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죽음을 말하다>[철학자의 서재]

<철학, 죽음을 말하다>[철학자의 서재]

 

 

박종성(호원대학교 외래교수)

 

[철학자의서재]가 “이시대와 철학”에서 새롭게 연재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제때에 죽도록 하라!

 

 

죽음이라는 삶의 그림자

낙엽이 떨어지고 눈이 내리는 계절이다. 우리는 그 앙상한 나무를 보며, 떨어진 낙엽을 보며 지나간 시간을 다시금 느끼며 자신의 삶으로 시선을 옮긴다. 생명을 다한 것은 죽음이다. 생명을 다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죽음일 것이다. 죽음에 대한 시선은 다시금 나의 삶에 대한 성찰로 전환된다. 그런 계절이다. 상황이 인간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일까? 물론 가을이 되고, 겨울이 와야 죽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과 함께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 속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인식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죽음은 인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올해 우리는 너무나 많은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다. 사회적으로는 너무나 가슴이 저미는 세월호 참사,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사고, 판교 환풍구 추락사고, 개인적으로는 가까운 이들의 죽음일 것이다. 죽음은 삶의 그림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피할 수도 없는, 모두가 직면하고야 마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다큐 <님아, 그 강을 건너지마오>가 역대 독립영화 최고 관객수를 넘어서 300만을 넘었다. EBS <다큐 프라임> ‘데스’에서도 죽음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죽음이란 어떻게 다가오는 것일까? 죽음이란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너무나 많은 참사와 사고가 많았던 한 해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을지도 모른다.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다시금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삶의 태도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철학, 죽음을 말하다>(산해, 2012)는 11명의 학자들이 11명의 철학자들이 말하는 죽음에 대한 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지면에서는 11명의 철학자들을 모두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 중 필자의 가슴에 남은 철학자들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머지 글들은 독자가 음미하는 것이 좋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음미한 맛은 모두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철학 죽음을 말하다

 

“검토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필자가 이 책을 통해 소화시킨 철학자들의 죽음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소크라테스는 현세적 삶을 중시하여 죽음을 무시하거나 내세적인 것에 충실하여 현세적 삶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에게 철학은 무지를 자각하는 것처럼 죽음에 대한 무지를 자각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는 “검토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잠자고 있는 자신의 영혼을 일깨우는 것이 철학인 것이다. 무지의 자각은 논박(elenchos)을 통해 궁극적으로 상대방을 당혹스러운 상태(aporia)에 처하게 하여 무지를 자각하는 과정을 말한다. 결과적으로 그에게 죽음은 죽을 운명의 인간이 죽음을 대비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이다. ‘죽음의 수련’은 결과적으로 삶의 태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시작은 죽음을 사유하는 것이다. 죽음의 사유는 플라톤에게서도 영혼의 돌봄으로 이어진다. 플라톤에게 영혼은 죽지 않은 것이며 생명의 원리인 반면, 육체는 물질적이고 죽는 것이다. 그리고 영혼의 본래성은 지성적인 능력이고 육체의 본래성은 감각적인 앎이다. 그런데 영혼의 본래성을 방해하는 것은 성적인 즐거움, 육체적인 즐거움, 소유욕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가 처한 삶의 환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감각적이고 소유욕을 증대시키며 체제를 움직이고 있는 현실이 우리의 삶의 환경이다. 자본주의 체제라는 것은 이렇듯 욕망의 체제로 굴러가는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며 자본주의 체제를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쇼펜하우어의 죽음에 대한 사유에서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에게? 인간 행위의 동인은 이기주의(Egoismus), 악의( Bosheit), 그리고 동정( Mitleid)이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인간은 맹목적인 삶의 의지(Wille)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의지, 욕망 때문에 번뇌, 고통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삶의 의지를 물질적 부, 돈에 두고 있다면 그것은 맹목적 의지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맹목적 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또 다른 삶의 의지의 긍정인 것이다. 나아가 이 맹목적 삶에의 의지의 부정은 인간애(caritas)이다. 인간애는 ‘그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말고 오히려 네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을 도우라’를 의미한다. 결국 그가 추구하는 인간은 동정(Mitleid)을 가진 자이다. 동정은 타자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그에 참여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삶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하는 현실이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는 끊임없는 욕망을 부추기고 무한 경쟁으로 삶을 옥죄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는 인간애를 실현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쇼펜하우어의 죽음에 대한 사유는 또 다시 현실의 변혁과 이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맹목적 의지의 부정은 삶의 구원(Erl?sung)이기 때문이다. 또한 맹목적 의지의 소멸은 일상세계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실존의 변화를 실현하여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해탈(Erl?sung)이 가능해 지기 때문이다. “검토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본주의는 검토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제때에 죽도록 하라, 타자의 얼굴과 만나라

니체(Nietzsche)는 인간을 신체(Leib)적 존재로 이해한다. 이것은 이원적 해석을 벗어나기 위한 전략적 개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이성과 육체, 그리고 힘의 의지(Der Wille zur Macht)가 공존하는 총체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에게 삶의 목적은 초인(Der ?bermensch)인데, 초인은 고정될 수 없는 인간, 현 상태의 유지(erhalten)가 아니라 지속적인 상승(steigen)을 추구하는 인간이다. 이는 힘의 의지(Der Wille zur Macht)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초인은 자신을 넘어서고 극복하는(?ber-sich-hinaus-gehen, sich-?berwinden) 자기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는(sich-schaffen) 삶을 영위하는 인간이다. 이는 인간 개개인이 구현해야 할 실존적 이상이다. 니체는 “제때에 죽도록 하라”,“그러나 결코 제때에 살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제때에 죽을 수 있겠는가?”라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말한다. 제때 삶을 사는 것은 삶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거나 삶의 열등함으로 인해 죽음을 의욕 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야 할 때 살려고 하지 않거나 그냥 죽지 않는 것이며, 삶에 가치를 부여하며 긍정하며 사는 것, 이것이 니체가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니다. 이것이 제때에 죽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세월호 참사는 제때 죽지 못하게 만든 사회적인 죽음이다. 제때에 죽지 못한 삶, 다시 말해 제때에 살지 못한 사회적 죽음인 것이다. 이 모든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타자의 죽음을 생각할 수 있다. 타자의 죽음은 레비나스(Levinas) 철학에서 중요한 내용이다.

레비나스는 죽음은 인식론에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윤리학적 차원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존재론은 존재자의 존재를 전제로 하여 존재 근거와 존재 방식을 탐구하는 것인데, 죽음은 존재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존재 영역을 넘어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타자가 철학의 제1원리이다. 타자와 죽음의 철학은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문제의식이며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사유의 한계에 대한 비판이다. 언제나 타자의 죽음은 나의 죽음을 앞선다. 그가 보기에 존재론적 철학은 ‘타자’를 ‘자아’의 영역으로 환원하여 자아의 지배하에 두는 ‘자아’ 우위의 철학이다.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것처럼 죽음 현재에 속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속하며, 따라서 선취를 통해 앞질러가서 사로잡을 수 있는 그런 ‘현재의 미래’가 아니다. 미래의 죽음을 현존재 안으로 들어온 죽음으로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타자의 타자성에 접근할 수 있는 방식은 윤리적 접근이며 이는 타자와의 만남, 타자의 얼굴과의 만남이다. 기아 빈곤, 전쟁, 테러, 어린이 여성, 노약자들은 타자의 얼굴이며, 이들의 얼굴은 “제발 저를 죽게 내버려두지 마세요!” “제발 저를 죽이지 마세요! 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세월호 참사라는 사회적인 죽음, 송파구 세 모녀의 죽음을 생각할 수 있다. 타자의 얼굴에 우리가 응답하는 것이 남겨진 자들의 과제이자 책무일 것이다. 국가는 이 타자들의 얼굴에 얼마만큼 응답하고 있는가! 지금의 현실에서 그 답은 부정적이다. OECD 34개 국가 중 죽음의 질 지수가 최하위인 현실에서 죽음의 사유는 더 긴요하게 요구된다. 지난 9월에 이미 3명의 노동자가 월성 핵발전소에서 목숨을 잃었고 어제 27일에 노동자 3명이 질식사하였다. 비단 이것만이 아니다. 안전하지 않은 국가에서 제때 죽을 수 없는 것이고 이것은 제때 살지 못하는 것이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삶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삶의 변혁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생명보다 이윤을 더 큰 가치로 추구하는 사회에서는 죽음으로 질주하는 타자의 얼굴들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현재를 즐겨라)이다. 즉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현재를 즐기고 이용’하기 위한 것이다. 현재를 즐기고 이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와 국가는 타자의 얼굴에 보다 적극적으로 응답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사회와 국가는 변혁되어야 한다. 제때에 죽도록 하라! 그러기 위해서는 타자의 얼굴과 만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