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씨 여전히 크기를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씨 여전히 크기를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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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성 원(부산대 교수)

 

세상에 글 잘 쓰는 이들이야 많고 많지만, 스티븐 제이 굴드는 그 가운데서도 구보씨가 몇 손가락에 꼽는 사람이다. 구보씨는 20여 년 전 [다윈 이후]라는 책을 처음 대했을 때의 감흥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책을 읽는다고 밤을 꼴딱 새운 것은 당시 구보씨가 젊고 팔팔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굴드는 유명한 고생물학자고 과학사가지만, 인문학적 소양도 누구 못지않다. 덕택에 그의 글에는 다른 데서는 찾기 힘든 종합적 미덕이 넘쳐난다. 수수께끼와 추론이, 그것을 뒷받침하는 데이터가, 날카로운 비판과 풍부한 유머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통념을 깨는 매력적인 통찰이 있다.

굴드가 괴팍하고 뻔뻔하고 심지어 야비하기조차 하다는 평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대중적인 과학적 글쓰기에서 어쩌면 굴드보다 더 잘 알려진 리차드 도킨스 진영과 오랫동안 각을 세우고 논쟁을 해온 탓이 클 것이다. 도킨스와 굴드는 동갑나기(1941년생)인데, 안타깝게도 굴드는 십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도킨스는 아직도 활동 중이다. 도킨스의 출세작인 [이기적 유전자](1976)가 나온 시기나 굴드가 [내추럴 히스토리]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에세이집 [다윈 이후](1977)를 펴낸 시기도 비슷하다. (굴드의 그런 에세이집은 이후 아홉 권이 더 나왔다.)

 

[이기적 유전자]도 정말 뛰어난 책이고 그 성가(聲價)는 아마 [다윈 이후]보다 앞설 것이다. 그렇지만 글의 멋이나 맛은 굴드가 낫다는 게 구보씨의 생각이다. 더구나 구보씨가 보기에는 진화론의 쟁점들에 관해서도 굴드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 대목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도킨스에 호의적인 최재천 같은 이들이 큰 활약을 하는 바람에 이 둘에 대한 평가가 치우치거나 기운 면이 있다. 다윈주의를 소개하고 전파하는 데 공로가 큰 최재천은 사회생물학의 창시자로 유명한 에드워드 윌슨의 제자다. 윌슨의

구보씨 거듭 크기를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씨 거듭 크기를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 성 원(부산대 교수)

 

구보씨는 아무거나 잘 먹는 편이지만 많이 먹진 않는다.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도 싫어하는 음식도 없다. 기왕이면 새로운 걸 맛보고 싶어 하지만, 지나치게 비싸거나 희귀한 건 쉽게 포기하거나 사양한다. 아무리 색달라 봤자 그게 먹을 거라면, 그저 한 입의 호사일 뿐이라고 생각해서다. 요리라는 게 이로 저작(詛嚼)되고 침과 섞여 목구멍으로 넘어가면 그걸로 제 임무는 끝나는 것 아닌가. 달갑게 넘길 수 있으면 그것으로 좋은 음식이다. 제깟 것이 맛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사실 우리가 유쾌하게 식사를 하는 데는 얼마나 맛있는 요리를 먹느냐보다 어떤 상황에서 누구랑 먹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요새 구보씨는 살이 찌나 보다. Y랑 밥을 먹는 일이 없어서다. Y는 입이 까다롭다. 나오는 말뿐 아니라 들어가는 음식도 여간 깐깐하지가 않다. 우선 식재료가 얼마나 신선한 것이냐를 따진다. 날 것을 잘 먹는데, 과일이나 야채 말고도 생선회나 심지어 육회까지 즐긴다. 젊은 날, 놀래켜 줄려고 산낙지를 사 줬다가 툭하면 그걸 먹으러 가자고 해서 곤욕을 치른 기억이 있다.

 

“구보야, 난 ‘이 징그러운 걸 어떻게 먹어요?’하고 내숭떠는 치들은 정말 밥맛이더라. 어떻게 먹긴? 요렇게 기름장 찍어 먹지.”

 

“그렇다손 쳐두 이런 걸 굳이 찾아다니면서 먹을 건 뭐누? 입 안에서도 꿈틀거리고 쩍쩍 달라붙는 걸 씹어 삼킨다는 건 아무래도 좀 야만적이라구.”

 

“야만적? 그건 엉터리 편견이야. 먹을 게 없어 썩은 고기나 먹고 그래서 후추나 찾던 애들이 더 야만적이지.”

 

“우리네 젓갈이나 김치도 일종의 썩은 건데? 치즈나 김치 같은 건 훌륭한 음식 문화라구. 어떻게 보면 끓이거나 구운 것보다 발효시킨 음식이 더 문화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어. 거기에는 시간이 개입하거든. 날 것은 직접적인 것이구 말이야.”

 

“그게 편견이고 단견이라는 거야. 신선한 먹을거리가 부족하니까 말리고 절이고 발효시켜 저장해서 먹은 거지, 이제 다시 신선하고 자연 그대로의 음식을 찾는 건 정말 자연스러운 일이라구. 너 좋아하는 헤겔 식으루 말하면 정(正)에서 반(反)을 거쳐 다시 합(合)으로 가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삶은 것두 먹구 삭힌 것두 먹구 이렇게 생생한 것두 먹잖니.”

 

“얼씨구, 그건 헤겔이 들으면 밥맛 떨어질 얘기구, 어떻든 이것저것 괜찮은 먹을거리가 많은 세상에서 굳이 꿈틀거리는 것까지 찾아 먹을 건 뭐냐는 거지.”

 

“맛있잖아.”

 

“글쎄, 맛이라는 게 거기서 거기 아닐까. 인간 혀의 미뢰(味?) 숫자는 아무리 많아야 만 개가 안 된다구. 느낄 수 있는 맛의 종류도 기껏 다섯 가지 정도고. 뭐, 냄새나 촉감도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내 생각엔 맛을 대단한 것처럼 내세우는 건, 더구나 그걸 예술이니 뭐니 해서 치켜세우는 건 일종의 사기가 아닐까 싶어.”

 

“구보야, 너 잠깐 혀 좀 내놔 봐.”

 

“아니, 또 왜?”

 

“잠깐이면 되니까 내밀어 봐.”

 

“체… 이렇게?”

 

“어디 봐. 어, 멀쩡하네? 그럼 넌 혀가 문제가 아니라 머리가 문젠가 보다. 맛을 느끼는 건 사실 혀가 아니라 머리거든. 넌 맛을 관장하는 뇌세포가 둔하거나 채 분화되지 않은 게 분명해. 말하자면, 머리가 나빠서 맛을 잘 모른다는 얘기지. 헤헤…”

 

천만에. 그건 오해다. 이래봬도 구보씨는 누구보다도 맛에 민감하다. 다만 그 민감함을 배타적으로 중시하지 않을 뿐이다. 그건 먹는다는 행위 자체에 대한 경계 때문일 수도 있다. 생각해 보라. 먹는 행위야말로 얼마나 파괴적이고 자기중심적인가. 먹는 일은 내가 아닌 것들을 부수고 찢어서 나의 일부로 재구성해내는 절차다. 말하자면 타자(他者)의 해체와 동일화가 먹는 행위의 목표다. 나의 해체가 아니라 타자의 해체, 타자로의 접근이 아니라 나로의 동일화가 관건인 것이다. 먹는다는 일은 동일화하는 자기의 고유한 행위다.
▲영화《올드보이》중 한 장면

먹는 과정을 생각해 보라. 거기엔 우선 우리 몸에서 가장 단단하고 파괴적인 부분인 이빨이 관계한다. 절단과 분쇄가 그 임무다. 하얀 이빨의 건치미(健齒美)는 그 기능의 원활한 수행이 유기체의 우월한 정상성을 보장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과시적 신호다. 이빨로 으깬 다음 우리는 그 음식물을 더욱 분해하기 위해 위장이라는 이름의 자루로 에워싼다. 언젠가 도올(??) 김용옥은 방송 강의에서 심오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뱃속의 음식물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인가 우리 밖에 있는 것인가? 각종 효소로 분해되어 걸죽해진 음식물, 그런 상태라도 흡수되기 전의 음식물은 내 몸에 갇혀 있는 것이지 진정 내 몸 속에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뱃속의 음식물은 아직 내가 아니다. 우리는 이 타자를 다 우리로 만들지도 않는다. 필요한 영양소는 흡수하는 한편, 쓸모없는 부분은 걸러내어 몸 주머니 바깥으로 버린다. 이른바 배설이다. 이 배설이 또 문제다. 오늘의 문명은 배설물이 선순환(善循環)하는 길을 막아버렸으므로, 먹는 일과 싸는 일의 관계는 먹히는 것과 먹는 자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끔찍하게 일방적이 되어버렸다. 평균적으로 인간은 평생 20톤 이상의 식량을 먹어치운다. 몸무게의 400배 정도다. 그러고도 자연에 자연스럽게 돌려주는 바는 거의 없다.

 

인간보다 많이 먹는 동물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몸무게 3톤의 코끼리는 하루 200킬로그램 이상의 먹이를 먹는다. 하지만 코끼리의 숫자는 전 세계적으로 100만이 안 되니, 70억의 인구에 비할 바가 아니다. 더구나 코끼리는 먹는 양의 절반 정도를 배설한다. 그 배설물은 벌레들의 먹이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사람들이 땔감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최근 태국에서는 코끼리 배설물로 종이를 만든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도 있다. 코끼리 한 마리가 하루에 싸는 똥으로 신문지 250장 정도에 해당하는 종이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의 똥은 어디에 소용이 되는가?

 

먹는 것은 내세울 만한 멋진 일이며 싸는 것은 숨겨야 할 더러운 일이라는 생각은 단선적이다. 그것은 자기 위주로만 자연의 과정을 대하는 뻔뻔한 문명의 결과다. 그러나 동화(同化)와 이화(異化)는 일방적일 수 없는 서로의 이면(裏面)이다. 우리는 끝내 먹기만 할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살아 있으면서도 무수한 생명들에 먹히며(살갗과 뱃속에 기생하는 생물체들을 생각해 보라), 결국은 분해되어 흙과 공기로 흩어지고 만다. 자연스러운 이 과정을 봉쇄하여 우리는 마치 동화만이 가치로운 일인 듯, 먹는 것만이 유의미한 일인 듯 살아가려고 한다. 먹는 일에, 맛에 집착하는 것이, 이미 원활치 않은 이 순환의 길을 더 틀어막는 데 기여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물론 먹는 일은 중요하다. 먹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를 키우고 유지할 수 없다. 제대로 된 성체(成體)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태아(胎兒) 때부터 잘 먹어야 한다. 성체가 되는 과정은 이렇게 외부의 양분을 받아들여 자신을 키우는 과정이다. 수정체(受精體)부터 보면 그 크기는 도대체 몇 배로 늘어나는 것일까. 나라는 생명체가 살아나가는 것은 이렇듯 내가 아닌 것을 나로 만들고 유지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이것은 거꾸로 생각하면 나는 내가 아닌 것에 그만큼 의존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나는 내가 아닌 것을 먹어서 지금의 나를 이룬다.

 

‘인간은 그가 먹는 것이다’라는 포이어바흐의 말은 바로 이런 의존성을 잘 드러내 준다. 여기서 부각되는 것은 인간의 능동적 주체성이 아니라 물질적 제약성이다. 인간은 그가 먹는 것이니 좋은 걸 먹어 훌륭한 인간이 되자는 뜻이 아니다.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낙지를 먹는 인간은 곧 낙지라고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한심스러운 일이다. 존재론적으로 따지면, 먹히는 것이 먹는 것에 우선한다. 먼저 식물이 있어야 그것을 먹는 동물이 있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우리는 자연을 인간적인 것으로 동화하지만, 그렇게 동화되는 세계가 우리에 우선하며 우리를 제약한다.

 

아, 그러나 먹는 이야기를 하다가 큰 주제를 잊어 먹진 말자. 구보씨가 새삼 먹는 것에 대한 생각을 떠올린 것은 사실 크기의 문제 때문이다. 대국(大國)이 문제고 국가의 크기가 문제라면, 그 크기의 소종래(所從來)가 또한 문제이지 않겠는가. 로마가 로물루스 형제의 소읍(小邑)에서 시작하였듯이 처음부터 큰 국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커나가는 것이라면, 생명체가 성장할 때 그런 것처럼 국가에게도 먹이가 필요하고 동화의 과정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만약 이것이 비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면 정말 큰일이다. 생명체는 그 먹이를 외부에서 구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생명체는 커나가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먹이를 필요로 한다. 사회나 국가도 그럴까? 자족적인 사회나 공생(共生)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은 냉혹한 세계질서 앞에서 한낱 공상에 불과한 것일까?

 

크고 힘센 존재가 작고 약한 존재를 먹이로 삼는 것은 자연의 순리로 여겨지곤 한다. 그래서 우리는 먹히고 피해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크고 힘센 존재가 되거나 최소한 그런 존재에 기댈 수 있기를 바란다. 악어의 먹이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악어가 되는 편이 낫지 않은가. 또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악어새의 처지라도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비록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일지라도 먹는 것에 대한, 동화와 자기 확장의 방식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라고 구보씨는 생각한다. “엄마, 곰이 나를 먹고 있어요.” 몇 달 전 러시아에서 야생 곰의 습격을 받은 젊은 처자가 죽기 전에 휴대폰으로 통화한 내용이 세간에 전해진 적이 있다. 인간이 다른 동물에 먹힐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이 끔찍한 사태는 우리가 먹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해 준다.

 

얘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런 어이없고 무참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지, 뭐, 먹는 것에 대한 반성이라구? Y가 있었다면, 구보씨는 아마 크게 핀잔을 들었을 것이다. 그렇긴 하다. 하지만 먹히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떤 존재에게도, 참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저 무심하게 먹는 일에 열중할 수 있는 것일까.

 

구보씨, 계속 크기를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씨, 계속 크기를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교수)

 

중국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어찌 구보씨뿐이겠는가. 많은 이들이 중국을 주목한다. 구보씨 친구 중에는 M과 조금 다른 시선으로 중국을 바라보는 이도 있다. C는 알아주는 사람은 별로 없는 자칭 정치평론가다. 정치를 업으로 한다는 친구가 사람 만나는 건 즐겨하지 않아 이름만 걸어놓은 작은 출판사 사무실에 틀어박혀 지낸다. 여하튼 그도 중국에 관심이 많다.

 

“M 그 친군 노무현 때부터 중국에 들락거리더니, 여태 그러고 있군.”

 

“지 말로는 장사꾼들 딱까리 한다던데?”

 

“그게 그거지. 장사하려면, 특히 중국에서 필요한 게 뭐겠어.”

 

“요즘 보시라이 건도 그렇고 중국도 복잡한 거 같아.”

 

“글쎄, 이전 같을 수야 없겠지. 어차피 변화는 불가피할 테니까.”
▲시진핑(習近平)과 펑리위안(彭麗媛)
“지난 번에 M은 시진핑 얘기 많이 하더군. 시진핑이 차기 주석으로 낙점되기까지의 뒷이야기들… 펑리위안인가 하는 시진핑 마누라, 그 여자가 중국에선 유명한 가순데, 장쩌민에게 시진핑이 점수 얻는 데 큰 역할을 했다나…어떻든 내부에 갈등이야 있겠지만 지도부는 그래도 연속성이 있는 것 아닌가?”

 

“하…그새 M은 장쩌민이나 시진핑하고 어울리나 보지? 그렇더라도 성장 패턴도 바뀌고 장쩌민 시대랑은 이미 다르겠지. 그 와중에 사람도 바뀌고, 대외관계도 조정이 될 테고…”

 

“그런 거, 원래 M이 잘 하잖아, 세태에 따라 움직이는 거.”

 

“… 잘 하겠지.”

 

“M은 중국이 북한을 놓아줄 리 없다고 그러던데. 남한도 경제적으로 이미 중국 영향권 안에 말려들어갔고…”

 

“뭐, 놓여날 힘도 없잖아. 그리고 중국한테는 북한이 있는 게 중요하니까.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역사라면?”

 

“이를테면 6.25를 생각해 봐. 중국에게는 북한이 대만을 포기하고 지켜야 할 정도로 중요했다고. 사실 6.25가 그 때 일어난 것도 중국하고 무관하지 않지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당시 중국공산당으로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전혀 달가운 일이 아니었지. 모택동은 계속 반대했어. 전쟁 발발을 막으려 했다구. 중국 본토를 장악한 직후였으니까, 사실 당연한 일이지.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 거라고도 할 수 있어. 6.25가 1950년에 일어난 건 중국공산당이 1949년에 본토를 통일했기 때문이라는 말이지.”

 

“허, 그거 말이 돼?”

 

“소련이나 미국 입장에서 보면 그럴 만하잖아. 소련도 불안한 면이 있었다구. 바로 턱 밑에 중공이라는 대국이 형성되었으니 말이야. 스탈린은 중국과 붙어 있는 한반도에서 변화를 꾀할 만 했을 거야. 그래서 스탈린은 김일성을 부추겼지만, 전쟁에 직접 개입은 하지 않았지. 미국과 맞부딪히는 게 싫기도 했겠지만 북한이 미국에 넘어갔을 때 위험한 건 소련보다는 중국이었으니까. 중국으로선 결국 대만을 목표로 배치했던 군대를 돌려서 압록강 너머로 투입할 수밖에 없었어. 이 결정을 둘러싸고 중국 공산당에선 며칠간 격론이 벌어졌지. 그러나 다른 선택은 어려웠을 거야. 북한을 내준다면 대만인들 쉽겠어?”

 

“하긴… 소련과 중국은 그 이후에도 계속 삐꺽거렸지. 그러고 보면 이념이라는 게 참 무색한 면이 있어.”

 

“지금은 또 러시아랑 군사훈련을 하잖아. 러시아 군함이 중국을 들락거리고. 미국에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북한도 다른 길이 없으니 중국에 붙는 거지. 그러니 김정일도 죽기 전에 중국을 조심하라는 말을 남겼고…”

 

“그랬나?”

 

“그랬지. 뭐,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잖아.”

 

“음…그런데 말이야, 세상엔 왜 큰 나라가 있고 또 작은 나라가 있는 걸까?”

 

“뭐?”

 

“이상하지 않아? 세상엔 200개 넘는 국가가 있는데, 그 가운데 큰 나라는 몇 개 안 된다구. 왜 어떤 나라는 크고 어떤 나라는 작냐 이 말이야.”

 

“허, 그건 세상엔 왜 호랑이도 있고 고양이도 있느냐랑 비슷한 문제 아냐? 그런 건 구보 너처럼 태평한 철학자들이나 따져볼 문제 같은데…”

 

“아냐, 이거 중요한 문제라구. 역사적으로 봐도 말이지, 중국이라고 항상 큰 나라였던 것은 아니잖아. 그리고 큰 나라도 항상 그 시초는 작은 데서부터 출발하거든. 주변을 정복하거나 병합하거나 해서 일단 큰 나라가 생겨나면 주변 나라들은 먹히거나 피해를 보거나 최소한 눈치를 봐야 한다는 거야…그런데 국가는 또 한없이 커질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커지는 데는 한계가 있어. 그렇다면 도대체 국가의 규모는 어떻게 정해지는 거지?”

 

“….”

 

C는 심드렁했다. 뭐, 그런 뻔한 것을 묻느냐는 표정이다. 하긴 이런 일이 새삼스러울 건 없다. 요즘 들어 구보씨가 늘상 당하는 일이니까.

 

“내 말은 왜 국가가 그렇게 커야 하느냐는 거야. 그 국가의 크기가 기여하는 바는 뭐지? 다른 국가를 제압하고 통제하고 이용하고 착취하기 위해서? 근데 그게 누구한테 좋지? 큰 나라의 일부가 되느니 독립하겠다는 지역들도 많잖아. 세상에는 그래서 수백 개나 되는 나라가 있는 거고. 큰 게 좋다면 이들은 왜 서로 합치질 않는 거야?”

 

“쯧… 구보야, 국가에는 정해진 크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익이 되는 한 팽창하려는 경향이 있는 거겠지. 또 그 팽창은 최소한의 동질성이 확보되는 한, 유지되는 거고. 그것이 강제에 의해서든 이익의 분배에 의해서든 말이야. 그러니까 큰 규모의 국가는 그 규모의 힘을 이용해 외부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한 계속 팽창을 시도할 수 있겠지. 그게 바로 제국(帝國)의 형태일 테고. 하지만 그 팽창의 이익이 임계점에 도달하면?그게 외부의 저항에 의해서건, 내부의 동질성 유지 비용에 의해서건? 팽창을 멈출 수밖에 없지 않겠어?”

 

“그건 대답이 안 돼. 그렇담 무수한 작은 나라들은 뭐야? 걔들도 팽창을 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어서 못하고 있다는 거야?”

 

“그렇지 않을까. 당장 우리도 봐. 천오백년 전 고구려 이야기가 아직까지 매력적인 이유가 뭐겠어?”

 

“그러니까 네 말은 모든 국가가 서로 팽창하려 하는데, 그게 다 자기중심적인 팽창이라서 서로가 외적인 제약 조건이 된다는 거겠네. 그렇담,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 그래서 침략의 이득이 그로 인한 위험부담이나 손해보다 커지면, 언제든 제국주의적 팽창은 일어난다는 거잖아.”

 

“에이, 꼭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지. 옛날엔 그랬을지 몰라도 오늘날엔 국제 질서가 명시적으론 그런 걸 허용하지 않으니깐. 하지만, 실질적으론 그런 면이 있잖아.”

 

“그건 결국 큰 게 좋다는 얘기네.”

 

“글쎄, 아무래도 규모가 힘이니까… 이를테면 미국은 그 덩치에서 나오는 힘으로 세계 곳곳의 자원과 요로(要路)를 장악하고 패권을 유지해서 굉장한 이익을 보고 있잖아. 적어도 그 이익의 일부는 자국의 동질성을 유지하는 데 쓰인다구. 그런데 만일 그러지 못한다고 생각해 봐. 그러면 이제 군사력은 부담으로 작용하기 시작할 테고, 조만간 미국은 그 규모를 유지하기 힘들어질 거야. 다민족이지만 독특하게 유지해왔던 미국적 애국심도 훼손될 테고. 그런 사태가 계속되면 미국이라는 나라도 쪼글어 들게 되겠지.”

 

“그 말도 결국 유지할 수 있는 한 큰 게 좋다는 얘기고…”

 

“허, 뭐, 꼭 그렇게 표현하고 싶다면야…그럼, 구보 넌 큰 게 나쁘다는 거야?”

 

“반드시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부담스럽다는 거지. 적어도 우리는 크지도 않고 또 충분히 크기도 어렵잖아. 그런 처지에서 크기에 집착하다간 자칫 사대(事大)에 빠질 위험이 있다구.”

 

“사대? 사대주의 말이야?”

 

“그래. 난 중국을 생각할라치면 맹자 양혜왕(梁惠王)편의 한 구절이 자꾸 떠올라. 지혜롭다는 것은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기는 것이다(惟智者 爲能以小事大), 작은 것이 큰 것을 섬기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以小事大者 畏天者)… 중국엔 옛부터 사대를 조장하는 이데올로기가 준비되어 있었다구.”

 

“구보야, 나도 중국의 영향이 걱정되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하는 건 좀 오버센스 같은데…”

 

“글쎄 말이야, 내 생각에도 내가 좀 과민한 것 같긴 해. 얼마 전엔 <카운트다운>이라는 영화를 보면서도 사대주의 생각을 했다니까.”

 

“카운트다운?”

 

“그래, 거기선 전도연이 사기꾼 여자로 나오거든. 이 여자가 술집에 앉아서 미리 찍어둔 남자를 꼬시는 거야. 술 한 잔 같이 하자고 나름 교태를 부리고 나선 이렇게 묻지. 당신 건 큰 편이에요? 난 좀 큰 게 좋아요.”
▲영화 《카운트 다운》중에서
“허허…”

 

“근데, 이 남자 당황해하면서 말하는 거야. 네, 동양인치고는 큰 편입니다.”

 

“쩝…”

 

“그 친군 그래서 결국 신세 조진다구. 사대주의의 슬픈 종말인 셈이지.”

구보씨 크기를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씨 크기를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교수)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Y에게서 소식이 왔다. 벌써 오래 전에 구보씨가 보냈던 이-메일에 대한 답이다. 여행 중이어서 확인이 늦었다고 했다. 여긴 중국인데 말이야, 바쁘게 이동하다 보니 도무지 경황이 없지 뭐니. 게다가 인터넷 사정도 안 좋고… 중국은 아직 대도시와 시골이 천지 차이야. 그러나저러나 중국이 넓긴 넓더구나. 재밌고 신기한 일도 많고… 이제 여름이니 구보 너도 어디 여행이나 떠나 보면 어때? 더운 날씨에 괜히 인상 쓰고 있지 말고… 그럼, 이만… 짜이젠.

 

구보씨는 입맛이 썼다. Y가 누구와 같이 있을지 짐작이 가는 까닭이다. Y가 몸담고 있는 시민단체에 알아보니 말로는 취재 여행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휴가 비슷한 형태지 싶었다. 그녀 자신이 계획을 입안하여 형식적인 허락을 받았고, 경비는 비행기삯 정도로 최소한만 지급했다 한다. 그렇담, 먼저 베이징으로 갔을 거다. 아니, 어디에 기착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상하이면 어떻고 충칭이면 어떤가. 어차피 조만간 M을 만났을 것 아닌가.

 

M은 중국에 자주 머문다. 업무상 그렇다고 했다. 벌써 몇 년째다. 그래선지 얼굴도 몸도 더 둥글둥글해지는 게 제법 중국인을 닮아가는 것 같다. 이제 우리한테 중국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야. 미국하고 일본에 대한 교역량을 다 합쳐도 중국에 한참 못 미친다구. 실질적으론 남한 정부가 중국의 비위를 거스르기 어렵게 되었다는 말이지. 지난봄에 만났을 때, M은 큼지막하고 퉁퉁한 손아귀에 작은 빼갈 잔을 쥐었다 놨다 하며 열변을 토했다.

 

체…언제는 우리가 중국 눈치 안 본 적이 있었나. 유사 이래 중국의 영향력은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압도적이었다. 이제 다시 우리에게 중국이 부각된다고 해서 새로울 것은 뭐고 반가울 것은 뭔가. 오히려 경계의 마음을 다잡아야 할 게 아닌가. 벌써부터 미국과 중국이 사사건건 힘겨루기를 하는 상황이니, 가뜩이나 허리까지 묶인 우리네 신세가 자칫 등 터지고 배 터지는 새우 꼴이 되지 않을까 걱정인 판이다.

 

“하하…근데, 그게 옛날과는 달라. 너 중국이 쥐고 있는 외환이 얼만지 아니? 자그마치 3조 달러가 넘어. 미국 국채만 1조 달라가 넘고. 작년에 미국은 중국 물건을 3000억 달라 가까이 사들였다구. 불황인데도 말이야. 이렇게 얽혀 있으니, 서로 충돌하긴 어려워. 물론 세(勢) 싸움이야 하겠지. 하지만 자칫하면 둘 다 구렁텅이로 빠진다구. 이제 세계는 누가 지고 이기고가 분명하게 갈릴 수 있는 상태가 아냐. 특히나 중국처럼 대국은 누구도 함부로 할 수가 없다구.”

 

“대국(大國)? 대국이라…그래, 그렇더라도 흥하고 망하는 데 크고 작은 게 결정적인 건 아닐 거야. 알잖아, 역사상 대국이니 제국(帝國)이니 하는 것들의 운명을… 중국도 다를 바 없지. 망하고 흥하고 한 게 그 동안 몇 번이야.”

 

“나라나 왕조야 그렇지. 하지만 문명은 다르잖아. 중국 문명권이 망한 적이 있냐? 서양의 침략을 받았지만, 그래서 아편전쟁 후에 일시적인 굴욕을 당했다고는 하지만, 백년 만에 다시 결집해서 백 오십년 만에 당당하게 다시 섰잖아. 이제 이백년이 되는 2040년경에는 아마 전세계의 패권을 쥐게 될 거야. 다시 명실상부한 중국(中國)이 되는 거지.”

 

“M 너, 완전히 중국파가 다 됐구나. 말하는 품새도 아연 중국인 같은데… 일단 단위부터가 말이야.”

 

“하하, 그래? 하긴 나 같이 이제 장사꾼 뒷바라지 하는 놈보다는 구보 너 같은 철학자가 스케일 크게 놀아야 하는 거잖아. 중국이라고 뭐 별 거 있겠어? 철학적으로 보면 사람 사는 덴 다 비슷하지. 근데, 스케일은 좀 달라. 얘들은 인구가 워낙 많으니까, 경제적으로 부유층이 기껏 10%가 안 되는데도 그 숫자가 1억이 넘는다구. 그러니 걔들만 해도 시장이 엄청난 거지. 중국의 소득 분포는 말하자면 호리병 형상이야. 못사는 애들은 또 엄청 많은데, 걔네들이 값싼 노동력의 원천이지. 그래서 얼마 전만 해도 중국에선 사업하기가 엄청 쉬웠어. 싼 노동력으로 생산해서 돈 있는 애들에게 팔면 되거든. 요즘은 좀 달라졌어. 중국도 이제 임금도 오르고 수지타산 맞추기가 쉽지만은 않아.”

 

“임금이 오른다는 건 좋은 거 아냐?”

 

“하하, 좋은 일이지. 하지만 일방적으로 좋은 게 어딨냐. 좋은 면이 있으면 나쁜 면도 있고, 세상이 그런 거지. 걔들 편에서도 형편이 나아지는 건 좋지만 그게 또 요구도 많아지고, 그러면 갈등도 더 생기고 시끄러워지고, 그 와중에 얌체도 생기고 희생도 생기고, 언제나 그렇듯 못된 놈들이 더 해 처먹고, 그런 게 조직화되고… 암튼 일 풀어나가는 건 자꾸 어려워진다구. 어떻든 너 중국 오면 연락해라. 베이징엔 와 봤지?”

 

“한 10년 전쯤? 그때하고 많이 달라졌겠네?”

 

“그럼. 그새 올림픽도 치르고 그랬잖아. 꼭 베이징이 아니더라도 연락해. 나두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일이 많으니까. 장사꾼 딱까리 노릇도 힘들어. 하하…”
▲ 중국의 항공모함사실, M은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인상에, 화통한 면이 있는 친구다. 학생 시절에 Y와는 한때 잘 지내던 사이였는데, 서로 엇갈리게 감방에 들락거리는 바람에 멀어졌지 싶다. 하긴 서로 무슨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니, 특별히 헤어지고 말고 할 게 없었을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그저 학생운동 시절의 친구 사이다.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M 이야기를 했더니, Y는 걔, 요즘 엄청 쪘던데 하며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그런데, Y가 중국에 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구보씨는 반사적으로 M을 떠올렸다. 그 둥글둥글한 얼굴과 웃음을. 뿐만 아니다. 신문에서건 인터넷에서건 중국 이야기만 나오면 Y와 M이 겹쳐서 떠오른다. 뭐, 중국 이야기에 중국에 있을 두 친구가 연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겠다. 그러나 문제는, 왜, 하필이면, 두 친구가 한꺼번에, 겹쳐서 떠오르냐는 거다. 겹쳐서 말이다.

 

아무튼 이를 계기로 구보씨는 중국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전이면 무심코 지나쳤을 사안들도 관심을 갖고 들춰 보게 된다. 그러다 보니 정말 중국에 한번 가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무엇보다 크기의 문제가 구보씨를 사로잡았다. 중국이라는 나라의 크기, 한반도의 크기, M의 몸집의 크기, Y가 구보씨에게서 차지하는 비중의 크기, 또 구보씨 자신의 마음의 크기…

 

사실, 중국은 가깝고 큰 나라다. 면적은 남한 땅의 100배나 되고 한반도 전체로 쳐도 40배가량 된다. 인구도 말이 14억이지, 정확한 수는 누구도 모른다. 산아제한 정책 탓에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 인구가 많은 탓이다. GDP는 일본을 추월해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다. 수치상으로 그 규모는 전 세계 GDP의 10%고 미국의 절반 정도지만, 경제적 영향력은 이제 미국에 못지않다고 보는 시각도 많다. 첨단기술이나 군사력 면에서는 아직 미국의 상대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만, 글쎄 그런 상태가 얼마나 갈까.

 

미국이 중국 항공모함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기회만 되면 일본 기지의 항모를 우리 서해안까지 끌고 와 해상훈련을 빙자한 무력시위를 하는 것을 보면, 중국의 진출에 대해 여간 경계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명박 정부가 제주도 강정에 기를 쓰고 기지를 건설하려는 것도 미국의 대중국 견제책의 일환임은 분명하다. 북한이 중국에 더욱 의존적이 되고 북한의 미사일이 평택이나 오산의 미군 기지를 위협할 수 있게 된 마당에, 미국으로서야 중국 본토를 사정권에 넣을 수 있는 보다 안전한 기지가 절실하지 않겠는가.

 

이런 사정이니 중국을, 또 중국과 미국의 관계를 고려에 넣지 않고 한반도에서 맘 편하게 지내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얼마나 잘 균형을 잡고 얼마나 잘 대처해야 허리 졸린 채 등 터지는 새우 꼴을 면할 수 있을까. 미국은 중국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묵과했거나 사실상 도와주었다고 비난하면서 남한에 전술핵무기를 재배치하겠다고 나섰다. 그럼에도 남이나 북이나 이런 판국을 조정할 능력이나 여유는 거의 없어 보인다. 북한은 고립된 처지에서 중국 외에는 기댈 곳이 없다. 대중 무역이 전체 무역의 90%를 상회한다. 출구가 극도로 제한된 이런 봉쇄 상태에서 북한은 핵무기를 절대 포기할 수 없을 것이고, 중국으로서야 핵을 가진 북한을 이제 자신의 24번째 성(省)쯤으로 이용하려 할 것이다. 미국은 북한을 트집삼아 대중국 견제선을 분명하게 그으려 하고 있다. 그런데 남한은 미국과 중국의 전략에 놀아나는 것 이외에 어떤 노력을 해 왔는가?

 

“통일? 너무 걱정하지 마. 그거 가능할 거야.”

 

지난봄의 술자리에서 M은 망설이거나 근심하는 빛 없이 이렇게 단언했다.

 

“허, 어떻게?”

 

“당장은 안 되지. 무엇보다 중국이 놓아주지 않을 거니까. 북한을 붕괴시켜 통일한다는 건 중국이 먼저 혼란에 빠질 때나 있을 법한 일이라구. 그런 통일론이야 남한 내부용이지, 이제 그걸 진지하게 믿는 또라이가 어디 있겠냐. 북한 정권이 바뀐들 중국에 대신 줄 게 없거든. 남한은 물론이고 미국도 말이지. 이쪽에서야 북한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을 테고…그러니 당분간 그대로 가는 거야. 뭐, 이 상태로 서로 긴장을 풀면서 장사나 하는 거지.”

 

“또 장사야? M, 너 정말 짱깨(掌?)가 다 됐구나.”

 

“하하, 구보야, 서로 안 싸울 수 있는 길은 싸우면 같이 손해 보는 관계를 만드는 게 최고야. 장사란 게 별거냐, 나만 이익을 보자는 게 아니라 서로 이득이 되게 얽는 거라구.”

 

“장사로 얽으면 통일이 돼?”

 

“그럼. 언젠가는 된다구. 초조하게 굴다가 바보짓만 안 하면 말이지. 유럽을 봐. 허구한 날 서로 치고받고 싸우던 애들이 이제 같이 놀려구 하잖아.”

 

“얼씨구, EU가 깨지느니 마느니 하는 판인데…”

 

“하하, 그것두 단견이야. 조금 길게 보면 이런 게 다 과정의 일부라구. 지금이야 국지적으루 이해가 엇갈리니까 그런 거지만, 이제 쪼개지면 결국 서로 손해거든. 다 잘 될 거야. 적어도 2, 30년은 봐야 한다구.”

 

“하, 2, 30년? 통일도?”

 

“당근이지. 내 생각엔 2040년쯤이면 우리도 통일이 되지 싶어.”

 

“어디랑? 중국이랑?”

 

“하하, 그건 아니지.”

 

M이 통이 큰 건지, 구보씨가 속이 좁은 건지, 구보씨는 중국을 생각하면 대개 마음이 편치 않다. Y와 M이 서로 알고 지낸 것도 2, 30년의 세월이 아닌가. 통 큰 M과 Y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얽혀 있을까. 알량한 속의 구보씨는 자기도 모르게 상을 찌푸렸다.

 

 

구보씨, 렛미인을 말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씨, 렛미인을 말하다

문성원(부산대)

세상일이 뜻 같지 않다. 요즘은 매사가 그렇다. 하긴 모든 일이 뜻대로 될 바에야 굳이 뜻이 필요하겠는가. 뜻대로 안 되는 세상이기에, 우정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분투해야 하는 것이리라. 이 좋은 봄날에 웬 허접한 소리냐고? 글쎄 말이다. 구보씨 딴에는 선거 뒤끝의 착잡한 마음이 아직 가시지 않은 모양이다.

구보씨가 사는 남쪽 동네엔 어제까지 흐드러지던 벚꽃이 이제 꽃잎을 하냥 떨구는 중이다. 저 꽃잎 하나하나에도 뜻이 있을까? 문득 구보씨는 생각해 본다. 꽃잎들에 얹히는 저 햇살과 향기를 나르는 저 바람에도? 그래,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 뜻은 인간의 뜻과는 상관이 없을 터이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뜻이라는 표현을 앞세워 세상 속으로 교묘히 파고든다.

뜻이라는 말은 같아도 그 뜻은 다르다. 인간의 뜻과 자연의 뜻이 다르고, 너의 뜻과 나의 뜻이 다르다. 그러나 원체 뜻이란 나를 통하여서야 그 뜻함이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던가. 내가 모르는 뜻은 엮이지도 풀리지도 못하니 내게 뜻으로 다가올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에 뜻이 있다 싶으면 나름으로 짐작하고 해석하기 마련이다. 그 덕택에 뜻은 곧잘 오해된다.

인간의 마음에는 자신이 실제로 잘 모르는 사안에 대해서도 가설을 세우고 설명을 하려는 본성이 있다고 한다. 오늘날의 뇌생리학이 밝혀 놓은 바에 따르면, 우리의 좌뇌는 자신이 알지 못하고 취한 행동에 대해서도 그럴 듯한 설명을 찾아 늘어놓는다.

우뇌와 좌뇌를 잇는 뇌량(腦梁)이 분리된 환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런 사람들에게서는 우뇌에 주어진 정보가 좌뇌에 제공되지 않는다. 가령 오른쪽 뇌와 연결된 시야에 “웃어보세요”라는 쪽지를 보여주면 이 사람은 거기에 따라 웃지만, 그 사람은 자신이 왜 웃는지 모르는 채 자신이 웃는다는 사실만 의식한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지금 왜 웃고 있나요?” 라고 물어보면, 그는(정확히 말해 그 사람의 좌뇌는) 모른다고 하지 않고 그럴듯한 설명을 찾아낸다. “당신이 재미있어서요.”라고 답하는 식이다.

 

틀린 답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가장 그럴듯한 답을 찾아 제시한다. 어차피 우리가 아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라면, 이렇게 주어진 한계 내에서 가설을 만들고 이론을 찾는 것이, 미지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효과적으로 살아가는 방편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도움은 제한적이다. 또 부작용도 있다. 신화적 세계관의 역할이나 문제점을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우리 삶에서 신화나 신화와 유사한 이데올로기를 떨쳐버리기는 어렵다. 뜻으로 얽힌 우리의 세계는 예나 지금이나 신화적 면모를 갖는다. 넓게 보면, 불명료한 사안에 뜻을 제공해 주는 이야기의 얼개가 곧 신화다. 세상이 한층 복잡한 것은 이런 신화적 뜻의 세계가 여럿이고 또 그런 세계들이 세상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나름의 세계를 갖는데, 그런 세계에는 다른 사람들의 세계에 대한 해석이 포함된다. 여러 뜻들에 대한 해석이 내 뜻의 재료가 된다. 이것은 누구나 마찬가지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 읽기는 우리 마음의 일부다. 덕분에, 우리의 삶은 부분적인 이해와 부분적인 오해들로 얽혀 있다.

그러니 세상일이 뜻대로 잘 될 리 없다. 우리의 시도는 무수한 시행착오의 연속이다. 그때마다 우리는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해석의 얼개를 수선하고 뜻의 가닥들을 다시 풀어 엮는다. 내가 받아들인 자연의 뜻에 대한 해석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의 뜻에 대한 이해가 잘못 되었을 수도 있다. 이렇게 나의 세계는 매번 개축되고 그때마다 다른 세계의 요소가 내 세계 안으로 들어온다. 사정이 좋을 때 그렇다는 얘기다.

그럼 나쁠 경우에는 어떤가?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뜻을 세계에 덮어씌우려 한다. 제 뜻이 아닌 내 뜻을 앞세워 세상을 해석하려 한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만, 그런 뜻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만 다른 세계의 요소를 받아들이려 한다. 수용의 거름망이 그만큼 강고하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밖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건 무조건 좋고 안의 세계를 고수하려드는 건 무조건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고집스러움이라고 다 해로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제나 소재에 대한 구보씨의 작은 고집, 이를테면 요즘 들어 반쯤 장난스레 드러내는 뱀파이어 영화에 대한 고집 따위는 그런 대로 봐줄만 한 것이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지금도 구보씨는 <렛미인>이라는 뱀파이어 영화가 뜻대로 안 되는 세상 살기의 방식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 보고 있는 중이다. 좋은 쪽으로? 나쁜 쪽으로? 글쎄, 어느 쪽이겠는가?

<렛미인>에 등장하는 뱀파이어는 독특하다. 어린 소녀의 모습이다. 이 영화의 원작 소설에 따르면, 원래 이 뱀파이어의 정체는 소녀가 아니라 거세된 소년이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떤가. 분화한 성적 매력이 나타나기 전 연약한 모습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도 소설 속에선 명확히 드러나는 아동성애의 코드가 숨겨져 있다는 건 짚고 넘어가자. 아동성애 도착(페도필)은 무력하고 핍박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러면서도 쉽게 지배욕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잘 나타난다.

그런데 <렛미인>의 소녀(또는 소년) 엘리는 뱀파이어다. 연약해 보이지만 실상은 초인간적 존재다. 물론 흡혈의 어두운 욕망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그것을 기꺼워하지는 않는다. 어쩔 수 없이 피를 필요로 할 뿐이다. 이 어쩔 수 없음이라는 조건은 연약해 보이는 외모와 호응한다. 도움과 보호가 필요한 가련한 존재, 그러나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중적 존재가 뱀파이어 엘리다.
영화 렛미인(Let The Right One In, 2008)의 한 장면
이 뱀파이어 소녀 엘리와 가까워지는 건 학교에서 왕따 당하는 소년 오스카다. 둔하고 약한 오스카는 힘이 지배하는 또래의 세계에서 기를 펴지 못한다. 영화에선 가냘픈 금발의 소년으로 나오지만 원래 소설에선 뚱뚱한 아이로 묘사되어 있다. 돼지 소리를 내보라고 놀림을 당하는 것은 그 탓이다. 그런데 이 오스카는 바보처럼 착하기만 하지 않다.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에게 복수하기를 원한다. 그는 밤에 아파트 정원으로 칼을 품고 나가 애꿎은 나무를 찌른다. 가상의 응징인 셈이다.

이 가상이 현실이 될 수는 없을까? 오스카의 뜻이 실현될 수는 없을까? 그건 나름으로 정의의 구현일 텐데 말이다. 엘리는 당하기만 하지 말라고 오스카를 부추긴다.

“받은 만큼 돌려줘. 더 세게. 그래야 걔네들은 그만 둘 거야.”

“하지만…걔들이…”

“그 때엔 내가 도와줄게. 나는 그럴 수 있어.”

오스카는 이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대응을 하고 아이들은 움찔한다. 브라보!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만만할 손가. 뜻밖에 한방 먹은 악동들은 더 크고 더 폭력적인 지원군을 부르고, 오스카는 속절없이 극한의 궁지에 몰린다. 이때 엘리가 나타나 섬뜩할 만큼 충격적인 폭력의 응징을 가한다. 그것은 어쩌면 정의로워 보인다. 핍박을 당하는 약한 자를 돕는 응징. 피의, 어둠의 응징. 여기서 뱀파이어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는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의 영어판 포스터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LET THE RIGHT ONE IN.” 이것은 정의로운 뱀파이어의 탄생인가?

오스카는 엘리가 뱀파이어라는 걸 안다. 선택의 여지는 있다.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뱀파이어는 초대받지 못하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가 그 어둠의 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장치다. 오스카가 엘리를 초대하는 것은 왜일까? 초대 받지 못한 채 오스카의 방으로 들어온 엘리는 온 몸에서 피를 흘린다. 정수리에서도 눈에서도 피가 스며나온다. 이 모습을 본 오스칼은 황급히 초대의 말을 내뱉고 엘리를 껴안는다.

“넌 누구니?” “난 너와 같아.”

“…. 난 사람들을 죽이지는 않아.”

“하지만 그럴 힘이 있다면 그러고 싶어 해. 복수를 위해서. 그렇지?”

“그래.”

“내가 해. 내가 해야 하니까.”
영화 렛미인(Let The Right One In, 2008)
물론 오스칼이 엘리를 좋아하게 된 건 엘리가 뱀파이어라는 걸 알기 전부터다. 그러니까 엘리를 받아들이는 건 어떤 이해관계나 바람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일 수 있다. 모두가 그렇다고 하듯, 사랑은 모든 것을 넘어서므로. 그러나 이 사랑이란 과연 무엇일까?

<렛미인>에는 뱀파이어 엘리를 사랑하는 또 한 사람이 나온다. 호칸이라는 인물이다. 중년을 훌쩍 넘어선 이 사내는 엘리가 마실 피를 얻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 그러다 붙잡힐 위험에 처하자 신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자기 얼굴에 염산을 붓는다. 엘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마지막 죽어가면서까지 그는 자신의 피를 엘리에게 준다. 사랑이란 이런 것일까?

뱀파이어는 늙지 않는다. 엘리는 백년 넘게 계속 12살이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호칸이 있었을까? 오스카가 트렁크에 담긴 엘리를 기차에 싣고 함께 떠나는 것으로 끝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가 또 한 사람의 호칸이 되리라는 걸 강하게 시사한다.

무릇 뱀파이어란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의 산물이다. 엘리와 같은 뱀파이어 역시 뜻대로 안 되는 세상 살기의 한 방편이다. 우리는 뜻대로 안 되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힘을 찾고 갈구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거기에 우리의 뜻과 어긋나는 대가가 따를 수 있음을 어렴풋하게 예감한다. 그것이 우리의 거의 모든 신화가 해피엔딩을 보장하지 않는 여운을 진하게 남기는 이유다. 뜻이 여럿인 세상을 뜻대로 사는 손쉽고 안락한 길은 없지 않을까.

그렇지, Y? 구보씨는 웬일인지 한동안 소식이 없는 Y의 속뜻을 헤아리며 혼자 멋쩍게 물어보았다.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철학의 유언]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철학의 유언]

지미정( 2012교육강좌 수료)

 

얼마 전 가끔 소식을 전하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배 죽음을 알리는 부고를 받았다고·····. 이유는 물론 외로워서이기도 하겠지만, 270만원 때문에 목을 맸다면서 자기 속이 까맣다고 했다. 그러면서 친구가 물었다. “그 선배가 철학적이었다면 살아있을까?” 나는 철학을 했어도, 또 죽음의 원인이 100만원이었어도 자살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친구에게 “철학을 했어도..”라는 말을 쉽게 내뱉었지만 ‘어쩌면 철학을 했으면 조금은 다를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처음 돈의 액수를 들었을 때, 나는 죽음의 원인이 단순히 돈의 액수로 환원되는 것 같은 느낌에 거부감이 들었다. 물론 친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왜 돈 때문에 사람이 죽어가야 하는지를 나와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것을 안다. 아마도 뒤늦게 철학을 공부하겠다고 용을 쓰는 친구이기에 어떤 말인가를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친구에게 철학을 했다면 다를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철학을 공부했을 때, 어떤 면에서는 현실을 바라보는 고통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철학을 공부했을 때 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 다를 수 있다. 그래서 현실을 비관하기도 하지만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도 생기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친구 질문의 의도를 그 선배가 철학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 힘을 가졌다면 돈의 고통과 외로움을 죽음으로 끝내지는 않았을 거라는 말로 이해한다.

삶과 철학

내가 생각하는 철학 공부의 의의는 우리 사회가 가진 여러 가지 모순에 눈을 떠 현실을 비판하는 이성을 가질 수 있다는 데 있다. 또 철학의 힘은 개인의 행복을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찾음으로써 주체적 삶을 살아가는 노력을 가능하게 만든다. 인간 삶의 모습과 사유 방식을 통해 좀 더 깊이 인간 본성을 탐구하는 일도 결국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의 물음에 답을 얻는 일이다. 철학은 지혜를 주는 학문이다. 어떤 사람은 종교에서 위로를 받지만 나는 철학 공부에서 위로를 얻었다. 나는 씨알 함석헌 선생을 통해 철학에 눈뜨고 비교 종교학 책을 몇 권 보던 중, 비트겐슈타인을 만났다. 그렇게 내 철학사랑은 시작했다. 비트겐슈타인은 현대 영미 분석철학자로 세상에 더 많이 알려졌지만, 나에게 비트겐슈타인은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철학자로 다가왔다.
비트겐슈타인(1889~1951)우리는 삶에 공허를 느끼면서 행복할 수 없다. 나는 대학 3학년 때 만난 지금의 남편과 3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의미도 모른 채 어린 나이에 시작한 결혼 생활이 나름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원하는 삶이 이게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까지 나는 내 꿈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고 내 꿈이 무언지조차 모르고 살았다. 그래서 삶은 늘 공허했고 불만족스러웠다. 주부로 살면서 아이들의 교육에 내 에너지 대부분을 소진했지만 얼마 안 가 그것도 나를 만족시키진 못했다. 나는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들도 행복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오기 시작했다. 그 시기가 아마 내 존재에 대한 물음이 시작된 시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처음에 아이들의 논술 지도를 위해 시작한 공부는 어느새 배움의 열망으로 변했고 아이들의 교육비를 대기도 어려운 현실에서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학부 편입을 했다. 공학을 공부한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인문학 공부가 필요했다. 뒤늦게 찾은 철학 공부의 즐거움은 그 어느 즐거움에 비할 수가 없었고 가족을 집에 두고 새해 첫날에도 도서관을 찾을 정도였다. 나의 철학에 대한 애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석사와 박사 과정을 꿈꾸게 했다.

자아실현의 삶

요즘엔 ‘자아실현’을 위해 무언가를 감수한다고 하면 조롱거리가 되는 듯하다. 돈 앞에서 자아실현에 대한 욕망은 초라해졌지만 인간에게 ‘자아실현’만큼 중요한 일도 없다. 심리학자 매슬로(Maslow, Abraham H)는 인간의 욕구 단계 가운데 자아실현의 욕구를 가장 상위에 두었다. 자아실현의 욕구는 인간의 생리, 안전, 사랑, 존경의 욕구가 충족된 후에 생기는 욕구라고 한다. 우리는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자신의 꿈을 접고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보면서도, 자신의 꿈을 포기 못해 처자식을 고생시키거나 자기 길만을 가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작년 초, 한 시나리오 작가의 아사 소식은 우리 사회 곳곳의 부조리함을 일깨운 사건이자 내겐 인간의 자아실현 욕구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우리에게 그녀의 창작에 대한 고통에 비해 최저 생계비로만 살 수밖에 없는 문화예술계 구조 문제를 일깨워 주었다. 더 나아가 나는 그녀가 자신이 선택한 그 일을 좀 더 일찍 그만두거나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병행하지 못한 이유가 궁금했다. 그녀에 대해 잘 모르는 나는 그냥 추측해본다. 그녀에게 작가로서의 삶은 단지 생계비 마련을 위한 일이 아니라 창작의 고통을 감내할 만큼의 희열을 주는 일이었으리라. 그녀가 생계를 위해 다른 일을 병행하지 못한 것은 그녀가 생을 만만하게 보아서도 아니고 현실과 타협하기 싫어서도 아닌, 다른 일과 병행하면서는 마음먹은 작품을 도저히 써낼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녀에게 창작은 자아실현 욕구와 관련한 것으로, 생의 위협 앞에서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일이 아니었을까? 그녀가 흥행을 위해 그녀 작품을 상업적으로 만들었다면 어쩌면 궁핍한 예술가로 살다 가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물론 그녀의 작품이 내 추측과는 달리 작품성이 떨어졌을 수도 있다. 그래서 혹자는 나의 이런 추측을 비판할 수 있다. 어쨌든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매슬로의 이론이 그녀에게는 예외적이라는 것이다. 매슬로가 인간은 가장 기본적인 생리 욕구가 해결되지 않고는 상위의 욕구를 추구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우리 주변에는 배고픈 예술가들이 많다. 또 만인의 존경을 받는 명예가 없어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자아실현의 삶을 사는 이들이 많다. 여기서 그들 모두는 생리적 욕구와 다른 욕구를 뛰어 넘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강한 자들이었음이 드러난다.

내 삶의 주인으로 살기

나는 30대 초반에서야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고민했다.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그 때 깨달았다. 현재 내가 추구하는 삶은 부조리한 사회 구조와 관습에 얽매이지 않으며 물질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삶은 많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며 어쩌면 유토피아로, 우리 사회에서 공감을 얻기 어려운 삶일 수 있다. 내 삶은 주인이 된다는 것은 주체적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을 때만이 가능하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물질과 지위와 권력의 소유에 집착하는 삶과 “존재 양식”으로서의 삶을 말한다. 프롬이 말하는 “존재 양식”의 삶은 “소유하지 않고도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의 재능을 생산적으로 사용해 세계와 하나가 되는 삶”을 말한다. 프롬이 말하는 “생산적”이라는 말은 창조하는 능력과는 무관한 것으로 활동의 산물보다 활동의 질에 있다. 즉 “스스로를 깊이 의식하는 사람, 자연을 그냥 지나쳐서 보지 않고 진정으로 투시하는 사람, 한 편의 시를 읽고 시인의 표현을 느낄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은 창조와 연결되지 않아도 생산적”이라고 말한다. 철학을 공부한 후에 나의 삶에도 변화가 생겼다. 나의 존재 가치를 외부에서 찾으려 했던 내 20대와는 다르게 지금 나는 의·식·주를 위한 최소한의 물질에 만족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내 삶의 주인으로 살면서 주변을 돌아보고 가끔은 그들을 위해 내 재능을 나누며 살고 싶다.

이 글을 친구와의 전화 이야기로 시작한 이유는 우리가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존재를 의식하기 위한 끊임없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우리는 우리의 자존감을 위해 배워야 한다. 배우지 않으면 우리의 자존감은 상처입고 절망에 빠진다. 최근에는 지역마다 평생 교육차원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이 개설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철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동안 철학은 돈이 안 되는 학문이라는 이유로 외면 받아왔다. 대학의 교육도 실용적인 학과만을 남기고 통폐합하기 시작한지 오래다. 이런 교육 현실은 많은 사람들이 삶의 방향을 잃고 소유하는 삶을 지향하게 만든다. 소유가 존재라 믿는 현대인의 병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소유지향의 태도는 타인을 배제하고 자신의 재산을 지키는 일 외에는 자신을 위한 다른 노력을 하지 않게 만든다. 지식의 소유도 마찬가지다. 지식을 소유하려는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에 대한 반박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자기의 이론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노력만 한다. 그러나 타인의 이견을 열린 자세로 대하는 사람은 지식의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다. 물질이든 지식이든 소유를 지향하지 않는 삶의 태도는 공부를 해야 얻을 수 있다. 나는 공부가 부족해서인지 아직 지식을 갈망한다. 지금 내가 알게 된 것을 과거에는 몰랐고, 모른다는 사실도 모르던 내가 알게 되는 기쁨을 맛보는 것이 내 공부의 즐거움이다. 나에게 평생 하고 싶은 일을 찾은 것은 행운이다. 남들보다 많이 늦었지만 나는 내 북장단에 발맞추려 한다.

자거라투스트라, 영화 ‘토리노의 말’을 보다[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세상의 어머니여! 모든 아이들을 보호할 것인가, 우리 아이를 위험에 내놓을 것인가

김 경 원(문정중학교 교사)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대립과 세계 기아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아기를 낳지 않는다 했던 여자는 남들보다 조금 늦게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자연 번식(?)에도 성공하였다. 중고등 시절, 선생님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으며 딴 짓과 자습 빼먹기를 밥 먹듯이 하던 여자는 먹고 살 방도를 위해 젊은 시절을 헤매다 양심도 없이 뒤늦게 교사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대한민국의 유부녀 여교사가 된 것이다. IMF 시절에는 먹고 사는 문제로 소심해질 대로 소심해진 국민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던 적도 있었지만 요즘 내 주변의 사람들은 부쩍 나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지난 달에 부산에서 만났던 초면의 남편 선배는 요즘 구독하는 신문에서 보니 학교가 정말 심각하다며 나를 딱하다는 듯이 쳐다보았고 최근 만난 큰시누이는 내 손을 두 손으로 움켜잡으며 힘들어서 어떻게 사냐고 했다. 뭐 그냥 그 자리에서 울어야 할 분위기였는데 안타깝게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물론 내 주위에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어울리는 여러 가지 심란한 에피소드는 많다. 내 주변의 소심한 동료는 수업이 끝나면 교무실에 돌아와 한참을 넋나간 표정으로 앉아 있는다. 그 선생님은 말 안 듣는 악동들의 교실에서 벗어난 충격(?)으로 점심시간이 지나는 것도 잊고 (정말 나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리 앉아 있는 것인데 그러한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 어떤 선생님은 자다가도 수업 시간에 힘들었던 장면이 생각나 벌떡 일어나 당시에 억울하게 당했던(?) 장면을 떠올리며 분노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주변 학교의 즐거우신(?) 학생들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활약상도 우리 학생들을 통해 종종 나의 귀에 들어오기도 한다. 킥복싱을 배운 학생과 학부모 혹은 자해하는 학생에 의해 위협을 당한 교사의 이야기는 같은 교사로서 학생들 앞에서 듣기에 민망한 경우가 많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본인도 교직 생활 10여년 동안 무협의 세계에서 생활하며 나름대로 몇 가지 어려웠던 에피소드는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나의 이야기를 쉽게 털어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냥 들으면 매우 버릇없고 나쁜 인간 말종들의 이야기로만 들리기 때문이다. 혹은 학생 장악력에 문제가 있는 여교사의 하소연으로 들릴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섬세하게 그 상황의 뒷면까지 보면 어려운 가정 형편에, 가족의 해체에, 잘못된 입시 위주 경쟁 교육에, 믿고 의지할 데 없는 외로움에, 권위적인 교사 및 학부모들이라는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면 우회 도로로 해결 방법을 찾게 되기도 한다. 최근 언론 지면에는 학교에 학생들을 장악할 남교사가 너무 없었다거나, 가해 학생에게 너무 처벌이 미약했다거나, 학교 문제라고 해서 외부 경찰이 소극적으로 대응했다거나 사회적으로 교사들이 체벌 등 강제적으로 학생을 장악할 방법이 없었다는 반성들이 들끓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남교사를 확충하자거나 가해 학생에게 강력하게 처벌하자거나 경찰의 적극 개입을 인정하거나 교사들에게 강력한 제제 주단을 주자는 등의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하지만 그 조치에 경쟁 위주의 교육 제도 시정이나 가족 복지에 대한 배려는 들어 있지 않다.

오늘도 인터넷에는 단골 기사인 학교 폭력 관련 기사가 새로 올라와 있다. 10만원 때문에 친구를 죽인 혐의로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으면서도 태연히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었다는 고등학생의 이야기가 우리의 흥미를 자극한다. “요즘 애들은 쯧쯧쯧…….”, “이런 애들은 콱 죽을 때까지 콩밥을 먹여야지.”, “이게 인간이야? 괴물이지!” 등등 강력한 대응이 자신의 도덕성을 입증하는 양 우리는 한 두 마디씩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성토하곤 한다. 그러면 우리는 깨끗하다. 이러한 괴물을 낳은 사회의 일원이지만 우리는 분명 깨끗할 것이다. 후속 기사에 따르면 이 아이의 아버지는 일찍이 도박에 빠져 집을 나가고 엄마가 홀로 일을 하여 생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과거에는 가정폭력에 시달렸고, 현재는 폭력적인 가난 앞에 노출되어 있던 이 아이의 엄마는 분명 비정규직이었을 것이고 늦게까지 일하느라 아이를 돌볼 시간이 없었을 거라고 말하면 그것은 세상을 너무 비관적으로만 보는 것일까?

도대체 어떻게 하면 학교 폭력을 없앨 수 있을 것인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아이들을 학교 폭력으로부터 보호할 것인가? 엄마로서는 눈물 나는 일이지만, 솔직히 말하면 교사인 나조차도 학교 폭력으로부터 내 아이를 완전하게 보호할 수 없다. 단지 운 좋게도 친절한 담임 선생님과 좋은 단짝 친구와 너그러운 일진을 만나길 기도할 뿐……. 혹은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총알도 피하는 유연성이 우리 아들에게 허용되길 바랄 뿐이다.

이기적인 엄마들 입장에선 우리 아이만 이 혼란한 세상에서 쏙 빼서 보호할 수 있은 방법이 있으면 좋으련만 세상은 쉽지 않아 나의 아이의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의 친구까지 안전하고 행복해야 비로소 나의 아이까지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정말 절실하게 나의 아이의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의 안위까지도 내 아이의 안위를 걱정하듯 걱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친구의 친구의 친구의 무한한 친구의 친구의 가정이 어떠한지 아버지는 도박을 끊으셨는지 어머니는 정규직으로 전환되셨는지가 진심으로 궁금하고 걱정이 되는 것이다.

“신이 세상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듣는 엄마들 부담스러운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여자들은 결코 자신의 자식만을 보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아이들을 보호하든지 아니면 자신의 자식을 위험 속에 내놓든지 둘 중 하나다.

자거라투스트라, 영화 ‘토리노의 말’을 보다[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편집자문위원)

니체 아부지, 울긴 왜 울었어요?

울다니, 내가 언제?

참 아부지도! 그 일이 너무나도 널리 알려져서, 이번에 영화로도 나왔던데요. 왜, 토리노를 여행하시다가, 가혹하게 얻어맞는 말의 말머리를 껴안고 울었다면서요? 왜 우셨어요?

아, 그거 말이냐, 어디 말이 불쌍해서 울었겠냐? 내 처지가 말하고 같아서, 그랬지. 왜 동병상린이라는 말도 있지 않니? 그런데 그게 영화하고 무슨 상관이냐? 내가 영화의 주인공이 됐단 말이냐?

헝가리 영화 감독 벨라 타르가 자신의 마지막 영화로 ‘토리노의 말’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대요. 그래서 저도 보고 왔어요. 물론 아부지를 주인공으로 만든 것은 아니고요. 아버지의 토리노 에피소드에서 감독이 착상을 얻었던 모양이에요. 그렇게 얻어맞는 말과 유사하게 가혹한 삶을 살아가는 어떤 부녀에 관한 이야기이죠. 영화는 시작하면서 이 부녀의 삶을 암시라도 하는 듯이, 마차를 끌고 가는 말의 모습을 오랫동안 비추어 주죠. 비루먹어서 정말 가련하게 보이지만, 마부가 때리는 채찍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짐승처럼 마차를 끌고 달리는데, 카메라는 말 머리에 바짝 붙어서 말의 모습을 클로즈업해요. 이 장면이 너무나 오래 동안 지속되어서 지루해질 것 같기도 한데, 이상하게도 우리 관객의 시선을 압도하면서 매혹하죠. 관객은 서서히 그런 말의 비루먹고, 짐승 같은 모습이 바로 자기 자신인 것처럼 느끼게 돼요. 그런데 아부지, 동병상린이라면 아부지도 누군가에게 가혹하게 얻어맞았다는 말인가요?
그런 셈이지. 그런데 나를 때린 게 어떤 사람이 아니고, 바로 우리를 지배하고 조종하는 신이었지.

그런데 아부지, 아부지는 신이 죽었다고 선언했다던데, 웬 신이 아직 살아서 아부지를 지배하고 조종한다는 말이에요?

글쎄 말이다. 자거라투스트라야, 채찍에 얻어맞는 말의 모습을 보니, 꼭 신이 우리를 그렇게 처벌하는 것만 같아서 말이야. 물론 신이란 것은 없겠지. 그런데도 우리는 신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살아왔어. 그 관념이 우리를 지배하고 조종해 왔던 것이지. 너도 알겠지만, 난 한 평생 그런 신에 대한 관념과 싸웠지. 그런 신에 대한 관념 때문에 우리는 한 번도 이 세상에 살면서 제대로 행복하게 웃어보지도 못했던 것이 아니니? 행복이란 것은 없었어. 그저 잠시의 휴식이 있었을 뿐, 우리의 짐승 같은 삶은 여전히 지속되었지. 그래서 마침내 나는 선언했던 거야. 신은 죽었다고. 그러면 이제 신이란 관념이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줄 알았어.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던 거야. 신은 이미 죽어도 골백번 더 죽었지만, 인간은 신이란 관념을 버릴 수가 없었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결국 내 인생도 그런 신의 관념에 잡아먹히고 말았지. 토리노에서 말이 얻어맞는 것을 보니, 나 니체조차, 신이 죽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이 니체조차도 신의 관념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에 의해 조종되고 지배되었다는 것이 한순간 너무 명확하게 자각되었던 거야. 주요한 것은 신은 관념만으로도 마치 실재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야. 신의 관념에는 존재의 관념이 포함된다고 하지 않니? 그러므로 관념만 있으면 존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래서 아부지가 스스로 바보였다고 말한 거예요? “어머니 나는 바보였어요” 이렇게 일기에 적었다면서요? 그럼 아부지는 결국 신의 관념과 싸우다가 패배한 것을 자인한 셈이네요.
그런가, 나도 모르겠어. 그 순간 나는 내가 꼭 바보였다는 느낌이 들었어. 신의 관념이라는 허깨비 앞에서 내가 졌다고 생각되었어. 그래서 그 뒤로 난 다시 깨어나고 싶지 않았어. 그저 짐승처럼 아무 생각도 없이 아픈 줄도 기쁜 줄도 모른 채 그렇게 살아가려 했지. 사람들은 내가 이제 진짜로 미쳤다고 하지만, 내가 미친 게 아니야. 나는 오히려 알았던 거지. 우리가 그저 짐승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야. 그래서 눈을 뜨고 싶지 않았던 거야. 어느 날 아침 침대에서 다시 깨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와 똑 같았어.

그런데 아부지, 이 영화의 내용도 유사해요. 점차 죽음과 파멸이 다가오죠. 영화는 6일 동안 지속되는데 계속해서 카메라는 어느 황량한 벌판에 사는 두 부녀의 삶을 냉혹하게 지켜보죠. 그 벌판은 메말라 있고 그 위에는 쉼도 없이 돌풍이 몰아치고 있어요. 그 돌풍은 관객인 우리조차 지겨워하게 만들 정도이에요. 그 돌풍 앞에서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오두막집은 비록 돌 벽으로 되었지만, 이미 곳곳에 무너지고 있어 더 이상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위기감을 불러일으키죠. 서서히 그들의 삶이 파괴되어 가요. 이튿날부터 말이 더 이상 마차를 끌기를 거부하죠. 나흘 째 유일한 우물의 물이 말라 버리고. 그날 두 부녀는 집을 버리고 탈출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들판은 텅 비어 있지만 그렇게 비어 있음 때문에 어디에로도 갈 수 없어요. 다시 두 부녀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닷새째 집안의 등불이 꺼지죠. 마지막 엿새째 암흑 속에서 두 부녀는 이제 모든 것이 죽음과 파멸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는 것 같아요.

그럼 자거라투스트라야, 이 영화는 자연주의적인 영화이냐? 김동인의 감자처럼, 결국 주변의 환경 때문에 인간이 무너지고 만다는 거냐?

니체 아부지, 사실 저도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아마 모파상의 작품인 것 같은데, 제가 지금 분명치 않습니다만, 눈보라 속에서 산장을 지키던 사람이 마침내 미쳐버리는 얘기가 떠올라서, 이 영화를 보면서 언젠가 두 사람이 미치지 않을까 내심 기다렸지만 영화는 그렇게 끝나지는 않았어요.

그럼 어떻게 끝났단 말이냐?

감독의 태도는 독특합니다. 이렇게 가혹한 삶 속에서 두 부녀는 마치 기계처럼 똑 같은 일을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반복해요. 그들은 깨어나면 한 잔의 술을 마십니다. 그것은 어떤 즐거움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일처럼 보여요. 독일의 고지대에서 사람들도 깨어나면 맥주 한잔을 마신다고 해요. 그래야 머리가 부팅된다나요. 또 아버지는 한 쪽 팔을 쓰지 못해 딸이 아버지가 옷을 입고 벗는 것을 도와주는데, 돌풍을 막기 위해 걸쳐 입은 여러 겹의 옷을 하나하나 벗고 다시 입죠. 그것은 마치 신성한 의식을 거행하는 것 같아요. 두 부녀는 어떤 말도 서로 건네지 않습니다. 오직 “먹자, 자자” 라는 간단한 말만 오가는데, 그 말은 아마 항가리어이겠지만, 우리 귀에는 거의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와 같이 들렸어요. 두 부녀의 삶은 진부하지만 신성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뭐라고 할까요. 어떤 인간의 자유의지의 힘이 강하게 느껴지는 삶입니다. 어떤 가혹한 압박이나 굴욕조차도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는 인간의 힘 말이에요.

자유의지라, 그러면 그들이 초인이란 말이냐?

사실 저는 그렇게 보았습니다. 그들은 장작을 패고, 옷을 깁고 하는 생존에 긴요한 일 외에는 창문 앞에 세워둔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앉아 우두커니 창밖을 몰아치고 있는 돌풍을 응시할 뿐입니다. 그들의 응시를 보면서 저는 들뢰즈가 말한 ‘시청각적 상황’이라는 개념이 떠올랐어요. 들뢰즈는 인간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히면 사유할 수 없는 것을 강제로 사유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그런 사유가 바로 응시라는 거죠.

자거라투스투라야, 거 참 그 영화 어디서 하냐? 나도 꼭 봐야 하겠는 걸. 아주 마음에 든다. 내 철학의 정수이구나.
그래요, 사실 감독 벨라 타르도 사회주의 항가리 출신이지만 니체 아부지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해요. 저는 사실 그 감독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요. 나중에 이 감독이 만든 영화들 ‘파멸’이라든가 ‘사탄탱고’ 등을 보아야 하겠어요.

그런데 아부지, 니체 아부지. 이 영화는 엿새 동안 진행되는 데 이튿날과 사흗날 외부에서 손님들이 찾아오죠. 이튿날은 동네의 이웃이 찾아옵니다. 그는 사실 술꾼이에요. 그러나 말로는 결코 굴복하지 말자고 다짐합니다. 주인공은 그의 말은 믿지만 그의 행위는 믿지 않는 듯 술 한 병을 주어서 쫓아 보내고 말죠.

굴복이라니, 누구한테 굴복한다는 말이냐?

니체 아부지, 그게 사실 이 영화를 해석하는데 걸리는 가장 큰 문제에요. 저는 그 이웃 손님과 아버지 사이의 대화의 대상이 신이라고 생각해요. 이 영화에는 보이지 않지만 신이 등장하죠. 끝없는 돌풍이나, 우물이 마르거나, 불이 꺼지는 것 등은 단순한 자연적인 사건은 아닌 것 같아요. 어떤 신의 힘이 여기서 작용한다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이 영화를 저는 꼭 욥기와 같은 맥락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성경의 욥기에서도 욥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 하느님은 욥을 파멸과 죽음으로 밀어 넣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아요. 그런데 이 영화는 같은 맥락이지만 대답은 욥과는 반대이죠. 즉 주인공은 신이 인간에게 가하는 가혹한 시련 앞에 처해 있어요. 그러나 그는 결코 신에게 굴복하지 않죠. 그 시련 앞에서 그는 오연하게 나는 인간이고 자유로운 의지를 지닌 인간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듯해요.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그들의 엄숙한 선언이 마치 해방의 선언처럼 울려 퍼지는 것 같아요.

그러면 그들이 프로메테우스란 말이냐?

에, 정말 감독은 그들의 모습을 마치 희랍의 신화에 나오는 인물처럼 그려놓았어요. 거인 또는 영웅들이 모습이죠. 저는 이 영화에 사흘째 날에 등장하는 집시의 모습에서 감독의 이런 생각을 잘 읽을 수 있다고 봅니다. 집시들이 다가왔을 때 주인공 부녀들은 그들을 쫒아내죠. 집시들은 떠나면서 딸에게 책을 하나 전해 줍니다. 그 책을 딸이 나중에 읽는데, 거기에는 성소가 더럽혀졌고 너희가 저지르는 죄 때문에 이런 고난을 받는다는 식으로 말이 적혀 있어요. 이것이 바로 기독교적인 죄의식이죠. 집시가 전해주는 이 책은 바로 신에게 저항하는 이 영웅들을 신에게 굴복시키려는 달콤한 죄의식의 말이었던 셈이죠. 물론 집시 자신은 신의 율법에 따라 살지는 않아요. 집시들은 그런 죄의식 때문에 차라리 신의 명령을 포기한 삶 즉 욕망의 삶을 살지만 죄의식을 버릴 수는 없죠. 반면 이 영화의 주인공 두 부녀는 이런 신이 인간에게 부과하는 죄의식 자체를 거부합니다.

자거라투스투라야, 이제 알겠니?, 내가 왜 나를 바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인간이 어떻게 신의 힘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이냐? 결국 스스로 파멸에 이를 뿐이야.

니체 아부지, 신에 저항하는 유일한 길이 있지 않을까요?

그게 무어지? 넌 아직도 모르겠냐? 신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주인공 두 부녀는 마침내 마지막 날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때 그 스스로 먹기를 거부합니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인간에게 허용되는 최후의 자유의지가 아닐까요? 먼저 딸이 먹기를 거부하죠. 그리고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쓰면서 감자를 으깨어 먹으려던 아버지조차 마침내 손을 내려놓습니다. 분노에 가득한 눈으로 그들은 서로 마주보죠. 그리고 영화는 페이드아웃 됩니다.

 

 

 

 

 

구보씨 다시 뱀파이어를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Y가 비아냥거린 대로 구보씨가 말이 많아진 걸까? 아니, 그럴 리 없어, 하고 구보씨는 고개를 젓는다. 하루 종일 말 한 마디 없이 지낼 때도 있는 걸. 그래도 별로 불편한 줄 모르겠던데…어쨌든 나는 쓸데없이 떠들어 대는 그런 부류는 아니라구. 오히려 어쩔 수 없어서 한 동안 말을 계속하고 나면 금세 목이 쉬거나 잠겨 버린다니까. Y야말로 말이 많지. 아무 때나 끼어들어 말을 시키고 말이야.

그런 주제에 나보고 말꼼수라구? 쳇… 이 구보를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린가. 난 꼼수라는 걸 생각해 본 적도 없어. 꼼수 아닌 수를 생각하기에도 벅차고 힘든 처진데 말이야. 게다가 생각해보지도 않은 걸 무슨 수로 말하느냔 말이지. 하긴, 철학자들은 예로부터 그런 오해를 받아왔잖아. 기껏 생각한 것을 풀어놓으면, 생각하기 싫어하는 치들은 그걸 궤변이나 꼼수로 여긴다니까. 근데 내가 이런 말을 할라치면, Y는 이것도 또 꼼수라고 할 거 아냐. 그게 아니라고 변명을 시작하면, 그것도 또 꼼수에 대한 꼼수라고 할 거고. 그런데 어떻게 말을 하냐. 야, 안 돼!

그리고 말을 하는 것과 꼼수 부리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구. <나는 꼼수다>의 ‘나’는 어디까지나 가카지, <나는 꼼수다>의 멤버들이 아니거든. <복수는 나의 것이다>에서 ‘나’는 구약의 여호와지, 그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이 아닌 것처럼. 그러고 보니, <나는 꼼수다>의 박찬욱 버전은 <꼼수는 나의 것이다>가 되겠군. 꼼수는 나만의 것이니 너희 어린 백성들은 감히 꼼수를 부릴 생각은 말아라, 이렇게 가카께서 하교(下敎)하신다는 말이 될 테니까.

여기까지 혼자 너스레를 떨다 구보씨는 아차 하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철학자 구보씨가 이렇게 경망하게 굴어서 되겠는가 싶어서였다. 어쩌면 이게 다 Y에게 전염된 탓인지 몰라. Y는 내가 옆에 있을 때에도 가끔 <개그 콘서트>를 보면서 깔깔대고 웃거나, <나꼼수>를 듣다가 키득거리기도 하니까 말이야. 매스 미디어의 전염성, 이것이야말로 수평적으로 확산하는 뱀파이어적 전염의 한 전형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Y에게 목덜미를 여기저기 가볍게 물린 것일 수도 있어.

하여튼 대중적 전염의 문제는 그 수평성이 자칫 초래할 수 있는 일차원성에 있지, 하고 구보씨는 목덜미를 한 손으로 쓸어내리며 생각해 본다. 그것을 극복하여 운동의 평면에 굴곡과 회절(回折)을 도입하고, 나아가 도약과 초월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진정성에 어울리는 일일 것이다. 물론 이런 모습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짐짓 고투(苦鬪)를 수반하는 까닭이다. 그것도 어떤 승리나 구원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고투를.

고투라니…장난스럽게 말을 시작해서 갑자기 너무 심각하고 비장(悲壯)해지는 것 아닐까. 하지만 우리 삶이 원래 그렇지 않은가. 삶의 다양성이란 유형(類型)의 평면적 수다성(數多性)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원을 넘나드는 깊이의 요동(搖動)과 착종(錯綜)을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문화적 고안물은 이런 점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뱀파이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니, 뱀파이어야말로 그런 점을 잘 보여줄 수 있기에 주목할 만한 것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구보씨는 박찬욱의 <박쥐>가 뛰어난 영화라고 여긴다. 알려진 대로 <박쥐>는 에밀 졸라의 소설 <테레즈 라캥>을 토대로 했다. 줄거리와 사건뿐 아니라 인물의 이름까지 빌려왔다. 김옥빈이 연기한 태주는 테레즈, 신하균이 맡은 병약한 남편인 강우는 까미유, 눈동자 연기가 인상적인 김해숙의 라여사는 라캥 ? 이렇게 노골적으로 차음(借音)을 할 정도로 원작에 진 신세를 분명히 한다. 그러나 정작 <박쥐>의 강점은 다른 데 있다.

에밀 졸라는 27살이던 1867년에 이 소설을 내놓았고, 그 때문에 도덕적인 논란도 겪었다. 당시로서는 치정 살인을 살인자의 견지에서 묘사한 소설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못 껄끄러운 일이었나 보다. 그래서 작가는 이 소설을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잣대에서 읽지 말고 인간에 대한 ‘자연주의적’ 탐구로 읽으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견지에서 이 소설은 그다지 충격적이지도 신선하지도 않다. 졸라 식의 자연주의적 평면은 이미 진부해져서일까.

영화 <박쥐>가 <테레즈 라캥>을 빌려와서 거둔 눈에 띄는 성과는 아마 칸느에서 얻은 점수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리라 하더라도 외국감독이 예를 들어 <장화홍련전>을 차용해서 만든 영화를 들고 온다면 아무래도 점수를 더 주게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경우에조차 차용을 빛나게 하는 것은 단순한 차용 자체일 수 없다. 빌려오지 않은 요소가 빌려옴에 생명력을 준다. <박쥐>에서 그것은 뱀파이어 신부의 설정이다.

사실 <테레즈 라캥>과 <박쥐>에서 현저하게 큰 차이를 보이는 인물은 송강호가 분(扮)한 상현이다. 졸라의 소설에서는 테레즈와 애정 행각을 벌이고 그 남편 까미유를 살해하는 로랑이 지극히 세속적이고 자기 욕망에 충실한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에 <박쥐>에서 상현은 그것과 정반대의 캐릭터라고 할 만하다. (이름도 전혀 다르다. 로랑과 상현, 두 이름엔 유사성이 없다.)

상현은 자신의 목숨마저 희생하여 구원을 찾으려는 젊은 사제다. 그가 읊조리는 기도 말은 기복적(祈福的) 자기중심성의 반대 극으로 비친다. 너무 극단적이어서 섬뜩할 정도다. 이 기도는 배경으로 깔리는 바흐의 칸타타 <이히 하베 게누크>(저는 만족하나이다)의 선율과 어울려 비현실적인 종교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에 코멘트를 달면서 그러한 희생과 자기 파괴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오만함이라고 말한다. 인간으로서는 이룰 수 없는 경지를 희구하는 것, 일종의 비상을 꿈꾸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세계는 나의 것이 아니다. 희생은 고통스럽고 회피하기 어려운 선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자기 파괴로 살 수 있는 피안(彼岸)의 입장권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면, 우리는 우리가 아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러려고 하는 존재다.

뱀파이어는 가질 수 없는 것의 한 귀퉁이를 훔친 괴물의 모습, 말하자면 욕망과 초월의 키메라다. 영화 <박쥐>에서는 오만함의 대가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욕망을 떠날 수가 없음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치다. 죽음을 무릅쓴 희생이 꼭 성자(聖者)를 낳는 것은 아니다. 성자의 외양(外樣) 속에도 욕망이 숨어 있을 수 있고, 그것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비틀릴 수 있다. 그 비틀림을 증폭시켜 보여주는 것이 뱀파이어의 힘, 뱀파이어가 가진 초능력이다. 욕망에 갇혀 타락한 초월의 열망, 상승의 반대급부인 추락의 깊이.

뱀파이어가 된 상현은 욕망에 휘둘리면서도 초월을 향한 열망을 버리지 못한다. 그는 욕망을 제어하고자 하며, 착한 뱀파이어가 되고자 한다. 착한 뱀파이어, 타인을 배려하는 흡혈? 전에도 말한 것처럼 이것이 이 영화를 코미디로 만드는 아이러니의 기본 구조다. 모두가 욕망을 쫓아 뱀파이어의 힘을 탐하는 세상에서 상현은 선과 악의 구분을 놓지 않는다. 그것이 태주와 함께 욕망을 쫓던 상현을 다시 파멸로 이끈다. 또 그것이 상현을 단순한 코미디의 대상이 아니라 비극의 주인공이 되게 한다. 헤겔의 말처럼, 가치로운 것의 몰락이 비극을 이룬다.

“태주씨랑 오래오래 살고 싶었는데… 지옥에서 만나요.”

“죽으면 끝. 그 동안 즐거웠어요, 신부님.”

상현과 태주의 생각은 파멸의 순간에서도 다르다. 욕망이 지배하는 수평적 공간이 태주의 세계라면, 가치가 만드는 상승과 하강의 깊이가 상현의 무대다. 내재(內在)와 초월(超越)은 부딪혀 얽히지만, 끝내 하나가 되지 못하고 발산(發散)한다.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쁜가의 문제는 아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의 쾌락과 영원성의 약속 가운데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욕망의 허망함과 이데올로기의 속박 가운데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박찬욱이 내놓는 답은 진부할지 모르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그것은 낡은 구두의 이미지로 잘 드러나는 사랑이다.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을 못 이겨 ‘행복 의상실’ 앞 밤거리를 속옷 바람으로 달리던 맨발의 태주에게 벗어준 상현의 구두, 그 구두를 태주는 마지막 순간에 꺼내 신는다. 동트는 햇빛에 까맣게 타버린 두 몸뚱이는 재로 부서지고, 그렇게 얽혔던 사랑의 자취가 떨어져 남는다. 달리 어찌 하겠는가.

알겠지만, 이 사랑은 문제를 없애거나 해결해주지 못한다. 그러나 또한 이 사랑은 내재의 허망함으로 녹아 버리지도 않고 초월의 기만으로 휘발해 버리지도 않는다. 사랑은 이 둘의 얽힘 속에서 태어나고 사라지며 그렇게 끊어지듯 지속한다. 사랑은 고투(苦鬪)하고, 또 고투한다.

물론 이런 고투에는 여러 버전이 있다. 박찬욱의 <박쥐>가 초월에 대한 열망의 과도함을 냉소(冷笑)하면서도 그 열망을 떨쳐내지 못하고 짐짓 거기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또 하나 주목할 만한 뱀파이어 영화인 <렛미인>은 현실의 제약을 뛰어넘는 강렬한 사랑을 제시하는 듯하지만 그 이면에서 작용하는 거래의 세속적 효과를 놓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엔 이 정도로 하자. 구보씨가 속절없이 또 이렇게 많은 말을 늘어놓게 된 것은 지난번에 Y가 느닷없이 말을 자른 데다가 말꼼수 운운하고 끝났던 여운이 영 개운치 않았기 때문이다. 개운치 않다는 건 뭔가 켕기는 게 있다는 뜻 아니니? Y라면 틀림없이 또 이렇게 물고 늘어졌을 것이다. 사실, 그녀는 나이에 비해 이가 튼튼한 편이다. 다른 건 몰라도 구보씨를 비웃을 때조차 살짝 드러나는 그녀의 가지런하고 하얀 이는 매력적이다. 그건 아름다움과 선함이 합치하지는 않는다는 유력한 증거다.

오늘 세상을 뒤덮은 하얀 눈과 같은 차가운 아름다움, 그것은 이면의 온갖 것들을 가린다. 그 미봉적(彌縫的) 차폐(遮蔽)가 아름다운 것은 아마 그것 또한 세상이 우리를 유혹하는 방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누구라서 그러한 아름다움을 겉치레고 허식이라며 마다할 것인가. 하얗게 내려 쌓이는 눈, 그것이 주는 모든 불편에도 불구하고 또 그것이 숨기는 모든 지저분함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눈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리고 모든 아름다움은 삶의 유혹이다. 그러한 한, 뱀파이어는 이곳에도 파고든다. 순백의 눈 위로 스미는 혈흔, 그 뚜렷한 색채의 대비?<렛미인>(2008)을 보라.

자거라투스트라 비키니를 만나다 [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비키니 씨, 저 알겠어요?

아, 자거라투스트라 씨, 안 그래도 소위 서자 철학자라는 자거라 씨한테 가보려 했어요. 지금 저한테 걸린 문제는 철학적인 문제가 아닌가요? 그런데 한국의 그 세계적인 철학자들께서는 어째 한 말씀도 없나요?

안 그래도 이 자거라투스트라가 나서 볼까 했지만, 원래 이 문제가 ….

자거라 씨도 겁먹었나요? 60만 ‘삼국카페’에서 들고 일어나니 그럴 만도 하겠네요.

왜 겁이 없겠소. 비키니 씨, 하지만 우리끼리 싸운다는 게 맘이 안 들어서, 그냥 넘어가기만 바랬어요.

아니 솔직히 한국의 철학자들이 언제나 그렇게 뒤꽁무니 뺐던 것은 사실이 아닌가요? 정치적인 문제야 철학자니까 몰라서, 아니 관심의 영역이 아니라서 그렇다 하더라도, 이처럼 윤리적인 또는 문화적인 문제가 나올 때도 항상 점잖은 척 뒷짐을 지고 있었던 거, 맞지요? 진중권 씨 혼자 일당백으로 싸우는데 미안하지도 않나요?

하긴 그래요. 우리 철학자들도 요새는 연구기금을 안 주면 연구 안하거든요. 그런데 보아하니 비키니 씨나 심지어 나꼼수 씨조차 큰돈은 없는 것 같은데, 무얼 하러 이 고상한 몸을 더럽히겠소.

더럽히다니요? 저 비키니는 정말 이 아름다운 가슴조차 더럽히면서 이 나라를 위해 나섰는데, 대체 이 나라 철학자들은 뭐가 그렇게 고상한 체 하는지 모르겠어요. 옛날에는 그래도 철학자 하면 디오게네스처럼 통 속에 사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우리나라 철학자들은 모두 시멘트 통속에 사는 것 같아요. 디오게네스의 통보다 시멘트 통이 더 고상한가요?

아니, 하여튼 미안하오. 하지만 이 문제는 철학자들도 별무 소용이요.

왜 그래요? 저 비키니, 차라리 확 벗을까요? 그러면 철학자들이 한마디 하겠어요?

누드 퍼포먼스의 역사야 길지요. 그때마다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곤 했고요. 그러면 이왕 만난 김에 한번 따져 봅시다. 여성의 누드, 또는 벗은 몸은 본래의 역할 즉 사랑의 매체라는 것 외에 사실 여러 가지로 이용되어 왔어요.

자거라 씨, 그런데 사랑이라면 사적이며 또 비밀스러운 관계가 아닌가요? 여성의 몸을, 아니 뭐 남성의 몸이라고 해도 좋은데, 그런 공간에만 제한해야 하나요? 푸코의 연구에 따르면 그렇게 몸을 사적인 공간에 밀어 넣은 것은 근대 기독교의 권력 행사였다고 하잖아요.

하긴 여성의 몸을 사적인 공간을 벗어나 공적인 공간에 등장시키면서 문제가 발생하죠. 이런 영역이 워낙 다양하니까 일일이 검토하기에는 시간이 없겠죠. 대표적으로 두 경우를 들어보도록 하죠. 몸이 특히 여성의 몸이 가장 많이 쓰인 것이 아마 상업적인 광고의 매체가 아닐까요? 그에 못지않게 예술의 매체가 되기도 했지요. 그런데 예술의 매체일 때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되어 왔던 것 같아요. 하지만 상업적인 광고의 경우에는 여성의 몸에 대한 모독이라고 하면서 많은 비난을 받았지요.

왜 예술은 되는데, 광고는 안 되었던가요?

비키니 씨, 그것은 예술이 아마도 가치가 있는 것이고 더구나 예술의 경우 대부분의 경우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여성의 벗은 몸을 매체로 썼으니, 그렇지 않을까요? 이 경우는 모독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본래적인 가치를 고양시키는 것이었으니까요. 반면 여성의 몸을 광고로 이용했을 경우는 비난을 항상 받아왔지요. 예를 들어 자동차를 여성의 몸에 비유하면, 여성의 몸이 뭔가 쇠 덩어리가 되는 것 같아, 평가절하를 받는 것 같지 않나요?

글쎄요. 자거라 씨. 잘 모르겠어요. 도올 김용옥 선생의 딸은 자기의 누드를 매체로 해서 환경파괴와 인간의 욕심을 비판하는데 그것도 보면 그건 광고인가요 아니면 예술인가요?

비키니 씨, 그 분이 그 때문에 돈 받은 적은 없다니, 예술에 속하겠지요?

그러면 저도 돈 한 푼 누구한테 받은 일이 없으니, 광고를 한 것은 아니지 않아요. 더구나 저는 몸을 통해 정치적 주장을 펼쳤고, 더구나 저의 정치적인 주장이 독재나 착취를 촉구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오히려 반대로 민주화나 사회평등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려 했으니, 더 높은 가치에 기여하는 예술에 가까운 것으로 보아도 되지 않을까요?

그럼요. 비키니 씨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잘했어요. 당신은 공지영 씨에 못지않는 예술가입니다.

물론 저야, 공지영 씨처럼 탁월한 예술적 표현을 하기에는 부족하죠. 하지만 표현이야 부족했더라도 그 표현하려는 내용이야, 가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서투른 예술가도 많지 않아요. 요새 지하철 다니다 보면 저보다 못한 시를 쓰는 시인도 많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공지영 씨한테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니 저는 모르겠어요. 제 몸이 그렇게 보기 싫었던 건가요? 아니면 제가 표현하려는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가요?

아니 표현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저는 감탄했어요. 그냥 말로 ‘가슴이 터지도록’ 이라고 하면 자주 쓰는 진부한 표현이잖아요. 그런데 정말 가슴을 눈으로 보여주니, 이 표현 자체가 생생한 아름다움을 얻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철학에서 개념(Concept)은 원래 임신(Conceive)이라는 의미인데, 제가 언젠가 이 표현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자, 철학의 ‘개념’의 의미가 정말 생생하게 다가왔어요. 그때처럼 저는 표현의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고마워요. 그런데 저는 자거라 씨의 주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가치라니, 좀 억압적인 느낌이 들지 않아요? 우선 가치 평가만을 가지고 본다면,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사람이야 높은 가치를 받겠지만 저같이 생물학적인 완성도에서 그렇게 높지는 않는 경우는 별 가치 없는 것이 아닌가요? 그러면 가치 없는 몸은 아무렇게나 이용되어도 된다는 얘기가 아니겠어요?

비키니 씨, 당신이야 딴지 총수조차 완성도에 감탄한다 했으니, 뭐 걱정이요. 하지만 사실 듣고 보니 가치 비교만으로는 안 될 것 같네요. 왜냐하면 인간의 몸은 어떤 완성도와 상관없이 항상 가치로 평가되기 이전의 신성성을 가진다고 보아도 되니까요? 몸이 이용되려면 적어도 그런 신성성에 걸 맞는 영역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자거라 씨, 몸이 신성하다 하니까 정말 더 거부감이 드네요. 솔직히 이런 신성한 몸이라면 사랑을 위해서도 사용한다는 것조차 죄스럽게 여겨지고요. 그런 생각은 결국 너무 억압적인 것이 아닌가요? 무슨 이 시대가 빅토리아 시대도 아니고, 또 솔직한 것 같지도 않고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몸을 이용해서 먹고 사는데 그들은 그러면 이 신성한 몸을 더럽히는 건가요?

아, 할 말이 없군요. 비키니 씨

자거라 씨, 만일 몸이 신성한 것이라면 어떤 다른 더 고위한 가치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잖아요. 그러면 몸에 스스로의 권리가 있다는 것 아닐까요? 우리는 몸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그렇게 보면 몸은 쾌감을 원하는 것 같아요. 자기에게나 남에게 서로 쾌감을 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물론 누가 강제를 이용해서 예를 들어 물리적인, 심리적인, 심지어 화폐적인 강제를 이용해서 쾌감을 강요한다면 그건 안 되겠죠. 그것은 일방만의 쾌감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자유로운 자신의 결정이라고 한다면 이런 몸을 통한 쾌감은 어떤 방식으로 야기되든 그게 정치적인 매체든 예술적인 매체이든 문제없는 것 아닐까요? 상업적인 광고의 경우는 좀 문제가 있겠네요. 돈의 노예라서 억지로 불쾌하지만 몸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돈 받더라도 즐겁게 한다면 문제없지 않을까요?

공지영 씨도 비키니 씨야 잘못이 없다 했던 것 같아요. 아니 불쾌하지만 비난할 거리는 아니다 보고, 다만 비키니 씨와 같은 누드(아니 비키니) 퍼포먼스를 장려한다는 점에서 나꼼수 씨를 비난한 거겠죠.

정말, 그래서 제가 자거라 씨를 찾아가려 했던 거죠. 나꼼수 씨가 저의 벗은 몸을 보고 마초적으로 즐겼다는 것이 공지영 씨의 판단인데, 저는 그건 타인의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재단한 것으로 봅니다. 물론 나꼼수 씨가 ‘대박’이라든가, ‘생물학적 완성도’라든가 ‘코피’라든가 말을 썼더라도 그것은 저의 벗은 몸을 보고 그저 욕망에 불타올랐다는 것은 아닐 거예요. 저는 선의로 생각합니다.

선의라니?

아까 말씀하셨잖아요. 표현방식의 생생함이라는 거죠. 저는 ‘가슴이 터지도록’이라는 표현을 생생하게 전달할 ‘수단을 찾았던 것이었어요. 아마도 나꼼수 씨가 말한 ‘생물학적인 완성도’란 ‘표현의 완성도라는 말을 찾지 못해서 나온 잘못된 언어 선택이라 봐요. 정말 나꼼수 씨가 내 몸을 생물학적으로 감상하고 있었다고 보지는 않거든요. 더구나 제 몸이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결코 완성도가 높지 않고요. 그럼에도 그렇게 표현한 것은 그런 의미겠죠.

그래도 비키니 씨, ‘코피’라는 표현은 사실 이미 그런 마초적인 감정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닐까요?

자거라 씨, 손가락으로 달을 지시하는데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바라보니, 잘못이라고 하기는 하겠죠. 그러나 사실 이런 문제에는 늘 이중성이 있지 않나요. 예술에서도 누드 퍼포먼스란 그런 이중성을 노리는 것이고요. 그러므로 손가락만 바라 본 사람이 제 뜻을 이해못했다고 비판할 수는 있어도 잘못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겠죠. 물론 그것이 그의 인간성이 아직 부족하다는 정도는 드러내기는 하겠지만 말이죠.

비키니 씨, 몸이 쾌감을 위한 것으로 충분하다면, 쾌감을 위한 것이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것일까요? 그럼 돈 받고 즐겁게 몸을 파는 것도 마찬가지인가요?

자거라 씨, 너무 극단화시키는 것 같아요. 매춘 속에서 쾌감을 느꼈다는 여성은 실제로 거의 없지 않아요. 사실 쾌감이란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의 결합으로 만들어지지, 그저 순수한 육체적인 접촉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그런데 정신적인 것을 너무 무겁게 잡으면 육체가 감당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만일 진정으로 사랑할 때만 몸이 매체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엄격한 도덕적인 입장이겠는데, 이 세상에 정말 그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요? 이제 우리는 사랑을 상당히 가볍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요? 그저 호감이 가고, 매력을 느낀다는 정도로. 물론 이런 가벼움이야 시대나 사회에 따라서 상당히 달라지겠죠. 저는 우리나라에서 사랑은 너무 무거워서, 저 같은 사람은 감당하기 힘들어요. 그래서 사실 저는 아예 포기하고 맙니다. 사랑을 너무 무겁게 보니, 좀 지겨워요. 그러고 그런 사랑이란 것도 실제는 없고요.

가벼운 사랑이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영화가 생각나는군요. 그런데 비키니 씨, 남에게 불쾌감을 주는 노출도 있다 하지 않아요? 왜 ‘바바리 맨’에 관한 얘기 들어보았잖아요? 솔직히 저는 부산에서 오래 살았는데 여름에 해운대 나가는 게 제일 싫었어요. 정말 아름다운 몸매란 찾아보기 힘들고 거의 대부분 불쾌감을 주더군요. 살들이 비죽비죽 튀어나오는데 말이죠. 그래서 저의 지론은 해수욕장에서는 비키니를 금지하자는 거예요. 모두 옷 입고 바다에 들어가라 이런 말이죠. 불쾌한 몸은 샤워할 때 혼자만 보면 된다는 거죠.

자거라 씨, 논점 이탈이 아니에요. 뭐 철학자가 그래요.

비키니 씨, 논점 이탈이라니요?

지금 문제는 여성의 몸을 (뭐 남성의 몸이라 해도 좋겠지요) 사랑이라는 관계 외에, 특히 정치적인 투쟁의 수단으로 이용해도 되는가 하는 문제이잖아요.

그거야 이제 정리된 것 아닌가요? 상업적인 것이, 예술적인 가치를 위해서 몸을 매체로 이용하는 것이 정당하다면 사회적인 가치를 위한 투쟁도 마땅하지 않을까요? 물론 예술의 경우는 직접적인 몸이 아니라 이미지화된, 기호화된 몸이라는 차이는 있겠지만, 사실 퍼포먼스 같은 경우는 인간의 몸을 직접 사용하기도 하니까, 뭐가 다르겠어요.

맞아요. 그런데 자거라 씨는 아름다운 몸매 타령만 하니, 그게 논점 이탈이 아니에요?

아니, 비키니 씨가 몸이란 쾌감의 수단이라 하니까. 꼭 쾌감만 주는 것은 아니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거죠.

육체란 쾌감을 주는 건데, 어떻거나 쾌감을 주지 않는다면 그런 육체는 그 자체로서 존중받더라도, 굳이 드러낼 필요는 없지 않아요. 정말 답답해, 정말 가슴을 풀어 헤쳐야 하겠네요. ‘가슴이, 아니 복장이 터지겠다, 철학자여’ 이거 내일 나꼼수에 오를 거예요. 내 복장 누드 사진하고 같이 오를 겁니다.

아니 참아요. 비키니 씨. 제가 먼저 벗고 싶지만, 남에게 불쾌감을 주는 체형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