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거라투스트라, 삼성 미술관 리움에 가다 [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MEGA 공동대표)

니체 아부지, 삼성 미술관 리움에 가보셨어요?

나야, 독일 촌구석에 사는데, 어찌 그런 데를 다 가보겠냐? 니는 천방지축으로 쏘다니니 그런 데를 다 갔다 온 모양이구나.

예, 아부지. 이번이 두 번째예요.

자거라투스트라야, 니도 삼성 국물을 좀 마시려고? 아서라, 니 차례까지 오겠냐?

아니 아부지, 그래도 제가 아부지 얼굴에 먹칠하겠어요. 처음에는 건축 공부하러 갔었어요. 그때 한참 건축 공부하고 있을 때인데, 글쎄 삼성 미술관에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작품이 집결되어 있다 하더 라고요. 이게 웬 떡인가 싶어서 직접 가보기로 했죠. 그런데 그때에는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어요. 미리 예약하고 와야 한 대요. 그래서 아이고, 내 팔자에 재벌 미술관에 들어가 보겠냐 하고선 돌아섰지요.

그럼 이번에는 안으로 들어갔더냐?

예, 신통하게도 이젠 예약 없이 들어갈 수 있대요. 김용철 변호사가 무언가를 폭로한 이후 삼성한테 유일하게 변한 게 그거라고 하더 라고요. 재벌 미술관이 서민에게 개방된 거죠. 정말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갔어요. 솔직히 좀 떨렸어요. 제가 입성이 형편없으니, 혹 그 때문에 입장을 거부당할까 봐서 말이요. 다행히 집어넣어 주더 라고요.

그래? 그 안이 어떻더니?

정말 깜짝 놀랐어요. 밖에서 보면 세 개 건축이 있거든요. 그게 안으로는 이어져 있어요. 아부지도 들어서 아시겠지만 전부 세계적인 건축가예요. 이런 사람들을 이어놓은 것은 삼성의 힘이 아니면 불가능하겠죠. 우선 이태리의 포스트모던 건축가 마리오 보타, 들어보셨어요?

야, 인마, 자거라투스트라야, 아비는 건축에 관심이 없다. 아비는 음악을 좋아하지. 그런데 음악에 비하면 건축이 어디 예술이냐? 그건 그저 물질 덩어리에 불과해. 그래서 헤겔도 건축을 예술 중에 제일 천박한 예술로 꼽지 않았니?

역시 아부지는 아직 19세기이군요. 요즈음 건축이 얼마나 찬란한데요? 건축을 영화에 비교하는 글도 있어요?

예끼, 이 놈, 지가 써놓고 슬쩍 자랑하다니. 그런데 포스트모던 건축이라는 게 무어냐?

니체 아버지, 그건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마리오보타만 가지고 말한다면, 주변이나 역사, 문화의 맥락을 고려한 건축이라는 거죠. 모더니즘은 이런 것들에 대해 무관심하거든요. 모더니즘 건축은 자기완결성을 추구했었지요.

그러면 마리오 보타가 삼성 미술관에서 고려한 맥락은 무어지?

글쎄요. 아부지, 그게 아리송해요. 좀 억지로 연결시키자면 미술관이 위치한 남산의 성곽의 형태를 건물의 지붕 선에서 발견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실제로 보이는 것은 성곽이 아니라 거대한 하이야트 건물이죠. 시꺼먼, 흉측한, 남산을 파괴하는, 박정희 시대 특혜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건물이죠. 더구나 미술관 지붕 선에서 발견하는 것은 꼭 한국적인 성곽이라 할 수는 없고, 로마적인 성곽처럼 보여서, 전체적으로 마리오 보타가 이태리에서 지은 건축을 그대로 하나 수입한 것처럼 보입니다.

쯧쯧, 뭐 이렇게 생각하려무나. 차용을 통해 패러디한 거라고.

뭐, 어쨌거나, 겉모습은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니, 한 가운데 로톤다라고 있어요. 뒤집어진 원추형 로톤다인데, 그 주위로 계단이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창문으로 아래쪽이나 위쪽을 쳐다보는데 그런 체험이 운동감을 주었어요. 건축이 시각이 아닌 감각을 보여 줄 수 있다는 증거지요.

원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하여튼 아부지, 그 외에도 해체주의 건축가 렘 쿨하스의 건축도 있어요. 그는 네덜란드 사람이죠. 삼성 미술관에서 가장 앞에 있는 건축물이 그가 지은 거죠. 밖에서만 보면 저건 나도 짓겠다 싶었는데, 그래서 별 감동을 못 받었죠. 그런데 이번에 안에 들어가 보니 아, 역시 해체주의자구나 하고 감탄했어요.

궁금하구나, 그게 뭐지?

건물 안에 또 건물이 있는데, 그 속에 있는 건물은 잘 보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여요. 부양하는 돌덩어리, 어때요? 멋있죠? 물론 착각을 이용한 거죠.

거 참 재미있구나.

그래요. 건축이란 게 원래 무게의 예술인데, 그걸 전복시킨 거죠. 하지만 솔직히 기분 나쁜 게 렘 쿨하스가 지은 서울대 미술관 건축(관악 캠퍼스)하고 이 건축이 너무 닮았거든요. 두 건축이 연대도 비슷하게 지어졌어요. 건축의 다양성과 깊이는 서울대 미술관 건물이 더 탁월하죠. 그래서 서울대 미술관 짓다 남은 아이디어로 삼성 리움 건축을 지은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렘 쿨하스나 삼성 미술관 관계자가 들으면 팔짝 뛸 이야기죠.

얘야, 자거라투스트라야, 확인할 수 없는 비난은 삼가 거라.

예, 죄송해요. 실제로 그럴 리가 있겠어요. 다만 그런 인상을 받는다는 거죠.

하여튼 조심하래도.

예, 알겠어요. 그리고 니체 아부지, 장 누벨의 작품도 있어요. 장 누벨의 이름이 나오면 건축을 아는 사람들의 가슴이 황홀해지죠.

장 누벨이라? 그는 어떤 스타일로 짓는데?

그의 건물은 전체적으로는 모더니즘의 본래적인 입장으로 돌아간 듯해요. 원래 모더니즘 건축이 처음 출발할 때(1920년대)는 과학적인 구조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것을 통해 인상적인 표현을 추구했거든요. 나중에(1940년대) 모더니즘은 기능주의로 타락하고 말았죠. 특히 장 누벨은 건축물의 입면이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운동성을 추구했어요. 그런 점에서 초기 모더니스트들이 운동성을 추구했던 것과 비슷해요. 그래서 예를 들어 파리에 있는 아랍 문화원 건물의 입면에는 수많은 카메라 조리개가 모여서 한편으로는 아랍식 전통 건물의 타일의 형태를 만들죠. 또 다른 한편에는 이 카메라 조리개가 빛의 양에 따라서 조였다가 풀어지면서 건물 안에 찬란한 빛의 예술을 전개하죠.

그러면 삼성 미술관 건물에는 장 누벨이라는 사람이 어떤 건물을 지었지?

마리오보타의 건물 옆에 있는 철판이 녹슨 건물처럼 보이는 건축을 그가 지었어요. 밖의 모습은 기둥을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사각형 입방체로 만들어 인상적이기는 하죠. 그런데 이 비슷한 건축을 그는 어디 딴 데 또 한 번 지어 놓았더 라고요. 어느 게 먼저인지는 모르지만 외면적인 모습은 너무 비슷해요.

음, 좀 실망스러운데..

세월이 지나면 녹슨 것이 진행되니까 입면이 바뀌죠. 그런 점에서 운동성을 추구한다는 장 누벨의 태도가 잘 표현되었다고도 하겠어요.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면 놀라운 정경이 하나 있어요. 건축의 모서리가 유리 창문으로 되어 있어서 다가가 보았죠. 그랬더니 놀랍게도 맞은 편 옹벽을 예술작품으로 만들어 놓았더 라고요. 녹슨 철근으로 상자를 만들어 옹벽을 따라 축조해 놓았어요. 거칠고 황량한 느낌을 주죠. 그런데 그 앞에 살아있는 대나무를 심어 놓았어요. 그 대비가 동양의 선적인 경지를 보여주는 듯해요.

오호, 자거라투스트라, 니는 행복했겠네? 그런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을 직접 체험했으니 말이야.

그런데 말이에요. 아부지, 개별 건물들은 틀림없이 세계적인 작가의 탁월한 작품인데, 문제는 그것들이 모여 있으니 뭔가 답답한 거죠.

자거라투스트라야, 무슨 말이니?

그래서 제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 답답함의 정체를 풀기 위해 고민해 보았죠. 그리고 이런 결론에 이르렀어요. 이건 너무 교과서적이잖아. 자 보자, 모더니스트 장 누벨, 포스트모더니스트 마리오 보타, 해체주의자 렘 쿨하스. 그러면 교과서에 나오는 순서 그대로이네. 한 가지가 빠졌는데 그게 뭐지? 아, 초현실주의가 빠졌군. 이렇게 생각하면서 밖을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초현실주의적인 조각 작품이 하나 거기 버티고 있더 라고요.

그게 뭐지?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 ‘마망(엄마)’인데, 거대한 거미이죠. 이건 설명 안 해도 정신분석학적인 차원에서 성적인 상징이라는 것을 잘 알겠죠. 그러니 완벽하죠. 삼성미술관이란 건축사의 교과서예요. 아주 공부 잘하는 모범생들이 좋아하는 교과서 그대로이죠. 니체 아부지, 단정하고 바르게 살아가지만 답답하고 고루한 모범생들 말이에요. 삼성 리움 미술관은 그런 학생이예요. 그런 학생들은 모든 것을 잘 알지만 다만 느낌은 없죠.

자거라투스트라야, 그걸 ‘삼성’이라 한단다. 너도 KS마크라면서, 그러니 ‘삼성’ 아니냐?

 

구보씨 계속 소통을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철학)

자연은 정녕 불인(不仁)한가. 천지불인(天地不仁)의 글귀를 되새겨보게 하는 요즘이다. 하기야 인(仁)이건 불인(不仁)이건, 인간사의 문제고 인간의 생각이지, 자연이야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렇더라도 우리는 알아서 자연을 섬겨야 할 처지다. 그 품에 깃들여 사는 건 우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방적 소통관계라 할 만하다. 어쩌면 소통이라는 말이 적합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소통이란 서로 관계를 맺고자 하는 주체가 있을 때라야 성립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을 그런 의도적 주체로 여길 수 없다면, 자연과의 소통이란 소통이라는 말의 비유적 확장에 불과할 것이다.

자연은 인간을 추구(芻狗)로도 여기지 않는다. 지푸라기 개 운운하는 것 역시 우리를 보살피지 않는 자연에 대한 섭섭함이 배인 인간의 반응일 뿐이다. 물론 이런 반응이 무의미하다는 건 아니다. 존 그레이(John Gray)라는 유럽의 학자는 Straw Dogs라는 책을 지어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비판했다(이 책은『하찮은 인간, 호모라피엔스』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지푸라기 개, 추구(芻狗)의 함의는 무엇보다 이렇게 인간의 겸손함을 깨우치는 데 있는 것 같다.

(일본 대지진의 참상)

이런 점에서, 우리는 자연과의 소통을 자연을 매개로 한 인간의 소통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법하다. 자연을 통한 인간들 사이의 소통이거나 인간 자신과의 소통이라는 뜻으로 말이다. 자연이 인간에 대해 무관심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자연을 염두에 두고 삶의 태도를 다져야 한다. 우리의 하찮음을 자각한 위에서 문명의 위세를 뽐내더라도 뽐내야 하지 않겠는가. 지진은 막을 길이 없더라도, 지진의 위험을 염두에 두고 건물도 짓고 산업시설도 만들어야 한다. 예상을 뛰어넘는 위험이 발생했다면, 거기에 맞추어 새로운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런 대책마저 뛰어넘는 재앙이 닥쳐온다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거야 할 수 없는 일이다. 페름기에 있었다는 엄청난 기후변화나 백악기말에 있었다는 유성 충돌과 같은 사태가 닥쳐온다면, 현재의 인간 능력으로서는 속수무책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태를 지레 우려하여 미리 손을 묶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겸손을 넘어서는 짓이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다시 짚어볼 만한 것은 ‘자연의 인간화와 인간의 자연화’라는 식의 발상이 갖는 한계다. 맑스가 젊은 시절부터 내세웠던 이 명제는, 윤구병 선생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만드는 문명’의 소산이다. 워낙 만든다는 것은 일단의 완결성을 추구하는 활동이기에, 이런 모델에 따르는 사고방식은 자칫 폐쇄성과 전체성을 띠기 쉽다.

‘자연의 인간화’가 만듦의 능동성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인간의 자연화’는 자연에 의한 인간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수동적이고 열린 자세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때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자연이란 인간에 의해 변형된 자연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런 교호작용은 결국 인간이 주도권을 쥔 활동과 환경의 상호관계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한 한, ‘인간의 자연화’는 인간이 환경을 매개로 스스로의 본성을 변화시켜 나간다는 귀결에 이르게 된다. 크게 보면, 인간이 세계를 만들고 그렇게 만든 세계를 스스로 의식한다는 서양 근대 문명의 틀, 이른바 자기제작과 자기의식의 도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구보씨는 아직도 맑스의 『경제학 철학수고』며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을 처음 읽었을 때의 흥분을 기억하고 있다. 이제 갓 스물이 되었을 나이에 그 내용은 충격이고 매혹이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이제 막 본격적인 자본주의적 산업화의 진통을 겪고 있었다. 맑스의 테제들은 우리가 이르지 못한 합리적 사회의 이상(理想)과 거기에 이르는 과정을 가리키고 있는 듯했다.

물론 그렇다고 구보씨가 이제 와서 보니 맑스가 틀렸다거나 과거 맑스를 받아들인 것이 잘못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각 시대에는 그 시대에 맞는 사상이 있는 법이며, 그런 점에서 맑스의 사상은 나름의 역할을 한 셈이다. 어떠한 사상도 자기 시대를 넘어설 수 없다면, 맑스의 사상 역시 예외가 아니다.

아직도 세상에는 ‘만드는 문명’이 한창이지만, 그 한계에 대한 지적은 이미 진부해졌다. 현대 철학의 주요한 흐름이 이 만드는 문명의 자기폐쇄성을 공격해온 지도 오래다. 목적을 설정하고 설계도를 만들고 수단을 마련하고 공정을 시작하여 제품을 완성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큰 성과를 낳은 것이 사실이지만, 이 모델을 일반화하기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다. 근본적인 면에서 자연은 이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더 따지고 보면, 사회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다.

그러나 제작 또는 생산이 모델로 자리 잡은 상황에선, 인간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이 이 모델에 따라 해석되고 처리된다. 경제는 물론이고, 정치나 이데올로기, 지식도 생산의 일종으로 여겨진다. 재료에 생산수단을 가해서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구체적 과정은 각 영역마다 다르겠지만, 그 기본 형식은 비슷하다. 사람도 교육을 통해, 훈련을 통해, 일정한 형태로 생산되는 생산물로 취급된다.

물론 모두가 균일하지는 않다. 공산품에도 여러 규격과 품질이 있듯이, 사람에게도 여러 종류와 등급이 있기 마련이다. 때로 불량품이 나오는 것처럼 일탈적인 사람들도 나타난다. 그런 불량품을 처리하는 곳도 있다. 감옥이나 병원 따위가 그런 곳이다. 여기에도 나름의 생산과정이 작동한다.

이런 식의 ‘만드는 문명’에서는 역사도 인간의 생산물로 취급된다. 그 생산을 계획하는 것이 꼭 인간의 개별적 의식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개개의 인간이 쉽게 포착하기 어려운 ‘보이지 않는 손’이나 ‘일반의지’일 수도 있고, ‘시대정신’이나 ‘이념’일 수도 있으며, ‘역사법칙’일 수도 있다. 어떻든 이 생산의 틀이 작동하는 것은 인간 집단에 의해서다. 그러니, 이 구조를 잘 파악만 한다면, 결과를 예상할 수도 있고 그 과정을 앞당길 수도 있다. 역사가 정말 일종의 만들기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라면 말이다.

사실, 근대 이후의 세계에는 이런 모델이 실제로 적용되어 온 셈이다. ‘만드는 문명’은 ‘기르는 문명’을 압도하고 잡아먹었다. 이제는 농작물도 가축도 기르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것이 되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소통은 이 생산 과정에 종속되어, 그 수단의 일부로 취급받는다. 현재의 우리 사회는 이런 모델을 잘 따르는 모범적인 사례다. 만드는 공정, 그것도 급속한 만들기의 훈련 속에서 만들어진 CEO 대통령을 내세워, 만들기로 온 땅과 물을 덮는 데 여념이 없다. 소통은 이런 만들기의 효율에 봉사하는 한에서만 유의미한 것으로 대접받는다.

그런데 문제는 생산이 놓이는 곳에는 언제나 그 생산에 영향을 미치고 그 생산을 조건 짓는 바깥이 있다는 데 있다. 우리가 아무리 이 바깥을 차단하거나 무시하고 싶어 해도 소용없는 일이다. 생산의 모델이 설정한 폐쇄성은 결국 깨지기 마련이다.

현대 철학은 이런 생산의 모델이 불완전한 것임을 보여주고 더 나아가 모든 폐쇄적 체계는 불완전한 것임을 보여주려고 애를 써왔다. 물론, 그 실질적 동기는 현실에서 드러난 생산 모델의 한계에서 비롯한다. 환경 문제가 그렇고, 공장식 사회주의의 실패가 그렇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환경 문제를 단순히 관리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또 하나의 잘못일 것이다. 그런 생각은 결국 자연을 우리의 통제 안에 놓을 수 있다는 사고방식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환경 문제가 생산의 단위를 좁게 설정하고 그 생산과정이 환경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못한 탓에 생겨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럴 경우, 이제는 그 단위의 범위를 넓혀 하나의 공장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 더 나아가 하나의 지구에 이르기까지 생산이 작용하는 영역을 확장하여 생각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맞는 생각일까?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지반 위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다시 고려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네 말은 우리가 ‘기르는 문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거야?”

Y가 못 참고 마침내 끼어든다. 그만하면 오래 참았다. 구보씨는 이런 상황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로 한다. 어차피 우리는 우리가 뜻대로 통제할 수 없는 환경에서 살지 않는가.

“아니, 꼭 그런 뜻은 아니야. 다만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는 거지. 사실 그건 기르는 문명의 장점이기도 해. 사람들이 곡식을 재배하는 데 힘을 쏟으면서도, 그 곡식을 내가 만든 것이라고 여기진 않았잖아. 자연의 생장에 조금 힘을 보태고 이용할 뿐이라고, 그래서 결국 우리를 먹여 살리는 것은 자연이라고 보았거든. 생각해 보면, 그게 옳은 태도 아닐까?”

“하지만, 구보야, 먹여 살리는 것만이 아니라 죽이기도 하는 게 자연이었지.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면 굶어죽고 휩쓸려 죽고 했던 것 아냐? 거기에 비하면 지금 형편이 훨씬 낫다는 건 분명해. 지진과 같은 재앙이야 예나 지금이나 어쩔 수 없는 거구. 아니, 어떻게든 지진 피해를 줄이고 있다는 면에서도 오늘이 낫잖아.”

“근데, Y야, 당장 원자력 발전소 문제를 생각해 봐. 나는 이게 단순한 관리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고 보는 거야. 사람들은 흔히 원전 사고가 관리나 설비의 문제라고들 하지. 이를테면 미국의 드리마일 원전은 사고로 핵연료봉이 녹아내렸는데도 격납장치 덕택에 방사능 피해가 없었지만, 소련의 체르노빌은 그렇지 못했다는 거야. 그러나 지금 일본의 상황을 봐. 우리가 예상하고 대비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거든. 그러니까 어떤 장치도 관리만 잘 하면 된다는 식의 생각이 위험하다는 거지. 이건 결국 철학의 문제고, 현실적으로는, 원전과 같은 생산물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라구.”

“나도 원전은 너 못지않게 반대해. 그런데, 그건 위험한 면이 있는 줄 알면서도 경제적 이유 때문에, 그것도 일부 사람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건설하니까 반대하는 거야. 정말 안전하다는 확신이 들면 원자력 발전소건 핵융합 발전소건 그런 걸 만드는 게 왜 문제가 되겠어? 근데, 구보 네 얘기는 좀 다른 것 같아. 그건 마치 인간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으니, 자연을 섬기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처럼 들려.”

“섬긴다구? 글쎄,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 또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잘못이라는 거야. 우리는 기본적으로 자연에 의존해 산다는 점을 잊지 말자는 거지. 말하자면, 자연과 우리 문명의 비대칭성을, 자연의 우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거야. 그게 자연과 소통하는 방식이고, 정확히 말하면 자연에 대하여 우리가 우리의 태도를 가다듬는 소통방식이라는 얘기지.”

“자연의 우위? 겸손? 그런 게 과연 문제를 해결해 줄까? 그거 사실은 일종의 도피거나 무책임한 태도 아냐? 차라리 더 안전한 발전장치를 개발하려고 노력하거나 지진을 예측할 수 있는 연구에 진력하는 게 현실적이고 제대로 된 태도일 것 같은데… 구보야, 미안한 말이지만, 내겐 여전히 너네들 철학자 얘기가 좀 공허하게 들려. 이것도 소통 부족이나 소통의 잘못 탓이니?”

“…..”

“엥, 구보야, 또 그런 얼굴 하지 말고, 일단은 내 얘기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지. 그게 네가 곧잘 말하는 대로 타자를 대하는 기본적 태도가 아니겠어? ㅎㅎ…”

영화로 사유하기 (1) : 연재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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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지영(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연재를 시작하기에 앞서, ‘영화로 사유한다는 것은 가능한 것인가, 만일 가능하다면 어떤 형태의 사유인가’라는 질문으로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1990년대 이후 마치 유행처럼 영화에 대한 이야기들이 넘쳐났다. 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사회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미술을 공부하는 이들이 그리고 철학을 공부하는 이들을 포함하여 모든 분야의 연구자들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외국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런 현상은 아마도 영화가 기존의 모든 예술을 재매개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와 더불어 대부분의 인문학 연구 영역들을 재매개하는 성격을 가지는, 말 그대로 ‘하이브리드’한 성격을 가진 예술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는 논의 방식이지만, 그러한 방식들이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유효한 사유방식일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할 시점인 것 같다. 사회의 변화, 기술의 변화 그리고 영화(영화 자체 뿐만이 아니라 영화를 둘러싼 여러가지 문화적, 제도적, 관행적 변화를 포함)의 변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여전히 유사한 방식으로 영화와 동영상, 비디오 등을 포함하는 유사 영화들에 대해 개입하고 언급하는 것은 과연 얼마나 적절하며 의미있는 발언일 수 있을까. 대상이 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패턴으로 개입하는 사유 방식에 대한 반성적 사유가 필요하지 않을까

다른 학문의 경우는 일단 제쳐두고, 철학의 경우를 예로 들어 생각해보자. 영화의 주제나 캐릭터, 스토리 등을 소재로 삼아 철학자들의 난해한 개념을 구체화시켜보는 방식이 가장 일반적으로 이루어진 영화에 대한 철학의 개입 방식일 것이다. 예를 들어, ‘매트릭스(Matrix)’를 통해 호접몽을 이야기할 수도 있고, 보드리야르를 이야기할 수도 있다. 혹은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를 통해 인간의 자기정체성의 문제를 논할 수도 있다. 필자 역시 교양 강의에서 많이 사용한 방식이기도 하다. ‘파이트 클럽(Fight Club)’의 경우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떠올랐고, 프롬의 이론을 적용하면 영화에서 쉽게 이해가지 않던 부분들이 너무나도 선명히 의미를 드러내곤 했다. 현대 사회와 소외 그리고 집단과 폭력의 문제를 졸리지 않게 설명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자료는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고백하건대, 데이빗 린치의 영화들은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꿈의 의미를 설명하기에 너무나도 훌륭한 보조자료 역할을 해줬고, 미하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La Pianiste)’는 외디푸스 컴플렉스를 설명하기 위한 너무나도 자극적인 도입부의 역할을 충실히 해주었었다.

영화 속에서 자신의 연구 분야와의 접합 지점을 찾아서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소재로 영화를 사용했다는 점에서는 문학이나 다른 인문학 영역의 개입도 사실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식의 영화의 활용은 여러 긍정적인 측면들을 지닌다. 영화를 좀 더 진지한 분석과 탐구 대상으로 보게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며, 또한 난해한 이론들에 좀 더 대중적으로 다가가게 만들거나 어려운 철학 이론들이 얼마나 이 세상의 불가해한 모습들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지를 감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앞서 말했듯 필자 역시 아주 많은 영화의 도움을 받아 학생들을 덜 졸게 하면서 어려운 이야기들을 강의 시간에 전달해 왔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묻고 싶다. 이런 방법들은 영화로 사유하는 것인가 아니면 영화를 ‘소재’로 사유를 진행하는 것인가.

먼저 이에 대한 대답부터 하자면, 위에서 언급한 방법들은 영화를 소재로 삼아 사유에 도움을 얻는 방식이지 영화로 사유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방식 또한 긍정적인 측면들을 가지고 있음은 이미 지적하였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새로운 사유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알고 있던 철학 이론들의 생생한 사례들을 영화 속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적용하여 풀어낸 것일 뿐, 이전에 없던 새로운 사유를 전개한 것은 아니다. 들뢰즈에 따르자면 철학적 사유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대상 속에서 발견해내는 재인식(recognition)이 아니다. 주어져 있는 사유의 틀을 넘어서며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개념과 사유 방식들을 창안해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유라고 한다. 그래서 들뢰즈의 주장에 따르면 필자를 포함하여 수많은 학자들이 영화에 대해 개입한 방식은 매우 거칠게 말하자면 영화를 착취한 것일뿐, 진정한 사유와는 거리가 먼 견해일 뿐이다. 그렇다면 대체 영화로 사유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존의 방식들과 뭐가 어떻게 다르다는 것인가.

영화로 사유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들뢰즈의 주장을 차치하고서라도 대체 왜 새로운 영화적 사유가 필요한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모두들 현재를 이미지가 지배하는 시대라고 말한다. 물론 이때 이미지는 영화나 사진을 포함하는 기계적으로 생산된 이미지를 의미한다. 길거리를 걸어다니건, 집안에서 쉬고 있을 때건, 강의실에서 강의를 들을 때건, 심지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도 이미지들은 넘실댄다. 논리적이라기 보다는 직관적이고, 선형적이라기보다는 비선형적 특성을 가지는 이미지들이 예전 책과 글이 차지하던 자리를 꿰찬지 오래이다. 이런 상황에서 직관적이고 비선형적인 이미지들을 전통적인 논리로 이해하는 방식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힘은 언어의 논리와는 다른 작동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시대가 어떤 방식으로 직동하고 있으며, 이 시대를 지배하는 이미지들이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말을 하고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예전 사유 방식을 적용하여 풀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거나 혹은 부적절할 것이다.

그리고 전철 안에서도, 길거리에서도 우리는 무수히 많은 동영상들(moving images) 속에 파묻혀 산다. 특히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비약적 발전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이미지의 생산과 유통은 특정인들에게만 허락된 한정된 범위의 것이 아니라 누구나 생산하고, 수용하고, 공유한다. 예전 극장에서만 혹은 텔레비젼 모니터를 통해서 보던 영화는 어쩌면 지나간 시대의 상징일런지 모른다. (여전히 이 방식 또한 다수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의 사회적 위상이나 의미에 대해서는 동일하다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영화는 어두운 극장을 나와 길거리로, 모바일 기기 속으로, 동영상 공유사이트, 개인 블로그와 같은 사이버 공간 속으로 그 영역을 확장하며 변이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저 예전과 같은 방식의 영화만이 아니라 이를 포함한 더 넓은 영역의 영화(이런 맥락에서 ‘확장된 영화’라는 이름을 붙혀본다)를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 아닐까 조심스레 예측해본다. 이 확장된 영화들은 많은 경우 줄거리, 캐릭터와 같은 기존의 이야기 구조를 가지지 않는다. 이전과 같은 사유 방식으로는 이제 수많은 우리 주변의 확장된 영화에 대해 더 이상 의미를 풀어낼 수 없는 막다른 지점에 와버린 것 같다.

영화로 사유한다는 것은 무엇일 수 있을까. 그것은 영화를 소재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이미지 자체의 논리를 따라 그 사유의 궤적에 참여하는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화적 사유에 참여할 것인가. 물론 미리 정해져 있는 정답이 있다거나, 유일한 하나의 방식만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매일 매일 새로운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 중에서 우리가 정말 새롭다거나 훌륭하다고 평가하는 영화들의 공통점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적 사유는 계속해서 변화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를 감각적으로 사유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영화로 사유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 이미지의 논리를 사유하는 것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로 우리를 열어놓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로 사유하기에 대한 한 가지 가능한 방식을 제안하고자 한다. 물론 이것이 유일하거나 앞으로도 계속 유효하다는 이야기는 아님을 전제한 상태에서 말이다. 니체의 말처럼, 확신은 거짓말보다도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계속 변화하는 와중에 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영화의 기본적인 메커니즘들을 통해 영화적 사유의 궤적을 추적해보는 것이 앞으로의 연재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방식이다. 영화 이미지, 프레임, 쇼트, 몽타주, 서사, 시점 등의 기본적인 영화 개념들이 어떠한 사유로 우리를 이끌어갈 수 있는지를 조심스레 따라가 보고자 한다. 변화의 과정 중에 있는 대상에 대해 절대적인 확신을 피하면서 새로운 개념화를 끌어내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오류와 오해들로 짜여진 부끄러운 생각들이라고 나중에 분명 후회할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미룰 수도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 변화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고, 나중이라고 오류가 없으라는 보장도 없으며, 나중에 어떻게 된다 할지라도 지금 상태에서의 사유는 그 자체로 의미있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여간 용기를 내어보고자 한다.

이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필자가 의지하는 사상가는 들뢰즈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그는 영화에 대한 상당히 두꺼운 두 권의 책을 썼다. 사실 만만치 않은 책이다. 여전히 읽을 때마다 숨어 있던 새로운 문장들과 새로운 의미들이 나를 찾아온다. 그래서 나의 들뢰즈의 영화책에 대한 독서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결코 완결될 수도, 완전해질 수 없는 들뢰즈와 영화에 대한 나의 이해를 바탕으로 영화 개념들에 대한 조금은 새로운 정식화를 시도하고자 한다. 물론 그의 영화책을 읽기 위해서는 들뢰즈의 철학과 특히 베르그손에 대한 그의 해석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들뢰즈의 철학에 대한 이야기가 분리될 수 없는 방식으로 제시될 것이다. 마치 들뢰즈 사진 속의 이미지처럼, 영화와 철학이 거울을 마주한 채 서로 반영하고 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철학이 영화적 사유에 개입하기를 희망한다.

기본적으로 앞으로 연재될 글들은 주로 들뢰즈 영화책의 이론들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그의 이론을 현재에로 확장하고자 한다. 1980년대 중반까지의 영화들과 그에 대한 사유들이 담겨있는 그의 영화책은 그 이후 대략 30여년 동안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변화는 그 이후 너무나도 바쁘게 달려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들뢰즈의 사유를 변화에 열어놓는 것은 아마도 들뢰즈 자신이 가장 원하는 사유 방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변화와 생성, 창조의 철학자인 그의 사유를 그의 죽음 이후의 시간에까지 열어놓는 것은, 설사 그의 이론을 변형시킨다 하더라도 가장 들뢰즈적인 사유방식이 아닐까 생각한다. 특히나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모바일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기존의 사회와는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들을 열어놓고 있는 시대이다. 열려있으며 새로운 연결접속이 무한히 진행되고 있는 변화의 시대에 대한 사유를 진행하기 위해서라도 들뢰즈의 리좀적 사유와 영화에 대한 사유는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들뢰즈 자신의 시대에서보다도 더욱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들뢰즈의 영화책은 그저 영화에 대한 책이 아니다. 이 책들은 영화를 통한 사유를 보여주며, 그 사유가 향하는 곳은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며, 그에게 영화란 이 세계와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관계와 시선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로 이 관계와 시선들이 영화 속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는지를 영화의 메커니즘들에 대한 개념화를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들뢰즈라는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는 영화와 그것이 속해있는 세상은 어떤 색채일지를 보고자 한다. 상당히 편협한 방식일 수 있음을 인정하지만, 솔직히 어쩔 수 없다. 상당히 좁은 우물이지만, 파고 내려가다보면 어느 지점에선가 깊이 파내려간 다른 우물과 만날 것이라 믿으며, 이 우물을 통해 내 우물 속의 물만이 아니라, 저 땅속 깊은 곳에 흐르고 있는 다양한 물들이 좁은 내 우물을 통해 지상으로 나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기대와 두려움을 주절거리는 것으로 연재를 시작하고자 한다.

불행을 선택하는 바보는 없다[생각vs생각]

행복전도와 자살의 역설-

행복전도사 최윤희 씨의 자살 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당혹감을 안겨주었다. 심지어 혼란을 넘어 “행복하라는 말은 모두 거짓이었나”, “당신의 책을 모두 버렸다”, “행복전도사 자격이 없다”는 등 배신감과 분노를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녀의 자살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고 심지어 배신감이나 분노를 느끼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행복하게 살라”고 말한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불일치를 느끼는 이유는 남에게는 행복한 삶을 살라고 말하고서는 정작 자신은 불행을 선택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스로 불행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을까? 스스로 불행을 선택한다는 생각은 외부관찰자의 판단일 뿐이다. 당혹스러움은 당사자의 관점과 외부관찰자의 관점을 혼동한 데서 비롯되었다.

고통으로부터 즐거움을 느끼는 메저키스트의 행동을 스스로 불행을 선택하는 행위로 보는 것은 외부관찰자의 관점일 뿐이며 당사자의 관점으로부터 보면 그것 또한 스스로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도 스스로 행복을 얻고자 하는 행위다. 행복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행위와 불행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행복을 얻는 소극적 행위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바보의 행복 또한 마찬가지다. 작은 다이아몬드보다 커다란 빵을 선택하고 행복해하는 바보를 외부관찰자는 불쌍하다고 동정한다. 당사자는 마냥 행복한데 말이다. 작은 다이아몬드보다 커다란 고기 덩어리를 선택한 강아지는 어떨까? 외부관찰자로서 우리는 그 강아지도 불쌍하다고 동정할까? 노무현이 야합적인 3당 합당을 비판하고 꼬마민주당을 고집했을 때, 낙선이 불 보듯 뻔한 출마를 스스로 선택했을 때, 살아서 당당하게 결백을 밝히는 대신 부엉이 바위를 선택했을 때 사람들은 스스로 불행을 선택하는 바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스로 불행을 선택하는 바보는 없다. 행복의 기준이 다를 뿐이다.

인지생물학자인 움베르또 마뚜라나(H. Maturana)에 따르면, 외부관찰자는 관찰자 스스로 설정한 특정한 맥락 속에서 효과적인 행동으로 관찰되는 행동을 인지적이거나 지능적인 행동으로 간주한다. 행동의 긍정적 효과를 행복이라고 본다면, 바보는 관찰자가 스스로 설정한 교환가치라는 맥락에서 볼 때 효과적이지 못한 행동을 했으므로 그 행동은 불행을 스스로 선택한 어리석은 것이다. 반면에 강아지는 관찰자가 스스로 설정한 사용가치라는 맥락에서 볼 때 효과적인 행동을 했으므로 이는 행복을 스스로 선택한 똑똑한 행동이다.

노무현은 관찰자가 스스로 설정한 권력의 가치라는 맥락에서 볼 때 효과적이지 못한 행동을 했으므로 그의 행동은 어리석은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의 관점에서 보면, 강아지뿐만 아니라 바보도 스스로 설정한 사용가치라는 맥락 속에서 효과적인 행동을 했고, 노무현도 스스로 설정한 정의의 가치라는 맥락 속에서 효과적인 행동을 했다. 모두들 불행이 아니라 행복을 스스로 선택했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더라도 여전히 당혹감을 느끼는 이유가 뭘까? 아마도 그녀가 “불행으로부터 도망가지 말고 초연하게 맞서라”고 말한 데 있지 않을까? 그렇게 말해놓고 스스로는 불행으로부터 도망갔으니까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게다. 그런데 그녀는 불행으로부터 단지 벗어나고자 한 것일까, 아니면 불행으로부터 도망가고자 한 것일까? 이 두 가지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앞의 것은 불행을 단지 불편해하는 경우이며, 뒤의 것은 불행을 무서워하는 경우다. 그녀는 어떤 경우였을까? “불행으로부터 도망가지 말고 초연하게 맞서라”라는 그녀의 말이 진실이었다면 그녀는 불행을 무서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몹시 불편했을 뿐이다. 그녀가 유서에서 “죄송하다”고 말한 이유는 불행으로부터 도망가서가 아니라 불편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벗어나려 한 데 있을 것이다.

마틴 하이데거(M. Heidegger)는 죽음으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맞서는 것을 실존적 결단이라고 한다. 물론 하이데거의 이 말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죽음으로부터 도망가고자 하면 공포를 느끼지만 죽음으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맞서면 불안을 느낀다. 공포를 느끼는 사람은 삶에 집착하여 종교인이나 의사를 찾아가 살려달라고 애걸하지만, 불안을 느끼는 사람은 삶의 무반성적인 태도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삶의 실존적 의미를 찾게 된다. 삶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죽음에도 집착하지 않는 초연한 실존적 삶을 살게 된다. 그러한 삶이야말로 모든 불행으로부터 벗어난 행복한 삶이 아닐까?

이것이 바로 최윤희씨가 전도한 행복의 비밀이 아닐까? 바보가 마냥 행복한 이유는 삶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무현을 우리가 바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그가 권력에, 아니 삶과 죽음에조차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최윤희씨의 자살은 그녀가 전도하며 다닌 “모든 불행은 집착으로부터 온다.”는 깨달음을 몸소 실천한 것일 뿐이다. 우리가 당혹감이나 배신감 또는 분노를 느끼는 것은 그 행복의 비밀을 아직 몸소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최윤희씨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속삭인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어요?”

김광식(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

중국의 신자유주의 대 신좌파[생각vs생각]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추상에서 구체로

1980년대의 개혁개방, 이와 더불어 분출된 사회와 사상운동의 활력 속에서의 중국 지식인을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대다수는 ‘피안’(마오쩌둥의 실험)이 이미 치유 불가능한 위기 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건너야 할 강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문제는 대다수가 그 피안의 상태를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 강을 건너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혀 지식계는 거의 옆을 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나아갔을 뿐, 잠시 멈추어 자신의 다리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대오 중 물살에 휩쓸린 사람이 없는지 살펴보지 못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중국 지식계는 1989년의 갑작스러운 사건(천안문 사태)으로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1990년대의 거대한 사회 경제적 변화를 직면한다. 열정과 추상이 휩쓸고 간 직후 그들에게는 좌절된 현실, 새롭게 직면하게 되는 현실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구체적인 전망이 요구됐다.

1990년대 초 중국은 개혁개방 정책에 다시금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중앙정부는 정치적으로 더욱 강하고 집중된 권력을 행사했고, 경제적으로는 전에 없는 고도성장을 이루게 된다. 이에 따라 대내적으로 시장화가, 대외적으로는 세계화가 심화되었으며 사회적 모순은 점점 첨예해졌다. 그러나 이를 정치적으로 표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학술계는 정부와 발맞춰 1980년대의 ‘급진주의’에 대한 비판과 국학 부흥을 주도했고, 대중문화와 상업문화의 확산이라는 현상을 두고 진행된 ‘인문정신’에 관한 토론 이후 경제와 정치 현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했다. 특히 공공정책, 정치개혁에 관한 이론적 토론들을 통해 점차 선명하게 두 진영으로 분화되어갔다.

현대화에 대한 두 가지 시각

자본주의를 수용하는 사회주의로서의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중국 공산당의 기본 방침으로 공인된 1992년 이후 시장의 자유화를 지향하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중심내용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담론이 중국에서 널리 주목받기 시작한다.

중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세계 경제체제에 편입해가려는 노력 속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회적 모순을 어떤 이들은 건전한 시장경제로 나가는 과정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과도기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어떤 이들은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중국판에 불과하며 그 성과는 소수에게 집중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배제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견해를 제출한다. 이는 사회가 새롭게 재편해가는 과정에 대한 매우 상반된 인식으로 전자의 견해는 ‘신자유주의(또는 자유주의)’로, 후자의 견해는 ‘신좌파’로 불린다.

중국의 신자유주의자들은 서구의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동의하며 중국의 현대화는 서구의 (신자유주의적) 현대화와 그 궤를 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중국의 문제는 개혁과 시장화가 자발적으로 아래로부터 형성된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아래로 추동된 것이어서 시장이 권력체제의 통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성숙하고 규범화되지 못한 것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진단한다.

따라서 이에 대한 해결은 시장경제를 더욱 발전시키고 완전하게 함으로써 이룰 수 있다고 한다. 국가가 모든 것을 통제하지 않고 시장에게 많은 역할을 맡긴다면 시장 자신의 발전 요구와 규율, 그리고 사람들의 이성적 노력에 의해서 현재의 문제를 극복하고 경제적 민주와 정치적 민주를 이룰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시장이 민주의 충분조건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필요조건이라고는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근대이후 민주와 시장경제가 분리됐던 사례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의 공정(公正)에 대한 이들의 입장은 분명하다. 불공정문제의 해결방법은 첫째 진정한 시장, 진정한 자유경쟁을 실현하고 규칙을 공정하게 하여 모든 사람이 준수하며 권력을 시장에서 축출하는 것이고, 둘째 법제를 완비하는 것, 즉 합법적인 개인의 재산을 보호하고 입법을 통해 빈부격차를 축소하고 법률에 의해 부패를 처벌하고 국유재산의 유지를 방지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를 통하여 한편으로는 시장경제 개혁의 미명 아래 권력이 사회적 재부를 약탈하는 것을 반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의 메커니즘을 벗어나는 개혁과 공정에 대한 요구를 반대한다. 전자는 중국 정부를 겨냥한 것이고, 후자는 신자유주의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신좌파를 염두에 둔 것이다. 그들에게서 시장과 이에 기반 한 공정에 대한 비판적 검토나 성찰은 찾아보기 어렵다.

바로 이 지점에서 1990년대 후반의 신자유주의와 신좌파의 논쟁이 본격화된다. 이를 촉발시킨 것이 신좌파로 분류되는 왕후이(汪暉)의 논문 「당대 중국 사상계의 현황과 현대성 문제」이다. 논쟁의 배경에는 중국 사회 모순의 첨예화 뿐 아니라 아시아 금융위기가 있었다.

신좌파는 세계화는 중국 사회 밖에 존재하는 문제가 아니라 중국 사회에 이미 내재된 문제로, 정치권력과 시장계획의 관계, 새로운 사회에서의 빈곤과 불공정의 출현, 구권력의 네트워크와 새로운 시장 확대의 내적 연계들이 근대와 현대의 역사를 다시 사고하는 기회를 제공했다고 말한다.

왕휘는 이로부터 만들어진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현대화를 서구의 현대화와 동일하게 이해해서는 안 되며, 서구 자본주의의 현대성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반현대적인 현대성’ 즉 서구의 현대화 과정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토대로 현대성을 토론하고 기획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화 또는 현대성에 대한 해석과 이해에서 신자유주의와는 뚜렷한 시각차를 보인다.

그러므로 중국의 ‘개혁’은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와 부가 집중되는 과도기적 자본주의가 아닌 정치와 경제적 민주를 확대하여 분배의 공정과 평등을 보장하고 빈부의 차가 무한히 확대되는 것을 막는 방식으로, ‘개방’은 자본의 논리를 무조건 받아들여 국제 자본주의 체계로 편입되는 것이 아닌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다.

신좌파는 신자유주의가 추상적인 ‘시장’ 개념으로 중국 사회와 세계의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과 그 사회의 경제가 정치와 맺고 있는 내적 관계를 은폐하면서, 맹목적적인 시장주의로 평등의 가치를 거세하고 있고, 궁극적으로 정치변혁의 필요성과 사회적 공정성에 대한 기본적인 호소를 희석시킨다고 비판한다.

신자유주의와 신좌파 모두 시장 경제를 긍정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사회의 공정을 자유로운 시장의 ‘경쟁과 효율’에 맡길 것을, 신좌파는 ‘공정과 평등’을 구현하기 위한 적극적인 비판과 견제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과거와 함께 가기: 전통의 재인식 대 역사의 재인식

중국의 신자유주의와 신좌파 논쟁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그들이 각각 자신들의 과거, 신자유주의는 전통을 신좌파는 모택동 사회주의를 긍정적으로 재인식하려 한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일부는 현대화의 길은 반드시 중국의 전통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현대화를 위해 전통을 파괴하는 것이 오히려 가치체계의 해체와 문화 동일성의 상실을 이끌어 현대화 과정을 손상시킬 수 있으므로 유교를 포함하여 합리성을 가진 문화전통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이들의 견해는 아시아 공업문명의 눈부신 발전의 원인이 유교문화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고 있다는 점에서는 ‘유교부흥론자’, 전통 가치의 비판적 계승을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비판계승론자’, 전통의 개방성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전통의 창조를 모색한다는 점에서는 ‘서체중용론자’와 유사하다.

전통에 대한 이와 같은 태도는 1910년대 신문화운동과 1980년대 문화열 시기의 전통에 대해 부정적이면서 적극적으로 서구화를 지향했던 자유주의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전통을 폐쇄적이고 정형화된 유물이 아닌 개방적이고 연속적인 유기적 생명체로 이해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을 전통에 주목하도록 하였을까? 첫째는 자유주의자들에게 늘 따라다니는 ‘전면적인 서구화론자’, ‘부르주와 자유화의 주범’이라는 꼬리표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꼬리표로 인하여 위축되고 탄압받기보다는 전통과의 화해를 도모하기로 한다. 둘째는 서구의 자유주의를 중국에 안정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전통 개념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전통 속에서 이에 부합하는 자원을 발굴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중국 자유주의 속에 있었던 전통과 서구화의 오랜 불화는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서 일단락된다.

신좌파는 1980년대 이후 대다수가 부정했던 마오쩌둥 사회주의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이는 그들이 중국이 추구해야 할 현대성을 ‘반현대적인 현대성’으로 설정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제국주의의 반식민지적 지배 아래에서 현대화를 모색했던 중국은 현대화운동에 있어서 서구의 현대성에 대한 비판과 성찰을 요구받았으며, 마오쩌둥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적 현대화에 대한 비판을 수렴하며 현대화를 추구했다. 그것이 곧 ‘반자본주의적인 현대성’이었다.

왕후이는 마오쩌둥은 공사제(公司制)와 집단경제방식으로 중국 경제의 발전을 추진하는 한편 분배제도에서 자본주의 현대화가 초래한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을 피하려 했으며, 공유제(公有制) 방식으로 전체 사회를 국가의 현대화라는 목표를 위해 조직하여 개인의 정치적 자주권을 박탈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기구가 인민주권을 억압하는 것에 깊은 반감을 가졌다고 평가한다.

마오쩌둥 사회주의가 심각한 역사적 모순을 드러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모두 부정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특히 그 안에 담겨있는 ‘반현대적’인 내용은 반드시 새롭게 성찰되어야 한다는 것이 신좌파의 입장이다. 마오쩌둥 사회주의의 ‘공정과 평등’이라는 반자본주의적 현대성의 내용이 지금의 중국에 절실히 요구되기 때문이다.

개혁 이후의 사회주의는 개혁 이전의 사회주의가 지니고 있었던 ‘반현대적’ 특징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으며 사회적 불평등은 날로 심화되어가고 있다. 세계화되고 독점적인 시장경제에 빠르게 편입되어가고 있는 중국에 아직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이와 같은 긍정적인 사회주의적 요소가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계몽과 현대성을 모색하다

중국의 신자유주의와 신좌파 논쟁, 그 가운데서도 신좌파의 주장은 적어도 자신들의 모색을 위한 치열한 비판과 성찰의 노력이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계몽’과 ‘현대성’의 문제는 중국의 지식인에게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지식인에게, 그리고 과거에서만 아니라 현재에도 쉽게 내려놓을 수 없는 주제다.

19세기 서구의 물리적 힘에 의해서 근대를 시작하게 된 공통의 역사적 경험은 필연적으로 동일한 계몽과 현대성을 목표로 갖게 했다. 그 과정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성립, 국민국가의 건설, 봉건질서와의 단절 등은 강조되었지만 모든 인간의 법적 평등, 개인의 해방과 자유, 언론의 자유 등은 억압되었다.

서구의 계몽과 현대성은 적어도 스스로 변화하고 충돌하는 긴장 속에 있었지만, 우리에게 계몽과 현대성은 불변하며 반드시 도달해야만 하는, 그러나 아직 도달하지 못한 절대적인 목표였다. 항상 그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것을 질책했을 뿐 계몽과 현대성이 우리에게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 우리 앞에는 지금 세계화된 자본주의 체제와 자본의 지배가 심화되어가는 현실이 놓여 있다. 어떤 이들은 이에 뒤쳐지지 않게 편입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어떤 이들은 이 현실을 뛰어넘으려 모색한다. 중국의 신좌파는 후자에 해당한다. 이를 위해 지나치게 그 일면만 관찰되고 있는 계몽과 현대성을 재검토하고, 마오쩌둥 사회주의를 재평가하고, 개혁개방 이후의 사회주의를 비판한다.

이는 오랫동안 중국에서의 계몽이 보여준 무비판적인 서구화를 반성하고, 현대성에 내재된 모순을 적극적으로 극복하는 과정이 중국의 현실적 역사 속에 존재함을 성찰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계몽은 이미 그 속에 스스로를 계몽시켜야 함을 함의하고 있으며, 현대성은 이미 그 속에 새로운 시대의식으로서의 의미를 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이 그리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계몽과 현대성은 스스로, 그리고 시대와 끊임없이 긴장하고 각성하며 만들어가는 것이어야 한다.

박영미(한양대 강사) /

무모함과 소심함을 넘어선 솔직함[생각vs생각]

전통, 찬양할까? 내칠까?

최근에 출판된 나의 저서 『공자, 페미니즘을 상상하다』에 대해서, 한 기자는 나를 어떤 다른 저자의 “무모함”에 비교하여 “소심함?”으로 평가하였다. “저자는 소심하였다”가 아니라 ‘?’를 동원하여 “소심한 걸까?” 라는 의문 제기의 방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좀 더 원색적인 발언이나 내용을 기대하였던 듯하다.

예컨대 “공자가 죽어야…” 혹은 “공자가 살아야…” 류가 아니어서, 재미난 구경거리가 한 판 벌어졌을 법도 할 기회를 놓쳐버렸다는 아쉬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또한 『공자, 페미니즘을 말하였다』라고 왜 좀 더 강력히 발언하지 않았는가, 아니면 왜 좀 더 화끈하게 공자를 내다 팔지 않았는가 하는 은근한 질책이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같은 저서를 두고 아주 다른 평가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상상하다”를 “말하였다”로 자체 이해하면서, 공자가 언제 페미니즘을 논한 적이 있는가에 초점을 두어 격분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논조는 공자와 유교는 가부장제의 산물이고 여성 억압적이며 계급적 한계를 지니는 것인데, 이것이 페미니즘 논의와 어떻게 한 자리에서 거론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즉 공자와 페미니즘, 유교와 페미니즘을 함께 거론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며, 유교 안에서 현대적인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것은 또 다시 공자를 살리려는 보수논리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전통 사상을 거론하는 데서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방식은 이처럼 찬양할까? 내쳐 버릴까?의 둘 중 하나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래서 둘 중 어느 하나를 완전히 폐기시켜 버리거나 다른 한 편에 완벽한 승리를 안겨 주는 방식을 취하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 안에서는 가치폄하 하는 논쟁 방식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려는 의도만이 숨겨져 있다. 그래서 한쪽이‘전통은 과거일 뿐이고, 전통은 아무 것도 아니며 그래서 폐기되어야 할 뿐이고’라고 말하면, 다른 한 쪽은‘현대는 문제투성이일 뿐이고 그래서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에 비하면 현대는 타락의 소치일 뿐이고’로 응수한다.

이 둘에게서 서로 만날 방법을 찾기란 어렵다. 그들은 소통, 화해, 융화를 생각하기 보다는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전제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것 아니면 저것의 논리만이 통하며, 전통의 만능을 찬양하거나 혹은 전통의 무능을 한탄하는 둘 중 하나의 방식만을 논의하고자 한다.

상호성과 ‘한국적’ 상호성

최근 차이의 철학, 다문화주의 등에 힘입어 많은 사람들이 서구를 보편으로 간주하는 것, 그래서 다른 문화권에 속한 전통을 무시하는 태도에 대해 맹렬히 비판한다. 또 서구라는 잣대로 전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다른 문화권에 속한 전통에서 발전된 목소리를 배제하게 된다고 고발하기도 한다.

상호문화성을 통해서 서로 다르고 때로는 이질적인 철학들 사이의 만남과 매개 – 타자성, 차이, 낯선 자의 해석학, 다문화성, 상호문화성, 초문화성 – 에 대하여 관심 가져야 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같은 작업, 다양한 문화들이 서로 만나는 현실을 겪으면서 중심성을 배제하고 문화의 상호성을 논의할 방안을 모색하는 것은 매우 유의미한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상호문화성을 말하는 사람들 역시도 ‘어떻게’ 상호성을 개발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답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서구’에 기반해서 ‘우리’의 문제를 말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도 그 안에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구촌화되어 있는 현재 상황에서 별도의 ‘우리’를 설정할 필요는 없으며, 그렇기에 상호성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한국적’ 상호성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그저 중심성을 비판하고 상호문화성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상호성을 마련하는 데 과연 효과적인 전략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한다. 상호성을 개발하는 것은 단일한 하나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각자 발 딛고 있는 현실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며, 그렇기에 자신이 현재 어디에 어떻게 발 딛고 있는가를 직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통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화두가 되는 것이며, 전통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전통에 대한 거론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전통과 현대, 이들을 한 자리에 놓고 거론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나 그 때에도 그 둘의 관계는 여전히 불편한 채로 남아 있기 쉽다. 전통 사상의 개념과 용어들을 현대 사회에서 사용하는 데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개념과 용어들을 재활용하는 작업은 비록 어렵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상호성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단일한 단어를 찾는 것보다는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우리가 성취하고자 하는 주된 과제에 충실할 수 있는 또 다른 의사소통의 길을 찾아보는 것이 때로는 더 유용한 방식일 수도 있다. 내가 몸담고 있는 현실과 그것에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는 전통을 완벽하게 분리해내기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그래서 서로 다른 시대의 두 영역의 일을 함께 논의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는 질문은 그 자체로서 우문일 수 있다.

전통을 비판하는 사람에게도 전통은 있고 그 전통은 어떻게든 해석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현대를 비판하는 사람에게도 현실은 있고 현실의 부정성은 어떻게든 해소되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우리 자신에게, 즉 우리 내부에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에 달려 있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남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남을 도울 수도 없다. 전통과 현대에 대한 어렵고도 지난한 논의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관심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남의 말과 생각을 빌어서 사회 변혁을 이루어보겠다는 무모한 모험을 시도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전통과 현실을 한꺼번에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무모함과 소심함을 넘어서서 솔직하게 전통을 바라보기

제주도 한라산의 정상에 오르는 데에는 여러 가지 코스의 길이 있다. 서북쪽 코스인 어리목 등반, 서남쪽 코스인 영실산 길, 동쪽 코스인 성판악 길, 북쪽 코스인 관음사 길 등이다. 영실산 길은 영실 기암의 경관이 좋으나 등산길이 짧아서 등산꾼들에게는 그다지 선호의 대상이 아니란다. 성판악 산길은 활엽수가 우거져 삼림욕 하기는 좋으나 그 때문에 주변경관을 온전히 감상하기는 어렵다. 한편 관음사 길은 계곡이 깊고 산세가 웅장하여 오르기가 수월치 않으나 한라산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각자 자기에게 익숙한 길을 따라, 혹은 자기가 선호하는 방식으로 정상에 오르면 된다. 동쪽에 사는 사람이 북쪽 코스를 선택하거나 북쪽 사는 사람이 동쪽 코스를 선택할 수도 있지만 어쩌다 특별히 하는 등산이 아니라면, 일상 속에서 늘 등산을 할라치면 각자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가기 쉬운 코스를 택하는 것이 편리하고도 오래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전통과 현대를 논의하는 데 거기에 전통을 거론할 필요가 있는 이유 혹은 상호문화성을 논의하는 데 ‘한국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필요가 있는 맥락을 나는 한라산 정상에 오르는 것을 통해 이해하고자 한다. 그것은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로부터 나에게 익숙한 개념을 가지고 낯선 방식으로 차이, 만남, 관계, 상생, 융화를 말할 수 있는 철학을 만들어보려는 것이다. 허나 이 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 해석의 방식이 반드시 ‘낯선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까지와 마찬가지인, 익숙한 방식으로는 새로운 논의를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즈음에서 『공자, 페미니즘을 상상하다』에 대한 서평을 다시 떠올려 보고, 그것을 바로잡아 보자. 공자가 비록 페미니즘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사상에서 여성주의 사상과 만날 수 있는 지점을 상상하고 유희하는 것은 소심함? 이 아니라 솔직함! 이라는 것이다. 공자 사상의 이러저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새로운 패러다임 구성, 새 판 짜기의 맥락에 재활용하는 전략은 소심함 혹은 무모함의 맥락에서가 아니라 긍정성과 부정성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 사상과 그것의 현대적 해석의 노력에는 전통과 현대라는 시공간적 간극을 이해하는 노력이 있어야 하며, 이는 그들 간의 차별화된 개념과 그 범주들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 개념이 어떤 방향의 철학을 제시할 것인지에 대한 충실한 해명이 요구된다. 또한 이러한 해명의 작업은 단순히 전통을 답습, 찬양하거나 혹은 비판, 거부하는 방식으로써가 아니라 과거의 문제들을 현실적 안목에서 성찰하고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김세서리아 (성신여대) /

변증법적 총체성:자유로 가는 길[생각vs생각]

“‘포괄적으로 보는 사람’(ho synoptikos)은 ‘변증술에 능한 자’(dialektikos)이지만, 그러지 못하는 사람은 그런 이가 아니기 때문이네.”(플라톤, 『국가』)

전체는 비진리인가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진리는 곧 전체”라고 제시하며 변증법적인 총체성의 개념을 존재론적 원자론에 기초를 두고 있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실체존재론과 근대의 경험주의, 그리고 선험적 형식주의(경험주의의 변형태 중 하나)를 비판하는 토대로 삼고 있다.

그러나 히틀러의 아우슈비츠 대학살과 스탈린의 강제수용소를 경험한 이후 보수적인 학자 진영이나 진보적인 학자 진영이 이 개념을 집중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고, 이 개념과 아울러 변증법 자체의 학문성과 실천성까지 모두 의심하고 심지어 폐기하는 데로 나아갔다. 이로써 변증법적 총체성이라는 개념은 정치적 전체주의라는 현실적 정치체제와 필연적 연관성을 지닌 것처럼 이해되어 왔다. 이러한 경향을 아도르노는 “전체는 진리가 아니다”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하여 표현한다.

변증법적 총체성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이며 개인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는 실증주의나 분석철학과 같은 경험-형식적 합리성의 철학(대표자로는 포퍼, 그의 반증주의는 전형적인 과학주의임), 그리고 소비에트 공식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며 정치적으로 새로운 진보를 제시하기를 열망하는 네오맑스주의(대표자로는 아도르노)나 포스트모던주의(대표자로는 리요타르) 양쪽에서 공격을 받는다.

새로운 좌파적 실험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 주자인 리요타르는 변증법의 ‘총체성’ 개념과 거대 담론을 비판하며 차이의 활성화를 통한 작은 담론을 대안으로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변: 포스트모던이란 무엇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우리는 전체와 하나에 대한 동경(변증법적인 총체성-인용자 주), 개념과 감성의 화해에 대한 동경, 명료하고 의사소통가능한 경험에 대한 동경을 실현하기 위해 지나친 대가를 치렀다. …… 그리하여 서술할 수 없는 것을 증언하고, 충돌하는 차이를 활성화하고 그 이름의 명예를 구원하라.” 이 글에서 변증법적인 총체성은 다양성을 배제하고 차이를 억압하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비판받는다.

한편 정치적 보수주의자인 포퍼는 자유주의의 기초가 되는 개인주의라는 정치철학적 관점과 자신의 과학적 탐구의 방법인 “시행착오”의 방법을 기초로 해서 변증법적 총체성을, 그 총체성의 역사적 발전적 과정의 필연성을 일종의 예언자의 망령으로 규정한다. 포퍼는 변증법적 총체성을, 역사적으로 전개된 과정 전체를 필연적으로 규정하는 일종의 ‘역사법칙주의’라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역사법칙주의는 과거, 현재, 미래 모두를 하나의 역사발전법칙으로 설명하고, 특히 미래를 이 법칙에 따라서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포퍼는 변증법적 역사진행과정의 총체를 점성술의 예언 차원으로 격하시키면서 동시에 변증법 자체도 ‘전(前)과학적이자 전(前)논리적인 사유방식’으로 규정한다. 그는 변증법을 “어떤 발전 또는 어떤 역사적 과정이 어떤 전형적인 방식으로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변증법적 3박자 이론으로 정의한다. 이 전형성이 바로 역사예측을 가능하게 하는 결정론을 포함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결정론의 형태가 헤겔에서는 개념적 필연성으로, 마르크스에서는 경제적 필연성으로 나타난다.

포퍼는 필연성에 기반을 둔 변증법이 철학의 발전뿐만 아니라 정치이론의 발전에서도 불행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역사에는 그 진행 과정을 필연적으로 지배하는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역사에는 의미나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포퍼에 의하면 “미래는 우리들에게 달려 있으며 우리들은 어떤 역사적 필연성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필연성에 기초한 전체 과정으로서의 변증법적 총체성은 예언적 환상에 불과하고 이로부터 인류의 자유를 구속하는 정치적 전체주의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개인화는 전체화를 동반한다

그런데 포퍼와 리요타르가 공격하는 내용과 방식은 달라도 이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즉, 현대 정치에 출현한 전체주의적 요소가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와는 거리가 멀고 정치공동체와 이성국가를 강조하는 변증법에서 기원한다고 본다는 점이다.

그러나 변증법은 전체주의의 기원이 아니다. 도리어 자유주의가 전체주의의 출현에 책임이 있다. 현상적으로 보기에 개인주의를 강조하는 자유주의는 전체주의와 전혀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개인의 자유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전체주의의 치료제로 추천되기도 한다.

이러한 혼동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근대 정치를 ‘개별화’와 ‘전체화’가 맞물려 진행되어 온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푸코). 일례로 ‘개인의 권리’와 ‘인격의 자유’에서 쓰이는 ‘권리’와 ‘인격’ 모두가 개인적인 차원에 속하는 개념들이 아니라 국가공동체의 차원에서 법적인 토대를 지니고 있다. 그런 이유로 이 개념들은 이미 자신들 속에 사회적, 더 나아가서 정치적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개인’이라는 개념도 추상화된 단위, 즉 국가나 사회로부터 추상화된 결과이지 이것들의 선행 원인이 아니다. 이렇게 본다면 ‘개인’, ‘권리’, ‘인격’ 모두 사회적, 정치적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개별화와 국가화(전체화)가 별개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근대 국가가 성립(전체화)하면서 개별화가 함께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즉 개별화는 추상적 직접성의 단계로서 이미 전체화를 내포하고 있다.

이처럼 자유주의적 개념들 속에 이미 전체화의 요소가 전제되어 있음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유주의는 절대로 어떤 정치적 지배도 부정하는 무정부주의가 아니다. 이는 자유주의의 정치적 담론 형식인 홉스와 로크의 사회계약론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홉스의 절대주의적 정치철학에서 자유주의가 기원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홉스의 정치철학이 근대성을 잘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면 그의 철학에는 자유주의의 핵심인 도구적 합리성(욕망을 계산하는 이기적 인간의 합리성)과 이 합리성의 주체인 이기적 개인(이는 갈릴레이의 분해와 결합의 방법에 의해서 시계가 분해되어 부품으로 쪼개지듯이 개인도 사회가 그 요소로 분해되어 나타난 단위이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는 그의 철학이 욕망하고 투쟁하는 시민사회의 철학임을 명백히 보여준다. 이 시민사회의 갈등과 싸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시민들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 홉스는 국가라는 괴물(홉스가 국가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리바이어던은 성경에 나오는 괴물 이름이다)을 고안한다. 그는 시민사회가 국가라는 절대 권력체 없이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통찰한 것이다.

이를 로크는 국가의 목표가 ‘재산의 보호’에 있다고 함으로써 분명히 한다. 재산 이론을 통해서 로크는 자연 상태에서 자신이 전제한 평등한 권리를 불평등한 권리로 변형시킨다. “시민사회(=정치 사회)는 이미 자연 상태에서 불평등한 권리를 생기게 한 불평등한 소유를 보호하기 위해서 건설된 것이다.”(맥퍼슨) 이는 자연 상태인 시민사회의 재산은 국가의 법률적 보호 없이는 안전할 수 없음을 극명히 보여준다. 이런 식으로 로크의 소유 개인주의(자유주의)는 국가와 법률의 강제를 필요로 한다.

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과 성격뿐만 아니라 근대 정치철학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푸코가 지적한 대로 근대 정치적 합리성이 ‘개별화’와 ‘전체화’를 동시에 진행시킨 점을 통찰해야 한다. 또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주장한 것처럼 계몽주의는 전체주의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요소는 자유주의 이념의 학문적 형식인 경험-형식적 합리성(논리실증주의에서 잘 구현된 합리성)에서 잘 드러난다.

이 합리성은 처음부터 배제의 논리를 구사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로부터 역사와 실천이성이 배제된다. 그리고 형이상학을 신화로 해체한 경험-형식적 합리성(계몽주의)은 자신이 다시 신화가 된다. 이러한 역설적인 합리성에 기반을 둔 자유주의는 처음부터 개인주의 외에 전체주의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계몽주의의 합리성이 신화와 탈마법화의 변증법으로 나타났듯이 자유주의는 자유와 지배(자유로부터 생겨난 지배)의 변증법으로 나타났다.

이 테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자유주의는 최소 국가론을 주장하므로 국가를 목적으로 두는 전체주의(국가 권위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유주의는 나치즘과 파시즘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치즘과 파시즘은 자유주의의 핵심적 주장인 ‘시장의 자기조절능력’의 무능에 대한 우파적 입장의 해결책으로 역사에 등장한다(Polanyi, The Great Transformation). 이것들은 시장 사회의 공격적 요소에서 기원한 시장주의의 실패작이다. 또한 이러한 실패를 보완하기 위해 등장한 케인즈의 복지국가와 자유주의의 최소국가가 우리 사회에서 논의되는 것처럼 적대적인 두 집안의 극단적인 대립이 아니라 자유주의라는 한 지붕 아래에서 두 가족이 대립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효율성을 신뢰하는 것이고 복지국가론은 시장이 낳은 문제를 시장주의로 보완한다는 수세적 입장에서 해결하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복지국가의 위기와 현실 공산주의 몰락 이후 등장한 공세적 (신)자유주의는 ‘세계화’라는 구호 아래 자본을 근대적 국민국가의 틀로부터 자유롭게 하고자 시도한다. 이처럼 초국적화된 자본의 본질적 운동은 수세에 있을 때는 국가라는 기구를 이용하고 공세에 있을 때는 국가의 틀을 벗어나고자 한다.

이처럼 자유주의는 권력을 부정하지 않는다. 자유주의는 자신의 개념 안에 권력 욕구를 가지고 있다. 자유주의의 특징은 권력을 실체화하지 않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권력의 그물망(예컨대 통치계약)으로 엮는 동시에 (예컨대 수용소 또는 파놉티콘 안에서) 권력의 개별화를 행한다. 로크의 ‘권리’, ‘인격’ 개념과 벤덤의 ‘원형감옥(파놉티콘)’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런 식으로 실제로 자유주의는 원자적 개인주의 더 나가 소유 개인주의로, 그래서 소유한 자의 자유와 소유하지 못한 자의 종속으로 귀결되며, 이 종속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억압적 권위주의로 귀결된다. 이러한 소수만이 자유로운 자유주의적 국가의 권위주의로부터 해방되고 만인이 자유로운 이성국가나 코뮌주의를 건설하려는 철학적 입장들이 등장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비억압적 총체성을 기획하는 정치적 오르가논으로서 헤겔과 맑스의 변증법이 역사적으로 출현하게 된다.

변증법이 정치적 전체주의의 기원으로 오해받는 역사적 이유

이처럼 정치적 전체주의의 기원이 자유주의임에도 불구하고 변증법적 총체성이 전체주의의 기원으로 오해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스탈린 소련의 수용소(굴락)와 중국의 인권 탄압이라는 역사적인 불행한 경험 때문이다. 하지만 스탈린 소련은 동구 몰락에서 보듯이 근본적으로 변증법과 사회주의의 원래 이념에서 변질된 근대 (도구)이성과 계몽 기획의 어두운 얼굴에서 기인한 것이다.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동구의 몰락은 서구 복지국가의 위기와 동시에 진행된 것이다. 이는 자유주의에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는 복지국가와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구소련 모두 근대성과 자유주의의 핵심인 도구적 합리성(경험-형식적 합리성의 형태 중의 하나)을 탈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구의 몰락은 근대성의 위기의 표현이며 그 근대성의 헤게모니적 지배권을 지닌 자유주의의 몰락(월러스틴의 테제)이다. 자유주의가 이러한 몰락에 직면하여 공세를 편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이다.

자유주의의 과학적 논리인 실증주의는 이러한 근대성의 어두운 얼굴을 무시하고 근대성을 일방적으로 찬양하지만, 변증법은 근대성의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본다. 변증법이 이 중에서 하나만을 주장한다면 이는 계몽을 찬성 아니면 반대하라는 ‘계몽의 협박’에 말려드는 것이다.

소련과 중국의 지배적 변증법은 근대의 성과만을 지나치게 미화한 비변증법적인 사유의 결과물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스탈린주의는 비변증법적 요소, 더구나 자유주의적 요소(형식적이고 도구적인 합리성), 즉 계몽의 변증법으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근대성 일반(유럽의 근대성과 그의 대표적 형태인 자유주의 철학)이 변증법보다 훨씬 더 이 이데올로기적 괴물의 탄생에 책임이 있다. 따라서 동구의 몰락은 ‘역사의 종말’이 아니라 역사 진행의 한 계기일 뿐이다.

근대성 일반(그 핵심으로서의 자유주의)이 위기에 봉착한 지금, 변증법적 사고의 폐기가 아닌 복권이 필요하다. 이러한 복권으로 인해 역사성에 기반을 둔 개념적 ‘노동’과 공시적인 것과 통시적인 것의 전체를 포착하려는 ‘총체성’을 향한 사유의 노동이 작동하게 된다. 이를 통해 근대성의 성과와 한계가 잘 드러날 것이다.

변증법적 총체성은 다양한 목소리를 억압하고 표현된 것에 순종하고 분쟁들을 일방적으로 종식시키는 논리적 전체주의도 아니며 더 나가 모든 사람들을 하나의 당이나 지도자에게 권위주의적으로 복종시키고 억압하는 정치적 전체주의는 더욱 아니다. 변증법적 총체성은 파편화되고 복잡한 현대 사회의 전체의 모습을 그려보려는 진리에 대한 용기 있는 자의 학문적 시도이다.

반대로 총체성이라는 내적 연관성을 지니지 못한 채 자유주의자들처럼 고립되고 분열된 단위들의 상호소통을 외치는 것은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아니다.

이와는 다르게 변증법은 서로 내적으로 연관된 전체라는 관점에서 서로 분열되고 갈등하는 전체 인류 공동체의 다양한 목소리를 그 생생한 대립적인 총체로 표현하고자 한다. 이로써 변증법은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의 소외된 목소리를 활성화하며 다양한 목소리를 갈등 속에서 조화하는 자유와 해방의 논리이자 정치의 오르가논이 된다. 다시 말해서 변증법이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오르가논이 된다.

변증법은 초역사적 추상적 공간이 아닌 현재의 역사적 조건을 원자화된 그림이 아니라 내적 연관성이라는 총체성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변증법은 미래를 예언하는 사이비 과학이 아니라 현재의 역사적 조건을 성찰하고 그 현실에서 무르익은 이념적 차원을 드러내는, ‘서술’과 ‘비판’의 기능을 하는 ‘황혼 무렵에 날아오르는 올빼미’이다.

김성우(상지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

소피스트는 정말로 나쁜 놈인가?[생각vs생각]

분신술을 사용하는 철학자가 있다면?

홍길동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듯이 우리에게도 ‘두 장소’에 동시에 나타나는 재주가 있다면 어떨까? 두 장소가 아니라 ‘한 장소’에 동시에 나타나는 분신술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무슨 일을 하게 될까? 만약 한 장소에 동시에 나타나는 재주를 지닌 사람이 ‘철학자’라면, 철학자는 그 재주를 어디에 사용할까?

아마도 철학자 분신들은 동일한 주제에 대해 자신들과 반대 입장을 지닌 사람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힘을 합쳐서 상대방을 한 목소리로 공격할 가능성이 높다. 천하무적의 분신들.

그러나 만약 그 자리에 반대 입장을 지닌 사람은 없고 ‘단지 분신들만 존재’한다면, 어떻게 될까? 분신들끼리 서로 반대 입장을 취하여 끝나지 않는 논쟁을 벌일지도 모른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지독하게 물고 늘어지는 분신들.

동일한 분신들이 환상 세계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 실제로 나타나서 반대 주장을 펼친다면, 우리는 그들을 양보 없는 논쟁을 벌이는 집요한 철학자로 간주하기보다는 반성 능력이 부족하여 논리적 모순을 범한다는 둥, 오류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둥, 철학자로서 자질이 부족하다는 둥, 심지어는 자아 분열, 다중 인격 운운하면서 비판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철학사를 들쳐보면, 청년기 때의 생각이 바뀌어서 말년에 자신의 생각을 번복하거나, 간혹 모순되는 주장을 펼치는 철학자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바뀌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후대 사람들이 동일한 주장에 대해 ‘해석’ 내지 ‘가치 평가’를 달리 하여 대립각을 이루기도 한다. 그 중에는 너무도 당연해서 도저히 ‘그 해석’과 ‘그 가치 평가’를 바꿀 수 없는 것까지도 전적으로 뒤집어서 세인들에게 충격을 주는 경우도 있다.

현대에 들어 충격파를 만들어내는 한 예로 고대 철학자를 들여다보자. 억울한 누명을 쓰고서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와 그 적들인 소피스트들을.

상투적 대립 – 소크라테스는 좋은 놈, 소피스트는 나쁜 놈

반드시 철학계가 아니더라도 일상 세계에 타산지석의 모델 내지 반면교사로 평가되던 소피스트들, 그들은 상투적 관점에서 보면 인류 역사상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소피스트는 잘못된 의견과 궤변이 난무하는 폴리스 안에서 두려움 없이 쓴 소리를 한 강직한 소크라테스를 미워하여 – 허위를 유포하고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 억울한 누명을 씌워 독배를 마시게 했으니, 소피스트가 나쁜 놈의 대명사가 된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단지 ‘한 인간’을 죽인 것이 아니라, 사상적 유산을 어느 정도 만들어낼지를 가늠하기 어려운 ‘위대한 천재 철학자’를 죽인 것이며, 그것은 곧 그가 부르짖는 ‘보편 규범과 보편 도덕’을 죽인 것이며, 궁극적으로 ‘진리’, ‘보편 진리’ 자체를 살해한 것이 된다.

진리 살해, 진리 매장은 소피스트가 주장하는 의견(잘못된 주장, 억견:doxa)을 진리(episteme)로 부각시키는 것을 동반하기 때문에, ‘진리 대 억견의 대립 구도’뿐만 아니라 ‘진리’와 ‘진리 인식 가능성’까지도 거부하는 것이 된다. 소피스트에게 보편 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진리 인식은 불가능하며, 그래서 진리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고, 결과적으로 진리는 의견이라서, 절대 진리를 주장하는 소크라테스는 죽음에 처해져야 한다.

소피스트에게 진리는 논쟁에서 이기는 자의 주장이며, 논쟁을 펼치는 정치의 장에서 이기기만 하면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 그에 반해 진리 다양성을 비판하면서 보편 진리와 보편 규범을 들고 나온 소크라테스와 진리 일원성은 소피스트에게는 가장 껄끄러운 적이다. 소크라테스는 집단행동을 통해 제거되어야 할 걸림돌이기 때문에, 소피스트는 나쁜 놈이 되더라도 소크라테스를 죽여서 그의 보편 진리까지 살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모순을 드러내는 분신 – 소크라테스의 이중성

나쁜 놈들의 수작에 맞서서,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주장하는 행태를 비판하고 동시에 진리 일원성과 보편 진리를 관철시키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과업이다. 그러므로 좋은 놈의 면모를 철저히 발휘하여 소피스트가 나쁜 놈임을 증명해야 하는데, 그 와중에 소크라테스는 청소년을 타락시킨다는 죄목으로 소피스트에게 고발당한다.

마지막 재판에서 소크라테스는 재판관과 방청객이 그의 무죄를 수긍할 수 있도록 자신들을 설득시켜 보라는 주문을 재판관으로부터 받는다. 사형 언도 권한을 지니는 재판관 앞에서 만약 소크라테스가 수사술을 통해 이들을 ‘감동’시킨다면 그는 무죄를 ‘설득’시키는 셈이 되고, 소크라테스에 대한 사형 판결은 철회될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설득적 연설을 해야 하는 곳에서 수사술이 아니라 변증술을 사용하여 상대방을 논박한다. 결국 논쟁에서 이기기는 하지만, 상대방을 감동시키거나 설득시키지는 못 한다. 감동받지 못한, 설득당하지 못한 재판관은 소크라테스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다.

희랍 당대에는 자신의 주장을 상대방에게 관철시키는 방법으로 변증술과 수사술을 사용했다. 변증술은 철학적 논증을 하는 기술로서 철저한 논쟁술이며, 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이다. 그에 반해 수사술은 상대방을 설득하는 정치적 연설의 기술이며, 다수를 향하여 이루어지는 웅변술이다.

철학적 진리를 논증하기 위해 변증술을 견지하는 소크라테스에 반해, 소피스트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견을 설득시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수사술을 악용하여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의견을 진리처럼 오독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소크라테스가 재판정에서 요구받은 것은 다수를 감동시키고 설득시키는 수사술임에도 불구하고 – 그가 변증술과 수사술의 차이를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은 탓인지, 아니면 실수인지 모르지만 – 변증술을 사용한다. 그래서 대화 상대자와의 논쟁에서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그리고 다수를 감동시키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소피스트만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결정적 실수도 한몫하고 있는 셈이 아닐까? 수사술을 사용해야 할 곳에서 변증술을 사용했다면, 그가 변증술과 수사술을 구별하지 못한 것이며, 그러한 미구별은 ‘진리를 다루는 변증술’과 ‘의견을 다루는 수사술’의 미구별로 이어진다. 달리 말하면 진리와 의견을 구분하지 않거나, 구분하지 못하는 실수를 범한 셈이 된다.

변증술과 설득술을 구분하지 않은 것은 진리(episteme)와 의견(doxa)을 구분하지 않은 것이 되고, 그로 인해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는 진리도 ‘하나의 의견’으로 전락한다. ‘소크라테스 대 소피스트의 대립’은 ‘진리 대 의견’의 대립이 아니라 – 진리가 의견이 됨으로 해서 – ‘의견 대 의견’의 대립이 된다.

소크라테스가 범한 실수는 그의 죽음을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간 데에서 그치지 않고 소크라테스 자신을 소피스트로 전락시킨 것이 된다. 소크라테스, 그는 또 하나의 소피스트인가?

소크라테스는 각자의 정신을 들여다보면 누구나 진리를 도출할 수 있다고 하면서 진리의 일원성과 보편성을 강조한다. 소크라테스의 대표 방법인 산파술을 보자. 산파는 산모가 아이를 낳는 것을 도와줄 수는 있지만, 산모에게 아이를 만들어줄 수는 없다. 인간 누구나 보편 진리라는 아이를 임신하고 있으며, 산파는 단지 임신한 아이를 낳도록 도와주는 것일 뿐이며, 그러한 산파가 바로 소크라테스이다. 산파술은 변증술로 전환되며, 변증술은 진리의 일원성에 기초하는 보편 진리를 찾는 방법이 된다.

소크라테스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가 있으며, 진리 인식은 변증술에 의해 누구나 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재판정에서는 변증술과 수사술을 혼동하는 실수를 범함으로 해서 진리와 의견의 차이를 불분명하게 만든다.

아렌트는 『정치의 약속』에서 소크라테스의 실수를 언급하면서 소크라테스가 보편 진리와 진리 인식을 그 자체로가 아니라 ‘의견’ 가운데서 드러내는 방식으로 전개한다고 주장한다. 아렌트가 보기에 소크라테스에게 의견은 파괴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진리가 오히려 의견의 작동 가운데서 산출되며, 의견은 언제나 진리와 유착(48쪽)해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진리는 의견을 통해 드러난다는 발상이 암묵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폴리스 공동체에서 ‘의견들의 대립’, ‘소피스트들의 대립’,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의 대립’은 ‘진리를 드러나게 하는 대립’이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위해 정신에 몰두하기보다는 ‘타인의 의견’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야 하며, 달리 말하면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가 되어야 한다. 소피스트화된 소크라테스라면, ‘소크라테스 대 소피스트의 대립’은 ‘소피스트 대 소피스트의 대립’이 된다.

의견들의 대립 속에서 진리를 드러내려면 자신보다는 다른 의견을 지니는 타인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며, 타인의 의견을 통해야 하므로, 진리 발견과 진리 주장은 외로운 철학자의 작업이 아니라 다수 속으로 침투해 들어간 소피스트의 작업이 된다.

또 하나의 모순적인 분신 – 진정한 민주주의자로서 소피스트?

분신술을 사용하여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트로 만들고, 진리를 의견 가운데 드러내도록 함으로써 진리가 의견이 되고, 의견이 진리가 되는 상황을 펼쳐 보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지지자인 플라톤은 아렌트와 달리 의견을 수용할 수 없다. 그래서 설득을 사용하여 대중을 다루는 것은 ‘폭력’과 폭력에 의한 ‘지배’라고 본다. 차후에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변론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기는 하지만, 설득에 의한 방법을 거부한 결과는 독배를 마시는 죽음일 뿐이었다.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고 간 소피스트는 주관주의, 진리 상대주의에 기초하여 진리 다양성을 주장하며, 이로 인해 이기주의와 유아독존을 심화시키는 부정적 태도를 낳는다. 게다가 그들은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치졸한 방법, 속임수까지 사용하여 의견을 진리로 둔갑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소피스트가 이렇게까지 타락하여 억울한 죽음을 만들어낼 때 그들이 속한 폴리스 공동체가 실제로 추구한 것은 자유와 평등이다. 자유민의 자유는 논쟁 과정에도 그대로 투영되는데, 자유의 근간이 되는 희랍의 이소노미(isonomy)라는 단어는 후대 사람들이 소피스트의 정신적 기반을 상당히 오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폴리스 공동체는 민주 질서를 갖췄지만, 민주정보다는 ‘비지배’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아렌트의 『혁명론』에 따르면, 아테네의 민주정은 “지배받지 않는 조건 아래서 시민들이 함께 생활하는 정치조직,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구분하지 않는 정치조직”(97쪽)이다. 그래서 자유는 비지배를 의미하는 이소노미로 간주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권력을 강화하여 타인을 지배하게 된다면, 그는 이소노미에 의거하여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된다. 자유민의 자유는 노예와 대비시키면 타고난 것일 수 있지만, 구체적 내용을 실현하는 정치적 행위 공간에서는 비지배를 관철시키는 것이라서 – 타고난 것이 아니라 – 폴리스적 삶을 통해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유와 평등이 인간적 노력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자유민은 각자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서 정치적 행위의 장으로 나와야 한다. 이때 자신의 의견이 없는 사람은 논쟁의 한 축을 이룰 수 없다.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서 논쟁의 장으로 뛰어들 때, 그들은 정치적 입장뿐만 아니라 진리에 대한 입장도 동시에 지니게 된다. 소피스트에게 철학적 진리는 의견이지만, 의견의 대립을 해소하는 과정에서 ‘자유로서 비지배’가 견지되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그들에게 ‘진리가 하나이다.’라는 전제는 무의미하다.

오랫동안 권모술사라는 철학사적 지탄을 받았던 소피스트가 정치적 행위와 논쟁의 장에 들어서려면, 반드시 의견을 지녀야 하고, 다양한 의견만큼 다양한 충돌 가운데서 진리를 구체화해야 한다. 이때 중요한 점은 자신의 의견을 진리로 격상시키는 과정에서 반드시 상대방을 만나야 하고, 상대방과 대화를 해야 하고,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 과정에서 비지배가 견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격다짐으로 자신의 주장을 상대방에게 관철시키는 폭력, 그로 인한 억압과 지배는 배제되어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보편 진리조차도 의견 가운데서, 다양한 의견 가운데서 드러난다면, 보편 진리를 위해 타인과 만나야 하고, 타인과 대화를 해야 하고, 타인과 만나는 공적 토론의 장에서 타인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민주적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소피스트가 보여준 것은 자유분방한 토론의 장에서 각자의 의견을 거쳐서 진리를 드러내려면 언제나 ‘타인’이 필요하고, ‘타인의 의견’이 필요하고, ‘타인과의 대화’가 필요하고, 그러다 보니 보편 질서 내지 보편 규범과 보편 진리를 내세워 의견을 일방적으로 억압하는 태도를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의견 가운데서 진리를 드러나게 하는 비지배적인 태도에 비추어 보면, 하나의 진리를 관철시키려고 하는 것은 폭력이고 억압이며 비민주적인 철학적 독소가 된다.

분신술로 인해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소크라테스는 독재적이고, 소피스트는 민주적이며, 소피스트는 반성 능력을 발휘하는 비지배적 대화를 하는 자이고, 소크라테스는 우격다짐으로 소피스트를 억압하는 또 다른 소피스트가 아닌가? 소피스트가 자유, 비지배, 그로 인한 다양한 의견, 의견 대립 속에서도 타인과의 대화를 지속하는 민주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태도와 정신은 망각되고 억울한 죽음을 야기한 집단행동만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비지배적인 자유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타인과 대화의 장을 만드는 모습, 즉 ‘망각된’ 소피스트의 모습을 소통이 단절된 우리 사회에서 다시 부각시켜야 한다. 공적 토론과 소통의 장을 실현하기 위해 비지배적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은 일방적이고 억압적인 현 정부가 낯선 타인으로 간주하는 서민들이 필요하고, 서민의 의견과 행동이 필요하며, 궁극적으로 의견 난립 속에서 상호 공존하는 방법이 필요하다는 메시지이다.

이정은(연세대) /

꽃보다 철학[철학의 유언]

꽃보다 철학[철학의 유언]

강지은(건국대학교 강사)

 

우리집은 아파트인데도 남들 선호하는 로얄층이 아니라 2층이다. 얼마전 딸아이 친구가 놀러 와서는 “하나는 왜 낮은 곳에 살아요?”하지 않겠는가. 이 동네는 아파트 단지이다. 비싸고 살기 좋은 로얄층은 10층 이상임을 아는 나는 당황스러웠다. “응…종은아 베란다 창을 봐. 나무들이 보이지? 사람은 자연과 가까이 살아야 하는 거야.” 아파트 창밖으로 시원한 하늘과 까마득히 멀리 지나가는 성냥갑만한 자동차를 보는 게 전부였던 그 아이에게 나의 답이 과연 설득력을 가졌을지는 모르겠다. 요즘 아이들도 알 건 다 알고 있기에.

어쨌든 2층이라고 답답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높은 곳에 사는 사람들은 누리기 어려운 계단 보행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 바쁜 시간대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느라고 시간 허비하는 일 없어 좋다. 그런데 이사 오자마자 발견한 1층과 2층 사이 계단 벽에 있는 낙서가 재밌다. “구준표♡금잔디 / 첫 날 밤”라는 공중파 드라마의 주인공 이름이다. 어른이 써 놓지는 않았을 것 같고, 고등학생들은 유치하다 할 것 같고, 아마 중학생이나 초등학교 고학년이 써 놓았을 법한 낙서엔 사춘기 인간의 설레임이 들어가 있는 것 같다.

사춘기 인간. 소년, 소녀도 아니고 꼬마도 아닌 인간. 우리가 쉽게 지나쳐버리는 어린 인간에 대해 잠깐 생각한다. 그는 인간이라서 가질 수 있는 권리, 책임 등이 뒤엉켜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질풍노도의 인간이다. 질풍노도(Sturm und Drang). 1770년에서 1780년에 걸쳐 독일에서 일어난 문학운동에서 유래한 이 말은 F.클링거의 희곡 『질풍노도』(1776)에서 유래한다. 당시 여러 문학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지만 그 중 단연 으뜸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향한 참을 수 없는 열정과 고뇌. 소설의 주인공 베르테르는 로테를 열정적으로 사랑하지만 그녀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극복하지 못한 채 끝내 권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믿거나 말거나 이 작품을 읽고 베르테르의 자살을 모방하여 유명을 달리한 사람은 지금까지 전 세계 2000여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한다.

무엇이 그토록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일까? 목숨마저 버리게 할 만큼의 힘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칸트에게 있다. ‘보편적 인간 이성에 대한 이념’을 전제하고 있는 칸트는 계몽주의자이지만 주관을 통해 대상을 구성한다는 측면에서는 낭만주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신에게 종속되어있는 수동적인 존재인 인간을 능동적인 존재로 규정한 칸트는 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 있음을 만천하에 고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칸트의 대표작을 흔히 3비판서라 부른다.『순수이성비판』에서는 인간의 인식과 한계에 대하여 밝힌다. 또 『실천이성비판』에서는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의지의 규정과 의지의 자유에 대해 해명하고자 한다. 마지막 『판단력비판』은 미학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칸트는 미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밝히고자 하였다. 그는 『판단력비판』에서 인식의 세계인 자연의 세계와 의지의 세계인 자유세계의 결합가능성에 관해 논한다.

칸트가 보기에 인간이 태어나서 맞닥뜨리는 세계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내 눈앞에 펼쳐진 자연세계, 다른 하나는 내면의 성찰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정신의 세계. 그런데 이 정신의 세계라는 것은 무한해서 도저히 인간의 지성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세계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펼쳐진 두 세계는 영원히 하나로 설명할 수 없는 아포리아가 될 수밖에 없다. 뭐든 하나의 원리로 설명하고 싶은 욕심이 철학자들에게는 있다. 물론 포스트모던한 철학자들은 하나의 원리가 일종의 편견이라고 비난하지만 여전히 나는 명쾌한 해답이 있었으면 하고 희망한다.

이 두 세계를 연결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칸트는 판단력이라고 하였다. 수학과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와 무한히 자유로운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인간의 능력이 판단력이다. 판단력은 미적 대상을 만날 때 인간 안에서 작동한다. 장미꽃은 일정한 형태와 향기를 갖춘 대상이고 우리는 앞에 놓인 꽃을 인식한다. 아직은 아름답다는 판단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은 무한의 상상력을 잡아다 장미꽃과 연결시킨다. 인간은 장미꽃의 형태를 넘어 그로부터 연상되는 우주의 조화로움, 사랑, 그리움 등을 떠올리며 아름다운 꽃을 찬미한다. ‘알 흠 답 다!’ 어느 배우의 발성을 흉내내서 적어본 것이지만 아름답다를 멋지게 소리내어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일순간 정지하는 호흡과 내면이 우주로 확장되는 듯 소름 돋는 느낌. 어떤 예술작품을 보더라도 혹은 듣더라도 아마 그로부터 받는 느낌은 비슷할 것 같다. 칸트는 이러한 미적 판단은 반드시 개인의 사적 이익과는 무관한 공평무사한 마음이 전제되어 있다고 보았다. 사실 사적인 마음이 개입되어 있을 때 아름다움은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어렵다. 모나리자가 아름다운 이유는 내가 그림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내 것 네 것을 따질 때는 이미 사라져버린다.

칸트는 이렇게 자연과 자유가 만나는 지점에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미적 심미안을 탄생시켰다. 칸트에게서 아름다움은 현실 대상의 균형과 조화가 아니다. 또 관념에만 존재하는 영적 대상의 신비로움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아마 ‘우주와 인간이 만나는 신비로운 체험’일 것이다. 이러한 칸트의 예술관은 독일낭만주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문학에서는 괴테, 철학에서는 셸링을 출현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주인공 베르테르는 천국과 지옥을 경험한다. 여기에서 문득 나에게 천국은 과연 무엇일까하고 곱씹어본다. 사실 최근에는 늘 사는 게 지옥 같다는 생각을 하고는 있지만 나도 천국같은 세상이 오길 바란다. 로또 1등, 논문 완성, 백점맞는 아이 엄마, 베토벤 합창교향곡 음악회에서 듣기 …. 어쨌든 베르테르는 로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할 때 천국을 경험하고 주위의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러나 로테를 떠날 수밖에 없음을 감지하고는 모든 게 불행이고 지옥이었다. 천국과 지옥이 물질의 많고 적음과 삶의 비루함에서 오지 않고 마음에서 왔던 것이다.

괴테부터 예술의 척도는 고전주의가 지향했던 규범과 모방이 아니라 창조적 주관성이다. 창조적 주관성은 언제나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베르테르의 사랑과 고뇌를 읽는 이들은 모두 이전의 문학 작품에서 느끼지 못했던 ‘무한한 인간의 정신세계’를 느꼈다. 그 무한한 정신세계는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손익계산이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 진정성, 인간행위의 동기만이 주인인 세상이다. 현실 세계에서 아무리 이들을 외쳐 보아도 돌아오는 반응은 “진정한 사랑? 그게 밥 먹여주냐?” 그러나 베르테르는 밥도 안 먹여주는 진정한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다 죽었고, 그런 베르테르를 읽은 독자는 이 세상에서 죽음을 택했다.

다시 글 앞에서 물었던 ‘왜 사람들은 베르테르를 따라 자살했을까?’ 나는 그 답이 칸트에게 있다고 했다. 베르테르가 죽은 이유, 베르테르를 따라 사람들이 죽은 이유. 그것은 칸트가 미학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소통 가능성이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을 함께 보고 들으며 나눌 수 있는 소통을 잃어버린 인간은 삶의 모든 의미를 잃는다.

나이를 먹으면서 가끔은 잊는다. 눈에 콩깍지 씌웠다고 욕먹으면서도 죽도록 누군가를 사랑해 본 경험을. 그리고 그 경험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그 심정을.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편지글 형식으로 쓰인 작품이다. 베르테르가 친구 빌헬름에게 자신의 정신세계를 편지로 전하는 글이다. 사람들은 로또에 당첨되면 누구에게도 말하려 하지 않지만 진리 혹은 진정한 사랑을 만나면 누구든 붙들고 이야기하고 싶은 법이다. 베르테르는 자신의 환희를 친구에게 말하고 싶었다. 물론 가장 그 사실을 함께 말하고 싶었던 이는 로테였겠지만 이미 다른 남자와 정혼한 여인. 진정한 사랑 혹은 진리는 그 자체 아름다운 것이지만 더 아름다운 것은 누군가에게 그 사실을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아름다움을 함께 나눌 그 누군가가 필요한 것이다. 아름다움은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다리이다.

칸트가 『판단력비판』에서 아름다움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바로 인간과 인간의 소통이었다. 서구 사회에서 자본주의의 발달과 주권의 확립으로 구성된 인간 주체는 오롯이 그 자체 완결된 인간이었다. 이렇게 원자화된 인간은 오직 자기 이익만 챙길 줄 아는 소통불가능한 존재처럼 보였다. 그 속에서 칸트가 희망했던 것은 인간과 인간이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 통로였다. 서로 이해하는 척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어 진실을 말하건대 진실로 이해하는 관계는 흔하지 않다. 그런데 칸트가 생각하기에 아름다움 앞에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서로 소통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누구든 자신이 발견한 아름다움을 누군가에게는 꼭 말하고 싶다.

그런데 칸트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긴 여운을 남겼다. 내가 아름답다고 느낀 것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는 것은 그도 나의 생각에 동조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바로 여기에 타인에 대한 고려가 전제된다. 타인에 대한 고려를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능력을 칸트는 ‘공통감’이라고 했다. 이제 칸트의 미학은 소통의 정치학을 꿈꾼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판단하듯 나의 사적 이익과 관계없는 인간의 일을 놓고 서로 소통하고자 한다. 먹고 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다움을 완성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사적 이익과 관계없는 인간의 일이란 바로 정치적인 것들이다. 정의, 도덕, 평등, 공동체 등등. 공평무사한 마음으로 이들에 대해 소통하는 장은 아름다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정치, 함께 아름다움을 나눌 수 있는 정치라면 그리고 그러한 것을 꿈꾸는 것이 철학이라면 나에게 철학은 그 어떤 꽃보다 아름답다.

 

철학자에게 천리마란…[철학의 유언]

동양에서 철학이란 미지 세계에 대한 탐험이 아니다. 이미 축적된 가치와 세계에 대한 확인이며 체득이다. 그런데 이것을 확인하고 체득하는 방법을 몰라 방황하기도 한다. 스승이 필요한 이유다. 동양에서 사승관계를 중시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도통론(道統論)도 나왔다. 인생의 성공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때론 어떠한 스승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좋은 스승 찾아 수 십리 수 백리 길을 찾아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교육여건 따라 아파트 가격 형성이 천차만별인 것은 요즘 불거진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오랜 전통이기도 하다.

처음 사학(私學)을 개창했다고 하는 공자의 제자가 3천명이라 하기도 하고 72명이란 소리도 있다. 기준을 어디다 두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수 있으니 숫자는 큰 의미가 없다. 다만 수제자 그룹에 속하는 이들을 일반적으로 72명이라 말한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는 인자(仁者)도 있고, 현자(賢者)도 있고, 오합지졸(烏合之卒)도 있다. 거렁뱅이도 있고, 깡패도 있고, 재력가도 있다. 말재주 좋은 재변가도 있고 어눌한 답답이도 있다.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위정자가 본 제자와 스승 공자가 본 제자, 그리고 일반 사람들이 본 제자의 모습은 같지 않다. 당대 위정자들과 일반 사람들이 현명하고 능력 있는 제자라고 평했어도, 공자가 보기에는 무능하고 똑똑하지 못한 제자일 수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자공(子貢)이다. 자공은 대단히 유능한 사람이다. 정치적 수완도 뛰어났고, 경제적으로도 부유했다. 주변에서는 공자보다 낫다는 얘기도 자주 했다. 그때마다 자공은 부담스러워하며 더욱 겸손했고 더 노력했다. 이쯤 되면 스승으로부터 인정받을 만도 했지만, 공자가 본 자공은 늘 부족한 사람이었다.

반면 안연(顔淵)은 누가 뭐라 해도 부족한 사람이다. 위정자나 일반 사람 눈엔 그랬을 것이다.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한 나약한 제자였다. 늘 스승의 말씀에 “Yes!”란 말만했지, 감히 “No!”라고 대꾸한번 못했다. 거기다가 본인은 물론 처자식의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무능자중의 무능자였다. 그래서 그는 위정자들이 인정하는 재능 있는 사람은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가 본 안연은 최고로 능력 있고, 최고로 똑똑한 제자였다. 어디를 가도 안연을 제일 먼저 챙겼고, 스승보다 먼저 저세상 사람이 되었어도 공자는 그의 이름을 달고 살았다. 권력자들에게 추천권을 행사할 때도 으레 죽은 안연을 추천했다.

사마천(司馬遷)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