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땅이 아니니 어찌 오래 머무를 수 있겠는가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

원진호 (책익는 마을 회원 / 원진호내과 원장)

 

얼마 전 중국의 철학자 펑유란의 <펑유란 자서전>(웅진지식하우스 펴냄)을 읽었다. 번역자 가운데 한 사람은, 이 책을 번역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동양철학에 입문하게 된 것도 이 분 때문이라는 것이 중요한 이유였다고 한다. 요즘 책익는 마을에서 <노자도덕경> 공부를 진행하고 있는데, 그 강의자가 이 책의 역자이기도 하여 권하기에 뜻에 따라 행동에 옮긴다는 마음으로 책을 집어 들었다.

 

천수를 누린 중국 철학자 펑유란

펑유란은 1895년에 태어나서 1990년에 사망하였다. 96세의 천수를 누렸다. 그 분에 대한 평가는 그의 묘비명을 보면 알 수 있다.

‘삼사에서 고금의 철학을 해석하고, 육서로 신리학의 체계를 세웠다.’

삼사와 육서는 이 분의 저작물로 삼사는 <중국철학소사>, <중국철학사>, <중국철학사신편>이고, 육서는 36년에서 48년 동안의 항일전쟁시기에 쓴 정원육서를 말한다. 삼사는 철학사 학자로서 “따라서 설명하는 것(照着講)” 이었고 정원육서는 철학자로서 “이어서 설명하는 것(接着講)”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신리학은 펑유란의 사상체계를 통칭하는 것이라 한다.

펑유란은 지금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중학과정 시절에 논리학에 흥미를 갖으면서 자연스럽게 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문과 특히 철학은 인기도 없고 돈도 안 되는 학문인가 보다. 베이징대학 입시원서를 받는 안내원이 다시 생각해 보라고 권한 걸 보면 말이다. 어떻든 그는 베이징대학 철학과에 1915년에 입학하고 1919년에 컬럼비아대학원으로 유학을 가 죤 듀이의 문하에서 철학을 연구한다.

 

왜 중국은 서구에 비해 근대화가 뒤쳐졌는가?

펑유란의 초창기 철학적 고민의 출발은 ‘왜 중국은 서구에 비해 근대화가 뒤쳐졌는가?’였다. 중국이 왜 서양보다 뒤쳐졌는가 하면 당시 보통의 논리는 이렇다. 우선은 중국이 서양에 비해 과학과 기술이 뒤떨어졌기 때문이고 그것은 자연과 세계를 대하는 태도와 관점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양은 자연을 관찰의 대상으로 보았고 탐구하고 극복할 과제로 여겼다. 이 과정에서 과학과 기술이 발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동양은 행복은 맘에서 구하는 것이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고 자연은 투쟁의 대상이 아니라 합일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자연을 극복하고 개조하는 분야가 발전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의 차이가 중국이 당시에 발전하지 못한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차이가 동양과 서양의 본질적 차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서양에서도 정신문명을 중시하는 태도가 있고 동양에서도 물질문명을 중시하는 관점이 있다는 것이다. 즉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본성은 본디 같은 것이고 사상도 모두 같다고 펑유란은 보고 있다. 이 논증을 그는 그의 박사논문에 쓰고 나중에 <인생철학>이라는 책에 싣는다. 이 책에서 그는 세상의 주요 사상들을 개괄하면서 총 열 개의 유파로 나누었다. 그는 사람이 경험하는 것은 천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으로 나뉜다고 보고 어느 쪽이 좋고 나쁜가, 어느 쪽을 더 중시하고 살아갈 것인가에 따라 유파들을 나누었다. 이 분류에서 동서양 사상이 근본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옛 것과 새 것의 차이라고 본다. 서양은 산업혁명과 과학의 발전을 통해 새 것인 사회로 진화되면서 물질문명적인 문화가 주도적인 것이 되고, 중국은 헌 것에 머물면서 새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정신문명이 주도적인 체 남아있다는 것이다. 중국이 근대화가 되면 중국에도 옛 것과 다른 근대철학이 발전할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중국철학사의 구분: 자학(子學) 시대와 경학(經學) 시대

근대화라는 것이 서구를 따라 가는 것이긴 하지만 똑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반봉건반제국주의 입장에서 중국의 근대화를 고민하였고, 중국 철학사를 집필하면서 옛것에서 새것을 발견하고 중국고유의 사상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유물론자가 아니라 신실재론과 실용주의에 바탕을 둔 유심론자였다. 이 때문에 중국공산혁명이후 많은 곤란을 겪기도 했지만 결국 마오쩌둥의 깊은 신뢰를 얻는 중국의 대표적인 철학자가 되었다.

펑유란은 중국철학사를 자학(子學)시대와 경학(經學)시대로 나누었다. 춘추전국시대인 子學時代는 지존이 없이 사상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평등하게 각 학파가 논쟁을 벌였던 시기이다. 이렇게 백가쟁명의 시대가 되었던 사회적 배경은 당시 통치를 담당했던 귀족이 쇠락하고 원래 있던 사회규범이 붕괴하고(禮崩樂壞), 사회제도가 해체된다.(天下無道) 당시 귀족을 위해 봉사했던 지식인 무리들이 원래의 자리를 잃고 민간으로 흘러든다. 이들은 귀족세력의 최하층을 이루었지만 사민(四民)의 으뜸이 된다. 그들은 지식을 생산하고 팔면서 생계를 도모하고 자신의 이론을 스스로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런 것이 발전하여 학파를 이루고 백가쟁명의 국면을 이루게 된다고 하였다. 경학시대는 유교가 지존이 되고 세상을 지배하는 규범이 되면서 경직된 사회체제를 형성했다고 한다. 그는 중국철학이 계승해야할 시대로 자학시대를 꼽았다.

 

신리학: 보편과 특수

그의 철학체계인 신리학은 보편과 특수에 대하여 논한 것이다. 그의 핵심 주장은 ‘리’(理)가 사물 속에 있다는 것, 즉 보편이 특수 속에 깃들여 있다는 것이다. 좀 더 설명하면 이렇다. 사물의 보편과 그 사물은 있으면서 같이 있고 없으면 같이 없는 것이다. 사물의 특수는 감각의 대상이며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다. 사물의 보편은 사유의 대상이며 실험실 속에서 그런 보편을 추상해 낼 수 없다. 이를 개념화 하면 ‘구체적 보편’이라 한다. 구체적 보편의 내포는 ‘리’이고 외연은 ‘사물’이다. 리와 사물, 내포와 외연은 원래 함께 있다. 사람의 사유가 그것들을 분석할 때 분별되고 대립되는 것으로 드러날 뿐이다. 이것은 인식의 문제이지 존재의 문제는 아니다. 사람들은 이 두 분야를 헷갈려 해서 이의 문제를 확실하게 정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리’란 사람의 사유가 추상의 방법을 통해 사물로부터 분석해 낸 것일 뿐이고 굳이 존재의 측면에서 이야기한다면 ‘리’는 사물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리는 사물이고 사물은 곧 리라고 할 수 있다.

 

항일 전쟁시기 시난연합대학의 교편생활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파란만장한 중국 근현대사를 엿볼 수 있다. 그는 5.4운동을 뒤로 하고 미국 유학을 가서 1923년에 중국으로 되돌아와 허난성 중저우 대학에서 교편을 잡는다. 그는 자신이 안심입명(安心立命)할 곳을 찾아 베이징 옌징 대학으로 옮기고 28년 칭화 대학으로 옮겨 대학의 개혁에 참여 한다. 33년 휴식년에는 유럽을 여행하고 당시 공산혁명에 성공한 소련을 방문한다. 당시 중국은 항일전쟁시기에 접어들고 그는 38년부터 45년까지 피난처인 시난연합 대학에서 교편생활을 이어간다. 당시 국민당 정부 하에 있었는데 갈수록 정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항일전쟁과 관련하여 대학과 학생이 정부와 대립하는 일이 많아진다. 44년 12월1일에는 급기야 수류탄 피폭에 의해 학생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펑유란은 교직을 맡고 있는 위치에서 당시 권위를 갖고 있는 교수회의를 통해 이 사태를 수습한다. 그는 강경파와 보수파의 주장을 둘 다 만족시키지 못했으나 그래도 파국을 막은 것으로 스스로 자위를 한다.

 

비록 좋다고 해도 내 땅이 아니니, 어찌 오래 머무를 수 있겠는가

중국이 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온 그는 그해 9월에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간다. 중국이 혁명의 혼란 속에 빠져 들자 그의 미국인 친구들은 미국에 눌러 있기를 권고한다. 그는 왕찬의 등부루에 나오는 문구 “비록 좋다고 해도 내 땅이 아니니, 어찌 오래 머무를 수 있겠는가”(雖信美而非吾土ㅁ, 夫胡可以久留.)를 인용하며 48년 중국으로 돌아온다. 펑유란은 자신은 반동중국인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자신의 나라를 제대로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중국 공산정권하에서 철학자로 살아가기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후 그는 끊임없이 자기부정과 사상개조를 해 나간다. 이 점에 있어 자서전에는 매우 솔직한 자기 평가가 기록되어 있다. 그는 <주역>의 건괘 문언전의 “글을 지어 진실함을 세운다”(修辭立基誠.)를 인용하면서 지식인의 글쓰기 원칙을 이야기 하면서 자신이 정녕 그러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이야기 한다. 그는 73년 林彪비판운동에서 공자비판운동으로 전환되면서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러한 행동이 진실된 대중노선에 따른 것인지 군중에 영합하기 위해서 행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이야기 한다. 그 선(線)은 진실함(誠)과 거짓(僞)에 의해 나뉠 것인데 당시 자신은 마오 주석과 당 중앙이 옳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부정하고 비판하면서 일보 전진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실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 여러 관점에서 살펴보지 못한 점, 자신이 더 받들어진다는 것에 대한 기쁜 마음도 있어 이는 군중에 영합한 측면이 있었다고 진솔하게 이야기 한다.

52년 중국당국이 대학의 모든 철학과를 없애고 베이징대학만 남겨두는 조치를 취하자 베이징대학으로 옮겨 간다. 여기에서 그는 문화대혁명을 겪게 되는데 홍위병들의 지식인 탄압으로 시련을 겪는다. 책에는 이 상황이 담담히 서술되어 있지만 문화대혁명의 상황이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다. 상당히 심한 극좌적 횡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에도 살아나는 중국을 보면 참 대단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펑유란의 학문적 자세

그의 학문적 자세는 어떠했을까? 그는 시경에 나오는 말 “주가 비록 오랜 나라이지만 그 사명은 새롭다”(周雖舊邦,其命維新.) 라는 문구를 인용하면서 오래된 나라의 정체성과 개성을 지니면서도 새로운 사명의 실현을 앞당기는 데 일조하고자 했다. 이러했기에 보수파와 진보파 둘 사이에서 비판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주관대로 삶을 살아왔다고 이야기 한다.

후배 학자들에게 그는 무슨 말을 남길까? 그는 “불이 옮겨 가니 꺼질 줄을 모른다”(火傳也, 不知其盡也.) 라는 문구를 인용한다. ‘ 인류가 수천 년에 걸쳐 축적한 지식은 진리의 불꽃이라 그 연료를 끊임없이 대 주어야 계속 연소되고 이어질 수 있다. 그 역할을 한 이들이 철학자요 시인, 문학가, 예술가, 학자이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연료삼아 피를 토하듯이 저작물들을 남겨 왔고 또한 본인도 그렇게 하려 했다고 한다. 후대에 남기는 저작물을 쓰는 각오는 이러 해야 한다. “누에는 죽어서야 실을 더 뽑지 않고, 초는 재가 되어서야 촛농이 마른다.” 즉 누에는 생명을 바쳐 실을 토해내고 초는 목숨을 다하여 빛을 내는 것처럼 분투하며 살 것을 당부하는 듯하다.

 

위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나를 성찰하기 위한 것이다.

책을 덮으며 책의 겉면에 있는 펑유란의 초상화를 들여다본다. 청말 민국 초에 유년과 청년 시절을 보내고 중국공산혁명을 보았으며 그 정권하에서 유심론 철학자로 살아왔던 그. 그의 백년의 삶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중화민족에 대한 자부심, 사람은 모두 같다는 평등의식, 여행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 학자로서의 성찰과 분투, 삶에 대한 소박함, 낙관성 그리고 솔직함을 그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 현실에 적응하는 현실주의와 타협주의가 느껴지기도 했고 그의 언행에서 중국 중심의 문화주의 냄새가 나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수차례 감옥생활을 하면서도 지조 있는 지식인의 삶을 포기 하지 않았던 우리나라 이영희 선생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통해 역사속의 인물을 알아 가는 것은 내게는 매우 유익하다. 반면교사다. 그들의 삶을 통해 나 자신을 성찰하는 것, 이 책이 나에게 주는 의미이다. 가슴에 듬직한 뭔가를 얻은 느낌을 간직한 채 책을 책장에 꽂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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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e시대와철학>과 <책익는 마을>의 공동기획 연재물입니다. 책과 더불어 건전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는 보령 책익는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세상살이, 세상보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펑유란 지음, <펑유란 자서전>(웅진지식하우스 펴냄)에 관한 원진호(책익는 마을 회원/원진호내과원장) 님의 글입니다.

 

구보씨 뱀파이어가 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아벨 페라라 감독의 영화 <어딕션>(1995)은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철학과 관련해서 특기할 만한 영화다, 라고 구보씨는 생각한다.

우선 여주인공 캐서린(릴리 테일러 분)이 박사논문을 준비하는 철학과 대학원생으로 나온다. 철학을 전공하는 인물이 영화에 등장하는 경우는 종종 있다. 그러나 대개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철학교수나 철학과 학생은 어딘지 어설프고 몽상적인 캐릭터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캐서린은 현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인물로 나온다. 그녀에게 철학은 배경적 장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해, 특히 현실의 참혹한 모습에 대해 묻고 답하는 실질적 통로다. 영화의 첫 장면은 월남전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들로부터 시작한다. 중간엔 홀로코스트의 장면들도 비춰진다. 이 악행은 어디에서 비롯하며 또 누구의 탓인가?
영화가 내놓는 답은 ‘중독’(어딕션)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실 악에 물들어 있고 악행의 공모자인데, 중독에 의해 무감각해져 있을 뿐이다. 평범한 미국 시민이 낸 세금이 월남 전쟁을 위해 쓰였고 또 이라크 전쟁을 위해 쓰이지 않았는가. 우리라고 해서 다를 바 없다. 우리도 이미 약자를 침탈하고 핍박하는 데 알게 모르게 한 몫을 하고 있지 않은가.

영화는 이런 면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뱀파이어를 끌어들인다. 어느 날 캐서린은 뱀파이어에 물려 뱀파이어가 된다. 그녀는 괴로워하지만 중독된 자신의 욕망을 떨쳐버릴 수 없다. 당당하게 맞서 대항하지 못하고 두려움 때문에 목을 내맡긴 탓이다.

“나를 똑바로 봐. 그리고 말해. 꺼지라고. 애원하지 말고, 당당히 말을 해.”

“제발, 제발…”

“겁쟁이. 너도 공모자야.”

이 영화에 따르면, 우리는 비겁함 때문에 중독된다. 아니, 이미 중독되어 있지만 비겁함 때문에 이를 직시하고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을 똑바로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 자신이 뱀파이어임을, 남의 피를 빨아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길, 부활하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다.

이런 귀결이나 메시지는 사실 상투적이고 진부한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이 영화를 요약하고 마는 것은 아마 이 매력적인 흑백 영상물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일 것이다.

“나는 그 영화 별루야. 지나치게 사변적이라구. 네 말대로 흑백으로 찍었기에 망정이지 칼라 영화였다면 진짜 어색했을 거야. 무엇보다 웬 설명조의 대사가 그렇게 많아. 니체에, 키에르케고르에, 사르트르에, 포이어바흐에, 또 뭐야, 결정론이 어쩌구, 윤리적 상대주의가 어쩌구, 게다가 영원이니 구원이니…어휴, 그럴 바엔 차라리 논문을 쓰지.”

“어, Y야, 그래도 이 영환 평이 좋았다구. 통찰이 훌륭하잖아. 뱀파이어에 대한 해석도 흥미롭고. 박찬욱의 <박쥐>가 깐느에서 상 받을 때, 사람들이 비교하여 거론했던 영화가 이거라구. 괴로워하는 뱀파이어의 모습이 닮았거든. 뱀파이어의 이빨을 과장되게 표현하지 않는다든지, 주사기로 피를 빼서 흡혈한다든지 하는 것도 이 영화에 먼저 나와. 말하자면, 우리를 뱀파이어로 해석하는 작업의 선구라는 거지.”

“그것도 웃겨.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가 왜 뱀파이어니? 그렇게 보는 건 사람들을 저주받은 운명으로, 죄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 놓는 거야. 그러구선 거기다 회개니, 용서니, 구원이니, 온갖 그럴싸한 말들을 들이대는 거잖아. 전에 어떤 다큐 보니까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입에 돌을 물린 채로 파묻힌 유해가 발굴됐는데, 그게 흡혈귀 취급을 받고 죽은 여자 유골이라는 거야. 뭐, 죽은 자가 피를 빨아먹고 다시 살아나지 못하게 하는 거라나… 기가 막힐 일이잖니? 그거 마녀 사냥의 일환 아냐? 페스트 같은 전염병이 도니까 뒤집어씌울 희생양이 필요했던 거고, 그래서 애꿎은 사람들을 뱀파이어로 몰아서 죽인 거라구. 그러니까 구보야, 그 뱀파이어에 대한 집착 좀 집어쳐. 재수 없다구.”

“근데, Y야, 그렇게 단선적으로 볼 필욘 없지 않을까. 네 말대로 뱀파이어엔 원래 그런 면이 있어. 뱀파이어는 경계 밖으로 밀어내야 할 경계 외적 존재였던 거야. 하지만 그건 체제 내적 관점에서지. 그런 견지에서는 뱀파이어 같은 괴물이 체제의 선이나 순수와 대비되는 악과 오염의 역할을 떠맡게 되는 거야. 하지만 관점을 바꿔서 생각해 봐. 이제 그런 체제 자체가 문제거든. 더 이상 문제를 밀쳐내 바깥의 적에게 덮어씌울 수 없단 말이야. 그런 식의 호도(糊塗)로는 위기만 더 키울 뿐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구. 그럴 때 어떤 일이 벌어지겠어? 밖으로 밀어냈던 악이 반향(反響)하여 내적인 것으로 삼투(?透)하기 시작해. 내부의 균열과 재평가가 생겨나고 말이지. 우리가 밀어냈던 그 악은 바로 우리 내부에 있는 것 아닐까? 우리의 배타(排他) 자체가 그 악의 주술(呪術)이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반성이 일어나는 거야. 그리고 그 반성은 선악의 구분 자체에까지 이르게 되지. 말하자면 이런 거야. 이전의 배타가 ‘악’을 내던지고 그럼으로써 바깥을 지시하는 것이었다면, 적어도 그렇게 지시된 바깥의 일부는 그 배타의 악을 열어젖히는 힘을 담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런 전환에는 당연히 뱀파이어도 포함된다구. 그렇지 않겠어? 가령 들뢰즈가 뱀파이어를 다루는 걸 좀 봐. 거기에는 자연스레 ‘악’의 문제가 결부되는 거야. 물론 그 ‘악’은 이제 더 이상 기피의 대상이 아니지. 일종의 전도(顚倒)가 일어나니까 말이야.”

“구보야, 내 생각엔 네가 뱀파이어 같애. 뭐? 전도? 맞아, 딱 그래. 전도된 뱀파이어. 옛날 뱀파이어는 너처럼 그렇게 말이 많지 않았거든. 거칠든 부드럽든 그저 조용히 물어뜯었지. 차라리 그게 더 나았는지도 몰라. 요즘 뱀파이어는 왜 이렇게 말이 많은 거야. 뱀파이어 이빨이 정말 ‘이빨 까는’ 이빨이 된 거 같아. <박쥐>의 송강호도 봐. 첨부터 중얼중얼, 무슨 기돈지 뭔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되뇌고, <어딕션>에서 그 여자도 아주 연설을 하잖아. 거기 나오는 치들은 다 그래. 중간에 남자 뱀파이어로 나오는 그 배우, 이전 영화들에선 꽤 괜찮더만, 이번엔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결국은 닥치고 피 빨아먹을 거면서. 하여튼 말 많은 것들은 재수 없어. 대체 무슨 영화를 이미지가 아니라 말로 만들려 드냐.”
“Y야, 그게 전형적인 체제 내 수법이야. 말이 막히면 말 많다고 내치는 거. 말로 대응이 안 되니까 하는 얘기거든. 이를테면, 말 많은 놈은 빨갱이라고 하는 식이지. 실은 자기네가 허용할 수 있는, 또는 허용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는 거야. 아니, 그렇게 화 내지 마. Y 네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거니까… 여하튼 그래서, 금지된 말이거나 파열된 구멍에서 나오는 말이 흡혈하는 피가 되고, 또 그런 말의 전달 수단이 뱀파이어의 이빨이 되는 거야. 물론 이 뱀파이어는 이제 내부의 뱀파이어지. 밖에서 들어오고 안에서 발산(發散)하는 괴물?물려서 전염되는 흡혈의 욕망이 바로 그 발산의 이미지라구. 예컨대 <나꼼수>를 봐. 그게 일종의 내화(內化)한 뱀파이어의 모습일지도 몰라.”

“구보야, 넌 그냥 말만 많은 게 아니야. 네 말은 아예 말이 안 돼. 아까 넌 비겁함 때문에 뱀파이어가 된다고 했지? 그런데 이제 와서 <나꼼수>가 뱀파이어라면, <나꼼수>가 비겁하다는 거잖아. 그럼 그치들이 만날 외치는 ‘쫄지 마!’가 비겁의 신호라는 거야? 도대체 무슨 말이 그래?”

“하, Y야, 비겁은 문젯거리인 사회에 사는 우리 모두의 일면이야. 우리가 이런 사회를 허용한 거라구. 말하자면 이명박을 뽑은 건 우리란 말이야. 그래서 우리는 이미 뱀파이어인 거야. 흡혈의 욕망을 지닌 존재인 거지. 그런데 이런 걸 자각하지 못하면, 우리는 뱀파이어란 마치 우리 밖의 존재인 것처럼, 우리가 밀쳐내야 할 괴물에 불과한 것처럼 착각을 하게 돼. 그게 바로 전통적인 뱀파이어의 이미지라구. 그걸 Y 네가 싫어하는 위정자들이 줄곧 써먹어왔던 거고. 거기에 습관처럼 파묻히는 것, 그게 바로 중독이야. 자각하지 못하고 벗어나지 못하는 중독, 그것이 정말 위험한 거지. 스스로가 뱀파이어인 줄 모르는 뱀파이어. 이게 비겁의 산물이야.

그렇지만 일단 우리가 이런 점을 깨닫고 절감하면,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지. 이때 뱀파이어의 전화(轉化)가 일어나는 거야.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보게 돼. 무엇이 거기에 얽혀 있는지도. 그래서 전통적 뱀파이어에게 거울을 보는 것은 끔찍한 일이야. 햇빛도 마찬가지지. 두려움, 이걸 완전히 떨칠 수 있을까. 그 두려움은 기성(旣成)의 체계가 항상 준비하고 부추기는 것이거든. 생각해 봐. 자각이니 절감이니 하는 말은 쉽지만, 그건 언제나 대가를 치르는 거야. 내가 뱀파이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은 햇빛에 살이 타는 미래를 예감하는 것이지. 자기 현시(顯示)와 자기 소외(疏外)와 자기 파괴를, 적어도 나의 근본적 변화를 받아들이는 거라구.

‘쫄지 마’라는 구호는 그러니까 내화한 뱀파이어의 증식 수단인 셈이야. ‘씨바, 쫄지 마’, 이것은 비겁을 돌파하여 균열을 비집는 내파(內破)의 구호고, 또한 두려움을 넘어, 그렇지만 아직도 두려움 가운데서 흡혈을 약속하는 구호지. 흡혈이라고 하면 다들 끔찍해 하는데, 왜 계속 이런 말을 쓰느냐고? 그건 한편으론 끔찍하기 때문이야. 우리가 실상 끔찍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지. 그 끔찍함의 이면에는 효율이 도사리고 있어. 피의 이미지와 상징성을 생각해 봐. 그건 엑기스, 곧 정수(精髓)고, 순환이고 전달이야. 또 흥분이고 두려움이지. 피는 안에서는 활기지만 밖으로 터져 나오면 두려움의 대상이 돼. 흡혈이란 그 활기와 함께 두려움을 먹는 거야. 그렇잖아? ‘쫄지 마’는 쫄 필요가 없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구호라구.”

“잠깐, 구보야. 너 아직도 할 말 많이 남았지?”

“아니, 거의 다 했어. 몇 마디만 더 하면 돼.”

“그럼, 그 몇 마디 아껴 뒀다 다음에 해. 내가 한 마디만 할께.”

“치, 뭔데?”

“넌 말이야, 구보야, 내가 보기엔, 덜떨어진 말로 꼼수 부리는 뱀파이어 같애. 말꼼수 뱀파이어, 어때? 그래두 말꼼수라니까 어감은 귀여운 데가 있지?”

자거라투스트라, 새해 달력을 사러 시장에 가다.[자거라투스투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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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거라투스트라는 신성한 새해를 맞이하면서 기이하게도 옛날에 쑥스러웠던 기억을 하나 떠올렸다.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였다. “너는 어째 그 흔한 선물하나 받아오지 못하느냐?” 어머니가 명절날이 되면 이렇게 늘 안스러워 하시기에 언젠가 명절을 앞두고 자거라투스트라가 꾀를 하나 냈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 자거라투스트라는 주변의 친구들을 불러 자신의 처지를 털어놓았다. 다들 처지가 비슷한 지라 자거라투스트라의 제안에 흔쾌히 동조하였다. 다음날 각자 자기 돈으로 자기 집에서 제일 필요한 물건을 사서 선물로 포장하였다. 그리고 우체국에 가서 그 선물을 자기 집에 그러나 서로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보냈다. 선물이 도착한 날 자거라투스트라는 놀란 어머니 앞에서 짐짓 “아, 이 친구가 뭘 이런 걸 다 보냈지”라고 중얼거리면서, “거 참 하는 일도 바쁠 텐데…” 하고 한마디 슬쩍 밀어 넣었던 것이다. 마치 그 사람이 정부나 학교에서 제법 높이 있는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어머니가 대견해 하시는 모습과 만족스러워 하는 웃음을 보면서 자거라투스트라는 작전이 성공적으로 마쳐진 것을 기뻐했다.

남들은 흑룡이 솟는다고 웅성대는 새해가 되자 자거라투스트라에게 이런 쑥스러운 옛날 일이 떠 오른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도대체 새해가 되었는데도 달력을 하나도 얻지 못했던 것이다. 새해가 되면 세상에 흔한 게 달력이 아니었던가? 무슨 회사나 어느 기관이다 해서, 약간이라도 떵떵거리는 직장이라면 새해가 되기 전에 달력 하나는 꼭 찍어서 돌리곤 했다. 자거라투스트라가 선물은 하나도 못 받아도 그래도 달력만큼은 이리 저리 많이 얻었다. 그래서 새해가 되면 지천으로 방안에 굴러다니는 달력을 발로 차면서, 어디서 보냈는지도 굳이 확인하지 않은 채 이런 달력들이 너무 귀찮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심지어 달력을 보내주었던 친지들이 약간 시답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 저가 아직 그런 떵떵거리는 직장에서 안 떨려 나고 잘 다닌다는 그 말이지? 그래 잘났다.” 이렇게 자거라투스트라는 속으로 악다구니를 쓰면서 보낸 사람의 정성을 애써 무시하곤 했다. 그만큼 발로 차였던 것이 달력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자거라투스트라는 새해가 되면 이렇게 받은 달력 가운데 몇 개를 골라, 방방이 새 달력을 걸어놓는 것이 마치 한 해를 새로 맞이하는 성스러운 의식으로 여겼다. 이렇게 새 달력을 걸어놓으면 그때는 마치 방마다 지난 해 쌓였던 먼지들과 액운 그리고 업보들이 모두 다 사라지고 새방이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새 달력의 깨끗한 빛은 방마다 환하게 빛났다. 불교 용어에 ‘정구업진언’이라는 말이 있는데 업을 씻어내는 주문이라는 뜻이다. 달력이야 말로 그런 진언이 아니었을까? 때로 달력 속에 자거라투스트라가 좋아하는 그림이라도 찍혀 있으면 날자 부분을 잘라 버리고 그림 부분만 따로 스크랩해서 벽이나 책장에 걸어놓아 두기도 했다. 달력에 찍힌 그림들은 원본보다야 훨씬 못하겠지만 색상이나 정밀도에 있어서 그림책으로 인쇄된 것보다는 훨씬 수준이 높았으니, 그런 그림이 실린 달력을 보면 탐내면서 이미 얻은 다른 달력과 바꾸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도대체 올해는 걸어놓을 달력을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도 그리고 어디서도 새해 달력을 보내 주지 않은 것이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주소를 잘못 아는 것인가? 여전히 학교 쪽으로 달력을 보낸 것일까? 아니면 이제 자거라투스트라가 더 이상 별 볼일 없으니 그까짓 달력 하나라도 굳이 보낼 필요가 없다는 것인가? 달력에 관해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달력이 없으니 갑자기 온갖 망상들이 머리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새해 벽두부터 마치 스핑크스 앞에 부딪힌 것처럼 ‘달력 실종 사건’에 대하여 고민하기 시작했다.

 

2

문제는 달력 없이 지내는가 아니면 달력을 시장에 가서 사기라도 해야 하는가 하는 양자 결단의 문제였다. 물론 또 하나의 선택지가 있기는 하다. 새해 달력을 누군가 보내오기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아직도 달력을 얻을 수 있는 데 부탁을 하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자거라투스트라는 자신이 아는 친척들, 그리고 친구들을 세어볼 필요도 없이 이런 선택지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과거에 달력을 기꺼이 보내주었던 친지들이 거의 대부분 현직에서 은퇴하고 말았다는 것은 새해가 지나도 일주일이나 지난 지금까지 달력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이 냉엄한 현실이 거꾸로 잘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닌가? 이제 새로운 세대들이 달력을 찍어 돌리는 직장을 얻기를 기다려야 하지만, 아직도 자거라투스트라 주변에는 달력을 찍는다는 그 떵떵거리는 직장을 지닌 젊은 세대들이 없었다. 더구나 달력을 찍는 직장은 사실 이제 한국에서도 그리 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과거에는 달력을 찍어 돌리곤 했던 직장들도 올해는 경기가 경기인 만큼 쓰임새를 줄이니 아마도 달력을 찍어 돌리는 것이 제일 먼저 줄여야 할 일인 모양이다.

달력을 걸어놓은 것이 자기 직장의 광고로서 효과가 많을 텐데, 그래 아낄게 따로 있지 달력을 안 찍다니. 아무리 경기가 좋지 않아도 달력만큼은 국민의 수대로 찍어서 여기 저기 보시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건 단순히 광고 때문만은 아니지 않는가? 그건 한국에서 잘나간다는 직장의 사회적 의무가 아닐까? 그럼 가난한 국민이 새해의 달력까지 시장에서 사야한다는 말이냐? 자거라투스트라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부아가 났다. 지난 몇 년 동안 이명박 정부가 고환율 정책을 취하면서 죽어나간 것은 서민이요, 온갖 혜택을 다 본 것은 소위 대기업 아닌가? 그런데도 그래 달력하나 못 찍겠다는 말이지!

속으로 부아는 나지만 어쩔 수 없이 자거라투스트라는 더 이상 달력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포기하고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먼저 달력을 돈 주고 사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심리적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자거라투스트라에게 또 하나 씁쓸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한때 김치를 사기 위해서 시장 바닥을 돌았던 기억이다. 지금처럼 마트가 발달하기 전이다. 그때는 시장에 가면 김치를 쌓아놓고 파는 아주머니들이 있어서 자거라투스트라는 그들로부터 김치를 구했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남자가 김치를 사러 간다는 것이 심리적으로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하는 수 없어서 시장에 가서 김치 파는 아주머니에게 다가갔다. 그때면 번번이 다른 손님(대개 젊은 여성이거나 젊은 주부들이다)들이 김치 아주머니를 둘러싸고 김치를 사려는 것을 발견하고, 자거라투스트라는 발걸음을 돌려 시장을 한 바퀴 다시 돌았다. 그리고 멀찌기 곁눈으로 김치 아주머니에게서 손님이 없는 것을 보고 또 다가가면 어느새 또 어떤 손님이 나타나서 자거라투스트라의 발걸음을 돌리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김치 하나를 사기 위해 그렇게 몇 번이나 시장을 돌았던 씁쓸한 기억이 났다.

그런데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만일 자거라투스트라가 시장에(아직은 달력 파는 곳이 어딘지 모르지만) 가서 달력을 사기 위해 이리 저리 쌓인 달력을 뒤적거리면 누군가가 분명 자거라투스트라를 보지 않을까? 그러면 그 중 어떤 사람은 “저 놈은 틀림없이 그런 달력을 찾는 중일 꺼야. 왜 있잖아? 그런 거 말이야. 소주 회사나 내의 회사 같은 데서 나오는 달력 말이야. 틀림없어, 생긴 거를 보니…”라고 생각할 것이 아닐까? 또 다른 사람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할 거다. “아이구, 저런, 오죽하면 달력을 사러 나왔을까? 그래 사돈의 팔촌, 초등 중증 고등 대학 동창 중에 한국에서 대기업이나 주요 기관에 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모양이지? 그런 사람 하나만 있어도 달력 사러 나오는 일은 없을 거다. 입고 있는 꼬라지 보니 집안이 안돼 보이기는 하네.” 뭐 이렇게 사람들이 자거라투스트라를 비웃을 것을 생각하니 굳이 비싼 돈(아직 얼마인지 정말 모른다)을 들여서 달력을 사러 가야할지 자거라투스트라로서는 고민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달력 없이 지내면 어떨까? 대체 달력을 방방이 걸어 놓는 게 무슨 악취미인가? 무슨 그림을 걸어놓는 것도 아닌데, 그게 무슨 입춘방문도 아니고, 무슨 부적도 아닌데 그걸 왜 방방이 걸어놓는가 말이다.

요새 젊은 사람들은 시계도 안 차고 다니더라. 혹 결혼한 사람이 ‘이 사람은 결혼했으니까 다른 사람은 결코 넘보지 마시오’를 표시하기 위해 남자는 시계를 차고 여자는 반지를 차고 다니기는 하지만, 요새 시계가 어디에 쓰일 데가 어디 있을까? 핸드폰에 시계가 너무나도 편리하고 정확하지 않느냐. 마찬가지이다. 핸드폰에 달력이 있고 다이어리도 일정표도 있으니, 굳이 방안에 걸린 달력을 쳐다볼 이유가 없지 않을까?

솔직히 자거라투스트라도 지난 일 년 동안 달력을 쳐다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유독 달력을 볼 때는 일 년에 몇 번 되는 제삿날을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새해 달력을 걸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달력에 제삿날을 표시하는 것이다. 제삿날이 모두 음력으로 되어 있어 표시해 놓지 않으면 금방 까먹고 지나가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제삿날을 잊지 않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차라리 제삿날을 평소에는 결코 기억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달력에 빨간 줄로 여러 번 동그라미를 쳐놓기만 하면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하여튼 그런 일이 없다며 정말 달력 쳐다 볼 일은 없으니, 제삿날도 핸드폰에 입력시켜 놓고 올해부터는 달력 없이 한 해를 지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까? 이렇게 자거라투스트라는 곰곰이 달력이 없는 삶을 다시 생각해 본다.

그렇다. 시계를 찾고 다니라고 강요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내게 노동시간을 빼앗기 위해 자본가가 강요하는 것이다. 시계를 찬다는 것은 그러므로 노동자가 되었다는 것이고, 자본주의 사회에 성공적으로 편입되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한 때는 시계를 찬다는 것이 성공의 징표이기도 했다.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달력을 걸어 놓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이 사회이다. 이 사회는 수많은 기념일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그 기념일이 사회적 시간을 조직하는 매듭 점들이다. 삼일절과 육이오, 개천절과 유엔 데이, 그리고 크리스마스 등. 그러니 달력이 없다면 우리는 사회적인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된다. 나 자신의 자유를 찾기 위해, 자연 그대로의 시간을 회복하기 위해 달력을 이제 우리의 공간으로부터 그리고 동시에 시간으로부터 제거할 필요가 있다.

 

3.

이렇게 한참이나 생각하던 자거라투스트라는 결국 달력을 사러 나가기로 했다. 그것은 다른 이유가 없었다. 오직 달력을 거는 것이 지금까지 한 해를 맞이하는 하나의 성스러운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무슨 의식처럼 해돋이를 보러 간다. 자거라투스트라도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새해 첫날 부산 해운대 앞바다로 떠오르는 해를 보러 갔던 것이 기억났다. 지금까지 구름에 가려 구름 위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기는 했지만 정말 바다에서 황금빛 꼬리를 끌면서 떠오르는 해를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매번 그렇게 의식처럼 해를 보러 가지 않는가? 그렇다면 달력을 거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나의 의식을 지킨다는 것은 아마도 인간만의 일일 것이다. 인간만이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풍습을 갖듯이 인간만이 그 자체로서는 의미 없는 자연적인 시간에 일 년을 만들고 다시 달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죽은 사람을 매장하고 달력 만드는 것은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소멸해가는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달력은 어디서 사는 것인가? 적어도 마트에 달력이 없다는 것은 자거라투스트라도 알고 있다. 매주 한 두 번은 마트에 들리면서 어디에 어느 물품이 있다는 것을 꿰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 달력은 문방구점에서 파는 것일까? 그것도 신년카드처럼 책방에서 파는 것인가? 아니면 시장에 달력을 파는 가게가 따로 있지 않을까? 언젠가 명동 거리에 벽에 펼쳐진 좌판대에서 달력을 본 듯도 하다. 도대체 달력은 범주적으로 어디에 분류되는가? 언젠가 바늘을 구하기 위해서 고민했던 분류의 문제가 희망찬 흑룡의 해, 새해 벽두에 자거라투스트라의 두통을 발생시키고 있다.

구보씨 뱀파이어를 만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문성원(부산대)

구보씨는 비록 내세울 것 없는 철학자지만 그 나름의 줏대가 있어 세간의 유행이나 풍조 따위엔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며 지낸다. 생각 없이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건 정말 철학자가 할 짓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다고 요즘 말하는 트렌드에 하릴없이 뒤지기만 할 순 없다. 세태에 휩쓸리지는 않아도 그 물결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무감해선 곤란한 까닭이다. 그래서 구보씨에게는 오늘날처럼 트렌드를 말하는 것이 트렌드가 되어버린 상황이 오히려 궁구의 대상이다.

다소 뜬금없이 들릴지 모르지만, 구보씨가 뱀파이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이런 사태와 무관하지 않다. 하긴 요샌 뱀파이어도 트렌드의 하나가 되어버렸다. 혹자는 오늘날 뱀파이어 영화나 뱀파이어 드라마가 ‘뜨는’ 것과 세계적인 불황 사이에 연관성을 찾기도 한다. 불안한 시대일수록 그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초인간적인 영생의 힘을 갖춘 존재가 각광을 받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의 뱀파이어는 <트와일라잇>에서처럼 꽃미남으로도 등장하지 않는가.

하지만 철학자 구보씨가 이렇게 피상적인 연관만으로 뱀파이어에 눈을 돌릴 리는 없다. 구보씨가 뱀파이어에 주목한 건 꽃미남 뱀파이어나 검사 뱀파이어가 등장하기 전부터다. 그리고 그렇게 된 사정에는 이십세기 후반의 한 유명한 철학자가 관련되어 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질 들뢰즈가 그 사람이다. 그렇다면 들뢰즈와 뱀파이어, 이 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혹 구보씨는 들뢰즈가 사실은 뱀파이어였다는 파격적이고 선정적인 주장을 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들뢰즈의 인상이 뱀파이어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점을 새삼스레 지적하려는 것인가?

 

그럴 리 없다. 철학자 구보씨는 그렇게 황당무계한 주장을 할 사람도, 또 겉보기의 유사성에 그렇게 쉽게 현혹될 사람도 아니다. 비록 얄팍함과 꼼수가 판을 치는 세상에 살아도 구보씨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 구보씨가 들뢰즈와 뱀파이어를 관련짓는 것은 들뢰즈가 자신의 저서(정확히 말하면 가타리와 함께 쓴 저작들)에서 뱀파이어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지, 세간에 횡행하는 거짓말과 속임수에 의해서가 아니다. 들뢰즈는 뱀파이어를 철학적 논의에 끼워 넣은 보기 드문 철학자고, 구보씨는 그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후대(後代)의 성실한 철학자일 뿐이다.

그런데 무릇 성실함은 혼자 힘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뱀파이어와 들뢰즈가 구보씨와 엮이는 데는 페이스북으로 친구의 친구가 다시 친구가 되듯 매개 역할을 한 이들이 있었다. 사실 구보씨는 원래 뱀파이어나 들뢰즈에 별 관심이 없었고, 그닥 호의적이지도 않았다. 몇 년 전, K가 소주잔을 기울이며 카프카와 뱀파이어와 들뢰즈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걸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니까 뱀파이어는 카프카와 들뢰즈와 K를 거치는 인연을 통해(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땅 속의 감자 줄기와 같은 리좀적 연결을 통해) 구보씨에게 이른 셈이다.

“카프카는 스물아홉에 펠리체를 처음 만났어. 친구 막스 브로트의 집에서 말이지.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 거야. 거의 매일 같이. 그리고 매번 답장을 요구했지. 당시 편지는 카프카가 살아나가는 힘이었어.”

“대단하군. 굉장한 여성이었나 보지?”

“글쎄… 사람은 보기에 따라선 누구나 다 굉장하지 않아? 펠리체 바우어의 사진이 남아 있긴 한데, 그 사진을 보면 미인이라고 하긴 어려워. 들뢰즈는 카프카가 오히려 펠리체의 근육질 팔과 육식동물 같은 큰 이빨에 매혹되었다고 하지. 카프카는 채식주의자였는데 말이야.”

 

“들뢰즈라면, 철학자 들뢰즈 말이야?”

“맞아, 그 들뢰즈가 가타리와 함께 <카프카>라는 책을 썼잖아. 거기 나오는 얘기야.”

“어, 그래? 나도 그 책은 대충 봤는데, 그런 건 기억이 안 나.”

“니네 철학자들은 워낙 감성적인 디테일에 약하잖아. 하지만 나 같은 문학쟁이들한테는 그런 게 먼저 다가온다구. 매력이나 감흥은 논리 이전이고 또 논리 이상의 것이거든. 그런데 들뢰즈에게는 그런 게 있어. 하긴 들뢰즈는 이런 디테일을 흡혈이라는 개념과 연결시키지만 말이야.”

“흡혈이라구? 흡혈이 개념이야?”

K는 구보씨를 잠시 쳐다보다, 반쯤 남은 소주잔을 마저 들이켰다.

“때로는 음주도 개념인 거야. 그게 현실에 대한 어떤 관계를 얽어매준다면 말이야. 술 마신다는 건 현실을 대하고 현실과 접촉하는 한 방식이잖아. 그런 점에서 음주는 오히려 살아 있는 개념인 거지.”

“그래, 들뢰즈도 술에 대해 얘기하긴 하지. 정확히 말하면, 알콜 중독에 대해서… 근데, 그건 좋은 거라고 하긴 어려워… 그건 시간을 멈춰 자신을 딱딱한 껍질 안에 가두는 거고, 기껏 그 안에서 안온한 추억의 반복에 빠지는 것이거든. 들뢰즈 자신이 알콜 중독자였던 적이 있으니까 이런 상태를 그럴듯하게 표현하기도 했던 거지. 뭐, 그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몰라…하지만 흡혈이라…그게 어떻게 개념이 되지?”

“아니, 알콜 중독 말고 그냥 술 마시는 거 말야. 알콜 중독이야 일종의 도피지만, 일반적으로 술 마시는 건 그런 것만은 아니거든. 대개 우린 혼자 마시지 않고 이렇게 같이 마시잖아. 그건 세상을 담고 넘어서는 방편일 수 있어. 현실을 견디고 극복할 에너지를 주니까 말이야. 흡혈은 조금 더 처절하지. 에너지를 얻기 위한 공포가 더 커. 술 마시는 데도 두려움이 있잖아. 우리는 사실 크고 작은 두려움 때문에 술을 마신다구. 술과 술자리가 주는 쾌감은 확실히 두려움을 상쇄하는 효과가 있지.

그러나 흡혈은 극단적인 두려움을, 공포를 수반해. 사람들은 드라큘라나 뱀파이어를 공포스럽다고 여기지만, 실은 그런 존재가 세상에 있어서 공포스러워지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세상에 대해 공포심을 갖기 때문에 그런 존재가 있게 되는 거야. 그렇잖아? 이런 건 너희들이 말하는 이데올로기적 체험의 전형적인 효과거든. 아무튼 그래서 뱀파이어는 공포와 한 몸이야. 그들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빛을, 십자가를, 마늘을 두려워 해. 현재의 세상을 지배하는 질서를, 제도를, 처방을 두려워하는 거야. 그리고 그들은 항상 비루먹었지. 살찐 뱀파이어를 본 적이 있어? 살찐다는 건 흡혈의 개념에 어긋나는 거야. 흡혈은 공포의 산물이니까 말이야.”

“뭐, 정말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흥미로운 면이 없진 않군. 문학적인 개념도 개념이니까 말이야. 게다가 들뢰즈가 이미지를 활용하는 데 능한 철학자라는 점도 쉽게 인정할 수 있어. 그런데 카프카는 뭘 두려워했다는 거야?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를 오이디푸스적으로 해석하는 데 반대하잖아. 하지만 실제로 카프카의 아버지가 억압적이었던 건 사실 아냐?”

“그건 그렇지. 하지만 펠리체와의 관계에서 카프카가 두려워 한 건 무엇보다 결혼이었을 거야. 그리고 어쩌면 육욕의 관계고. 카프카는 펠리체에게 천 통에 가까운 편지를 썼어. 그러나 정작 만난 건 몇 번 뿐이라구. 그리고 두 번이나 약혼을 했다가 파혼을 하거든. 나는 들뢰즈가 카프카의 편지를 흡혈과 관련지은 건 탁월하다고 생각해. 육식 동물에 대한 채식주의자의 흡혈. 이건 세상에 대한 카프카의 관계를 잘 형상화하고 있거든. 카프카는 세상의 살을 뜯어 삼킬 수가 없었던 거야. 그러기에는 이 현실이 너무 탐욕적이고 맹목적이며 공포스러웠던 거지. 그래서 그는 항상 출구를 꿈꾸면서 외설적 세상의 피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흡혈을 하는 방식을 택했던 셈이지.

너 혹시 우리가 어렸을 때 추송웅이 공연했던 <빨간 피터의 고백>이라는 연극을 기억해? 최근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에 나온 추상미가 그 딸이라구. 뭐, 몰라? 하여튼 너는 디테일에 문제가 있어. 어쨌든 그 <빨간 피터의 고백>의 원작이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잖아. 거기서 카프카는 원숭이의 입을 빌어 말하지. 그 대산 알지? ‘저는 자유를 원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출구를 찾았을 뿐입니다.’ 카프카가 흡혈의 에너지로 연명하려 한 건 자기의 존재를 고수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들뢰즈 식으로 얘기하면 탈주하기 위해서라구.”
<채식주의자 뱀파이어>(레메디오스 바로) 물론 구보씨가 그 때 안주삼아 들었던 K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다. 구보씨는 나름 줏대 있는 인간이어서, 비록 술에는 취했어도 다른 사람의 견해에까지 쉽게 취하는 인물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맨 정신으로는 감내하기 어려운 허다한 꼼수들이 판치는 세상에 산다고 해도, 구보씨는 절대 그렇게 녹록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K는 석 달이 멀다 하고 주종(酒種)과 화제와 애인을 바꾸는, 줏대 없는, 또는 줏대가 여럿인 친구가 아니던가.

그래도 그 이후로 구보씨가 뱀파이어에 관련된 사안을 그냥 흘려보지 않게 된 것은 사실이다. 예전 같으면 관심도 두지 않았을 뱀파이어 영화도 기회가 닿으면 챙겨 보고, 자기도 모르게 흡혈이라는 틀로 세상사를 해석해 보다 혼자 멋쩍어 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전에 보지 못했던 ‘디테일’이 눈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무엇보다, 주변에 뱀파이어를 닮은 인간들이 의외로 많다는 점에 구보씨는 가끔 놀란다. 그들은 탐욕스런 현실에 대한 공포와 선망을 모순적으로 품고, 두려움이 배인 웃음을 때로 수줍게 흘리지만, 그 웃음 사이로 깊게 감춰진 갈구(渴求)의 송곳니를 일순 번뜩이기도 하는 것이다.

게다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뱀파이어적 현상이 증식하는 방식이다. 사실 이것이 뱀파이어와 트렌드 사이의 중요한 관계다. 뱀파이어는 자연적이거나 계통적으로 번식하는 것이 아니라 전염에 의해 늘어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점을 <천 개의 고원>이라는 책에서도 지적하고 있다.) 뱀파이어는 부모가 뱀파이어라서 뱀파이어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수직적으로 긍정하지 못하는 까닭에 자식을 낳지 않는다. 그러나 스스로를 절멸시킬 수 없는 흡혈의 욕망은 수평적으로 번져나간다. 뱀파이어는 생식세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신경세포의 혈류를 타고 확산된다. 이들의 번식은 신경을 급속히 외장(外藏)하고 있는 오늘날의 문명을 배양액으로 삼는다.

고전적으로는 뱀파이어에게 물리면 뱀파이어가 된다. 오늘날 뱀파이어의 이빨은 기술적으로 세련되어서, 사람들의 눈망울이 공포와 욕망으로 번뜩이는 순간 미세한 빨대처럼 그들의 목덜미에 파고든다. 인터넷은 그 좋은 매개체다. 카프카가 오늘에 살고 있다면, 그는 자못 심각한 <나꼼수>와 같은 이-메일을 매일 밤 수많은 펠리체의 목덜미에 박아 넣고 있을지 모른다. K, 그도 위험하다. 그는 능히 뱀파이어의 그런 방식에 전염됐음직한 인물이다. 그러나 구보씨는 다르다. 구보씨는 나름 줏대가 있는 철학자라서, 결코 그런 일에 휩쓸릴 사람이 아닌 것이다. 알겠지만,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이 절대 아니다.

자거라투스트라 벌교에 가다(3) [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1.

마침내 다산초당 입구에 이르렀다. 자거라투스트라는 90년대 초에 학생들과 함께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돈이 없어 감히 관광버스를 빌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시골버스를 타고 포장도 안 된 시골길을 툴툴거리며 돌아다녔다. 학생들은 ‘철학기행’이라는 티셔츠를 만들어 입고 등 뒤에다가는 “실학사상을 찾아서”라는 구호를 적었다. 그때 버스를 기다리던 동네 사람들이 참 신기하다는 듯이 아니면 먹고 사는 게 빠듯한데 저런 놈들도 다 있네 하는 식으로 바라보던 것이 기억난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잠시 그때의 추억에 빠졌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서 학생들과 막걸리를 먹던 생각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때 학생들은 정말 노래를 많이 불렀다. 어디에서나, 어느 틈에서나 시간만 나면 학생들은 노래를 불렀다. 무슨 바위 덩어리나 돌멩이처럼 살자 라는 노래 말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기억이 난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지금도 의문이다. 왜 그때 학생들은 그렇게 노래를 불렀을까? 2000년대 들어 어느 덧 운동권 학생들이라는 개념이 사라질 무렵부터 이상하게도 학생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물론 그들도 노래를 불렀지만 항상 노래방에서 다른 사람 앞에 나서서 그러나 혼자서 불렀을 뿐이지 길거리에서 합창하는 것을 본 적은 없다.

자거라투스트라는 다산초당 입구에 내려 산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다산초당이 나왔다고 기억했다. 그래서 선배님에게 점심 먹기 전에 먼저 잠시 둘러보고 가자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다산초당 입구에서 걸어 올라가는데 아무리 올라가도 다산초당은 보이지 않는다. 다산초당은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 산을 4분의 3정도 올라가서야 나타났다. 그때는 금방 올라갔는데…그게 벌써 이십년 전 자거라투스트라가 아직 젊었을 때의 일이니 착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씁쓸해 한다.

다산은 왜 이곳에 초당을 지었을까? 자거라투스트라는 그런 의문을 풀어보려고 다산초당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본다. 유배되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강진읍 내에 있었다 하니까 굳이 이 외진 구석, 이름 없는 산 중턱까지 와야 했을 필요는 없었을 텐데? 물론 산에서 흐르는 물이 찻물로 좋기도 하겠지만 어디 좋은 물이 여기뿐이었을까? 다산초당을 오른 쪽으로 조금 돌아가면, 다산이 아마도 강진만의 푸른 들판과 은빛 갯벌을 동시에 바라보았을 장소가 있어 지금 거기에 누각을 하나 만들어 놓았으니 다산은 강진만을 보기 위해 여기 머물렀을까? 아니면 다산에게 다도를 가르쳤다는 초의선사가 다산초당이 있는 산 오른 쪽 중턱에 있는 작은 절(백련사)의 주지로 잠시 있었다니 서로 교유하기 위해 여기 머물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산의 부인의 친정이 해남(해남윤씨)에 있었으니 그쪽 집안에서 소유하고 있는 땅이 거기 있어서 그리 갔지 않았을까?

자거라투스트라가 그런 물음을 선배님에게 묻자, 선배님의 대답은 간단하다. 그거야 문화유산을 답사하는 유흥준 교수가 고민할 문제라는 것이다. 내일 할 수 있는 일을 오늘 고민하지 말라 했는데, 남이 고민해 줄 문제를 우리 철학자가 굳이 고민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자거라투스트라는 언젠가 가까이 지내던 어느 교수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분의 주장은 굳이 스스로 공부할 필요고,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과 술친구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가 알면 나도 아는 것이니 말이다.

자거라투스트라는 ‘국민관광지’ 다산 초당을 휑하니 둘러보고 시끄러움을 피해 다산이 강진만을 바라보았던 곳에 가서 강진만을 바라본다. 그리고 유배라는 형벌이 제법 괜찮은 벌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오늘에 되살리면 어떨까? 그래서 주로 학자나 예술가들에게 특별 형으로 부과하면, 좋지 않을까? 물론 국가가 밥과 잠자리는 제공해야 하겠지. 그러면 전국의 많은 시간강사들이 유배 형을 받기 위해 이를 악물고 시대의 금기에 도전할 것이니 학문과 예술의 발전에 얼마나 기여하겠는가? 은빛으로 빛나는 강진만의 갯벌을 바라보다가 자거라투스트라는 잠시 몽롱한 오수에 빠졌다.
다산 초당에서 본 강진만의 모습, 비가 오려 흐려 은빛으로 빛나는 강진만의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2

다산 초당을 둘러본지 두 시간째 어느새 오후 세시나 되었다. 이제 점심 겸 저녁을 먹을 차례인데, 기대해왔던 꼬막은 어디서 파는지, 바닷가를 차로 실실 돌아도 눈에 띠지 않았다. 그럼 강진 시내에 들어가면 있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무작정 강진시내로 들어갔다. 그런데 갯벌이 있다고 다 꼬막이 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강진 시내에서도 꼬막집을 발견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꽃게탕을 한다는 집에 들어 배를 채웠다.

그런데 강진 시내를 돌아다니는 중 시인 김영랑이 살았던 집이라는 표시가 있어 밥을 먹고 바로 찾아가 보기로 했다. 여행을 하다보면 새로운 발견을 한다는데, 김영랑이 여기 살았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영랑의 집을 지나칠 수는 없지 않는가?

찾아가보니 영랑의 집도 국민관광지가 된 것이 틀림없다. 다 똑같이 만들어진 한옥이 이제 너무 식상하다. 국민관광지의 한 가지 특징이 있는 것 같다. 한옥에 두 종류가 있는데, 초가3간이 있고 기와3간이 있다. 약간 엘리트적인 느낌이 드는 인물은 기와 3칸으로 반면 약간 비엘리트적인 느낌이 드는 인물은 초가 3간이 배정된다. 중요도에 따라서 3칸 4칸 5간정도 크기가 조절된다. 나철 선생은 초가3간이다. 반면 영랑은 초가 5간이다. 실제 시인이었던 김영랑의 집이 5간이나 되는 너른 집(현대식으로는 약 40평정도)이었을까 의심스럽다. 이것을 통해 국민들이 역사적 인물을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영랑의 집구석에 감나무가 있고 그 밑에는 장독대가 있었다. 실제 영랑의 시대부터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조경임에는 틀림없다. 아직 가을이 아니라 유감스럽게 장독대에 떨어지는 단풍잎을 볼 수 없었다. 세상에는 친화성이 존재하는 것 같다. 화학적 친화성과 같이 이미지의 친화성도 있지 않을까? 얼음에는 팥을 쳐야지 콩가루를 칠 수야 없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감나무 잎이 단풍이 된다면, 그게 마루에 떨어질 수도 없고, 부엌에 떨어질 수도 없으니, 오직 장독대 외에는 다른 곳이 없지 않을까? 이런 장독대의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누이라는 이미지로 이어지지 않을까? 영랑이 “오매 단풍들겠네” 라고 탄식할 때, 아마 그의 누이가 그 장독대를 닦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기에 저 산의 골짜기에서 시작한 단풍의 붉은 빛(골불)이 감나무를 거쳐서 마침내 장독대에서 일하던 누이의 발그랗게 상기된 얼굴에까지 번졌을 것이다.
모란과 감나무, 장독대가 어우러진 영랑의 생가의 마당

영랑의 집 앞에 비석처럼 생긴 바위에 그의 대표적인 시 ‘모란이 피기까지’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마당에는 모란이 심어져 있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이 시를 민족주의적인 시로 해석하는 것을 기억했다. 차라리 이미지의 아름다움을 설명했더라면 더 아름다웠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장미과에 속하는 모든 꽃들은 꽃이 떨어질 때 마치 목이 벤 듯 통째로 떨어진다는 것을 말이다. 장미도 무궁화도 그리고 동백도 꽃이 떨어질 때는 그처럼 목이 벤 듯이 떨어져 후드득 떨어진 꽃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처참하여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하다. 그 점을 기억하면 모란이 피기까지에서 영랑이 이렇게 읊었던 이미지가 눈에 떠오를 것이다.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인터넷으로 확인해 본 해학 이기의 생가, 국민관광양식 초가 4간이다. 나철 선생 생가-초가 3칸-보다 한 등급 높다.

3.

식사를 하고, 영랑의 집까지 구경하니 벌써 다섯 시이다. 이제는 더 늦출 수 없다. 서울까지 가려면 여기서 대 여섯 시간은 가야 하니까 말이다. 드디어 자거라투스트라는 차를 돌려 서울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차 안에서 자거라투스트라는 선배님에게 물었다. 오늘 아침 해학 이기의 절명시를 선배님이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속도로 운전은 단조롭고 지루하기 때문에 감기는 눈을 깨워야 하기 때문이다.

형, 해학 이기의 고향은 어디에요.

글쎄 전라도 김제 어디라고 듣기는 했는데, 정확히는 몰라.

그러면 가는 길인데, 김제에 들렀다 갈까요? 근데 김제 어딘지 알아요?

몰라. 또 거기 가면 알 수 있지 않을까? 근데 시간이 되나?

 

글쎄요. 빨리 가면 해 지기 전에 김제까지 가지 않을까요? 형, 나철 선생과 해학 이기는 서로 친했어요?

매천 황현이나 홍암 나철은 모두 왕석보의 제자이고 낮은 벼슬이나마 중앙의 무대에 출사를 했으니 서로 가까웠을 것으로 짐작돼. 그런데 해학 이기는 김제에서 공부하다가 28세 되는 때 과거 시험을 포기하지. 게다가 상처도 하고 부친도 돌아가시고, 집안에 먹을 것도 없어 전국을 유리걸식하거든. 물론 선비니까 이 집 저 집 사랑방에 떠돌았겠지. 이때 그는 기왕의 유교와 선비라는 제도적인 틀을 벗어던지게 되지.

그래서요?

그때 대구에도 갔다가 천주교 신부하고 논쟁하면서 ?천주6변?이라는 글을 작성하기도 했지. 그때가 44세 즉 1891년이야. 그런 가운데 나름대로 개혁사상을 정립하는데, 1892년 45세 때 순창에 머무르면서 ?질제고?라는 책을 쓰지. 질제란 그의 호야. 그 다음 해 46세 1893년에 황현을 만나. 황현이 그를 구례로 초청한 거지. 아마 그때 왕석보의 제자들 틈에 끼어 있었으니, 나철도 만나지 않았을까 짐작되는데, 그때만 해도 세상에 절망해서 은둔해 버릴 요량으로 호를 남악거사라고 바꾸어 버렸어. 남악이란 곧 지리산이 아닐까 해.

형, 그의 개혁사상의 핵심은 무엇이에요?

그게 참 재미있어. 이어지는 해 1894년에 알다시피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잖아. 이기는 이 혁명 앞에서 은둔해 버리려던 결심을 깨고 거꾸로 동학농민혁명에 직접 가담해서 처음 단순히 부패청산을 목표로 한 이 혁명을 그야말로 진정한 제도적인 혁명으로 바꾸기를 기도했지. 그래서 전주에 입성한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을 만나러 전주에 간 거야. 그래서 자기의 개혁사상을 토로했지. 그 핵심은 바로 토지개혁이야. 토지를 가난한 농민에게 나누어주자는 주장이야. 그 방식은 공전제라고 하는데, 요새 말로 한다면 유상몰수 유상분배라는 주장이지.

와 그때 그런 주장을 했단 말이에요? 대단한데…

그의 토지개혁론은 그가 실학 사상가 정약용의 여전제나 유형원의 한전론 등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자기 나름대로 제시한 이론이지. 실제로 그 후 60년 뒤에 이승만 시대 토지개혁이 유상몰수 유상분배였으니, 그가 얼마나 시대를 앞섰던 가를 짐작하지. 그는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개념을 몰랐지만 토지개혁이 부르주아 혁명의 핵심이라면 그가 바로 부르주아 혁명가이지. 그는 동학농민혁명의 힘으로 그 부르주아 혁명을 수행하려 했던 거지.

어마어마한데요. 소위 갑신정변도 꿈꾸지 못했던 혁명이잖아요.

그렇지. 그래서 해학 이기를 다시 보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그런데 전봉준이 만약 또 다른 동학농민군의 지도자 김개남이 동의한다면 자기는 이기의 주장에 동의한다고 했던 모양이야. 그래서 김개남을 만나러 남원에 가는데, 이상하게도 더욱 혁명적이라고 알려진 김개남이 이기를 만나주지도 않고 체포하려 하지. 그래서 그는 간신히 탈출해서 도망하고 동학농민혁명 운동에 대해 실망하게 되었어.

김개남이 반대한 이유는 무엇이에요?

그건 몰라. 연구를 좀 더 해야 하는데… 하여튼 그러고 나서 동학혁명 실패 후 일본군의 강압에 의한 정부 개혁에서 무언가 기대하고 자신의 주장을 펼쳐보려 했지만, 한계를 깨닫고 3년 후 1898년 구례로 다시 내려와. 이때 그는 다시 황현 등과 어울리지. 1902년에는 ?급무8제의?라는 글을 써서 요긴한 개혁의 핵심을 고종에 건의하지만 동시에 시를 통해 고종의 무능과 대신의 비행을 비판했다가 수난을 당하지. 이때가 말하자면 재야 비판가로서의 활동이지.

그래서요?

그는 개혁운동에 점차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거든. 1904년2월 일제가 약간의 차관을 대가로 해서 항무지 개간권을 달라고 했어. 그때 황무지가 국토의 4분의 1정도니 엄청난 국토가 일제에 넘겨지는 거지. 이때 그가 나철과 더불어 보안회를 조직해서 반대하면서 일대 군중운동을 일으켰어. 그러자 정부는 이 보안회를 강제해산시키기도 했는데 어떻든 군중운동의 힘으로 일제의 간계를 막아냈어. 이 보안회가 나중에 대한자강회, 그리고 신민회의 핵심세력이 되고 독립운동의 중추가 되니까 그의 역할이 짐작되지?

사상적으로 그는 입각점이 어디에 있어요? 여전히 유학자였나요? 실학 아니면 양명학?

그는 유학에서 잠시 묵자 쪽을 기웃거렸다가, 바로 양계초의 신민사상 쪽으로 넘어간 것 같아. 그 점에서 당시 개혁주의자들의 대세를 따른 셈이지.

 

4.

형 그러면 대종교와는 어떤 관계가 있어요?

그것도 아주 재미있는데, 이 보안회 이후부터 그는 나철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활동하기 시작해. 1905년 을사조약 전에는 일본에 건너가 언론을 통해 비판운동을 하기도 하지만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1907년에는 을사오적을 처단하는 조직 즉 자신회를 만들었어. 하지만 거사가 실패해서 주모자로서 그는 7년 형을 받았지만 고종이 감동받았던지 7개월 만에 풀려났어.

그런데요.

1908년 그는 ?일부벽파론?을 발표했지. 도끼를 들고 제도개혁을 주장한 거야. 그 도끼는 물론 내가 잘못이면 내 목을 도끼로 베라는 그런 의미이지.

정말 단호하군요.

그래 단호한 개혁사상가로서 그는 나철 선생 이상이야. 그러다가 1909년 나철과 더불어 민족종교인 단군교를 창립하지. 그런데 1910년 나철 선생이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자 그는 단학회를 발기하고 그 경전이 되는 ?진교 태백경?을 완성해. 그러고 나서 1909년 7월 1일 10 여 일간의 폐문절식으로 자진하고 말았다 해.

그게 좀 이상하네요. 왜 태백경을 지은 거죠?

글쎄 그건 좀 이상한데, 사상적 차이 때문이 아닐까 하거든. 최근 『환단고기』라는 책이 있잖아. 그건 고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책에 가까운 것인데, 환인, 환웅, 단군의 시대가 역사적으로 실재했다는 주장이지. 그 책이 최근에 발간되는 데는 복잡한 연원이 있는데 결국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 책의 주요 내용은 해학 이기가 지었던 것으로 보여. 그렇게 본다면 대종교는 단군을 신앙화하는데 목적이 있었다면 이기는 단군을 역사적 영웅으로 만들려 했던 것이 아닐까 해. 둘 다 민족애를 고취시키려는 시도였지만 종교와 역사라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지. 사상가 해학 이기로서는 종교에 부담을 느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데, 확실한 것은 아니야.

이렇게 선배님의 강의를 듣는 동안 어둠은 깊어갔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 도저히 김제에서 해학 이기 선생의 생가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바로 서울로 돌아오기로 했다. 서울에 도착하니 10시, 피곤이 온 몸을 급습한다. 종교와 역사, 머릿속에는 이런 개념들이 마치 헬리콥터가 돌아가는 소리처럼 소리치면서 맴돈다.

혼란의 시간 속에서 [치유시학]

?

김성리 (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보이지 않는 벽을 느끼다

무엇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인식함을 의미한다. 현실의 시간은 순차적으로 지나가지만, 과거의 시간은 오히려 거꾸로 돌아온다. 되돌아 온 과거의 시간과 기억은 현재의 나를 성찰하게 하고, 그 성찰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행복했던 시간과 기억이 현재의 나에게 슬픔을 주더라도 비극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할머니는 자신이 결코 과거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과거를 회피하거나 부정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를 정기적으로 만나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할머니의 이러한 태도는 나에게 혼란을 주었다. 너무나 담담하게 전하는 과거의 이야기들에 어느 순간 의혹을 가지게 된 것이다.

엄청 난 고통의 시간을 지나왔고, 현재도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인 사람이 자신의 과거를 진실 되게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요시코와 마쓰시타와의 이야기도 사춘기 때의 상상이나 드라마를 보면서 지어낸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왜 숙자와 관련된 이야기는 하지 않는 걸까?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차마 내색하지 못하고 갈등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할머니로부터 처음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김선생이가? 나가 마이 아푸다. 이번 주는 오지 마래이.” 전화선을 통해 힘없는 할머니의 소리가 들려 왔다. 뭐라도 물어볼 틈도 없이 전화는 끊겼다. 나는 급하게 할머니 집을 찾아 갔다. 마을은 여전히 고요했고, 이제 낯이 익었는지 동네 개들은 짖는 대신 꼬리를 흔들었다.

마을 가장 안쪽, 마을 입구에서 보면 지붕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낮게 자리 잡은 할머니의 집은 마을보다 더 고요했다. 대문도 없는 할머니의 집 마당에 들어서자 일찍 핀 코스모스 두 송이가 눈에 띄었다. 주인이 없는 방은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잘 정리된 방을 생경하게 보다가 길을 사이에 두고 있는 앞집 아주머니께 갔다.

“큰일 날 뻔 했제. 어데로 간다고 혼자 휠체어를 탔을꼬. 중심을 못 잡아서 휠체어하고 같이 요 밑으로 굴렀다 아이가. 이장이 병원 차 불러서 싣고 갔다. 그래도 김선생 헛걸음 한다고 전화하대. 참 두 사람 얄궂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온 몸에 힘이 빠져서 겨우 걸음을 떼어 할머니 방 앞에 있는 작은 툇마루에 앉으니, 눈물이 핑 돌았다.

 

어둠이 내려앉는 마당에서

천천히 걸어도 마을 한 바퀴를 도는 데 30분이 걸리지 않는다. 그 마을 내에서 이동할 때에도 할머니는 전동 휠체어를 타야 한다. 할머니의 뭉툭한 발로는 중심을 잡고 걸을 수 없다. 할머니의 발은 언제나 붕대가 감겨 있었다. 방안에서도 할머니는 서지 않는다. 엉덩이로 움직인다.

마을 입구에 있는 교회에 갈 때나, 병원에 갈 때를 제외하면 거의 방안에서 생활한다. 교회에 갈 때에도 전동 휠체어를 타야 한다. 그래도 교회 안으로 들어서면 잠시라도 서서 움직여야 할 텐데 그때 미끄러지면 어쩌나 싶어서 발바닥에 미끄럼 방지 돌기가 있는 꽃무늬 양말을 몇 켤레 사 드린 적이 있다.

내 손으로 신겨 드리고 싶었지만, 할머니는 한사코 싫다고 했다. 방바닥 한 쪽에 그때 사드렸던 양말 중의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새 양말을 신고 어디로 갈려고 했던 것일까? 지난 번에 왔을 때, “조금씩 운동을 하는 게 어떨까요?”했던 내 말이 너무 방정맞았던 것일까? 그 손으로 양말을 제대로 신기나 했을까?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이 나는 그저 그렇게 앉아 있었다.

마당은 어둑해지고, 나는 조금씩 밀려오는 알 수 없는 불안에 휩싸였다. 네 살 때였던가.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어머니는 골목 입구에 있던 어떤 집에 들어가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 사이 호기심으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골목길은 신기했다.

그때 어느 집에서 개가 짖었고, 나는 겁에 질려 소리 지르며 뛰다가 엎어졌다. 금방이라도 큰 개가 나를 덮칠 것 같은 공포에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때 한 아이가 뛰어와서 돌멩이를 던져 개를 쫓아내고 나를 일으켜 주었다. 그리고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무릎에 난 피를 닦아 주고 있을 때, 그 애의 어머니가 부엌에서 나오더니 나를 알아보았다.

그 애는 내 손을 꼭 잡고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돌아서 우리 집 앞까지 나를 데려다 주었다. 집에서는 이미 난리가 나 있었고, 대문 앞에 퍼질러 앉아 있던 할머니 손에 끌려 그 애는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양 손에 두 꼬마 아이의 손을 잡고 그 집에 가서 고마움을 전했고, 그 애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같은 나이였지만, 그 애는 나에게 언제나 든든한 보호막이었다. 그 애와 함께 있으면 두렵지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내가 전학을 가기 전까지 우리는 매일 아침에 만나서 저녁에 헤어졌다. 그리고 정확히 14년 후, 남포동 골목길에서 “리야”를 큰 소리로 반복해서 부르고 있는 그 애를 만났다.

나를 부둥켜안고 팔짝거리는 그 애와 달리 나는 뭔가 어색했다. 그 날, 그 옛날처럼 그 애의 손에 이끌려 그 애의 집으로 갔을 때, 온 식구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저녁을 먹고 우리 둘이 만났을 때의 이야기가 꽃을 피웠지만, 정작 나는 즐겁지도 않았고 유쾌하지도 않았다. 또 반갑지도 않았다.

다만, 부끄러웠다. 같은 나이의 친구에게 보호를 받아야했던 나약했던 유년의 그 기억이 부끄러웠다. 바보같이 다 아는 동네의 길도 모르고, 나보다 훨씬 작은 개에게 놀라 겁쟁이처럼 엎어져서 일어설 줄도 모른 채 울기만 했던 내 유년의 시간을 누군가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웠고, 현재의 내 모습을 신기해하는 그 분들이 좋게 다가오지 않았다.

할머니의 마당에 내려앉는 어둠을 보면서, 왜 할머니가 숙자와 연관된 기억을 말하려 하지 않는지, 요시코에만 머물러 있으려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기억이 있다. 내가 어린 시절의 단짝과 함께 했던 시간이 부끄러워 감추고 싶듯이 할머니에게는 숙자가 감추고 싶은 기억인 것이다.

마주 보고 앉아서 함께 숙자의 시간으로 돌아가기에는 할머니와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기억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할머니와 내가 나란히 앉아 함께 바라볼 수 없는 강이 있다는 것을 나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요시코와 마쓰시타의 이야기만이 할머니와 나 사이를 이어주는 징검다리인 게다.

 

할머니를 다시 보다

할머니가 처음 구술한 시가 생각났다.

 

고요한 이 밤

풀에 벌레들

아름다운 멜로디로

내 심장을 울리네.

 

현해탄의 사랑이여

옛 추억의 첫사랑

– 내 전부를 바친 임이여

그리워 그리워서

하염없는 눈물에

내 옷깃이 젖었네.

 

소리쳐 통곡할 때

초승달도 울고 있네.

 

이 밤도 뒹구르며

몸부림칠 때

눈물이 강이 되어

잠을 이루지 못하네.

<여름밤 > 전문

 

마쓰시타는 할머니의 ‘전부를 바친 임’이다. 평생을 홀로 그리워하던 사람이고, 그 그리움 때문에 죄스러움을 떨칠 수 없었다. 고요한 밤이 되면 풀벌레 소리에도 생각나고, 초승달만 보아도 보고 싶어서 눈물 흐르게 하는 사람이 마쓰시타이다. 그에 대한 그리움은 마쓰시타를 만난 19살부터 80세를 넘기는 현재까지 할머니의 영혼을 기억 속에 가두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부림 치’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할머니에게 왜 ‘숙자는 말하지 않는가’라는 의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할머니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 곳곳에서 기쁨보다 슬픔을 먼저 느끼며 살고 있다. 나는 할머니의 슬픔을 나의 관점에서 보고자 했던 것이다.

다시 할머니의 방문을 열어 보았다. 여러 번 본 방인데도 다르게 느껴졌다. 낡고 오래된 가구가 지키고 있는 방은 정갈했다. 새삼스럽게 할머니가 자기 주변을 매우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엌에도 처음으로 들어갔다. 역시 깔끔하고 허투르게 놓인 그릇 하나 없었다. 보일러실 겸 세탁실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사용하는 사람 없이 오랫동안 그렇게 있었던 것처럼.

하다못해 벗어 던져 놓은 옷가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내가 사 드린 양말만 한 구석에 없는 듯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는 옷차림도 유난히 정갈했다. 여름에도 그 작은 방에서는 시골 방에서 흔히 나는 냄새조차 없었다. 그것들이 할머니가 품위를 지키고 자존심을 잃지 않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나의 어리석음이여!

지금까지 할머니는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으나, 나는 텅 빈 공간에서 할머니가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할머니가 다쳤다는 말에 예상하지 못했던 나의 반응들, 온 몸으로 느꼈던 허탈함과 정신적인 공허감은 지금껏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할머니와의 이별 예감을 몸으로 느낀 것이다.

할머니는 이제 자신의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고, 이별의 시간을 위하여 주변을 정리하는 것일 게다. 풀벌레의 울음을 아름다운 멜로디라고 말하면서도, 그 아름다운 멜로디에서 심장을 울리는 슬픔을 느끼는 할머니의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마쓰시타가 옛 ‘추억의 첫사랑’임을 알면서 시를 통해 현재의 시간 속에 나타내는 것도 정리의 하나일 것이다.

인간은 과거 시간 속의 자신과 현재의 자기를 비교할 수 있다. 숙자와 현재의 할머니를 비교할 때 숙자는 행복과 슬픔의 경계선에 있는 인물이다. 한센 병이 찾아 온 이후 어머니와 잠시 함께 했던 시간 외의 그 많은 시간을 할머니는 홀로 현실을 버텨냈다. 남편이 옆에 있었지만, 내밀한 속내를 털어 놓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할머니의 정신은 언제나 갇혀 있었다.

천형이라는 표현 외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병을 평생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 몸과 마음의 상처를 혼자 다스려야 하는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할머니의 세상 바깥에서 오빠와 언니들이 애타게 찾았던 동생은 숙자였다. 현재의 할머니는 아니었던 것이다. 회상만으로도 따뜻하고 포근해야 할 기억이 현실과 연결되지 못할 때 그 기억은 슬픔이 된다.

내가 어린 시절 친구와의 기억을 누구와 공유하고 싶지 않듯이 할머니에게는 숙자가 공유하고 싶지 않은 기억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숙자에 대한 호기심을 내 마음 속에서 지워야 하지 않을까. 숙자를 의식하지 않아야 할머니의 마음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그래야 할머니도 삶의 짐을 조금은 가볍게 내 앞에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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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기억 속의 이름 [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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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유년의 이름, 그 따뜻함

내가 배우처럼 세상을 살 수 있다면 이 세상을 놀이터로 여기고 즐길 수 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때 이름은 묘한 힘을 지닌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이름에 쓰이는 문자의 뜻에 의해 삶의 방향이 결정되기도 하고, 내가 나아가고자 하는 지향에 의해 이름이 새로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믿음을 은연 중에 가지고 있다. 더러는 이름을 바꾸면 미래가 변할 수 있다고 믿기도 한다.

내가 어릴 적에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나를 “리야”라고 불렀다. 정말 나는 내 이름이 ‘리야’라고 믿었으므로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을 마치고 교실에서 선생님께서 “김성리”를 부를 때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꿋꿋하게 내 이름이 호명되기를 기다렸다. 출석부가 접히고 ‘탁’ 소리를 내며 교탁 위에 내려지는 순간, 놀랍게도 한 남자 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 큰 소리로 말했다.

“리야 이름 안 불렀는데예”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특이한 병 치례와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로 인하여 나는 꽤 알려진 아이였기 때문에 처음 만난 선생님과 많은 아이들은 남자 아이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거의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에 나는 당황했고, 내가 호명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키가 크고 마른 몸집을 하셨던 선생님께서는 천천히 나에게로 와서 “네 이름은 김성리다. 잘 기억해라”하시며 머리를 만져 주었다. 집으로 오는 내내 아이들은 비실비실 웃었고, 용감했던 그 남자 아이는 신기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내 머릿속은 뒤죽박죽 헝클어져 있었고, 대문 앞에서 할머니가 “리야”라고 부르는 소리에 대답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게 되었다.

그날 오후에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거제도 내의 다른 지역에 계시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동생을 데리고 오셨다. 나는 심각하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했지만, 모든 가족들은 큰 소리로 웃기만 하고 그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만은 그 자리에 내가 없는 것 같은 착각에 내 머릿속은 더 어지러웠다.

어둑해지는 데도 불구하고 나는 뒷마당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슬프고 외롭고 뭔가 분하고 억울했다. 아버지가 내 앞에 앉아 막대기를 집어 흙 위에 글자 세 개를 적어서 내게 보여 주셨다. 그리고 큰 소리로 글자를 하나하나 짚어 가며 읽었다. “김, 성, 리, 네 이름이다. 리야는 우리가 너를 이뻐해서 부르는 이름이고”

그날 이후 지금까지 “리야”라는 이름은 나에게 언제나 따뜻하고 다정한 기억이 되었다. 나를 “리야”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모두 나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다. 내가 어디에서 태어났으며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나의 성격이 어떠했으며 어떤 병을 앓았는지 안다. 심지어 내가 한글을 언제 읽고 쓰게 되었는지까지 안다. ‘리야’라는 이름 속에는 내 유년의 시간들이 들어 있는 것이다.

 

놓아버릴 수 없는 유년의 기억

‘이숙자’라는 이름에는 할머니의 유년이 들어 있다. 할머니에게는 언니가 두 명, 오빠가 한 명 있었다. 오빠와 언니들은 할머니가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이미 타지에서 학교에 다니거나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고향에 남겨졌던 여동생을 수소문하여 연락이 닿았음을 볼 때, 할머니는 부모형제의 사랑을 받은 막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빠와 언니들은 일본에서 살고 있었다. 해방이 되고 일본에서의 터전을 미처 정리하지 못해 귀국을 미루는 사이 국교는 단절되어 어린 동생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할머니는 현실적으로 형제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잊다시피 살았지만, 오빠와 언니들은 막내를 포기하지 않고 할머니를 찾았다.

“오빠는 안 만날라쿠데. 언니가….둘이 나한테 편지가 왔데….”

“오빠가 실망이 컸다 아이가. 언니도 실망하고….”

“실망 안 하겄나. 실망했제. 마이 실망했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오빠는 병든 여동생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때로는 끼니 잇기가 힘에 겨운 생활이었기에 오빠가 정기적으로 보내 주는 돈은 유용했다. 언니들은 간헐적인 도움을 주는 대신 잦은 전화로 동생의 안부를 챙겼다. 오빠는 세상을 하직하는 순간까지 여동생을 내버려둔 세월과 고향 사람들과 세상을 용서하지 않았다.

“몇 해 전에 올케라는 사람이 왔다갔다. 오빠가 죽었다카더라. 일본 여자데. 오빠가 너무 마음 아파했다고….보고 싶어 했다고….”

“그래서 자기가 왔다고 하더라. 올케가 오빠 대신 나 보고 가서 말해 주겠다고. 흐응…. 내가 어찌 살고 있는지, 내가 어떤 모습인지 말해 주몬 죽은 오빠가 아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마치 고요한 마당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주위의 사람이 죽어서 가마니에 둘둘 싸여 갈 때도 할머니는 슬픔을 느끼지 않았다. 아니 느낄 수 없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죽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빠의 죽음은 다르게 다가왔다. 자기의 유년의 한 켠에 구멍이 뚫리고 있었던 것이다.

예쁘고 어리게만 여겼던 막내 여동생의 고단한 삶은 뒤늦게 오빠의 한이 되었고, 그런 오빠에게서 할머니는 보이지 않는 사랑을 느꼈다. 끝까지 여동생을 만나지 않은 것은 오빠의 가슴 아픈 배려가 아니었을까. 매달 오던 돈은 오빠 사후에도 한 동안 보내져 왔다. 올케의 말에 의하면 오빠의 부탁이 있었다고 한다.

“인자 돈이 안 온다. 올케도 죽었는지 아니면 어디 요양원에서 쓸쓸하게 있는지. 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돈 보낸다고 하데. 오빠가 죽기 전에 신신당부하고 부탁했다 카데.”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 자체가 에너지가 되어 현재까지 지속된다. 지금이라는 시점에서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유년기의 행?불행을 떠나 언제나 부모님의 사랑과 형제들과 함께 했던 시간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내가 ‘리야’라는 이름만으로도 외롭지 않듯이 ‘숙자’라는 이름에는 이제는 할머니만이 알 수 있는 관심의 시간들이 살아 있는 것이다.

 

내려놓을 수 없기에 고통이 되어버린 과거의 이름

숙자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 년 동안 집에서 놀았다. 조신하게 살림살이를 배우고 친구들과 어울려 수다를 나누는 생활에 싫증이 나면서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마침 집안에 서울에 가서 학교를 다니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여고에 진학하고 싶은 생각은 더 간절했다. 일찍 객지에 나가 자기 앞가림을 하는 오빠와 언니들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집안이 좀 괜찮았다. 그래도 울산에는 학교가 없는 기라.”

집안 살림살이가 괜찮은 덕에 숙자의 여고 진학은 쉽게 결정이 났고, 숙자는 시험을 쳐서 부산공여에 진학했다. 부산에 하숙집을 정해 놓고 토요일이 되면 울산 집에서 지내다 일요일에 다시 부산으로 돌아오는 일상이 반복되었지만, 숙자의 자긍심은 나날이 높아갔다. 일제 강점기에 여고를 다니는 여성이 많지 않았기에 교복을 입고 기차를 타면 한복을 입은 또래 여성들의 부러운 마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숙자는 할머니의 기억 속에 교복 입은 여고생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1940년대의 여고생, 단발머리를 하고 책가방을 든 얌전한 여고생의 이미지는 어쩌면 할머니의 영혼에 남아있는 또 다른 상처일지 모른다. 할머니는 ‘단발머리’를 여러 차례에 걸쳐 강조했다.

“그때는 전부 단발이라. 단발머리하고 있으모 공여생인기라.”

“하모. 단발머리하고 교복입고 기차 타 봐라.”

한 때는 단발머리가 억압과 획일화된 교육의 실체로 지목되어 지탄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런 현실적인 시간 속에서도 할머니 기억 속의 단발머리는 꿈 많던 공여생인 숙자와 동일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숙자는 이제는 절대로 되돌아 갈 수 없는 기억 너머의 지층 깊숙한 곳에 홀로 남겨져 있다.

숙자로부터 60년도 더 되는 시간이 흘러갔고 많은 사건들이 지나갔다. 한 여인의 곁으로 셀 수 없는 바람과 흙이 마치 먼지처럼 날아갔다. 얼마나 많은 꽃들이 피고 지고 또 피었으며,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들도 태어나고 죽기를 수없이 반복했던가. 그러한 시간 동안 숙자는 할머니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서 숨죽이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의식적으로 회피하고 부정하는 것은 그것을 알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할머니가 숙자를 기억 속에 묻어 놓고 드러내기를 꺼려하는 것은 유년의 기억이 현재는 고통으로 재현되기 때문이다. 숙자가 꾸었던 그 많던 꿈들은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소멸되었고, 숙자는 바로 할머니의 유년기와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숙자는 할머니의 타자였던 것이다.

 

저 푸른 하늘 밑에는

내 고향 내 살던 집이 있겠지.

 

집옆에서는 올해에도 살구나무에

활짝 핀 살구꽃이 피었겠지

마당 뒤에 있는 감나무에서

감꽃이 떨어지면

바가지로 주워담아

실로 꿰어서 목에 걸던

그 어린 시절이 그립구나

– <고향> 부분 –

숙자가 살던 집에는 큰 감나무가 있었다. 숙자는 하얀 감꽃을 주워 실에 꿰어 목걸이로 만들어 목에 걸었다. 어린 적 우리 집 뒷마당에도 감나무가 있었다. 나무가 크지 않아 감꽃이 많이 열리지 않아서 나는 이웃집 마당에 떨어져 있는 하얀 감꽃을 주워 목걸이로 만들었다. 감꽃은 금방 시들었지만, 그 향기는 오랫동안 코끝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가 병든 몸으로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에 돌고 도니/ 부평 같은 신세가 되어/ 어언간 60여년이 되었구나./ 세월은 빨라 유수와 같으니/ 내 청춘은 흘러흘러/ 머리에는 벌써 백발이 휘날리(<고향>)”고 있다. 병은 숙자와 할머니의 연결 고리를 끊어 버렸고, 숙자는 기억 속에 묻히게 된 것이다.

 

과거를 말해주는 흔적, ‘숙자’.

숙자라는 이름을 부르지는 않았으나 할머니는 숙자로 살았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시로 대신 풀어 나갔다.

 

삽짝거리로 나와서

돌다리를 건너

사랑하는 모교에 가고 싶구나

칠계단을 올라가면

우편에는 벚꽃나무와

좌편에도 벚꽃나무가

엉겨 붙어서 봄이 되면

벚꽃이 장관이더라.

(……)

친구들과 사진 찍던

그 추억이 떠오르며

선생님과 기념촬영도 했건만

모교가 잊혀지지 않고

사무치도록, 꿈속에서도 그리워지네.

 

언제나 가보리

언제나 보고 싶어

먼 산만 바라보네.

– <고향> 부분 –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숙자는 결코 지워진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언제나 그리웠고 언제나 돌아가고 싶었지만, ‘내가 숙자’라고 말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먼 산만 바라보’듯이 그렇게 숙자를 가슴 깊이 묻었던 것이다. 한 사람에게는 지금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그 과거의 과거가 함께 있지만, 누군가는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과거를 기억 깊숙이 묻어버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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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구보씨 뱀파이어를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철학)

 

“여우가 닭 잡아먹는 게 죄냐?”

 

이건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2009)에 나오는 대사다. 뱀파이어가 된 태주(김옥빈 분)가 자신을 책망하는 상현(송강호 분)에게 내뱉는 말이다. 상현도 뱀파이어다. 그는 가톨릭 신부였는데, 수혈을 받고 뜻하지 않게 뱀파이어가 되었다. 인간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처지지만, 가능한 한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식물인간이 된 환자의 피나 자살하는 사람의 피를 받아먹는다.

반면, 태주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당당하다. 그녀는 신선한 피를 위해 거리낌 없이 인간을 죽인다. 그녀는 뱀파이어고, 뱀파이어는 “인간을 잡아먹는” 존재다. 그렇다면 그녀가 인간을 죽이는 것이 무슨 잘못인가? 태주는 상현의 어정쩡한 태도를 비웃는다.

“너는 남의 피로 연명하면서 네 피 한 방울 나눠주는 건 그렇게 아깝냐?”

이것도 <박쥐>에 나오는 대사다. 눈 먼 노(老)신부(박인환 분)가 자길 뱀파이어로 만들어주길 거부하는 상현에게 하는 말이다. 그는 뱀파이어가 되어서라도 다시 이 세상을 보고 싶어 한다.

“그렇게도 보고 싶으세요? 이 캄캄한 세상이?” 상현은 그러한 욕망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피를 탐하는 노신부를 찔러 죽인다. “가서 쉬세요.” 그러면서 상현은 그가 죽인 노신부의 심장에서 솟아나는 피를 빨아먹는다.

상현은 스스로의 욕망을 쉽게 저버리지 못하면서도 그런 욕망의 탐닉을 막으려 든다. 그는 뱀파이어지만, 윤리적이고자 하는 뱀파이어다. 그러나 뱀파이어가 정녕 윤리적일 수 있는가? 상현의 말과 행동이 블랙 코미디가 되는 바탕은 여기에 있다. 그는 비닐 팩에 피를 담아 냉장고에 두고 마시며, 이렇게 말한다. “조금 빨아먹다 버리는 건 일종의 인명경시가 아닐까?”

그런데 이런 블랙 코미디의 무대는 영화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가 뱀파이어 세상이라고 말하는 건 틀림없는 과장이겠지만, 돈을 탐하며 돈의 순환에 생명을 거는 인간들의 모습은 확실히 뱀파이어와 닮았다.

게다가 돈은 뱀파이어와 같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하지 않는가? 그것은 물질적 지배와 안락만이 아니라 깨끗한 피부와 성형의 아름다움까지 만들어낸다. 돈의 위력을 가진 이들은 이제 인간 세상의 한 부류로 자리 잡는다. <트와일라이트> 시리즈의 뱀파이어가 어둠과 경계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인간 사회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는 점도 예사롭지 않다.

닭을 잡아먹는 여우가 동네에 내려와 닭들과 동거하며 닭들을 관리하기에 이른 짝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닭이 아닌 여우가 되고자 한다. 기왕이면 멋지고 매력적인 뱀파이어가 되고 싶어 한다. “뱀파이어면 어때?” 사람들은 피를 탐하는 <박쥐>의 노신부처럼 되뇐다.
영화 ‘박쥐’의 한 장면구보씨가 DVD로 영화를 여기저기 돌려보아 가며 여기까지 얼기설기 썼을 때다. 어느 틈엔가 옆에 와 있던 Y가 끼어든다.

“구보야, 너는 어떻게 영화를 봐도 그렇게 기괴한 영화만 보니? 그 박쥔지 생쥔지 하는 영화는 벌써 몇 번째 틀고 앉았는지 모르겠다. 참 취미도 괴상하다, 너.”

“어, 미안. 시끄럽다면 헤드폰 끼고 볼께. 난 곧 이 영화로 강의도 하고 글도 써야 하거든. 이제 겨우 한 페이지 썼어. 강의 노트는 아직 시작도 못했고… 근데, 그게 아니더라도 이 영화 진짜 볼 만한 영화야. 박찬욱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좋다구.”

“글쎄, 난 박찬욱 좋은지 모르겠더라. 그 사람 영환 어딘지 좀 구겨진 것 같애.”

“하하… 뭐, 그렇게 볼 수도 있지. 근데, 어딘가 구겨진 마음이 없다면 영화건 문학이건 불가능하지 않겠어? 구겨진 주름에 세상이 이렇게 또 저렇게 담기고, 그걸 풀어내는 데서 예술이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치, 그럼, 주름 많은 사람은 다 예술가겠네? 박찬욱은 그것도 아니고 이제 쉰이 다 된 얼굴이 뺀질 통통하던데?”

“유심히도 봤다. Y, 너 은근히 박찬욱 좋아하는 건 아냐?”

“아니라니까. 난 잔인하고 기괴한 장면들 싫어해. 그런 걸 왜 우리가 영화에서도 봐야 하니?”

“외면한다고 그런 면이 우리 삶에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 오히려 그런 걸 극적으로 제시해서 우릴 자극하고 정화(淨化)하는 게 필요한지도 몰라. 거기서 새로운 아름다움이 탄생하는 것이고 말이야.”

“기껏 뱀파이어가 그런 거야? 덜떨어진 서양 귀신이 피 빨아먹는 게?”

“Y야, 그게 꼭 그렇진 않다구. 뱀파이어를 이 시대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어. 흡혈하는 기생적 존재, 어둡지만 창백한 힘과 매력을 지닌 존재. 이런 걸 자본으로 볼 수도, 자연에 대한 인간 자체로 볼 수도 있잖아. 게다가 원래 뱀파이어는 경계적 존재였어. 이런 존재에게는 정상적 존재에게선 찾기 힘든 갈등과 문제가 있다구. 생각해 봐. 뱀파이어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라구 할 순 없어. 그렇다구 신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야. 네 말대로 귀신인 것도 아냐. 분명히 몸뚱이를 가진 생명체라구. 그러나 짐승이라고 할 수도 없어. 말하자면 일종의 괴물인 거지. 경계적 괴물. 그래서 이걸 어디에서부터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흥미로운 얘기들이 나올 수 있는 거야. 박쥐라는 동물도 원래 경계적 존재잖아. 그런 점에서 이 영환 우리말 제목이 영어 제목보다 나아.”

“영어 제목은 뭔데?”

“Thirst. 갈증… 너무 평면적이지. 하긴 뭐, 저주스런 갈증, 그런 정도의 뜻이고 이미지겠지만.”

“저주스런 갈증? 거기 저주는 왜 붙어?”

“Y야, 이거 뱀파이어 영화라구. 뱀파이어는 피를 마셔야 살잖아. Y 네가 뱀파이어가 됐다고 생각해 봐. 피를 빨아먹는 게 기꺼운 일이겠어? 근데 이걸 욕망 일반으로 해석할 수 있거든. 욕망이라는 게 대부분 희소성이 있는 대상을 향하는 거고, 그래서 누군가를 밀쳐내야 충족될 수 있으니까. 때론 억압하고 착취하고 해서 말이지. 그거 일종의 피 빨아 먹는 거라고 할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고 또 만일 그렇게밖에 살 수 없다면 저주스런 거지. 저주스런 욕망, 저주스런 갈증.”

“구보야, 그건 정말 난센스고 오버센스야. 네 말은 우리 모두가 일종의 뱀파이어란 말이잖아. 그게 말이 돼?”

“내 참, Y야, 그건 내가 좀 전에도 했던 말이야. 넌 대체 내 말을 듣고 있기나 한 거니? 내가 그랬잖아, 뱀파이어를 자연에 대한 인간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봐. 우리가 다른 생물들을 어떻게 취급하는지를. 꼭 사슴피를 받아먹고 곰의 쓸개즙을 빼내먹는 인간들만 뱀파이어가 아니라구. 인간이 동물을 사육하고 도살해 먹어치우는 방식은 정말 잔인한 거야. 뱀파이어가 차라리 고상할 정도지. 입가에 피 안 묻히고 점잖은 척 포크와 나이프로 식사를 한다고 해서 잔인하지 않은 건 아니야. 당하는 동물 입장에서는 더 기가 막힐 노릇 아닐까. 사람들이 사는 부근엔 사육당하는 동물 이외엔 대형 동물들이 남아나질 않아. 특히 육식 동물들은 거의 멸종이야. 경쟁자가 없는 뱀파이어가 인간인 거지. 그뿐만 아니라구. 인간은 인간도 사육하고 착취하잖아.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말이지. 서로가 서로 피를 빨아먹는 거야. 그렇게 볼 수도 있잖아? 아닌 게 아니라, 이 박쥐라는 영화에는 서로 피를 빨아먹는 장면이 있어. 상현이 제 피를 태주에게 먹이면서 태주의 피를 빨아먹는 장면 말이야. 실은, 박찬욱이 이 영화를 처음 구상할 때 머리 속에 그려뒀던 장면이 바로 그거라는 거야. 그걸 중심으로 해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거지. 재밌잖아?”

“재밌다구? 구보야, 넌 정말 이상해. 잔인하다고 하더니 재밌다는 건 또 뭐니? 잔인한 게 재밌다는 거잖아. 도대체 그게 정상적인 사람이 할 소리야? 박찬욱이나 너나 괜한 과장을 해서 잔인한 면을 만들어내고는 그걸 재밌다고 즐기는 거 아냐? 그건 가학 취미라구. 니들이 그런 취향을 가지고 있으니까 세상이 그렇게 보이는 거구,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고 여기는 거야. 니들이야말로 뱀파이어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니까, 괜히 다른 사람들한테도 뒤집어씌우는 거 아니겠어? 안 그런 척 하는 너희들도 다 뱀파이어다, 이렇게 세상에 대구 외치는 거잖아. 그거 꼬리 잘린 여우 심정인 거야.”

“아니, Y야, 난 가학적인 걸 즐기는 게 아니라, 그저 그런 욕망의 굴레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는 거야. 박찬욱은 그런 걸 영화로 표현해 보는 거고… 박쥐의 상현을 봐. 그는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구. 어쩔 수 없이 욕망의 수렁에 말려들어가면서도 거기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려 하지. 그가 악을 행하는 건 다른 악을 막기 위해서야. 가령 뱀파이어가 되려는 신부를 죽인다든가, 태주를 학대한다고 생각하고 강우를 죽인다든가 하는 일이 그래. 그리고 그런 게 더 큰 악을, 파국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자 태주와 함께 목숨을 버리는 쪽을 택하지. 물론 내 얘긴 그런 결말이 좋다거나 필연적이라는 건 아냐. 중요한 건 그렇게 벗어나려는 자세와 시도가 있다는 거지. 그게 일종의 희망 아닐까. 저주받은 갈증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희망 같은 거…”

“구보야, 내가 보기엔 욕망을 적대시하는 네 생각이 애초부터 잘못된 거야. 구원은 무슨 구원이니? 그건 병주고 약주는 것일 뿐야. 옛날부터 사람들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작자들이 해 온 짓이라구. 욕망이 있으면 잘 충족시킬 길을 찾아야지, 억지로 억누르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면 그게 없어지니? 사실은 그렇게 해놓고 뒷구멍으로 지들만 즐기는 놈들이 따로 있잖아. 구보, 너 같이 정신 못 차리는 철학자나 괜히 구원이니 뭐니 하며 헛물켜는 종교인들이 거기 들러리를 서고 말이야. 그러니까 결국 사람이 구겨지는 거야. 박찬욱도 철학과 출신이지? 그것도 가톨릭 계통 학교를 다녔잖아. 그래서 사람이 건강하지 못한 것 아닐까?”

“어, Y야, 그거 인신공격이야. 그리고 근거 없는 얘기라구. 박찬욱이 철학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얘긴 들어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철학과를 나와서 영화에 조금이라도 더 깊이가 있는 걸 거야. 박찬욱 영화는 생각보다 치밀하고 섬세하다구. 예를 들어 여기 이 장면도 봐. 장면 배치나 소도구 하나까지도 예사롭지 않아. 동양과 서양, 근대와 현대 따위를 섞어놓으려고 애를 많이 썼다구. 인간의 본성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분위기에서까지 경계적인 면을 찾아 표현하려 한 거야. 한 오분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어. 자, 이걸 좀 볼래…”

“됐거든. 구보야, 나 바쁘거든. 그리고 그 영화엔 볼만한 남자 배우 하나 없이 다 구보 너처럼 칙칙한 애들만 나와서 관심 없거든. 그러니 너나 열심히 보셔.”

자거라투스트라 벌교에 가다(2) [자거라투스트라 벌교에 가다]

이병창(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1.

자거라투스트라는 난감한 가운데서도 요즈음은 각 시, 군에서 자기 고장 관광지도를 만들어 배포하니까 혹시 거기에 표시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우선 휴게소를 찾아야 하는데, 보통 거기에서 관광지도를 배포하니까.

차는 순천 시내를 지나 금방 벌교의 벌판에 이른다. 광활한 논에는 파랗게 자란 벼들이 바람에 일렁거렸다. 바람은 순천만의 바다에서 불어오는 듯하다. 자거라투스트라는 마음속으로는 순천만의 갈대 숲 사이로 흐르는 은빛 강물을 그려보고, 혀로는 오늘 점심으로 먹을 예정인 순천만 꼬막 맛을 느끼며, 눈으로는 도로 옆의 휴게소를 찾는데 여념이 없었다. 손과 발은 스스로 움직이면서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었으니, 모든 감각이 각기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기묘한 환각상태에 빠져들었다. 들뢰즈가 말했다는 파편화된 감각이란 것이 이런 상태를 의미하지 않을까? 이 상태가 어쩐지 환각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차는 마치 꿈속을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 피카소의 몽타주 그림이 떠올랐다. 옆자리의 선배님은 깊은 침묵 속에서 아마도 나철 선생의 사상을 의미하는 것 같다.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 있으면서도 서로 교감한다. 공감각에 의한 공동의 세계가 차안에 넘치고 있었다.

드디어 벌교읍에 들어가기 직전 도로 옆에서 자동차 휴게소를 발견했다. 마침 벌교읍 관광지도가 마침 한 장 남아있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급히 지도를 펼쳐 눈으로 나철 선생의 생가를 찾는다. 야호! 정말로 나철 선생의 생가가 표시되어 있었다. 게다가 지도에는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가 친절하게 표시되어 있는 게 아닌가? 이건 예상치도 않던 횡재이었다. 벌교에 오면서도 벌교가 바로 태백산맥의 무대였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니! 『태백산맥』을 생각하면 광활한 벌교의 벌판을 다시 보니, 이렇게 넓은 들판이라면 얼마나 많은 소작인들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그 순간 관광지도에 대해 느꼈던 고마움 때문에 관광지도에 드리워져 있는 절망의 그림자를 예감하지 못했다.

관광지도란 것은 한 장 속에 모든 관광지를 표시해야 하니까, 실제 지형을 상당히 왜곡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자거라투스트라는 그 순간 이 평범한 진리를 잊어버렸다. 벌교를 찾아오는 거의 전부는 『태백산맥』의 흔적을 찾는다. 이 흔적은 시내 한 가운데 있는 부용산의 오른편에 위치한다. 거기에는 김범우의 집이며, 소화의 집, 그리고 읍내홍교가 표시되어 있다. 관광객들을 위해 이 부분은 확대되어 그려졌다. 반면 나철 선생의 생가는 부용산 왼편에 위치한다. 그런데 지도는 이 부분을 축소시켜서 나철 선생의 생가가 마치 읍내의 왼편 부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사이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아 걸어 다닐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나중에 안 것이지만 시내 가운데 그려진 부용산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산이다. 실제 나철 선생의 부용산 왼편에 있지만 무려 15키로 정도 떨어져 있다.

이 관광지도 때문에 자거라투스트라와 선배님은 부용산 자락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돌면서 여러 번 돌아다녔지만, 생가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면 혹시 부용산 산허리 어디에 있을까 하여 부용산을 걸어 올라 갔다. 부용산은 정말 이름 그대로 무척이나 예쁜 산이다. 『태백산맥』에서는 이 산에서 봉화가 오르는데, 그러면 정말 꽃봉오리처럼 보일 것 같다. 높이는 한 400미터 정도이다. 그런데 이 부용산을 거의 다 올라가도 유적지라는 것이 없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들은 나철 선생에 대해 전혀 모른다. 혹 아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도 실상은 알지 못했다. 그들의 부정확한 정보 때문에 10분이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나철 선생의 생가를 찾는데 무려 두 시간이 걸렸다. 자거라투스트라는 포기하려고 할 무렵, 마지막으로 지도상에 표시된 나철 선생 생가 가까이 있는 벌교 소방서를 GPS 기계에 넣어보았다. 나철 선생에 관해서는 일자무식이던 GPS는 벌교 소방서는 단숨에 알아보았다. 소방서를 찾으면 바로 거기에서 나철선생 생가를 찾을 수 있는데,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그리하여 다시 기계에 몸을 맡기고 소방서를 찾아가보니 부용산 자락을 왼쪽으로 돌아서 무려 15 키로 이상을 돌아가서야 나철 선생의 생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두 시간 동안 헤매는 동안, 자거라투스트라는 어떤 깊은 절망감에 사로 잡혔다. 프랑스의 어떤 늙은 여배우는 혼자서 살다가, 접시를 깨뜨리자 절망감 때문에 자살했다고 한다. 자거라투스트라는 그때 여배우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될 것 같았다.

 

2.

동네에 들어가자, 나철 선생의 유적지 표시가 보인다. 무슨 유적지인가 했더니 나철 선생을 기리는 비석이다. 나철 선생의 생가는 동네 한 가운데 있다. 이제 비로소 나철 선생의 이름이 알려진 듯 생가는 새로 조성 중에 있었다.
나철 선생을 기리는 비석이다. 1990년 3월 1일에 세웠다고 한다. 사진을 확대하면 대개 어떤 말인지 짐작될 것이다.전국 어디서나 위인들의 생가는 다 똑같다. 삼간 기와집, 나철 선생의 생가도 꼭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 위인 생가의 기본 설계도가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나철 생가는 새로 지은 기와집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미처 공사가 마무리 안 된 듯 땅 바닥에는 아직도 시뻘건 황토가 내팽겨져 있었다. 물론 안내인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마을 개들이 낯선 사람을 보고도 짖지 않으니 아마도 가끔씩 찾아오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자거라투스트라는 후일을 위해 사진을 찍어 두고 선배님은 방에 모셔져 있는 나철 선생의 영정에 절을 한다. 짱구가 튀어나온 나철 선생의 인상은 단호하기가 겨울날의 얼음처럼 느껴진다.
선배님의 나철 선생에 대한 존경심은 지극하다.결국 찾아냈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자거라투스트라는 선배님에게 점심 먹으러 가자고 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읍내에 들어가서 『태백산맥』의 무대를 밟아보고 다시 순천만 쪽으로 가서 꼬막 맛도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선배님이 거기서 강진 다산초당이 얼마나 먼지를 물어본다. 어림대중으로 한 시간 정도면 갈 수 있을 거라 하니, 그러면 그리 가자고 한다. 이까지 왔으니 다산초당은 꼭 보고 가고 싶다는 것이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우리나라에서 화엄사와 다산초당을 가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며 그 소수에 선배님이 속한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아침을 늦게 먹었으니 점심 겸 저녁을 거기 가서 먹으면 되겠다고 생각한다. 순천만의 꼬막만 꼬막일까, 강진만의 꼬막도 꼬막이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보성을 지나 강진만을 향해 출발했다. 길은 사차선 자동차 전용 국도, 호남지방의 도로가 다 그렇듯이 여기도 텅 비어 있다. 차를 몰면서 자거라투스트라는 물었다.

형, 대종교는 요새도 신도가 있어요?

그저 단군할아버지를 조상신으로 모시고 있는 종교, 민족주의적인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한 종교, 고조선 시대가 실재한다고 믿는 종교, 그러나 실상은 조상숭배의 일종인 종교, 그것이 자거라투스트라가 알고 있는 대종교이다. 요새 누가 이런 구닥다리 종교를 믿겠는가?

대종교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의 가장 주요한 단체를 이끌었지. 청산리 대첩을 이끌어낸 북로군정서가 바로 그건데, 알지? 그런데 이런 독립운동 때문에 오히려 대종교의 종교성이 사상적으로 간과되고 그저 국조 숭배운동으로만 격하되고 말았어.

그러면 대종교의 종교성은 어디에 있어요?

글쎄 나도 깊이 연구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르는데, 흥미로운 특징이 있어. 대종교는 3분법을 중요시해. 대개 모든 사상은 이분법이잖아. 유교가 그렇거든. 태극, 무극, 음양, 4괘 등. 서구 구조주의도 이항 대립을 기본 골격으로 삼는다 하더라. 그런데 여기는 3분법이야. 대종교의 가장 주요 저서가 『삼일신고』인데, 셋이 하나이라는 주장이 그 핵심이라서 책 제목이 ‘삼일신고’이거든.

셋이 하나라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

삼신(三神)일체라는 뜻이지. 한배검(신)은 곧 환임(인), 환웅, 환검(단군)이라는 거야. 이 신들은 역사적으로 등장한 순서에 따라 나열된 신들의 계보가 아니야. 이 신들은 하나의 신 즉 한배검의 세 가지 위격이지. 환임은 조화의 신이고, 환웅은 교화의 신, 한검은 치화의 신이지.

뭐, 기독교의 삼위일체설하고 비슷하네요. 성령과 성신과 성자.

그러게 말이야.

기독교의 영향이라 보아야 하나요?

글쎄, 대종교 자신은 상고 시대의 종교의 부활이라 하지만, 사실은 20세기 초에 발생한 종교로 보이는데, 그러니 기독교 영향을 배제할 수가 없겠지. 마치 동학처럼 말이야. 그런데 왜 굳이 삼위일체설을 빌려 올 생각을 했을까? 그게 멋있어서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형도 아시겠지만, 기독교의 삼위일체설은 그리스도가 인간이면서 신이라는 이중성을 주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리이잖아요. 삼위일체설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신적인 지배 질서를 보존할 수 있었죠. 결국 기독교는 종교이면서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유일한 종교가 된 거예요. 헤겔은 그래서 기독교가 중세에 인간의 자유라는 개념을 사상적으로 보존해 왔다고 주장하죠. 이렇게 자유의지와 신의 질서를 종합하면, 세계의 타락과 신의 정의도 통일될 수 있죠. 전자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인한 타락이고, 후자는 신적인 질서의 관철이죠.

교주가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종교는 많지 않나? 하지만 그런 종교가 삼위일체설을 주장하는 것 같지는 않는데…..

신의 아들이라는 주장과 인간이면서 신인 그리스도라는 개념과는 좀 다르지 않아요? 신의 아들이란 자신의 신성을 가정하는데, 그것은 인간 속에 있지만 인성과는 독립된 본성이죠. 이 인성은 언젠가는 신성에 의해 사라져야 할 것이죠. 예를 들어 중세 기독교에 영향을 많이 끼친 배화교가 그렇지요. 그런데 기독교의 삼위일체설에서는 인성이 그 자체가 신성이라는 주장이 됩니다. 이것은 엄청난 혁명적인 주장이죠. 예를 들어 육체적 욕망이 그 자체로서 신의 뜻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건 잘 모르겠는걸. 그런 주장은 불교에서 평상심이 곧 도심이라는 주장과도 비슷하네. 동학이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하는 주장도 그렇고. 그런데 삼위일체설에 대한 그런 해석은 기독교를 너무 극단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닐까?

글쎄요. 사실 기독교는 신성과 인성의 분리와 통일, 배화교와 삼위일체설 사이를 오가죠. 그 사이 어느 지점에 기독교의 제 분파들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 신교는 신성의 분리 쪽으로 더 다가가고, 반면 구교는 신성과 인성의 통일 쪽으로 더 다가가죠.

그렇구나. 하여튼 대종교에서 이런 삼분법이 마치 만화경 속에서처럼 계속 확대재생산 되거든. 인간을 설명할 때가 특히 그래. 인간은 3眞과 3忘과 3途를 가지고 있어. 3진이란, 다시 셋으로 나누어지는데, 곧 성, 명, 정으로 이루어지지. 그것들은 자체 내에 어떤 대립을 가지지 않는 것들이야. 이 각각이 내부에서 구별을 가지면, 이제 3망이 되지. 그래서 성이 선, 악으로 나누어지면 心이야. 명이 청, 탁으로 나누어지면 그게 기이고, 다시 정이 厚, 薄으로 나누어지면 그게 身이야. 이 3망이 도착적으로 되면, 그게 感, 息, 觸인데 그 각각은 모두 6가지로 이루어져 있어. 그 외에도 모든 교리에 3이 기본 단위가 되어서 항상 그 배수로 진행되거든. 마치 3이라는 숫자가 대종교에서 자기 증식을 하는 것 같아.

그거 참 신기하네요.

예를 들어 성이란 선도 악도 아니야. 이것은 본질태이지. 그런데 이 성의 현상태가 마음이야. 그런데 이 마음은 선, 악으로 나누어지거든, 그러면 깨달음의 논리가 이렇게 전개되지. 우선 우리는 수련을 통해 악한 마음에서 선한 마음으로 나아가야지. 그런데 그것만으로 부족해. 선하다, 악하다는 것조차 넘어서야만 비로소 그 마음의 본성에 도달하지. 이런 설명은 불교의 공론에서 주장한 것과 같다. 유에서 무로, 그리고 유도 무도 아닌 것으로 나아가는 논리가 공론이잖아.

그것 참 흥미롭군요. 어떻게 수행하는지 아세요?

몰라. 주요한 것은 대종교 속에 인간을 설명하는 어떤 새로움이 있다는 거지. 아직까지 아무도 연구해 보지 않았는데, 나도 지금 연구 중이야.

김지하 선생은 한국의 사상의 특징이 3박자라고 해요. 서양음악의 기초는 2박인데, 한국음악의 기초는 3박이라는 거죠. 이런 3박에 맞추어 한국사상도 전개되었다 해요. 그런 3박의 개념이 대종교에도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요?

글쎄, 하여튼 대종교가 특이하기는 해.
대종교의 주요 경전인 천부경이 새겨져 있는데, 자거라투스트라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렇게 차 안에서 토론 하는 사이, 차는 마침내 강진만에 도착했다. 다산초당 앞에 펼쳐진 강진만은 푸른 들판과 어울려서 싱싱한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거라투스트라, 벌교에 가다(1) [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사업단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자거라투스트라는 오래 전 선배님과의 한 술자리에서 전남 보성 벌교읍에 가보자고 약속했다. 선배님 말씀으로 거기엔 홍암 나철 선생의 생가가 있다는 것이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처음에 시원스럽게 약속했지만, 사실 꼭 가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도대체 벌교라면 저 멀리 남쪽 바다 끝이 아닌가? 거기서 조금 더 가면 ‘땅 끝’이라지? 다행히 선배님이 술자리에서의 약속이라 생각하신 듯 독촉하지 않으니 자거라투스트라도 그런 약속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여름방학도 끝나갈 무렵, 선배님과 우연히 다시 술을 먹는데, 나철 선생 이야기가 또 나왔다. 선배님이 최근 ‘한국현대사상사’를 쓰셨는데 거기 나철 선생도 포함되어있다는 것이다. 자거라투스트라는 나철 선생을 계룡산의 신흥종교의 어떤 교주 중의 하나 정도로 생각하는데, 선배님의 말씀 가운데는 은근한 존경심이 감추어져 있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방학 동안 꼬박 집에만 붙어 있었던 것을 생각하고 핑계 삼아 시원한 바다 바람이나 쏘이자 싶어, 그럼 바로 떠나가자고 했다. 선배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앞 뒤 말을 자르고 그러자고 하는 바람에 마침내 자거라투스트라는 벌교까지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약속한 날 아침에 자거라투스트라는 세미나가 있어 그걸 다 마치고 떠나려니 벌써 오후 3시였다. 서두르면 순천 근처 갯벌까지 갈 수 있겠지? 거기는 꼬막 천지인데, 꼬막안주에 소주 한잔이면 그까지 간 보람도 있겠네. 이렇게 생각하니 자거라투스트라는 어릴 때 소풍 떠나는 심정으로 되돌아 간 듯했다.

떠나자마자 자거라투스트라는 선배님께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형, 나철 선생은 왜 자결했대요?

자기의 숨을 스스로 막는 선도의 수행법이 있는데 폐기법이라 해. 나철선생은 그렇게 돌아가셨어. 구월산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국문학자 김두봉을 비롯한 제자들을 데리고 함께 수행했는데, 드디어 1916년 8월 14일이 되었지. 그날 선생은 앞으로 사흘간 혼자서 수행할 것이니 누구든지 들어오지 말라 하셨지. 사흘이 되어도 아무 기척이 없자, 제자들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미 자진 하셨지.

그러면 유서는 없었어요?

있지. 순명시를 남기셨어. 동포의 참혹한 고통 보면서 “이들의 죄를 대신 받겠다.”고 기록하셨지. 즉 원래 죽어야 할 자, 즉 일제겠지. 일제를 대신해서 죽으니, 한을 조금이라도 풀라는 뜻이지. 동포들 보고 나의 몸뚱아리를 씹어 먹으며 자신들의 분을 풀라는 것이지. 기가 막힌 자살시이지?

한을 풀라는 것이에요? 아니면 내가 죽었으니, 너희도 죽음을 무릅쓰라는 거예요?

흠, 그런데 대종교는 1909년 음력 1월 15일 중광절에 창시되거든. 처음에는 단군교라 했는데, 일부 세력이 오히려 친일 쪽으로 빠지면서, 1910년 8월 5일에 들어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지. 그러다가 1914년 5월 13일 만주 화룡현 청파호에 본부를 옮겨. 그는 이미 일제의 대종교 탄압을 예상한 듯해. 정말로 1915년 일제는 종교통제안을 발표해서 대종교는 종교가 아니라 위장된 독립운동단체라면서 탄압하기 시작했지. 1916년 나철 선생의 자진은 일제의 이런 종교 탄압에 대한 항의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튼 그러면서 예언시도 남겼는데, 앞으로 북방의 이리와 남방의 원숭이가 싸울 것이고, 그 때문에 세상이 혼란스러울 것이라고 예언하셨대.

북방의 이리나, 남방의 원숭이가 무엇을 의미해요?

글쎄, 어떤 사람은 소련과 미국을 의미하고, 그래서 남북전쟁을 예언했다고도 보지. 순 억지지. 남방의 원숭이라면 당장 일본을 생각해야 할 게 아닐까? 그러면 러일 전쟁 또는 소일 전쟁을 예견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선배님과 차안에서 대화하는 동안 자거라투스트라는 자기도 모르게 대화에 빠져 길을 놓쳐 버렸다. 허둥지둥 길을 다시 찾아 고속도로에 들어서니 고속도로에 들어가는데 그만 모든 진이 빠져 버렸다. 게다가 서울 천안 사이의 길은 항상 그렇듯이 지체와 정체를 거듭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차를 몰면서도 생각에 골몰했다. 그의 생각은 자진한 나철 선생의 운명과는 거리가 지극히 먼 생활상의 긴박한 문제였다. 본래 순천 갯벌에서 한잔 하려던 기획은 시간상 불가능하다. 그러면 오늘은 어디에? 자거라투스트라의 머리에 갑자기 지리산이 떠올랐다.

형, 온천해 볼래요? 시간상 오늘은 구례까지 밖에 못가요. 내일 아침 거기서 바로 순천으로 가는 고속화도로가 있으니까 벌교엔 내일 갑시다. 또 온천 랜드 가면 멋진 찜질방이 있어요. 제가 지리산 갔다가 내려와서 잤던 적이 있거든요.

찜질방에 잔다는 것에 대해 선배님은 거부 반응이 없어 보인다. 값이 싸기는 하지만, 찜질방에는 코고는 놈, 잠꼬대 하는 놈, 이가는 놈들이 많아 여간 시끄러운 것이 아닌데….

천안에서 전주 쪽으로 빠지자 도로는 갑자기 텅 빈 듯했다. 이걸 차별이라 해야 하나, 아니면 축복이라 해야 하나? 자거라투스트라는 애매함을 느끼면서도 텅 빈 도로 위에서 엑셀레이터를 밟기 시작했다. 이미 8월 말, 날은 차의 속도만큼이나 빨리 저물어 갔고 날이 저무는 만큼 차도 빨리 달려갔다. 어느새 구례 그리고 지리산 온천 랜드이다. 거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찜질방을 찾아 갔다. 찜질 방 옆에 자그마한 주막이 있어 자거라투스트라는 선배님과 막걸리를 굽고 삼겹살을 비웠다. 주막의 주모가 이 한 여름에 온천을 찾아온 우리들을 이상한 듯 쳐다본다. 정말 온천 랜드는 텅 비어 있었다. 아울러 찜질방도 거의 선방 수준이다. 자거라투스트라는 한없는 고요를 배게 삼아 꿈도 없는 잠을 달게 잤다. 새벽에 깨어나 보니 어렴풋한 새벽 빛 속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선배님이 구례 화엄사를 본 적이 없다 하기에 거기 홍매화가 있는데, 딴 것은 볼 것이 없고 그 매화는 꼭 보아야 한다고 우기면서 선배님을 모시고 갔다. 화엄사 앞에서 아침을 먹는데, 식당 주인이 관광지도를 전해 준다. 선배님이 그 지도를 보더니 갑자기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생겼단다. 매천사라는 곳이다. 한말 선비 매천 황현이 순국하신 곳이다. 선배님은 밥을 먹다 말고 이 기막힌 우연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매천 황현, 그리고 홍암 나철은 모두 왕석보라는 선비의 제자였어. 왕석보가 바로 구례 출신이야. 우리가 우연히 들른 이 근처 어디일꺼야. 그러데 왕석보의 제자로 또 한 분이 있지. 그 분이 바로 해학 이기라는 분이야. 매천은 광양 사람이고, 해학은 김제 사람이지. 그리고 나철은 벌교 사람이고, 모두 이 구례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어. 이 지리산 자락의 구례가 그들의 정신적 고향인 셈이지.

형, 왜 하필이면 구례인가요?

글쎄, 그걸 몰라. 이 근처에는 무언가가 있는데 그건 나도 모르지. 뭔가가 있는 것은 틀림없어.

그렇네요. 화순에 운주사라는 곳이 있는데 좀 신비해요. 이 근처는 미륵의 전설이 얽힌 곳이 많아요. 김제 금산사도 그렇구요. 소위 장소라는 개념으로 이 동네를 좀 연구할 필요가 있겠네요.

그런데 세 사람은 정치적으로 보면 다 달라. 매천은 전통 성리학을 고집하신 분이지만 양명 쪽도 가까이 하신 것 같아. 나철은 개혁주의자 반계 유형원을 사숙하고, 김윤식의 문하에서 활동했으니까, 실학 쪽을 계승한다 보아야겠지. 그런데 이기는 폭이 넓었어. 나중에는 진화론을 수용하여 신민론자 또는 자강주의자가 되지. 그런데 셋 다 자결했다는 데 공통적이야. 해학이 가장 일찍이 1909년 곡기를 끊고 자결하고, 이어서 매천이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아편을 먹고 자결하고, 마지막으로 나철이 1916년 숨을 막아 자결했어.

거참 형, 같은 선생의 제자들이 모두 자결했다니, 놀랍군요. 스승이 철학을 자결 연습으로 가르치신 게 아닙니까? 소크라테스처럼 말이에요. 그런데 자결할 때 남긴 말도 비슷한가요?

매천 역시 절명시를 남겼어. 그런데 핵심은 인간 세상이 지식이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이었지. 약간 지식인의 책임감을 보이기는 하지만 절명시 치고는 좀 신세타령 투야.

해학 이기의 유언에 대해 묻기 전에 아침 식사가 끝났다. 우리는 곧바로 화엄사의 홍매화를 찾아갔다. 화엄사의 분위기와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잘 어울렸다. 꽃이 진 홍매화는 각황전 옆에 서 있었지만,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고 그 스스로도 그런 고독을 즐기는 듯했다.
각황전의 돌사자 석등 오른 쪽 뒤편에 보이는 나무가 화엄사 홍매화이다. 봄이 되면 눈부신 매화가 피어난다.화엄사를 나와 자거라투스트라는 매천사로 가보았다. 다행히 GPS덕분에 힘들지 않고 찾을 수 있었으나, 이 시대 누가 매천을 찾으리. 매천사의 문은 두꺼운 열쇠로 잠겨 있었다. 사당 문이 열리면 순국하신 선생님께 절이나 하고 돌아갈까 하여 안내인을 찾으나 안내인도 보이지 않는다.
매천사의 사당을 담장을 넘어 찍어 보았다.

하는 수 없이 자거라투스트라는 서둘러 나와 마침내 최종 목적지인 벌교로 간다. 일사천리로 간다는 말이 정말로 실감난다. 텅 빈 거리는 속도 제한도 없어 정말 달리기 좋다. 차는 곧 순천을 벌교에 다다른다. 벌교 근처에 이르러 비로소 자거라투스트라는 선배님에게 물었다.

나철 선생의 고향이 벌교읍 어디쯤인지 알아요?

선배님은 태연하게 말한다.

벌교읍에 가면 알 수 있다 했어.

아니 이럴 수가 아뿔싸. 자거라투스트라는 후회가 막급이다. 선배님만 믿고 나철 선생에 관해 전혀 아무런 조사도 하지 않고 떠났던 것이다. 급하게 GPS를 누르는데 나철, 홍암, 대종교 그리고 심지어 자결 등 아무리 집어넣어도 GPS는 묵묵부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