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 씨, 철학을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 씨, 철학을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교수)

 

?

에필로그

구보 씨는 최근 수강생들이 써 놓은 강의 평을 보고 약간 충격을 받았다. 스스로 강의를 잘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엉터리는 아니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런 자만심에 금이 간 셈이다. 짤막짤막하게 한두 줄씩 써 놓은 강의 평을 훑어보다가 구보 씨의 눈이 멎은 곳은 다음과 같은 글귀에서였다.

“쉬운 얘기를 너무 어렵게 한다.”

아니, 이럴 수가… 이건 이전부터 익히 들어왔던 평가와 좀 다르다. 어렵다는 얘기보다, 졸린다는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다. 물론 어렵다거나 졸린다는 평도 마음에 걸리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선 나름의 변명거리가 있다. 우선, 어렵다는 거야, 원래 철학이 어려운 학문이 아닌가. 아직 분명한 해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궁리하는 게 철학이니, 어렵고 골치 아픈 건 철학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생각하기 싫어해서는 철학을 잘 할 수 없다. 또 설사 생각하기 싫다고 해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몰리지 않는다면 철학을 시작할 수조차 없다. 그러니 철학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여러분은 골치 아플 각오를 해야 한다. 대신, 철학자들의 사유를 따라 평상시 깊게 따져보지 못했던 문제들을 들추고 파헤치다 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색다른 시야가 열릴지 모른다. 구보 씨는 처음부터 이렇게 수강생들에게 당부를 하곤 했다.

강의가 졸린다는 점에 대해서는 책임을 다른 곳에 돌리기가 쉽지 않다. 워낙 말이 좀 느린 편에다 밋밋한 어투이고 보니, 잠깐 내용을 놓치면 목소리가 졸음을 부르는 알파파의 리듬과 맞아 들어가기 십상이다. 때로 억지로 목소리를 높이려 해 보지만 괜히 어색하기만 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구보 씨는 아예 졸리는 목소리라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좋게 생각하면 편안함을 주는 목소리라는 것 아닌가. 조분조분하고 느릿느릿하며 모가 나지 않은 부드러운 음색의 목소리. 어쩌면 심야 음악방송에 어울릴 법한 목소리.

“불면증 있는 분들은 제 강의를 녹음해 가서 잠 안 올 때 들으세요. 효과는 확실히 보장할 수 있어요. 정말이에요. 저도 잠 안 올 땐 혼잣말을 한답니다.”

구보 씨가 강의 때 곧잘 써먹는 자못 애처로운 유머다. 그렇다고 구보 씨의 강의실에는 조는 수강생들 투성이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집에서는 졸되, 강의실에서는 졸지 말라고 구보 씨는 매번 부탁을 한다. 그래도 조는 사람이 있으면 다가가 깨운다. 졸린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졸지 않는다는 데 철학을 향한 여러분의 의지가 있습니다. 목소리의 외피에 가려진 각성(覺醒)의 알맹이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그래도 다시 졸려는 사람이 있으면 이런 슬라이드를 띄우기도 한다.

김어준 ⓒMBC

?

이렇게 고투(苦鬪)를 해 가면서라도 구보 씨가 살리려는 것은 강의의 내용이다. 무엇보다 철학적 문제의식과 개념들이 어떤 배경에서 나온 것이고 또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중점을 둔다. 어려운 내용을 가능한 한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려고 나름 애를 쓰는 것이다. 그런데 쉬운 얘기를 너무 어렵게 한다니…맥 빠지는 평이 아닐 수 없다.

익명(匿名)의 지적 하나에 그렇게 괘념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막상 신경이 쓰이는 것을 보면 구보 씨 스스로도 내심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나 보다. 어쩌면 구보 씨 강의만이 아니고 철학 자체의 처지가 마음에 걸렸는지도 모른다.

근래 대학에선 철학과가 폐지되거나 다른 과와 통폐합되는 일이 드물지 않다. 한남대와 경남대의 경우에는 철학과를 없애겠다는 결정을 내려져, 여기에 항의하는 교수와 학생들이 대학 당국과 맞서고 있다. 졸업생의 취업률이 떨어지고 입학생도 줄고 있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이런 일은 국내에만 그치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로, 영국의 미들섹스 대학의 철학과는 그 명성이 상당했는데도 최근 폐지되고 말았다. 아직 항의하는 운동이 그치지 않고 있지만, 역시 돈의 논리에 밀린 이 사태를 쉽게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철학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불필요한 학문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오히려 우리 사회는 철학적 기초가 부족해서 문제라거나,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인문학과 철학적 사유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몇몇 상업적 기획물이 아니면 철학적 저작들은 잘 팔리지 않는다. 중요한 고전이 번역되어 나와도 초판 천부를 넘기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너희 철학자들이 더 정신 차려야 한다는 거야. 철학자들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구. 쉬운 얘길 어렵게 한다는 평은 내가 보기엔 정곡을 찌른 거 같아.”

“그래? 어째서?”

“철학자라는 사람들은 대개 텍스트에 갇혀 살잖아. 그러다 보니 쉽게 할 수 있는 말도 이런저런 개념을 통해서 하려고 하고 그 덕택에 얘기가 쓸데없이 어려워지는 거라구. 구보, 네가 좀 심하긴 하지만, 너만 그런 건 아닐 거야.”

“Y야, 개념적 사고란 중요한 거야. 개념은 말하자면, 생각의 다발을 엮는 얼개 같은 거거든. 왜, 우린 분명한 생각의 줄기가 없이 말하는 사람을 두고 흔히 ‘그 사람 개념이 없다’고 하잖아. 철학적 개념은 그런 개념들 가운데서도 아주 근본적인 것들이니까, 보기에 따라선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지. 근데 그건 우리가 일상적으론 근본적 사유를 잘 하지 않는다는 반증 아닐까.”

“푸… 구보야, 문제는 니들이 말하는 그 근본적이라는 게 대부분 낡고 비현실적이라는 거야. 대체 뭐가 근본적인데? 옛날에 근본적으로 여겨졌던 게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하는 게 니들의 병폐라구. 그거 내가 보기엔 아무래도 직업병 같애.”

“직업병?”

“그래, 철학자라는 오래된 직업 때문에 생기는 직업병. 철학의 역사가 길고 훌륭한 철학자가 많은 건 자랑거리겠지만, 니들은 그 역사와 전통에 따라야 깊이 있는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아. 그래서 결국 너네가 하는 게 뭐야? 헤겔이니, 칸트니, 플라톤이니, 공자니, 주자니 하는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헤매는 게 주 업무잖아. 그런데 그 사람들 생각이 오늘날에도 그렇게 중요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거 모르고도 잘 지내고, 그런 거랑 상관없이 생각하고 고민한다구.”

“Y야, 그건 오해야. 그렇게 따지자면, 우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나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몰라도 그런대로 잘 지내고 그런 거 없이도 그럭저럭 생각하고 살거든. 게다가 철학자들이 옛날 개념에만 빠져 있는 건 아니야. 오히려 우리 시대에 맞는 적절한 개념들을 찾아내려거나 만들려고 노력한다구.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서 그렇지…그래서 더더욱 옛 개념들을 참조하는 게 중요한 거야…”

“혹시 너무 많이 참조하는 거 아냐? 그러니까 괜히 어려워지지. 그러다가 제 풀에 지쳐서 그런 참조 자체가 가치로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어쩌면 Y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앞의 것만 보아서야 눈앞의 것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법이다. 때로는 돌아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일 수도 있다. 우리의 현실 자체가 다면적이고 다층적이며 다양한 잠재성을 안고 있는 것인데, 어떻게 거기에 적합한 문제의식이나 개념이 단번에 나올 수가 있는가. 야구선수가 안타나 홈런을 치기 위해서는 무수한 연습과 헛방망이질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물론 오늘의 현실은 옛날과 같지 않다. 과거에 중요하게 여겨졌던 철학적 문제들 가운데는 이미 해결되었거나 그 탐구 영역이 다른 분야로 넘겨진 것들도 많다. 이를테면, 우주의 본성이나 됨됨이에 관한 문제들은 이제 천체 물리학이나 미립자 물리학이 다루고 있고, 근세의 중요한 철학적 주제였던 인식론적 문제들의 많은 부분은 이제 심리학과 생리학의 소관 사항이 되었다. 인간 사유의 본성에 관한 문제들조차 오늘날은 진화심리학이나 뇌생리학 등에서 다루어 많은 성과를 내고 있다.

철학에 남은 것은 이제 사실의 문제들이 아니라 가치의 문제, 규범의 문제들이라고 할 만하다. 사고의 규범을 다루는 논리학, 행위의 규범을 다루는 윤리학이 아직 철학의 고유한 영역으로 남아 있다. 그것마저도 규범적 사고의 현상, 규범적 행위의 현상이 문제될 때면 그것들을 데이터로서 다루는 심리학이나 사회학 따위의 대상이 되고 만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철학은 결국 사유의 내적 연결을 문제 삼는 도구적 학문이라거나, 사회역사적 상황에 따른 규범적 행위양식과 가치체계를 정당화하거나 비판하는 이데올로기적 분야라는 규정이 나오기도 한다.

그렇지만 철학의 어깨가 마냥 가벼워지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치의 문제는 의미의 문제와 엮이어 오랜 숙제처럼 철학을 겨냥한다. 모름지기 철학자란 여전히 삶의 의미나 세상의 존재 의미 같은 거창한 문제에 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이런 면에서 철학은 예술이나 종교와 같은 전선에 선다. 물론 예술이나 종교의 무기가 감성이나 신앙인 것과는 달리, 철학의 무기는 사유다. 이전에는 이 사유가 종교적 믿음이나 과학의 성과에 기대어 의미를 길어 올렸다면, 오늘날은 예술적 감성을 가까운 파트너로 삼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

구보 씨가 구보 씨가 된 것도 사실 그런 탓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구보 씨는 원래, 박태원의 구보 씨에서부터 최인훈의 구보 씨, 주인석의 구보 씨에 이르기까지 소설가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철학자 구보 씨라는 뒤떨어진 변용(變容)이 등장하게 된 것은 알게 모르게 문학이나 예술에 대한 철학의 친화적 쏠림이 작용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구보야, 너 또 얼버무리려고 하는구나. 네가 구보씨가 된 건 그저 개인적인 빌붙음 때문 아냐? 그걸 어떤 추세나 경향 탓으로 돌리려 하면 곤란하지.”

“하하, Y야, 꼭 그런 건 아냐. 말하자면 그와 같은 면도 있다는 거지. 그리고 그게 철학의 현황이나 궁지를 보여준다는 얘기고.”

“글쎄, 내 생각에 그건 별로 당당하지 못한 태도 같아. 현황이니 궁지니 하면서 그 뒤로 숨으려는 것처럼 보여. 언제 철학이나 인문학의 처지가 어렵지 않은 때가 있었니? 진짜 철학자라면 거기에 당당하게 맞서야 하지 않을까?”

“허…진짜 철학자라…그런데, 그게…”

“왜, 자신 없어?”

“Y야, 그렇게 윽박지를 일은 아니라고 봐. 모든 사람이 전사(戰士)가 될 수는 없는 일 아냐? 나도 나름대로 노력 중이라구. 어설프고 부족해 보이겠지만, 이 구보 씨 이야기도 그 일환이고 말이야. 기왕이면 좀 너그럽게 봐 주라.”

“….”

“안 돼?”

“구보야, 되고 안 되고가 어딨니? 네 말대로 다양한 게 세상산데… 어쨌든 이제 네 얘기에서 나는 그만 빼 줘.”

“어, 그럼 곤란해. 네가 빠지면 사람들이 그나마 무슨 재미로 이걸 보겠냐.”

“그거야 구보 네 사정이고…”

“Y야, 그렇게 말하지 마. 네 사정이 곧 내 사정이지. 네가 정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당분간 쉬는 수밖에…사실, 나도 그럴까 생각 중이었어. 쉬면서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볼께. 이를테면 구보씨의 철학 강의 같은 거 어때? 역사철학이나 문화철학 같은 거. 조분조분한 목소리로 하는 도저히 졸 수 없는 강의, 쉬운 얘기를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얘기를 쉽게 하는 강의…그게 언제부터 가능할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런 거 시작할 때면 너도 다시 도와줄 거지?”

구보씨 여름을 즐기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씨 여름을 즐기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교수)

 

?

구보씨는 바다를 좋아한다. 산이 싫다는 건 아니지만 바다가 더 좋다. 흐르는 강물도 괜찮지만 철썩이는 바다가 더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그 느낌이 시원하지 않은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폐포(肺胞)가 씻기는 듯, 답답한 기분이 잦아든다. 바다는 언제나 하늘을 비추고 그 하늘을 눌러 담은 빛으로 출렁인다. 바다의 색깔은 하늘보다 더 짙고 다양하다. 하늘 아래 세간의 기운마저 비추어 담기 때문일까.

밤바다도 매력적이다. 때로, 달빛을 받아 일렁이는 바다와 마주해 있노라면, 세상의 온갖 걱정들이 다 그 물결에 반사되고 부서지는 것 같다.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한 친구는 바다에서 수영하는 참 맛을 알려면 밤바다에 들어가 봐야 한다고 했다.

“우주가 온 몸을 휘감는다는 느낌이 들 거야.”

정말 그랬다. 구보씨는 어둠의 촉감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어둠이란 어떤 결여가 아니라 빛으로 희석되기 전 세상의 본 모습이 아닐까. 바닷물의 감촉과 사위의 어둠이 한꺼번에 다가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긴 별빛의 존재감마저 유별났다. 공기 중에 산란되는 대낮의 빛이 증폭된 음향과 닮았다면, 어둠 속의 별빛은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아련한 노랫가락 같았다. 밤바다의 출렁임 가운데 머리만 내놓고 잠시 떠있을 때면, 껴안는 듯한 막막함이 두려움이나 충만함에 앞서 와 닿았다.

비 오는 날 바다에 들어가는 것도 색다른 맛이 있다. 떨어지는 빗방울은 곧장 바다의 일부가 된다. 하늘과 빗줄기로 이어지는 바다 가운데서 작은 점처럼 고개를 들면 얼굴에 부딪히는 빗방울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는 표현은 원래 헤밍웨이의 것이라고 했던가. 바다 위에 내리는 빗방울들은 한껏 입을 벌려 담아내고 싶은 아득한 곳의 인삿장 같다.

출처: http://bluei333.egloos.com

금년에도 구보씨는 자주 바다를 찾았다. 그러나 한적한 바닷가에서 밤수영을 즐기거나 빗줄기로 샤워를 대신하는 호사를 누리지는 못했다. 대신, 해수욕장의 번잡함을 피해 아침을 이용하곤 했다. 남들이 헬스장을 향하는 이른 시간에 바다에 몸을 담구는 것이다. 아침나절이면 바닷가 인근의 주차장도 한산하다. 한 시간 정도 호젓하게 바다를 즐기다가 젖은 몸을 수건 한 장으로 대충 닦고 목욕탕으로 향하면 그만이다.

“그럴 바에야 헬스장이 낫지 않아? 그 시간대에는 비키니 입은 여자애들도 없을 거 아냐?”

구보씨가 간단히 해수욕 하는 비법(!)을 알려주자 제법 명민한 척하는 동료 하나가 한 쪽 입 꼬리를 치켜 올리며 하는 말이다. 글쎄, 그렇긴 하다. 하지만 구보씨는 요새 ‘비키니’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헬스장의 손바닥만 한 수영장에 가고 싶은 마음도 안 든다. 갇혀 있는 느낌이 들어서다. 바다에 들어가는 것에는 수영을 한다는 의미만 있지 않다. 그것은 일종의 즐김이기도 한 까닭이다.

즐기는 것은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것과는 다르다. 도구는 목적에 의해 갇혀 있기 마련이어서, 도구적 이용에는 즐김이 없거나 있다 해도 억압되기 십상이다. 건강을 위해, 또는 몸매를 만들기 위해 수영을 한다면, 거기서 우세한 것은 목적성이지 즐김이 아니다. 목적에는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규제와 한정이 따른다. 반면에 즐김에는 놂이, 놀이가 있다. 여기엔 정해진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움이 수반된다. 사실, 즐김의 즐거움이란 이런 벗어남 때문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벗어남 자체가 즐거움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급한 오해다. 물론 그렇게 볼 만한 여지가 있긴 하다. 억압에 대한 탈출과 해방이 쾌감을 주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쾌감과 즐거움 또는 즐김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즐거움은 단순한 쾌감과 달리 주관 내부의 즉물적 유착에서 벗어나 객관으로 한 발 더 다가간 폭넓은 느낌이다. 더구나 즐김은 느낌에 국한되는 않는 행위의 사태다. 그리고 즐거움은 즐기는 행위에서 온다.

즐김과 즐거움의 중요한 특징은 그것과 관련된 대상이나 사태가 어떤 의도나 목적으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산과 바다를 즐기고, 청명한 날씨를 즐기며, 친구와 교제를 즐기고, 삶 자체를 즐긴다. 이 가운데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는가? 즐김의 한쪽은 우리가 붙잡고 있지만, 다른 한 쪽은, 더 넓고 더 멀리 뻗쳐 있는 다른 한쪽은 우리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다. 그런 탓에 즐김은 항상적이지 않고, 그런 까닭에 즐김은 비로소 즐거울 수 있는 것이다.

즐김은 양면적이다. 바다를 생각해 보자. 바다를 바라보거나 바다에 몸을 담금으로써 우리는 바다를 즐긴다. 그러나 언제나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다는 풍랑에 사나워지기도 하고 엄청난 크기로 우리를 위협하기도 한다. 바다가 우리를 감싸고 우리에게 스스로를 열어주는 때는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우리는 기껏 여름 한 철 동안 바다에, 그것도 해변의 한 귀퉁이에 다가갈 수 있을 따름이다. 바다를 즐길 수 있을 경우는 바다 자체의 존재에 비해, 그 넓이에 비해 너무나도 좁다. 바다가 우리와 어울린다고 느껴지는 때, 그리고 바다의 가없음이 그 어울림과 잠시 이어져 있을 때, 그래서 바다가 우리에게 즐김을 허용할 때, 우리는 바다를 즐긴다. 이런 것이 즐김의 특성이다. 즐거움은 이 즐김에 수반되며 또 우리를 이 즐김으로 인도한다. 즐거움은 즐김으로 난 길에 기꺼움으로 쓰인 표식이다.

요즘 프랑스 철학 용어로 자주 거론되는 주이쌍스(jouissance)는 이 즐거움에 대한 이름이라 보아 좋다. 주이쌍스는 우리가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쾌락이 아니다.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주이쌍스는 일단 성적(性的) 향락(享樂)이라는 뜻으로 새겨지지만, 이 향락이야말로 제어되지 않는 심연에 닿아 있지 않은가. 거기서 열리는 틈바구니는 우리에게 정체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 실재(實在)로 이어진다. 향락을, 주이쌍스를 우리는 소유할 수 없다.

즐거움이란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즐거움이 비롯하는 즐김이 우리보다 큰 터전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즐김과 함께할 수 있을 뿐이다.

“즐… 구보야, 넌 어쩜 끝까지 그 모양이니? 난 도무지 네 말이 이해가 안 돼. 즐기는 거야 그냥 즐기면 되는 거지, 너처럼 이상하게 꼬아 생각해서야 어떻게 즐거울 수가 있겠어? 내 눈엔 네가 제대로 즐길 줄을 모르니까 괜한 얘길 늘어놓는 걸루 밖엔 안 보여.”

“허, Y야, 무슨 소리야. 넌 아까도 내가 바다에서 노는 걸 봤잖아. 즐길 줄 모른다는 건 정말 나하곤 거리가 먼 얘기라구.”

“피, 그게 뭐 노는 거고 즐기는 거야. 아침나절에 잠깐 바닷가에서 어슬렁거려 놓고…”

“어어, Y 너도 그때 기분 좋다고 했잖아? 그렇게 날이 더워지기 전에 바람 쏘이는 게 따가운 여름을 현명하게 즐기는 길이라구. 공자님이 봤으면 증점(曾點)의 지혜라고 칭찬했을 거야.”

“누구? 증점?”

“그래, 봄날에 사람들이랑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바람 쐬고 시 읊으며 돌아오고 싶다던…”

“관 둬, 됐거든. 철학자라고 다 너처럼 고리타분하진 않을 텐데, 참 걱정이다, 얘.”

“아니, 이거 고리타분한 거 아니야. 즐기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구. 오늘날이라고 해서 편리함 속에 모든 걸 가둘 순 없거든. 그리고 즐긴다는 건 그렇게 가두어진 틀 밖으로 나가야 가능한 거야. 어려움과 위험의 틈새에 놓인 안락함과 여유로움이 아니라면, 즐김의 진짜 매력은 사라져 버리는 거지. 그러니까 즐김은 모든 문제의 해결이 아니야. 쾌락의 충만은 더더욱 아니고 말이지. 증점이나 공자가 즐김을 어떤 유토피아적 상태에서 찾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구. 실제로 공자와 증점은 다른 제자들이 자리를 뜨고 나자 그 제자들이 논의했던 정치 얘기를 계속하거든. 즐김은 어디까지나 세상 가운데에, 또 세상의 틈새에 놓이는 거야.”

“구보야, 즐긴다는 건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곳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거 아닐까. 그거면 충분한 거지, 너처럼 괜한 토를 달기 시작하면 즐겁던 일도 정나미가 떨어질 것 같애.”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근데, 좋아하는 것과 즐기는 것은 똑같은 게 아니거든. 다시 공자 얘길 해서 안 됐지만, 공자도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과 같지 않다(好之者 不如樂之者)고 하잖아. 즐긴다는 건 좋아한다는 것보다 더 이루기 어려운 어떤 걸 거야. 좋아한다고 해서 다 즐길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이지. 즐긴다는 건, 뭐랄까, 내가 아닌 어떤 흐름 속에 있어야 하는 거라구. 거기에 더불어 있는 것, 그러나 소유하거나 지배하지 않는 방식으로 있는 것, 이를테면 어떤 흐름을 타고 같이 흘러야 하는 거야. 그건 마치 파도타기와도 같지. 파도를 즐길 때 우리는 파도를 거스르는 것도 파도에 완전히 파묻히는 것도 아니야. 파도와 함께 하는 것이긴 하지만.”

“구보야, 나 파도타기 안 좋아해. 안 좋아하는 건 즐길 수 없는 거 아냐?”

“그야 그렇겠지. 하지만 거기엔 묘한 면이 있어. 가령 산을 타는 사람들을 생각해 봐. 이 한 여름에도 아찔하게 높은 히말라야같이 험준한 설산(雪山)을 오르는 사람들. 그들이 산을 좋아하는 건 사실일 거야. 그러나 그건 단순한 좋음일까? 거기에는 좋음 말고도 두려움과 불안과 기대와 동경 같은 것들, 몇 마디로 줄여 말하기 어려운 것들이 들어 있어. 하지만 그 사람들은 그걸 즐기는 것이 아닐까. 달리 말하면, 그렇게 펼쳐지는 즐김의 장에 뛰어드는 것 아닐까.”

“에구, 구보야. 난 히말라야에 오를 생각 없어. 난 그딴 거 안 좋아한다구.”

“쩝… 그럼, 이렇게 생각해 봐. 나는 어때? Y야, 너는 이 구보를 좋아만 하는 건 아니지? 차라리 넌 이 구보와의 관계를 즐긴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관계가 우리 두 사람의 뜻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 우리는 각자 이 관계의 한 쪽 끝을 쥐고 있을 뿐이야. 그 끝을 잡고 때로는 이렇게 때로는 저렇게 흔들리는 관계의 물결을 타고 가는 것이지. 거기에는 때로 열락(悅樂)도 깃들고 회한(悔恨)도 깃들지만, 그것 자체로 우리는 이 관계를, 이 삶을 즐긴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구보야, 착각하지 마. 뭐? 열락? 회한? 미안하지만 구보야, 넌 지루함 자체라구. 거기에 즐길 게 어딨니?”

“엥? 그럼, 왜 여지껏 날 계속 만나는데?”

“그거야…네가 그래도 한철연 회원이니까 그렇지. 그걸 여태 몰랐어?”

구보씨, 잠에서 깨어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씨, 잠에서 깨어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교수)

 

?

나름 긴 잠이었다. 구보씨는 창문을 열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다.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크게 하품을 하는 구보씨의 쩍 벌어진 입에도 비춰든다. 아직 졸음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듯 눈을 연신 비벼대는 구보씨, 그 부스스한 모습이 꼭 겨울잠이라도 자고 일어난 짐승 같다.

?

잠이란 참 좋은 거야, 하고 구보씨는 생각한다. 잠은 일종의 축복이지, 잠이 아니고서야 우리가 어떻게 거듭 새로워질 수 있겠어. 구보씨는 마사지하듯 양손으로 얼굴을 부비다가 다시 눈을 끔벅거려 본다. 세상이 맑고 투명하다. 언제 이렇게 환해졌을까. 저 멀리 신록의 산등성이가 뿜어내는 청량함이 피부와 와 닿는 듯하다.

?

대체 얼마나 잤지? 영 분명치가 않다. 거푸 퍼마신 술 탓일까. 한 동안 멍한 기분으로 끼적끼적 살아서일까. 그러나 어떻든 세월은 흐른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니 뭐니 하더니 계절은 이미 봄을 훌쩍 타넘고 있지 않은가. 한참을 자고 깨니, 어두운 긴 터널을 빠져나온 것 같은 기분이다. 겨울잠을 자고 난 곰처럼, 구보씨는 뻐근한 팔다리와 몸뚱이를 이리저리 흔들고 비틀어본다.

?

잠은 우리를 순수하게 만든다. 꼬인 몸과 마음의 타래들을 풀어 원상태에 가깝게 돌려놓는다. 서로 얽혀 랙이 걸릴 지경인 프로그램들을 리세팅해주는 격이라고나 할까. 일반적으로 잠은 휴식이고 복구며, 재정비고 새로운 준비다. 활동의 감소와 위축처럼 보이는 잠의 비활성 상태는 깨어 있는 분주함 못지않게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아이들은 잠 잘 때 크고, 미인은 잠잘 때 예뻐진다지 않는가.

?

그러나 겨울잠은 좀 다르다. 거기엔 일종의 마비가 수반되는 까닭이다. 하기야 모든 잠이 얼마간 그렇긴 하다. 보통 우리는 꿈을 꾸는 수면 상태(REM 수면)에서 근육의 긴장을 놓아버린다. 하지만 겨울잠의 경우는 긴장 이완이 그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흔들어도 쉽게 깨어나지 못할 정도로 활동이 정지되고 체온도 떨어진다. 동물들은 겨울잠을 자면서 꿈을 꿀까? 아마 아닐 것이다. 냉동 인간이 꿈을 꿀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가시에 찔려 잠든 숲속의 공주가 그 잠든 백 년 동안 꿈을 꾸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

하지만 ‘팻걸’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까뜨린느 브레야 감독의 영화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서는 가시에 찔린 공주가 잠든 사이에 나이도 먹고 꿈도 꾼다. 브레야는 잠이 마비 상태라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브레야의 공주는 그 꿈 속에서 평생의 연인을 만나고, 그 기억을 지닌 채 꿈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온다. 이 여성에게는 마비와 멈춤의 시간은 없다. 잠자기 전과 잠이 깬 후, 꿈꾸기 전과 꿈꾸고 난 후는 다르다. 그녀는 순진한 채로 머물러 있지 않다. 그래서 그녀는 깨어나 당당히 행동하고 남자 친구에게 당당히 이렇게 말한다. “난 혼자서 네 세계 속으로 들어갔던 거야.”

?

브레야는 긴 잠의 설정이 함축하는 정지와 수동성을 받아들일 수 없었나 보다. 어쩌면 거기서 남성 지배의 사회가 설정한 순결과 정조의 이미지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일찍이 이링 페쳐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잠이 순결을 강요하는 상징이라고 해석하지 않았는가. 모름지기 젊은 계집은 정숙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잠은 그 기다림의 강제된 형태다. 그것은 물레 막대기의 뾰족함을 경계하지 못한 데 대한 벌이다. 방종의 유혹이 널린 현실을 함부로 돌아다닌 죄는 마비의 잠으로 가려지고 치장되어야 한다. 백 년 동안의 잠은 순결을 회복하고 보증하는 장치다.

?

이런 종류의 잠은 현실에 대한 외면이고 도피이면서 또한 현실의 강압에 대한 순응이기도 하다. 자고 있는 동안에도 세상은 굴러간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서는 궁전의 요리사가 요리하던 생선까지도 마법에 의해 잠에 빠지지만, 이렇게 잠든 환경은 잠자는 공주의 부속물일 뿐 시간 속 세상이 아니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으로부터 눈을 돌린 채 긴 잠에 빠진 공주는 과연 평화로울까? 그것은 마비의 평화로움, 마비의 순결함일 뿐이다. 더구나 그것은 과연 그녀를 위한 것일까?

?

오스트레일리아의 여성 감독 줄리아 리의 영화 ‘슬리핑 뷰티’는 이런 질문에 노골적으로 답한다. 돈이 아쉬운 미모의 대학생 루시는 마비되듯 잠든 채로 발가벗겨져 하얀 침대에 누워 있고 돈과 지위로는 아쉬울 것이 없는 노인네들이 차례로 그녀를 탐한다. 그러나 ‘삽입’은 금지다. 순결함이야말로 이들이 바라는 것이므로. 루시는 자신의 자궁을 결코 성소(聖所)라고 여기지 않지만, 그들은 그것을 원한다. 수동적이고 하얀 몸뚱이의 순수를. 약을 먹고 잠들었다 깬 루시는 자신이 잠자고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모른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계속 순수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더욱 더 더럽혀진 것일까?

?

이런 경우에 잠은 그 약점을 훤히 드러낸다. 이 잠에서 나는 세상과 교호적이지 않은 관계를 맺는다. 나는 세상을 무시하고 세상은 나를 유린한다. 나는 그 유린을 묵과하고 망각함으로써 세상에 아부한다. 때로 우리의 잠은 이렇게 비루하다. 거기에 비하면 동물의 겨울잠은 얼마나 안온한 축복인가. 매서운 겨울 날씨는 동굴에 웅크려 잠자는 짐승의 몸뚱이를 유린하지 못한다.

?

“그래서 어떻게 되는데?”

?

“뭐가 말이야? 겨울잠 자던 곰? 아니면 나?”

?

“아니, 루시 말이야. 영화 ‘슬리핑 뷰티’의 루시라는 여자…”

?

Y다. 그녀도 일어났다. 그녀는 부스스하지 않고 얌체 같이 예쁘다. 언제나처럼.

?

“글쎄, 너라면 어떻게 하겠니? 막상 돈을 몇 번 손에 쥐고 나자 잠잘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가 궁금한 거야. 그래서 침대에 눕기 전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하지.”

?

“그럼 결국 알게 됐겠네?”

?

“근데 그렇게 영화가 진행되면 시시하지 않겠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고서는 마비된 순수를 파는 일을 그만둔다? 아니면 분노에 차서 복수를 한다? 이거 다 너무 통속적이잖아.”

?

“왜, 그 더럽고 못된 노인네들을 혼내 주는 게 괜찮을 것 같은데. 폭로해서 몰락시킨다든지 아니면 짤 라버린다든지 해서 말이야. 난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걸 생각만 해도 오싹해. 검사들 접대 사건만 해도 그렇잖아, 그 개새끼들… 그래도 정신 못 차리고 윤창중이 같은 기가 막힌 일도 생기고…”

??

“허, Y야, 잘 자고 나서 왜 그래? 아무튼 이 영화에선 그런 식으로 처리하진 않아. 줄리아 리라는 감독이 시나리오도 썼는데, 그 여잔 루시를 유린하는 현실 자체의 공허함이나 균열을 드러내려 하지. 싸움으로 몰고 간다면 그 노인네들, 그러니까 지배 계층의 패배를 보여준다 하더라도 환상적 만족에 그치지 않겠어? 아니면 그저 그런 고발 영화가 되고 말거나…”

?

“줄리아 리? 그 사람 한국계야?”

?

“아니, Leigh라고 쓰는데, 호주 여자야. 소설도 쓰는 작가고. 그런데 이 영화 원작은 가와바타 야스나리 소설이지.”

?

“가와바타?

?

“가와바타? [설국]의 그 가와바타 말이야?”

?

“맞아. 그 사람 소설에 [잠자는 미녀]라고 있거든. 1960년에 발표한 거니까 줄리아 리의 영화보다 50년 전이지. 거기서도 잠재워 놓은 젊은 처자를 탐하는 노인이 나와. 영화의 기본 얼개는 이 소설에서 따왔다고 봐야지. 하지만 세부 내용이나 분위기는 꽤 달라. 무엇보다 가와바타의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에구찌(江口)라는 노인네거든. 이 노인네가 수면제를 먹여 잠재운 여자랑 동침할 수 있게 해주는 유곽을 찾아가서 겪는 이야기를 그린 거야. 여러 번에 걸쳐 이 여자 저 여자랑 같이 자면서 이 생각 저 생각 하는 거지.”

?

“그게 무슨 이 생각 저 생각이야, 이런 지랄 저런 지랄이지. 드런 놈들, 구역질 나.”

?

“하하… 왜 나한테 그래? 가와바타 소설이 남성 중심적인 건 분명하지만, 그래도 나름의 섬세함이 있잖아… 아무튼 그래서 영화에선 여자를 주인공으로 놓는 거 아닐까. 루시라는 여자가 겪는 이야기가 중심이 되거든. 하긴 영화에서도 에구찌 비슷한 노인네가 나오긴 해. 공허해하고 우울해하며 삶에 그다지 애착을 갖지 못하는 노인네… 이 노인네는 결국 잠든 루시 옆에서 약을 먹고 죽지. 가와바타 소설에서는 옆에서 자던 여자가 죽거든. 나는 이게 현실의 공허와 균열을 나타내려는 장치라고 봐. 루시를 유린하는 현실은 실상 노쇠한 무의미의 현실, ‘뼈가 부러진’ 현실이야. 그 현실은 이제 절망하여 스스로 무너지지. 그렇지만 루시처럼 마비 상태로 잠들어 있으면 깨어나서는 소스라치며 놀라 소리 지르게 돼. 이건 잠의 부정적 이미지야. 망각과 아부의 잠, 그건 결국 죽음과 동침하는 잠이고 죽음과도 같은 잠이지. 루시의 카메라에 찍힌 잠의 모습처럼. 그게 싫으면 깨어 있어야 하는 거야. 불면(不眠)의 주의력으로 눈을 똑바로 뜨고 말이지.”

?

“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아까는 잠이 축복이라고 하지 않았어? 횡설수설하는 것을 보니 아직 잠이 덜 깬 거 아냐?”

?

“내 참, Y야, 그러니까 잠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거야. 꿈꾸는 잠과 마비의 잠. 회복과 갱신을 위해서는 잠을 자되 넋을 놓고 있지는 말아야 하는 거라구. 꿈도 없는 깊은 잠은 꿈꾸는 잠과 결합되어 있을 때만, 또 야경(夜警)의 매서운 눈초리와 결합되어 있을 때만 의미가 있는 거야. 그래서 우리는 겨울잠을 잘 수 없는 거지. 우리네 삶에는 겨울을 피해갈 수 있는 안온한 동굴이란 없으니까…”

?

“하지만 구보야, 내가 볼 때 나쁜 잠과 좋은 잠을 가르는 특징은 딴 데 있어. 그렇게 잠꼬대처럼 복잡하지 않고 아주 단순한 거라구.”

?

“뭔데?”

?

“코 골지 않는 거. 구보야, 내가 왜 이런 말 하는지 알지?”

?

구보씨, 다시 동물을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씨, 다시 동물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 성 원(부산대 교수)

 

 

구보씨는 11월을 좋아한다. 늦가을에 마음을 주는 것이지만, 달로 치자면 11월이다. 왜냐구? 그냥이다. 따지자면 이유야 많겠지만, 그런 건 아마 사후(事後)에 가져다붙이는 핑계들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도 뭔가 한 가지 들어야겠다면, 찰기와 집착이 덜어진 이즈음의 투명한 햇살이 11이라는 숫자를 닮아서라고 해 두자. 그것이 기껏 ‘빼빼로 데이’를 연상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그런데 11은 평행의 숫자만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클리나멘(clinamen)의 기호다. 물기 마른 나뭇가지에 욕심 없이 내려앉는 햇살들처럼 비스듬히 만나고 합쳐지는 편의(偏倚)의 움직임이 11월에는 배어 있다. 왜냐구? 그것도 그냥이다. 그래도 뭔가 이유가 필요하다면 새로움을 위해 기꺼이 스스로를 떨구는 자연의 눈부심 때문이라고 해 두자. 올해는 더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그것이 혹 연말의 선거를 염두에 둔 이미지는 아니냐구? 글쎄, 그렇게 보고 싶다면야 굳이 말릴 생각은 없다. 어떻든 11월은 대지(大地)와 몸을 섞는 낙엽의 계절이다.

 

그러나 이런 너스레로 구보씨가 늦가을의 정취를 상찬(賞讚)하는 데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따른다. 엄혹한 겨울을 앞둔 그 전조(前兆)의 안타까움이 어떻게 기꺼움과 그토록 쉽게 만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눈앞에 닥칠 어려움을 하찮게 여길 만큼 여유로운 처지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닌가? 추위와 굶주림은 이제 옛날 일이 되었는가? 구보, 네게는 바야흐로 장기 불황으로 빠져드는 이 세상의 찬바람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있겠는가. 우리의 얄팍한 구보씨는 누구 못지않게 그런 세태에 민감하다. 그나마 업으로 삼고 있는 일이 철학이어서 그 경박함이 약간 감해지고 있음을 언제나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는 터다. 그럼에도 구보씨는 철학의 유행사조들을 이런 세태에 견주어 평가함으로써 자신의 얄팍함을 정당화하려 할 정도로 뻔뻔하기조차 하다. 그건 또 무슨 말이냐구? 역시 경박한 얘기다. 불황기에는 불황기의 철학이 뜬다고 생각한다는 거다.

철학에 불황의 철학이 어디 있고 호황의 철학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것은 사유가 묵직한 사람들의 견지다. 대부분의 훌륭한 철학자가 그렇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이들의 철학도 부침(浮沈)을 겪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불경기를 바라고 경제활동을 하는 것은 아니나, 불가불 불황을 겪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제 아무리 줏대 있는 인간이더라도 자신이 놓인 조건의 제약 속에서만, 또 그 제약에 따라 사고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사고의 결과가 세간에 영향을 미치는 강도와 양상은 더욱 더 그 환경적 조건과 관련이 깊다.

오늘의 철학적 환경은 흡사 11월과도 같지 않은가, 라고 구보씨는 생각해 본다. 그래서 그에겐 11월이 아름답게 비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구보씨는 가벼울지언정 긍정적인 심성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모든 긍정은 세상으로부터 유혹을 느끼는 데서 시작되며, 아름다움이란 이런 유혹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그래서 긍정적 삶은 이제 시작하는 현재를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비롯하는 것이므로.

하지만 11월의 황량함이 아름답다는 건 난센스거나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이 아닐까? 게다가 만일 시작점이 진정 아름답다면, 거기에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건 도리어 어려운 일이 되지 않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름다움에 대한 해묵은 오해 때문이다. 아름다움이란 멈춰 있어야 하는 어떤 지점, 우리가 움켜잡고 놓치지 말아야 하는 어떤 지점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건 행복이라는 말이 흔히 그러하듯 우리를 기만하는 표면적 이미지일 따름이다. 아름다움이 유혹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궁극의 도달점이거나 목표여서가 아니라, 오히려 움직임을 부추기고 위험을 수반하는 것이어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의 느낌이 굳이 있어야 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조금 천박하게 말해, 아름다움에는 늘 대가가 있는 법이다. ‘팜므 파탈’은 아름다움의 중요한 면모를 드러내 준다. 애써 묵직하게 말해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삶의 아름다움은 늘 위험을, 때로 치명적인 운명을, 궁극적으로는 죽음의 그림자를 배경으로 삼는다. 우리를 분리 이전과 이후의 심연으로부터 끌어내는 감각이 아름다움이라는 말이다. 그렇기에 아름다움은 인간만의 감각이 아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고개를 내미는 모든 생명체는 그런 힘을 발휘하기 위해 아름다움을 필요로 한다. 하얗고 차가운 겨울이 절박하게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며, 스산하고 매정한 늦가을이 처연하게 아름다울 수 있는 까닭이다.

아무튼 11월의 철학, 불황의 철학은 한편으로 동물의 철학이다, 라고 구보씨는 지레 생각해 본다. 왜냐구? 글쎄, 이것도 그냥이다. 이유야 여러 가지 붙일 수 있겠지만, 우선은 구보씨의 동물적 감각이 그렇게 지시하기 때문이라고 해 두자. 사실 따지고 보면, 구보씨가 이전에 입에 올렸던 벌거벗음이나 이제 내세우려는 동물성이나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우리가 뒤집어쓰고 있는 문명의 치장 한 꺼풀 아래를 겨냥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다만, 요즘 같은 늦가을과 불황의 정취 속에서라면,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는 동물에 대한 이야기가 벌거벗음을 재삼 거론하여 한기(寒氣)를 불러들이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지난 번에 잠깐 언급했던 아감벤이건 또 말년에 몇 년간 동물에 대한 논의를 계속했던 데리다건 동물성을 긍정적으로 거론하는 현대 철학자들이 대개 걸고넘어지는 상대는 역시 하이데거다. 하이데거가 존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인간 존재뿐이라고 하면서 동물과 인간을 확연히 구분했던 탓이다. 그에 따르면, 동물이 살아가는 세계는 주어진 환경에 얽매인 빈한한 세계다. 반면에, 인간은 스스로 세계를 형성하는 존재고, 그런 점에서 진정으로 세계 속에 존재한다. 대지 위의 우뚝 세워진 세계, 그것은 인간만의 세계다.

이런 생각은 보기에 따라 몹시 자의적이고 폭력적이다. 도대체 하이데거가 동물의 처지를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하이데거 철학의 주안점이 고정된 규정에 매인 이른바 존재자위주의 사유를 넘어서는 것이었다고 하지만, 결국 그는 인간의 사유를 중심에 놓는 데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긴, 인간이 인간의 사유를 벗어나는 일이 가능하기나 하겠는가? 그렇더라도 하이데거의 문제는 인간의 삶과 사유의 우월함을 적극적으로 전제하고 인정했다는 데 있다.

 

 

최근 우리말로도 번역된 <철학자와 늑대>라는 책을 쓴 마크 롤랜드는 인간의 세계가 다른 동물의 세계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동물의 지능이 인간보다 못한 것도 아니다. 단지 인간과 동물은 다른 지능을, 다른 용도로 발달된 지능을 지녔을 뿐이다. 이를테면 늑대는 늑대가 살아가는 방식에 적합한 지능을, 원숭이는 원숭이가 살아가는 방식에 적합한 지능을 지닌 것이고, 그 점은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인간을 포함한 영장류는 집단의 다른 구성원의 마음을 읽고 기만할 줄 알지만, 늑대가 무리를 이루고 살아가는 데에는 그러한 기능이 필요치 않다. 그런데도 이런 차이를 쉽게 위계화하여 다른 동물을 낮추어 보는 것은, 인간이 거둔 짧은 기간의 성공에 도취해서, 각기 다른 방식의 삶이 지닌 자연사적 무게를 무시하는 것이다.

 

마크 롤랜드는 전문적으로는 몸과 마음의 관계를 주제적으로 다루는 구보씨 또래의 철학자지만, <동물의 역습> , <SF철학>과 같은 보다 대중적인 책들의 저자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는 10년이 넘는 세월을 늑대와 함께 살았고, 그 체험을 바탕으로 <철학자와 늑대>라는 특이한 책을 썼다. 그렇다고 그가 야생 상태의 늑대와 살았다는 것은 아니다. 개를 키우듯 늑대를 키웠고 그 늑대와 같이 생활했다. 늑대와 같이 달리고 장난치고 여행했으며, 심지어 강의실에도 늑대를 데리고 다녔다. 가족처럼, 어쩌면 가족보다도 더 가까이 지냈던 셈이다. 그런 경험을 통해 그가 제시하고 싶어 한 것은, 늑대가 인간 못지않게 매력적이고 멋진 존재이며, 사랑할 만한, 심지어 존경할 만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는 브레닌이라는 이름의 늑대를 키우고 사랑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롤랜드에 따르면, 그것은 늑대가 “인간의 영혼 속에 오래도록 잊혀져 왔던 깊은 구덩이를 파내기 때문”이다. 벤야민의 표현을 빌면, “구원의 밤”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얘, 구보야, 나 많이 참았거든. 하지만 어쩌지? 이젠 네 횡설수설을 더는 들어줄 수가 없어. 11월이 어쩌구 낙엽이 어쩌구 하다가, 불황이니, 동물이니, 늑대니 되는 대로 주절대더니, 이젠 뭐, ‘구원의 밤’이라구? 네 스스로도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ㅎㅎ, Y야, 물론이지. 말이 되고말고… 어어, 그렇게 화내지 말구 조금만 더 들어 봐. 내가 금방 설명해 줄께. 늦가을이라는 게 뭐야? 시련을 앞둔 계절 아냐? 그걸 요즘의 불황이랑 연결 짓는 게 뭐가 이상해? 좀 더 거창하게 말하면 세계자본주의의 위기랑 연결할 수도 있을 거야. 그리고 동물성에 관해 생각하는 건, 이렇게 시련에 크게 봉착한 문명이라면 어차피 밟게 되는 반성의 수순이라구. 그 동안 버텨온 자만심에 대해 반성할 때, 그게 천상을 향한 기도로만 뻗치지 않는다면, 또 갈 곳이 어디겠냐? 그나마 이렇게 동물성에까지 생각이 미치는 건 이제껏 쌓아둔 문명의 여유가 뒷받침되기 때문이야. 정말 급하고 절박하면 구덩이를 깊게 파볼 여유조차 없을 거거든. 늦가을 즈음해서, 매섭고 추운 눈보라가 몰아치기 전에, 우리의 됨됨이를, 우리의 소이연(所以然)을 깊이 있게 되씹어 보는 거야. 그게 말하자면 ‘영혼의 구덩이’인 셈이지. 영혼이란 우리가 동물과 함께 가지는 것이거든. 영혼을 뜻하는 라틴어 아니마(anima)와 애니멀(animal)의 어원적 근친성을 생각해 봐. 그리고 ‘구원의 밤’이란, 우리가 이렇게 근원적으로 파고들어갈 때 닿게 되는 깊이와, 그것에 따르는 간곡한 바람에 대한 은유라고 할 수 있어. 사실 새로운 날은 밤에서 비롯하는 거잖아.”

“헐, 그렇게 갖다 붙이면 연결 안 되는 게 어딨니? 그 정도면 박근혜와 잔 다르크도 이어 붙일 수 있겠다.”

“박근혜와 잔 다르크? 어, 그건 새로운 얘기가 아닌데? 예전에 한나라당 주성영이 ‘박근혜는 잔다르크다’ 그런 적이 있어. 한나라당을 위기에서 구했다고 말이지.”

“내 말이 그 말이야. 너, 그 주성영이 성매매 의혹으로 지난 번 국회의원 선거에 불출마했다가 얼마 전에 새누리당 유세지원단장이 된 거 알아?”

“어, 그래? 정말 웃기는군. 사람이 없는 건가, 아부가 힘이 센 건가… 그런데, 가만, 이상하네… 지금 Y 네 말은, 내가 주성영 같은 인간하구 비슷하다는 거야?”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하지만 알게 뭐야, 그 깊은 ‘동물성’에서 보면 상통하는 면이 있을지도…풋, 구보야, 그렇다고 표정까지 그렇게 야수 흉내를 낼 필요는 없잖니?”

 

구보씨, 동물을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씨, 동물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
문 성 원(부산대 교수)

 

굳이 개냐 고양이냐를 따지자면 구보씨는 개 쪽이기보다는 고양이 쪽이다. 생긴 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성격이 그렇다는 말이다. 요즘은 아파트처럼 밀폐된 공간에서도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집이 늘었는데, 개는 하루만 혼자 두어도 곤란하지만 고양이의 경우는 혼자서도 며칠 정도는 잘 견딘다고 한다. 구보씨도 그렇다. 소란스럽고 번잡한 것보다는 차라리 홀로 있는 게 낫다고 여긴다. 아마 철학자라면 대부분이 그렇지 않을까. 개를 닮은 철학자라고 하면 영 이상하지만, 고양이를 닮은 철학자라고 하면 어째 그림이 그려질 법도 하지 않은가.

하긴 때로 세상엔 개 같은 철학자가 없진 않았다.
(내용이 대단치는 않지만, 이런 책도 있다.)고대(古代) 그리스의 유명한 견유학파(犬儒學派), 곧 키니코스학파가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그때의 ‘개 같음’은 개떼처럼 몰려다니면서 욕망의 대상을 약탈하거나 구걸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는 시끄럽게 짖어대고 꼬리를 흔들어대며 위계에 따른 협박과 아부의 몸짓을 과시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반대로, 견유학파의 ‘개 같음’은 온갖 누추함을 마다않고 인위의 번쇄(煩?)를 갈가리 찢어버리는 자유로움에 있었다. 그러니까 견유학파에서조차 사교성은 철학자의 특성이 아니었던 셈이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세속의 그 무엇에도 굽히지 않는 자존과 고독의 품위가 있었다. 그것은 개보다는 오히려 고양이 족속들에 더 어울리지 않는가.

그렇다고 구보씨가 호랑이나 사자를 닮았다는 것은 아니다. 표범이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살쾡이라면 또 모르겠다.

“얘 좀 봐, 여전히 웃겨. 너처럼 배나온 살쾡이가 어디 있니?”
(견유학파의 디오게네스)이크, Y다. 드디어 그녀가 돌아왔다. 오랜 여행 탓인지 약간 야위고 피부가 그을린 게 야생성이 더 강해진 모습이다. Y야말로 살쾡이 같다.

“글쿠 말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하지, 애꿎은 짐승들은 왜 끌어들이니? 니들 철학자들이 언제 동물들을 제대로 대접해 준 적이 있기나 하니?”

아니, 그건 오해다. 철학자들도 나름으로 동물에 민감하다. 당장 니체와 말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는가.

1889년 토리노. 니체는 마부의 채찍질에도 꿈쩍 않는 말에게 달려가 목에 팔을 감으며 흐느낀다. 그 후 니체는 ‘어머니 저는 바보였어요’라는 마지막 말을 웅얼거리고, 10년간 식물인간에 가까운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다.

영화 ?토리노의 말?은 이런 내용의 해설자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토리노의 말? 중 한 장면)이 영화는 헝가리의 세계적인 영화감독 벨라 타르가 작년에 내놓은 작품이다. (그는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이제 영화는 그만 만들겠다고 하더니, 이번 부산 국제영화제에서는 뉴커런츠 분야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니체는 말에게 동정(同情)과 공감(共感)을 표시했고, 벨라 타르는 이 공감을 모티브로 삼아, 요즘 유럽에서 다시 유행을 맞은 종말론적 분위기를 인상적인 흑백 화면과 강렬한 폭풍의 음향 속에 담아냈다.

니체가 말의 목을 껴안았다는 1889년은 히틀러가 태어난 해다.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도 그 해에 태어났다. 1989년에는 동구의 사회주의가 몰락한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동물이 철학자에게 공감하는 일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철학자가 동물에게 공감을 보이는 일은 확실히 있다. 벨라 타르는 여기에 주목한다. 강한 공감은 위기에서 비롯하고, 거꾸로 강한 공감의 표현이 위기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기도 한다. 근본적인 위기와 동물적인 공감, 꽤 그럴싸한 연결이 아닌가.
(벨라 타르)종말이 근본적인 종말이면 인간과 동물에 너나가 있을 수 없다. 반면에 ?혹성탈출? 식의 종말이라면 그것은 인간 지배의 종말일 따름이다. 그런 종류의 위기에서는 오히려 동물과 인간의 구별이 더 두드러진다. 공감이라고 해 봐야 그건 인간 위주의 공감이어서, 인간과 닮은 원숭이가, 곧 인간의 편인 원숭이와 인간의 적인 원숭이가 문제될 뿐이다. 위기의 심각성에 따라 공감의 양상과 범위가 달라진다는 얘기다.

역시 종말론적 분위기에 편승해 요즘도 자주 언급되는 칼 슈미트에 의하면, 누가 동지인지는 누가 적인지에 따라 정해진다. 무엇이 우리랑 같은 부류인지는 무엇이 우리를 위협하는지에 따라 정해진다. 적어도 사회적 반향이 있는 공감의 폭과 경계는 이런 적대와 위험에 따라 그 윤곽이 그려지는 법이다. 그런 까닭에, 동물이 공감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경우라 해도 보통은 인간적 감정의 연장일 뿐이다. “이 짐승만도 못한 놈!” 우리는 우리의 적에 대해 때로 이렇게 외친다. 그런가 하면, 우울하고 서글픈 기분으로 주저앉아 있을 때 개나 고양이가 옆에서 살랑거리면 우리는 거기서 위안을 받기도 한다. “그래, 니들이 인간보다 낫지…”

그러나 니체가 두들겨 맞는 말에 대해서 느꼈던 연민과 공감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껏 우리 주변에 미치기 마련인 친근성의 테두리를 넘어선다. 전에는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낯선 말을 위해 니체는 뛰어든다. 그전부터 말에 애착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니체가 말을 아끼던 애마(愛馬) 신사였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런데도 그는 말의 목을 껴안고 흐느낀다. 거기에는 비일상적(非日常的)인, 그러나 보편의 심장을 꿰는 울림이 있다.

벨라 타르가 이 보편성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영화의 흑백 화면과 어울리는 수도사적 꼿꼿함의 전통이 깔려 있다. 그것은 물론 서구의 전통이고 기독교적 전통이며 히브리적 전통이다. 아니, 니체가? 기독교의 신을 부인했던 바로 그 니체가 기독교의 전통과 연결된다고? 당근이고 말밥이다. 적어도 신이 살아있었음을 인정해야 그 신이 죽었다고 선언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니체 자신이 목사의 아들이었으며 기독교적 죄의식과 평생 싸움을 벌였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제 정말 니체의 신은 죽었는가? 글쎄… ?토리노의 말?은 무엇보다 유럽의 절망감을 드러내 보인다. 영화의 무대는 황량한 벌판의 외딴 집에 고정되어 있다. 영화의 중간에 등장한 집시들은 마부의 딸에게 미국으로 같이 가자고 꼬드긴다. 그들은 한바탕 소동을 피운 뒤에 물러가지만, 집시 노인네가 건네주고 간 책에는 성소(聖所)가 더럽혀졌으며 회개의 의식(儀式)이 필요하다고 쓰여 있다. 집시들이 퍼 마시고 떠난 우물은 말라버린다. 방종(放縱)한 약탈자인 미국은 아직 승리자로 군림해 있는데 꼿꼿한 품위의 유럽은 처연하게 종말을 맞이한다는 말인가?

벨라 타르보다 더 성가(聲價)가 있는 유럽의 영화감독 라스 폰 트리에 역시 작년에 종말론적 작품을 내놓았다. 그 영화 ?멜랑콜리아?에서는 아예 지구가 낯선 별에 부딪혀 박살나 버린다. 여기에도 동물로는 말이 등장한다. 종말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무력함을 함께 나누기에는 말만한 상대가 없기 때문일까. 그러나 이때에도 말은 인간의 세계를 그려내는 주변적 역할을 넘어서지 못한다.
(조르조 아감벤)동물을 종말론과 관련해 전면적이고도 주제적으로 다룬 이로는 『호모 사케르』로 유명해진 조르조 아감벤을 들 수 있다. 그의 책 『열린 것』(이태리어 원본은 2002에, 영어번역본은 2004년에 나왔고, 우리말로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은 ‘인간과 동물’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보기에 따라선 니체 식 말목 껴안기의 연장으로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아감벤이 다루는 종말론은 ?토리노의 말?에 비해서도, ?멜랑콜리아?에 비해서도, 니체의 흐느낌에 비해서도 그 절실함이 덜하다. 그것은 아마 10년 전의 이탈리아가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에 패배한 것을 빼놓고는 심각한 위기나 절망에 부딪히지 않은 탓인지도 모른다.
조르조 아감벤, 『열린 것』워낙 서구의 전통에선 종말이 부정적인 것으로만 치부되지 않는다. 종말은 새로운 시작인 까닭이다. 부활과 구원이 종말이라는 사건과 함께 하지 않는가. 인간과 동물의 관계도 여기서는 새로워진다. 아감벤은 『구약』의 ?이사야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인용한다. “그때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고 송아지와 사자 새끼가 함께 먹으며 어린 아이들이 그것들을 돌볼 것이다.”(11장 6절) 종말에 이르면 인간과 동물은 전혀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다. 이제까지 인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던 동물성에 대한 차별과 비하가 사라진다. 말하자면, 완전한 ‘신’(新;神)세계에서 동물과 인간의 공감이 완성되는 것이다.

“구보야,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 횡설수설하더니 삼천포로, 아니, 영 엉뚱한 데로 빠지잖아. 동물 얘기하다가 종말이니 뭐니 하는 것도 이상한데, 이젠 아주 천당으로 올라가니? 내가 뭐랬니? 이것저것 괜히 주워섬기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라고 했지. 대체 하고 싶은 말이 있기나 한 거니? 그 동안 내가 없을 땐 어땠는지 정말 궁금하다, 얘.”

“어, Y야. 그래두 내 말에 맥락은 있는 거야. 철학자들이 근래에 동물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러니까 인간 중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접근하려고 하고 있는데, 그게 기본적으로 인간 삶과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에서 온다는 거지. 종말론이라는 게 다름 아닌 그런 근본적인 문제의식에서 비롯하는 거고 말이야. 물론 이런 생각들이 주로 서구적인 것이긴 하지만, 뭐, 오늘날의 주된 삶의 패턴이 서구적인 것이니까…”

“그런데 아감벤이 철학자 맞아? 역사학자 아냐?”

“뭐, 미학이나 문헌학적 작업에 익숙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철학자라고 해야겠지. 내가 말한 책에도 그림이나 옛 문헌에 대한 얘기가 다방면으로 많이 나오긴 해. 그러나 가장 중심적으로 다루는 건 하이데거의 인간관과 동물관이고 거기에 대한 비판이야. 그리곤 벤야민의 견해를 일종의 대안 비슷하게 제시하지.”

“너처럼 횡설수설한단 얘기야?”

“쯔.,. Y야, 내 말도 횡설수설 아니라니까…”

“그럼, 대답해 봐. 아까, 니체가 ‘어머니, 저는 바보였어요.’라고 말했다고 했지? 그게 무슨 뜻이야?”

“글쎄… 그건 아마 자신의 작업이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혔다는 뜻이 아닐까. 동물과 공감하는 차원까지 내려가서야 절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래서 니체의 그 말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거겠지. 종말론이라는 게 기존의 질서를 부분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다 뒤집어야 된다는 것이니까 말이야.”

“그래? 그럼, 구보 넌 언제, ‘Y야, 난 바보였어. 그 동안 횡설수설했구나.’ 하고 말할 건데?”

구보씨 사회적 크기를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씨 사회적 크기를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 성 원(부산대 교수)

 

구보씨는 명색이 사회철학 전공자지만 딱히 ‘사회적’이진 않다. 오히려 자신이 그다지 사회적이지 못하다는 걸 의식하다 보니 사회적 문제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해야 할지 모른다. 게다가 한편으론 사회철학을 공부하다 보면 부족한 사회성이 메워질 거라는 헛된 기대도 있지 않았을까… 하여튼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 해서 다 사회적인 건 아니다. 그래서 칸트도 인간의 사회성을 일러 ‘비사회적 사회성’이라 하지 않았는가.
임마누엘 칸트칸트가 그런 표현을 쓴 데는 당시 부각되어 있던 인간의 이기성에 대한 관심과 긍정이 큰 몫을 했다.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경제적 인간이라는 근대의 인간상에 대한 관심과 긍정 말이다. 사실 이기적 인간과 사회적 인간이란 얼핏 보기에도 서로 모순되는 두 면모지만, 이 두 가지를 함께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근대 유럽의 현실이었다. 이기적인 인간들이 부대끼며 어울려 사는 사회, 그런 사회가 유지될 뿐만 아니라 발전하기도 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또 해명해야 했던 것이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이런 현상에 대한 가장 잘 알려진 대답이다. 직접적인 이기심을 넘어서서 인간 사회를 지탱해 주는 이성적인 법칙이 있다는 것이다. 칸트가 말하는 ‘비사회적 사회성’에도 비슷한 면이 있다. 각자의 이익을 좇는 것이 인간 본성의 ‘비사회적’ 면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그런 비사회성을 끌어안는 사회성이 작용하는 탓이다.

그러니까 이 사회성에는 개체의 자기 이익 이상의 무엇이 있다. 칸트는 이런 면모를 역사가 추구하는 이념(理念)과 관련시켜 이해하면서도 그것을 개체를 넘어서는 어떤 실체(實體)로 생각하진 않았지만, 헤겔에 이르면 그와 같은 사회성은 정신(精神)이라는 이름의 실체로 등장하게 된다. 민족정신, 시대정신 같은 초개인적인 무엇이 되는 것이다.

어라, 잠깐! 구보씨가 이렇게 딱딱한 얘기를 늘어놓으려던 것은 아니었다. 아무 때나 현학적인 철학자 행세를 하려 드는 건 비(非)사회적이고 반(反)사회적인 짓임을 아는 까닭이다. 그건 구보씨에게 어울리는 사회적 스타일이 아니다. 언제 보아도 우아한 남녘의 오빠 스타일이 아닌 것이다. 구보씨가 말하려던 것은 다만, 사회성에는 우리의 직접성을 뛰어넘는 면이 있다는 것, 그 덕택에 우리의 삶에는 숱한 어려움이 가중된다는 것 정도였다.

아니, 또 잠깐! 그렇다고 구보씨가 자신의 비사회적인 면을 이기심과 등치하거나 그런 이기심을 인간 본성으로 생각한다는 말도 아니다. 이를테면, 우리는 본래 이기적인 인간인데 필요에 따라 사회를 이루어 살려다 보니 이렇게 힘이 드는 거다, 라는 식으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의 이기성이 부당하게 강조되기 시작한 것은 자본주의 질서가 자리 잡아나가면서부터였다.
아담 스미스실은, 칸트는 물론이고 아담 스미스도 인간의 본성에 이기적인 구석만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아담 스미스는뿐 아니라이라는 두툼한 책을 썼고(우리말 번역본도 나와 있다), 동정심을 인간의 기본 감정 가운데 하나로 내세웠다. 아담 스미스는 당대의 유명한 지식인이자 역시 동정심을 통해서 인간의 윤리를 설명하려고 했던 철학자 데이비드 흄과 동향의 친구이기도 했다(둘 다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나이는 흄이 열 살 가량 위였다).

인간을 순전히 이기적인 개체로만 보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잘못된 생각이다. 그런 생각으로는 그런 식의 견해를 조장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마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물론 이기심을 강조하는 것이 자본주의 하의 탐욕을 정당화하는 데는 꽤 쓸모가 있다. 하지만 탐욕을 부린다 해도 그 탐욕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려면 최소한 그럴 수 있는 무대인 사회가 존립해 있어야 하지 않는가. 그렇기에 이기심도 어떤 질서 속에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잘 정돈된 질서 안에서 각자 이기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라는 얘기다.

현대 자유주의 정의론의 대가라는 존 롤스가 내세우는 정의로운 사회도 따지고 보면 이런 부류의 사회다. 그가 생각하는 정의의 원칙이라는 게 이른바 합리적 이기심을 가진 인간들을 출발점으로 삼기 때문이다. 사회는 이기적인 인간들이 모여 사는 조직인데, 서로가 자기 처지만 생각해서는 그 이기심이 공정하게 추구되기 어려우니, 각자가 다른 처지에 놓일 경우도 생각해서 이기심을 충족시키자는 것이다. 이기주의의 세련된 보편화(普遍化)라고나 할까, 이것은 말하자면 아메리카의 고상한 자유주의 스타일인 셈이다. 그리고 이런 스타일에는 동정심이 필요 없다.
존 롤스하긴, 오늘날처럼 규모가 큰 사회가 동정심에 입각한 도덕으로 굴러가기는 어렵다. 동정심(同情心)이나 공감(共感)이란 건 원래 소규모 집단을 이루어 살던 시기에 생겨나고 정착된 감정일 테니 말이다. 농경으로 대규모 정착 문명이 일어나기 전, 인류는 오랜 기간 동안 100여명 정도의, 많아야 200명이 못되는 규모의 집단생활을 했다고 한다. 현생 인류로서의 기간만 해도 수만 년이고,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수십만 년의 세월이다. 그 흔적은 오늘날에도 남아 있어, 제 아무리 인간관계가 복잡하고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정서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상대는 백 명 남짓을 넘기 힘들다.

그래서, 군대로 따지면 중대(中隊) 규모의 집단이 정서적 교감을 지니고 가장 큰 결속력을 발휘할 수 있는 최대 단위가 된다. 아니, 그렇기에 중대의 크기가 그 정도로 정해졌다고 해야 맞는 얘기일 것이다. 집단이 이 크기를 넘어서면 서로 속속들이 알기도 어렵고 정서적으로 일체감을 느끼기도 곤란해진다. 직접적인 접촉으로 유지될 수 있는 집단의 크기가 생래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 크기를 훨씬 뛰어넘는 규모로 삶을 꾸려나가지 않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자, 그렇다 보니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마음과 사회 환경, 심정과 사회 조직 사이에 괴리가 생겨난다. 오늘의 도시 생활에선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지만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감정적으로 충실할 여유는 누구에게도 없다. 기억을 동반하는 이지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기억이란 것이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상당 부분 감정과 엮이기 마련이니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무리 큰 규모의 사회 속에 산다 해도 결국 우리가 믿고 결속할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일 수밖에 없다.

한 사회의 지배적인 무리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가령 일국의 대통령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관계하는 일차적인 집단의 크기는 백여 명 남짓이다. 물론 각각의 사람들이 관계하는 일차 집단은 서로 같지 않게 중첩된다. 그러나 이런 중첩적인 관계가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골고루 퍼져가기는 어렵다. 게다가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틈새들을 따라 서로의 간극은 크게 벌어지며 집단들끼리의 엮임도 쉽게 적대적인 선들로 균열된다. 심정적 집단의 크기와 실제의 사회적 관계로 얽힌 집단의 크기 사이에서 온갖 문제들이 생겨난다.

“그런데 구보야, 그거 구닥다리 문제제기야. 그렇게 해서는 노자(老子) 식의 소국과민(小國寡民) 얘기밖에 더 나오겠어? 사대주의에 시비를 걸더니 아예 거꾸로 가는구나.”

C는 아무래도 강북의 영감탱이 스타일이다. 구보씨랑 나이는 같은데, 너댓 살은 더 먹은 것처럼 군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아니, 그런 것만은 아니야. 이거 보기에 따라서는 민주주의의 핵심 문제라구. 자치(自治)의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느냐의 관건이지. 자유주의자들은 이런 문제를 도외시하잖아. 걔들은 한편으로 기계적이라구. 말하자면, 분해-결합의 스타일이야. 인간을 일종의 레고 조각처럼 보고 필요에 따라 이어다 붙이면 어떤 규모의 어떤 사회건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니까. 레고 조각만 깨뜨리지 않으면 된다는 거지. 그 조각이 완성된 사회의 어디에 붙어 있건 다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거야. 그 치들은 공동체 단위에 대한, 그러니까 코뮨 단위에 대한 생각이 없어.”

“하지만 그런 문제야 지방 자치나 지역 사회 단위를 통해 해결하는 수밖에 없잖아. 지금 백 명 이백 명 단위의 공동체로 생활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고… 내가 보기엔 요즘 공동체주의라는 것은 알맹이 없는 수세적(守勢的)이고 수사적(修辭的) 논의에 불과해. 적어도 산업 사회 이후의 코뮨이라는 건 경제까지 공동체로서의 사회가 장악할 때 유의미해지는 거야. 그게 코뮤니즘이지. 그걸 포기한 공동체주의는 그냥 공화주의일 따름이고, 자유주의의 일파야. 자유주의적 공화주의란 말이지.”

“그런데 그게 개인주의는 아니거든. 골수 자유주의는 개인주의고. 개체를 우선적인 것으로 놓고 인간 사회를 바라보느냐 아니면 공동체적인 사회 속에서 개체가 형성되는 것으로 보느냐는 큰 차이라구.”

“너희 철학자들한테야 그렇겠지.”

“허, 아니라니까. 예를 들면, 경제민주화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질 때, 그래서 개인의 소유권과 재분배를 통한 복지가 충돌할 때, 그런 입장 차이가 큰 역할을 한다구.”

“글쎄, 그럴까? 미국만 해도 그 구별이 선명치 않을 걸. 공동체주의자들 가운데 민주당파도 있고 공화당파도 있을 거야. 우리도 봐, 지금 박근혜에 붙어 있는 김종인 같은 이들이 순수한 개인주의자는 아니잖아. 내가 보기엔 그거 개와 고양이의 차이보다도 못한 것 같아.”

“개와 고양이?”

“그래, 개와 고양이. 개는 사회적인 동물이고 고양이는 안 그렇다고 하잖아. 공동체주의자와 자유주의자를 나누느니 차라리 개 닮은 놈과 고양이 닮은 놈을 나누는 게 낫겠다. 구보, 넌 어느 쪽이냐?”

“나야 뭐 대체로 자유주의에 비판적이니까… 근데, 너 지금 나보고 개 같다는 거냐?”

구보씨, 안철수의 크기를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씨, 안철수의 크기를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
문 성 원(부산대 교수)

 

며칠 전 TV에서 안철수가 출연한라는 프로를 보다가 구보씨는 문득, 머리 크고 키 작은 것으로야 안철수가 구보씨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키 크고 머리 작은 걸 좋아하는 세상이라지만, 세간의 기준도 사람 나름으로 통하는 것인가 보다.

하긴, 보이지 않는 키도 있으니까… 구보씨는 인천 출신의 옛 친구 한 명을 떠올렸다. 키가 꽤 작은 편이었던 그 친구는 그런 단점(短點)에 전혀 굴하지 않고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의 ‘정신적인 키’를 내세웠다. “오해하지 마라. 이래 뵈도 마음만은 꺽다리다.” 요새의버전으로 하면 이런 식이었다고 할까. 실제로 마음의 길이를 재어보지 못했으나, 언제나 여유 있고 푸근한 친구였다.

그렇다면 안철수의 정신적인 키는 얼마나 될까. 구보씨는 그 프로 내내 앉은 모습만 보여주는 안철수의 정신적 키를 가늠하려고 애썼다. 그간의 고심이 처음의 긴장한 표정에서 언뜻 드러나기도 했다. 미간에 세로 주름이 잡히고 흰 머리도 늘었다.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안철수 원장의 SBS출연 모습, 출처: SBS이제 안철수가 정치 일선에 나서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만이 아니라 최근에 펴낸 책을 보면, 그 준비를 상당 기간 해 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직접적인 경험은 부족할지라도, 과외 수업을 통해서건 개인적인 노력을 통해서건, 우리 사회의 주요한 사안들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피력할 수 있는 준비를 꽤 갖추었다. 이것은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아직 나쁠 건 없다는 게 구보씨의 생각이다. 안철수 효과는 일단 긍정적이다. 기성의 정치에 대한 변화 요구를 대변하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그 효과를 좀 더 이어나가는 것이 좋지 않은가.

안철수 현상에 대해서는 이미 더 보태기 어려울 정도로 말들이 많다. 그런데 구보씨로서는 논의의 중심을 약간 빗겨나 특기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안철수의 경우가 이제는 거의 잊힌 옛 지도자상의 이상적(理想的) 전통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무릇 지도자나 통치자는 자신이 잘났다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 그 능력과 인품을 아는 주변 사람들이 추천하고 밀어 올리는 것이라는 전통 말이다.

그런 전통이 정말 있느냐구? 물론이다. 따지자면 요순(堯舜) 시대부터다. 요임금과 순임금은 그 덕성으로 임금이 되었고 하(夏)나라를 연 우(禹)임금은 치수(治水)의 능력을 인정받아 왕위에 올랐다. 당시에는 스스로 왕이 되고자 악다구니를 쓰지 않았다. 오히려 훌륭한 인물을 찾아 임금으로 세우는 것이 과제였다. 그럼에도 한편에서는 세속의 권력을 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기피하는 분위기마저 있었다. 자신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주려 한다는 말을 듣고 강물에 귀를 씻었다는 허유(許由)의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중국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도 추대로 임금이 되었고 이후 석탈해나 김알지 등 다른 성씨들이 돌아가며 왕 노릇을 했다. 구보씨가 어릴 때만 해도 그런 전통의 자취가 남아 있었다. 남 앞에 함부로 나서거나 스스로 우두머리가 되려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었다. 이러저런 자리에 추천이 되더라도 더 적합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양보하는 것이 도리라고 배웠다. 학급의 반장 선거에서 자기 이름을 적는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낯 뜨거운 일이었다.

물론 이런 방식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그 자리가 크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닐 경우다. 부족 모임에 가까운 옛 국가에서는 왕이라고 해 봐야 큰 권한을 누린다기보다는 책임을 져야 할 일이 많았다. 오늘날도 위세는 없고 책임만 많은 자리는 서로 미루지 않은가. 왕위에 대한 욕심이 강해지고 세습이 일반화한 것은 챙겨 가질 것이 많아진 이후였다. 중국에서는 하나라 우왕의 아들인 계(啓)로부터 세습이 행해졌고 우리의 경우도 2~4세기 경에 이르면 세습이 확립된다. 그렇더라도 덕 있는 자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선양(禪讓)의 정신은 오랫동안 유교 정치의 이상으로 남아 있었다.

민주주의 시대에 선양이니 덕치니 하는 것은 잘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민주(民主)의 민이 단일한 것이 아닌 한, 오늘날의 정치는 이해관계의 반영이고 조절임이 명시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조절이 온갖 밀쳐내기와 나눠먹기로 행해지고 강자에 빌붙기와 약자를 억누르기로 이뤄질 때, 도덕적인 지도자에 대한 갈망이 커지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해관계로 엮인 정치의 장에서 단련이 된 인물들보다 정치에 대한 야심이 원래 없거나 약했던 인물들이 인기를 얻고 있는 오늘의 사태는, 누구나 인정하듯 기존 정치에 대한 깊은 불신의 증거다.
, 김영사, 2012.안철수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주변에서 부추기고 유혹하는 일이야 벌써 오래 전부터 있었다. 만일 정치적인 야심이 본래 있었다면 일찌감치 등장했을 것이다. 이명박과 다른 부류의 또 하나의 성공 신화를 바탕으로 한다는 설명만으로는 안철수 현상을 해명하기에 많이 부족하다고 구보씨는 생각한다. 안철수를 ‘IT시대의 이명박’이라고 하는 것으로는 그가 내보이는 도덕성과 상식적 합리성에 대한 세간의 평가와 기대를 가늠하기 어렵다.

안철수의 긍정적인 이미지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사심 없음이고 공익 지향성이며 약자에 대한 관심이다. 백신 개발과 무료 배포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이래, 그는 20여 년간 그런 이미지를 지키고 키워 왔다. 박원순에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한 이유도 박원순이 그 자리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이런 안철수의 판단 방식은 이상적인 지도자의 선정에 대한 전통적인 상과 들어맞는다. 또 그렇게 양보할 수 있을 정도로 사심 없는 인물이라면 더 큰 자리에 적합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대중들의 판단 또한 지도자 선정의 전통적인 상과 어울린다.

“철학자로서야 그런 면에 주목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듣기에는 굉장히 나이브한 생각이야.”

C는 언제나 그렇듯 약간 비관적이다. 한 명뿐인 직원마저 휴가 간 출판사의 사무실에는 이 더운 여름에도 에어컨을 틀지 않아 가만히 앉아 있기에도 텁텁하고 후덥지근하다. C는 에어컨을 켜면 금방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불과 5년 전을 생각해 봐. 그 때 이명박의 지지율은 지금 안철수의 지지율을 훨씬 뛰어넘었다구. 이명박이 도덕적이고 이상적인 지도자 상에 걸맞아서 그랬을까? 천만에. 오히려 거꾸로였지. 이명박의 비도덕성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음에도 사람들은 그 점에 대해 눈을 감았어. 반면에 문국현은 또 어땠어? 문국현은 서투르게나마 이명박과 다른 윤리적 사회 경영을 내세웠지만 결과는 허망했지. 대중은 도덕성을 이유로 대통령을 뽑지 않아.”

“나도 물론 도덕성만으로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건 아니야.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확실히 정치에서의 도덕성을 요구하고 있다는 거지. 심지어 박근혜조차 신뢰성과 약속 지키기를 자신의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잖아. 이게 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할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런 요구의 뿌리를 전통에서 찾는 것이 무의미하진 않을 거야. 어떤 요구든 잠재된 바탕 위에서라야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야. 그래서 민중의 요구는 때로 변덕스러워 보이지만 그렇게 흔들리면서도 결국은 제 갈 길을 잡아나가는 것이 아닐까…”

“도덕성은 정치에선 양념 같은 거야. 고춧가루를 마구 뿌리거나 소금을 함부로 쳐서 못 먹을 것 같은 음식으로 망가뜨려 내치기는 좋지만, 양념만으론 괜찮은 요리를 만들 수 없다구. 안철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야. 이전 음식을 먹어 보니 상한 거라서 신선한 음식을 찾는 건데, 원재료가 부실한 채 몇 가지 양념만으로는 요리가 만들어지지 않거든. 금방 그 한계가 드러나기 마련이라구.”

“원재료? 그게 뭐야?”

“정치에서의 재료야 힘이지. 가장 중요한 힘은 이해관계에서 나오는 거고. 그게 곧 쌀과 고기 같은 거야. 물론 도덕성도 힘이 아닌 건 아니고 재료가 아닌 건 아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재료에 지나지 않아. 쌀이나 고기 같은 기본 재료가 부실하면 그 위에 채소나 양념을 아무리 잘 깔아놔 봐야 겉으로만 맛있어 보일 뿐이야. 안철수는 턱없이 부족한 기본 재료로 음식을 만들려는 서툰 요리사와 같다구.”

“그럼, 안철수가 안 된다는 거야?”

“대통령 말이야? 글쎄,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결과가 좋진 않을 거야. 안철수는 프랭클린 루즈벨트를 모델로 삼겠다고 하던데, 루즈벨트는 빵빵한 배경에 서른도 안 되어 상원의원으로 정계에 들어선 인물이야. 1932년에 대통령이 되기 전에 관료로 1차 대전도 치루고 부통령 출마도 하고 주지사도 하고 산전수전 다 겪었다구. 뉴딜을 추진할 힘이 그냥 생기는 건 아니야. 안철수는 루즈벨트는커녕 오바마하고도 비교가 안 되지만, 지금 오바마를 봐. 운신의 폭이라는 게 한 뼘밖에 안 되잖아.”

“정치인이라면 자신을 지지해 준 사람들이 배경이지 않을까? 그들의 요구가 힘이고 말이야.”

“하하… 물론,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 하지만 노무현의 경우를 생각해 봐. 지지자를 계속 잡아두려면 그들의 요구에 맞는 무언가를 줄 수 있어야 한다구. 그런데 무엇을 통해서 그럴 수 있지? 도덕성을 통해서? 그런 양념을 걷어내는 데에는 긴 시간이 들지 않아.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나 룰라의 브라질처럼 자원이나 풍부한 나라 같으면, 그간 해먹던 놈들을 쫓아내고 경제를 정상화하면서 대중들의 지지를 계속 끌어낼 수 있겠지. 하지만 우리는 처지가 그렇지도 못한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앞으로 세계의 경제 상황은, 그러니까 이제 다시 골이 파이기 시작한 공황은 점점 더 심해질 거라구. 우리 같은 경제 구조로는 정말 극복하기 어려운 위기가 다가올 공산이 커. 파시즘으로 안 가면 다행이야.”

“파시즘? 안철수가 말이야?”

“안철수가 직접 그런 길로 가지는 않겠지. 그러나 정치가 여러 갈등을 해결하는 데 무력함을 보이고 경제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그래서 혼란스러운 상황이 계속되면 무력과 선동으로 정권을 잡으려는 전체주의 세력이 득세하지 말라는 법은 없어.”

“하하… C야, 그렇게까지야, 민주화 이후 20년이 넘었는데…”

“그래, 나도 안 그러면 좋겠는데, 역사는 전진만 하는 게 아니거든. 지금 이탈리아나 스페인을 봐. 불안불안하잖아.”

“흠… 그러나저러나은 읽어 봤지?”

“봤어. 대충… 그런데 정치가 학습한다고 금방 되진 않으니까…”

“많이 팔렸다지?”

“글쎄, 20만부는 넘었겠지…”

“하…나온 지 1주일 만에… C야, 근데 너네 출판사에서는 일 년에 책이 몇 부나 나가냐?”

“뭐? 지금 그딴 건 왜 물어?”

구보씨 여전히 크기를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씨 여전히 크기를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
문 성 원(부산대 교수)

 

세상에 글 잘 쓰는 이들이야 많고 많지만, 스티븐 제이 굴드는 그 가운데서도 구보씨가 몇 손가락에 꼽는 사람이다. 구보씨는 20여 년 전 [다윈 이후]라는 책을 처음 대했을 때의 감흥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책을 읽는다고 밤을 꼴딱 새운 것은 당시 구보씨가 젊고 팔팔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굴드는 유명한 고생물학자고 과학사가지만, 인문학적 소양도 누구 못지않다. 덕택에 그의 글에는 다른 데서는 찾기 힘든 종합적 미덕이 넘쳐난다. 수수께끼와 추론이, 그것을 뒷받침하는 데이터가, 날카로운 비판과 풍부한 유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통념을 깨는 매력적인 통찰이 있다.

굴드가 괴팍하고 뻔뻔하고 심지어 야비하기조차 하다는 평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대중적인 과학적 글쓰기에서 어쩌면 굴드보다 더 잘 알려진 리차드 도킨스 진영과 오랫동안 각을 세우고 논쟁을 해온 탓이 클 것이다. 도킨스와 굴드는 동갑나기(1941년생)인데, 안타깝게도 굴드는 십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도킨스는 아직도 활동 중이다. 도킨스의 출세작인 [이기적 유전자](1976)가 나온 시기나 굴드가 [내추럴 히스토리]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에세이집 [다윈 이후](1977)를 펴낸 시기도 비슷하다. (굴드의 그런 에세이집은 이후 아홉 권이 더 나왔다.)

 

[이기적 유전자]도 정말 뛰어난 책이고 그 성가(聲價)는 아마 [다윈 이후]보다 앞설 것이다. 그렇지만 글의 멋이나 맛은 굴드가 낫다는 게 구보씨의 생각이다. 더구나 구보씨가 보기에는 진화론의 쟁점들에 관해서도 굴드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 대목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도킨스에 호의적인 최재천 같은 이들이 큰 활약을 하는 바람에 이 둘에 대한 평가가 치우치거나 기운 면이 있다. 다윈주의를 소개하고 전파하는 데 공로가 큰 최재천은 사회생물학의 창시자로 유명한 에드워드 윌슨의 제자다. 윌슨의

구보씨 거듭 크기를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씨 거듭 크기를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 성 원(부산대 교수)

 

구보씨는 아무거나 잘 먹는 편이지만 많이 먹진 않는다.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도 싫어하는 음식도 없다. 기왕이면 새로운 걸 맛보고 싶어 하지만, 지나치게 비싸거나 희귀한 건 쉽게 포기하거나 사양한다. 아무리 색달라 봤자 그게 먹을 거라면, 그저 한 입의 호사일 뿐이라고 생각해서다. 요리라는 게 이로 저작(詛嚼)되고 침과 섞여 목구멍으로 넘어가면 그걸로 제 임무는 끝나는 것 아닌가. 달갑게 넘길 수 있으면 그것으로 좋은 음식이다. 제깟 것이 맛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사실 우리가 유쾌하게 식사를 하는 데는 얼마나 맛있는 요리를 먹느냐보다 어떤 상황에서 누구랑 먹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요새 구보씨는 살이 찌나 보다. Y랑 밥을 먹는 일이 없어서다. Y는 입이 까다롭다. 나오는 말뿐 아니라 들어가는 음식도 여간 깐깐하지가 않다. 우선 식재료가 얼마나 신선한 것이냐를 따진다. 날 것을 잘 먹는데, 과일이나 야채 말고도 생선회나 심지어 육회까지 즐긴다. 젊은 날, 놀래켜 줄려고 산낙지를 사 줬다가 툭하면 그걸 먹으러 가자고 해서 곤욕을 치른 기억이 있다.

 

“구보야, 난 ‘이 징그러운 걸 어떻게 먹어요?’하고 내숭떠는 치들은 정말 밥맛이더라. 어떻게 먹긴? 요렇게 기름장 찍어 먹지.”

 

“그렇다손 쳐두 이런 걸 굳이 찾아다니면서 먹을 건 뭐누? 입 안에서도 꿈틀거리고 쩍쩍 달라붙는 걸 씹어 삼킨다는 건 아무래도 좀 야만적이라구.”

 

“야만적? 그건 엉터리 편견이야. 먹을 게 없어 썩은 고기나 먹고 그래서 후추나 찾던 애들이 더 야만적이지.”

 

“우리네 젓갈이나 김치도 일종의 썩은 건데? 치즈나 김치 같은 건 훌륭한 음식 문화라구. 어떻게 보면 끓이거나 구운 것보다 발효시킨 음식이 더 문화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어. 거기에는 시간이 개입하거든. 날 것은 직접적인 것이구 말이야.”

 

“그게 편견이고 단견이라는 거야. 신선한 먹을거리가 부족하니까 말리고 절이고 발효시켜 저장해서 먹은 거지, 이제 다시 신선하고 자연 그대로의 음식을 찾는 건 정말 자연스러운 일이라구. 너 좋아하는 헤겔 식으루 말하면 정(正)에서 반(反)을 거쳐 다시 합(合)으로 가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삶은 것두 먹구 삭힌 것두 먹구 이렇게 생생한 것두 먹잖니.”

 

“얼씨구, 그건 헤겔이 들으면 밥맛 떨어질 얘기구, 어떻든 이것저것 괜찮은 먹을거리가 많은 세상에서 굳이 꿈틀거리는 것까지 찾아 먹을 건 뭐냐는 거지.”

 

“맛있잖아.”

 

“글쎄, 맛이라는 게 거기서 거기 아닐까. 인간 혀의 미뢰(味?) 숫자는 아무리 많아야 만 개가 안 된다구. 느낄 수 있는 맛의 종류도 기껏 다섯 가지 정도고. 뭐, 냄새나 촉감도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내 생각엔 맛을 대단한 것처럼 내세우는 건, 더구나 그걸 예술이니 뭐니 해서 치켜세우는 건 일종의 사기가 아닐까 싶어.”

 

“구보야, 너 잠깐 혀 좀 내놔 봐.”

 

“아니, 또 왜?”

 

“잠깐이면 되니까 내밀어 봐.”

 

“체… 이렇게?”

 

“어디 봐. 어, 멀쩡하네? 그럼 넌 혀가 문제가 아니라 머리가 문젠가 보다. 맛을 느끼는 건 사실 혀가 아니라 머리거든. 넌 맛을 관장하는 뇌세포가 둔하거나 채 분화되지 않은 게 분명해. 말하자면, 머리가 나빠서 맛을 잘 모른다는 얘기지. 헤헤…”

 

천만에. 그건 오해다. 이래봬도 구보씨는 누구보다도 맛에 민감하다. 다만 그 민감함을 배타적으로 중시하지 않을 뿐이다. 그건 먹는다는 행위 자체에 대한 경계 때문일 수도 있다. 생각해 보라. 먹는 행위야말로 얼마나 파괴적이고 자기중심적인가. 먹는 일은 내가 아닌 것들을 부수고 찢어서 나의 일부로 재구성해내는 절차다. 말하자면 타자(他者)의 해체와 동일화가 먹는 행위의 목표다. 나의 해체가 아니라 타자의 해체, 타자로의 접근이 아니라 나로의 동일화가 관건인 것이다. 먹는다는 일은 동일화하는 자기의 고유한 행위다.
▲영화《올드보이》중 한 장면

먹는 과정을 생각해 보라. 거기엔 우선 우리 몸에서 가장 단단하고 파괴적인 부분인 이빨이 관계한다. 절단과 분쇄가 그 임무다. 하얀 이빨의 건치미(健齒美)는 그 기능의 원활한 수행이 유기체의 우월한 정상성을 보장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과시적 신호다. 이빨로 으깬 다음 우리는 그 음식물을 더욱 분해하기 위해 위장이라는 이름의 자루로 에워싼다. 언젠가 도올(??) 김용옥은 방송 강의에서 심오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뱃속의 음식물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인가 우리 밖에 있는 것인가? 각종 효소로 분해되어 걸죽해진 음식물, 그런 상태라도 흡수되기 전의 음식물은 내 몸에 갇혀 있는 것이지 진정 내 몸 속에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뱃속의 음식물은 아직 내가 아니다. 우리는 이 타자를 다 우리로 만들지도 않는다. 필요한 영양소는 흡수하는 한편, 쓸모없는 부분은 걸러내어 몸 주머니 바깥으로 버린다. 이른바 배설이다. 이 배설이 또 문제다. 오늘의 문명은 배설물이 선순환(善循環)하는 길을 막아버렸으므로, 먹는 일과 싸는 일의 관계는 먹히는 것과 먹는 자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끔찍하게 일방적이 되어버렸다. 평균적으로 인간은 평생 20톤 이상의 식량을 먹어치운다. 몸무게의 400배 정도다. 그러고도 자연에 자연스럽게 돌려주는 바는 거의 없다.

 

인간보다 많이 먹는 동물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몸무게 3톤의 코끼리는 하루 200킬로그램 이상의 먹이를 먹는다. 하지만 코끼리의 숫자는 전 세계적으로 100만이 안 되니, 70억의 인구에 비할 바가 아니다. 더구나 코끼리는 먹는 양의 절반 정도를 배설한다. 그 배설물은 벌레들의 먹이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사람들이 땔감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최근 태국에서는 코끼리 배설물로 종이를 만든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도 있다. 코끼리 한 마리가 하루에 싸는 똥으로 신문지 250장 정도에 해당하는 종이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의 똥은 어디에 소용이 되는가?

 

먹는 것은 내세울 만한 멋진 일이며 싸는 것은 숨겨야 할 더러운 일이라는 생각은 단선적이다. 그것은 자기 위주로만 자연의 과정을 대하는 뻔뻔한 문명의 결과다. 그러나 동화(同化)와 이화(異化)는 일방적일 수 없는 서로의 이면(裏面)이다. 우리는 끝내 먹기만 할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살아 있으면서도 무수한 생명들에 먹히며(살갗과 뱃속에 기생하는 생물체들을 생각해 보라), 결국은 분해되어 흙과 공기로 흩어지고 만다. 자연스러운 이 과정을 봉쇄하여 우리는 마치 동화만이 가치로운 일인 듯, 먹는 것만이 유의미한 일인 듯 살아가려고 한다. 먹는 일에, 맛에 집착하는 것이, 이미 원활치 않은 이 순환의 길을 더 틀어막는 데 기여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물론 먹는 일은 중요하다. 먹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를 키우고 유지할 수 없다. 제대로 된 성체(成體)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태아(胎兒) 때부터 잘 먹어야 한다. 성체가 되는 과정은 이렇게 외부의 양분을 받아들여 자신을 키우는 과정이다. 수정체(受精體)부터 보면 그 크기는 도대체 몇 배로 늘어나는 것일까. 나라는 생명체가 살아나가는 것은 이렇듯 내가 아닌 것을 나로 만들고 유지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것은 거꾸로 생각하면 나는 내가 아닌 것에 그만큼 의존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나는 내가 아닌 것을 먹어서 지금의 나를 이룬다.

 

‘인간은 그가 먹는 것이다’라는 포이어바흐의 말은 바로 이런 의존성을 잘 드러내 준다. 여기서 부각되는 것은 인간의 능동적 주체성이 아니라 물질적 제약성이다. 인간은 그가 먹는 것이니 좋은 걸 먹어 훌륭한 인간이 되자는 뜻이 아니다.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낙지를 먹는 인간은 곧 낙지라고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한심스러운 일이다. 존재론적으로 따지면, 먹히는 것이 먹는 것에 우선한다. 먼저 식물이 있어야 그것을 먹는 동물이 있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우리는 자연을 인간적인 것으로 동화하지만, 그렇게 동화되는 세계가 우리에 우선하며 우리를 제약한다.

 

아, 그러나 먹는 이야기를 하다가 큰 주제를 잊어 먹진 말자. 구보씨가 새삼 먹는 것에 대한 생각을 떠올린 것은 사실 크기의 문제 때문이다. 대국(大國)이 문제고 국가의 크기가 문제라면, 그 크기의 소종래(所從來)가 또한 문제이지 않겠는가. 로마가 로물루스 형제의 소읍(小邑)에서 시작하였듯이 처음부터 큰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커나가는 것이라면, 생명체가 성장할 때 그런 것처럼 국가에게도 먹이가 필요하고 동화의 과정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만약 이것이 비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면 정말 큰일이다. 생명체는 그 먹이를 외부에서 구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생명체는 커나가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먹이를 필요로 한다. 사회나 국가도 그럴까? 자족적인 사회나 공생(共生)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은 냉혹한 세계질서 앞에서 한낱 공상에 불과한 것일까?

 

크고 힘센 존재가 작고 약한 존재를 먹이로 삼는 것은 자연의 순리로 여겨지곤 한다. 그래서 우리는 먹히고 피해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크고 힘센 존재가 되거나 최소한 그런 존재에 기댈 수 있기를 바란다. 악어의 먹이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악어가 되는 편이 낫지 않은가. 또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악어새의 처지라도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비록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일지라도 먹는 것에 대한, 동화와 자기 확장의 방식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라고 구보씨는 생각한다. “엄마, 곰이 나를 먹고 있어요.” 몇 달 전 러시아에서 야생 곰의 습격을 받은 젊은 처자가 죽기 전에 휴대폰으로 통화한 내용이 세간에 전해진 적이 있다. 인간이 다른 동물에 먹힐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이 끔찍한 사태는 우리가 먹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해 준다.

 

얘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런 어이없고 무참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지, 뭐, 먹는 것에 대한 반성이라구? Y가 있었다면, 구보씨는 아마 크게 핀잔을 들었을 것이다. 그렇긴 하다. 하지만 먹히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떤 존재에게도, 참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저 무심하게 먹는 일에 열중할 수 있는 것일까.

 

구보씨, 계속 크기를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씨, 계속 크기를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교수)

 

중국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어찌 구보씨뿐이겠는가. 많은 이들이 중국을 주목한다. 구보씨 친구 중에는 M과 조금 다른 시선으로 중국을 바라보는 이도 있다. C는 알아주는 사람은 별로 없는 자칭 정치평론가다. 정치를 업으로 한다는 친구가 사람 만나는 건 즐겨하지 않아 이름만 걸어놓은 작은 출판사 사무실에 틀어박혀 지낸다. 여하튼 그도 중국에 관심이 많다.

 

“M 그 친군 노무현 때부터 중국에 들락거리더니, 여태 그러고 있군.”

 

“지 말로는 장사꾼들 딱까리 한다던데?”

 

“그게 그거지. 장사하려면, 특히 중국에서 필요한 게 뭐겠어.”

 

“요즘 보시라이 건도 그렇고 중국도 복잡한 거 같아.”

 

“글쎄, 이전 같을 수야 없겠지. 어차피 변화는 불가피할 테니까.”
▲시진핑(習近平)과 펑리위안(彭麗媛)
“지난 번에 M은 시진핑 얘기 많이 하더군. 시진핑이 차기 주석으로 낙점되기까지의 뒷이야기들… 펑리위안인가 하는 시진핑 마누라, 그 여자가 중국에선 유명한 가순데, 장쩌민에게 시진핑이 점수 얻는 데 큰 역할을 했다나…어떻든 내부에 갈등이야 있겠지만 지도부는 그래도 연속성이 있는 것 아닌가?”

 

“하…그새 M은 장쩌민이나 시진핑하고 어울리나 보지? 그렇더라도 성장 패턴도 바뀌고 장쩌민 시대랑은 이미 다르겠지. 그 와중에 사람도 바뀌고, 대외관계도 조정이 될 테고…”

 

“그런 거, 원래 M이 잘 하잖아, 세태에 따라 움직이는 거.”

 

“… 잘 하겠지.”

 

“M은 중국이 북한을 놓아줄 리 없다고 그러던데. 남한도 경제적으로 이미 중국 영향권 안에 말려들어갔고…”

 

“뭐, 놓여날 힘도 없잖아. 그리고 중국한테는 북한이 있는 게 중요하니까.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역사라면?”

 

“이를테면 6.25를 생각해 봐. 중국에게는 북한이 대만을 포기하고 지켜야 할 정도로 중요했다고. 사실 6.25가 그 때 일어난 것도 중국하고 무관하지 않지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당시 중국공산당으로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전혀 달가운 일이 아니었지. 모택동은 계속 반대했어. 전쟁 발발을 막으려 했다구. 중국 본토를 장악한 직후였으니까, 사실 당연한 일이지.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 거라고도 할 수 있어. 6.25가 1950년에 일어난 건 중국공산당이 1949년에 본토를 통일했기 때문이라는 말이지.”

 

“허, 그거 말이 돼?”

 

“소련이나 미국 입장에서 보면 그럴 만하잖아. 소련도 불안한 면이 있었다구. 바로 턱 밑에 중공이라는 대국이 형성되었으니 말이야. 스탈린은 중국과 붙어 있는 한반도에서 변화를 꾀할 만 했을 거야. 그래서 스탈린은 김일성을 부추겼지만, 전쟁에 직접 개입은 하지 않았지. 미국과 맞부딪히는 게 싫기도 했겠지만 북한이 미국에 넘어갔을 때 위험한 건 소련보다는 중국이었으니까. 중국으로선 결국 대만을 목표로 배치했던 군대를 돌려서 압록강 너머로 투입할 수밖에 없었어. 이 결정을 둘러싸고 중국 공산당에선 며칠간 격론이 벌어졌지. 그러나 다른 선택은 어려웠을 거야. 북한을 내준다면 대만인들 쉽겠어?”

 

“하긴… 소련과 중국은 그 이후에도 계속 삐꺽거렸지. 그러고 보면 이념이라는 게 참 무색한 면이 있어.”

 

“지금은 또 러시아랑 군사훈련을 하잖아. 러시아 군함이 중국을 들락거리고. 미국에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북한도 다른 길이 없으니 중국에 붙는 거지. 그러니 김정일도 죽기 전에 중국을 조심하라는 말을 남겼고…”

 

“그랬나?”

 

“그랬지. 뭐,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잖아.”

 

“음…그런데 말이야, 세상엔 왜 큰 나라가 있고 또 작은 나라가 있는 걸까?”

 

“뭐?”

 

“이상하지 않아? 세상엔 200개 넘는 국가가 있는데, 그 가운데 큰 나라는 몇 개 안 된다구. 왜 어떤 나라는 크고 어떤 나라는 작냐 이 말이야.”

 

“허, 그건 세상엔 왜 호랑이도 있고 고양이도 있느냐랑 비슷한 문제 아냐? 그런 건 구보 너처럼 태평한 철학자들이나 따져볼 문제 같은데…”

 

“아냐, 이거 중요한 문제라구. 역사적으로 봐도 말이지, 중국이라고 항상 큰 나라였던 것은 아니잖아. 그리고 큰 나라도 항상 그 시초는 작은 데서부터 출발하거든. 주변을 정복하거나 병합하거나 해서 일단 큰 나라가 생겨나면 주변 나라들은 먹히거나 피해를 보거나 최소한 눈치를 봐야 한다는 거야…그런데 국가는 또 한없이 커질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커지는 데는 한계가 있어. 그렇다면 도대체 국가의 규모는 어떻게 정해지는 거지?”

 

“….”

 

C는 심드렁했다. 뭐, 그런 뻔한 것을 묻느냐는 표정이다. 하긴 이런 일이 새삼스러울 건 없다. 요즘 들어 구보씨가 늘상 당하는 일이니까.

 

“내 말은 왜 국가가 그렇게 커야 하느냐는 거야. 그 국가의 크기가 기여하는 바는 뭐지? 다른 국가를 제압하고 통제하고 이용하고 착취하기 위해서? 근데 그게 누구한테 좋지? 큰 나라의 일부가 되느니 독립하겠다는 지역들도 많잖아. 세상에는 그래서 수백 개나 되는 나라가 있는 거고. 큰 게 좋다면 이들은 왜 서로 합치질 않는 거야?”

 

“쯧… 구보야, 국가에는 정해진 크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익이 되는 한 팽창하려는 경향이 있는 거겠지. 또 그 팽창은 최소한의 동질성이 확보되는 한, 유지되는 거고. 그것이 강제에 의해서든 이익의 분배에 의해서든 말이야. 그러니까 큰 규모의 국가는 그 규모의 힘을 이용해 외부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한 계속 팽창을 시도할 수 있겠지. 그게 바로 제국(帝國)의 형태일 테고. 하지만 그 팽창의 이익이 임계점에 도달하면?그게 외부의 저항에 의해서건, 내부의 동질성 유지 비용에 의해서건? 팽창을 멈출 수밖에 없지 않겠어?”

 

“그건 대답이 안 돼. 그렇담 무수한 작은 나라들은 뭐야? 걔들도 팽창을 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어서 못하고 있다는 거야?”

 

“그렇지 않을까. 당장 우리도 봐. 천오백년 전 고구려 이야기가 아직까지 매력적인 이유가 뭐겠어?”

 

“그러니까 네 말은 모든 국가가 서로 팽창하려 하는데, 그게 다 자기중심적인 팽창이라서 서로가 외적인 제약 조건이 된다는 거겠네. 그렇담,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 그래서 침략의 이득이 그로 인한 위험부담이나 손해보다 커지면, 언제든 제국주의적 팽창은 일어난다는 거잖아.”

 

“에이, 꼭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지. 옛날엔 그랬을지 몰라도 오늘날엔 국제 질서가 명시적으론 그런 걸 허용하지 않으니깐. 하지만, 실질적으론 그런 면이 있잖아.”

 

“그건 결국 큰 게 좋다는 얘기네.”

 

“글쎄, 아무래도 규모가 힘이니까… 이를테면 미국은 그 덩치에서 나오는 힘으로 세계 곳곳의 자원과 요로(要路)를 장악하고 패권을 유지해서 굉장한 이익을 보고 있잖아. 적어도 그 이익의 일부는 자국의 동질성을 유지하는 데 쓰인다구. 그런데 만일 그러지 못한다고 생각해 봐. 그러면 이제 군사력은 부담으로 작용하기 시작할 테고, 조만간 미국은 그 규모를 유지하기 힘들어질 거야. 다민족이지만 독특하게 유지해왔던 미국적 애국심도 훼손될 테고. 그런 사태가 계속되면 미국이라는 나라도 쪼글어 들게 되겠지.”

 

“그 말도 결국 유지할 수 있는 한 큰 게 좋다는 얘기고…”

 

“허, 뭐, 꼭 그렇게 표현하고 싶다면야…그럼, 구보 넌 큰 게 나쁘다는 거야?”

 

“반드시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부담스럽다는 거지. 적어도 우리는 크지도 않고 또 충분히 크기도 어렵잖아. 그런 처지에서 크기에 집착하다간 자칫 사대(事大)에 빠질 위험이 있다구.”

 

“사대? 사대주의 말이야?”

 

“그래. 난 중국을 생각할라치면 맹자 양혜왕(梁惠王)편의 한 구절이 자꾸 떠올라. 지혜롭다는 것은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기는 것이다(惟智者 爲能以小事大),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기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以小事大者 畏天者)… 중국엔 옛부터 사대를 조장하는 이데올로기가 준비되어 있었다구.”

 

“구보야, 나도 중국의 영향이 걱정되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하는 건 좀 오버센스 같은데…”

 

“글쎄 말이야, 내 생각에도 내가 좀 과민한 것 같긴 해. 얼마 전엔 <카운트다운>이라는 영화를 보면서도 사대주의 생각을 했다니까.”

 

“카운트다운?”

 

“그래, 거기선 전도연이 사기꾼 여자로 나오거든. 이 여자가 술집에 앉아서 미리 찍어둔 남자를 꼬시는 거야. 술 한 잔 같이 하자고 나름 교태를 부리고 나선 이렇게 묻지. 당신 건 큰 편이에요? 난 좀 큰 게 좋아요.”
▲영화 《카운트 다운》중에서
“허허…”

 

“근데, 이 남자 당황해하면서 말하는 거야. 네, 동양인치고는 큰 편입니다.”

 

“쩝…”

 

“그 친군 그래서 결국 신세 조진다구. 사대주의의 슬픈 종말인 셈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