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의 철학자 윤구병 선생의 ‘꿈꾸는 형이상학’ (2021) 서평[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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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의 철학자 윤구병 선생의 <꿈꾸는 형이상학> 서평

1)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윤구병 선생님(이하 ‘선생님’으로 지칭)의 철학을 소개한 한재경 선생의 책 <윤구병 철학의 이해>(미발간 원고)을 읽고 다시 한번 선생님의 형이상학에 흥미가 이끌렸기 때문이다.

필자는 몇 년 전인가 선생님을 모시고 선생님의 철학에 관한 심포지엄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필자는 선생님이 2013년 발간한 책 <철학 다시 쓴다>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 이 책을 중심으로 선생님의 형이상학에 관해 논평했다.

이번 읽은 한재경 선생의 책을 통해 그동안 선생님의 철학적 사유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새로 발간한 윤구병 선생의 책을 두 권이나 사서 읽었다. 하나는 <꿈꾸는 형이상학>(보리, 2021)이고 다른 하나는 <철학자가 본 우주 역사>(보리, 2024)이다. 그 가운데 전자가 눈에 뜨였다. 이 책에서는 확실히 그 이전에 나타나지 않았던 논의, 대표적으로 ‘거품 우주론’이 새로이 등장해서 진한 흥미를 느끼게 된 것이다.

2)

먼저 한재경 선생에게 감사하다. 한 선생은 선생님의 철학을 ‘산뜻하다’(또는 스마트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잘 정리했다. 먼저 선생님의 핵심적 저서 세 권(위의 두 권을 제외한 나머지 책은 ‘있음과 없음’이다)을 ‘단계’로 요약하고, 여기서 문제가 되는 논점을 ‘고리’로 정리했고, 마지막에는 ‘묻고 답하기’를 통해 독자가 드는 의문점을 풀어주었다.

이런 감각은 선생님이 젊었을 때 ‘뿌리 깊은 나무’라는 잡지를 편집할 때 지녔던, 또 출판사 보리를 통해 새로운 감각으로 그림책을 만들어낼 때 보여주었던 감각인데, 한 선생이 그런 감각을 빼닮았다는 느낌이 들어, ‘우연이 아니네’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필자가 잘 정리했다는 것은 선생님의 생각에 물음을 던질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한 선생의 정리 덕분에 선생님의 생각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필자가 한 선생의 글을 평가하려면, 선생님의 철학을 알고 그것과 비교해야 하는데, 아직 그럴 처지에 이르지 못해 그런 평가는 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서문에 선생님 자신이 한 선생의 책이 자신의 철학을 온전하게 담아냈다고 하니, 그에 기초해서 차라리 선생님의 철학에 직접 접근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철학 다시 하다’라는 저서도 못지않게 선생님의 철학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빠뜨린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필자가 보기에 선생님의 형이상학에는 그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동양철학의 전통이 그 가운데서도 특히 기 철학의 전통이 새롭게 등장하는데, 이 전통에 관해서 충분히 부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필자가 보기에 선생님은 그사이에 그 이전 플라톤이나 신플라톤주의 전통에서 동앙 철학의 기 철학 전통으로 대대적인 회전 기동을 했다. 그런 가운데, 아직 그런 회전 기동이 완성된 것이 아닌지, 그 이전 플라톤적 이원론적 체계 즉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양극 체제와 기 철학에서 기 일원론적 사유가 혼재하면서 그사이에 균열과 충돌이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글을 쓰는 동기가 이런 갈등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한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3)

선생님의 철학의 출발점은 여러 책에서 강조되는 것과 같이 ‘없는 것’이라는 개념을 ‘빠진 것’으로 이해하자는 주장이다. 파르메니데스가 ‘없는 것’은 없다고 한 이래로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있는 것’에 대립하는 ‘없는 것’ 없이는 형이상학이 출발하지 않으니, ‘없는 것’이 부딪히는 난점, 모순을 피하려 ‘빠진 것’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하기를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상 여러 책에서 선생님이 사용하는 언어를 검토해 보면, 굳이 이런 제안이 의미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대부분 글에서 선생님은 ‘빠진 것’이라는 말 대신 ‘없는 것’이라는 말을 그대로 쓰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빠진 것’이나 ‘없는 것’이나 큰 차이가 없는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님이 그렇게 제안한 것은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인데, ‘빠진 것’은 빠진 것 외에 나머지는 있으니 아무것도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빠진 것’은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빠진 것’도 모든 것이 빠진 것으로 되면,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서 ‘없는 것’과 같은 것이 되니, 큰 차이가 없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필자는 파르메니데스처럼 과연 없는 것은 사유조차 할 수 없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없는 것’은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사유할 수는 있지 않을까?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사유는 ‘없는 것’ 없이는 사유할 수 없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구나 빨간색을 보고 거기에 없는 것인데도 곧바로 파란색이 아니라고 사유하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선생님은 글에서 ‘없는 것이 없다’는 ‘[모든 것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만약 ‘없는 것’이 사유할 수 없다면, ‘없다’가 중첩된 이 말을 우리는 어떻게 사유해서 그것을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인가?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사유는 반성적이다. 우리는 빨간색과 파란색(논의의 필요 상 색에 두 가지만 있다고 하자)을 묶어서 사유한다. 파란색은 빨간색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빨간색을 보고 곧바로 파란색이 아니라고 하며, 파란색이 없으면 빨간색이 있다고 생각한다.

+ 전기와 -전기를 보자. – 전기는 ‘없는’ 전기는 아니다. 다만 + 전기에 대립하는 전기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사유에서 우리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대립시켜 사유한다. 그러므로 ‘있는 것’이 있으면 ‘없는 것’은 없다고 말하기도 하며 ‘없는 것’이 있으면 ‘있는 것’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사유가 가능한 것은 우리의 사유가 ‘없는 것’을 통해서 사유하는 반성적 사유이기 때문일 것이다.

3)

선생님의 생각은 어떻든 ‘없는 것’을 ‘빠진 것’의 극단으로 보자는 것인데, 마찬가지로 ‘있는 것’ 역시 반대쪽 극단이 될 것이다. 양극단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은 ‘있는 것인 동시에 없는 것’이며 ‘있지 않은 것이며 없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곧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무규정자, 아페이론이다.

아페이론’ 개념이야 플라톤 철학 이래로 익숙한 개념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여기서 더 나가서 아페이론에 정도를 설정한다. 즉 ‘있는 것’이란 극단에 더 가까운 아페이론과 ‘없는 것’이란 극단에 더 가까운 아페이론이다. 이렇게 되면 그사이에 무한한 수의 아페이론이 출현한다. 제논의 역설이 잘 보여주듯 1과 0 사이에는 무한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아페이론에 정도가 있다는 것은 좀 이해하기 힘들다. 아페이론 즉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무규정적인 것인데 무규정적인 것에 정도가 있을 수 없지 않을까?

유한한 것들 사이에는 가깝고 멀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처한 극단은 극단인 한에서 무한한 거리에 있다. 무한한 거리를 측정할 수 없으니, 어느 것이 무한에 더 가까운가는 말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무한히 선한 하나님 앞에서 교황과 나 가운데 누가 하나님에 가까울까? 아마 하나님 앞에서는 다 같이 타락한 죄인일 것이다.

더구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상대적으로 짝이 지어진 개념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아페이론은 b, c, d는 있지만, a는 없다고 하자. 이것은 ‘있는 것’이 많으므로 ‘있는 것’에 가까운가? 그러나 사실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무한히 많은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에는 e, f, g, …d 없으니 차라리 없는 것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4)

일단 ‘있는 것’과 ‘없는 것’이라는 양극단 사이에 아페이론이 있다고 하자. 중요한 것은 이 아페이론은 운동한다는 것이다. 이 운동은 한편으로는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가는 운동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있는 것’에서 ‘없는 것’으로 가는 운동이다.

이 두 가지 운동을 선생님은 ‘함’과 ‘됨’의 운동이라 한다. 이 운동 개념이 사실 선생님의 형이상학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는 생각이다. 우선 이 운동은 각기 그 원천이 다르다. ‘함’의 운동은 원천이 ‘있는 것’에서 나온다. 반면 ‘됨’의 운동은 원천이 ‘없는 것’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형이상학의 핵심적 문제에 부딪힌다. ‘있는 것’은 있을 뿐이다. 그것이 순전하면 할수록 더욱 ‘있는 것’뿐인데, ‘있는 것’이 어떻게 ‘함’이라는 운동의 원천이 되는가? ‘있는 것’은 하나이니, 하나로 뭉치게 하는 힘이 나오는 것일까? ‘없는 것’은 여럿이니, 여기서 여럿으로 만드는 힘이 나오는 것일까?

있기는 있고 그것이 하나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하나로 만드는 힘은 다른 데 있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없는 것’은 여럿이더라도 그것을 여럿으로 만드는 힘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철학에서 ‘있는 것’, ‘없는 것’과 구별되어서 ‘임’과 ‘아님’이 논의되어 왔다. ‘임’은 그 자체가 긍정적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고 ‘아님’은 부정적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니 차라리 ‘임’과 ‘아님’에서 ‘함’과 ‘됨’이라는 운동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선생님은 ‘있는 것’과 ‘임’, ‘없는 것’과 ‘아님’을 이미 동일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임’과 ‘아님’이 따로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임과 아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관계는 모든 철학자가 논하는 중요 문제인데도 선생님의 글에서는 그런 논의가 없다. 왜냐하면, 양자를 일치하는 것으로 전제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양자는 언어상으로, 특히 한국어에서는 두 언어쌍은 명백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필자는 ‘임’과 ‘아님’이 운동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운동의 원천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아닌 다른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예시하려는 것이다. ‘임’과 ‘아님’이 운동의 원천이 아니더라도, 하여튼 운동의 원천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자체에 있다는 것은 특별하게 논증되어야 할 사실이다.

5)

이제 선생님 형이상학의 전모를 이해하기 위해 ‘있는 것’, ‘없는 것’이 운동의 원천이라는 주장을 논증 없이 받아들이고 보자.

더 큰 문제가 있다. 운동의 힘은 성격이 다르다. ‘있는 것’의 운동은 자기 방향으로 아페이론을 끌고 간다. 그래서 아페이론을 더욱 하나가 되게 만든다. ‘없는 것’은 자기 방향으로 아페이론을 끌고 가서 더욱 여럿으로 만든다.

이런 운동은 사실 헤라클레이토스가 촛불의 비유를 통해 생성하는 힘과 소멸하는 힘으로 제시한 바가 있다. 이런 운동하는 아페이론을 운동의 측면에서 보면, 끊임없이 운동하는 것이지만, 두 가지 운동이 균형 속에서 있을 때 그것은 정지한 것으로 보이며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를 ‘로고스’라 한다.

동양철학에서 기 철학도 마찬가지로 음과 양이라는 두 가지 대립하는 힘은 끊임없이 상호 전환하는 운동을 전개하니 이 운동 자체는 무극이며 이 운동이 고유한 균형을 이룬다면 곧 태극이다.

그런데 헤라클레이토스든, 기 철학에서든 두 운동은 서로 대립하지만 대칭적이다. 두 가지는 어느 것이 어느 것보다 앞서고 우위라고 말할 수 없다. 이런 일방의 우위는 기의 일원론적인 철학에서는 논리적으로 배격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양자가 균형을 이루어야만 하나의 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헤겔의 경우, 두 힘의 대립을 제시하면서 이 두 힘은 펼치고 수렴하는 힘이라고 하지만, 펼치는 힘이 펼치는 것은 수렴하는 힘이 그렇게 촉발하기 때문이라고 하며, 수렴하는 힘이 수렴하는 것은 펼치는 힘이 그렇게 촉발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양자 사이에 능동과 수동을 공평하게 부여한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 두 가지 운동을 ‘함’과 ‘됨’의 운동으로 규정하는데 이 ‘함’과 ‘됨’은 능동과 수동이라는 비대칭적인 운동이다. ‘함’, 능동은 작용하고 ‘됨’, 수동은 수용한다. 그러나 ‘됨’이 능동적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함’이 수동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

5)

이렇게 비대칭적인 운동을 설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선생님이 앞서서 가졌던 유출설적인 흔적이 아닐까 한다. 신플라톤주의자에게서 ‘있는 것’은 ‘없는 것’을 향해 유출한다. ‘있는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질수록 하나로 만드는 힘이 떨어지니, 거꾸로 여럿으로 만드는 힘이 강하게 된다. 이런 유출 가운데 자연계의 다양한 층위가 출현한다. ‘철학 다시 하다’에 따르자면, 여기서 정신과 생명, 자연, 질료가 차례로 출현한다.

자연의 위계적 계층성을 설명하는데 이런 유출설이 기여한다. 이 신플라톤주의에서부터 나오는 유출설이야말로 그 이후 자연의 위계성 또는 진보적 진화를 확립하는 원천이 되었다.

그런데 2021년 발간된 <꿈꾸는 형이상학>이란 책에 이르면, 이제 ‘함’과 ‘됨’이라는 두 가지 힘이 비대칭적이라는 성격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필자가 선생님이 이 시기 큰 변화를 겪었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이제 이런 변화의 측면을 더 규명해 보자.

‘꿈꾸는 형이상학’에서 선생님은 두 가지 우주 설화를 제시한다. 한 재경 선생이 요약한 바에 의하면 두 가지다. ① 하나의 설화에서는 ‘한어미’라는 개념이 출현한다. 원래 두 힘은 ‘한어미’ 속에 통일되어 있었다. 그러다 어떤 우연한 기회에 두 가지 대립하는 힘으로 분열되는데, 이제 두 힘은 ‘밝이’나 ‘검이’와 같은 대립하는 개념으로 규정된다.

“거미가 밝이를 푹 감싸고 있어서 .,, 밝이는 검이가 끝없이 옥죄는 바람에 뜨거워지고 또 뜨거워져서 펑 하고 터져 버렸다. … 이때 한 덩어리였던 힘이 둘로 갈라진다. 밝이의 힘은 하미가 되고 검이의 힘은 되미가 된다. 하미가 힘을 쓰면 되미는 그 힘을 받아 하는 대로 된다.”(한재경, 미발간원고)

② 다른 하나의 설화는 ‘까망이’와 ‘하양이’라는 용어가 쓰인다. 그런데도 일원론의 흔적은 은폐된 방식으로 출현한다. 즉 두 대립하는 힘의 긴장된 관계를 통해 내적인 통일성을 가정한다.

“하양이와 까망이가 틈새 없이 맞닿아 두 힘이 서로 다른 결을 이루면서 태극도형처럼 하나는 함으로 다른 하나는 됨으로 휘어진 결 무늬를 이루기 시작했다.”(꿈꾸는 형이상학, 28)

여기서 ‘밝이’나 ‘햐양이’, ‘검이’나 ‘까망이’는 동양철학에서 양과 음에 대응하는 용어로 보인다. 이렇게 두 힘이 원래 통합되어 있었다는 것이나, 두 힘이 음양으로 구분되면서 양자 사이에 비대칭적인 흔적은 사라진다. 그 점은 두 힘의 관계가 태극도설의 모양으로 제시된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6)

이처럼 유출설적인 입장에서 동양철학의 기 일원론으로의 전환을 일으킨 원인은 무엇일까? 그 원인은 따지고 보면 그 이전부터 계속된 선생님의 지론인 ‘결’의 개념 때문이 아닐까 한다.

사실 이 ‘결’의 사상은 일찍부터 지녀왔던 사상이며 매번 강조해 마지않던 사상이다. 그런데 유출설적인 입장에서 대립하는 힘인 ‘함’과 ‘됨’이 비대칭적이라면 이것들이 만나서 결이 나온다고 보기 어렵다. ‘결’은 두 힘의 균형을 통해 서로 순환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비대칭적이라면 이런 균형이 깨어지면서 순환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선생님으로서는 ‘결’이 ‘톨’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은 현대과학의 이론과 연관되면서, 형이상학이 확정되기도 전에 이미 확고하게 가지고 있는 신념이다. 그런데 유출설의 입장에서 이 결을 설명하기가 곤란했던지, 사실 앞선 책에서는 ‘결’이라는 말은 나오지만, 그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 나오는지 상세한 설명이 없다.

‘결’의 사상을 끌어내려면 대립하는 힘의 균형이라는 개념에 이르러야 했는데, 이런 대립의 균형은 이미 양자의 통일을 전제로 하기에 기 일원론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그 덕분인지, ‘꿈꾸는 형이상학’에서는 두 힘이 꼬여서 어떻게 결이 나오는지가 상세하게 그려진다. 이게 소위 선생님의 ‘거품 우주론’이다.

‘거품 우주’론의 상세한 내용은 생략하도록 하자. 그게 성공적인지는 필자가 평가할 능력이 되지 못한다. 다만, 그 근거는 함과 됨이라는 비대칭적 구조 없이 기일원론에 근거한 대칭적인 음양의 순환으로도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그 우주는 주역에서 음양이 중첩되어 사상, 팔괘,  64효 등으로 나가는 세계와 어쩌면 그렇게 신통하게 들어맞는지 모르겠다. 다만 선생님은 주역에서 음양의 관계를 뫼비우스적 띠로 이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밝이’의 한 가운데 블랙홀이 있고 ‘검이’의 한 가운데 화이트홀이 있으며 이 양자가 다시 월홀과 한 자리에 있다는 주장에서 분명하게 엿보인다. 하나의 뫼비우스의 띠가 다시 중첩되면서 뫼비우스의 띠를 이룬다면, 거품 우주론이 나오지 않을까? 

어떻든 간에 매우 흥미로운 우주였다. 필자는 이규성 선생 덕분에 동양철학, 그 가운데 왕선산의 기 철학을 배운 적이 있는데, 하나의 기가 음양 두 기로 분화되어 상호 대립하는 가운데 우주 만물이 생겨난다는 주장에 흥미를 느꼈다. 그러나 그의 철학에서 음양의 대립이 어떻게 다양한 만물로 발전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그저 기에 청탁과 유동성과 고정성이 있다는 정도 외에 더 들을 수는 없었다. 또한, 필자는 여러 주역 소개서를 읽었다. 동양철학 그것도 주역에 관해 지식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주역에서 음양의 괘가 중첩되는 과정을 선생님처럼 우주 발생론으로 읽는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선생님의 ‘거품 우주론’은 무척이나 탁월한 설명으로 보인다.  음양을 통해 이루어진 우주생성론, 코스모고니는 선생님이 최초가 아닐까? 여기 선생님이 주역이 제시한 것과 ‘거품 우주론’을 보여주는 한 가지 도해만을 소개하려 한다.(이 도해를 읽을 때 그저 평면적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 같다. 순환이 뫼비우스적인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전제로 읽으면 무척이나 흥미로운 도해로 보인다.)


7)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형이상학에서 아직도 신플라톤주의적 유출설적 흔적이 여전히 남아, 일원론적 기 철학적인 흔적과 충돌한다는 사실만을 언급하고 마치려 한다.

이런 흔적은 ‘밝이’나 ‘검이’ 대신 ‘하미’나 ‘되미’, ‘잇스미’나 ‘업스미’라는 용어가 사용된다는 데서 남아 있다. 또한, 한 덩어리인데 그 모습이 ‘밝이’가 ‘검이’를 싸안고 있고 옥죄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는 데서도 나타난다. 아무리 싸안더라도 또는 서로 꼭 붙어있더라도 둘은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하미’가 하면 ‘되미’는 “하는 대로 된다”라고 말하는 데에는 여전히 비대칭적 능동-수동 관계가 등장한다.

함과 됨, 능동과 수동이라는 비대칭성을 유지해야 할 다른 이유가 있을까? 유출설이나 서양철학적 흔적에서 완전히 벗어나면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의문이 많다. 2021년 <꿈꾸는 형이상학>에서 선생님이 유출설에서 기 일원론으로 도약했듯이 다시 한번 도약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한다.

필자는 지금까지 선생님의 철학을 한마디로 하면 곧 ‘결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이 좀더 오래 사셔서 우리에게 또 “새로운 철학이네!” 하는 경탄을 다시 한번 불러일으키기를 고대해마지 않으면서,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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