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 세모녀 살해… 그래서 난 <국제시장>이 무섭다[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가족주의의 유령

이 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오마이뉴스> 1월 8일 자에 중복 게재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70412

▲  지난 6일 오후 경북 경북 문경 농암면에서 경찰에 붙잡힌 '서초 세모녀 살해 사건' 용의자 A씨가 서울 서초경찰서로 이송되고 있다. A씨는 서울 서초구 서초동 자택에서 아내와 두 딸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 연합뉴스

▲ 지난 6일 오후 경북 경북 문경 농암면에서 경찰에 붙잡힌 ‘서초 세모녀 살해 사건’ 용의자 A씨가 서울 서초경찰서로 이송되고 있다. A씨는 서울 서초구 서초동 자택에서 아내와 두 딸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 연합뉴스

실직한 가장이 부인과 두 딸을 죽이고 도주 자살을 시도하려다가 붙잡혔다. 불황과 실직으로 인한 경제적 압박 끝에 인간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셈이다. 가족 간의 불화와 증오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가족애와 과도한 연민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더 가슴이 아프다. 전혀 낯설지만은 않은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일 수도 있다. 경제적 곤궁이나 우울증 등으로 인해 삶을 포기하려는 어른들이 종종 자식들과 동반 자살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살인범이 된 대한민국의 가장, 가족 때문이다

이런 사건들을 보면서 그런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고뇌와 고통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생각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극진한 가족주의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런 가족주의는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들이 공유하는 정신이니까 우리 모두 극단적인 선택의 잠재적 공범일 수도 있다. 가족주의로 인해 가족은 가장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소유물로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땅의 대부분의 엄마들은 자식들의 모든 것, 그들의 미래의 삶마저도 걱정하고 책임지려고 한다. 하지만 자식이 부모의 소유물인가?

 

한 때 택시의 서비스 개선책으로 나온 구호가 있었다. 가족처럼 모시겠다는 취지의 슬로건으로 기억된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제발 가족처럼 취급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가족이 아니라 생면부지의 고객에 대한 서비스 정신으로서 모시는 게 훨씬 잘 모실 수 있지 않겠는가? 택시 기사들이 승객들을 멋대로 무시하고 거칠게 대한 것이 아마도 가족처럼 생각해서 그런가보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의 가부장적 가족주의 하에서 가장은 가족 구성원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군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가장이란 명분하에 자신이 성공했다면 그 성공한 삶을 자식이 이어받아야 한다고 믿고, 자신이 실패했다면 그 실패한 삶을 자식이 대신해서 보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의 욕망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그런 가족주의의 망령이 아닌가?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부모가 자식의 모든 것, 그의 미래와 생명을 책임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져서도 안 된다. 부모가 현재 고통을 겪는다고 해서 자식이 똑 같이 반복한다고 예단하는 것은 지나치다. 설령 그런 고통을 겪게 될 지라도 그 모든 것을 부모가 책임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의 역할이 있고 자식들의 삶이 있는 것이다. 다들 가족을 이루는 구성원이지만 각자 독립된 인격을 가진 주체가 아닌가? 이제는 그런 독립적 주체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가족주의는 한 세대 전이나 21세기에 들어선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국제시장>이 거부감 드는 이유

▲  영화 의 한 장면.   ⓒ CJ E&M

▲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 CJ E&M

한국의 신산(辛酸)한 근대사를 그린 영화 <국제시장>이 히트를 치면서 그 시대를 거쳐왔던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내고 있다. 우리 세대는 그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너무나 공감을 하지만, 나는 이제 그런 감정과 과도한 가족 유대가 부담스럽고 거부감이 든다. 이런 가부장적 가족주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몇 장면이 있다. 흥남부두에서 등에 업은 누이동생을 잃어버리자 구하러 갔던 아버지와 헤어지면서 아버지가 당부하는 다짐이 있다.

“덕수야! 지금부터는 네가 가장(家長)이다. 가장은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이 최우선이다.”

주인공 덕수는 가장으로서의 이런 책임을 지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 삶을 포기할 만큼 평생을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다. 동생이 서울 대학교에 합격을 하자 가족의 경제를 책임지기 위해 그는 지체 없이 서독 광부를 지원한다. 나중에 돌아와서 막내 누이의 결혼 비용과 고모의 가게를 지키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베트남전쟁의 한 복판으로 뛰어 들어간다. 부인이 이제 그만 짐을 내려 놓고 당신 자신의 삶을 살라고 눈물로 호소할 때도 덕수는 그게 가장의 책임이고 역할이라고 말한다.

늘그막에 가족들이 모두 모여 잔치를 벌일 때 덕수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아버지 유품을 모신 방으로 들어간다. 그 방에서 덕수는 힘들었던 지난 삶을 회상하면서 아버지의 인정을 구한다. “아버지! 저 이만하면 약속 잘 지켰지예? 저 진짜 힘들었거든요!”개인의 삶보다는 가족을 위한 삶이 덕수의 정체성을 이루었던 탓에 그 가족의 첫 번째 가장인 아버지의 인정이야말로 고통과 희생에 대한 보상으로 믿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관객몰이를 하고 있다면 그만큼 가족주의의 정서적 유대가 우리 삶 속에 크게 자리 잡고 있음을 반증한다. 가족주의는 식민지를 거치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태에서 가족 구성원들의 생존을 보호하고 국가의 산업화를 이루는데 큰 힘이 되기도 했었다.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 가족주의, 그만하자

하지만 가부장적인 가족주의는 권위주의적인 사회 구조와 남성 중심적 기업 문화, 연고주의적인 사회적 관계, 족벌경영과 부의 세습을 낳는 주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가족주의의 긍정이나 부정 여부와 관계없이 가부장적 형태의 가족주의는 이제는 벗어 던져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가족주의 안에서는 개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의 욕망과 인격의 자립성, 개인의 주체성 등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가족주의를 거부한다고 해서 가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이 중요하더라도 일차적으로 가족의 구성은 인격적 개인, 주체적 개인이어야 하고, 그런 개인들의 욕망과 인격이 인정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부장적 가족주의 하에서는 그런 개인들이 설 땅이 없다. 이 말은 세 모녀를 살해한 21세기의 가장에게나 힘들게 근대사를 살아왔던 <국제시장>의 덕수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그릇된 가족애가 정당화되고, 가족이란 이름하에 개인의 무한 희생이 당연시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가 성장하면 잘 어울리던 옷도 더는 몸에 맞지 않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회가 변화하면 그 사회를 규정하는 원리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족주의가 힘을 발휘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12살짜리 아동 성 매수가 집행유예라니…[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12살짜리 아동 성 매수가 집행유예라니…

 

?이 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딸 같은 12세 여아와 성매매를 한 40대가 집행유예를 받았다고 한다. 판결문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뉴스에 나온 양형 이유에 따르면 이렇다. “아직 성적 자기결정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는 아동·청소년의 성을 매수해 죄질이 불량하지만 동종 전과가 없는 점, 범행을 반성하는 점을 참작했다” 이런 내용을 보면서 도대체 이 나라의 사법부가 위치한 시간대가 어느 시대인지 의심스럽다. 가부장적이고 봉건적인 조선의 19세기라 하더라도 미성년자의 성을 매수하는 행위는 도덕적으로나 법률적으로 도저히 용납이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법원은 어떻게 이런 판단을 내리게 되었는가? 일단 언론에 보도된 내용만 가지고 보자.

 

법원도 12세 여아의 성을 매수한 것이 불량한 죄질임을 인정하고 있다. 현행법 하에서 성 매수는 불법이다. 특히나 13세 이하의 미성년자를 상대로 하는 경우는 특례법에 의해 가중 처벌을 한다. 자유의사에 의해 합의를 했다 하더라도 미성년자의 경우는 독립적인 인격이 아니므로 인정이 안 된다. 일단 성 매수가 불법이고, 무엇보다 미성년자, 특히 12살짜리 아동이다. 언론에 나온 것만으로는 두 차례 성 매수를 했다고 한다. 언론에 나온 정도가 이러니 그 이상도 생각해볼 수 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라면 반복적이고 상습적일 수 있다. 상습범의 경우라면 더 엄중하게 처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법원은 집행유예로 판결했다. 그 이유가 재밌다. “동종 전과가 없는 점, 범행을 반성하는 점을 참작했다.” 아, 대한민국의 법정에서는 초범이고 반성하면 다 풀려나는구나. 법원이 언제부터 이렇게 관대해졌는가?

 

40대가 어린 막내 딸 같은 12살짜리와 성매매를 했다는 것이 어디 간단한 문제인가? 합의를 가장하고, 돈으로 유혹을 했다 하더라도 아이가 성큼 따라나설 수 있겠는가? 여기에는 돈으로 유혹하는 이상으로 위계에 의한 강박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7조(13세 미만의 미성년자에 대한 강간, 강제추행)은 10년 이상 무기징역까지 처벌할 정도로 엄중하다. 그런데 12살짜리 아동의 성 매수를 한 자에 대해 법원은 ‘죄질이 불량하다’는 표현으로 간단하게 처리한다. 이런 표현 속에는 죄질이 얼마나 위중하고, 얼마나 반인륜적이고, 얼마나 폭력적인가 드러나 있지 않다. 그저 통상적으로 있을 수 있을 정도의 불량한 죄 정도로 무심하게 넘겨질 수 있다. 아무튼 죄질이 불량하다고 했으니까 그 죄에 대해 문책하고 처벌해야 하지 않는가? 이런 행위에 대해 법원은 어떻게 판단했는가?

 

“동종 전과가 없는 점, 범행을 반성하는 점을 참작했다.” 일단 범행을 반성하는 점부터 보자. 아무리 나쁜 범죄를 저지른 자들도 엄중한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높으면 면죄를 위해 반성을 가장할 수 있다. 이런 반성은 사실 진실한 반성일 수 없다. 물론 그런 경우도 없지 않겠지만 법원이 그런 반성문 정도로 면죄시켜 준다면 개나 소도 다 반성문 쓰고 나올 일이다. 법원의 판단이 그렇게 우연적이고 심정적인 판단에 매달린다면 법의 엄중함을 어디서 볼 수 있겠고, 그런 범죄가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예방적 처벌의 효과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음으로 다른 이유가 된 동종 전과가 없다는 점을 보자. 전과가 없는 초범의 경우 정상을 참작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경우에 따라서다. 죄질이 불량하고 위중하고 반인륜적이고, 앞으로 반복될 가능성이 높은 범죄에도 똑같이 초범이라 정상을 참작한다는 것은 법원이 별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판단했다는 것 외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다시 한 번 양형의 이유를 보자. “죄질이 불량하지만 동종 전과가 없는 점, 범행을 반성하는 점을 참작했다.” 이런 표현은 대부분 copy and paste로 이루어지는 상투적 판단이다. 혹은 자판기에 넣고 커피 뽑는 것처럼 기계적이다. 이 판단에는 아동 성 매수가 얼마나 불량한 죄질인지에 대한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법원의 판단은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아동 성 매수가 갖는 반인륜성과 폭력성이 어떻고, 또 그 판단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파급효과가 있는지에 대한 아무런 성찰이 없다. 미성년자에 대한 성폭행이나 성 매수 등과 관련해 죄를 엄중하게 묻는 것은 세계적으로 일반적 추세이다. 그만큼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등의 발달로 아동 성매매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추세를 저지하고 경고하기 위해서 더 엄중하게 처벌해야 하는데 대한민국의 법원은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이런 기계적 판단에는 그런 관심과 파급효과 등을 의도적으로 차단하려는 전문가의 계산된 냉정함이 엿보일 지경이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일까?

 

일반인의 호기심 이상으로 법원의 판단에 대해 알 수 없는 나로서는 다만 법적 판단이 상당 부분 우연적이고 자의적으로 내려지고 있다고 생각할 밖에 없다. 이런 우연과 자의의 틈바구니로 정치적 압력, 금전의 유혹, 전관예우 같은 비합리적 요소가 들어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원의 판단을 불신하는 사람들은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 “유전 무죄요, 무전 유죄” 혹은 “늘었다 줄었다 하는 고무줄 판결”로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법의 판단이 그럴 수 없고, 결코 그래서도 안 된다. 엄중하고 공정해야 할 법원의 판단이 이렇게 자의적이고 우연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법적 정의가 훼손이 되고 법적 질서와 안정이 깨질 수가 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이 떠안게 되지 않겠는가? 12살짜리 아동 성 매수 범을 집행유예로 쉽게 풀어 줄 정도로 법원은 성범죄에 대해 관대하단 말인가? 법원은 자신들이 내리는 판단의 의미와 효과에 대해 좀 더 신중하고 성찰적이어야 할 것이다.

 

일본철학사전[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일본철학사전

 

이 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헤겔과 그의 시대

헤겔과 그의 시대

어제 Yes24에서 건국대의 이신철 박사가 번역한 헤겔 관련 책을 2권 주문해서 받았다. 하나는 하세가와 히로시의 『헤겔 정신현상학 입문』이

고 다른 하나는 곤자 다케시의 『헤겔과 그의 시대』다. 히로시는 헤겔 원전 번역으로 독일 정부로부터 <레싱> 상도 받았다고 한다. 아직 제대로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두 권 다 연구가 탄탄한 느낌이다. 일본 학계의 연구 수준을 잘 반영하는 것 같다. 그런데 표지 날개를 보니 이 책을 번역한 이신철 박사가 칸트, 헤겔, 현상학, 마르크스, 니체까지 막대한 분량의 철학 사전을 다 번역한 것을 보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평생을 작업해도 힘들 엄청난 분량과 난이도 높은 철학 사전들을 이렇게 혼자서 번역을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고, 또 그러면서 한국 철학회나 출판계에서 그 흔한 번역상 하나 받지 못했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뒤로는 볼 것 안 볼 것 다 보면서도 앞으로는 무시하는 우리 학계와 문화계의 전형적인 이중성에 다름 아니다.

 

헤겔정신현상학입문

헤겔정신현상학입문

그런데 두 번째로 놀란 것은 오전에 <법철학> 강의에서 발표하던 한 학생이 의도(Vorsatz)와 기도(Absicht)라는 용어를 이해하기 위해 네이버 사전을 활용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다. 네이버에 『헤겔 사전』이 제공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한 번 네이버에서 검색을 해보니 이박사가 번역한 일본철학계의 사전들이 다 제공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지식검색 사이트에서 제공되는 사전들의 내용이 모두 일본에서 출간된 철학사전에 기초한 것이다. 이것을 확인하고 나서 착잡한 느낌이 든다. 한국 철학계에 수없이 많은 학회들이 존재하고, 그 이상의 학회지들을 발간하며 수많은 논문들을 쏟아내면서도 솔직히 사전 한 권 못 만들고 있다. 오래 전에 학원사에서 나온 철학 사전도 다 일본 사전을 번역하고, 몇 개 항목만 국내 학자가 추가한 것들이다. 20여 년 전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나온 『철학대사전』은 구동독에서 출간된 것을 집단 작업을 통해 번역했고, 동양철학 항목들은 국내 소장 학자들이 공동 집필했다. 하지만 이 사전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세계관이 유명무실해졌기 때문에 더는 생명을 유지하기 힘들다. 사정이 이런데 한 개인과 한 출판사의 노력으로 사전들이 대거 번역이 되고, 또 그것이 네이버에서 실시간으로 제공되고 있다. 이런 사정을 한국 철학계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알고 있으면서 짐짓 모른 체 눈감고 있는 것인지…어떤 경우든 한국 철학계와 책임 있는 철학자들이 참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한국 철학계가 대중과 거의 유리된 상태에서 A4 10장짜리 논문과 연구비, 실적과 승진을 위한 연구에 매달릴 때 일본 철학회는 우리가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하게 기초 연구 시스템을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지방 대학출신들도 노벨상을 받는 일본 과학계의 탄탄한 연구 시스템이 인문학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다. 지금은 그렇게 노골적으로 하기 힘들겠지만 우리 윗세대 학자들 가운데는 일본 논문이나 저서를 이름만 바꿔서 출간한 것도 적지 않고, 나 개인적으로도 구체적으로 확인한 바 있다. 내가 대학졸업 논문을 쓸 때이니까 30년도 더 된 현실이다. 그런데 그 이후로 우리 학계가 양적으로 많이 성장했지만 내부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내 전공과 관련해서 갖는 느낌이다. 헤겔의 주요 저작들이 우리말로 번역되고 여러 차례 재번역까지 되었지만 전공 학자들이 인용하기 힘들 정도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똑같은 책들이 여러 번역자들에 의해 최근까지 재번역되고 있다. 이렇게 기초 작업과 기초 연구가 무시되고 소홀히 되다 보니 우리 연구자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이론, 새로운 철학만 찾아 헤매는 것이 솔직한 실정이다. 물론 새로운 것을 찾고 연구하는 것은 학자들의 당연한 임무겠지만 뿌리 없이 유행 따라 이루어지는 연구는 생명이 길지도 못하고 더더구나 창의적인 작업을 기대하기는 더 힘들다.

 

개인적으로 오늘부터 일본어를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당장 인터넷으로 하세가와 히로시가 번역한 헤겔의 『정신현상학』 일본판을 주문했다. 일본어는 같은 알타이어 계 언어이고 한자문화권에 있어 다른 언어보다 쉽게 배울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다보면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될 것 같아 의도적으로 안 배우고 일본 학계의 동향을 무시했었다. 하지만 더는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 지금 수준에서는 우리가 여러 모로 수입하고 의존할 수밖에 없겠지만 어떻든 공개적으로 이 문제를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우리 학계, 아니 그 전에 나 스스로도 자극을 받고 무엇에 역점을 두고 무엇을 중시할지를 반성할 수 있지 않을까?

 

 

한글날을 생각하며[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한글날을 생각하며[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 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파이드로스』라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보면 소크라테스가 문자와 말의 관계에 관한 신화를 소개하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타무스 왕이 다스리는 테베에 토트라는 신이 찾아온다. 토트 신은 왕에게 통치에 필요한 여러가지 기술을 소개한다. 이 신은 서양에서 주사위 놀이를 처음 발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농사를 짓는 기술과 천문 지리에 관한 기술, 그리고 백성들의 병을 치료하는 기술을 말한다. 왕은 이 모든 기술이 대단히 실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기쁘게 받아들인다. 다음으로 토트 신이 백성들에게 문자를 가르쳐 주겠다고 제안을 한다. “왕이여, 이런 배움은 이집트 사람들을 더욱 지혜롭게 하고 기억력을 높여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억과 지혜의 묘약(phamakon)으로 발명된 것이니까요.” 그런데 유독 문자와 관련해서는 왕이 거부를 한다.

 

왕이 거부하는 첫 번째 이유가 흥미롭다. 첫째, 문자가 진리(truth)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짝퉁(the semblance of truth)만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문자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흥미로운 진단이다. 진리는 화석화된 문자가 아니라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우리의 의식(영혼)에 각인되는 것이다. 사실 현장의 생생한 소리는 영혼에 직접적으로 현전한다. 우리는 스승의 이런 목소리를 통해 진리를 깨우치고 또 이 진리를 똑 같은 형태로 전승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자로 표현되는 순간 이런 생생한 현전이 사라진다. 문자는 다만 그것을 저장할 뿐이고, 우리는 그 저장되고 기록된 문자를 통해 화석화된 진리의 흔적(semblance, 짝퉁)만을 상기할 뿐이다. 문자는 영혼의 기억(memory) 능력을 퇴화시키고, 다만 떠올리는 능력(상기: reminiscence)만 남긴다. 모든 종교에서 스승(구루)의 역할은 이런 생생한 진리를 우리의 영혼에 각인시키는 데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그 스승은 대부분 남성과 아버지로 나타난다. 그런데 문자는 독학을 가능하게 하므로 스승이 필요 없고, 스승의 권위도 잊게 한다. 권위가 사라지면 결국 왕의 통치도 위험해질 수 있다고 본다. 이런 몇 가지 이유를 들어 타무스 왕은 토트 신이 문자를 가르쳐주겠다는 제안을 거부한 것이다.

 

문자가 진리의 생생한 현전을 단순한 모방(시뮬라크르)으로 변질시킴으로써 서양의 로고스의 형이상학을 지탱해왔다는 데리다의 분석은 일면 타당하다. 목소리(음성)는 이 현전의 형이상학을 통해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권위와 통치의 권위를 정당화한 것이다. 테베의 왕은 문자가 도입되면 이런 아버지와 스승, 그리고 왕의 권위가 무너질 것을 우려해서 문자를 전해주겠다는 토트 신의 제안을 거부했다. 하지만 이런 역할을 목소리만 담당했겠는가? 문자 역시 그것을 아는 식자識者와 무식자 無識者를 차별하고, 식자의 강력하고 유효한 통치수단으로 활용되어 오지 않았던가? 전통적인 유교 경서에 기반한 조선의 과거시험은 통치를 담당하는 관료들을 등용하는 관문의 역할을 했다. 때문에 한문을 모르고 경서를 읽지 못한 일반 대중은 반상의 차별 이상으로 통치계급에 접근할 수 있는 지식이 없다. 조선에서 한자라는 문자는 봉건적인 조선의 위계질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해주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15세기 중반 조선의 위대한 왕 세종은 문자를 거부하는 테베의 왕과 다르게 오히려 적극적으로 문자를 발명해서 어리석은 백성의 삶을 개선하려 한 것이 아닌가?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끼리 서로 맞지 아니 할세. 이런 이유로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쉽게 펴지 못할 놈이 많으니라. 내 이를 위하여 어여삐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니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쉬이 익혀 날로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훈민정음 서문)

 

읽어 볼수록 명문이다. 중국과 조선이 언어 체계가 다른데 중국의 한자로 모든 생각을 표현하고, 모든 문서를 한문으로 작성하는 상황에서는 조선이 아무리 자주 독립을 외친다 해도 중화적 세계관을 벗어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한문에 접근하기 어려운 일반 대중의 뜻이 정치에 반영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까 한문은 중화적 세계관에 갇힌 조선의 봉건체제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외부적으로는 중화적 세계관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하겠다는 것이고, 내부적으로는 봉건적 위계질서 안에 민주주의의 정신적 토대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글 창제의 소식을 듣고 최만리를 위시한 조선의 양반 사대부들이 극렬 반대했다는 것은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 자신들이 누려왔던 보호와 기득권이 무너질 수 있었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이후 성경을 위시한 서적이 대량 보급되고 이것이 루터의 종교 개혁의 기반이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조선의 세종은 단순히 인쇄의 기술이 아닌 문자를 발명해서 보급하려 했던 것이니 그 얼마나 혁명적인가? 한글이 1446년에 반포되었고 유럽의 종교개혁이 1517년 시작이 되었으니 적어도 70년 이상을 앞서 있다.

 

전문 언어학자에 따르면, 영어와 독일어 그리고 프랑스어를 위시한 서구의 모든 언어는 인도 유럽피언 언어가 문화와 지역에 따라 특성화되고 개선되면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 발전된 것이다. 따라서 언어를 일정한 원리와 계획에 따라 독자적으로 발명한다는 것은 유럽의 전통이나 그 밖의 세계 어떤 전통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조선의 세종은 분명한 언어 창제의 원리에 따라 한글을 만든 것이다. 자음은 발성기관의 기능과 작동을 본 딴 음운학적 원리를 따르고, 모음은 동양사상의 오랜 전통인 천지인天地人이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 모든 글자는 모음과 자음이 독립적인 아닌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결국 한글이라는 글자는 음과 양의 대대관계, 우주 자연의 정신 및 철학과 몸과 기계의 기능 및 작동이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표현한다. 이 한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니까 한글의 표현가능성과 확장 가능성은 대단히 우수한 것이다. 게다가 음양의 원리와 같은 모음과 자음의 결합은 현대 컴퓨터 언어의 기초를 이루는 이치 논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기계어로 확장될 가능성도 무한하다. 오늘 날 인터넷에 기반 한 디지털 혁명에 언어학적으로 가장 활용성이 큰 언어가 한글인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글이 이런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표음문자로서의 한계도 적지 않다. 다시 말해 고도의 사색을 축약하고 추상하는 면에서는 표음문자가 그 역할을 다 할 수 없다. 반면 추상기능은 표의문자로서의 한문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장점이다.

 

이 점에서 나는 좀 더 솔직해지고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많은 한글학자들이 한글 한자 병행론을 비판하면서 한글 전용론을 외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첫째, 언어와 문자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고 문화가 바뀌면서, 새로운 말이 만들어지고 의미도 바뀔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는 조선시대의 한자나 그 한자로 만들어진 한문과는 큰 관계가 없다. 한중일이 똑같이 한자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발음은 전혀 다르고 의미 차이도 큰 경우가 있다. 한자는 중국에서 탄생했을지라도 오늘날 그것은 동아시아의 정신문화의 근간일 뿐이다. 그런 한자를 받아들여 오래 사용하면서 이미 각 나라 별로 토착화되고 변용된 것이다. 마치 유럽의 영어와 독일어,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등 모든 유럽 언어가 인구어 전통의 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각 나라 별로 발전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라틴어는 유럽 언어의 근간이자 정신적 뿌리 역할을 하면서 각 나라의 언어의 내용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들이 교육과정에 라틴어를 도입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한자도 마찬가지여야 한다고 본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70%가 한자로 만들어진 개념어이다. 그런데 그것을 표음문자인 한글로 표기가 된다고 해서 모두 음성언어로 바꾼다는 것은 비효율적일 뿐더러 무식의 표현이다. 간단히 말해 한글학자 최현배 식으로 모든 것을 인위적으로 한글로 바꾸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우리 사고의 영역을 절대적으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이미 한자는 동아시아의 오랜 전통 속에서 타자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 언어 체계 속으로 동화된 우리 언어나 다름없다 보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것이다. 마치 영어와 독일어 그리고 프랑스어와 같은 각 언어가 라틴어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그들 나라의 모국어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지와 같다. 이런 의미의 한자는 과거의 서책에서 발견되는 한문과도 별 상관없다. 때문에 일상적으로 표현되는 한자를 알 수 있는 교육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하겠다.

 

둘째, 동양철학이나 불교 관련 논문들 그리고 책들을 보다 보면 수백, 수천 년 전의 한문 투가 전혀 번역이 되지 않은 상태로 쓰이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심지어 페이스 북에도 불교 경전이 한문 투를 거의 바꾸지 않은 상태로 올라오는 경우가 있다. 만약 그것이 문헌학의 대상이라면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떤 의미 있는 종교적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그렇게 했다고 하면 그것은 대단히 문제가 있다고 본다. 어떤 이는 그것이 그 사상이나 종교의 핵심을 표현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예를 들어 불교의 사상도 인도에서 유래한 것이고, 그것이 중국의 한자와 사상을 통해 번역된 것이다. 수 백, 수 천 년 전의 한문 투는 그 당시 중국 사람들, 혹은 한자 문화권 하에서 자기 언어가 없던 우리 조상들의 생각을 표현하는 어쩔 수 없는 방식일 뿐이다. 문헌학적 연구나 사상사적 연구가 아니라면 빼어난 우리 한글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그 오래된 유물을 반복할 이유는 전혀 없다.

 

세상이 달라지고 문화가 달라지고 사용하는 언어도 바뀌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과거의 그런 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과거에 예속된 것이고 지적으로 태만한 것이다. 이때의 번역은 단순히 한글 전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 한국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한글과 한자로 이루어진 국어에 의한 번역이고 가독성에 기초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할 때 비로소 고전이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될 수 있다. 불교든 동양사상이든, 아니면 서양사상이든 우리가 이런 언어를 가지고 표현할 때 그 모든 것들은 더 이상 타자의 사상이 아니라 우리 사상 속에서 재해석될 수 있다고 본다. 데카르트가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철학책을 쓰고, 괴테가 독일어로 소설을 쓰면서 비로소 프랑스 철학과 독일 문학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과 같지 않을까?.

 

셋째, 오늘 날 한글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것보다 다른 데 있을지 모른다. 지난 수 십 년간 이룩한 경제 성장과 세계화, 인터넷의 등장은 영어의 위력을 말할 수 없이 키워 놓았다. 여기에는 자연발생적인 측면도 있지만 인위적으로 이루어진 영어 교육의 열풍도 크다. 한국처럼 영어가 돈을 벌고 출세를 하는 데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사회에서는 영어의 비중은 말 할 수 없이 크다. 때문에 이런 영어의 영향력이 불가피한 측면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좀 더 큰 문제는 인위적인 영어의 열풍과 교육이 새로운 정신적 사대주의를 조성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창의적인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대학 강의조차 영어강의를 획일적으로 강요하고 있다.

 

국문학이나 한문학도 영어로 강의를 하고 유럽에서 유럽 학문을 공부하고 돌아온 선생한테도 영어강의를 요구한다. 대학평가 점수와 연관되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것은 학문의 내용과 질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처사다. 영어로 언어를 획일화하는 것은 언어 생태계를 파괴하고 학문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해칠 수 있을 뿐더러, 모국어로 연구하고 사유할 수 있는 것을 막음으로써 학문의 창의적이고 장기적인 발전도 막는 것이다. 영어 강의자를 우대하고 국내 대학 출신이 자연스럽게 배제됨으로써, 학문의 사대적 종속을 심화시키고 새로운 언어 계급주의를 야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학문의 자생적 발전이 절대적으로 어려워지고 있다. 이웃나라 일본에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모두 국내파 지방대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의 획일적 언어 정책이 얼마나 대학의 창의적 교육을 망치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한글날은 결코 일회적인 행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잘못된 한글화 정책으로 모국어의 풍부한 자원을 스스로 황폐화시켜서도 안 된다. 학자들은 끊임없이 이 모국어를 통해 훌륭한 정신적 창작물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서양철학이 수입된 지 120년이 넘어가도 아직 이렇다 할 우리 철학의 자랑거리가 되는 저작이 없는 실정이다. 모국어로 쓰인 훌륭한 창작물은 그것이 비록 서양 사상이나 과거의 중국철학, 불교철학을 기술한 것이라 해도 우리의 철학이다. 이 점은 다른 학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국어의 정신을 살려 표현하는 것은 단순히 간판 몇 개 바꾸고, 낱말 몇 개 한글로 표현해서 쓰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이다. 우리는 언제가야 진정 이 모국어로 사유하고, 이 모국어로 쓰인 문헌들을 중심으로 참조하고, 이 모국어로 우리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고, 그리하여 이 모국어로 빼어난 정신적 창작물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정치적 판단과 법적 판단[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정치적 판단과 법적 판단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지난 주말 두 가지 판단이 논란이 되었습니다. 하나는 민주당 비대위 대표 박영선이 2011년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 2012년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으로 활동하며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던 이상돈 교수를 비대위 위원장으로 내정했다는 정치적 판단이고, 다른 하나는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국정원 선거 개입 관련 재판에서 전 국정원장 원세훈에 내려진 법원의 판단입니다. 둘 다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는 예민한 문제인데, 저는 판단이라는 의미에서 한 번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 따르면 판단은 보편과 특수를 결합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에는 크게 이미 존재하는 보편을 특수에 적용하는 규정적 판단과 특수로부터 보편을 찾는 반성적 판단이 있습니다. 전자는 도덕적이고 법적인 판단에서 많이 볼 수 있고, 후자는 미적이고 정치적인 상황에서 많이 내려집니다.

 

먼저 특수에서 보편을 찾는 정치적 판단을 보지요. 세월호 정국에서 비대위 대표를 맡은 박영선의 행로를 보면 괴이할 정도입니다. 새누리와의 협상안이 당내에서 두 번이나 부결이 되고, 유족들의 반발도 크게 샀지요. 협상 내용을 떠나서 협상의 기본적인 원칙과 방식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협상에 들어가려면 관련 당사자의 합의를 거친 내용이 있어야 하는데, 그걸 상대측과 협상하고 와서 당내에서 그리고 유족들의 동의를 구하는 형태인거지요. 본말이 전도된 셈이지요. 비상 상황이라 전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부결되었으면 다시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런 실수를 두 번 되풀이하는 것을 보고 괴이쩍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두 번 실수는 분명히 책임을 물어야 하는데 새민련에서 그냥 넘어간 것도 문제이고요. 그런데 이번에는 새민련 내부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서 이상돈 교수를 영입하려 했다가 당내의 큰 반발을 사고 있습니다. 아하, 이 대목에 와서 나는 박 대표가 정말 정치적 판단력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얼마나 포스트 모던적으로 생각을 해서 여야와 진보/보수의 경계를 넘나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상돈 교수는 직전 대통령 선거까지 적장의 책사 노릇을 했던 자가 아닙니까? 그가 아무리 새누리를 비판하고 있고, 합리적 사고와 중도 입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적장의 책사를 자당의 비대위 위원장으로 앉히려는 생각을 했을까요?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 그렇게 했을까요? 나는 이것이 정치의 기본도 모르고, 정치적 판단이 전혀 안 돼 있는 데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는 현 상황이 아무런 질적 차이가 없이 무수한 잡다들의 혼재로 비춰진 것이지요. 다 그놈이 그 놈이고, 대신 좀 더 낫거나 좀 더 나쁜 정도의 차이로만 파악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 상황의 보편적이고 객관적 의미나 원리가 파악이 안 되는 거라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을 못한다는 것이지요.

 

칼 슈미트 이야기처럼 정치란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야 전선이 어디에 있고, 전략을 어떻게 세우며 전방과 후방에 인력을 어떻게 배치해야 하는지를 확실히 할 수가 있지요. 이건 강경파니 온건파니 하는 문제와는 상관도 없습니다. 그동안 새민련이 세월호 정국에서 허둥지둥 거리면서 새누리에 면박당하고 유족들 꽁무니를 따라 다닌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니까 어떻게 행동할 지 판단이 서지 않은 거지요. 한 마디로 정치적 판단력의 부재 혹은 무능, 정치에 대한 무감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셈입니다. 이럴 때는 다른 수 없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장수를 갈아치우는 수밖에요.

 

사진-ttp://www.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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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은 앞서의 경우처럼 특수한 상황으로부터 그 객관적 의미를 찾아가는 반성적 판단이 있는 반면, 어떤 원칙이나 규칙을 가지고 특수한 상황에 적용하는 규정적 판단도 있습니다. 국정원장이 지난 선거 정국에서 선거법을 위반했는지를 판단할 때, 국정원법을 위반해서 정치에 개입한 것에 대해서는 유죄를 인정했지만 선거에 개입한 부분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한 겁니다. 게다가 정상 참작으로 집행유예를 선고했으니까 사실상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은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명백히 국정원장이 직원들을 동원해서 11만 건이나 되는 댓글 공작을 한 정황이 드러났음에도 선거법 위반이 아니고 구속도 되지 않았으니 국민의 법 감정이나 여론이 용납하기 힘든 것이겠지요.

 

법적 판단은 사건과 관련된 여러 증거들을 판단해서 해당 법 조항을 적용하는 것이지요. 이 때 이런 판단은 특수한 상황이나 증거에 어떤 조항이나 원칙이 적용되는 가가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상당한 증거 능력과 관련된 공방이 필요하죠. 본 사건의 경우에도 댓글 공작이 2012년 1월 전이고, 야당 후보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라 특정 후보의 탈락을 겨냥한 것이 아니고, 이런 댓글 행위가 일상적인 정치 행위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는 행위인지 등등을 따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증거가 확정이 됐을 때 검찰의 기소내용과 여기에 적용할 법조항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것이죠. 때문에 법원의 이런 판단은 상당히 정교하고 기술적인 법적 판단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법 실증주의자들이 말하듯 이 판단은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커피를 뽑는 식으로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사건의 의미와 정치적 성격, 그 파장 등을 바라보는 재판부의 입장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 재벌들이 탈세나 기타 등등으로 법원의 판결을 받을 때 이른바 국민 경제에 미친 공로나 영향 등을 판결 주문에 넣고 정상참작 운운하면서 집행유예로 빼 넣는 경우들이 다반사였습니다. 하자만 이것은 법치와 평등의 원칙에 어긋나는 재판부의 월권이나 다름없는 것이지요.

 

국민경제는 그들이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님에도 판사의 재량권과 해석권이란 차원에서 주관적이고 자의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법원이 재벌에 대해서 이런 봐주기식 판단을 상당히 제한하는 것은 법치와 사법부의 독립이란 측면에서 고무적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튼 재판부가 법조항이란 보편과 사건이라는 특수를 결합해서 판단할 때 자의성이 개입할 여지, 쉽게 말하면 정치적 판단의 여지가 많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판결문이 문제가 됩니다.

 

이번 판결에서는 국정원의 정치적 개입은 인정했으면서도 집행유예로 빼준 것도 문제가 될 겁니다.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할 국가 기관, 특히 정보기관이 조직적으로 정치에 개입한 것을 인정하고서도 유야무야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판단이지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반 상식적인 정치적 판단을 재판부가 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선거에 개입했는가의 여부를 판단할 때 적용한 법조항이 문제입니다. 법원은 선거법 제85조(선거운동금지)와 제86조(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 금지)의 차이를 부각시키면서 기소된 제85조 위반이 아니라고 합니다. ‘선거 또는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와 ‘선거운동’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는 공직선거법의 입법취지 및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 그 이유지요.

 

제86조는 검찰의 공소장에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법원이 판단할 이유가 없어서 별론으로 처리를 했습니다. 선거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선거운동 한다는 것보다 외연이 넓고 포괄적이죠. 죄형법정주의 운운하는 것은 그만큼 법을 엄격하고 좁게 적용하겠다는 제스처지요. 여기서 짜고 치는 고스톱 판을 연상케 합니다. 이미 국정원의 정치 및 선거 개입 여부에 대해 강력 수사하겠다고 했던 검찰 총장을 사생활 문제로 밀어냈고, 수사팀도 완전히 물갈이를 해놓았습니다. 이런 사전 정지 작업을 통해 건드리면 다친다는 무언의 경고를 한 셈이지요. 이제부터 검찰은 자기검열을 하게 된 것이고, 쉽게 말하면 알아서 기는 개가 될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지요. 제86조는 이미 민주당에서 고발장을 제출할 때 적용한 법규인데 검찰이 그걸 몰라서 뺐을까요? 당연히 바보가 아닌 바에야 국민은 검찰과 법원, 그리고 그 윗선의 거래에 대해 상상력을 발동할 수밖에 없지요.

 

세 번째로, 선거운동금지에 관한 85조 적용문제를 보지요. 법원은 국정원의 조직적인 댓글 공작을 정치활동으로 인정했으면서도 집행유예로 무력화했고,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라는 판단을 공소장에 없다는 것으로 빼버렸습니다. 이렇게 외연을 좁혀 놓고 나서 마지막으로 국정원의 조직적 댓글이 선거운동도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죄형법정주의 운운하면서 이렇게 좁고 엄격하게 법을 적용하느라 재판부도 고심 많이 했을 겁니다. 한 마디로 재판부는 축소전략을 쓴 것이고 이것이 일관성이 있다고 한다면 뭐라고 하겠나요? 법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하는 것은 법원의 덕목이니까요?

 

그런데 담당 판사는 2013년 야당 시의원의 리트윗 단 한건에 대해 벌금 500만 원이라는 의원직 상실 형을 선고했고, 야당 후보자 배우자가 월간지에 보도된 내용을 인용해 상대 후보자의 부정축재 의혹을 제기하는 이메일 1건을 보냈다는 이유만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한 쪽에서는 법을 한 없이 축소해서 적용하고, 다른 쪽에서는 한 없이 확장해서 적용한 셈이죠. 이러니 일반 국민의 법 감정은 법원의 판결을 고무줄 판결이라고 생각하고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로 생각하는 거지요. 법관의 자의성과 주관성, 게다가 정치적 판단이 민주주의의 발전에 중요한 판결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겠죠. 당장 현직 동료 판사가 이 판결문을 가지고 지록위마(指鹿爲馬)라고 비난하고 나선 겁니다. 동료의 판결문을 비판한다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고 용기 있는 행동일 것입니다.

 

중요한 대통령 선거 정국을 앞두고 정치에 개입은 했지만, 선거 운동은 아니라는 판단은 개도 웃을 일이지요. 손바닥으로 해를 가린다고 해서 가려질 수 있을까요? 법관들이 이렇게 뻘짓을 하니까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고, 법원 판결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판결을 가지고 어떤 이들은 법관들이 형식논리도 모른다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문제입니다. 검은 것을 검다 하고, 흰 것을 희다고 하지 못하는 거짓의 문제이지요.

 

나는 모든 법관들이 이렇게 정치성을 띤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물전의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고 소수의 출세지상주의 판사들이 사법부의 위상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지요. 당장 이 판결문에 대해 의롭게 문제제기를 하는 판사도 있고, 또 이재현 CJ 회장에 대해 과거의 재벌 봐주기 식과 다르게 엄격하게 법을 적용하는 재판부도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번의 원세훈 판결과 2013년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의 국정원 수사 은폐 사건 판결 같은 것은 법원이 스스로 알아서 기는 개가 되는 치욕적인 판결이고, 사법적 정의를 크게 후퇴시키는 판결이라 생각합니다.

 

검찰이야 행정부 소속이고, 최고 권력자의 입김이 검찰총장을 통해 압박으로 가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합니다. 하지만 삼권이 분리된 법치국가에서 법원이 독립적으로 판단을 하지 못하고 권력의 눈치를 본다는 것은 국민으로서 대단히 불행하게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민주주의와 법치는 헌법이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법을 운용하고 적용하고 또 판단하는 법관들이 법의 정신을 지키려고 노력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무소불위의 권력과 금력이 지금 정치를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국민을 소외시키고 있을 때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사법부가 아닐까요? 이 점에서 본다면 법률적 판단은 단순히 보편을 특수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규정적 판단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특수가 지니고 있는 보편성을 알아가는 반성적 판단도 개입하고 이를 통해 법의 정신과 법치주의가 살아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침단상[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아침단상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아침에 일어나서 페북의 타임라인을 보다 보니 두 가지 기사가 유독 눈을 끈다. 하나는 삼성 반도체 노동자로 일을 하다가 백혈병에 걸려 죽은 황유미 양의 아버지에 관한 기사이고, 다른 하나는 ‘경영판단의 원칙’에 관한 김 상조 교수의 시론이다. 둘 다 삼성과도 관련이 있다.

 

고 황양의 아버지는 인터뷰에서 항소심에서도 유가족의 판단에 손을 들어준 법원의 판단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딸이 백혈병에 걸린 지 9년만이고, 죽은 지 7년 만이다. 그 긴 세월 동안 꽃 같은 딸이 백혈병에 걸려 죽어가는 모습에 가슴아파하고, 또 그만큼 긴 세월동안 나 몰라라 하는 재벌 기업을 상대로 분노하면서 싸워왔던 아버지의 힘들었던 모습이 오버랩된다. 한국사회에서 개인이 재벌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외롭고 힘들고 모든 것을 바쳐야 하면서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무력감과 좌절감을 이겨내고 승리한 것이다.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힘이다. 그만큼 이런 승리는 보석같이 빛난다.

 

사진-http://hr-oreum.net

사진-http://hr-oreum.net

삼성반도체와의 싸움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 직업병으로 판정된 것은 2 케이스 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번 판결이 산재 보상의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정치 논쟁은 끝이 없지만 법원의 판결은 중요한 판례로 유사 사건들의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투쟁만을 일삼는 세월호 공방이 눈여겨 볼 대목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삼성도 기업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에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하며, 다른 유사 사건들도 전향적으로 잘 마무리를 했으면 한다. 삼성이 오늘날의 성공 신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건희 회장을 위시한 소수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 그 이면에 수많은 직원들의 헌신과 고통, 그리고 반도체 사망자들처럼 산재로 죽어간 노동자들의 피와 땀, 그리고 국민들의 소비와 국가의 정책적 지원 등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 세계적으로 성장한 기업으로서 윤리의식과 책임의식을 같이 키워야 할 것이다.

 

사실 이번 판결이 나기까지 무려 7년이나 걸렸던 데는 삼성의 무력시위와 악의적인 방해 공작, 그리고 막강한 로펌의 인력들이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법률가들의 지원을 받았기는 하지만, 이런 삼성의 권력에 맞서 일 개인이 소송을 벌인다는 것 자체도 상상하기 힘들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과 같기 때문에 미국의 법정이었더라면 이번 판결에서 단지 유족들의 손을 들어주는 것 이상으로 소송과정에서의 재벌의 행태에 대해 ‘징벌적 손해 배상’이 적용되어 천문학적 책임을 물게 했을 것이다. 이 법은 우리 국회에도 상정이 되었지만 국회로 진출한 법피아들의 방해로 아직도 계류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징벌적 배상 제도가 적용된다면 기업도 마음대로 소송과정에서 횡포를 부릴 수가 없을 것이다. 법원도 이 문제를 좀 더 전향적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그래야 이 땅에 정의가 살지 않겠는가?

 

다른 하나는 2년 가까이 소액주주운동을 벌여온 김상조 교수의 ‘경영판단의 원칙’에 관한 글이다. 지난 세기 말 IMF를 겪고, 2009년 금융위기도 거쳐 온 기업들이 투자 불확실을 이유로 사내에 엄청난 유보금을 쌓아 놓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대학도 천문학적 유보금을 쌓아 놓고 등록금 타령만 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 유보금을 그대로 적립할 것인지 아니면 특정 부문에 투자를 할 것인지는 기업의 고유한 경영판단이라는 것이다.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현 경제 내각이 이 부분에 높은 세율을 적용하겠다고 했지만 용두사미 격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런 경영판단은 일종의 초헌법적인 통치행위와 비슷한 의미가 있다. 국정의 총책임자인 대통령의 판단은 사법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 특별권력관계의 통치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지난 정권 때 엄청난 부실과 이권으로 진행된 4대강 사업에 대해 제대로 된 조사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 날 헌법학자들은 이런 초헌법적 통치행위가 헌법의 정신을 무력화한다고 해서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학설을 정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기업의 경영판단의 원칙이라는 것도 그 경계와 책임이 모호한 면이 적지 않다. 오늘날 기업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은 막중하다. 그런 기업, 특히 삼성과 같은 세계적인 기업의 경영판단의 잘잘못은 국가 경제와 국민들의 일상적 삶에도 큰 충격을 미칠 수가 있다. 때문에 그런 기업의 경영 판단을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필수적이다. 김 교수가 벌이는 ‘소액주주운동’도 그런 견제의 한 방식이다. 김 교수는 20년 전부터 경실련을 배경으로 소액주주 운동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삼성과도 많은 마찰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사실 이런 감시와 견제를 위해서는 단순히 분노와 의기만 믿고 할 수 없는, 고도의 전문적 지식이 요구된다. 때문에 이것은 그 방면의 전문가들, 지식인들만이 사회적 책임을 갖고 뛰어들 수 있는 부문이다.

 

나는 김 교수를 보면서 이 땅의 지식인들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늠한다. 전문적 지식을 갖고 높은 연봉을 받는 대학교수들이 일반인들과 똑같이 피켓 들고 행진하고 단식 흉내 내고 하는 것은 직무 태만이고 유기이다. 물론 그런 행동들이 전혀 필요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고도의 전문적 지식과 높은 연봉을 받는 만큼 그런 전문성을 발휘하는 방식으로 싸우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그들은 사회를 비판하고, 국민들을 움직이는 글을 쓰고 이론을 만들어야 하고, 전문적 식견을 통해 그런 비리와 불평등을 실증적으로 밝혀내야 한다. 1980년대 초 프랑스에서 사회당이 압승을 거둔 데에는 68운동 세대들의 이론들이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대학사회의 구조적 부정의와 불평등과 싸워야 하고, 이제 노골적으로 극우행동을 하는 젊은 학생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교육 현장에서 싸워야 한다. 오늘날 자본과 권력에 의해 순치된 대학이 자기 검열에 급급하는 데 어떻게 사회 비판을 할 수 있겠는가? 세월호 문제가 정체된 데는 지식인들과 법률가들의 전문성이 실종된 상태에서 일반인들과 똑같이 행동한 책임도 크다. 공론장을 이야기하고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떠들던 이 땅의 수많은 하버마스리언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궁금할 뿐이다. 결국 그들에게는 피켓 들고 세월호 운운 하는 것과 이 땅의 현실과 유리된 이론들을 수입해서 저들끼리 골방에서 티격태격 하는 것 사이에 아무런 연관도 없는 것 같다.

 

사정은 정치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국회의원 한 명을 운영하는데 연간 들어가는 비용이 5-6억이 넘는다고 한다. 본인의 세비와 보좌관들의 연봉, 그리고 사무실을 운영하고 기타 등등으로 들어가는 비용이다. 입법과 의정 활동을 하라고 국회에 보내주었지만 이들이 지난 몇 개월 동안 세월호 문제로 정치가 실종되는 동안 입법 활동을 한 것은 단 한 건도 없다고 한다. 이 정도 되면 직무 태만이 아니라 유기이고 해고감이 아닌가? 그러면서도 세비는 꼬박꼬박 챙기고 있다. 하다못해 감옥에 있는 통진당의 이석기 의원도 그동안 챙긴 세비가 6억이라고 한다. 거기다가 동료의원의 비리를 감싸는 방탄 국회를 만드는 데는 여야 없이 합심단결하고 있다. 이게 말이나 되는가? 하루 종일 폐지를 줍는 이 땅의 노인들의 한 달 폐지 수입이 5만원이고, 사회 변화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NGO 단체의 간사들이 한 달 100-150만원도 안 되고, 열심히 지식보따리를 들고 이 대학 저 대학으로 강의를 위해 뛰어다니는 대학 강사들의 연 수입이 1000-2000만원도 안 되는 현실을 그들은 아는가? 그럼에도 그들은 탱자탱자 하면서 엄청난 세비만 챙기고 특권만 누리고 있는 것이다. 무노동 무월급은 파업현장의 노동자들이 아니라 바로 이런 정치인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원칙이다.

 

한 마디로 우리 사회는 전문가들이 사라진 사회이고, 전문가들의 윤리와 책임의식이 실종된 사회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저 구석에 있는 지식인들의 이름은 꿰고 있지만, 우리 현실을 대처할 때는 그저 몸으로 때우는 것 외에는 -그것이라도 제대로 하면 모르겠지만- 할 줄 모르는 게 지식인이다. 아무런 전문적 훈련도 받지 못하고, 역량도 없는 인간들이 열심히 눈도장 찍어서 공천 받고 발품 팔아 당선되고 나면 나 몰라나라 하는 정치인들이 득세하는 한 이 땅의 변화와 개혁은 요원할 뿐이다.

 

 

 

그림자 박물관[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13

그림자 박물관[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13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크기변환_그13

그림자들은 열린 문으로 자유롭게 훨훨 날아가고
마법할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른 체 쿨쿨
마법나라의 젊고 힘센 왕이 되는 꿈을 꾸며
꿈의 나라로 빠져들어 갔어.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나는 왜 김영오 선생의 단식을 반대하는가?”[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나는 왜 김영오 선생의 단식을 반대하는가?”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벌써 4달이 넘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누가 책임이 있고, 앞으로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다. 오히려 딸의 죽음의 진상을 밝힐 수 있도록 특별법을 제정해 달라는 유민의 아빠 김영오 선생만 37일이라는 초인적 단식을 진행하고 있다.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듯하다. 그이의 얼굴, 그이의 눈빛을 바라 볼 때 도저히 언어로 표현할 길 없는 어떤 숭고함의 비극을 느낀다. 그는 법제정이 이루어지 지지 않는 한 죽음도 불사하리라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오늘 여야는 재협상을 통해 다시 합의안을 끌어냈다. 지난 번 합의안에 비해 특별히 주목할 사항은 1-1. 항목이다. 즉 “특별검사 후보 추천위원회 위원 중 국회에서 추천하는 4명 중 여당 2인의 경우 야당과 세월호 사건 유가족의 사전 동의를 받아서 선정하여야 한다.”

 

사진-민중의 소리

사진-민중의 소리

이 합의안에 대해 김영오 선생을 위시한 유가족들은 당장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제대로 된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원하는 유가족들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월호 정국은 다시 화해와 타협이 불가능한 파국의 상황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김영오 선생도 목숨을 거는 단식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여야 합의안과 유가족들의 반대 여부와 상관없이, 나는 이처럼 죽음을 불사하는 단식을 지지할 수도 없고 허용해서도 안 된다고 본다. 예민한 정국에서 오해를 살 수도 있겠지만, 다음에 제시하는 몇 가지의 이유는 내가 충심으로 제시하는 것들이다.

 

첫째로, 선생의 뜻은 숭고하지만 생명까지 파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생명을 살리자는 법을 죽음을 담보로 만들 수 없다. 선생의 결연한 입법 의지는 지금까지의 단식으로도 충분히 표현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선생에게는 죽은 딸만이 아니라, 앞으로 잘 키워야 할 딸도 있다. 그 딸에게는 언니가 죽은 것이 깊은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다. 그런데 다시 아빠의 똑같은 모습을 대한다면 그것은 도저히 부모로서 보여줄 모습이 아니다. 아빠의 그런 행동은 진정성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가족이라는 큰 인륜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한 개인의 목숨이 이 사회의 미래를 다 책임질 수도 없고 책임져도 안 된다. 세상의 질서는 개인의 진정성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단식은 도저히 다른 수단을 사용할 수 없는 약자가 자신의 의사와 의지를 표현하는 마지막 수단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죽음을 불사하고 생명을 내 던지는 수단이 된다면 더 큰 인륜을 파괴할 수 있다. 더불어 사는 공동체 안에서는 우리가 지켜야 할 인륜적 질서가 있다. 이 인륜적 질서가 파괴된다면 어떤 결과가 벌어지겠는가? 개인의 진정성은 새로운 독단일 수 있고, 광기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둘째, 특별법은 모든 것을 해결하는 만능열쇠가 아니다. 특별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입법이 되어도 그 법에 따라 누가 어떤 의지를 갖고 조사를 하느냐가 있고, 조사의 결과를 가지고 법원에서 다툴 때도 법원이 어떤 판단을 할지 모른다. 또 그 판단의 결과를 가지고 실행에 옮길 때도 수많은 방해와 공작이 있을 것이다. 싸움은 특별법 하나로 단판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첫 단추를 어떻게 꿰는가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 첫 단추 하나에 모든 것을, 특히 사람의 소중한 생명을 걸 수는 없다.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은 앞으로도 수많은 시간과 수많은 장소에서 벌어질 것이다. 그 때마다 성숙한 국민의 비판 정신으로 장애물을 관철하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야만 한다. 특별법이 만능열쇠인 양 여기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은 지나치게 법을 물신화하고 신격화하는 것이다. 이제는 정파 간에 타협을 해야 할 때이다. 만족스럽지는 못해도 두 번째 합의안이 나왔다. 정치는 타협이고, 법은 그 타협의 산물이다. 이미 협상에 들어갈 때부터 성역 없는 수사권이 아닌 특검추천권을 쟁점으로 삼은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여당 2인의 경우 야당과 세월호 사건 유가족의 사전 동의를 받아서 선정하여야 한다”는 합의안을 거부할 이유는 없다. 이 정도의 문제로 목숨을 건 단식을 계속할 수는 없다.

 

셋째, 법은 도덕이나 종교가 아니다. 도덕과 종교는 모든 악을 버리고 절대 선을 취하는 근본주의를 선택할 수 있지만, 법은 정치 세력 간에 타협할 수밖에 없고 차선책일 수밖에 없다. 국가는 이런 법에 의해서 움직이는 체제이다. 아무리 숭고한 뜻을 가졌다 하더라도 한 개인의 목숨을 담보로 그런 국가를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 특별법이 유가족들의 뜻에 못 미친다고 하면, 그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국민들의 의지와 정신이 성숙하지 못한 탓이다. 그것은 유가족들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는 야권의 정치적 역량의 한계이고, 세력이 불리한 탓이다. 그것은 입으로만 비판을 외칠 뿐 실질적인 변화의 역량 구체에는 관심 없는 이 땅의 양심 세력들의 한계 탓이다. 이런 부족한 역량과 불리한 세를 가지고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겠다고 하면, 그것은 오히려 독단으로 가는 지름길이고 민주주의 사회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법은 그 시대를 사는 국민들의 자유로운 의지의 산물이다. 특별법에 반대하는 국민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의 의지도 반영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법은 도덕이나 종교처럼 최선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세계의 입법을 원하면서 죽음을 불사하는 순교의 정신을 보인다면, 그것은 이 나라를 도덕 국가, 신정 국가로 되돌리는 것이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하는 것이다. 순결한 도덕과 종교의 정신이 잠시 우리 정신을 위안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법을 제치고 우리 사회 갈등 해결의 최종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좋든 싫든 이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이고, 그 법은 정치 세력들 간에 타협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길래 어떤 철학자는 그 시대의 법은 그 시대의 국민의 정신의 수준을 대변한다고 말한 것이다.

 

여야 간의 합의안에 유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시민단체와 새정련 내부에서도 다시 반발이 크다고 한다. 유족들의 반대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시민단체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더는 유가족들을 세월호 정국의 최전선으로 내밀어서는 안 된다. 그이의 끝없는 단식을 볼모로 현 정세에서 이룰 수 없는 조건을 더는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 죽음을 불사한 단식을 영웅시하면 안 된다. 그것은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나쁜 것이며 잘못된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새정련 내부에서 타협안을 거부하는 의원들의 비겁함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당신들의 무능함으로 현실 정치의 주도권도 내주고, 세월호 정국도 지지부진하게 만든 것이 아닌가? 정치인들이 앞장서서 풀어야 할 것을 풀지 못한 탓으로 유가족들과 시민들이 볼모로 잡힌 것이 아닌가? 당신들이 진정으로 타협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 전에 의원직 총사퇴를 하라. 그 길만이 실종된 정치를 되살리고, 벼랑 끝에 선 유가족들을 살리는 것이다. 이제는 도덕과 종교가 아니라 정치가 나서야 할 때이다.

 

내가 이렇게 장황하게 단식을 반대하는 이유는 한 가지로 모아진다. 이 세계 안에, 그리고 이 세계 밖에서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생명을 내 던지는 순간, 이 사회는 더 위험한 나락으로 빠져들기 때문이다. 부디 이제 그만 단식을 중단해주길 바란다. 선생의 숭고한 뜻을 가지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이 있기 때문이다.

교황의 방문을 환영하며[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교황의 방문을 환영하며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으로 나라 전체가 술렁이고 있다. 정부는 정부대로 대한민국의 흥보 효과를 생각하고 있고,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시한 야권은 대한민국의 부정의를 알리고 세월호 문제를 풀어주었으면 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는 기독교에 대해 별로 호의적인 사람도 아니고, 또 일 개인을 영웅처럼 숭배하는 분위기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때문에 교황 방문을 그저 외국의 한 사절이 오는가보다 하는 정도로 데면데면하게 생각한다. 다만 프란치스코 교황의 파격적인 행보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다. 부도덕하고 불평등한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이탈리아 정치의 암적 존재인 마피아를 파문하고 또 한없이 고통받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하려는 교황의 모습은 종교 지도자 이전에 인간적으로도 존경할만하다.

 

나는 모든 것을 물질의 운동으로 믿는 소박한 유물론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체 유심조를 순박하게 믿는 유심론자도 아니다. 아마도 유물론과 유심론의 절충이거나 양극단의 화합을 요구하고 중용을 찾는, 그래서 대개는 건전한 이성의 봉쌍스에 기대는 사람 정도가 나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종교를 배척하지도 않고, 숭배하지도 않는다. 또 종교를 무시하거나 무관심하게 대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종교 역시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며, 인간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삶의 형식(Lebensform)으로 이해해도 좋다. 나의 이런 어정쩡한 태도가 때로는 모든 종교에 대해 싸잡아 비판할 수 있는 거리 유지에 도움이 된다. 내 수업을 듣던 어떤 신심이 굳은 학생은 나의 이런 모습이 딱해 보였는지 한 번은 창조 과학과 전도와 관련된 책 두 권을 선물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성장하는 과정에서는 종교에 한번 젖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서 내 학생의 부모인 목사에게 내 딸을 좀 인도해 줍사고 데려간 적도 있다. 내 딸도 한 1년 열심히 다니더니 나를 닮아서 그런지 그 다음에는 별로 흥미를 못 느끼는 것 같다. 내가 산을 탈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는 산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다름 아니라 전국의 유명한 사찰을 탐방하는 일이다. 그래서 유명 산천의 도처에 있는 웬만한 절들은 다 가봤고, 사찰마다 미묘한 분위기와 풍경의 차이 등을 좋아한다.

 

내가 결정적으로 유물론자가 될 수 없는 것은 종교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특성과도 연관이 있다. 종교의 발생과 진화를 여러 가지 차원에서 설명하지만, 나는 종교를 결정적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한다. 하나는 종교의 초월과 관련한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관계에서 종교가 던지는 메시지와 관련되어 있다. 종교는 다른 어떤 것보다 인간의 유한성을 깨우치고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늪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는 바울의 고백은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음을 통렬히 고백하고 있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아침 이슬과 같고 파도 거품과 같다는 금강경의 한 구절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유한성에 대한 자각으로 인해 종교는 무엇보다 우리의 시선을 감각적이고 가시적이고 현세적인 것에만 머물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한다. 현재의 이 삶에 대한 우리의 단단한 시야를 끌어 올려 저 너머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단순히 현실 도피로 생각할 수는 없다. 이러한 초월에 대한 자각은 현재의 삶을 보다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한다. 죽음에 대한 자각, 초월에 대한 의식은 현재의 삶을 어떻게 꾸려 나가야 하고, 또 무엇을 지향할 것인지를 깨우쳐준다. 모든 상대적인 것들 너머의 어떤 절대자는 이런 유한자들의 불평등과 부정의, 부도덕 등을 성찰하고 비판할 수 있는 하나의 지침이다. 맑스가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폄하하고, 과학적 실증주의나 유물론이 비등할 때마다 종교를 전근대적이고 미신적이라고 부정해왔지만, 종교가 갖는 이런 초월에 대한 인간의 지향성을 결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고등 종교의 메시지는 한 결 같이 사랑과 자비 등과 같이 더불어 사는 인간들 간의 관계의 덕목을 중시한다. 이런 사랑과 자비는 빈부와 남녀, 귀천을 따지지 않는다. 이점에서 본다면 종교는 근대의 평등이나 인권 사상이 나오기 훨씬 이전에 평등과 인권의 사상을 선취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수가 산상수훈을 할 때 전한 사랑의 메시지는 현실 세계의 불평등과 부정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혁명적 메시지이다. 신은 인간을 지배하는 권력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불평등한 신분과 권력관계를 넘어서 있는 사랑이라는 것이 아닌가? 이런 예수의 모습이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구원과 희망, 혹은 해방의 선지자로 보였고, 기존 권력의 지배자들에게는 반역을 꾀하는 혁명가로 비춰졌을 것이다. 이런 사랑의 정신은 불교의 자비의 정신, 혹은 유교의 인(仁)의 사상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점에서 모든 고등 종교는 이 세계 안에서 인간들이 다른 어떤 조건이나 제약, 차이 등을 넘어서 서로 더불어 사는 지혜를 깨우쳐 주고 있다. 나는 현실 세계 안에서의 종교의 가장 큰 얼굴은 사랑 그 자체라고 본다. 그런데 꼭 근본주의가 아니라도, 종교의 이름을 걸고 증오와 갈등을 조장하는 경우를 우리는 부지기수로 본다. 종교가 현실 세계에서 하나의 권력이 되고, 이 권력 다툼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선봉장 역할을 하는 경우이다. 종교는 내면의 확신을 지지해주고 정당화해주기 때문에 그만큼 더 강하고 무서울 수 있다.

 

사실 종교가 현실 권력으로 변질되는 데는 종교 자체에도 원인이 있다. 예수나 석가, 혹은 마호메트나 공자와 같이 최초의 선지자의 메시지가 전달될 때는 사랑과 진리, 그리고 초월 등의 메시지는 선지자 자신과 동일시된다. 하지만 선지자가 죽고 나서 그의 메시지가 후대로 전달될 만큼의 생명력을 갖추려면 몇 가지 조건이 요구된다. 무엇보다 선지자를 따르는 제자들 집단이다. 이런 제자들 가운데는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도 있고, 이 제자들의 제자들도 있을 것이다. 순전히 스승의 가르침을 전달하려는 이런 제자들 혹은 신자들의 집단이 후대로 가면서 전문화된 사제 집단으로 관료화될 수 있다. 그 다음 선지자가 죽고 나면 그의 가르침의 원형을 보전하려는 움직임이 생긴다. 일종의 교리를 정립하는 것인데, 이것은 경전으로 완성된다. 경전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이단을 배척하고 자기 정체성을 확립한다. 이렇게 정립된 교리가 초기 선지자의 가르침을 완전하게 대변하는지의 여부는 다를 수도 있다. 교리가 만들어지고 사제집단이 형성되면서 그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도 동시에 필요하다. 성당이나 교회, 그리고 사찰이 그 경우이다. 그러므로 모든 고등 종교가 역사적으로 등장하고 제도화되는 과정에서는 이 세 가지가 필수적으로 구비되는 것이다. 즉 선지자의 순수한 가르침이 특정 시간과 공간 속에서 역사화되고 제도화되는 과정이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종교의 세속화라 할 이런 모습을 실정성(Positivit?t)이라 표현한다. 역사적으로 이런 실정성은 최초의 말씀과 전혀 상관없이 현실 속에 뿌리를 내리면서 현실 권력이 되는 경우가 많다. 교리는 도그마(Dogma)로 화석화되고, 사제집단은 관료화된 기생집단이 되며, 교회는 세속 세계의 부와 권력의 집산지가 된다. 다시 말해 종교의 본질 중의 하나인 초월과 사랑의 정신을 망각한 채로 세속 권력과 별반 차이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 부패한 종교는 종교를 가장한 현실 권력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이런 모습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등 종교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번에 내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신자들이 아닌 사람들까지 열광하는 데는 교황이 보여준 종교의 본래 정신과 본질을 그에게서 떠올리기 때문일 것이다. 교황은 바티칸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현실세계의 불평등과 부정의를 비판하고 경고한다. 오늘날 대안 없이 절대 강자들의 놀음 터로 변한 신자유주의의 자본의 논리에 대해 그는 거침없이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독재”라고 비판하고, 흔히들 말하는 낙수효과나 파이효과에 대해 “그릇과 파이만 키운다”고 독설을 퍼붓기도 한다. 벌써부터 교황의 이런 행보에 대해 보수주의자들은 교황을 마르크스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자로 낙인찍고 있다. 종교의 본래 정신으로 현실 자본주의나 기타 사회적 모순들을 비판하는 것은 어쩌면 서구의 근대화 과정에서 얻어낸 제정분리와 탈 주술화의 정신을 위반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새로운 중세 화를 염려하기도 한다. 물론 교황식으로 비판한다고 해서 오늘날 자본주의 질서가 재편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하지만 비신자인 일반인들까지 교황을 반기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 이 현실권력의 불평등과 부정의를 깨뜨려야 한다는 것, 그 과정에서 종교의 참다운 정신인 만인 평등의 정신과 사랑을 수평적으로나 수직적으로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등을 교황의 거침없는 행보에서 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런 교황의 정신이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위로하고, 이 땅의 곳곳에서 고통 받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으며, 나아가서 국민의 고통을 외면하는 위정자들과 고삐 풀린 한국식 신자유주의가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