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 침묵의 법을 부활시키지 말라[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법륜, 침묵의 법을 부활시키지 말라[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윤지영(명지대 강사)

 

법륜의 말은 구토를 일으킨다. 자신의 우울증의 근간이 가족 내 성폭력에서 기인하며 그 안에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어머니에 대한 미움이 뒤엉켜 있음을 어렵게 토로한 이에게 법륜은 무엇이라 말하는가. 법륜의 손쉬운 답에 대한 비판에 앞서, 먼저 내담자가 자신의 고통을 토로한 짧은 글귀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이해를 시작해야 한다.

▲ ⓒ뉴시스

내담자의 글귀는 근친상간 성폭력의 복잡한 심리적 메커니즘을 잘 반영하고 있다. 자신의 생존기반이며 심리적, 물질적 쉼터이자 안전망이라 여기던 가정이 한순간에 위협적 공간으로 바뀌었을 때, 심리적 물리적 약자인 아이는 이 상황을 감내하거나, 아니면 폭로하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 이러한 감당하기 힘든 진실 앞에서 아이의 발언은 헛소리나 망상, 쓸데없는 이야기로 치부되어 간과되어진다. 왜냐하면 여태껏 우리는 가족에 대한 신화를 통해 행복의 패러다임을 정초해 왔기 때문이다. 가족이란 단위가 폐쇄적 불소통의 장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란 공적 영역과 분리되어야할 내밀한 사적 영역이자 혈연으로 맺어진 비영리적 자연적, 순리적 관계로 이상화됨으로써, 가족 구조 내의 위계성과 폭력의 가능성에 대해 우리는 함구해 버리고 만다. 이러한 맥락에서, 근친상간 성폭력에 대해 폭로하는 이는 영구한 단위여야 할 가족을 해체해 버리는 내부적 위협 요소로 인식되어진다. 그러하기에 가족 구조 내에 산재한 불편한 진실을 건드리는 이의 발화 위상은 내동댕이쳐져 버리고 만다. 다시 말해 내담자는 이러한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자신의 고통에 대해 발화할 기회조차 박탈되어 침묵 속에 방치되어야 했다. 아버지의 가해와 어머니의 방관 속에서 내담자는 행복과 위로의 원천으로 이상화된 가족 이데올로기와 자신의 현실적 가족의 피폐함의 간극 안에서 혼동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긴 침묵과 자기 혐오로 점철된 시간의 강을 건너 어렵게 말하기 시작한 내담자는 다시금 가족들이 그녀에게 강요했던 침묵의 법이 법륜에 의해 부활되었음을 볼 것이다.

침묵의 법에 의해 봉인되었던 뒤엉킨 고통과 몸의 기억들을 망상으로 치부하는 것이 법륜의 요지다. 마약중독의 예로 시작되는 그의 글은 마약 중독의 원인을 개인의 의지 부족으로 읽어내는 단순함을 보인다. 납치와 강제적 마약 투여란 폭력적 실태에 노출된 개인이 어떻게 그 엄청난 트라우마를 감당하며 생존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심층적 분석없이 마약중독이라 결과물만을 보고 이를 개인의 의지 부족이라 진단하는 것은 스스로가 제시한 콘텍스트에 대한 이해 부족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 왜 상습적 마약 복용을 통해 그가 도피하고자 하는 고통은 무엇이며 그 고통은 단순히 생리학적 뇌의 일부분의 중독 현상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심리적 신체적 상흔을 스스로가 자해하는 방식은 아닌지 등에 대한 질문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제대로 된 트라우마의 예에 대한 이해도도 없이 법륜은 마약 중독에서 근친상간 성폭행의 문제로 이야기를 비약해 버린다.

고통의 원인을 찾기 보다, 그 고통을 키워낸 자신을 다스리면 모든 고통이 사라질 것이란 해법은 모든 폭력 양상을 개인의 마인드 컨트롤의 문제로 축소해 버리고 만다. 다시 말해 성폭행은 하나의 망상일뿐이며 피해자 자신의 정신수양 문제로 극복가능한단 법륜의 말은 억압과 차별 메커니즘을 정당화하는 보수 담론이다.세상은 아무래도 안바뀌니 당한 너가 입다물고 없었던 일로 쳐라는 논리는 고통의 개인화를 통해 구조적 폭력성을 은폐한다. 즉 억압의 부조리성을 폭로하는 불편한 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기보다,부조리에 분노하는 이를 망상가로 만들어 침묵케 하는 것이 여태껏 폭압적 사회질서가 유지되는 방식아니었는가? 더없이 기득권 유지적 발언을 수양으로 포장하지말라.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봄은 고통의 원인에 대한 직시,그 감당하기 힘들고 불편한 진실과의 대면이다. 어디서 고통이 기인한 지도 모른 채, 어떻게 고통을 넘어설 수 있다고 여기는가. 그것이야말로 고통을 더욱 더 비대하게 키우는 도피의 방식일 뿐이다.

아버지의 사죄와 반성, 어머니의 방조에 대한 설명을 내담자는 필요로 한다. 물론 이러한 정면충돌의 방식에서 내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개인적 가족사의 특이성에 한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폭력 양상이 구조적인 가족의 위계질서에서 발생되는 것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떻게 근친상간 성폭력이 빈번히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은폐되어져 버리고 마는가. 왜 어머니는 방관자가 될 수 밖에 없었나, 이는 경제적 의존성과 생존 기반의 물적 토대를 남편이 전적으로 소유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었는가. 가족은 왜 해체되어선 안되는가. 피해자와 방관자, 가해자란 뒤틀린 관계성이 가족이란 이름 아래 유지되어야 하는가. 이러한 수많은 질문들을 던지는 것이 바로 내담자가 침묵을 깨고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는 아닌가.

다시 말해 내담자가 겪은 이 트라우마가 미친 몇몇 개인의 가족사가 아니라, 가족에 대한 신비화가 강화될 수록 가족 내의 부조리와 폭력 현상이 지속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법륜은 고통의 기억과 몸을 속세의 헛된 망상으로 치부하는 초월적 태도로써 내담자가 수십년간 고투해 오던 실존적 고통과 몸부림을 헛된 몸에 새겨진 망상더미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은 아닌가.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를 더욱 키우게 할 수 있는 상담 방식이다.

나아가 권력을 지닌 이-아버지가 어떠한 일을 저질러도 하위주체인 자식은 그저 감사하란 말은 권력 구조의 폭력양상을 재생산하게할뿐이다.구조에 내재한 부조리 자체를 허상으로 만듦으로써 세상곳곳에서 터져나오는 고통어린 비명들을 비가시화하는것은 종교적 해탈이 아니라 폭력적 수탈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 당장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구조적 폭력 구도를 건드리기 보다, 개인적 차원의 마인드 컨트롤로 구원을 찾으라는 말은, 아직도 이 사회가 가족 신화를 공고히 하고자 하는 데에 있다. 가족은 신비롭고 내밀한 사적 영역으로 공적 영역의 분리를 통해 신성화되어야 하고 침묵되어야 할 성전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이 거하고 일상의 미시 정치학이 발휘되고 협상되고 갈등이 발생하는 공간이 바로 가정이다. 이 가정 내의 폭력이 사회적 폭력의 일부이며 가족이란 사적 단위의 문제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가족이 지옥이 되었을 때 대안적 공동체가 폭력 구도에 노출된 이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비명과 고함에 귀기울일 지를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법륜의 말은 고통의 초월이란 종교적 맥락에서 읽혀야 하며, 사회적 문화적 맥락과는 다른 결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묻겠다. 그 초월이란 위치의 강요가 과연 내담자와 같이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또한번의 침묵의 법의 시행이며 그들을 자신 안으로 유폐시키는 감금 방식이라 생각하진 않는가.

‘만셰이아’, 죽음에 대한 질문과 삶에 대한 대답/심찬희 [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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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질문과 삶에 대한 대답?

– 윤주영 감독의 ‘만셰이아’를 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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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심찬희(서울시립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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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0일 한철연 신년회 문화행사로 윤주영 감독의 [만셰이아: 죽은 자들의 도시]를 초청 상연하였고, 상연 후 감독과 함께하는 대화 시간을 가졌다.

 

만셰이아, 죽은 자들의 도시?

2008년 이집트 카이로와 아스완 등지를 혼자 여행하던 윤주영 감독은 ‘죽은 자들의 도시’라 불리는 만셰이아에 이끌린다. 거대한 공동묘지이자 약 50만 명이 거주하고 있는 삶의 터전인 만셰이아는 카이로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구성원들은 다양하지만 대부분은 도시 빈민들이다. 죽음과 삶이 공존하는 것처럼 보이는 만셰이아의 매력에 이끌린 감독은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아랍어로 적은 종이를 들고 이곳의 거주민들에게 대답을 구하고자 했다. 의사소통 안 되는 외국인의 이런 행동이 거주민들에게 이해되지 못한 것은 당연해 보인다. 이런 감독에게 아랍어의 벽을 넘어 거주민들과 관계 맺을 수 있게 도움을 준 것은 그곳에서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아는 헨드와 제납 자매였다. 이들과의 우연한 만남 때문에, 그리고 만셰이아의 거주민들에게도 역시 막연한 죽음보다는 매일의 구체적인 생존이 훨씬 절박하다는 이유 때문에 감독이 얻게 된 답은 죽음에 대한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감독은 2년 후 캠코더를 들고 혼자서 다시 헨드와 제납 자매를 방문하여 그들과 매일 함께 생활하며 영화를 제작했으며, 다큐의 많은 부분은 출국하기 며칠 전에 겨우 허가를 받아 촬영한 헨드, 제납과의 인터뷰로 구성되었다.

 

죽음에 대한 질문과 삶에 대한 대답

상영에 앞서 영화는 [죽은 자들의 도시]라는 제목으로 한철연 회원들에게 소개되었는데, 상영 후 먼저 죽음이라는 큰 주제와 영화 속에 녹아 있는 여성주의적인 내용 사이에 괴리감이 느껴진다는 질문이 있었다. 영화가 이집트 여성들의 척박한 삶을 부분적으로 잘 보여준 것 같긴 하지만 죽음이라는 주제와 그들의 구체적인 삶이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감독이 선호하는 영화의 제목은 ‘죽은 자들의 도시’보다는 ‘만셰이아’다. 죽음이라는 단어 때문에 만셰이아에 이끌리게 되었지만, 영화를 만들게 한 것은 만셰이아라는 장소 안에서 사람들과 만나며 겪은 경험들이었다. 감독은 영화와 ‘죽음’의 연결고리를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헨드와 제납의 대답에서 찾는다. 자매는 삶의 시작을 결혼이라고 얘기하는데, 이 결혼은 또 죽음과 연결된다. 결혼은 이들에게 돈과 발(足), 즉 자유인 것이다. 결혼을 통해 진정한 삶이 시작된다. 따라서 그 같은 삶을 시작하게 해 줄 좋은 결혼이 없다면 죽음을 통해 다른 삶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죽음이라는 말로 가리키는 것은 삶이 불가능한 곳, 혹은 살만한 삶의 바깥이다. 헨드와 제납의 경우 그것은 결혼 바깥의 삶을 의미한다. 만셰이아에서 두려운 것은 흔히 보는 죽음이 아니라 전기와 수도가 없는 것, 그래서 신이 자신들을 돌아 봐 주지 않을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영화 Mansheia(죽은 자들의 도시)

숨기는 것과 드러나는 것

죽음에 대해 물었으나 얻은 것은 죽음에 대한 답이 아닌 구체적인 삶의 모습들이었다. 이렇게 감독의 질문들은 예상하지 않은 답을 얻기도 하고, 혹은 대답을 얻지 못하기도 한다. 감독은 헨드, 제납 자매와의 인터뷰를 위해 3개월여를 기다렸고, 그 시간 동안 그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자매는 각자 감독과 단 둘이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았고, 그래서 삶의 답답한 부분들, 깊은 내면의 이야기들을 자매는 들려주었다고 한다. 겨우 인터뷰 승낙을 받은 것은 귀국을 3일 앞둔 날이었다. 하지만 제납이 비슷한 또래 친구인 감독에게 새벽에 울면서 전화를 하기도 하고 자신의 흔들리는 모습을 드러낸 것과는 달리, 헨드는 카메라 앞에서 침묵한다.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진 헨드, 제납 자매와의 인터뷰는 감독 스스로 비하인드가 더 많다고 말하는 영화를 만들게 했다.

자매는 이집트 여성들의 삶과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특히 거의 강제적인 여성 할례, 그리고 처녀성과 결혼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인상 깊다. 그중 흥미로운 부분은 결혼 첫날밤 신부의 처녀성을 검사하는 풍습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다. 그렇게 처녀성을 중시하는 풍습은 30년 전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을 때, 화면 바깥에서 들려온 남편의 목소리가 인터뷰를 멈춘다. 촬영은 중단되었고, 얼마 후 인터뷰가 다시 시작된다. 똑같은 인물이 인터뷰를 하고, 방금 한 이야기는 없었던 것처럼 이집트에서 처녀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 한다. (하지만 얼굴 표정에는 약간의 웃음기가 있다. ‘알 거 다 아는’ 사람들끼리의 웃음?) 감독은 같은 인물의 상반되는 인터뷰 장면을 별다른 여과 없이 그대로 집어넣는다. 감독은 스스로 자신의 영화에 대해 숨기는 것과 드러나는 것에 대한 영화인 것 같다고 평했는데, 이 중단된 인터뷰 장면은 그런 주제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어렵게 승낙 받은 인터뷰가 감독의 기대치대로 진행되지 못했을지라도, 헨드, 제납 자매와의 인터뷰에서 감독의 나레이션은 거의 없다. [만셰이아]는 ‘드러나는 것’과 드러나지 않은 것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지만, 함부로 ‘드러나지 않는 것’을 캐묻거나 들추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헨드나 제납이 들려주는 것들 외에는 어떤 일들이 있어왔는지를 알 수 없다. 상반된 내용의 인터뷰를 하며 공공연한 진실에 대해 거짓말을 할 때 얼굴에 떠오르는 것은 공모하는 자의 은밀한 웃음 혹은 비웃음이나 자조 중 하나일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아이와 함께 할 때, 웃을 때의 행복한 얼굴을 보고 연기라고 생각해야 할 이유도 없다. 헨드와 제납이 또래 친구인 감독에게 들려주었을 이야기들을 우리가 모두 이해할 수 있기라도 한 듯이 지금 카메라 앞에서 들려달라고 요구할 수도 없다. 결혼 바깥의 삶이 죽음과 등치될 만큼 그들에게는 지금의 결혼 제도, 아버지의 법과 웃으며 공모하는 것이 살만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다.

‘죽음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던진 감독은 언어의 벽에 부딪치다 헨드와 제납을 만나게 되었고, 만셰이아 사람들의 삶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죽음 보다는 수도와 전기, 온수와 같은 생존의 문제에 더 친숙하다는 사실은 헨드, 제납 자매와 만셰이아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에 닿게 했다. 그리고 친구로서의 윤주영 감독과 카메라 사이의 거리는 영화가 침묵 앞에서 멈추거나, 말할 수 없는 것과 말해지는 것 사이의 간극에 이르게 했다. 카메라는 멈췄지만 결코 쿨한 태도로 멈추지 못하고, 서성이는 듯 아쉬운 발걸음으로 그 침묵 앞에 선다. 윤 감독이 친구로서 헨드와 제납의 삶에 깊이 다가간 것처럼, 앞으로 감독의 카메라도 자신과 타인의 삶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더 들려주길 기대한다.

 

한국과 미국 1프로가 일으킨 쿠데타를 막자! 강은희의『위험한 거래』나태영/[보고 듣고 생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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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미국 1프로가 일으킨 쿠데타를 막자!

– 강은희 저,『위험한 거래, 한미FTA의 베일을 벗긴다, 』-
글: 나태영(교육강좌 수료, 한철연 회원)

 

강은희 책은 쉽다. “한미매국협정이 폐기 되어야만 이 나라 서민이 살 수 있습니다.” “한미에프티에이 어려운데 누가 알아요? 누가 관심 갖겠어요?”

내가 둘레 분과 나눈 대화 내용이다. 한미매국협정은 사실 어렵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한미매국협정 하면 우선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든다. 전문가들만이 다루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한미매국협정 때문에 당신들이 경제적으로 큰 피해를 볼 것이 불을 보듯 한데도 그렇다.
강은희 지음, 『한미FTA의 베일을 벗긴다 위험한 거래』, 책이 있는 마을, 2012.
강은희는 많은 사람들이 한미매국협정을 어려워 한다는 사실을 크게 의식한 듯하다. 강은희는 1장과 2장에서 먹거리 문제를 다뤘다. 독자들이 한미매국협정을 쉽게 받아들이도록 배려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1장에서 강은희는 재벌이 먹거리 시장, 즉 골목상권까지 차지하려는 사실을 정확히 다룬다. 재벌이 전국 편의점 대다수를 차지한다. 골목에 있던 구멍가게들이 하나씩 하나씩 바람과 함께 사라진다. 대신에 재벌 편의점이 그 빈자리를 채운다. 재벌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중소업체들이 편의점에 삼각김밥등을 댄다. 삼각김밥은 중소업체가 창조한 상품이다. 재벌들은 편의점에서 잘 팔리는 상품을 자체 생산한다. 많은 중소업체들이 망한다. 재벌은 또 그치지 않는다. 카길, 몬산토로부터 값싸게 질 낮은 먹거리 재료를 사 온다. 그 재료에는 유전자변형 식품도 들어있다. 재벌들은 최소비용으로 최대 이윤을 내려고 안달한다. 이 땅 사람들 건강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강은희는 재벌이 먹거리 시장을 흙탕물로 만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한국 재벌이 한미매국협정을 왜 옹호하는 지를 아주 쉽게 독자한테 알려준다. 이 땅 서민들이 질 나쁜 먹거리 때문에 건강이 나빠진 다는 사실을 명쾌하게 알려준다.

서민들은 앞으로 비싼 의료비를 어찌 감당해야 하나?

 

‘위내시경 한국 4만원, 미국 100만원. 대장내시경 한국 5만원, 미국 160만원. 맹장수술 한국 30만원, 미국 900만원. 승모판치환술 한국 180만원, 미국 5700만원. 슬관절치환술 한국 50만원, 미국 6600만원’(마포의료생협 소식지, 2011년 3월)

지금 한국 국민건강보험제도는 전 세계의 국민건강보험제도와 견주어 볼 때 상당히 좋은 제도이다. 더 보완할 점이 있지만 좋은 제도임에는 틀림없다. 내가 최근에 피부과에 간 적이 있다. 병원에서 진찰 받고 주사 맞는데 한 5천원 냈다. 약국에서 3일치 약 사는데 한 3천 원 냈다.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적은 돈을 냈다. 위 인용 글에서 보듯이 미국에서는 현실적으로 꿈 꿀 수 없는 일이다. 3일치 약 값이 3천원인 까닭은 그 약이 복제약이기 때문이다. 오리지널 약이었다면 몇 배 더 비쌀 것이다. 열 배 이상 비싼 경우도 있다. 한국에서 맹장수술 받는데 40만원이다. 미국에서는 주마다 다르다. 900만원에서 2000만원 사이이다. 한미매국협정이 폐기 되지 않고 지속된다면 10년, 20년, 30년 뒤에는 한국에서도 맹장 수술비가 미국 수준이 될 것이다. 내가 늙어서 겪게 될 현실이다. 우리 자식들이 겪게 될 현실이다. 한미매국협정이 시작되었으니 의료민영화는 이루어질 것이고 약값과 의료비가 오르는 것은 서럽지만 일어날 사건이다. 그렇다고 병 없이 살 수 있을까? 질 나쁜 먹거리를 먹는 서민들이 병 없이 살기는 더 어려울 것이다.

산에서 땔감을 구하는 노인들이 생겨나지 않을까?

 

우리 집에서 겨울에 내는 도시가스비가 한 달에 13만원이다. 우리보다 집이 더 큰 경우에는 당연히 도시가스비가 더 나올 것이다. 생활비가 넉넉하지 않은 노인들에게 한 달 13만원은 큰돈이다. 그래서 노인들 중에는 도시가스를 쓰지 않고 전기장판으로 겨울을 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다. 그나마 전기세가 적게 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한미매국협정이 폐기 되지 않고 지속되면 노인들이 겨울에 전기장판조차도 쓰실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최근 1년 사이에 전기세가 두 번이나 올랐다. “최근 한국전력공사는 전기요금 인상안을 또다시 제출했다. 벌서 일년 사이에 세 번째다. 한국전력공사 이사회는 지난 5월 16일 전기요금을 평균 13.1%에 달하는 인상안을 의결한 뒤 지식경제부에 제출했다. 작년 2011년 8월과 12월에 각각 4.5%와 4.9%를 인상한 뒤 5개월 만에 또다시 인상안을 제출한 것이다.”(226쪽)한미매국협정이 시작 되었으니 한전 민영화가 서서히 이루어질 것이다. 전기세가 오르는 일이 더 많아질 것이다. 오르는 폭도 더 가파를 것이다. 전기세가 너무 오르면 노인뿐만이 아니라 젊은이 88만원세대들도 겨울에 난방비를 아끼려고 산에서 땔감을 구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21세기에 바로 이 땅에서 20세기 초중반, 19세기 이 전에 일어났던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계삼은 말한다. “석유가 이제 한 세대만 지나면 완전히 끊어진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어디 있겠습니까.”(<작은책> 2012년 3월호, 94쪽) 앞으로 30년 또는 40년 뒤에는 석유자원이 지구상에서 바닥날 것이다. 만약 이 말이 현실로 드러난다면 전기세는 지금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를 것이다. 2003년 폭염 때 프랑스에서는 노약자 약 1만5천명이 돌아가시는 사건이 벌어졌다. 여름 폭염 때 전기세 아끼려고 에어컨 설치 못하는 노인, 에어컨이 있어도 틀지 못하는 노인들에게 한미매국협정은 재앙이다.

한국 헌법은 개밥의 도토리일까?맞다. 한국 헌법은 개밥의 도토리이다. 미국 주법이 제일 힘세다. 한미매국협정문은 그 다음으로 힘세다. “대법원이 2007년 1월 12일 법무부에 보낸 의견서를 보면 ISD 제도의 문제점은 주권의 침해 가능성, 중개청구 대상에 사법부의 재판이 포함되는 문제, 국가의 공공정책 왜곡 문제, 중재절차의 투명성 문제, ISD가 주로 미국투자자들의 보호 장치로 기능할 것이라고 지적했다.”(143 – 144쪽) 그래서 몇 몇 뜻있는 사람들은 한미매국협정 국회 날치기 통과를 을사늑약이라고 부른다. ISD 즉투자자 국가 소송제는 이 땅 서민들한테 재앙이다. 나라를 뛰어넘는 자본이 국제분쟁위원회에 이 나라 전기, 철도, 수도 등등에 관련해서 한국을 상대로 제소하면 백이면 백 한국 정부가 저들에게 벌금을 물어줘야 한다. 저들에게 한국 헌법을 들이대면 저들은 비웃을 것이다.

“ISD는 미국투자자들의 손실을 보존해주기 위해 국가의 막대한 공적자금을 쏟아 부어야 하고 국가의 복지정책에 심각한 재정적 장애를 초래하게 된다. ‘중재재판’을 담당하는 세계은행은 투자자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국제금융기구이다. 중재 결과는 대부분 투자자에게 유리한 쪽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외국 사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145쪽) 한미매국협정이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될 때 민주당(2012년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87명 가운데 47명은 출판기념회 참석했다. 민주노동당과 일부 민주당 국회의원만이 한나라당(2012년 새누리당) 국회의원과 몸싸움을 했다.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김선동은 온 몸을 던졌다. 우리는 이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노무현과 이명박은 윤봉길 의사한테서 회초리 맞아야 한다

 

▲ 위험한 거래, 강은희 지음, 책이 있는 마을 펴냄

농업을 우습게 본 노무현과 이명박은 윤봉길 의사한테서 회초리 맞으면서 배워야 한다. 나라를 뛰어넘는 식량자본 카길과 몬산토가 윤봉길 선생 말을 더 잘 따른다. 서럽고도 슬픈 현실이다. 억장이 무너진다.

“농사는 천하의 대본(大本)이라는 말은 결단코 묵은 문자가 아닙니다. 이것은 억만 년을 가고 또 가도 변할 수 없는 대진리입니다. 사람이 먹고 사는 식량품을 비롯하여 의복 주옥의 자료는 말할 것도 없고 상업, 공업의 원료까지 하나도 농업생산에 기대지 않은 것이 없느니만치 농민은 세상 인류의 생명창고를 그 손에 잡고 있습니다. 우리 조선이 돌연히 상공업 나라로 변하여 하루아침에 농업이 그 자취를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이 변치 못할 생명 창고의 열쇠는 의연히 지구상 어느 나라의 농민이 잡고 있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농민의 세상은 무궁무진합니다.”-윤봉길 의사의 ‘농민독본’ 중에서- (‘고인돌’출판사 사장인 정낙묵 명함에서 다시 가져옴)

일본은 다른 나라와 무역 협정 맺을 때 일본 농업을 확실히 보호한다. 라고 송기호는 말했다. 한국은 일본한테서 배워야 한다.

우리 아버지한테서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

 

내가 어린이(초등)학교 다닐 때 우리 아버지가 내게 했던 말이 기억난다. 논에서 거머리 잡는 방법이 일본 사람과 한국 사람이 다르다. 일본 사람은 깡통을 허리에 매고 잡은 거머리를 깡통에 넣는다. 한국 사람은 (잠시 아버지가 웃으며 말을 멈춘다.) 잡은 거머리를 같은 논 저 쪽으로 던진다. 저 쪽으로 휙 던진다.

지금 한국 땅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한미매국협정이 폐기되지 않고는 절대로 복지정책을 펼 수 없다. 경제 민주화를 이룰 수도 없다. 그런데도 한미매국협정이 이번 대선에서 쟁점도 되지 못한다. 통합진보당 대통령 후보 이정희만이 홀로 한미매국협정 폐기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2012년 4.11 총선 전에는 전국에서 들끓었던 한미매국협정 반대시위가 지금은 왜? 일어나지 않을까. 이 땅 진보정당 책임이 크다. 이 땅 시민단체 책임이 크다. 이 땅 지식인, 언론인 책임이 크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한미FTA의 베일을 벗긴다 위험한 거래』이 책을 많은 사람이 읽자. 한미매국협정이 어렵다고 생각하시는 분들한테 이 책을 선물하자.

한미매국협정을 폐기해야 한다. 폐기한 후 천천히 연구해서 미국과 대등한 관계에서 다시 무역협정을 맺어야 한다. 박정희 정권 때부터 천덕꾸러기처럼 무시당해 온 이 땅 농민을 구해야 한다. 나라를 뛰어넘는 자본으로부터 이 땅 공공부문을 지켜내야 한다. 그들로부터 이 땅 99프로를 지켜내야 한다.

2003년 폭염 때 프랑스에서 노약자 약 1만5천명이 돌아가신 사건을 잊지 말자!

한국 자살률이 2012년 지금 세계 1위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한국에서 한미매국협정 이제 시작이다!

 

 

21세기 『자본론』, 월간 〈작은책〉/ 나태영 [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21세기 『자본론』

– 월간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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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나태영(교육강좌 수료, 한철연 회원)

 

참 언론은 약한 사람 눈, 귀, 입이 되어야 한다. 이 땅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99프로가 아니라 1프로를 위하는 언론기관들이 많다. 언론이라고 말하기조차 구차스러운 수구 언론들이 판을 친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의 힘이 약해져야 이 땅 서민들이 속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김진숙이 노동자를 해직시킨 한진중공업에 맞서서 높은 크레인에 올라갔다. 1년 넘는 기간 동안 올라갔다.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김진숙을 구하기 위하여 희망버스를 타고서 김진숙을 만나러 갔다. 제 정신이 박힌 진보언론에서는 김진숙과 희망버스를 크게 다뤘다. 조선일보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 한미매국협정(한미FTA)이 시작되었다. 10년, 20년, 30년 후에 한미매국협정으로 비롯된 피해는 끔찍스러울 것이다. 제대로 된 언론이라면 한미매국협정에 반대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조중동은 한미매국협정에 찬성한다. 조중동은 한미매국협정에 찬성하는 여론을 만든다. 왜? 한미매국협정은 한국의 1프로와 미국 1프로에게 이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1프로로부터 많은 광고를 받으려는 꼼수 때문이다. 저들에게 광고주가 되지 못하는 99프로는 항상 눈 밖에 나있다. 조중동도 99프로를 위한 기사를 쓴다고 반론을 펴시는 분도 계실 것이다. 하지만 저들의 그런 행동은 자신들이 내는 신문이 괜찮은 신문이라고 물타기 하려는 수작일 뿐이다. 이 땅 99프로에게 고통을 주는 한미매국협정에 찬성하는 여론 만들면서 99프로를 위하는 기사 쓰는 것은 눈가리고 아웅일뿐이다. 전경련 회장 허창수가 “경제민주화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은 허창수가 무식하고 염치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조중동이 뒷 배경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갑갑한 것은 저들의 수작에 넘어가는 99프로가 많다는 사실이다. 1프로의 종노릇하는 조중동은 과연 언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오죽하면 민주시민이 촛불집회 열 때마다 ‘조중동 OUT’ 이라는 팻말을 들고 있겠는가.

조중동의 그림자가 짙을수록 진보월간지 〈작은책〉이 내는 빛은 더 더욱 환하다. 우리는〈작은책〉에서 이 땅 99프로가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1프로로부터 퇴직당해서 싸우는 노동자들을 만날 수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1프로에 맞서서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왜 한미매국협정이 폐기되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가부장제에 눌려서 힘들게 살면서도 가부장제의 한계를 조목조목 지적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북한에서 오신 분들이 이 땅에서 겪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지구를 지켜주는 생태교육도 받을 수 있다. 어린이학교 학생들의 재기발랄한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8천년 민족사 최고 문장가 박지원선생이 칭찬하는 보통 사람들이 〈작은책〉작은책에많이 나온다.

〈작은책〉을 읽게 되면 국회의원들이 몸싸움하는 것을 피상적으로 비판하지 않게 된다. 저들이 무엇 때문에 싸우는 지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 저들 가운데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른 지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 파업하는 철도 노동자들을 비판하지 않게 된다. 파업하는 철도 노동자들에게 마음을 함께해 줄 생각을 하게 된다. 프랑스 민주시민들처럼 말이다.
월간나는 개인적으로 〈작은책〉에 아쉬움이 있었다. 〈작은책〉에서 농촌 이야기를 다룰 때 그랬다. 〈작은책〉이 농촌의 어려운 현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다. 2012년 9월호를 보면서 나는 내 아쉬움을 달래게 되었다.
“독자님들, 저는 지금 전북 변산에 내려와 있습니다. 내년에는 〈작은책〉사무실을 일부 변산으로 옮길 예정이지요. 〈작은책〉이 노동자들의 현장뿐만 아니라 농민과 농촌의 실태를 가까이에서 보고 알리면서 독자님들과 함께 느끼고 싶기 때문입니다.”〈작은책〉2012년 9월호 10쪽)

한미매국협정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이 땅 농민이다. 농민이 피해보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는 너무도 많다. 일본에서는 다른 나라와 무역 협정 맺을 때 농민을 확실히 보호하는 쪽으로 협정을 맺는 것을 보면 우리도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부디 〈작은책〉이 이 땅 농민들이 겪는 어려움을 잘 알려주기를 바란다. 더 욕심을 부린다면 한미매국협정을 폐기하는 데에 〈작은책〉이 큰 역할을 해 주기를 기도한다. 〈작은책〉이라면 그리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작은책〉에 나왔던 분이 6개월, 1년 뒤에 한겨레신문이나 프레시안에서 다뤄지는 경우를 가끔 본다. 〈작은책〉정기 구독자이기에 느끼는 기쁨이다. 공유정옥씨가 하나의 보기가 될 것이다.(삼성반도체에서 일하시다가 백혈병을 얻어 고생하시는 분들에게 힘이 되어주는 반올림에서 활동하시는 분이 공유정옥씨이다). 〈작은책〉이 진보적인 언론 가운데서도 맨 앞에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보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작은책〉17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백두산과 만난다. 이오덕이라는 백두산 말이다. 민주주의 고갱이는 투표이다. 하지만 투표를 했다고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먹물들은 말한다. 민주주의 핵심은 대의제라고 말이다. 거짓말이다. 민중이, 백성이, 일꾼이, 노동자가, 가난한 사람이, 시민이 주인이 되어야 진짜 민주주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야 백두산 이오덕 선생 뜻을 알 것 같다. 이제야, 이제야 말이다.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한다.” “어린이(초등)학교 학생도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라고 말씀하신 뜻을 이제야 깨닫는다. 몽둥이로 머리를 맞은 듯이 말이다. 맞다. 참말로 민주주의는 일하는 사람이 권력을 쥐는 것이다. 나는 안다. 이오덕 선생이 이 말을 하려고 하셨다는 것을 말이다. 먹물들은 믿을 것이 못된다. 일하는 사람이 스스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작은책〉은 일하는 사람에게 권력을 쥐어 준다. 그래서 나는 〈작은책〉이 좋다. 이오덕 선생은 좋으시겠다. 작은책이 울끈 불끈 힘차게 나아가니 말이다. 〈작은책〉이 벌써 17주년(2012년 5월 1일 노동절)을 맞이했으니 말이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적으로 칼 마르크스가 쓴 『자본론』이 다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도 그렇다. 『자본론』 대가 김수행 교수와 강신준 교수가 언론에 자주 나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자본론』은 노동자의 성서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자본론』 이라는 책은 너무 어렵다. 실력 있는 사람과 어울려 여럿이서 읽어야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것도 1년에서 2년 정도의 기간 동안 공을 들여야 읽어낼 수 있는 어려운 책이다. 보통 사람이 혼자 읽기는 쉽지 않은 책이다.

『자본론』을 읽고 싶지만 어려워서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진보월간지〈작은책〉을 권한다. 한 달 보는데 3천원이다. 2010년에 작은책 강연 뒷풀이 때 한 분이 작은책 한 달 보는 값을 올리라는 말을 했다. 그러자 당시 작은책 일꾼 최규화 씨가 말했다. “한 달에 3천원 해도 부담 되서 못 보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작은책〉 정신이다. “한 달에 3천원 해도 부담 되서 못 보시는 분들이 많은” 이런 상황이 바로 21세기 대한민국 현실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작은책〉 꼭 정기구독 해주십사 부탁드린다. 〈작은책〉을 정기구독하는 순간 여러분은 지성인이 된다. 한 달에 3천원도 부담 되서 〈작은책〉 보지 못하는 분을 위해서 〈작은책〉 후원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 삼성일반인노조, 구속노동자후원회 같은 단체나 해고노동자 등이 여러분의 후원으로 〈작은책〉을 받아보실 수 있다.

 

 

만들어진 신화 사무라이정신, 장성훈의 『사무라이정신은 거짓이다!』/나태영 [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만들어진 신화 사무라이정신

장성훈의『사무라이정신은 거짓이다!』

글: 나태영(교육강좌 수료, 한철연 회원)

 

‘현재를 다스리는 사람이 과거를 다스리고, 과거를 다스리는 사람이 미래를 다스린다.’
고대 이집트 사상이 고대 그리스 사상보다 더 뛰어나다. 고대 그리스 사상가들이 이집트에 공부하러 갔다고 자주 자랑한 것을 보면 이는 명백한 사실이다. 이정호 교수 한테서 들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일반인은 드물다. 한국고대사가 중국고대사보다 더 뛰어나다. 이형구 교수, 우실하 교수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이 땅 다수 역사학자들이 게으르고 무능해서 그런 사실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들은 화이사관, 식민사관에 물들어서 그렇다. 그들은 이완용 양아들인 이병도의 자식들이다. 식민사학자 이병도는 죽기 전에 참회하고 단군신화가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 자식들은 그 애비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착잡한 일이다. 그들은 신채호 선생만한 역사관도 지니지 못했다. ‘현재를 다스리는 사람이 과거를 다스리고, 과거를 다스리는 사람이 미래를 다스린다.’ 중국이 동북공정, 하상주단대공정(하나라, 상나라, 주나라 시기를 밝히는 공정)을 억지로 밀어붙이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중국 어용 역사학자들은 단군왕검, 광개토태왕, 을지문덕장군도 중국인 조상으로 둔갑시키려고 한다. ‘가늠할 수 없는 꿈의 크기’ 대조영도 저들은 중국인 조상으로 둔갑시키려고 한다. 징기스칸을 중국인 조상으로 생각하는 중국인들 많다. 무섭고도, 무서운 현실이다. 두 눈 부릅뜨고 우리는 우리 고대사 공부해야 한다.

일본인은 거짓을 참인 것처럼 만드는데 도통한 인간들이다. 없었던 왕을 있었다고 끊임없이 우긴다. 일본 고고학자는 일본에 구석기 시대가 있었다는 역사를 만들려고 가짜 구석기 유물을 땅 속에 묻었다. 거짓이 항상 참을 이길 수는 없다. 언론을 통해서 그 학자 거짓이 드러났다. 보통사람 장성훈이 쓴『사무라이정신은 거짓이다!』라는 이 책이 일본인들이 거짓말한 사실을 잘 드러내준다. 이런 책을 역사학자가 쓰지 않았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청나라 정사인『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라는 책도 이 땅 역사학자들은 번역하지 않았다. 우리 고대사와 관련된 내용이 많이 나오는데도 그랬다. 저들은 뼛속까지 화이사관, 식민사관에 물든 인간들이다. 최초로 번역한 사람은 공무원 장진근이다. 세상에 나온 지 232년 만에 한국에서 처음으로 번역되었다. 이 땅 역사는 힘 있는 사람들보다 뜻을 지닌 보통사람들이 가꾼 역사라는 생각을 해본다. 한국 현대사에서 대통령들은 작것질을 했다. 독도에 대해서 말이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이 그리했다. 보통사람들이 독도를 지켰다. 장성훈도 중요한 일을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무라이정신은 거짓이다!』, 장성훈 지음, 북마크 펴냄, 2011년

사무라이정신은 근대에 만들어진 이름이다

‘청일전쟁1894∼1895에서 이긴 일본은 자신감을 되찾으며, 서양 열강과 맺은 굴욕적인 통상조약을 개정하는 데 성공한다. 그동안 서양 열강에 갖고 있던 열등감으로부터 자신감도 회복한다. 그러면서 서양의 사상보다는 일본의 ‘고유한 가치관’을 갖자는 기류가 사회 전반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BUSHIDO-The Soul of Japan』이라는 책이 미국에서 영어로 발간된 것도 이때1898년였다.’

‘그 이전의 어떤 문헌에도 ‘무사도’라는 단어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무사도라는 말 자체를 이 책의 저자가 창안하여 만든 글이라고 책에서 밝히고 있다.’(55쪽)

‘그가 유럽의 교수로부터 “일본은 학교에서 종교를 가르치지 않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학생들에게 도덕적 규범을 가르치며 일본의 도덕적 가치관은 무엇인가?”하는 당혹스런 질문을 받는다.

궁색한 답변에 자존심이 상한 저자는 며칠을 생각한 끝에 그것은 ‘무사도’라는 것을 겨우 생각하게 됐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학교에서 특별히 도덕적 규범에 대하여 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자신의 관념 속에 내재되어있던 도덕적 관념은 그가 어려서 듣던 무사들의 무용담 얘기 속에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56쪽)
영화 7인의 사무라이(1954)

그가 유럽의 교수로부터 “일본은 학교에서 종교를 가르치지 않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학생들에게 도덕적 규범을 가르치며 일본의 도덕적 가치관은 무엇인가?”하는 당혹스런 질문을 받는다.
궁색한 답변에 자존심이 상한 저자는 며칠을 생각한 끝에 그것은 ‘무사도’라는 것을 겨우 생각하게 됐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학교에서 특별히 도덕적 규범에 대하여 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자신의 관념 속에 내재되어있던 도덕적 관념은 그가 어려서 듣던 무사들의 무용담 얘기 속에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56쪽)

‘꼬리가 길면 밟힌다.’ 거짓은 언제든 드러난다. 일본학자가 없던 사무라이정신을 근대에 억지로 만들었으니 그 한계가 일본 역사에서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가미가제 특공대원’들은 숭고한 애국심으로 국가를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하지 않았다. 얼빠진 정치인들과 얼빠진 일본 역사학자들이 지어낸 거짓말이다. 그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같은 신세였을 뿐이다. 이 책 『사무라이정신은 거짓이다!』에서 요미우리신문의 와타나베 쓰네요 회장이 말했다. 가미가제 특공대가 실제로 미 함정에 돌진한 숫자가 6프로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도 그 한계를 알 수 있다.

피로 물든 시대, 전국시대는 일본에도 있었다

‘일본의 전국시대는 일본역사에 있어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 한 나라가 무려 50 ∼70여 개의 작은 독립된 세력으로 나뉘어져, 130여 년간 서로가 서로를 침략하고 침략당하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는 시기였다.’(39쪽)

‘전쟁이 있을 때는 전쟁에 피해를 보고, 전쟁이 없을 때는 전쟁 준비로 또 다른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면서도 겨울이면 바람막이조차 되지 못하는 움막에서 얼어 죽지 않으려고 웅크리고 자고, 춘궁기면 굶어 죽지 않으려고 주린 배를 움켜잡고 살아야 했다.

자료에 의하면 당시의 지배계급이었던 사무라이들조차도, 상위 30%만이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고, 나머지 70%는 절대적 빈곤 속에서 살았다고 한다.’(40쪽)

?현대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처럼 속마음을 화통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를 알만한 내용이 이 책에 나온다. 경제대국 일본인들 참 불쌍하다.

‘모반과 하극상이 어찌나 심했던지, 영주 및 사무라이들은 동료나 부하는 물론 부모도, 형제도, 심지어 자식도 믿을 수 없는 극단적인 상황이 되었다. 식사를 할 때나, 잠을 잘 때나, 항상 칼을 소지하고 다니게 되었다.’

‘오늘은 살아 있어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고, 아침에 일어나 숨을 쉬어야 살아 있음을 실감하는 그런 시기였다.’(21쪽)

도조 히데키는 절대로 김홍집이 될 수 없다.
도조 히데키는 나쁜 짓은 크게 하고 책임지는 일을 해야 할 때는 쥐새끼처럼 쥐구멍으로 숨었다. 참으로 구차하게 살다간 인간이다. 도조 히데키를 보면서 그릇이 작은 인간은 큰 일 맡으면 안 된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도 똑같이 맞춤하는 사실이다.

‘이름 앞에 애국자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는 친일파가 한 사람 있다.’ ‘일본의 선진 문물을 보고서 그는 불과 한 달 만에 친일로 기울어 있었다.’ (정운현의『친일파는 살아있다』, 169쪽)

‘하루아침에 친러파 세상이 되어버리자 친일파 역적으로 지목된 그는 신변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그는 사인교를 타고 고종이 머물고 있던 정동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일본군이 그의 사인교를 가로막으며 소리를 질렀다.

“대감! 지금 군중들이 대감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같이 얼른 이곳을 피하셔야 합니다.”

그러자 김홍집은 비통한 표정을 짓더니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일국의 총리로서 동족의 손에 죽는 것은 천명이오. 구차하게 남의 나라 군인의 도움으로 살아남고 싶은 생각은 없소!”

그가 탄 사인교는 군중들의 몽둥이가 기다리는 광화문 쪽으로 향했고, 그는 결국 길바닥에서 맞아죽었다. 그의 시체는 새끼줄에 묶여 개 끌리듯 종로로 끌려가서 발길질과 팔매질에 온갖 수모를 겪었다.’(정운현의 『친일파는 살아있다』, 171쪽)

 

‘육군 대신으로 그 당시 내각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던 도조 히데키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삼국동맹을 주도하고, 영국, 미국 등이 지배하고 있던 동남아시아를 침범케 함으로써, 기존의 전쟁을 영국과 미국을 상대로 확대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72쪽)

‘한마디로 도조 히데키는 겁쟁이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비굴할 정도로???.

사무라이답게 할복할 용기가 없어서, 그 고통을 감내할 자신이 없어서 총으로 자살을 시도했지만, 결국엔 총을 머리에 제대로 쏠 용기조차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겁쟁이 도조 히데키는 자신이 내린 ‘전진훈前進訓’과는 반대로 명예롭게 죽지도 못하고 수치스럽게 포로로 잡혀 재판장에 섰으며, 자신이 부하들에게 권유한 ‘와전옥쇄瓦全玉碎’도 지키지 못한 채 부끄럽게 교수형에 처해진 것이다.’(76, 77쪽)

 

불교는 살생을 금하는 종교이다. 원광법사가 세속오계를 통해서 말했다. “산 것을 죽일 때는 가려서 하라.” 하지만 원광법사의 말씀을 거스르는 말을 일본 승려는 너무 쉽게 했다.

‘당시 일본인들의 신망을 받던 ‘야스타니 하쿠운Yasutani Hakuun은 “당연히 우리는 죽여야 하며, 가능하면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자국민들에게 어용설법을 하였다.’(51쪽)

야스타니 하쿠운이 과연 일본인들의 신망을 받을만한 승려였는지 의문이 생긴다. 옳곧게 살기 힘들다는 생각을 해본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몇몇 기독교 목사들이 상식에 어긋나는 말을 한다. 동족인 북한을 도와줘야함에도 불구하고 북한과는 상대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한다. 남북긴장을 풀기 위해 노력해야할 종교인들이 남북긴장을 더 악화시키는 일을 해대고 있다. 남북이 독일과 다르게 천천히 30년에 걸쳐서 통일을 이루면 대한민국은 백범 김구선생이 꿈꾸시던 멋진 문화대국이 될 것이다. 경제대국이 될 것이다. 세계 최대 금융그룹 골드만 삭스가 한 말이다.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 많다. 왜 독도가 엄연히 한국 땅인데도 저들은 일본 땅이라고 우기는지, 왜 일본이 위안부 여성을 동원하고서도 계속 궤변을 일삼는지, 왜 일본이 2차 세계대전의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척 하는지, 왜 많은 일본인들이 세뇌되어 자살을 하게 되었는지, 왜 일본 총리가 염치없이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경제대국이라고 자랑하는 일본이 전후 독일처럼 상식이 통하는 나라가 되기에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열도부여)은 이 땅 삼국시대 때 백제(반도부여)와 범부여 국가를 이룬 나라였다. 백촌강 전투 때 일본(열도부여)이 수백 척 배를 백제로 보낸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김운회교수가 쓴 『대쥬신을 찾아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런 일본이 이 땅에 큰 죄를 지었다. 그 첫째는 임진조일전(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 둘째는 1910년에 조선을 강제병합한 것이다. 그보다 더 큰 죄는 이 땅에 식민사관을 심은 것이다. 이 땅 정기를 없애려고 삼천리 금수강산에 말뚝을 박은 것이다. 조선시대 왕궁을 더럽힌 것이다.

김택민 교수는 이 땅 역사가 ‘한의 역사’가 아니라 중국 역사가 ‘한의 역사’임을 정확히 밝혔다. 장성훈이 좀 더 공을 들여서 김택민 교수처럼 훌륭한 역사책을 써주길 부탁한다. 『일본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라는 책을 써주길 부탁한다. 일제 강점기에 이루어진, 지금도 이 땅 곳곳에서 힘을 발휘하는 식민사관을 없애주는데 큰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다. 우리 역사가 ‘한의 역사’가 아니라, 일본 역사가 ‘한의 역사’였음을 확실하게 밝혀주길 기대한다.

‘난세는 길고 치세는 짧다

최초의 1천 년, 난세 870년 치세 130년

중간의 8백 년, 난세 670년 치세 130년

마지막 1천 년, 난세 700년 치세 300년’

(김택민의『중국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 12쪽, 개정판 책 제목이 『3000년 중국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로 바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