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씨 무상급식을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철학)

오세훈은 구보씨랑 나이가 비슷하다. 그럼 구보씨도 정신 연령이 다섯 살 인가? 뭐,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안철수도 구보씨랑 나이가 비슷하지만, 그렇다고 구보씨가 안철수처럼 머리가 좋은 건 아니지 않은가. 동년배라는 건 그저 살아온 시절과 나날이 같고 그래서 동질감을 느끼기 쉬운 조건이 하나 마련되어 있다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구보씨는 오세훈과 동질감을 느끼기 참 힘들다. 차라리 오세훈보다는 같은 오씨고 나이도 비슷한 오바마가 낫다.

구보씨도 때로 한 똥고집 하는 편이지만, 오세훈의 똥고집에는 욕이 절로 나온다. 지가 시장이면 모든 시정(市政)이 제 뜻대로 흘러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자신의 견해와 판단에 확신에 있다 해도 시의회의 결정을 거슬러서까지 끝내 자기 생각을 고집하려 하는 건 시정이 아닌 다른 목적을 위한 것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식의 태도로는 온갖 쇼를 다 동원해봐야 그 다른 목적마저 이룰 수 없을 게 뻔하다.

구보씨는 물론 그 따위 주민투표에 참여하지 않는다. 불행히도 구보씨가 서울시민이 아닌 관계로, 불참한다고 내세울 수 없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렇지만 이 일은 서울시민만의 문제가 아니다. 무상급식 논란은 그 사안 하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를 어떻게 운영해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방향과 직결되어 있다. 거창하게 말하면 역사의 흐름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도 무관하지 않다.

구보씨는 도시락 세대다. 알루미늄으로 된 사각형 도시락(그걸 당시엔 보통 ‘벤또’ 또는 ‘변또’라고 했다. 일본어 べんとう에서 온 말이다.)을 가방에 넣어 들고 다녔다. 겨울이면 그 도시락을 조개탄 난로 위에 겹겹이 얹어놓고 데워 먹었다. 반찬이라야 시큼한 김치와 콩나물, (역시 일본말로 ‘뎀뿌라’라고 하던) 어묵 조각 정도였고, 달걀부침이라도 하나 얹어져 있으면 진수성찬인 격이었다. 도시락 통에서 반찬 국물이 흘러 책이며 노트가 젖는 일도 더러 있었다.

그래도 도시락을 먹는 시간은 즐거웠다. 중고등학교 때는 대부분 점심시간 전 쉬는 시간에 까먹어 버리곤 했지만… 보통 두셋이 모여서 먹었는데 반찬이야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고, 때로 남의 도시락을 몰래 홀랑 먹어버리는 일도 있었다. 도시락에서 드러나는 빈부격차, 그런 게 없진 않았겠지만 심각하게 의식하지는 못했다. 다들 고만고만하게 못 살았으므로. 때로 도시락을 못 싸온 친구들이 있으면 나눠 먹었다. 국가적으로 쌀을 아끼느라 보리밥 혼식을 장려했고 그것 때문에 도시락 검사를 하기도 했던 시절 얘기다.

그러니 구보씨는 무상급식뿐 아니라 학교급식이라는 걸 경험해 보지 못했다. 오세훈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무상급식이 못마땅한가. 하지만 오세훈말고는 다섯 살짜리 아이도 제가 경험하지 못한 일을 받아들일 줄 안다. 그렇지 못해서야 무슨 성장과 무슨 발전이 있겠는가. 오세훈이 보수의 아이콘을 자처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그렇게 발전을 거부하는 것이 보수라면 그 보수의 운명이 몰락이라는 건 보리밥 먹은 날 방귀가 잦다는 사실보다 더 명확한 일이다.

학교급식이 일반화하려면 경제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그건 맞다. 구보씨가 지나온 시절을 돌아봐도 그렇다. 그런데 우리사회에 학교급식이 일반화한 지는 이미 오래다. 물론 그 전에도 단체 급식이 이루어진 곳은 있었다. 대표적인 곳이 군대다. 하지만 이것이 무상급식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군인들은 징병된 군인이건 자원한 군인이건 군인으로서 근무를 하는 것이고, 그래서 많건 적건 보수를 받는다. 군대의 급식은 근무의 필요 때문에 주어진 것이며, 따라서 공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럼, 학생들은 어떤가? 학생들이야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니 이들에게 공짜로 밥을 줄 이유는 없지 않은가? 이게 문제다. 사실 이런 생각이 낡은 것이고, 극복해야 할 잔재다. 그럼 어떻게 보는 것이 옳은가? 학생들은 미래의 잠재적 일꾼이고 배운다는 건 일을 하기 위한 준비니까 그 준비 기간 동안 사회가 이들을 부양할 필요가 있다고 해야 할까? 그게 맞는 얘길까? 아니다. 얼핏 그럴 듯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도 아니다. 역시 낡은 생각이다.

이런 생각들에는 일하는 자만이 먹을 수 있다는 발상이 깔려 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거다. 물론 이런 생각이 적합하고 진보적인 때도 있었다. 시민계급과 노동계급이 성장하고 노동의 중요성이 한껏 부각되던 시절, 봉건 귀족계급을 떨어내어야 할 기생충으로 취급하던 시절이 그랬다. 알다시피 초기자본주의는 노동의 가치를 앞세우며 성장했다. 그러나 부르주아의 패권이 확립되면서 자본이 노동을 압도하는 가치의 근원으로 등장하게 된다. 돈이 돈을 낳는 사회가 정당화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다시 노동의 가치를 전면에 내세워야 하는 것 아닐까? 노동이야말로 경제적 가치의 근원이고 노동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주체라는 점을 다시 부각시켜야 되는 것 아닐까?

그런데, 그게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노동이 여전히 중요한 인간 활동이라는 건 분명하지만, 노동의 양태가 변하고 있고 기존의 노동에 대한 수요가 줄고 있는 까닭이다. 이미 진부해진 ‘노동의 종말’에 대한 논의를 다시 들먹일 필요도 없이, 어느 사회에서나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은 일자리 부족이다. 자동화와 정보화 와중에서 줄어드는 일자리를 상쇄할 만큼 새로운 일자리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여기서 생겨나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그리고 사실, 모든 사람이 예전처럼 오래 일할 필요도 없다. 이건 크게 보면 좋은 일이다. 인간 사회를 꾸려가는 데 필요한 전체 노동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자리와 노동시간을 제대로 나눈다면 누구나 조금만 일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을 법하다. 맑스가 꿈꾼 공산사회가 생각나지 않는가. 그러나 불행히도 실제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생산적인 자리는 소수가 차지하고 많은 사람들이 잉여 취급을 당한다. 짐스럽거나 없어도 되는 존재로 전락할 위기에 놓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안정된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생겨나는 또 하나 심각한 문제는 세대 간 갈등이다. 지속적 일자리가 늘기는커녕 줄고 있으니 새로 커 나오는 세대에게 돌아갈 몫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나마 있는 자리는 기성세대가 차고 앉아 내놓질 않는다. 젊은 세대는 예전보다 더 심한 경쟁에 내몰리지만 그렇게 시달린 이들 가운데 극소수만이 상대적으로나마 안정된 직장을 가질 수 있다. 우리나라에 이른바 대기업 일자리는 모두 합쳐 200만이 채 안 되고 공무원은 100만 정도다. 이 가운데 매년 새로 나오는 일자리가 얼마나 되겠는가?

구보씨는 요즘 TV에서 유행하는 오디션 프로들을 볼 때도 영 마음이 편치 않다.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보는 듯해서다.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는 각광받는 소수와 그늘에 묻힌 다수의 대비가 전형적인 영역이다. 이것이 우리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지는 않은가? 매번 다수의 탈락자를 만들어내는 이런 구조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조만간 이른바 88만원 세대의 혁명적 반발이 불가피하지 않겠는가?

“어휴, 답답해. 구보야, 그런 거랑 무상급식이 무슨 상관이니? 너도 오세훈처럼 갈피를 못잡고 옆으로 새는 거 아냐?”

“이크, Y야, 너 그럴 줄 알았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되는데…”

“어수선하게 새롭지도 않은 얘기 늘어놓지 말고 그냥 핵심만 얘기하면 안 돼?”

“모든 일엔 다 준비가 필요한 거야. 핵심을 건드리기 위해선 충분한 전희가 필요하잖아.”

“너 그렇게 까불다 혼난다. 오세훈만 욕하지 말고 너도 나이 값 좀 해라.”

“쩝… 어쨌든 내 얘기의 요점은 이제 노동만을 내세워 삶의 경제적 가치를 정당화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거야. 노동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극적이고 당당하게 자신들의 삶을 보장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거지. 보편적 복지의 정신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거라구. 이 사회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하고 그걸 권리로서 주장할 수 있어야 하며, 사회는 마땅히 그걸 보장해 줘야 한다는 얘기야. 시혜가 아니라 당연한 권리로 말이지. 그래야 1등 시민과 2등 시민, 생산적 인간과 잉여적 인간 따위의 차별이 생겨나고 확대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구.”

“놀고먹는 사람한테두?”

“가능하면, 놀고먹는 사람한테두. 내가 아까 말했잖아. 일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구. 그리고 일을 안 하는 사람이 남들보다 더 풍요를 누리는 건 곤란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구나 당당하게 자기 삶을 살 수 있어야 해. 무엇보다 일에 대한 협소한 개념을 바꿔야 한다구. 자기가 좋아하고 보람을 느끼는 활동을 한다면 그게 다 일이잖아. 가령 노래를 부른다든지 그림을 그린다든지 연극을 한다든지 하는 것 말이야. 이런 활동을 통해 꼭 많은 사람이 소비하는 결과를 생산하지 못한다 해도 자기가 좋아하는 활동을 하는 사람이 기본적인 물질적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는 거야.”

“구보야, 그거 너무 나간 거 아냐? 아직 우리 사회가 그 정도 기반은 없잖아?”

“뭐, 그렇긴 해. 그러니까 그런 걸 준비하면서 교육 영역에서부터 생각을 바꿔나가자는 거야. 아이들이 누구나 차별 없이 밥을 먹을 수 있게 한다는 건, 이 사회에 사는 사람은 당연히 인간으로서의 기본 조건을 누릴 수 있다는 걸 체험하게 하는 거라구. 그러니까 이건 단순히 무상급식에 얼마가 들어가느냐 하는 식의 비용의 문제만이 아니야. 우리 사회의 미래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나가느냐 하는 철학의 문제라구. 오세훈은 이런 문제에 대한 철학이 없거나 잘못된 거야. 전혀 미래 지향적이지 못한 거지. 그런 면에서 오세훈은 꼴보수가 맞아.”

“잠깐, 구보야. 넌 오세훈이랑 같이 도시락 세대, ‘변또’ 세대라며? 무상급식은커녕 아예 학교급식도 못 받아봤다고 했잖아. 그런 환경에서 학교를 다녔으면 너도 낡은 제도와 관념의 세례를 받았을 거 아냐. 그런데 넌 어쩌면 그렇게 시대를 앞서가는 척, 진보적인 척 할 수가 있어?”

“하하, 그게 바로 철학의 힘이라구. 믿거나 말거나 말이야.”

자거라투스트라, 역사법칙에 내기를 걸다 [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너 이놈, 자거라투스트라야, 감히 내기를 걸다니?

아, 니체 아부지, 어떻게 아셨어요?

이놈아, 니가 어제 밤 술 먹고 들어와서 중얼거리지 않았더냐? 박근혜가 대통령되면 니가 백만 원 따게 되었다고 히히닥거렸지.

아, 그랬나요? 맞아요. 어떤 후배의 농간(?)에 넘어가서 그만 내기를 걸고 말았죠? 박근혜 떨어지면 그 백만 원 가지고 잔치 벌리죠 뭐.

아이고, 이 멍청한 놈, 그런 내기는 일종의 패배주의를 선동하는 것이 아니겠니? 그게 진짜 죄악이지. 근데 자거라투스트라야, 박근혜가 된다는 근거라도 확실하냐?

니체 아부지, 제가 철학을 했지 어디 점술을 배웠겠어요? 그러니 그걸 어찌 제가 알겠어요. 다만 거꾸로 생각한 거죠. 지금 박근혜의 대항마로 나오는 사람들이 너무 한심해서 말이죠.

자거라투스트라, 너보다야 더 한심하겠니?

저야 공부하는 사람인데 비교가 되나요? 하지만 그들은 어떤 정치적 비전을 보이지 않는 것 같아요. 그게 너무 한심해서 제가 그런 내기를 한 거죠. 그런데 아부지, 니체 아부지. 도대체 정치란 무엇입니까?

야, 이놈, 내가 공자님이냐. 그리고 니가 무식한 자로(子路)이냐? 그런 식으로 묻게? 하지만 내가 생각해 본 것이 있는 데… 말하면 니가 알까?

제가 서자이지만 그래도 아부지 아들 아닙니까? 말씀 해보세요.

니도 알겠지만 다윈 선생한테 내가 배웠지만, 진화란 일종의 자연선택이 아니냐. 자연은 다양한 변이를 만들어. 상황이 변화하면 거기 맞는 변이를 선택해 지속하려 한다면서? 나머지 변이는 더 이상 쓸 데 없으니 진화의 시궁창이 속으로 내 던져지고 말지. 마찬가지 아닐까? 정치라는 것도? 정치가들도 다양한 변이를 미래의 프로그램으로 준비하고 있겠지. 그런데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그 중의 하나가 선택될 거야. 그러면 나머지는 정치인들은 전부 역사의 불구덩이에 내던져지고 말지. 정치가들은 자신이 선택될지를 모른 채 하나의 변이를 준비해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역사가 선택하지 않는다면, 역사의 불쏘시개에 불과한 비참한 존재가 되고 말겠지. 그게 정치가의 ‘운명’이 아닐까? 정치가는 그런 운명을 짊어지는 운명애적 존재가 아닐까? ‘아모르 파띠’, 그게 내가 늘 부르짖던 것이잖아.

아부지 말씀은 꼭 헤겔이 역사이성과 영웅과의 관계에 대해 말한 것과 같네요. ‘이성의 간지’라는 말씀이죠? 하지만 정치와 자연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어요. 마르크스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역사에 우여곡절과 전전반측이 있지만 어떤 큰 흐름이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러니 정치가는 이런 큰 흐름을 미리 예측하고 바로 그 흐름 앞에 서야 하지 않을까요? 소위 역사의 전위라는 말이죠. 그런 예측적인 선택을 정치가의 ‘모럴’이라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 정치가의 패배는 운명이 아니라 잘못된 선택의 결과일 뿐이니, 그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겠죠.

정치는 모럴이 아니야, 운명이라는 거지. 자거라투스트라야, 니는 아직도 역사의 법칙이란 게 아직도 있다고 믿느냐? 마르크스의 법칙이란 19세기 역사를 통해 포착한 것이지. 그때는 소위 세계라는 것이 없었어. 그저 민족국가만이 있었지. 자본주의의 민족국가적인 발전 단계였던 거지. 그런데 오늘날 21세기, 전 지구적 차원에서 자본주의가 형성되어 있는 이 단계에서, 이제 그런 역사법칙이란 의미 없지 않을까?

세계사가 성립한다고 역사법칙에 의미가 없어진다는 말씀이 이해되지 않네요.

거 봐라. 니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 않았더냐.

아, 아부지, 저도 그 정도는 이미 생각해 보았어요. 아부지 말이 이런 거죠? 제가 설명해 볼게요. 국제자본은 일국의 자본주의를 넘어선 국제적 차원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거죠. 이런 구조 속에는 자본주의 체제를 형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지구적 차원에서 분산되어 있다는 거죠. 그래서 한쪽이 문제되면 다른 쪽에서 문제를 풀어가면서 전체적으로는 국제자본이 자신을 지속적으로 확장시킨다는 거죠? 월러스타인의 세계체제론에 가까운 주장이시죠?

내가 뭐 그렇게 어려운 주장을 한 것은 아니고, 하여튼 그런 거야 IMF를 겪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니냐? 그런 단계에서 역사법칙 운운하다니 자거라투스트라야, 어는 어느 시대 사람이냐? 나보고 19세기라 하는데, 니야 말로 19세기가 아니냐?

아부지, 곰이 롤러코스트를 타고 재주를 피운다더라도 언젠가 떨어진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 아니에요? 그건 필연적인 사건이죠. 마찬가지로 국제자본이 두 손으로 5개의 공을 돌리는 저글링을 하더라도 언젠가 하나는 놓치고 말죠. 5개 돌리다가 4개를 돌리더라도 국제자본이 돌아야 가겠지만, 한 개 떨어뜨린 공은 어떻게 되나요? 거기서는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저는 지난번 중동에서 일어난 자스민 혁명이 바로 그런 거라고 보아요. 그 중동이란 것이 국제 자본이 돌리던 공 중의 하나였는데, 그만 떨어뜨렸던 거죠. 그 사이에 혁명이 터졌구요.

글쎄다, 그게 무슨 혁명인지 모르겠는데, 자스민 혁명이 성공한 이집트에는 지금 군부가 시위 군중을 무차별 사살한다 하더라.

아부지, 저는 그저 그런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한 거지, 반드시 성공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잖아요.

자거라투스트라야, 역사법칙이란 구시대 유물을 고집하려고 너무 어려운 논리를 구사하는 것이 아니냐? 그냥 역사에 법칙이 없다고 보면 아주 단순하잖아. 그리고 모든 이론이란 것이 단순한 거구. 역사에 법칙이 없다면 나쁠 게 무엇이 있니? 니들 철학자들이 먹고 살게 없어서 좀 안 되긴 했지만, 니들 철학자들을 먹여 살리려고 우리가 머리가 아파야 하겠니?

아부지, 역사법칙이 없다면, 세상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는 것이 아닐까요? 역사법칙이 없다면, 무엇이 역사를 지배하겠어요? 결국 힘이 지배한다는 것이 아니에요? 힘이 정의죠. 그래도 사람들이 살아갈 희망이 있을까요? 언젠가 이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에 사람들이 그래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자거라투스트라야, 그게 바로 종말론이라는 거야. 니들이 역사가 심판해 줄 거라는 거지. 이 세상의 부정의와 고통과 학살을 신 대신 역사가 심판한다는 주장이 바로 ‘역사법칙론’이라는 주장의 실질적인 의미가 아니냐? 역사에 종말은 없어. 그걸 모르겠니? 그건 기독교가 뿌려놓은 아편이지. 신이 아편이 아니야. 종말이 온다는 믿음이 아편이지.

아부지, 니체 아부지, 아부지가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아편이 아닐까요? 아부지의 말씀은 절망이죠. 우리 모두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절망이라는 아편이죠. 아부지, 사르트르는 잠들기 가장 좋은 방법은 잠 든 척 하는 거라고 말했대요. 실제로 잠 든 척하다보면 잠 들 거라는 거죠. 우울증 환자는 세상을 우울하게 보기 때문에 더욱 더 우울하게 된다고 하죠. 실제로 그는 세상을 극복하기 위해 아무 노력을 하지 않으니까요. 마찬가지 아닐까요? 역사에도 법칙이 있다고 우리가 믿는 다면 실제로 역사에 법칙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믿음이 존재를 만다는 것이 아닐까요?

이, 놈아, 그런 놈이 왜 진다는 내기를 했단 말이냐? 진다고 믿는다면 결국 지게 될 거 아니냐? 그러니 니가 패배주의를 선동했다 하는 거야. 알겠니?

“제2차 인문학 페스티벌”(8. 20-21), 대천 해수욕장에서 책읽기 잔치 열려

작년 2010년에 처음으로 열린 <인문학 페스티벌>에 이어 올 해에도 보령(대천)에서 보령 책익는 마을(촌장 박종택)의 주최 주관으로 <제2차 인문학 페스티벌>이 개최된다.

2010년에는, 박인희(안양대 강의교수)의 김명진(시민과학센터 운영위원), 이진남(숙명여대 교수), 류호철(안양대 강의교수), 이정모(과학저술가), 김시천(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이종필(고등과학연구원), 편상범(고려대 강사), 전중환(경희대 교수), 이재현(동덕여대 교수), 이명현(천문연구원 연구원), 강양구(프레시안 기자) 등 인문학의 여러 분야는 물론 과학, 종교, 역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강의가 한창 휴가철인 8월 13-14일 이틀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당시 인문학 페스티벌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시민과 학생이 세미나룸을 가득 채웠고, 아침부터 하루종일 계속되는 강의에도 불구하고 강의실의 열기는 내내 뜨거웠다.

처음에는 몇 명의 독서모임으로 출발한 조촐한 모임이었지만, 지금은 여러 팀으로 이루어져 매월 저자를 초청하여 모두가 읽고 강의와 토론을 하는 <저자초청토론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며, 2010년부터는 집중적으로 인문학에 대한 강의와 토론의 축제로서 <인문학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있다.

올 해에는 2010년에 강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페스티벌의 성격을 약간 변화시켜, 저자토론회와 접목시켜 축제를 준비하고 있다. 참여하기로 정해진 강사진은, 김주일(정암학당 연구원)의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를 비롯, 최시현(소설가), 장시복(경제학자), 이종수(문학저술가), 김태권(만화가) 등이 자신의 저술을 중심으로 강의하고 토론하는 축제가 마련하고, 8월 20-21일 이틀에 걸쳐 대천 한화콘도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아래의 글은 ‘보령 책익는 마을’의 황선만(보령 책익는 마을 전 촌장)이 <제1차 인문학 페스티벌>을 마친 후에 <보령신문>에 기고한 글 “2010보령 인문학페스티벌을 마치고”을 옮겨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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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달 전 일이다. 오랜만에 만난 아저씨뻘 되는 친척분은 내게 이것 저것 꼬치꼬치 물었다. 직장은 잘 다니고 있는지, 사는 집은 어떤 곳인지, 아이들은 공부를 잘 하는지, 돈 벌이는 괜찮은지 등등 친척 어른으로서 궁금한 점이 많았는가 보다. 그런데 헤어지면서 하시는 말씀이 날 잠시 머뭇거리게 하였다.

“주변 사람들이 잘 살아야 되네,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해서 성공해야 돼! 알뜰하게 돈 잘 벌게.”

우리네 생활 속에서 의례적이고 일상적으로 듣는 말이고 가장 많이 하는 말이기도 하다. 성공과 돈이 등치관계라는 주장은 교과서에만 등장하지 않을 뿐 우리네 삶의 공간에는 도그마와 같은 명제로 또아리를 틀고 있다. 문화행사도 돈벌이가 되어야 하고, 국회의원도 돈을 벌 줄 알아야만 한다. 청소년들의 공부의 목적은 명문대를 가는 것이고, 그것도 고액 연봉의 직장으로 취업 잘되는 학과를 가는 것이다.

인문학 페스티벌이 만들어진 의도 속에는 그런 고민이 들어있다. 우리네 장롱 속에 숨어버린 것 같은 ‘가치’라는 단어를 꺼내서 펼쳐들고 다양한 무늬의 ‘성공’의 길을 생각해보고 싶었다. 몇몇 학자와 저자를 모시고 책익는마을의 조촐한 토론회를 생각했는데 횡재수가 온 것이다. 참여하겠다는 분이 12명이나 기별이 온 것 아닌가. 그동안 저자초청 토론회라는 이름으로 시민들을 초대하는 행사를 10여 차례 진행해온 우리들은 별 이의없이 ‘보령시민들과 함께하는 만남의 장’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뿔사! 시간을 아무리 쪼개도 12명의 강의를 넉넉하게 배치할 수가 없었다. 몇 분은 오시지 말라고 하는 것도 참으로 어렵고 기간을 하루 이틀 더 늘릴 수도 없는 처지이다 보니 1시간 강의 10분 휴식에 12시간 연강이라는 수험생 시간표가 나오고 말았다.

게다가 제목을 붙이는 것 또한 고민거리였다. 도대체가 한 단어로 표현할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약간은 겸연쩍은 일이지만 12강 중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주제를 포괄하는 단어를 생각했고 그 결과물이 인문학 페스티벌이었다. 책익는 마을의 저자초청토론회가 ‘인문학’ 중심이었고 우리들의 월별 선정도서 또한 그러하기에 인문학이라는 단어는 구미를 확, 땡겨왔다. 그리고 인문학페스티벌이라는 제목만 읽어보고 찾아올 위인이 어디있겠는가. 이야기 주제와 강사프로필이 있으니 사전에 생각해볼 여유는 충분할 것이었다.

그래서 참가자들에게 사전에 자세히 안내하는 차원에서 강사의 소속, 저서, 강의주제, 자세한 시간 안내까지 포스터, 전단지 등에 담아두었던 것이다. 듣고 싶은 강의만 들어도 상관없으니 주제와 강의시간을 살펴서 원하는 강의시간별로 참석이 가능하다는 안내를 넣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시간을 맞춰서 원하는 강의에 참여했는데, 12강을 계속해서 참여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어떤 강의시간에는 넓은 세미나실에 보조의자까지 채워지는 경우도 있었다. 세상에 일없는 사람은 없다고 했는데, 귀한 시간들을 아낌없이 배려하는 것을 볼 때 시민들의 지적 욕구가 얼마나 큰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참여자는 보령시민들 뿐만이 아니었다. 서울, 인천, 수원, 부여에서도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왔고, 익산과 천안에서도 다녀갔다. 또 어떤 사람은 보령시 홈페이지에 난 홍보를 보고 대구에서 올라와 1박2일 동안 꼬박 강의실을 지켰다.

강사들도 행사의 의도에 공감해서인지 자신의 강의시간만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청중으로 앉아있었고 쉬는 시간에는 참가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했다. 약간은 우려했던 과학 관련된 강사들의 강의내용도 행사의 제목을 의식해서인지 순수자연과학에 치우치지는 않았다. 솔직히 이날의 인문학페스티벌이 전공학자들의 세미나도 아니고 이른바 대중강연 아닌가. 아무리 수준을 맞춘다하여도 주제에 따라서 어떤 이에게는 부족할 터이고, 어떤 청중에게는 넘칠 것 아닌가. 배정된 시간이라도 넉넉했다면 좀 나았겠지만 강의시간표를 받아든 누구라도 예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강사들이 자신의 강의 앞뒤에도 자리를 지켜주어서 관심있는 사람들과의 개별적 소통이 이루어진 것은 흐믓하고 감사한 일이었다. 책익는마을의 저자초청 토론회처럼 선정도서를 읽은 사람에 한해 참가하고 30분 저자의 강의에 90분 질의응답으로 이어지는 토론이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러나 그런식으로 그렇게 많은 강사들을 만날려면 우리들 일상을 참으로 많이 할애해야 했을 것이다.

1박2일 동안 이어진 릴레이 강의를 듣고 다소 피곤해진 몸으로 정리를 하고 있는데 연세 지긋한 한 선배에게서 문자가 왔다.

“유익한 시간들이었어. 우리가 젊어지는 느낌이었고 행복했어.”

도대체 내가 왜 이틀 동안 아니, 준비해온 한 달 동안 생업도 소홀히 하면서 왜 그렇게 달뜬 나날을 보냈을까. 책익는 마을 회원들은 또 무슨 이득을 보자고 그렇게 많은 시간을 나누고 후원금까지 내면서 달려왔을까. 직장에서 휴가를 내면서까지 참여했다는 낯선 청중들은 또 어떤 열정이 있기에 그런 용기를 내었을까. 그 자리는 흔히 만나는 ‘금융자산관리법’ 강의도, 돈 많이 번 유명인사의 ‘인생 성공법’ 강의도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진중하고 고리타분해서 우리가 학창시절에 얼핏 스쳐갔을 뿐 대체로 거들떠보지 않는 어려운 주제들이 아니었던가.

나는 그 열정을 지적인 욕구,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고미숙은 『호모쿵푸스』에서 ‘아무런 실용적 목적이 없이도 공부할 수 있을 때, 그때 공부는 비로소 최고의 지식이자 사회를 변혁하는 무기이면서 동시에 운명을 통찰하는 지혜의 수행이 된다’고 말했다. 청소년들에게 ‘책읽지 말고 공부하라’고 말해야하는 시대이기에, ‘대학을 졸업하면 공부 끝!’이라고 하는 세상이기에 나는 행복해지는 조건으로 인문학적 독서를 소망한다.

우리는 학교 다닐 때의 성적을 다 늙어서까지 외고 다니면서 자신의 두뇌가 뛰어나다고 믿는 사람들을 흔히 만난다. 또 학교 때 성적이 안 좋았던 사람들은 자신이 평생 책과는 인연이 없다고 치부해버리는 경우도 만나곤 한다. 모두가 잘못된 성장기가 만들어준 허상이다. 한 번 책을 함께 읽고 터놓고 만나보라. 나이도 학력도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능력도 전제하지 말고 책을 놓고 함께 토론해보라. 권위와 잘난체를 소거하고 함께하는 공부가 얼마나 따스한 인간애를 샘솟게 하고 행복한 기운이 넘쳐나게 하는지를 경험해보시라. 우리나라 근대적 사유의 물꼬를 튼 연암 박지원은 13살 연하인 박제가와 평생 벗으로 함께했다. 책을 읽는 공부는 누구나가 할 수 있고, 그 속에서 다양한 무늬를 한 역동적 행복의 길을 만날 수 있다.

2010보령 인문학 페스티벌은 보령 시민들의 그런 공부를 향한 열정을 확인하는 계기에 다름 아니었다. 평생교육이라해서 실용적 기능을 배우는 것 만이 어찌 평생교육이겠는가. 아니, 우리는 대학에서까지 기업에서 요구하는 기능 중심의 스펙 쌓기 공부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성인사회에 독서가 필요하다. 사회인으로 시작하는 그 시점이야말로 비로소 진짜 공부를 해야하는 출발점이다. 마지막 강의를 듣고 일어서는 그 순간에 내 마음속에는 읽고 싶은 책이 여러 권 떠올랐다. 또 이틀 동안 특별한 기능을 익히지도 않았고 대단한 지식을 배운 것도 아니지만 뿌듯한 기운이 충만해지고 있었다.

<보령신문 2010년 8월 24일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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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e시대와 철학>에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를 연재하는 보령 책익는 마을의 인문학 축전이 인문학과 삶이 어우러지는 새로운 시민 축전으로 자리매김되기를 바라며, 이에 소식을 알립니다.

일시 및 장소 : 2011년 8월 20-21일 대천 한화콘도 세미나실

참고 문의 및 연락처 : 017-432-9558

카페주소 : http://cafe.daum.net/thinders

자거라투스트라 박헌영을 만나다 [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박헌영 선생님, 무고하신지요? 거기 계신 곳이 천당인가요?

글쎄요. 자거라투스트라씨, 여기가 천당인지 지옥인지 잘 모르겠소. 하느님은 ‘저 세상’에서 누구나 그의 소망을 실현시켜 주시지요. 그러니 여기가 천당이 맞을 거요. 예를 들어 살아있을 때 술을 좋아했던 사람은 죽어서 영원히 술을 먹도록 해 주시지요. 그런데 생각해보시오. 영원히 술만 먹으라 하면, 그게 지옥이지, 뭐가 아니겠소. 하느님의 자비는 곧 하느님의 심술일 거요.

그러면 소망을 바꾸면 되지 않아요?

자거라투스트라씨, 아직 안 죽어서 모르시는 모양이군, 사람이 죽으면 더 이상 소망을 바꾸지 못해요. 그게 죽는다는 것이요.

그러면 박헌영 선생님은 거기서 무얼 하세요?

하느님은 나에게 저 세상의 정권을 잡도록 해 주셨소. 그래서 내가 지금은 ‘저 세상’ 한반도 통일국가 주석이요.

드디어 소원을 이루셨군요.

글쎄. 방금 말했잖소. 소원은 이루었지만 그게 소원의 성취가 맞는지는 모르겠소. 왜냐하면 여기 ‘저 세상’에서는 권력은 무의미하기 때문이요. 하느님께서 이미 모든 사람의 소망을 실현시켜 주셨으니까요. 아무도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없어요. 찾아오는 사람도 없죠. 게다가 여기는 죽는 사람도 없소. 이미 모두 죽었으니까. 따라서 겁박당하는 사람도 없소. 그러니 권력이 무슨 의미가 있겠소? 여기는 사람들이 왕이 왕인지를 모르고 지내요.

그러면 박헌영 선생님, 거기서 이 지상 세계의 소식은 듣나요?

그럼. 항상 내려다보고 있으니까, 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나 보고, 듣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어라도 들을 수 있소. 하지만 굳이 내려다 볼 필요성은 전혀 느끼지 못하오. 나만 그런 게 아니요. 여기서는 다들 그래요. 제상을 차려 놓으면 뭐 먹을 게 있나 가볼까 하다가도, 가 봐야 어느 집안이나 신세타령만 잔뜩 보고 들으니 요새는 여기 ‘저 세상’ 사람들은 다들 제상 보기를 돌보듯 하오.

그러면 요새 박헌영 선생님에 대해 재평가하는 흐름이 있다는 것도 모르시겠네요?

역사가들이 밥 벌어 먹고 살려고 때로 이렇게 평가했다가 때로 저렇게 평가하는데, 내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런 것들을 일일이 쳐다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소? 근데 자거라투스트라씨는 웬 일로 나를 찾아 왔소? 벌써 죽으려고 미리 준비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박헌영 선생님, 저야 아직 죽을 생각은 없어요. 제가 이대 출판사하고 계약을 맺어서, 박헌영 선생님의 사상에 관한 책을 쓰기로 했거든요. 그래서 요즈음 이런 저런 자료 수집을 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새로운 평가들이 많이 눈에 띄더군요. 그래서 정작 선생님은 그런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한번 알고 싶었어요.

어디 어떤 평가인지 들어나 봅시다.

제가 요즈음 발견한 건데, 여러 가지 평가가 달라졌더군요. 그 중 한가지만 말하고 싶어요. 종파투쟁이라는 것이죠. 일제시대 ‘조선공산당’이라하면 종파투쟁 때문에 망한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평가되어 왔었죠. 심지어 종파주의 때문에 1928년 12월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해체된 이후,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는 중에서도 종파투쟁이 그치지 않았다고 하죠. 나중에 해방이후 남로당이 세워질 때 박헌영 선생님은 아예 일개 종파인 ‘경성콩그룹’ 빼고는 모두 배제시켰고 결과적으로 박헌영 선생님도 종파주의의 책임을 지고 숙청되신 걸로 아는데요?

저런 무식하기는, ‘경성콩그룹’은 종파가 아니고 정통이요. 종파와 정통을 그렇게도 구분 못해요? 실례지만 자거라투스트라씨, 그 머리로 무슨 철학을 하겠소?

죄송합니다. 박헌영 선생님, 하여튼 화내지 마세요. 제가 박헌영 선생님에게 책임을 묻는 게 아니라 그런 견해가 바뀌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지요. 최근 성균관대 임경석 교수가 초기 사회주의를 연구하면서, 이런 종파주의의 책임이 조선 공산주의자한테 있는 게 아니라고 주장했어요. 조선 공산주의를 지도하는 지도선 자체가 사실은 혼란스러웠다고 하더라고요. 예를 들어 연해주 지역에 있던 소련 극동공화국 고려국에서는 상해파를 지지하고, 반면 코민테른 동양부에서는 이르크츠크파를 지원했다고 해요. 박헌영 선생님은 이르크츠크파이셨지요?

물론 나야 코민테른의 지시를 금과옥조로 여겼지요. 코민테른이야말로 정통 아니요. 소련 극동공화국 정부는 나중에 이단으로 해산된 정부인 줄 모르시오?

아 저도 임경석 교수의 책을 읽고 비로소 알았어요. 그래서 나중에 코민테른 동양부로 지시를 일원화 시켰지만 이번에는 코민테른 내부에서 혼란이 생겼다 하지요. 스탈린파와 비스탈린파 사이에 갈등이 생겼죠. 그래서 지시가 엇갈려서 어느 지시를 따를 지 혼란스러웠다고 해요.

하여튼 나 박헌영은 그 중에서도 항상 정통만 골라서 따랐소.

박헌영 선생님, 임경석 교수는 이런 혼란이 결국 민족주의의 문제였다고 합니다.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원리는 반민족주의이었지요.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민족주의하면 2차 코민테른의 제국주의 전쟁 참여, 나치즘과 파시즘 생각부터 나는 모양이에요. 그런데 레닌이 1922년 코민테른 2차 대회이후 민족주의를 받아들여, 서구 사회주의와 아시아 민족주의 사이의 국제적 동맹을 추구하면서부터 마르크스주의 내부에 혼란이 발생했다고 해요.

맞았소. 그 결과 중국에서 1924년 국공합작이 이루어졌소. 그런데 1927년 4월 장개석의 상해쿠데타로 공산주의자들이 숙청되자, 분위기가 바뀌었소. 여기서 스탈린파와 비스탈린파 사이에 갈등이 생긴 거요. 스탈린은 민족주의를 긍정하고, 비스탈린파는 민족주의를 부정했다 해요. 그때만 해도 코민테른에는 비스탈린파가 우위에 있었고. 코민테른은 1928년 6차 대회 이후 민족주의가 위험하다는 생각했소. 그때 코민테른의 지시는 민족주의를 폭로하라는 것이었소. 대중들을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떼어놓으라는 것이요. 그런 지침을 가장 충실히 따른 게 우리요. 그게 바로 이르크츠크파이고, 조선의 화요회파이고, 나중에 ‘경성콩그룹’파이요. 그래서 우리가 정통이라는 거요. 이젠 아시겠소?

그럼 박헌영 선생님,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 지미트로프가 새로운 테제를 제시했던 거는 아세요? 그때 그 테제는 서구에서는 인민전선을, 아시아에서는 민족통일전선을 하라는 거였어요.

물론 내가 왜 모르겠소. 코민테른이 바뀌면 그걸 따라야 하는 거는 당연하지 않겠소. 그게 정통노선이거든.

그런데 박헌영 선생님, ‘경성콩그룹’이 중심이 되고, 선생님이 지도한 해방이후 남로당은 결코 그런 노선이 아니었던 걸로 아는데요? 바타협적인 투쟁 노선, 혁명적 대중노선이라고 하면서, 민족주의자들과 통일전선은 거부하고, 내부에서도 콩그룹 일색으로 꾸려가지 않았어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내가 발표한 8월 테제를 보시오. 민족통일전선을 강조한 거 아니요? 다만 이론과 달리 실제에서 우리나라에서는 해방이후 합작할 만한 부르주아가 없었어요. 우리나라 부르주아들은 대개 일제에 투항했소. 비타협적인 투쟁을 견지했던 민족주의자들은 얼마 안 되고, 그들은 정견이 고루하기 짝이 없었고, 더구나 우리를 적대해서 합작할 수 없었을 뿐이요. 게다가 경성콩그룹을 빼고는 일제시대 다 전향하지 않았소? 그런 쓰레기 같은 사람들과 당을 같이 하란 말이요?

박헌영 선생님, 노여워하지 마세요. 제가 최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통합문제를 바라보다 보니, 그 옛날 종파투쟁이 아직도 전개되는 것 같아서, 그래요. 임경석 교수는 조선공산당의 종파투쟁을 이론적인 차이에로 귀결시키려 했는데, 표면적으로 보면 결국 이번에도 민족주의가 문제더군요. 민족주의의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는 북한에 대한 태도의 문제이고, 이어서 민주당과 같은 부르주아 정당에 대한 관계의 문제이죠. 내부적으로는 민족주의자들과 연대하려는 자와 단절하려는 자 사이의 갈등이구요. 일파만파이죠.

그렇다면 자거라투스트라씨, 단호한 이론적 투쟁이 필요해요. 그래서 순결한 원칙적인 통일을 이루어야 하지요. 그것만이 종파를 없애는 유일한 방식이요. 그때는 오직 정통만이 남아있죠. 이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항상 정통이요. 이 세상은 정통만이 정통이요.

원칙적인 통합, 그게 바로 선생님의 주장이죠. 하기는 지금 민노당과 진보신당 사이의 통합 논쟁도 항상 그런 쪽으로 흘러가더라고요. 통합에 원칙이 없다는 거죠. 그러니 언젠가 깨어질지 모른다는 거고, 그래서 통합이 안 된다는 주장이에요. 절대 통합하지 않겠다는 거죠.

자거라투스트라씨, 역시 순결한 원칙을 따르고자 하는 순전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없는 게 아니군. 나야 항상 그런 대중들을 대변한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박헌영 선생님, 저는 임경석 교수가 틀렸다고 보아요. 역사적인 운동이 무슨 자연과학적 운동이 아니라면, 거기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판가름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겠죠? 운동이란 때로는 이게 옳은 것처럼 보이고 때로는 저게 옳은 것처럼 보이니, 당연히 역사적 운동에는 이런 저런 분파, 이런 저런 종파들이 혼재하게 되는 것 아닐까요? 그러니 종파투쟁이란 역사의 불가결한 과정이지요. 그런데 이것을 극복하고 통합을 이루는 것이 역사적 승리를 위한 필연적인 요구이구요. 하지만 여기서 순수한 원칙적 통일이란 좋은 말이지만 역사적 운동에서는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자거라투스트라씨, 세상에 쉬운 것이 어디 있겠소. 하여튼 당신도 항상 정통을 따르도록 해요. 그러면 아무런 어려움이 없소.

박헌영 선생님, 이론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 통합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이론이 틀린 사람들, 어떻게 보면 그들의 잘못된 이론 때문에 나까지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협감이 들 때조차, 그래도 서로 협력하면서 함께 일을 할 수 있어야 종파라는 것이 사라지지 않을까요?

웬 궤변이요. 이론이 틀린데 어떻게 함께 해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도 몰라요?

하지만 박헌영 선생님, 이 세상에 이론이 같아서 함께 하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목적을 추구하면서도 함께 가는 묘안을 짜내는 것은 오직 마음만이 가능하게 하지 않을까요? 바로 열려진 마음. 서로에게 기회를 주면서 파국을 피하고, 진실이 드러날 때가지 위험을 무릎 쓰고 참고 견디고, 결과적으로 서로 다른 방향에서 추구해 왔던 일들이 상생의 효과를 이루도록 만드는 것. 이것은 이론이 아니고 오직 마음이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 분열이 있었다면, 일단 무조건적으로 통합하고 모든 것을 상대편에게 넘겨준 다음, 역사의 진실이 드러나기를 기다리는 게 옳지 않아요?

자거라투스트라씨, 마음이 아니요. 이론이요. 철두철미 정통만을 따르고자하는 마음, 그게 바로 우리 혁명가의 마음이요.

박헌영 선생님, 마오의 경우를 보시죠?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위와 코민테른의 극좌적 투쟁방침 때문에 그는 정권처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탈당하지 않았고, 수년간 절에 거의 유폐되면서도 당이 위기에 빠졌을 때 기꺼이 협조했지요. 그리고 마침내 만리장정 가운데 비로소 지도권을 회복했었죠. 보리 출판사에서 나온 ‘대장정’이란 소설을 읽어보세요.

거 뭐 시답지 않는 소리요. 자거라투스트라씨, 그냥 잠이나 자시오. 나는 이 ‘저 세상’에서도 항상 정통만을 따르는 사람이요. 그래서 나의 공화국에 아예 이름도 이렇게 붙였소. 한반도 통일 정통 공화국이요.

보이지 않아도 있다 – 박지원, 「不移堂記」 [연암읽기 02]

전호근(경희대)

사함은 연암 박지원의 벗이다. 본디 대나무를 좋아했던 사함은 자신의 호를 죽원옹(竹園翁), 곧 ‘대나무집 늙은이’라고 지었다. 그런데 연암이 막상 가서 보니 사함의 집에는 대나무가 한 그루도 없었다. 연암은 잠시 생각에 잠겼을 터. 그러고는 느닷없이 자기 스승이었던 이양천의 이야기를 꺼낸다.

연암의 스승 이양천은 일찍이 시·서·화에 뛰어나 삼절로 불렸던 이인상과 막역한 사이였다. 본래 제갈공명을 흠모했던 이양천은 이인상에게 공명의 사당에 심어져 있는 잣나무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지난 뒤 이인상이 족자를 보내왔는데 펼쳐보니 잣나무 그림은 없고 양나라 사혜련이 지은 「설부(雪賦)」, 그러니까 눈에 관한 시만 있다. 이양천이 어찌 된 거냐고 묻자 이인상은 「설부」 안에 잣나무가 들어 있으니 잘 찾아보라고 대꾸한다. 그림을 달라고 했는데 글씨를 보내오고 잣나무를 그려달라고 했는데 눈 속에서 찾아보라니? 이양천은 의아할 밖에.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있다가 이양천은 임금의 잘못을 바로 잡으려 간했다가 흑산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어려움을 겪는다. 유배지로 가던 중 눈이 내리더니 곧이어 금부도사가 오면 사약이 내릴지도 모른다는 전갈이 왔다. 따라갔던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며 울부짖는데 이양천은 문득 멀리 눈 속에서 어릿한 나무를 발견한다. 아, 이인상이 말하던 눈 속의 잣나무가 바로 저기 있구나!

섬에 갇힌 뒤 큰 바람이 바다를 뒤흔드는 어느 날 밤, 사람들은 모두 혼비백산하여 토하고 어지러워하는데 이양천은 이렇게 노래했다.

“남쪽 바다의 산호야 꺾인들 어쩌겠는가마는 오늘 밤 임금의 처소가 추울까 걱정이라네[南海珊瑚折奈何 ?恐今宵玉樓寒].”

얼마 뒤 이인상에게서 편지가 왔다.

“근래에 그대가 지은 산호곡(珊瑚曲)을 얻어 보았더니 잘 지내고 있는 줄 알겠소. 이제 보니 그대야말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 할 만하오.”

이런 이양천이 세상을 떠난 뒤 연암은 그의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한다.

“이학사는 참으로 눈 속의 잣나무로다. 선비는 곤궁해진 뒤에 평소의 뜻을 살필 수 있는 법이니 어려움 속에서도 뜻을 바꾸지 아니하고 홀로 우뚝 서 있었으니 어찌 날씨가 추워진 뒤에도 변하지 않는 잣나무가 아니겠는가.”

이런 이야기를 사함에게 들려주고 연암은 이렇게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다.

“나의 벗 ‘죽원옹’ 사함은 대나무를 사랑한다. 사함이 참으로 대나무를 아는 사람이라면 날씨가 추워진 뒤에 우리는 눈 덮인 그대의 뜰에서 대나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잣나무와 대나무는 모두 선비의 변함없는 지조를 상징한다. 이양천은 붓을 쥐고 그림을 그릴 줄은 몰랐지만 당대의 화가 이인상이 보기에 그야말로 자신의 삶으로 잣나무를 제대로 그린 사람이었다. 연암 또한 자신의 벗 사함이 어려운 시절이 닥치더라도 변함없이 지조를 지켜 삶의 대나무를 그리리라는 믿음으로 보이지도 않는 눈 속의 잣나무를 이야기한 것이다.

구보씨 여전히 소통을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12]

문성원(부산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 모든 걸 둘로 나누어 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구보씨가 이런 말을 처음 들은 건 대학교 때였다. 항상 재기가 넘치던 한 선배로부터였다. 이런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어느 쪽에 속할까를 짚어보기 마련이다. 모든 걸 둘로 나누어본다는 건, 얼핏 생각하기에도 단순하고 마땅찮은 특성이다. 양분법이나 흑백논리처럼 좋지 못한 이미지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통 ‘나는 둘로 나누어 보는 쪽이 아니란 말이야’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런 즉시 함정에 걸려들고 만다. 나는 둘로 나누는 보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둘로 나누어 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사람을 양분하여 보는 사고방식을 전제하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사실 이건 배중률(排中律)이라는 논리적 법칙을 활용한 함정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A이거나 A가 아닌 것이지 이도저도 아닌 그 중간은 없다는 게 배중률이다. 이 A의 자리에는 어떤 것이 들어가도 괜찮다. 예컨대 모든 사람은 쥐를 닮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진다고 해 보자. 이것 역시 참인 진술이 되지 않는가.

물론, 쥐를 닮은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 있는 한에서 그렇다. 또 모든 사람이 쥐를 닮은 사람은 아닌 한에서 그렇다. 사람은 모든 걸 세 가지로 나누어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세 가지로 나누어 보는 사람이 적어도 한 명 있고 또 모든 사람이 다 사물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보지 않는다면, 그 진술은 참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모든 걸 둘로 나누어 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두 종류가 있다는 말에는 그런 단서가 없어도 된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이미 사람을 둘로 나누어 보는 사람으로서 모든 걸 둘로 나누어 보는 사람의 예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거짓말쟁이 역설의 반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누가 말한다면 그런 말은 자기 배반적이 된다. 말한 사람도 사람이고 그래서 거짓말쟁이에 속하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세상에는 모든 걸 둘로 나누어 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스스로 모든 걸 둘로 나누어 보는 사람의 예가 됨으로써 적어도 반쯤은 자기 말을 확증하는 셈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사물을 둘로 나누어 본다면 이 말은 거짓이 된다. 그런 경우엔 세상에는 모든 걸 둘로 나누어 보는 한 종류의 사람만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럴 리야 있겠는가?

사실, 이 말은 이 말을 듣는 사람이 자신은 양분법적인 사고를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도록 유도함으로써, 나머지 한 종류의 사례를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런 다음, 자신이 양분법적인 사고를 하지 않는다는 생각 자체가 양분법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해서 듣는 사람에게 머쓱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게 이 말의 전략이고 재미다. 배중률을 빠져나가기 어려운 것처럼, 이 말이 숨겨 놓은 함정에서 벗어나기도 어렵다.

실제로 우리는 둘로 나누어 보는 사고에 익숙하다. 일단 세상은 나와 내가 아닌 것으로 나눠져 있지 않은가. 게다가 내가 아닌 것도 내게 좋은 것과 내게 나쁜 것, 내게 유리할 것과 내게 불리한 것으로 나눠진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흐리멍덩한 것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도 집중적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경우에 그렇지, 중요한 사안으로 떠오르면 도리 없이 내게 좋은 것과 나쁜 것 가운데 한쪽에 속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사는 내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 두 가지로 나눠지기도 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내게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어 보는 사고방식은 좋은 걸까, 나쁜 걸까? 이런 물음에 대해 바로 나쁜 것이라고 대답하면 또 다시 함정에 걸려든다. 그런 대답 자체가 이미 모든 걸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어보는 ‘나쁜’ 사고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분법이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니다. 좋은 경우도 있다.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모든 걸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양분하여 보는 것은 오랜 기간에 걸친 적응의 산물이다. 자연적 삶 속에서는 어떤 것이 나에게 위험한 것인지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를 재빨리 판단하지 못하면 생존하기 어렵다. 새로 나타난 놈이 먹이인지 천적인지 친구인지 적인지를 분간하지 못해 우물쭈물하고 있다가는 순식간에 당해서 거꾸러지기 십상이다.

세상에 어디 나쁘기만 한 것이 있겠는가. 또 어디 좋기만 한 것이 있겠는가. 좋은 면이 있으면 나쁜 면이 있고, 나쁜 면이 있으면 좋은 면도 있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여유 있는 상황에서나 부릴 수 있는 사치다. 야생의 삶에서는 빠른 판단과 빠른 대처가 생존을 좌우한다. 인류는 그 진화적 됨됨이가 형성되는 긴 시간을 그런 환경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은 야생이 아닌 문명 세계다. 여기서는 원초적인 이분법이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오랜 기간에 걸쳐 마련된 우리의 성향은 쉽게 지워지거나 통제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보자. 한 번 내게 피해를 준 사람은 보통 미워하거나 피하게 된다. 아, 그때는 나름의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었고, 실은 저 사람에게도 괜찮은 면이 많아. 생각은 이렇게 하면서도 한번 구겨진 감정과 마음은 쉽게 펴지지 않는다. 더구나 그런 마음은 당사자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그 사람과 닮거나 유사한 특징을 지닌 사람들에게까지 연장된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라는 건, 어떤 면에선 유용한 반응 양태다. 솥뚜껑을 자라로 오인한 건 우스운 꼴일지 모르지만, 혹시라도 그게 솥뚜껑이 아니라 자라였다면 어찌 하겠는가. 일단 경계하고 주의해서 열 번 오인하는 것이 그렇게 하지 못해 한 번 물리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 단, 이건 솥뚜껑처럼 숨어 있는 자라가 그렇게 드물지 않은 환경에서의 얘기다.

자라를 만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둥그런 물건만 봐도 깜짝깜짝 놀란다면, 그건 곤란한 일이다. 이런 증상이 심할 경우엔 교정이나 치료가 필요하다. 심각한 충격이나 피해를 당한 사람은 그런 일이 마음에 남긴 상흔을, 이른바 트라우마를 쉽게 극복하지 못한다. 아픈 기억과 관련된 즉각적인 반응이 이유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우리가 놓인 상황과는 잘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직접적인 마음의 움직임이나 감정을 조절하려고 애쓴다. 감정적으로는 아직 개운치 않은 상대에게도 짐짓 마음을 열려고 노력하고 심정의 쏠림에 휘둘리지 않고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평가하려고 자세를 다잡는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거의 본능적인 양분법을 극복하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데도 우리는 양분법이 지배하는 현상을 쉽게 목도하곤 한다. 인터넷만 열어보아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세간의 관심을 모으는 사안에는 대개 호오(好惡)의 입장이 선명한 댓글들이 달린다. 소위 악플들에는 노골적인 혐오나 증오의 감정들이 드러나고, 내편과 상대편이 전쟁터에서처럼 갈린다.

이것은 진화의 과정이 우리에게 남겨놓은 잔재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일찍이 초기 포유류에서 물려받은 변연계(邊緣系)의 감정 회로를 신피질(新皮質)의 이성적 계산이 통제하지 못하는 결과라고 할 수 있을까?
서용선, TV토론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많다. 구보씨는 어제 TV에서 본 토론을 생각해 본다. 으레 그렇듯 그 토론에도 말 잘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최고의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고 대부분이 대학 교수다. 대뇌 전두엽의 잘 발달된 신피질을 훌륭히 활용하는 사람들이다. 그래도 의견이 선명하게 갈린다. 그래서 세상에는 다시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상하게 양분법을 사용하는 사람과 투박하게 양분법을 사용하는 사람. 도대체 왜일까?

“구보야,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어. 물어볼 만한 걸 물어보는 사람과 물어볼 만하지 않은 걸 물어보는 사람. 너 같은 철학자가 어디에 속하는지는 안 물어봐도 잘 알겠지?”

드디어 Y가 이죽거린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여자가 있다. 손톱으로 할퀴는 여자와 말로 할퀴는 여자. 아니, 한 종류가 더 있다. 손톱으로도 할퀴고 말로도 할퀴는 여자. Y는 자신이 어느 편에 속하는지 알고 있을까?

“하지만 Y야, 그런 걸 궁금해 하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야. 또 철학자만 그런 것도 아니고… 난 나름대로 진지하게 물음을 던지는데, 마치 쓸데없는 걸 물어본다는 식으로 그렇게 무시하려 들면 곤란하다구.”

“엥, 진지하게 묻는 거라구? 설마… 나도 교수나 언론인 같은 지식인들을 많이 만나 봐서 알지만, 그네들이라고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건 전혀 아니거든. 문제는 자연이냐 문명이냐가 아니라, 또 감정이냐 이성이냐가 아니라, 이해관계라구. 그건 맑스 이래 상식이잖아. 네 얘길 듣고 있다 보면 이렇게 뻔한 사실이 사라지고 지엽적이거나 부수적인 게 중요한 문제처럼 등장해. 그게 바로 지식인들의 전형적인 수법 아냐? 구보 너처럼 스스로는 미처 의식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알량한 논리나 지식이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치장해야 너네들의 존립 기반이 마련되지 않겠어? 하지만 봐. 얼마나 많은 지식인들이 쉽게 말을 바꾸고 논리를 뒤집어 가며 자신의 이익을 쫓아갔는지를. 그러니까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거야. 이해관계를 쫓는 보통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척 하면서 역시 이해관계를 쫓는 지식인 나부랭이들.”

“어, Y야, 너 오늘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왜, 무슨 일 있었으면 좋겠어?”

“네 말 하는 폼새가 좀 이상하잖아. 지식인 나부랭이라니…”

“그럼, 아니야?”

“Y야,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대화하자는 게 아니라 싸우자는 거라구. 감정이 실려 있는 말이잖아. 그래가지구는 소통이 안 돼. 기껏해야 자기만족적인 화풀이인 거지. 거기서 어떤 생산적인 결과가 나오겠어?”

“에그, 또 소통이야? 구보야, 너야말로 참 이상하다. 소통을 내세우는 게 무슨 만병통친 줄 아니? 고상하게 웃는 낯으로 얘기해도 소통이 안 되는 경우도 많고, 침묵하거나 화내는 게 소통의 효과적인 방편일 때도 있어. 그러니까 구보야, 세상에는 두 종류의 소통이 있는 거야. 소통을 떠들지만 진짜 소통엔 관심이 없는, 무지하거나 교활한 가짜 소통과, 소통이라는 정해진 틀에 매이지 않고 감정이나 생각을 나누는 진짜 소통. 고상한 가짜와 투박한 진짜. 구보야, 너는 어느 쪽이니?”

자거라투스투라 소설가 김숨을 만나다[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사업단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자거라투스투라야, 왜 눈이 벌겋지? 요새 불면증이라도 생긴 거냐?

아니에요. 니체 아부지, 소설책 읽느라고요.

그 나이에, 아직도 소설을 읽느냐? 한심하다고 생각되지 않니? 니 친구들은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데…넌 권력의지란 없느냐?

니체 아부지, 아부지가 말한 ‘권력의지’라는 것 때문에 철학자들이 죽을 지경이에요. 아부지를 위해 변명하느라고 말이에요. 저는 그걸 인간의 내면 속에서 솟구치는 자유로운 생명력을 의미한다고 설명해서, 사람들의 의심을 풀어주려 하지만, 솔직히 저 스스로 그 개념이 좀 수상하긴 해요.

뭐가 수상하다는 말이냐?

그럼, 니체 아부지, 토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악령?에 나오는 음모적인 무정부주의자도 그런 생명력을 가진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자거라투스투라야, 니는 아직 도덕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구나. 네가 그 속에 들어가 앉은 것은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너 자신을 보존하기 위한 작은 욕망 때문이지. 나는 그런 사람을 ‘종말인’이라고 부른다.

니체 아부지, 자유로운 생명력이 보편적인 선을 지향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신학자 샤르댕은 그런 해석을 하고 있지만, 역시 신을 개입시키지 않을 수 없을 거 같아요.

보편적인 선이라는 굴레조차 내 던져 보렴. 그때는 이 세상이 또 다르게 보일 것이야. 왜 불교의 선사들은 백척간두에서 자기 몸을 던진다 하지 않니. 너도 그렇게 너를 버려 보렴.

니체 아부지, 솔직히 전 그게 두려워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제 자신이 아니라 겨우 교수직을 던지는 정도이죠. 그런데 아부지, 요새 아주 엄청난 소설가를 제가 발견했어요? 니체 아부지, 소설가 김숨이라고 알아요?

자거라투스투라야, 숨 막힌다. 이름이 왜 이렇게 숨 막히냐? 물론 예명이겠지만 너무 팍팍하게 지은 것이 아닐까? 그런데 어떻게 알은 거지?

우연히 술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어요. 잘 아는 시인을 찾아갔더니, 그 자리에 있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말없이 돼지고기를 굽기만 하고 전혀 먹지는 않더라고요. 그 침묵이 심상치 않아서 제가 지은 책하나 드리고, 그가 지은 소설책 한권을 받았죠. 장사치고는 제가 훨씬 이득이죠. 안 팔리는 책과 잘 팔리는 책을 교환했으니까요. 그 소설책 이름이 또 숨 막혀요. 『간과 쓸개?라니까요.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그런 거 말이냐? 그럼 풍자소설이겠네?

그렇지는 않아요. 대개 200년도 후반 미국발 금융위기 전후에 쓴 단편소설들을 끌어 모은 책이에요. 그 중 첫 번째 소설의 제목이 ?간과 쓸개?이고, 그 제목을 따서 책 이름으로 했어요.

소설책 한권 읽는다고 그렇게 눈이 충혈되었냐? 소설이야 그저 전철에서 읽으면 충분한 거 아니냐.

니체 아부지, 소설가 들으면 도끼 들고 나오겠어요. 김숨의 소설이 하도 재미있어서 그의 소설을 대부분 구했어요. 많이도 썼는데 지금까지 제가 구해 읽은 것은 『간과 쓸개』 말고도 『투견』, 『백치』, 『침대』가 있어요.

그래 자거라투스투라, 니가 보기에 어떻드냐?

놀라운 소설가예요. 뭐랄까 힘이 넘쳐요. 위에 말한 책 가운데 가장 빨리 나온 게 『투견』인데 (2005년 정도) 그의 소설은 거의 대부분 현실에 짓밟힌 채 무기력하게 그리고 두려워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어 든든한 리얼리즘의 바탕 위에 서있죠. 그런데 강열한 이미지들, 철학적인 사색들로 해서 투박한 힘이 느껴지죠. 여성 작가라고 전혀 생각되지 않을 정도예요. 그게 꼭 김기덕 감독의 영화들을 연상시킨다니까요.

아, 김숨이 여성 작가이냐? 나는 이름 때문에 정말 김기덕처럼 생긴 남자가 아닐까 했는데…

그런데 니체 아부지, 소설가 김숨에게 200년도 후반에 아마 2007-8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아요. 무언가 변화가 있어요. 그저 한번 쓱 훑어보았기에 정확히 알지는 못하겠지만, 예를 들어 혹 종교적인 개종과 같은 사태가 아닐까 싶어요.

그럼 김숨이 기독교인이란 말이냐?

그건 몰라요. 저는 한 번도 김숨과 예기한 적은 없다니까요? 아까 말했잖아요. 그저 말없이 돼지고기만 굽고 있었다니까요.

그럼 종교적 개종이란 무슨 말이냐?

아니 그와 유사한 사태라는 거죠. 니체 아부지, 말 귀를 그렇게 못 알아들어요?

알겠다. 니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말하라는 얘기지. 니는 나의 말귀를 그렇게 못 알아듣느냐? 자식이 애비한테 대드는 것을 나는 못 본다.

글쎄 소설가 김숨이 다루는 대상은 항상 그래요. 예를 들어 『백치들』에서는 IMF 사태로 직장을 잃은 백수들을 다루고 있죠. 어떤 사람들인지는 충분히 짐작되죠. 그런데 김숨은 이들을 묘사하면서 마치 『백년동안의 고독』에서 마르케스가 시도했던 것처럼 마술적 리얼리즘의 기법과 비슷한 것을 구사해요. 그래서 마술적인 분위기가 백수들의 어두운 삶을 에워싸고 있죠. 그들의 패배와 그들의 무기력 속에 그들이 가진 간절한 소망이 그렇게 표현되어요.

음. 마르케스는 남미의 원시림의 느낌이 들지 않나? 김숨도 그런가?

그런 원시림의 느낌은 아니에요. 오히려 썩고 끈적끈적한 물웅덩이 느낌이 들죠. 그러나 그 속에서도 생명은 살고 있는 거죠. 그런데 『간과 쓸개』에 와서 소설가 김숨에게 또 다른 변신이 일어났어요. 물론 여전히 다루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짓밟힌 하층민의 삶이죠. 하지만 이 책에서는 마술적 리얼리즘을 넘어서 거의 카프카적인 느낌이 들어요.

카프카라니?

그 중의 한편을 제가 오늘 소개해 드릴 께요. 그러면 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실 거예요. ?모월 모일?이나 ?룸 미러?가 있는데, 그 중에 ?룸 미러?가 좋겠네요.

‘두 부부가 토요일 오후 차를 타고 구리에서 강변도로를 거쳐 파주로 가죠. 아내가 이 소설의 화자인데, 그들은 남편의 이모부의 장례식장에 가는 길이죠. 남편의 이모가 20년 전에 죽은 이후, 남편은 이모부를 만난 적이 없다고 해요. 당연히 왜 죽었는지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죠.’

‘차의 뒷자리에는 아이들(두 남자아이)이 타고 있는데 그들은 차를 타자말자 자고 있어요. 남편은 끊임없이 룸 미러를 힐끗힐끗 보면서 아이들이 깨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하죠. 그건 화자인 아내도 마찬가지이에요.’

두 남자아이가 깨어나면 어떤 소동을 벌일지 짐작이 되죠. 그래서 차라리 그 아이들이 잠들어 있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숨죽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태도일 거예요. 그들의 삶은 그저 장례식장에서 만나는 정도이죠. 니체 아부지, 짐작이 되요?

글쎄다. 그건 아파트에 사는 한국인이나 알겠지 19세기 독일에 살았던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남편은 전에 아이들이 키우던 도마뱀을 죽이려 했어요. 그리고 아이들에게 박제가 된 새를 선물로 합니다.’

이게 바로 아이들을 재우는 방식이죠. 아마 도마뱀이 아이들에 내재하는 생명력이라면, 박제가 된 새는 이를 감시하는 초자아를 의미하겠죠. 어떻든 그 결과 이 중산층 부부는 평온하면서 질서 있는 삶을 살죠. 물론 거세된 삶이겠죠.

자거라투스투라야, 니가 해설까지 덧붙이지 말고, 그저 소개만 하렴. 그래야 나도 나름대로 감상하지 않겠느냐?

알겠어요. 해설은 자제하죠. 하지만 해설하지 않고 설명하는 법을 제가 몰라요. 아니면 직접 읽어보시죠.

알았다. 하여튼 계속해 보렴.

한강을 끼고 달리면서 그들은 아주 진부한 사건들을 만나죠. 관광버스를 만나는데, 그 버스 회사의 이름이 ’우주 관광‘이에요. 처음에는 빈차였는데 이상하게도 나중에는 사람이 가득 타고 있어요. 그 가운데 잠든 노인이 있는데 화자가 들여다보니 혀가 없어요. 또 살찐 돼지를 싣고 아마도 도축장으로 가는 트럭도 만나죠. 화자는 돼지들에게서 역겨운 냄새를 맡고 구역질을 느끼죠. 이런 것들은 모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 같아요. 거세된 삶, 그것은 곧 죽음 속에 들어있는 삶이죠. 바로 이런 세계는 니체 아부지가 유럽의 종말로 묘사한 그런 삶의 모습이죠.

그런데 차가 자유로로 들어가면서 점차 지체되기 시작해요. 비구름이 몰려와서 날은 저녁처럼 어두워지죠. 주인공이 잠깐 잠들었는데 그 사이(꿈이지 아니면 생시인지 불분명해요) 강변을 질서 있게 나르던 새들이 위협적으로 나르더니 갑자기 살찐 돼지들을 공격해요. 그리고 뒤차에서 상향등을 켜서 비현실적인 빛이 그들의 차안에 비추어 들죠. 그래서 땅에서 기던 차가 갑자기 공중에 떠있는 느낌이 들어요. 여기서부터 현실이 환상적인 세계로 바뀌는데 그런 변화가 꼭 카프카적인 세계 같아요. 하여튼 이런 일들은 무언가 다가오는 어떤 것을 암시하는 알레고리죠.

그래서 제가 소설가 김숨에게 무슨 일이 있었다고 짐작하는 거죠. 실제로 ?룸 미러?의 마지막에 무슨 일이 생겨요. 갑자기 차들이 정지해 버리고 사람들은 내려서 걸어가죠. 화자도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고 싶어 내려서 사람들을 따라 걸어요. 사람들 중 어떤 여인은 딸을 안고 가는데 그녀의 긴 머리칼이 딸의 숨을 막는데도 그것도 모르고 그냥 미친 듯이 걸어요. 주인공이 마침내 사람들이 멈추어 서서 모여 있는 곳에 도착하죠.

그래, 도대체 무슨 일이 생겼는데?

아니 소설은 거기서 끝나요.

“그리고 마침내 내 눈앞에 펼쳐진 그 광경을 보았다. 지금쯤 내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났을지도 모르겠다는 끔찍한 생각을 하며…”

이게 소설의 마지막 구절이에요.

그럼, 자거라투스트라 너는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니?

글쎄요. 모르죠. 적어도 분명한 것은 그 사건은 잠든 아이들을 깨어나게 할 만한 사건이라는 거죠.

그게 뭐냐?

글쎄요. IMF 사태 같은 거? 아니면 노무현의 죽음? 하여튼 아이들이 깨어난다는 것은 적어도 니체 아부지가 말한 생명력이 솟구친다는 뜻이겠죠. 죽음과 같은 현실을 깨뜨리는 그런 힘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긍정적으로 해석해요. 하지만 부정적일 수도 있죠. 그것은 소란과 폭동을 동반하는 것일 테니까요.

자거라투스트라, 오바마 빈 라덴을 만나다.[자거라투스투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오바마 빈 라덴씨, 왜 그렇게 구석에 쭈그려 있지요? 한 나라 대통령이 말입니다.

당신 누구요? 난 오사마가 아니요, 오바마요.

아, 죄송해요. 난 짜라투스투라가 아니라 자거라투스트라요. 니체의 사생아. 들어 본 적이 있을 거요.

아니 금시초문이요.

그럼 멀지 않아 듣게 되겠지요. 주한 미국 대사관에 물어보시오. 대학교수치고 안식년을 미국으로 가지 않은 교수가 딱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나, 자거라투스트라요. 한국교수들이 왜 안식년을 미국에서 보내는 것인지, 오바마 대통령은 아시오?

그야, 미국이 당신네 한국 교수들의 교수자격증의 고향이니, 안식하기에 딱 맞기 때문이 아니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사실은 ‘맹모삼천지교’ 때문이요. 말이 어렵지는 않겠지요? 이 나라에서는 영어 실력이 출세의 지름길이고, 부모된 자로 자식을 미국에 데리고 가는 것은 다 그런 맹모삼천지교 때문이요.

그럼 당신은 반미주의자라서 부모의 도리조차 포기한 거요?

무슨 말씀이요. 우리 친구 중에 미국에는 갔지만 라스베가스에 가지 않았다는 친구가 하나 있소. 그는 거기서 잭팟이 터지면, 교수가 도박했다고 신문에 날까 봐 가지 않았다고 해요. 나도 마찬가지요. 미국에 갔다가, 내가 유명해지면, 나보고 미국 갔다 왔기 때문에 유명해졌다 할 거 아니요? 그래서 미국에 안가는 거요.

한국 말에 ‘기우’라는 말이 있다 하더니, 꼭 당신보고 하는 말이군요. 당신이 유명해질까 걱정하는 것이 바로 그런 기우에 해당되는 거요. 근데 왜 날 찾아 왔소. 내가 철학이나 하도록 한가한 줄 아시오?

하기는 당신이 바쁜 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당신이 하도 심해서 내 찾아왔소. 내가 투표권도 없지만 지난 대통령 선거 때 열렬하게 당신을 밀었던 것을 아시오? 그때 예비선거 시작하자말자, 힐러리 클린턴하고 당신이 TV토론에 나왔더군요. 힐러리의 요리 빼고 저리 빼는 약삭빠른 워싱톤식 정치 감각에 비해 당신은 우직하고 시원시원했어요. 이라크에서 철군하겠다는 단 한마디 명확한 약속 때문에 난 당신이 당선되기를 학수고대했소.

아, 그래요. 반갑소. 이번에 또 선거가 있는데, 한 번 더 부탁해요.

하지만 이번에는 절망했소. 어떻게 한 나라 대통령이 의자 구석에 마치 물에 빠진 쥐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다는 말이요?

아니, 내가 말하지 않았소? 이번 기습 작전을 지휘하는 장군에게 자리를 양보한 거요. 그것은 나의 실용주의 정신을 보여준다고, 신문에도 다 설명되었는데, 그것도 모르요?

그런데 나한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 그것은 마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것처럼 보입디다. 기습작전을 하고 혹 문제가 있으면 내가 한 것이 아니다 하고 발뺌 하려 했던 거 아니요? 한 발은 이쪽에 넣고 다른 발은 밖으로 빼는 자세가 바로 당신의 자세 같아요. 당신이 그런 것은 다 옛날의 아픈 기억 때문이 아니요?

무슨 기억을 말하는 거요?

그 옛날 이란 혁명이 일어났을 때 이란 학생들이 미 대사관을 점령했지요. 그때 카터는 기습작전을 폈는데, 실패로 돌아갔어요. 사람들은 카터가 재선을 하지 못하고 끝내 단임으로 마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이 기습작전의 실패 때문이라 해요. 그 기억 때문에 이번에 기습작전 하면서도 당신은 안절부절 못하고 그래서 엉거주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던 거 아니요? 만일 실패하면 내가 한 게 아니라고 발뺌하려 했던 거지요.

자거라투스트라 씨? 내 말을 기억해요? 미국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 내가 빈 라덴을 제거한 후, 위대한 우리 국민들에게 한 바로 그 말, 말이요. 이거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오바마 빈 라덴 씨, 미 대통령 각하, 정말 그 말은 위협적이었어요. 전 세계 반미주의자들의 가슴을 벌벌 떨게 했어요. 미국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그래서 저항하지 않은 오사마 빈 라덴을 살해한 거요? 그래서 그의 시신을 아무도 모르는 바다에 수장해 버린 거요? 이 끔찍한 야만은 오사마 빈 라덴의 끔찍한 테러와 뭐 다를 바 있소? 마땅히 그를 데려와 재판을 한 이후 처형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은 당신네들이 체포해 재판하고 사형하지 않았소? 그게 정의의 나라 미국의 이미지에 맞는 게 아니요?

자거라투스트라 씨, 당신은 한국에서 백만 권 팔렸다는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지 않았단 말이요? 거기 보면 다 나오는데, 내가 또 설명해야 한단 말이요?

그 책은 나도 읽었소. 거기 보면 인류에게는 민주적인 합의를 넘어서는 어떤 공동적인 도덕이 있다는 거 아니요. 그런 도덕 속에 인권이 들어간다고 당신네들이 말하지 않았나요? 그리고 그런 인권에는 재판받을 권리도 포함되는 것이요. 당신네들은 봉건주의 시대에나 통하던 복수의 권리를 수행한 거지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모르겠지만 오사마를 재판하는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아요? 우선 오사마는 재판정을 자신의 테러리즘을 선전하는 장소로 삼을 거란 말이요. 히틀러가 뮌헨 폭동이 실패로 돌아가 체포된 이후 재판정에서 벌렸던 선전을 생각해 보시오. 정의로운 재판정을 불의의 선전장이 되도록 하는 것은 옳은 일이요? 자거라투스트라씨, 당신이라면 이런 끔찍한 부정의를 허용할 수 있겠소?

오마바 씨, 이슬람이 그렇게 무서워요? 아니면 이슬람을 탄압했던 당신네들이 스스로 무서운 거요? 오사마 빈 라덴이 재판정에 서면 그게 다 폭로될까 보아 그런 것 아니요? 당신들이 정의롭다면 재판의 결과 오히려 전 세계에 당신네들의 대의가 들어날 것 아니요? 그건 그렇다하고, 철학적으로 보아서 그것은 결과를 고려하는 논법이 아니요? 당신이 존중하는 마이클 샐던은 공동의 권리는 천부적인 것이어서, 결과와 무관하게 정의라 했어요. 그래서 그는 공동체주의자가 된 거요.

아니, 자거라투스트라 씨 책을 좀 열심히 읽어보세요. 거기 칸트를 논하면서 샐던이 뭐라 했나요? 이런 논의를 하지 않아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도덕법칙이 있다 합시다. 내 친구가 강도를 피해 내 집으로 도망 왔어요. 그런데 강도가 찾아와서, 내 친구가 숨었는가 묻습니다. 그때 칸트라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해요? 결과를 위해 거짓말할 수는 없소. 샐던은 이때 소위 회피 전술을 쓰면 된다고 하지 않았나요? 즉 내 친구가 집에 숨은 것은 아니라고 말이요. 집에 오기는 했지만 숨은 거는 아니라는 거지요. 물론 집에 왔다는 말은 빼고 뒤의 말만 하는 거지요. 그러면 결과의 위험도 피하고, 법칙도 지킬 수 있다고 했지요. 그러면서 샐던은 바로 이 회피 전술이 클린턴이 르윈스키 청문회에서 써먹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오바마 씨, 그래서 당신은 이번에 회피 전술을 사용한 거구 만요. 재판의 권리를 인정하면서도 재판이 성립되지 않도록, 남몰래 살해해 버린 거군요. 그리고는 살해한 것은 아니고 다만 총을 발사했다고 하면서 오사마 빈 라덴의 마지막 장면을 공개하지 않는군요.

나는 다시 강조하겠소. NCND요. 그게 나의 스승 마이클 샐던이 나에게 가르쳐준 비법이요.

오바마 씨, 굳이 당신들한테 철학이 왜 필요한지 궁금해요. 아니 거꾸로 우리 같은 철학자가 이 세상에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당신네들의 기만을 합리화하기 위해 우리가 필요한 거요?

아니, 자거라투스트라 씨, 그게 내 물을 물음이요. 우리가 그냥 살게 놓아두면 안 돼요? 왜 당신네들 철학자들이 당신네들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건에 굳이 개입해서 우리로 하여금 궤변을 하도록 강제하는 거요?

그럼 오사마 빈 라덴을 수장한 것도 샐던 책에 나오는 거요? 사람들이 무덤에 묻힐 권리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권리로 보았소. 말하자면 인권인 셈이요. 궁금하면 『정신현상학』에서 ?인륜의 정신? 장을 보시오. 거기서 헤겔은 안티고네 비극을 다루면서 안티고네가 한 말을 새기고 있어요. 비록 조국에 대항한 역적이지만, 나의 오빠이고, 그래서 묻힐 권리가 있다고 하는 말, 말이요.

물론 우리 미국이 그런 기본적인 권리를 부정한 것은 아니요. 다만 바다에 묻었을 뿐이요. 그리고 그 바다를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지. 그러니 인간으로서 묻힐 권리를 부정한 것은 아니지 않아요? 자거라투스트라 씨 우리 미국인들이 그렇게 허술한 사람은 아니요.

맞아요. 그런데 당신네들은 오사마의 무덤을 세우면 그게 성지가 될까 보아 수장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시체도 무덤도 찾을 수 없으니 말이요. 하지만 그건 생각해 보았어요. 바다에 수장하면 그 모든 바다가 성지가 된다는 것, 말이요? 전 세계의 바다가 얼마나 넓고 얼마나 많아요. 전 세계의 바닷물이 모두 오사마 빈 라덴의 피가 되고, 전 세계의 모든 소금이 오사마 빈 라덴의 살이 되는데. 그것도 당신네들이 결과를 고려한 거요?

자거라투스트라 씨 다시 말하건대, 미국은 할 수 없는 것이 없어요. 만일 그러면 미국은 전 세계 바다를 말려서 육지로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그렇게 흥분하지 마세요. 오바마 씨, 내가 좋은 제안을 하리다. 오사마 빈 라덴을 주검을 건져서 지금이라도 남극에 묻으세요. 설혹 남극이 성지로 되더라도, 오사마 빈 라덴 추종자들이 설마 남극까지 가겠소?

자거라투스트라 씨 재선이 되면 봅시다. 나도 재선까지는 어쩔 수 없어요. 현실이 그런 거요.

알겠소. 오바마 씨, 당신이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기를 바라요. 난 당신이 카터처럼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써먹고 버리는 카드가 되기를 바라지 않아요. 그리고 재선이 되면 좀 분명하게 합시다. 먼저 그 천 년 먹은 여우 힐러리 클린턴을 해임하시오. 그는 여성주의의 이미지를 해치는 결정적인 본보기요.

 

 

 

 

 

5천년 최고의 문장, 박지원, 『연암집』[연암읽기]

전호근(경희대)

『연암집』은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문집으로,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일상적인 글쓰기 주제인 서(序)·발(跋)과 시(詩)·서(書)는 물론이고, 임금에게 올린 장계(狀啓)나 대책(對策), 소(疏)뿐만 아니라 「방경각외전(放?閣外傳)」 같은 소설,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장편 기행문으로 평가받는 「열하일기(熱河日記)」와 농사를 짓는 데 필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과농소초(課農小抄)」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일찍이 구한말의 창강 김택영을 비롯하여 많은 문인·학자들은 연암이 우리 고전문학의 최고봉이라는 데 동의했다. 그만큼 연암의 문장은 짝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기 때문이다. 『연암집』을 읽는다는 것은 고전 애호가들은 물론이고 연구자들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도전이다. 지극히 아름답지만 또 지극히 난해하다. 또 하나, 당대 조선인들의 삶을 구구절절하면서도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연암집은 참으로 귀한 책이다. 예를 들어 「열녀함양박씨전 병서」에서 연암은 과부의 심정을 이렇게 읊는다.

“가물거리는 등잔불 제 그림자 위로할 제 홀로 지키는 밤은 지새기가 어렵더라. 게다가 처마 끝에서 빗물이 방울져 떨어지거나 창가에 달빛이 하얗게 흐르며, 낙엽이 뜰에 뒹굴고 외기러기 하늘에서 울며, 멀리 닭 울음도 끊어지고 어린 종년은 세상모르고 코를 골면 가물가물 잠 못 이루노니 이 괴로움을 누구에게 하소연하랴.” 가만히 읽고 있으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 때문에 그의 글은 당시 사대부뿐만 아니라 여인과 중인들에게까지 필사되어 읽혔을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군왕이던 정조(正祖)조차도 연암을 글을 읽지 못하도록 금지하기까지 했다. 그만큼 파급력이 컸다는 뜻이다. 사실 연암은 혈연이나 정치적 계보로 치면 당시 신분사회의 최상층부에 있었던 주류였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조금도 얽매이지 않았다.

오히려 연암은 당시 양반지배층의 고루하고 위선적인 관념을 선뜻 뛰어넘었던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백동수 등 서얼 출신들과 마음을 터놓고 진실하게 교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인들의 이야기를 즐겨 들었고 참외 파는 사람, 돼지 치는 사람도 서슴없이 자기 친구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떠돌이 거지나 이름 없는 농부, 땔나무 하는 사람, 시정의 왈패 등 하층민이 자주 등장한다. 상하의 위계가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감히 시도하기 어려운 글을 쓴 셈이다. 그런 점에서 연암은 진정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연암의 빛나는 문장은 바로 그런 자유로운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연암의 글은 호탕함에서는 『맹자』와 견줄 만하고 신랄한 풍자와 날렵한 비유에서는 『장자』를 넘나든다. 예컨대 맹자의 논리로 성리학적 사고에 갇혀 있는 당시의 지식인들을 매섭게 비판하고, 장자의 다채로운 표현을 빌어 시골 사람의 코고는 소리를 아름답게 그려낸다.

중국의 고문을 모방하는 글쓰기에 얽매어 있었던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연암의 글을 잡글이라고 비난했지만 그는 시대를 꿰뚫어 보는 예리한 감각으로 양반지배층의 위선과 가식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게다가 읽는 이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는 해박한 지식, 불한당도 여지없이 설복시키는 명쾌한 논리, 마치 눈앞에서 대상을 보는 듯 착각하게 하는 사실적인 표현, 읽고 있으면 절로 무릎을 치게 하는 절묘한 비유 등으로 많은 독자들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그의 글은 읽는 사람을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하며 머리털이 쭈뼛 서게 하거나 목이 메이게 하는가 하면 무릎 치며 탄복하다가 종내 가슴이 아려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는 마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우쳐주기까지 한다. 오늘날 우리가 연암의 글을 읽어야 할 이유다.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 [서평/특별기고]

강신익(인제대 의대 교수/인문의학연구소장)

이 책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는, 현대 정신의학이 다양한 문화의 자생적 문제해결능력을 무시하고 미국문화의 잣대로 인간의 몸과 마음을 재단함으로써 발생하는 사태들에 대한 보고서이다. 저자는 거식증, 외상후장애증후군(PTSD), 정신분열병, 우울증 등 서구에서 발견되고 분류되고 관리되어 온 대표적 정신질환이 홍콩, 스리랑카, 아프리카의 잔지바르, 일본에서 퍼져나가는 양상을 세심히 관찰해 보여준다. 그리고 서양의학은 토착문화의 자생력을 파괴하는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중 홍콩과 일본은 우리와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하는 지역이어서 특히 관심이 간다.

아마 현대의학이 인류를 참혹한 질병의 고통에서 구해준 은인이라고 믿는 독자라면 무척 당혹스러울 것이다. <질병 판매학>, <더러운 손의 의사들>, <제약회사들은 어떻게 우리의 주머니를 털었나> 등 현대의료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많은 책들이 출판되기는 했어도 의학이 인류구원의 보루라는 믿음은 우리 사회에 아직 굳건하다. 이 책들은 제약회사가 처방권을 가진 의사를 합법적으로 또는 탈법적으로 매수해 불요불급한 처방을 남발하도록 조장한다고 폭로한다. 실제로 약을 처방하는 대가로 제약회사가 의사나 의료기관에 지불하는 리베이트의 문제가 여러 차례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2000년에 있었던 의사들의 파업은 의약분업을 통해 약품의 유통마진을 줄이려는 정부와 의사집단의 이해가 충돌한 사건이었다. 문제를 이렇게만 보면 이해당사자들 사이의 조정과 합의가 해결책이다. 실제로 의사파업은 힘에 따라 이해관계를 재분배하는 걸로 마무리가 되었다.

하지만 이 책은 문제를 좀 더 근원적인 곳에서 찾아낸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축적해 가는 삶의 지혜, 즉 공동체마다의 문화다. 그런데 미국의 의사들이 중심이 돼서 만들어낸 정신질환분류(DSM)에는 서양과 다른 세계관과 삶을 담을 공간이 없다. 따라서 서양의 정신의학은 서양인의 삶에서 형성된 정서와 문제를 기준으로 다른 문화권의 삶을 재단할 수밖에 없다. 홍콩의 거식증 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날씬한 외모에 대한 무의식적 동경이 이 병의 원인이라는 서양식 설명은 실제 사례와 거의 들어맞지 않는데도 말이다. DSM은 특정 문화권에서만 발견되는 증상을 포함하기도 한다. 한국인에게만 있는 ‘화병’이 그 중 하나다. 하지만 서양의 교향악에 국악 가락 한 소절을 집어넣는다고 그 음악이 국악이 되지는 않는다. 이 책은 그런 문화적 불협화음에 관한 것이다.

문제를 이해관계보다 더 큰 문화의 틀 속에서 찾아낸 것이 이 책의 큰 장점이다. 이로써 우리는 의료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된다. 이것은 20세기 중반 이후 현대의학을 비판적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대두된 여러 학문 중 하나인 의료인류학의 접근법이기도 하다.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 하버드 대학의 아서 클라인만은 대만에서의 정신병 연구를 통해 정신질환에 대한 문화적 연구의 길을 열었다.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서구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문화적 폭력일 뿐 아니라 현지민을 새로운 의료상품의 소비자로 만들어 사회경제적으로 수탈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거식증과 정신분열병의 사례가 주로 문화적 폭력에 대한 것이라면 외상후증후군과 우울증의 사례는 주로 문화적 폭력이 경제적 수탈의 수단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외상후증후군과 우울증은 각각 서구식 훈련을 받은 심리상담사와 거대 다국적 제약기업의 큰 시장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현지인들을 서양인처럼 앓게(미쳐가게) 만든다는 것이다.

세계가 미국처럼 미쳐가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현지 문화에 대한 무지와 무시라면 다른 하나는 미국인들의 몸과 마음이 되어버린 그들 자신의 문화에 대한 반성의 부재다. 이 책의 초점은 전자에 있지만 후자에 대해서도 마땅히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이것은 의료인류학이 갔던 경로이기도 하다. 최초의 의료인류학자들은 과학에 바탕을 둔 서양의학의 객관성과 보편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식민지와 후진국에서는 건강에 관한 각종 미신과 토착신앙 때문에 서양의학이 잘 수용되지 않았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위해서는 그들의 신앙과 문화를 연구해야만 했다. 그런데 후진국의 신앙과 거기에 바탕을 둔 토착의학을 연구하다보니 비교분석을 위해 같은 방법으로 서양의학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문화적 장막에 가려 보이지 않던 서양의학의 전제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서양의학의 보급을 위해 시작된 연구가 이제는 오히려 서양의학의 문제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된 것이다. “다른 문화의 믿음들을 깊이 탐구하면 우리 자신의 문화적 편향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있다.”

이 책은 서양의 정신의학이 다른 문화권에서 만들어내는 문제들에 관한 것이지만, 거꾸로 다른 문화의 시선으로 서양의학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도 있다는 교훈을 주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일상에 대한 과도한 의료화가 다양한 맥락 속에서 자동적으로 습득된 문제해결 능력을 무력화하여 오히려 병을 만든다고 주장하는 이반 일리히의 <병원이 병을 만든다>, 그리고 프랑스의 정신의학이 식민지 알제리인의 정신을 파괴하고 지배하는 양상을 비판한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과 일맥상통한다.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에서 예외는 아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진단명을 쓰지 않지만 50대 이상 세대라면 히스테리와 신경쇠약이라는 서양에서 발명되고 수입된 증세에 익숙할 것이다. 실제로 그런 증상을 앓았던 경험이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유명 연예인들의 잇단 자살은 우울증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켰고 아마 그 발병을 더 촉진시켰을지도 모른다. 천안함 사건에서 생존한 승조원에 대해 실시했다는 외상후장애증후군 치료는 과연 어떤 문화적 전제에서 출발한 것인지에 대한 반성도 필요하다. 혹시 치료를 빌미로 틀에 박힌 가치를 주입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 책은 이러한 현실적 반성 외에 우리들 자신의 본성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가 생물학적 존재인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문화에 길들여진 존재라는 사실을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이 책은 이 점을 상기시켜 준다. 대중은 문화적 권위의 지지를 받는 틀 속에서 질병을 이해하고 경험한다. 중세 유럽에서는 그 문화적 권위가 교회였지만 근대 이후 급속히 과학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20세기 이후에는 자본과 소비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19세기 유럽에서 크게 유행했던 히스테리 환자들은 이 분야의 문화적 권위였던 의사 샤르코가 진단하고 분류하고 기술한 그대로의 증상을 겪었다. 오늘날의 소년소녀들은 TV에 등장하는 연예인의 외모와 행동과 소비패턴을 규범으로 삼고 닮으려 한다. 그래서 성형과 미용과 다이어트의 열풍이 분다. 이것은 “무의식이 감정의 고통을 당대에 이해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하는 시도”의 결과다. 이렇게 문화적 기대와 개인적 경험이 상호 작용하고 우리의 생물학적 몸은 문화적 경험과 기대를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한다. 몸과 문화는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생물-문화적(Bio-Cultural) 현실이다.

21세기의 문화적 권위인 자본은 바로 그 생물-문화적 현실을 파고들어 자신들에게 유리한 새로운 생물-문화적 현실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자율적 문제해결 노력이 아닌 약품의 소비가 규범인 현실이다. 이런 현실이 확대되면 모든 사람이 그 새로운 생물-문화적 현실의 구성요소가 된다. 책 속에 인용된 애플바움의 말처럼 “완벽한 건강이라는 유토피아적 가능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부지중에 기업의 마케팅 담당자들에게 우리가 가진 자유의 도구들을 마음대로 통제할 고삐를 넘겨주고 말았다. 과학의 객관성, 의료의 윤리와 공정성, 환자의 이익을 위해 일하겠다는 맹세를 스스로 지키는 한에서 의학에 자율성을 부여할 특권은 이제 그들 손에 있다.”

의료인의 전문가로서의 자율성과 대중의 의료인에 대한 신뢰를 되찾고 환자가 의약품의 소비자가 아닌 자기 건강의 주체로 바로 설 수 있을지의 여부는 바로 이와 같은 사회문화적 메커니즘을 바꿀 수 있을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이 책이 의료와 관련된 모든 논쟁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