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 세모녀 살해… 그래서 난 <국제시장>이 무섭다[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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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주의의 유령

이 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오마이뉴스> 1월 8일 자에 중복 게재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70412

▲  지난 6일 오후 경북 경북 문경 농암면에서 경찰에 붙잡힌 '서초 세모녀 살해 사건' 용의자 A씨가 서울 서초경찰서로 이송되고 있다. A씨는 서울 서초구 서초동 자택에서 아내와 두 딸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 연합뉴스

▲ 지난 6일 오후 경북 경북 문경 농암면에서 경찰에 붙잡힌 ‘서초 세모녀 살해 사건’ 용의자 A씨가 서울 서초경찰서로 이송되고 있다. A씨는 서울 서초구 서초동 자택에서 아내와 두 딸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 연합뉴스

실직한 가장이 부인과 두 딸을 죽이고 도주 자살을 시도하려다가 붙잡혔다. 불황과 실직으로 인한 경제적 압박 끝에 인간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셈이다. 가족 간의 불화와 증오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가족애와 과도한 연민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더 가슴이 아프다. 전혀 낯설지만은 않은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일 수도 있다. 경제적 곤궁이나 우울증 등으로 인해 삶을 포기하려는 어른들이 종종 자식들과 동반 자살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살인범이 된 대한민국의 가장, 가족 때문이다

이런 사건들을 보면서 그런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고뇌와 고통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생각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극진한 가족주의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런 가족주의는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들이 공유하는 정신이니까 우리 모두 극단적인 선택의 잠재적 공범일 수도 있다. 가족주의로 인해 가족은 가장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소유물로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땅의 대부분의 엄마들은 자식들의 모든 것, 그들의 미래의 삶마저도 걱정하고 책임지려고 한다. 하지만 자식이 부모의 소유물인가?

 

한 때 택시의 서비스 개선책으로 나온 구호가 있었다. 가족처럼 모시겠다는 취지의 슬로건으로 기억된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제발 가족처럼 취급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가족이 아니라 생면부지의 고객에 대한 서비스 정신으로서 모시는 게 훨씬 잘 모실 수 있지 않겠는가? 택시 기사들이 승객들을 멋대로 무시하고 거칠게 대한 것이 아마도 가족처럼 생각해서 그런가보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의 가부장적 가족주의 하에서 가장은 가족 구성원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군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가장이란 명분하에 자신이 성공했다면 그 성공한 삶을 자식이 이어받아야 한다고 믿고, 자신이 실패했다면 그 실패한 삶을 자식이 대신해서 보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의 욕망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그런 가족주의의 망령이 아닌가?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부모가 자식의 모든 것, 그의 미래와 생명을 책임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져서도 안 된다. 부모가 현재 고통을 겪는다고 해서 자식이 똑 같이 반복한다고 예단하는 것은 지나치다. 설령 그런 고통을 겪게 될 지라도 그 모든 것을 부모가 책임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의 역할이 있고 자식들의 삶이 있는 것이다. 다들 가족을 이루는 구성원이지만 각자 독립된 인격을 가진 주체가 아닌가? 이제는 그런 독립적 주체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가족주의는 한 세대 전이나 21세기에 들어선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국제시장>이 거부감 드는 이유

▲  영화 의 한 장면.   ⓒ CJ E&M

▲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 CJ E&M

한국의 신산(辛酸)한 근대사를 그린 영화 <국제시장>이 히트를 치면서 그 시대를 거쳐왔던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내고 있다. 우리 세대는 그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너무나 공감을 하지만, 나는 이제 그런 감정과 과도한 가족 유대가 부담스럽고 거부감이 든다. 이런 가부장적 가족주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몇 장면이 있다. 흥남부두에서 등에 업은 누이동생을 잃어버리자 구하러 갔던 아버지와 헤어지면서 아버지가 당부하는 다짐이 있다.

“덕수야! 지금부터는 네가 가장(家長)이다. 가장은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이 최우선이다.”

주인공 덕수는 가장으로서의 이런 책임을 지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 삶을 포기할 만큼 평생을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다. 동생이 서울 대학교에 합격을 하자 가족의 경제를 책임지기 위해 그는 지체 없이 서독 광부를 지원한다. 나중에 돌아와서 막내 누이의 결혼 비용과 고모의 가게를 지키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베트남전쟁의 한 복판으로 뛰어 들어간다. 부인이 이제 그만 짐을 내려 놓고 당신 자신의 삶을 살라고 눈물로 호소할 때도 덕수는 그게 가장의 책임이고 역할이라고 말한다.

늘그막에 가족들이 모두 모여 잔치를 벌일 때 덕수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아버지 유품을 모신 방으로 들어간다. 그 방에서 덕수는 힘들었던 지난 삶을 회상하면서 아버지의 인정을 구한다. “아버지! 저 이만하면 약속 잘 지켰지예? 저 진짜 힘들었거든요!”개인의 삶보다는 가족을 위한 삶이 덕수의 정체성을 이루었던 탓에 그 가족의 첫 번째 가장인 아버지의 인정이야말로 고통과 희생에 대한 보상으로 믿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관객몰이를 하고 있다면 그만큼 가족주의의 정서적 유대가 우리 삶 속에 크게 자리 잡고 있음을 반증한다. 가족주의는 식민지를 거치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태에서 가족 구성원들의 생존을 보호하고 국가의 산업화를 이루는데 큰 힘이 되기도 했었다.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 가족주의, 그만하자

하지만 가부장적인 가족주의는 권위주의적인 사회 구조와 남성 중심적 기업 문화, 연고주의적인 사회적 관계, 족벌경영과 부의 세습을 낳는 주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가족주의의 긍정이나 부정 여부와 관계없이 가부장적 형태의 가족주의는 이제는 벗어 던져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가족주의 안에서는 개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의 욕망과 인격의 자립성, 개인의 주체성 등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가족주의를 거부한다고 해서 가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이 중요하더라도 일차적으로 가족의 구성은 인격적 개인, 주체적 개인이어야 하고, 그런 개인들의 욕망과 인격이 인정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부장적 가족주의 하에서는 그런 개인들이 설 땅이 없다. 이 말은 세 모녀를 살해한 21세기의 가장에게나 힘들게 근대사를 살아왔던 <국제시장>의 덕수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그릇된 가족애가 정당화되고, 가족이란 이름하에 개인의 무한 희생이 당연시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가 성장하면 잘 어울리던 옷도 더는 몸에 맞지 않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회가 변화하면 그 사회를 규정하는 원리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족주의가 힘을 발휘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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