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을 생각하며[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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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을 생각하며[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 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파이드로스』라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보면 소크라테스가 문자와 말의 관계에 관한 신화를 소개하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타무스 왕이 다스리는 테베에 토트라는 신이 찾아온다. 토트 신은 왕에게 통치에 필요한 여러가지 기술을 소개한다. 이 신은 서양에서 주사위 놀이를 처음 발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농사를 짓는 기술과 천문 지리에 관한 기술, 그리고 백성들의 병을 치료하는 기술을 말한다. 왕은 이 모든 기술이 대단히 실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기쁘게 받아들인다. 다음으로 토트 신이 백성들에게 문자를 가르쳐 주겠다고 제안을 한다. “왕이여, 이런 배움은 이집트 사람들을 더욱 지혜롭게 하고 기억력을 높여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억과 지혜의 묘약(phamakon)으로 발명된 것이니까요.” 그런데 유독 문자와 관련해서는 왕이 거부를 한다.

 

왕이 거부하는 첫 번째 이유가 흥미롭다. 첫째, 문자가 진리(truth)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짝퉁(the semblance of truth)만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문자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흥미로운 진단이다. 진리는 화석화된 문자가 아니라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우리의 의식(영혼)에 각인되는 것이다. 사실 현장의 생생한 소리는 영혼에 직접적으로 현전한다. 우리는 스승의 이런 목소리를 통해 진리를 깨우치고 또 이 진리를 똑 같은 형태로 전승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자로 표현되는 순간 이런 생생한 현전이 사라진다. 문자는 다만 그것을 저장할 뿐이고, 우리는 그 저장되고 기록된 문자를 통해 화석화된 진리의 흔적(semblance, 짝퉁)만을 상기할 뿐이다. 문자는 영혼의 기억(memory) 능력을 퇴화시키고, 다만 떠올리는 능력(상기: reminiscence)만 남긴다. 모든 종교에서 스승(구루)의 역할은 이런 생생한 진리를 우리의 영혼에 각인시키는 데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그 스승은 대부분 남성과 아버지로 나타난다. 그런데 문자는 독학을 가능하게 하므로 스승이 필요 없고, 스승의 권위도 잊게 한다. 권위가 사라지면 결국 왕의 통치도 위험해질 수 있다고 본다. 이런 몇 가지 이유를 들어 타무스 왕은 토트 신이 문자를 가르쳐주겠다는 제안을 거부한 것이다.

 

문자가 진리의 생생한 현전을 단순한 모방(시뮬라크르)으로 변질시킴으로써 서양의 로고스의 형이상학을 지탱해왔다는 데리다의 분석은 일면 타당하다. 목소리(음성)는 이 현전의 형이상학을 통해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권위와 통치의 권위를 정당화한 것이다. 테베의 왕은 문자가 도입되면 이런 아버지와 스승, 그리고 왕의 권위가 무너질 것을 우려해서 문자를 전해주겠다는 토트 신의 제안을 거부했다. 하지만 이런 역할을 목소리만 담당했겠는가? 문자 역시 그것을 아는 식자識者와 무식자 無識者를 차별하고, 식자의 강력하고 유효한 통치수단으로 활용되어 오지 않았던가? 전통적인 유교 경서에 기반한 조선의 과거시험은 통치를 담당하는 관료들을 등용하는 관문의 역할을 했다. 때문에 한문을 모르고 경서를 읽지 못한 일반 대중은 반상의 차별 이상으로 통치계급에 접근할 수 있는 지식이 없다. 조선에서 한자라는 문자는 봉건적인 조선의 위계질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해주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15세기 중반 조선의 위대한 왕 세종은 문자를 거부하는 테베의 왕과 다르게 오히려 적극적으로 문자를 발명해서 어리석은 백성의 삶을 개선하려 한 것이 아닌가?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끼리 서로 맞지 아니 할세. 이런 이유로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쉽게 펴지 못할 놈이 많으니라. 내 이를 위하여 어여삐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니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쉬이 익혀 날로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훈민정음 서문)

 

읽어 볼수록 명문이다. 중국과 조선이 언어 체계가 다른데 중국의 한자로 모든 생각을 표현하고, 모든 문서를 한문으로 작성하는 상황에서는 조선이 아무리 자주 독립을 외친다 해도 중화적 세계관을 벗어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한문에 접근하기 어려운 일반 대중의 뜻이 정치에 반영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까 한문은 중화적 세계관에 갇힌 조선의 봉건체제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외부적으로는 중화적 세계관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하겠다는 것이고, 내부적으로는 봉건적 위계질서 안에 민주주의의 정신적 토대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글 창제의 소식을 듣고 최만리를 위시한 조선의 양반 사대부들이 극렬 반대했다는 것은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 자신들이 누려왔던 보호와 기득권이 무너질 수 있었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이후 성경을 위시한 서적이 대량 보급되고 이것이 루터의 종교 개혁의 기반이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조선의 세종은 단순히 인쇄의 기술이 아닌 문자를 발명해서 보급하려 했던 것이니 그 얼마나 혁명적인가? 한글이 1446년에 반포되었고 유럽의 종교개혁이 1517년 시작이 되었으니 적어도 70년 이상을 앞서 있다.

 

전문 언어학자에 따르면, 영어와 독일어 그리고 프랑스어를 위시한 서구의 모든 언어는 인도 유럽피언 언어가 문화와 지역에 따라 특성화되고 개선되면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 발전된 것이다. 따라서 언어를 일정한 원리와 계획에 따라 독자적으로 발명한다는 것은 유럽의 전통이나 그 밖의 세계 어떤 전통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조선의 세종은 분명한 언어 창제의 원리에 따라 한글을 만든 것이다. 자음은 발성기관의 기능과 작동을 본 딴 음운학적 원리를 따르고, 모음은 동양사상의 오랜 전통인 천지인天地人이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 모든 글자는 모음과 자음이 독립적인 아닌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결국 한글이라는 글자는 음과 양의 대대관계, 우주 자연의 정신 및 철학과 몸과 기계의 기능 및 작동이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표현한다. 이 한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니까 한글의 표현가능성과 확장 가능성은 대단히 우수한 것이다. 게다가 음양의 원리와 같은 모음과 자음의 결합은 현대 컴퓨터 언어의 기초를 이루는 이치 논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기계어로 확장될 가능성도 무한하다. 오늘 날 인터넷에 기반 한 디지털 혁명에 언어학적으로 가장 활용성이 큰 언어가 한글인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글이 이런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표음문자로서의 한계도 적지 않다. 다시 말해 고도의 사색을 축약하고 추상하는 면에서는 표음문자가 그 역할을 다 할 수 없다. 반면 추상기능은 표의문자로서의 한문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장점이다.

 

이 점에서 나는 좀 더 솔직해지고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많은 한글학자들이 한글 한자 병행론을 비판하면서 한글 전용론을 외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첫째, 언어와 문자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고 문화가 바뀌면서, 새로운 말이 만들어지고 의미도 바뀔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는 조선시대의 한자나 그 한자로 만들어진 한문과는 큰 관계가 없다. 한중일이 똑같이 한자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발음은 전혀 다르고 의미 차이도 큰 경우가 있다. 한자는 중국에서 탄생했을지라도 오늘날 그것은 동아시아의 정신문화의 근간일 뿐이다. 그런 한자를 받아들여 오래 사용하면서 이미 각 나라 별로 토착화되고 변용된 것이다. 마치 유럽의 영어와 독일어,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등 모든 유럽 언어가 인구어 전통의 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각 나라 별로 발전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라틴어는 유럽 언어의 근간이자 정신적 뿌리 역할을 하면서 각 나라의 언어의 내용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들이 교육과정에 라틴어를 도입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한자도 마찬가지여야 한다고 본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70%가 한자로 만들어진 개념어이다. 그런데 그것을 표음문자인 한글로 표기가 된다고 해서 모두 음성언어로 바꾼다는 것은 비효율적일 뿐더러 무식의 표현이다. 간단히 말해 한글학자 최현배 식으로 모든 것을 인위적으로 한글로 바꾸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우리 사고의 영역을 절대적으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이미 한자는 동아시아의 오랜 전통 속에서 타자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 언어 체계 속으로 동화된 우리 언어나 다름없다 보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것이다. 마치 영어와 독일어 그리고 프랑스어와 같은 각 언어가 라틴어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그들 나라의 모국어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지와 같다. 이런 의미의 한자는 과거의 서책에서 발견되는 한문과도 별 상관없다. 때문에 일상적으로 표현되는 한자를 알 수 있는 교육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하겠다.

 

둘째, 동양철학이나 불교 관련 논문들 그리고 책들을 보다 보면 수백, 수천 년 전의 한문 투가 전혀 번역이 되지 않은 상태로 쓰이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심지어 페이스 북에도 불교 경전이 한문 투를 거의 바꾸지 않은 상태로 올라오는 경우가 있다. 만약 그것이 문헌학의 대상이라면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떤 의미 있는 종교적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그렇게 했다고 하면 그것은 대단히 문제가 있다고 본다. 어떤 이는 그것이 그 사상이나 종교의 핵심을 표현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예를 들어 불교의 사상도 인도에서 유래한 것이고, 그것이 중국의 한자와 사상을 통해 번역된 것이다. 수 백, 수 천 년 전의 한문 투는 그 당시 중국 사람들, 혹은 한자 문화권 하에서 자기 언어가 없던 우리 조상들의 생각을 표현하는 어쩔 수 없는 방식일 뿐이다. 문헌학적 연구나 사상사적 연구가 아니라면 빼어난 우리 한글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그 오래된 유물을 반복할 이유는 전혀 없다.

 

세상이 달라지고 문화가 달라지고 사용하는 언어도 바뀌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과거의 그런 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과거에 예속된 것이고 지적으로 태만한 것이다. 이때의 번역은 단순히 한글 전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 한국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한글과 한자로 이루어진 국어에 의한 번역이고 가독성에 기초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할 때 비로소 고전이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될 수 있다. 불교든 동양사상이든, 아니면 서양사상이든 우리가 이런 언어를 가지고 표현할 때 그 모든 것들은 더 이상 타자의 사상이 아니라 우리 사상 속에서 재해석될 수 있다고 본다. 데카르트가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철학책을 쓰고, 괴테가 독일어로 소설을 쓰면서 비로소 프랑스 철학과 독일 문학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과 같지 않을까?.

 

셋째, 오늘 날 한글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것보다 다른 데 있을지 모른다. 지난 수 십 년간 이룩한 경제 성장과 세계화, 인터넷의 등장은 영어의 위력을 말할 수 없이 키워 놓았다. 여기에는 자연발생적인 측면도 있지만 인위적으로 이루어진 영어 교육의 열풍도 크다. 한국처럼 영어가 돈을 벌고 출세를 하는 데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사회에서는 영어의 비중은 말 할 수 없이 크다. 때문에 이런 영어의 영향력이 불가피한 측면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좀 더 큰 문제는 인위적인 영어의 열풍과 교육이 새로운 정신적 사대주의를 조성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창의적인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대학 강의조차 영어강의를 획일적으로 강요하고 있다.

 

국문학이나 한문학도 영어로 강의를 하고 유럽에서 유럽 학문을 공부하고 돌아온 선생한테도 영어강의를 요구한다. 대학평가 점수와 연관되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것은 학문의 내용과 질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처사다. 영어로 언어를 획일화하는 것은 언어 생태계를 파괴하고 학문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해칠 수 있을 뿐더러, 모국어로 연구하고 사유할 수 있는 것을 막음으로써 학문의 창의적이고 장기적인 발전도 막는 것이다. 영어 강의자를 우대하고 국내 대학 출신이 자연스럽게 배제됨으로써, 학문의 사대적 종속을 심화시키고 새로운 언어 계급주의를 야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학문의 자생적 발전이 절대적으로 어려워지고 있다. 이웃나라 일본에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모두 국내파 지방대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의 획일적 언어 정책이 얼마나 대학의 창의적 교육을 망치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한글날은 결코 일회적인 행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잘못된 한글화 정책으로 모국어의 풍부한 자원을 스스로 황폐화시켜서도 안 된다. 학자들은 끊임없이 이 모국어를 통해 훌륭한 정신적 창작물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서양철학이 수입된 지 120년이 넘어가도 아직 이렇다 할 우리 철학의 자랑거리가 되는 저작이 없는 실정이다. 모국어로 쓰인 훌륭한 창작물은 그것이 비록 서양 사상이나 과거의 중국철학, 불교철학을 기술한 것이라 해도 우리의 철학이다. 이 점은 다른 학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국어의 정신을 살려 표현하는 것은 단순히 간판 몇 개 바꾸고, 낱말 몇 개 한글로 표현해서 쓰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이다. 우리는 언제가야 진정 이 모국어로 사유하고, 이 모국어로 쓰인 문헌들을 중심으로 참조하고, 이 모국어로 우리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고, 그리하여 이 모국어로 빼어난 정신적 창작물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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