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예속의 썩은 뿌리[썩은 뿌리 자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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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예속의 썩은 뿌리

최 지 현(건국대 철학과 학부)

#. 1

이웃집에 사는 형과 저녁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큰 사거리를 지나면서 유독 눈에 띠는 것은 핵 안보 정상회의와 관련한 현수막이었다. 정상회의가 열리는 양일간 하루는 짝수 번호 차만, 다른 하루는 홀수 번호 차만 다니라는 것이었다. 눈을 돌려보니 지나가는 버스들에도 그런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저 정상회의를 사람들은 정말 원하는 걸까? 그런다 해도 저런 사소한 부분에까지도 정부에서 제재를 해야 되나… 만약 사람들이 원한다 해도 저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걸까? 정말 정상회의가 시작되면, G20회의 때처럼 또 한바탕 난리 나겠네…’ 순간 여러 생각이 들었다. 봄이 오려는 듯, 오지 않는 요즘, 안 그래도 싱숭생숭한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퇴근하고 지하철역에서 나오는 형과 만나서 식당으로 들어갔다.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면서 형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보면서 요즘의 여러 사회 이슈들에 대한 대화가 이어졌다. “너 그거 아냐? S사에서 휴대폰 담합했던 거 있잖아.” “아, 그때 인터넷에서 봤어요. 양심도 없지.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뭐 회사가 다 그렇지. 양심적인 회사가 어디 있어. 그런데 그거 때문에 손해가 클 것 같으니까, 소비자보호원을 상대로 소송 낸다던데.” “와, 그것까지는 몰랐는데 상식적으로 그게 어떻게 말이 되요?” “왜, 회사 입장에서는 손해가 크니까.” 얼마 전 인턴을 마치고, 정식 직원으로 한 회사에 입사한 형은 부쩍 나에게 아저씨들 같은 말이 늘어놓았다. 너처럼 생각해서 회사 취직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회사 들어가서는 그런 소리 하면 안 된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여전히 S사의 소송이 이해가 안 갔다. 아무리 이익을 위해서라지만, 명백한 자신들의 잘못인데도… 어느덧 이야기는 제주도 해군기지에까지 넘어갔다.
제주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목소리
“그 누구지, 어떤 여자가 해적기지라고 했다며? 꼭 군대도 안 갔다 온 사람들이 그러더라. 군대 가면 사람 죽이는 법 배워오는 것 아니냐고 하고, 군대에 가면 예의범절을 배워오는 거지…” “맞잖아요. 군대에서 가르치는 건 그거죠. 전쟁 났을 때, 사람 어떻게 죽이나… 표현이 좀 그래서 그렇지. 또 해적기지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죠….” “그래, 너도 군대 안 갔다 왔잖아. 군대 가서 그렇게 해봐라. 너는 살아서 못 돌아온다.” 형은 어느 정도 장난으로 한 말이었지만, 나에게는 참 어려운 말이었다. 군대식의 예의범절이 통용되는 사회, 그리고 그렇게 해야 제대로 되었다고 말하는 사회. 그리고 강정마을. 인터넷 뉴스로 강정마을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너무 착잡했다. 얼마 전 제주도에 갔을 때 들렸던 4.3 평화 박물관에서 들었던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평화를 염원하는 섬, 하지만 평화는 언제나 지연되고 있는 섬, 오히려 대부분의 주민들이 폭력에 노출되어왔던 섬. 그 역사는 다시 또 반복되고 있는 걸까? 지금이라도 그저 달려가고 싶었지만, 일상에 얽매여 가지 못한다는 용기 없는 나를 다시 느끼면서, 꽤나 따뜻해서 여느 봄 저녁 같았던 그 저녁은 나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비틀어놓았다.

#. 2

썩은 뿌리 자르기. 과연 어떤 뿌리를 잘라야 할까 고민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한, 두 가지의 쟁점, 그리고 무수한 이슈들이 있고, 그 중 하나를 다루어 볼까 고민도 했었다. 그러나 한, 두 가지의 이슈만을 다루기에, 그것들은 뿌리가 아니었으며, 뿌리를 보여주거나 가리키지도 못했다. 그것들보다는 더 근본적인 것, 그것이 뿌리가 아닌가. 그렇지만 우리 사회의 그 뿌리는 일반적인 뿌리, 즉 하나나 두개의 큰 덩어리로 이루어진 그런 뿌리는 아닌 것 같다. 땅 속에 있는 또 한 그루의 나무와 같이, 무수한 줄기와 같은 뿌리들로 이루어진 뿌리이며, 그 무수한 뿌리들 서로는 서로와 만나면서 새로운 뿌리가 되어 그것 전체의 변화의 과정을 이끄는 뿌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몇 개의 썩어있는 뿌리에 대하여 시급하고, 적절하게 대응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뿌리는 그것과 만날 수 있는 모든 뿌리들을 부정적으로 변형시키고 전체의 변화 또한 그렇게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날, 그 혼란스러웠던 저녁은 나에게 그러한 썩어있는 뿌리 중 하나가 무엇인지에 대해 넌지시 단초를 던져주고 있었다. 그 뿌리는 바로 폭력과 예속이 한데 뒤엉켜서 보기 흉하게 썩어있는 뿌리였다.
해군기지 건설을 위한 발파를 막으려는 시민에게 경찰이 망치로 상해를 입혔다
폭력은 일반적으로 관계로부터 기인한다는 기본적인 특성을 갖는다. ‘A가 B에게 폭력을 행사한다.’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폭력이라는 행위에는 주체인 A와 피해자, 혹은 대상인 B가 필요하며, 폭력이라는 행위는 주체와 대상 사이에서의 일종의 관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 혹은 다른 어떠한 것과 어떠한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관계로부터 오는 폭력역시 일정 부분에서는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내(주체 나)가 나에게 실망감에 젖어 나(대상 나)에게 행하는 폭력,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오는 가족들과 나, 혹은 친구들과 나, 선생님과 나와 같은 개인과 개인 사이의 폭력, 인간이 처음으로 접하는 폭력은 이러한 것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성이 커지면서 동시에 폭력의 규모도 함께 확대된다. 집단(또래들의 무리, 공동체, 국가…)과 나 사이의 폭력, 집단과 집단 사이의 폭력. 이러한 점에서 폭력은 일상적인 측면 역시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일상적인 측면의 폭력, 즉 작은 규모의 폭력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따라 사회 전반에 공공연하게 폭력이 퍼지거나, 커다란 규모의 거시적 폭력이 발생하는 것 역시 어떠한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사회가 이러한 폭력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작은 규모의 미시적 폭력은 물론이고, 거시적이고 큰 규모의 폭력조차 모두 일상적인 것이 되어버린 것 같다. 이러한 이유는 폭력이 작은 규모의 폭력일 때 폭력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을 갖고 해결해야 하는데, 실제적으로 그렇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여러 매체들과 일상 속에서 일종의 분노감과 폭력을 교육받으면서 폭력에 훈련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미 미시적인 폭력에 충분히 젖어있기 때문에 거시적인 폭력이 만연하게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 우리 사회 전반에는 폭력이 일종의 당연한 것으로조차 되어버린 것 같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세계 최고 수준에 달한다. 이는 나와 나의 관계에 있어서의 폭력이 세게 최고 수준이 달해 있다는 것을 의미할 지도 모른다. 청소년과 선생으로 대표되는 어른 혹은 학교 간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해 우리 사회는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해야 할 정도이며, 그리고 그것마저도 찬반으로 나뉘어 치열한 정치싸움을 할 정도로 청소년에 대한 폭력이 일면에서 당연시 되고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최근 이슈가 되었던 학교 폭력 문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어른들이 행하고 있는 폭력이 그대로 청소년들에게로 흘러들어갔기 때문이다. 또한 며칠 전, 강정마을에서는 구럼비 바위 폭파를 위한 화약의 유입을 막기 위해 시위자들이 서로 손을 잡은 채 팔에 PVC 파이프를 끼고 인간띠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를 진압하는 경찰은 3시간이 지체되었다는 이유로 PVC 파이프를 부수고 시위자들을 연행하기 위해 현장책임자는 파이프 위에 망치질을 해댔다. 이는 거의 몸에 대고 그냥 망치질을 한 것과 다름없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치질을 해대는 당사자는 어떠한 당혹감 없이 분노에 찬 표정으로 거침없이 망치질을 해댔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비무장 상태의 비폭력 시위자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폭력을 행사하는 그 모습은 아마도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폭력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또 한편으로, 우리 사회에 폭력이 쉽게 만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 사회가 다른 곳보다도 유달리 더 끈끈한 관계성을 중시한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만약 우리 사회가 강조하는 관계성이 건강하고 아름다운 관계성이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사실 우리 사회가 강조하는 관계는 그다지 건강하지는 못한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러한 관계성은 여러 부분에서 예속의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혹은 돈을 벌기 위해서, 또 편한 군 생활을 위해서 소위 ‘알아서 기어야 하는’ 아부와 아첨의 관계가 일상 속에서 필요하며 실제로 그것이 만연한 사회가 바로 우리 사회라는 점은 사람들이 예속의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예속의 관계는 폭력과 악순환을 이룬다. 폭력이 인간관계를 예속에 종속시키면, 예속은 폭력이 일어나기 더 쉬운 환경을 만들어주고, 그러한 폭력은 다시 사람들의 관계 사이에서 더 강한 예속을 만들어주는 식으로 말이다. 왜 S사는 그런 비상식적인 소송을 준비하는 것일까? S사는 단순히 그 소송을 통해 손해에 대한 피해보상을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피해보상을 받든 받지 못하든 상관없이, 소비자보호원에게 그들이 쉽게 견딜 수 없을 일정한 위협을 주고, 그것으로 스스로 예속 관계를 형성하여, 앞으로 자신들이 폭력을 휘두르기 더 편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비슷한 경우에도 소비자보호원은 쉽사리 그 사실을 공개하거나 고발하지 못하게 되면서, 기업 환경적으로는 하나의 장애물이 없어져 그들의 힘을 쉽게 휘두를 수 있게 될 것이다. 사회에 공공연하게 폭력이 만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폭력과 예속의 악순환은 그러한 폭력에 쉽사리 저항할 수 없도록 사람들의 의지를 스스로 꺾게 만든다. 이 결과, 스피노자가 제기했듯, 사람들은 자유를 원하면서도 스스로 어딘가에 예속되려고 하는 현상이 우리 사회에도 나타나며, 폭력과 예속은 ‘원만한 관계’라는 일종의 ‘좋은 말’로 수식되어 사람들을 속이며 억압하고 있는 것이다.

#. 3

이러한 모습을 갖고 있는 폭력과 예속이라는 썩은 뿌리는 우리 사회가 시급하고도 확실하게 제거해야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썩은 뿌리는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로서 사회 곳곳의 현상들에 퍼져있기에 당장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당황스럽기도 하다. 여전히 이 정도의 단순한 분석만으로는 우리 사회의 폭력과 예속을 제대로 이해하기 부족할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해결책조차 낼 수 있을지 고민조차 든다. 다만 문제를 문제로서 인식하는 것에 위로를 갖는다 해도, 앞으로 어떻게 이 문제를 더 풀어나가야 할지, 이 생각 앞에서 더욱 마음이 급해진다. 여전히 공부에 미진하고 사유에도 미숙하기에, 더욱 공부와 사유에 매진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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