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6

왜 고상한?‘존재’와?‘무’가 아니고 흔해빠진?‘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6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자, 여러분, 이제 그림 하나를 더 보고 넘어가기로 할까요?” 이렇게 말하면서 저는 그림을 하나 그렸습니다.

그림8

“보다시피 이것이 가장 단순한 모습으로 드러난 플라톤의 우주입니다. 이 우주 밖에는 무엇이 있느냐고요? 그것은 이데아(idea)라는 두드러기들이 잔뜩 나 있는 있는 것, 곧 하나의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에서 보듯이 같은 것(같음)의 고리는 있는 것에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이 있는 것(있음)은 파르메니데스의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달라붙어〔syneches〕 하나〔monoeides〕로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하나임으로 말미암아 영원불변하며,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저됨(자체성, 自體性)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하나의 바로 이런 특성으로 말미암아 하나, 곧 있는 것에 맞닿아 있는 것도 하나와 같은 것, 하나로 있는 것에 동참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의 우주는 하나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우주, 그 안에서 펼쳐지는 시간과 공간의 파괴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저임(자기 동일성, 自己同一性)을 잃지 않고 영원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덧붙여서 설명한다면, 플라톤의 우주 맨 바깥을 두르고 있는 같은 것(같음)의 고리는 있는 것과 같은 것이고, 바로 이 때문에 플라톤의 우주는 여러 개가 아니라 하나일 수밖에 없으며, 생성도 소멸도 되지 않고 정지해 있는 것입니다. 이 우주 안의 모든 변화와 차별상, 곧 운동과 여럿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까지 포함해서 다른 것〔heteron〕에서 나옵니다. 플라톤의 우주 안쪽을 여러 겹으로 감싸는 이 다른 것(다름)의 고리는 있는 것과 다른 것, 하나와 다른 것, 따라서 없는 것이요, 여럿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지요? 다른 것이 있는 것과 다른 것이어서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하나와 다른 것이어서 여럿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런 설명에는 논리의 비약이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까? 없는 것과 여럿이 같은 것이라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우리 잠깐 생각을 다시 가다듬어 봅시다. 저는 앞에서 파르메니데스의 말을 빌려 있는 것은 하나로 있다고 했고, 왜 그런지 증명까지 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있는 것만 있고, 그것이 하나이며 없는 것은 없다면, 파르메니데스 주장대로 시간도 공간도 없고, 그에 따라 우주도 삼라만상도, 생성과 소멸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감각과 이성으로 파악하는 모든 것들은 죄다 마야의 휘장 너머에 펼쳐진 환상의 세계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결론은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정상적인 모든 사람의 상식에 벗어납니다. 상식에 벗어나지 않는 주장을 하려면 하나뿐만 아니라 여럿이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인 있는 것뿐만 아니라 없는 것도 있다고 말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없는 것이 있다니? 그런 엉터리없는 말이 어디 있어? 없는 것은 그 말 그대로 없는 거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라는 말을 파르메니데스가 쓴 뜻 그대로 쓰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없는 것이라는 말을 아예 없는 것, 없음 바로 그것이라는 뜻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 우리가 흔히 쓰는 뜻으로 이 말을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은 빠진 것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앞에서 우리는 여럿의 가장 작은 수, 곧 여럿의 최소 단위는 둘인데, 있는 것은 하나이므로 여럿이 있다고 하려면, 없는 것도 있다고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럿을 살리기 위해서 없는 것을 있음과 같은 자리에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없는 것이 있는 것과 몸을 맞대고 나란히 서 있다는 것이 우연이고 모순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여럿을 요청하는 순간 우연과 모순으로 가득 찬 세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없는 것이 있는 것과 나란히 서자마자 파르메니데스의 없음 바로 그것은 없어지고, 어려운 말로 ‘존재화(存在化)한 무(無)’ 다시 말해서 없다는 규정 아닌 규정을 받아들인 어떤 것, 곧 빠진 것이 없는 것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타납니다. 이렇게 해서 여럿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는 구제되고 플라톤의 우주에서 다른 것은 있는 것과는 다른 것, 없는 것, 그러나 없음 바로 그것은 아닌 것으로 재해석되어 있는 것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아까 이야기했듯이 이 관계는 우발적인 것, 우연이고 모순입니다. 그리고 이 우연과 모순은 우리의 의식 속에 최초의 우연, 원초적 모순으로 드러나고, 이 때문에 운동과 변화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왜냐하면 운동은 모순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운동의 문제는 여기에서 함께 다루기는 벅차니까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합시다.”

저는 여기에서 여럿의 문제를 조금 더 자세히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습니다. 모든 것의 최소 단위〔unit〕인 하나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세히 설명은 못 했지만 이 하나, 곧 있는 것을 찾아내야만 어떤 것을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는 말도 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가 없으면, 다시 말해서 있는 것이 없으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나 빠진 것에 대해서는 아무 이름도 붙일 수 없고 따라서 무엇이라고 부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예 없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으니 제쳐놓고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니까 제 말투에 익숙한 어떤 학생이 이렇게 묻더군요. “선생님, 오늘 수업에는 이고운 양이 빠졌는데요. 이렇게 우리는 빠진 것에도 이고운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습니까?” “뭐? 이고운 양이 빠졌어? 입덧이 심한가?” “에이, 선생님도. 처녀가 입덧은 무슨 입덧이에요. 괜히 딴전 피우시지 말고 대답해 주세요.” 사실 제가 하는 이야기에는 어려운 낱말이 하나도 없어서 말이야 쉽지만 이 쉬운 말들의 실꾸리를 따라가다 보면 곧잘 미로에서 헤매기 일쑤여서 가끔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 긴장을 풀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꽁무니를 뺄 수는 없는 노릇! “어쩌다 이고운 양이 여기에 없어서 졸지에 빠진 것이 되어 버렸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고운 양이 처음부터 빠진 것, 처음부터 없는 것은 아니었지요? 그리고 지금도 여기에서는 빠졌지만 다른 자리를 채우고 있을 것입니다. 대답이 되었나요?” 잠시 동안 긴장이 풀린 사이에 저는 여럿에 대해서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하나가 없으면 여럿이 있다는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럿이라는 말로 저마다 다른 하나하나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 강의실에 여러 학생들이 있지요? 그런데 하나하나 저마다 다르지요? 이를테면 변강세 군과 이옥녀 양은 각각 한 사람이면서 서로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변강세 군과 이옥녀 양이 다르다는 걸 어떻게 해서 안다고 했지요?” 이 시간이 존재론 시간이라는 것을 잘 기억하고 있는 한 학생이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건 첫 시간에 가르쳐 주셨듯이, 변강세 군에게 있는 어떤 것이 이옥녀 양에게는 없고, 변강세 군에게 없는 어떤 것이 이옥녀 양에게는 있기 때문입니다.” 이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폭소가 터져 강의실은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이름이 비슷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판소리 가루지기타령에 나오는 변강쇠와 옹녀를 연상하고, 뛰어난 정력을 지닌 이 두 남녀를 머리에 떠올리다 보니 생각이 엉뚱한 데로 비약한 모양이었습니다. 어쨌거나 그 학생의 대답이 옳았기 때문에 저는, “맞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하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은 다시 책상을 두들기면서 배를 잡고 웃어 대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학생들의 웃음이 그치기를 기다리고 나서 설명을 계속했습니다. “이것과 저것이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까닭은 아까 저 학생이 말했듯이 이것에 있는 (어떤) 것이 저것에는 없고, 이것에 없는 (어떤) 것이 저것에는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럿의 테두리 안에 있는 하나하나의 것은 저마다 있는 것(있음)과 없는 것(없음)의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것에 있는 것이 다른 것에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만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사람, 개, 소, 말, …… 빨강, 파랑, 노랑, …… 동그라미, 세모, 네모 …… 이렇게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이야기했듯이 있는 것은 하나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을 이루는 삼라만상의 하나하나는 있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모두 하나에 참여할 수 있고, 바로 이 때문에 어떤 것으로 규정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다른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그림 8을 다시 한 번 살펴볼까요? 이 그림을 보면 다시 확인할 수 있듯이 같은 것〔tauton〕의 고리는 있는 것과 맞닿아 있습니다. 형식적으로 보면 없는 것과 같은 것도 있을 수 있고, 있는 것과 같은 것도 있을 수 있지만 플라톤이 같은 것의 고리로 하여금 우주의 맨 바깥을 감싸고 있도록 한 것으로 보아 같은 것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문제는 ‘다른 것(다름 바로 그것)’을 둘러싸고 이루어진 해석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저도 잘 모르니 여기서 덮어두고 다른 것이 지니고 있는 이중의 성질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하지요. 다른 것은 이 두 마디로 요약해 말할 수 있습니다.

1. 다른 것은 있는 것과 다르다는 점에서 있는 것이 아니다.

2. 다른 것은 없는 것과 다르다는 점에서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뭉뚱그려 말하자면 다른 것〔heteron〕은 동시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인지는 이미 앞에서 말씀드렸지요? 그렇습니다. 바로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들어서 이 둘을 맺어 주면서 동시에 떼어 놓는 무규정적인 것 바로 그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