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씨 다시 뱀파이어를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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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원(부산대)

Y가 비아냥거린 대로 구보씨가 말이 많아진 걸까? 아니, 그럴 리 없어, 하고 구보씨는 고개를 젓는다. 하루 종일 말 한 마디 없이 지낼 때도 있는 걸. 그래도 별로 불편한 줄 모르겠던데…어쨌든 나는 쓸데없이 떠들어 대는 그런 부류는 아니라구. 오히려 어쩔 수 없어서 한 동안 말을 계속하고 나면 금세 목이 쉬거나 잠겨 버린다니까. Y야말로 말이 많지. 아무 때나 끼어들어 말을 시키고 말이야.

그런 주제에 나보고 말꼼수라구? 쳇… 이 구보를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린가. 난 꼼수라는 걸 생각해 본 적도 없어. 꼼수 아닌 수를 생각하기에도 벅차고 힘든 처진데 말이야. 게다가 생각해보지도 않은 걸 무슨 수로 말하느냔 말이지. 하긴, 철학자들은 예로부터 그런 오해를 받아왔잖아. 기껏 생각한 것을 풀어놓으면, 생각하기 싫어하는 치들은 그걸 궤변이나 꼼수로 여긴다니까. 근데 내가 이런 말을 할라치면, Y는 이것도 또 꼼수라고 할 거 아냐. 그게 아니라고 변명을 시작하면, 그것도 또 꼼수에 대한 꼼수라고 할 거고. 그런데 어떻게 말을 하냐. 야, 안 돼!

그리고 말을 하는 것과 꼼수 부리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구. <나는 꼼수다>의 ‘나’는 어디까지나 가카지, <나는 꼼수다>의 멤버들이 아니거든. <복수는 나의 것이다>에서 ‘나’는 구약의 여호와지, 그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이 아닌 것처럼. 그러고 보니, <나는 꼼수다>의 박찬욱 버전은 <꼼수는 나의 것이다>가 되겠군. 꼼수는 나만의 것이니 너희 어린 백성들은 감히 꼼수를 부릴 생각은 말아라, 이렇게 가카께서 하교(下敎)하신다는 말이 될 테니까.

여기까지 혼자 너스레를 떨다 구보씨는 아차 하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철학자 구보씨가 이렇게 경망하게 굴어서 되겠는가 싶어서였다. 어쩌면 이게 다 Y에게 전염된 탓인지 몰라. Y는 내가 옆에 있을 때에도 가끔 <개그 콘서트>를 보면서 깔깔대고 웃거나, <나꼼수>를 듣다가 키득거리기도 하니까 말이야. 매스 미디어의 전염성, 이것이야말로 수평적으로 확산하는 뱀파이어적 전염의 한 전형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Y에게 목덜미를 여기저기 가볍게 물린 것일 수도 있어.

하여튼 대중적 전염의 문제는 그 수평성이 자칫 초래할 수 있는 일차원성에 있지, 하고 구보씨는 목덜미를 한 손으로 쓸어내리며 생각해 본다. 그것을 극복하여 운동의 평면에 굴곡과 회절(回折)을 도입하고, 나아가 도약과 초월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진정성에 어울리는 일일 것이다. 물론 이런 모습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짐짓 고투(苦鬪)를 수반하는 까닭이다. 그것도 어떤 승리나 구원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고투를.

고투라니…장난스럽게 말을 시작해서 갑자기 너무 심각하고 비장(悲壯)해지는 것 아닐까. 하지만 우리 삶이 원래 그렇지 않은가. 삶의 다양성이란 유형(類型)의 평면적 수다성(數多性)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원을 넘나드는 깊이의 요동(搖動)과 착종(錯綜)을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문화적 고안물은 이런 점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뱀파이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니, 뱀파이어야말로 그런 점을 잘 보여줄 수 있기에 주목할 만한 것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구보씨는 박찬욱의 <박쥐>가 뛰어난 영화라고 여긴다. 알려진 대로 <박쥐>는 에밀 졸라의 소설 <테레즈 라캥>을 토대로 했다. 줄거리와 사건뿐 아니라 인물의 이름까지 빌려왔다. 김옥빈이 연기한 태주는 테레즈, 신하균이 맡은 병약한 남편인 강우는 까미유, 눈동자 연기가 인상적인 김해숙의 라여사는 라캥 ? 이렇게 노골적으로 차음(借音)을 할 정도로 원작에 진 신세를 분명히 한다. 그러나 정작 <박쥐>의 강점은 다른 데 있다.

에밀 졸라는 27살이던 1867년에 이 소설을 내놓았고, 그 때문에 도덕적인 논란도 겪었다. 당시로서는 치정 살인을 살인자의 견지에서 묘사한 소설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못 껄끄러운 일이었나 보다. 그래서 작가는 이 소설을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잣대에서 읽지 말고 인간에 대한 ‘자연주의적’ 탐구로 읽으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견지에서 이 소설은 그다지 충격적이지도 신선하지도 않다. 졸라 식의 자연주의적 평면은 이미 진부해져서일까.

영화 <박쥐>가 <테레즈 라캥>을 빌려와서 거둔 눈에 띄는 성과는 아마 칸느에서 얻은 점수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리라 하더라도 외국감독이 예를 들어 <장화홍련전>을 차용해서 만든 영화를 들고 온다면 아무래도 점수를 더 주게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경우에조차 차용을 빛나게 하는 것은 단순한 차용 자체일 수 없다. 빌려오지 않은 요소가 빌려옴에 생명력을 준다. <박쥐>에서 그것은 뱀파이어 신부의 설정이다.

사실 <테레즈 라캥>과 <박쥐>에서 현저하게 큰 차이를 보이는 인물은 송강호가 분(扮)한 상현이다. 졸라의 소설에서는 테레즈와 애정 행각을 벌이고 그 남편 까미유를 살해하는 로랑이 지극히 세속적이고 자기 욕망에 충실한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에 <박쥐>에서 상현은 그것과 정반대의 캐릭터라고 할 만하다. (이름도 전혀 다르다. 로랑과 상현, 두 이름엔 유사성이 없다.)

상현은 자신의 목숨마저 희생하여 구원을 찾으려는 젊은 사제다. 그가 읊조리는 기도 말은 기복적(祈福的) 자기중심성의 반대 극으로 비친다. 너무 극단적이어서 섬뜩할 정도다. 이 기도는 배경으로 깔리는 바흐의 칸타타 <이히 하베 게누크>(저는 만족하나이다)의 선율과 어울려 비현실적인 종교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에 코멘트를 달면서 그러한 희생과 자기 파괴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오만함이라고 말한다. 인간으로서는 이룰 수 없는 경지를 희구하는 것, 일종의 비상을 꿈꾸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세계는 나의 것이 아니다. 희생은 고통스럽고 회피하기 어려운 선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자기 파괴로 살 수 있는 피안(彼岸)의 입장권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면, 우리는 우리가 아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러려고 하는 존재다.

뱀파이어는 가질 수 없는 것의 한 귀퉁이를 훔친 괴물의 모습, 말하자면 욕망과 초월의 키메라다. 영화 <박쥐>에서는 오만함의 대가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욕망을 떠날 수가 없음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치다. 죽음을 무릅쓴 희생이 꼭 성자(聖者)를 낳는 것은 아니다. 성자의 외양(外樣) 속에도 욕망이 숨어 있을 수 있고, 그것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비틀릴 수 있다. 그 비틀림을 증폭시켜 보여주는 것이 뱀파이어의 힘, 뱀파이어가 가진 초능력이다. 욕망에 갇혀 타락한 초월의 열망, 상승의 반대급부인 추락의 깊이.

뱀파이어가 된 상현은 욕망에 휘둘리면서도 초월을 향한 열망을 버리지 못한다. 그는 욕망을 제어하고자 하며, 착한 뱀파이어가 되고자 한다. 착한 뱀파이어, 타인을 배려하는 흡혈? 전에도 말한 것처럼 이것이 이 영화를 코미디로 만드는 아이러니의 기본 구조다. 모두가 욕망을 쫓아 뱀파이어의 힘을 탐하는 세상에서 상현은 선과 악의 구분을 놓지 않는다. 그것이 태주와 함께 욕망을 쫓던 상현을 다시 파멸로 이끈다. 또 그것이 상현을 단순한 코미디의 대상이 아니라 비극의 주인공이 되게 한다. 헤겔의 말처럼, 가치로운 것의 몰락이 비극을 이룬다.

“태주씨랑 오래오래 살고 싶었는데… 지옥에서 만나요.”

“죽으면 끝. 그 동안 즐거웠어요, 신부님.”

상현과 태주의 생각은 파멸의 순간에서도 다르다. 욕망이 지배하는 수평적 공간이 태주의 세계라면, 가치가 만드는 상승과 하강의 깊이가 상현의 무대다. 내재(內在)와 초월(超越)은 부딪혀 얽히지만, 끝내 하나가 되지 못하고 발산(發散)한다.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쁜가의 문제는 아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의 쾌락과 영원성의 약속 가운데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욕망의 허망함과 이데올로기의 속박 가운데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박찬욱이 내놓는 답은 진부할지 모르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그것은 낡은 구두의 이미지로 잘 드러나는 사랑이다.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을 못 이겨 ‘행복 의상실’ 앞 밤거리를 속옷 바람으로 달리던 맨발의 태주에게 벗어준 상현의 구두, 그 구두를 태주는 마지막 순간에 꺼내 신는다. 동트는 햇빛에 까맣게 타버린 두 몸뚱이는 재로 부서지고, 그렇게 얽혔던 사랑의 자취가 떨어져 남는다. 달리 어찌 하겠는가.

알겠지만, 이 사랑은 문제를 없애거나 해결해주지 못한다. 그러나 또한 이 사랑은 내재의 허망함으로 녹아 버리지도 않고 초월의 기만으로 휘발해 버리지도 않는다. 사랑은 이 둘의 얽힘 속에서 태어나고 사라지며 그렇게 끊어지듯 지속한다. 사랑은 고투(苦鬪)하고, 또 고투한다.

물론 이런 고투에는 여러 버전이 있다. 박찬욱의 <박쥐>가 초월에 대한 열망의 과도함을 냉소(冷笑)하면서도 그 열망을 떨쳐내지 못하고 짐짓 거기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또 하나 주목할 만한 뱀파이어 영화인 <렛미인>은 현실의 제약을 뛰어넘는 강렬한 사랑을 제시하는 듯하지만 그 이면에서 작용하는 거래의 세속적 효과를 놓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엔 이 정도로 하자. 구보씨가 속절없이 또 이렇게 많은 말을 늘어놓게 된 것은 지난번에 Y가 느닷없이 말을 자른 데다가 말꼼수 운운하고 끝났던 여운이 영 개운치 않았기 때문이다. 개운치 않다는 건 뭔가 켕기는 게 있다는 뜻 아니니? Y라면 틀림없이 또 이렇게 물고 늘어졌을 것이다. 사실, 그녀는 나이에 비해 이가 튼튼한 편이다. 다른 건 몰라도 구보씨를 비웃을 때조차 살짝 드러나는 그녀의 가지런하고 하얀 이는 매력적이다. 그건 아름다움과 선함이 합치하지는 않는다는 유력한 증거다.

오늘 세상을 뒤덮은 하얀 눈과 같은 차가운 아름다움, 그것은 이면의 온갖 것들을 가린다. 그 미봉적(彌縫的) 차폐(遮蔽)가 아름다운 것은 아마 그것 또한 세상이 우리를 유혹하는 방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누구라서 그러한 아름다움을 겉치레고 허식이라며 마다할 것인가. 하얗게 내려 쌓이는 눈, 그것이 주는 모든 불편에도 불구하고 또 그것이 숨기는 모든 지저분함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눈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리고 모든 아름다움은 삶의 유혹이다. 그러한 한, 뱀파이어는 이곳에도 파고든다. 순백의 눈 위로 스미는 혈흔, 그 뚜렷한 색채의 대비?<렛미인>(2008)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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