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3-칸트 비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3-칸트 비판
1)
앞에서 헤겔의 ‘개념’이 논리적 범주로서 다른 범주와 구별되는 내용적 의미를 살펴보고 동시에 일반적으로 논리적 범주가 지닌 의미가 형식 논리학에서의 의미와 어떻게 구별되는가 살펴보았다.
이제 개념의 일반적 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에 이르렀다. 그것은 곧 개념이 선험적 통각 즉 ‘주체’라는 주장인데, 이를 위해 헤겔은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이 칸트에서 주체 개념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이해의 맥락으로 제시한다.
그는 여기서 철학적 비판이 가진 의미를 다시 되새기는데 이는 정신현상학에서 이미 서술했지만, 여기서 되풀이된다. 즉 어떤 체계에 대한 비판은 그 체계를 그 체계 밖에서 단적으로 부정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비판은 비판하는 철학이 전제하는 근본 규정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지만, 비판받는 철학은 자기의 근본 규정을 고집하면서 비판하는 철학의 근본 규정을 거부하니, 비판은 마치 적이 없는 곳에서 싸움을 전개하는 것과 같다.
“진정한 반박은 적의 힘 속으로 들어가서 적의 힘이 닿는 범위 안에서 자기의 진을 치는 것이어야 한다. 적을 적 자신 밖에서 공격하고 적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권리를 보유하는 것은 분투하는 것이 아니다.”(논리학 2부, GW12, 15)
그러므로 진정한 비판이 되기 위해서는 적이 진지를 차린 곳 안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내부에서 무너뜨려야 한다. 이것은 곧 그 체계 자신이 부딪히는 모순을 통해 스스로 부정되는 것이며 즉 그 체계 자신이 유래한 특수한 원리에 대한 부정이다.
즉 어떤 체계에 대한 비판은 ‘특정한 부정성[bestimmte Negation]’에 기초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기 내 반성이 일어나 더 일반적인 체계가 제시되고, 지금까지의 체계는 그 일반적 체계의 한 부분으로 포함된다. 헤겔은 스피노자 체계에 대한 비판도 이런 내적인 부정, 즉 ‘특정한 부정성’을 통해 일어나야 한다고 본다.
2)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비판과 관련하여 헤겔은 이미 본질론에서 ‘절대자’ 개념을 논하면서 어떻게 스피노자가 한계를 드러내는지 보여주었다. 거기서 그는 스피노자의 실체는 출발점에서는 ‘자기 원인’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기를 규정하는 원리로 제시했으나, 곧이어 이런 실체를 모든 규정성에 대한 단순한 부정으로 순수한 자기 동일성으로 규정하는 데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한다.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이 지닌 자기 원인이라는 개념은 라이프니츠에서 모나드 개념으로 발전했다. 라이프니츠는 자기를 산출하는 표상 개념을 통해 자기 원인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으나, 그로서는 이런 모나드가 개별적이며 따라서 이런 모나드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었으니 결과적으로 라이프니츠는 예정조화설에 빠지고 말았다.
이런 비판을 넘어서 헤겔은 실체는 곧 서로 대립하는 개체의 상호작용하는 관계라는 개념으로 규정하면서, 이를 통해 앞에서 말했듯이 ‘주체’라는 개념을 끌어냈다. 헤겔은 이런 주체라는 개념이 곧 칸트의 순수 통각 개념으로 출현하게 되었다고 한다.
칸트의 철학은 선험철학이며 여기서 선험적 통각의 통일은 범주를 통한 통일이다. 이런 통일을 통해 직관을 통해 주어지는 다양이 통일되면서 객체가 출현하게 된다. 여기서 주관 속에 있는 범주와 직관을 통해 주어지는 대상이 통일되면서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의식의 주관적 통일]에 대립하여 표상의 객관적 규정이 지닌 원리는 통각의 선험적 통일이라는 근본 명제로부터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객관적 규정이라고 할 범주를 통해서 주어진 표상의 다양이 규정되니, 이 다양은 의식의 통일로 이끌려진다.”(논리학 2부, GW12, 18)
“이와 같이 대상이 정립되면서 대상은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거나 객관적인 대상으로 된다. 따라서 대상은 개념 속에서 이런 객관성을 가지며 이 개념은 대상이 수용되는 자기의식의 통일이다. 따라서 대상의 객관성 또는 개념은 그 자체 자기의식의 본성일 뿐이며 주관 자체와 다른 계기나 규정을 가지지 않는다.”(논리학 2부, GW12, 18)
직관의 다양을 통일하는 선험적 통각의 통일은 그러므로 대상을 정립하는 주체의 활동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칸트에서 비로소 ‘개념’으로서 주체가 출현했다고 보며, 헤겔의 철학은 칸트의 이런 선험적 철학의 원리를 받아들이며, 그 자신을 선험주의자라고 자처하기에 이른다.
3)
칸트의 선험적 통각의 통일에 관한 헤겔의 설명은 곧바로 의문에 부딪힌다. 통각의 통일은 결국 주관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며 칸트가 주장한 것처럼 누구나 인정하는 보편적인 현상 세계를 산출하기는 하지만, 물 자체를 인식하는 객체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헤겔이 직관의 다양을 선험적 통각이 통일하면서 객체에 이른다고 말한 것은 칸트에 대한 오독이 아닐까?
바로 여기서 칸트와 헤겔의 차이점, 헤겔이 칸트를 어떻게 극복하는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헤겔은 오히려 칸트가 참다운 철학의 원리 즉 개념과 주체에 이르렀으면서도, 다시 이를 내던지고 말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칸트가 선험적 통각의 개념 즉 범주의 본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칸트는 범주가 직관의 다양을 통일한다는 것을 마치 ① 선험적 통각의 범주가 마치 하나의 좌표계를 이루고 있으면서 경험을 통해 주어지는 직관의 다양을 그 주어지는 모습에 따라(즉 직관의 계기와 동시성 사이의 관계 즉 도식) 이런저런 범주에 할당되는 것처럼 생각했다.
여기서 직관의 다양과 범주가 통일되기는 하지만, 이 통일은 다만 외면적이다. 그것은 마치 음양의 축을 설정해놓고 모든 주어지는 것을 이런 음양의 좌표축에 할당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되면 좌표축과 대상이 결합하기는 하지만, 이 결합은 외면적인 것에 그친다.
사실 무엇이든 이 음양의 좌표축에 따라서 할당할 수 있으니, 이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말한 것처럼 모든 땅은 모두 붉게 칠하고 하늘은 모두 푸르게 칠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나중에는 밤에 모든 소가 까맣게 보이듯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색으로 칠해질 수도 있다.
4)
중요한 것은 이렇게 보면, 통각의 선험적 범주는 스스로 내용을 산출하는 것이 아닌 ② 공허한 형식적 개념으로 다시 떨어진다는 것이다. 헤겔은 이런 생각은 칸트 자신이 범주가 직관의 다양을 통일한다는 원리와 모순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헤겔이 보기에 이런 선험적 통각의 원리에 따르면 범주가 자신의 대상을 스스로 산출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지성은 이런 방식에서는 독자적인 공허한 형식이며 이 형식은 부분적으로는 앞에서와같이 주어진 내용을 통해 실재성을 얻으며 부분적으로는 그런 내용을 추상하여 즉 그 내용을 어떤 것이기는 하지만, 개념에서 보면 다만 쓸모없는 것으로 제거한다.”(논리학 2부, GW12, 20)
결국, 칸트는 직관의 다양이 일정한 좌표축에 할당된다고 보았으며 선험적 범주가 직관을 규정하는 것은 이런 할당에 한정하면서, 헤겔로 볼 때 칸트가 범한 가장 중요한 실책은 ③ 반성 개념을 무시했다는 데 있다.
즉 칸트는 선험적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서 12개의 판단 형식 즉 범주를 제시했다. 이 범주는 지성이 가지고 있는 범주인데, 지성은 판단의 능력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선험적 통각 속에는 또 다른 능력이 있으니 곧 추리의 능력이고, 이것이 바로 이성이다.
이런 이성의 능력에 속한 범주가 곧 반성 개념인데, 칸트는 이런 반성 개념이 선험적 통각의 통일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런 반성 개념의 역할을 다만, 순수이성 비판에서 라이프니츠의 반성 개념을 비판하는 부록에 잠깐 언급했을 뿐이다.
“칸트는 다만 감정과 직관만 지성 앞에 둔다. 우선 그는 이미 그 자신의 이런 계단화가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주었는데, 그 단서는 곧 그가 반성 개념에 관한 하나의 논문을 선험 논리학이나 지성론의 부록으로서 덧붙인다는 데 있다.이 반성 개념의 영역은 직관과 지성 사이에 그리고 존재와 개념 사이에 놓여 있는 영역[즉 본질론의 영역]이다.”(논리학 2부, GW12, 19)
직관의 다양이 범주에 할당된다는 칸트의 입장은 결국 ④ 범주 전체를 대상에 대해 외면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 결과 필연적으로 범주 전체는 그 어느 것이든 그 너머에 물 자체가 존재하게 되며, 이런 물 자체에 이 범주를 적용할 수는 없다. 만일 물 자체에 이런 범주를 적용하는 순간 여기서 이율배반이 나오게 된다.
“칸트는 이성의 범주에 대한 태도는 다만 변증법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사실 이 변증법의 결과를 다만 전적으로 무한한 무인 것으로서 파악하니, 이를 통해 이성의 무한한 통일은 또한 여전히 종합을 잃어버리고 이로써 출발점이었던 사변적이고 진정한 무한한 개념을 잃어 버린다.”(논리학 2부, GW12, 21)
5)
결론적으로 칸트는 출발점에서는 범주가 대상을 구성한다고 했으나 곧 이를 단순히 범주가 대상에 할당되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자기의 출발점을 부정하고 말았다.
“두 번째로, [한 측면에서] 개념은 인식에서[선험적 인식] 객관적인 것으로서 제시되었으며 따라서 진리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개념과 같은 것은 어떤 주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실재성은 주관에 대립하는 객관성이라는 뜻으로 이해되면서 그와 같은 주관적인 것으로부터 실재성을 끌어내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논리학 2부, GW12, 19)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Feel free to contribu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