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ento mori. 베를린에서 바쳐진 애도의 물결. [베를린에서 온 편지]-2

Memento mori. 베를린에서 바쳐진 애도의 물결. [베를린에서 온 편지]-2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활짝 핀 나무조차 사람들이 그 만개 밑에 가려진 공포의 그늘을 인지하지 않는 순간 거짓말을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순진무구한 표현도 아름답지 못한 존재자를 치욕스럽게 하는 구실이 된다. 아름다움이나 위로란 더 이상 없으며, 있다면 그것은 오직 다음의 시선, 즉 공포를 직시하고 감내하며 ‘부정성’에 대한 단호한 의식 속에서도 더 나은 상태에 대한 가능성은 놓치지 않으려는 시선이다.” (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

5월 3일. 화창한 날씨였다. 전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이 베를린 최대 관광지인 브란덴부르크문(Brandenburger Tor)에서 따스한 햇살을 쐬며 맥주에 쿠리부어스트(베를린의 명물 간식)을 즐기던,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온하고 행복한 토요일 오후였다. 이곳 한복판에 느닷없이 검은 상복을 입은 한국인 약 2백여 명이 나타났다. 슬픔을 머금은 표정을 하고, 다시는 이 푸르른 하늘을 두 눈으로 볼 수 없을 가여운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리고 수백 명의 생명, 그것도 대다수가 고등학생들인 이들이 차디찬 바닷물 속에서 숨을 거두도록 방치한 이 무능하고 부패한 사회에 침묵으로 항거하기 위해.

이날 거행된 베를린 시민분향소에 참여한 참석자들의 표정은 침통했다. 이 맑은 날씨를 원망이라도 하듯.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2백여 명의 조문객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어린 생명의 죽음에 부채감을 느끼는 어른들은 이제 자신들의 삶마저 원망스러워할 지경이다. 누가 이런 끔찍한 비극을 초래했는가? 부패한 정부, 조작과 기만이 일상이 된 사회는 인명구조에 무능하다. 지독히도 슬프고 비극적인 결론이다. 참석자들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우선적으로 정치적 발언을 최소화하고, 희생된 이들의 영혼에 깊은 위로를 전달하고자 했다.

SAM_0366사전행사로 기획된 단체 묵념, 바이올린 협주와 성악 공연, 독어로 번역된 유가족 어머니의 편지 낭독을 마친 뒤, 2백여 명의 조문객들이 각자 마련해온 흰 꽃을 헌화하면서 분향예절을 거행했다. 모두의 가슴엔 노란 리본이 달려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독일인들을 비롯한 외국인들 상당수도 함께 헌화를 하고 망자의 영혼을 위로했다. 이들 역시 언론을 통해 한국 정부의 무능함이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낳았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한국의 현실에 대해 언론이 사실을 보도하지 않는 나라는 어찌 보면 한국이 유일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의 공영방송과 대형일간지들이 정부의 공식발표만을 옮겨적는 동안,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주요 일간지들은 이번 사건에서 드러난 한국정부의 무능함에 대해 신랄하게 꾸짖고 있었다. 비록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고 피부색이 다를지언정, 우리를 지켜보던 수많은 외국인들의 연대의 정서는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에서 온 루크라는 젊은이가 전통 파이프연주를 통해 “Amazing grace”를 연주했을 때, 우리는 국경을 초월해 이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희생자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헌화를 하고 분향을 한 뒤, 망자에 대한 예의로 절을 하고 나서 한참을 몸을 일으키지 못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고개를 바닥으로 숙이고 절을 하던 사람들은 어째서 몸을 일으킬 힘을 잃어버린 것인가. 어째서 우리는 어린 생명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의식에 통탄할 만큼 비참함을 느껴야 하는가.

침몰하는 배는 벤야민이 말한 바 있는 “변증법적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즉 그것은 단지 하나의 우발적인 사건으로서 우리에게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처한 절망과 위기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와 분노가 “집단 무의식”의 형태로 투영된 하나의 이미지였다. 사건 초기, 180도 뒤집혀 파란 선수만을 수위에 남겨놓은 채 침몰해버린 배의 이미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서 있는 공간이 땅 속으로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은 현기증을 일으켰다. 그것은 세월호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가 침몰해간다는 위기의식이었다. 조타수를 쥔 사람들은 승객들에게 “제자리에 가만히 있으라”고 지시한 뒤 그들 자신이 가장 먼저 구조되었다. 선장에게 버림받은 채 차디찬 바다 속에 가라앉아 희생되어야 했던 생명들은, 마치 경제위기 시 사측의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가장 먼저 잘려나가야 하는 노동자들, 특히 비정규직에 대한 알레고리였다. 버림받은 어린 생명들이 희생되어야 했듯이, 이 사회는 언제나 강자의 생명을 보장해주기 위해 약자가 희생되어야 하는 구조와 논리를 지니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일체의 희망도 없는 지금의 ‘버림받은 세대’는, 죽어야 했던 어린 생명들과 자신들을 일체화했다. 그들은 슬퍼했고, 절망했으며, 이 절망이 분노로 바뀌는 순간에, 그들은 ‘침묵행진’이라는 방식으로 이 모든 것을 낳은 한국 사회에 항거했다. 아무런 말 없이, 그러나 깊은 울림을 안고.

?정부에 항의하는, 안산 단원고 학부모들인 유가족들을 보수층이 증오하는 것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사회 질서를 그 자체로 절대적인 것으로 떠받드는 자신들의 논리상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식을 잃고 절규하며 “내 아이를 살려내라”고 외치는 부모들이 “종북”이라며, 그들에게 “시체장사”라는 표현을 붙인다. 그들이 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이 한국의 사회 시스템에 자신들의 불만을 제기하는 모든 세력은 ‘종북’이다. 심지어 그것이 살 수 있었던 생명이 이 정권의 무능함으로 인해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왔을 때, 차디찬 주검을 마지막으로 안아본 뒤 장례를 치러야 하는 부모들이라 할지라도. 한국 보수세력과 현정권은 인간의 존엄을 짓밟아버렸다. 가족을 잃고 울부짖는 자들의 처절한 외침마저 그들에겐 “종북”의 논리가 된다. 그런데 그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가만히 있으라”는 메세지에 더 이상 순응하지 않는, 그들의 말대로 가만히 있으면 우리 모두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친, 각성한 새로운 세대의 “버림받은” 청년들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침묵행진을 벌이려던 청년들과 시민들을 경찰병력을 동원해 감금해버렸다. 마치 “청와대로 가자”고 외치던 실종자 가족들을 경찰력으로 저지했듯이.

SAM_0372

만약 칼 슈미트적 의미에서의, 주권자에 의해 선포된 예외상태가 아니라 아감벤적인, “벌거벗은 생명(호모사케르)”에 의해 개시된 예외상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지금일 것이다. 죽어간 생명의 넋은 지금, 연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누가, 이 억울한 죽음에 항거할 것인가? 바다 속에 수장된 ‘벌거벗은 생명’을 위해 눈물짓는 자들은,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고문받는 자가 비명지를 권리를 갖듯이, 영원한 고통은 표현될 권리를 갖는다.”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고통의 표현욕구가 실천적 충동을 낳고, 이는 총체적 지배 하에서도 윤리와 정치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것이 아도르노 철학의 한 축이다. 고통(Leiden)은 실천적 열정(Leidenschaft)의 근거가 된다. 세월호 이후 윤리와 정치, 즉 ‘실천’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미메시스적 충동이 분노의 파토스로 이어질 때일 것이다. 이 분노의 파토스(부정성)를 변화의 긍정적 힘으로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정치’의 과제다.

 

침몰한 세월호와 마찬가지로 한국사회가 침몰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조타수를 잡은 세력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겨도 좋은 것인가? 우리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지시한 뒤에, 그들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먼저 배를 빠져나갈 사람들에게 우리의 생명을 맡겨도 좋은 것인가? 푸른 하늘과 만개한 푸르른 나뭇잎의 싱그러움마저도 삶의 약동이 아니라 집단적인 죽음에 대한 죄의식으로서 우리를 짓누르는 이 순간에, 베를린의 야속한 푸른 하늘은 우리에게 준엄하게 묻고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무덤이 우리에게 말하듯, “죽은 자는 우리를 깨우친다.” 이 벌거벗은 생명이 불러일으킨 “예외상태” 속에서, 우리는 한국 사회 주권권력의 공백상태를 무엇으로 채워야 할 것인가??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을 소개합니다[베를린에서 온 편지]-1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을 소개합니다[베를린에서 온 편지]-1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왼 쪽이 칼 리프크네히트, 오른 쪽이 로자 룩셈부르크의 무덤이다. 가운데 비석에는 “죽은 자는 우리를 깨우친다”고 씌어 있다.

왼 쪽이 칼 리프크네히트, 오른 쪽이 로자 룩셈부르크의 무덤이다. 가운데 비석에는 “죽은 자는 우리를 깨우친다”고 씌어 있다.

구름 뒤덮인 흐린 하늘에서 겨울비가 서글프게도 내리던?2011년?12월?26일.이 날은 성탄절 연휴라 도서관도,?음식점도,?상점도 모두 문을 닫았다.?나는 오래 전부터 방문하고 싶었던 로자 룩셈부르크의 무덤을 가보기로 했다.

S반(S-Bahn)?기차역에서 장미 꽃 두 송이를 샀다.?기차는 동베를린을 향해 달렸고,?나는 베를린 리히텐베르크( Lichtenberg) 지역에 있는?“사회주의자들의 묘”에 도착했다.?이곳은 독일의 저명한 사회주의자들의 묘지들이 안치된 곳으로,구동독 정부가 거대한 공원으로 조성해 사회주의의 역사에 대해 시민들에게 홍보하려 했던 곳이다. (물론 독일이 통일된 이후에는?“스탈린주의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는 비석도 공원에 추가되었다.)?묘지공원 안의 거대하게 조각된 동상에는?“죽은 자는 우리를 깨우친다”라는 문구가 씌어 있었고,?그 아래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의 무덤이 있었다.

미리 사 온 두 송이 장미를 하나는 칼 리프크네히트에게,?다른 한 송이는 그 이름도?“장미”라는 뜻을 가진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헌화했다. 1919년?1월,이 두 혁명가가 반혁명 군부 세력에 의해 납치되어 살해된지도?90여 년이 흘렀다.?그러나 매 년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이 두 혁명가들이 밟았던 길은 단순히 과거의 지나간 역사일 뿐 아니라,?오늘날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적 현재에 대해 반성적으로 성찰하게 만드는 현재의 거울일 것이다.

그로부터 몇 년 뒤,?나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름을 딴?“로자 룩셈부르크 재단?(Rosa Luxemburg Stiftung, RLS)”에 장학금 지원서를 냈고,?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올 해부터 매달 생활비 보조를 받게 되었다. RLS는?1990년“사회분석과 정치교육 연합(Verein Gesellschaftsanalyse und politische Bildung e. V.)”이라는 명칭으로 출발한 교육 후원 재단이며,독일 연방의회 제3당인 독일 좌파당(Die Linke)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RLS는?2001년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과?2003년 파리에서 열린 유럽사회포럼에 참여했고,?현재까지 민주적이고 사회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정치적 활동들과 학술적 연구들을 조직하고 후원하고 있다. 1990년 이래 맑스 엥겔스 선집(Marx Engels Werke)의 편집자 역할을 하고 있으며,?현재?MEGA라고 불리는,?맑스 엥겔스 전집(Marx Engels Gesamtausgabe)의 출간 역시 후원하고 있다.?전통적 좌파운동뿐 아니라 생태주의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서도 후원하고 있으며,?그 이론적 성과들을 출간하고 관련 행사들을 개최하고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의 로고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의 로고

장학생 선발 과정에서도?RLS는 지원자의 학술적인 역량과 지도교수의 추천과 더불어 지원자의 사회적 참여도를 높은 평가 기준으로 세워놓고 있다.지원자가 정당,?노동조합, NGO,?정치단체 등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지,?또는 사회운동이나 난민 구호 같은 사회참여,?사회봉사 등의 활동을 수행한 경력이 있는지를 검토해,?지원자가 민주적인 사회 발전에 공헌했다는 확신이 있을 때 장학생으로 선발한다.?학술적인 지원과정을 통해 사회적 발전에도 기여하겠다는 재단의 취지가 장학생의 선발과정에도 녹아 있는 것이다.장학생 선발은 일반 전형과 외국인 전형으로 구분되지만,?일반 전형에 외국인도 지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여성과 외국인(특히 개발도상국가 출신)은 할당제를 적용해 선발 비율을 높이려 하고 있다.?여성과 외국인 같은 소수자를 배려한 정책이다.

4월?11일과?12일에는 이번에 로자 룩셈부르크 장학금을 받게 된 학생들의 오리엔테이션 행사가 있었다.?이틀간 진행된 이 행사는 장학생들이 서로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장학생들이 알아야 할 행정적인 규칙들과 절차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면서,?동시에?RLS에서 진행하는 여러 연구 프로젝트들과 연구모임들에 대해 소개하는 시간들도 마련해 놓았다. RLS이 진행하는 프로젝트들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유럽’?협동 연구과정”, “다원적 좌파의 재조직‘?연구과정”, “사회적 변형?:?사회-생태적 정의”?등이 있고, RLS?내에서 진행되는 자율적 연구모임들에는?“비판이론”, “비판적 심리학”, “페미니즘과 성 연구”, “아프리카 정책 연구”, “동유럽 정책 연구”, “법 정책과 인권”, “자본주의와 계급투쟁”, “유로화와 경체위기”?등이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나와 비슷한 철학적 관심을 가지고 있는 두 명의 친구를 새로 알게 되었다.?터키에서 온 에크렘은 베를린 자유대학교 철학과 박사과정생인데,?그는 자신의 논문 주제를?“알튀세르의 반국가적 코뮤니즘”으로 소개했다.?그에 따르면,?맑스주의는?20세

마리아나와 에크렘

마리아나와 에크렘

기 후반부터 심각한 위기를 겪었는데,이 위기는 단순한 정치적 위기가 아니라 존재론적 위기이며,?본인은 주로 알튀세르의 후기 저작들을 근거로,?알튀세르의 존재론적 연구들이 궁극적으로는 맑스주의의 존재론적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작업이었음을 밝히겠다고 한다.?그는 이 때문에 알튀세르에게서 철학적 요소와 정치적 요소는 분리될 수 없으며,?이러한?“이론 내에서의 계급투쟁”으로서 철학이라는 알튀세르의 구상은 그의?“반국가적 코뮤니즘”이라는 정치적 귀결로 이어져야 한다며,?이것이 그의 학위논문에 대한 구상이라고 소개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 정치학 박사과정생이지만 베를린에서 거주하고 있으며,?앞으로는 빈에서 공부할 예정이라는(참고로 최근 빈 대학교 정치학과는 비판이론,?후기 구조주의,?맑시즘,?여성주의 등 젊은 급진 성향의 학생들이 선호하는 이론들이 집중적으로 다뤄지는 정치이론의?‘메카’로 부상하고 있다.)?마리아나는 비판적 정신분석학의 재구성을 학위논문의 이론적 과제로 설정하고 있다고 한다.?그녀에 따르면, 1920년대 지식인들은 맑시즘과 정신분석학을 통합하려 시도했고 이러한 시도가?60년대까지 이어졌지만, 1960년대 이후 후기구조주의를 중심으로 정신분석학이 지닌 억압적 성격을 폭로하는 일련의 철학자들이 등장하면서,?정신분석학과 정치철학을 결합하려는 시도는 큰 좌절을 맛보게 되었다.?그러나 마리아나에 따르면,?이러한 후기구조주의의 반(anti)정신분석학은 반(anti)과학주의라는 이론적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본인은 정신분석학을 새로이 전유함으로써 전통적 정신분석학의 억압적 성격을 탈피하면서도 후기구조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관점을 도출하고자 시도하겠다고 한다.

이렇게?RLS에서 나는 철학과 정치이론에 관심을 가진 다른 연구자 친구들을 만나 교류할 수 있었으며,?나의 관점을 넓힐 수 있었다.?나아가 구좌파의 획일성을 벗어난 다원주의적인 유럽 좌파의 재구성 같은 관심이 가는 주제들에 대해서 다른 연구자들과 관심을 교류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로자 룩셈부르크는 비극적으로 생애를 마감했지만,?오늘날 그녀를 추모하며 그녀의 삶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곳저곳에서 각자의 방식으로?‘붉은 로자’를 애도하고 있다.?로자 룩셈부르크 재단은 학술적 영역에서?‘이론적 실천’을 통해 민주적이고 사회적인 세계를 위해 한 발 한 발,?무겁지만 동시에 사뿐한 걸음을 내딛고 있다.?이 재단에서 재정적인 수혜와 더불어 폭넓은 학술적 교류 기회를 얻게 된 사실에 감사하며,?다시 한 번 그녀의 묘지를 찾아 장미꽃을 헌화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이윤추구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의 생산활동 [노동이야기]-12

이윤추구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의 생산활동

?[노동이야기]-12

 

이 재 원(한철연 회원)

?1.?주인과 노예

겨울의 막바지,?봄이 오고 있다. P건설현장이다. H?인력회사에서 열 명 정도 함께 갔다.

아침 조회가 끝난 후 조별 모임을 했다.?나는 헬멧과 안전벨트는 이곳 하청화사에서 받았으나 각반을 준비하지 못했다.?나는 반장에게 딱 걸렸다. “당신은 돌아가.”?라고 반장이 말했다.?나는, “알겠습니다.?좀 여쭙겠습니다”라고 운을 떼었다.?반장이 말해보라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생존할 권리가 있지요?”?다시 반장이 수긍했다.?나는 거칠게, “돌아가라 하면 나는 무었을 먹고 살지?”라고 말했다.

내 딴에는 인권과 정의에 대해 말 한 것이었다.?인권 차원에서 모든 이는 생존권이 있다는 것,?이에 따라서 노동할 권리를 빼앗는 것이 정의롭지 않다는 의미였다.?그리고 사람을 기계의 부속품쯤으로 대하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었다.?하기야 어떤 이들에게는 노예가 넘쳐나는 현실에서 더 이상 노예가 필요 없을 것이다.

그 날은 어찌 어찌 일했다.?함께 일하러 간 노인으로부터 들었다.?전에도 한번 모두 쫓겨 온 적이 있었다 한다.?그 와중에도 내 편을 들어 준 사람이 있었단다.?그러자 반장이, “모두 돌아가고 싶으냐”라고 했단다.?노인은 그 소리를 듣고,?또다시 쫓겨 가는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단다.?그 날은 분위기 썰렁해서인지,?모두들 쉬지도 않고 일했다.

나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좋다.?노동은 인간 구원의 수단이자 해방의 도구로서,?노동을 통한 자기실현 과정에 있는 인간의 자기표현을 보여주는 낭만적인 글이요,?노동이 인간을 어떻게 소외시키면서도 인간을 고양시키는지 말해주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싸워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의 노예가 된다.?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처럼 비취진다.?주인이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노예는 주인에게 봉사한다.?그러나 어느 순간 변증법적 역전이 이루어진다.?노예는 노동하면서 물질 법칙을 알게 되고 자연을 이용할 줄 알게 되면서?“일종의 ?자유(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되찾게 이러한 변증법적 전환에 의해서 노예의 노동은 노예에게 자유를 되찾아 준다.?그러나 주인은 물질시계의 혹독함을 알지 못한다.?왜냐하면 그는 자신과 세계의 중간에 노예를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노예는 노동을 통하여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된다.?그러나 주인은 노예 없이는 살 수 없는,?노예의 노예가 된다.

며칠간의 아파트 천정공사 무임노동과 일주일간의 저임금 노동도 이 변증법을 믿기에 시작한 것이었다.

외국인?L과 둘이서 지방이서 일하는 천정 시공 작업 팀에 합류하기로 했다.그러나 우리를 일 시켜주기로 한 팀장?Y의 제안을 듣고,?현명한?L은 즉시 자기는 일을 포기하겠다,?돌아가겠다고 말했다.

팀장은 처음 며칠간은 무임금 노동으로 일을 배우라고 했다.?그것도 우리가 목수이므로,?일을 이해하기 때문이라는 전제였다.?일을 배운 다음에는 때려먹기ㅡ일 한 만큼 공임을 받으라고 했다.

그러나?L이 돌아가자 상황이 변했다.?나는 졸지에 팀장?Y의 시혜대상이 되고 말았다.?나는?Y가 주는 대로 임금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2.?제골치기,?일명 때려먹기의 역사

농촌의 작업은 예전에는 모두 협동 작업이었다.?논의 김을 맨다 하자.?어렸을 때 본 광경이 눈에 선하다.?어디에서 그처럼 모여 들었는지 마을 앞 논들에 사람들이 가득,?일렬로 늘어서 이 논 저 논 할 것 없이 한꺼번에 김을 매어 나갔다.?그리고 내가 노동할 나이가 되어서는 모를 심거나 벼를 벨 때,?물결치듯 작업해 나가는 것을 배웠다.?앞 물결이 나아가면 뒤 물결이 밀려오듯,작업속도가 늦은 사람을 옆 사람이 조금씩 도와주다 보면 작업 대형이 비슷해진다.

고향 농민들 중에는 객지로 품을 팔러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그들이 배워온 작업방법이?<제 골 치기>이다.?누군가가?“제골 치기 해보자”고 제안 한다면 작업하는 사람들은 밭두둑 하나씩 맡아 오직 자기가 맡은 작업만 해 나간다.?다행히 이런 작업 방식은 그저 장난에 그쳤다.

사진-이재원

사진-이재원

제골치기는 지주들이나 마름들이 작업농민 등골 빼 먹기 위해 개발한,?농민 노동의 작업능률을 올리기 위한 방식이다.?지금도 남아있는 소작농 계약서에서 추측할 수 있다.?남쪽 지방의 지주들이 소작농과 맺은 계약에 지주는 소득의?7할을,?소작농은?3할씩 나누게 되어 있다.

풍성한 대지의 소작도 정작 당시의 농민들에게는 혜택이 아니라 저주였다.그토록 민란이 자주 일어난 것도 이유가 있다.?그리고 떨거지,?떼거지의 역사도 이런 소작 방식 때문이었다.?풍년 들면 소득의?3할로 근근이 연명하지만 흉년 들면 농민들은 먹을 것이 없다.?굶어 죽으나 난리를 일으켜 죽으나 죽는 것은 매 한가지 아닌가??또는 저항 대신 흉년 들지 않은 동네로 줄지어 얻어먹으러 고향을 떠나간다.?그리고 해를 넘겨 다시 농사지을 철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온다.?지주 일가의 신화 뒤에는 이처럼 농민들의 등골을 빼 낸 역사가 있다.

제골치기가 건축 작업 현장에 들어온 지는 정확치 않지만 오래 된 모양이다.일본인들이 말했다는,?노동판에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놈들 우께(도급노동)?주면 죽을까봐 겁난다.”

어쨌든 때려먹기는 인간개인의 능력과 구성원들의 합의와 협동을 고려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건축 현장에서는 원청에서 하청으로,?하청에서 각 노동자에게?<때려먹기>식 노동 계약이 이루어진다.?벽돌공의 도급 노동은 한 장당?150원,?미장은 한 석방 얼마,?목수 내장 공사 한 세대당 얼마,?이런 식의 때려먹기가 현장의 현재 모습이다.?그 분야에서 기능이 떨어지는 사람은 자신의 밥 값 치르기에도 바쁜 구조가 때려먹기이다.

 

3.?천정 시공

천정 시공은 시간 가는 줄 모른다.?끊임없이 생각하면서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무척 복잡하지만 방 천정 공사 작업 순서를 간단히 요약해 보련다.

우선 각재와 석고보드 등,?작업 재료를 작업 장소에 옮겨놓는다.

시공 레벨(높이)?지접에 먹금을 놓는다.

방의 커튼 박스를 짜,?먹선에 맞춰 창틀 위에 고정시킨다.

먹선을 따라 벽체에?3cm?각재로 반자 돌림을 고정시킨다.

반자틀을 기준으로 해서 우물 정자 형 반자틀을 만들어준다.

천정에 콘크리트에 못 밖는 타카를 사용하여 달대를 달아,?반자틀을 고정시킨다.

반자틀에 석고보드를 붙인다.

거실 천정 작업은 방 천정 작업보다 한 공정이 더 있다.?등받이 틀을 추가해야 한다.

도급작업은 대개 한 세대에 한사람이 들어가서,?혼자서 작업한다.

20년 전에는 이와는 다른 작업 방식이었다.?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눈빛으로 의견을 주고 밭으며 작업했다.

때려먹기 식의 노동에는 동료도 없다.?마치 월터 하프당크의 판화?“선차”(旋車?:Tretmuuhle)1)의 노예처럼,?소외되고 고독한 인간이 반자틀에 끼어있을 뿐이다.

그림출처 도로테 죌레, 사랑과노동,박재순 역, 한국신학연구소, 1987

1) 그림출처
도로테 죌레, 사랑과노동,박재순 역, ?한국신학연구소, 1987

그것이 문제였다.?혼자 작업하는 경우,?작업자들의 이야기는,?답답하기 짝이 없다고 했다.?외톨이 작업 과정 때문일까,?작업이 끝나면 그들은?“저렇게 먹어도 사람이 살 수 있는가”,?생각이 들 정도로 소주를 마셔 댓다.

내가 효자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적어도 술 먹는 방식은 술 배울 때 선친이 당부한 것을 평생 따랐다.

<소주와 양주는 마시지 말아라.?맥주와 막걸리는 마셔라.>

왜 이렇게 나를 가르쳤는지 모르는 채 이 당부를 지켰다.?소주는 안 마셨다.한 잔에 기절한다.?선물 들어온 양주는 좋아하는 사람을 주었다(이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늙어서야 그 의미를 알았다.?소주,?독한 술일수록 중독이 빨리 된다는 것,?그리고 양주는 가짜가 많아 몸을 해친다는 의미이다.?고독하지 않다면 노동자들이 그토록 몸을 해치도록 술을 마시지는 않아도 될 것이다.

 

4.?정의에 대한 동의를 구하기 어려운 시대,?그리고 봉사노동

나는 우께,?때려먹기 천정 공사에 적응하지 못했다.?내가 기능이 떨어지고 작업 속도가 늦은 것이 큰 이유였다.?또한?6시 반에 시작해서 늦도록 작업하는 탓에 체력과 관절이 견디지를 못했다.?강도 높은 노동에 비해 내가 차지할 돈이 작았다.?능력대로 돈을 받는 사회라면 나는 때려먹기 노동자 축에 끼지도 못하는 셈이었다.?따라서 나는 노동하지만 노동자는 아닌,?이상한 존재일 것이다.

노동자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기고 죽음으로 이 사회의 부당 노동 정책에 저항했다. “부의 불균형과 노동에 대한 비정당한 대가….?이건 자본주의가 아니야.?부의 균형,?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이게 자본주의,?민주사회인데.”(고 이남종씨 메모-한겨레신문)

인간 권리,?존엄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모든 인간은 생존이 보장되어야 한다.?이것은 민주주의에 해당하는 언사이다.?이에 비해?“능력에 따라서”?분배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입장이 될 것이다.?그러나 도급 노동,?때려먹기는 외향적으로는 능력에 따라서 임금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능력급도 아니고 인권의 입장에서 분배하는 것도 아니다.?그 출발점에서 원청,?하청,?재하청의 원환구조 끝에 자리 잡은 착취 구조가 있다.?애저녁에 공평한 분배 구조가 아니다.

이러한 시대에 사회 구성원들 간에 정의에 대한 동의 구하기가 참으로 어렵다.?출발이 공평하지 못한데,?계약 자체가 불평등을 가진 채 출발하는데 누가 이러한 노동 계약을 정의롭다고 할 것인가?

나는 극악한 시대에 있었던 노동 운동에 대해서 생각해본다.?대 공황기 미국에서 있었던 사례이다.?캄보디아 한국 회사에서 저임금 노동자에게 총을 쏘았듯이,?굶주린 노동자들에게 회사가 고용한 총잡이들이 총알 밥을 먹이던 시대(포드 자동차)에, <노동 나눔 운동>이 있었다.?이 구성원들은 노동이 필요한 사람에게 무상으로 일을 해 주었고,자발적으로 녹색혁명을 이루는 노동에 참여했다.?봉사 노동이었지만,?이 노동이 사람들을 구했다.?뉴딜 정책은 이처럼 일하려는 사람들의 의사를 반영한 것이었지,?거저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봉사노동의 분야는 지금도 무궁무진하다.?병든 사람,?늙은 사람 등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돌봄 노동도 있다.?또는?<아름다운 가계>에서 보듯이,?소외된 이들을 돕기 위한 봉사노동도 있다.?문제는 봉사노동에 대한 최소한의 생활비를 누가 제공할 것이냐의 여부이다.?간신히 이 문제에 대해 한마디 한다면,?정신을 나누는 노동이 있다면 자기의 소유를 나누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마르크스의?<발췌>에서 보듯,?이윤추구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활동은 우리를 삶의 표현으로,?인간적인 욕구 충족으로,?인간 공동 본질 실현으로 인도한다.?이는 변증법적 구조를 갖는 논리이다.

이윤추구로서의 노동이 아니라면,?각 사람은 노동을 통해 자신과 타자를 상호 인정하게 된다.?왜냐하면 노동하는 사람은 노동을 통해 자신의 개성을 표현할 것이고,?이처럼 자기 표현으로서의 노동은 그에게 창조하는 기쁨을 맞볼 것이다.

상대방은 이 사람의 노동의 생산물을 향유하며,?기쁨을 느낀다.?모든 창조하는 이는 바로 이처럼 누군가가 자신의 생산물을 기꺼워하는 것에 기쁨을 느낀다.?이것이 노동하거나 창조하는 자의 진정한 욕구이다.

따라서 노동하여 창조한 사람이나,?이 생산물을 향유하는 사람은 상호간의 존재를 보충해 주는 사람이 된다.?서로서로 각 사람의 사유,?사랑 안에서 상호 승인한 셈이다.

극좌 [노동이야기]-11

극좌 [노동이야기]-11

이 재 원(한철연 회원)

 

 

 

1. 극우와 극좌

아시시의 프랜시스의 경구를 실천할 수 있을까?? “필요한 것은 네가 써라. 남는 것은 타인의 몫이다.”

타인 지배와 관련한 또 다른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성가대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한 젊은 수도사가 그에게,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 악보집을 자기 개인 소유로 하기를 청했다. 프랜시스가 말했다.

“그대는 지금은 책 한 권을 소유하기를 원한다. 그 다음에는 다른 것을 소유하기를 원할 것이다. 나중에 그대는 이렇게 말 할 것이다. ‘형제여, 이리 와서 이것을 나에게 집어 다오.'”

프랜시스는 소유욕이 지배욕과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꿰 뚫어본 셈이다.

지배와 소유의 원칙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 극우적 성향이라면 소유와 지배에서 벗어나는 성향은 극우의 반대인 극좌가 틀림없다. 노동 현장에는 극우적 성향이 지배적이다. 만약에 극좌적 성향의 노동 현장을 만들 수만 있다면 좀 더 인간적인 노동세계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2. 팀장들

겨울에 목수일 얻기란 대단히 어렵다. 팀장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 이를테면 일 잘 하고 고분고분 자기 말 잘 듣는 사람들만 뽑아 데리고 간다.

나는 팀장이 좋아할 목수는 못 된다. 일찌감치 인력회사 사장에게 조공일 하기를 지원했다. 월급소장보다는 어대충 귀여운 용역회사 여사장에게 부탁했다. 나보다 나이 한 참 어린 여 사장은 나를 “재원씨, 재원씨”하며 불러 일을 보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름 대신 내 옷깃을 끌어, 그것을 일 보내는 신호로 삼기도 한다. 가끔 농담도 한다. 이를테면 여사장이 나이 많은 사람에게 일 관계로 전화를 했으며, 그런 이야기가 화제에 오를 경우, 나는 “노인에게 전화해서 뭣에 써요? 젊은 남자에게 전화해야지–” 라는 식의 개그다. 성적 수치심을 주지 않는 한도에서 농담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뿐만 아니라, 약간 즐거운 상상도 가능하게 한다.

목수만 팀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조공도 팀장이 있다. 팀장을 지명하는 것은 대개 현장의 반장들, 또는 용역회사에서 팀장을 지명하기도 한다. 현장의 입장이든 용역회사의 입장이든 팀장을 지명해야만 인력 관리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용역회사는 팀장에게 “어디 현장 몇 명”이라고 알려주면 팀장은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을 뽑아 데리고 간다. 그런데 이 팀장에 임명된 사람들의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가 심상치 않다. 두목노동자도 아니고 보수를 더 받는 것도 아닌데, 전횡을 휘두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웃과 잘 지내야 하지만, 팀장들과 잘 지내기란 나로서는 어려웠다.

이곳저곳으로 일 하러 다녔다. 오피스텔, 학교 신축, 아파트 현장에서 조공으로 일했다. 조공 일은 목수 일에 비해 힘이 딱 절반밖에 들지 않는다. 목수 일은 진을 빼지만 조공 일은 수월하기 짝이 없어서 일 년 내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진-이재원

신축 22층 오피스텔은 분양가가 평당 천만 원이라 한다. 건물주는 전문으로 오피스텔을 짓는 사람이란다. 땅을 사고 자본 있으면 건물은 그야말로 저절로 올라간다. 건축회사 하나를 지정해서 건축 계약을 한다. 이 회사를 가리켜 원청이라고 한다. 원청회사는 5데마의 하청회사와 계약을 한다. 5데마는 토목과 목수, 철근과 콘크리트, 조적을 포함한 미장을 가리킨다. 원청회사는 다시 5데마와 하청 계약을 맺는다. 건축법에는 원청과 하청만 있다. 그런데 그게 애매해서, 특수한 경우에는 재하청도 허가하는 예외 조항을 두고 있다. 지금 모든 하청회사는 재하청을 준다. 직접 고용이란 건축 관련 분야에서 [없다]. 그리고 재하청은 회사 간의 제 살 깎아 먹기의 온상이다. 경쟁의 모든 하중은 개별 노동자들이 받는다.

JH 현장은 일할 만 했다. 눈 오면 눈 쓸고, 콘 타설하면 온도를 올리기 위해 난로 불을 피워야 한다. 회사의 반장은 나에게 매일 자기 현장에 일 나오기를 청했다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할 뿐만 아니라, 노가다 짬밥(경력)이 있어서 일머리를 알아 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용역회사 팀장 YH였다. 그의 행위 – 그는 타인을 지배하는 행위를 당연시했다 – 에 대해 바른말 하자, “너는 빠져라”고 했다. 나는 그가 일 안 나오는 주말에만 JH로 일 하러 갔다. 용역회사 사장이 “아저씨, JH가요”라고 말해도 YH가 있으면 뒷짐 지고 일 하러 가지 않았다. 보고 싶은 사람 못 보는 고통이 가슴을 에듯, 껄끄러운 사람과 함께 하루를 보낸다는 것 역시 지옥임을 다 알기 때문이다.

제임스 조이스가 말하듯, 이런저런 면에서 ‘흥미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 노동자들 간에 어린 아이 같은 일이 벌어진다. P 아파트 현장에 조공으로 갔다. 이곳에 몇 번 왔다. 어느 사이엔가 상황이 변했다. 전에는 용역 팀장을 지명하지 않고 일 했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엔가 이곳 용역팀장 X가 작업지시를 하고 있었다. 정화조 해체 작업과 자재정리였다.

나는 평소대로 자재 나올 분량을 예상하여 정리할 부재의 바닥 받침목을 깔고 그 위에 품을 쌓고 있었다. 용역 팀장이, 다시 받침목 깔 장소를 지정해 주었다. 그러나 그의 지적은 옳지 않았다. 그가 지정한 장소에도 받침목을 깔아야 한다. 그러나 내가 받침목 놓은 장소에도 역시 필요하다. 지하, 지금해체작업을 하는 공간에서 부재들이 많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사정을 말하자, 그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니, 내가 하는 작업 지시를 그렇게 고까워하면 나는 어떻게 작업을 시킨단 말이오?” 말 소리로 보아 X는 외국 동포였다. 이런, 사람들이 모두 나와 X를 쳐다보았다. 아하, 나만 몰랐을 뿐, 바로 옆에 회사 반장이 지켜보고 있었다. X팀장은 반장에게 나를 고자질한 셈이었다. 반장이 작업자 전원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한 마디 훈시를 했다.

“내가 시키는 일이 못 마당하면 이 현장 안 나오면 됩니다.”

그리고 나를 지목해서 말했다.

“마찬가지로 아저씨도 팀장 지시하는 것이 맘에 안 들면 안 나오면 됩니다.”

나는 큰 소리로, “네” 라고 말했다.

Y는 경증 뇌성마비 장애인이다. 젊다. L은 고관절 환자이다. 늙었다. L은 아픈 몸을 이끌고 먹고 살기 위해 일하러 온다. 나는 두 사람 모두 함께 일 해 본 적이 있다. L과 함께 일하러 가면, 그가 힘들지 않는 일 하도록 도와주었다. 순전히 말풍선이기는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L씨, 옆에 서 있어. 내가 다 하께”라고 말하기도 했다.

P현장에서는 오늘 따라 자재를 밑에서 위로 올리는, 일명 되치기 작업이었다. 하필 Y와 L이 한 조가 되어 일했다. L이 허리 아파서 자주 쉬었다. Y는 항상 쫓긴다. 자기 신체의 핸디캡도 있어, 일 해치운 분량이 늦어지면 일하러 오지 말라는 소리를 들을까 걱정이기 때문이다. 팀장이 채근하는 눈빛을 보이자 Y는 기어코 팀장에게 L을 고자질하고 말았다.

“저 아저씨가 일을 안 해요”라고.

밥그릇 싸움이라는 말이 아주 적절한 경우가 있다. 대개 일거리가 없는 겨울에는 교대로 일 나간다. 용역회사 소장이 일 나갈 사람을 지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선착순으로 사람들을 태우는 차를 타면 일 나가는 경우도 있다. 75세의 월남 참전용사 김 노인은 아주 일찍 와서 노란봉고차에 올라타 있다. 나도 두 번 그 차에 타 보았다. 그러나 도저히 일찍 올라탈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밥그릇을 뺏는 셈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온 사람은 일을 못 나가게 된다.

일 못나가는 사람들의 스트레스는 크다. 김 노인의 가계부를 보자. 월세 30만원, 겨울 연료비 30만원, 부인 병원비, 약값, 생활비가 기본으로 필요하다.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찍 와서는 노란 봉고차에 올라탄다.

3. 두 건축회사들

학교 신축현장, 국내 굴지의 전자회사 에어컨 설치 작업에 조공으로 배치 받아 갔다. 네 명이 갔다. 용역 소장은 내게, ‘아침밥을 사 먹고는 영

사진-이재원

수증을 회사에 제출하라’고 했다.

현장에 도착해서 두 명은 기초 안전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쫓겨갔다. 그 기초안전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 신분이 불확실하다는 뜻이다. 한 명은 혈압이 높았다. 따라서 세 명 쫓겨오고, 나만 남아서 일했다. 늙은 것이 힘만 좋아서 노동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다리 한 쪽 달아 매어놓는다 해도’ 하루를 보내는 것은 일도 아니다.

일이 끝나면 용역회사에서 주는 일일 공수 싸인을 받아가야 한다. 그것을 증거로 용역회사는 파견한 회사에서 돈을 받는다. 대기업 S전자 과장은 아침밥 영수증을 보고 말했다.

“이것은 내가 판단할 문제를 넘어서네요. 일은 한명 했는데 4인 밥값에 사인해 줄 수는 없어요. 현장소장님 오실 때가지 기다려 주세요.”

소장이 왔다. 문제를 설명 듣고는 내게 말했다.

“식사 한 명 분만 싸인해 줄께요.”

현장소장에게 말했다.

“일 못하고 간 사람들 차비는 못 주더라도, 부잣집에서 숟가락 하나 더 놓으십시오.”“부잣집을 떠나서, 기초 교육 안 받은 사람 보내면 안 되는 것, 혈압 환자 보내면 안 되는 것 알면서 보낸 용역회사 잘못입니다. 용역회사 가서 받으세요.”

나는 하릴없이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대기업 P건설에서 ‘안전기원제’를 올렸다. 작업자들은 세 시 반에 일을 마치고 강당으로 모였다. 성균관 집례관이 기원제를 주도했다. 봉행, 신위봉헌, 분향, 술 올리기, 축문독촉, 그리고 참석자들의 성의 표시와 배례 순서로 이어졌다. 나도 담배 한 가치(지갑을 집에 놓고 나왔다) 놓고 배례했다.

음식을 푸짐하게 차렸다. 한 200명 충분히 먹을 만한 양이었다. 떡은 작은 트럭으로 한 차정도? 되었다. 고기와 막걸리도 푸짐했다.

기원제는 내게 익숙하다. 현장을 돌아다니며 흔치 않게 보기 때문이고, 몇 십년 전, 매 해 농민과 공장 여공 조동조합 합동 기원제를 지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이 가장 진실한 것이다. 민주주의 염원 기원제는 당시의 우리들에게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것이었다. 출근 투쟁으로 마루타처럼 매맞는 여공과 전경환이가 해 먹은 도입우 여파로 거덜 난 농민들에게 간절한 것은 민주주의였다.

젊은 농민들은 음복 후 여공들이 내 뿜는 막걸리 세례를 얼굴에 맞고는 오히려 희희낙락했다. 노-동 기원제는 가난한 사람들의 축제의 장이었고, 연대의 장이었다. 상호 위로와 치유의 장이었다. 이들의 기원제는 경직된 건축회사의 기원제와는 영 달랐다.

지금은 성균관 집례관이 기원제를 집도하지만, 예전이라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건축 현장에는 무당이 집도하는 ‘고사’를 지냈다. 고사 비용은 무척 비싸다. 현장 소장의 주머니 돈이 아니라, 하청 회사의 부조금들이다. 대기업 현장 소장은 돈을 지불한 대가를 받는다.

어렵게 인터뷰한 새끼무당의 이야기는 ‘을화’의 내용과 같았다. 고사를 집도하는 늙은 무당이 있다면 여러 명의 젊고 아리따운 새끼 무당들이 있다. 보수를 두둑이 받은 새끼무당 중 하나는 대개 몇 개월간 현장소장의 애인이 된다.

4. 여성 건축노동자들

H 건설현장에서 여자목수가 경량철골, 내장 일을 하고 있었다. 여성으로서는 조금 무겁게 여겨질 대형 타카를 어깨에 메고 작업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한 팀이 되어 우께(도급노동)하면 도합 40만원 선일 것이다.

S 건설 현장에서 페인트 여공이 기둥에 테이핑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바삐 움직였다. 나는 기둥 주변의 장애물들을 치웠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자마자 일당이 얼마인지 물었다. 그녀는 10년차, 9만원을 받는다고 했다.

여공들은 대개 타일 조공, 페인트, 도배, 드물게는 내장목수 조공도 있다. 방수, 마감청소, 이사 청소도 여성들의 몫이 크다. 타일 여공 일당이 가장 높다. 부부가 함께 일한다면 하루 도합 40-50 만원을 받는다. 그만큼 타일 일이 어렵다. 오랜 숙련 과정이 필요해서 기능을 익히기도 어렵다.

중년 여성들의 일거리라야 식당밖에 없다. 그러나 식당의 노동은 해 본 사람만 안다. 일 자체도 고단하지만 손님들 접대하기란 보통 일이 아니다. 감정노동까지 겸해야 하기 때문이다. 건축여공들은 이구동성으로 식당 노동은 할 게 못된다고, 끔찍하다고들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여공은 H누나이다. 모든 면에서 나보다 나았기 때문에 연하이지만 누나라고 불렀다. 기능이 뛰어나서 반장을 제외하고는 임금이 가장 높았다. 그녀의 자랑은 지방대학 박사과정인 아들이었다. 아들이 학위를 받으면 아주 좋은 차를 사 주는 것이 그녀의 꿈이었다. 그녀의 집에도 가 보았는데, 동해안 큰 냇가 주변에 넓직한 단층 슬라브였다. 집은 가족들이 모이는 명절 때를 제외하고는 별로 쓰지도 않았다. 30여 년의 오랜 노동으로 그녀의 손마디 마다 관절염이 있었다. 아픈 손으로 아주 야무지게 작업했다. 그녀는 육체를 초월하는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가? 술 취한 동료가, 함께 일하던 동료가 성 추행하려는 바람에 그녀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제기랄, 그 뒷수습을 하러 내가 내려가서 고생했다. 피해 여성이 고소하면 회사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가해 남성에게 술을 진탕 사 먹이자, 술술 뱉아냈다. 거대 현장이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이라서 단 두 명만 일했단다.

“지가 내 마누라라도 되나, 모든 힘든 일은 다 내가 했다. 그러고도 품값이 나와 똑 같다. 떼돈 벌면서 내게 무엇을 해 주는가?”

술 취해 방어 능력이 없는 여성에게 그랬단 말이지? 너보다 힘없는 여성에게 그랬단 말이지?

나는 H누나의 경우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가해자의 ‘욕망이 증오로 바뀌었는가, 증오가 욕망의 옷을 입었는가?’ 아니면 노동의 고통이 다른 식의 보상을 찾도록 했는가?

몇 십 년 전에는 건축 현장에 여성도 목수를 했다. 남자들과 똑 같이 못 주머니 차고 일했다. 여자라 해서 머뭇거리거나 ‘여자인 양’ 하는 법이 없었다. 남자들이 어깨에 메고 나른다면 그녀들은 판넬을 머리에 이고 날랐다.

미모는 죄가 아닌데도 여성들에게는 항상 천형처럼 붙어 다닌다. 아르바이트하던 미모의 외국 여성이 내게 털어놓은 이야기가 있다. 아주 친한 동료였다.

“배운 사람이나 못배운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돈 많은 사람이나 다 똑같아요. 왜 그렇죠?”

왜 그러냐는 물음은 만나는 남성들 모두 성을 요구한다거나 유혹한다는 뜻이다. 건설 현장에도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이 돌았다. 대개 여공들은 남편이 아파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는 경우가 많다. 친척을 따라 일한다면 별 문제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오야지들이 여공에게 성 상납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것이 사실인 듯해서, 어떤? 부인이 여럿인 오야지들이 이었다.

합의와 동의하에, 사랑하는 사이라면 문제될 것 없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성상납은 이 나라에 희망 없음의 상징이다.

다른 모든 사랑의 이야기처럼 아가서를 읽다 보면 사랑의 신비와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결코 성을 사소한 문제로 생각할 수 없다. 도대체 강제적 성 관계를 시도하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강제란 사랑하는 사이에서 있을 수 없다. 만약 폭력에 길들여진 관계라면 사디즘과 매저키즘으로 뒤엉킨 관계일 것이다. 사랑의 신비는 생 떽쥐베리가 말하듯, “그 사람을 향해 나아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 사람을 품에 안으려는 욕구”이다. 이런 욕구만이 사랑은 너와 나만 아니라, “제3의 것”을 바라보게 한다. 사랑은 그 자체로 “초월적”힘이 되며 프랑스 60운동에서 보듯, 혁명을 가능하게 한다.

 

 

의식노동[노동이야기]-⑩

의식노동[노동이야기]-⑩

이 재 원(한철연 회원)

 

 

1. 만추(晩秋)

브레히트는 묻는다. 신화로 가득 찬 ‘아름답고 견고한 저 테베의 상들은 누가 지었는가?’ 사람들은 대답할 것이다. ‘테베의 왕들이 지었겠지.’

어르신을 따라서 한적한 시골에서 며칠을 보냈다. 새벽달에게 농담하다(고 쓰고는 애인 생겨 달라고 떼쓰다고 읽는다). 아침 물안개를 즐기고 알을 품는 논병아리를 구경하며 보냈다. 한적한 곳에서는 노래도 불렀다. 고추잠자리 가성이 안 올라가서 며칠 연습했다.

매 끼니를 얼마나 잘 먹었는지, 죄책감까지 들 정도였다. 죄책감의 근거는 만나로 연명하던 광야인 즉 누가 한 수저 더 먹으면 다른 사람은 굶는 떠돌이 히브리인들의 삶에서 그들 지도자들의 ‘먹기를 탐하는 자, 목에 칼을 댈지라’는 경고이다. 어르신의 냉엄한 눈초리인즉 호된 꾸지람을 듣다 보니 나를 괴롭히는 귀신들이 도망갔다-상처들이 치유되는 깊은 시간이었다.

그 지방의 명찰을 구경 갔다. 절은 새로 개축했다. 숙련공들의 솜씨가 잘 드러나는, 목재들의 이음은 틈새 하나 없었고 3포 양식의 화려한 건축물이었다. 20년 전 절 짓는 비용은 평당 천만 원이었다. 단청 공사를 하고 있었다. 단청공들은 작업 조건에 따라서 때로는 누워서, 때로는 앉거나 서서 작업하고 있었다. 20년 전 단청 공사 가격은 300만원이었다. 지금의 비용은 추정도 못하겠다.

절 뒤켠에 단아한 황토방이 있었다. 만추의 주변 경관과 참으로 잘 어울렸다. 누구라도 그 곳에서 머물러 살고 싶도록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스님은 이것을 ‘내가’지었다고 했다. 공장에서 목재를 깎아다가 현장에서 짜 맞춤하는 공법이라면 평당 약 3백만 원, 목수와 인부들이 직접 작업한다면 건축 비용을 추정할 수 없다.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 1956)

 

자본주의의 꽃을 금욕의 상징인 절에서 본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부처님께 절 공양하는 것이 많은 신도와 스님들의 소원이라는 것을 들었다. 새로 지어도 고풍스러운 매력을 지니는 전통 건축양식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러나 테베의 성을 지은 것은 왕들이 아니듯이, 절을 공양하는 것은 헌금한 사람이나 스님들이 아니다. 오막살이를 보면 그 속에 사는 가난한 가족들을 생각하듯이, 신축 절을 보면 온 몸이 아픈채 노동하여 가족을 부양하는 목수들과 퇴역쟁이들을 생각한다.

스님과 차 마시는 자리에 동석할 수 없었다. 돈 냄새가 진동해서라면 내가 너무 애큐트(acqute)한가? 주지스님은 야생의 버려진 사슴을 주워다 기른다 했다. 사람 손을 타고 큰 사슴은 사람들을 잘 따랐다. 나는 또다시 스님의 자기 신비화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야생 사슴이 길거리에 내버려져 있을 턱이 없기 때문이다. 스님 자신이 추측의 단초를 주었다. 근처 사슴 농장에서 이 아이(사슴) 시집보내, 새끼 한 배를 내었다고 했다.

오래 전 일이다. 집에서 키우던 염소가 새끼를 낳고 죽었다. 어린 것들을 가족들이 우유 먹여 키웠다. 얘들이 사람을 얼마나 잘 따르는지, 배고프면 마루앞에 와서 매애-하고 울었다. 귀엽다며 욕심 많은 사람이 한 마리를 가져갔다. 다른 한 마리는 성장하자, 집 어딘가에 묶어놓았다. 사람이 다가가면 개가 주인에게 애교 부리듯이 커다란 뿔을 조심스럽게 들이밀거나, 두 발로 서서 펄쩍펄쩍 뛰었다.

‘일부작 일부식(一不作 一不食)’을 실천하는 스님이 계셨다. 그가 정치력이 넓어져, ‘절(국립공원) 입장료 받지 말자‘는 운동을 했다. ’중이 손이 없나 발이 없나, 부처님이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일해서 먹고 살라‘고 일갈했다. 이 운동 발전하면 절에서 헌금 받지 말자라는 주장으로 번질지도 모를 참이다. 그는 종단에서 쫓겨났다. 그 후 진보파 스님이 종권을 잡자 승첩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몇 십 억 헌금 뒤에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을 본다. 누구는 극락 가기 위해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타인을 자기 도구로 삼는다. 이는 기독교, 천주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 건축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2. 노동자의 자기방어 기제들-원인들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다. 누군가는 내가 이슬만 먹고 사는 사람으로, 돈 필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소히 돈 들어갈 데가 많다. 서사 작업도 해야 하고 독서도 하고 술도 마시려면 돈 들어간다. 남는 돈은 친구 발전을 위해 쓰기를 바란다. 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 일하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띄엄 뛰엄 일해도 워낙 사람이 없다보니 용역회사에만 가면 일감이 있었다. 윤 씨, J를 포함해 여럿이서 기존 현장에서 바라시 작업을 했다. 공정표에 바라시는 콘크리트 타설 후 15일 지난 후 해야 한다. 그러나 이곳 현장은 어제 콘 타설했다. 조심스럽게 해체작업 한다 해도 양생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콘크리트는 잘 굳지 않을 것이다.

바라시는 우선 갓다(카터, 쇠로 된 절단기)를 이용해 형틀 짜면서 여기 저기 묶은 반생이를 끊는다. 이 작업은 쉽지 않다. 큰 갓다로 하면 무거워 팔이 아프다. 작은 갓다로 하면 힘이 들어 팔이 아프다. 끊고 또 끊어내다 보면 다 끊겠지, 하는 생각으로 작업해 나갔다. 그 다음인 즉 하리(보)의 형틀과 상판(슬래브)을 이어주기 위한 목재를 털어낸다. 하리 패널들을 연결해 주는 핀을 제거한다. 만약 핀을 재거한 다음 헌치를 털면 갑자기 폼들이 밑으로 쏟아지게 된다. 작업 순서를 뒤바꾸면 위험하다. 삿보도(지주 동바리)들을 가로 세로로 이어주는 후리도메 철봉들을 제가한다. 동바리는 정확히 15일 후에나 제거하게 된다.

하리통 바라시 작업 후에 다른 사람들이 자재를 정리하는 동안, 김 팔뚝이(나의 팔뚝 두 배를 가졌기 때문에 김 씨에게 붙여진 별명)와 손을 맞춰 벽체 해체 작업을 했다. 그는 젊고 공손했으며 바라시 전문으로, 유능하기 짝이 없어, 저녁에는 애인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한다고 했다. 우선 벽체의 다대(거푸집을 똑바로 세우기 위한 철봉)를 제거한다. 한 사람은 철봉을 잡고, 다른 사람은 철봉을 고정시킨 반생이나 후크, 즉 철봉을 폼에 고정시킨 재료를 제거한다. 다대(세로)철봉을 폼에서 분리시켜 정리한 다음, 같은 방식으로 요꼬(가로) 철봉을 제거한다. 벽체 폼 핀을 제거한 후, 한 사람은 폼을 잡아주고 다른 사람은 빠루(바라시 대)로 단단하게 벽체에 붙은 폼을 떼어내 정리한다.
해체란 것이 높은 곳에서 아래로 재료들을 내리는 것이라서 중력은 가중된다.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작업하는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하다 다치는 사람은 무능하다. 두 달 전 공정 때, 언어장애인 Y가 다쳤다. 무식하나 힘 좋고 시키는 대로 막일하는 그를 사장(오야지)으로 호칭했다. Y가 오른 손 엄지손가락 큰 뼈 금이 가고 작은 뼈 골절 후 몇 개월이 지났다. 그의 엄지는 움직이지 않는다. 산재를 청하기 위해 관리자들에게 서류에 사인을 부탁했다. Y에게 돌아온 대답은 ‘반장 해임’이었다. 산재 난 현장은 보험료가 올라가고 하청에서 불이익 받기 때문이다. 이런 정책 덕분에 유리한 것은, 즉 산업자원부뿐이다.

화병이 났다. 노동하면서 일 때문이 아니라 공손하지 못하거나 교양 없는 사람들의 말 때문이다. 노동자로서 원색적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각양의 사람들을 만나는 행운을 누리는 데에는 비용이 든다.
레미콘 공장 신축 현장이다. 평택항에서 일했던 팀이 옮겨왔다. 팀장이 작업을 지시하며 나와 J를 향해 말했다. “이씨, 타이 빼먹지 말고 다 꽂아. 저번 (평택항) 옹벽 핀 네 개 안 꼽았어.” 내가 물었다. “옹벽 터졌나요?” 터지지는 않았단다.

J가 나에게 말했다. “거봐요. 내가 핀 잘 꽂으라 했죠?”

순간, 처녀들이 시집가기 위해 안방 가는 그날까지 ‘승질’ 더럽다는 소리 듣지 않기 위해 상대 남자에 대한 불만에도 주둥이 꾹 다물고 있듯 하기는 어려웠다. 나는, “아, 씨발 너도 함께 핀 꼽았잖아” 하고 내 쏘고 말았다.

사정은 이렇다. 나와 J가 작업한 구간을 바라시하던 정씨가 폼과 폼을 연결하는 핀이 빠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행히 바대(폼 외부를 가로, 세로로 연결시키는 철봉)가 핀 빠진 곳에 붙어있어서 콘크리트가 터지지는 않았다. 출 퇴근길은 지루하다. 정씨는 심심파적으로, 재미있게, 핀 빠트린 노동자들을 조롱했다. “개쌔끼들이 손이 얼었나봐”, 이런 식으루다가.

J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나를 방패막이로 쓴 것은 천하고 비겁하다. 노동자들이 자기방어기제를 쓰는 이유는 한 가지 이유이다. 팀에서 찍히면 일하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팀을 떠나, 다시 외톨이로 이 현장 저 현장 떠돌아 일을 다니기로 했다. 야비한 인간들과 어울려봐야 득이 될 턱이 없기 때문이었다.
?

3. 일하는 사람들의 책임 한도

평택 항 작업 현장 앞 도로에는 이른 아침부터 수입 곡물을 운반하는 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 현장은 수입 곡물 터미널 신축이다. 일하는 사람들은 이 건물이 무었을 하든 관심 없다. 일해서 품값을 받아 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무기 공장에서 일해도 되는가? 원자력 발전소 신축 일 해도 되는가? 지엠오 곡물 수입 건축물을 지어도 되는가?

무기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기 때문에 무죄인가? 박그녀는 외국에 있었으므로 진보당 해산 청구 국무회의에 전자 싸인을 했으므로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것인가? 내가 원자력을 짓는 것이 아니라, 높은 사람들이 시켜서 일했을 뿐이지, 원자력 주변에 많이 태어나는 지진아들에 대한 책임이나, 반감기 수억 년의 방사능 폐허에 대한 무한 책임져야 하는 후손에 대한 책임은 없는가?

일하는 사람들의 책임한도에 대해서 물을라 치면 노동자의 가치라는 문제와 떼어놓을 수 없다. 노동하는 나는 단순히 생산력의 도구인가, 아니면 나는 생각하고 계획할 수 있는 존재로서 노동하는가의 여부이다. 전자라면 자본에 착취당해도 싸다. 후자라면 범죄와도 같은 노동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에서 오신 손님이 앞에서의 여행에 함께 했다. 그는 국내에서 회자되는 지엠오 식품이니, 광우병 쇠고기니 하는 논의들에 대해서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일상 그것들을 아무 문제없이 먹기 때문이다.

지엠오 식품이나 쇠고기가 미국과 한국의 잣대가 다르다는 설명을 하기란 요령부득이었다. 미국에서는 지엠오 식품이 없다. 이것을 허가 안하기 때문이다. 유독 국내에만 건너오는 것이 지엠오 농산물이다. 쇠고기 역시 미국에서 유통되는 것은 월령이 낮다. 송아지가 성우가 되면 바로 시장으로 간다. 우리 식탁에는 월령에 상관 없는 고기가 올라온다. 그러나 자국 시장에는 송아지에서 갓 성우가 된 고기를 유통시킨다 . 그러니 그 나라 사람들은 동양 어느 나라에서 벌어지는 촛불 시위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엠오 농산물은 광우병과 같이 위험하거나 더 위험성이 크다. 자신들을 ‘자연의’라고 칭하는 사람들인 즉, 야마기시 학원의 영향을 받아 인체에 자연 치유 능력이 있다고 믿는 이들이 어떤 새로운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엠오 농산물은 우선 인체의 약한 부분인 관절, 물렁뼈를 친다. 2년간 지엠오 밀을 먹인 쥐에게서 종양이 솟아났다(한겨레 21). 종래의 실험용 쥐 검사는 6개월이었다. 그렇다면, 지엠오 곡물을 먹고 큰 축산물들은? 그러한 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지엠오 농산물로 만든 식용유, 밀가루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건강은?

미국 손님은 미국이 사람과 동물에게 그토록 해로운 물건을 다른 나라에 파는 부정의한 나라가 아니라고 믿는 듯 했다. 그러니 지엠오 논쟁이니,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 부정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 이해시킬 수 없는 부분은, 보수주의자 손님이 미국 공무원의 자국 이익을 위한 행위, 도덕적 불감증 문제였다. 미국의 어느 판사는 한 미간 쇠소기 비밀협상이 끝난 새벽에 일어나 스위스 은행에 동결되어있던 이명박 회사 자금 해제 서류에 싸인을 했다(한겨레21).
?

?4. 데모크라시-국민의 독재

미국 손님으로부터 자신이 가꾸는 정원 손질에 대해 들었다. 정원에 여러 가지 나무들을 심었다. 그 곳에서 풀이 자라면 야단난다. 이웃에서 곧바로 신고가 들어간다. 그러면 벌금을 내야 한다. 따라서 보름에 한 번 꼴로 풀을 베어주거나 잔디밭의 잡초를 제거해야 한단다.(황금광 시대),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의 부정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네들의 민주주의란 부러울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국민의 독재란다. 공동체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지, 개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민주주의란다. 수많은 이민족들이 함께 사는 곳이라서 질서 유지를 위해서라도 민주 독재가 더욱 철저하단다.

노동 현장에서는 노동자에 의한, 노동자를 위한 노동이란 꿈도 못 꾼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일을 지시하는 사람들의 강제가 휠씬 많다. 노동자는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요, 명령은 관리자들이 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딱 잘라 정신노동자와 육체노동자라는 이분법이 작용한다.

곡물하치장 공사이후 유치원 신축 공사장을 갔다. 직영 목수 8명이 있었고, H인력에서 가끔 보는 이들 3명과 함께 갔다. 오야지가 일하는 우리들 주변에 지켜 서서 사사건건 일을 지시했다. 수시로 일의 방식을 바꿔 지시하기도 했다. 하루가 무척 길었다. 오야지의 말이 스트레스가 되기 때문이다. 하루가 무척 길었다. 오야지의 말이 스트레스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 날은 J도 함께 갔다.

누군가가가 말했다.

“저 오야지와 함께 일하기는 힘들겠어.”

압권은 함께 일하러 간 X노인의 궁시렁이었다. 오야지가 안 듣는 곳에만 가면 노인이 한 마디씩 했다.

“너는 손이 없냐 발이 없냐, 네가 해라 이자식아.” “너는 기본이 틀려먹었다 이자식아. 아침 밥도 안 멕이고 (쉴)참에 라면 주는걸 보고 알겠다.” “가만 있으면 알아서 할 터인데 아주 나쁜 놈이구먼.” “이제 퇴근한다 이눔아, 나는 너와 일 안할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노인이 말했다.

“못주머니 차고 함께 일하는 오야지하곤 일 할 만 하지만, 못주머니 안 차고 지시만 하는 사람과는 일하기 힘들다. 함께 일하는 사람은 품값도 더 쳐준다. 목수 힘든 거 알기 때문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X노인이 사회성이 부족해 보일 수도 있다. 오야지와 잘 지내지 못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X노인의 생각에는 일하는 사람들의 자존심이 반영되어있다. 오야지는 자기는 일 시키는 사람, 정신노동자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목수 편에서는 노동 자체가 무의식적이 아니라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하는 작업이다. 가장 효과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찾아 작업한다. 따라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가 불필요하다.

기왕에 원자력 발전소 이야기가 나왔다. 몇 년 전에 완공된 신고리 원자력 발전소 4개 는 아직 가동을 못하고 있다. 원자력발전소 부품 비리와도 관계있는 모양이다. 원자력 안전위원장이라는 사람이 인터뷰한 내용을 보았다(노컷 뉴스). ‘발전소를 당장 세울 만큼의 문제될 부분은 없다… 심각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했다. 산업통상부 장관은 전수조사결과 지금까지 ‘심각한 문제는 없다고 들었다’고 했다. 누구인지 정확치 않으나, 어느 인터뷰이는 비리 품목의 부품들은 ‘외국에서도 사용한다‘고 말하더란다.

통속적 인간인 나는 스즈키 인트루더를 탔다. 다른 사람들이 그러하듯, 돈을 만지자 맨 처음 이것을 샀다. 국산 오토바이의 성능에 항상 불만을 가지고 있다가, 지축을 울리는 그 소리와 미소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애인 같은 모습에 반해서 샀다. 우연히 오토바이에서 국산 600CC용 부품을 발견했다. 정품이 아닌 비품을 사용한 오토바이는 생명의 문제와 연관 있다. 크게 손해 보고 원 주인에게 되팔았다. 개인 생명 달린 오토바이와 원자력사고를 비교할 수 있으랴만, 내 경험에서 할 수 있는 유비는 이것 뿐이다.

부정으로 검사를 통과한 원자력 부품에 대해 ‘별 문제 없다’고 말하는 이들은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윤리불감증 정도를 넘어서 범죄가 확실한, 국정원과 군 사이버 사령부(기무사)의 선거 개입까지도 무조건 편드는 사람들이 이정권의 수혜자나 언제든지 신분 상승 기회가 있다고 믿는 엘리트들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음에 놀랬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메말라 빠진 한 마디밖에 할 수 없다. 방송과 언론이 국민 의식을 장악하고 오랜 반공 교육을 통해 주입받은 것들이 작용하고 있다고.

무엇인가 혁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혁신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확실한 것은 민주주의부터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재 투쟁의 시기가 지났다면 다시 올 투쟁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일 게다.

읽어주신 분들게 감사 드린다…….

 

 

가을 프롤레타리아트[노동이야기]-⑨

가을 프롤레타리아트[노동이야기]-⑨

이 재 원(한철연 회원)

?

?

1. 일하러 오가는 길

H인력으로 가는 새벽길은 이 도시의 번화가를 거쳐 간다. 우선 밤을 새워 일하는 커피 전문점 종업원들을 본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젊은이들이 모이는 나이트클럽이 있다. 토, 일요일은 새벽까지 클럽 앞에서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다. 한 눈에 보아도 알 수 있는, 남녀들이 만들어내는 각양의 그림들을 목격한다. 큰 길을 건너면 뒷길 형을 한 번화가이다. 여기에서도 술 취한 젊은이들의 각양의 행태를 본다. 편의점 데크마다 남녀들이 엉켜 쓰러져 잠들어있다. 시청의 젊은 청소원의 작업과 폐지 줍는 정신지체 부부의 작업이 겹치기도 한다.

퇴근길에도 이들 부부를 만난다. 각양의 폐지더미와 함께 길목 한켠에 앉아, 스피커와 같은 고물들에서 쇠붙이와 나무를 분리하는 작업도 한다.

나는 이들의 작업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싶은 충동을 참는다. 차마 핸ㅡ폰을 들이댈 수 없다.

십 수 년 전, 광부를 그리는 떠돌이 화가, 나중에는 천주교 공소의 주임이 되어 그림을 그리던 화가의 말을 들은 적 있다.

“갱도를 올라온 광부들이 한숨을 푹 쉰다. 차마 그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지 못한다.”

?

2. 데마찌-J의 절망

평택 항 현장은 며칠째 최소 인원만 일하러 간다. 어느덧 구조물 마무리 공사 시기라서 H인력 일감이 뚝 떨어졌다. 비도 자주 오가는 통에 더욱 일 할 날들이 드물어졌다. 반장들은 평소 일하던 이들 중 성실한 사람 몇 명만 데리고 갔다. 나는 나대로, J는 J대로 일을 한 참 안했다. 전화로 ‘오늘은 일 나가자’고 합의했으나, 우리는 오늘도 일거리를 찾지 못했다.

평택 항에 일 나가던 이들 중 간택되지 못한 윤씨, 정씨, J와 나는 둘러서서 잡담을 나누었다. 정씨와 J는 경마장에서 만나 밥도 먹고 마권을 사기도 했단다. 그 둘은 지금 수중에 한 푼도 없다. 기적 같은 이는 윤 씨이다. 그는 여름에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현장에서 보는 윤 씨는 시체와도 같았다. 햇빛에 그을은 얼굴은 핏기 하나 없고 눈은 초점 없는 생선의 그것 같았다. 금방 쓰러질 것 같이 보였다. 왜 그리 열심히 일하느냐고 묻자 “손자 키우려고”, 또는 “무조건 일 나오는 거야”라고 했다.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 관절은 어떠냐고 물으면, “아픈 데는 없어, 아직까지는”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체력을 타고 태어났다. 오래 된 3층짜리 작은 상가가 그의 소유이다-노동하여 건물주가 되다니, 대단하다.

뒤늦게 윤 씨만 팔려나가고, 나머지는 돌아가야 한다. J가 “소주 한 잔 사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한 참을 걸어 은행 근처 편의점 파라솔에 자리 잡았다. 나는 컵 라면을, J는 ‘휴식시간’을 안주삼아 소주를 마셨다. J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번에는 들어주기 곤란할 정도의 이야기를 했다.

?이재원

“형님이 양주 사주던 날까지 경마에서 꼴아 박은 돈 생각하면 참 후회막급이네. 방세라도 줄 걸…”

보름 전 일이다. 그는 모아둔 돈을 가지고 경마장에 갔다. 돈이 바닥났다. ‘성질났다’. 집에까지 걸어와서는 신용카드 빛을 내어 다시 경마장으로 갔다. 그리고는 다 쏟아 부었다. 그날 저녁, J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 술을 사주며 나는, “인간이 귀신을 어찌 이기겠나. 할 수 없지”라고 했다. 내가 귀신을 믿어서가 아니다. <정념>인 즉 ‘한 대상에 대한 정신활동의 집중화’, 고착화(Katexis)라는 것이 신적인 힘들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뜻이었다.

그토록 허망하게 돈을 낭비한 후에 일하기 싫은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경마에 집착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그의 비극적인 가정사가 있고, 학력과 관계없는 무학에 가까운 난독증도 있다. 즉, 그는 지식과 경제, 양자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인 셈이다. 그에게 듣는 가장 행복한 날들은 할머니가 생선을 구워, 그것을 뜯어 그의 밥 수저 위에 올려주던 어린 시절이었다.

최소한의 윤리도 걷어치우고 도박을 조장하는 경제정책의 뒤켠에 사람들의 희망 없음이 있다. 정선 카지노 동네 호텔에 묵는 사람들은 한밤중에 천정에서 커다란 손이 나와 휘젓는 통에 기절초풍한다는 이야기부터 중고 좋은 차를 샀는데 사고 났다는 <카더라>까지, 도박의 결과 목숨까지 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보도가 흔하지 않은가. 십 수 년 전 사설 경마장 설립에 50억 들어야 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는 도박 자체가 (범상하지 않은) 자본의 산물이라는 증거요, 또 몇 천 만원 배팅한다는 강남 애마부인 이야기들과는 다른, 사행성 폭력 자본에 절망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위협을 무릅쓰고 돈 안되는 투자를 하는 자본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J는 오늘 방세를 내야 한다. 그러나 돈이 없다. 그가 말했다.

“아무래도, 일해서 (품삯을 받으면) 찜질방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아. 지난번 방세 밀렸을 때 주인이 심하게 뭐라 하더라구.”

당연히 방 얻어 사는 것이 찜질방에 있는 것보다 좋다. 우선 마음대로 식사를 해 먹을 수 있다. 잠도 편히 잘 수 있다. 그는 겨울을 대비해 난방용 유류도 한 드럼 사 놓았다. 찜질방에 들어간다면 겨울나기를 준비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도 유류나 식량을 산다는 등의 계획을 세워 살기가 어려울 것이다. 나는 간신히 한마디 했다.

“H인력에 나오는 그 잡부, 찜질방에서 90일 살았대. 내가 90일 동안 며칠 일했느냐 물었더니 15일 일을 했대. 찜질방에서 잠을 잘 못자기 때문에, 일하기 힘들어. 일하면 방세부터 줘. 일부분이라도…”

J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얼마나 더 고생을 해야 하나? 이렇게 살다가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냥 살아야지 뭐, 혹시라도 반장이 된다면 형편이 나아지겠지. 반장이 되면 여자도 생기겠지, 생활이 안정될 테니까.”

K팀장은 자기 쓰고 저축하는 돈을 제외하고, 한 달에 5백 만원을 부인에게 준다. 하루도 일을 빠지지 않는, 18년간 군 생활을 한 김 노인은 한 달에 연금 3백만 원 받는다. 당연히 그는 개인주택을 지닌 부자이다.

J가 팀장이 될 수 있을른지는 의문스럽다. 술과 경마가 그를 방해하며, 난독증이 건축도면 읽는 것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일용 노동자로 산다는 것 자체가 계획을 세워 사는 일이 어렵다. 나 역시 어떤 사람의 삶을 서사화하려는 작업을 시작했으나, 들쑥날쑥한 경제 형편으로 작업을 완성하지 못한 채로 있다. 자료들 프린트 자체가 않좋기도 하지만, 독서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소주 한 병을 다 마신 J가 말했다.

“소주 한 병 더 사주고 형님은 가세요. 나는 더 앉아 있다가 갈게요.”

?

3. 따

평택 항 현장은 3층 사무동과 2층 지휘 동을 짓고 있다. 공사는 더디다. 날씨는 35도를 향한다. 망치질 몇 번 하면 숨이 헐떡거린다.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어느 순간 쓰러질지 모른다. 쓰러지면 심장이 멈추고 뇌사한다.

?이재원

천정을 슬래브로 가리지 않는 오픈구를 되나우시, 부적합 시공 고치는 작업했다. 유독 내가 이 일을 주도하는 L에게 간택되었다. 힘도 좋고 일도 잘 하는 L은 <그 사람이 현장 일 다 한다>는 칭찬을 듣는다. L이 BT 아시바 위에서, 나는 밑에서 필요한 재료들을 올려주었다.

우선 기존 하리(보) 폼을 뜯어내어 아래로 내렸다. 그 다음 새롭게 치수를 맞추기 위해 작은 폼들을 올려 주면 L이 가와바리, 속고 위에 품을 붙였다. 그리고는 시다 오비끼(직사각형의 9센티미터 목재)를 하리통 위에 각목으로 임시로 이어붙인 다음, 시다 오비끼 아래에 삿보도를 세워 받쳤다. 다시 삿보도 위에 네다로 각재와 철봉을 깐 다음, 그 위에 합판을 깔아 슬래브 판을 완성하였다.

성격이 급한 것인지, 일을 빨리 하려는 욕심 때문인지, 내가 조금만 더디면 L은, “형님 이거이거…”라고 소리쳤다. 일반인들은 거리를 걷기에도 힘든 날씨이다. 한 숨 돌리면서 일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작업 중간에 땜빵작업을 한다. 하리통 빈 곳을 각재와 합판을 이용하여 이어 짜기 해야 한다. 나는 정신이 나가, 땜빵으로 짠 패널을 하리 통에 이어붙이며, 연결 불가능한 빈 곳에 헛못질까지 했다.

사람들은 모두 짜증스러워 했다. 인간이 천사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어떤 일이든 곤란하거나 잘 안 되는 일은 다른 사람의 핑계를 댄다. 재미있게 일해야만 일이 쉽고 능률이 오른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감정을 주체 못한다. 날씨 탓이 크다. 함께 일하면서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방에게 화를 낸다. 손 맞춰 일하는 이들의 감정 까지도 받아야주어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그 와중에 나는 현장에서 따를 당했다.

IMF 당시 어느 은행 지점장이 강제 해직 당했다. 가족들이 그를 노숙자들 속에서 찾아냈다. 그는 집 주소는 물론 자기 이름도 잊고 있었다. 모든 것이 노동과 연관된 우리의 삶에서 직업인 즉 자기의 아이덴티티이다. 해직당한 이는 종교적 파문과 같은 정신상태가 되는 것이었고, 자기 자신인 즉 이름을 잊어야만 살 수 있었던 셈이다.

따돌림을 당한다는 것은 이와 비슷하다. 따 인 즉 노동세계에서 밀려날 위기를 겪는 순간이요, 당하는 이는 현장에 계속 일하러 나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따는 예전에는 어느 현장에나 있었던 일이다. 그래서 목수들은 외톨이로 현장에 나가지 않았다.

J와 손 맞춰 일 할 때는 별 일 없었다. 내가 부족한 부분을 J가 잽싸게 말로, 또는 행동으로 보완해 주었다. 그러나 J가 일 안하는 동안, 갈수록 나와 다른 목수들의 실력 차이가 났다. 목수 현장을 몇 십 년 떠났던 내가 평생 목수만 해 온 사람들과 문제해결 능력이 같다면 그들 목수들을 무시하는 것이리라.

돼지띠 노인은 내게, ‘이 씨는 반생이 틀게 하지 마’라고 말했다. 또, ‘이 씨는 도리반생이 못 박지 마’라고 하기도 했다. 또 다른 사람은 나와 함께 일하다가, ‘당신 목수 얼마나 했어?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라고 말하기도 했다. 매일 하는 일들을 하지 말라니, 이는 왕따인 셈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도리반생이 못 박는 것, 반생이 트는 것을 재산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이 재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나에게 이런 저런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은 왕따 시키는 것이다. 정히 내가 작업하는 것이 불안하다면 정확히 알려주고 확인하면 될 일 아닌가?”라고 받아쳤다.

따를 시키는 사람, 갑은 따를 당하는 사람, 을에게 항상 은근한 경쟁심을 가지고 있다. 갑질 함으로써 현장에서 자신은 스스로 안심하는 심리가 있다. 내가 당하기 이전의 따 대상은 외국인 K였다.

별 생각이 다 났다. 나는 왜 이토록 힘들게 노동하는가? 좋은 노동세상을 꿈꾸기 위해서인가? 다시 학자로 돌아간다면 어떨까? 그러나 내가 다시 몇 년간 책 읽을 형편이 되는가?

견뎌야 했다. 따를 무시하고 내 할 일을 묵묵히 했다. 내가 일 안 나올 수도 없었다. 공기는 한정되어 있으나 날이 너무 더워서 사람들이 일을 하러 오지 않았다. 현장은 항상 사람들이 부족했다.

?

4. 희망의 사제들

가을이 다가오자 현장에는 활기가 넘쳤다. 여름에 한 달 걸릴 일을 온도가 낮아지자 15일 정도면 해치웠다. 현장들마다 마무리 공사로 들어갔다. 덩달아,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일거리가 줄어들었다. 정씨나 J, 그리고 나 같이 자주 일나오지 않던 이들이 가장 어려운 시기이다.

?이재원

그 와중에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일 할 생각 않나고 술 마시게 되는 사회적 사건들이 터졌다.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증거들은 왕따를 당하거나 고독보다 더 절망스러웠다. 4대강 비리를 볼 때와는 또 다른 절망감이었다. 소련 KGB와 자신들의 업무를 비교하는 국정원 직원의 대답(뉴스타파)을 들으며, 민주주의는 불가능할 것 같은 절망을 느끼기도 하였다. KGB가 고르바쵸프 당시 국가안전위원회를 꾸려 사실상의 쿠테타를 일으켰듯이, 관료들이 안전이라는 신념을 조직의 이득인 즉 사적 욕망 충족 수단으로 이용한다면 내란 구성과 똑같이 위험하다. 안전을 개인 욕망으로 만드는 순간 제지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민족과 국가를 제1원리로 하는 파시즘의 안쪽에는 정치 경제 파시스트들의 자기보호 계기가 작동한다.

사람들에게 술도 사주고 통닭도 사주며 대화했다. 그러나 정치관련 대화는 안 하늬만도 못했다. 권력 언론들이 파쇼 자본주의를 고착화하기 위하여, ‘기차 바퀴는 박달나무로 만든다’고 떠들어 대면, 진상을 알아볼 생각도 안하거나 그저 맹목적으로 현 체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라 수용하고 재확대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희망>이 가장 위대한 것이라 했다. 간신히 해석하자면 ‘하느님의 나라는 정의로울 것이다’라는 희망만이 ‘하느님은 전능하다’라는 믿음보다 위대하다고 했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나이가 젊다고 청년이 아니요 백발이라서 노인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가진 사람만이 청년’이라고 했다.

경제도 민주화되는 세계에서만 사람들은 계획을 세워 삶을 살 정도가 될 것이다. 지금처럼 건설 방식이 도급과 하도급 형식이라면 업자들은 배부를 것이지만 일반 노동자의 풍요는 기대할 수 없다. 임금이 생존비에도 못 미친다는 증거가 배우자 없는 노동자들이다. 임금이 생존비 이상 올라간다면 노동자도 자식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경제정책과 임금 정책에서 노동자의 삶의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 <자본>에 따라서, 노동자의 노동력에 임금을 준다면, 실제 생산한 노동의 그 가치에 따라서 임금을 받을 수 있다면 틀림없이 노동자가 살 만 한 세상이 될 것이다. 이런 정책은 오직 <정의로운 자본주의>에서만 가능하다. 구성원의 진정한 행복을 기획하는 사회가 욕망에 기초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못다 한 이야기들[치유시학]

못다 한 이야기들

 

 

?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다시 찾은 할머니의 집

 

시간은 간다는 말도 없이 흘러갔다. 흐르는 시간 동안 할머니는 언제나 내 마음 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차를 타고 가거나 길을 걷다가도 문득 떠오르면, 나는 괜히 눈을 부벼댔다. 어쩌다 한적한 곳으로 가게 되면 꼭 할머니 집으로 가던 그 길 같아서 주위를 돌아보며, ‘우리나라는 도심지만 벗어나면 풍경이 똑 같다’고 혼자 중얼거리곤 했다.

나는 할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고, 임종 소식도 듣지 못했다. 혹시 일이 생기면 연락해달라고 내 연락처를 적어 놓았지만 소용없었다. 한 동안 전화연락이 두절되었지만, 박사학위 논문 심사 중이라서 한 동안 할머니를 잊고 있었다. 그렇게 봄과 여름이 지나고 가을도 지나 겨울 문턱에서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집은 굳게 닫혀 있었다.

다시 찾은 마을은 여전히 고요했고, 할머니 집 뒤 공터에 매여 있던 누런 개만 컹컹 짖었다. 마을 입구의 교회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비탈길을 계속 내려오면 할머니의 집이 나온다. 할머니의 집은 동네 끝, 가장 아래쪽에 있기 때문에 비탈길 끝에서 다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야 한다. 대문이 없는 집의 마당으로 들어서야 비로소 집이 보인다. 할머니가 계시지 않는 집은 적막했고 잡풀의 흔적마저 보이지 않았다. 담이 없기 때문에 겨울 바람은 마치 예전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빈 마당을 돌아나가고 있었다.

집은 기역자로 되어 있다. 원래는 일자형 집이었는데, 간단히 몸을 씻을 수 있고 보일러를 들여놓을 수 있는 공간을 이어서 기역자가 되었다. 현관문을 열면 작은 쪽마루에 방문이 연결되어 있다. 미닫이문을 열고 방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는 화장대와 그 옆에 작은 창문이 있었다. 화장대와 창문 사이 벽에는 작은 텔레비전이 낡은 받침대 위에 놓여 있었다. 방문과 마주 보이는 벽에는 옷장과 이불장이 연결되어 있는 오래된 가구가 있다. 그 옆 벽면에 작은 미닫이문이 있고 그 문을 열면 창고 겸 작은 방이 나온다. 방으로 통하는 미닫이문 옆에 있는 또 다른 미닫이문을 열면 부엌으로 들어갈 수 있다. 밖으로 나오는 문이 있는 욕실 겸 보일러실은 안에서 부엌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곳이 할머니가 거주하는 공간의 전부였다. 그 공간 뒤로 돌아가면 작은 방과 간단하게 식사준비를 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는데, 그 곳에는 외지의 직장에 다니는 젊은이가 세를 들어 살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그 젊은이를 만나지 못했지만, 할머니를 통해 마음씨가 좋은 사람이라는 기억을 지니게 되었다. 그 젊은이는 할머니의 집 여기저기를 고쳐주기도 하고, 가끔씩 할머니의 손발이 되어 준다고 했다.

마당에는 초록색 간이 화장실이 하나 있었다. 문은 오래되어 완전하게 닫히지 않고 색도 바래져 있고, 할머니가 전동 휠체어를 타고 가서 이용하기에는 너무나 불편한 곳이었다. 그 화장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비가 오면 어쩌나, 바람이 세게 불면 어쩌나, 여름에는 너무 덥고 겨울에는 너무 추울텐데 얼마나 불편하실까. 마음과 달리 헤어질 때까지 나는 할머니께 화장실을 지어 드리지 못했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할머니만 안 계셨다. 예전보다 더 많이 어긋나 있는 화장실문을 보자 슬픔이 밀려왔다. 그 문에 덧대어 있는 얇은 판자가 강한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며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돌아가시기 전 오랜 시간을 스스로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고 했다. 국가에서 보내주는 도우미의 도움으로 식사를 해결했지만, 그 도우미가 오지 못하는 날에는 이웃 분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때에도 전화로 안부를 물으면 “괜찮다. 니는 공부 잘하고 있제? 너거 아는?” 하며 나를 염려했다. 괜찮다는 말을 나는 그대로 믿었다. 단 한 번도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 계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학위를 받으면 만나러 가야지, 학위를 받고 나면 소설을 써서 할머니께 감수를 받아야지 하는 부질없는 생각만 했었다. 골목을 돌아 나오며 스스로 “괜찮다. 괜찮다. 너는 몰랐을 뿐이야”라고 되뇌이면 되뇌일수록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지 않아. 넌 어쩌면 일부러 할머니의 말을 그대로 믿었던 것 아니야? 학위? 그런 건 변명이고 핑계야. 왔어야 했어. 절대로 괜찮지 않아.”

당신은 천상 여자였습니다.

 

할머니는 그 나이 대의 여느 사람에 비해 키가 컸다. 앉은 키가 나보다 훨씬 컸다. 결코 여리거나 가냘픈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만은 10대 소녀의 감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초저녁에 울려오는 플루트의 음률 같은 감성은 할머니의 평생을 고통 속에 살게 한 원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삶을 시로 읊을 수 있게 해 준 힘이기도 했다.

한 여름에도 한 겨울에도 나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는 중간에도 수시로 옷매무시를 가다듬거나 머리카락을 곱게 쓸어내리곤 했다. 치마는 언제나 펼쳐져 있었다. 비록 나이 들고 병들어 있어도 단아한 모습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은 형언키 어려운 감동과 함께 비장함마저 느껴졌다.

할머니는 이야기 도중이나 시를 읊을 때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자주 했다. 특히 밤에 혼자 누워 “지난날을 생각하며 시를 지으면 머리가 아프고 기운이 없어서 다음에는 안 한다 해야지” 하고 다짐하지만 또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단순하게 기억력이 좋은 것이 아니라 할머니는 기를 소진하여 두통이 올 정도로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칡넝쿨처럼 헝클어진 자신의 생을 정리하여 반듯하게 뉘어 놓고 가시고자 했던 건 아니었을까.

할머니는 자신이 다니던 울산 병영의 초등학교를 시에서 세심하게 표현했다. 부산고녀, 항도고녀(현재의 경남여고) 등에 대해서도 교복과 머리 모양까지 기억했다. 이야기책(소설)을 좋아해서 일제 강점기 때 장날에 가서 책을 사거나 어른들로부터 이야기 듣기를 좋아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야기책을 좋아했고, 한글과 일본어로 된 책을 읽을 수 있었지만 병에 걸린 이후로는 책을 볼 수 없었노라고 했다. 이제는 좋아하는 책을 맘대로 볼 수 있는데 백내장으로 책을 읽을 수 없다며 허탈해 했다.

특히 아들에 대한 기억은 너무나 생생하게 재현하여 그 고통의 크기와 깊이를 짐작하게 했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결코 마르지 않는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 그리고 안타까움은 거대한 강물이 되어 할머니의 80년 삶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었다. 그 그리움이 크면 클수록 병든 자신에 대한 원망도 깊어갔으리라.

이웃 아주머니는 할머니가 생전에 안 좋은 일은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이웃이 알고 있는 사실마저도 할머니가 스스로 말하거나 인정한 적이 없었노라고 했다. 또 먼저 부탁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심지어 조석으로 끼니가 힘들어도 신세지는 것을 꺼려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웃 아주머니의 말을 들으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자 자신을 향한 애정이었음을 안다. 19세에 꺾여버린 꿈, 이루지 못한 사랑, 어쩔 수 없었던 이별, 그 이후로도 자신의 의지대로 살지 못하고 이리저리 쫓겨 다녀야 했던 삶, 60년 가까운 세월을 옆에서 지켜주고 사랑을 주었던 할아버지에게 차마 과거를 밝힐 수 없었던 죄스러움 등은 할머니를 옭아매고 있었지만, 그래도 놓을 수 없었던 것이 자기애였음을 나는 알고 있다.

몸은 내 것이면서도 내가 어찌할 수 없었지만, 자존심만은 끝까지 지키고 싶어 했던 할머니의 그 마음을 고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기애가 아집이 되고 고집이 되었다 하더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그 마음을 나는 안다. 그 마음으로 80 평생을 모질게 버텨왔음을 알기에 오늘도 할머니 생각에 젖어든다.

그리고 나에게 남은 것은

 

온 몸의 기를 소진하여 두통에 시달리면서도 시를 구상하고, 나를 만나 그 시를 들려주는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아마 시를 생각하는 그 과정 자체가 스스로 자기 삶의 매듭을 푸는 과정이었기에 두통을 앓으면서도 시를 생각하고 또 생각한 것이었지 싶다. 나에게 시를 읊어주고 그 시를 다시 나의 목소리로 들으면서 할머니는 과거를 정리하고,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부정했던 그 과거의 시간들을 서서히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할머니와의 만남은 나의 실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 할머니와의 만남은 ‘시가 과연 사람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한 지적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할머니도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 대담을 신청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할머니와의 만남은 나 자신과 소통하는 길이자 우주로 통하는 길이 되어 있다.

예전에는 무심코 보았던 달이 이제는 나를 깨우는 북과 같다. 가득 차서 흠 하나 보이지 않는 보름달에서 초승달로, 다시 보름달이 되는 것을 보며 우리들의 삶이 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안다. 가득 차면 내보내야 하고, 부족하면 다시 메우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라는 걸 안다. 또 우리들 모두는 몸과 마음이 미병(未病) 상태라는 것, 그래서 언제든지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병에 걸렸든 미병 상태이든 인간은 귀한 존재이다.

할머니와 함께 한 시간들은 평생이라는 시간 개념에서 본다면 극히 짧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은 할머니와의 만남 이후의 내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처음 알고자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하게 얻었다. ‘시는 마음을 치유한다.’ 그러나 실제로 치유는 시가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하는 것이라는 걸 나는 덤으로 얻었다. 시는 치유로 가는 문이라는 걸 알았다.

세상에 온전한 것은 없다. 우리는 온전함에 가까워지기 위해 삶이라는 여행을 한다. 세상에는 쓸모없는 것도 없고 쓸모없는 일도 없다. ([불혹의 문장들], 알렙) 그렇다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쓸모없는 생명도 없다. 할머니는 초기 구술시에서 자신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손톱만한 벌레만도 못한’ 사람으로 비하했다. 나에게 할머니의 삶은 바람 같고 푸른 잡초 같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바람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나뭇가지를 흔들거나 풀잎을 흔들어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한다. 때로는 우리들의 몸을 빌려 자신이 우리 옆에 와 있음을 알린다. 그러나 바람이 없는 곳은 없으며 갈 수 없는 곳도 없다. 잡초는 언제나 푸르다. 뿌리째 뽑히기도 하고 밟히기도 한다. 정원에 옮겨 심기는커녕 가까이 올까봐 온갖 약을 다 뿌린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나 자란다. 할머니의 삶은 바람처럼 잡초처럼 그렇게 나의 삶 안으로 들어왔다.

다소 불온한 의도로 시작된 만남이었지만, 할머니를 통하여 내가 다시 깨달은 것은 고인 물은 썩지만 흐르는 물은 결코 썩지 않으며, 바다로 가면 바다가 되고 돌틈으로 흘러 들어가면 맑은 샘물이 된다는 사실이다. 또 얻은 게 있다면, 나는 누군가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자각을 얻게 된 것이다. 나에게 있는 능력은 그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고통을 덜어주고자 시를 읊어주거나 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로 만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할머니가 자신의 상처를 내보이고 스스로 치유해갔던 그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앞으로 내가 가야할 길은 그와 같은 힘을 찾아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돌려주는 게 아닐까 한다.

 

*** 이말란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끝을 맺고자 합니다. 그 동안 읽어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누군가가 기억해 준다면 그 사람은 영원한 삶을 산다고 들었습니다. 육신은 가고 없어도 단 한 사람만이라도 기억해 준다면 그 분은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노동이야기]- ⑧

프롤레타리아트[노동이야기]- ⑧

이 재 원(한철연 회원)

?

?

1. 모든 사람을 다 책임질 수 있단 말인가?

평택 항 수입물류 공장 공사현장이다. 바닷바람은 육지보다 체감기온 5-6도정도 낮다. 산소가 많은 바닷가 공기 덕분에 일해도 힘든 줄 모르겠다. 목수 2인 1조로 일해서 더욱 좋다.

며칠 간 J와 손을 맞춰 일했다. 일도 잘 할 뿐 사람이 젊잖다. 고향도 같다. 목수 두 사람이 모이면 그중에 실력이 나은 사람이 있다. 힘으로나 실력으로나 J가 나보다 났다. 따라서 일머리를 J가 이끌었다. 나는 육체 뿐 아니라 머리까지 편했다.

일 끝난 후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혼자서는 주문 받지 않는 물 회(회 국수)가 가장 럭셔리한 메뉴이고, 국수나 국밥 등을 함께 먹었다. 그의 개인사는 듣지 않아도 알 듯 했다.

눈이 가는 곳에 마음이 있다. 처음 J와 손을 맞춰 지하에서 바라시(해체)하는데, 그가 담배를 피우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담배를 내밀자, 그는 3일간 담배를 못 피웠다고 했다. 그는 한 달을 방구석에서 헤매다가 돈이 떨어지자 무작정 H인력을 찾아왔다고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그는 스크린 경마장을 즐긴다. ‘비가와도 눈이 와도 말은 달린다’는 명언을 했다. 얼마를 넣고 가도 한 순간에 없어진다고 했다. 지름 신이 임하는 순간 뭉칫돈을 거는 탓이다.

바라시를 끝내고 가와바리, 즉 공중에 걸쳐놓은 속고 위에 폼을 붙이는 작업도 둘이 함께 했다. 나는 조기, 폼에 적절한 치수를 재어 못 두 개를 밖아 J에게 건네준다. J는 내가 밖아 놓은 못 두 개를 지지 삼아 패널을 속고에 고정되도록 못을 박았다. 우리는 혼자 하는 사람들보다 두 배 이상 작업을 했다. J는 계산도 빠르고, 작업도 차분하게 했다.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함께 작업하니까, 작업 지시하는 반장이 아예 우리 둘을 항상 함께 작업에 배치했다.

ⓒ 이재원

J와 손 맞추어 일 하던 중, 나는 평택 항 현장의 최고참, 돼지띠 노인에게 간택 당했다. 그는 어제까지 외국인과 손을 맞춰 일했는데, 두 사람은 소란하기 짝이 없었다. 의사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이요, 외국인이 노인에게 불평하기 때문이었다. 노인이 다리를 보여주는데, 퉁퉁 부어있었다. 노인은 나에게 재료는 물론 소모품도 모두 갖다 달라고 했다. 몇 일간 노인과 함께 일하는 동안, 내 별명은 졸지에 <데모도>가 되었다. 노인의 주문에 따라 움직이는 내 편을 들어준 별명이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 벽체를 보강하는 일종의 보, 통칭 ‘눈썹’을 ‘되 나우시’, 즉 부적격 작업을 고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노인은 아래에 있고, 나는 보위로 올라갔다. 폼을 뜯어내는데 벽체가 바람에 몹시 흔들렸다. 기분 나쁜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간신히 뜯어내고, 다시 정확한 치수대로 눈썹을 이어냈다.

점심 직전에 비가 내린 날이다. 한 30분을 비 맞으면서 일했다. 땀에 젓은 옷이 비에 젖어 무척 짜증이 났다. 작업을 중단하고 용역회사에 돌아와 돈을 받은 J가 총총히 사라졌다. 그는 좀 전에 넌지시 내게 물었었다.

“이제부터는 무엇을?…”

나는, ‘상명대 도서관에…’라고 응답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일요일이다. 그의 발걸음으로 봐서 늦은 경마장 행이라고 짐작했다.

몇 년 전에 만난 노동자는 <바다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한 달에 두어 번, 돈을 모아서 도박장에 간다. 어느 경우에는 차비도 없어, 주변 사람에게 ‘차비 좀 달라’하면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평택 항 일이 없는 날, J와 학교 신축 공사 현장에 팔려나갔다. 학교 건축은 80년대 말, 90년대 초 건축회사 수석 목수로서 내 전문 분야였다. 따라서 현장이 고향 같았다. 예전 식으로 슬래브 작업을 했다. 횡 800센티, 종 360 센티 슬래브 여섯 칸 작업이다. 하리, 기둥 형틀을 세웠고 하스라, 즉 보 형틀을 올려놓은 상태였다.

우선 J와 시다 목을 준비했다. 슬래브 종대 치수보다 40-60 센티 정도 짧게 오비끼를 자른 후, 여기에 삿보도를 끼워 받치기 위해 3인치 항 대못을 네 개 박아둔다.

슬래브 하스라 위에서 다른 두 사람이 각목을 횡으로 길게 매달아, 시다 목을 받을 준비를 한다. 준비가 되자, J는 시다 목을 슬래브 위 사람에게 올려주고, 나와 다른 한 사람이 삿보도를 받쳤다. 구름 속에 있던 햇빛이 드러나자, 갑자기 숨이 ‘컥’ 막히는 듯 한 기분이었다.

그다음 시다 위에 네다 재료를 배열한다. 두께 5센티 각 파이프를 30센티 간격으로 깔고, 이음매 부위에 각재를 깔아, 시다와 못으로 고정시킨다. 그리고 그 위에 수지 알판이나 베니야 알판을 못으로 고정시킨다.

알판 슬래브 작업은 십 몇 년 만에 처음이다. 오직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슬래브 깔아갈 때는 물결 흐르듯이 작업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한 쪽부터 한 사람이 한 칸씩 깔아 가면, 그 다음 사람이 하리 통 치수를 맞추면서 다음 칸 슬래브 작업을 해 나간다는 의미이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 작업을 도와주다가, 간신히 작업 방식을 파악하고는 J의 조언을 참고로 맨 마지막 슬라브를 깔아나갔다.

J는 하루 쉬고 경마장에 가겠단다. 도박, 광신과 세뇌를 클리닉 하는 방식에 대해 ‘줏어들은(口耳之學)’ 적이 있다. 나는 J가 경마장 간다고 한 날 새벽에 메시지를 했다. “경마장 가지 말고 강릉 가서 물 회나 먹고 오자.” 잠시 후 그가 전화로, ‘오늘은 경마장, 강릉은 다음에 가자’고 했다. 나는 도서관에 앉아 있다가, 시장으로 갔다. 오리 한 마리, 낙지 두 마리, 전복 세 마리를 샀다. J가 TV에서 보았다며, 이것들을 함께 끓인 음식을 먹어보고 싶다는 말을 기억했던 것이다. 다시 전화했다. J가 당장 오겠다고 했다.

그는 ‘난생 처음 이토록 맛있는 음식을 먹어 본다’고 했다. 옥에 티는, 그가 오리 뼈를 덕수가 십여 년 전 수학여행에서 사다 준 은도금 재떨이에 버렸다는 것이다. 식사 후 그는 총총히 경마장으로 갔다. 나는 혼잣말을 했다. ‘너(나)여, 모든 사람을 책임질 수 있는가?’

대학원 시절, 유학 간 약혼녀로부터 파혼을 선고받은 친구가 빠친꼬에 빠지는 것을 보았다. 그를 따라 빠친꼬장에 가 보았다. 그는 크게 돈 욕심을 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상처를 잊으려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
노동자들이 도박에 빠지는 것은 자기 고뇌에 대한 응답이다.

?

2. 성(性愛)과 경제, 그리고 두목노동자

인간 내면에 대해서는 항상 더러운 이야기만 하게 된다. 전에 가본 적이 있는 H인력에서 멧세지가 왔다. ‘목수 일 많습니다. 일 나오세요.’ H인력은 하루에 100명 정도의 목수를 현장에 보내고 있었다. 나는 평택 항에 고정으로 일 나가기 전까지 땜빵용, 그러니까 고정으로 한 현장에서 일하던 목수들이 안 나올 때 그 현장에 투입되는 인력으로, 이곳저곳 현장을 돌아다녔다. 원룸 현장에서 외국인 Y와 함께 일했다. 나는 그를 <따거>라 불렀다. 키가 크고 힘이 좋은 이를 지칭하기 좋은 이름 아닌가. 그가 서투른 한국 말로 내게, ‘내일 비 와. 애인(자기에게 소개시켜 줄 여성) 있어?’라고 말했다. 나는 ‘없어’라고 말했다. 그가 재차, ‘애인 줘’라고 말했다.

이튿날 비가 왔다. Y와 점심때 국밥집에서 만났다. 그는 머리고기와 소주 두 병을 해 치웠다. 잘 통하지 않는 대화로 애먹고 있을 때, 한국말을 잘 하는 Y의 친구가 왔다. 친구로부터 시원하게 Y의 심중을 들을 수 있었다. Y는 곧 고국으로 돌아갈 참이다. 고민이 있으니, 방금 한국에 온 친구 때문이다. 친구는 목수 일은 되지만, 한국말을 못해서 어디현장에서 일을 시켜줄 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자기 친구를 데리고 일 다녀 달라는 것이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대답을 못 했다.

두 사람이 모국어로 한 참을 이야기했다. 나는 무료해,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었다. 이것이 실례되지 않을 듯 했다. 그만큼 그들은 할 이야기가 많았다.

그들이 나가자고 했다. 어슬렁거리며 따라가자, 콜라텍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J의 친구가 말했다.

“내내 일 하면서 고생하다가, 이런 곳에 와서 기분을 풀지요. 언니들 바글바글 해요.”

플로어에는 할머니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들의 옷차림은 전문 댄서와 같았다. 현실은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적나라하다. 눈치를 보아 하니, 파고다 할머니들이 많은 듯 했다. 노동할 수 없는 여성들은 경제력 있는 남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파고다 할머니들에 비하면 일용 노동자조차도 아주 높은 계급이다.

나는 다시 책을 꺼내 읽었다. Y의 친구가 ‘책은 집에 가서 읽어요, 여기에서는 그냥 놀아요’라고 했다. 다시 둘러보니, 외국어를 하는 젊은 여성들도 많았다.

술 취한 Y가 집요한 내면을 드러내었다. 말끝마다 새끼손가락을 들어올리고, <애인>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아마도 hook-up body만 중요한 곳에서 ‘아름다운(젓가슴, 사랑, 육체)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플로어의자에서 사람들이 끈적거리는 눈으로 다른 사람들의 뒤를 쫓았다.

60대의 O목수는 좋은 차를 몰고 다닌다. 우람한 몸에 성질도 장기(長氣)해서, 화내는 것을 본 적이 없는 호인이다. 그 역시 <땜빵>이라서 나는 그의 차를 타고 몇 군데 현장에 일하러 갔다. 그 역시 말끝마다 <여자친구>였다. 외국인 여자 친구와 아라비아 지역 까지 여행을 다녔다. 여자 친구는 몇 년간 출국 했다가, 이제 며칠 후면 한국에 들어온다고 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노동자들에게 감정과 성,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는 답이 없다. ‘손 맞인 즉 땡기는 맛이 없어 유흥업소 여성은 사양’하고 자기만의 창녀를 갖기 위해, 입에 담기에도 꺼려지는 인간 종들이 <장자연>을 만드는 세계에서 경제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빼았기는) 것이 현실이다. 더 얻은 사람이 있다면 빼앗기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경제적 형편 대문에 사랑을 빼앗긴다는 것은 소설이 아니다. 이런 저런 사정, 특히 경제적 형편 때문에 남편을 버리고 돈 벌러 나왔다는 이야기는 항용 듣지 않는가. ‘생식 능력만 있는 이’(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의미이다)가 성적 상대를 빼앗긴다는 것은 그에게 행복 추구권리, 사랑을 통한 감정 충족 까지도 박탈당한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진다.

노동자들은 반장에게 비 호감적이다. 단지 반장이 우리보다 돈을 더 많이 번다는 것에 대한 질투만은 아니다.

반장 급은 일을 시키고, 목수들이 일하는 것을 감시한다. 일반 목수들이 자주 쉬어야 하지만, 반장들은 한 달 내내 일 할 수 있다. 일당도 더 많이 받는다. 책임이 큰 만큼 돈 많이 버는 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진리를 탐구하는 이들이 일신의 영달을 위해 태도를 바꾼다면 그것은 <변절>이다. 그러나 반장이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도 아니니 그가 노동자 편이 아니라 사용자 편이라고 해서 변절이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의도를 해석하자면, 반장들이 미운 이유는 ‘한 사람의 노예 상태를 다른 사람의 완전한 인간적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서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평택 항 현장에는 반장이 두 사람이다. 월급 받는 총 반장은 모든 데마, 철근, 콘크리트, 형틀을 총괄한다. 목수 반장에게 작업지시를 하는 것도 총 반장이다. 그리고 일당 노동자 목수 반장이 있다. 반장들이 정확히 일하면 ‘되 나우시’는 없다.

지금도 항용 그렇지만, 옛날이라야 몇 십 년 전만 해도 거짓말처럼 돈 잘 버는 오야지들은 애인이 있었다. 대충 서너 사람이 기억난다. 잡철 오야지의 여성은 아기를 안고 현장에 함께 왔다. 현장에서 그녀가 하는 것은 아이를 어르는 일이다. 어느 목수 오야지는 젊은 여성에게서 얻은 아이를 키우기 위해 은퇴할 나이가 훨씬 넘도록 일했다. 둘 이상의 여성을 거느린 미장 오야지는 오통으로 항상 허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애인인 여성들로부터 두목 노동자의 ‘카리스마에 반했다’는 이야기를 우회해서 듣곤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어느 여성의 결정을 이끌어주는 남성다움에 반했다는 것인 즉, 그 여성이 일종의 매저키스트적이거나 자기 독립적(자기중심적이 아니라)이지 못한 여성들일 것이다. 그러한 결합이 바람직할 리 없다. 다만, 그 여성들이 경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면, 그러니까 파고다 할머니들이 엄존하는 현실에서 타인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는 여성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

3. 외국인 노동자와 내국인의 임금

목수들이 아주 흔히 화제를 삼는 것이 외국인 노동자와 내국인 인건비에 관한 것이다. 80년대부터 현장을 떠나지 않았던 O씨가 말했다.

“90년대만 해도 2000년 도에는 목수 품값이 일본이나 미국 수준이 되리라고 예상했다. 당시에는 젊은 사람들이 목수 일을 배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점점 임금이 올라가는 추세였다. 그런데 갑자기 IMF터지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오면서 품값이 오히려 떨어졌다. 여행 비자든 방문비자든 개의치 않고 현장에 와서 일하는 통에 완전히 망했다.”

87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면서 건축노동자들의 품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공공연히, ‘노태우가 우리 형편을 좋게 해 주었다’고 말했다. 지금이야 5,1.6프로의 보수층이 있지만, 권력 지지 기반이 없던 당시로서는 정치가들이 기층노동자들에게 어느 정도 잘 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보다 정보도 많고 똑똑하다. 중소기업 협회 등에서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 인건비가 싼 나라를 만들려고 불철주야 노력한다.

한 나라의 경제가 발전하고 인건비가 비싸지면 값 싼 노동력을 외국에서 끌어들여온 역사는 길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라 당대의 노동자들이 처한 절실한 문제였다. 노동 시간이 짧아지고 인건비가 오를 만하면 자본가들이 가난한 나라의 값 싼 노동력을 끌어들이는 통에 노동자들이 국제적으로 단결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가난한 나라의 값 싼 노동력이 만들어 내는 것은 생 떽쥐베리가 분노하듯이 <살해된 모차르트>들, 짐짝처럼 실려 있는 폴란드 노동자들이 탄 기차의 교육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만이 아니다. 자국과 타국 노동자들의 빈곤의 공평화도 만들어낸다.

매듭을 풀어나가는 자기실현의 길[치유시학]

매듭을 풀어나가는 자기실현의 길

?

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

?

자기실현의 길?

자신의 비밀을 평생 동안 혼자 간직하고 있다가 누군가에게 털어놓기 위해서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 뒤에는 온전한 자유를 향한 염원이 있다. 온전한 자유, 진정한 자유는 세계와 교류하여 나와 세계가 서로 영향을 줄 때 실현가능한 것이다. 삶의 빛은 현실적인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 더욱 빛나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7개월 동안의 만남에서 보여준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한센병에 걸렸다는 사실만으로 개인의 고유성과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한 삶을 살아왔기에 세상을 원망하기도 하고 지금은 없는 기억 속의 이웃들에게 분노하기도 했지만,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며 지난 삶을 정리하는 모습은 한 줄기 빛과 같았다.

그 지난한 삶에 맺혔던 매듭을 말로써 하나씩 풀어나가는 모습을 생각하면 어린 시절의 내 할머니와 어머니의 다림질 모습이 떠오른다. 우물에서 퍼 올린 물로 긴 광목천을 발로 밟아 빨아서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에 널어놓으면 마치 햇살이 내려와 하얗게 부서지는 것처럼 보였다. 바람에 펄럭이던 광목천 사이를 뛰어노는 사이 광목천은 바싹 마르고, 어머니는 그 천을 하나씩 걷어서 풀을 먹였다.

커다란 대야에 마른 광목천을 넣고 어머니가 풀주머니를 주물럭거리면 하얀 풀물들이 나와 광목천을 촉촉하게 적셨다. 광목천을 손으로 주물러 풀물이 골고루 천에 스며들면 다시 빨랫줄에 널어 말렸다. 풀을 먹인 광목천은 햇빛 아래에서 더 하얗게 표백되어 갔다. 빳빳하게 마른 천을 걷어 들인 어머니는 마루에 앉아서 입으로 물을 뿜어 천을 다시 촉촉하게 만들었다. 어머니가 물을 뿜는 소리에 비례해서 어머니의 콧등에는 땀이 맺혔다.

촉촉하게 젖은 광목을 직사각형으로 개켜 보자기로 싸서 발로 밟았다. 어머니의 발 아래에서 광목은 물기가 골고루 퍼지면서 동시에 구김살도 펴지고 있었다. 어느 정도 밟기가 끝나면, 광목은 다듬잇돌 위에서 다듬이 방망이에 의해 부드럽게 다듬어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양손에 방망이를 들고 일정한 속도로 다듬잇돌 위에 있는 광목을 두드렸다.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는 그 어떤 음악소리보다 어린 내 가슴 속을 휘젓고 다녔다. 마당의 평상 끝에 앉아 다듬이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어머니가 광목천과 하나가 되는 착각에 빠져들곤 했다.

다듬이질이 끝나면 할머니와 어머니는 마주 앉아 광목천의 끝자락을 잡고 팽팽하게 밀고당기다가 다리미질을 시작했다. 동그란 쇠 다리미에는 타고 남은 숯이 들어 있었고, 광목천은 다리미가 왔다갔다하는 사이에 잔주름 하나 없이 평평해지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 옆에서 사악거리는 다리미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곤 했다.

할머니가 자신의 삶과 가슴에 맺힌 한을 말로 풀어나가는 그 모습이 마치 누런 광목을 하얀 천으로 만들어가는 어머니의 손길 같았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원망도 미움도 안타까움도 사랑의 아픔도 하나씩 벗어던지는 모습이 지난한 시간을 거쳐 하얗게 탈색되어 햇살 아래 빛나던 광목천과 같았다. 그것은 자기 의지에 의해 자기 본연으로 돌아가는 것, 곧 자기실현의 길이었다.

?

고통이 크면 자신의 삶은 보이지 않는다.

?

처음 만났을 때, 할머니는 자신의 고통을 정확하게 드러내지 못했다. 떠나보낸 아들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마쓰시타에 대한 회한, 먼저 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미안함, 함께 살지 못하는 딸에 대한 아쉬움 등이 서로 뒤엉켜 마치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한은 할머니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살아가면서 하나씩 보태지는 고통은 매듭과 같다. 이 매듭은 삶을 얽매는 질곡이자 현실을 어두움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나의 고통에 함몰되면 내 고통이 너무 크게 느껴지기 때문에 자신의 삶은 보이지 않는다. 이 세상에 오로지 나 홀로 내던져진 것 같은 막막함만 남는다.

할머니의 초기 시를 보면 “나는 왜 이렇게 고통이 많고/ 내 앞에는 여러 가지 시련이 닥치나/ 절망에 싸였다.(시 [내 인생길] 중)”고 고백한다. “약한 자는 아무리 말을 하여도/ 소귀에 경 읽기더라.(시 [내 인생길] 중)”는 표현으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울분을 토해 놓았다. 그러나 시를 읊고 그 시를 내 목소리를 통해 다시 들으며, 시로 못다한 이야기들은 말로 하면서 맺혀 있던 매듭을 하나씩 풀어나갔다.

?

내가 본시 왈가닥한 성격에
참지 못해 그 사이로 뛰어들어
발로 얼음을 타며 돌아다니다가
결국 엉덩이로 얼음에
방아를 찧고 말았네.
내 죽는다고 뒹구르니
길가는 나그네 아저씨가 두 손을 잡아
일으켜 주셨네
너무도 감사하여 맘으로 답례하였네.
– 시 [임진강에서] 부분-

?

http://www.wallsonline.org/beautiful-winter-river/

할머니는 구술한 마지막 시인 [임진강]에서 처음으로 세계와 교류하고 소통하는 표현을 했다. 할머니는 이 시에서 “많은 인파들이 아이 어른 분별없이/ 팽대를 치며 썰매를 타고/ 옆에서는 스키를 타며/ 즐겁게 놀고 있는” 사이에 뛰어들어 얼음을 지치며 놀다가 넘어졌는데, 알지 못하는 나그네 아저씨가 도움을 주어서 고마웠다고 회상했다.

“임진강에는 언제 가보셨어요?” 나의 질문에 할머니는 “어데, 가 본적 없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에게 들었다. 꼭 한번은 가보고 싶대. 그래서 한번 생각해봤다.”라며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큰 소리로 웃었다. “김선생, 어떻노? 얼음이 얼모 팽이도 돌리고 얼음썰매도 탄다. 임진강은 저 우에 있으니 얼음이 더 얼었을 끼다.” 할머니는 눈을 지긋이 감고 혼자만의 생각에 젖어 들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편안해 보여서 말없이 옆에 앉아 있었다. 자신에게 일어났던 사실만 시로 읊거나 말을 하다가 상상으로 시를 읊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시 속에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많은 인파”)이 등장하고, 스스로 그 인파 속으로 뛰어 들어가 함께 놀았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 우물물조차 마시지 못하게 하는 이웃사람들에 대한 원망에서 벗어나 넘어진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나그네에게 마음으로 답례를 하는 것은 어떤 변화일까?

어쩌면 고달픈 현실의 삶에서 희망을 찾고 꿈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닐까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할머니의 팔을 잡았다. “으응?”하며 나를 보는 할머니의 눈빛은 잔잔했다. 얼굴에는 밝은 빛이 서려 있었다. 며칠 계속된 감기로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표정은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할머니는 어두웠던 과거에서 빛을 찾아내어 어둠을 밝음으로 바꾸고 있었다.

?

슬픔이 있어 기쁨은 빛나는 것

?

할머니가 시와 이야기를 통하여 찾아낸 빛은 어린 시절 책에서 읽고 동경했던 임진강에 대한 기억이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갈 수 없었기에 마음 깊은 곳에 꽁꽁 묶어놓았던 임진강으로 떠나서 해보고 싶었던 얼음지치기를 하며 노는 자신을 상상한다는 것은 할머니에게 그 어떤 자유가 찾아 온 것은 아닐까.

온전한 자유란 혼자만의 세계를 떠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행해지는 실천이다. 비록 상상의 세계이지만, 많은 인파들 사이에 스스로 뛰어 들어가 놀다가 넘어지고, 누군가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그 행위야말로 할머니가 원하던 자유였다. 할머니와는 물 한 모금도 나누어 마시지 않으려 하던 과거의 이웃은 넘어진 자기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이웃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과정에서는 늘 과거의 낡은 생각과 결별해야 하는 의식이 따른다. 생각은 생각을 낳고 분노는 어리석음을 낳고, 어리석음은 눈과 귀를 가리고 미혹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이 미혹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자각이 있어야 하는데, 자각은 경험으로부터 시작한다. 지나온 삶을 때로는 시로 나타내고 때로는 말을 하는 경험으로부터 할머니의 자각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자각은 과거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할머니를 이끌고 있었다.

?

그런데 갑자기 아무런 소식도 없이
회오리바람이 불어
온 스키장은 아수라장이 되어
모자와 목수건이 날아가며
그 나그네 아저씨의 모자가
하늘로 뱅뱅 돌더니
임진강 흐르는 강가에 떨어져서
돌고 있는데 철새 한 마리가
날개 죽지가 부러져서
퍼득퍼득 뛰며
그 모자 속으로 들어가서
갑자기 사공이 되어 노를 젓고
끝이 없이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네.
이 일을 보고 있는 나그네 아저씨는
고요한 말로
‘허, 참, 이상하다’ 하더니
뒤돌아서네.
나는 곁에서 눈이 땅에 흐리도록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신기하다고 느꼈네.
– 시[임진강에서] 부분-

?

자신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던 나그네의 모자는 날개 죽지가 부러져 날지 못하는 새의 피난처가 되어 어딘가로 흘러간다. 그것을 눈이 흐려질 정도로 보면서 할머니의 마음은 신기함으로 가득 차 있다. 상처 입은 새와 함께 할머니의 지난 삶은 어딘가로 흘러가고, 이제 할머니는 사람 사이에서 신나게 놀기도 하고, 타인의 손을 잡고 일어서기도 하는 활달한 소녀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강물은 스스로 흘러 바다로 간다. 나와 너, 자연과 인간이 서로 어울려 하나가 될 때, 우리의 삶도 강물처럼 가야할 곳으로 간다. 그러나 삶의 질곡은 우리를 세계와 단절시키고, 우리는 마음의 문을 닫고 어둠 깊숙한 곳으로 자신을 유폐시킨다. 유폐의 길고 어두운 시간을 지나 할머니는 닫혔던 삶의 문을 열고 새로운 희망의 공간으로 발을 떼기 시작했다.

내 고통의 실체를 그대로 볼 수 있을 때 진정한 삶은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나와 내 옆에 있는 사람을 함께 볼 수 있다. 할머니는 자신의 고통을 ‘날개 죽지가 부러진 철새 한 마리’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철새에게 모자를 양보한 나그네도 함께 놀던 많은 인파도 사라지고 할머니는 혼자서 멀리 사라져가는 철새를 보고 있다.

60년의 시간을 지나, 지금 여기에 있는 할머니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60년의 시간 동안 자신을 할퀴고 간 수많은 고통의 순간들을 할머니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병에 걸린 자신을 스스로 용서할 수 없었던 지나간 시간, 병 때문에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아들, 어머니, 마쓰시타에 대한 기억도 철새 한 마리와 함께 강물에 흘려보낼 순간이 온 것일까?

?

니 그동안 참말로 욕 봤다.

?

마지막 시를 읊은 후에도 우리들의 만남은 한 달 정도 지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봄이 오고 있는데도 그날은 몹시 추웠다. 방바닥은 냉기만 면하고 있었고, 전기장판 위에서 우리는 이불을 무릎에 덮고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담담하게 앞을 보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인자 오지 마라.” “내 할 말 다 했다.” “니 그동안 참말로 욕 봤다.” 짧게 이어지는 말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스스로 드러낸 할머니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할머니가 시를 들려주면서 나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전에는 밤에 누우면, 무신 생각이 그리 많은지 잠이 안 온다. 잠은 안 오고 생각은 자꾸 나고. 눈물은 왜 그리 나오던지. 그런데 요새는 시 생각한다고 다른 생각이 안 난다. 뭐라고 할꼬. 우찌하면 잘 표현이 될꼬. 하룻밤에도 수십 번은 시를 썼다고 허물었다가 안 하나. 어떤 때는 머리가 아파서 에이 하지 말자 하다가도 또 생각하는 기라. 그라다보모 머리도 안 아프고 잠이 든다.”

“보래이, 김선생. 내 살아온 이런 이야기도 시가 되나? 참 우습제. 내 다시는 말 못할 줄 알았다. 하모, 누한테 말하겄노. 시를 생각하다보모 내가 나한테 말을 하는 기라. 그때는 그랬다. 아이다. 이랬다. 혼자 그라다보모 날이 샌다. 허허허. 참 우습제?” 그렇게 마음으로 쓰고 기억한 시를 구술하고 내가 받아 적은 후 다시 읽고 있노라면, 더러는 “아이가, 그기 아이다.” 하며 수정하기도 했다.

자신의 삶을 시로 나타내기 위하여 온 정신을 다하여 집중하는 동안, 할머니는 자신을 얽매고 있던 매듭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지혜를 터득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지혜는 자신의 삶을 시로 만드는 성찰과 집중의 과정에서 저절로 생겨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누군가가 곁에 있고, 곁에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삶을 시와 이야기로 들려주며 스스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마음의 파도를 잔잔하게 다스릴 수 있었던 이러한 모든 과정을 통해 할머니는 스스로 삶의 매듭을 풀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니 그동안 참말로 욕 봤다.”라는 말은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 준 나에게 한 말이자 할머니 자신에게 해주는 위안의 말이었으리라. 또한 구술을 할 때 상대의 말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우치게 해 준 말이었다.

우리들의 마지막 만남이 있었던 15개월 후, 할머니의 전화번호로는 더 이상 신호가 가지 않았다. 지난 6월 5일은 할머니가 시간과 공간, 무수한 인연들로부터 자유로워졌던 날이다. 날개 죽지 부러진 한 마리 철새는 임진강물을 따라 바다로 흘러가서 현해탄을 건너 아들을 만났을까. 마쓰시타를 만나 아들의 존재를 알렸을까. 그리고 할아버지를 만나 내 옆에 있어주어 고마웠다고 두 손 마주 잡았을까.

?

?

일회용 인간?[노동이야기]- ⑦

일회용 인간?[노동이야기]- ⑦

이 재 원(한철연 회원)

?

?

1. 동정당하다

며칠째 이곳 J읍 인력에서 일을 얻고 있다. 몇 일 비가 온 후 날이 개었다. 오늘은 컨테이너 짐 하차, 일명 까대기 작업을 했다. 인력사무실에서 운동선수와 나, 둘이서 이 고추장 공장에 배치 받았다. 그는, “부지런히 까대고 일찍 집에 가자”고 했다. 공장에서는 오전에 일을 마치기를 요구한단다. 컨테이너 기사도 바삐 짐을 내려줘야만 다시 일하러 갈 수 있단다. 중국에서 제조해 컨테이너로 운송해 온 고추장, 20킬로 박스 한 컨테이너당 천 개씩 도합 2천개를 하차해야 한다.

박스를 파레트에 60개 씩 쌓아 올리면 지게차가 운반해 갔다. 운동선수는 숨도 안 쉬고 작업을 계속했다. 나도 보조를 맞춰나갔다. 그는, 자기는 지구력이 없어서 일찍 일을 못 마치면 지쳐 나가 떨어진다고 했다. 첫 번째 컨테이너를 비울 때까지 딱 한 번 쉬었다. 그것도 공장 직원(아줌마)이 커피를 갖다 주었을 때이다.

두 번째 컨테이너 작업을 할 때, 그가 갑자기 주저앉았다. 근육에 경련이 왔단다. 무심코 작업하는데, 나도 온 몸에 경련이 일었다. 나는 주저앉지는 않았다. 심장만 뛰면 계속 움직이리라, 생각하고 끝까지 달렸다.

오전 열 시 반, 마지막 박스를 파레트에 올리자, 지게차 기사가 창고 정리 좀 하고 가라 했다. 나는 단번에, 못하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운동선수의 차에 앉아있었다. 지게차 기사가 와서, “이라와요, 잠깐만 (정리) 하면 돼”, 하고 나를 불렀다. 나는 지게차 기사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어른이 초등학생을 이용해 먹냐?”

창고에서 25킬로짜리 고추 마대를 운동선수와 둘이서 여덟 파레트 쌓아주었다. 이 정도 일 도와주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지게차 기사는 자기 할 일을 용역 노동자에게 떠 넘기는 것이니 이용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내가 그토록 짜증을 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까대기하며 운동선수로부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는 성미가 무척 급해서, 박스를 반듯하게 쌓아 올리되, 딱 한 번에 파레트 위에 놓아야만 한다. 내가 박스를 바로잡기 위해 조금이라도 꼼지락 거리면 작업시간이 늦어질 뿐만 아니라, 자기까지도 보면 힘이 빠진다고 야단이었다.

동정질까지 당했다. 작업 도중 나이를 묻길래 솔직히 대답했더니, “와, 대단하시네요. 나는 그 나이에 아저씨처럼 힘 쓸 거 같지 않아요”하고는 태도를 바꿔 “천천히 하세요”라고 했다. 동정과 모욕은 백지 한 장 차이 아닌가.

이튿날도 까대기 작업에 배치 받았다. 이번에는 파트너가 바뀌었다. 회사원인 그는 야간작업이어서 일하러 왔다 한다. 내 나이를 듣고는 아예 나의 작업 속도에 보조를 맞추었다. 도리 없이 다시 동정당했다. 어제보다는 작업하기 덜 힘들었다.

?

?

2. 누가 이들의 편이 되어줄 것인가?

비 오기 4일 전, 그러니까 J 용역에 처음 온 날, 자동차 도색 공장에 일하러 갔다. 액티비티 카본, 활성탄을 교체하는 작업이다. 도색 과정에서 페인트 냄새를 잡아주는 것이 활성탄이다. 실내 작업장의 공기를 활성탄 박스를 거치도록 강제 송풍하면 페인트 냄새가 없어진다. 정수 과정에서 쓰이는 등, ‘활성탄’ 쓰임새로 보자면 친환경 느낌을 준다. 그러나 작업자들에게는 이것이 노역이다. 쓰리 엠 마스크를 쓰지만 소용없다. 방진복을 입지만, 미세 가루는 방진복을 뚫고 들어온다. 또한 건조한 활성탄 가루가 습기를 찾아, 눈의 진액과 만나면 눈 주위에 달라붙는다.

일곱 명이 한 조가 되어서, 24칸, 사용한 약 천개의 활성탄 자루를 꺼낸 후 높이 1.5미터, 길이 3미터, 폭 2 미터의 박스에 다시 담는다.

꺼낼 때, 두 조가 되어, 한 사람이 3층에 설치된 박스 안으로 들어가 활성탄 자루를 꺼내 주면 다른 사람이 이것을 받아 옮겨 지상 1층으로 던진다. 아래 사람들이 이것을 항공마대에 담아 지게차로 폐기장으로 옮긴다.

네 개의 큰 박스에 칸막이가 24개이다. 폐기할 활성탄 자루를 다 꺼낸 후에는 다시 칸막이에 새로운 것으로 다시 담는다.

크레인으로 활성탄이 담긴 항공마대를 들어올려 3층 난간에 살포시 내려놓는다. 그러나 크레인은 항공마대를 완전히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 3층 난간이 낡아서 중량에 못 이겨 무너져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장까지 달려들어 두 칸을 한꺼번에 작업한다. 한 칸에 각기 한 사람씩 두 칸에 들어가면 나머지 사람들은 항공마대로부터 탄 자루를 꺼내 손에 손으로 전달해 칸에 넣어준다. 항공마대에서 탄 자루를 꺼내 전달하는 반장은 빛의 속도이다. 크레인을 빨리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크레인으로 들어 올려 작업하는 곳은 그나마 수월했다. 그러나 크레인이 닿지 않는 칸이 있다. 엘리베이터로 2층까지 올린 다음 2층에서 3층까지는 계단을 통해 받아치기한다. 2층에 두 명이 계단으로 올리면 계단에 늘어선 세 명 사람들이 위로 전달 전달해서 맨 위 3층에 있는 사람에게 전달한다. 우즈베키스탄 사람 A는 4-5킬로의 활성탄 자루를 공놀이하듯 한 손으로 빙글 돌려 올렸다. 나는 한 손으로는 들어 올려 전달하기 어려웠다. 두 손으로 받아, 머리 위로 치켜 올려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가슴은 터질 듯 뛰고, 숨은 턱 끝까지 닿았다. 이렇게 1000개를 올리고 나니, 새삼 체력 좋은 유전자를 남겨주신 조상에게 감사할 것 밖에는 없었다.

중국동포 형제 중 동생이 활성탄 박스로 들어가 새 것을 담는 중이었다. 형이 버럭했다. 빨리빨리 하라는 뜻이다. 덥고 먼지 많이 나는데 작업을 서둘러 끝내야 한다는 거다. 둘이 싸울 듯 했지만 그들은 형제이다. 열받은 동생이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작업했다. 더운 박스 속에서 답답했던 것이다. 나는 아찔했달까, 그가 걱정스러웠다. 활성탄이 호흡기를 통해 폐로 들어가면 인간의 장기는 그것을 해소해 내지 못한다. 그냥 폐에 붙어있게 된다.

그가 진폐증 진단을 받았다 하자.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다. 회사는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들, 이를테면 작업자를 채용하고 월급과 보험을 책임지느니, 외주를 줘서 이런 일들을 해치운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작업자들이 임시직이었다지 않는가. 도장회사는 도급 주는 것으로 그들의 할 일을 다 한다. 그 와중에 용역 노동자들은 보호받을 길 없는 신세가 된다.

진폐 진단이 날지라도 동생 이 씨는 하소연할 곳이 어디에도 없다. 도장회사를 상대로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 그는 이 회사 직원이 아니요, 가끔(작년에도 한 번 왔었다) 와서 일했을 뿐이다.

회사는 D반장에게 도급을 주었다. 다시 말해서, 문제가 생기면 D반장이 책임지라는 뜻이다.

안전장구도 문제이다. 활성탄 같은 고농도 분진 작업시 특수 방진 마스크는 필수이다. 또한 김서리지 않는 고글을 작업자에게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도급 맞은 반장이 한 번 쓰라고 비싼 장비를 사 줄 리 없다. 아주 형식적인 마스크, 청소할 때나 쓰는 M3를 제공했다.

회사는 큰 돈을 벌면서도 귀찮은 공사에 있어서는 어느 것 하나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직영노동자를 고용한다면 4대 보험, 산업재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고, 작업 시간은 지금 용역 노동자들이 하는 것 보다 두-세 배 늘어날 것이다.

물어야 한다. 자본주의적 방식이 오직 이윤 극대화만 중시해야 하는지, 법인 회사가 하도급 주고 그 비용을 지불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 한 것인지. 용역 노동자들의 작업 환경을 방치하는 것이 과연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인지.

이튿날은 비가 왔다. 나는 활성탄 다시 작업을 하러 가면 쓰려고 보안경을 샀다. 가서, 쓰고 버리는 인간들이 당하는 고통을 지켜보리라.

활성탄 작업이 끝났다. 다들 화장실로 들어가 얼굴을 씻었다. A가 세수한 나를 보고, “예뻐요, 예뻐요”라고 했다. 거울을 보았다. A가 빈 말을 한 것은 아닌 듯하다. 얼굴은 그런대로 탄가루가 씻어졌으나 속눈썹 부위는 탄가루가 붙어있었다. 쌍꺼풀인 늙은 내 눈 주위는 눈 화장한 할머니급 여인의 그것처럼 (예뻐) 보였다.

형제 중 동생이 내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형님, 어려우시죠?” 나는 그의 행동이 순수한 호의임을 알아차렸다. 이해상관 없는 호의는 정신병도 치료하지 않는가. 나는 편히 그에게 어깨를 맡겼다.

?

?

3. 배 농장 노동

까대기 이틀하고 무릎과 허리가 몹시 아파, 사흘 쉬었다. 다시 배 농장에 배치받아, 몇 일 간 지베레린 처리 작업을 했다. 배는 구슬만 했다. 배나무와 배를 연결하는 가느다란 꼭지에 지베레린을 발라 주면 배를 추석 때쯤 출하할 수 있다. 지베레린은 성장 촉진제이다. 이것을 칠하고 나서 적과 후 배에 봉지를 씌워주면 배가 크고 껍질은 얇되, 빛깔이 예쁘고 당도도 뛰어나다.

하여튼 좋아 보이는 것은 먹지 않는 것이 좋다. 가난한 밥상이 최고다.

지베레린은 차약과 비슷하게, 튜브에 담겨있다. 이것의 뚜껑을 열고, 그 위에 차솔 두 개를 겹친 것 같은 꼭지를 설치한다. 꼭지에 지베레린을 새어나오도록 한 후, 배 꼭지에 밀어넣으면 목적하는 위치에 약품이 발라진다.

작업은 쉬웠으나 조심할 것이 많았다. 지베레린이 배에 닿으면 배가 썩는다. 닿지 않도록 조심하되, 칠하지 않은 채 지나쳐서도 안 된다. 특히 배 잎사귀에 가려져 있는 것들을 빼 놓기 쉽다. 이것을 조심해야 한다.

여덟 사람이 일하러 갔다. 두 사람은 특별했다. 한 사람은 중국동포 여성으로, 제빵사이다. 다른 한 사람은 함께 까대기 한 회사원이다. 두 사람은 오늘 휴일이라서 일하러 왔다고 했다.

배 농장 부부는 사람들이 좋았다. 이 농장 4천 평, 도합 6개의 배 농장이 있다고 했다.

사진 ?이재원

이튿날에는 배밭 전문 여성 노동자들 11명과 함께 작업했다. 여성노동자 팀장이 우리 용역 노동자들까지 작업 지휘를 했다. 그들은 하루 일당 5만원을 받는다 했다.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을 관찰할 수 없었던 나는 그들의 작업과 정서를 열심히 훔쳐보았다. 웃고 떠드는 와중에 싸움도 잦았다. 특히 ‘억측’을 하는 여성들이 어려웠다. 한 쪽이 길고 반대 쪽이 짧은 배나무 밭 두둑이 있다 하자. 긴 쪽을 맡게 된, 억측을 즐기는 여성 작업자들이, ‘꼭 나에게만 어려운 곳을 주는 군’이라는 식으로 불평했다.

억측하는 사람 자신을 할퀴고 주변 사람까지 해치는 것이라서, 억측을 자주 하는 사람은 친구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나를 포함해서 그 누구도 억측하는 여성 노동자와 맞대기(일찍 자기 두둑을 끝낸 이들이 아직 끝내지 않은 배 두둑의 맞은편으로 가서 작업해오는 것)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고개를 쳐들고 배 씨알을 찾으려니 눈이 무척 아팠다. 일을 끝날 때 쯤 되어서는 고개를 쳐들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배나무 그늘과 그 녹색의 푸르름 때문에 일 년 내내 일하라 해도 일 할 수 있을 듯 기분이 좋았다.

여성 노동자들은 몇 일 후 배 봉지를 씌우는 작업을 시작한다. 아침 5시부터 저녁 8시까지 약 한 달 간 일한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3천개를 싸면 하루 15만 원 정도 번다. 진위를 가릴 수 없으되, 여성 작업자들은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끼려, 그냥 나무 위에서 소변을 본다고 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그렇게 돈 벌다가 몸을 망가트린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장마 전까지만 일하고, 7-8월 달에는 어디 틀어 박혀 내 계획에 따라 시간을 쓸 생각이다. 일이 없을 때까지 열심히 일을 따라 다녔다. 술을 안마시니 돈이 그대로 모여 있어 틀어박힐 경비는 충분할 듯하다.

?

?

4. 옘병(화염병) 맞을 놈들

k씨가 얼마 전 교회 장로가 되었다. k씨는 양 어금니가 없다. 식사하는 모양이 자연스럽지 않고 무척 어려워 보인다. 단무지도 씹어 삼키지 못하고 우물거리다가 뱉아 낸다. 그는 집이 근처인데도 중국 동포 형제들과 함께 용역사무실 숙소를 쓴다.

k는 장로되면서 천만 원을 교회에 냈다.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서인가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옘병 받아야 할 목사이군”이라고 중얼거렸다. 용역노동자, 한 푼 안 쓰고 모아야 일 년에 천만 원 저축할까 말까 하다. 점심 식사하는 중에 한 말이었는데,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마뜩치 않았다.

k씨에게 은근히,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당신 소속 교회 장로는 몇 명인가?

-61명이다.

장로들 직업은 대개 무엇인가?

사장들이다.

장로되려면 교회에 내는 돈이 있는가?

-장로 장립식 행사비는 낸다. 그러나 그 외에 돈을 내는 것은 자유이다.

목사가 당신 직업을 아는가?

-다 안다.

당신이 노가다 하는 것도 아는가?

-물론 안다.

당신 어금니 다구앙도 못 씹는데, 교회 돈 내지 말고 이빨 치료하는 것이 더 옳지 않은가?

-남의 사생활에 대해 왜 그렇게 알려 하는고?

노동자들의 삶에 관심이 많은 푼수라서.

들은 이야기이다. 기지촌 여성들이 미국에 많이 갔다. 그들이 과거를 세탁할 길은 한인 교회 집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먹을 것 안 먹고 집사 되기 위해 헌금했다더라. 헌금 많이 하고 장로인 k는 구원받는 앞자리에 위치할까? 내 눈에는 하느님과 일대 일의 통로를 가진다는 특징을 가진 교회의 목사가 장로 장사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예수는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자와, 죄 없는 자가 아니라 죄 있는 자와 함께 있”었다(공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