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씨, 동물을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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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씨, 동물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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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성 원(부산대 교수)

 

굳이 개냐 고양이냐를 따지자면 구보씨는 개 쪽이기보다는 고양이 쪽이다. 생긴 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성격이 그렇다는 말이다. 요즘은 아파트처럼 밀폐된 공간에서도 개나 고양이를 키우는 집이 늘었는데, 개는 하루만 혼자 두어도 곤란하지만 고양이의 경우는 혼자서도 며칠 정도는 잘 견딘다고 한다. 구보씨도 그렇다. 소란스럽고 번잡한 것보다는 차라리 홀로 있는 게 낫다고 여긴다. 아마 철학자라면 대부분이 그렇지 않을까. 개를 닮은 철학자라고 하면 영 이상하지만, 고양이를 닮은 철학자라고 하면 어째 그림이 그려질 법도 하지 않은가.

하긴 때로 세상엔 개 같은 철학자가 없진 않았다.
(내용이 대단치는 않지만, 이런 책도 있다.)고대(古代) 그리스의 유명한 견유학파(犬儒學派), 곧 키니코스학파가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그때의 ‘개 같음’은 개떼처럼 몰려다니면서 욕망의 대상을 약탈하거나 구걸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는 시끄럽게 짖어대고 꼬리를 흔들어대며 위계에 따른 협박과 아부의 몸짓을 과시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반대로, 견유학파의 ‘개 같음’은 온갖 누추함을 마다않고 인위의 번쇄(煩?)를 갈가리 찢어버리는 자유로움에 있었다. 그러니까 견유학파에서조차 사교성은 철학자의 특성이 아니었던 셈이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세속의 그 무엇에도 굽히지 않는 자존과 고독의 품위가 있었다. 그것은 개보다는 오히려 고양이 족속들에 더 어울리지 않는가.

그렇다고 구보씨가 호랑이나 사자를 닮았다는 것은 아니다. 표범이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살쾡이라면 또 모르겠다.

“얘 좀 봐, 여전히 웃겨. 너처럼 배나온 살쾡이가 어디 있니?”
(견유학파의 디오게네스)이크, Y다. 드디어 그녀가 돌아왔다. 오랜 여행 탓인지 약간 야위고 피부가 그을린 게 야생성이 더 강해진 모습이다. Y야말로 살쾡이 같다.

“글쿠 말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하지, 애꿎은 짐승들은 왜 끌어들이니? 니들 철학자들이 언제 동물들을 제대로 대접해 준 적이 있기나 하니?”

아니, 그건 오해다. 철학자들도 나름으로 동물에 민감하다. 당장 니체와 말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는가.

1889년 토리노. 니체는 마부의 채찍질에도 꿈쩍 않는 말에게 달려가 목에 팔을 감으며 흐느낀다. 그 후 니체는 ‘어머니 저는 바보였어요’라는 마지막 말을 웅얼거리고, 10년간 식물인간에 가까운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다.

영화 ?토리노의 말?은 이런 내용의 해설자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토리노의 말? 중 한 장면)이 영화는 헝가리의 세계적인 영화감독 벨라 타르가 작년에 내놓은 작품이다. (그는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이제 영화는 그만 만들겠다고 하더니, 이번 부산 국제영화제에서는 뉴커런츠 분야 심사위원장을 맡았다.) 니체는 말에게 동정(同情)과 공감(共感)을 표시했고, 벨라 타르는 이 공감을 모티브로 삼아, 요즘 유럽에서 다시 유행을 맞은 종말론적 분위기를 인상적인 흑백 화면과 강렬한 폭풍의 음향 속에 담아냈다.

니체가 말의 목을 껴안았다는 1889년은 히틀러가 태어난 해다.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도 그 해에 태어났다. 1989년에는 동구의 사회주의가 몰락한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동물이 철학자에게 공감하는 일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철학자가 동물에게 공감을 보이는 일은 확실히 있다. 벨라 타르는 여기에 주목한다. 강한 공감은 위기에서 비롯하고, 거꾸로 강한 공감의 표현이 위기의 분위기를 고조시키기도 한다. 근본적인 위기와 동물적인 공감, 꽤 그럴싸한 연결이 아닌가.
(벨라 타르)종말이 근본적인 종말이면 인간과 동물에 너나가 있을 수 없다. 반면에 ?혹성탈출? 식의 종말이라면 그것은 인간 지배의 종말일 따름이다. 그런 종류의 위기에서는 오히려 동물과 인간의 구별이 더 두드러진다. 공감이라고 해 봐야 그건 인간 위주의 공감이어서, 인간과 닮은 원숭이가, 곧 인간의 편인 원숭이와 인간의 적인 원숭이가 문제될 뿐이다. 위기의 심각성에 따라 공감의 양상과 범위가 달라진다는 얘기다.

역시 종말론적 분위기에 편승해 요즘도 자주 언급되는 칼 슈미트에 의하면, 누가 동지인지는 누가 적인지에 따라 정해진다. 무엇이 우리랑 같은 부류인지는 무엇이 우리를 위협하는지에 따라 정해진다. 적어도 사회적 반향이 있는 공감의 폭과 경계는 이런 적대와 위험에 따라 그 윤곽이 그려지는 법이다. 그런 까닭에, 동물이 공감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경우라 해도 보통은 인간적 감정의 연장일 뿐이다. “이 짐승만도 못한 놈!” 우리는 우리의 적에 대해 때로 이렇게 외친다. 그런가 하면, 우울하고 서글픈 기분으로 주저앉아 있을 때 개나 고양이가 옆에서 살랑거리면 우리는 거기서 위안을 받기도 한다. “그래, 니들이 인간보다 낫지…”

그러나 니체가 두들겨 맞는 말에 대해서 느꼈던 연민과 공감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껏 우리 주변에 미치기 마련인 친근성의 테두리를 넘어선다. 전에는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낯선 말을 위해 니체는 뛰어든다. 그전부터 말에 애착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니체가 말을 아끼던 애마(愛馬) 신사였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런데도 그는 말의 목을 껴안고 흐느낀다. 거기에는 비일상적(非日常的)인, 그러나 보편의 심장을 꿰는 울림이 있다.

벨라 타르가 이 보편성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영화의 흑백 화면과 어울리는 수도사적 꼿꼿함의 전통이 깔려 있다. 그것은 물론 서구의 전통이고 기독교적 전통이며 히브리적 전통이다. 아니, 니체가? 기독교의 신을 부인했던 바로 그 니체가 기독교의 전통과 연결된다고? 당근이고 말밥이다. 적어도 신이 살아있었음을 인정해야 그 신이 죽었다고 선언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니체 자신이 목사의 아들이었으며 기독교적 죄의식과 평생 싸움을 벌였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제 정말 니체의 신은 죽었는가? 글쎄… ?토리노의 말?은 무엇보다 유럽의 절망감을 드러내 보인다. 영화의 무대는 황량한 벌판의 외딴 집에 고정되어 있다. 영화의 중간에 등장한 집시들은 마부의 딸에게 미국으로 같이 가자고 꼬드긴다. 그들은 한바탕 소동을 피운 뒤에 물러가지만, 집시 노인네가 건네주고 간 책에는 성소(聖所)가 더럽혀졌으며 회개의 의식(儀式)이 필요하다고 쓰여 있다. 집시들이 퍼 마시고 떠난 우물은 말라버린다. 방종(放縱)한 약탈자인 미국은 아직 승리자로 군림해 있는데 꼿꼿한 품위의 유럽은 처연하게 종말을 맞이한다는 말인가?

벨라 타르보다 더 성가(聲價)가 있는 유럽의 영화감독 라스 폰 트리에 역시 작년에 종말론적 작품을 내놓았다. 그 영화 ?멜랑콜리아?에서는 아예 지구가 낯선 별에 부딪혀 박살나 버린다. 여기에도 동물로는 말이 등장한다. 종말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무력함을 함께 나누기에는 말만한 상대가 없기 때문일까. 그러나 이때에도 말은 인간의 세계를 그려내는 주변적 역할을 넘어서지 못한다.
(조르조 아감벤)동물을 종말론과 관련해 전면적이고도 주제적으로 다룬 이로는 『호모 사케르』로 유명해진 조르조 아감벤을 들 수 있다. 그의 책 『열린 것』(이태리어 원본은 2002에, 영어번역본은 2004년에 나왔고, 우리말로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은 ‘인간과 동물’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데, 보기에 따라선 니체 식 말목 껴안기의 연장으로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아감벤이 다루는 종말론은 ?토리노의 말?에 비해서도, ?멜랑콜리아?에 비해서도, 니체의 흐느낌에 비해서도 그 절실함이 덜하다. 그것은 아마 10년 전의 이탈리아가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에 패배한 것을 빼놓고는 심각한 위기나 절망에 부딪히지 않은 탓인지도 모른다.
조르조 아감벤, 『열린 것』워낙 서구의 전통에선 종말이 부정적인 것으로만 치부되지 않는다. 종말은 새로운 시작인 까닭이다. 부활과 구원이 종말이라는 사건과 함께 하지 않는가. 인간과 동물의 관계도 여기서는 새로워진다. 아감벤은 『구약』의 ?이사야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인용한다. “그때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고 송아지와 사자 새끼가 함께 먹으며 어린 아이들이 그것들을 돌볼 것이다.”(11장 6절) 종말에 이르면 인간과 동물은 전혀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다. 이제까지 인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던 동물성에 대한 차별과 비하가 사라진다. 말하자면, 완전한 ‘신’(新;神)세계에서 동물과 인간의 공감이 완성되는 것이다.

“구보야,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 횡설수설하더니 삼천포로, 아니, 영 엉뚱한 데로 빠지잖아. 동물 얘기하다가 종말이니 뭐니 하는 것도 이상한데, 이젠 아주 천당으로 올라가니? 내가 뭐랬니? 이것저것 괜히 주워섬기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라고 했지. 대체 하고 싶은 말이 있기나 한 거니? 그 동안 내가 없을 땐 어땠는지 정말 궁금하다, 얘.”

“어, Y야. 그래두 내 말에 맥락은 있는 거야. 철학자들이 근래에 동물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러니까 인간 중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접근하려고 하고 있는데, 그게 기본적으로 인간 삶과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에서 온다는 거지. 종말론이라는 게 다름 아닌 그런 근본적인 문제의식에서 비롯하는 거고 말이야. 물론 이런 생각들이 주로 서구적인 것이긴 하지만, 뭐, 오늘날의 주된 삶의 패턴이 서구적인 것이니까…”

“그런데 아감벤이 철학자 맞아? 역사학자 아냐?”

“뭐, 미학이나 문헌학적 작업에 익숙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철학자라고 해야겠지. 내가 말한 책에도 그림이나 옛 문헌에 대한 얘기가 다방면으로 많이 나오긴 해. 그러나 가장 중심적으로 다루는 건 하이데거의 인간관과 동물관이고 거기에 대한 비판이야. 그리곤 벤야민의 견해를 일종의 대안 비슷하게 제시하지.”

“너처럼 횡설수설한단 얘기야?”

“쯔.,. Y야, 내 말도 횡설수설 아니라니까…”

“그럼, 대답해 봐. 아까, 니체가 ‘어머니, 저는 바보였어요.’라고 말했다고 했지? 그게 무슨 뜻이야?”

“글쎄… 그건 아마 자신의 작업이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혔다는 뜻이 아닐까. 동물과 공감하는 차원까지 내려가서야 절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래서 니체의 그 말을 종말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거겠지. 종말론이라는 게 기존의 질서를 부분적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다 뒤집어야 된다는 것이니까 말이야.”

“그래? 그럼, 구보 넌 언제, ‘Y야, 난 바보였어. 그 동안 횡설수설했구나.’ 하고 말할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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