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이데올로기』1·2(2019), 『정신의 오디세이: 자유 의지의 역사』(2021) 등을 저술한 전 동아대 철학과 교수 이병창 회원이 영화와 소설, 철학 등 광범위한 문화 비평을 담아내는 코너이다.

호퍼와 정신분석 6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호퍼와 정신분석 6

 

1)

앞에서 1924년 호퍼가 조와 결혼한 이후, 호퍼와 조의 욕망 구조는 상상적 동일화의 관계로 규정했다. 이 상상적 동일화는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핵심은 자기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관계이다. 이 나르시시즘은 자기를 어머니가 사랑하는 대상, 즉 팔루스로 간주하는 것인데 호퍼의 등대 그림이 그런 나르시시즘을 잘 보여준다.

 

상상적 동일화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모습이 소위 부인이라는 모습이다. 이는 한편으로 자기가 어머니의 사랑 대상이라는 사실을 믿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다시 이를 부인하며, 자기가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믿는 것이다. 믿음과 부인은 끊임없이 전전반측하면서 주체를 이원적으로 분열시킨다.

 

이런 부인의 모습은 상상적 동일화의 여러 증상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페티시즘이나 조울증이며 그에 못지 않게 관음증과 노출증 역시 이런 부인의 기제에 속한다.

 

2)

등대 그림과 같은 시대 즉 1920년대 호퍼의 그림에는 그의 관음증을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방안의 여성을 그린 그림이다. 이런 그림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밖에서 창문을 통해 방안의 여성을 들여다보는 그림이다. 다른 하나는 방안의 여성이 창문 밖으로 그림 안에는 등장하지 않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그림이다. 대표적으로 아래 두 그림을 비교해 보자.

 

 

이 그림은 1928년 그려진 ‘밤의 창문’이라는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시선은 창 밖의 어둠 속에 머무른다. 그 시선은 창을 통해 밝은 빛이 비치는 방안을 들여다본다. 방안은 아찔하도록 밝은 노란 빛이 반사하고 있고 그 가운데 붉은 가운을 입은 여성이 마치 냉장고에 무언가를 꺼내는 듯한 등을 구부린 채 서 있다.

 

오른쪽 창문을 통해 보이는 물체는 형태가 모호하여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은 여성이 입은 가운과 같은 색조인 밝은 붉은 색이라는 것이 눈에 띈다. 놀라운 것은 왼쪽 창문에서 흰색의 커튼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모습이다. 보통은 바람이 밖에서 방안으로 부는데 이 커튼은 방 안에서 밖으로 흔들리고 있다. 커튼의 흔들림은 마치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이 유혹한다.

 

그 때문에 붉은 가운을 입은 채 등을 구부린 여성의 모습은 에로틱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면서, 관음증의 대상이 된다. 관객은 어둠 속에서 숨어서 숨을 삼키며 방안의 여성을 들여다볼 것이다.  바로 이 관객의 시선은 원래 호퍼의 시선이 아니었던가?

 

3)

 

이 그림은 1927년의 ‘아침 11시’라는 작품이다. 앞의 그림과 제목부터 대조된다. 앞의 그림이 깊은 밤이라면, 이 그림은 늦은 아침이다. 여기서 아침의 밝은 햇빛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바람은 잔잔한 듯 커튼의 창가에 그저 늘어져 있을 뿐이다. 짙은 푸른 색 소파에 앉은 여성은 벌거벗은 채, 창 밖을 바라본다. 이 여성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방안은 붉은 색, 푸른 색, 노란 색 등이 어울려 상당히 생동적이고 화려한 느낌을 준다. 이 그림에서 시선을 끄는 것은 벌거벗은 여성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시선을 끄는 것이 있다. 바로 왼쪽의 탁자 위에 있는 전등이다. 여성의 나체를 에워싼 밝은 색과 불이 꺼진 전등의 어두운 붉은 색이 대조되며, 여성의 신체가 지닌 크기에 비해 본다면 전등의 크기가 상당히 과장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과장된 실내등의 모습은 전형적으로 팔루스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뒤의 그림에서 여성의 체형이나 머리칼의 모습을 볼 때 모델이 아내인 조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앞의 그림에서는 여성의 뒷모습만 보이지만 신체의 체형은 상당히 젊은 여성으로 보인다. 아마도 자기의 집에 있는 아내 조의 모습을 집밖에서 시선으로 그린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은 몇몇 해석자가 설명한 것처럼 호퍼가 고가 전철을 타고 가다가 창문을 통해서 본 낯선 여성의 모습일 수도 있지만, 그림에서 시선의 위치가 고가 전철보다 높아서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났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4)

두 가지 그림이 모두 아내 조를 모델로 하였지만 실제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고 하겠다. 앞의 그림은 관음증적인데, 관음증의 표면적 대상은 다르지만 그 대상의 궁극적 의미는 곧 자신의 어머니이다. 그는 지금 프로이트가 말한 원초적 장면을 훔쳐보고 있다. 그는 이 장면을 보고 또 보지만, 그는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본 장면을 그는 스스로 은폐하기 때문이다. 즉 부인의 기제가 여기서도 작동한다.

 

뒤의 그림에서 여성은 자신을 노출하고 있다. 관음증의 대상은 오히려 은폐된다. 이런 은폐가 시선을 자극한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벌거벗은 여성은 관음증의 대상이라 하기보다는 오히려 노출증의 증상으로 볼 수 있다. 이 경우 그림 속의 인물은 자신을 누군가의 사랑의 대상으로 보여주려 한다. 즉 자신의 육체를 무기로 타인의 시선을 끄는 것이다.

 

그림 속의 여성이 바라보고 있는 그림 밖의 무엇인가는 그녀의 시선의 대상이라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그리고 바라보기를 바라는 어떤 타자이다. 이 타자는 누구일까? 여성의 노출증에서는 그녀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처럼 남성인 호퍼가 그린 여성이라면, 이 여성은 호퍼 자신을 의미할 것이다. 호퍼는 그림 속의 여성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이런 동일시는 앞에서 ‘여름 실내’라는 작품에서 침대에서 미끌어 떨어진 여성에서도 등장했다. 호퍼는 연애에서 실패한 자기를 이 여성에 투영하였던 것이다. 그림 속의 호퍼가 그 자신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이 벌거벗은 여성의 뒤에 놓여 있는실내등이 암시하지 않을까?

이 여성이 곧 호퍼 자신이라면 자신을 바라보아 주기를 그토록 바라 마지 않는 대상은 곧 어머니가 될 것이다. 그림의 주인공은 그의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창 밖에서 그 시선을 찾고 있다. 어딘가 있겠지만,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는 없다. 여기서도 부인의 기제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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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퍼와 정신분석 5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호퍼와 정신분석 5

 

1)

앞에서 20년대 후반 호퍼의 욕망 구조에 대해 언급했다. 다리, 망사르 집, 등대 그림 등에서 보듯이 실재로 가는 길은 차단되었고 그는 이에 대응하여 상상계적인 동일시를 통해 실재로 다가간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는 호퍼의 생애에서 어쩌면 가장 행복했을 수도 있는 신혼기였다. 호퍼는 1924년 9월 같은 동료 화가인 조(Josephine Nivison)과 결혼했다. 그리고 1925년 삽화가로서 상업적 활동을 포기하고 그림에 전적으로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그의 그림이 팔리기 시작했다. 이런 시기에 그가 상상계적인 동일시에 빠졌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호퍼 자신의 전기를 통해서 그의 욕망 구조를 짐작해 내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호퍼의 생애에서 그런 부분에 관한 연구는 없다. 그런데도 몇 가지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우선 눈에 뜨이는 것은 그의 부모이다.

 

2)

호퍼의 부모는 침례교도로서 상당히 경건한 삶을 했다고 알려진다. 부모는 결코 강압적이지 않았고 그림에 대한 호퍼의 관심을 격려해주었다. 그럼에도 호퍼의 부모의 청교도적인 태도는 호퍼에게 강한 영향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호퍼는 1906 이후 3년간 파리에서 생활했다. 그 당시 미국에서 파리로 온 예술가들은 파리의 모더니스트 예술가들의 무정부적인 삶에 휩쓸려 들었다. 호퍼는 파리의 인상주의 그림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음에도, 파리의 예술가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부모가 정해준 집과 미술관을 오가며 혼자서 인상파의 그림을 습득했다고 알려진다.

무엇보다도 그가 나중에 자신이 살았던 집과 유사한 집을 그리면서 이름을 청교도라고 붙인 데서 이런 청교도적 영향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 집은 흰색 나무 판넬로 이루어진 단순한 맞배 지붕 형태이며, 이런 집은 후일 호퍼의 그림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3)

호퍼의 그림에서 파리 시절 초기에는 거의 유일하게 인상파적으로 밝고 경쾌하며, 붓터치가 자유로운 그림이 그려졌다. 파리 이전 습작기에서나 1909년 그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이후 어느 때나 그의 그림은 무겁고 어두우며 이제 붓터치를 알 수없이 평면화 된 색채가 지배하게 된다. 파리 시절 이 경쾌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왜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다시 어두워졌을까?

그가 막 미국으로 돌아왔던 시기에 그린 그림 ‘여름 실내(Summer Iinterier: 1909)’는 그의 마음에서 무언가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이 그림에서 왼편의 짙은 갈색의 침대를 제외하고는 모든 부분은 상당히 밝은 색조를 이루고 있다. 그 한 가운데 이불보와 함께 침대에서 바닥으로 미끄러진 한 여성이 있다.

그녀는 상의만 걸치고 하의는 벗은 모습이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숙이고 있어 얼굴은 윤곽만 보이지만 오뚝한 콧날이 인상적이다. 얼굴은 검게 칠해져 마치 뒤로 묶은 머리카락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녀는 무언가 충격을 받았으며, 그 앞에서 무기력하게 내팽개친 모습이다.

 

4)

대체 이 여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꿈을 꾸다가 침대에서 떨어진 듯하다 볼 수도 있는데 상의를 걸치고 있다는 것이 그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군가 그녀를 덮친 이후 갑작스럽게 떠난 것인가? 검은 얼굴은 그렇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침대를 제외한 나머지 밝은 색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제목은 ‘여름 실내’인데, 이 제목으로 보면 호퍼의 삶에서 여름에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은 호퍼가 실연 이후의 심정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기 호퍼는 독일에서 온 한 여성을 사귄 것으로 알려진다. 호퍼는 그녀에게 상당한 애착을 느낀 듯한데, 그녀는 호퍼에게 깊은 감정은 없었고, 그러기에 쉽게 떠나고 말았다. 한 두 번 편지 교환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더 이상 관계는 발전하지 않았다.

이런 배경에서 그림을 보면, 그림에서 미끌어진 여성은 호퍼 자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호퍼는 독일계 여성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무기력하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 아닐까? 호퍼가 육체적으로 무기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호퍼의 무기력은 호퍼에게 여성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심적으로 억압하는 기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기 그는 상당기간 극복할 수 없는 무기력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그의 친구 Walter 는 말한다. 

“[그는] 며칠 동안 이젤 앞에 앉아서 불행감을 느끼며 손가락을 들어 주문을 깰 수도 없는 상태에서 살았다”

 

5)

여기서 호퍼의 욕망 구조를 추측해 보자. 호퍼는 청교도 가정에서 심적 억압을 느꼈다. 그것은 거꾸로 그만큼 그의 마음의 표면 아래서 실재의 욕망이 일렁거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시절만해도 그의 의식계는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하면서 어둡기는 했지만 그래도 평온한 상태였다.  파리 시절 호퍼가 앞에서 말한 연애에 빠졌을 때, 그의 욕망 구조는 가장 안정적이었다. 이때 경쾌하고 밝은 그림이 그려졌다.

그러나 호퍼의 실연은 그에게 심적인 충격을 주었고 그 때문에 그럭저럭 유지되어온 그의 상징세계는 균열하면서 이런 균열의 틈 속으로 마그마와 같은 욕망, 실재에 대한 욕망이 분출하기 시작했다. 분출하는 실재에 대한 욕망 앞에서 그가 취한 태도가 곧 상상적인 동일화이다. 1925년 그려진 ‘철로 가의 집’에서 기괴할 정도로 솟아 있는 망사르 집이 실재에 대한 욕망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1927년 ‘등대 언덕’에서 그려진 솟구친 등대는 상상적 동일화를 의미한다.

그의 욕망 구조가 상상적 동일화 단계로 진입하는 시기 1924년 호퍼는 조와 결혼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이미 42살이고 동갑이니 호퍼보다 조가 상당히 늦은 나이에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호퍼와 조의 관계는 욕망 구조의 측면에서 본다면 부부의 욕망 관계로 받아들이기에는 석연하지 않는 점이 눈에 뜨인다. .

 

6)

호퍼와 아내의 관계를 아주 잘 보여주는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은 호퍼의 친구인 사진가가 1960년에 찍은 사진이다. 이 집은 호퍼가 바닷가 South Truro에 그가 직접 지은 집이다. 이 사진에서 호퍼는 무척이나 확대되어 있고 반면 조의 모습은 뒤쪽에 아주 조그마한 크기로 등장한다. 마치 그의 등대 그림에서처럼 거대한 조는 위압적이다.

이 그림을 보면 호퍼는 마치 압도적인 가부장적 존재이고 반면 조는 그에 종속되어 존재감 자체가 희미하게 보인다. 하지만 이 사진의 진정한 의미는 멀리 떨어져 있는 조가 뒤에서 아이와 같은 호퍼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호퍼는 아이와 같고, 조를 어머니처럼 따른다. 조가 없으면 호퍼는 짜증을 내면서 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호퍼는 사춘기 소년이 항상 그렇듯이 자기 자신을 압도적 힘을 지닌 존재로 확신한다. 하지만 그의 확신은 그의 배후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니, 이 관계를 라캉적인 용어로 설명하자면, 곧 상상적인 동일화의 심적 구조에 속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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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퍼와 정신분석 4 – ‘등대’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호퍼와 정신분석 4 – ‘등대’

 

1)

호퍼가 망사르 지붕을 한 집을 그렸던 것은 대개 1920년대 후반이다. 이 시기 호퍼의 그림 가운데 우리의 눈을 또 한 번 끌어당기는 그림이 있다. 그것은 등대 그림이다. 이 등대는 호퍼가 자주 여행을 갔던 메인주 바닷가에 세워진 등대이다. 이 등대는 언덕 위에 세워져 있어(등대의 뒷면은 절벽이다), 호퍼는 대체로 아래에서 언덕 위를 쳐다보는 시각에서 등대를 그렸다. 이렇게 등대를 그린 그림 가운데 온라인에 소개된 것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니, 거의 광적인 집착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1927년 그려진 ‘등대 언덕(Ligthouse Hill)’의 경우, 등대로 올라가는 언덕은 왼쪽 위에서 햇빛을 받아 명암이 마치 파도처럼 일렁거린다. 이런 일렁거리는 파도가 화면의 아래쪽 반을 차지하고, 그 위에 투명한 푸른 창공을 배경으로 등대지기가 사는 집과 등대가 나란히 서 있다.

 

집의 어두운 그림자가 진 박공 면이 등대를 마주보고 있다. 집은 좀 축소된 듯하며, 등대의 밝게 햇빛을 받는 측면이 집에 마주 서 있는데, 이 등대는 상당히 우람하다는 느낌을 준다. 등대의 위쪽 창문이 닫혀 등대 불빛은 보이지 않지만 불빛을 암시하는 듯 노란색이다. 등대지기의 집과 등대는 약간 떨어져 있지만, 마치 다정한 관계이듯 언덕 위에 서 있다.

 

2)

1929년 그려진 ‘the lighthouse at two lights’(두 개의 빛에 비친 등대, 그림에서 하나의 빛은 햇빛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등대 불빛으로 생각된다.)에서 호퍼는 앞의 등대 그림과 마찬가지로 밑에서 언덕 위의 등대 집과 등대를 쳐다본다.

 

쳐다보는 방향은 앞의 그림과는 반대방향이다. 햇빛도 이번에는 석양인데, 화면의 오른쪽에서 들어오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명확한 명암을 등대와 집에 만들고 있지만, 이 그림에서는 일렁거리는 파도와 같은 언덕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또 석양인지라 붉은 색조가 전체, 심지어 푸른 하늘조차 감돌고 있다.

 

멀리 마치 망원경으로 본 듯, 중간의 언덕 부분은 잘려져 있다. 그러므로 이 그림은 등대와 등대지기의 집만이 클로즈업된 셈인데, 앞의 그림에서 등대와 집이 균형을 이루었던 것과 달리, 이 그림에서는 등대가 창공으로 상당히 빠른 속도로 치솟아 오른다. 반면 집은 마치 내려 앉은 듯하다.  등대에서는 위압감조차 느껴진다.

 

3)

두 그림에서 정도는 다르지만 시각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아무래도 등대로 보인다. 호퍼는 등대를 우람하게 위로 치솟는 방향으로 그렸다. 누구 보기에도 등대의 우람함에 충격을 받을 것이다. 정신분석학적 눈으로 본다면 우람하거나 위압적인 등대는 거대한 팔루스를 상징한다는 것을 쉽게 이해하리라.

 

등대 그림은 망사르 지붕을 한 집 그림과 대비된다. 앞에서 망사르 집은 호퍼에게 실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앞의 그림에서 실재로 다가가는 길은 점차 차단되면서 실재가 불러내는 매혹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렇다면 등대 그림에서 팔루스가 거대해진 것은 실재로 다가가려는 호퍼의 욕망이 차단되어 있다는 것에 반비례하는 것이 아닐까?

 

거대한 팔루스는 호퍼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하는데 라캉은 이런 동일시를 상상계적인 욕망으로 설명한다. 그의 거대함의 진실은 실재로 가는 길의 불가능성이니, 상상계적인 동일시를 통해 호퍼는 이 차단된 길을 넘어 가고 있다.

등대 그림에서 호퍼의 욕망은 마치 퀸스보로우 다리에서 과도적으로 보이는 다리의 모습처럼 과잉적이다. 그것은 실재에 가 닿기보다는 실재를 지나치며, 그러기에 다시 돌아와 새로이 실재에 다가간다. 호퍼는 실재에 다가는 새로운 길을 바로 이런 상상계적인 동일시, 거대한 팔루스를 통해 발견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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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퍼와 정신분석 3 – ‘망사르 지붕’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호퍼와 정신분석 3 – ‘망사르 지붕’

 

1)

앞에서 호퍼의 그림에 나오는 다리를 살펴보았다. 호퍼의 다리는 결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호퍼에게 이 다리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것이다. 다리는 어디론가 건너가는 것이며, 그곳으로 향하기 위해 죽음과 같은 강물을 건너가야 한다.

 

그런데 이 다리는 어디로 건너가는 것일까? 그림에서 호퍼가 다리를 건너 이르는 곳은 다름 아닌 집이다. 1909년의 ‘왕궁 다리’나, 1913년 ‘퀸스보로우 다리’에서 보이듯이 그 집은 주로 망사르 지붕을 한 집으로 나타난다.

 

2)

망사르 지붕이란 17세기 프랑스 바로크 양식을 대표하는 지붕이다. 이 망사르 지붕은 19세기 말 부활하여, 제국주의 양식의 일부가 되어, 이 시기 상류층의 저택이나 호텔에서 차용되었다. 아마도 미국에서도 시골 농장주나 도시 부르주아의 저택이 주로 이런 망사르 지붕을 하였던 모양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망사르 주택은 주변의 환경으로부터 고립적으로 존재하면서, 한 두 창문을 제외하고는 굳게 닫혀 있어서, 매우 침울한 모습을 하고 있다. 1909년 ‘왕궁 다리’ 그림이 그려질 시기만 해도, 이 왕궁으로 가는 다리는 안정적으로 펼쳐져 있었다. 1913년 ‘퀸스보로우 다리’는 이 주택으로 접근하지만 그 힘은 너무 과도하여 이미 지나친다.

 

20년대 이르면 이제 이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냉혹하게 차단되고 마니, 이 시기 이후 집은 주변의 환경으로부터도 고립되면서 마치 꿈 속에서나 나타날 것 같은 환상적인 모습을 취하게 된다.  1925년 그려진 ‘철로 가의 집’을 보자.

 

이 그림에서 화면의 하단을 가로지르며 녹슨 철로와 둔덕이 지나가면서 그 너머에 있는 집으로 접근하는 것을 차단한다. 그 너머 망사르 지붕을 주택은 시각적으로 약간 왜곡되어 있다. 전체의 왼편보다 오른쪽 편이 약간 확장, 돌출하여 있다. 시선이 오른쪽 위쪽에 놓여 있는 듯한데, 반면 햇빛이 그림의 왼쪽으로 들어오면서, 시선의 방향과 충돌한다.

 

창문은 모두 닫혀 있고, 이층의 햇빛을 받는 쪽의 창문 하나가 반쯤 열려 있다. 전체적으로 녹슨 철로의 붉은 색과 대조되는 망사르 지붕의 짙은 녹색은 황량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집은 아마 현실 속에 실제로 있는 집 같지 않다. 주택의 이런 왜곡된 모습은 어쩌면 환상 속에 있는 듯하다.

 

3)

1927년 그려진 ‘도시’라는 그림에서 화면의 오른쪽 반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망사르 지붕을 한 호텔이다. 이 호텔은 실제 크기보다 더 크게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림의 왼편 아래쪽에는 텅 빈 광장이 있고 행인의 모습은 지극히 축소되어 점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림의 왼편 위쪽에는 1950년대 세워졌을 법한 빌딩, 수평적인 빌딩과 수직적인 빌딩이 교차한다. 이런 빌딩은 오른쪽의 호텔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보인다.

 

빌딩이나 망사르 호텔의 어느 창문도 검고 닫혀 있어 그 안을 볼 수 없다. 다만 호텔의 2층 시선이 가는 바로 앞의 창문은 전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밝은 색으로 차양이 내려져 있다. 이 부분을 제외하면 그림의 전체 색조는 대체로 우중충하게 탈색된 듯하여 전체적으로 황량한 느낌을 준다.

 

호퍼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이런 망사르 주택(저택이나 호텔)은 다리와 마찬가지로 형태상 아름다움의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호퍼가 여러 번 반복하여 이런 집을 그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집은 아마도 사회적 관점에서도 해석할 수 있겠다. 망사르 지붕의 집은 아마도 미국 시골의 농장주나 도시의 중소 부르주아의 저택이었을 것이다. 이 시기 미국이 급속하게 자본주의화하면서, 과거 농장주와 중소 부르주아는 몰락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니, 호퍼에게 아마도 향수를 불러일으켰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호퍼 그림 전체에서 목가적인 향수가 주제로 된 적은 없으니, 이런 사회적 관점도 적절한 해석이 되지는 못한다.

 

이 집이 호퍼에게 지닌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호퍼의 그림에 접근하는 통로를 마련해 줄 것으로 보이는데, 그 단서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에게 하나의 힌트가 주어져 있다. 그것은 히치코의 영화 사이코이다.

 

그의 영화에도 망사르 지붕을 한 주택이 출현한다. 언덕 위에 고립적으로 솟아 있는데, 이 집은 아래쪽 모텔의 주인인 남자가 살고 있는 집이다.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이 집의 비밀을 폭로한다. 남자는 자기 어머니를 살해하고 그 유골을 지하실에 보존한다. 그리고 그 일정한 때가 되면 스스로 자기 어머니로 변신한다. 그 때란 곧 그가 외부의 다른 여자에게 욕망을 느낄 때이다. 그는 자신이 욕망을 느낀 여자를 어머니의 이름으로 살해한다.

 

영화에서 히치코크는 실재계에 사로잡혀 있는 주인공 남자의 심리를 표현하기 위해 망사르 지붕을 한 고립된 주택을 내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망사르 지붕의 집이 호퍼를 사로잡았던 이유도 바로 이런 실재에의 고착이 아니었을까?

 

3)

집이 어머니를 상징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된다. 집은 고향이며, 어머니이고 유년의 시절이고 자궁이다. 그렇다면 호퍼도 이런 망사르 지붕을 한 부르주아 또는 농장주의 저택에 살았을까? 그렇지는 않다.

 

호퍼의 부모는 중산층이고,  독실한 청교도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다. 실제 호퍼가 살았던 집은 그의 그림 ‘퓨리턴’에 나오는 것과 같은 집이다. 단순한 맞배 지붕으로 이루어지고 백색의 나무 판넬로 지어진 집이다. 그런데도 호퍼가 이렇게 망사르 지붕을 한 집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망사르 집의 특징은 아무래도 지붕 밑 다락방에 있을 것이다. 약간 상상해 보자. 내가 어릴 때 살았던 집은 단층 기와집이었다. 부엌의 위쪽에는 다락이 있었다. 안방에서 다락으로 들어가는 구조였지만, 나는 학교 시절 자주 책을 들고 혼자 다락방에 올라 책을 읽었다. 주로 소설책이었다.

 

그렇게 다락방에 머무르는 시간은 어머니의 자궁에 들어 있는 것과 같은 고요함과 아늑함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런 기억을 생각해 보면, 망사르 지붕을 한 집에 호퍼가 심리적으로 꽂힌 이유도 짐작되지 않을까?

 

망사르 지붕을 한 고립된 집은 호퍼에게는 곧 실재이다. 그는 이런 실재계의 흔적을 전반적으로 황량하게 보이는 집에 암시했다. 그것은 유독 눈길을 끌도록 하는 붉은 색 굴뚝이나 밝은 색깔의 차양이다. 호퍼는 때로는 과잉적으로 지나치기도 하고, 때로는 차단되어 다가가지 못한다. 이 집은 끊임없이 호퍼를 매혹하며, 차단된 저 너머에서 그에게 손짓한다.  호퍼의 의식이 접근하지만 끝내 접근하지 못하는 그것은 즉 실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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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퍼와 정신분석 2 – ‘다리’ [흐린 창가에서 – 이병창의 문화 비평]

호퍼와 정신분석 2 – ‘다리’

 

1)

시기적으로 볼 때 1906년 호퍼가 뉴욕 미술학교를 졸업한 이후, 1924년 호퍼가 상업적 삽화가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그림에 전념할 때까지 흔히 호퍼의 독창적인 그림이 형성되는 준비 기간으로 간주된다.

 

이 시기 초반 1906년부터 1911년까지 세 차례 프랑스에 건너갔는데 그때마다 오래 머무른 것은 아니며 당시 파리에 모여든 예술가들과 다양하게 교제했던 것도 아니지만, 이 시기를 그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모더니즘의 예술에 상당히 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이 시기에 남겨진 그림에는 밝고 경쾌한 색깔이 주조를 이루고 사물의 형태는 흔들리면서 순간적이며 자유로운 붓질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1911년 이후 미국 뉴욕에 거주하면서 한편으로 그는 삽화가로서 밥벌이를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독창적인 그림에 이르기 위하여 분투하였다. 그의 그림은 곧 어둡고 무거운 색깔이 짙게 깔리고 사물의 형태는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이제 그의 그림에서 붓질의 흔적이 거의 발견될 수 없는 정도에 이른다.

 

호퍼는 이와 같이 인상파적인 그림 기법을 벗어나면서 자신의 독창성에 이르게 되지만 그런데도 이 파리 시기부터 호퍼가 관심을 가지는 그림의 소재는 다른 유럽 모더니스트 화가와는 단적으로 구별된다.

 

2)

호퍼가 이 시기부터 상당기간 지속적으로 관심을 지녔던 소재 중의 하나가 ‘다리’이다. 그는 파리의 세느강을 가로지르는 여러 다리를 그렸을 뿐만 아니라(대표적으로’파리의 다리’1906 ‘왕궁 다리’1909), 미국에 건너와서도 대표적으로 ‘퀸스보로우 다리’(1913)를 그렸으며, 다리에 대한 그의 집착은 심지어 1946년 그린 ‘도시로 다가가면서’라는 그림에서도 남아 있다.

 

그 중 우리의 시선을 일차적으로 끄는 것은 파리의 다리(1906년)이다. ‘파리의 다리’는 파리에 처음 도착한 직후에 그린 것이어서 아직 프랑스적 영향이 보이지 않는다. 이 그림에서 색깔은 호퍼의 초창기 그림에서 나오는 짙고 어두운 색이며, 우람한 다리의 교각과 강변의 산책로만 보인다.

 

왼쪽 끝에는 두 그루의 튼실한 나무 그루터기가 보이며 다리 밑을 흐르는 강물이 오른쪽에 조금 눈에 뜨인다. 그림을 가득 채운 것은 아치형 다리이다. 다리 밑은 어둠이 깔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산책로 난간과 교각 아래 부분만이 빛을 받아 반짝인다.

 

이 그림에서 다리의 형태적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시도는 헛된 것일 것이다. 호퍼는 이 다리를 어떤 이유로 그렸던 것일까? 이상하게도 전체와 어울리지 않은 붉은 색 원반의 도로 표지가 다리 교각을 향한 왼쪽 시선을 가로막는다. 이런 표지판이 다리 아래 산책로에 서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아마 이 표지판은 호퍼가 환상을 통해 그림 속에 집어넣은 것이 틀림없다.

 

붉은 표지판은 통과를 금지하는 신호이니, 그것은 무언가 접근하는 것을 금지하는 듯하다. 다리 자체가 접근을 금지하는 것일 수는 없다. 다리는 어딘가로 건너가는 것이니, 그렇다면 이 표지판이 금지하는 것은 바로 이 다리가 건너가는 그곳을 의미하지 않을까? 그런데 1906년의 이 다리 그림에서는 이 다리가 어디로 건너가는 것인지를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3)

이런 의문 때문에 우리는 다리를 그린 다른 호퍼의 그림도 심상치 않은 눈으로 보게 된다. 파리 시기 호퍼는 여러 다리 그림을 그렸다. 아마도 파리의 다리란 다리는 모두 그린 것이 아닐까 싶은데, 그 가운데 하나 1909년 왕궁다리를 보자. 그림 ‘왕궁 다리’는 왕궁(과거 불탄 왕궁의 남은 부분인데, 지금은 김나지움 건물로 쓰인다)과 이어지는 다리이다. 앞의 두 다리와는 달리 전반적으로 인상주의적인 색갈이나 붓질이 지배적이지만 여기에서조차 다리 자체는 그렇게 흥분할 만한 심미적 아름다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왼쪽의 다리는 오른쪽에 솟아있는 왕궁과 대조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왕궁의 압도적인 무게를 고려하자면, 구도상 다리가 주는 무게는 상당히 약하다. 그래도 이 그림에서 다리는 오른 편으로 약간 기울어져 약간의 속도감을 느낄 수 있다. 그림의 하단은 세느 강물이 흐르고 있다. 강물은 색깔이나 형태에서 생동감을 주기보다는 조용하다. 심연처럼 시퍼렇지도 않고 상당히 흐리지만 밝은 색이다. 다리는 이런 강물을 왕궁으로 간다.

 

3)

‘왕궁 다리’에서 보이는 안정된 구도는 ‘퀸스보로의 다리’에 이르면 전혀 달라진다. 아직 약간의 인상주의적 화풍이 남아 있고, 더구나 전체 구성은 ‘왕궁 다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왼편의 다리와 오른편의 집이 그림의 중심을 차지한다. 그 하단에는 강물이 흐른다.

 

그런데 퀸스보로우 다리는 이 그림에서 거의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급속하게 기울어진 철교는 마치 그 위에서 기차가 굉음을 내며 달리는 듯하다. 그림의 하단에는 이제 그림과 평행하여 흐르는 강물이 보인다. 왕궁 다리에서 그려진 강물과 달리 이 그림에서 강물은 시커멓게 보이고, 일렁거림도 느려져서 죽음의 느낌이 든다.

 

반면 오른쪽 하단에는 마치 안개에 싸인 듯이 집이 몇 채 보인다. 앞에 있는 집(박공지붕)은 흐릿한 윤곽만 보이며 그 뒤에 있는 집(현대식빌딩)은 아예 형체 자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왕궁 다리’에서 왕궁의 상당히 안정된 모습에 비하면, 위축되고 불안정한 모습이다.

 

’왕궁 다리’와 ‘퀸스보로우 다리’를 비교해 보면, 전자가 안정된 느낌이라면 후자는 불안정하다. 압도적인 다리에 비해 다리가 다가가는 집은 너무 불안하다. 압도적인 다리는 거꾸로 흥분한 듯한 초조한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4)

이제 1946년 호퍼의 인생 말기에 그려진 다리를 보자.

이 그림에서 지하철 선로가 강물을 대신한다. 다리는 이 지하철 선로를 넘어가는 찻길로 보인다. 외편에 서 있던 집은 이제 늘어선 빌딩으로 바뀐다. 이 빌딩이나 다리 그리고 지하철, 다리를 이루는 벽 들은 지저분하고 누추하다. 창문이 닫혀 있고 단조로운 빌딩은 일단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는 느낌을 준다.

 

이 그림이 주는 느낌은 어쩌면 1906년 그려진 ‘파리의 다리’와 유사하다. 다만 ‘파리의 다리’가 육중한 다리를 강조한 것이라면 이 그림에서 강조되는 것은 늘어선 빌딩이다. 앞의 다리에는 접근 금지의 붉은 색 표지판이 붙어 있다. 뒤의 다리 밑은 죽음이 짙게 깔린 동굴과 같다.

 

다리 그림만 놓고 보면 호퍼는 파리 시절 잠깐 밝음과 가벼움, 안정감을 획득했으나 불안하고 흥분한 모습을 거쳐 다시 초기의 음울함으로 되돌아간 듯 보인다. 호퍼는 파리 시절 자신감을 가지고 다리를 건너 어떤 집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는 파리 이후 자신감을 잃은 듯하다. 처음 흥분한 듯하지만 곧 무기력하게 되며, 시퍼런 강물이나 차가운 지하철 선로에 의해 막혀 버린다. 호퍼의 자신감이 상실되면서 호퍼가 그린 집의 모습은 삭막한 빌딩의 모습으로 변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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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퍼와 정신분석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호퍼와 정신분석1-서론

 

1)

호퍼는 흔히 사실주의적 화가로 규정되어 왔다. 그의 그림은 고독한 현대인의 자화상(실비아 보르헤시)이라거나 미국 도시인의 초상화(슈미트)라 말해진다. 또는 그의 그림은 30년대 공황기를 그렸다고 한다.

 

이렇게 평가되는 이유는 누구나 그의 그림에서 쉽게 황량하고 소외되고 고독한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감정은 현대인이나 미국 도시인 그리고 공황기에서 지배적인 감정이었으니, 호퍼를 그렇게 평가하는 것도 일리는 있다.

 

이런 평가는 자주 호퍼 자신의 언급에서 확증을 얻기도 한다. 그는 1933년 현대 미술관 회고전에서 자신의 그림은 “자연에 관한 가장 내적인 인상을 전사한 것”이라고 했다.

 

2)

그러나 호퍼의 그림을 미국, 30년대, 현대 사회를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이라 보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등장한다. 무엇보다도 그의 그림에는 이 시대 등장한 독립성을 상실한 대중이나 풍요한 소비 사회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노동자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호퍼의 그림을 그의 시대를 반영하는 사실적인 그림으로만 본다면, 그는 이제는 상실한, 서부 개척 시대 목가적인 삶을 그리는 향수적 낭만주의 화가로 규정될 뿐이지만 그의 그림에서 아무도 이런 향수를 느끼지는 않는 것 같다.

 

그 때문에 그의 그림을 형이상학적 개념을 통해 해석하려는 시도가 등장했다. 그 대변자가 곧 렌너일 것이다. 그는 호퍼의 그림을 전반적으로 ‘문명과 자연의 대립’으로 규정한다. 호퍼의 그림 속에 나타나는 으스스할 정도로 무성한 숲과 그것에 대비되는 창문이 닫힌 집 사이의 대비를 본다면 그런 형이상학적 해석도 쉽게 받아들여진다.

 

호퍼의 그림에서 놓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의 그림이 가진 에로티시즘인데, 그의 그림을 이와 같이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서술할 때, 이런 에로티시즘을 설명하기 곤란하게 된다.

 

물론 원초적 욕망과 도덕적 억압 사이의 관계도 렌너가 말한 자연과 문명의 대립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의 예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그의 에로티시즘은 상당히 낭만주의적인 개념이 되는데, 이런 설명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그의 그림 어디에서도 원초적 욕망에 대한 찬가가 보여지기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의 그림 어디에서도 도덕적 억압에 대한 긍정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의 그림에서 자주 발견되는 것은 어떤 황량함과 무기력함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런 감정 때문에 그는 현대인을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평가를 받기는 하지만, 그런 황량함과 무기력감은 다르게 본다면 오히려 에로티시즘과 더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3)

여기서 욕망에 관한 라캉의 개념 틀을 검토해 보자. 라캉은 성적 욕망의 구조를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는데 신경증과 정신증 그리고 도착증이라는 유형이다. 그 가운데 정신증 개념 또는 실재계라는 개념은 충동을 억압하면서 이를 욕망을 통해 대체적으로 충족시키는 상징계의 와해에서 생겨난다.

 

상징계가 와해되면, 그의 욕망도 마치 바람 빠진 것처럼 빠져나가게 된다. 그의 욕망이 사라진 빈 자리를 이제 이드 즉 실재가 지배한다. 그는 실재에 고착된다. 그는 이 실재계로부터 탈출하여 욕망을 느끼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실재에 고착된 인물은 히치코크 감독의 영화 ‘사이코’에서도 등장한다. 사이코는 죽은 어머니 속에 갇혀 지내며 그가 어떤 외부의 여자에게 욕망을 느끼는 경우, 그 여성을 살해한다. 이와 같이 욕망을 상실한 실재계적인 인물은  크로넨버그의 영화 ‘스파이더’에서도 등장한다. 여기서 실재계에 갇힌 주인공의 모습은 문이 폐쇄되고 창문이 닫힌 건물의 모습으로 상징된다. 실재게를 탈출하려는 그는 망상을 통해 자기를 합리화한다. 즉 자기의 어머니는 자기 아버지의 손에 의해 이미 살해되었고 지금 있는 어머니는 아버지가 자주 가는 술집의 매춘녀일 뿐이라는 망상이다.   

호퍼에게서 등장하는 인간의 모습은 이렇게 극심한 망상에 시달리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폐쇄된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는 여기서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을 느끼면서도 끝내 무기력하게 머무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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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예술의 화해(2)-천명관의 소설 고래를 통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삶과 예술의 화해(2)

-천명관의 소설 고래를 통해

 

4)

금복은 후반부에 이르면 전반부와는 대립된 성격으로 변화한다. 그녀의 욕망은 이제 남성적 욕망의 형태를 띠며, 작가는 최후로는 금복이 남자로 바뀌는 것으로 설정한다. 금복은 이런 남성적 욕망에 토대를 두고 총명한 지혜를 이용하여 마침내 평대에 거대한 기업을 세운다.

 

금복은 노파의 국밥 집을 운영하다가 다방으로 바꾸어 커피를 팔게 되고 돈을 모았으나 강도에게 다 털린다. 그날 폭풍우가 치면서 국밥 집 지붕이 무너져 노파가 쓰지도 못하고 감추어놓은 돈 무더기가 쏟아진다. 그 중에는 남발안이라는 곳의 토지문서도 있었는데, 금복은 곧 남발안을 개발하기로 결심한다.

 

금복은 지식인 다운 모습을 지닌 ‘문’(이름이 아니라 성만 기록된다)을 데리고 남발안을 방문한다. 문이 이 땅의 진흙을 만져보고 이 진흙을 이용해 벽돌을 찍으면 되겠다고 말하자. 금복은 문에게 벽돌 개발 책임을 맡기고 뚝심을 부려가면서 가진 모든 돈을 투자하여 마침내 벽돌공장을 세운다. 여기서 나온 벽돌은 단단하고 아름다워 전국에 팔리고 곧 금복은 부자가 된다.

 

금복은 그녀가 과거에 만난 사람들을 불러모아 거대한 기업을 세운다. 그녀는 생선장수를 불러 평대에 운수업체를 세우며 그 정점에서 금복은 그녀의 거대한 꿈을 실현시킬 고래를 닮은 극장을 세우려 한다. 

 

작가는 이 고래 극장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한다. 작가는 금복의 고래에 대한 동경을 서술하면서 이 거대한 힘을 지닌 존재를 통해 금복은 그녀의 뒤를 쫓는 죽음을 극복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이런 고래를 획득할 수는 없다. 결국 극장이라는 환상적 예술의 형식을 통해 고래를 획득할 수밖에 없으니, 고래 극장이란 이런 점에서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고래극장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적 존재이며 따라서 허망한 존재를 말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고래극장은 다름 아닌 자본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자본은 죽음을 극복하는 힘을 가진 존재이지만, 그런 자본은 사실 축적한 순간 곧 무너지고 마는 허망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금복은 마침내 고래극장을 세움으로써 고래를 획득했다고 믿지만 사실 이 순간이 바로 그녀가 추구했던 거대한 욕망이 물거품으로 떨어지는 순간이다. 금복은 자신이 어릴 때 사귀었던 약장수를 불러 고래극장을 맡기고 자신은 어린 창녀인 수련의 몸을 탐닉한다. 하지만 약장수와 수련이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둘은 미리 돈을 빼돌린 다음 함께 도망치고 만다. 금복은 실의에 젖어 술에 취해 살다가 극장에 라이터를 던져(떨어트린 것이지만, 아마 던졌을 것 같다) 고래극장은 불타고 만다. 영화를 보던 관객 800명도 함께 죽는다.

 

금복의 몰락은 자본의 몰락이니, 자본의 사회과학적인 일반적 법칙이라 하겠다. 하지만 작가가 자본을 그려내는 방식에는 자본에 대한 사회과학적 파악과는 구분되는 독특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후일 자본가가 되는 금복이 전반부에서는 오히려 예술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작가는 금복이 기업을 세우고 마침내 고래 극장을 세우는 것을 죽음의 극복과 연관시킨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래 극장은 자본을 의미하면서도 동시에 예술을 의미한다. 이 경우 예술은 자본과 마찬가지로 허망한 꿈을 제공하는 사기 예술에 불과하다.

 

5)

그렇다면 진정한 예술은 어떤 것인가? 천명관의 입장은 앞에서 언급했던 토마스 만의 입장과 대척점에 놓여 있다. 토마스 만은 독일 낭만주의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기초하여, 예술을 죽음에 대한 동경, 몰락에의 의지를 통해 설명하려 했다. 그에게서는 몰락과 죽음이 곧 아름다움이니 그런 점에서 예술은 삶과 대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천명관은 토마스 만과 달리 예술을 오히려 죽음을 극복하는 진정한 의지로 설정한다. 작가는 예술의 꿈과 자본의 꿈이 어쩌면 동일한 바탕 위에 있는 것으로 상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본은 앞에서 금복의 삶을 통해 말했듯이 죽음을 극복하려는 의지에서 나온 것인데, 작가는 이 점에서 예술 또한 마찬가지로 보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자본이 죽음을 극복하는 데 실패했다는 판단 위에서 작가는 오히려 진정한 예술은 죽음을 극복하려는 의지, 삶의 의지를 지탱해주는 힘이라고 본다. 이런 판단을 통해서 이제 소설 3부에서 예술가로서 춘희의 삶이 시작된다. 작가에게 예술가는 병약한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거대한 몸집과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춘희의 모습이다.

 

춘희의 삶에서 보듯이 예술가는 마침내 예술에 도달하기까지 삶 속에서 끝없는 희생을 겪어야 한다. 마치 노파가 무심한 눈을 가진 반편이를 닮았다고 자기 딸을 애꾸로 만들었듯이 금복은 춘희를 태어났을 때부터 냉담하게 대한다. 춘희는 춘희가 걱정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몸집과 어마어마한 힘을 가졌지만 단순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결과인 듯 춘희는 말을 하지 못하며, 어머니 금복의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혀 온갖 수난을 당한다. 마침내 춘희는 남발안 벽돌공장으로 돌아와서 들판을 쏘다니며 짐승처럼 살아간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통뼈인 트럭 운전사의 아들을 만나 잠시 삶의 기쁨을 찾고 아이도 놓지만, 그는 춘희가 아이를 뱄을 때 자신의 자유가 얽매이는 것이 싫어 춘희를 버리고 떠난다. 춘희는 그가 떠난 겨울 차가운 눈 벌판에서 아이를 먹이려 애쓰다가 잠이 들고 아이도 얼어 죽게 된다. 깨어난 춘희의 온몸에서는 새로 탄생하는 예술의 힘인 듯 울음이 터진다. 말 못했던 자폐아 춘희가 드디어 예술적 소통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다. 이미 감옥을 나왔을 때 노파의 두부를 먹으며, 춘희는 수난을 일차 마치지만, 자신이 낳은 아이의 죽음으로써 춘희는 예술적 단련의 문을 통과하게 된다. 

 

마치 예수 수난사를 연상시키는 이런 춘희의 삶(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설정이 더욱 그렇게 보이게 한다) 가운데 그녀에게 내재하던 교감의 능력이 싹이 트고 자라나며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며 그 거대한 몸집과 어마어마한 힘으로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든다.

 

벽돌을 만드는 것은 금복과 춘희가 동일하지만 금복은 그것으로 허망한 부를 쌓으려 했던 반면 춘희는 삶을 기억하기 위해 만든다. 춘희는 무상의 예술로서 벽돌을 남발안 벌판에 쌓아놓고 죽는다. 그러나 예술로서 벽돌은 살아서 춘희의 죽음을 넘어선다. 그리고 마침내 그 벽돌로 대극장이 완성된다. 그것은 고래극장과 같은 극장이지만, 이제 의미는 달리 한다. 고래극장이 헛된 꿈을 부풀리는 가상의 세계라면 대극장은 삶의 버팀목이 되는 예술이다.

 

6)

전체적으로 볼 때 삶과 예술의 대립을 그린다는 점에서 천명관 작가는 토마스 만과 마찬가지 예술의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토마스 만이 삶과 예술을 극명하게 대립시켰던 것과 달리 천명관은 삶과 예술의 화해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미 삶을 대변하는 자본가 금복에서도 내재적으로는 예술적 능력이 감추어져 있다. 다만 금복의 예술은 허망한 꿈으로서 예술이니, 그것은 자본과 동일한 속성이 된다. 거꾸로 춘희는 예술의 원리를 대변하지만 그의 예술은 죽음에의 동경으로서 예술이 아니라, 삶에의 의지로서 예술이니, 예술은 고통과 희생을 딛고 출현하며 삶을 견디고 이끌어가는 힘이 된다.

 

삶과 예술의 화해(1)-천명관의 소설 고래를 통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삶과 예술의 화해(1)

-천명관의 소설 고래를 통해

 

1)

삶과 예술은 여러 면에서 대립한다. 삶은 현실의 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으나 예술은 현실 너머에 있는 영원을 향한다. 삶은 실재적인 것이 아니면 충족될 수 없지만 예술은 가상적인 수단을 통해 목적에 이른다. 삶은 지루한 일상을 통해 강건함을 유지하지만 예술은 아름다움에 대한 도취 속에 생명을 갉아 먹는다.

 

삶과 예술의 대립을 해결하고자 지금껏 많은 철학적 사유가 등장했으며 예술가는 이 문제를 자신의 방법으로 풀어나가려 했다. 치열하게 이 문제와 맞싸웠던 예술가 중 대표자는 토마스 만일 것이다. 그의 청년기, 노벨상 수상 작품인 붓덴부르크 일가는 상인으로부터 시작한 독일 자본가의 4대에 걸친 성공과 몰락을 그리고 있다.

 

4대의 흥망에서 결정적 전환점은 붓덴부르크 가문의 3대 수장 토마스이다. 왕성한 자본가이었고 마침내 정치적 권력도 획득한 아버지와 예술가적 기질을 지닌 아름다운 어머니 사이에 그는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젊었을 때 예술에 심취했으나 책임감 때문에 아버지가 남긴 기업을 이어받는다. 그는 투철한 책임감으로 기업을 발전시키지만, 그의 내면에는 예술에 대한 동경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 때문인지 그는 병약한 예술가의 모습을 가진 여성 게르다와 결혼한다. 이미 토마스 시대 말기에 그의 기업은 몰락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태어난 4대 하노는 마침내 음악에 대한 동경에 빠져 조상이 대대로 물려준 기업이 몰락하는 것을 방관하고 만다.

 

2)

천명관의 소설 고래도 토마스 만과 마찬가지로 삶과 예술의 대결을 그려내고 있다. 물론 그는 토마스 만과는 삶과 예술의 대립보다는 삶과 예술의 화해 가능성을 그려낸다. 이 소설 역시 3대에 걸쳐 전개되는데, 주요 무대는 평대라는 산골이다. 이곳은 기차가 지나가는 평범한 산골 마을이었으나, 주인공 금복이 세운 벽돌공장 때문에 개발 붐이 일어났던 곳이다.

 

작가는 3대에 걸친 인간의 운명을 그려내기 위해 시공간을 자유롭게 오가는 화자가 되어, 마치 초기 영화의 변사처럼 주인공의 운명을 슬퍼하기도 하고 나름대로 해설하기도 한다. 그런 가운데 작가는 서사시적 특징을 지닌 소설 속에 다양한 장르로부터 빌어온 장치를 끌어넣는다. 그는 환상과 캐리커처, 풍자를 비벼 주인공의 운명을 조탁해 낸다.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은 어쩌면 모두 아이러니한 인물이다. 그들은 각기 내면 속에 자기와 대립하는 원리를 가지고 있어서 스스로 몰락하고 말며, 전체적으로 모든 인물은 자가당착적이다.

 

주인공 1대가 노파라면 2대는 금복이다. 마지막 3대가 춘희이다. 이들 사이에는 엄격하게 핏줄이 흐르는 것은 아니다. 금복은 노파가 운영했던 국밥 집을 이어받았는데 폭풍우가 몰아 지던 날 노파가 감추어 놓고 죽은 돈을 발견하고 이 돈을 바탕으로 거대한 기업을 세운다. 벽돌공장을 비롯해 운수업체 그리고 마침내 고래극장이라는 거대한 건물은 그녀가 집념으로 이룬 산물이다. 춘희는 금복의 딸이지만, 금복이 거지가 되어 전국을 유랑할 때 우연히 낳은 딸일 뿐이다. 그런데 금복은 춘희가 4년 전에 죽은 자신의 연인 걱정을 닮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춘희를 걱정의 딸로 간주한다.

 

이들 3대는 어떻게 보면 한국자본주의 발전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작가는 시대 배경을 알아볼 수 없도록 제거해 버리는데, 한국 자본주의의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이 한국 자본주의의 서사시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3)

1대 노파는 박색이며 가난한 천민이다. 그러나 그녀는 왕성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양반 가 막내 아들인 반편이와 관계하다가 두들겨 맞고 쫓겨난다. 그녀는 반편이를 꾀어내어 물에 빠트려 죽이고 도망해, 철도 건설 공사가 한창 이던 시기 평대에 국밥 집을 차려 돈을 모은다. 그녀는 기어 다니면서도 악착같이 돈을 모아 지붕 밑에 감추어 둔다. 노파의 이런 모습은 마치 민중에서 나온 초기 자본가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고 볼 수 있겠다. 노파는 삶의 원리를 대변한다. 

 

그러나 삶의 원리를 대변하는 노파의 몸 속에 이미 이에 대립하는 예술의 원리가 싹트고 있었으니 그것이 곧 애꾸이다. 노파가 반편이와 관계하여 낳은 딸이 애꾸인데, 노파는 딸의 눈이 자신이 죽인 반편이의 무심한 눈을 닮을 것을 보고 죄의식 때문에 부지깽이로 딸의 논을 찔러 애꾸로 만들고 딸을 산 속에 사는 벌치기에게 꿀벌 2통에 팔아버린다. 애꾸는 아이러니하게도 한편으로는 노파의 돈을 훔치려다 결국 노파를 죽이게 만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벌치기로부터 벌과 교감하는 법을 배운다. 무심한 눈, 자연과의 교감은 후일 예술가가 되는 춘희를 연상시킨다.

 

3)

소설의 중심은 금복이다. 작가는 금복의 삶을 전반부(1부의 이야기)와 후반부(2부의 이야기)로 구분한다. 전반부에서 금복은 세상의 물정을 파악하는 총명한 자질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또한 불타는 내적 욕망(작품 속에는 ‘바람’으로 상징된다)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어머니가 죽은 이후 자신을 향하는 아버지의 욕정을 피해, 생선장수와 도망쳐 항구에 이른다. 거기서 그녀는 천부의 총명함으로 생선장수를 도와 덕장을 운영하다가, 걱정을 만난다. 걱정은 거대한 몸집과 어마어마한 힘을 지니고 있으나 단순하여 세상의 흐름을 알지 못하는 남자이다. 금복은 걱정을 사랑하여 생선장수를 버리고 걱정과 살림을 차리지만, 금복 자신이 예감한 대로 걱정은 단순성에서 나오는 만용으로 폭풍우 속에 굴러 떨어지는 통나무를 막다가 다친다.

 

춘희는 걱정을 보살피는 가운데, 칼잡이를 만난다. 칼잡이는 세상의 온갖 나쁜 짓을 다하는 깡패 두목이지만, 그 모든 것은 자신이 사랑했던 한 여자 기생인 나오꼬를 위한 것이다. 칼잡이는 자신의 손가락 6개를 바치고 나오꼬를 품에 안지만, 아침에 그가 발견한 것은 그를 기다리다 이미 나이 들어 노파가 된 여자였다. 칼잡이는 자신의 욕망이 허망했다는 것을 깨닫고 평생 다시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기로 했으나 나오꼬를 닮은 금복을 보자, 사랑에 빠진다.

 

결국 걱정을 사랑하는 금복은 그녀를 사랑하는 칼잡이와 함께 살기로 한다. 하지만 어느 날 걱정은 금복이 칼잡이와 관계하는 것을 보고, 집을 떠나 바다에 빠져 죽는다. 칼잡이는 걱정을 붙잡으러 따라 나섰으나 금복은 칼잡이가 걱정을 살해해 바다에 던진 것으로 생각하고 칼잡이를 등 뒤에서 작살로 찔러 죽인다.

 

이렇게 해서 전반부는 끝난다. 금복은 걱정을 상실한 절망과 칼잡이를 죽인 죄책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거지가 되어 전국을 유랑하다가 어느 마구간에서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른 아이를 낳는 중에 쌍둥이 자매에 의해 구원받으면서 전반부가 끝난다.

 

전반부에서 나타난 금복의 모습 속에는 아직 후일 대기업을 일으키는 자본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금복의 모습은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인데, 그녀가 감추고 있는 거대한 욕망의 모습은 걱정을 사랑하는 모습에서나 칼잡이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모습에서 보듯이 남성적 욕망과 대립하는 여성적 욕망의 형태이다. 작가는 그 때문에 금복에게 남자를 홀리는 냄새가 들어있다고 서술한다. 여성적 욕망의 형태는 자주 예술적 기질의 원천으로 설명되는데 이런 점에서 금복의 전반부에서 모습은 예술가적 기질을 보여준다고도 하겠다.

나의 철학일지(7)[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나의 철학일지(7)

1)

앞에서 박사학위 논문에 관해 이야기했다. 내가 재직했던 학교에서 승진의 조건으로 요구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했던 짓이기는 하지만, 철학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한번 정리해보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그 생각이란 곧 당시 유행하던 구조주의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내가 박사 논문의 주제로 헤겔 책 가운데 정신현상학을 택했던 것은 정신현상학의 서론(Einleitung]에 나오는 회의의 길이라는 개념 때문이었다. 나는 이 개념이야 말로 구조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단서를 제공해 줄 것이라는 믿었다.

헤겔은 회의의 길을 설명하면서, 물 자체란 의식 자체를 넘어서 있기에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물 자체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의식에 대해서 나타나는 물 자체일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만일 그런 특정한 의식을 넘어선다면, 그 의식에 대해 물 자체로 나타난 것조차, 넘어서게 되며, 이제 새로운 의식에서는 과거 물 자체로 여겨진 것조차 하나의 계기로 포괄될 수 있다고 하였다.

어떤 의식이 물 자체에 부딪혔을 때, 그것이 모순적인 경험이다. 왜냐하면, 그때 부딪히는 물 자체는 그런 특정 의식에서는 이렇게 규정할 수도 없고 그 반대로 규정할 수 없는 것 즉 이율배반이나 딜레마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의식에 나타나는 모순 경험은 실재 즉 물 자체에 대해 의식이 부딪히는 원초적인 경험이다.

헤겔은 이런 원초적인 모순 경험을 통해 의식은 새로운 형태의 의식으로 역사적으로 발전하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모순을 통해 나가는 길을 헤겔은 서론에서 ‘회의의 길’이라고 불렀으며, 이런 회의를 두려워하는 것은 오히려 진리를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만일 정신현상학이 이렇게 모순을 통해 나가는 회의의 길이라고 한다면, 이 길은 개별적인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나가는 길이며, 영원히 최종 지점에 도달하지 못하는 열린 길이 아닐 수 없다.

2)

내가 논문에서 추구했던 것은 모순을 통해 나가는 회의의 길이 실제로 정신현상학에서 발견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나는 헤겔 정신현상학을 처음부터 샅샅이 읽어 나가면서, 과연 모순의 경험이 어떻게 의식의 발전에 기여하는가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기쁘게도 나는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이 발전하는 변곡점마다 다양한 형태의 모순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모순은 다양한 모습으로 감추어져 있었는데, 이율배반이나 딜레마는 물론이며, 계몽주의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절대적 자유의 공포’나, 칸트 비판에서 나오는 ‘전치’, 또 낭만주의 비판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영혼’조차 모순 개념의 변장된 구체적인 형태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물론 박사학위 논문 자체에서 구조주의 한계를 거론한 것은 아니었다. 박사학위 논문은 그저 정신현상학에서 회의의 길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회의의 길이 확립된다면, 이것을 통해 구조주의가 극복될 길이 열릴 것으로 기대했다. 또한 나는 내가 발견한 바로 이 길이 마르크스가 주장한 유물론적 변증법의 길을 말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박사학위 논문을 심사받는 과정 중에 나의 이런 기대는 심사위원들이 가지고 있는 헤겔에 대한 선입견과 정면으로 충돌되었다. 일반적으로 헤겔의 변증법적 발전은 개념이 자기를 대상화하며 다시 자기 내로 복귀하면서 전개하는 길이었다. 이 때문에 헤겔의 변증법은 일반적인 것에서 개별적인 것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이며, 당연히 이런 길은 마침내 자기 자신에 도달하면서 끝나게 되는 폐쇄된 길이었다.

사실 정신현상학 서문에 나오는 여러 가지 표현들은 이런 관념론적 해석의 길을 확인해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심사위원들에게 이런 서문에 나오는 길 즉 관념 변증법의 길은 논리학과 같은 학문에서 전개되는 길이며 이 길은 학문에 이르는 도정에 있는 정신현상학의 길과는 구분된다고 역설하였으나, 심사위원들은 나의 주장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이런 의문에 답하기 위해 서문에서 설명한 관념 변증법의 길과 서론에서 설명한 회의의 길을 매개할 가능성을 찾아보았다. 나는 곧 정신현상학에서 ‘형태’와 ‘계기’라는 개념이나 ‘내면화’와 ‘시간화’라는 개념을 발견하면서, 이 개념이 두 가지 대립하는 길을 매개해 준다고 생각하면서 논문을 보완하였다.

이런 보완의 덕분인지, 다행히 심사위원들은 나의 주장을, 비록 자신들은 인정하기 어렵지만, 하나의 실험적인 해석으로 받아들여 주면서 논문은 통과될 수 있었다. 나는 마치 헤겔이 아니라 나 자신이 진리에 이르는 새로운 길을 발견한 것처럼 기뻐했다. 나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내가 마치 학문적으로는 새로이 태어나는 것처럼 느꼈다.

4)

간신히 90년대 이후 전개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을 극복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상의 흐름은 또다시 변화했다. 21세기로 들어가면서, 1990년대 서구 사상을 지배했던 후기구조주의의 흐름도 퇴조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사상의 물결이 밀어닥쳤는데 내가 보기에 두 가지 흐름이었다. 하나는 들뢰즈와 같은 미분적 차이의 철학이었고 다른 하나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이었다.

흔히 들뢰즈나 라캉은 푸코와 데리다와 같이 프랑스 출신 사상가이었으므로, 그냥 프랑스 철학을 통칭되었으나, 내가 보기에는 전혀 다른 흐름의 사상이었다. 왜냐하면, 푸코와 데리다가 후기구조주의에 기초해서, 상대주의적 결론에 이르면서 어떤 객관적 가치나 진리의 존재를 부정햇지만, 들뢰즈나 라캉의 경우는 이와 달리 진리의 가능성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들뢰즈는 가장 원초적인 미분적인 감각적 경험이 모든 진리의 기초이었다. 그의 이런 입장은 욕망 개념을 서술한 ‘앙티 외디푸스’라는 책에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났다. 거기서 그는 욕망이란 원초적인 미분적인 욕망이 무한히 적분되면서 출현하는 것이라고 보면서 욕망은 결핍이 아니라 곧 생산이라고 하였다. 그의 이런 논리는 전반적으로 진리 개념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라캉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라캉 역시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무의식을 진리의 기초로 보았다. 라캉은 이때 무의식이라는 개념보다는 ‘대타자의 말’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한 라캉적인 해석이었다.

들뢰즈나 라캉은 진리를 인식가능하다고 본다는 점에서 구조주의가 부딪힌 상대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사실 들뢰즈나 라캉이 푸코나 데리다보다 먼저 나타난 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또는 세계적으로) 오히려 푸코나 데리다 뒤에 유행하게 된 것도 이런 까닭이 아닌가 생각했다. 즉 사람들이 이 시대에 이르러 객관적 가치와 진리를 부정하는 구조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런 상대주의를 극복하려는 갈망이 사람들이 들뢰즈나 라캉으로 향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5)

나는 들뢰즈나 라캉이 등장한 것은 곧 신자유주의 붕괴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2008년 미국에서 경제위기는 30년간 세계를 제패한 미국의 신자유주의의 한계를 일거에 폭로했던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세계 곳곳에서 신자유주의의 폐해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이 쏟아졌고 ‘나는 분노한다는’ 함성이나 신자유주의의 본산인 ‘월가를 점령하라’는 운동이 전 세계에 펼쳐졌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자유주의는 김대중 선생의 IMF 극복 노선을 타고 들어왔으며, 노무현 정권의 경제 개혁을 통해 번성하게 되었다. 특히 노무현 정권은 삼성에게 나라의 경제에 대한 진단을 맡겼으며,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을 세계 금융 허브로 만들고,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미 FTA를 추진하면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압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노무현 정권이 정권을 다시 보수 진영으로 넘기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 부동산 투기 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금융 허브를 만든다고 하면서 금융개방을 가속화했는데, 그 때문에 당시 신자유주의 시대 낮은 금리로 떠돌던 과잉 화폐(특히 일본 자본)가 한국으로 쏟아져 들어왔으니, 기술적 발전이 정체되면서 투자처를 찾지 못한 과잉 화폐는 부동산 투기에 몰려들었다. 그러니 노무현 정권이 실패하게 된 진짜 원인은 다름 아닌 그가 추진했던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이 아니었을까?

노무현 정권이 말기 전개된 세계적 금융위기는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파산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적 민주정권 즉 노무현 정권의 실패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와 더불어 전 세계적으로 또한 한국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구조주의도 쇠퇴했으며, 이에 대체하여 새로운 시대를 모색하는 철학적 흐름도 등장했다. 바로 그것이 곧 들뢰즈의 철학과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관심의 폭발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나의 철학일지(6)[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나의 철학일지(6)[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1)

푸코에 이어서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데리다의 해체주의였다. 푸코는 실천적 관점에서 흥미를 불러일으켰고 실제 나중에 정치권에서 친노파를 만들어내는 데 일부분 기여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들어온 것이 데리다의 해체철학인데, 실천 쪽보다는 오히려 예술과 문학 비평 쪽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

데리다의 사상 중에 흥미를 끌었던 개념은 무슨 ‘중심주의’이다. 그의 사상으로부터 ‘이성 중심주의’, ‘유럽 중심주의’, ‘남성 중심주의’ 등 각종 중심주의 개념이 나왔다. 그의 철학은 ‘중심’ 중심주의였다. 이런 개념은 기존의 보수적 지배 사상의 비판일 수도 있으나 당시에는 주로 운동권 사상에 대한 비판으로 해독되었다. 운동권 사상 역시 보수적 사상에 못지않게 이런 각종 중심주의의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의 해체적 비판에서 방법론적 핵심 개념은 ‘차연’이라는 개념이었다. 이 개념은 차이와 지연이라는 두 의미를 지닌 합성어인데, 거슬러 올라가면 후기구조주의라는 방법론에서 필연적으로 이끌려 나오는 개념이었다. 후기구조주의에서 모든 구조는 상대적이고 일시적이다. 그 때문에 어떤 것은 하나의 구조로 파악되는 동시 다른 구조로도 파악된다. 순수한 객관적 대상이 없으니, 두 구조는 하나의 지점에서 중첩될 뿐이며, 바로 이렇게 두 구조가 중첩되는 지점을 지칭하는 개념이 곧 차연이었다.

데리다는 머지않아 이런 차연 개념을 포기하고 레비나스 등과 같이 자신의 출발점이었던 현상학적 본질직관 개념으로 돌아가는데, 데리다의 후기 사상은 내가 알기로 한국에서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운동권이 자기를 반성하는데 방법론적인 관점을 주었다. 데리다의 주장은 당시까지도 남아서 투쟁했던 운동권의 진영 안에 수류탄을 깐 것과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진리이고 가치 있다고 믿지 않고서 어떻게 행동으로 나갈 수 있겠는가? 하나의 구조를 지배하는 것은 하나의 욕망일 뿐이니, 세상은 욕망 사이에 벌어지는 이전투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전투구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투쟁에 나설 수는 없었다.

2)

그 외에도 나는 알튀쎄와 같은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자 책을 읽었다. 그의 중층적 결정론이나 구조적 총체성 개념은 명확하다는 느낌을 주기는 했으나 이상하게도 거부감이 느껴졌다. 당시 한국에는 윤소영 교수와 같은 알튀쎄 주의자가 있었고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나, 나로서는 알튀쎄의 철학이 무언가 가슴에 와닿는 느낌이 없었다.

그 밖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가인 보드리야르의 책을 읽기도 했다. 그의 소비사회라는 개념이나 시뮬라크르라는 개념은 흥미로웠으나, 그는 사회학자에 가깝고 재치 있다고 생각했으나, 깊이를 느끼지는 못했다. 보드리야르는 나중에 내가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데 기여했다는 점만은 밝히고 싶다.

이렇게 나는 한 십 년 동안을 당시 유행을 좇아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 다행히 학교에서 교과목 개편을 하면서 나는 내 마음대로 나의 강의 커리큘럼을 짤 수 있는 권리를 얻었기에 나는 내가 공부하고 싶은 것을 교과목으로 설정해서, 내가 공부하면서 동시에 강의하기도 했으니, 나의 실험적 강의를 참고 들어준 학생들에게 지금 미안하기도 하며 동시에 고맙게도 생각한다.

97년 나는 지쳤다. 마침 학교에서 안식년을 받아 해외로 나가게 되었다. 유럽에서라면 무슨 새로운 전망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독일로 떠났다. 유럽에서 나는 97년 겨울 한국이 IMF에 빠지게 되었고 그해 년 말 선거에서 김대중 선생이 당선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3)

IMF로 망하는 것은 어차피 예견되었던 사실이니 당연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어서 곧 김대중 선생의 당선을 알았을 때, 나는 최초로 무거운 중압감에서 벗어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대중 선생이 87년 여름 노동자 대투쟁 시절, 노동운동을 배신했을 때도, 배신감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게 그의 진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가 정권을 잡기만 하면 그는 운동권과 그가 묵시적으로 합의한 경제적 개혁을 달성하리라 믿었다.

이 노선은 박현채 선생이 기초를 잡고 김대중 선생이 널리 알린 대중경제 노선이었다. 그것은 산업의 재편성을 통해 민족경제로 나가는 노선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김대중 선생에 기대했다. 이제 정권을 잡았으니 그는 자신의 대중경제 노선을 실천하리라. 희망이 솟았다.

멀리 독일에서 매일 아침 도서관으로 나가면서 나는 이참에 어설픈 현실참여를 끝내고 학자로서의 나의 길을 다잡아 가리라고 생각했다. 독일 튀빙엔은 참 작은 대학 도시였다. 만물은 고요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5월의 들판이었다. 마치 어릴 때 어머니가 덮어주던 포프린 이불보에 수 놓인 꽃잎들처럼 들판에는 이름 모를 야생 꽃들이 피었다.

나는 튀빙엔 유학생들과 자주 함께 산책하면서, 철학을 공부하는 학자로서 나의 과제가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나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단순히 어떤 철학이 좋아서 하는 것은 철학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철학도 자의식을 가지고 해야 하며, 나의 철학적 자의식이 가리키는 바에 따르자면 철학은 시대의 현실을 극복하는 철학, 실천적 철학이어야 했다.

나는 산책하면서, 내가 10년간 허겁지겁 따라갔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들을 생각해 보았다. 십 년간 그들의 철학이 내게 가르쳐준 것이 무엇인가를 찾으려 했으나 손에 잡히는 것 없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었고, 어떤 진리도 가치도 없었다. 과연 우리는 이렇게 살 수 있을까?

과거 운동권은 이제 소확행이라는 개념에 빠져들었다. 그게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삶이었다. 소확행이란 곧 와인과 여행, 그리고 약간의 흐트러진 매무새를 의미했다. 하지만 이런 소확행을 즐기려면 어느 정도 중산층적인 물질적 자원이 필요했다. 대학교수로서 나도 이런 소확행의 분위기가 나의 온몸을 휘감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럴수록 의식적으로 나는 이 분위기에서 빠져나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허무주의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을 극복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푸코나 데리다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은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곧 구조주의라는 무기였다. 이 구조주의는 거슬러 올라가면 칸트에 이르고, 언어학이라는 확실한 토대를 갖추고 구조주의 외에도 과학철학(예를 들어 토마스 쿤) 등에서 지지와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더구나 마르크스주의조차 이미 알튀쎄를 통해 구조주의로 전향했다.

구조주의는 후기구조주의에서 보듯이 불가피하게 상대주의와 소확행이라는 삶으로 빠지게 마련인데, 어떻게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고민을 하면서 나는 내가 안식년을 보내고 있었던 튀빙엔 대학교에서 이루어지던 헤겔 논리학 심포지움에 참석하였다. 나는 독일어도 잘 모르면서도 빠짐없이 참석했는데, 그는 마침 헤겔 논리학 3권 개념론 부분을 읽어나갔다. 독일 교수와 대학원생의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내가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헤겔에 관해서라면 그가 모르기는 나와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이었다.

헤겔 강의를 들으면서 다른 한편 도대체 헤겔 철학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고민하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곧 헤겔 철학이 어쩌면 구조주의적 방법론을 넘어서는 가능성을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생각이었다.

구조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구조 자체의 변화 가능성을 생각해야 했다. 구조주의는 어떤 것을 구조적 좌표 위에 점 찍는 것은 가능했지만 구조가 변동하는 가능성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하나의 구조에서 다른 구조로의 변화는 우연일 뿐이었다.

그런데 헤겔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의 발전은 하나의 인식 구조에서 다른 인식 구조로 변화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하고 나는 생각했다. 헤겔 정신현상학에서 이행 구조를 밝히게 된다면, 구조가 필연적으로 변동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무릎을 쳤다. 이제 구조주의를 극복하는 길이 보였다. 이렇게 해서 나는 80년대 헤겔 연구에 이어서 10년 만에 다시 헤겔연구로 돌아서게 되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해야 하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박사 논문을 통해 정신현상학의 이행과정을 밝혀 보고자 했다. 나는 튀빙엔 대학교 도서관에서 다시 정신현상학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으며 그 가운데 모순이라는 개념에 주목했다. 정신현상학의 이행과정에는 항상 모순이라는 개념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그 모순은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딜레마로, 어떤 경우에는 자가당착으로 어떤 경우에는 전치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나는 정신의 이행은 모순을 통해 일어난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런 감을 바탕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이 논문으로 나중에 귀국한 지 2년 뒤 2000년 겨울에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제목은 ‘정신현상학에서 정신 개념에 대한 연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