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퍼와 정신분석 6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호퍼와 정신분석 6
1)
앞에서 1924년 호퍼가 조와 결혼한 이후, 호퍼와 조의 욕망 구조는 상상적 동일화의 관계로 규정했다. 이 상상적 동일화는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핵심은 자기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관계이다. 이 나르시시즘은 자기를 어머니가 사랑하는 대상, 즉 팔루스로 간주하는 것인데 호퍼의 등대 그림이 그런 나르시시즘을 잘 보여준다.
상상적 동일화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모습이 소위 부인이라는 모습이다. 이는 한편으로 자기가 어머니의 사랑 대상이라는 사실을 믿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다시 이를 부인하며, 자기가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믿는 것이다. 믿음과 부인은 끊임없이 전전반측하면서 주체를 이원적으로 분열시킨다.
이런 부인의 모습은 상상적 동일화의 여러 증상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페티시즘이나 조울증이며 그에 못지 않게 관음증과 노출증 역시 이런 부인의 기제에 속한다.
2)
등대 그림과 같은 시대 즉 1920년대 호퍼의 그림에는 그의 관음증을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방안의 여성을 그린 그림이다. 이런 그림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밖에서 창문을 통해 방안의 여성을 들여다보는 그림이다. 다른 하나는 방안의 여성이 창문 밖으로 그림 안에는 등장하지 않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그림이다. 대표적으로 아래 두 그림을 비교해 보자.
이 그림은 1928년 그려진 ‘밤의 창문’이라는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시선은 창 밖의 어둠 속에 머무른다. 그 시선은 창을 통해 밝은 빛이 비치는 방안을 들여다본다. 방안은 아찔하도록 밝은 노란 빛이 반사하고 있고 그 가운데 붉은 가운을 입은 여성이 마치 냉장고에 무언가를 꺼내는 듯한 등을 구부린 채 서 있다.
오른쪽 창문을 통해 보이는 물체는 형태가 모호하여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은 여성이 입은 가운과 같은 색조인 밝은 붉은 색이라는 것이 눈에 띈다. 놀라운 것은 왼쪽 창문에서 흰색의 커튼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모습이다. 보통은 바람이 밖에서 방안으로 부는데 이 커튼은 방 안에서 밖으로 흔들리고 있다. 커튼의 흔들림은 마치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이 유혹한다.
그 때문에 붉은 가운을 입은 채 등을 구부린 여성의 모습은 에로틱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면서, 관음증의 대상이 된다. 관객은 어둠 속에서 숨어서 숨을 삼키며 방안의 여성을 들여다볼 것이다. 바로 이 관객의 시선은 원래 호퍼의 시선이 아니었던가?
3)
이 그림은 1927년의 ‘아침 11시’라는 작품이다. 앞의 그림과 제목부터 대조된다. 앞의 그림이 깊은 밤이라면, 이 그림은 늦은 아침이다. 여기서 아침의 밝은 햇빛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바람은 잔잔한 듯 커튼의 창가에 그저 늘어져 있을 뿐이다. 짙은 푸른 색 소파에 앉은 여성은 벌거벗은 채, 창 밖을 바라본다. 이 여성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방안은 붉은 색, 푸른 색, 노란 색 등이 어울려 상당히 생동적이고 화려한 느낌을 준다. 이 그림에서 시선을 끄는 것은 벌거벗은 여성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시선을 끄는 것이 있다. 바로 왼쪽의 탁자 위에 있는 전등이다. 여성의 나체를 에워싼 밝은 색과 불이 꺼진 전등의 어두운 붉은 색이 대조되며, 여성의 신체가 지닌 크기에 비해 본다면 전등의 크기가 상당히 과장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과장된 실내등의 모습은 전형적으로 팔루스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뒤의 그림에서 여성의 체형이나 머리칼의 모습을 볼 때 모델이 아내인 조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앞의 그림에서는 여성의 뒷모습만 보이지만 신체의 체형은 상당히 젊은 여성으로 보인다. 아마도 자기의 집에 있는 아내 조의 모습을 집밖에서 시선으로 그린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은 몇몇 해석자가 설명한 것처럼 호퍼가 고가 전철을 타고 가다가 창문을 통해서 본 낯선 여성의 모습일 수도 있지만, 그림에서 시선의 위치가 고가 전철보다 높아서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났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4)
두 가지 그림이 모두 아내 조를 모델로 하였지만 실제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고 하겠다. 앞의 그림은 관음증적인데, 관음증의 표면적 대상은 다르지만 그 대상의 궁극적 의미는 곧 자신의 어머니이다. 그는 지금 프로이트가 말한 원초적 장면을 훔쳐보고 있다. 그는 이 장면을 보고 또 보지만, 그는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본 장면을 그는 스스로 은폐하기 때문이다. 즉 부인의 기제가 여기서도 작동한다.
뒤의 그림에서 여성은 자신을 노출하고 있다. 관음증의 대상은 오히려 은폐된다. 이런 은폐가 시선을 자극한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벌거벗은 여성은 관음증의 대상이라 하기보다는 오히려 노출증의 증상으로 볼 수 있다. 이 경우 그림 속의 인물은 자신을 누군가의 사랑의 대상으로 보여주려 한다. 즉 자신의 육체를 무기로 타인의 시선을 끄는 것이다.
그림 속의 여성이 바라보고 있는 그림 밖의 무엇인가는 그녀의 시선의 대상이라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그리고 바라보기를 바라는 어떤 타자이다. 이 타자는 누구일까? 여성의 노출증에서는 그녀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처럼 남성인 호퍼가 그린 여성이라면, 이 여성은 호퍼 자신을 의미할 것이다. 호퍼는 그림 속의 여성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이런 동일시는 앞에서 ‘여름 실내’라는 작품에서 침대에서 미끌어 떨어진 여성에서도 등장했다. 호퍼는 연애에서 실패한 자기를 이 여성에 투영하였던 것이다. 그림 속의 호퍼가 그 자신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이 벌거벗은 여성의 뒤에 놓여 있는실내등이 암시하지 않을까?
이 여성이 곧 호퍼 자신이라면 자신을 바라보아 주기를 그토록 바라 마지 않는 대상은 곧 어머니가 될 것이다. 그림의 주인공은 그의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창 밖에서 그 시선을 찾고 있다. 어딘가 있겠지만,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는 없다. 여기서도 부인의 기제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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