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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 강해(87)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87)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B.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자 가운데 누가 행복한가. : 정의로운 삶의 우월성 증명(제9권

576b-592b)

1) 첫 번째 증명 : 정치체제와 개인의 내적 구조에 기초한 증명(576b-580c)

 

[576b-580c]

* 소크라테스는 첫 번째 증명ἀπόδειξις을 시작하기 전에 이렇게 말한다. 최악κάκιστον의 인간이란 한마디로 꿈ὄναρ에서나 가능한 상태를 깨어 있을 때도 가지고 있는 자이다. 가장 참주정적인 성향을 타고난 자가 독재자μόναρχος가 되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576b) 대중πολύς에게는 다양한 의견이 있겠지만 그러한 자가 가장 사악한πονηρότατος 자이자 가장 비참한ἀθλιώτατος 자이다. 그리고 나라와 개인이 닮았다ὁμοιότητος는 점에서 덕ἀρετῇ과 행복εὐδαιμονίᾳ의 문제도 나라와 개인에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576c) 그리고 참주정체제의 나라와 왕정체제의βασιλευομένης 나라를 덕과 행복과 관련하여 비교 판정κρίνειν할 때는 그 주변의 몇몇 사람이 아니라 나라 전체ὅλος(576d), 나라 곳곳을 살펴보고서ἰδόντες 의견δόξα을 내놓아야 한다. 이 말에 글라우콘은 동의한 후 참주정체제의 나라가 가장 비참하고, 왕정체제의 나라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라고 말한다.(576e)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비교 판정할 수 있는 사람은 사유διανοίᾳ를 통해 인간의 성품ἦθος 속을 꿰뚫어 볼 수 있고διιδεῖν, 참주와 한 지붕 아래 살면서συνῳκηκότος 공적 사적 모든 행동이나 모습을(577a) 모두 경험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바로 그러한 판정 능력과 경험이 있는 사람인 척 해보자’προσποιησώμεθα고 제안한다.(577b)

* 이렇게 비교 판정을 위한 준비를 마친 후 소크라테스는 본격적으로 첫 번째 증명을 시작한다. 그 내용을 정리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1) 나라와 사람의 유사성ὁμοιότητα을 상기하면 참주정체제의 나라는 자유로운ἐλεύθερος 나라가 아니라 노예 상태δοῦλος에 있는 나라이다. 그곳에서도 주인δεσπότης들과 자유인들이 있긴 하지만 그건 그중 작은 부분에 불과하고 전체로 보면 그 나라는 가장 훌륭한 부분까지도 수치스럽고ἄτιμος 비참하게 노예 상태로 있는 나라이다.(577c) 사람이 나라와 닮았다면 나라와 동일한 구조τάξις가 필연적으로 사람에게도 있다. 그렇다면 그 나라를 닮은 참주정적 인간의 영혼은 숱한 예속δουλεία과 자유인답지 못함ἀνελευθερία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가장 훌륭한 부분들은 노예 노릇을 하는 반면, 작은 부분이자 가장 사악하고 광기 가득한 부분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다. 그런 상태에 있는 나라는 그 어떤 나라나 보다도 원하는 바ἃ βούλεται를 못 하는 나라이므로 영혼 전체ὅλη ψυχῆς에서 보면 영혼 또한 원하는 바를 가장 못할 것이다.(577d) 그런 영혼은 폭력적인 욕망의 침οἶστρος에 늘 쫓기며 혼란ταραχή과 후회μεταμέλεια로 가득 차 있다.

2) 그리고 참주정체제의 나라는 부유하긴πλούσιος커녕 가난할πενομένη 수밖에 없어(577e) 참주정적인 영혼 역시 필연적으로 늘 가난하고πενιχρός 채워지지 않은ἄπληστος 상태로 있고 또 두려움φόβος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나라만큼 비탄ὀδυρμός과 한탄στεναγμός, 통곡θρῆνος과 고통ἀλγηδών이 더 많이 발견되는 곳은 없다. 이에 따라 사람의 경우에도, 참주정적인 인간보다 더 많이 욕망ἐπιθυμία과 욕정ἔρως으로 미쳐버린 경우 또한 없다.(578a) 그러므로 바로 이 나라가 가장 비참한 나라로 판정된다.(578b) 그리고 특히 최고로 비참한ἀθλιώτατον 자는 이들 사인(私人)ἰδιώτη으로서 참주정적인 인간이 아니라 불행하게도 어떤 불운συμφορά을 만나 실제 참주가 된 자이다.

3) 하지만 가장 중대한 문제, 즉 좋은 삶과 나쁜 삶의 문제를 다루려면 이에 그치지 않고 다음과 같은 논의를 통해τῷ τοιούτῳ λόγῳ 보다 더 충실히 고찰해야 한다.(578c) 이를 위해 우선 나라에서 노예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부유한πλούσιος 개개인ἑνὸς ἑκάστου τῶν ἰδιωτῶν들을 예로 들어보자. 이런 사람들은 많은 자를τὸ πολλῶν 다스린다ἄρχειν는 점에서 참주들과 닮았다. 그런데 이들은 나라 전체πᾶσα ἡ πόλις가 개개인을 돕고 있기 때문에 불안해하지도 않고 가노οἰκέτης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578d) 그러나 만일 어느 신이 오십 명 또는 그 이상의 노예를 거느린 한 사람을 그의 재산οὐσία, 노예, 가족과 함께 어느 외딴곳에다 갖다 놓았다고 해보자. 이 경우 그는 나라전체가 주는 그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으므로 자신과 가족이 노예들에 의해 살해되지 않을까ἀπόλοιντο 두려움φόβος에 떨게 될 것이다.(578e) 물론 그는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노예들 가운데 몇몇의 비위를 맞추고θωπεύειν 많은 것을 약속해주고 자유인으로 놓아주면서 그들의 아첨꾼κόλαξ이 되지만, 자기 주변에 다른 자가 주인 되는 것을 참지 못하여 그를 극형ἔσχατος τιμωρία에 처하려는 사람들이 이웃으로 살고 있을 경우 그는 온통 적πολέμιος들에 둘러싸여 감시당하면서φρουρούμενος(579a) 한층 더 엄청난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참주의 성향을 갖고 있는 자들은 온갖 종류의 숱한 두려움과 욕정으로 가득 차 감옥δεσμωτήριον에 갇혀 있는 삶을 보낸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탐심λίχνος으로 가득하지만, 여느 자유인들처럼 구경이나 하고 싶어 하는 그 어떤 것도 못한 채 여인네처럼 인생의 대부분을 집안에 틀어박혀(579b) 다른 사람을 시기φθόνος하며 지낼 수밖에 없다. 어떤 불운에 의해 실제 참주가 된 자는 이처럼 나쁜 것들을 더 많이 거둬들이면서 마치 어떤 자가 몸σῶμα이 병들어서(579c) 자기 자신도 제어하지 못한 채 그런 몸으로 일생을 다른 몸뚱이들σώματα과 경쟁하고ἀγωνιζόμενος 싸우면서μαχόμενος 고달프게χαλεπώς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바로 이런 자야 말로 완전히 비참한 상태에 있는 자이다.(579d)

*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요컨대 진짜 참주는 가장 큰 아첨θωπεία과 굴종δουλεία에 매여 있는 진짜 노예δοῦλος이고 가장 못난πονηροτάτων 자들의 아첨꾼이며(579d). 또한 영혼 전체의 측면에서 그런 자는 자기 욕구들을 어떤 식으로도 채우지 못하는 자이며, 누구보다도 가장 많이 결핍된ἐπιδεής 자이자 가난한 자이다. 결국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와 닮은 상태에 있는 참주는 평생 두려움으로 차 있고 경련σφαδᾳσμός과 고통ὀδύνη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579e) 이런 사람의 특징을 요약하자면 자신이 잡은 권력 ἀρχὴ 때문에 이전보다 더 시기심 많고φθονερός 믿을 수 없고ἄπιστος 부정의하고ἄδικος 친구도 없고ἄφιλος 불경스럽고ἀνόσιος 온갖 나쁜 것κακία들을 받아들이고 키워내는 자이자 이 모든 것들로 인해서 주변 사람들까지도 불운한δυστυχής 자로 만드는 자이다.(580a)

* 소크라테스는 이와 같이 첫 번째 증명을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논의를 가무단의 공연에 비유하여 최종 판정관이 공연 후 최종 우승작과 순위를 발표하는 것처럼 글라우콘에게 최종 판정관을 맡긴다. 이에 글라우콘은 논의 순서 즉 가무단χορός의 공연에 등장했던 순서대로 순위를 판정하고(580b)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받아 ‘그들이 어떠한 자인지 인간들과 신들 모두가 알든 모르든 간에’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아래와 같이 선언한다. ‘가장 뛰어나고ἄριστος 가장 정의로운δικαιότατος 자가 가장 행복한εὐδαιμονέστατος 자이며 그 사람은 가장 왕정적인βασιλικώτατος 사람이자 자신을 왕정체제로 다스리는 자이다. 반대로 가장 나쁘고 가장 부정의한 자가 가장 비참한 자로서 이 사람은 가장 참주정적인 사람이자 자신과 나라를 최대한 참주정체제로 다스리는 자이다.’(58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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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6e ‘누구에게나 자명한 사실’ : 소크라테스가 전체를 살펴보고 비교 판정과 관련한 의견을 내놓자고 했음에도 글라우콘은 결론에 해당하는 말을 미리부터 자명한 사실로 내세우고 있다. 이것은 비교 판정을 시작하기에 앞서 ‘전에 정의가 어떤 것인지에 관해 동의한 것이 옳았다면’(576a) 지금까지의 논의로만으로도 대화자들끼리는 이미 논의의 결론이 충분히 공유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대중들 사이에는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대중에겐 다양한 의견이 있다’(576c)는 소크라테스의 첨언은 앞으로 제시될 증명들이 기본적으로는 지금까지의 펼쳐온 논의들을 마무리하고 재확인하는 결론적 논의이지만, 동시에 다른 생각을 가진 대중들을 최대한 설득하기 위한 목적도 크게 고려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우리가 주의하고 있지 않지만 트라쉬마코스는 제2권 이후에도 이 대화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실제로 그는 제5권에서 대화에 끼어들기도 한다.(450b) 플라톤의 설정대로라면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곁에서 대화를 지켜보고 있는 트라쉬마코스를 의식하고 있다.

* 577b ‘우리가 바로 그것을 판정할 능력을 갖춘 사람이자 참주정적인 인간들을 실제로 만나 본 사람인 척 해보길 바라나?’ : 소크라테스는 본격적인 증명에 들어가기 전에 그 증명의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 그 증명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갖추고 있어야 할 자격에 대해 언급한다. 요컨대 사유에 기초한 이론적 판단력도 중요하지만 관련된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겪은 경험 또한 중요하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곳에서 자신과 대화자들이 그러한 경험 관련 자격을 갖추고 있는가에 대한 특별한 언급 없이 바로 자신들을 그러한 자격을 갖춘 사람인 양 전제하고 논의를 시작한다. 이것은 일단 형식상 논리적 비약이라는 점에서 정당성을 스스로 훼손하는 처사이다. 어떤 척을 하자고 말하는 것도 소크라테스에게 어색한 일이다. 아마도 이글의 저자 플라톤 자신이 아테네와 시칠리아에서 직접 참주정의 참혹상을 경험한, 그것도 혹독하게 경험한 당사자임을 독자들이 익히 알고 있다고 여기고 그랬을지 모른다. 어쨌거나 이 언급은 판정에 있어 사유를 통한 판단력뿐만 아니라 경험이 갖는 중요성을 함께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 577c ‘가장 훌륭한 부분까지도’ : 타락하기 이전 정치체제에서 통치 및 수호자 역할을 했던 사람들, 즉 나라의 구조 상 통치자계층과 수호자 계층을 말한다.

* 577d ‘동일한 구조’ : 여기서 ‘구조’의 그리스어 원어는 taksis이다. taksis는 원래 공격 또는 방어에 가장 효율적인 전투 대형을 갖춘 상태 즉 질서 잡힌 ‘대오’의 뜻을 갖고 있는 군사 용어이다. 그래서 taksis는 문맥에 따라 이곳처럼 ‘구조’(577d, 618b)라는 뜻 외에 ‘대오’(468a, 471d, 522d,e, 525b), ‘질서’(561d,587a), ‘순서’(620d), ‘줄’(617d) 등으로 옮기기도 한다. 여기서 구조는 내용적으로 나라의 세 계층과 개인 영혼의 세 부분 간의 질서를 말한다. 그러므로 플라톤에게 구조가 잘 잡혀있다는 것은 각 계층과 부분의 위계와 역할이 본성에 맞게 질서를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욕구 부분은 본성상 이기적 물질적 속성을 가지고 있어 타자의 이익을 배려하고 그들과 조화를 이루고 공존하기 위해서는 이성 부분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플라톤에게 지배 또는 다스림archein은 타자에 대한 억압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배려에 기초한 구성원 모두의 조화와 공존을 도모하는 일이다. 구조가 왜곡되면 다스림도 왜곡되어 조화와 공존은 무너진다.

* 577d ‘참주정체제의 영혼’ : 참주정적 인간의 영혼, 참주정적 인간의 극치가 참주라는 점에서 극명하게는 참주의 영혼이라고 말할 수 있다.

* 578a ‘참주정적인 영혼 역시 필연적으로 늘 가난하고 채워지지 않는 상태로 있을 것이네’ : <고르기아스> 416e, 493a-494e, 521a, <파이드로스> 279c, <편지들> 355c 참고.

* 578e ‘오십 명 또는 그 이상의 노예’ : 기원전 5세기 고대 아테네에서 한 가구 당 노예의 수는 보통은 3명에서 많으면 12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50명 이상의 노예는 매우 부유한 소수 부자들의 경우일 것이다. 물론 대부호로 알려진 당대 니키아스는 1,000명에 달하는 노예까지 갖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 579a ‘신이 또 다른 여러 사람을 그 사람 둘레에 이웃으로 살게 한다고 해보세.’ : 여기서 ‘참주 둘레에 사는 이웃’은 앞서 자유인과는 다른 여러 사람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 참주가 갖고 있는 패권욕, 또는 그 참주의 전제 정치를 못 마땅하게 여겨 그를 제거하기를 원하는 주변 국가들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앞서 참주가 노예들 가운데 풀어준 자유인과 달리 민주정 치하에서 전적인 자유에 길들여져 있어 여전히 간섭을 싫어하거나 참주의 착취에 시달리며 참주정에 적대감을 갖고 있는 또 다른 자유인들 또는 과두주의자들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579b ‘여인네처럼 인생의 대부분을 집안에 틀어박혀’ : 고대 아테네를 비롯해 당대 그리스 폴리스 일반의 관습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성은 다 드러난 공간에서 공공연히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조차 금지되었다.(<법률> 781c) 이런 측면에서 보면 플라톤이 <국가>에서 여성을 통치계급의 일원으로 포함시키고 남성들과 함께 공동 식사하도록 한 것은 당대 사람들에게는 그 자체로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었다. 플라톤은 오직 철학만이 그러한 관습적 편견과 제약을 넘어설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고 여겼다.

* 579d ‘다른 몸뚱이들sōmata과 경쟁하고 싸우며 살아가도록 강제’ : 다른 몸뚱이들은 다른 참주정적인 인간들을 가리킨다. 지배 욕구에 찌든 참주정적 인간들은 필연적으로 평생토록 서로 간 권력 투쟁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가만히 있으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580a ‘우리가 전에 말한 것들까지도’ : 이미 앞에서도 참주정적 인간들이 축복 받은 필연인 양 평생 대중들의 미움을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567a), 그리고 그 누구의 친구도 되지 못한 채 주인 아니면 노예로 살 수 밖에 없다는 것(576a)이 언급된 바 있다.

* 580b ‘마치 최종 판정관kritēs이 결과를 발표하듯 자네도 내게 그렇게 해주게.’ : 당대 아테네인들은 가무단의 공연을 심사할 때 아래와 같이 매우 엄격하고도 복잡한 절차를 거쳐 심사위원을 선정했다. 먼저 축제가 열리기 전 평의원에서 후원자들과 함께 심사위원 후보들을 선발한 후 이들 명단을 부족별로 하나씩 총 10개의 항아리에 담았다가 경연 당일 각 항아리에서 한 명씩 총 10명의 심사위원을 뽑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 중 다시 추첨된 5명의 최종판정관이 앞서 심사위원들이 적은 투표함을 열어 우승 가무단과 순위를 확정한 후 전령을 통해 발표했는데 이곳 최종 판정관은 위와 같은 가무단 공연 심사과정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곳에서 소크라테스가 최종판정을 자신이 아니라 글라우콘에게 맡기는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플라톤의 대화는 대화자들을 향해 자신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선언하거나 알리는 것이 아니라 대화자들과 문답을 나누며 비판적인 설득을 통해 함께 진실에 도달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글라우콘에게 최종 판정을 맡기고 그 내용을 받아 직접 다시 발표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함께 동일한 진실에 도달하였음을 보여준다.

* 580b ‘마치 가무단choros이 등장하듯 그들이 등장했던 순서라고 판정합니다.’ : 가무단 공연 심사의 경우 우승 가무단을 발표할 때 동시에 순위도 함께 발표하듯이 이곳에서도 그에 맞추어 최종 판정대상으로서 우승자인 철인왕정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논의된 타락한 정치체제들이 순서대로 함께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논의의 목표대로 철인왕정의 최종적인 비교 판정 대상은 최악의 정치체제로서 참주정이다.

* 580c ‘그들이 어떠한 자인지 인간들과 신들 모두가 알든 모르든 간에’ : 아데이만토스가 제2권에서 소크라테스에게 이 비교 판정과 관련한 답변을 처음으로 요청할 때 아래와 같이 말한 것을 환기시키고 있는 부분이다. ‘신들과 사람들에게 알려지든 그렇지 않든, 정의는 좋은 것이고 부정의는 나쁜 것인지도 보여 달라’(367e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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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소크라테스는 애초 계획한 대로 타락한 정치체제들과 그것을 닮은 사람들에 대한 논의를 토대로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자 가운데 과연 누가 행복한가를 비교 판정하는 논의(576b-592b 제9권 끝)를 시작한다. 소크라테스가 비교 판정을 위해 이곳에서 제시하고 있는 증명들은 아래와 같다.

1) 첫 번째 증명 : 정치체제와 개인의 내적 구조에 기초한 증명(576b-580c)

2) 두 번째 증명 : 영혼의 세 부분에 기초한 증명(580c-583a)

3) 세 번째 증명 : 참된 즐거움과 거짓 즐거움의 구분에 기초한 증명(583b-588a)

* 플라톤이 이 세 가지 증명에서 각각 사용하는 논거들은 크게 정치적 논거, 심리학적 논거, 그리고 형이상학적 논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즉 첫 번째 증명은 정치체제로서 나라와 개인 사이의 유사성에 기초하고 있고, 두 번째 증명은 영혼의 3부분 즉 이성적 부분, 기개 부분, 욕구 부분 각각에 상응하는 즐거움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세 번째 증명은 플라톤의 존재에 관한 이론에 기초해 있다. 이러한 접근 방식 내지 방법은 사실 대화편 전체를 통해서도 사용된 것들이다. 그 내용을 크게 구분해보자면 제2권에서 제4권까지는 정치적 방법이, 제8권에서 제9권까지는 심리학적 방법이, 제5권에서 제7권까지는 형이상학적 방법이 채택되고 있다. 그 점에서 보면 이곳에서 플라톤이 지금 그러한 방법들을 모두 동원해 종합적인 관점에서 최종적인 마무리를 수행하고 있는 것은 매우 적절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것이다.(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이 증명을 토대로 ‘부정의가 아니라 정의야 말로 이익’(588b-592b 제9권 끝)임도 덧붙인다. 이로써 정의와 행복이라는 <국가>의 기본 논제를 촉발시킨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형식에서나 내용에서 전적으로 잘못된 것임이 밝혀진다. 이번 강해는 우선 첫 번째 증명 부분을 다룬다.

* 첫 번째 증명의 핵심은 정치제제로서 나라와 개인이 갖는 유사성(577c), 즉 나라와 개인의 동형적 구조(577d)에 입각하여 그 내적 구조를 전체적으로 살피는 방식으로 참주정 체제의 비참성을 드러낸 후 그것을 근거로 그것을 닮은 참주의 비참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중요한 것은 행복이건 비참함이건 나라와 개인의 동질적 구조가 빚어내는 양태들은 각기 그것을 구성하는 계층들과 영혼 부분들의 내적 관계를 ‘전체holos’(576d)로서 파악할 때 비로소 드러난다는 것이다. 요컨대 첫 번째 증명의 핵심은 나라와 개인이 갖는 유사성(577c)을 토대로 이와 같은 3계층 또는 영혼 부분들의 내적 관계 내지 질서를 개별차원이 아니라 ‘전체’ 차원에서 파악하는 방식으로(576d)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이미 철학자의 행복은 이러한 영혼의 내적 구조가 전체적으로 조화와 질서를 갖추었다는 것으로 뒷받침된 바 있다. 그렇게 보면 참주의 비참성은 이러한 영혼의 내적 구조가 전체적으로 조화롭지 못하고 위계나 질서를 갖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본래 구조가 역전된 것이다.

* 이와 같은 방식에 따라 소크라테스가 첫 번째 증명을 통해 종국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참주의 비참한 삶의 양상들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579d-580a)

1) 참주는 가장 큰 아첨과 굴종에 매여 있는 진짜 노예이다.

2) 참주는 자기 욕구들을 어떤 식으로도 채우지 못하는, 누구보다도 가난한 자이다.

3) 참주는 평생토록 친구도 없고 고립된 채 두려움과 경련, 고통으로 가득한 불운한 삶을 보낸다.

* 그리고 위와 같은 참주의 비참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소크라테스는 몇 가지 논거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논거의 내용들이 상호 중첩되어 있어 분명하게 구분해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최대한 그것들을 차례대로 정리해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참주는 가장 큰 아첨과 굴종에 매여 있는 진짜 노예이다.(577c-577e)

참주정이 극단적인 자유로부터 생겨난 최대의 예속이자 가장 야만스러운 노예 상태의 정치 체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도 밝혀진 사실이다.(564a) 그리고 참주가 누군가의 주인 아니면 노예로 산다는 것도 이미 밝혀졌다.(576a) 나라와 개인의 유사성에 기초한 증명 방식에 따른다면 이것만으로도 참주가 진짜 노예라는 증명 과제는 증명된 셈이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 이곳에서는 정치체제의 내적 구조에 대한 전체적인 분석을 토대로 위계질서 붕괴에 따른 참주정과 참주의 노예 상태에 대한 증명이 수행된다. 즉 참주정은 그 내적 구조를 전체적으로 분석해 보았을 때 위계질서가 무너져 가장 작은 부분인 참주가 나머지 생산자 계층을 비롯해 가장 훌륭한 부분인 수호자 계층까지 노예로 만들어 버린 정치체제이다.(577c) 이에 따라 참주의 영혼 또한 참주정을 닮아 내적 구조상 위계와 역할이 전도되어 전체적으로 무질서 상태가 되고 만다. 물론 참주의 영혼에서 욕정에 사로잡힌 욕구 부분이 거꾸로 기개 부분과 이성 부분을 폭압적으로 지배한다는 점에서 이성과 기개 부분이 노예이지 참주의 영혼은 노예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참주의 영혼은 늘 욕망의 침에 쫓겨 다니면서 영혼 전체의 이익이 아닌 욕구 부분의 이익에 매몰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는 주인다운 다스림과는 전혀 무관한 욕정에 휘둘리고 있다는 점에서 ‘영혼 전체를 놓고 말한다면’(577e) 참주정 나라가 그렇듯이 참주의 영혼은 그 자체로 욕정의 노예일 뿐이다. 그래서 참주의 영혼은 혼란과 후회로 가득 차 있다.(577e)

 

2) 참주는 자기 욕구들을 어떤 식으로도 채우지 못하는, 누구보다도 가난한 자이다.(577e-

578a)

참주가 누구보다도 가난한 자임은 참주가 노예라는 앞서의 논거와 연동되어 있다. 그래서 내용도 짧고 간단하다. 한마디로 참주정 체제의 나라는 노예 상태에 있는 나라이므로 그 어떤 나라보다도 자유롭게 원하는 바를 못하는 나라이다.(577d) 그러므로 참주정 체제의 영혼, 즉 참주의 영혼도 원하는 바를 가장 못할 것이다.(577d) 요컨대 참주정 체제의 나라가 가난한 것이 필연적인 한, 참주정적인 영혼 역시 필연적으로 가난하다. 물론 참주정의 나라에서 나라 전체는 가난해도 현실의 참주는 풍요하면 풍요했지 결코 가난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부와 가난은 재물의 크기가 기준이 아니라 원하는 바를 이루냐 못 이루냐가 기준이다. 욕망의 노예가 된 참주는 아무리 많은 것을 원해도 그것을 못 이루는 상태로 늘 결핍상태에 있다. 가난하다는 것은 결핍에서 헤어 나올 수 없음을 의미한다. 반대로 비록 적은 재산을 가졌을지라도 결핍을 못 느끼면 그는 결코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부와 가난 역시 결국은 영혼의 내적 구조가 질서를 갖추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이성이 아닌 욕구에 지배되는 참주는 그래서 늘 결핍에 시달리는 가난한 자이다.

 

3) 참주는 평생토록 친구도 없고 고립된 채 두려움과 경련, 고통으로 가득한 삶을 보낸다.(579b-580a)

참주정의 나라와 참주정적 영혼은 욕망의 노예 상태에 있어 늘 가난하고, 결핍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나라보다 비탄과 한탄, 통곡과 고통이 더 발견되는 나라는 없다. 게다가 이런 나라와 그와 같은 사람은 두려움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578a) 이런 점에서도 참주정적인 인간은 단연 가장 비참하다.(578B) 특히 참주정적인 인간이면서 불행하게도 어떤 불운을 만나 사인이 아닌 실제 참주가 된 자가 한결 더 비참하다.(578b-c) 소크라테스는 참주가 늘 두려움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참주들과 닮은 부유한 개개인 즉 노예를 많이 거느린 자들의 경우를 예로 든다.(578e) 이들은 사실 나라에서 그 노예들을 두려워하며 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나라의 권력자들과 기득권자들은 제도와 법률을 통해 그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신들이 이 부유한 개개인들과 그들의 노예들을 나라가 그들을 도울 수 없는 상태, 이를테면 어느 외딴 곳에 떨어트려 놓았다고 가정할 경우 사정은 달라진다. 그곳에서는 노예들이 부자들의 비위를 맞추거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어 부자들과 가족들은 노예들에 의해 재산을 뺏기는 것은 차치하고 언제 살해당할지 모르는 두려움과 공포가 늘 상존해있다. 이것은 참주나 기득권자들이 나라의 제도와 권력에 기대어 자신의 사적 탐욕을 거침없이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부정의한 그들의 삶 자체가 얼마나 많은 적대적인 사람들을 나날이 키워내고 있는지 또 그에 따라 주위 사람들에 대한 얼마나 많은 의심과 공포에 시달리며 살고 있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권력을 놓지 않으려 한다. 설사 이런 고립된 상황이 두려워 노예들 가운데 비위를 맞추어 어떤 자를 자유인으로 풀어주고 그들에게 아첨하며 목숨을 부지한다고 해도 날이 갈수록 전적인 자유에 길이 든 자유인들이 참주의 지배에 불만을 가질 경우, 또는 참주의 패권욕과 전제정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주변 국가들이 있을 경우, 참주는 그들과도 적대적이 되어 늘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의심과 공포, 적들의 감시 속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집에 틀어박힌 채 고립된 삶을 살게 된다.(579a-c)

* 혹자는 현실에서 성공한 참주정이 존재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역사를 들여다보면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지배를 통해 공포와 불안을 극대화시켜 아주 오래 동안 체제를 유지하고 지속한 참주정이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나 플라톤이 이곳에서 드러내고 있는 참주정의 비참성의 핵심적인 요체들 즉 ‘욕정의 노예상태’, ‘영혼의 궁핍’, ‘공포와 고립’은 현실 세계 실제 참주들 모두에게 – 그들이 끝까지 권력을 유지했건 중도에 좌절되었건 상관없이 – 하나같이 두루 적용될 수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영혼의 측면에서 보면 플라톤에게 성공적인 참주란 그 자체로 형용 모순이다. 플라톤 당대 가장 알려진 최고의 참주로서 제명을 산 디오뉘시오스 I세조차 평생 전쟁에 시달렸고 특히 암살 위협 때문에 꼼짝없이 성에 갇혀 지내는 신세라 당대 사람들이 가장 선망하는 올림픽 구경조차 대리인을 보냈다고도 전해진다.(J. Adam. 해당 부분 노트 참고) 역사 속 폭력적 독재자들에 관한 전기에서 평생을 행복하게 살았다는 증거를 찾아내기란 그리 쉽지 않다. 반대로 처참하고 불행한 종말을 맞이했다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오늘날 자기 세상인 양 설쳐대는 우리가 알만한 현대판 참주들 모두 하나같이 권력 상실과 전쟁에 대한 공포, 자신과 가족에 대한 암살 위협에 시달리면서 폐쇄된 공간에서 잠도 못 이루면서도 욕정은 들끓어 늘 결핍과 불만을 끼고 산다. 무엇보다 권력을 독점하려는 참주의 욕망은 그 자체로 참주 자신을 배타적으로 고립시키고 타자들과의 관계 일체를 분열시켜 결국은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근본 원인이 된다. 현실 정치가 예외 없이 이러한 권력욕의 전쟁터일 수밖에 없다면 일시적인 평화는 몰라도 인류에게 불행이 그칠 날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곳 첫 증명에서 다루어진 노예 상태가 아닌 자유, 부(富), 그리고 공포로부터 해방 그 모두는(이것은 우연찮게도 각기 민주정 치하 민중들, 과두주의자들, 참주 포함 참주정 치하 시민들이 바라고 원하는 가치들이다.) 오직 철학자왕정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철학자왕정의 도래 가능 조건에 신적 행운과 영감의 도움까지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편지> 326a, <국가> 499c) 그 실현이 얼마나 지난한 것인지, 지성이 지배하는 나라를 향한 이곳 <국가> 논의가 얼마나 간절하고 처절한 것인지를 함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상의 실현은 어렵고 처절하다. ta kala tō onti chalepa.- 아름다운 것은 참으로 힘든 것이다.

* 이로써 첫 번째 증명이 마무리된다. 위 증명이 갖는 한계는 시작 전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처럼 ‘전에 정의가 어떤 것인지에 관해 동의한 것이 옳다’(576a)는 것, 즉 본성에 따른 모든 계층 간과 영혼 간의 조화와 질서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증명이 나라와 개인 간 ‘동일한 구조’와 ‘전체 연관’을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끝-


다음 주제 : VI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타락한 정치체제들 분석(제8권-제9권) 

B.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자 가운데 누가 행복한가. : 정의로운 삶의 우월성 증명(제9권

576b-592b)

1) 두 번째 증명 : 영혼의 세부분에 상응하는 즐거움에 기초한 증명(580c-583a)

[강좌안내] 2026년 <한철연 아카데미> 서울도서관과 협업 : 9월 작가힙톡(Hip-Talk) 3주(매주 금요일 / 4일, 11일, 18일) 일정 [한철연 소식]

“2026년 <한철연 아카데미>는 서울도서관과 협업하여 서울도서관의 연속 강좌 “작가힙톡(Hip-Talk)”으로 진행합니다. 9월 작가힙톡(Hip-Talk) 3주(매주 금요일 / 4일, 11일, 18일) 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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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4일 – 윤태양 작가 : 온고지신도 텍스트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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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 윤태양(건국대학교 철학과 강사)
>도서 : 『 다시 , 동학 』
>내용 : ‘온고지신’의 자세로 미래를 구상하는 주체적인 고전 읽기 방법을 제안
>일시 : 9.4. (금) 19:00~20:30
>장소: 서울도서관 일반자료실 내 생각마루
>신청기간 : 8.25. (화) ~ 9.3. (목) 선착순 모집
● 9월 11일 – 김정철 작가 : 알고리즘의 파도 속, 느리게 읽기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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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 김정철(충북대 인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
>도서 : 『기울어진 문해력』
>내용 : 알고리즘 세계에서 느리게 읽기의 필요성과 가치
>일시 : 9.11. (금) 19:00~20:30
>장소: 서울도서관 일반자료실 내 생각마루
>신청기간 : 8.25. (화) ~ 9.10. (목) 선착순 모집
● 9월 18일 – 조배준 작가 : 포스트 휴먼의 질문하는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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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 조배준(숭실대 베어드학부대학 연구교수)
>도서 : 『읽지 않는 사람들』
>내용 : AI 시대, 독서와 질문의 필요성
>일시 : 9.18. (금) 19:00~20:30
>장소: 서울도서관 일반자료실 내 생각마루
>신청기간 : 8.25. (화) ~ 9.17. (목) 선착순 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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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도서관 철학 토크콘서트, 두 밤의 기록, “삶을 돌아보는 네 가지 철학적 시선” ② [한철연 강좌]

서울도서관 철학 토크콘서트, 두 밤의 기록,

삶을 돌아보는 네 가지 철학적 시선” ②

 

글 : 오상현 (철학박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업1부장)

 

이 프로그램은 지난 7월, 서울도서관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함께 기획한 ‘작가힙톡’ 토크콘서트입니다. ‘개인으로서의 나’에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까지, 네 명의 철학자가 두 번의 저녁에 걸쳐 삶에 관한 질문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업1부장으로서 이 프로그램을 기획했으며, 두 회차 모두 진행과 토크콘서트 사회를 맡았습니다. 아래는 그 두 번째 밤을 돌아보며 남긴 기록입니다.

 

2주차 관계 속에서 나를 지키는 철학의 기술 / 2026724일 금요일 19:00

 

두 번째 밤의 주제는 ‘관계 속의 나’였습니다. 성균관대 현남숙 교수님이 ‘공감, 소통, 인간관계’를, 한국방송통신대 진보성 교수님이 ‘인정, 비교, 신뢰, 공정함’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지난 시간에 ‘개인으로서의 나’를 들여다보았다면, 이번 시간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 즉 나를 둘러싼 관계를 들여다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이번에도 진행을 맡아 무대에 섰습니다.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 서로 다른 전공의 두 분이 같은 주제 앞에 나란히 섰습니다.

첫 번째 강연자는 현남숙 교수님이었습니다. 대화는 다이얼로그, 혼자 하는 독백이 아니라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르틴 부버의 ‘나-너 대화’와 ‘나-그것 대화’를 빌려, 상대를 인격으로 만나는 대화와 도구로 대하는 대화가 얼마나 다른지 짚었습니다. 힘들 때만 연락해 몇 시간을 쏟아내고는 평온할 때는 소식 없는 지인 이야기가 인상 깊었습니다. 셰리 터클의 『외로워지는 사람들』을 빌려 온라인 시대의 소통이 편리해진 만큼 헐거워졌다고 짚었고,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인용하며 갈등은 침묵과 시간이 메워준다고 조언했습니다.

관계 이야기에서는 영화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속, 사랑이 식을까 두려워 스스로 생을 마감한 여인의 이야기로 시작해 바우만의 『리퀴드 러브』로 나아갔습니다. 단단했던 관계들이 액체처럼 흘러내리는 시대, 우리는 책임을 지는 ‘릴레이션십’보다 책임 없는 ‘네트워크’에 익숙해졌다고 했습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빌려, 개성을 지키며 하나 되는 것, 보호와 책임, 존중과 지식이 관계의 조건이라는 말로 마쳤습니다.

두 번째 강연자는 진보성 교수님이었습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서양 철학이 붙잡아 온 질문이지만, 『논어』에는 애초에 그런 존재론이 없다고 했습니다. 대신 ‘사람(人)’ 옆에 ‘두 이(二)’가 붙은 ‘인(仁)’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그 자체를 중심에 둔다는 것입니다. 복숭아 씨앗 속 씨알처럼 누구에게나 있지만, 관계 속에서만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인정에 대해서는 『논어』의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보지 못함을 걱정하라.”는 구절과 악셀 호네트의 ‘인정 투쟁’ 개념이 이어졌습니다. 비교에 대해서는 “군자는 두루 사귀되 비교하지 않는다.”는 『논어』 구절과 『장자』의 이야기를 빌려, ‘대동’과 ‘소동’을 구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는 문장으로 진짜 친구는 화려함이 사라진 뒤에야 보인다고 전하며, 거리를 두고 기다리라는 말로 마쳤습니다.

짧지만 강렬했던 두 강연이 끝나고 토크콘서트가 이어졌습니다. 맨 앞에 나란히 앉은 두 분의 청중이 실은 오늘 처음 소개팅으로 만나 이 자리에 함께 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강의실은 웃음과 탄성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오랜 친구인데도 나이가 들며 달라진 처지에서 오는 씁쓸함을 묻는 질문, 관계를 맺을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을 묻는 질문도 이어졌습니다. 진보성 교수님은 타인을 자신의 삶의 패턴에 억지로 맞추려 하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라고 답했고, 현남숙 교수님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개념을 빌려, 굽신거림과 오만 그 사이 어딘가에서 매 순간 적절한 판단을 찾아가는 것이 관계의 기술이라고 답했습니다.

프로그램을 모두 마치고 탁 트인 서울광장에 다시 섰습니다. 저 멀리 남산타워는 여전히 게으름 없이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무더운 여름밤, 나를 들여다보고 관계를 살펴보는 일까지, 두 번의 저녁이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께 의미 있는 사색의 시간이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소개팅 당일에 강연장까지 와 주셨던 두 분, 첫 만남에 나누었던 수많은 철학적 질문들을 함께 했으니, 앞으로도 오래오래 예쁜 사랑 이어가시길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프로그램이 종료되었습니다. 강연을 수락해주신 박은미, 현남숙, 진보성 선생님과 강연 협의부터 실무까지 함께 애써주신 서울도서관 관계자분들, 영상 촬영을 맡아주신 최기봉 피디님까지 깊이 감사드립니다. 더 유익하고 의미 있는 프로그램으로 다시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끝.


서울도서관 철학 토크콘서트, 두 밤의 기록, “삶을 돌아보는 네 가지 철학적 시선” ① [한철연 강좌]

서울도서관 철학 토크콘서트, 두 밤의 기록,

삶을 돌아보는 네 가지 철학적 시선” ①

 

글 : 오상현 (철학박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업1부장)

 

이 프로그램은 지난 7월, 서울도서관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함께 기획한 ‘작가힙톡’ 토크콘서트입니다. ‘개인으로서의 나’에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까지, 네 명의 철학자가 두 번의 저녁에 걸쳐 삶에 관한 질문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업1부장으로서 이 프로그램을 기획했으며, 두 회차 모두 진행과 토크콘서트 사회를 맡았습니다. 아래는 그 첫 번째 밤을 돌아보며 남긴 기록입니다.

 

1주차 진짜 나를 들여다보는 철학적 시선 / 2026710일 금요일 19:00

 

진짜 나를 찾는 여름 밤. 첫 번째 밤의 주제는 ‘진짜 나’였습니다. 철학커뮤니케이터 박은미 선생님이 ‘진짜 나, 욕망, 죽음, 행복’을, 저는 ‘외로움, 불안, 능력주의, 대체불가능성’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금요일 저녁 일곱 시, 무더운 여름 공기가 가시지 않은 채로 사람들이 서울도서관으로 하나둘 모여들었습니다. 마흔 명 정원을 훌쩍 넘어서 최종 신청 인원은 예순여덟 명이었습니다. ‘불타는 금요일’, 이른바 ‘불금’을 포기하고, 저마다의 약속을 미뤄두고 온 얼굴들을 보면서, 무엇이 이들을 여기까지 오게 했을까 생각했습니다.

프로그램의 기획 취지를 설명하면서 저는 ‘사람’과 ‘인간’이라는 두 글자를 나란히 세웠습니다. ‘사람(人)’ 옆에 ‘사이 간(間)’이 만나야 비로소 ‘인간(人間)’이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낯선 이와 눈을 맞추고 인사를 나누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좌우에 계신 이분들이 바로 여러분을 사람에서 인간으로 거듭나게 만들어주시는 소중한 조건입니다.” 『논어』의 한 구절도 함께 건넸습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그런데 그 세 번째 사람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첫 시간은 사람, 즉 ‘개인으로서의 나’를 살펴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 번째 강연자는 철학커뮤니케이터 박은미 선생님이었습니다. 먼저‘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는 묵직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반면에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내맡기는 삶을 ‘가짜 나’라고 했습니다. 늘 누군가와 비교하고, 인정받아야 안심이 되고, 그러다 문득 공허해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나’는 비교할 잣대가 없다고 했습니다. 나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평생에 꼭 한 번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 자신이다.”라는 말씀이 참석자들의 마음에 내려앉았습니다. 세네카의 말도 빌려 왔습니다. 인생은 진정으로 시작할 준비가 되면 거의 끝나 있다고 말입니다. 죽음을 자꾸 회피하려 들기 때문에 우리 삶이 새로워지지 못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제가 나섰습니다. 외로움, 불안, 능력주의, 대체불가능성. 네 개의 단어를 들고 무대에 섰습니다. “외로운 것보다 더 외로운 것은 외로움을 들키는 것”이라던 어느 카피라이터의 문장에서 시작해,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정호승의 시구를 지나, 마침내 『논어』의 한 구절에 닿았습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외로움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넘어서야 비로소 독립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얹었습니다. 다음 키워드는 불안이었습니다. 공포는 그 대상이 분명하지만, 불안은 그 대상 없이 오직 가능성만으로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 존재라는 사르트르의 말처럼, 정해진 목적 없이 던져진 우리 인간에게 불안은 숙명과도 같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니 지금 혹 불안을 느낀다면, 그것은 병이 아니라 오히려 정상인 셈이라고 전달했습니다. 위로가 되었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입니다.

짧은 두 강연이 끝나고 토크콘서트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한 참여자가 조용히 손을 들어 자기의 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상황과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교차하면서 매일이 불안하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저는 가수 보아의 노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데뷔 초, 유행했던 곡의 제목은 ‘No.1’이었지만, 십 년이 지나 그녀가 부른 노래는 ‘Only One’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일등이 아니어도 좋다고, 유일한 존재가 되는 길도 있다고.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사람들은 해본 일보다 해보지 않은 일을 더 오래 후회한다고, 망설여진다면 일단 저질러 보라고 말입니다.

어느덧 마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정답을 얻으러 온 밤이 아니었습니다. 두 철학자의 이야기 역시 그들의 시선이기에, 각자의 시선이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고 전했습니다. 강의실을 나서는 청중들의 얼굴을 한 분 한 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만은 한결 가벼워지기를 바랍니다.

프로그램을 모두 마치고 나와 탁 트인 서울광장에 섰습니다. 저 멀리 남산타워가 무심하게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불금을 포기하고, 철학으로 자기 삶을 돌아보고자 와주셨던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끝.


결의 철학자 윤구병 선생의 ‘꿈꾸는 형이상학’ (2021) 서평[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결의 철학자 윤구병 선생의 <꿈꾸는 형이상학> 서평

1)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윤구병 선생님(이하 ‘선생님’으로 지칭)의 철학을 소개한 한재경 선생의 책 <윤구병 철학의 이해>(미발간 원고)을 읽고 다시 한번 선생님의 형이상학에 흥미가 이끌렸기 때문이다.

필자는 몇 년 전인가 선생님을 모시고 선생님의 철학에 관한 심포지엄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필자는 선생님이 2013년 발간한 책 <철학 다시 쓴다>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 이 책을 중심으로 선생님의 형이상학에 관해 논평했다.

이번 읽은 한재경 선생의 책을 통해 그동안 선생님의 철학적 사유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새로 발간한 윤구병 선생의 책을 두 권이나 사서 읽었다. 하나는 <꿈꾸는 형이상학>(보리, 2021)이고 다른 하나는 <철학자가 본 우주 역사>(보리, 2024)이다. 그 가운데 전자가 눈에 뜨였다. 이 책에서는 확실히 그 이전에 나타나지 않았던 논의, 대표적으로 ‘거품 우주론’이 새로이 등장해서 진한 흥미를 느끼게 된 것이다.

2)

먼저 한재경 선생에게 감사하다. 한 선생은 선생님의 철학을 ‘산뜻하다’(또는 스마트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잘 정리했다. 먼저 선생님의 핵심적 저서 세 권(위의 두 권을 제외한 나머지 책은 ‘있음과 없음’이다)을 ‘단계’로 요약하고, 여기서 문제가 되는 논점을 ‘고리’로 정리했고, 마지막에는 ‘묻고 답하기’를 통해 독자가 드는 의문점을 풀어주었다.

이런 감각은 선생님이 젊었을 때 ‘뿌리 깊은 나무’라는 잡지를 편집할 때 지녔던, 또 출판사 보리를 통해 새로운 감각으로 그림책을 만들어낼 때 보여주었던 감각인데, 한 선생이 그런 감각을 빼닮았다는 느낌이 들어, ‘우연이 아니네’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필자가 잘 정리했다는 것은 선생님의 생각에 물음을 던질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한 선생의 정리 덕분에 선생님의 생각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필자가 한 선생의 글을 평가하려면, 선생님의 철학을 알고 그것과 비교해야 하는데, 아직 그럴 처지에 이르지 못해 그런 평가는 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서문에 선생님 자신이 한 선생의 책이 자신의 철학을 온전하게 담아냈다고 하니, 그에 기초해서 차라리 선생님의 철학에 직접 접근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철학 다시 하다’라는 저서도 못지않게 선생님의 철학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빠뜨린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필자가 보기에 선생님의 형이상학에는 그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동양철학의 전통이 그 가운데서도 특히 기 철학의 전통이 새롭게 등장하는데, 이 전통에 관해서 충분히 부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필자가 보기에 선생님은 그사이에 그 이전 플라톤이나 신플라톤주의 전통에서 동앙 철학의 기 철학 전통으로 대대적인 회전 기동을 했다. 그런 가운데, 아직 그런 회전 기동이 완성된 것이 아닌지, 그 이전 플라톤적 이원론적 체계 즉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양극 체제와 기 철학에서 기 일원론적 사유가 혼재하면서 그사이에 균열과 충돌이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글을 쓰는 동기가 이런 갈등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한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3)

선생님의 철학의 출발점은 여러 책에서 강조되는 것과 같이 ‘없는 것’이라는 개념을 ‘빠진 것’으로 이해하자는 주장이다. 파르메니데스가 ‘없는 것’은 없다고 한 이래로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있는 것’에 대립하는 ‘없는 것’ 없이는 형이상학이 출발하지 않으니, ‘없는 것’이 부딪히는 난점, 모순을 피하려 ‘빠진 것’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하기를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상 여러 책에서 선생님이 사용하는 언어를 검토해 보면, 굳이 이런 제안이 의미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대부분 글에서 선생님은 ‘빠진 것’이라는 말 대신 ‘없는 것’이라는 말을 그대로 쓰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빠진 것’이나 ‘없는 것’이나 큰 차이가 없는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님이 그렇게 제안한 것은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인데, ‘빠진 것’은 빠진 것 외에 나머지는 있으니 아무것도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빠진 것’은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빠진 것’도 모든 것이 빠진 것으로 되면,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서 ‘없는 것’과 같은 것이 되니, 큰 차이가 없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필자는 파르메니데스처럼 과연 없는 것은 사유조차 할 수 없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없는 것’은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사유할 수는 있지 않을까?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사유는 ‘없는 것’ 없이는 사유할 수 없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구나 빨간색을 보고 거기에 없는 것인데도 곧바로 파란색이 아니라고 사유하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선생님은 글에서 ‘없는 것이 없다’는 ‘[모든 것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만약 ‘없는 것’이 사유할 수 없다면, ‘없다’가 중첩된 이 말을 우리는 어떻게 사유해서 그것을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인가?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사유는 반성적이다. 우리는 빨간색과 파란색(논의의 필요 상 색에 두 가지만 있다고 하자)을 묶어서 사유한다. 파란색은 빨간색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빨간색을 보고 곧바로 파란색이 아니라고 하며, 파란색이 없으면 빨간색이 있다고 생각한다.

+ 전기와 -전기를 보자. – 전기는 ‘없는’ 전기는 아니다. 다만 + 전기에 대립하는 전기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사유에서 우리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대립시켜 사유한다. 그러므로 ‘있는 것’이 있으면 ‘없는 것’은 없다고 말하기도 하며 ‘없는 것’이 있으면 ‘있는 것’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사유가 가능한 것은 우리의 사유가 ‘없는 것’을 통해서 사유하는 반성적 사유이기 때문일 것이다.

3)

선생님의 생각은 어떻든 ‘없는 것’을 ‘빠진 것’의 극단으로 보자는 것인데, 마찬가지로 ‘있는 것’ 역시 반대쪽 극단이 될 것이다. 양극단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은 ‘있는 것인 동시에 없는 것’이며 ‘있지 않은 것이며 없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곧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무규정자, 아페이론이다.

아페이론’ 개념이야 플라톤 철학 이래로 익숙한 개념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여기서 더 나가서 아페이론에 정도를 설정한다. 즉 ‘있는 것’이란 극단에 더 가까운 아페이론과 ‘없는 것’이란 극단에 더 가까운 아페이론이다. 이렇게 되면 그사이에 무한한 수의 아페이론이 출현한다. 제논의 역설이 잘 보여주듯 1과 0 사이에는 무한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아페이론에 정도가 있다는 것은 좀 이해하기 힘들다. 아페이론 즉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무규정적인 것인데 무규정적인 것에 정도가 있을 수 없지 않을까?

유한한 것들 사이에는 가깝고 멀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처한 극단은 극단인 한에서 무한한 거리에 있다. 무한한 거리를 측정할 수 없으니, 어느 것이 무한에 더 가까운가는 말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무한히 선한 하나님 앞에서 교황과 나 가운데 누가 하나님에 가까울까? 아마 하나님 앞에서는 다 같이 타락한 죄인일 것이다.

더구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상대적으로 짝이 지어진 개념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아페이론은 b, c, d는 있지만, a는 없다고 하자. 이것은 ‘있는 것’이 많으므로 ‘있는 것’에 가까운가? 그러나 사실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무한히 많은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에는 e, f, g, …d 없으니 차라리 없는 것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4)

일단 ‘있는 것’과 ‘없는 것’이라는 양극단 사이에 아페이론이 있다고 하자. 중요한 것은 이 아페이론은 운동한다는 것이다. 이 운동은 한편으로는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가는 운동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있는 것’에서 ‘없는 것’으로 가는 운동이다.

이 두 가지 운동을 선생님은 ‘함’과 ‘됨’의 운동이라 한다. 이 운동 개념이 사실 선생님의 형이상학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는 생각이다. 우선 이 운동은 각기 그 원천이 다르다. ‘함’의 운동은 원천이 ‘있는 것’에서 나온다. 반면 ‘됨’의 운동은 원천이 ‘없는 것’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형이상학의 핵심적 문제에 부딪힌다. ‘있는 것’은 있을 뿐이다. 그것이 순전하면 할수록 더욱 ‘있는 것’뿐인데, ‘있는 것’이 어떻게 ‘함’이라는 운동의 원천이 되는가? ‘있는 것’은 하나이니, 하나로 뭉치게 하는 힘이 나오는 것일까? ‘없는 것’은 여럿이니, 여기서 여럿으로 만드는 힘이 나오는 것일까?

있기는 있고 그것이 하나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하나로 만드는 힘은 다른 데 있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없는 것’은 여럿이더라도 그것을 여럿으로 만드는 힘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철학에서 ‘있는 것’, ‘없는 것’과 구별되어서 ‘임’과 ‘아님’이 논의되어 왔다. ‘임’은 그 자체가 긍정적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고 ‘아님’은 부정적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니 차라리 ‘임’과 ‘아님’에서 ‘함’과 ‘됨’이라는 운동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선생님은 ‘있는 것’과 ‘임’, ‘없는 것’과 ‘아님’을 이미 동일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임’과 ‘아님’이 따로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임과 아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관계는 모든 철학자가 논하는 중요 문제인데도 선생님의 글에서는 그런 논의가 없다. 왜냐하면, 양자를 일치하는 것으로 전제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양자는 언어상으로, 특히 한국어에서는 두 언어쌍은 명백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헤겔의 경우도 ‘임’과 ‘아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구분된다. ‘임’과 ‘아님’은 문장의 계사이며 그것은 어떤 것이 다른 것과 이루는 관계를 지칭하는 것이다. ‘임’은 어떤 것을 서로 하나로 만드는 힘이며 ‘아님’은 서로 다르게(여럿으로) 만드는 힘이다. 어떤 것은 이런 두 힘 즉 ‘임’과 ‘아님’의 운동 속에 있으며 어떤 것은 이런 운동의 어떤 상태이다. 이 운동이 일정한 평형 상태에서 고정된 듯한 모습을 지니면, 그것을 통해 어떤 것이 지닌 규정 즉 ‘무엇임’이 출현한다.

있는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계[Da] 속에 있는 것 즉 현존[Dasein]이다. 이 관계가 운동하는 힘이 되어 어떤 것을 있게 만든다. 이 관계를 통해 생성되는 규정성은 이 관계가 전개하는 전체 공간 속에 위치하게 된다. 이런 위치함을 통해 어떤 것은 현존한다.

필자는 헤겔의 말대로  ‘임’과 ‘아님’이 운동의 원천이라고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운동의 원천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아닌 다른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예시하려는 것이다. ‘임’과 ‘아님’이 운동의 원천이 아니더라도, 하여튼 운동의 원천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자체에 있다는 것은 특별하게 논증되어야 할 사실이다.

5)

이제 선생님 형이상학의 전모를 이해하기 위해 ‘있는 것’, ‘없는 것’이 운동의 원천이라는 주장을 논증 없이 받아들이고 보자.

더 큰 문제가 있다. 운동의 힘은 성격이 다르다. ‘있는 것’의 운동은 자기 방향으로 아페이론을 끌고 간다. 그래서 아페이론을 더욱 하나가 되게 만든다. ‘없는 것’은 자기 방향으로 아페이론을 끌고 가서 더욱 여럿으로 만든다.

이런 운동은 사실 헤라클레이토스가 촛불의 비유를 통해 생성하는 힘과 소멸하는 힘으로 제시한 바가 있다. 이런 운동하는 아페이론을 운동의 측면에서 보면, 끊임없이 운동하는 것이지만, 두 가지 운동이 균형 속에서 있을 때 그것은 정지한 것으로 보이며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를 ‘로고스’라 한다.

동양철학에서 기 철학도 마찬가지로 음과 양이라는 두 가지 대립하는 힘은 끊임없이 상호 전환하는 운동을 전개하니 이 운동 자체는 무극이며 이 운동이 고유한 균형을 이룬다면 곧 태극이다.

그런데 헤라클레이토스든, 기 철학에서든 두 운동은 서로 대립하지만 대칭적이다. 두 가지는 어느 것이 어느 것보다 앞서고 우위라고 말할 수 없다. 이런 일방의 우위는 기의 일원론적인 철학에서는 논리적으로 배격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양자가 균형을 이루어야만 하나의 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헤겔의 경우, 두 힘의 대립을 제시하면서 이 두 힘은 펼치고 수렴하는 힘이라고 하지만, 펼치는 힘이 펼치는 것은 수렴하는 힘이 그렇게 촉발하기 때문이라고 하며, 수렴하는 힘이 수렴하는 것은 펼치는 힘이 그렇게 촉발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양자 사이에 능동과 수동을 공평하게 부여한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 두 가지 운동을 ‘함’과 ‘됨’의 운동으로 규정하는데 이 ‘함’과 ‘됨’은 능동과 수동이라는 비대칭적인 운동이다. ‘함’, 능동은 작용하고 ‘됨’, 수동은 수용한다. 그러나 ‘됨’이 능동적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함’이 수동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

5)

이렇게 비대칭적인 운동을 설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선생님이 앞서서 가졌던 유출설적인 흔적이 아닐까 한다. 신플라톤주의자에게서 ‘있는 것’은 ‘없는 것’을 향해 유출한다. ‘있는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질수록 하나로 만드는 힘이 떨어지니, 거꾸로 여럿으로 만드는 힘이 강하게 된다. 이런 유출 가운데 자연계의 다양한 층위가 출현한다. ‘철학 다시 하다’에 따르자면, 여기서 정신과 생명, 자연, 질료가 차례로 출현한다.

자연의 위계적 계층성을 설명하는데 이런 유출설이 기여한다. 이 신플라톤주의에서부터 나오는 유출설이야말로 그 이후 자연의 위계성 또는 진보적 진화를 확립하는 원천이 되었다.

그런데 2021년 발간된 <꿈꾸는 형이상학>이란 책에 이르면, 이제 ‘함’과 ‘됨’이라는 두 가지 힘이 비대칭적이라는 성격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필자가 선생님이 이 시기 큰 변화를 겪었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이제 이런 변화의 측면을 더 규명해 보자.

‘꿈꾸는 형이상학’에서 선생님은 두 가지 우주 설화를 제시한다. 한 재경 선생이 요약한 바에 의하면 두 가지다. ① 하나의 설화에서는 ‘한어미’라는 개념이 출현한다. 원래 두 힘은 ‘한어미’ 속에 통일되어 있었다. 그러다 어떤 우연한 기회에 두 가지 대립하는 힘으로 분열되는데, 이제 두 힘은 ‘밝이’나 ‘검이’와 같은 대립하는 개념으로 규정된다.

“거미가 밝이를 푹 감싸고 있어서 .,, 밝이는 검이가 끝없이 옥죄는 바람에 뜨거워지고 또 뜨거워져서 펑 하고 터져 버렸다. … 이때 한 덩어리였던 힘이 둘로 갈라진다. 밝이의 힘은 하미가 되고 검이의 힘은 되미가 된다. 하미가 힘을 쓰면 되미는 그 힘을 받아 하는 대로 된다.”(한재경, 미발간원고)

② 다른 하나의 설화는 ‘까망이’와 ‘하양이’라는 용어가 쓰인다. 그런데도 일원론의 흔적은 은폐된 방식으로 출현한다. 즉 두 대립하는 힘의 긴장된 관계를 통해 내적인 통일성을 가정한다.

“하양이와 까망이가 틈새 없이 맞닿아 두 힘이 서로 다른 결을 이루면서 태극도형처럼 하나는 함으로 다른 하나는 됨으로 휘어진 결 무늬를 이루기 시작했다.”(꿈꾸는 형이상학, 28)

여기서 ‘밝이’나 ‘햐양이’, ‘검이’나 ‘까망이’는 동양철학에서 양과 음에 대응하는 용어로 보인다. 이렇게 두 힘이 원래 통합되어 있었다는 것이나, 두 힘이 음양으로 구분되면서 양자 사이에 비대칭적인 흔적은 사라진다. 그 점은 두 힘의 관계가 태극도설의 모양으로 제시된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6)

이처럼 유출설적인 입장에서 동양철학의 기 일원론으로의 전환을 일으킨 원인은 무엇일까? 그 원인은 따지고 보면 그 이전부터 계속된 선생님의 지론인 ‘결’의 개념 때문이 아닐까 한다.

사실 이 ‘결’의 사상은 일찍부터 지녀왔던 사상이며 매번 강조해 마지않던 사상이다. 그런데 유출설적인 입장에서 대립하는 힘인 ‘함’과 ‘됨’이 비대칭적이라면 이것들이 만나서 결이 나온다고 보기 어렵다. ‘결’은 두 힘의 균형을 통해 서로 순환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비대칭적이라면 이런 균형이 깨어지면서 순환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선생님으로서는 ‘결’이 ‘톨’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은 현대과학의 이론과 연관되면서, 형이상학이 확정되기도 전에 이미 확고하게 가지고 있는 신념이다. 그런데 유출설의 입장에서 이 결을 설명하기가 곤란했던지, 사실 앞선 책에서는 ‘결’이라는 말은 나오지만, 그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 나오는지 상세한 설명이 없다.

‘결’의 사상을 끌어내려면 대립하는 힘의 균형이라는 개념에 이르러야 했는데, 이런 대립의 균형은 이미 양자의 통일을 전제로 하기에 기 일원론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그 덕분인지, ‘꿈꾸는 형이상학’에서는 두 힘이 꼬여서 어떻게 결이 나오는지가 상세하게 그려진다. 이게 소위 선생님의 ‘거품 우주론’이다.

‘거품 우주’론의 상세한 내용은 생략하도록 하자. 그게 성공적인지는 필자가 평가할 능력이 되지 못한다. 다만, 그 근거는 함과 됨이라는 비대칭적 구조 없이 기일원론에 근거한 대칭적인 음양의 순환으로도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그 우주는 주역에서 음양이 중첩되어 사상, 팔괘,  64효 등으로 나가는 세계와 어쩌면 그렇게 신통하게 들어맞는지 모르겠다. 다만 선생님은 주역에서 음양의 관계를 뫼비우스적 띠로 이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밝이’의 한 가운데 블랙홀이 있고 ‘검이’의 한 가운데 화이트홀이 있으며 이 양자가 다시 월홀과 한 자리에 있다는 주장에서 분명하게 엿보인다. 하나의 뫼비우스의 띠가 다시 중첩되면서 뫼비우스의 띠를 이룬다면, 거품 우주론이 나오지 않을까? 

어떻든 간에 매우 흥미로운 우주였다. 필자는 이규성 선생 덕분에 동양철학, 그 가운데 왕선산의 기 철학을 배운 적이 있는데, 하나의 기가 음양 두 기로 분화되어 상호 대립하는 가운데 우주 만물이 생겨난다는 주장에 흥미를 느꼈다. 그러나 그의 철학에서 음양의 대립이 어떻게 다양한 만물로 발전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그저 기에 청탁과 유동성과 고정성이 있다는 정도 외에 더 들을 수는 없었다. 또한, 필자는 여러 주역 소개서를 읽었다. 동양철학 그것도 주역에 관해 지식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주역에서 음양의 괘가 중첩되는 과정을 선생님처럼 우주 발생론으로 읽는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선생님의 ‘거품 우주론’은 무척이나 탁월한 설명으로 보인다.  음양을 통해 이루어진 우주생성론, 코스모고니는 선생님이 최초가 아닐까? 여기 선생님이 주역이 제시한 것과 ‘거품 우주론’을 보여주는 한 가지 도해만을 소개하려 한다.(이 도해를 읽을 때 그저 평면적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 같다. 순환이 뫼비우스적인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전제로 읽으면 무척이나 흥미로운 도해로 보인다.)


 

이 거품 우주는 신적 지성의 눈으로(스피노자적 영원의 상하에서) 보면, 단순한 음양의 순환을 통해 모든 우주가 설명되는 일이관지 하는 우주일 것이다. 그러나 지상적 인간의 지성으로 보면, 아마도 그 인간의 지성이 어느 위치에 서 있는가에 따라서 어떤 우주는 맴돌고, 어떤 우주는 휘돌며 어떤 우주는 감돌고 있을 것이다. 인간 지성의 눈으로 보면, 이 우주는 우연 그 자체이지만, 영원의 상하에서 보면 필연적이다.

이 무한 기하학의 세계와 같이 아름다운 우주에서 선생님은 우연을 강조한다. 그것에서 자유가 나오기 때문이라 한다. 하지만, 우연은 곧 맹목적 운명이니, 어린아이처럼 또는 선사처럼 이 운명을 즐기는 선생님은 몰라도 우리 같은 무거운 영혼에게는 필연성의 세계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7)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형이상학에서 아직도 신플라톤주의적 유출설적 흔적이 여전히 남아, 일원론적 기 철학적인 흔적과 충돌한다는 사실만을 언급하고 마치려 한다.

이런 흔적은 ‘밝이’나 ‘검이’ 대신 ‘하미’나 ‘되미’, ‘잇스미’나 ‘업스미’라는 용어가 사용된다는 데서 남아 있다. 또한, 한 덩어리인데 그 모습이 ‘밝이’가 ‘검이’를 싸안고 있고 옥죄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는 데서도 나타난다. 아무리 싸안더라도 또는 서로 꼭 붙어있더라도 둘은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하미’가 하면 ‘되미’는 “하는 대로 된다”라고 말하는 데에는 여전히 비대칭적 능동-수동 관계가 등장한다.

함과 됨, 능동과 수동이라는 비대칭성을 유지해야 할 다른 이유가 있을까? 유출설이나 서양철학적 흔적에서 완전히 벗어나면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의문이 많다. 2021년 <꿈꾸는 형이상학>에서 선생님이 유출설에서 기 일원론으로 도약했듯이 다시 한번 도약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한다.

필자는 지금까지 선생님의 철학을 한마디로 하면 곧 ‘결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이 좀더 오래 사셔서 우리에게 또 “새로운 철학이네!” 하는 경탄을 다시 한번 불러일으키기를 고대해마지 않으면서,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4-실체에서 주체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4-실체에서 주체로

1)

헤겔은 칸트의 선험철학의 원리를 받아들이면서 칸트가 선험적 범주가 대상을 구성하는 것은 직관의 다양이 선험적 범주에 할당되는 것이며 따라서 개념은 공허한 형식이고 그 내용은 직관에서 주어지는 다양이라고 했던 것을 비판한다.

헤겔은 선험적 범주는 공허한 형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기의 내용을 산출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범주는 일반적 개념이지만, 동시에 자기 규정성을 지닌 구체적인 개념이다. 실재성은 범주 자신에서 나오므로 범주와 실재성, 개념과 대상은 합일하면서 객관적인 진리로 된다.

“또한, 여기[칸트적 심리적 관념론]에 속하는 것은 개념이 다시 직관의 다양이 없으면 내용이 없고 공허할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개념이 선천적[apriori] 종합이라는 사실을 무시한다. 개념이 그와 같이 선천적 종합이므로, 개념은 정말로 말해 규정성과 자기 내 구별을 지닌다. 규정성은 개념의 규정성이고 따라서 절대적 규정성, 개별성이므로 개념은 모든 유한한 규정성과 다양성의 근거이자 원천이다.”(논리학 2부, GW12, 23)

헤겔은 ‘선천적 종합’, 즉 개념에서 그 규정성이 나온다는 주장을 자기의 철학의 원리로 삼는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어떻게 보면, 마치 나르시시즘적 원리처럼 보인다. 자기가 만들어놓은 것이니 그 속에 자기가 들어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렇게 자기가 만들어놓은 것은 주관적인 산물이며 그 너머에 대상 자체, 물 자체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2)

헤겔이 개념에서 규정성이 나온다고 했을 때 이 규정성이 자기 넘어 물 자체에 부딪힌다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개념이 의식과 대상으로 분화되고 즉 그 자체 존재[an sich]가 대자 존재[fuer sich]와 대타 존재[Sein fuer andres]로 구별된다고 했을 때, 여기서 의식, 대자 존재란 곧 개념에서 나온 실재성, 규정성을 의미하며, 대상 곧 대타 존재는 이런 실재성과 규정성 너머에 등장하는 물 자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런 분화와 구별이 의미하는 것은 곧 개념에서 규정성이 나오는 순간 물 자체에 부딪힌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 물 자체를 헤겔은 어떻게 극복하는 것일까? 헤겔을 비롯한 모든 당대 철학자들의 근본적 아포리아였던 이 문제를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론[Einleitung]에서 의식 경험의 길이라는 방법을 통해 풀어나간다.

즉 하나의 의식은 일정한 범주를 통해 대상을 규정한다. 의식은 이 규정성을 자기의 범주에서 끌어내지만, 이 규정성은 그 너머 물 자체에 부딪힌다. 그런데 이때 물 자체란 자기의 전제가 되는 의식 때문에 생겨난 것이니, 본래의 물 자체가 아니라 ‘그 의식에 대해 그 자체적인 존재[Fuer es an sich Sein]’가 된다.

그러므로 의식의 범주와 물 자체는 서로 모순 속에서 빠지고 이로부터 의식은 자기 내로 반성하면서 새로운 범주로 이행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다시 새로운 규정성이 출현하며 이 속에는 그 이전 범주에서 물 자체였던 것이 이 범주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 결과 이 새로운 범주에 대해 또 새로운 물 자체가 출현하게 되면서 운동이 계속된다.

이런 과정은 의식의 범주가 개별적인 것에서 포괄적인 것으로 발전하는 과정이며 대상이 점차 더 구체적으로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이다. 이 두 과정이 맞물려 나가는 것이 곧 의식 경험의 길이다.

3)

정신현상학에서 서술된 이 의식 경험의 길은 역사적으로 의식의 형태들이 겪어나갔던 발전을 의미한다. 이 발전을 매개하는 것은 의식과 물 자체와의 모순인데, 이런 역사적인 의식 형태가 현재 의식의 평면에 투영되면서 논리적인 범주의 발전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논리적 범주의 발전에서도 범주는 그 자신에서 규정성과 실재성을 끌어내지만, 이는 곧 그 실재성을 넘어선 것 즉 물 자체와 모순에 부딪히게 된다. 그 결과 새로운 범주가 출현하면서, 논리적 범주의 발전이 일어나게 된다. 마침내 최종적으로 범주가 모든 실재성을 포괄하면서 더는 모순이 나오지 않는다면, 바로 이 범주가 최종적인 절대적 범주이며 곧 진리인 개념 즉 이념이다.

헤겔은 이런 논리적 발전을 통해서 칸트가 좌표축에 할당했던 범주를 논리적 순서에 따라서 전개한다. 헤겔은 칸트의 12개 판단 형식과 그 범주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다만 칸트와 달리 이를 논리적인 발전에 따라서 배치했다. 헤겔은 의식 경험을 통해 일어나는 논리적 계기의 발전을 통해 개념으로부터 규정성이 나온다는 선천적 종합 개념이 단순히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을 가능성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헤겔은 하나의 범주와 다른 범주로 이행하는 과정, 즉 범주의 자기 내 반성 과정이 중요하게 된다. 그것을 매개하는 것은 물 자체와의 모순이지만, 이 자기 내 반성이 일어나는 과정은 사유의 과정이다. 바로 이 사유의 과정이 추론적 이성이 하는 일이며 이 추론적 이성이 사용하는 범주가 곧 반성 개념이 된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칸트가 무시했던 반성 개념의 역할을 사유 속에 제대로 위치시킬 수 있었다.

논리적 범주의 발전이라는 개념은 칸트와 헤겔에서 선험적 통각의 개념을 차이 나게 만든다. 칸트에서 통각과 범주는 서로 구별된다. 통각은 범주를 직관의 다양과 결합하는 기능을 지니지만, 그 자체는 독립적인 것으로서 범주 밖에 있다. 마치 그것은 플라톤에서 데미우르고스가 이데아와 아페이론을 결합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헤겔에서 범주는 선험적 통각이 자기를 구별하여 출현한 하나의 규정성이며, 통각은 이 규정성이 부딪히는 모순을 통해 다시 새로운 범주를 규정한다. 이 과정에서 범주는 선험적 통각의 본래 그대로를 드러내게 되면서 마침내 선험적 통각은 범주를 통해 자기를 실현하게 된다.

헤겔에서 범주의 생성 운동을 통해 출현한 ‘개념’이라는 범주에서 마침내 통각은 자기를 본래 모습대로 드러내니, 그런 점에서 앞에서 개념이 곧 선험적 통각 또는 자기의식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범주의 전개 운동 자체는 결국 선험적 통각이 자기를 드러내는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4)

칸트는 범주가 규정성을 산출한다는 선험철학의 원리에 이르렀으나, 범주를 여전히 형식적인 좌표축으로 보면서, 다시 형식 논리학에서의 추상적 일반적 개념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러나 헤겔은 범주가 규정성을 산출한다는 선험철학의 원리를 지키면서 이를 범주의 발전과 결합하면서, 물 자체의 문제를 극복하게 되었다. 그 결과 헤겔은 형식 논리학과는 전적으로 구별되는 새로운 논리학을 형성할 수 있었다.

논리학의 핵심은 곧 판단이다. 논리적 범주란 곧 판단의 형식 즉 주어와 술어의 관계인 계사를 규정하는 개념이다. 판단의 형식은 12개가 있는데, 이 12개의 범주는 서로 다른 내용을 지닌다. 이 범주가 지닌 내용은 이 판단 형식이 구체적인 판단으로 나타날 때 지니는 내용과 구별된다.

예를 들어 질적 긍정판단은 예를 들어 ‘이것은 빨갛다’와 같은 판단의 형식을 말한다. ‘이것의 빨강임’이라는 특정한 사태는 긍정판단의 구체적 내용이지만, 긍정판단의 판단 형식은 개별자인 주어와 일반적인 성질인 술어 사이의 관계이다. 이 판단형식 자체의 내용은 개별자와 일반자의 관계이다.

이런 질적 긍정판단 형식은 정언판단 형식과 구분된다. 이 정언판단의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진달래는 봄꽃이다’와 같은 판단이다. 문법적 형식으로만 보면 질적 긍정판단과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주어와 술어의 논리적 관계를 보면 후자의 경우 주어는 개별자가 아니라 일반자(즉 ‘진달래’)이다. 그리고 술어는 유적 일반자(‘봄꽃’)이다.

이처럼 구체적 내용의 차이가 아니라 판단 형식 자체가 즉 범주가 다른 범주와 지닌 차이가 곧 판단 형식의 내용이다. 이런 판단 형식은 직접적으로 보면 진리이지만, 이미 자체 내 모순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질적 긍정판단 형식은 개별자와 일반자가 대립하니, 이 양자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질적 긍정판단 형식은 이미 그 자체 모순이다. 그러므로 이 질적 긍정판단 형식은 이런 모순에 부딪혀서 다른 범주 즉 다른 판단 형식으로 이행한다.

“이 절대적 형식은 자기 자신에서 자신의 내용을 갖거나 실재성을 갖는다. 개념은 진부한 공허한 동일성이 아니므로 자신의 부정성이나 절대적 규정이라는 계기 속에 구별하는 규정을 지닌다. 일반적으로 말해 논리학의 내용은 절대적 형식의 그런 규정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내용은 절대적 형식을 통해 스스로 정립한 것이며 따라서 또한 그 자신에 적합한 내용이다.”(논리학 2부, GW12, 25)

어떤 판단 형식 속에 내재하는 모순은 그 자체로 드러나지 않는다. 처음에 아직 경험이 제한되어 있을 때 판단 형식은 통일성을 지니고 그 모순은 감추어지지만, 경험의 발전에 따라서 이 판단 형식의 모순이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논리적 범주의 발전은 경험의 발전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런 경험의 발전을 통해서 이런 논리적 범주의 발전이 가능한 것이다. 다만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의 발전이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것과 달리 논리적 발전은 이런 경험의 발전을 의식 내에서 즉 현재 의식의 평면 위에 투영된 방식으로 겪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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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 내용이 아니라 판단 형식 그 자체의 내용이 판단 형식과 부딪히는 모순이 논리적 범주, 판단 형식의 발전을 이끄는 힘이다. 헤겔은 이점을 진리의 이념과 연관하여 설명한다.

진리는 알다시피 대상과 개념의 일치이다. 논리적 범주는 구체적 내용이 없는 일반적 형식이므로 이 일반적 형식에 관해 진리를 따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논리적 범주 즉 판단 형식 자체가 내용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면, 판단 형식과 그 내용 사이의 모순이 성립하고 거꾸로 양자의 일치인 진리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논리적 범주도 형식과 내용, 개념과 실재성의 일치인 진리를 향해 나간다. 논리적 범주 역시 진리를 향해 생동적인 운동을 전개한다. 이 생동적 운동은 모순을 겪어나가는 운동이다.

“논리학은 절대적 형식의 학문이므로 이런 형식성은 참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서 자기의 형식에 적합한 하나의 내용을 가져야 한다. 그런 요구는 논리적으로 형식적인 것이 순수한 형식이어야 하고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참된 것은 순수한 진리 자체이어야 하면 할수록 더욱 요구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형식적인 것은 자체 내 규정이나 내용에서 훨씬 풍부한 것으로 사유되어야 하며 또한 구체적인 것에 대해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보다 무한히 더 큰 작용력을 지닌 것으로서 사유되어야 한다.”(논리학 2부, GW1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