형성하고 맞이하지 못한 것이 두 번의 큰 전쟁 때문일 것이다. 왜와 전쟁과 청과 전쟁이었다. 삶의 터전이 피폐해, 백성이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으니, ‘니르고자 홀배’의 소통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한편에서는 실학을 하였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상층의 공론장을 돈독히 하여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이 후자에서 노론 지배가 백성과 지식인들의 입틀막을 하였으니, 그것이 “사문난적”이란 이름으로 마치 마남사냥하듯 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일제가 “대전통고”를 통해 학파와 가문의 분파싸움을 시켰다고 하고, 지금도 사전이든 무엇이든, 인물을 표현할 때 성씨의 본을 표현하는 것처럼 가문을 먼저 드러내는 것도 상층의 지배의식이었다. 그가 어디서 태어나 무엇을 생각하며 자랐는지는 뒷전이다. 이런 ‘사문난적’ 기득권은 미국제국 아래서, 또 다시 노론이 집권의 연장을 위해, 미국의 ‘맥카시 선동’과 같은 빨갱이사냥을 빌려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말하면 악마취급하면서, 지금도 보안법이란 이름으로 사상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를 박탈하고 있다.

*

이런 역사적 과정에서 일제잔재와 미제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으로. 백성, 민중, 대중, 인민은 끊임없이 저항하면서 흐르고 있다. 민중운동은 동학에 끈을 연결하고 있고, 민주화라는 노동 해방의 이름으로 대중 운동도 죽 이어져 왔다. 사상사에서 사문난적 이래로, 사상의 자유가 거의 없지만, 그래도 백성의 입말은 흐른다. 해방 후 80여년 동안, 입말을 한글로 문자화하면서, 인민의 소통이 활발해졌다. 게다가 프랑스의 백과전서와 같은 방식이 위키피디아가 형성되었고, 그보다 더 나아가 쳇GPT와 AI지식를 통한 소통도 되고 있다. 입말이 오랜 억압과 강제에 벗어난 것은, 촛불시위와 응원봉 불빛 항쟁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부터 이제서야 공화정이라는 입말이 터전에서 흐르고 있다. 대표자 선출에서 1인 1표제가 당연한데도, 이게 일제의 간화선을 배운 이들처럼 선문답하듯이 말장난 하려 든다.

프랑스 공화정의 등장은 대혁명에서였다. 이 공화정은 그리스의 직접 민주제와, 황제[참주]제 이전의 고대 로마의 원로원의 의회 제도를 함께 모방한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귀족과 성직자의 놀이판에서 제3신분이, 즉 성직자 또는 귀족에서 기득권을 내려놓은 지식인들이, 백성 또는 인민과 더불어 현실의 표면에서 주인으로서 등장한 것이다. 직접민주제와 권력자들의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인민이 소환하는 소환제가 공화정의 기본이다.

민주당과 같은 한 정당에서 1인 1표제의 공화정을 실험하려고 한다. 볼테르처럼 시대의 깃발을 드는 유시민도 있고, 루소처럼 공화정을 추구하려는 조국도 있다. 게다가 독일식 사법체계가 노동자 억압과 인민 강제라는 것을 알리는 박은정 같은 조국혁신당의원과 재야에서는 이병철 변호사와 최강욱 변호사 같은 이들도 있다. 프랑스 혁명의 동인이었던 제3신분이 발언하는 것처럼, 신장식 조국혁신당 의원은 문제를 제시한다, 즉 (1) 사회주의란 (붉은 칠) 낙인찍기, (2) 문조털래유로 돌팔매를 하는자들, (3) 검찰개혁의 기둥에 도끼질 하는 자에게 반격을 공언한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와 같은 길을 가도 된다고 하는 것을 실행하려는 진보당의 김재연도 있다. 어쩌면 우리나라가 우리 입말로 백성(민중, 대중, 시민, 인민)이 ‘제 뜻을 펼치는’ 시대, 즉 프랑스 에서는 2백여 년이 걸려 피의 혁명을 일으킨 다양한 생성의 시대를, 우리는 80여년 만에 촛불 또는 응원봉을 든 빛의 혁명을, 평결과 조화정의로서 이루어 갈 것이다.

입말의 시대가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라고 알리는 목탁소리에 깬 새벽 새소리들처럼 유시민, 조국, 박은정, 이병철, 최강욱, 신장식의 노력에 찬사를 보내며, 역사에서 처음으로 공화국의 시험대에 오른 정청래 민주당 후보 대표에게 응원을 보낸다.

(5:32, 59RMCC)


필자 류종렬: 한철연 회원, 철학아카데미
『깊이 읽는 베르그송』(2018), 『처음 읽는 베르그송』(2016) 등을 번역했고, 『박홍규 철학의 세계』(2023), 『박홍규 형이상학의 세계』(2015) 등을 함께 썼다.

코너명인 ‘천 하룻밤 이야기’는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
세헤라자데가 천 하룻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는 설화에서 따왔다.
이 지면에 천 하룻밤 만큼 이어진 한 사람의 생각을 적는다.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5-내부와 외부의 관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변증법 반성운동35-내부와 외부의 관계

1)

본질적 관계는 세 단계로 전개된다. 전체와 부분, 힘과 드러냄, 내부와 외부의 관계다. 이 관계는 모두 개체 사이의 관계를 매개로 두 세계 즉 본질(요소의 관계)의 세계와 현상(관계를 이루는 요소)의 세계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여기서 본질이 현상의 자립성을 어느 정도 파고드는가(현상의 반성 또는 본질의 정립)에 따라서 세 단계가 구분된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에서 전체는 부분에 대해 외면적이며 다만 형식적인 관계에 머무를 뿐이다. 힘과 드러냄의 관계에서 힘은 물체와 외면적으로 관계하지만, 독립적으로 실존한다. 힘이 상호작용하는 관계에 이르면, 상호작용의 양면으로서 내부와 외부가 출현한다.

전체와 부분의 관계나 힘과 외화의 관계는 역학적 자연에 존재하는 관계다. 내부와 외부의 관계가 유기체적 조직이 다시 출현한다. 실존에서 현상을 거쳐 관계에 이르기까지 존재론에서 이미 전개되었던 생성의 운동이 다시 반복되었다. 마침내 힘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본질론의 출발점이라고 할 유기체적 조직이 다시 출현한 것이다.

2)

현상 편은 실존 장, 현상 장, 관계 장으로 전개된다. 이는 판단 형식에 상응하는데, 실존이 정언판단 형식에 해당한다면, 현상에서 출현하는 법칙은 가언판단 형식에 해당한다. 그리고 관계 장에서 마침내 출현한 내부와 외부의 관계가 곧 선언판단 형식에 해당한다.

법칙이 가언판단 형식이란 것은 쉽게 이해된다. 그런데 내부와 외부의 관계가 선언판단 형식이라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여기서 헤겔이 선언판단 형식이라 한 것은 배타적인 선언판단 형식을 말한다. 즉 두 선택지 p와 q가 서로 모순 관계에 있을 때 판단이 A= p or q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면 (배타적) 선언판단이 된다.

이런 배타적 선언판단에서 p, q는 종적 본질이 실현되어 나타나는 개체의 집합을 이룬다. 이 배타적 선언판단에서 주어인 A는 p, q라는 개체를 통해 자기를 실현하는 종적 본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배타적 선언판단은 내부와 외부의 관계를 말한다.

개체의 집합은 이런 배타적 관계에 있을 때 전체 집합이 된다. 만일 개체를 다른 방식으로 나누면 전체 집합이 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생물체를 암수로 구분하면, 배타적 관계가 되고 여기서 암수의 개체는 종의 완결된 전체 집합을 이룬다. 그러나 생물체를 영양 기능에 따라서 분류하게 되면, 영양을 얻는 방식에 식물과 동물로 대체로 구분되더라도 그 사이에 다양한 중간 집단이 있고 그 중간 집단은 무한히 세분되므로 완결된 전체 집합을 이루지 못한다.

그런데 헤겔은 배타적 전체 집합을 이루는 것과 종적 본질과 필연적으로 상관한다고 본다. 즉 배타적인 전체 집합이 그 집합을 구성하는 원리가 종적 본질인가를 결정해 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꾸로 종적 본질은 자기를 배타적인 집합으로 출현하게 한다.

그러므로 생물체를 암수로 나누면 배타적 집합이 되는데, 그러니 암수로 나누는 기준 즉 재생산 기능이 생물체의 종적 본질이 된다. 반면 그것은 영양 기능을 기준으로 나누었을 때 배타적 집합이 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종적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하게 된다. 배타적 집합과 본질 사이의 이런 연관을 표현하는 원리가 곧 내부와 외부의 합일이라는 원리이다.

3)

힘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자립적인 실존이 동시에 가상이 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지양하면서 자기에 대립하는 타자로 되며, 타자로 반성하는 것을 통해 자기 내로 복귀하며, 타자를 정립하는 것을 통해 자기가 존립한다.

여기서 자기 관계한다는 점에서 자립적인 실존이지만, 이것이 자기 부정을 통해 또는 대립하는 타자를 매개로 해서 나온다는 점에서는 가상이다.

“이제[힘의 상호작용 속에서] 공허하고 투명한 구별만이 즉 가상만이 현전한다. 그러나 이 가상은 매개이어서 이것은 자립적인 존립 자체이다. 대립된 규정은 자기 자신에서 자기를 지양하며 그들의 운동은 이행일 뿐만은 아니다. 부분적으로 그 출발점이 되어 타자로 이행되었던 직접적인 것은 다만 정립된 것으로서만 존재하며 부분적으로 이를 통해 규정의 각각은 그 직접성 속에서 이미 자기의 타자와 통일을 이루며 이를 통해 이행은 전적으로 그에 못지 않게 자기를 정립하면서 자기 내로 복귀하는 것이다.”(논리학, GW11, 364-365)

이런 힘의 상호작용은 이미 이 힘들의 내적인 통일을 전제로 한다. 상호작용은 이런 내적인 통일이 자기를 드러낸 것이다. 이 내적 통일을 헤겔은 내부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생물체의 종적 본질인 재생산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힘이 상호작용하므로 여기서 자립적인 개체는 대립하면서도 상호작용하는 개체적 실존으로 분화된다. 이런 개체가 이루는 집합이 곧 외부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결합을 통해서 재생산하는 암수 두 개체의 집합이다. 이 집합은 종적 본질이 실현된 실존의 집합이다.

여기서 내부 즉 내적 본질과 외부 즉 개체의 집합은 상호작용하는 유기체적 조직을 토대로 한다. 그것의 양면이 곧 내부와 외부이다. 그러므로 내용으로 보면, 내부와 외부는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다만 형식상으로 보면, 양자는 내부와 외부로 구분된다.

4)

여기서 내부와 외부는 동일한 상호작용하는 유기체적 조직을 토대로 한다. 헤겔은 이 유기체적 조직을 ‘절대적 사태’[실체]라고 하는데, 내부와 외부는 이 유기체적 조직의 동전의 양면이며 다만 형식적인 구별이므로 내부와 외부는 상호 직접 이행한다.

“내부는 반성된 직접성 또는 본질의 형식이니 외부 즉 존재의 형식에 대립하여 규정된다. 그러나 양자는 다만 동일한 것이다. 이 동일성은 우선 양자가 충만한 내용을 지닌 토대로서 또는 절대적 사태로서 갖는 순전한 통일이며 그런 통일에서 두 가지 규정은 서로 무차별하고 외적인 계기이다.”(논리학, GW11, 365)

내부와 외부는 이처럼 동일한 사태가 지닌 양 측면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양자는 직접 자기의 타자로 이행한다. 즉 그것이 외부이므로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은 내부이며 거꾸로 그것이 내부이므로 바로 그 때문에 그것은 외부이다. 예를 들어, 유기체 재생산의 기능은 오직 암수 개체로 분화되는 것을 통해서만 수행되며, 암수 개체의 분화는 곧 유기체의 본질이 재생산 기능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왜 유기체의 재생산 기능은 암수라는 서로 배타적인 관계에 있는 개체로 분화되는가? 이는 암수 중간적인 또는 암수 양면적인 개체의 출현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거꾸로 예를 들어 영양을 획득하는 기능으로 분류하면 식물과 동물로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그 중간에 다양한 집단이 있는데, 기생 식물이라든가 이동하는 식물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개체가 배타적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그 기능은 생물체의 본질적 기능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헤겔은 이에 대해 대답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부가 본질로, 외부가 존재로 규정된다면, 하나의 사태는 다만 그 본질 속에 있는 한에서 바로 그 때문에 다만 직접적 존재이며 하나의 사태는 다만 존재하므로 다만 비로소 여전히 그 본질 속에 있다.”(논리학, GW11, 366)

즉 내부와 외부는 개념적으로 “각각이 다른 규정을 전제로 하며, 그 자신의 진리인 이 다른 규정으로 이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내부는 “그의 타자 즉 외부에 관계하는 것으로서만 존재하며”, 외부는 “본질 즉 내부에 관계하는 것으로서만 존재한다.”(논리학, GW11, 366)

일반적으로는 유기체가 대립된 개체로 분화되는 경우, 유전자의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어서 그 종적인 재생산을 더 강화할 수 있게 한다고 설명된다. 헤겔은 이런 설명보다도 개념적으로 내부와 외부는 유기체적 조직의 동전의 양면이라는 설명으로 대체한다.

이를 고려해 볼 때, 헤겔은 유기체적 조직은 그 본래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대립하는 개체로 분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일반적인 개념적 진리로 삼는 것으로 보인다.

5)

헤겔은 예를 들어 생물체의 종이 암수로 구분되는 것과 같은 것을 내부와 외부가 직접적으로 통일되는 것으로 규정한다. 양자는 상호작용하는 유기체적 조직이라는 절대적 사태를 토대로 한 것이다. 이 사태가 내용이 되고, 내부와 외부란 다만 사태가 지닌 동전의 양면이며 형식적 차이에 불과하다.

여기서 외부와 내부의 통일은 유기체적 상호작용을 매개로 한다. 그러나 이 유기체적 상호작용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일 뿐이므로, 이를 매개로 한 외부와 내부의 통일 역시 우연하다. 예를 들어 종의 재생산은 암수의 결합을 통해 일어나는데, 암수의 만남 자체가 우연적이므로 이런 재생산은 우연적인 것으로 머무른다. 그 때문에 종의 재생산은 지속성을 지니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제 외부와 내부의 필연적인 통일이 요구된다. 이런 필연적 통일은 상호작용하는 개체의 필연적인 만남을 전제로 한다. 이를 통해 내부는 외부를 통해 자기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하게 된다.

예를 들자면, 인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를 보자. 인간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연적으로 타자와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다. 자연에 대해 노동하기 위해서는 상호 협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사회는 개체의 작용을 통해 자기를 지속하게 한다. 헤겔은 내부와 외부의 이런 필연적 관계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내부는 단순한 자기 내로 반성된 동일성인 한 직접적인 것이며 따라서 본질인 동시에 존재이며 외부적인 것이다. 외부는 다양한 규정된 존재인 한에서 다만 외부이니 즉 비본질적인 것으로서 정립되면서 근거로 복귀하니 곧 내부로 존재한다.”(논리학, GW11, 365)

내부와 외부의 직접적인 통일에서 내부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작용하는 개체 내에 머무른다. 반면, 내부와 외부의 필연적인 통일에서 내부는 이제 외부와 구분되는 독립적인 실존을 가지게 된다. 거꾸로 외부는 자체 내에서 내부를 지니게 된다. 그 결과 외부와 내부 사이에 상호작용이 일어나게 된다. 예를 들어 인간의 유적 본질은 사회로서 개체들의 집합과 구별되는 독립적인 실존을 가지게 된다. 또한, 상호작용하는 개체는 각자의 자기의식이라는 고유한 내면을 지닌다.

그 결과 인간은 본질에 대한 자각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사회를 구성한다. 여기서 유적 본질을 사회로 실존하게 하는 것은 개인이 내적 의식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매개한다. 내부와 외부는 매개적으로 통일하게 된다.

“즉 각자는 바로 그것이 본래 그러한 것인 자신의 타자를 통해 관계의 총체성이 된다. 또는 거꾸로 말하자면 각각의 측면이 지닌 규정성은 이 규정성이 그 자체에서 총체성이라는 사실을 통해 다른 규정성과 매개된다. 그러므로 총체성은 형식이나 규정성을 통해 자기 자신과 매개하고 규정성은 단순한 자기 동일성을 통해 매개된다.”(논리학, GW11, 365)

내부와 외부의 직접적인 통일은 이제 막 완성되었다. 앞으로 3편 실제성에 들어가면 직접적이고 우연적인 통일이 필연적이고 매개되는 통일로 발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