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모함과 소심함을 넘어선 솔직함[생각vs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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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찬양할까? 내칠까?

최근에 출판된 나의 저서 『공자, 페미니즘을 상상하다』에 대해서, 한 기자는 나를 어떤 다른 저자의 “무모함”에 비교하여 “소심함?”으로 평가하였다. “저자는 소심하였다”가 아니라 ‘?’를 동원하여 “소심한 걸까?” 라는 의문 제기의 방식을 취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좀 더 원색적인 발언이나 내용을 기대하였던 듯하다.

예컨대 “공자가 죽어야…” 혹은 “공자가 살아야…” 류가 아니어서, 재미난 구경거리가 한 판 벌어졌을 법도 할 기회를 놓쳐버렸다는 아쉬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또한 『공자, 페미니즘을 말하였다』라고 왜 좀 더 강력히 발언하지 않았는가, 아니면 왜 좀 더 화끈하게 공자를 내다 팔지 않았는가 하는 은근한 질책이 거기에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같은 저서를 두고 아주 다른 평가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상상하다”를 “말하였다”로 자체 이해하면서, 공자가 언제 페미니즘을 논한 적이 있는가에 초점을 두어 격분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논조는 공자와 유교는 가부장제의 산물이고 여성 억압적이며 계급적 한계를 지니는 것인데, 이것이 페미니즘 논의와 어떻게 한 자리에서 거론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즉 공자와 페미니즘, 유교와 페미니즘을 함께 거론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며, 유교 안에서 현대적인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것은 또 다시 공자를 살리려는 보수논리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전통 사상을 거론하는 데서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방식은 이처럼 찬양할까? 내쳐 버릴까?의 둘 중 하나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래서 둘 중 어느 하나를 완전히 폐기시켜 버리거나 다른 한 편에 완벽한 승리를 안겨 주는 방식을 취하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 안에서는 가치폄하 하는 논쟁 방식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려는 의도만이 숨겨져 있다. 그래서 한쪽이‘전통은 과거일 뿐이고, 전통은 아무 것도 아니며 그래서 폐기되어야 할 뿐이고’라고 말하면, 다른 한 쪽은‘현대는 문제투성이일 뿐이고 그래서 찬란했던 과거의 영광에 비하면 현대는 타락의 소치일 뿐이고’로 응수한다.

이 둘에게서 서로 만날 방법을 찾기란 어렵다. 그들은 소통, 화해, 융화를 생각하기 보다는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전제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것 아니면 저것의 논리만이 통하며, 전통의 만능을 찬양하거나 혹은 전통의 무능을 한탄하는 둘 중 하나의 방식만을 논의하고자 한다.

상호성과 ‘한국적’ 상호성

최근 차이의 철학, 다문화주의 등에 힘입어 많은 사람들이 서구를 보편으로 간주하는 것, 그래서 다른 문화권에 속한 전통을 무시하는 태도에 대해 맹렬히 비판한다. 또 서구라는 잣대로 전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다른 문화권에 속한 전통에서 발전된 목소리를 배제하게 된다고 고발하기도 한다.

상호문화성을 통해서 서로 다르고 때로는 이질적인 철학들 사이의 만남과 매개 – 타자성, 차이, 낯선 자의 해석학, 다문화성, 상호문화성, 초문화성 – 에 대하여 관심 가져야 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같은 작업, 다양한 문화들이 서로 만나는 현실을 겪으면서 중심성을 배제하고 문화의 상호성을 논의할 방안을 모색하는 것은 매우 유의미한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상호문화성을 말하는 사람들 역시도 ‘어떻게’ 상호성을 개발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답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서구’에 기반해서 ‘우리’의 문제를 말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도 그 안에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구촌화되어 있는 현재 상황에서 별도의 ‘우리’를 설정할 필요는 없으며, 그렇기에 상호성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한국적’ 상호성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그저 중심성을 비판하고 상호문화성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상호성을 마련하는 데 과연 효과적인 전략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한다. 상호성을 개발하는 것은 단일한 하나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각자 발 딛고 있는 현실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며, 그렇기에 자신이 현재 어디에 어떻게 발 딛고 있는가를 직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통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화두가 되는 것이며, 전통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전통에 대한 거론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전통과 현대, 이들을 한 자리에 놓고 거론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나 그 때에도 그 둘의 관계는 여전히 불편한 채로 남아 있기 쉽다. 전통 사상의 개념과 용어들을 현대 사회에서 사용하는 데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개념과 용어들을 재활용하는 작업은 비록 어렵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상호성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단일한 단어를 찾는 것보다는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우리가 성취하고자 하는 주된 과제에 충실할 수 있는 또 다른 의사소통의 길을 찾아보는 것이 때로는 더 유용한 방식일 수도 있다. 내가 몸담고 있는 현실과 그것에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는 전통을 완벽하게 분리해내기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그래서 서로 다른 시대의 두 영역의 일을 함께 논의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는 질문은 그 자체로서 우문일 수 있다.

전통을 비판하는 사람에게도 전통은 있고 그 전통은 어떻게든 해석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현대를 비판하는 사람에게도 현실은 있고 현실의 부정성은 어떻게든 해소되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우리 자신에게, 즉 우리 내부에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에 달려 있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남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남을 도울 수도 없다. 전통과 현대에 대한 어렵고도 지난한 논의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관심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남의 말과 생각을 빌어서 사회 변혁을 이루어보겠다는 무모한 모험을 시도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 자신의 전통과 현실을 한꺼번에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무모함과 소심함을 넘어서서 솔직하게 전통을 바라보기

제주도 한라산의 정상에 오르는 데에는 여러 가지 코스의 길이 있다. 서북쪽 코스인 어리목 등반, 서남쪽 코스인 영실산 길, 동쪽 코스인 성판악 길, 북쪽 코스인 관음사 길 등이다. 영실산 길은 영실 기암의 경관이 좋으나 등산길이 짧아서 등산꾼들에게는 그다지 선호의 대상이 아니란다. 성판악 산길은 활엽수가 우거져 삼림욕 하기는 좋으나 그 때문에 주변경관을 온전히 감상하기는 어렵다. 한편 관음사 길은 계곡이 깊고 산세가 웅장하여 오르기가 수월치 않으나 한라산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각자 자기에게 익숙한 길을 따라, 혹은 자기가 선호하는 방식으로 정상에 오르면 된다. 동쪽에 사는 사람이 북쪽 코스를 선택하거나 북쪽 사는 사람이 동쪽 코스를 선택할 수도 있지만 어쩌다 특별히 하는 등산이 아니라면, 일상 속에서 늘 등산을 할라치면 각자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가기 쉬운 코스를 택하는 것이 편리하고도 오래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전통과 현대를 논의하는 데 거기에 전통을 거론할 필요가 있는 이유 혹은 상호문화성을 논의하는 데 ‘한국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필요가 있는 맥락을 나는 한라산 정상에 오르는 것을 통해 이해하고자 한다. 그것은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로부터 나에게 익숙한 개념을 가지고 낯선 방식으로 차이, 만남, 관계, 상생, 융화를 말할 수 있는 철학을 만들어보려는 것이다. 허나 이 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 해석의 방식이 반드시 ‘낯선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까지와 마찬가지인, 익숙한 방식으로는 새로운 논의를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즈음에서 『공자, 페미니즘을 상상하다』에 대한 서평을 다시 떠올려 보고, 그것을 바로잡아 보자. 공자가 비록 페미니즘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사상에서 여성주의 사상과 만날 수 있는 지점을 상상하고 유희하는 것은 소심함? 이 아니라 솔직함! 이라는 것이다. 공자 사상의 이러저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새로운 패러다임 구성, 새 판 짜기의 맥락에 재활용하는 전략은 소심함 혹은 무모함의 맥락에서가 아니라 긍정성과 부정성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 사상과 그것의 현대적 해석의 노력에는 전통과 현대라는 시공간적 간극을 이해하는 노력이 있어야 하며, 이는 그들 간의 차별화된 개념과 그 범주들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 개념이 어떤 방향의 철학을 제시할 것인지에 대한 충실한 해명이 요구된다. 또한 이러한 해명의 작업은 단순히 전통을 답습, 찬양하거나 혹은 비판, 거부하는 방식으로써가 아니라 과거의 문제들을 현실적 안목에서 성찰하고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김세서리아 (성신여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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