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비극에서 희망을 줍는 진정한 광대 [기획서평]

이현숙 (자유기고가)

어두운 무대 한 귀퉁이, 비탄에 잠긴 여배우가 핀 조명을 받으며 주저앉아 있다. 삶의 전부라 여겼던 연인과 이별한 뒤 반쯤 정신을 놓은 듯 보인다. 힘없이 혼잣말을 내뱉던 여배우는 점차 분노와 허탈감, 애증과 모멸감에 몸을 떨며 격앙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온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애써 부정하며 격한 대사를 토해내다 끝내 실신하는 장면이 이 연극의 절정이다.

나는 여배우로 분장한 딸의 눈에서 순간 ‘번쩍!’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배우가 먼저 울음을 터뜨리면 안 돼. 관객의 눈물을 끌어내야지, 조바심으로 입이 마른다. 절규하며 쓰러진 여배우, 그리고 암전. 관객들의 박수와 함성이 이어지고 내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끝내 눈물 흘리지 않은 채 슬픔과 고통의 연기를 해낸 딸이 자랑스러웠다.

 

청년 햄릿을 만나 평생 ‘셰익스피어’를 끼고 살다

<셰익스피어 읽어주는 남자>의 저자의 말처럼 “연극은 지독한 중독”이다. 무대 중독에 빠져 지내던 딸과 가슴 졸이며 함께 울고 웃었던 어미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중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아직 어린 십대의 딸이 혹독한 연습을 견뎌내며 수없이 오르내리던 무대, 그것은 땀과 눈물과 고행을 거쳐 새롭게 탄생하는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기적 같은 체험이었다.

한바탕 꿈을 꾸듯이 나를 잊고 인생의 희로애락을 펼치고 나면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져 내리는 무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곳은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날개 없이도 날아다닐 수 있는 꿈과 상상의 세계이다. 그 무대에 서 본 이, 그 무대를 만들고 꾸민 이, 무대에서 함께 호흡해 본 모든 이들은 기꺼이 이 중독에 함께 빠져든다. 셰익스피어를 읽어주며 조용한 발걸음을 이끈 저자는 어느 새 훌쩍 무대 위로 뛰어올라 광대로 변신해 있었다.

이 책 프롤로그의 제목처럼 ‘독한 인연은 운명’인가 보다. 저자는 ‘햄릿’을 통해 셰익스피어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대학시절 야학활동을 하며 만난 ‘햄릿’은 “낯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손에 금방 잡히지도 않았고, 연하기도 강하기도 달기도 쓰기도 떫기도 맵기도 했다”고 추억한다. 그날 이후 30년 동안 껴안고 산 셰익스피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독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햄릿>을 만나 처음 맛 본 인생의 온갖 맛과 냄새와 감촉은 청년이었던 저자에게 첫사랑이자 영원한 사랑으로 각인되었을지 모른다. 유한하고 변덕스런 인간과의 첫사랑이 아닌 자기 생애의 첫 궤적을 뚫고 들어온 강렬한 체험이기 때문에. 나무 주걱으로 엉덩이를 맞아가며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를 땀과 눈물로 익히고 올라선 소녀의 첫 무대, 나의 초등학교 마지막 겨울방학을 헌납해 버린 문고판 명작선 50권과의 만남, ‘햄릿’을 만난 저자의 떨림이 나의 추억 속에서도 파문을 일으킨다.

 

‘희망’의 다른 이름, 셰익스피어 비극

저자는 셰익스피어에게 고리타분한 학술적 접근으로 다가서지 않고 400년이란 시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연출가이자, 배우, 작가, 관객의 입장에서 친근하게 소개한다. 특히 ‘성격 비극’이라 명명한 셰익스피어의 비극 세계로 이끌면서 황홀하고 거친, 그렇지만 발을 빼고 싶지 않을 만큼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숲으로 과감히 이끈다.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셰익스피어에 대해 제대로 된 지식을 갖추지 못한 독자에게 저자의 이 같은 시도는 매우 참신하고 친근하다. 마치 무대 전체가 회전하는 원형 극장에 앉아 무대의 뒷면까지도 흥미진진하게 감상하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관객의 속마음을 꿰뚫는 노련한 솜씨 덕분에 지루한 줄 모르고 중세 연극에 빠져들 것 같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또 다른 이름의 희망이다’라는 프롤로그의 소제목에서 저자가 왜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몰입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총 37편의 희곡, 4편의 장시, 154편의 소네트를 남긴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작품 중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 4편의 비극을 추려낸 저자는 꿈을 빌어 셰익스피어의 말을 옮긴다.

“우주를 움직이는 궁극적인 힘은 완전한 선이지만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래서 언제나 선이 이길 수는 없다.”

지뢰처럼 널린 악에 의해 선도 함께 폭발하고 폐허가 된 우주는 새로운 선의 질서로 다시 세워진다는 셰익스피어의 법칙을 전하면서 저자는 선이 제물로 바쳐지는 현실이 고통스럽다고 고백한다. 그렇지만 그토록 강렬한 비극의 세계가 슬프지만 우울하지 않고 그 자체로 희망이 될 수 있어서 비극에 사로잡힌다고 덧붙인다.

나는 이 말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비극이 그 자체로 희망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셰익스피어는 도대체 인간을 선한 존재로 본 것인가, 악한 존재로 본 것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이끌고 저자는 다시 작품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직접 답을 찾아보라고.

 

<햄릿>, 중세를 걷어내고 고통스런 인간의 삶 투영하다

<햄릿>은 표면적으로는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아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저자는 ‘당신은 누구인가?’를 묻는 존재론의 철학을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세상과 역사에 대한 엄숙한 소명을 스스로 짊어진, 참을 수 없이 무거운 존재”(114쪽)였던 햄릿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무엇이 진리이고, 진실인가를 묻는 자였다.

햄릿은 마치 세상 물정 모르고 자란 온실 속의 화초와 같아서 세상의 악에 맞서 복수를 꿈꾸다 허망하게 쓰러지는 유약한 청춘으로 그려진다. 그는 세상도, 여자도 모두 역겨울 뿐만 아니라 복수를 꿈꾸더라도 마음을 더럽히지 말아야 하는 완벽주의자이며,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고뇌하기만 하는 우유부단한 인간이다.

그는 그대로 중세시대의 인간이며, 셰익스피어 자신이기도 하다. 16세기 중세의 화두는 ‘신’에 맞서는 ‘인간’의 성찰이 아니었던가. “마음속을 함부로 입 밖에 내지 말고 엉뚱한 생각일랑 섣불리 행동으로 옮기지 마라. 남의 의견은 들어주되, 시비판단은 삼가야 한다”(83쪽)는 플로니어스의 대사가 운명 앞에서 촛불처럼 흔들리는 햄릿을 조롱한다.

햄릿은 인간의 비극이 ‘신’과 ‘인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속에 공존하는 ‘선’과 ‘악’의 갈등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셰익스피어 비극의 원형이다. 저자는 햄릿을 통해 셰익스피어가 중세의 어둠을 걷어내고 고통스런 삶을 생생하게 목도하게 한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 반복되는 고통의 삶이 ‘시지프스’를 떠올리게 하는 우리의 삶 자체라고 덧붙인다.

 

천성만 남은 ‘왕’은 ‘광대’와 다를 바 없다

“앞으로는 슬픔이 사랑에 따르리라

사랑은 의심에 사로잡혀

시초는 달콤해도 끝내는 쓴맛으로 변하리라.” (<비너스와 아도니스> 1136-1138행)

비너스의 구애를 뿌리치고 죽음을 맞은 아도니스가 자줏빛 아네모네로 핀 것을 보고 비너스가 한 예언이다. 불멸의 사랑을 꿈꾸는 모든 인간에게 이토록 잔인한 저주는 없을 것이다. ‘죽이고 사랑하리라’는 <오셀로>의 소제목은 비너스의 저주보다 더 짙고 비릿한 피 냄새를 풍긴다. 사랑 자체가 인간을 짧은 행복과 긴 슬픔, 그리고 때때로 피할 수 없는 비극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든다.

믿으니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걷어치운 사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 맞는 말일까? 질투와 의심에 눈이 멀어 사랑하는 아내 데스데모나를 목 졸라 죽인 오셀로, 한순간의 광기에 휩싸여 평생토록 사랑한 아내를 목 졸라 죽인 철학자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98~1990)가 문득 겹쳐진다.

흑인 장군이었던 오셀로의 불같은 성격이 지고지순한 백인 아내 데스데모나와의 역설적인 사랑을 비극으로 몰아갔지만, 오히려 이들의 파격적인 사랑을 등불 삼아 현대인의 얕고, 약은 사랑을 들추어보게 된다. 나이도, 신분도, 조건도 뛰어넘은 이들의 사랑은 끝내 간교한 이아고에 의해 파멸의 쓴맛을 보았지만 21세기의 사랑은 시작부터 달콤하지도, 조건을 뛰어넘지도 않기에 방해받지 않고 안전하게 이어진다. 쓴맛을 보지 않는 사랑의 씁쓸함이 더 오래 남는다.

자식에게 버림받고 파탄에 빠지는 가장 불우한 왕 ‘리어 왕’이 등장한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 사랑하는 부모에 비해 효도하는 자식이 턱없이 희소하긴 마찬가지였나 보다. 오죽 충성스런 신하, 효도하는 자식이 없었으면 충효(忠孝)라는 덕목을 유교의 첫째가는 가치로 내세웠을까하는 삐딱한 시선이 생기기도 한다.

백두난발을 하고 광풍 속을 미쳐 날뛰는 리어 왕을 보면서 죽을 때까지 오래 오래 행복하고 안락하게 살고자 하는 인간의 나약한 희망을 보는 듯해 서글퍼졌다. ‘늙음’은 약한 인간을 더욱 비굴하고 나약하게 만드는데, 그것조차 인정하지 못한 ‘리어 왕’은 마음의 눈을 갖지 못하고 나이 먹은 댓가를 가혹하게 받은 셈이다.

“모든 것을 다 주고 타고난 천성만 남았으니, 왕이나 광대나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195쪽)라고 조롱하는 광대의 목소리, “노인이 쓰러지면 젊은이가 일어서는 법이지”(206쪽)라고 내뱉는 에드먼드의 대사가 인생의 비정함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숨도 멎지 않은 부모의 곁에서 물려받은 재산 다툼으로 혈안이 된 자식들을 보는 일은 이제 놀랍지도 않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무사는 시대를 바꾸고 광대는 역사를 바꾼다.

어느 새 <맥베스>를 공연하는 극장으로 우리를 인도한 저자는 셰익스피어와의 대화로 압도해나간다.

셰익스피어에게 묻는다.

“악을 제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셰익스피어가 답한다.

“이 땅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어쩔 수가 없답니다.”

또 묻는다.

“희망은 없습니까?”

셰익스피어가 답한다.

“양심이 있습니다.”

악마 맥베스가 웃는다. (269쪽)

저자는 또 맥베스에게 묻는다.

“인간은 그렇게 나약한 것인가요?”

“양심은 양처럼 온순하고 욕망은 이리처럼 사납소” (276쪽)

왕의 살해에 동참하여 함께 손에 피를 묻혔던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맥베스. “인생이란 단지 걸어가는 그림자, 무대 위에 있는 동안은 뽐내고 떠들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가련한 배우에 불과한 것”이라고 읊조린다. 인간의 생에 대한 통찰이 저절로 묻어나는 셰익스피어의 명대사가 아닌가!

셰익스피어는 무대 위에서 뽐내며 떠드는 인간의 유형을 ‘무사’와 ‘광대’ 두 유형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무사는 세상을 움직이나 광대는 무사를 움직인다. 무사는 시대를 바꾸지만 광대는 역사를 바꾼다’는 말로 에필로그를 장식한 저자, 그는 진정한 ‘광대’를 꿈꾸는 자이며, 위대한 ‘광대’였던 셰익스피어를 영원히 잊지 못하는 사람이다.

 

비극 속에서 ‘희망’을 건져 올리는 ‘광대’

인간을 꿈의 세계로 이끄는 무대, 그 무대를 제멋대로 활보하며 주인공을 빛나게도 하고, 날카로운 유머와 조롱을 날리며 관객을 손안에서 쥐락펴락하는 ‘광대’. 세상을 무대로 삼고, 인간을 배우이자 관객으로 삼아 4백년을 죽지 않고 살아가는 광대 셰익스피어를 만나게 한 또 한 사람의 광대, 그는 저자이다. 무겁고 암울하고 참담한 비극을 소재로 한 무대를 순회하면서도 끝내 ‘희망’을 보게 한 저자의 수고로움이 광대에 버금간다.

주인공인 남자를 파멸로 몰아가는 악한 여자들을 등장시켜 페미니스트들을 열 받게 했을 법한 중세인 셰익스피어의 한계는 동시대 조선에서 횡행하던 ‘여인잔혹사’를 떠올리면 상대적으로 강도가 약하다는 생각이 들어 깊이 파고들고 싶지 않다. 오히려 중세도, 근대도, 현대도 한참 지난 21세기 한국에서, 강요된 술 접대와 성 접대로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배우의 속절없고 어이없는 이야기는 과연 몇 등급의 비극에 속하는지 셰익스피어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다. 그 여배우의 복수는 햄릿의 복수보다 더 실현하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를 보면 아직도 세상은 ‘무사’의 차지인 것만 같고, 일본이 당한 참혹한 비극 앞에서는 ‘희망’을 말하는 것이 오히려 ‘희망고문’을 하는 것이 아닐까 망설여진다. 이 악물고, 두 눈 질끈 감고 버텨도 더욱 모질고 독해지기만 하는 세상에서 우리를 장악하는 비극의 정체를 낱낱이 드러내어 기어이 ‘희망’을 끄집어내라고 말해 주는 셰익스피어가 그립다.

 

『반가워요, 베리만 감독님』[책소개]

* 이병창선생님(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의 책『반가워요, 베리만 감독님』이 나왔습니다. 한 명의 영화감독과 그 영화를 깊이 있게 분석하고 통찰하는 독특한 ‘철학적 영화비평’입니다. 그래서인지 베리만의 영화 속에서 헤겔, 들뢰즈, 라캉, 프로이트를 넘나들거나 현대 영화사조를 되짚기도 하고, 아울러 욕망, 소통, 자유, 영혼, 신 등의 주제를 성찰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반가운 마음에 일단 출판사의 책소개글로 소식을 먼저 전하고 추후에 좀 더 진지한 서평과 논의를 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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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마르 베리만은 스웨덴이 낳은 세계적인 영화 감독이다. 그는 칸느 영화제뿐만 아니라 아카데미 영화제에서도 여러 차례 수상하여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갖춘 감독이다. 그는 우디 알렌이나 박찬욱 감독 등 많은 감독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가 만든 영화들 「제7의 봉인」, 「산딸기」,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겨울 빛」, 「침묵」, 「화니와 알렉산더」는 한국에서도 영화 마니아들이라면 누구나 손꼽는 걸작들이다.

독자들은 그 동안 베리만의 영화들을 쉽게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의 영화의 이야기가 거의 수수께끼 같고, 연극적인 대사들로 가득하며,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기보다는 감각적인 이미지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베리만의 영화 가운데서 대표적인 영화 15편을 골라서, 독자들에게 그 이야기를 재구성하여 보여준다. 저자는 이런 재구성 속에서 연극적인 대사들을 풀이하고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의 속살을 채우고, 이미지의 암시적인 의미를 밝혀 준다. 결과적으로 저자는 소원하게 느껴졌던 베리만의 영화들을 독자들이 반갑게 맞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저자는 베리만의 영화에서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성격을 라캉의 욕망 개념을 끌어들여 분석한다. 저자는 다양한 주인공들을 욕망의 평면 위에 배치하면서 그들이 가진 성격적인 차이를 구조적으로 드러낸다. 저자는 이를 통해 그 동안 베리만의 영화에서 감추어져 왔던 인물들의 성격적인 갈등의 원인과 양상을 밝혀 낸다. 저자는 주인공들의 성격적인 갈등 속에서 현실과 환상, 권력과 욕망의 대립을 찾아 낸다.

베리만의 영화는 주인공들 사이의 성격적인 갈등의 정점을 그려낸다. 그것은 마치 묵시록에 나오는 신이 침묵하는 순간과 같다. 이 순간에서 절망은 영원히 계속될 듯하다. 그러므로 베리만의 영화는 침울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저자는 신이 침묵하는 그 순간에 이미 신이 도래해 있듯이 베리만의 영화 역시 어둠 속에서 이미 밝아 오는 겨울빛과 같은 희망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고 본다.

<목차>

여는 글
1 「여름 간주곡」예술과 삶
2 「모니카의 여름」체념과 저항
3 「톱밥과 반짝이」모욕당하는 예술가
4 「제7의 봉인」신의 침묵
5 「산딸기」허무주의와 모성
6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거미신
7 「겨울빛」영적인 교감
8 「침묵」소통의 가능성
9 「페르조나」영화의 자기반영성
10 「늑대의 시간」깨어진 거울
11 「수치」폭력성의 근원
12 「애착」환상의 힘
13 「외침과 속삭임」죽음을 넘어서
14 「가을과 소나타」억눌린 고통
15 「화니와 알렉산더」조화의 우주
닫는 글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 [서평/특별기고]

강신익(인제대 의대 교수/인문의학연구소장)

이 책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는, 현대 정신의학이 다양한 문화의 자생적 문제해결능력을 무시하고 미국문화의 잣대로 인간의 몸과 마음을 재단함으로써 발생하는 사태들에 대한 보고서이다. 저자는 거식증, 외상후장애증후군(PTSD), 정신분열병, 우울증 등 서구에서 발견되고 분류되고 관리되어 온 대표적 정신질환이 홍콩, 스리랑카, 아프리카의 잔지바르, 일본에서 퍼져나가는 양상을 세심히 관찰해 보여준다. 그리고 서양의학은 토착문화의 자생력을 파괴하는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중 홍콩과 일본은 우리와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하는 지역이어서 특히 관심이 간다.

아마 현대의학이 인류를 참혹한 질병의 고통에서 구해준 은인이라고 믿는 독자라면 무척 당혹스러울 것이다. <질병 판매학>, <더러운 손의 의사들>, <제약회사들은 어떻게 우리의 주머니를 털었나> 등 현대의료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많은 책들이 출판되기는 했어도 의학이 인류구원의 보루라는 믿음은 우리 사회에 아직 굳건하다. 이 책들은 제약회사가 처방권을 가진 의사를 합법적으로 또는 탈법적으로 매수해 불요불급한 처방을 남발하도록 조장한다고 폭로한다. 실제로 약을 처방하는 대가로 제약회사가 의사나 의료기관에 지불하는 리베이트의 문제가 여러 차례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2000년에 있었던 의사들의 파업은 의약분업을 통해 약품의 유통마진을 줄이려는 정부와 의사집단의 이해가 충돌한 사건이었다. 문제를 이렇게만 보면 이해당사자들 사이의 조정과 합의가 해결책이다. 실제로 의사파업은 힘에 따라 이해관계를 재분배하는 걸로 마무리가 되었다.

하지만 이 책은 문제를 좀 더 근원적인 곳에서 찾아낸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축적해 가는 삶의 지혜, 즉 공동체마다의 문화다. 그런데 미국의 의사들이 중심이 돼서 만들어낸 정신질환분류(DSM)에는 서양과 다른 세계관과 삶을 담을 공간이 없다. 따라서 서양의 정신의학은 서양인의 삶에서 형성된 정서와 문제를 기준으로 다른 문화권의 삶을 재단할 수밖에 없다. 홍콩의 거식증 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날씬한 외모에 대한 무의식적 동경이 이 병의 원인이라는 서양식 설명은 실제 사례와 거의 들어맞지 않는데도 말이다. DSM은 특정 문화권에서만 발견되는 증상을 포함하기도 한다. 한국인에게만 있는 ‘화병’이 그 중 하나다. 하지만 서양의 교향악에 국악 가락 한 소절을 집어넣는다고 그 음악이 국악이 되지는 않는다. 이 책은 그런 문화적 불협화음에 관한 것이다.

문제를 이해관계보다 더 큰 문화의 틀 속에서 찾아낸 것이 이 책의 큰 장점이다. 이로써 우리는 의료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된다. 이것은 20세기 중반 이후 현대의학을 비판적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대두된 여러 학문 중 하나인 의료인류학의 접근법이기도 하다.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 하버드 대학의 아서 클라인만은 대만에서의 정신병 연구를 통해 정신질환에 대한 문화적 연구의 길을 열었다.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서구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문화적 폭력일 뿐 아니라 현지민을 새로운 의료상품의 소비자로 만들어 사회경제적으로 수탈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거식증과 정신분열병의 사례가 주로 문화적 폭력에 대한 것이라면 외상후증후군과 우울증의 사례는 주로 문화적 폭력이 경제적 수탈의 수단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외상후증후군과 우울증은 각각 서구식 훈련을 받은 심리상담사와 거대 다국적 제약기업의 큰 시장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현지인들을 서양인처럼 앓게(미쳐가게) 만든다는 것이다.

세계가 미국처럼 미쳐가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현지 문화에 대한 무지와 무시라면 다른 하나는 미국인들의 몸과 마음이 되어버린 그들 자신의 문화에 대한 반성의 부재다. 이 책의 초점은 전자에 있지만 후자에 대해서도 마땅히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이것은 의료인류학이 갔던 경로이기도 하다. 최초의 의료인류학자들은 과학에 바탕을 둔 서양의학의 객관성과 보편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식민지와 후진국에서는 건강에 관한 각종 미신과 토착신앙 때문에 서양의학이 잘 수용되지 않았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위해서는 그들의 신앙과 문화를 연구해야만 했다. 그런데 후진국의 신앙과 거기에 바탕을 둔 토착의학을 연구하다보니 비교분석을 위해 같은 방법으로 서양의학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문화적 장막에 가려 보이지 않던 서양의학의 전제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서양의학의 보급을 위해 시작된 연구가 이제는 오히려 서양의학의 문제에 대한 반성의 계기가 된 것이다. “다른 문화의 믿음들을 깊이 탐구하면 우리 자신의 문화적 편향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있다.”

이 책은 서양의 정신의학이 다른 문화권에서 만들어내는 문제들에 관한 것이지만, 거꾸로 다른 문화의 시선으로 서양의학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도 있다는 교훈을 주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일상에 대한 과도한 의료화가 다양한 맥락 속에서 자동적으로 습득된 문제해결 능력을 무력화하여 오히려 병을 만든다고 주장하는 이반 일리히의 <병원이 병을 만든다>, 그리고 프랑스의 정신의학이 식민지 알제리인의 정신을 파괴하고 지배하는 양상을 비판한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과 일맥상통한다.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에서 예외는 아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진단명을 쓰지 않지만 50대 이상 세대라면 히스테리와 신경쇠약이라는 서양에서 발명되고 수입된 증세에 익숙할 것이다. 실제로 그런 증상을 앓았던 경험이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유명 연예인들의 잇단 자살은 우울증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켰고 아마 그 발병을 더 촉진시켰을지도 모른다. 천안함 사건에서 생존한 승조원에 대해 실시했다는 외상후장애증후군 치료는 과연 어떤 문화적 전제에서 출발한 것인지에 대한 반성도 필요하다. 혹시 치료를 빌미로 틀에 박힌 가치를 주입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 책은 이러한 현실적 반성 외에 우리들 자신의 본성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가 생물학적 존재인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문화에 길들여진 존재라는 사실을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이 책은 이 점을 상기시켜 준다. 대중은 문화적 권위의 지지를 받는 틀 속에서 질병을 이해하고 경험한다. 중세 유럽에서는 그 문화적 권위가 교회였지만 근대 이후 급속히 과학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20세기 이후에는 자본과 소비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19세기 유럽에서 크게 유행했던 히스테리 환자들은 이 분야의 문화적 권위였던 의사 샤르코가 진단하고 분류하고 기술한 그대로의 증상을 겪었다. 오늘날의 소년소녀들은 TV에 등장하는 연예인의 외모와 행동과 소비패턴을 규범으로 삼고 닮으려 한다. 그래서 성형과 미용과 다이어트의 열풍이 분다. 이것은 “무의식이 감정의 고통을 당대에 이해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하는 시도”의 결과다. 이렇게 문화적 기대와 개인적 경험이 상호 작용하고 우리의 생물학적 몸은 문화적 경험과 기대를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한다. 몸과 문화는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생물-문화적(Bio-Cultural) 현실이다.

21세기의 문화적 권위인 자본은 바로 그 생물-문화적 현실을 파고들어 자신들에게 유리한 새로운 생물-문화적 현실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자율적 문제해결 노력이 아닌 약품의 소비가 규범인 현실이다. 이런 현실이 확대되면 모든 사람이 그 새로운 생물-문화적 현실의 구성요소가 된다. 책 속에 인용된 애플바움의 말처럼 “완벽한 건강이라는 유토피아적 가능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부지중에 기업의 마케팅 담당자들에게 우리가 가진 자유의 도구들을 마음대로 통제할 고삐를 넘겨주고 말았다. 과학의 객관성, 의료의 윤리와 공정성, 환자의 이익을 위해 일하겠다는 맹세를 스스로 지키는 한에서 의학에 자율성을 부여할 특권은 이제 그들 손에 있다.”

의료인의 전문가로서의 자율성과 대중의 의료인에 대한 신뢰를 되찾고 환자가 의약품의 소비자가 아닌 자기 건강의 주체로 바로 설 수 있을지의 여부는 바로 이와 같은 사회문화적 메커니즘을 바꿀 수 있을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이 책이 의료와 관련된 모든 논쟁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