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의 방문을 환영하며[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교황의 방문을 환영하며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으로 나라 전체가 술렁이고 있다. 정부는 정부대로 대한민국의 흥보 효과를 생각하고 있고,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시한 야권은 대한민국의 부정의를 알리고 세월호 문제를 풀어주었으면 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는 기독교에 대해 별로 호의적인 사람도 아니고, 또 일 개인을 영웅처럼 숭배하는 분위기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때문에 교황 방문을 그저 외국의 한 사절이 오는가보다 하는 정도로 데면데면하게 생각한다. 다만 프란치스코 교황의 파격적인 행보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다. 부도덕하고 불평등한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이탈리아 정치의 암적 존재인 마피아를 파문하고 또 한없이 고통받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하려는 교황의 모습은 종교 지도자 이전에 인간적으로도 존경할만하다.

 

나는 모든 것을 물질의 운동으로 믿는 소박한 유물론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체 유심조를 순박하게 믿는 유심론자도 아니다. 아마도 유물론과 유심론의 절충이거나 양극단의 화합을 요구하고 중용을 찾는, 그래서 대개는 건전한 이성의 봉쌍스에 기대는 사람 정도가 나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종교를 배척하지도 않고, 숭배하지도 않는다. 또 종교를 무시하거나 무관심하게 대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종교 역시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며, 인간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삶의 형식(Lebensform)으로 이해해도 좋다. 나의 이런 어정쩡한 태도가 때로는 모든 종교에 대해 싸잡아 비판할 수 있는 거리 유지에 도움이 된다. 내 수업을 듣던 어떤 신심이 굳은 학생은 나의 이런 모습이 딱해 보였는지 한 번은 창조 과학과 전도와 관련된 책 두 권을 선물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성장하는 과정에서는 종교에 한번 젖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서 내 학생의 부모인 목사에게 내 딸을 좀 인도해 줍사고 데려간 적도 있다. 내 딸도 한 1년 열심히 다니더니 나를 닮아서 그런지 그 다음에는 별로 흥미를 못 느끼는 것 같다. 내가 산을 탈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는 산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다름 아니라 전국의 유명한 사찰을 탐방하는 일이다. 그래서 유명 산천의 도처에 있는 웬만한 절들은 다 가봤고, 사찰마다 미묘한 분위기와 풍경의 차이 등을 좋아한다.

 

내가 결정적으로 유물론자가 될 수 없는 것은 종교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특성과도 연관이 있다. 종교의 발생과 진화를 여러 가지 차원에서 설명하지만, 나는 종교를 결정적으로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한다. 하나는 종교의 초월과 관련한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관계에서 종교가 던지는 메시지와 관련되어 있다. 종교는 다른 어떤 것보다 인간의 유한성을 깨우치고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늪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는 바울의 고백은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음을 통렬히 고백하고 있다.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아침 이슬과 같고 파도 거품과 같다는 금강경의 한 구절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유한성에 대한 자각으로 인해 종교는 무엇보다 우리의 시선을 감각적이고 가시적이고 현세적인 것에만 머물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한다. 현재의 이 삶에 대한 우리의 단단한 시야를 끌어 올려 저 너머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단순히 현실 도피로 생각할 수는 없다. 이러한 초월에 대한 자각은 현재의 삶을 보다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한다. 죽음에 대한 자각, 초월에 대한 의식은 현재의 삶을 어떻게 꾸려 나가야 하고, 또 무엇을 지향할 것인지를 깨우쳐준다. 모든 상대적인 것들 너머의 어떤 절대자는 이런 유한자들의 불평등과 부정의, 부도덕 등을 성찰하고 비판할 수 있는 하나의 지침이다. 맑스가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폄하하고, 과학적 실증주의나 유물론이 비등할 때마다 종교를 전근대적이고 미신적이라고 부정해왔지만, 종교가 갖는 이런 초월에 대한 인간의 지향성을 결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고등 종교의 메시지는 한 결 같이 사랑과 자비 등과 같이 더불어 사는 인간들 간의 관계의 덕목을 중시한다. 이런 사랑과 자비는 빈부와 남녀, 귀천을 따지지 않는다. 이점에서 본다면 종교는 근대의 평등이나 인권 사상이 나오기 훨씬 이전에 평등과 인권의 사상을 선취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수가 산상수훈을 할 때 전한 사랑의 메시지는 현실 세계의 불평등과 부정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혁명적 메시지이다. 신은 인간을 지배하는 권력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불평등한 신분과 권력관계를 넘어서 있는 사랑이라는 것이 아닌가? 이런 예수의 모습이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구원과 희망, 혹은 해방의 선지자로 보였고, 기존 권력의 지배자들에게는 반역을 꾀하는 혁명가로 비춰졌을 것이다. 이런 사랑의 정신은 불교의 자비의 정신, 혹은 유교의 인(仁)의 사상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점에서 모든 고등 종교는 이 세계 안에서 인간들이 다른 어떤 조건이나 제약, 차이 등을 넘어서 서로 더불어 사는 지혜를 깨우쳐 주고 있다. 나는 현실 세계 안에서의 종교의 가장 큰 얼굴은 사랑 그 자체라고 본다. 그런데 꼭 근본주의가 아니라도, 종교의 이름을 걸고 증오와 갈등을 조장하는 경우를 우리는 부지기수로 본다. 종교가 현실 세계에서 하나의 권력이 되고, 이 권력 다툼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선봉장 역할을 하는 경우이다. 종교는 내면의 확신을 지지해주고 정당화해주기 때문에 그만큼 더 강하고 무서울 수 있다.

 

사실 종교가 현실 권력으로 변질되는 데는 종교 자체에도 원인이 있다. 예수나 석가, 혹은 마호메트나 공자와 같이 최초의 선지자의 메시지가 전달될 때는 사랑과 진리, 그리고 초월 등의 메시지는 선지자 자신과 동일시된다. 하지만 선지자가 죽고 나서 그의 메시지가 후대로 전달될 만큼의 생명력을 갖추려면 몇 가지 조건이 요구된다. 무엇보다 선지자를 따르는 제자들 집단이다. 이런 제자들 가운데는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도 있고, 이 제자들의 제자들도 있을 것이다. 순전히 스승의 가르침을 전달하려는 이런 제자들 혹은 신자들의 집단이 후대로 가면서 전문화된 사제 집단으로 관료화될 수 있다. 그 다음 선지자가 죽고 나면 그의 가르침의 원형을 보전하려는 움직임이 생긴다. 일종의 교리를 정립하는 것인데, 이것은 경전으로 완성된다. 경전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이단을 배척하고 자기 정체성을 확립한다. 이렇게 정립된 교리가 초기 선지자의 가르침을 완전하게 대변하는지의 여부는 다를 수도 있다. 교리가 만들어지고 사제집단이 형성되면서 그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도 동시에 필요하다. 성당이나 교회, 그리고 사찰이 그 경우이다. 그러므로 모든 고등 종교가 역사적으로 등장하고 제도화되는 과정에서는 이 세 가지가 필수적으로 구비되는 것이다. 즉 선지자의 순수한 가르침이 특정 시간과 공간 속에서 역사화되고 제도화되는 과정이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종교의 세속화라 할 이런 모습을 실정성(Positivit?t)이라 표현한다. 역사적으로 이런 실정성은 최초의 말씀과 전혀 상관없이 현실 속에 뿌리를 내리면서 현실 권력이 되는 경우가 많다. 교리는 도그마(Dogma)로 화석화되고, 사제집단은 관료화된 기생집단이 되며, 교회는 세속 세계의 부와 권력의 집산지가 된다. 다시 말해 종교의 본질 중의 하나인 초월과 사랑의 정신을 망각한 채로 세속 권력과 별반 차이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 부패한 종교는 종교를 가장한 현실 권력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이런 모습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등 종교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번에 내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신자들이 아닌 사람들까지 열광하는 데는 교황이 보여준 종교의 본래 정신과 본질을 그에게서 떠올리기 때문일 것이다. 교황은 바티칸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현실세계의 불평등과 부정의를 비판하고 경고한다. 오늘날 대안 없이 절대 강자들의 놀음 터로 변한 신자유주의의 자본의 논리에 대해 그는 거침없이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독재”라고 비판하고, 흔히들 말하는 낙수효과나 파이효과에 대해 “그릇과 파이만 키운다”고 독설을 퍼붓기도 한다. 벌써부터 교황의 이런 행보에 대해 보수주의자들은 교황을 마르크스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자로 낙인찍고 있다. 종교의 본래 정신으로 현실 자본주의나 기타 사회적 모순들을 비판하는 것은 어쩌면 서구의 근대화 과정에서 얻어낸 제정분리와 탈 주술화의 정신을 위반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새로운 중세 화를 염려하기도 한다. 물론 교황식으로 비판한다고 해서 오늘날 자본주의 질서가 재편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하지만 비신자인 일반인들까지 교황을 반기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 이 현실권력의 불평등과 부정의를 깨뜨려야 한다는 것, 그 과정에서 종교의 참다운 정신인 만인 평등의 정신과 사랑을 수평적으로나 수직적으로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등을 교황의 거침없는 행보에서 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런 교황의 정신이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위로하고, 이 땅의 곳곳에서 고통 받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으며, 나아가서 국민의 고통을 외면하는 위정자들과 고삐 풀린 한국식 신자유주의가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라 본다.

 

군대 폭력 백서를 만들자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군대 폭력 백서를 만들자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 같은 글이 <오마이뉴스>에도 실려 있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22095

세월호 문제가 해결되기도 전에 윤일병 폭행치사 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멀쩡한 아들을 나라를 지키라고 군대를 보냈더니 군 내무반에서 몇 달 동안 조직적으로 폭행을 당하다 사망했다니 부모 심정이 어떻고, 현재 군대에 있거나 앞으로 군대를 보내게 될 부모들은 또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국방의 의무는 헌법에 규정된 국민의 4대 의무 중 하나이다. 그래서 20세 이상의 신체 건강한 성인남자라면 누구든 이 의무를 벗어나기 어렵다. 특히 대한민국은 6.25 남북 전쟁을 경험했고, 현재도 평화상태가 아닌 휴전상태이기 때문에 남북간의 대치와 긴장이 적지 않다. 때문에 한국에서 군대의 역할은 사회의 어떤 부문 이상으로 막중하고 국민들의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그런 군대에서 일어나는 폭행과 사망사건, 자살과 의문사 사건, 그리고 탈영병들의 총기 사건 등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다치거나 죽어가고 있다. 군은 이런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개혁을 다짐하지만 사정은 전혀 달라지지 않고 있다. 이런 폭력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수 십 년 전부터 있어 왔던 일이다. 윤일병 치사 사건을 이야기하다 보니 군대를 수 십 년 전에 제대한 내 대학동기들의 카톡방에서는 마치 어제 일어난 것처럼 생생한 체험담들이 올라오고 있다. 폭력의 체험이 그만큼 생생하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일 것이다. 몇 안 되는 사례지만, 나는 이런 사례들을 계기로 군대 폭력 백서라도 만들었으면 하는 심정이다. 고통스러운 역사를 뼈저리게 반성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 다시는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 때문이다.

 

<첫번째 사례> 신** 현직 대학 교수?

“아마 우리 동기들 모두 비슷한 군대 시절 어두운 기억이 있겠지만 나도 80년 입대해서 **훈련소 조교로 근무할 때 고참의 술 외상값 20여만원을 대신 갚기를 거부했다고 10여명의 조교가 저녁부터 점호도 열외당한 채 그 병장 동기들로부터 4시간여 집단 구타를 당한 적이 있다. 결국 내가 술취한 병장의 군화에 얼굴을 맞아 입술이 찢어져 집합은 끝났고 나는 의무실로 후송되어 열 바늘 이상을 꿰맸고 그 흉터는 아직도 내 얼굴에 대한민국의 병역의무를 마친 증거로 뚜렷히 남아있다. 사실 구타보다 내가 더 실망했던 것은 사고 후 헌병대와 보안부대에서 사고조사 과정이었다. 조교가 입술을 열 바늘 꿰맸고 타박상의 흔적이 온몸에 있고 당시에도 엄격한 구타금지 지침이 있었기에 의무장교가 신고를 해서 헌병대와 보안부대에서 조사를 나왔지만 구타금지 목표달성을 염려한 연대참모 장교들의 강력한 회유와 압력으로 나는 청소 중 넘어졌다고 진술하였고 수사관들은 내 온몸의 멍은 확인하지도 않은 채 단순 사고로 종결하였다. 이 과정에서 짜고 치는 고스톱 판에 끼어들어 사기당한 것 같은 기분과 절망감으로 인한 마음의 아픔이 구타로 인한 몸의 통증보다 몇 배는 아팠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번 사건을 보며 무려 30년도 전의 군대문화가 아직도 개선되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지만 우리세대가 보다 나은 미래를 물려줄 수 있기를 아직도 기대해본다.”

 

이 동기는 군대의 악습과 관련한 집단 폭력도 문제지만 그것을 처리하는 과정의 문제점을 적고 있다. 군내의 불투명한 사고 처리 과정은 조직적인 은폐로 이어진다. 그동안 군대 내의 수많은 의문사, 자살 사건들에 대한 재조사도 필요하다. 따라서 사고 처리와 관련해서는 군 감찰만으로는 안 된다. 반드시 군 외부의 민간 인사가 참여하는 전문 조사기구가 필요함을 보여준다. 백서 이야기를 했더니 내 동기는 다음과 같은 방안을 덧붙이고 있다.

 

사진-오마이뉴스

사진-오마이뉴스

“취지에 적극 동감하며 내경험 관련하여 첨언하면. 첫째 군대 내 폭력 등 사고 보다 투명하지 않은 사후 조사과정이 더 문제다. 즉 사고 관련하여 관리책임 문책 등의 불이익이 두려워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는 군대문화가 개선되지 않는 한 폭력근절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고, 둘째 한 번에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니 구성원 모두가 작더라도 개선을 향한 노력을 해야 할 듯. 내 경우 말년 병장의 외상술값을 후임들에게 떠넘기는 것이 그 당시 그 부대에서의 관습이었으니 이를 거부한 것이 폭력사고를 유발했다고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지 않았으면 나도 물려받고 물려주는 악습을 되풀이 했을 테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을지 모를 일 아니겠나. 외상값 대신 내 주고 물려주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당시에도 적은 금액도 아니었고 젊은이의 순수함이 군대에 와서 오염되는 것 같아 그냥 몸으로 때운 셈이지 ㅠㅠㅠ”

 

<두번째 사례> 박** 기업임원 은퇴

?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젊은 날의 우리들의 모습이야. 나 역시 모종의 사건에 본의 아니게 개입되어 쇠파이프로 얻어맞다가 정신 줄을 놓고 회복실로 실려 간 일부터, 기억하기 싫을 정도의 구타를 여러 번 당했는데 어떤 때는 부대 내에 있으면 맞아 죽겠다 싶어 무단이탈 을 한 적도 있었네. 다 지난 이야기지만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네. 그러나 그 당시를 생각해 보면 그렇게 맞으면서도 끝까지 내 몸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삶에 대한 본능에 따라 처신하고 대응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네. 덕분에 제대할 때 앞 이빨 세 개를 포세링하고 나왔는데 군대서 공짜로 하는 대신 실험케이스로 그중 이빨 하나를 새로운 신경치료방법을 적용하다 실패해서 나중에 그걸 뜯어내는데 접착제가 얼마나 강한지 이빨 세 개가 통째로 빠질뻔 한 적도 있었다네. 각설하고 제대 후에 꾸는 가장 큰 악몽이 다시 입대하는 거라는데 나 역시 그런 꿈을 자주 꾸었다네. **이나 **나 다 나처럼 대부분의 우리 동기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으리라 생각하네. 그러면서도 잠시라도 윤일병 사건에 대하여 남의 일처럼 생각한 시간이 있는 듯하여 반성이 된다네. 아무쪼록 다양한 개선방안을 통하여 다음 세대에서 는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기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기원하네.”

 

내가 백서로 만들자고 하니까 그는 처음에 자기 사례는 빼줬으면 한다고 말한다. 개략적으로 뭉뚱그려 표현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체험만이라도 충분하다고 하니까 그는 더 심한 경험을 이야기해주면서 동의를 해준다. “스트레이트 100대라는 구타도 당해 봤지. 가슴 한 복판 동일한 위치에 정확히 100대를 주먹으로 맞는 구타 방법인데 맞고 나면 아파서 기침도 못하고 죽은 피가 흘러서 하체까지 피멍이 드는 그런 매도 맞고 버텼지. 한번은 참겠는데 두 번째는 진짜 죽겠더라. 그래서 다음 번에는 죽기를 각오하고 엉겨 붙어 끝장낸 적도 있었지.” 정말 일반인은 상상하기도 힘든 폭력이다. 이런 체험을 다시 기억하는 것조차 고통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 동기의 이런 이야기가 참으로 용기 있는 고백이라 생각한다.

 

<세번째 사례> 홍** 대기업 임원?

“요즘 군대내 폭력 문제가 집중 터져 나오고 있는데 나도 4학년 1학기 마치고 79년 10월 **훈련소로 입대하여 군복도 입기 전에 민간인 복장의 장정시절에 내무반에서 3시간 넘게 폭행당한 사실이 있습니다. 첫날밤 불안, 설렘, 호기심 등 복잡한 심정으로 조신 있게 있던 중인데 느닷없이 옆 내무반 고참 하사가 들어와서 어깨안마를 하라고 했지요. 난 그저 투닥 투닥 두드렸는데 “이 새끼가 안마를 하나 구타를 하나”하면서 확 일어나서 째려보면서 ‘엎드려 뻗쳐’부터 마구시키는데 내가 제대로 따라 하지 못하니까 그때부터 본격 때리고 차기 시작하여 7시부터 10시까지 폭행을 당했지요. 난 폭행당하면서도 그놈 얼굴을 정면 응시하면서 “아 저놈이 악마의 화신이구나.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고 속으로 이를 갈았지요. 지금도 그놈 얼굴을 기억합니다. 10시 취침나팔 때문에 폭행은 멈췄지만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11-12시, 1-2시, 3-4시에 걸쳐 3회 불침번을 서도록 지시하면서 그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 내일 아침 전체 벌주겠다고 협박하여 골병든 몸으로 잠도 못자고 불침번을 3회 서게 되었지요. 동료장정들이야 공포감에 침묵했지만 우리 내무반장 병장은 왜 가만히 있었는지, 그 비굴함과 무책임감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아요. 그 폭행하사는 정**, 군번은 얻어맞으면서 외웠는데 지금은 잊어 버렸네요. 제대를 1주일 앞두고 외부 산으로 싸리나무 작업을 나갔다가 고생하고 와서 화풀이했다고 나중에 들었지요. 다음날 의무대로 신체검사 가서 군의관한테 신고했고, 의무대장 면담을 요청해서 의무대장실에서 사실을 그대로 설명하고 폭행자 정**을 처벌하고 방치자 내무반장을 교체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중대장 대위가 불려와 내가 보는 앞에서 의무대장 중령한테 워커발로 조인트 까이고 나서 나를 자기 방으로 데려가 고향 초를 한 갑 주면서 피우라 하고 커피까지 직접 타주었지요. 악마 정하사가 바로 와서 내 온 몸을 안티프라민과 무슨 약으로 바르면서 하는 말이 “너가 항복하지 않고 계속 개기면서 내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아서 너가 무서웠다. 그리고 반성문 쓰라 할 때 쓰는 시늉이라도 했으면 거기서 그쳤을 텐데” 하면서 도로 나를 원망하는 투여서 기가 막혔지요. 법대로 군사재판을 받게 할 것을 계속 주장했지만 중대장이 **대 ROTC 말뚝인데 남한산성 군 형무소로 갈 경우 자기도 옷 벗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여 자대영창 최고인 15일 영창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 문제 제기하지 않기로 했지요. 계속되는 가슴 통증을 느끼며 본격 훈련받던 중에 여호와의 증인으로 총 들기를 거부하여 영창 갔다 온 동료에게 정** 하사 영창 생활을 물어봤더니 그 새끼 하는 말이”제대 말년에 재수 없게 똥 밟았다”고 하면서 아직도 반성하지 않아서 아주 괘씸했던 기억이 납니다. 논산 훈련소를 마치고 나올 때 소원수리제도가 있었는데 그때 중대장과의 약속을 지켜 아무런 신고도 하지 않았지만 악마의 화신 정**을 지금 만나도 뺨 때기 때려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 동기는 자신이 당한 부당한 폭력을 교훈으로 삼아 자신이 상급자가 되었을 때 그런 폭력을 없앴다고 한다. “내가 확 바꾼 게 아니라 내 입대 당시 구타금지가 실시되고 얼차려로 대체되는 상황에서 일부에서 구타가 근절되지 않았던 게지. 그 때도 군 인권뿐만 아니라 군 전력 차원에서 구타금지를 강력 실시하긴 했었지. 그래서 구타 행위가 적발되면 처벌하였어. 내가 입대하니까 유신군대라 하면서 구타 없는 군대라고 홍보하더군. 그전에는 구타가 일반화되어 있었고 당연시 되었다더군. 내가 **3사관학교 병원 부대에 배치되어 일부 잔존하는 구타까지도 고참되었을 때 근절시켰다는 게야. 물론 나는 자대 배치 이후 한 번도 맞은 적은 없었고 얼차려만 받았지. 만기 제대가 아닌 교련 혜택 6개월 단축 제대로 병장 고참 기간이 짧았긴 해도 그 기간만큼은 확실히 금지시켰네.” 이 동기의 경우를 보면 군내 폭력 문제는 책임자의 의지와 문화 개선 등으로 충분히 바꿀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폭력을 되물림하지 않으려는 상급자의 의지가 중요하다.

 

<네 번째 사례> 이** 현직 기업 대표?

“ㅎㅎ**가 고생 많았구나.^^그런 생각조차 하기 싫은 경험이 없는 친구들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하사로 수용 연대에서 차출되어서 훈련도 그렇고 자대에서도 병들과 싸우고 선임하사들한테 터지고. ㅠㅠ?

근데 빠따는 치면 안 되겠더라구. 내가 선임되면서 빠따를 안치니 제대 이틀 남겨놓고 후배들이 계곡에서 벌거벗은 채 슬레트 깔고 돼지고기 구워먹으면서 쏘주를 같이 하는데 빠따 한 대씩 맞아 보겠다는거여…술김에 그랬겠지만 속으론 이런~미친 놈 있나? 그러면서 벌거벗은 몸에 한 대를 때렸어…그랬더니 피가 근육 속에 터져 번지는 게 눈에 확 들어오는 거야…?

군복위로 때리니 그런걸 모를텐데 몇 십대씩 맞었을 땐 몰랐던거지. 암튼 폭력은 없어져야지..”?

 

이 동기의 경우는 농담삼아 빠따를 쳤을 때의 경험을 적어 주었다. 폭력은 피해자 못지않게 가해자에게도 충격과 고통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 이런 사례도 있다. “내 동갑 외사촌도 자대에서 머리를 가격당해. 의병 제대 했고. 거의 집안 망하다시피 했고. 얼마 전 죽었지. 원호 대상 신청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집안 마다 그런 사연들 하나쯤 있지.” (오**, 현직 대학교수) 군대 폭력으로 불구가 되는 경우, 게다가 원호 대상으로 지정되지 못했을 경우, 그로 인해 한 집안이 붕괴되는 경험도 적지 않을 것이다. 모든 고통을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떠맡을 수밖에 없는 경우이다.

 

<다섯번 째 사례>?

윤일병 사건에 대한 단상 김** 현직 변호사.?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병역의무를 다하기 위해 입대한 어느 한 청년이 2달 동안 매일 폭행당하다가 비참하게 죽어버린 최근 사건에 대해 세상이 시끄럽다. 국방장관, 합참의장 등 지휘, 통솔라인의 책임을 묻고 재발방지를 위해 관련자를 엄벌해야 한다고 여러 언론들이 북과 장구를 치고 있다. 이미 벌어진 비극적 사건이 다시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한 제도적 개선이 중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윤일병은 2달 동안 폭행을 당해 죽음에 이르는 시간동안 왜 항거하지 않았을까? 가해자들의 상급자에게 직보함으로써 군대 내의 폭력 상황에 대한 저항을 왜 하지 않았을까? 아마 윤일병도 이에 대해 나름대로 고민했겠지만 저항해도 별 수 없다고 스스로 체념했을지 모른다.?

돌이켜 나의 군대생활을 회상해 본다.

내가 79년 1월에 육군 이등병으로 입대하여 **사단 ***연대에서 성스러운 병역의무를 다하고 있을 때인 1980년에 전두환을 간접방식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하기 위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위원선거가 있었다. 당시 주소지 동사무소에서 부재자투표용지가 오지 않은 30여명의 사병들 때문에 100% 투표율을 달성할 수 없다고 열이 받은 인사장교가 관련자 모두를 연병장에 모아놓고 뺨 한대씩 후려친 일이 있었다. 나도 그중에 끼어 있어서 느닷없이 뺨맞으면서 왜 내 잘못이 아닌 일로 뺨맞는 것인지에 대해 나는 억울해 했다가, 그 자리에서 인사장교가 나눠준 2박3일 휴가증을 받아 쥐고 병영을 나설 때엔 뺨맞고 휴가 나온 것이 차라리 더 낫다는 생각도 했다. 그에 보답(?)하느라 서울에 있는 동사무소까지 가서 투표용지를 받아 결국 ***연대 100% 투표율 달성에 기여한 사실도 있었다. 이 때만 해도 군대에서 상급자로부터 폭행당하는 것에 대해 저항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때로부터 몇 달 지나지 않은 상병시절에 10여명의 헌병들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한 일을 겪고서야 나는 뒤늦게 저항했다. 내가 폭행당해야 할 잘못이 없었다는 것을 설명했음에도 헌병들은 내가 끝까지 변명한다면서 30분이 넘도록 내게 무자비한 집단린치를 가했다. 내 눈은 밤탱이가 되고, 입술과 코는 터져서 피범벅이 되었으며, 허벅지와 등짝은 군화발로 짓이겨져 퍼렇게 멍이 들어 내 온몸은 완전히 망가졌었다. 사건의 내용인 즉, 당시 나는 ***연대 암호병이라 통신대 소속으로서 그 날 전화교환대 야간당직을 새벽 4시부터 5시까지 지켜야 하는 불침번이었는데 내 앞 불침번이 잠들었다가 나를 깨우지 않고 그대로 잠자다가 헌병대장의 전화를 받지 못한 사건이 벌어졌다. 헌병들이 조사하다가 내 당직시간에 상황이 벌어진 문제를 두고 나를 추궁했으나, 앞 당직이 나를 깨우지 않아서 당직을 못 선 것이니 내 잘못이 없다고 항변했다가 나는 10여명의 헌병들에게 그야말로 개같이 얻어맞았던 것이다.

나 혼자만이 거처하는 암호실에 돌아와서 서럽게 울다가 이대로 참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나는 보안대장을 찾아갔다.?

연대암호병인 나는 2급 군사비밀에 해당하는 난수표 암호자재를 취급하기 때문에 보안대 관리 하에 있었다. 나는 보안대장에게 내가 헌병들에게 당한 일을 모두 이야기했고, 국가의 중요 군사비밀을 취급하는 암호병으로서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는데도 불구하고 헌병들에게 개취급을 당하여 자존심이 심히 손상된 나의 심정을 전달했다. 내 얘기를 들은 보안대장은 그 자리에서 문제의 헌병들을 보안대로 당장 오라고 소집시키더니 내가 보는 앞에서 그들을 완전히 작살내버렸다. 내가 30분 동안 얻어 터졌다고 했더니 보안대장은 엉망이 된 내 몸을 그들에게 보여 주면서 10여명의 헌병들을 1시간동안 몽둥이찜질 및 군화발로 짓이기며 그야말로 아작을 내버렸다. 헌병들은 모두 반죽음이 되어 기어서 돌아갔다.

그 다음날 헌병대장(수 년 동안 진급 못한 고참 대위)이 나를 부르더니 내게 협박을 했다. 나 때문에 헌병들이 보안대장에게 아작이 났으니 앞으로 내가 제대할 때까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아서 반드시 내 호적에 빨간 줄이 가게끔 영창에 보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난 준법생활을 철저히 하여서 결국 그의 호언장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는 전두환 정권 때였고 고참 대위인 헌병대장은 준위 계급인 보안대장에게 직접 항의하지도 못하고 만만한 내게 화풀이만 했던 것이다. 그 일이 있고부터는 121연대에서 사병들에게 그 위세를 떨던 헌병들도 나를 건드리지 못했다.?

.

왜 윤 일병은 저항하지 못했을까가 나는 정녕 안타깝다.

내년에 군입대해야 하는 내 아들에게 나는 오늘도 권했다. 맞아 죽을 때까지 2달동안이나 그렇게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고. 불의에는 맞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소한 불의에 매번 시시콜콜 따지지는 말라는 친절한 말도 덧 붙인다.

세월호 사건, 윤일병 사건 등등 이성적 사회로서의 합리적 상태가 아닌 모든 비정상 사건들에는 가해자인 인간들의 추악한 모습이 있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어김없이 가해자를 비난하는 소리들이 터져 나오고도, 또 세월이 흐르고 나면 다시 비슷한 사건들이 어김없이 되풀이 되고야 만다.

이 사회에 해 끼치는 자들에 대한 질타는 역사에도 항상 있어 왔기 때문에, 그러고도 또다시 되풀이 되는 추잡한 모습들을 보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가해자들에 대한 질타만으로는 안 되고, 불의에 항거하는 힘을 이 사회 구성원 각자가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평소에는 내 일이 아니라며 먼발치에서 지켜만 보다가 내게 구체적인 불의로 닥치고 나서야만 비로소 뒤늦게 정의에 대한 관심을 쏟고 소리치는 것은 위선이다.

위선이다.

위선이다.

이 사회가 아직도 더 좋은 사회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사회정의에 대해 무관심으로 대응하고 나와는 직접 이해 관계없는 일로 외면해온 큰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 도처에서 벌어지는 불의에 대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나라를 방문하는 날이 다가온다.

나는 그를 위해 기도한다…………

이 동기는 부당한 이유로 무지막지하게 당한 폭력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항한 경험을 통해 “불의에 항거하는 힘을 이 사회 구성원 각자가 키워야 한다”고 말한다.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조직적이고 반복적인 폭력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불의에 저항하는 용기는 분명 필요하겠지만, 보통 사람 이상의 용기를 주문하기는 힘들 것이다. 사실 이런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되면 두려움 때문에 저항할 의지를 상실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리라. 그럼에도 폭력을 감수하고 묵인하기 보다는 강하게 저항하고 폭로하는 것이 폭력을 재발하는 데 훨씬 도움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몇 안 되는 사례지만 충격적일만큼 끔찍스럽다. 수 십 년 전의 이야기지만, 그 고통의 체험이 너무 뼈저린 탓에 지금 들어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런데 오래 전의 이야기이고, 지금의 군 폭력 행태는 그 때와 다르다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과연 그럴까? 또 이런 사례를 적시하려고 하면 어떤 이들은 왜 오래 전 이야기까지 들추어서 군을 음해하려고 하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국방의 의무가 신성한 것처럼 군대는 국민을 외적으로부터 지켜주는 신성한 역할을 하는 집단이다. 이런 군대가 국민으로부터 불신을 당하고, 군대 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기피하는 집단이 된다면, 그런 군대는 결코 강한 군대가 될 수가 없다. 군대 폭력 문제는 일회적이거나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것은 조직적이고 반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게다가 폐쇄적 조직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거의 시정되지도 않고 있다. 그러니 오죽하면 윤일병처럼 맞아죽던지, 아니면 육군 22사단의 총기난사 사건의 주범인 임모 병장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겠는가? 이번 기회에 군대 폭력과 의문사, 자살, 총기 사건 등에 관한 백서같은 것이 만들어졌으면 한다. 그리하여 이런 백서가 군의 민주화와 개혁을 이루고, 국민의 군대와 강한 군대로 재탄생하는 초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통스런 트라우마를 고백하고 공개하는데 동의해준 내 동기들의 용기에 감사드린다.

 

죽음에 대한 단상(斷想)-2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죽음에 대한 단상(斷想)-2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3.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리저리 떨어질 이파리처럼 같은 가지에 났어도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고 나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해 별로 다르지 않다. 모든 종교는 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고, 사후 세계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는 데서 탄생한다. 모든 예술은 이 죽음과 관련된 여러 의식을 미학화하고 예술적으로 표현하려는 데서 탄생한다. 이런 문제의식에서는 철학도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철학은 종교나 예술과 다르게 합리적 언어로 서술하고 논증하려 할 뿐이다. 고대 문헌들 가운데 이 죽음과 관련해 빼어난 성찰을 보여주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플라톤의 『파이돈』이라는 작품이다. 초기 플라톤의 작품은 대부분이 스승 소크라테스의 행적과 관련되어 있다. 청년들의 정신을 타락시키고 신을 모독한다는 죄로 고발을 당한 소크라테스가 법정으로 가다가 제사장 에우튀프론을 만난다. 아버지를 살인범으로 고소하러 가는 그와 경건과 불경의 문제를 토론한 작품이 『에우튀프론』이다.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가 배심원인 아테네 시민들을 향해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는 내용을 담은 작품이 『변명』이다. 빌어도 시원찮을 소크라테스는 도리어 아테네 시민들을 향해 당신들의 영혼을 살피라고 충고한다. 괘씸죄까지 더해져 사형선고를 받은 소크라테스가 감옥에 갇힌다. 당시 감옥의 소크라테스는 바로 사형을 당하지는 않는다. 외국으로 나간 아테네의 배가 들어올 때까지 사형선고를 유예 받는다. 이때 돈 많은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인 크리톤이 소크라테스를 감옥에서 탈출시켜 외국으로 망명시키려고 소크라테스와 논쟁을 벌인다. 여기서 잘못 알려진 ‘악법도 법이다’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작품이 『크리톤』이다. 그런데 사형을 받기 바로 전날 밤에 마지막으로 파이돈이 스승을 설득하러 들어갔다가 나눈 대화가 ‘죽음’에 관한 유명한 작품인 『파이돈』이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인간의 영혼이 무엇이고, 이 영혼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자못 날카로운 논증을 통해 설명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살 이유가 아니라 죽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 몇 가지를 적어보자.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다.”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다.”

 

영혼과 육체는 본래 다른 존재이다. 정신과 육체를 별개로 보는 이원론의 시작이다. 영혼은 비물질적이고 단일하고 죽지 않는 것이다. 복합물이 아니기 때문에 나누어지지 않으며, 파괴되지도 않기 때문에 영원히 죽지도 않는다. 육체는 그 정반대이다. 육체는 물질적이고 복합적이기 때문에 생멸을 반복한다. 플라톤의 『공화국』에 등장하는 ‘에르(Er)의 신화’를 보면 영혼은 본래 이데아의 세계에 거주한다. 이 영혼이 이승으로 넘어오면서 망각(레테Lethe))의 강물을 마시면서 이데아의 세계의 기억을 상실하고 육체의 감옥에 갇히는 것이다. 플라톤을 거부하는 현대의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그를 패러디해서 정 반대로 표현한다. “영혼이 육체의 감옥이라고”. 육체의 감옥에 갇힌 영혼은 빠삐용처럼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한다. 그 때 도와주는 것이 철학이다. 때문에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다.” 이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다. 육체가 죽을 때 비로소 영혼은 자유로워지고, 자신의 본래 고향인 이데아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플라톤의 생각은 얼마나 기독교적인가? 이 철학의 수업을 받은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 플라톤 철학이 기독교를 그리스에 전파하는데 어울린다고 본다. 아우구스투스는 플라톤의 이원론을 따라 ‘신의 나라’와 ‘인간의 나라’의 두 세계로 나누는 기독교의 역사철학을 정립한다. 기독교의 몸을 빌린 플라톤의 철학이 중세 천년을 지배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감옥으로부터 탈출시키려고 온 파이돈 앞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자신이 감옥을 나갈 수 없는 이유, 그리고 결연히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득한다. 그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난 해방이고, 이데아의 세계로 들어가는 영원한 자유의 시작이다. 이보다 더 큰 확신이 있을까? 이처럼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을 어떻게 탈옥을 시킨단 말인가? 몽매한 제자들은 그저 이 뛰어난 스승의 말에 설득당하고 감복할 뿐이다. 하지만 치밀하고도 논리적으로 설명하던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말을 놓치지 말 일이다. “나도 그 세계를 직접 가본 것이 아니라 전해들은 것이네, 그래서 꼭 내 말과 같지 않을 수도 있다네…이렇게 믿는 것은 하나의 모험이라 하겠으나, 그 모험은 아름다운 것일세”(플라톤, 『파이돈』) 그렇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직접 경험한 바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신화를 전달한 것이고, 다만 그 신화가 그럴 듯해서 그것이 옳다고 확신한 것이며, 이러한 확신이 강해질수록 더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 아닌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모든 이야기, 신화와 설화, 종교와 이성의 논증 등은 다만 이러한 완벽한 무지에 기초해 있을 뿐이다. 그 세계는 우리가 경험한 것도 아니고, 합리적으로 논증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렇게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것이 어디 죽음뿐이겠는가? 영혼은 어떻고, 세계의 유무한성은 또 어떤가?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창조주라고 하는 신의 존재는 또 어떤가? 많은 신학자와 철학자들이 신 존재 증명을 둘러싸고 무수한 논쟁을 벌였지만, 어떻게 보면 그런 논쟁은 사상누각에 불가할 뿐이다. 근대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데카르트 조차 이런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애쓴다. 사유하는 자아(코기토)를 새로운 세계의 원리로 정립했지만, 여전히 이 자아를 보증서줄 절대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의 유명한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이 나온다. 신은 개념상 완전한 존재이고, 완전하기 때문에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 의 ‘합리적 심리학’에서 제시한 신 존재 증명 비판은 그런 논증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함을 밝힌다. 관념 속의 백 탈러(당시 독일 화폐)와 실제 내 호주머니 속의 백 탈러는 다르다. 관념 속의 신은 현실 속의 신이 아니라고. 존재는 신이라는 완전성의 개념에 속하는 술어가 아니라고.

 

이런 오래된 형이상학적 문제들의 약점은 경험적으로 검증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학이 발달하고 실증주의적 세계관이 비등할 때, 형이상학의 존재는 끊임없이 위협을 당한다. 근대 경험론의 유명한 회의주의자는 신학과 형이상학에 관련된 모든 책들은 백해무익하므로 불쏘시개로나 쓰라고 독설을 퍼붓는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는 먼 옛날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랜 철학의 문제들을 해결했다고 자처한 20세기 비엔나 서클(Vienna Circle)의 논리실증주의자들에 따르면, 세상에는 두 가지의 명제만이 있다. 하나는 의미 있는(meaningful) 명제이고, 다른 하나는 의미 없는(meaningless) 명제이다. 무엇이 의미 있는 명제인가? 경험적으로 검증이 가능한 명제와 참과 거짓이 확실한 논리적인 명제가 그렇다.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다.”는 명제가 전자에 해당되고, “3*5=12”라는 명제는 후자에 해당된다. 전자는 참인 명제이고, 후자는 거짓 명제이다. 이와 다르게 경험적으로 검증도 안 되고, 논리적이지도 않은 명제는 무의미한 명제이다. 가치와 관련된 도덕 명제나 검증이 불가능한 영혼의 불사나 신의 존재와 같은 형이상학적 명제와 신학적 명제는 무의미한 명제이다. 따라서 이러한 명제들은 그저 ‘개소리’나 다름없이 무의미한 명제이다. 그들은 이런 ‘검증이론’(Verification theory)을 가지고 철학의 오랜 아포리아들을 해결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철학은 이제 종언을 고해야 하는가? 철학은 그들의 도발적인 주장 이래로 더 이상 그런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관심을 갖지 않는가? 과학이 발달하면 영혼에 관한 오랜 갈증이 해소되고, 신에 관한 물음을 더는 하지 않는가? 이런 말만 덧붙이겠다. 비엔나 서클의 수장인 모리츠 슐릭은 강의를 하다가 학생의 권총을 맞아 죽고, 그 서클 멤버들도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고. 개를 오래 키워 본 경험으로는 개소리에도 미세한 변별이 있고, 그 차이에 무수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4. “아, 극락세계에서 만날 나는 도를 닦고 기다리겠노라.” 월명은 죽은 누이와 극락세계에서 만날 것을 기약한다. 착한 누이가 선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당연히 극락왕생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때문에 자신도 선한 삶을 살고자 도를 닦고, 다시 만날 그날을 기다리겠다고 한다. 죽음은 그냥 죽음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후의 세계에서의 보상과 징벌의 문제는 이승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죽음은 곧 삶의 문제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왜 우리는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가? 이런 생각의 밑바탕에는 숨은 전제가 있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 이는 받아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받는다는 사실의 문제이다.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이 불공평하고 부 정의한 세상에서 그나마 살아갈 수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과연 그것은 사실 명제인가? 그것은 소망에 불과하지 않은가? 착하게 사는 사람이 과연 상을 받고, 나쁘게 사는 사람이 과연 벌을 받고 있는가? 하지만 잠시 눈을 돌려 세상을 냉정하게 있는 그대로 보라. 과연 그런가고. 오히려 이기적이고 사람들을 이용하려 들고 나쁜 짓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더 잘 살고, 권력이나 사회적 지위도 누리고 그러지 않는가? 착한 사람들은 그저 멍청하게 당하기만 하고 어렵게 살고 있지 않는가? 이런 현실 속에서 착하게 살라고?

 

『사기열전』을 쓴 중국의 유명한 사마천은 그 책을 이런 물음으로 시작한다. “과연 하늘에 道가 있는가?” 백이와 숙제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고 수양산으로 들어간 충절의 정치인이다. 그들은 주나라의 무왕이 통치하는 곳에서 나는 어떤 것도 먹을 수 없다고 하면서 결국은 굶어 죽었다. 양심과 절개를 지킨 사람들의 말로는 비참하게도 굶어 죽은 것뿐이다. 반면 유명한 악인 도척은 온갖 악행을 일삼고도 부귀영화를 누리고 무병장수까지 한다. 그는 사람의 생간을 매일같이 먹었다고 한다. 얼마나 악인이면 공자까지 그를 교화하러 들어갔다가 손을 내두르고 물러날 정도이다. 『장자』의 잡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물론 사실은 아니고, 다만 유가를 패러디하기 위해 노장(老莊) 쪽에서 만든 이야기이리라. 사마천은 선인과 악인을 이렇게 극명하게 대비시키면서 과연 하늘에 도가 있는 가고 묻는다. 만일 도가 있다면 당연히 선인은 상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아야 하는데 현실 세계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더 빈발하지 않는가? 그러니 다시 한 번 묻는다. 과연 하늘에 도가 있는가? 이런 물음을 던진 사마천의 내력이 있다. 그는 이릉(李陵) 장군이 흉노와의 전쟁에서 중과부적으로 패배한 사건에서 이릉을 변호하다 무제(武帝)의 노여움을 사서 남자로선 치명적인 거세의 궁형(宮刑)을 받게 된 것이다. 사실 다른 대신들처럼 비겁하게 이릉의 등에 비난의 화살을 쏘았다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너무나 솔직하게도 진실과 소신을 지킨 것이고, 그 대가는 너무도 비참했다. 그런 참담을 견디지 못해 자살까지 하려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권유로 그 억울함을 누대에 남은 명저 『사기』를 쓰는 일로 대신한 것이다. 때문에 그가 이 『사기열전』을 시작하면서 던진 물음은 너무나 절실한 윤리적 물음이다. “과연 하늘에 道가 있는가?” 과연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 하지만 이것은 당위이고 요청이다. 적어도 선하게 살아야 한다면 그 의미는 무엇인가? 왜 우리는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은 오래 된 물음이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숱한 종교와 철학이 등장한다. 불교는 인과응보를 이야기한다. 선인선과고 악인악과라는 것이다. 선하게 살면 복을 받고, 악하게 살면 벌을 받는다고 한다. 금생의 복이 없다면, 그것은 전생에 나쁜 업을 지었기 때문이다. 내생의 복은 금생의 선업을 쌓을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해야 한다고 불교는 가르친다. 이 인과응보론이 교조화되면 현실 합리화의 논리로 변질될 수도 있다. 다 과거의 인연이고 업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는 여자로 태어난 것,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 가난한 것 등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닐까? 극락과 연옥, 천국과 지옥은 악을 행하지 말고, 선을 행하도록 유도한다. 선한 자가 복을 받고, 악한 자가 벌을 받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사후 세계의 심판을 이용한 징벌과 보상이다. 하지만 사후 세계나 심판자의 존재를 입증할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더구나 그것은 공포와 두려움을 이용한 타율적 강제이다. 이런 공포와 강제가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도덕이란 무엇인가? 도덕적 행위란 단지 연민과 동정심으로 행하는 행동인가? 이런 감정을 갖고 선한 행동을 하는 경우도 많다. 루소나 흄과 같은 근대의 많은 계몽 사상가들은 이런 동정심을 통해 가난한 자와 병약한 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공리주의자들은 보다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시킨다면 그것이 도덕적이고 선하다고 말한다. 행위의 동기와 상관없이 좋은 결과만 있으면 도덕적이며 선하다고 보는 것이다. ‘돼지의 쾌락’이라 비난 받는 면이 없지 않지만, 공리주의자들의 견해는 사회 정책적 차원에서 사회를 개량하고 개선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다. 칸트는 이런 접근과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무엇이 도덕적이고, 왜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하는가?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짐승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길이다. 개가 도덕적으로 행동하는가? 묵묵히 그리고 열심히 일한 소를 도덕적이라고 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동물들의 행위를 도덕적 행위라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덕은 인간에게 고유한 행위가 아닐까? 인간의 행위 중에서 동물의 행위와 비슷한 행위를 제한다면 도덕적 행위가 남지 않을까? 무엇이 동물의 행위이고, 무엇이 인간의 행위인가? 애완동물을 키워 본 사람은 알겠지만 동물도 감정이 있다. 어떤 때는 인간보다 더 정서적으로 반응을 잘 한다. 이런 감정은 항상 그 감정을 유발한 원인이 있다. 기쁘게 하는 것, 슬프게 하는 것, 화가 나게 하는 것, 사랑하게 하는 것 등 모두가 어떤 원인이 있어 그것에 대한 반응이 나타나고, 그 각각에 대응하는 감정이 나타난다. 이런 감정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인간이나 동물이나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감정은 원인과 결과의 고리에 갇혀 있다. 편의상 우리는 이것을 ‘~때문’(because of)의 산물이라고 하자. 인간은 항상 ~ 때문에 희노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을 가지며, 동물도 그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칸트는 숭고한 도덕을 이런 동물적 감정에 정초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감정은 비루하고 비천하기 때문이다. 도덕은 자유로운 존재의 자유로운 행위에 기초해 있다. 타율적 강제나 외부의 공포 때문에 선한 행동을 한다고 하면 그것은 노예의 도덕일 뿐이다. 나중에 니체는 원한(르쌍티망) 감정으로 타자를 부정하는 행위를 ‘노예의 도덕’으로 보고,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고귀한 도덕을 ‘주인의 도덕’으로 본다. 그리스의 자유인들에게는 자기를 긍정하고 자기 안에 목적을 갖는 행위가 정치적 실천(Praxis)이다. 정치는 자유인들만의 활동이다. 반면 타자를 위해 봉사하고 행위의 목적을 타자에게 두는 것은 비천한 여성이나 노예가 담당하는 노동(Arbeit)이다. 이점에서 칸트가 생각하는 도덕은 자유의지를 가진 자의 덕목이다. 자유인의 도덕적 행위는 외부의 원인에 종속되거나 타율적 강제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자신 안에 행위의 동기를 가지는 행위이다. 편의상 이런 행위를 ‘~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의 행위라고 하자.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손해가 남에도 불구하고, 힘듦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착한 마음으로 착한 행동을 하는 것, 그것만이 도덕적이라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보자. 밤에 산을 넘던 사마리아 장사꾼은 강도의 피해를 입고 신음하는 사람을 만난다. 생각해보라. 얼마나 무섭고 떨리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갖는 두려움과 떨림은 모든 생명체의 자연스런 보호 본능이자 감정이다. 당연히 도망가고 싶을 것이다. 합리적(이성적)으로 생각을 해도 마찬가지이다. 산속에서 이런 피해를 받았다고 한다면 그 또한 똑 같은 피해를 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할 수 있다. 강도는 주변에서 똑같이 노릴 가능성이 클 것이다. 그래서 감정적인 반응이나 이성적인 계산은 똑 같이 이유(~ 때문에)를 들어 빨리 도망가라고 권유한다. 하지만 사마리아 인의 착한 마음(선의지)은 이런 이유를 넘어선다. 그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강도를 당할 수 있다는 합리적 판단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부상당한 사람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도덕의 뿌리는 감성이나 이성이 아닌, 전사들의 용기와 같은 의지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인간은 순응하는 인간이 아닌 용감한 인간이다. 그렇다. 도덕이란 이런 선의지에 기초해 있다. “이 세계에서 또는 도대체가 이 세계 밖에서까지라도 아무런 제한 없이 선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선의지뿐이다.”(칸트, 『윤리형이상학기초』) 그것은 감정도 아니고 결과에 대한 고려나 계산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자유로운 의지를 가진 인간의 착한 마음일 뿐이다.

 

그러므로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왜 우리는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하는가?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고 선의지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선의지는 의무감이다. 의무란 무엇인가? 의무란 법칙에 대한 존경으로 말미암은 행위의 필연성이며, 도덕은 이런 선의지에 기초해 있다. 마땅히 법칙에 따르는 행위, ‘마땅히 ~해야 한다’의 명령에 따르는 행위이다. 하지만 이 명령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타율적 명령이 아니다. 자유로운 인간 스스로 부여한 규범이자 명령, 곧 자기 입법이고 자율(autonorm)이다. 때문에 이런 도덕법칙을 따를 때 그는 비로소 자유롭다. 자유로운 인격의 왕국에 거주하는 인간이 따르는 보편적 도덕 법칙이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령’이다. “마치 너의 행위의 (주관적) 준칙(maxim)이 너의 의지를 통해서 보편적인 자연법칙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 하라.” “너의 인격에 있어서나 어떤 다른 사람의 인격에 있어서나 인격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취급하고, 단지 수단으로서 만은 결코 사용하지 않도록 행위 하라.”(칸트, 『실천이성비판』)

 

이런 칸트의 생각이 너무 추상적이고 이상적으로 보이는가? 도덕적으로 행동하려 하다 보면 늘 손해를 볼 뿐이고, 결국 선인보다 악인이 득세하는 세상이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 칸트는 결과의 유 불리를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까닭은 우리가 인간이므로, 우리가 자유로운 존재이므로, 우리가 선의지를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가 비도덕적으로 행동할 이유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땅히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그러므로 도덕적 행동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선의지의 선택은 비도덕적으로 행동할 무수히 많은 이유와 유혹에도 불구하고, 또 그 모든 것을 무릅쓰고 이루어지는 힘든 인간적 선택이라 할 수 있다. 도덕적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그런 힘든 선택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치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무리치는 예수처럼, 오직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왕궁의 호사로운 삶을 박차고 나간 석가처럼,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알아주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않는 공자처럼 사는 것이다. 평범한 우리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리한 요구인가? 그렇지 않다. 마땅히 도덕 법칙에 따라 살아가려는 인간은 이미 성인의 반열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개가 아니다. 인간은 소가 아니다. 인간은 이미 성인(聖人)이다. 이런 성인을 어떻게 이기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겠는가? 인간은 그 자체가 목적이고, 우리는 이런 인간들의 ‘목적의 왕국’에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모든 위대한 종교는 이런 인간들 속에 감추어진 신성(神聖)을 끊임없이 일깨운다. 당신이 이미 부처라고, 인간이 곧 하늘이라고.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어떠한가? 그 세계 안에 거주하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어떠한가? 그 세계에서 목적으로 대접받는가, 혹은 수단과 소모품으로 취급되는가?

 

죽음은 모든 것을 무화하는 절대 부정이다. 그래서 죽음은 슬프고, 고통스럽고, 모든 것과 단절되는 두려움이다. 이 생사의 문제 앞에서는 다른 어떤 문제도 가볍다. 부귀와 권력도 이 앞에서는 한 없이 무력해진다. 성서의 온갖 이야기, 팔만 사천의 법문조차 이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한낱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다. 인간 문명이 쌓아 올린 온갖 지식과 기술, 그리고 과학조차 이 절대 부정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죽음의 슬픔과 고통, 그리고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지 못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우리를 생각의 극단으로 끌고 간다. 죽음은 삶의 무게조차 사소하게 만든다. 죽음 앞에 서면 우리는 삶을 더 진지하게 성찰하게 된다. 과연 어떤 삶이 의미가 있는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장례식장을 다녀오면서 생각한 죽음에 대한 단상은 끝이 없는 것 같다. 다시 한 번 월명사의 제망매가를 읽어보자. 어떻게 다가오는가?

 

生死路隱 죽고 사는 길이

예 이샤매 저히고 이 세상에 있으므로 두려운데

나는 가나다 말도 나는 간다는 말도

못 다 니르고 가나닛고 못다 하고 가버렸느냐

어느 가을 이른 바라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닙다이 이리저리 떨어질 잎처럼

한 가재 나고 같은 가지에 났어도

가논 곧 모다온뎌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아으 彌陀刹애 맛보올 내 아아! 극락에서 만날 나는

道 닷가 기드리고다 도를 닦으며 기다리겠노라.

<끝>

 

그림자 박물관[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12

그림자 박물관[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12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크기변환_그12

열쇠가 너무 많아 박물관의 열쇠를 찾아내기가 어려웠어.
그런데 아침해가 방긋하고 올라오자 열쇠 하나가 빤짝하는거야.
문을 열자 죽어 있던 그림자들이 아침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살아났어.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죽음에 대한 단상(斷想)-1?[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죽음에 대한 단상(斷想)-1?[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나이를 먹을수록 자주 가는 곳이 있다. 하나는 결혼식장이고, 다른 하나는 장례식장이다. 젊은 시절에는 친구들 결혼식장을 다녔지만, 이제는 친구 자녀들의 결혼식장이다. 결혼식장은 선남 선녀가 사랑을 다짐하면서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함께 하는 자리이니까 보는 사람도 즐겁다. 젊었을 때는 나도 그런 결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즐거웠고, 나이를 먹어서는 나도 저런 사랑과 결혼을 한 시절이 있었구나 하는 추억을 되돌릴 수 있어 기쁘다. 하지만 장례 식장을 다녀올 때는 마음이 무겁다. 축하해주러 가는 길이 아니라 슬픔을 위로하고 함께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그래도 부모님 연배의 죽음을 슬퍼해주는 경우가 많지만, 드물지만 주변 친구들이나 그 부인의 죽음을 함께 슬퍼해주고 위로해주는 경우도 있다. 더구나 자식 세대들의 죽음을 대할 때는 그 아픔이 더 크다. 부모가 죽으면 청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도 있듯, 그런 고통은 참으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몇 년 전 친동생의 딸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을 때, 올 해 친구의 다 큰 아들의 죽음을 대했을 때는 그 고통을 그대로 느낄 수 없는 것이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참으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깝게 지내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내 곁을 떠났다는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중학교 시절부터 아주 최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얼굴들, 오래 전이어서 이제는 그 얼굴도 잘 떠오르지 않는 사람들…부모의 죽음, 세월호의 죽음들… 아, 생명은 이렇게 죽을 밖에 없는 것인가? 일전에 대학 동기의 모친상을 다녀오고서 잠시 잊고 있었던 죽음을 생각해본다.
 
오래 전 고등학교를 다닐 때 암송하던 시 <제망매가>이다.
 
죽고 사는 길이
이 세상에 있으므로 두려운데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하고 가버렸느냐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리저리 떨어질 이파리처럼
같은 가지에 났어도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아, 극락세계에서 만날 나는
도를 닦으며 기다리겠노라
(월명사, 제망매가)
 
그 당시는 별 생각 없이 외웠지만 지금 다시 보니 죽음에 관한 성찰이 다 담겨 있는 것 같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예고 없이 찾아오는 죽음의 우발성, 가을바람에 나부끼는 이파리 같은 생명의 유한성, 태어난 곳은 하나이고 분명해도, 죽고 난 후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사후의 세계는 과연 있는 것인가? 죽음 이후에 대한 인간 지식의 완벽한 무지, 죽음 이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극락과 천국에서의 만남을 위해 도를 닦고 선을 행하겠다는 윤리적 결단,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 극락정토는 있는 것일까? 죽음은 삶에 대해 어떤 의미를 갖는가? 등…이 짧은 시 안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죽음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 한 배에서 태어난 누이가 먼저 간 것을 슬퍼하며 쓴 시이지만 어찌 이것이 오누이만의 사별에 한정될 수 있겠는가?
 

1. “죽고 사는 길이 이 세상에 있으므로 두려운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어두운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사람들의 통속적인 생각을 넘어선다. 만물이 유전한다는 그의 철학은 변증법의 시작을 알린다. 그의 잠언은 이렇다. “삶은 죽음이다.” “시작은 끝이다.” 만물의 시작에서 종말을 이야기하고, 생명의 탄생에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이 어두운 철학자의 말을 사람들이 깨닫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죽음은 삶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삶이 없다면 죽음도 없는 것이고, 시작이 없다면 끝도 있을 수 없다.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지만 우리는 오직 사물의 한 면만을 보려고 한다. 탄생과 소멸, 만물의 끊임없는 변화를 그는 타오르는 불의 이미지로 묘사한다. 불교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지혜를 더 깊게 해준다. 불교의 가장 기본 철학인 사성제(四聖諦)는 고(苦)에서 시작한다. 고는 어디서 오는가? 생명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모든 생명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데서 고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생명이 탄생하면서 이 생명을 지속하기 위해 먹어야 되고, 먹기 위해서 일해야 되고, 이 몸이 힘들다 보면 병도 생기는 것이 아닌가? 그러다 보면 결국 이 생명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본다면 모든 고통은 이 몸을 타고 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자연법칙과 같은 필연성을 우리는 종종 잊고 사물의 한 면만 보는 것이 아닌가? 아름다운 꽃이 영원히 피워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불교는 이런 생명의 고통을 해결하려 한 것이다. 난세에 몸과 생명을 보존하려 했던 중국의 도가들은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 양생을 위한 수련에 힘쓴다. 하지만 열심히 수련해 동안을 유지하고 장생불사의 건강하던 도인의 몸도 한 순간에 호랑이의 먹이가 될 수 있지 않은가? 양생법이 해답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몸과 생명이 낳고 죽는 그 까닭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장자』 외편에는 부인상을 당한 장자가 죽은 부인의 시신을 앞에 두고 덩실 덩실 춤을 추는 이야기가 나온다. 친구 혜자가 문상을 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 어이없어 한다. 아무리 부인이 죽으면 사내들은 뒷간에 가서 웃는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춤까지 추는 것은 심하지 않은가? 이 때 장자가 말을 한다. “그렇지 않네, 아내가 죽었을 때 나라고 어찌 슬퍼하는 마음이 없었겠나? 그러나 그 시작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 본래 삶이란 게 없었네.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형체도 없었던 것이지. 그저 흐릿하고 어두운 속에 섞여 있다가 그것이 변하여 기(氣)가 되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되었고 형체가 변하여 삶이 되었지. 이제 다시 죽음이 된 것인데, 이것은 마치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철의 흐름과 맞먹는 일. 아내는 지금 ‘큰 방’에 편안히 누워 있지.”(『장자』) 삶과 죽음에 관한 우주의 영원한 이치와 작용을 깨달은 장자가 어찌 곡을 할 것이고, 어찌 춤을 추지 않을 수 있겠는가? 스토아의 현인들도 죽음에 대한 이런 깨달음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인간의 유한성이라는 엄연한 진실과 그로 인한 고통의 감정을 강조한다. 사도 바울은 어두운 사망의 골짜기를 헤맬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유한성을 통렬하게 일깨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모든 생명은 곧 죽을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사실, 이 고통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오직 우리를 창조한 신에 귀의할 때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모든 철학과 종교는 죽음이라는 엄연한 사실과 그로 인한 고통을 해결하려는 몸짓의 표현이리라. 아침 이슬과 같은 이 생명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법을 깨닫게 하거나, 이 유한한 생명을 창조한 무한한 신의 존재에 귀의하거나 이다. 혹은 우주의 영원한 이법 속에서 삶과 죽음의 물리적 법칙을 깨닫는 것이다. 가을 날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당신은 눈물이 흐르는가? 돌이 위에서 아래로 낙하하는 모습을 보면 당신은 슬픈가?
 
2. 죽음은 어떻게 오는가? (죽음의 우발성과 우연성)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하고 가버렸느냐.” 천수를 누리다가 돌아가신 분을 문상 갈 때는 비교적 마음이 가볍다. 모든 죽음의 이별이 쉬운 것은 아니다. 그래도 천수를 누리고, 갈 때를 알면서 돌아가신 경우에 우리는 호상이라는 말을 한다. 이런 호상을 맞이할 때는 산 사람들의 마음도 무겁지는 않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죽음을 예측한단 말인가? 아침에 잘 다녀오겠다고 나간 사람이 사고로 갑자기 죽을 때처럼 죽음은 종종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갑자기 들이닥친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현대를 ‘위험 사회’로 규정한다. 이런 위험은 곳곳에 널려 있다. 거대 도시에서 교통사고, 건물 붕괴, 화재 등의 재난은 다반사다. 재난 사고에 취약한 우리의 경우는 이런 사고가 전혀 낯설지 않다. 그래서 더 위험한 것이다. 지진이나 해일 같은 자연 재해도 기후 변화와 환경 파괴로 더 빈발해진다. 미국 같은 경우는 종종 총기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테러 행위로 멀쩡한 시민들이 다치거나 죽는 경우도 많다. 이런 사고는 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우리로부터 빼앗아 간다. 우발적인 죽음으로 인한 갑작스런 이별을 대할 때 우리는 어떤가? 벌써 두 달이 넘도록 전국을 난타하고 있는 세월 호 대 참사는 갑작스럽게 닥쳤기 때문에 더 고통스럽다. 죽음을 대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산자들은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산자들은 자신들의 이 비통한 마음을 죽은 자들에게 투사를 한다. 그래서 억울하고 원통하게 죽은 영들은 필시 구천을 떠돌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영혼결혼식도 하고 천도 제를 지내기도 한다.
 

울리히 벡/ 출처: blog.joins.com

울리히 벡/ 출처: blog.joins.com

 
이런 우발적인 죽음과 달리 자발적인 죽음도 있다. 물론 우리나라가 세계 제 1위의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자살을 자발적인 죽음이라 할 수는 없다. 그것은 비록 자신이 선택한다 할지라도 엄밀한 의미에서의 자기 결정은 아니다. 자살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떠밀려 선택할 수밖에 없는 타살의 한 형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자유로운 선택에 관한 라캉의 유명한 예가 있다. 밤길 골목에서 강도를 마주친 어떤 사람이 “죽을래 돈을 내 놓을래”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외양은 선택의 형식을 취했지만 내용상으로 그가 선택할 다른 여지는 없다. 돈을 내놓기 싫다고 하면 죽을 수도 있고, 죽고 나면 돈도 뺏길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자살을 선택할 때는 그것 외에는 달리 선택할 도리가 없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으로 봐야 옳다. 때문에 높은 자살 율은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하겠다.
 
이처럼 자율의 형식을 가장한 타율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 자발적인 죽음도 있다. 이른바 영웅적인 죽음이 그렇다. 설령 죽을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죽음을 무릅쓰고 감히 죽음과 대결하고 그 죽음을 넘어서는 죽음이다. 자기 생을 통해 타인들의 생명을 구하려는 영웅들의 죽음이 그렇다. 생명보존의 욕구는 모든 생명체의 자연적 본능이다. 그런데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타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위험한 상황으로 들어가는 것은 죽음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이루어지는 영웅적 선택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형태의 죽음은 죽음을 미리 앞서 예비하는, ‘죽음에 대한 선구적 결단’으로 묘사한다. 이런 결단은 오직 자유로운 존재인 인간에게만 가능하다. 인간만이 자신의 신체가 소멸되는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다. 아마도 인간 정신의 위대함은 이런 자발적이고 영웅적인 죽음에서 드러나지 않겠는가? 그의 신체는 소멸해도, 그의 정신은 산자들의 기억 속에서 생명을 유지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왜 월드컵에 열광하는가?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사람들은 왜 월드컵에 열광하는가??[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요즈음은 월드컵 시즌이다.?월드컵은 전 세계인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경기다.?지난 두 달 동안 짓눌렀던 세월호의 슬픔도 이 열광을 감출 수는 없다.?사람이 어찌 슬퍼만 할 수 있겠는가??월드컵의 열기가 전 세계를 덮고 있고,?지구 반대편의 경기를 보기 위해 사람들은 밤과 낮을 거꾸로 살고 있다.?특정 사건을 가지고 이념이나 인종,?빈부의 격차를 넘어서 열광하는 경우는 드물다.?올림픽 경기를 제외한다면,?단일 구기 종목으로 전 세계의 국가가 고루 예선과 본선에 대표 팀을 파견하는 경우는 축구가 유일하다.?야구는 미국과 동아시아 국가,?그리고 유럽 일부 국가를 제외한다면 지구를 대표하는 종목은 아니다.?배구나 하키,?골프 등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축구에 열광을 할까??축구에는 인종적?·문화적 차이와 상관없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그 무엇이 있을까??공을 차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 행위와도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우리나라의 경우도 격구(擊毬)라고 해서 사람들이 모여 공을 차는 경기가 있었다.?멕시코의 마야 인들도 공을 가지고 노는 오랜 경기 전통이 있다.?이런 전통은 다른 많은 민족이나 문화권에서도 찾아보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공을 발을 가지고 노는 이런 행동의 어떤 면이 인간의 보편적 본능에 충실한가??축구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오직 발로만 하는 운동이다.?골을 막는 골키퍼만이 손을 사용할 수 있으며,?공이 장외로 나가 경기장 안으로 공을 집어넣을 때만 예외적으로 손의 사용이 허락된다.?경기장에서 손을 사용하면 바로 프리킥 벌칙을 받고,?패널티 애리어 안에서 골 키퍼가 아닌 다른 선수들이 손을 사용하면 패널티 킥이라는 최고의 벌칙을 받는다.?혹시 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오직 발과 머리만 사용하게 하는 것이 이런 본능적 행위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은 아닌가?

손은 인간 문명의 발전과 깊은 연관이 있다.?인류가 직립 원인으로 서면서 비로소 손이 해방된다.?손이 대지로부터 해방된 사건은 문명사의 발전에서 획기적 사건일 수도 있다.?이 손은 나무의 과일을 따고,?도구를 제작할 때 사용된다.?도구의 사용은 인간이 직접 몸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대상을 조작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도구를 사용하면서 인간은 다른 동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사회 진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또 손은 손가락을 활용하여 셈을 세는 데도 사용된다.?하나 둘로 시작하는 셈은 추상 활동의 시작이다.?이 셈으로부터 숫자의 발견이 이루어진다.?숫자는 자연 대상을 단순하게 계산하는 추상 도구이다.?이 수자로부터 수들의 관계와 비율이 발견되고,?이를 통해 음들의 관계,?물리적 사건들의 관계,?천체의 운동의 법칙 등이 숫자를 통해 확인되는 것이다.?도구를 제작하고 추상 활동이 발전하는데 있어 그 출발은 손이 대지로부터 해방되는 사건이다.

그런데 축구에서는 이 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핵심적인 규칙이다.?오직 발과 머리만을 사용하고,?그 발의 재간과 헤딩 기술만을 이용해서 공을 골대로 집어넣는 것이다.?이 발은 대지와 연결되어 있다.?가장 원초적인 대지를 딛고서 이 대지로부터 에너지를 받는 수단이다.?때문에 발은 이런 원초적인 본능과 에너지에 가장 깊게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축구가 동서고금의 인종과 문화,?노소와 경제적 빈부 차와 상관없이 고루 환영을 받는 것은 아마도 이런 원시적 본능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야구의 경우 홈런을 치면 관중들의 환호를 받고 누상을 한 바퀴 돈 홈런 타자는 다른 선수들과 손을 마주치는 세리모니를 한다.?그 장면은 상당히 절제된 문화 의식과 같다.?하지만 축구에서 골을 넣는 순간 그 선수의 포효를 보라.그는 막장으로부터 올라오는 괴성을 지르면서 온갖 몸동작이 복합된 세리모니를 하면서 동료들의 축하를 받는다.?다른 어떤 경기보다도 축구의 경우 이런 괴성과 몸동작이 심한 편이다.그것은 원시적 에너지의 발산과 연관이 있지 않은가?

수 만 명의 사라들이 운집해 있는 거대한 경기장을 보라.?과거 로마의 콜로세움을 연상시키지 않는가??아니 그 이상이다.?로마인들은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끼리 피를 흘리는 대결을 보면서 환호했다.?어떤 경우는 사자와 같은 야수와 싸우는 것을 보고 열광하고,?네로 황제 시절에는 기독교인들이 야수들의 밥이 되는 모습에 광분하기도 했다.?그들은 콜로세움에서 이런 원시적이고 야수적인 결투 장면의 피를 보면서 야수적 본능을 대리 충족한다.?아마도 현대의 축구경기는 그런 원시적 본능과 욕구를 대리 경험할 수 있는 데 가장 가깝지 않을까??그런데 이런 원시적 본능과 욕구를 발산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어떨까??사회학적으로는 이런 에너지나 정념의 발산 장치를?‘안전도관’이라고 말한다.?이런 도관은 내부의 에너지를 외부로 배출하는 도관의 역할을 한다.

고대 그리스 사회는 이런 안전도관으로 디오니소스 축제를 활용했다.?니체는?『비극의 탄생』이란 작품에서 그리스 사회를 본적으로 두 가지 판이한 정신이 지배하고 있다고 본다.?이 작품은 니체가?28살에 써서 그의 천재성을 인정받기도 했지만,동시에 문헌학의 일반적 전통을 벗어나 비판을 받기도 했다.유명한 미학자 빈켈만은 그리스 정신을?‘아름다움의 정신’으로 간주한다.?아름다움은 무엇보다 수적 황금 비례에 기초한 통일성과 단순성의 미이다.?그에 따르면 그리스 사회는 이 아름답고 밝은?“아폴론적 정신”으로 대변된다.?그런데 니체는 빈켈만의 이런 일반화된 분류를 거부한 것이다.?그리스 사회는 밝은“아폴론적 정신”뿐만 아니라 어두운?“디오니소스적 정신”도 있다는 것이다.?빈켈만이 밝은 아름다움의 정신을 조형예술의 아름다움 속에서 보았다면,?니체는 어두운?“디오니소스적 정신”을 주로 비극의 축제에서 확인한다.?비극은 그리스 사회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거치면서 민주주의가 정착하고 경제가 발전하는 등 최전성기에 유행한 드라마이다.?그리스의 시민들은 이 비극 공연에 열광하면서 공동체의 유대를 확인하고 정서적인 카타르시스를 체험하기도 한다.?이런 비극축제는 중세의 카니발로 이어진다.?니체에 따르면 밝은?“아폴론적 정신”은“개체화의 원리”이고,?어두운?“디오니소스적 정신”은?“전체와 집단의 원리”이다.?전자는 조형예술의 아름다움 속에 구현되고,?후자는 비극이 공연되는 집단 축제(디오니소스 축제/중세의 카니발)에서 드러난다.?축구와 같은 운동경기나 혹은 대규모 집단 응원 행위도 이런 축제와 연관이 깊다.?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정신이 세 가지 장벽을 무너뜨린다고 한다.?즉 인간과 자연의 벽,?개체와 공동체의 벽,?의식과 무의식의 벽이 그것이다.?말하자면 디오니소스적 정신은 인간을 자연(무기물)으로 되돌리고,?개체를 공동체와 연결하고,?의식을 무의식의 세계로 환원하는 것이다.?그렇다면 원시적 본능의 발산과 집단 에너지를 하나로 묶는 월드컵 축구를 현대판 디오니소스적 축제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2002년 월드컵 당시 수만의 인파가 거리에서?‘대~한민국,?따단 따 딴단’을 외칠 때 보여주었던 집단 에너지의 일체감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축제나 로마의 콜로세움 경기를 능가할 정도이다.?이런 원시적 에너지의 발산은 신화의 세계와 연결될 터인데,?그 당시 동아시아의 오랜 전쟁의 신?‘치우 황제’가 마스코트로 등장한 것도 우연은 아닐 터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축구를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운동으로 보거나 축구를 몸만으로 하는 경기라고 단순화하기에는 힘들다.?외형적으로 보기에는 발과 머리를 사용하고 있어 머리와는 상관이 없는 몸의 운동으로 보인다.?하지만 개인들의 기량을 쌓는 과정에서 발재간과 헤딩 기술은 몸에 기억된다.?몸은 의식이나 정신활동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그것 역시 두뇌의 활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현대 뇌 과학에 따르면 몸이 두뇌의 활동이고,?두뇌는 몸을 기억한다.?뇌의 발달은 다른 육체기관과 별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손이 기억을 하고 몸이 기억을 하는 것이다.?예를 들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들은 복잡하고 현란한 기교를 요하기 때문에 전문 피아니스트라도 연주가 쉽지가 않다.?그는 훌륭한 연주를 위해 반복적인 훈련을 하지만,?그렇다고 악보 전체가 그대로 머릿속에 암기되는 것은 아니다.?설령 암기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지휘자의 손동작과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춰 정확히 어떤 순간에 어떤 건반을 터치하는 것은 암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거의 무의식적인 동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터치는 기억하는 뇌의 독립적인 명령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말하자면 뛰어난 피아니스트는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의식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기억하며,?정교한 손동작이 이루어지는 만큼 뇌의 발달도 이루어지는 것이다.?기억은 손과 뇌,?그리고 환경이라는 특수한 맥락의 합작품인 것이다.?이런 사정은 축구에서 주로 사용하는 발재간과 헤딩 기술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축구 선수는 오랜 반복 훈련에 따라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상황에서 대처하는 능력을 몸과 뇌에 각인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축구를 본능적 활동과 에너지의 발산으로만 보는 것은 지나친 왜곡이 될 수 있을 것이다.?축구에서는 다른 모든 경기와 마찬가지로 전술을 이해하고 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이 과정은 두뇌 플레이가 많이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반복적으로 훈련하면서 몸으로 익히는 것이기 때문이다.?토탈 사커를 지향하는 현대 축구에서는 고정된 포지션 속에서 주어진 역할만 수행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다른 어떤 경기보다 상황에 따른 임기웅변의 역할이 필요한 복잡한 경기라고 할 수 있다.?게다가 축구는 심판의 엄격한 규칙과 지도하에 진행되는 경기이다.?전술을 훈련하는 과정에서는 무엇보다 다른 동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이런 커뮤니케이션은 단순한 인지과정만이 아니고,?규칙을 내면화하고 적응하고,?더 나아가서 그것을 응용하는 과정이다.?그것은 끊임없이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 타자와 소통하면서 몸으로 체득하는 고도의 훈련이라 할 수 있다.?더욱이 상업화된 프로 축구에서는 선수들은 다른 문화권과 언어권 출신의 다른 선수들과 소통하는 어려움도 필수적으로 겪게 된다.?이런 복잡한 커뮤니케이션의 과정은 몸으로 익힌 고도의 두뇌 활동을 요구한다.?때문에 이런 경험을 거친 뛰어난 선수들이 은퇴 후 해설 경기를 별다른 어려움 없이 맡는 것을 보면 그들의 지능이 일반인들을 상회한다고 말해도 틀린 것은 아니다.?이렇게 본다면 축구가 단순히 발재간과 헤딩기술을 활용한 원시적 운동이라는 말은 전혀 맞지 않는다고 하겠다.

오늘 날 현대 축구는 다른 어떤 경기들보다 대표적으로 상업화된 경기이다.?선수들의 몸값으로 천문학적인 돈이 오가고,?축구팀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웬만큼 재정이 뒷받침되기 전까지는 엄두도 내기 힘들다.?스타 선수의 몸값은 웬만한 중견기업의 수익을 넘어설 정도이다.?지역 간 격차도 심해 리그별 수준 차는 무엇보다 경제력을 반영하고 있다.?세계축구협회(FIFA)가 유엔 못지않게 권력기관이 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고, FIFA의 수장은 세계 정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월드컵을 유치하는 과정은 올림픽 유치 못지않게 국가 간에 사활을 건 경쟁을 통해 이루어진다.?이렇게 보면 축구는 가장 자본의 영향을 받는 현대적인 운동 산업의 하나라 할 ??? 있다.?동시에 축구는 가장 원시적인 본능에 기초한 경기,?몸과 뇌 그리고 상황이 집적된 고도의 기억 메카니즘에 기초해 있고,?적과 아군으로 나누어진 변화무쌍한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고도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게임이다.?그렇다면 축구는 원시와 현대,?본능과 이성,?몸과 정신,?자기와 타자,?선수와 관중 등이 종합적으로 집적된 경기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가장 상업화되고 현대화된 경기 속에 여전히 감추어져 있는 가장 원시적 본능과 에너지로 인해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축구를 보기 위해 일상의 스캐쥴을 무시하고,?축구를 보면서 열광을 하고,?이 축구의 승패에 실의와 환희를 표현하는 것은 아닌가?

 

과거 역사를 현재 역사에 써 먹지 못한다면 역사책 덮어라!: 김 갑수가 쓴『전쟁과 운명』

과거 역사를 현재 역사에 써 먹지 못한다면 역사책 덮어라!:?김 갑수가 쓴『전쟁과 운명』

 

나태영(한철연 회원)

 

 

김갑수와 최장집

이명박 정권 초기에 전국 수만 명 대학교수가 시국선언을 했다.이명박 정권 비판하는 시국선언을 했다.?바로 이 순간 이명박 도우미가 나타났다.?최장집이 나타났다.?최장집이 말했다.

‘이명박 정부가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틀린 말은 아니다.?선거로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었으니 말이다.?히틀러도 선거로 총통 자리에 올랐다.?최장집이 헛소리해도 최장집 비판하는 사람이 없었다.?그만큼 최장집 인맥과 학맥이 두텁다.?손호철,?정청래,?박상훈이 최장집 폐인이다.?김갑수 혼자서?<오마이뉴스>에서 최장집을 비판했다.

 

근대사를 통해 현대를 읽다.

김갑수는 백범 김구 선생을 존경한다.?인정한다.?다만 백범 김구 선생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비판한다.?한독당 김구가 한민당 이승만 생각을 받아들인 사실을 비판한다.?김구 선생이 친일파 청산을 먼저 하고 국가 건설했어야 했는데 국가 건설을 먼저 하고 친일파 청산하자는 이승만 꼬임에 넘어간 사실을 비판한다.?결국 이승만 의도대로 친일파 청산은 물거품이 되었다.?김구 한독당은 사라지는 비운을 당했다.?김구 선생도 암살당하는 비운을 당했다.?이런 사실을 꿰뚫고 있는 김갑수는 함부로 통합하는 것을 반대한다.?민주노동당이 국민참여당과 억지로 합치는 것을 반대했다.?김갑수 말대로 민주노동당이 국민참여당과 억지로 합치다가 좋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과거 역사를 오늘 우리 문제를 푸는데 사용할 줄 아는 김갑수 안목을 높이 살만한 부분이다.

김갑수는 통합보다는 한 세력이 강해지면 다른 세력이 강한 세력으로 빨려 들어오는 게 낫다고 말한다.?한독당 김구 선생 실패를 보고서 품은 생각이다.?나는 속 마음으로 김갑수 의견에 반대했다.?나는 진보당과 노동당이 합쳐져야 한다는 생각을 품었다.?까닭은 보통 사람들 눈에는 두 당이 똑같은 당이라는 것이다.?괜히 쪼개져서 보통 사람들이 볼 때 진보는 세력이 작으면서도 왜 쪼개지냐는 비난을 받기 때문이다.?조금 다르더라도 합쳐야 한다고 나는 주장했다.?그래서 진보정당 지지율을 높여야 된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생각보다는 김갑수 생각이 더 옳고 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한다.?민주노동당(진보당)과 진보신당(노동당)이 쪼개질 때 앙금이 크다.?북조선 관련 사건이 터질 때 입장 차이가 생긴다.?특히 북조선 핵 문제가 생기면 입장 차이가 두드러진다.

그래도 노동당은 정의당 보다는 낫다.?국정원 내란음모 조작 사건이 터졌을 때 노동당은 정의당처럼 국정원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았다.?국정원을 비판하고 진보당 편을 들어줬다.?다행이다.?어쨌든 두 당이 서로를 비난하지 않고 상식적으로 비판적 지지 관계를 맺었으면 좋겠다.?두 진보정당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정책 경쟁을 하면 좋겠다.?너무 급하게 통합을 밀어붙이면 일을 그르칠 것이다.

‘8·15?직후 김준연은 한민당 간부가 되어 이승만의 단정수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사 중의 하나가 되었다.?그는 한민당의 선전부장이었다.?우리가 익히 알듯이 한민당은 친일지주와 친일 부역배들이 주축이 된 사이비 야당이었다.

같은 한민당 내에 장덕수라는 경쟁자가 있었다.?물론 장덕수는 화려한(?)?친일경력의 소유자였다.?하지만 장덕수는 미국 컬럼비아대학 정치학 박사로서 세속적인 실력 면에서 김준연보다 우월했다.?장덕수는 한민당의 요직인 정치부장과 외교부장을 겸직했다.?동시에 장덕수는 김구와 황해도 동향으로서 김구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한민당과 한독당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도 하고 있었다.’

‘내부의 정적 장덕수도 제거하고 단정수립에 반대하는 임정 주도의 한독당까지 와해시킨다면?’?김준연으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었을 것이다.?그는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을 만났다.?얼마 후 장덕수는 혜화동 자택에 카빈을 들고 찾아온 경찰에게 피살되었다.?김구가 미군정 재판정에 나가 미군 장교에게 모욕적인 심문을 받은 것은 장덕수 암살 배후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다.?이어 미군정 재판부는 한독당의 핵심인물인 김석황 조상항 손정수 등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이것은 한독당의 와해와 김구의 죽음,?그리고 친일청산 실패로 귀결되었다.?결국 단정수립에 반대하던 통일세력,?요즘으로 말하면?‘종북세력’인 한독당과 지도자 김구를 거세한 것은 미군정과 이승만이지만 그 앞잡이에 야당을 자임하던 김준연이 있었던 것이다.

김준연은 오늘의 누구와 닮았는가.?아니 오늘의 누가 김준연과 닮았는가.?최고학부,?독일유학,?운동권 장식 이력,?제1야당 출신,?반공단정세력,?미군정·독재정권을 배후로 하여 경쟁자와?‘종북정당’을 파괴한 이가 누구인가??공히 김준연 그리고 유시민이 아니었던가?’‘우리는?1950년대 진보당 파괴와 조봉암 법살의 역사를 알고 있다.?이것은 조봉암과 라이벌 관계에 있던 서상일계의 배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서상일(1887~1962)은 언제나 조봉암에게 날카로운 경쟁의식을 느꼈고‘진보?1인자’를 향한 야심이 만만치 않았다.?보성전문 출신인 그는 사사건건 조봉암에게 시비를 걸었다.

당권 장악을 위한 서상일계의 쿠데타가 벌어진 것은?1956년 대선 이후였다.?대선에서 조봉암의 진보당이 민주당 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수권정당으로 도약하자 미국과 이승만 집단은 진보당을 적출하려 들었다.?서상일은 여기에 앞잡이로 나섰다.?그는“조봉암의 주장은 너무 강하다(북에 가깝다)”고 하면서 진보의 혁신과 대중화를 표방, ‘혁신대동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서상일과 그 추종자들은 내부 쿠데타에 실패하자,?곧’민주혁신당’?창당에 나선다.?그러나 민주혁신당은 조봉암이 지향했던?’피해대중의 구제‘에는 관심이 없었다.?아무튼 민주혁신당의 창당은 조봉암 등의 진보세력을 고립시켰고 진보정당의 명맥을 끊어놓는 역할을 담당했다.

조봉암은 체포되었다.?서상일과?‘혁신’?세력들은?‘진보당 사건’?피의자들에 대한 재판에서,?조봉암과 진보당 인사들에게 교묘하게 불리한 증언만을 내놓는다.?즉?“진보당은 좌경사회주의 정당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민주혁신당은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나 진보당에 비해선 우경화한 정당이다” “그들이 평화통일을 이룬 후 노동자,?농민들이 주도권을 잡도록 하기 위해 공산당과 합작 내지 같은 행동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미래의 일이므로 나는 모르겠다”등이었다.

민주혁신당은 오늘의 어느 정당과 닮아 있으며 서상일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그의 배후에는 누가 있었는가.?서상일은 오늘의 누구와 닮았는가??아니 오늘의 누가 서상일과 닮았는가.?진보의 선두주자 조봉암도 제거하고?‘종북정당’?진보당도 와해시키는 데 앞잡이 역을 자임한 사람은 공히 서상일과 심상정이 아니던가?’‘민주혁신당은 오늘의 어느 정당과 닮아 있으며 서상일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그의 배후에는 누가 있었는가.?서상일은 오늘의 누구와 닮았는가??아니 오늘의 누가 서상일과 닮았는가.?진보의 선두주자 조봉암도 제거하고?‘종북정당’?진보당도 와해시키는 데 앞잡이 역을 자임한 사람은 공히 서상일과 심상정이 아니던가?’?(김갑수, <주권방송>?페이스북 단상, 2013년?10월?16일)

김갑수는?『전쟁과 운명』?이 책에서 우리나라 근대사라는 거울에 오늘 우리를 비춘다.?누가 진국인지 도대체 누가 껍데기인지 보여준다.?진국은 통합진보당이다.?껍데기는 민주당이다.?정의당이다.?새누리당은 껍데기 메카이다.?껍데기 생산공장이다.?아니다.?작것이다.?철학자 윤구병이 말했다. ‘있어야 할 것이 있고 없어져야 할 것이 없어진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이다.’

껍데기는 더 있다. <오마이뉴스>에서 통합진보당과 이석기를 비난하는 인간들이 껍데기이다.?저들은 국정원이 만든 놀이터에서 열심히 논다.?국정원이 원하는 대로 논다.?국정원은 평범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었다.?평범한 사람을 억지로 감옥에 가두었다.?국정원이 저지른 나쁜 짓이 이 땅 현대사를 도배질한다.?국정원이 조작해서 만든?‘짜깁기 녹취록’은 절대로 증거가 될 수 없다.?그런데도 그?‘짜깁기 녹취록’을 근거로 통합진보당과 이석기를 비난하는 인간들이 많다.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다. <오마이뉴스>는 진보언론이다.?그런 진보언론에서 증거가 되지도 않는?‘짜깁기 녹취록’을 근거로 터무니없는 연속 인터뷰 기사를?1면에 올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손호철은 스스로를 진보교수라고 말한다.최소한 손호철은 박사학위를 딴 사람이다.?책도 여러 권 쓴 사람이다.?그런 과정에서 많은 논쟁을 했을 것이다.?자주 자기 생각을 다듬었을 것이다.?그런 손호철이 증거가 되지도 않는?’짜깁기 녹취록’을 근거로 통합진보당과 이석기를 비난한다.?착잡한 상황이다.?배움이 무엇인지 물음표를 던지고 싶다.

결론부터 말한다.?통합진보당은 김구 한독당처럼 죽지 않는다.조봉암 진보당처럼 죽지 않는다.

1970년대, 1980년대 이 땅에서 행해졌던 일이 이미 일제 강점기 때 행해졌다.?박정희는 친일파이다.?이런 박정희를 존경하는50대 이상 분들이 너무도 많다.?그 분들께 이 책?『전쟁과 운명』과?『중경의 편지』,?『압록강을 넘어서』를 선물하고 싶다.

 

이재유 선생 한 번 찾아 뵙고 싶다.

그 당시에 이런 멋진 분이 계셨다니 기쁘다. ‘그는 이념보다는 민족의 생존권과 독립을 당면 과제로 삼았다.’는 부분과?’그는 조직원들을 지도 감독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원들과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을 지원하는 투쟁 방식을 실천했다.’는 부분이 내게 많은 깨달음을 준다.?통합진보당과 노동당 사람들이 이 분한테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전쟁과 운명』을 읽고 외친다.

 

박근혜는 물러나라!?

『친일파는 살아있다』!
남한과 북조선은 단군 자손 국가이다!
발해와 신라가 싸운 전철을 밟지 말라!
주한미군 물러가라!
국가보안법 폐지하라!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하라!

 

이반의 사랑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반의 사랑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살다 보면 바뀌는 것도 있고,?안 바뀌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한국사회가 지난 한 세대 동안 너무 숨 가쁘게 달려 왔기 때문에 당연히 외형적인 변화는 말할 필요도 없다.?너무 다이나믹하다 보니 한?2-3년만 지나도 도시의 외관이 달라지고 도로가 달라지고 건물이 달라지는 경우가 숱하다.그러다 보니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마음도 당연히 크게 바뀐 것 같다.?크게 달라진 것 중 하나가 동성애에 대한 태도이다.?종종 토론 주제로 동성애를 다루는 경우가 있는데,?의외로 학생들이 남녀 불문하고 동성애에 대해서는 대단히 관대하다는 것이다.?우리가 대학 다닐 때는 게이나 레즈비언이란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돋고 외계인 취급을 했던 것과는 천양지차다.내가 대학 시험에 합격을 하고 겨울에 고대 타임 반 동계 특강을 다닌 적이 있다.?이 타임 반은 상당히 유명해서 동계 강좌인데도 불구하고 참가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타임>지를 선배들이 읽고 설명해주는 형태로 진행된다.?그런데 그 때 타임지 표지 모델로 여자?2명이 팔짱을 끼고 걷는 모습이 나온 적이 있다.?그 중의 한 여자는 가방을 들고 바지를 입고,?다른 여자는 선글라스를 끼고 스커트를 입은 것으로 기억된다.?타임즈 표지 모델이 레즈비언을 처음 화두로 올렸던 것이다. 1976년이니까 미국 사회에서도 동성애자들이 사회의 주목을 받던 초기였으리라.?그 때 강독을 이끌던 고 학번 선배가 이 중에 누가 여자 역할을 하고 누가 남자 역할을 하는가를 맞추어 보라고 주문하는 것이다.?그 당시 나는 그런 장면이 너무나 희한하고,?또 그런 것들이 논쟁거리가 된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럼에도 거진?4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기억을 하는 것을 보면 그만큼 그 장면이 인상적이었음을 반증한다.?그 뒤로 별로 그 문제를 생각하지 않았다.?그러다 박통이?10.26?사태로 죽고 나서 교회를 내 발로 찾아간 적이 있다.?지금도 인상적인데 그 교회의 남성 반주자가 피아노도 잘치고 얼굴도 이쁘장한 사람이었다.?신앙생활도 아주 잘해서 교회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기가 많았던 사람이다.?그 사람이 당시 중 고등학교 남학생들을 여러 명 건드렸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다.?혈기방장하던 시절이라 그 문제를 덮지 못하고 교회와 각을 세우다가 혼자 나온 경험이 있다.

그런데?90년대 중반 이른바?PC?통신이 한창 유행할 때였다.?알 만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 당시 하이텔이나 나우누리 같은 통신망들의 대화 방은 밤만 되면 북적거리던 시절이다.?대화 방에 가면 숱하게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밤을 새워 밀담을 즐긴다.?입담 좋으면 여자 만나기도 쉬워 이른바 번개도 유행했던 것으로 안다.?그런데 어느 날?’이반’이라 이름붙인 대화 방에 들어가려니까 일반인지 이반인지 묻는 것이다.?그래서 나는 모 몇 학년 몇 반 정도로 생각해서 그냥 일반이라고 하니까 일반은 안 된다고 하면서 입장 불허하는 것이다.?하도 이상해서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곳은 동성애자들의 방이라고 한다.?일반은 일반인을 말하고,?이반은 그냥?2반이 아니라 일반을 일탈한?’이반’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그 사정을 알고는 그 방 근처만 가도 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을 받았다.?그만큼 당시의 우리 세대에게는 동성애는 여전히 낯선 코드이고,?그만큼 편견도 적지 않다.?이런 편견을 극복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지나서이다.?이 당시?e-Mail을 통한 소통과 연애는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의?’You’ve got a mail’에 잘 나타나 있고,?대화 방은 전도연이 주연한?’접속’처럼 아름다운 추억의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동성애에 대한 호불호는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다.?서구에서 유대 기독교의 영향을 받던 시기는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가부장적이고 남성적인 중심적인 사회에서 동성애는 악마적이고 자연에 거슬리는 것으로 취급된다.?서구에서도 지금까지 가장 동성애에 대해 반대가 심한 곳은 기독교적 전통이 큰 곳에서이다.?기독교가 서구의 중심에 자리 잡기 전만 해도 동성애에 대해 대단히 관대한 문화가 유지되고 있었다.?특히 그리스 문화에서는 성인 남자가 어린 미소년과 사귀는 일종의 원조교제가 유행처럼 번지고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았다.?이런 문화는 철학적 정당성도 얻고 있었다.?남녀 간의 사랑은 육체를 매개로 하는 저급한 욕망에 기초해 있지만,?성인 남자와 미소년의 관계는 순수한 영혼의 교류라는 것이다.?그 만큼 더 사랑의 이데아에 가깝다는 이야기일 터인데,?일찍부터 이성이 가방 들고 감성의 욕망을 쫓아다녔다는 증좌일터이리라.?소크라테스의 주변에 늘 젊은이들이 함께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그 중에 한 사람이 나중에 그리스의 유명한 정치인이 되었던 알키비아데스이다.?그는 명문가 출신이고 용모도 수월하고 명민한 두뇌의 소유자이다.?그런 그가 소크라테스를 대단히 연모한 것이다.?한 번은 둘이서 해변 가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있었다.?하지만 이 사랑은 짝사랑이다.?파도소리가 들리고,?별이 보석처럼 밤하늘을 장식한 해변 가에서 사랑하는 연인이 밤을 새운다고 상상해보라.?얼마나 가슴이 설레 이겠는가??알키비아데스도 그런 대단한 썸씽을 기대했을 것이다.?그런데 돌부처 같은 우리의 소크라테스는 동이 틀 때까지 우뚝 서서 꿈쩍도 안하고 동쪽 하늘만 바라다보았다고 한다.?그러니 이제 막 사랑에 눈뜬 젊은 알키비아데스의 실망이 말할 수 없이 컸다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플라톤의?『향연』에 보면 그가 여러 사람들이 토론하는 곳에서 노골적으로 소크라테스에 대한 연정을 토로하는 장면들이 나온다.?그만큼 동성애가 일반화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의 한 사람인 비트겐슈타인이 동성애자라는 이야기도 낯선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이 집안사람들은 대단한 천재들이고 예술적 재능도 타고 났다.?오스트리아 철강 재벌인 탓에 그의 집에는 늘 당대의 뛰어난 재사와 예술가들이 북적거렸다.?하지만 그의 형제들 대부분은 비극적 운명으로 일찍 죽거나 자살을 하고 또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클림트의 에로틱한 그림에는 그의 누이동생이 모델로도 나온다.?유명한?’볼레로,?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은 전쟁에서 오른 팔을 잃고 돌아온 그의 형인 피아니스트를 위해 작곡가 라벨이 헌정한 곡이다.?약관?21살에?1차 세계대전 당시 포로수용소에서 틈틈이 메모로 썼던?『논리-철학 논고』라는 책은?20세기 영미 분석철학의 성전 역할을 하기도 했다.?철학 도들의 입에서 끊임없이 회자되는 이 책의 명제 몇 가지. “언어는 세계의 그림이다.”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거의 잠언 수준이다.?집안 내력 때문인지 비트겐슈타인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우울한 감정을 떨치지 못했다.?하지만 그가 캠브리지 대학의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도중에 사창가가 있었는데 종종 그곳을 들렀다는 보고도 있는 것을 보면 동성애자라는 것은 확증된 사실만은 아닌 것 같다.?이 문제는 지금도 논란이 많다.?한 때 포스트모던 철학의 기수로 한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미셸 푸코도 동성애자이다.?그는 친 동성애자 운동,?소수자 차별 반대 운동을 주도하던 행동하는 철학자이기도 했다.?그는 예일 대 교환교수로 있을 때 종종 게이 바를 들렀는데 결국?1984년에?AIDS에 걸려 죽기도 했다.?그는 근대의 정신과 몸을 지배하는 지식과 권력 체계를 비판하는 일에 주력했다.?근대의 합리적 이성이 이성과 반이성을 나누고,?광기를 추방하고,?의학적 지식이 이런 지배의 도구 역할을 한다는 것을 고발했다.?감옥과 병원의 탄생,?그리고 학교의 탄생이 근대적 지식의 담론 속에서 동일한 출생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밝히기도 했다.?미시 권력의 네트워크와 생산적 권력의 개념은 한국 사회를 분석하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광기의 역사』,?『감옥의 탄생』,?『감옥의 탄생』등은 많이 읽히는 그의 주저들이다.

80년대 후반에 나온 영화?<필라델피아>는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고발한 빼어난 법정 영화이다.?로펌의 잘나가는 변호사인 주인공 톰 행크스가 동성애자라는 것이 밝혀지자 업무 미숙을 이유로 부당 해고 당한다.?그 당시만 해도?AIDS?환자에 대한 무지와 불신이 커서 동료 변호사들도 그의 소송을 대리하려고 하지 않는다.?편견으로 주저하던 흑인 변호사 댄젤 워싱턴이 사건을 맡으면서 톰 행크스와 함께 로펌을 상대로 진행하는 법정 공방은 법과 정의가 무엇인가를 강렬하게 일깨워준다.?배심원 측이 회사 측의 부당 해고를 인정하면서 원고의 손을 들어주자 법원은 원고에 대한 피해배상 외에 우월적 지위를 남용하던 피고에 천문학적인 징벌적 손해 배상을 선고한다.?왜 한국의 법정에서는 이 징벌적 손해 배상 제도가 도입되지 않는가??이 영화를 보다 보면 동성애자를 감싸주는 가족들의 태도가 인상적이다.?한국의 가족에서 동성애자임을 커밍 아웃하면 여전히 맞아 죽을 일이고 쫓겨날 일이다.?사실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고,?다만 성적 기호만이 다를 뿐이다.?이러한 차이가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종종 우리들의 편견은 그것을 잊고 있다.?이 영화의 빼어난 장면 중의 하나가 최종 판결 전에 죽음을 예감한 톰 행크스가 변호사 워싱턴 앞에서 마리아 칼라스의?”La mamma morta”(어머니는 돌아가시고)를 들으면서 몸으로 연기하는 장면이다.?안 본 사람은 꼭 한 번은 볼 일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3b0p9mTJOJI?변호사가 동성애자 의뢰인에 진정 마음을 열고 공감하는 계기가 되는 아리아다.?동성애자들의 빼어난 예술적 취향을 보여주려는 뜻도 없지 않은 것 같다.

사랑의 종착역은 결혼이다.?사랑이 사랑으로만 끝나면 너무 무책임하지 않은가??모든 인륜지 대사의 기초는 사랑하는 사람끼리 가정을 이루는 일이다.?나는 굳이 남자와 여자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동성 결혼이 우리나라에서는 인정이 되지 않고 있고,?세계적으로도 네덜란드와 벨기에,?그리고 미국의 매서츄세츠 주 등 아직은 소수이다.?문화적으로 진보적이라고 생각되는 파리에서도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시위가 몇 달 전에 격렬하게 일어난 적이 있을 만큼 아직은 거부감도 크다.?하지만 동성결혼의 합법화를 인정하는 것은 세계적 추세이다.?멀지 않은 미래에는 우리 역시 이 추세를 거부하기 힘들지 모르겠다.?이미 영화감독 김조광수는 공개적으로 동성결혼을 선언한 적이 있다.?그렇다면 결혼을 남녀로 국한시키는 혼인법이나 가족법,?기타 이와 관련된 친족 상속법,?민법 등 많은 법 개정도 불가피할지 모르겠다.?미래의 가족은 우리가 그간 알아 왔던 형태와는 상당히 달라질 것이란 생각이 크다.?일단 결혼이란 이성간의 일이라는 것만이 아님을 받아들여야 될 때가 올 것이다.?이 부분은 문화적인 인정과 사회적인 합의가 있기 까지 진통도 클 것이다.?특히 기독교는 신의 섭리,?창조 질서 등을 앞세우면서 반대가 심할 것이다.?동성 간의 결혼을 인정할 때2세 생산도 과거와는 크게 다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입양과 시험관 아기,정자와 난자의 기증 및 매매, 2중 대리모와 대리부 등 이성 간의 결혼에서 생각하기 힘든 방식이 일상화될 것이다.?무엇보다 자식에 대한 부모들의 과도한 집착과 교육에 대한 태도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미래에는 교육과 관련한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가 동성결혼으로 인해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고 본다.?이러한 변화가 긍정적이 될지 아니면 부정적이 될지는 지금 예단하기는 힘들겠다.?덕분에 우리 시대는 죽을 때까지 새로운 변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고민해야 할지 모르겠다.?무조건 귀를 닫으면 꼴통 보수요,?꼰대 소리를 듣지 않겠는가?

 

거짓 원인의 오류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거짓 원인의 오류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학생들에게?Argumentation Theory를 가르치다 보면 논리학의?’오류론’을 한 번은 꼭 다룬다.?그런데 이 오류 론에는?’형식적 오류’와?’비형식적 오류’가 다 포함된다.?형식적 오류는 형식적 규칙을 위배했는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니까 그 규칙만 알면 비교적 판별하기가 쉽다.?마치 도로 교통에서 신호 위반이나 과속의 경우 규칙 위반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과 같다.?그런데 일상 언어에서는 형식이 아닌 내용과 관련해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다반사다.?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한데 곰곰이 따져보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때로는 이 오류를 일정한 효과를 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재판정에서 피의자가 눈물 흘리면서 동정심에 호소하는 경우가 전형적이다.?그가 한 행위와 그의 처지는 별개지만 눈물은 이 둘을 연결시켜줘서 정상참작에 도움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을 것이다.?소크라테스도?『변명』에 보면 이런?’연민에의 호소’를 한다. “친구여,?저도 사람입니다.?다른 사람과 똑같습니다.?저도 호머의 말처럼 목석으로 된 인간이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고,?식구도 있고,?아들도 셋 이예요.”?찔러도 피한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소크라테스 조차 마누라와 자식새끼를 앞세우며 선처를 구하는 것이다.?김 시습의?’자지는 만지고,?보지는 조지라'(自知晩知 補知早知)는 표의문자와 표음문자로 혼용되는 우리 일상어의 애매성을 노린 위트 효과다.?서당에서 열심히 글을 읽는 아이들 모습이 기특해 큰 소리로 한 수 읊었더니 서당의 훈장 이하 아이들이 욕하는 줄 알고 달려들었다는 것이다.?사실은 김 시습 자신이 왔는데도 내다보지도 않는 모습에 부아가 나서 야유를 한 것이리라.?스스로 알려고 하면 늦게 알고,?도움을 받아 알려고 하면 일찍 안다는 말이다.?선거철만 되면 흑색선전이 난무하고,?온갖 비리들이 폭로되는 경우가 있다.?전형적인 물 타기 방식이요,?피장파장의 오류이다.?종종?’예수 믿으시오’?하면서 확성기로 떠들고 앞뒤로는?’불신지옥’?간판을 달고 다니는데 이는 흑백논리의 오류이다.?신이 이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했는데 그들은 흑과 백이라는 두 가지 색깔로만 보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신의 창조물을 왜곡하는 저들이 오히려 불신하는 것은 아닐까??이런 단순화가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그 효과가 강력하기 때문에 종종 정치인들이나 대중을 선동하는 사람들이 쉽게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때문에 이런 형태의 오류는 무조건 틀렸으니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만 말하기 어렵다.?그 중에 하나가?’거짓 원인의 오류’이다.

이 오류는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가 필연성이 없음에도 마치 있는 것처럼 상정하는 오류다.?예전에 마당이 있던 시절 여름날 열심히 빨래를 해서 마당에 널었는데 소나기가 내린다고 생각해 보라.?또 그런 불편한 경험을 두 어 차례 반복해보라.?그러니까 나오는 엄마들의 소리가?’빨래만 하면 비가 온다’는 것이다.?여러분들은 세차를 할 때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는가??세차만 하면 비가 온다고…사실 빨래를 널거나 세차를 하는 사건과 비가 온다는 사건 사이에 인과 관계가 없음에도 우리의 연상 속에서는 자연스럽게 연결된다.?개들만 조건 반사하는 것이 아니다.?전라도 사람이 어떻고,?경상도 사람이 어떻고 하는 것도 사실 그 사람 자체와 그의 출신 지역 사이에 필연적 인과관계가 없음에도 자연스럽게 편견으로 자리 잡고 있다.?중세의 마녀사냥이나 나치가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한국 정치에서 늘 반복이 되는 종북 놀이도 그 한 예이다.?과거 왕조시대에 여름 날 가뭄이 심하면 왕이 나서서 기우제를 지냈다.?자연재해와 인간의 도덕적 책임 간에 어떤 연관이 있다고 믿는가??동양의 전통적인 천인합일의 사상에서는 양자는 연결되어 있고 상호 조응한다고 본다.?이 형이상학적 가설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은근슬쩍 학생들한테 이런 질문을 던진다. “기우제를 지내면 실제로 비가 올까요 안 올까요?”?학생들은 당연히 연관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질문을 받으면 당황 하면서 여러 가지 답변을 내놓는다. ‘안 옵니다.’?사실 이런 답변이 합리적이다.?그런데 배운 것이 죄라고,?어떤 학생은 기우제를 지내면 연기가 하늘로 많이 올라가 비가 내린다고 나름 과학적으로 답변하는 경우도 있다.?마른하늘에 그 한 조각구름이 무슨 큰 역할을 하겠는가??하지만 정답은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왜 그럴까??비가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니까…

일전에 송 강호,?김 혜수가 주연한?<관상>이라는 영화가 히트를 친 적이 있다.?병약한 문종이 관상쟁이를 통해 역모의 상을 미리 알아 단종의 보위를 지키려다 실패하는 이야기다.?수양의 상은 전형적으로 역모의 상이라고 한다.?역모는 당시 정치 상황을 꿰뚫고 있다면 충분히 예측 가능할 것이다.?관상쟁이의 판단은 다만 사람들에게 합리적 예측에 대해 신념과 확신을 불어넣어 주는 데 적격이다.?꿈보다 해몽이고 후행적 정당화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관상은 얼굴에 드러난 상을 통해 그 사람의 과거/현재/미래를 본다는 것인데 사실 가당찮은 이야기일까??드러난 상은 과거를 일정하게 반영할 수 있고,?그 과거를 통해 미래를 미루어 짐작은 할 수 있다.?그리고 이런 판단은 상당히 경험적이고 통계적이다.?게다가 오랜 숙련을 통해 통계예측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과학적인 통계가 부족하던 시절의 경험적 통계학이다.?사람들을 많이 대하는 직업에서는 외양을 통해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신뢰도가 있다.?나도 그렇게 판단하는 방법이 있다.?동양의?12지 이론을 가지고 사람들을 일정하게 그 유형에 포함시켜 판단하는 것이다.?예전에 노무현과 이회창이 대통령 선거로 대립할 때 다들 이 회창을 독수리 상이라고 했는데,?나는 쥐 상이다고 하고 노 무현 상이 호랑이 상이다고 어거지 부린 적이 있다.?사실 이런 포괄적 분류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아무튼 이걸 가지고 학생들이 많이 떠들면?”?너희들 다 보인다.?미래가”?라고 엄포주면 서로 봐달라고 하면서 조용해진다.?학생들은 나의 합리적 이론보다는 그런 불합리하고 비합리적인 속설에 더 반응한다.?학자가 하는 애기보다 사주 봐주는 점쟁이 이야기를 더 귀담아 듣지 않는가??일종의 심리적 효과이고 플라세보 효과?(placebo effect)이다.?서양에서도?19세기 초에 이런 형태의 관상학과 골상학이 유행한 적이 있다.?용모와 안색,?얼굴에 드러난 특성 등을 통해 그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이다.?외면이 내면을 반영한다는 생각이다.?특히 범죄인의 성향과 유형을 판단하는 데 골상학이 상당히 이용되기도 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비 과학으로 더는 과학의 반열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외면으로 드러난 특질,?뼈의 구조와 배치 등이 내면의 정신과 필연적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동양에서는 관상보다는 골상이요,?골상 보다는 심상이라고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안에 감추어진 마음을 더 높이 사고 있다.?나는 아직도?”정신은 뼈다”라는 말의 의미를 묻고 있다.

현 정부 들어 크고 작은 사건이 빈발하고 있다.?그 중에서도 세월 호 사건은 너무도 큰 참사인데다 현재까지도 진행형의 사건이다.?얼마 전에는 내가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양 터미널에서 화재가 나?7명이 죽고 수 십 명이 큰 부상을 당했다.?시민들이 일상으로 이용하는 시설에서 이런 사고가 벌어졌다는 것은 큰 충격이 될 수 있다.?전남 장성의 한 요양원에서는 화재가 놔 요양 노인들?21명이 불에 타고 연기에 질식돼서 죽는 사고도 났다.?그런데 이처럼 빈발하는 사고의 형태가 과거 김 영삼 대통령 시절을 연상케 하고 있다.?당시의 대형사고 몇 가지만 손꼽아도 서해 페리호 침몰사고(사망292명),?대구 지하철 가스 사고(98명 사명),?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사망500여명), KAL기 괌 추락사고(228명 사망),?성수대교 붕괴사고(32명 사망)이다.?하나 만으로도 엄청난 데 이런 대형 사고가 부지기수로 터지니까 국민들이 받는 체감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가??그러니까 영부인의 상이 곡상(哭象)이라 국민들의 눈물을 많이 뺀다는 말이 돌았다.?영부인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들어가고 나온 굴곡(屈谷)이 없지는 않다.?뒤의 곡(谷)을 앞의 곡(哭)으로 치환한 것이다.?어느 유명한 관상가의 말이라고 했다.?물리적인 사고와 대통령 영부인의 상간에 인과관계를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마는 관상가들의 그런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가 대중들의 마음속에는 아무런 저항 없이 자리 잡기도 한다.?김 영삼 정부 말에 초유의?IMF?위기를 맞았으니 더 그 말의 울림이 더 크다.?전형적인?‘거짓 원인의 오류’이지만 국민들의 집단 연상의 메카니즘 속에서는 필연성이 있다는 믿음이다.?혹세무민은 바로 이런 틈을 파고든다. “어,?그러고 보니 박 근혜 상도 만만찮아.?눈물 꽤 짜내게 생겼네.?편안한 상이 아니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