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설미향의 두 자화상[보고 듣고 생각하기]

감성적 내일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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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원(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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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본 웹진의 [문화보기] 코너에 성황리에 연재를 한 [나무이야기]와 작가의 블로그http://dandron.blog.me/에 있는?김설미향 작가의 그림에 대한 단상임을 알립니다.

1. 작가의 두 자화상이 있다. 하나는 드로잉 자화상들이다. 다른 하나는 [나무이야기]라는 타이틀의 자화상이다. 나무들을 자화상이라고 [과감히] 말하는 이유는, 작품에는 항상 작가의 의식이 따른다는 예술 일반론에 기대어 하는 말이다.

드로잉화 자화상들은 제목도, 번호도 없다. 이들은 하나같이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얼굴은 일그러지거나 뼈만 남은 듯 볼 품 없다. “음, 그림이 꿈틀거리는군요. 자기 얼굴은 자기가 잘 아는 법, 자화상의 진가를 느끼고 감”이라는, 알쏭달쏭한 덧글을 남기고 가는 이도 있다. 나도 덧글을 따라, ‘그림이 요동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려 애써본다.

그나마 작가의 자화상에 대한 설명에서 작가의 행복하지 않은 심정을 읽을 단초가 있다. 작가는 묻는다. “나의 가족은 무엇”인가? 잠자다가도 작가는 운다. 추측으로만 가능한 트라우마가 있다는 의미이다. “쓰레게 줍는 노인들에게 슬프고”, 소비의 방향을 잃은 사람들 때문에 슬프다.

또 다른 작가의 자화상, [나무이야기]의 그림들은 드로잉 자화상에 비해 분위기가 다르다. 밝은 채색이 우선 시선을 붙잡는다. 연결되는 짧은 이야기들 덕분에 그림들에 논리적 순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숲 속의 나무가 행복한 봄을 즐긴다. 나무는 아이들(사람들)에게 풍성히 베풀어준다. 그러나 무참히 상처받는다. 상처받고 잠이 든 나무는 동료들의 위로에 따라 다시 깨어난다(다시 생명을 얻는다). 나무는 나비들과 새들을 포함하여 자연과, 사람들과 관계한다. 아마도 자화상은 자연에 있는 모든 존재들과 생명을 나누기를 꿈꾸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해서 ‘예술은 삶을 짓누르는 형식에다가 인간의 의미를 새겨 넣는다’는 경구가 성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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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림을 읽기 위하여 니체가 [비극의 탄생] 전반부(1-5절)에서 말하는 예술 일반론을 짧게 언급할 필요가 있다. 고전 예술론과 니체에 의하면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다. 그러나 단순한 자연모방이나 사실을 표현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실로부터 등을 돌려, 사실에 대한 인상이나 착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연의 모방이란 주관인 내가 객관인 자연과 상호 교호작용을 하는 방식이다. 니체는 교호작용의 예를 서정시인의 시작(詩作) 상태를 빌려 설명한다. 서정시인에게 기쁨(해방된 욕구)과 비애(억압된 욕구)의 상태에서 자연에 대해 자신을 주체로 인식한다. 결핍된 욕구인 열망이 해방받기 위해 분출된다(니체 식으로 말하면, 욕망이 주관을 이끌어낸다). 니체를 따라, 쇼펜하우어 식으로 말하면 어떤 욕구가 충족되면 다른 욕구가 다시 생기게 마련이다. 주관의 열망이 분출되면 자연 경관이 다시 우리의 욕구를 순수한, 의식 없는 인식을 갖도록 해 준다. 이렇게 해서 예술가의 창작 상태는 주관적 의지와 반성적 자연 상태를 나누어갖게 된다.

예술가가 이처럼 자연을 모방하게 되는 것은 가상에 대한 필요성 때문이다. 니체는 라파엘로의 그림(천국과 지옥)을 빌려, 예술가가 왜 가상을 필요로 하는지 설명한다. 인간은 그의 토대에서 고통스러운 존재이다(그림 하반부). 그러나 매 순간 가상(상반부)이 만들어내는 욕구 충족경험을 한다. 이렇게 하여, 표현된 것으로부터 새로운 가상인 즉 [가상의 가상] 세계가 만들어진다. 새로운 가상은 이 세계를 [살 만한 것]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니체의 유명한, “세계는 예술로서만 정당화된다”는 경구가 완성된다.

예술 일반론에 더하여 리얼리즘 예술론도 잠깐 살펴보자. 까간은 [미학 강의]에서 리얼리즘과 고전 문학의 차이를 명료히 했다. 고전문학에서는 성과 속, 미와 추의 게토가 엄격히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리얼리즘에서는 이 게토가 무너진다.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그 내면은 추악하기 짝이 없다. 예술가가 현실의 미, 추를 적나라하게 밝히는 이유 역시 어떤 목적 때문이다. 예술 일반론에서 예술의 목적이 가상에 대한 필요였다면 리얼리즘 예술의 목적은 사회적 치유에 있다. “그대들, 젊은이들을 위해 시인은… 플라터너의 거친 혓바닥으로 폐결핵의 가래침을 낱낱이 핥는다”. 미래를 위해 현재의 해악들을 제거하겠다는 것이 리얼리즘의 진수이다.

회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피카소를 어느 화풍이라고 규정하든, 그의 그림 [게르니카]에는 리얼리즘이 숨쉬고 있다. 그는 그림을 통해 인간의 잔인성과 야만을 고발하고 있다. 말들이 죽어가고, 인간이 학살당하고 있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사진도 있고, 신문 기사도 있다. 그러나 리얼리즘 예술을 리얼리즘 예술답게 하는 이유는 인간의 야만성을 고발하고(이것이 현실이다), 참 인간화된 세계는 이런 것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웅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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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제 김미향의 그림들을 다시 읽을 수 있다. 또 다른 자화상인 그림에 첨가된, 이해 가능한 절제된 경구들에는 풍성한 의미들이 숨어있다. 인간은 물론 자연과의 교호작용, 형제 관계를 형성하겠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무의 눈을 보자. 그(녀)는 암, 수 구별 이전의 존재로서 나비(이성이 아니다)를 쫒고, 아이들을 쫒고, 죽었다가(잠들었다가) 다시 깨어(살아)난다. 자연이란 원래 ‘생명’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그래서 “시는 나와 같은 바보나 짓지만, 나무를 만드는 것은 하나님뿐”이라는 외침이 가능할 것이다.

우중충하고 암울한 드로잉 자화상에는 다행스럽게 귀에 헤드폰이 걸려있다. 작가가 위로받을 양식이 있는 것이 다행스럽다. 자세히 보면 그림은 적적성성(寂寂惺醒)하다.

?고요한 가운데 깨어있음이 분명하다. 눈은 차분하게 어느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잠들어 있지도, 요동치지도 않는다. 다시 들여다 보면, 눈은 아마도 맑은 갈색이리라 짐작하게 된다. 어쨌든 눈은 맑다. 응시하는 시선이란 반성적 시선이요 현실에서 일어나는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시선이다.

작가는 오늘날 가족일반에 대해 반성한다. 가족 일반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현실을 사실적으로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박범신은 이득과 희생을 강요하는 오늘 가족의 세태를 그리지 않았던가. 어느 여성은 옷 장사하는 시누이가 제사 때마다 짝퉁을 들고 와 강매하는 통에 죽을 지경이라는 하소연을 했다. 가족 관계에서조차 장사꾼의 이득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이라면 그런 장사꾼을 믿느니 차라리 창녀를 믿으라는 마크 트웨인의 경구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족을 이처럼 갈기갈기 찢어놓은 이유는 무엇보다도 공평하지 못한 사회적 분배에 기인한다는 것을 누가 모르랴.

가족이란 내게 무엇인가? 소통하는 존재인가?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인가? 필자는 [비가 오면 우산이 되어주]는, [그림 6]에 기대어 작가의 의도를 과감하게 추측해 본다. “오늘은 내게 기대세요, 내일은 내가 당신에게 기댈께요.” 그림책의 나무들은 작가가 현실에서 살아가는 소명(Gerufe)을 보여주는 듯하다. “좋은 예술가가 되어 타인들(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이 그녀의 바램이다. 나에게 와서 쉬라. 오늘 가족 일반에게 이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가족 공동체이다. 그게 아니라면 가족은 또 다른 지옥이다(홍 선생님 어록). 가족은 작은 사회이다. 가족이 이득관계로 지옥이듯이 사회 역시 이득관계로 지옥이라면, 이런 사회와 가족은 지양되어야 한다. 이 예술가의 의도이다.

드로잉 자화상에 이어지는 글 속의, 작가가 행복할 수 없는 요소들에 대해 반드시 짚어야 한다. 폐지줍는 노인과 몸 파는 여성들 때문에 고통받는 작가는 ‘창밖에 떨고 있는 저 개 한 마리 대문에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존재이다. 타인의 고통에 무딘 것이 오늘 사회 현상임을 작가는 고발한다. 삶의 의미를 묻는 작가의 의도는 여기에 있는 듯하다. 더 나은 사회는 가슴과 가슴으로 만나는 사회여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 민감한 사회이어야 한다.

작가가 인간으로 많은 약점을 지녔다하자(자화상에서 보듯, 수려하지 않은 외모이든, 시에서 보듯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든). 시인의 의도는 범인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러나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로서 많은 장점을 지녔기에 그녀는 참 좋은 예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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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이라 생각하고 가벼이 읽다가(보다가), 몸 어느 부위를 때리는 충격을 받는 것은 뎅커(Denker)로서의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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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자화상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삶의 노래에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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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존재의 이유를 찾아 떠나는
끊임없는 약속과도 같은 물음을 찾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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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빛나는 시월의 달을 짖고
봄의 휘날리는 구름섬과 같은
바람의 향기에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붉게 물든 어린 복숭아 향기를 기억하듯
나는 그렇게?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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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뜨고 아주 가끔 바람이 내게로 와
비오는 산막골을 되찾듯 어린잎에 피어오르는 빗줄기에
작은 풀은?쓸쓸함에 기억을 도둑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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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다리에 던지는 마음이 풍덩
어린아이는 밤하늘 반짝반짝 커다란 우주를
물빛에 차갑게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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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영혼 그 흔적의 자리 그림자는
자체의 흔들림을 가지고
밝음도 그 어둠도 가지지 않은 체를 건져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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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 자리에 그 것일 뿐이다.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한국사가 아니라 중국사가 한의 역사:김택민이 쓴『중국역사의 어두운 그림자』

[보고 듣고 생각하기]

한국사가 아니라 중국사가 한의 역사

-김택민이 쓴 『3000년 중국역사의 어두운 그림자』, 신서원, 2006-

글:? 나태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여유 있으면 8천만 겨레 모두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

중국사를 관통하는 고난에 비하면, 우리 역사 관통하는 고난은 소꿉장난 수준이다. 일제강점기 일본학자가 우리 고난 침소봉대했고 이병도 따르는 역사학자들이 계속 식민사관 대물림한다. 이병도는 을사5적 이완용 양아들이다.

한국이 951번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면, 중국 땅에서는 약 3만 번 전쟁이 일어났고, 일본에서는 약 2만 번 전쟁이 일어났다.

중국역사
맨 앞 1천년, 난세 870년 치세 130년
가운데 8백년, 난세 670년 치세 130년
마지막 1천년, 난세 700년 치세 300년(12쪽)

1979년에 박정희가 지 부하한테 총알 맞아 죽었다. 그 때 나는 중3 학생이었다. 1980년에 나는 고 1 학생이었다. 40대 중후반 윤리선생님이 침을 튀기면서 우리는 못난 민족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 『시련과 극복』이라는 책이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책 앞 부분에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한테 9백 몇 십번을 침략 받았다는 내용이 나왔다. 그 내용을 설명하시면서 윤리 선생님이 “우리 민족은 병신이야”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뭐라 설명할 수 없었지만 좀 거시기 했다. 좀 억울했다.

중학교 때 국사 책 앞 부분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고구려가 위장 관구검한테 공격 받아 왕이 어디로 도망갔다. 라는 내용이 말이다. 책을 쓴 학자들이 식민사관에 세뇌되어 그리 썼을 것이다. 중국학자들이 쓴 책을 보면 자기들이 진 전쟁에 대해 역사책 앞에서 다루지 않는다. 수나라, 당나라가 고구려한테 대패한 이야기 잘 다루지 않는다. 간혹 다루더라도 아주 쪼금 다룬다.
 

김택민,『3000년 중국역사의 어두운 그림자』, 신서원, 2006. 사진출처: www.everedu.com/


 
1981년에 서울역 대일학원에 다녔다. 성문기본영어 들었다. 강사는 일본에서 살다가 오신 분이다. 그 분이 그러시더라.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 아닙니다. 원나라한테 침략 받을 때 우리 조상 여자들이 겁탈 당했습니다. 여러분 핏속에 몽골 피 있습니다. 우리나라 기와집 처마는 새 날개 모양입니다. 우리나라가 너무도 많이 다른 나라한테 침략을 받아서 새처럼 자유를 추구하는 마음이 생겨서 건물 처마가 새 날개 모양입니다.

그 분이 또 헛소리 하셨다. 우리가 세계에 내세울 유물이 석굴암이 아닙니다. 비원에 있는 아무개라는 목조건물입니다. 같이 일한 역사 강사가 그러더라. 우리 전통가옥 처마는 아래에서 볼 때 가장 웅장하게 보이도록 각도를 잡았다고 말이다.

우리나라 국사책에
일제 강점기 항목이 나온다.
그런데 우리나라 세계사 책에는

오호 16국 강점기,
요 강점기,
금 강점기,
원 강점기,
청 강점기

라는 항목이 나오지 않는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영어판을 1985년에 대학 도서관에서 본 적이 있다. 일본 항목을 봤더니 1대 왕부터 몇 대왕까지 줄줄이 사탕처럼 나온다. 상식 있는 일본학자들이 몇 대까지는 뻥이라고 인정하는 내용이 버젓이 사실인 양 나왔다. 대한민국 항목을 봤더니 단군 왕검 이야기 나오고 갑자기 서기 삼국시대 이야기 나온다. 단군 왕검 이야기는 신화로 나온다. 서양인들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보면 일본이 한국보다 더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로 볼 것이다. 열 받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 항목은 이 나라 영문과 교수들이 영역했더구만. 당연히 원래 글은 식민사관에 쪄든 이병도 제자들이 썼겠지. 이병도가 나라 팔아먹은 이완용 양아들이라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1985년에 대학생 사촌집에 갔다. 사촌한테 내가 물었다. 일제 시대와 해방초기에는 우리나라 마라톤 선수가 세계 맨 앞 이었는데 지금은 왜 성적이 나쁠까? 사촌이 그러더라. “조선 놈은 3일에 한 번씩 맞아야 정신 차려.” 식민사학자가 우리한테 심어놓은 말을 이 나라 최고 지성인이라는 대학생 입에서 나왔다. 깝깝했다.

이래서 나는 한국고대사에 관심이 많다. “조선 놈은 3일에 한 번씩 맞아야 정신 차려.” 이 말이 이 땅에서 없어지는 그 날까지 나는 한국고대사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중국역사의 어두운 그림자』(『3000년 중국역사의 어두운 그림자』로 책 제목 바뀜)이 책이 많이 팔려야 화이사관 식민사관 문제 풀 수 있다.

숨을 편하게 쉬기 위하여 개고기를 그만 먹는다[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숨을 편하게 쉬기 위하여 개고기를 그만 먹는다

-비정기 간행물 <숨>-

글:? 나태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많이 고민하다가 이 글을 쓴다. 며칠을 고민했다. 사랑하는 안해가 이 글을 읽고 뭐라고 하지 않을까? 주책없다고 말이다. 하지만 어쩌랴? 다 사실인 것을. 나는 어린이(초등)학교 2학년 시기를 인천에서 보냈다. 하루는 어둑 어둑한 밤에 아버지가 나와 두 살 위인 형을 데리고 논 부근 물가로 가셨다. 자전거 뒤에 다라이를 싣고 가셨다. 그 다라이에는 불에 그을려 검게 탄 개가 있었다. 아버지는 그 개를 더 작은 크기로 토막내기 위해서 논가 물 있는 곳으로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신 것이다.

집에 왔더니 어머니가 이미 개고기 요리할 준비를 해 두셨다. 어머니가 개고기 토막을 큰 솥에 넣고 부글 부글 끓이시는데 냄새가 참 좋았다. 된장냄새와 함께 구수한 개고기 냄새가 참 좋았다. 요리가 다 되었는지 어머니가 개고기 덩어리를 하나씩 꺼내어 칼로 잘게 썰어주셨다. 우리 식구는 한 점 한 점 맛나게 먹었다. 나도 맛나게 먹었다. 참 맛 있었다.

그 뒤로도 집에서 개고기를 몇 번 먹었다. 커서는 보신탕 집에서 지인들과 어울려 먹었다. 나름 친한 분을 내가 초대해서 함께 보신탕을 먹곤 했다. 최근 까지도 나는 보신탕을 먹었다. 숨이라는 무크지를 읽고 깊이 생각을 해봤다. 그 동안 내가 보신탕을 먹은 개인 역사를 돌이켜 보았다. 내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내용이 <숨> 2권에 나와서 더 더욱 그랬다. 나는 대학 다닐 때 도올 김용옥교수 책을 열정적으로 읽었다. 책이 나오기가 무섭게 간절한 마음으로 그 분 책을 사서 읽었다. 그 분 책에서 보신탕 이야기가 나왔다. 청나라 위안 스카이 이야기를 곁들여서 보신탕 이야기를 했다. 88 올림픽 한다고 줏대없이 보신탕 집을 단속하지 말고 자신있게 전통 음식인 보신탕을 먹으라는 것이 대체적인 내용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보신탕 집이 보양탕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음성화된다는 것이다. 내가 그 당시 존경하던 석학이 보신탕을 자신있게 먹으라는 말을 들으니 나는 뿌듯했다. 나 자신이 보신탕을 먹는다고 공공연하게 밝히고 다녔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한테도 보신탕은 반만년 역사가 이루어낸 훌륭한 전통 음식이라는 말까지 했다. 프랑스 여배우 브리짓 바르도가 대한민국에서 이루어지는 보신탕 문화는 야만적이라는 비난이 너무도 몰상식한 말이라고 힘주어 비판하기도 했다. 그이는 문화 상대주의를 모르는 몰상식한 문화제국주의자라고 비판을 하면서 말이다. 의사들이 수술환자에게 수술 부위가 빨리 아물도록 보신탕을 권한다는 아버님 말씀도 내가 보신탕 신봉자가 되게 하였다.

<숨>, 더불어숨 출판사, 2009.

 

서울시 마포구 성미산 마을에 작은나무카페가 있다. 내가 사는 동네에 말이다. 그 카페에서 숨이라는 책을 처음 읽었다. 그때는 내가 이런 글을 쓰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숨> 1권과 2권을 사서 집에서 쉬엄 쉬엄 읽었다. 안해가 요즈음 그런다. 내가 숨을 읽더니 여덟 번이나 그랬단다. “에이, 이 책 읽다 보면 앞으로는 보신탕 못 먹겠네.” 지인과 보신탕 빨리 한 번 푸짐하게 사 먹고 보신탕과 영원히 이별할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럴 수 없었다. 숨에서 개와 관련된 글을 읽고 숨에 나온 이쁜 개 사진을 본 내가 더는 보신탕을 먹을 수 없었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개를 사랑했던 기억 때문에 내가 지금 개고기를 먹지 않으려는 것 같다. 어릴 때 집에서 개를 길렀다. 아버지가 강아지를 사 오셨다. 아버지는 어떤 강아지를 사오시던지 강아지 이름을 재동이라고 지으셨다. 재동이는 내가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꼬리를 흔들며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내게 안기곤 했다. 혀로 내 손을 내 얼굴을 빨곤 했다. 아직도 재동이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재동이 혀의 촉촉한 감촉이 느껴지고, 재동이 선한 눈빛이 어른거리고, 재동이가 달려올 때 내는 핵핵거리는 소리가 바로 지금 들리는 듯하다. 재동이를 안을 때 느꼈던 따스한 체온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뚜렷이.

우리 아버지가 네 형제에게 그랬듯이 나도 우리 딸 쌍둥이에게 보신탕을 먹게 했다. 어린 우리 쌍둥이가 보신탕도 먹을 줄 안다고 자랑하고 다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끔찍하다. 부모로써 쌍둥이한테 미안하다. 큰 죄를 지었다. 앞으로는 쌍둥이에게 보신탕 먹을 기회를 만들어 주지 말아야겠다. 숨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내 글을 읽고 충격 받으실 것을 생각하면 내가 겁난다. 무안하다. 그래도 돌이켜 보니 내 주변에서 긍적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내가 잘 몰랐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렇더라. 아버님이 약 15년 전부터 보신탕을 드시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절에 다니시면서 차츰 개고기를 끊으셨단다. 우리 안해도 약 3년 전부터 보신탕을 먹지 않았다. 이제 나만 안 먹으면 된다. 다행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참 살기 힘든 곳이다. 불량한 사장 때문에 파업하는 일꾼들이 많다. 그 분들 삶은 참 팍팍하다. 하지만 <숨>이라는 책을 읽고는 그 분들이 그래도 동물들보다는 낫구나 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동물들은 파업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부당한 짓을 해대는 인간을 상대로 시위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오늘은 2010. 9. 21. 한가위 연휴 날이다. 내 삶에서 작은 혁명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내게 다짐한다. 앞으로는 절대로 보신탕 먹지 말자. 앞으로는 되도록 고기 식사를 줄이자. 앞으로는 되도록 적게 먹자. 달님 저를 굽어 살피소서.

해님 제 가슴을 뜨겁게 해 주소서.

 

이반 일리히,『절제의 사회 Tools for Conviviality』를 읽고…/지미정 [보고 듣고 생각하기]-①

이반 일리히,『절제의 사회 Tools for Conviviality』를 읽고…/지미정 [보고 듣고 생각하기]-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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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정(한철연회원)
이반 일리히의 상생 사회를 위한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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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12년 봄에 차를 팔았다. 차 안에서 우연히 들은 라디오 방송의 사연이 내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젊은 아내가 남편을 설득해 차를 판 사연이었다. 부부는 치솟는 기름 값과 교통체증 때문에 대중교통으로 출·퇴근을 했으며 기껏해야 주말에 마트나 나들이를 할 때만 자동차를 사용했다. 그러나 자동차를 보유하기 때문에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자동차 할부금과 보험료, 세금 그리고 유지비와 보수비를 따져보니 자신들의 소득에 비해 터무니없이 과했다. 세대 당 한 대의 자동차 보유를 당연히 여기는 요즘 시대에 그녀의 지혜로운 선택은 내게 용기를 주었다. 그 당시 나는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가까운 거리도 차로만 움직이고도 늘 시간에 쫓기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도 소비에 의존했다. 나는 차를 팔고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지금은 차 없는 생활의 이로움을 발견하며 만족하며 살아간다. 아마도 그 배경에는 이반 일리히(I. Illich)의 영향이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일리히는 오스트리아 철학자며 로마 가톨릭 수사였다. 그는 서양 문화의 제도들이 우리의 교육, 의료, 노동, 에너지 사용, 교통 그리고 경제 발달에 미치는 효과를 비판했다. 일리히는 인생 후반기에 얼굴에 자라는 암 때문에 고통 받았으나 전문적인 의료에 따르기보다 전통적인 방법들로 치료했다. 그는 종양에 의한 고통을 진정시키기 위해 정기적으로 아편을 피우기도 했으며, 일리히는 종양이 진행 초기일 때, 종양을 제거하기 위해 의사와 상담했지만 종양을 제거하면 말하는 능력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을 듣고 종양과 함께 사는 삶을 선택했다. 일리히는 그 삶을 자신의 운명이라 말했다.

▲이반 일리히 지음 박흥규 옮김, 생각의 나무 펴냄

일리히는 『상생 도구 Tools for Conviviality』에서 우리 사회가 부정의한 이유는 극소수에게만 자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도구의 존재를 정치적으로 용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리히의 ‘도구 tools’와 ‘상생 conviviality’ 개념은 앞으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간단한 의미는 다음과 같다. 일리히는 “현대 기술이 관리자managers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서로 연결된 개인에게 봉사하는 사회”(Illich, p.?)를 ‘convivial’하다고 말한다. 관리자는 기업의 사장을 의미한다. 즉 현대 기술은 기업의 사장이 돈을 벌게 쓰이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많아지게 하는 도구여야 한다. “정치적으로 서로 연결된 개인”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려면 일리히가 정치를 어떤 뜻으로 사용하는지 알아야 한다. 일리히에게 정치는 “에너지나 정보의 동등한 투입이 아니라 일정한 한계 안에서만 최대의 산업적 산출의 분배”(Illich, p.?)를 다루어야 한다. 정치는 투입이 아니라 산출과 관련한다. 산출의 분배를 최대화하는 것이 정치의 목표다. 분배의 최대화는 곧 돈 많이 버는 것이고, 그렇다면 ‘convivial’은 사장이 아니라 개인들이 돈을 많이 벌게 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 글에서 나는 먼저 도구의 근본 독점을 비판하고 일리히의 ‘도구 tools’와‘convivial’ 개념을 분석한 후, 일리히가 제시한 대안들을 평가한다. 일리히가 상생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제시한 구체적인 정치 대안은 이상적이고 전 근대적이라 현실에 적용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러나 나는 오늘의 지구 환경과 생태 문제를 단순히 자연에 대한 존중과 인간과 자연의 화해 또는 조화라는 추상적인 답에서 찾는 것은 문제에 대한 원인을 잘못 분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일리히의 사상은 산업 도구의 근본 독점에 대한 비판을 통해 상생 사회를 위한 개인의 노력이 무엇인지를 일깨우고 사회 개혁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더 구체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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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본 독점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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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히에 따르면 과도하게 효율적인 도구가 자연환경에 대한 인간관계를 조장하도록 응용하면 도구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균형을 파괴하면서 환경을 부패시킨다. 또 도구는 사람들이 스스로 할 필요가 있는 일과 기성품이 필요한 일 사이의 관계를 파괴할 수 있다. 후자의 파괴는 근본 독점을 낳는다. ‘근본 독점’이란 “하나의 상표가 지배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유형의 제품이 지배적인 것을 의미한다.”(Illich, p.55) 예를 들어 코카콜라가 아니라 탄산수들이 음료 시장을 독점하고 식혜나 수정과 같은 전통 음료와 차를 음료시장에서 배제하는 것이 근본 독점이다. 자동차도 이런 방식으로 교통을 독점한다. 자동차는 도시 이미지를 만드는데, 미국은 이미 1970년대에 도시의 자동차가 도보와 자전거의 이동을 배제했고, 대만에서는 자동차가 하천 교통을 배제했다. 이와 같이 한 상표의 자동차를 많이 타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에 의해 도보, 자전거, 배 등의 다른 교통수단이 배제되는 것이 근본 독점이다. 학교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공부에 대해 근본 독점을 확대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미인가 대안학교나 서원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공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으로, 즉 ‘무교육자’로 낙인찍혀 검정고시를 통과하지 않으면 교육 받은 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의료 행위도 학교 교육을 받은 의사일 경우에만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일리히는 우리의 타고난 능력이 배제되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근본 독점이 생기며 이 근본 독점이 강제적 소비를 강요함에 따라 개인의 자율성을 제한한다고 보았다. 또 “근본 독점은 거대 제도가 공급하는 표준 제품의 강제 소비를 수단으로 강요하기 때문에 특별한 사회적 통제를 만든다.”(Illich, p.56) 거대 제도가 만든 강제 소비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나라는 불과 50년 전만 해도 아이를 낳는 곳은 병원이 아니고 가정이었다. 간호사 경력이 있는 산파는 아이를 받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고 병원에서 아이를 낳을 때 드는 비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비용만으로 출산이 가능했다. 그리고 산모의 산후 관리도 지금처럼 큰 규모의 조리원에서 이루어질 필요 없이 가족의 도움으로 집에서 조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연분만을 위해서도 병원에 하루나 이틀 입원을 해야 하고, 입원 절차에는 각종 검사가 따르며 그에 대한 부담도 소비자가 진다. 이것은 의료 제도가 개인에게 강제하는 것이지 개인이 필요에 의해 선택한 것이 아니다. 지금도 집에서 아이를 낳는 산모들이 있지만 그녀들은 성가시고 불편한 방송 기자의 호기심 가득한 취재에 응해야하는 불필요한 관심을 감수해야 한다. 또 분만을 돕는 산파를 구하기도 어렵다.

장례 문화도 근본 독점을 낳았다. 멕시코에서는 한 세대 전(일리히가 책을 쓴 1973년을 기준)까지도 묘지를 파는 일과 죽은 자를 축복하는 일 외에는 모든 장례 준비를 가족이 했다. 가족이 모여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는 서로 다투기도 하지만 죽은 자를 보내는 슬픔을 터뜨리며 기분을 풀기도 하고, 죽음이라는 숙명과 삶의 가치를 되새기는 기회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멕시코의 모든 장례 절차는 패키지 상품이 되었고, 장의사가 하는 장례 의례는 법률로 강제해서 장의사들이 시신을 통제하는 근본 독점을 낳았다.

일리히는 치유하고, 위로하며, 이동하고, 배우고, 집 짓고, 죽은 자를 묻는 일과 같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는 수단이 사람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에 의존하면서 상품에는 제한적으로 의존한다면 우리는 풍족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스스로 가능한 활동은 교환가치가 아닌 사용가치를 부여”(Illich, p.58)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사용가치를 부여하는 자유로운 활동을 노동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타고난 능력을 포기하고 우리를 대신해 ‘더 좋은’ 무엇과 우리의 능력을 교환할 때 근본 독점은 성립한다. 근본 독점은 가치를 산업적으로 제도화하는 것을 말하며, 이것은 ‘새 것들’의 희소성과 소비 수준에 따라 사람을 계급화 하는 틀을 만든다. 근본 독점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정의는 가치 있는 서비스 비용을 증가시켜 특권을 차별적으로 부여하고 자원에 대한 접근 권리를 제한하여 사람을 의존하게 만든다. 최근에 장례 대행업체 가운데 일부는 상당히 고가의 장례 예식 상품을 유족에게 권한다. 부자가 아니고는 이용할 수 없는 고가의 장례 예식은 결국 서비스에서 차별화 전략으로 또 다른 특권 의식을 낳으며 일부 계층만이 누리는 서비스 자원이 되고 만다. 우리가 근본 독점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그 독점은 다원적으로 진행해 강제된 모든 것들에 대한 우리가 가진 인내의 한계를 파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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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생 도구?
1) 도구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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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히에게 도구의 범위는 넓다. “나는 (…) 단순한 기자재만이 아니라, (…) 거대한 기계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 생산시설도 포함시키고 교육, 건강, 지식, 의사결정을 생산하는 것과 같이 만져서 알 수 없는 상품의 생산 체계도 포함시킨다.” (Illich, p.22)

일리히에게 ‘도구 tools’는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해 마련한 장치인 ‘수단’을 의미한다. 그는 합리적으로 고안한 모든 장치를 하나의 범주로 포섭할 수 있기 때문에 도구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기술 도구만이 아니라, 학교의 교과 과정이나 결혼 법 같은 의도적으로 형성한 사회적 고안물도 도구에 속한다.

일리히에게 ‘도구’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인간을 위해 일하는 도구’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과 함께 일하는 도구’다. “인간을 위해 일하는 도구인 기계는 사람들을 더욱 교묘하게 프로그램화된 에너지 노예로 만들지만, 인간과 함께 일하는 ‘도구’는 개인이 갖는 에너지와 상상력을 최대한으로 만들 수 있는 도구”다.(Illich, P.10) 동력 도구 가운데 몇 가지는 인간 에너지의 증폭기 역할을 한다. 가령 소가 쟁기를 끌지만 사람도 소와 함께 일하고 그 성과는 인간과 동물의 힘이 결합해 얻어진다. 전기톱과 기중기도 같은 방식이다. 반면에 제트기를 조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인간 에너지는 제트기 출력에 의미 있게 쓰이지 않는다. 그래서 제트기는 프로그램화된 에너지 노예 인간을 위해 일하는 ‘산업 도구’며 인간과 함께 일하는 소, 쟁기, 전기톱, 기중기는 ‘상생 도구’라 부른다. ‘상생 도구’는 사용하는 각자가 상상력을 발휘해 환경을 풍요한 것으로 만들 수 있게 최대의 기회를 부여한다. 도구는 사용자의 목적에 따라 상생을 진작시키는데 전화는 구조적으로 상생 도구다. 왜냐하면 관료는 사람들이 전화하면서 이야기한 개인 비밀을 간섭하거나 보호할 수는 있어도 전화로 서로 말하는 내용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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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계속…

죽음에도 등급이 있다:『국민연금, 공공의 적인가 사회연대 임금인가』 나태영/[보고 듣고 생각하기]

죽음에도 등급이 있다:『국민연금, 공공의 적인가 사회연대 임금인가』 나태영/[보고 듣고 생각하기]

나태영(한철연 회원, 교육강좌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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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한 죽음과 처절한 죽음스콧 니어링은 중년 나이까지 교수로서 열정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펼친 사람이다. 늙어서는 한적한 시골로 내려가서 자연 속에서 농사지으며 살아간 사람이다. 100세까지 모래 살다가 스스로 밥 굶고 죽은 사람이다.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다. 한없이 살다간 사람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한을 안고 자살하신 분들이 구천을 헤매신다. 한국이 오이시디 국가 가운데서 자살률이 2위와 큰 차이나는 1위이다. 전 세계에서는 1, 2위와 비슷한 3위이다. 10만 명당 자살자 수가 31.4명이다. 2007년에 한겨레신문에서 자살방지위원회 회장이 이런 말을 했다. 우리나라 자살률은 일주일에 한 번씩 대구지하철 참사가 일어나는 꼴이라고 말이다. 60대 자살률은 그 두 배이다. 이 분들의 죽음은 스콧 니어링의 죽음과 너무나 대조된다. 이 분들의 죽음을 기억해 주는 사람도 거의 없다. 이분들의 자살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다. 사회 구성원을 챙겨주지 못한 병든 사회가 죽인 살인이다. 이분들의 죽음을 사회적 타살이라고 생각할 때 문제 해결이 가능할 것이다.

▲국민연금, 공공의 적인가, 사회연대 임금인가, 오건호 지음, 책세상 펴냄

국민연금은 생명줄이다.국민연금이 단단했다면 우리나라 60대 자살률이 참혹한 수준으로 높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국민연금 혜택을 많이 받아야할 서민들이 국민연금을 믿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서민들이 오히려 국민연금에 강하게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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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이 여러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높은 소득 재분배의 효과를 지닌 사회복지의 기둥이기도 하다. 역설적이게도 국민연금에 가장 많이 저항하는 저소득,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국민연금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일게다.’(8, 9쪽)

국민연금은 생명체이다.국민연금 정책은 완벽하게 정해진 것이 아니다. 큰 틀은 정해졌지만 운영방식은 5년에 한 번씩 바꿀 수 있다. 우리 사회 구성원이 국민연금을 어떤 방식으로 운영하느냐에 따라서 국민연금이 이룰 결과는 달라질 것이다. 60대 자살률 수치도 달라질 것이다.

사보험 연금은 1천원 내고 850원 받는다. 국민연금은 1천원 내고 2천원에서 2천 5백원 사이 받는다. 우리나라가 스웨덴 수준 되면 2천 5백원 받을 것이고, 지금처럼 우리나라가 사회복지정책을 확고하게 펼치지 못하면 2천원 받을 것이다. 아니 2천원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국민연금 가입자는 대부분 납부한 보험료보다 2배 이상의 연금액을 수령한다.’(76쪽)‘심각한 일은 대다수 국민이 국민연금과 사보험 중 사보험이 가입자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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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이 사보험보다 유리한 점은 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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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국민연금의 연금수령액은 매년 물가상승률을 반영해 실질가치로 지급된다. 이는 사보험의 연금액 기준과 다른 중요한 특징이다.’ ‘예를 들어 필자가 계속 국민연금에 가입한다면, 62세가 되는 2027년(서평자 주: 2033년부터 연금 개시자는 65세부터)부터 매월 43만 원을 받을 예정이다.’ ‘국민연금에서 밝히는 미래 연금액 43만 원은 사보험의 137만 원과 동일한 금액이다.’(60, 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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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에서 덧붙일 내용이 있다. 이 책을 쓴 오건호는 62세부터 국민연금을 받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오건호보다 몇 살 더 어린 세대는 2033년부터 연금 개시 나이가 65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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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은 지속가능한가?

‘가장 뜨거운 쟁점은 재정추계 기간이었다. 민주노총은 정부가 설정한 재정추계 기간 70년이 지나치게 길다고 비판했다.’ ‘외국의 재정추계 기간은 60~75년이지만 우리나라와 같이 연금의 역사가 짧고 연금을 둘러싼 사회경제적 환경이 급속히 변하는 곳에서는 가능한 한 기간을 짧게 설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민주노총의 주장이다. 민주노총은 신규 가입자의 가입 연령(24~27세)과 평균수명(84세)을 고려할 때 60년이면 재정추계 기간으로 충분하다고 제안했다. 그런데 10년이라는 차이가 왜 이렇게 중요한가?’‘만약 재정추계를 60년으로 설정한다면, 국민연금 재정안정화를 위한 필요보험료율은 정부안에 비해 3.1%P 낮아진다. 즉 정부가 급여율 60%를 유지하기 위해 제시한 필요보험료율 19.85%가 16.75%로 줄어들고, 급여율을 50%(서평자 주: 2008년 50프로에서 매년 0.5% 인하하여 2028년 급여율 40%로 낮추기로 확정)로 인하할 경우 필요보험료율은 15.9%에서 12.8%로 더욱 완화된다.’(100, 101쪽)

국민연금관리공단이 민주노총 주장대로 재정추계를 70년이 아니라 60년으로 설정한다면 국민연금 재정이 바닥나는 예상 시점이 더 늦춰질 것이다. 가입자가 내야할 보험료율도 낮아질 것이다. 국민연금 고갈 시점에 의해서 느끼는 일반인들 두려움도 많이 누그러뜨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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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회가 노령화가 빠르게 진행된다. 출산율은 너무 낮다. 세상살이가 팍팍하기 때문이다. 국민연금 재정을 단단하게 유지하려면 출산율이 더 높아져야 한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팍팍한 사회에서 그 누가 아이를 많이 낳고 싶겠는가. 이 사회에서 복지정책이 잘 펼쳐지면 출산율이 높아질 것이다. 국민연금이 든든하게 이 사회 구성원 노후를 지켜준다면 또한 출산율이 높아질 것이다. 국민연금 보험료율을 높이면 국민연금 재정은 더 든든해질 것이다. 보험료율 9프로를 선진국처럼 18프로로 높여갈 필요가 있다. 천천히 높여갈 필요가 있다. 물론 이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우선 가입자 당사자가 싫어할 수 있다. 직장가입자는 국민연금 보험료 절반을 기업주가 내 준다. 그렇기 때문에 기업주들이 크게 저항할 것이다. 기업주들은 노동자 노후가 편해져야 노동자들이 더 열심히 일할 것이라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그래도 국민연금 수익비가 높아서 국민연금 재정이 어려워질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사회적으로 답을 찾아내야 한다. 우선 4대강 사업처럼 해만 끼치는 행정에 많은 예산을 쓰는 일을 없애야 할 것이다. 남북화해를 이루어 국방비에 들어가는 예산을 줄이도록 노력해야할 것이다. 납세자들이 세금을 더 내야 한다. 이명박 정부에서 이루어진 부자감세를 원래 수준으로 돌려놔야 한다. 더하여 부자증세를 이뤄내야 한다. 그 다음 사회 전체 구성원이 세금을 더 내야 한다. 부자증세가 제대로 이루어지면 다른 구성원들도 세금 더 내는 것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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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과 기초 노령연금

2007년에 노무현 정부는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40프로로 낮췄다. 국민연금 보험금을 낮췄기 때문에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기초노령 연금을 만들었다. 65세 이상 노인 70프로가 기초노령 연금으로 월 9만 4천 6백원을 받는다. 박근혜가 대통령 공약으로 65세 이상 모든 노인들이 기초노령 연금으로 20만원 받게 하겠다고 발표했다. 박근혜는 대통령 당선 된 후에 국민연금 기금 일부의 돈으로 모자라는 기초노령연금 재정을 메우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올바른 길이 아니다. 2011년 국민연금 1인당 수급액이 월 26만 원이다. 공무원연금의 12% 수준이고, 사학연금의 9% 수준이다. 그걸 헐어서 기초 노령연금 재원으로 쓴다? 너무 황당하다. 2011년 공무원연금 1인당 수급액은 월 218만 원이다. 거액의 퇴직수당을 제외한 수급액이 이 정도이다. 2009년 군인연금 1인당 수급액은 월 235만 원이다. 2011년 사립학교교직원연금 1인당 수급액은 월 298만원이다. 민주당은 특수직연금 받는 사람도 기초노령연금 20만원 받아야 된다고 주장한다. 홍헌호는 민주당 주장을 비판한다. 나도 홍헌호 주장에 동의한다. 특수직연금 대상자는 국민연금 대상자보다 높은 액수의 연금을 받는다. 굳이 그 분들이 기초노령연금까지 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공무원연금, 사학연금, 군인연금은 모자라는 재정을 국민세금으로 메운다. 국민연금은 이 세 연금보다 관련 당사자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우선 공평성 차원에서 옳지 않다. 아직 고령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당장은 국민연금에 쌓인 돈이 많아 보인다. 하지만 몇 십 년 뒤에 국민연금 받을 대상자가 압도적으로 늘어날 것을 생각하면 국민연금 기금에서 돈을 빼 내는 것은 절대로 옳지 않다. 아랫돌 빼내서 윗돌 막으려 하면 그 집은 반드시 무너진다. 장기적으로는 적자로 돌아설 수도 있는 국민연금에 국민 세금으로 메워야 할 때가 닥친다. 이명박 정부 때 부자감세 했던 것을 원래 위치로 되돌려서 기초노령연금 재정을 메워야 할 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낮춰서 기초노령 연금을 만든 것을 생각하면 국민연금 기금 중 일부를 기초노령연금으로 쓴다는 말은 결코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이 책이 지닌 약점과 강점이 책은 2006년에 나온 책이다. 국민연금 운영방식은 5년에 한 번씩 바뀐다. 2013년 에도 국민연금 운영방식이 바뀔 것이다. 그럼 이 책이 나온 뒤에 두 번 운영방식이 바뀐다. 이 책이 바뀐 운영방식을 담고 있지 않다는 것이 이 책이 지닌 한계이다. 가장 큰 한계는 이 책에서 오건호가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사학연금, 군인연금을 모두 합칠 것을 과감하게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물론 말하기 어려운 점은 있다. 너무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혹시 오건호가 이 책 고쳐서 다시 내게 된다면 국민연금하나로 운동을 다뤄주길 기도한다. 오건호가 건강보험하나로 운동 펼치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지닌 강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국민연금의 큰 틀을 이 책은 알려주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이 왜 연대임금인 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왜 서민들이 국민연금을 들어야 하는 지 쉽게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2004년에 일어난 국민연금 반대 운동에 대해서 글쓴이 오건호는 반대만 하지 않는다. 일부 내용은 옳다고 인정한다. 물론 틀린 내용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말한다. 정부가 잘못한 내용도 차분하게 짚어낸다.이 책은 얇다. 값도 싸다. 5천 9백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한 권씩 사 읽기를 권한다. 바뀐 내용은 인터넷 검색창에서 검색하면 금방 찾을 수 있다. 아직 국민연금 가입하지 않고서 사보험 연금에 가입하려는 사람은 우선 이 책을 꼭 사 읽기 바란다. 아직 국민연금 가입하지 않은 서민은 반드시 이 책 사 읽기 바란다. 이 책이 널리 읽히면 60대 자살률이 많이 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처절하게 죽음을 맞이하시는 분을 많이 줄일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책값은 단 돈 5천 9백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