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씨, 잠에서 깨어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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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씨, 잠에서 깨어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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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긴 잠이었다. 구보씨는 창문을 열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다.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크게 하품을 하는 구보씨의 쩍 벌어진 입에도 비춰든다. 아직 졸음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듯 눈을 연신 비벼대는 구보씨, 그 부스스한 모습이 꼭 겨울잠이라도 자고 일어난 짐승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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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란 참 좋은 거야, 하고 구보씨는 생각한다. 잠은 일종의 축복이지, 잠이 아니고서야 우리가 어떻게 거듭 새로워질 수 있겠어. 구보씨는 마사지하듯 양손으로 얼굴을 부비다가 다시 눈을 끔벅거려 본다. 세상이 맑고 투명하다. 언제 이렇게 환해졌을까. 저 멀리 신록의 산등성이가 뿜어내는 청량함이 피부와 와 닿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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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얼마나 잤지? 영 분명치가 않다. 거푸 퍼마신 술 탓일까. 한 동안 멍한 기분으로 끼적끼적 살아서일까. 그러나 어떻든 세월은 흐른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니 뭐니 하더니 계절은 이미 봄을 훌쩍 타넘고 있지 않은가. 한참을 자고 깨니, 어두운 긴 터널을 빠져나온 것 같은 기분이다. 겨울잠을 자고 난 곰처럼, 구보씨는 뻐근한 팔다리와 몸뚱이를 이리저리 흔들고 비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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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은 우리를 순수하게 만든다. 꼬인 몸과 마음의 타래들을 풀어 원상태에 가깝게 돌려놓는다. 서로 얽혀 랙이 걸릴 지경인 프로그램들을 리세팅해주는 격이라고나 할까. 일반적으로 잠은 휴식이고 복구며, 재정비고 새로운 준비다. 활동의 감소와 위축처럼 보이는 잠의 비활성 상태는 깨어 있는 분주함 못지않게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아이들은 잠 잘 때 크고, 미인은 잠잘 때 예뻐진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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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겨울잠은 좀 다르다. 거기엔 일종의 마비가 수반되는 까닭이다. 하기야 모든 잠이 얼마간 그렇긴 하다. 보통 우리는 꿈을 꾸는 수면 상태(REM 수면)에서 근육의 긴장을 놓아버린다. 하지만 겨울잠의 경우는 긴장 이완이 그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흔들어도 쉽게 깨어나지 못할 정도로 활동이 정지되고 체온도 떨어진다. 동물들은 겨울잠을 자면서 꿈을 꿀까? 아마 아닐 것이다. 냉동 인간이 꿈을 꿀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가시에 찔려 잠든 숲속의 공주가 그 잠든 백 년 동안 꿈을 꾸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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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팻걸’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까뜨린느 브레야 감독의 영화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서는 가시에 찔린 공주가 잠든 사이에 나이도 먹고 꿈도 꾼다. 브레야는 잠이 마비 상태라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브레야의 공주는 그 꿈 속에서 평생의 연인을 만나고, 그 기억을 지닌 채 꿈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온다. 이 여성에게는 마비와 멈춤의 시간은 없다. 잠자기 전과 잠이 깬 후, 꿈꾸기 전과 꿈꾸고 난 후는 다르다. 그녀는 순진한 채로 머물러 있지 않다. 그래서 그녀는 깨어나 당당히 행동하고 남자 친구에게 당당히 이렇게 말한다. “난 혼자서 네 세계 속으로 들어갔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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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야는 긴 잠의 설정이 함축하는 정지와 수동성을 받아들일 수 없었나 보다. 어쩌면 거기서 남성 지배의 사회가 설정한 순결과 정조의 이미지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일찍이 이링 페쳐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잠이 순결을 강요하는 상징이라고 해석하지 않았는가. 모름지기 젊은 계집은 정숙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잠은 그 기다림의 강제된 형태다. 그것은 물레 막대기의 뾰족함을 경계하지 못한 데 대한 벌이다. 방종의 유혹이 널린 현실을 함부로 돌아다닌 죄는 마비의 잠으로 가려지고 치장되어야 한다. 백 년 동안의 잠은 순결을 회복하고 보증하는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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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종류의 잠은 현실에 대한 외면이고 도피이면서 또한 현실의 강압에 대한 순응이기도 하다. 자고 있는 동안에도 세상은 굴러간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서는 궁전의 요리사가 요리하던 생선까지도 마법에 의해 잠에 빠지지만, 이렇게 잠든 환경은 잠자는 공주의 부속물일 뿐 시간 속 세상이 아니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으로부터 눈을 돌린 채 긴 잠에 빠진 공주는 과연 평화로울까? 그것은 마비의 평화로움, 마비의 순결함일 뿐이다. 더구나 그것은 과연 그녀를 위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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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의 여성 감독 줄리아 리의 영화 ‘슬리핑 뷰티’는 이런 질문에 노골적으로 답한다. 돈이 아쉬운 미모의 대학생 루시는 마비되듯 잠든 채로 발가벗겨져 하얀 침대에 누워 있고 돈과 지위로는 아쉬울 것이 없는 노인네들이 차례로 그녀를 탐한다. 그러나 ‘삽입’은 금지다. 순결함이야말로 이들이 바라는 것이므로. 루시는 자신의 자궁을 결코 성소(聖所)라고 여기지 않지만, 그들은 그것을 원한다. 수동적이고 하얀 몸뚱이의 순수를. 약을 먹고 잠들었다 깬 루시는 자신이 잠자고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모른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계속 순수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더욱 더 더럽혀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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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우에 잠은 그 약점을 훤히 드러낸다. 이 잠에서 나는 세상과 교호적이지 않은 관계를 맺는다. 나는 세상을 무시하고 세상은 나를 유린한다. 나는 그 유린을 묵과하고 망각함으로써 세상에 아부한다. 때로 우리의 잠은 이렇게 비루하다. 거기에 비하면 동물의 겨울잠은 얼마나 안온한 축복인가. 매서운 겨울 날씨는 동굴에 웅크려 잠자는 짐승의 몸뚱이를 유린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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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떻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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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말이야? 겨울잠 자던 곰? 아니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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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루시 말이야. 영화 ‘슬리핑 뷰티’의 루시라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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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다. 그녀도 일어났다. 그녀는 부스스하지 않고 얌체 같이 예쁘다. 언제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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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너라면 어떻게 하겠니? 막상 돈을 몇 번 손에 쥐고 나자 잠잘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가 궁금한 거야. 그래서 침대에 눕기 전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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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결국 알게 됐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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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렇게 영화가 진행되면 시시하지 않겠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고서는 마비된 순수를 파는 일을 그만둔다? 아니면 분노에 차서 복수를 한다? 이거 다 너무 통속적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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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 더럽고 못된 노인네들을 혼내 주는 게 괜찮을 것 같은데. 폭로해서 몰락시킨다든지 아니면 짤 라버린다든지 해서 말이야. 난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걸 생각만 해도 오싹해. 검사들 접대 사건만 해도 그렇잖아, 그 개새끼들… 그래도 정신 못 차리고 윤창중이 같은 기가 막힌 일도 생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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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Y야, 잘 자고 나서 왜 그래? 아무튼 이 영화에선 그런 식으로 처리하진 않아. 줄리아 리라는 감독이 시나리오도 썼는데, 그 여잔 루시를 유린하는 현실 자체의 공허함이나 균열을 드러내려 하지. 싸움으로 몰고 간다면 그 노인네들, 그러니까 지배 계층의 패배를 보여준다 하더라도 환상적 만족에 그치지 않겠어? 아니면 그저 그런 고발 영화가 되고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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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 리? 그 사람 한국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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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Leigh라고 쓰는데, 호주 여자야. 소설도 쓰는 작가고. 그런데 이 영화 원작은 가와바타 야스나리 소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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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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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설국]의 그 가와바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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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그 사람 소설에 [잠자는 미녀]라고 있거든. 1960년에 발표한 거니까 줄리아 리의 영화보다 50년 전이지. 거기서도 잠재워 놓은 젊은 처자를 탐하는 노인이 나와. 영화의 기본 얼개는 이 소설에서 따왔다고 봐야지. 하지만 세부 내용이나 분위기는 꽤 달라. 무엇보다 가와바타의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에구찌(江口)라는 노인네거든. 이 노인네가 수면제를 먹여 잠재운 여자랑 동침할 수 있게 해주는 유곽을 찾아가서 겪는 이야기를 그린 거야. 여러 번에 걸쳐 이 여자 저 여자랑 같이 자면서 이 생각 저 생각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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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이 생각 저 생각이야, 이런 지랄 저런 지랄이지. 드런 놈들, 구역질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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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왜 나한테 그래? 가와바타 소설이 남성 중심적인 건 분명하지만, 그래도 나름의 섬세함이 있잖아… 아무튼 그래서 영화에선 여자를 주인공으로 놓는 거 아닐까. 루시라는 여자가 겪는 이야기가 중심이 되거든. 하긴 영화에서도 에구찌 비슷한 노인네가 나오긴 해. 공허해하고 우울해하며 삶에 그다지 애착을 갖지 못하는 노인네… 이 노인네는 결국 잠든 루시 옆에서 약을 먹고 죽지. 가와바타 소설에서는 옆에서 자던 여자가 죽거든. 나는 이게 현실의 공허와 균열을 나타내려는 장치라고 봐. 루시를 유린하는 현실은 실상 노쇠한 무의미의 현실, ‘뼈가 부러진’ 현실이야. 그 현실은 이제 절망하여 스스로 무너지지. 그렇지만 루시처럼 마비 상태로 잠들어 있으면 깨어나서는 소스라치며 놀라 소리 지르게 돼. 이건 잠의 부정적 이미지야. 망각과 아부의 잠, 그건 결국 죽음과 동침하는 잠이고 죽음과도 같은 잠이지. 루시의 카메라에 찍힌 잠의 모습처럼. 그게 싫으면 깨어 있어야 하는 거야. 불면(不眠)의 주의력으로 눈을 똑바로 뜨고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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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아까는 잠이 축복이라고 하지 않았어? 횡설수설하는 것을 보니 아직 잠이 덜 깬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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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참, Y야, 그러니까 잠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거야. 꿈꾸는 잠과 마비의 잠. 회복과 갱신을 위해서는 잠을 자되 넋을 놓고 있지는 말아야 하는 거라구. 꿈도 없는 깊은 잠은 꿈꾸는 잠과 결합되어 있을 때만, 또 야경(夜警)의 매서운 눈초리와 결합되어 있을 때만 의미가 있는 거야. 그래서 우리는 겨울잠을 잘 수 없는 거지. 우리네 삶에는 겨울을 피해갈 수 있는 안온한 동굴이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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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구보야, 내가 볼 때 나쁜 잠과 좋은 잠을 가르는 특징은 딴 데 있어. 그렇게 잠꼬대처럼 복잡하지 않고 아주 단순한 거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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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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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골지 않는 거. 구보야, 내가 왜 이런 말 하는지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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