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씨 여름을 즐기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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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씨 여름을 즐기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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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씨는 바다를 좋아한다. 산이 싫다는 건 아니지만 바다가 더 좋다. 흐르는 강물도 괜찮지만 철썩이는 바다가 더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그 느낌이 시원하지 않은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폐포(肺胞)가 씻기는 듯, 답답한 기분이 잦아든다. 바다는 언제나 하늘을 비추고 그 하늘을 눌러 담은 빛으로 출렁인다. 바다의 색깔은 하늘보다 더 짙고 다양하다. 하늘 아래 세간의 기운마저 비추어 담기 때문일까.

밤바다도 매력적이다. 때로, 달빛을 받아 일렁이는 바다와 마주해 있노라면, 세상의 온갖 걱정들이 다 그 물결에 반사되고 부서지는 것 같다.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한 친구는 바다에서 수영하는 참 맛을 알려면 밤바다에 들어가 봐야 한다고 했다.

“우주가 온 몸을 휘감는다는 느낌이 들 거야.”

정말 그랬다. 구보씨는 어둠의 촉감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어둠이란 어떤 결여가 아니라 빛으로 희석되기 전 세상의 본 모습이 아닐까. 바닷물의 감촉과 사위의 어둠이 한꺼번에 다가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긴 별빛의 존재감마저 유별났다. 공기 중에 산란되는 대낮의 빛이 증폭된 음향과 닮았다면, 어둠 속의 별빛은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아련한 노랫가락 같았다. 밤바다의 출렁임 가운데 머리만 내놓고 잠시 떠있을 때면, 껴안는 듯한 막막함이 두려움이나 충만함에 앞서 와 닿았다.

비 오는 날 바다에 들어가는 것도 색다른 맛이 있다. 떨어지는 빗방울은 곧장 바다의 일부가 된다. 하늘과 빗줄기로 이어지는 바다 가운데서 작은 점처럼 고개를 들면 얼굴에 부딪히는 빗방울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는 표현은 원래 헤밍웨이의 것이라고 했던가. 바다 위에 내리는 빗방울들은 한껏 입을 벌려 담아내고 싶은 아득한 곳의 인삿장 같다.

출처: http://bluei333.egloos.com

금년에도 구보씨는 자주 바다를 찾았다. 그러나 한적한 바닷가에서 밤수영을 즐기거나 빗줄기로 샤워를 대신하는 호사를 누리지는 못했다. 대신, 해수욕장의 번잡함을 피해 아침을 이용하곤 했다. 남들이 헬스장을 향하는 이른 시간에 바다에 몸을 담구는 것이다. 아침나절이면 바닷가 인근의 주차장도 한산하다. 한 시간 정도 호젓하게 바다를 즐기다가 젖은 몸을 수건 한 장으로 대충 닦고 목욕탕으로 향하면 그만이다.

“그럴 바에야 헬스장이 낫지 않아? 그 시간대에는 비키니 입은 여자애들도 없을 거 아냐?”

구보씨가 간단히 해수욕 하는 비법(!)을 알려주자 제법 명민한 척하는 동료 하나가 한 쪽 입 꼬리를 치켜 올리며 하는 말이다. 글쎄, 그렇긴 하다. 하지만 구보씨는 요새 ‘비키니’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헬스장의 손바닥만 한 수영장에 가고 싶은 마음도 안 든다. 갇혀 있는 느낌이 들어서다. 바다에 들어가는 것에는 수영을 한다는 의미만 있지 않다. 그것은 일종의 즐김이기도 한 까닭이다.

즐기는 것은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것과는 다르다. 도구는 목적에 의해 갇혀 있기 마련이어서, 도구적 이용에는 즐김이 없거나 있다 해도 억압되기 십상이다. 건강을 위해, 또는 몸매를 만들기 위해 수영을 한다면, 거기서 우세한 것은 목적성이지 즐김이 아니다. 목적에는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규제와 한정이 따른다. 반면에 즐김에는 놂이, 놀이가 있다. 여기엔 정해진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움이 수반된다. 사실, 즐김의 즐거움이란 이런 벗어남 때문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벗어남 자체가 즐거움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급한 오해다. 물론 그렇게 볼 만한 여지가 있긴 하다. 억압에 대한 탈출과 해방이 쾌감을 주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쾌감과 즐거움 또는 즐김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즐거움은 단순한 쾌감과 달리 주관 내부의 즉물적 유착에서 벗어나 객관으로 한 발 더 다가간 폭넓은 느낌이다. 더구나 즐김은 느낌에 국한되는 않는 행위의 사태다. 그리고 즐거움은 즐기는 행위에서 온다.

즐김과 즐거움의 중요한 특징은 그것과 관련된 대상이나 사태가 어떤 의도나 목적으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산과 바다를 즐기고, 청명한 날씨를 즐기며, 친구와 교제를 즐기고, 삶 자체를 즐긴다. 이 가운데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는가? 즐김의 한쪽은 우리가 붙잡고 있지만, 다른 한 쪽은, 더 넓고 더 멀리 뻗쳐 있는 다른 한쪽은 우리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다. 그런 탓에 즐김은 항상적이지 않고, 그런 까닭에 즐김은 비로소 즐거울 수 있는 것이다.

즐김은 양면적이다. 바다를 생각해 보자. 바다를 바라보거나 바다에 몸을 담금으로써 우리는 바다를 즐긴다. 그러나 언제나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다는 풍랑에 사나워지기도 하고 엄청난 크기로 우리를 위협하기도 한다. 바다가 우리를 감싸고 우리에게 스스로를 열어주는 때는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우리는 기껏 여름 한 철 동안 바다에, 그것도 해변의 한 귀퉁이에 다가갈 수 있을 따름이다. 바다를 즐길 수 있을 경우는 바다 자체의 존재에 비해, 그 넓이에 비해 너무나도 좁다. 바다가 우리와 어울린다고 느껴지는 때, 그리고 바다의 가없음이 그 어울림과 잠시 이어져 있을 때, 그래서 바다가 우리에게 즐김을 허용할 때, 우리는 바다를 즐긴다. 이런 것이 즐김의 특성이다. 즐거움은 이 즐김에 수반되며 또 우리를 이 즐김으로 인도한다. 즐거움은 즐김으로 난 길에 기꺼움으로 쓰인 표식이다.

요즘 프랑스 철학 용어로 자주 거론되는 주이쌍스(jouissance)는 이 즐거움에 대한 이름이라 보아 좋다. 주이쌍스는 우리가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쾌락이 아니다.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주이쌍스는 일단 성적(性的) 향락(享樂)이라는 뜻으로 새겨지지만, 이 향락이야말로 제어되지 않는 심연에 닿아 있지 않은가. 거기서 열리는 틈바구니는 우리에게 정체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 실재(實在)로 이어진다. 향락을, 주이쌍스를 우리는 소유할 수 없다.

즐거움이란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즐거움이 비롯하는 즐김이 우리보다 큰 터전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즐김과 함께할 수 있을 뿐이다.

“즐… 구보야, 넌 어쩜 끝까지 그 모양이니? 난 도무지 네 말이 이해가 안 돼. 즐기는 거야 그냥 즐기면 되는 거지, 너처럼 이상하게 꼬아 생각해서야 어떻게 즐거울 수가 있겠어? 내 눈엔 네가 제대로 즐길 줄을 모르니까 괜한 얘길 늘어놓는 걸루 밖엔 안 보여.”

“허, Y야, 무슨 소리야. 넌 아까도 내가 바다에서 노는 걸 봤잖아. 즐길 줄 모른다는 건 정말 나하곤 거리가 먼 얘기라구.”

“피, 그게 뭐 노는 거고 즐기는 거야. 아침나절에 잠깐 바닷가에서 어슬렁거려 놓고…”

“어어, Y 너도 그때 기분 좋다고 했잖아? 그렇게 날이 더워지기 전에 바람 쏘이는 게 따가운 여름을 현명하게 즐기는 길이라구. 공자님이 봤으면 증점(曾點)의 지혜라고 칭찬했을 거야.”

“누구? 증점?”

“그래, 봄날에 사람들이랑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바람 쐬고 시 읊으며 돌아오고 싶다던…”

“관 둬, 됐거든. 철학자라고 다 너처럼 고리타분하진 않을 텐데, 참 걱정이다, 얘.”

“아니, 이거 고리타분한 거 아니야. 즐기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구. 오늘날이라고 해서 편리함 속에 모든 걸 가둘 순 없거든. 그리고 즐긴다는 건 그렇게 가두어진 틀 밖으로 나가야 가능한 거야. 어려움과 위험의 틈새에 놓인 안락함과 여유로움이 아니라면, 즐김의 진짜 매력은 사라져 버리는 거지. 그러니까 즐김은 모든 문제의 해결이 아니야. 쾌락의 충만은 더더욱 아니고 말이지. 증점이나 공자가 즐김을 어떤 유토피아적 상태에서 찾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구. 실제로 공자와 증점은 다른 제자들이 자리를 뜨고 나자 그 제자들이 논의했던 정치 얘기를 계속하거든. 즐김은 어디까지나 세상 가운데에, 또 세상의 틈새에 놓이는 거야.”

“구보야, 즐긴다는 건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곳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거 아닐까. 그거면 충분한 거지, 너처럼 괜한 토를 달기 시작하면 즐겁던 일도 정나미가 떨어질 것 같애.”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근데, 좋아하는 것과 즐기는 것은 똑같은 게 아니거든. 다시 공자 얘길 해서 안 됐지만, 공자도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과 같지 않다(好之者 不如樂之者)고 하잖아. 즐긴다는 건 좋아한다는 것보다 더 이루기 어려운 어떤 걸 거야. 좋아한다고 해서 다 즐길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이지. 즐긴다는 건, 뭐랄까, 내가 아닌 어떤 흐름 속에 있어야 하는 거라구. 거기에 더불어 있는 것, 그러나 소유하거나 지배하지 않는 방식으로 있는 것, 이를테면 어떤 흐름을 타고 같이 흘러야 하는 거야. 그건 마치 파도타기와도 같지. 파도를 즐길 때 우리는 파도를 거스르는 것도 파도에 완전히 파묻히는 것도 아니야. 파도와 함께 하는 것이긴 하지만.”

“구보야, 나 파도타기 안 좋아해. 안 좋아하는 건 즐길 수 없는 거 아냐?”

“그야 그렇겠지. 하지만 거기엔 묘한 면이 있어. 가령 산을 타는 사람들을 생각해 봐. 이 한 여름에도 아찔하게 높은 히말라야같이 험준한 설산(雪山)을 오르는 사람들. 그들이 산을 좋아하는 건 사실일 거야. 그러나 그건 단순한 좋음일까? 거기에는 좋음 말고도 두려움과 불안과 기대와 동경 같은 것들, 몇 마디로 줄여 말하기 어려운 것들이 들어 있어. 하지만 그 사람들은 그걸 즐기는 것이 아닐까. 달리 말하면, 그렇게 펼쳐지는 즐김의 장에 뛰어드는 것 아닐까.”

“에구, 구보야. 난 히말라야에 오를 생각 없어. 난 그딴 거 안 좋아한다구.”

“쩝… 그럼, 이렇게 생각해 봐. 나는 어때? Y야, 너는 이 구보를 좋아만 하는 건 아니지? 차라리 넌 이 구보와의 관계를 즐긴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관계가 우리 두 사람의 뜻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 우리는 각자 이 관계의 한 쪽 끝을 쥐고 있을 뿐이야. 그 끝을 잡고 때로는 이렇게 때로는 저렇게 흔들리는 관계의 물결을 타고 가는 것이지. 거기에는 때로 열락(悅樂)도 깃들고 회한(悔恨)도 깃들지만, 그것 자체로 우리는 이 관계를, 이 삶을 즐긴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구보야, 착각하지 마. 뭐? 열락? 회한? 미안하지만 구보야, 넌 지루함 자체라구. 거기에 즐길 게 어딨니?”

“엥? 그럼, 왜 여지껏 날 계속 만나는데?”

“그거야…네가 그래도 한철연 회원이니까 그렇지. 그걸 여태 몰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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