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씨, 렛미인을 말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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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씨, 렛미인을 말하다

문성원(부산대)

세상일이 뜻 같지 않다. 요즘은 매사가 그렇다. 하긴 모든 일이 뜻대로 될 바에야 굳이 뜻이 필요하겠는가. 뜻대로 안 되는 세상이기에, 우정 뜻을 세우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분투해야 하는 것이리라. 이 좋은 봄날에 웬 허접한 소리냐고? 글쎄 말이다. 구보씨 딴에는 선거 뒤끝의 착잡한 마음이 아직 가시지 않은 모양이다.

구보씨가 사는 남쪽 동네엔 어제까지 흐드러지던 벚꽃이 이제 꽃잎을 하냥 떨구는 중이다. 저 꽃잎 하나하나에도 뜻이 있을까? 문득 구보씨는 생각해 본다. 꽃잎들에 얹히는 저 햇살과 향기를 나르는 저 바람에도? 그래,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 뜻은 인간의 뜻과는 상관이 없을 터이다. 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뜻이라는 표현을 앞세워 세상 속으로 교묘히 파고든다.

뜻이라는 말은 같아도 그 뜻은 다르다. 인간의 뜻과 자연의 뜻이 다르고, 너의 뜻과 나의 뜻이 다르다. 그러나 원체 뜻이란 나를 통하여서야 그 뜻함이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던가. 내가 모르는 뜻은 엮이지도 풀리지도 못하니 내게 뜻으로 다가올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에 뜻이 있다 싶으면 나름으로 짐작하고 해석하기 마련이다. 그 덕택에 뜻은 곧잘 오해된다.

인간의 마음에는 자신이 실제로 잘 모르는 사안에 대해서도 가설을 세우고 설명을 하려는 본성이 있다고 한다. 오늘날의 뇌생리학이 밝혀 놓은 바에 따르면, 우리의 좌뇌는 자신이 알지 못하고 취한 행동에 대해서도 그럴 듯한 설명을 찾아 늘어놓는다.

우뇌와 좌뇌를 잇는 뇌량(腦梁)이 분리된 환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런 사람들에게서는 우뇌에 주어진 정보가 좌뇌에 제공되지 않는다. 가령 오른쪽 뇌와 연결된 시야에 “웃어보세요”라는 쪽지를 보여주면 이 사람은 거기에 따라 웃지만, 그 사람은 자신이 왜 웃는지 모르는 채 자신이 웃는다는 사실만 의식한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 “지금 왜 웃고 있나요?” 라고 물어보면, 그는(정확히 말해 그 사람의 좌뇌는) 모른다고 하지 않고 그럴듯한 설명을 찾아낸다. “당신이 재미있어서요.”라고 답하는 식이다.

 

틀린 답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가장 그럴듯한 답을 찾아 제시한다. 어차피 우리가 아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라면, 이렇게 주어진 한계 내에서 가설을 만들고 이론을 찾는 것이, 미지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효과적으로 살아가는 방편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도움은 제한적이다. 또 부작용도 있다. 신화적 세계관의 역할이나 문제점을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우리 삶에서 신화나 신화와 유사한 이데올로기를 떨쳐버리기는 어렵다. 뜻으로 얽힌 우리의 세계는 예나 지금이나 신화적 면모를 갖는다. 넓게 보면, 불명료한 사안에 뜻을 제공해 주는 이야기의 얼개가 곧 신화다. 세상이 한층 복잡한 것은 이런 신화적 뜻의 세계가 여럿이고 또 그런 세계들이 세상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 나름의 세계를 갖는데, 그런 세계에는 다른 사람들의 세계에 대한 해석이 포함된다. 여러 뜻들에 대한 해석이 내 뜻의 재료가 된다. 이것은 누구나 마찬가지고, 그래서 우리의 마음 읽기는 우리 마음의 일부다. 덕분에, 우리의 삶은 부분적인 이해와 부분적인 오해들로 얽혀 있다.

그러니 세상일이 뜻대로 잘 될 리 없다. 우리의 시도는 무수한 시행착오의 연속이다. 그때마다 우리는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해석의 얼개를 수선하고 뜻의 가닥들을 다시 풀어 엮는다. 내가 받아들인 자연의 뜻에 대한 해석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의 뜻에 대한 이해가 잘못 되었을 수도 있다. 이렇게 나의 세계는 매번 개축되고 그때마다 다른 세계의 요소가 내 세계 안으로 들어온다. 사정이 좋을 때 그렇다는 얘기다.

그럼 나쁠 경우에는 어떤가?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뜻을 세계에 덮어씌우려 한다. 제 뜻이 아닌 내 뜻을 앞세워 세상을 해석하려 한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만, 그런 뜻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만 다른 세계의 요소를 받아들이려 한다. 수용의 거름망이 그만큼 강고하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밖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건 무조건 좋고 안의 세계를 고수하려드는 건 무조건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고집스러움이라고 다 해로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주제나 소재에 대한 구보씨의 작은 고집, 이를테면 요즘 들어 반쯤 장난스레 드러내는 뱀파이어 영화에 대한 고집 따위는 그런 대로 봐줄만 한 것이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지금도 구보씨는 <렛미인>이라는 뱀파이어 영화가 뜻대로 안 되는 세상 살기의 방식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 보고 있는 중이다. 좋은 쪽으로? 나쁜 쪽으로? 글쎄, 어느 쪽이겠는가?

<렛미인>에 등장하는 뱀파이어는 독특하다. 어린 소녀의 모습이다. 이 영화의 원작 소설에 따르면, 원래 이 뱀파이어의 정체는 소녀가 아니라 거세된 소년이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떤가. 분화한 성적 매력이 나타나기 전 연약한 모습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도 소설 속에선 명확히 드러나는 아동성애의 코드가 숨겨져 있다는 건 짚고 넘어가자. 아동성애 도착(페도필)은 무력하고 핍박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그러면서도 쉽게 지배욕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잘 나타난다.

그런데 <렛미인>의 소녀(또는 소년) 엘리는 뱀파이어다. 연약해 보이지만 실상은 초인간적 존재다. 물론 흡혈의 어두운 욕망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그것을 기꺼워하지는 않는다. 어쩔 수 없이 피를 필요로 할 뿐이다. 이 어쩔 수 없음이라는 조건은 연약해 보이는 외모와 호응한다. 도움과 보호가 필요한 가련한 존재, 그러나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이중적 존재가 뱀파이어 엘리다.
영화 렛미인(Let The Right One In, 2008)의 한 장면
이 뱀파이어 소녀 엘리와 가까워지는 건 학교에서 왕따 당하는 소년 오스카다. 둔하고 약한 오스카는 힘이 지배하는 또래의 세계에서 기를 펴지 못한다. 영화에선 가냘픈 금발의 소년으로 나오지만 원래 소설에선 뚱뚱한 아이로 묘사되어 있다. 돼지 소리를 내보라고 놀림을 당하는 것은 그 탓이다. 그런데 이 오스카는 바보처럼 착하기만 하지 않다.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에게 복수하기를 원한다. 그는 밤에 아파트 정원으로 칼을 품고 나가 애꿎은 나무를 찌른다. 가상의 응징인 셈이다.

이 가상이 현실이 될 수는 없을까? 오스카의 뜻이 실현될 수는 없을까? 그건 나름으로 정의의 구현일 텐데 말이다. 엘리는 당하기만 하지 말라고 오스카를 부추긴다.

“받은 만큼 돌려줘. 더 세게. 그래야 걔네들은 그만 둘 거야.”

“하지만…걔들이…”

“그 때엔 내가 도와줄게. 나는 그럴 수 있어.”

오스카는 이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대응을 하고 아이들은 움찔한다. 브라보!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만만할 손가. 뜻밖에 한방 먹은 악동들은 더 크고 더 폭력적인 지원군을 부르고, 오스카는 속절없이 극한의 궁지에 몰린다. 이때 엘리가 나타나 섬뜩할 만큼 충격적인 폭력의 응징을 가한다. 그것은 어쩌면 정의로워 보인다. 핍박을 당하는 약한 자를 돕는 응징. 피의, 어둠의 응징. 여기서 뱀파이어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는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의 영어판 포스터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LET THE RIGHT ONE IN.” 이것은 정의로운 뱀파이어의 탄생인가?

오스카는 엘리가 뱀파이어라는 걸 안다. 선택의 여지는 있다.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뱀파이어는 초대받지 못하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가 그 어둠의 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장치다. 오스카가 엘리를 초대하는 것은 왜일까? 초대 받지 못한 채 오스카의 방으로 들어온 엘리는 온 몸에서 피를 흘린다. 정수리에서도 눈에서도 피가 스며나온다. 이 모습을 본 오스칼은 황급히 초대의 말을 내뱉고 엘리를 껴안는다.

“넌 누구니?” “난 너와 같아.”

“…. 난 사람들을 죽이지는 않아.”

“하지만 그럴 힘이 있다면 그러고 싶어 해. 복수를 위해서. 그렇지?”

“그래.”

“내가 해. 내가 해야 하니까.”
영화 렛미인(Let The Right One In, 2008)
물론 오스칼이 엘리를 좋아하게 된 건 엘리가 뱀파이어라는 걸 알기 전부터다. 그러니까 엘리를 받아들이는 건 어떤 이해관계나 바람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일 수 있다. 모두가 그렇다고 하듯, 사랑은 모든 것을 넘어서므로. 그러나 이 사랑이란 과연 무엇일까?

<렛미인>에는 뱀파이어 엘리를 사랑하는 또 한 사람이 나온다. 호칸이라는 인물이다. 중년을 훌쩍 넘어선 이 사내는 엘리가 마실 피를 얻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 그러다 붙잡힐 위험에 처하자 신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자기 얼굴에 염산을 붓는다. 엘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마지막 죽어가면서까지 그는 자신의 피를 엘리에게 준다. 사랑이란 이런 것일까?

뱀파이어는 늙지 않는다. 엘리는 백년 넘게 계속 12살이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호칸이 있었을까? 오스카가 트렁크에 담긴 엘리를 기차에 싣고 함께 떠나는 것으로 끝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가 또 한 사람의 호칸이 되리라는 걸 강하게 시사한다.

무릇 뱀파이어란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의 산물이다. 엘리와 같은 뱀파이어 역시 뜻대로 안 되는 세상 살기의 한 방편이다. 우리는 뜻대로 안 되는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힘을 찾고 갈구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거기에 우리의 뜻과 어긋나는 대가가 따를 수 있음을 어렴풋하게 예감한다. 그것이 우리의 거의 모든 신화가 해피엔딩을 보장하지 않는 여운을 진하게 남기는 이유다. 뜻이 여럿인 세상을 뜻대로 사는 손쉽고 안락한 길은 없지 않을까.

그렇지, Y? 구보씨는 웬일인지 한동안 소식이 없는 Y의 속뜻을 헤아리며 혼자 멋쩍게 물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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