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자유를 위하여[치유시학]

 

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혼자 하는 사랑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행복한 것일까 아니면 괴로운 것일까. 사랑의 시작은 달콤하고 절대로 이별이 없을 거라는 믿음으로 시작된다. 서로 마주 보기만 해도 행복한 시기에는 만남은 필연적으로 이별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다. 설령 생각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사랑에 이별 따위는 절대 끼어 들 수 없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별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찾아온다. 이별의 상황에서 상대의 입장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음을 안다 하더라도 강제적이며 급작스러운 이별은 마음 깊은 곳에 그 마음보다 더 크고 깊은 상처를 남긴다. 할머니에게는 마쓰시타와의 이별을 준비할 시간도 없었고 현실로 받아들일 심리적 여유도 없었다.

할머니에게 마쓰시타는 어쩌면 괴로움 속의 행복이 아니었을까 싶다. 할머니가 처음 읊은 시 속에서 첫사랑은 풀벌레의 울음소리처럼 애달픈 기억이었다. 깊은 밤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에도 할머니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무에게도 자신의 슬픔을 나타낼 수 없었고, 그 어느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고통이었다.
 

사진 출처: http://blog.daum.net/nogada4723/

 

소리쳐 통곡할 때
초승달도 울고 있네.

이 밤도 뒹구르며
몸부림칠 때
눈물이 강이 되어
잠을 이루지 못하네. -시 <여름밤>의 부분-

 
할머니의 사랑은 그랬다. 60여년의 긴 시간 동안 오직 혼자 알고 혼자 아파하고 혼자 그리워해야 하는 사랑이었다. 다시는 재회할 수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시간도 밤하늘에 떠 있는 달과 밤이 되면 우는 풀벌레만 함께 할 수 있었다.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그립다 말하지 못하고 홀로 잠 못 이루며 고통스러워야 했다.

그 고통의 시간은 또 다른 죄의식의 시간이기도 했다. 오랜 시간을 할머니의 곁을 지켜준 할아버지에 대해 할머니는 “나한테 참 잘했어. 내가 아무리 성질부리고 고집을 피워도 그리 화를 안 내대.”라는 말로 고마운 마음을 드러냈다.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참 똑똑했다. 시대만 잘 만났으모 한 자리 했을 끼다. 뭘 해도 뭘 맡아도 똑 부러졌거든.”하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그 감정은 사랑이 아니었다. 한 가정을 이루고 부부의 연을 맺어 의지하며 긴 세월을 살아온 정이었다. 할아버지에 대한 정이 따뜻하고 깊어도 사랑은 아니었던 것이다. 사랑과 정을 검은 돌과 흰 돌처럼 확연하게 구분하여 정의내릴 수 없지만, 할머니는 할아버지에 대해 말할 때 사랑이나 그리움 같은 표현을 하지 않았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

 

마쓰시타에 대한 할머니의 감정은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사랑의 가면을 쓴 집착이었을까? 18살 어린 나이에 만나 19살이 되어서야 마음의 문을 열고 20살에 헤어진 사람을 81세가 될 때까지 변하지 않고 사랑한다는 게 가능한 것일까? 사랑은 변하는 게 아니라고, 단지 그 사랑을 하는 사람의 마음이 변하는 거라고, 그래서 할머니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었다면 무엇에 대한 집착이었을까? 할머니는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을 집착하며 고통으로 살아왔던 것일까? 무엇이 할머니의 마음을 60여 년 전의 시간 속으로 자꾸 끌고 간 것이었을까? 의문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사라졌다.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창밖으로 시선을 주고 있는 할머니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할머니가 서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앉아 있었다. 어쩌다 치마 밑으로 발이 나오면 애써 치마를 끌어당겨 발을 감추곤 했다. 진물이 묻어 있는 할머니의 발을 볼 때에도, 전동 휠체어를 타다 넘어져 크게 다쳤을 때에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할머니가 자유의지로 서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80평생을 살아오면서 할머니가 자신의 삶과 자신의 몸을 자기의지대로 할 수 있었던 게 언제였을까? 마쓰시타와의 사랑이 종말을 고한 그 시점까지였던 게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나의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 할머니가 집착하는 것은 잃어버린 사랑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신이 아닐까?

 

너무도 사랑하여
양손을 꼭 잡고
철로길을 걸으며 뛰며
동심에 싸여
아무것도 두렵고
무서운 걸 모르더라.
-시 <사랑>의 부분-
 
서로가 웃으며 변치 말자고
손을 굳게 잡고 다짐하며
맹세도 하였더라.
이것이 영원한 우리의
사랑의 속삭임이었더라.
-시<첫사랑 이야기 1> 부분-
 

애당초 나와 마쓰시타는
맺어질 사랑이 아니었구나.
국경이 다르고 나라가 다르니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보내주리라, 가거라
속절없는 사랑, 미련 없이 보내주마
-시<첫사랑 이야기 2>부분-
 
넘어지며 엎어지며 미끄러질 때마다
사랑하는 그대의 두 팔로
안아 일으켜 줄 때마다
눈 속에서도 그 따뜻한 사랑이
우리의 정으로 더 깊이 들더라.
-시<눈 내리는 날> 부분-

 

마쓰시타에 대한 기억은 사랑에 대한 영원한 약속에서 체념으로, 그리고 따뜻했던 정으로 이어진다. 사랑에 대한 약속도 이별도 할머니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진 것들이다. 비록 ‘국경이 다르고 나라가 달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던 이별도 할머니의 의지였다. “보내주리라, 가거라/ 속절없는 사랑, 미련 없이 보내주마”하며 체념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이제 따뜻한 기억으로 돌아와 있다.
 

내게도 행운이 있었던가
김철수라는 청년을 알아서
60년 동거생활하며 그 안에서
예쁜 딸을 선물로 하나 받았더라.
-시<내 인생길> 부분-

할아버지와의 만남을 “행운”으로 표현하며, 딸은 선물로 여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21살 때 만난 청년 김철수로 호칭한다. 여기에서 나는 다시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와 함께 한 60년 세월을 ‘결혼생활’이라는 말 대신 ‘동거생활’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언어 하나하나를 분석하고 그 의미를 따지는 것이 때로는 무의미하기도 하지만, 불쑥 나오는 언어를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본다면 결혼이 아닌 동거는 할머니가 생각하는 자신의 결혼관에 대한 표현일 수도 있다.

마쓰시타와 함께 한 시간들과 이별이 자기의지에 의한 것이었다면, 할아버지와의 결혼은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남겨진 상황에서 일본에서 온 용한 의사를 만나기 위해 떠돌이 약장수를 따라 간 결과 이루어진 반강제적인 결혼이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이루어진 결혼을 인정할 수 없었노라고 이미 수차례 되뇌었다.

살면서 만난 것을 행운이라고 여길 정도로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비록 자신의 손으로 키우지 못하고 입양시켜 보냈지만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선물이라고 여길 정도로 귀한 인연이었지만, 그 결혼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것이었다. 마쓰시타와 헤어진 이후의 60년은 온전히 할머니의 삶이 아니었던 것이다. 살아도 살았노라고 자신에게 말할 수 없는 삶이었다.
 
 

선택의 자유

 
사랑이니 이별이니 하는 것들은 이제 더 이상 할머니의 삶을 흔들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눈 내리는 날의 따뜻한 정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60여 년을 찾아 헤맨 것은 삶이라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였다. 한센병이 찾아오면서 할머니가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살다보면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방종으로 낭비하면서도 그것을 자유라고 여기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나는 자유의지로 할머니를 찾아왔고, 할머니도 자유의지로 나를 맞이해 주었지만, 두 자유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 나는 내 연구의 당위성을 입증하기 위해 할머니를 만났고, 할머니는 삶으로부터 자유를 되찾기 위해 나를 만난 것이다.

나는 부끄러웠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생각만으로 얼마나 많은 올가미를 만들고 덫을 만들어 스스로를 구속했는지, 그리고는 살기가 힘들다고 푸념했는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할머니에게는 생각의 자유마저도 없었다.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선택할 수도 없었고, 희망을 가질 수도 없었다. 애써 일구어 놓은 삶의 터전도 외압에 의해 뺏기고 낯선 곳으로 강제 이주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60년 동안 자신의 자유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날을 기다렸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 사랑과 슬픔을 시로 읊었다. 비록 자유롭게 선택한 삶은 아니었지만, 그 삶을 자신의 방식으로 드러내고자 선택한 것이 나와의 만남이었다. 선택의 자유, 온전한 자유가 항상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선택에 의해 내일 불행한 일을 당할 수도 있고, 애써 일구어 왔던 꿈이 사라질 수도 있다. 다만, 선택의 자유에 의해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사실만큼 가슴 벅찬 일이 있을까. 할머니는 자신의 삶을 풀어놓음으로써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가지게 되었다. 자유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할머니는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온전한 자유를 가지기 위해서는 할머니가 열어야 할 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인간 증오의 토대-지배(쫒겨 돌아오다) [노동이야기]- ⑥

?인간 증오의 토대-지배(쫒겨 돌아오다)[노동이야기]-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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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 원(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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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항에서 일하다 쫓겨 돌아왔다. 사정은 이렇다. 오랜만에 비가 왔다. 오전부터 함께 일하는 이들, 새우등 배 씨, 전 씨 알 씨와 막걸리를 마셨다. 장항 항구와 여기 저기 거리 구경도 하다가, 밥집에서 점심 식사하며 또 마셨다.

평일에는 모두들 일이 끝난 후 저녁 식사에 술들을 고파 했다. 그러나 누구도 “술 한 잔 마시자”라고 말 못했다. 유일하게 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공사 책임자이지만 아주 가끔일 뿐, 좀체로 술 한 잔 하기 어려웠다.

막걸리 앞에서 나는 발 달린 비지밥통이다. 점심에 술 마신 후에는 걸을 수가 없었다. 동료들에게 부축해 주기를 부탁했다. 여관으로 왔다. 사 들고 온 막걸리를 한 잔씩 더 하기로 했다. 방 문 앞에 와서 부축했던 이들이 나를 들이 밀었다. 그 순간 중심을 읽고 앞으로 넘어지며 막걸리 병에다 눈을 박았다.

이튿날 일하러 갈 수가 없었다. 정신은 몽롱했으며, 눈은 끔찍했다. 현장에서는 누가 다치는 것에 크게 신경 쓴다. 얼굴에 상처 있으면 누가 볼까무서워 공사 책임자가 우선 꺼린다. 거기에다 문자로 공사 책임자에게 헛소리까지 했다. 그의 답문 메세지는 화가 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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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캐릭터들

장항에 오기 전에는 이 팀과 홍성에서 경사면 공사를 했다. 나의 임무는 ‘열차 감시원’이었다. 공사 중에 열차가 오가면 휘슬을 불어 노동자들이 대피하도록 한다. 처음에는 이 일만 했다. 그러나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현장에서 감시원 노릇만 할 수는 없었다. 한 발 한 발 일에 적시다 보니 나중에는 열차 감시보다 작업자가 되어 있었다.

지하수가 흐르거나 비가 오면 선로의 자갈에 물이 고인다. 이 물들은 약한 지면이나 낮은 경사면에 몰리고, 이 물들이 선로 경사면을 파먹게 마련이다. 따라서 자주 경사면을 보수해 줘야 한다. 포크레인이 작업을 하지만 장비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은 순전히 인력으로 해야 한다.

ⅰ) 포크레인이 진입할 길을 만들기 위해 휀스를 철거한다.

ⅱ) 포크레인이 무너진 경사면을 흙으로 채운다.

ⅲ) 작업이 끝나면 그린 망을 씌우고 풀씨를 뿌린다.

ⅳ) 휀스를 원위치대로 복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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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레인 김 사장은 오랫동안 경사면 작업을 했다. 가파른 둔덕에 장비를 고정하면 작업할 때는 완전히 누운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하루 종일 쉬는 법이 없었다. 그는 저녁이면 끙끙 앓는 소리를 했다. 그는 공사 책임자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했다. 4.5톤 트럭을 운전해 자질구레한 짐들을 가지러갈 때면 들어줄 수 없을 정도로 불평을 했다. 그러나 사장 앞에서는 활짝 웃는 낯빛으로 응대했다. 나는 일종의 감정노동도 겸한 셈이다.

나는 주로 휀스 작업을 했다. 몇 년 전에도 해 본 일이라서 손에 익숙했다. 주로 중국동포 새우등 배 씨와 우즈베키스탄 동포 알 씨와 손을 맞춰 일했다.

새우등 배 씨는 나이가 무척 많아 보였다. 그러나 연변에서 농사꾼이었다는 그는 일 하는 데 익숙했다. 왜 그처럼 나이 많아 보이느냐는 농담 섞인 질문에도 화내는 법 없이 재미있게 답했다.

“아이들 잘 먹이려고 일 하다가 이렇게 늙었지.”?

그는 15년 전에 상처한 이후로 아이들을 혼자 키웠다고 했다. 지금은 모두 장성했다. 배 씨의 고향 친구 전 씨에 의하면, 배 씨가 아이들을 키우며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배 씨가 일하는 것을 보자면, 하루 종일이라도 삽질 할 기세이다. 작은 체구에 끈질기게, 부지런히 일했다.

가장 오랫동안 내 기억을 괴롭힌 것은 홍성에서 일할 때의 안전관리자였다. 그는 고위 공직자 출신이었다. 그는 내 임금의 세 배일 것이다. 거기에다가 이상한 내역으로 백 만원을 더 받는다고 했다.

그와 처음 만난 날, 명언만 뱉아내는 그의 발언에 그의 성격에 이상한 느낌을 갖기는 했다. “우리 일반인들은 운동권을 사기꾼으로 안다”는 멘트에서부터 “전두환 같은 사람이 나와서 (운동권을) 쓸어버려야 한다”고 했다. 나중에는 말끝마다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종북좌파”였다. “종북좌파는 북한에 가서 살아야 돼”라고 덧붙였다.

북한 핵실험 이후 그의 명언은 품격을 더 했다. “지금이라도 본때를 보여줘야 해”로 시작해서, ‘골통 보수’가 아닌 ‘보수 꼴통’인 자기들이야말로 ‘애국자’라고 했다. 1993년인가, 북한이 핵실험할 때 미국방장관이 인터뷰한 내용을 이야기했다. 미국이 북한을 공격할 가능성을 검토했다. 그러나 전쟁 나면 한국군 수십 만, 미군 5만여 명이 전사할 것이요, 이에 대한 정치적 부담이 미국으로 하여금 북한 핵실험 응징을 포기했다. 또한 전쟁 나면 한국은 지금의 경제력을 포기해야한다는 반박에, 그것은 “종북좌파”들이 만든 말일 뿐이라며, 지금 북한을 응징하지 않으면 대대로 북한에 눌려 살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우리 나라의 진정한 안전과 관심사들”에 관해서는 읽을 생각도, 들을 생각도, 기억하지도 않으려 하는 그의 무식을 탓했다.

자기 의견에 맞지 않으면 모두 고무줄 논리로 종북좌파라고 매도하는 그의 인간증오의 원인이 되는 트라우마가 뭔지 그의 이야기에서 찾고 싶었다. 그가 고위 공직에 있을 때 노조와 맞부딪혔다. 그는 당시 “무척 고생했다”라고 말했다. “전두환 때는 편했어. 노조가 힘이 없었거든. 그런데 노태우 때부터 힘이 세진거야. (노조가 자기를) 원수 대하듯 대드는 통에 무지 고생했다.”

노조가 약했을 때는 (그가) 편했다는 말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부정적인 내용이 더 클 것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랬다. 야만과 공적 살인, 인간의 권리를 짓밟히는 시절이 그에게 좋았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자면, 다른 사람들을 짓밟은 토대 위에서 그의 공직생활이 좋았다는 의미 아닌가?

내 주변에서 우파를 만난 적 있다. 고향이 대구인 그 사람, 단 한 명이다. 귀중한 모임이 있었다. 그가 하는 이야기는 그가 공부한 것이나 글 쓰는 내역(윤리학)과 달라 무척 갈등했다. 결국 나는 그 모임을 포기해야만 했다.

홍성에서 처음에는 나, 포크레인 김 사장, 안전관리자와 여관방을 함께 썼다. 안전관리자가 여관에 들어와 보고는, 내게 ‘공사책임자에게 방을 따로 얻어달라’고 이야기하라고 말했다. 특유의 사람을 매너지(manergiment)하는 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다른 방으로 옮겨 앉았다.

안전관리자는 아침에 역장(이나 공사관리 공무원)과 미팅을 했다. 가끔 그와 함께 역에 나갔다. 우연찮게 풀무 전공부 홍 선생님을 역에서 뵈었다. 홍 선생님이 사모님께 나를, ‘교수님’이라고 소개했다. 홍 선생님은 노동에 관심이 많으시다. 나는 더 이상 강의는 안하고 노동한다고, 글도 쓴다고 근황을 이야기했다. 홍 선생님은 내가 혼자가 아니라, 웹진(인즉 동료들)과 함께 글 쓴다는 사실을 축하하고 격려해 주었다.

안전관리자와 나는 저녁 식사에 거의 항상 막걸리를 반주 삼았다. 두 세병 막걸리 값은 그가 냈다. 그의 숙부는 건국 후 초대 정부 부서의 총장을 지냈다. 그의 숙부도, 그의 부친도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연금, 개인연금, 건물세 등을 받는다. 여기 일 안 해도 먹고 살 만큼 큰 돈을 가지고 있단다. 그러나 그는 일 년에 7개월 이상을 일한다고 했다. 그는 노동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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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여덟 명이 한 팀이다. 공사 책임자인 사장, 포크레인 김 사장, 안전관리자, 나, 일을 진행하는 박 씨, 새우등 배 씨, 전 씨, 알 씨다. 포크레인이 못 들어가는 곳의 경사면이 무너져 있다면 마대에 흙을 담아 축대를 쌓는다. 흙은 경사면 아래에 있고 무너진 곳은 몇 미터 높이에 있다. 흙을 담아 사람과 사람 손을 통해 위로 전달한다. 그 작업이 힘들었다. 작업 경험이 많은 박 씨는 팀장 노릇을 했다. 다른 작업자들은 그에게 꼼짝 못했다. 배 씨만이 “일 시키면 사장이야”라고 불평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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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에도 경사면 보수 작업을 했다. 그 때에도 일을 마치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했다. 정확히 표현할 수 없지만, 노가다 판에는 이상한 폭력이 있다. 말이 공손하지들 못하다. 특히 나쁜 사람들이 아닌데, 말은 폭력적이다. 그것을 견디기 힘들었다. 이것은 내 문제일 수 있다.

군대 제대 후 한 6개월을 아직 군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항상 다리를 오그리고 자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폭력 노출증’에 시달렸던 셈이다. 무엇인가 압박해 오는 질서를 지금도 참지 못한다. 은근한 폭력, 주먹이 아니지만 분위기와 말투, 쓰는 용어들이 폭력적이다. 특유의 충청도 서부 사투리 때문일 수도 있다. 또는 노가다 판의 생리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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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장항으로 옮겨 와서는 보도 벽돌을 들어내고 벽돌보다 넓은 점자 보도블럭으로 교체하는 작업이다. 장항에 와서는 모두 여관에서 잔다. 공사 책임자 사장, 박 씨, 새우등 배 씨, 전 씨, 알 씨, 나, 그리고 안전관리자 김 씨 형님이 새로 가세했다.

ⅰ) 빠루를 이용해 벽돌을 걷어올린다.

ⅱ) 손수레에 담아 항공마대로 벽돌을 옮긴다.

ⅲ) 벽돌을 빼 낸 자리에 다시 보도블럭을 심는다.

ⅳ) 크레인을 이용해 항공마대를 밖으로 옮긴다.

ⅴ) 항공마대에 담긴 벽돌은 폐기장에 갖다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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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이 벽돌을 걷으면 배 씨와 나는 항공마대로 옮기는 일을 했다. 3일간 벽돌을 옮겨 나르다 보니, 형광 천을 붙인 안전조끼를 보기도 싫어졌다.

벽돌을 다 걷은 후 보도블럭을 다시 심는 작업이다. 세 사람이 수레를 이용해 보도블럭을 날라오면 박 씨가 보도블럭을 심었다. 다리를 불편히 하는 박 씨에게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안 아프다면 이 나이에 사람이 아니지, 참고하는 거지”라고 말했다. 나는 보도블럭을 심는 박 씨를 앞 서 나가며 모래를 손보았다. 박 씨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보도블럭을 심어 보았다. 열 장도 심지 못 해 허리가 끊어지듯 아파왔다. 내일 비가 온댔지, 육체가 일기예보를 해 준다. 그리고 다음 날, 내가 술 취해 쫓겨오게 된 날이다. 아침부터 비가 왔다.

폐기물 비용은 비싸다. 폐기장에서는 벽돌을 부수어, 모래와 흙을 분리한다. 생생한 벽돌을 돈 주고 부순다니, 아깝다. 민표에게 메세지 했다. “안녕, 나 장항역. 재활용 벽돌 무제한.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운임 부담해 가져가면 좋지.”

민표가 자기 친구를 통해 벽돌을 처치해 주었다. 회사는 폐기물을 재활용 처리한 덕분에 몇 백 만원 이득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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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홍성에서의 안전관리자가 하던 말들을 곱씹게 된다.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록 이 시대의 노동하는 인간들의 고통을 더 생각하게 된다. 대조적인 두 가지 예가 생각난다.

나는 강사 하던 대학교에서 1급 공무원 출신이 교수로 취임하는 것을 보았다. 2천년 초반 교육법이 바뀌면서 만들어진 제도 덕분이었다. 한 두 명이 아니었다. 정치 계열에 특히 그런 사람들이 많이 왔다. 학생들이 가장 큰 피해자였다. 함께 식사한 (고위 공무원 출신) 사람들로부터 강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대개는 자기의 경험을 이야기한다고 했다. 그들의 경험이 필요하다면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수란 학문을 가르치는 것이지 경험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국회의원 빽이면 돈 들고 가는 인간보다 우선 교수가 되는 학교였다.

이해할 수 없던 것은 89년이었다. 나는 전교조 노동자 선생을 교장이 징계위원회에 회부한 (해고하는) 현장 농성장에 있었다. 권력의 강요라고 말할 수 없었다. 노동조합 자체가 징계위원회(학교 이사들)에게 불리하다는 상황을 즉각적으로 알고 실천한 것이다. 새파란 젊은이들을 자른 이들은 모두 이 지방에서는 유력한 인사들(돈 많고 잘 사는)이었다. 노동조합이 없다면 ‘자유로운 닭장 속의 여우’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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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가는 시간 속에는[치유시학]

 

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설렘과 기쁨의 기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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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기억은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린 그 날로 돌아갔다. 할머니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눈은 고통의 기억이었다. 떠돌이 약장수에게 속아 한센인 집단촌으로 갈 때 눈길을 걸어갔던 기억을 고통스럽게 떠 올렸었다. 하지만 꽃이 가득했던 교정과 고향마을은 이제 하얀 눈이 마을을 뒤덮은 설날 아침이 되어 있었다.

할머니에게 어린 시절의 기억은 설렘과 기쁨 그 자체였다. 대문을 나서면 계절마다 다른 꽃들이 길가 곳곳에 피어 있었고, 학교 교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던 것이 꽃과 나무였다. 산속에 버려져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 사투를 벌일 때의 나무들은 할머니가 넘어야 했던 장애물이었지만, 어린 시절의 나무는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꽃을 피우던 휴식처였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물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기억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오래된 시간 속의 사물에 대한 기억은 이미지로 남는다. 그 이미지는 시간의 흐름과 관계없이 정신 속에 살아남아 기억의 주인과 함께 태어나고 늙어가며 사라져간다. 즉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그 이미지는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사물이 반복하여 만나고 그 만남이 생의 전환점과 연관되어 있다면 기억은 이중의 잠금장치를 한다. 가장 오래된 기억이 뒤에 만난 기억에 의해 묻혀 잊히게 되는 것이다. 꽃과 나무 그리고 눈은 할머니의 유년기를 아름답게 만들었던 것들이지만, 그 이후 할머니가 경험한 고통들에 의해 원초적인 기억은 사라졌던 것이다.

어린 시절의 할머니를 들뜨고 행복하게 했던 기억들이 발병 후 이어지는 고난 속에서 기억 저 너머로 아득히 사라지고, 행복했던 기억의 자리에는 고통스럽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는 이별과 회한의 기억들이 자리 잡았다. 그 기억들은 너무나 단단하고 야멸치게 할머니의 삶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고통의 기억들을 걷어내고 행복하고 설레던 그 시절로 할머니는 돌아가고 있었다. 60여 년 동안 열리지 않는 문 안에 유폐되어 있던 그 기억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유년기의 기억을 하나하나씩 읊조리는 할머니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할머니의 작은 심장박동이 나에게로 옮겨와 나는 온 몸이 떨리는 긴장 속에서 할머니가 읊조리는 시를 받아 적었다.

소록도 설경(출처: 블로그southern-se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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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날 아침에

 

정월 초하룻날 설날이 되었다

잠에서 눈을 떠

창문을 열고 보니 폭설이 내려서

온 바다를 흰눈이 덮었고

은빛 찬란함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더라.

눈 내리는 날에 가장 좋아하던

우리 집 바둑이는 천지를 돌아다니며

뒹구르며 좋아하며 짖는 그 소리가

노래같이 들리더라

너무나도 신기하고 놀랍더라.

장독 위에는 소복소복 쌓인 눈이

연꽃같이 희고 아름다웠더라

대밭의 댓잎에서는 흰눈이

소복소복 쌓여서 칼끝과 같이

쪼삑쪼삑 하였더라.

소나무에도 많은 눈이 쌓여서

목화같이 보이기도 하고

눈꽃같이도 아름다웠고

좋게 보이더라.

우리 집 지붕 끝에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서

보기에 경치가 좋았더라.

나는 설날의 음식과 떡국으로 차려서

아랫마을의 할머니 집으로

세배를 나섰더니 눈 속에서

길을 몰라 헤맬 때

바둑이가 내 앞에 뛰어와서

길을 인도하였더라.

그 후에 사랑하는 임과 함께

큰 눈덩이를 만들어 굴리고

눈사람을 만들어

머리에는 고깔을 씌우고

임과 둘이서 어깨 손을 얹어

사진을 찍으며 기뻐하였더라.

그리고 눈덩이를 만들어

서로 던지며 때리며 싸움이 벌어져

어린아이 같은 동심으로

돌아갔더라.

넘어지며 엎어지며 미끄러질 때마다

사랑하는 그대의 두 팔로

안아 일으켜 줄 때마다

눈 속에서도 그 따뜻한 사랑이

우리의 정으로 더 깊이 들더라.

팔십 평생을 살아도

눈 나리는 이 날이

잊혀 지지 않고

옛 추억이 그립더라.

눈 나리는 어느 날.

-<눈 내리는 날> 전문-

 

시 <눈 내리는 날>은 할머니의 10번째 시이다. 이 시 속의 바다는 아이를 남겨두고 돌아오면서 자살을 기도하던 예전의 바다 대신 흰 눈이 뒤덮어 은빛으로 빛나는 눈부신 바다이다. “그거는 바다가 아인기라. 얼매나 눈이 왔는지 바다가 안 보이더라” 어린 시절 보았던 눈 온 날 아침의 바다는 할머니에게 은빛으로 빛나는 기억이었다.

오래 전에 마주쳤던 사물은 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실제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거나 희미해진 채로 기억된다. 이때의 사물은 구체적인 형상이 아니라 이미지로 남게 되는데, 은빛의 바다 이미지는 살아야 할 의미를 상실하고 죽음을 시도했던 바다의 기억을 뭉개고 있었다. 그리고 어린 시절 꿈을 키우며 뛰어 놀았던 울산 앞바다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실제로 아무리 많은 눈이 내려도 바다를 뒤덮지는 못한다. 바다의 색깔조차 바꾸지 못한다. 어쩌면 할머니가 은빛 바다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백사장일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나는 할머니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할머니의 얼굴에 피어나는 행복감을 논리적이며 건조한 이성의 언어로 파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또한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지만 진실이라고 굳게 믿는 기억이 있다. 몇 살쯤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그날은 눈이 많이 왔었다. 눈길을 걸어 학교 운동장에 갔을 때, 그 곳에는 하얀 눈으로 뒤덮인 바다가 있었다. 나는 그 바다 위를 발자국을 찍으며 걸었고, 강아지도 나를 따라 폴짝폴짝 뛰어 다녔다.

아무도 없는 그 곳을 뛰어다니며 강아지와 놀던 어린 나는 마치 그림 속의 풍경처럼 내 기억 속에 살아 있다. 어른이 되고 세상사에 지칠 때면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기억 속의 나를 멀리서 바라보며 위안을 받곤 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나의 기억을 사실로 받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눈이 내린 적이 없고, 우리 집에는 강아지가 없었으며 가족 중 그 누구도 어린 나를 아침 일찍 학교에 가게 내버려둔 적이 없었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지만, 그들이 조목조목 아무리 많은 증거를 들이대며 나의 기억이 거짓이라고 논리적으로 말해도 따뜻하고 포근한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기억은 숨어 있는 진실처럼 나에게는 비밀스러운 기쁨이 되었다. 할머니의 시를 들으며 한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연꽃같이 희고 아름답게

 

할머니는 오래 전의 눈 내린 날 정경을 정확하게 묘사했다. 눈이 내려앉은 대나무 잎, 마치 목화처럼 보이는 눈 쌓인 소나무, 눈이 녹아서 흘러내리다 얼어붙은 처마 끝 고드름까지 그 모든 정경을 마치 오늘 아침에 본 것처럼 이야기했다. “눈이 그렇게 많이 왔는데 설날 세배를 혼자 가셨어요?” “흠흠흠” 할머니는 나의 질문에 어깨를 웅크리며 낮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쪼끔만 기다리면 같이 갈긴데 내가 그냥 나섰제.” “그래서 길을 잃으셨어요?” “뭐 길을 잃었겠노. 눈이 하도 마니 와 놔서 좀 낯설기도 하고 강아지가 하도 날뛰니까 쫓아가다 딴 길로 가기도 하고 그랬제” 말하는 내내 할머니의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할머니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시 <눈 내리는 날>에서 눈에 띠는 것은 마쓰시타와의 추억이었다. 할머니가 시에 묘사하는 눈 오는 날의 정경이나 있었던 일은 분명 마쓰시타를 만나기 이전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시의 후반부에 가서는 마치 눈이 많이 온 그날 마쓰시타를 만나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을 함께 만든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마쓰시타는 허무와 고통의 얼굴로 표현되었다. 뿐만 아니라 마쓰시타와의 기억은 언제나 분명했다. 그런데 어린 시절 눈 내리는 날의 빛나는 정경과 함께 마쓰시타와 함께 했던 기억이 포개어지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나는 잠시 망설이다 질문했다. “마쓰시타와 눈사람도 만들었어요?” “응, 참 많이 엎어졌다. 그때마다 일으켜 주는 게 좋아서 또 엎어지고 했제”

눈 오는 날 마쓰시타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진 것은 분명해 보였다.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기억과 마쓰시타와의 기억이 하나로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마쓰시타와의 사이에 있었던 아픈 기억이 행복하고 즐거웠던 기억에 의해 조금씩 덮여가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받으며 보냈던 유년의 기억들이 발병 후의 고통스러운 기억에 의해 시간 저 너머에 은폐되어 있다가 조금씩 모습을 내미는 것처럼 고통의 기억들이 조금씩 사라져가는 게 아닐까?

마쓰시타와 함께 했던 눈 오는 날의 기억은 ‘사랑하는 두 팔로 안아 일으켜 줄 때마다 눈 속에서도 그 따뜻한 사랑이 정으로 더 깊이 들’던 행복의 시간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팔십 평생을 살아도 잊히지 않는 그리운 시간으로 할머니의 사랑은 돌아오고 있었다. 이전에 구술했던 시에서 보였던 고통과 회한의 기억 대신 연꽃같이 희고 아름다운 시간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인간의 대지[노동이야기]- ⑤

인간의 대지[노동이야기]- ⑤

이 재 원(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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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0년도의 품삯으로 고정되다

아파트 주차장 공사 현장이다. 바닥 슬래브에 이미 기둥(하스라)을 심었다. 양 옆 지상에 노출되는 주차장 거푸집을 완성했다. 이곳은 특이하게도 공장에서 하스라를 완성한 형태로 가져와서는 크레인으로 들어올려, 제 자리에 심고 난 후 슬래브 콘크리트를 타설했다. 남은 부분은 램프(지하 주차장 자동차 길)로, 앞으로의 공사 순서는 다음과 같다. 지상에서 보(하리)와 슬래브를 짜, 크레인으로 들어 올려 완성된 형틀에 이어 짜 맞춘다. 하리와 슬래브를 바닥에서 짜서 크레인으로 들어 올린다는 발상은 아주 새로운 노동 방식으로, 크레인이 널리 보급되면서 시작되었다. 자재를 일일이 사람이 들어 올려 짜 맞추던 예전 방식에 비해 공기가 무척 단축된다.?

오늘 새벽, 목수 일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서울 용역에 갔다. 소장이 말했다.?

“십만 원 받고 목수 조공 갈래요? 내일은 팀(목수) 보내 줄 테니 …”

나는 두말 않고 고개를 끄떡였다. 서울 용역에서 철근공이라는 성정동 사람과 나, 둘이서 현장에 ‘팔려’ 나갔다. 철근공은 나이가 많았다. 그는 평생 철근 공을 했으나, 일당 10만원을 받는다고 했다. 이유를 물었다. 그는 ‘늙어서 (누가 써주지 않는다)’라고 했다. 현장에 기존 팀원 7명이 있었다. 현장은 산세 좋고 주변은 탁 트인 남향이었다. 지세가 사람을 편하게 하는가보다. 마음도 쾌적했다. 광 씨가 지휘를 하고, 김 군, 성정동, 나를 포함한 네 명이 하리 통을 짰다. 현장에서 치수 표준은 mm단위이다. 7400길이에 높이 450의 하리 통이다.

ⅰ) 90 각재(오비끼)를 600 길이로 잘라, 900 간격으로 바닥에 배열한다.

ⅱ) 90×50 각재(투바이)를 올려 ⅰ)과 못으로 고정한 후, 이음새를 50×50 각재로 연결한다.

ⅲ) 각 파이프를 1 위에 올려, 움직이지 않도록 파이프 양 옆에 빗 못으로 박아준다.

ⅳ) 400으로 자른 합판을 ⅱ)의 위에 올려, 투바이에 30만 물리도록 작은 못으로 박은 후, 굵은 못(8cm)을 ⅰ)과 ⅱ) 부분에 겹쳐 박는다. 반대쪽도 이 과정을 반복한다. 이 때 합판 양 끝 부분을 투바이에서 80이 남도록 밖으로 밀어내야 한다. 80 부분을 이미 완성된 슬래브 하리에 올려 연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ⅴ) 눕힌 양 모서리에 45cm×120cm 폼을 7장 올려붙인다.

ⅵ) 3cm 삼각형 멩끼를 ⅳ)의 안쪽 아래, 코너 부분에 박는다.

ⅶ) 패널 아래쪽에 구멍을 뚫은 다음 6번 반생이를 꽂아놓는다. 철근 작업 후 반생이를 조일 것이다.

 

못 박기 시작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팔목이 아팠다. 오래 일을 안 한 탓에 근육이 놀랬다. 굵은 못이 나뭇굉이에 걸려 잘 들어가지 않았다. 두 손으로 망치질하는데, 성정동이 말했다. “거 뭐야, 두 손으로, 츳…”

괘씸했다. 두 손으로 못 박는 기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두 손 망치질은 콘크리트 못 등 단단한 곳에 못 박을 때 요긴하다. 이 기술은 절 지으며, 한 자짜리 대못을 함마로 때려 박을 때 익혔다. 두 손으로 망치질 하는 목수는 드물다.

처음에는 김 군을 “애기야”라고 불렀다. 고등학교 막 졸업한 앳된 얼굴이었다. 그러나 곧 출산을 앞 둔 애기아빠였다. ‘애기가 애기를 낳는군.’ 그가 하리 통 밖에서 안으로 손을 넣어 멩끼를 박았다. 그것이 무척 불편한 자세이다. 내가 하리 통 속으로 들어가서 박았다.

그토록 식욕이 당기는 점심은 오랜만이었다. 평소에는 풋내 때문에 잘 먹지도 않던 봄채소 무침(김치)은 달디 달았다. 밥과 생선 두 토막, 국을 남김없이 다 먹었다.

식사 끝낸 후 현장 불 옆에 쉬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팀원들이 왔다. 재료가 떨어져, 오전 작업이 끝이란다. 내일도 데마찌란다.

 

서울용역 소장이 4만 5천원을 주며 말했다.

“내일 꼭 나오세요, 그런데 목수 맞아요?”

“네.”

소장이 재차, “정말 목수 맞아요?” 라고 말했다. 나는, “옛날 목수, 오야지급, 다른 일 하다가 작년부터 목수일 하기 시작 했어요” 라고 덧붙였다. 소장이 다시, “내일 꼭 나와요, 나는 사람을 이리저리 돌리지 않아요, 한 현장만 보내요”, 라고 했다. “그거 좋네요.”

매일 이곳저곳 팔려 다니면 항상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주변 환경이 익숙해 질 때까지 스트레스를 받는다.

밤새 잠을 설쳤다. 소장의 ‘목수 맞느냐’는 말이 스트레스를 주었다. 오랫동안 일 안한 탓에 복잡하게 현대화된 공정을 따라잡기 힘들다. 시스템 동바리 등, 작업해 보지 않은 일을 만나면 눈치껏 해야 한다. 말이 눈치껏이지, 누가 핀잔이라도 준다면 참고 일하기 어렵다. 밤 새 꿈을 꾸었다. 새벽에 일어나 생각했다. 먹고 사는 것이 이토록 힘든가?

아침 일찍, 서울 용역에 갔다. 전에 함께 일했던 김 씨를 만났다. 그의 말은 나를 더욱 겁먹게 만들었다. ‘현장에서 일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장이나 기사가 득달같이 용역회사에 전화한다. 왜 이런 목수도 아닌 사람을 보냈느냐… 그러면 온 동네가 시끄럽다. 자기도 어떤 사람 소개했다가 우세만 당했다.’

온양 터미널 현장에 여덟 명이 갔다. 어제 함께 일했던 평 반장과 씨와 이 씨도 함께 갔다. 지하 3층을 올리는 중이었다. 땅 속 깊숙한 곳에 현장이 있었다. 목수 작업은 깔끔했다. 그러나 일 분량이 많지 않았다. 하리 통을 다 만들어 올리고 땜빵만 남아 있었다. 땜빵도 30여 군데 뿐이었다. 여덟 사람이 일 할 분량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 몇 명이 사무실로 커피 마시러 갔다. 사무실 기사가 말하더란다. ‘목수 네 사람만 보내라 했는데, 이처럼 많이 왔느냐. 데스라 네 명만 올리겠다. 알아서 하라.’

함께 간 목수들이 웅성웅성 말이 많은 와중에 평 반장이 자기는 돌아가겠다고 했다. 나도 그 뒤에 줄을 섰다. 이 씨를 포함해 셋이 돌아왔다. 평 반장의 진단인 즉, 서울 용역 소장이 터미널 현장을 ‘잡으려고’ 시위차 목수를 많이 보냈다고 했다.

이 씨가 버스표를 샀다. 버스가 터미널에 도착했다. 나는 차 한 잔 하라고, 내 거처로 그들을 이끌었다. 길을 가면서, “회사에서 일해도 돈을 잘 받을 수 있느냐, 예전에는 돈 받기가 어려웠다”라고 물었다. 이 씨가 어두운 얼굴로, “돈 받기 어려우니까 다들 용역회사에 나가는 건데…” 라고 말했다. 노동자들은 뻔 히 일당에서 10프로를 떼이며 용역회사에 나가 일 한다. 이 씨의 표정은 이런 사정에 대해 말하는 셈이다. 평 반장은 매일 일당을 지급하는 식으로 목수들을 데려다 쓴다고 했다.

평 반장은 한껏 내 거처를 부러워했다. 그는 1천만 원에 20만원 월세를 산다. 그러나 그는 실질적으로 많은 돈을 굴린다. 적어도 목수 일당 서너 달을 줄 수 있는 돈이다.

평 반장이, 용역회사 거치지 말고 자기 팀으로 들어오라고 제안했다. ‘그날그날 10만 원씩 주마, 곧 다음 현장으로 옮긴다, 그 때 돈을 올려 주겠다.’ 나는 늙은 철근공의 말을 생각했으며, 지방에 가서 일 할 경우 생기는 경비를 생각했다. 나도 평 반장에게 제안했다. ‘계단을 시켜다오.’ 계단은 일이 많은 대신 무거운 것을 나르거나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육체의 부담이 적다. 이어 말했다. ‘대신 자주 와서 치수 잘 맞추고 있는지 질문하고 감독만 해 주라.’ 이 씨가 웃으며 말했다.

“참 어렵네.”

 

2. 돈 떼어먹고 도망간 두목노동자

 

오전에는 하스라 통을 마저 끝낸 후, 오후에는 슬래브를 짰다. 슬래브 칫수 가로 7400, 세로 3600 넓이의 슬라 13개를 짜야 한다.

ⅰ) 바닥에 6m 강관 파이프 두 개를 깔고, 6번 반생이 네 개를 그 아래에 끼워놓는다.

ⅱ) 시다 오비끼를 3000으로 9개를 잘라, 강관 파이프에 적정 간격으로 배열한다.

ⅲ) 시다 오비끼 양 옆과 중간에 900×500 각재와 사각 파이프를 올린 후, 가네(직각)를 만든다. 이 과정이 중요하다. 직각이 틀어지면 슬래브 짜 맞춤이 어려워진다.

ⅳ) 이 위에 합판 을 300씩 밀어낸 다음, 각재 위에 못으로 고정한다.

ⅴ) 합판(세로 910, 가로 1820) 세 장을 세로로 늘어놓고, 870으로 잘라 붙이면 3600이 된다. 이어서 합판 아홉 장과 합판 땜빵 12를 끼워 넣으면 7400이 된다. 이 과정에서 반생이를 합판 위로 올려 빼 놔야 한다. 그래야만 반생이에 크레인 고리를 걸어, 들어 올릴 수 있다.

 

?이재원

오늘 노동자들의 화제는 단연 돈 떼어먹고 도망간 ‘창수’라는 목수 오야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현 씨가 도망간 오야지를 변명했다. 창수 씨는 매일 하청회사(협력회사라 부른다)에 데스라(일일 공수)를 올렸다. 인원수만 올렸다. 그런데 하청회사가 돈 계산하면서 갑자기 일 한 노동자 명단을 내어놓으라 했다. 창수가 명단이 없다고 하자, 하청회사가 돈을 안 주었고, 창수 씨만 독박 쓰고 도망갔다는 것이 요지였다. 새빨간 거짓이지만, 참고 분석해 보면 이렇다.

ⅰ) 건축법 상 원청회사가 협력회사에 일감을 주면, 협력회사는 도급(재하청)을 주어서는 안된다. 원청회사는 관리자만 두고 있다.

ⅱ) 하청회사도 건축 담당 기사와 관리자만 고용하고 오야지들에게 재 하청을 준다.

ⅲ) 목수를 투입하는 큰 오야지가 따로 있다. 그가 재하청업자이다. 큰 오야지는 평 씨처럼, 여러 명의 두목노동자를 불러 일을 시킨다. 창수 씨는 작은 규모의 재 하청업자였다.

 

창수 씨의 경우,

ⅰ) 하청회사가 창수 씨로부터 데스라를 받을 때 노동자 명단이 아니라 인원수만 받았다면, 애저녁에 돈을 떼어먹으려 한 짓이다. 임금 못 받은 노동자가 노동부로 가서 하소연한다 해도 일 한 증거가 없으니, 노동부에서도 막막할 것이다.

ⅱ) 창수 씨가 회사 데스라에 노동자 명단을 올렸다면, 그는 돈 받아 도망갈 셈이었다.

둘 다 동일한 원인이 있다. 하청과 재하청의 고리가 그것이다. 그런데 다시 의문점이 더 생긴다. 창수 씨는 어떻게 하청회사에서 노임을 한꺼번에 받아, 개별 노동자에게 나눠주는 역할을 했을까? 그리고 원청회사는 왜 이것을 묵인했을까?

도급노동을 주지 말라는 법도 애매하기 그지없다. 이를테면 특허 노동의 경우는 도급노동을 허용한다. 또한 누군가 내부 고발해서 도급노동을 하청 준 것으로 법정에 섰다 하자. 재하청 준 협력회사는 벌금을 내는 것으로 끝이다. 임금을 못 주었다 치자. 하청 업자는 ‘돈이 없어서 못 주었다, 돈 벌어서 임금 주겠다, 지금까지 받은 돈은 자재비 등등에 썼다’, 라고 하면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하청회사는 유한 책임만 지고 있다. 공사에서 손해 보았다면 자기 돈을 털어 보상할 이유가 없다. 하청회사에 중요한 것은 공사에 대한 책임뿐이지 임금이 아니다. 또, 하청회사가 재 도급 업자에게 임금을 준 것도 애매하다. 법정에서 시비가 가려진다면, ‘관례상 오야지에게 노동자들 임금을 주어왔다, 오야지가 노동자에게 다시 돈을 주는 것이 관례다’, 라고 하면 그 또한 처벌 방법도 기준도 없다. 도둑놈들이 행세하는 세상이니, 기회만 있다면 도둑들이 생길 것이다.

 

3. 기계와 함께 하는 노동

오전에는 하리 통을, 오후에는 슬래브를 제 자리에 위치시켰다. 크레인이 하리 통을 매달아, 이미 작업해 놓은 슬래브 양 옆에 이어 붙이는 작업이다. 지상에서 하리와 슬래브를 짜서 들어 올린다니, 사람들 참 똑똑하다.

평 반장이 슬래브를 크레인에 매달아 현장으로 유도하면 양 옆에 한 사람씩 서서 하리 통을 잡아 제 자리에 위치시킨다. 크레인이 잡시 멈춰 선 사이, 슬래브 아래에서 하리 통 아래에 삿보도(철제 지주대)를 받친다. 슬래브를 짜면서 베갯목에 대못을 박아 놓았다. 우선은 하리 양 끝을 받친 후, 중간을 받치고, 나머지를 받친다. 네 명이 삿보도 작업을 했다. 광 씨가 진두지휘를 하고, 김씨, 김 씨 친구 조공, 그리고 나 넷이서 작업했다. 크레인은 계속 하리를 날라왔고, 우리는 바삐 작업을 서둘렀다.

요령들이 없어 힘들게 삿보도 작업들을 한다. 삿보도 아랫부분을 직선으로 제 자리에 위치시킨 후, 속 강관을 끄집어 올려 베개목 못에 끼운 후, 겉 강관과 핀으로 연결한 후, 나사를 돌려 적절한 높이로 올리는 식이다. 그런 식으로 작업하면 무척 힘들다. 요령을 부리면 작업이 조금 쉽다. 삿보도 아랫부분을 제 자리에 위치시킨 후, 삿보도를 비스듬히 하여 속 강관을 뽑아내, 흘러내리지 않도록 단단히 잡아 수직으로 세운 후 못에 걸리도록 들어 올리면 조금 힘이 덜 든다. 중력 법칙에 적응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어렵기는 여전하다. 고개를 위로 향하고 작업하는 통에, 팔과 다리, 허리는 물론 목까지 아프다. 광 씨가 잠시 쉬는 시간에, 삿보도 받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작업일 듯 하다고 말했다.

점심 먹으러 가면서 목을 아래로 숙이고 걸어갔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 천정 벽화를 그리면서 항상 고개를 쳐들고 일했다. 그는 고개(목)가 아파, 쉴 때나 평상시에는 고개를 숙이고 다녔더란라.

오전에 하리 통 여섯 개를 걸었다. 오후에는 슬래브를 정치시키는 작업이다. 생 떽쥐베리의 아름다운 소설 『인간의 대지』에는 노동자로서 부럽기만 한 노동들이 나온다. “사막에 간다는 것은…하나의 샘을 우리의 종교로 만드는 것이다.” 정원을 가꾸듯 사막에 샘을 파는 행위이다. 사막에 사는 사람들이 물을 깃기 위해서는 며칠을 걸어야 하며, 우물이 있는 곳을 찾아낸다 해도 “낙타 오줌이 섞인 흙탕물이 나올 때까지” 모래를 파내야 한다. 그 샘을 찾기 위하여 “청춘이 스러지는 것을 겁내지 않는 것”이 인간이다. 사막에 사는 이가 유럽의 수풀 우거진 샘을 보고는 말했다. 인간의 노력 없이 모든 풍요로움을 허락하는 신이란 “속이는 신”이다(6,사막에서).

노동자로서 더욱 부러운 장면이 있다. “하룻밤 동안 인간을 얼음덩어리로 만드는 안데스 산” 속에 불시착했다가 일주일 만에 살아 돌아온 기요메가 말한다. “동료들은 내가 걷고 있는 줄로 생각한다. 그들은 모두 나를 믿는다. 그러니 만약 내가 걷지 않는다면” 나는 동료의 기대를 저버리는 “못난이다”.

조립식 노동, 삿보도를 받치는 노동에는 동료가 없다. 잠시잠깐 쉬면서 함께 모여 담배를 피운다. 그 뿐이다. 다시 흩어져, 불연속적이고 분리된 존재로 노동한다. 노동의 영감도, 창조성도 없다. 끝없는 노역으로서의 노동만 존재한다. 고독한 인간이 삿보도 사이에 끼여 있다. 생 떽쥐베리는 대지에 선 인간 노동의 목표를 분명히 제시한다.

“우리가 이런 도구들을 통해서 찾아내야 하는 것은 자연, 정원사나 항해사, 혹은 시인의 자연”이다(3, 비행기). 시인의 노동, 정원사의 노동이라니, 얼마나 황홀한가. 그는 대지와 결혼할 것이다.

 

4. 진화의 과정과 의사의 노동

슬래브 작업을 마치자, 그 다음 날 부터는 일이 쉬웠다. 벽체 반생이를 조이거나 도리잡기, 즉 건물의 수직과 수평, 일직선이 되도록 형틀을 잡아주는 작업 등이었다. 평 반장 팀은 원래 옆 건물로 가서 작업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곳 공기가 늦어지는 바람에 이곳 주차장 공사를 돕고 있다. 따라서 일감이 많지 않았다. 하루건너 하루 일 하는 식이라서 노동자들 불만이 많았다. 나는 몸을 만들 기회이므로 대체로 만족했다. 무릎이 아파, 쉬는 날 병원에 갔다. 의사가 말했다. “관절에 변형이 시작되었네요. 노동을 해야 하지만 관리의 차원에서 병원 자주 오세요.”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중력법칙을 이기고 두 발로 서도록 진화해 왔으니, 관절 변형이 오는 것도 진화의 과정이지.’

옛날 목수들이 하는 이야기가 있다. ‘젊었을 때 일 안하고 노는 것이 보약 한 첩과 같다.’ 물론 일을 많이 하면 관절이 빨리 달아 없어질 것이다. 덕수가 전화로, “힘든 일은 하지 마세요”라고 했다. 나는, “일하든 안하든 나이 들면 관절은 사그라지게 마련이야. 힘든 일이든 쉬운 일이든 크게 문제 안 돼. (다 진화의 과정에 있는 거야),”라고 대답했다.

그 와중에,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의사를 만났다. 어금니를 뺏다. 마주대하는 이가 없으니 시간이 지나면서 반대 편 어금니가 이가 솟아날 것이다. 여러 의사들에게, ‘솟아나지 않을 방법’을 문의하고 다녔다. 하나같이 임플란트를 하라고 했다. 아니면 빠진 옆 이를 삭감하여, 브릿지 형식으로 어금니를 하나 달아내라 했다. 이를 삭감한다고 생각하자 우울해졌다. 임플란트는 죽어도 하기 싫었다. 죽을 먹고 살거나, (이가 새로 솟기를 기다릴 참이다). 발품을 팔고 다닌 끝에,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의사를 만났다. 솟아날 이를, 맞물리는 치아가 있는 옆 이와 한데 묶어놓는 것이다. 그 분의 노하우인데 공개해서 어떨는지… 만약, ‘기술이 돈’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공개한다 해도 기꺼워하시리라.

이재원 단편소설-오래된 빈 무덤[철학을 사랑한 소설]

이재원 단편소설-오래된 빈 무덤[철학을 사랑한 소설]

이재원(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투구와 갑옷으로 무장한 채 차도와 인도에 늘어서 있던 전투경찰들이 물러가자, 팽팽했던 긴장이 사라졌다. 눈에 불을 켠 채 경찰과 대치하던 유가족들과 젊은 사람들이 빈소 겸 숙소로 사용하는 건물, 엉성한 포장을 들추고 들어갔다. 밤을 지새운 탓에 눈을 붙이려는 것이다.

함께 온 백발의 이 선생이 서 교수, 김 시인과 둘러서서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플라톤의 농담을 번안하며, 속으로 웃었다. ‘백발만큼이나 현명하지!’

핸드마이크를 든 사람이 추모 미사를 올린다고 했다. 백발의 신부가 강론을 시작한 미사 텐트로 가서, 비닐 천을 깐 바닥에 앉았다.

“안식 후 첫 날 사람들이 제사지낸 스승의 묘를 찾았다. 스승은 억울하게 죽었다. 스승에게 애정을 가진 이들은 무덤이 멀리 있는데도 벌써 눈이 붉어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되 무덤은 사람이 들어갈 만 한 동굴을 만들고 문을 대신해 큰 바위로 빗장을 지르는 양식이었다.

무덤의 문이 열려있었다. 한두 사람이 옮길 만 한 돌이 아니었다. 스승의 시신은 거기 없었다. 기어이 비자연적인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에게 뿌리박힌 믿음이 있다. 언제부터 생긴 믿음인지 모른다. 비자연적인 현상은 비자연적인 현상을 부른다. 억울하게 죽은 자에게는 비자연적인 현상이 따른다. 사람들이 믿는 논리적 귀결은 빈 무덤이다.”

신부는 한참 뜸을 들였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2009년 1월 20일 아침, 서울 한복판에서 건물 옥상 위 망루가 시뻘건 불길에 휩싸여 있는 참혹한 현장을 중계하던 인터넷 방송 앵커의 목소리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뉴시스

남일당 앞, 백열등 몇 개를 켠 무대를 차린 문화패가 공연을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백발이 많았다. 문화패가 공연을 시작했다. 나는 그곳으로 가서 앉았다. 사회자가 이교수의 손을 잡아 무대 앞으로 이끌었다. 사회자는 무엇인가 보는 눈이 있었다. 노래패의 연주가 흘러나오자, 미리 맞춘 듯 왈츠가 이어졌다. 백발이 성성한 여교수의 동작이 경쾌함에 놀랐다. 왈츠의 음악은 박수로 화답하는 관중들의 소음을 뚫고 마치 한적한 산속에 앉아 있는 느낌을 주었다. 그 때도 이런 느낌이었나? 충신 되기도 거부하고 가족을 위해 산천을 떠돌던 한 인간이 한적한 산 속에서 휴식을 취하는, 시간도 멈춰버린듯 했던 그 곳, 최 군의 무덤 봉분을 만드는 뒤켠에 앉아있었던 1985년 겨울, 월계리(月桂理)로 거슬러 올라갔다.

?

연희동 쪽방에서 홍제동 유진상가 앞 까지는 족히 40여분 거리였다. 오늘 하루 일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몇 십 명,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영하의 날씨도 일하려는 사람들을 막지 못했다. 사람들을 빼곡히 태운 봉고차 한 대가 유진상가 앞에 섰다. 나는 조수 대에 탄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보았다. ‘최 군이다’. 그 역시 나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차에서 내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 혀?”

악수하며 내가 말했다.

“목수.”

“타.”

누군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나는 연장가방을 든 채 비집고 차에 올랐다. 최 군이 말했다.

“우리 같은 늠이야 이런데서 밖에 만날 디가 읇다야만, 대학생이 되었다며 웬일이냐?”

나는 대답대신 되물었다.

“반장이야?”

옆 사람이 말했다.

“군기반장이요, 군기반장. 말 잘 들으쇼.”

겨울 해는 벌써 사라졌다. 어둑하니 땅거미가 드리우고 있었다. 그 날 일 끝난 후, 평창동 택지개발 축대 거푸집작업 현장 함바에 마주 앉았다. 막걸리 잔을 앞에 둔 채, 자기자랑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그의 말은 처연한 것인지 자조적인 것인지, 짐작할 수 없도록 이중적이었다.

“별스럽지 않은 여자지만 함께 끼구 자는 것이 삶의 보람이라면 보람이다. 여자가 가족 없이 혼자 큰 티 안내구 아픈 노인네 보살핀다.”

“노인네가 아파? 어버지? 어머니? 누가 편찮으신데?”

“아버지, 시굴서는 술 한 잔도 안하던 양반이, 금호동 올라와서는 허구헌날 마시더니, 저 새파란 나이에 풍이다.”

고향에서는 제법 탁탁한 살림을 일구던 그의 부친은 제법 넓은 땅을 씨 한 톨 안 남기고 모두 팔아 서울로 이주했다. 큰 아들을 감옥에서 빼 내기 위해서라는 둥, 이주를 둘러 싼 소문이 무성했다. 최 군의 말에 의하면 친척에게 뜯기고 고향 사람에게 사기 당한 아버지는 시골 땅 판 돈으로 금호동에 간신히 가게 방 겸 방 하나 딸린 판자 집을 구할 수 있었다.

그의 형은 중앙 체육관 페터급 챔프였다. 그도 덩달아 중앙체육관에 다녔다. 그가 가장 즐겁게 이야기하는 대목이라서 알 수 있다. 그 때가 그에게는 호시절이었다.

낮에 그가 반장에게 말했다.

“내 고향 친구여. 대학생이여, 대학생. 계속 일 시켜줘.”

우리보다 한창 연배인 반장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팔자가 풀렸다. 반장이,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네모도 깔아’, 하면 최 군이 와서 일 요령을 알려주었다. 다시 반장이 와서,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판네루 대’, 하면 다시 최 군이 와서 일 요령을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꼭 한마디 말을 달았다.

“여기서 일하는 애덜 다 신당동 패거리여. 나는 목수루 왔지만, 반장은 신당동에서는 내 아우 뻘이여. 아무 걱정말구 시키는대루 혀.”

십 수 살이나 나이 많은 동생을 두고 있는 그를 전혀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주먹잽이였다. 반장 말에 토를 다는 인간은 그로부터 즉시 응징 당했다. 그가 앙앙대는 사람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아채 뒤집어 날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여러 사람들이 달려들어 그를 뜯어 말리는 시늉을 했고, 응징당한 사람은 고분고분해졌다.

최 군 덕분에 나는 연탄난로가 확확 달아오르는 커다란 군용 텐트 숙소에서 잘 수 있었다. 저녁이면 저녁마다 함바에서 막걸리 한 사발 곁들이는 것도 여반사였다. 그는 주인을 향해, “어이, 이거 내 앞으로 달아놔”, 하고는 내 밥상에 막걸리 두어 병 안겨주었다. 나는 한껏 일에 버팅겼다. 달포가 지나자, 반장이 시키는 것도 무엇이든 최 군 도움 없이 할 수 있었다.

최 군과 손을 맞춰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힘도 좋고 일하는 요령도 좋았다. 삼육 패널 두 장을 힘도 안들이고 어깨에 메어 날랐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통에 일찌감치 할당량을 마치면, 그는 “가자”, 하고는 함바로 들어갔다. 해가 잔뜩 남았는데도 우리는 막걸리를 마셨다.

그러나 택지조성 축대 일이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방학이 다 해, 학교로 돌아가야 할 시점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리도 일이 맞아 떨어지는지, 마침 철 늦게 온 구정이라서 학교 돌아갈 시점과 간조 날이 엇비슷했다.

일찍 간조한 후, 그가 이끄는 대로 커다란 연장가방을 든 채 옥수동으로 향했다.

버스 종점에서 내리자 최 군이, “뭘 좀 사야겠어, 걔가 고기를 좋아해” 라고 말하고는 어둑한 상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산등성이에 올라서자 그가 말했다.

“이제 반 왔다잉. 한 참 더 걸어가야 혀”, 하고는 길 옆 어느 집 문을 열었다.

그의 집은 내가 상상했던 판잣집은 아니었다. 벽돌 골조에 슬레이트집이었다. 부친도 상태가 그리 나쁜 편으로 보이지 않았다. 말도 잘 했다. 그의 새댁은 수줍음을 많이 타 보였는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큼지막한 몸을 하고 있었다. 얼굴 한 번 보여주고는 어디로 숨었다.

최 군을 따라 공동 수도 깐으로 갔다. 그는 돼지고기를 씻어 잘게 잘라 냄비에 담았다. 생선은 비늘을 제거하고 배를 가른 다음 깨끗이 씻어 토막을 치 다른 냄비에 담았다. 최 군이 멀뚱해 하는 나를 향해 말했다.

“쟈는 이런 거 못 혀. 친척 집에서 눈칫밥 먹고 컸을텐디 왜 이런 것두 못허는지 모르겄어. 그런디 아버지 옆에는 항상 붙어있어.”

최 군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가지고 온 것들을 들고 부엌(이라야 우습게 친 차양막) 으로 들어갔다. 소리를 죽인 최 군의 우렁우렁한 소리가 밖으로까지 들렸다.

“돼지고기는 고추장으로 비벼서 연탄에 올리면 되어. 생선은… 무를 이렇게…” 하고는 도마 소리가 들렸다. 최군에게 응답하는 새댁의 목소리는 분명하지는 않았으나, 다정다감한 것만은 분명했다.

밥상에서 그의 부친이 말했다.

“나 평생 용산 시장에서 지게 지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더군.”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최 군의 동생도 있었다. 모친은 보이지 않았다. 거리에서 저자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식사를 끝낸 후, 짐 보따리를 든 채 다시 그의 손에 이끌려 산을 넘었다. 그는 이 길을 매일 왕복해서 로드 웍을 했다고 말했다.

“실력이여, 실력. 한 두 방 맞는 것은 문제도 아녀. 노렸다가 날릴 수 있을라먼 하체거덩, 하체. 하체 단련은 로드 웍이거덩. 지금도 맞고 살지 않는 이유가 이거지 이거.”

이것이란 그의 허벅지였다.

“츰에는 맞구 다니지 말라구, 절대루 객지 와서 맞구 다니지 말라구 갈켜주었지. 형은 빵잽이여. 허구헌 날 빵이여.”

복싱을 배우게 해준 형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로도 들리고, 무책임한 형을 원망하는 이야기로도 들렸다.

어느 산등성이에서 그가 저 아래 보이는 커다란 돔 형 건물을 가리켰다.

“저게 장충체육관이여. 저기 서는 게 꿈이었는디, 이게 안 따라주는 거여, 이게.”

그는 자기 눈을 가리켰다. 그의 한 쪽 눈은 시력이 없다. 체력과 깡이 있으나 상대를 가격할 눈의 초점이 맞지 않았다. 따라서 랭킹에 오른다거나 프로가 되기는 기대할 수도 없었다.

눈 때문에 그의 별명은 어원도 의미도 알 수 없는 ‘눈깔멩이리’였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나와 같은 학년이 없었다. 그의 집과는 근거리였으므로 우리는 초등 중등을 함께 걸어 다녔다. 군것질은 그의 몫이었다. 그에게 백리 사탕을 살 돈은 항상 있었다. 초등학교 때 나는 이름도 모르는 ‘나쇼날’ 라디오니, ‘딸라 장수’니 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친척이 있어, 서울에서 그런 장사를 한다고 했다. 마침 이 고장을 덮친 해일의 원인과 영향, 태풍의 원인과 그 길목에 대해서도 자상히 알고 있었다. ‘나쇼날’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일 터였다.

그는 원래 깡다구가 있었다. 중학교 때 어떤 아이와 붙었다. 시골 이이들 싸움질은 무척 드문 일이라서, 한 구경거리가 되었다. 상대 아이는 몸이 잽싸기로 유명했으며, 유일한 취미가 싸움이라서 항상 누군가를 골탕 먹이고 싶어 했다. 상대방은 싸움이 시작되었는데도 얼굴에 살짝 웃음까지 머금고 있었다.

최 군이 먼저 코피가 터졌다. 코피 터지면 물러나는 것이 상례다. 그러나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 그가 주먹을 쥐고 앞으로 왔다 뒤로 갔다, 하며 기회를 엿보는 통에 상대방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가 뒤로 주춤거리자, 상대가 앞으로 조끔씩 전진했다. 그가 싸움터에 있는 야트막한 무덤으로 조금씩 뒷걸음으로 올라갔다. 무심코 좇아가던 상대방이 아차,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가 무덤 중간쯤에서 상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토록 잔인한 아이들 싸움은 처음 보았다. 위에 올라탄 그가 막무가내로 상대방의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 뒤로 아무도 그와 싸움하지 않았다. 오히려 싸움꾼들이 슬슬 그를 피했다.

그는 중학교 미술선생에게 자주 칭찬을 들었다. 그의 그림이 항상 복도에 걸렸다. 리얼하달까, 이삭 줍는 여인 비슷하게, 굴 따는 여인 그림도 있었다. 나는 옛날 생각이 나서 그에게 물었다.

“그림 그리고 싶어 했잖아? 그 쪽에서는 해본 거 없어?”

“그림이랄 것은 없지만, 극장 간판 그리는 거 배웠다. 몇 년간 극장에서 잘 놀았지. 그러나 간판이 사양길이라서 밥 먹고 살 수 읎을 뿐만 아니라 저 판자집을 지켜야 했어.”

그가 다시 말했다.

“저 집 지키려고 별 짓 다 해봤다. 저기서 밀려나면 갈 데 읎으니께. 형 한테 들은 이야기다. 빵 살다가 고명한 사람헌티 들었것지.

거 옛날 사람 하나가, 충신 시켜줄테니 순장 당하라는 명령을 거절했다며? 나는 가족을 지켜야겠다, 충신 되는 것도 싫다. 데리고 산천을 떠돌지언정, 나는 가족을 지켜야겠다고 했다며?

내가 그런 심정이었다. 안강망이라고 아나? 예닐곱 명 타는 배인디, 겨울마다 가서 배 탔다. 그게 그물 내렸다가 걷으면 마구 술을 마시거등. 첨 배에 올랐을 때 멀미를 심하게 하니, 조금 봐 주더라구. 죽는 줄 알았지, 모든 걸 다 토하는겨. 그게 익숙해지구 시간이 지나자 애덜이 사람 잡는겨. 선원덜이 오락거리가 읎잖은감. 츰 온 사람 개나 고양이 데리고 놀기지 뭐. 어떻게든 우그려뜨려 가지구 노는거여. 어떤 영감이 그러데. 죽기 아니면 살기루다가 걔들한티 뎀벼야지, 아니면 내가 죽는다는겨.”

그가 다시 주먹을 들어 올려 흔들며 말했다.

“이거루 살았다. 소주병 잇슈 마신 늠덜 서너 명이야 나 당할 수 있나? ”

그의 집에서 걷기 시작한지 한 참 만에 산을 건너, 길을 건너 신당동에 도착했다. 그가 어디로 시선을 고정하지 않은 채 말했다.

“한번 헐레?”

나는 단번에 알아들었다.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다시 말했다.

“내가 이 동네 잘 알어.”

나는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신당동에 도착자마자 그가 안내한 곳이 여인숙이었다. 그가 주인에게 말했다.

“내 친군디 대학생이여, 대학생.”

지금도 찾아갈 수 있을 만큼 그곳 거리의 광경이 선하다. 뒷골목 술집은 안주가 다양했다. 막걸리 앞에서는 나는 속없는 인간이다. 처음에는 이야기가 통했다. 막걸리 빈 병이 몇 개 되자,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건장한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가 눈을 휘번덕 하더니만, 한 사람 멱살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짝 갈라진 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되었다구? 뭐라구 아가기 놀리고 다녔어?”

멱살 잡힌 사람이 켁켁거리며,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함께 온 사람들이 그를 얼렜다. 한 참이 지나서야 멱살 잡혔던 사람이 말을 시작했다.

“서울 교통 운전수들이 데모를 시작했어. 오야지가 깨라구 해서 몇 명 갔지. 버스에서 내리는 족족 운전수들 개패듯 팼어. 덩치 좋고 대찬 놈이 덤벼들자, 형이 냅다 발로 찼다. 그 냥 기절하데…

살인나는 줄 알았다. 병원 데리고 갔는데, 불알 터졌대. 그래 형이 달려 간거야.

엊그제두 면회 갔다 왔어. 홍성 교도소로. 우량 판정 받을랴구 애쓴다 하더라구. 나는 잘못한 거 없어.”

최 군이 말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말하구 다녀? 머, 형이 잘못해서 달려갔다구? 느이덜이 한 짓이잖여. 느덜두 같이 사람 팬 거 아녀. 왜 형한티 뒤집어 씌우디끼 허냐? 드런 느무 깡패새끼덜, 옳게 살어 옳게…”

나는 술이 다 깨버렸다. 그의 이야기 중에, 자주 들었던 것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금호동에 재개발 계획이 있다. 부친 대신 자기도 그곳 재개발 협상 팀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은 중이다. 그가 말했다.

“나이만 먹었지, 무얼 알아야 조합에 들어가지. 갸덜이 나헌티 바라는 건 이거야, 이거.” 하며 그는 주먹을 들어 보였다. 그의 말을 듣자하면, 재개발 조합은 항상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땅과 건물을 함께 가진 사람은 극소수였다. 문제는 땅 없이 건물 권리만 소유한 사람들이나, 세를 사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딱지를 준다 해도 아파트 입주는 불가능했다. 그 동네 사람들이 새로 짓는 아파트에 입주할 만 한 돈이 없었다. 그의 집은 건물 소유권만 있었다. 따라서 까딱 잘못되면 그냥 거리에 나않게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고민이었다.

나는 그의 말에 응답할 지식이 없었다. 내 관심이라야 학교에서는 기껏 책 읽는 시간, 책 몇 페이지 뿐이요, 그것 날아갈까봐 놀러 다니지도 못하는 인간이었다. 그리고 방학에는 몇 푼 버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와 헤어진 후 몇 학기가 지났다. 자취집 주인이 시골에서 연락이 왔다며, 고향 송 군의 전화번호를 주었다. 송군에게 전화 했다.

“최군이 죽었어. 윌기리(월계기)로 와. 최 씨네 종산.”

“어떻게 죽었는데?”

“얼어죽었대.”

“이 날씨에?”

“그러게, 그렇게 이야기 들었어.”

그의 운구를 따라 온 사람은 몇 명뿐이었다. 산일 하는 사람, 친구 몇 명, 그리고 일을 주도하는 최 군의 사촌 형과 새댁, 동생이 전부였다.

작지 않은 몸집의, 수줍었던 새댁은 여전히 수줍음을 타는 듯 했다. 아무에게도 얼굴을 안 보여주려 작심한 듯, 고개를 무덤 앞 땅에 밖은 채 엎드려 있었다. 누가 몸을 들어 올려도, 몸을 흔들어도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그의 죽음이 무척 의심스러웠다. 그의 사촌에게 넌지시 물었다.

“형님, 어떻게 된 거예요?”

“때려 부순 집에서 안 나가겠다고, 텐트 치고 잤대. 그날 밤에 얼어 죽었대.”

그의 사촌으로부터는 더 이상 들을 말이 없었다. 그의 동생을 찾았다. 몇 년 새 그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묘지 봉분을 만드는 뒤편에서였다.

“저는 그 때 공장에 있었어요. 동네 사람들한테 들은 이야기예요. 철거반 수십 명이 떼거지로 몰려왔대요. 아랫 쪽은 포클레인이 부수고, 포클레인이 올라오지 못하는 언덕에는 함마를 든 사람들이…”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사람들이 울부짖는 소리, 가재도구가 나뒹구는 소리, 벽돌에 가해지는 함마 소리, 공간이 빈 벽돌의 울림…

입에 갈증이 났다. 나는 저 아래편에 놓인 술짝으로 걸어가 술을 들고 다시 올라왔다. 그가 다시 말했다.

“형이 발악을 했대요. 철거작업자 두들겨 패구, 경찰 두들겨 패구, 신사복 입은 사람들, 회사 사람들 쫓아가서 패구. 여러 사람들한테 짓밟혔대요. 철거원, 경찰, 회사 사람 할 거 없이 달려들어 형을 짓밟았대요.”

떠날 곳 없는 철거민들이 거기에서 밤샘을 했다. 그는 뭉개진 나무를 치우고 벽돌을 들어내 텐트를 치고 기어 들어갔다.

아침에 그가 일어나지 못했다. 소리도 없이 신음도 없이 죽었다. 경찰이 의사를 대동하고 왔다. 사인은 ‘동사’였다. 동네 사람들이 경찰과 의사에게 항의했다. 어제 최 군에게 몰매를 준 사람들을 조사해야 한다.

그의 부친이 말했다.

“월기리루 가. 늬덜까지 죽으까 무섭다. 몇 백 명 눈 깜작 안허구 죽이는 늠덜이다.”

최군은 자기가 지킨 것들의 댓가, 벽돌 슬레트 집 보상금을 써서 장지로 향했다.

묘지 봉분 작업하는 옆에 서있던 그의 사촌이 우리 있는 쪽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최군 동생에게 말했다.

“동상, 일허는 사람덜 뭘 좀 멕여야겠는디, 식당에다가 국밥이라도 시키까?”

최군의 동생이, “그러셔야죠”, 하고는 주머니 지갑을 뒤졌다.

김이 자욱한 함바에서 처음 마주 앉았을 때,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참 용케도 만났구만, 객지에서”, 라고 너스레를 떨던 그의 모습을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면 나는 마음의 손가락으로 저 멀리 산 능선을 따라 그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한 참 후에야 사람들이 모두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았다.

언젠가 평창동에 간 일이 있었다. 밤늦게 모임이 끝나, 나는 이 선생 집에 가서 잠자기로 했다. 택시를 타자 이 선생이, “평창동”하고 말했다. 나는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동네라고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 동네를 돌아보았다. 이 선생 집은 빌딩과도 같았다. 집들이 모두 웅장했다. 동네는 깨끗했으며, 잘 다듬어져 있었다. 김을 풍기던 함바와 군용 텐트로 만들었던 숙소는 상상도 가지 않았다.

발전하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 금호동의 개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한강 물이 내려다보이는 수려한 그 곳을 돈 잘 버는 사람들이 그냥 놔 둘리 없다. 최 군이 금호동에 자리 잡은 것 자체가 비극의 씨앗이었다면, 그는 애초에 유랑하는 존재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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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 밑에는 내 살던 집이 있겠지[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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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오래된 풍경

 

기억 속의 풍경은 원색보다는 무채색에 가깝다. 아주 오래된 시간 속의 풍경이 원색으로 재현된다는 것은 그 기억이 그만큼 강렬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색깔만이 아니라 어떤 소리, 어떤 풍경은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퇴색되지 않고 점점 더 뚜렷하게 기억으로부터 떠오른다.

나에게 지금까지도 기억되는 시간은 유년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의 교실 옆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그 연못 주변에는 가지가 늘어져 땅에 닿는 버드나무가 있었다. 버드나무 잎은 처음에 연한 노랑을 띤 연둣빛에서 점점 초록으로 물들어갔다. 연못에 담긴 버드나무 잎을 보는 내내 나는 시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있었다.

중학교에 입학하여 매일 걸어 다니는 등교 길에서 이른 아침에 만나던 초록빛 군무는 가끔 꿈에서도 만난다. 보리가 익기 전, 바람 따라 춤을 추던 보리들은 초록빛 바다였고, 나는 그 초록빛 군무에 넋을 잃고 서 있곤 했다. 마치 바람마저 초록빛이 되어 그 바람 속에 서 있는 나는 투명한 초록빛이 되어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착각에 빠졌다.

나이 들어가면서 힘들거나 분노를 느낄 때 어린 시절의 그 기억들은 나의 마음을 평화롭게 가라앉혀 주었다. ‘그래, 그런 시절이 있었지. 그땐 참 행복했지.’라는 생각에 젖어들고,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고 나는 살아야 할 의미가 있는 가치로운 존재라는 느낌이 들었다. 나에게도 행복했던 시간이 있었고, 그 행복에는 이유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나는 또 다른 행복감을 느꼈다.

유년의 시간은 그런 것이다. 시인 김춘수도 유년의 기억을 천사와 함께 하고 있다. 남녀의 구별이 없고 선과 악의 구별이 없는 시간, 그 시간이 천사와 같은 유년이 아닐까. 노자가 말하는 무위의 시간, 본성과 자연에 충실한 시간이 유년이 아닐까. 따라서 유년은 순수 그 자체일지 모른다. 유년은 온전함 그 자체일지 모른다.

시인 천상병은 ‘뼈와 살을 태우던’ 고통의 기억을 어린 아이와 같은 순진함으로 지워낸다. 천상병의 초기 시는 매우 어렵고 형이상학적인 면이 있지만, 고통의 시간 이후에 쓴 시들은 점점 후기로 갈수록 어린 아이처럼 기교가 없어진 단순?간결한 미를 지닌다. 천상병의 아내 목순옥은 약을 먹기 때문에 단순해진다고 말했다지만, 천상병은 본성에 충실하고 자연에 가까웠던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그의 고통을 스스로 치유했다고 본다.

어떤 인위성도 없고 강압적인 힘도 없던 그 시절이 유년이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 본성과 자연성을 하나씩 상실해 갈 때마다 유년의 기억도 하나씩 깊은 무의식의 세계에 가라앉는 것이리라. 그러다 지극한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그 시간의 끝에서 나를 바라볼 때 유년의 기억은 마치 거짓말처럼 하나씩 떠오르는 것이 아닐까.

 

고향을 노래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할머니의 시는 유년의 기억으로 가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에 돌고 도니

부평 같은 신세가 되어

어언간 60여년이 되었구나.

세월은 빨라 유수와 같으니

내 청춘은 흘러흘러

머리에는 벌써 백발이 휘날리네.

아, 고향에 가고 싶다

보고 싶기도 하다

못 가는 신세가 되었으니

저 푸른 하늘 밑에는

내 고향 내 살던 집이 있겠지.

 

집옆에서는 올해에도 살구나무에

활짝 핀 살구꽃이 피었겠지

마당 뒤에 있는 감나무에서

감꽃이 떨어지면

바가지로 주워담아

실로 꿰어서 목에 걸던

그 어린 시절이 그립구나

장독 뒤에는 목단꽃이

활짝 피어 그 옆에는 나리꽃이

돌담 위에는 호박 덩굴이 올라가서

금년에도 익은 호박이

주렁주렁 누렇게 매달렸겠지.

삽짝거리로 나와서

돌다리를 건너

사랑하는 모교에 가고 싶구나

칠계단을 올라가면

우편에는 벚꽃나무와

좌편에도 벚꽃나무가

엉겨 붙어서 봄이 되면

벚꽃이 장관이더라.

사계단으로 올라가니

매실 열매가 무르익어서

벌겋게 익으면 많은 사람 보시기에

입맛을 돋운다.

그리고 칠계단으로 올라가 서니

큰 운동장에서는

우리가 뛰놀던

그 모습들이 떠오르네.

운동장 옆에는

전부 벚꽃나무가 줄을 서서

너무나도 아름답더라.

친구들과 사진 찍던

그 추억이 떠오르며

선생님과 기념촬영도 했건만

모교가 잊혀지지 않고

사무치도록, 꿈속에서도 그리워지네.

 

언제나 가보리

언제나 보고 싶어

먼 산만 바라보네.

-<고향> 전문-

 

9번째 시 [고향]에서 할머니는 고향을 회상하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말과 말 사이에 으레 있던 침묵이 보이지 않았다. 멀리 보며 천천히 말을 하던 평소와 달리 나를 보며 동의를 구하기도 했다. “봐라, 김선생. 니 감꽃으로 목걸이 걸어봤다 했제?” “니 감꽃 냄새 기억하나?” 할머니는 나의 맞장구에 씨익 웃으며 시를 읊었다.

특히 시 [고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집과 동네, 그리고 학교를 정확하게 묘사했다. 마치 지금 이 순간 그 곳을 걷고 있는 것처럼 눈을 지그시 감고 한 구절 한 구절 시를 읊어 나갔다. 할머니의 시를 받아 적는 동안 잔잔한 호수 가를 걷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전해져왔다. 기억 속의 고향은 꽃밭이었다.

할머니는 시 [고향]에서 ‘가고 싶다’ ‘그립구나’ ‘아름답더라’는 표현으로 고향에 대한 마음을 표현했다. 그리고 갈 수 없는 마음을 “저 푸른 하늘 밑에는/내 고향 내 살던 집이 있겠지.” “언제나 가보리/언제나 보고 싶어/먼 산만 바라보네”라는 표현으로 묘사했지만, 그 그리움마저도 할머니에게 찾아온 작은 행복을 어쩌지 못했다.

시 [고향]에 묘사되는 여러 종류의 꽃은 “사무치도록, 꿈속에서도 그리워지”는 고향이 할머니의 기억 속에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말해 준다. ‘집 옆에는 활짝 핀 살구꽃’이 있었고, ‘마당 뒤에는 감꽃’이 가득 떨어져 ‘바가지로 주워 담아 실로 꿰어 목에 걸’고 다녔다. ‘장독 뒤의 목단꽃과 그 뒤에 피어 있는 나리꽃’ ‘돌담 위를 오르는 호박 덩굴’에는 ‘누렇게 익은 호박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유년의 집은 이제 갈 수 없지만 할머니의 기억 속에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다.

“삽짝거리로 나와서/돌다리를 건너” 학교에 가면 그 곳은 벚꽃천지였다. “벚꽃이 그렇게 많았어요?” “하모. 요요 칠계단이 있었거든. 조게는 사계단이 있었고”라며 말을 이어가는 할머니는 마치 나의 손을 잡고 그 계단을 오르는 듯이 보였다. 두 팔을 넓게 벌려 한 손으로는 “여게 칠계단이 있는 기라”하며 허공의 한 지점을 가리키고, 다른 손으로는 허공의 어딘가를 가리키며 “여게는 사계단인데, 계단을 오르다 서서 돌아보면 온통 벚꽃천지제.”

뭉툭한 할머니의 손끝을 따라 좁은 방안 가득 벚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큰 운동장 한쪽에서는 어린 할머니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뛰고 있었고, 계단 위에서는 또 다른 어린 할머니가 학교를 가득 덮고 있는 벚꽃을 경이로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어린 할머니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벚꽃들은 우리가 앉아 있는 방안 가득 흩날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유난히 덥던 여름 날 할머니의 집을 처음 방문하던 그날, 나를 맨 먼저 반겨준 것도 꽃이었다. 대문도 없고 울도 없는 집에 울타리 대신 피어 있던 코스모스가 생각났다. 그 마을은 꽃이 없는 집이 많았다. 많은 집들이 마당을 시멘트로 개조하였고, 마을 곳곳에도 산속 시골마을치고 꽃이 보이지 않았다. 마을 입구 교회 옆에 있던 키 큰 야생화가 그나마 눈에 띄었다. 교회 예배실 앞에는 화분에 꽃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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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문이 열리다

 

할머니의 유년 기억 속에 유난히 꽃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잊고 있었던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며 가장 먼저, 가장 많이 꽃을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발병을 알고 난 뒤부터 할머니의 삶에서 꽃은 사치였는지 모른다. 발병과 함께 시작된 할머니의 고통 속에서 꽃은 더 큰 상처로 남았던 게 아닐까?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유년의 기억을 지배하고 있는 꽃으로부터 할머니는 상실의 아픔을 더 크게 느꼈을지 모른다.

시인 김춘수는 꽃을 보며 환희와 행복을 노래하지 않았다. 흔들리는 가지의 끝에서 수없이 생겨났다 사라지는 시간의 운명을 보았다. 김소월은 저만치 홀로 피어 있는 꽃으로부터 끝없이 순환하고 있는 시간의 흔적을 찾았다. 삶의 아픔을 지닌 사람들에게 꽃은 아름다움의 대상이라기보다 자신이 도달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할머니에게도 유년의 꽃은 깊은 절망과 메울 수 없는 상실의 시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즐거움을 느끼는 것, 즉 쾌락은 매우 간단하다. 보고 싶으면 보고, 보아서 좋으면 즐기면 된다. 간단한 쾌락 대신 고통이 자리 잡는 것은 자아의 붕괴를 의미한다. 더 이상 내가 나를 즐겁게 바라보지 못할 때, 나 자신으로부터 행복을 찾을 수 없을 때 우리의 자아는 이미 붕괴되어 있는 것이다.

자아의 붕괴는 지극한 심적 고통을 동반한다. 고통은 그것과 연관된 것들을 무의식의 세계로 밀어 넣고 문을 잠가 버린다. 이 고통의 끝에서 유년의 기억이, 꽃의 기억이 되살아나 그 기억을 이야기하며 지금 현재를 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무엇이 60년 동안 굳게 닫혔던 무의식의 문을 열게 했을까? 고통을 느끼지 않으며, 아니 오히려 꽃의 기억이 할머니의 얼굴에 홍조를 가져다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할머니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야야, 김선생. 벚꽃나무가 얼매나 큰지 모른다. 그 큰 나무들이 전부 꽃을 활짝 피우면 학교는 꽃밖에 안 보이는 기라. 이리이리 계단에 서서 손을 내밀면 꽃이파리가 손바닥에 떨어진다. 후 하고 불면 또 날아가는 기라.” 나도 할머니를 따라 손을 내밀고 있었다. 할머니의 손바닥을 떠난 벚꽃 하나가 내 손바닥 위에 앉는 환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노동자가 노동을 두려워하랴[노동이야기]- ④

노동자가 노동을 두려워하랴[노동이야기]-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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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 원(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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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폐기물 공장의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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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에 의하면 외국인 근로자가 근로연수생 명목으로 들어올 때 1500-3000달러를 들여야 한다. 그 비용이 희한하다. 중소기업협동조합에 200만원 이상, 송출회사, 대사관 부로커들이 ‘먹는다’.

그들은 자기 조국을 위해 일 할 수도 있었다. 그들을 키워준 것은 그들의 이웃과 가족이다. 교육받고 일 할 준비 했으나 그곳에는 일자리가 없어 외국에 왔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보이지 않는 차별들을 감수한다.

겨울에는 일이 없다. 몇 개 있는 일자리는 대단히 열악한 것으로, 일 년 내내 그곳을 마다하지 않고 나갔던 외국 사람들의 몫이다. 내국인들은 그곳에 하루 일 갔다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용역회사가 일 배치하는 패턴이 있다. 자주 오는 사람이 우선이고, 어떤 현장에 계속 나가는 사람에게 그 현장에 우선권을 준다. 나 같이 가끔 가는 이들은 금, 토요일에나 일이 돌아온다.

노동자들도 천차만별이다. 금, 토요일은 경마장에 간다. 일주일 일 했으니 주머니들 두둑히 가지고 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차비도 안 남기고 다 쓰고 온다.

이번 겨울, 나는 용역회사에 나가 하루 일했다. 방수회사에서는 겨울이라서 외부 공사를 전면 중단했다. 일한 날, 중국동포 두 명, 키르키즈스탄에서 온 사람들 두 명, 나 이렇게 5명이 폐기물 처리공장으로 배치되었다.

중국 동포 김 씨는 특별한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술을 좋아해서, 현장에서 고철을 주워가는 고물상 주인이 항상 현장에 사다 놓는 소주를 아침부터 마신다. 그는 앞 서 말한, 열악한 환경의 현장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몇 년째 다니고 있다.

키르키즈스탄에서 온 둘 중 한 명은 작년에도 같이 일적 적 있다. 푸른 눈에 키가 크다. 그에게, ‘카레이스키(혼혈)’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아리안’이라고 답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리스 철학의 원류와 니체의 [비극의 탄생] 해석의 문제로, BC 15세기 그리스에 들어와 아티카 문화를 발전시킨 고대 ‘아리안’들에 대해 관심 관심이 있어, 지금도 그에 관한 책들을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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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하는 일은 항상 똑같다. 컨베어 벨트 옆에 마련한 의자에 앉아 쓰레기 주어내는 일 네 사람, 컨베이어벨트에 올리기 전 폐기물에서 미리 나무 토막 등 큰 쓰레기를 모아 버리는 작업이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일 한 적 있다. 쇠붙이 등을 골라내는 전기 자석 장치에 의해 콘덴샤가 폭발하면 대단히 놀라게 된다.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나고 불이 붙기도 한다. 또한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올라오는 것들은 만지는 것 자체만으로, 아니 보는 것만으로도 파상풍 걸릴 듯하다. 여름이면 악취가 진동한다. 겨울이면 차가운 얼음덩어리 쓰레기를 주워내는 통에 손에 동상 걸리는 듯하다.

이렇게 처리된 쓰레기는 태워 스팀으로 만들어 옆 제지공장에 보내고, 남은 모래와 자갈은 다시 사용한다. 플라스틱과 물렝이(연질의 플라스틱)는 재사용 분리하지 않는다. 쓰레기들과 함께 연료를 분사해 태운다. 그 과정에서 스팀을 만들어 옆 한솔제지에 공급한다.

나는 컨베이어벨트의 처음 공정, 포크레인이 쓰레기더미를 파내 흩어놓으면 굵은 쓰레기를 주워내는 곳으로 배치되었다. 작업할 것들은 산허리를 파헤치고 나온 생나무들, 집을 허문 뒤 나오는 목재들이었다. 컨베이어벨트 작업보다는 비교적 쉽다. 포클레인 기사는, ‘왔다갔다 하지 말고 잘 주어 내. 이거 하려고 (용역회사에서 작업자) 부른거니까’, 라는 등 잔소리도 심했다. 하우스 덮개 같은 큰 물건은 쇠스랑으로 찍어 끌어내었다.

태국에서 온, 이름을 이야기하는데 도통 외울 수 없는 이와 함께 일했다. 옹박이라 이름 붙였다. 바싹 마른 몸매에 순박한 눈을 가지고 있다. 그 몸에서 기운이 얼마나 센지, 내 몸통 반 만 한 나무도 휙 집어던진다. 옹박은 회사에서 월급 주는 것이 아니다. 고물상에서 이곳에 한 사람 배치했다. 고철을 주어 모으되, 쓰레기도 주워낸다.

그의 자존심을 세워 주는 일은 비교적 간단하다. 무에타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 말에서 한 단어만 알아들었다. “무에타이!”, 하더니, 시범을 보인다. 팔끔치로 가격하고 무릎을 들어올려, 밖으로 뺀 자세에서 상대 옆구리 가격하고는, 번개같이 뒤돌아서며 상대의 머리를 가격하는 흉내를 낸다. 몇 년 수련했느냐는 내 질문에 그는 손가락 세 개를 내 보였다. 3년 수련할 경제력이 있다면 그도 태국에서는 비교적 경제 형편이 좋았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그의 시범 답례로 양가 태극권을 시연했다. 그가 내가 시연한 것이 태권도냐고 했다. 내가 태극권이라고, 중국 기(氣) 운동이라고 말해도 이해하지 못했다.

상명대에 가장 좋은 만화도서관이 있다. 각국의 만화들이 있다. 평소, 도서관으로 걸어가서 만화도 보고 책도 보다가 점심 먹고 나서는 한적한 곳을 찾아 태극권을 했다. 운동 안하고 나이 들면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꾸준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태극권을 돈 내고 배운다는 것은 노동자에게 불가능하다. 비용뿐만 아니라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태극권 선생도, 중국 사람이라고 해서 아무나 태극권 할 줄 아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문화도 향유할 수 있는 사람, 부자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무에타이 덕분에 점심 먹으며 나에 대한 태국 사람들의 호의어린 눈길을 감지할 수 있었다. 옹박이 마구 자기 친구들에게 말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 없을지라도, 내가 무에타이를 좋아한다, 태국 사람들 무술 최고다, 라고 했다는 등의 말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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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계단 짜기?

어디에나 가난이 펼쳐져 있다. 집 뒤에 목욕탕 겸 찜질방이 있다. 용역회사에서 만났던 사람들 몇 명을 본다. 잠잘 곳이 없어 찜질방에서 생활한다 해도 그들은 노동하는 사람, 노동자이다.

40대 신씨는 힘이 좋아 6미터짜리 강관을 두 개씩 메고도 날아다녔다. 어느 노인은 ‘저녁은 대개 빵으로 해결한다’고 했다. 덜 쓰고 저축하기 위해서다. 잘 먹지 못하는 탓에 그는 체중이 50킬로도 안 나가 보였다.

찜질방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함께 일했던 김씨이다. 그와 손 맞춰 며칠을 함께 계단작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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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거푸집 짜는 것은 3차원의 사고를 필요로 한다. 평면도를 보고 입면을 생각하고 다시 전체 계단을 상상해야 한다. 김씨와 함께 만들었던 계단 도면은 높이 580cm, 상하 계단넓이 사이 20cm를 뗀, 한 쪽 넓이 120cm 양 넓이 합 260cm, 오도리바(계단참) 네 개의 비교적 큰 지하계단이다.

ⅰ) 계단 오름 방향 하부 벽체 거푸집을 준비한다. 계단을 향해 마주선다면 오른쪽이 오름 측이 된다. 후미당 세움 벽체 넓이 180cm, 높이130cm으로 합판을 잘라 준비하고, 여기에 계단 시작부 높이 30을 더해서 높이 160cm이 되도록 판넬을 만든다.

ⅱ) 계단벽체(후미당 하부), 전면, 좌측에 준비한 판넬과 철재 폼을 이용하여 외부 거푸집에 고정시킨다. 철재 폼은 타이가 잘 맞는다. 그러나 목재 판넬은 외부 폼과 이가 잘 맞지 않는다. 따라서 세파타이(안밖의 이가 맞지 않는 부분에 쓰는 변형타이)를 사용한다.

각 벽체가 콘크리트 타설시 밀리지 않도록 강관파이프를 가로 세로로 고정시킨다.

ⅲ) 상방향 후미당(계단 밑바닥)을 올릴 작업을 한다. 아시바(밭침대)를 설치하면서 시다오비끼(밑밭침) 9cm, 네다(횡목) 9cm을 고정시킨 후, 치수대로 합판을 잘라 후미당을 완성한다.

ⅳ) 첫 번째 오도리바를 설치한다. 아시바를 사용하여 시다와 네다를 설치한 후, 가로260cm, 상방향 96cm, 하방향 130cm이 되도록 합판을 잘라 고정시킨다.

지금까지 한 작업을 네 번 반복하면 네 개의 오도리바와 계단 총 높이(590cm)의 계단하부 거푸집이 완성된다.

이제 계단 상부거푸집을 짜 올려야 한다.

ⅴ) 계단 상부 벽체 거푸집(사끼리)을 설치한다. 보폭, 보고 부분을 계단모양이 나오도록 나나미(사끼리)로 잘라 판넬을 짜 붙이는 작업이다. 이 때 철재 거푸집폼을 사용하여 공중에 떠올린 상태로 외부 거푸집에 고정시킨 후, 그 아랫부분에 베니야를 잘라 판넬을 짜 붙인다. 일곱 계단을 높이와 폭에 맞도록 잘라 판넬을 짠 후, 세파타이를 이용해 외부 거푸집과 기존 설치한 계단 상부 폼에 고정시킨다.

이 때 각 보폭 보고 계단 콘크리트 두께 15cm가 나오는지(이 부분이 허공에 떠 있어야만 콘크리트가 이 부분에 들어간다)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ⅳ) 전방 벽체를 다음 오도리바(세 번째 오도리바) 높이까지 설치한다. 대개 폼 치수가 부족하거나 남는다. 부족하게 폼을 올린 후, 치수 높이까지 합판을 잘라 판넬을 짜서 보강한다. 오도리바에서 콘크리트 타설할 치수 15cm를 허공에 띄워, 외부 거푸집에 폼을 고정시킨다.

ⅶ) 내림계단(두 번째 오도리바로 올라가는 법면-왼쪽 방향) 벽체(사끼리)를 설치한다. 이때 콘크리트를 타설했을 때 오도리바 세로 방향이 140cm가 나오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작업(ⅴ, ⅳ, ⅶ)을 한번 더 반복하면 계단 내부 벽체 거푸집이 완성된다.

ⅷ) 계단폭 120cm가 되도록, 그리고 콘크리트 높이 15cm를 채울 수 있는 높이로 법면 네 군데에 게꾸미 고정대를 설치한다.

목수가 작업을 끝내면 철근공이 작업을 한다 철근작업이 끝나면,

Ⅸ) 완성된 계단 거푸집에 콘크리트를 채울 폭 26cm, 높이 17cm 간격으로 게꾸미(계단 밭침)를 설치한다.

일 끝나면 김 씨와 나는 거의 매일 ‘슈퍼 했’다. 나는 대개 맥주나 막걸리를, 그는 소주를 마셨다. 그는 당시에 목수 송출회사의 숙소에서 기거했다. 목수 송출회사란 두목 노동자가 만든 회사로, 용역회사와 다르다. 목수 예닐곱 또는 열 명이 소속돼 있어 두목 노동자가 이들을 시켜 작은 현장에서 도급노동도 하고, 대 건설회사 직영 형식으로 목수들을 ‘대여’한 다음, 회사에서 팀장 수당을 받는다. 도급노동이 불법이므로 대기업 건설회사들이 찾아낸 방법으로, 일종의 파견노동 형식을 제공하는 것이 송출회사의 역할이다.

하루는 김씨가 술 취한 채 일하러 왔다. 온전한 날에도 가끔 의견 충돌하는데, 술 취한 그와는 불안해서 함께 일 할 수 없었다. 나는 반장에게, ‘말 못할 사정으로 집으로 가야겠다’고 말하고는 그냥 돌아왔다. 그 뒤로 그 회사에 일하러 가지 못했다. 기본급 받는 회사에서 일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김씨에게는 남쪽에 가족이 있었다. 그의 사정을 듣자면, 아이들 공부 중이라서 겨울이 가장 문제라고 했다. 여느 노동자처럼 겨울 일 못하면 생활비는 빛이 되어, 다음 해까지 그 영향을 미친다.

지금 그는 송출회사 숙소를 나와, 용역회사에서 일을 다닌다고 했다. 일 다니며 이곳 찜질방을 숙소로 삼는다. 그는 올 겨울 내내 일했다. 오늘만 쉬는 중이다. 내가, “겨울에 일해서 다행이네요, 겨울에 일하면 힘들기야 하지…” 라고 말하자, 그는 “억지로 일하는 거지요, 일 시작해서 아침 열 시 까지는 손이 시려워 어찌할 줄 모르죠”라고 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나는 김씨의 의중을 알 수 있다. 일 없는 것이 문제이지, 노동자가 고생하는거야 문제될 거 없다. 김씨는 겨울에 일할 수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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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거푸집 기능사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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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가 내게 물었다.

“어떻게 지내세요?”

“그냥 놀아요. 용역회사 가끔 나가봐도 일이 없어요.”

“일 안하고 어떻게 살아요? 생활비는?”

“거푸집 기능사 자격증이 있어요. 그 덕분에 회사에서 기본급을 받아요.”

“그 자격증이 어떻게 소용되죠? 어떤 식으로 시험을 봐요?”

“우리 포스코 현장에서 일한 적 있잖아요, 거기 형틀 반장이 있었어요. 도면 들고 다니며 스미(먹줄) 놓은 거 대조하거나,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라고 지시하던 사람이 형틀목공 기능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죠. 연줄이 있다면 그 사람처럼 월급쟁이 할 수도 있죠. 또는 회사에 소속해서 일 할 수도 있어요. 각종 공사 응찰시 기능공 자격증이 필요하거든요. 기본급이 얼마 안되는 대신, 일하면 일당을 따로 받는 식이죠.”

거푸집 기능사 자격증 시험은 5시간 30분을 준다. 시험 문제는 ‘현치도를 작성한 후, 내경 480 cm, 외경 530cm, 높이 560cm의 원형 거푸집 반쪽을 짜라’고 했다. 시험문제 도면은 수직재 16개, 띠장 12개, 연결재 9개가 있다. 필요한 재료를 받았다. 현치도를 그리기 위한 켄트지랑 목재들이다.

ⅰ) 자와 콤파스를 사용해서 켄트지에 내경 480, 외경 530이 되도록 수직재와 띠장, 연결재를 평면화 해서 그린다.

ⅱ) 현치도 위에 띠장 재료를 올리고, 컴파스를 사용해서 도면에서 따 올린 후, 직소톱을 이용해서 자른다. 연결재도 같은 식으로 원형이 되도록 잘랐다. 작업 순서대로라면 수직재를 자동대패로 가공해야 하지만 수험생들이 자동대패에 몰려있어 시간을 벌기 위해 띠장과 연결재를 먼저(우선) 가공했다.

ⅲ) 자동대패를 이용하여 수직재를 두께 25mm, 넓이 52mm로 가공했다.

ⅵ) 기계대패로 수직재를 외경52cm, 내경 48mm로 마름질했다. 대패질하기 편하도록 현치도보다 1mm씩 줄였다.

작업중 어떤 사람이 와서, ‘자기 기계대패가 고장났으니, 다 썼으면 내것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는 ‘실어도(초짜)’다. 기계대패는 힘주어 쓰면 탄소가 타서 금방 고장난다. 타인 연장을 빌려 쓰면 탈락이다. 그 사실을 말해 주었는데, 그럴지라도 빌려달라 했다. 초짜가 시험보러 오는 이유는 여러가지이다. 외국인일 경우 기능공 자격증으로 비자를 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ⅴ) 수직재를 560mm씩 자른 후, 이것을 네 개씩 띠장 상단 중단 하단, 세 개에 고정시켰다. 고정시키는 과정이 중요하다. 수직재 이가 잘 맞지 않으면 불합격이다. 서로 맞을 때까지 정교하게 대패질했다.

ⅵ) 띠장에 연결한 수직재 모듬, 도합 네 개를 연결재로 고정시켰다.

형틀이 완성되었다. 점검해 보니 합격 가능했다. 시험문제, 현치도, 형틀을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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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사 자격증 덕분에 기본급 받는다거나 회사 관리자가 되는 것이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이를테면 그 자격증으로 원자력 발전소 건설공사를 수주했다 하자. 이런 건물 때문에 고생하는 후손들은 몇 십 년, 몇 백 년 후 이렇게 말 할지도 모른다. “배고파서 원자력 발전소 건설 일을 했다고? 속없는 인간들이 살았었군. 굶어 죽었어야 옳지. 그래, 배고프다고 무기공장에서도 일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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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 안하는 겨울, 노동자는 운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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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력은 쓰지 않으면 아주 빨리 사그러진다. 일주일만 방구석에 쳐박혀 있어보라. 걷기에도 힘들어진다. 석탄 캐는 노동자가 옷에 석탄가루로 더러워지는 것을 두려워하랴만, 일을 하래도 몸이 안 따라주면 애달프다. 평소 육체를 단련해두지 않으면 안된다.

노동하기 위한 운동은 맨손 체조가 제일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불필요한 근육은 노동하기 불편하다. 근육이 걸리적거려서 두터운 옷 입은 듯, 움직이기 둔하기 때문이다. 끌로드 르 르슈의 영화 [우리와 같은 타인(Les Uns et Les Autres-사랑과 슬픔의 볼레로)]에 맨손체조하기 좋은 동작들이 있다. 이 영화는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를 중심에 두고, 2차 대전의 와중에 있는 네 예술가의 인생 여정을 사실과 상상을 교차하여 그리고 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글렌 밀러, 에디뜨 삐아프, 루돌프 누레예프가 그들이다. 감독이 가장 큰 공로자임은 말 할 것도 없지만, 작곡가까지 포함하여 걸출한 여섯 명의 천재가 등장하는 셈이다.

르 르슈의 영화 초반과 후반부, 유니세프 자선 공연에 위 네 사람의 예술가들(과 후손들)이 볼레로를 연주하고 누레예프 역의 배우가 차라리 운동에 가까운 춤을 춘다. 춤의 요점은 하체에 있다.

두 발바닥을 밖으로 벌려, 왼 발은 오른 쪽에, 오른 발은 왼 쪽으로 교차시킨 다음, 무릅을 적당히 굽히고 앞 뒷발 을 편히 벌린다. 발 뒷끔치를 볼레로 리듬에 맞추어 오리내리기를 반복한다. 때로는 앞, 뒷발을 좌우로 움직이기도 한다. 배우의 손동작을 따라 하기에 여의치 않아, 스트레칭하듯 자세를 취한다.

볼레로가 중요 모티프가 되는 영화가 또 하나 있다. 줄리 앤드류스가 주연한 [텐]이다. 또다른 여주인공은 볼레로가 성애(性愛)에 가장 적합한 음악으로 묘사한다. 음악이 어떻게 감성을 자극하는지, 어떻게 엑스타시(Ex-tasis)를 가능하게 하는지 여부는 각 사람의 정서에 따라 틀리겠으나, 어쨌든 감성해방의 기능이 있음은 분명하다.

볼레로 체조(춤)는 온 몸이 뻐근할 정도로 운동량이 많다. 그러나 이 동작이 지루하지 않은 이유가 음악 때문이다. 이렇게 열심히 운동하다가 안죽겠다고 떼쓸까봐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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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루엔[노동이야기]-③

톨루엔[노동이야기]-③

이재원(한철연 회원)

 

1. 겨울

 

숙소는 성남에 있었다. 어떤 사람이 숙소를 썼으나, 퇴사하는 바람에 내가 쓰게 되었다.

지하도 방수작업을 했다. 작업 순서는 크게, 다음과 같다.

ⅰ) 토목회사(이하 토목)에서 버림(버팀 콘크리트였는데, 어느새 버림으로 고정되었다) 콘크리트를 타설한다. 방석 콘크리트(이하 방석)라고도 한다.

ⅱ) 방석 위에 특수본드를 바르고, 합성수지 시트(이하 시트)를 붙인다.

ⅲ) 토목은 그 위에, 1미터 정도의 기초 철근 콘크리트(이하 기초)를 타설한다. 이 때, 양 측면은 30센티미터를 뗀다. 기초 위에 도로를 따라 약 4미터 높이의 벽체를 올린다.

ⅳ) 벽체를 따라 시트를 시공한다.

ⅴ) 시트 보호 모르터(몰탈)를 바른다.

ⅵ) 방수작업이 끝나면 토목회사는 흙, 중요 부위는 콘크리트로 백필(되메우기) 작업을 한다.

ⅴ) 마지막으로, 토목에서 슬라브를 타설하면 그 위에 시트 방수를 하고, 보호 모르터로 마감한다.

 

이렇게 적어보면 무척 쉽다. 그러나 실제는 냉엄하다. 날씨는 영하 15도를 오간다. 온 몸을 싸매었으나, 왼 손 엄지와 검지가 무척 시렸다. 동상인가, 하고 병원에 갔다. 의사는, “동상이라면 살이 썩죠. (당신의 경우)동상이 아니라, 손가락의 실핏줄이 막힌 것 같습니다”라고 진단했다.

휴대용 찜질팩을 반으로 자르고, 자른 부의 내용물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테이프로 밀봉한 후, 면장갑 위에 붙였다. 면장갑 위에 커다란 공업용 고무장갑을 끼었다. 한결 따뜻하고 손도 시리지 않았다.

한겨울이지만 지하도 공사장 내부는 춥지 않다. 영상 1도 정도이다. 지금 우리 팀 9명이 작업하는 구간은 세 군데이다. 벽체 시트작업 두 석방(한 석방은 길이 20미터, 높이 5미터 정도), 바닥 두 석방(바닥 한 석방은 가로세로 약 20미터), 벽체 모르터 두 석방이다.

두목노동자 신반장이 총 반장이며, 유반장이 작업을 진행한다. 신 반장은 우선 벽체 모르 터를 끝낸 후, 벽체 시트방수 작업을 하라고 지시했다. 그 와중에 몇몇은 빠져서 벽제 면 정리, 바닥 청소를 해야 한다. 신 반장은 조 반장을 시켜, 권 씨 아줌마와 김 씨 아줌마를 데리고 바닥 정리하러 보냈다. 나머지는 벽체 몰탈을 해야 한다. 조 반장은 오 반장과 함께 아파트 현장에서 작업한다. 지금은 겨울이라서 아파트 방수 작업을 할 수 없어 이 현장으로 왔다.

벽체 모르터는 쉽지 않다. 작업 재료 준비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토목회사는 한꺼번에 작업하는 것이 아니다. 바닥에서 우선 3분의 2 쯤 벽체를 올린 후, 나머지는 슬래브와 함께 벽체를 마감하는 식이다. 따라서 후속 작업을 위해 철근을 1미터 쯤 위로 뽑아 놓는다. 방수보호 모르터는 이 와중에서 작업준비를 해야 한다.

방수 작업을 서두르는 이유가 있다. 백필(되메우기)의 긴급한 필요성 때문이다. 공사구간 양 옆으로 철골과 볼링 콘크리트(볼링 장비로 땅을 뚫어 흙을 끄집어 낸 후 그 안에 철근과 콘크리트로 채워 기둥을 세운 것)를 세워놓았다. 그러나 이는 공사를 하기 위한 임시방편일 뿐이다.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따라서 방수 공사를 한 후 되도록 빨리 되메우기 해야만 임시벽체가 무너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유반장이 작은 김 씨를 데리고 복강판 위에서 레미탈을 내리면 젊은 한 씨와 내가 아래에서 받았다. 복강 판이 벽체 외부로 열려 있다면 작업이 조금 수월하다. 직접 외부 벽체로 레미탈을 받아서 작업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장 사정으로, 이를테면 외부 복강 판이 차도로 이용되고 있다면 일이 좀 더 많아지고 어렵다. 레미탈을 벽체 안쪽으로 내린 후, 여기에서 믹서 하여 통으로 담아 철근 너머로 옮겨주어야 하는 번거로운 작업이다.

작은 김 씨는 성격이 온순하다. 일도 물론 잘 한다. 레미탈 믹서기는 위험한 기계이다. 잘못 작업하면 기계의 회전력에 의해 손목을 다치거나 또는 손가락이 부러지기도 한다. 작은 김 씨가 레미탈 섞는 작업을 도맡아 한다. 나와 한 씨는 한 명은 위에서 밧줄로 레미탈을 믹서한 몰탈을 매달아 끌어올려, 벽체 외부로 전달해 준다. 큰 김 씨는 우마에 올라서서 위쪽을 발라간다. 권 씨는 서서, 중간을 발라간다. 박 씨 형님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레미탈을 받아서 큰 김 씨와 권 씨에게 전달해 주는 한 편 쭈그려 앉아, 바닥을 마무리해 간다.

큰 김씨는 66세이다. 그가 하는 말은 뻥이 심해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며칠 전에는 아침 식사하다가, “며느리가 5억 해 먹고 (도망)갔어” 라고 말하는 거다. 작은 김 씨는 친절하다. 그냥 흘려버려도 좋을 이야기를 꼬치꼬치 물었다. “왜 며느리가 돈 먹고 도망가게 놔 두냐” 로부터 시작해서 “아저시가 그토록 돈이 많았더냐”는 식으로 이야기 해 가니, 옆에서 듣기 피곤하다. 차라리 노망난 노인네 말로 알아들었으면 좋겠다.

큰 김 씨는 기골이 장대하다. 그러나 그의 나이는 어쩔 수 없어서 빨리 지친다. 그러면 박 씨가 거들어준다. 미리 앞에 가서 까치발로 서서 벽체를 발라나간다. 그러면 큰 김 씨는 조금 쉬면서 진도를 맞춰 나갈 수 있다.

몰탈 작업에서 한 씨와 나는 별 도움이 안 된다. 둘 다 몰탈을 바르지 못한다. 미장은 기능이되 손목을 많이 사용한다. 전에는 미장의 일당이 가장 비쌌었다. 그만큼 육체적으로도 어렵고 기능을 익히기도 어렵다.

한 씨와 내가 자주 손을 맞추어 하는 일은 벽체 면정리 작업이다. 토목의 일은 항상 거칠어서, 폼과 폼 사이의 이음새가 매끄럽지 못하고, 단차도 많다. 토목 일은 대개, 콘크리트 면을 땅 속에 묻어버리는 탓에 외부에 드러나는 건물을 짓듯이, 벽체 면을 매끄럽도록 신경 쓰지 않는 탓이다.

우리의 사정은 다르다. 벽체 외벽에 방수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벽체 면정리 작업은,

ⅰ) 망치와 노미를 이용해서 반생이(콘크리트 중량과 폼 중량을 버티기 위해 철근과 폼을 연결시킨 부드러운 재질의 굵은 철사)를 끊어낸다.

ⅱ) 단차 부분을 몰탈로 메운다.

ⅲ) 4인치 그라인더로 폼과 폼 연결 부위의 매끄럽지 못 한 부분을 갈아낸다.

 

그라인더 작업 시, 콘크리트 찌꺼기나 튀거나 먼지가 많이 발생하므로, 보안경과 방진 마스크는 필수이다.

한 씨와 나는 비교적 죽이 잘 맞았다. 사다리를 타고 작업해야 할 경우에는 한 사람은 사다리를 잡아주어야 한다. 사다리는 항상 넘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한 씨는 우리 작업하는 원청회사의 직원이었다. 입사하기 어렵다는 회사이다. 그는 5년 전 교통사고를 당했다. 겉으로는 멀쩡해서, 의사는 장애 진단을 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한 씨는 업무를 볼 수 없었다. 한직에서 한직으로 밀려가도 업무를 감당할 수 없었다. 자진 퇴사했다. 퇴사 3년 만에 집은 큰 집에서 작은 집으로, 작은 집에서 전세로 옮겨않았다. 금전적으로 견딜 수가 없어서 이 회사 사장에게 연락했다. 단순 노동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장은 한 씨의 대학 동기라고 했다. 한 씨는 지금 이 회사에 2년째 다니고 있다. 때로는 도급 공사도 해 보았다. 그러나 도급은 돈이 남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일용직으로만 일한다. 그러나 매일 일 하기에는 힘에 부쳐서, 한 달 15일 정도만 일한다고 했다.

일 끝나면 작업자들은 거의 매일 한 잔씩 한다. 큰 김 씨와 작은 김 씨, 그리고 김 씨 아줌마의 집은 안산이라서, 술자리에 없다. 김 씨 아줌마는 자주 “야, 수원서 한 잔 하고 헤어지자. 니들만 입이냐” 라고 불평했다.

모란시장 뒷골목 대포 집에 자주 갔다. 술 한 접시 5천원, 어마어마한 냄비에 끓여 내오는 홍어찜(실은 가오리 찜) 1만원이다. 때로는 생선 매운탕이 나오는데, 역시 5-6명 술안주 될 만 한 양이 1만원이다.

장날이면 포장마차가 문을 연다. 포장마차는 막걸리 집보다 안주가 비싸다. 양미리 구이, 돼지 사태구이, 횟감도 판다. 1인당 1만 원 정도 꼴이 든다.

뷔페식 오리구이 파는 곳도 있다. 1인당 6천원을 내면 막걸리 한 병에 고기는 무제한이다.

또 다른 포장마차는 좀 더 비싸다. 술값만 내면 안주는 공짜다. 대신 맥주 1병에 5천원이다. 안주는 내장구이가 주를 이룬다. 어느 날 이곳에서 비참한 사람을 보았다. 지능이 모자란 여성이 껌을 팔러 왔다. 술손님들이 장난 반, 욕망 반으로 그녀에게 자주 술을 권한다. 그녀는 이미 취했다. 그녀가 누구에게 라고 할 것 없이 소리쳤다.

“야 한번 빨러 가자. 만 원 만 줘.”

포장마차 주인이 말했다.

“야 야. 정신 차려라. 집에 가라.”

그녀가 포장마차를 나간 후 주인이 말했다.

“남자들이 재를 데리고 가려 해. 따라가는 걸 내가 여러 번 말렸지.”

내가 말했다.

“정신 치료를 받을 수준이네. 정신병원에 입원해서 지옥같이 사는 것보다 그냥 저렇게 사는 게 나으려나?”

작은 김 씨에 의하면 박 씨 형님의 사모님은 상당한 미인이시다. 술자리에서 박 씨 형님에게 사모님에 대해서 물었다.

“사모님이 미인이시라면서요? 노인인데도 그리 미인이세요?”

빙긋 웃으며 박 씨가 말했다.

“아직 노인은 아냐. 나하고 7살 차이거든.”

“결혼은 연애하셨어요? 중매? 사모님 고향은?”

“강 아래(금강 건너, 즉 호남). 그 때는 모두 중매지 뭐.”

“사모님을 사랑하세요?”

“안 그러면 어쩌겠어. 그나마 없으면 늙어 어찌할 거야?”

“평생 돈을 잘 벌어다 주셨어요?”

“평생 이렇게 일했지. 그런데 전에는 일 해서 먹고 살 만 했어. 미장 일이 많기도 하고 일당도 비쌌거든.”

“나는 이해가 안 가더라, 부인을 사랑한다는 사람이나 남편을 사랑한다는 사람. 산에 가면 부부가 함께 오는 것이 통 이해가 안 가. 집에서 내내 잔소리 듣거나 싸울 텐데 산에까지 와서 그러는 거.”

“뭐 사랑하는 척 하는 거겠지.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박 씨 형님은 여기에 기록할 수 없는, 부부간의 내밀한 이야기도 했다.

구정이 왔다. 노동자들은 무사히 겨울을 넘긴 셈이다. 구정을 끼고 한 일주일 일을 쉬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신 반장은 이번 구정은 딱 5일만 쉬자고 했다. 그만큼 일이 바쁘다는 뜻이다. 신 반장은 5만원이 든 봉투 하나씩 돌렸다. 유 반장이 신 반장에게 말했다.

“신사장님 정말 감사해요. 이번 겨울 일 못했으면 그냥 몇 백 만원 마이너스거든요. 그러면 내년 일 년 내내 허덕이는데, 이번 겨울에는 일해서 무사히 넘어갔네요.”

유 반장의 말에는 노동에 대한 고마움이 묻어있었다.

그러나 이 말에는 동시에, 노동에 대한 적대적 표현이 숨어있다. 유 반장의 책임은 아니되, 그에게 노동은 살아남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노동이 인간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는 기본적 이데는 생략되어 있다.

유반장의 말에는 해결되지 않는 무엇인가가 있다. 유 반장은 내년 겨울에는 어쩔 것인가? 내년 겨울에도 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가? 이런 질문들과 노동하는 우리의 현실여건에서 노동에 대한 모든 이데와 앙가주망은 소멸한다. 현장에서는 이렇게 말 할 틈새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뎅커(Danker)로서 갈등이 있다. 그러나 결코 이론을 포기할 수 없다. 이론을 포기하면 패배주의이다. 새로운 세계를 모색하기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론을 모색하는 작업은 오직 하나, 씩씩한 마음을 갖는 수밖에 없다. 허공에 대고 헛소리하듯, 실패할 각오를 하고 이데를 이야기 할 용기가 필요하다.

“한 사회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는 노동하는 사람이 노동을 통하여 더욱 자기를 발전시켜나갈 조건을 형성하는 노동정책이 필요하다. 그런 사회는 탐욕이나 경쟁이 아니라 상호 신뢰와 협동에 기초하여 노동을 조직하는 사회요, 경직되고 이기적인 개인주의가 아니라 이타심과 온화한 인격주의에 기초한 사회이다. 이런 경우, 경쟁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정책, 동료가 내 협조자라는 관점에서 서로 돕는 신뢰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인간적 욕구에 응답할 수 있는 노동조건을 구상해야 한다.”

 

2. 여름

 

회사는 내 숙소를 성남에서 영통으로 옮겨주었다. 현장이 가까워서, 통근하는 시간이 짧아서 좋았다. 성남의 그것 보다 깨끗했다. 몇 년 전에 함께 일 한 적이 있는 조반장이, “이 씨, 그냥 성남에 있지 그래. 수원에 홀로 떨어지면 외톨이 아냐, 외톨이” 라고 말 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외톨이가 두렵지 않다.

여름이 되자, 햇빛에 달구어진 복강 판이 열을 전도해, 지하도 온도는 35도가 넘었다. 작업자들은 교대로 캔 맥주를 사 마셨다. 아침 참에 하나, 오후 참 시간에 하나, 그리고 퇴근하면서 한 캔 씩 마시는 식이다. 그러나 술자리가 길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성남 팀이 떠나면 작은 김 씨랑 맥주를 더 마시고 헤어지곤 했다.

작은 김 씨의 화제는 단연 고등학교 3학년인 딸 이야기이다. 실업학교를 다니는데, 은행에 인턴사원이라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취직을 보장해 준다고 했다. 그에게, ‘왜 딸 하나냐, 대개 아들을 바라는 법 아니냐’라고 물었다. 내가 그렇게 믿어서가 아니라, 대화 거리를 만든 셈이다. 김 씨는, “돈이 있어야 키우제, 돈이. 내 처지에 딸 하나 키운 것도 감지덕지요,” 라고 했다.

중국 동포 큰 박 씨와 작은 박 씨가 합세했다. 조 반장은 권 씨와 오 반장, 아줌마 둘을 데리고 신반장의 아파트 현장에서 일한다.

큰 박 씨는 은밀히, 한약재로 만들었다는 중국산 ‘파란’ 약을 팔았다. 작업자들이 사갔다. 약을 써 본 이의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약 성분은 한약재가 아니라 도파민 같은, 일종의 화학 작용제인 듯 했다.

벽체 시트 작업 순서는 다음과 같다.

ⅰ) 콘크리트 이어 친 부분(조인트)과 조인트필터(석방 연결 부위에 콘크리트의 팽창과 수축을 고려해서 넣은 고무판) 부분에 40센티미터 넓이로 특수 본드를 칠한 다음,

ⅱ) 시트(합성수지 방수재, 길이 10미터, 넓이 1미터, 두께 3밀리미터)를 30센티미터 넓이로 잘라 붙인다.

ⅲ) 벽체에 본드를 칠한 다음,

ⅳ) 벽체 길이에 맞춰 시트를 잘라 붙인다.

본드가 문제이다. 겨울에는 휘발성이 약하므로 별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름이 되자, 냄새가 지독했다. 나는 시트작업 할 때는 항상 화학약품을 걸러주는 안면 마스크를 착용했다. 동포 큰 박 씨가 본드를 칠하면서 나가면 나와 박 씨 형님이 시트를 붙인다. 나는 우마 위에서 시트를 받아 펼쳐 벽체에 대면, 박 씨 형님은 바닥에서 랩(시트의 겹쳐 붙임 부위-대개 옆과 아래에 10센티미터를 겹친다)을 보아주는 식으로 붙여나간다.

안면식 마스크를 했으나 식사하러 갈 때 마스크를 벗으면 옷에 냄새가 배어 있었다. 모두들 그 냄새를 싫어했다.

작은 김 씨가 처음부터 이곳 현장에서 작업했다. 시범 시공할 때 원청 소장이 감리에게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원청 소장은 이 특별한 방수재료를 구하기 위해 자기가 무척 애썼다고 하더란다.

대개 발주처는 입찰시 작업 제품명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제품을 만드는 회사마다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재료가 있다. 본드를 쓰지 않는 제품도 있다. 합성수지가 아닌, 고무 시트의 경우에는 프라이머를 도포한 후, 가스 토치를 이용해 작업하기도 한다. 어쨌든 우리가 작업하는 재료는 위험천만한 것이다. 본드 통 표지, 품질 표시 항목을 읽어보았다. 용매제로 ‘톨루엔’을 썼다고 밝혔다. 톨루엔은 신장과 심장에 나쁜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진, 1급 발암물질이다. 작업자들은 한결같이, 하고 많은 제품 중에 하필 왜 이 재료냐는 불평을 했다.

유반 장은 시트작업 시 마스크를 안 썼다. 안면 마스크를 쓰고 작업하다가, 본드 냄새가 마스크 안에 들어오면 나가지 않아 더 위험하다고 했다. 일이 벌어졌다. 작업을 끝내고 나온 유반장이 구토했다. 다시 일어나 걸어가다가 또 구토했다. 사람들이 부축해서 병원으로 갔다. 후에 들으니, 병원에서는 링거 외에는 별 해독제가 없다고 하더란다.

유 반장 사건이 회사에 보고되자, 이 곳 현장 담당이라는 인간이 와서 작업장의 산소농도를 측정했다. 그 후 신 반장은 홴 두 개를 가져왔다. 작업장 양 옆에 설치하자, 냄새가 잘 빠져나갔다.

유 반장은 몇 개월 후 심장 혈관에 관을 삽입하는 시술을 했다. 400만 원 수술비는 신 반장 보증 하에 회사에서 빌려줬다고 한다. 심장 수술과 톨루엔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터널[노동이야기]-②

터널[노동이야기]-②

이재원(한철연 회원)

 

터널 뚫은 것을 볼라 치면 항상 감탄스럽다. 곡선이든 직선이든 어쩌면 저리 앞 뒤 입구가 반듯하게 만날 수 있느냐는 말이다. 몇 십 년 전, 이름도 잊어버린 동료들(대학원 타 학과)과 서해안에 여행 간 적 있었다. 건축기사라서, 어느 회사에 적을 두고 기사 수당을 받아 공부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가 바닷가에서 구멍 뚫린 돌을 주웠다. (내가 보기에는 돌이 아니라 그물을 가라앉히기 위해 시멘트로 만든 어구의 일종이었다.) 그는 ‘구멍 뚫린 돌-시멘트 덩어리-을 얻은 일이 자기에게 행운을 줄 것’이라고 믿었다. 이유인 즉, 막힌 것이 뚫린다는 미래에 대한 암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터널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행운을 이고 있겠다.

외관상 멋들어진 토목공사 작품도 자세히 보면 손볼 곳이 많다. 철근 콘크리트 토목과 건축 구조물의 보수와 방수를 전문으로 하는 이 회사가 하는 작업을 통칭〈그라우팅〉이라 부른다. 이유는 이렇다. 철근 콘크리트를 타설할라치면 양생과정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재료가 응고하면서 수축이 일어나면 작은 균열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리고 계절과 온도의 변화에 따라 팽창과 수축이 계속되면서 균열은 더욱 심해지거나 콘크리트 부분에 파열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보수가 필수이다.

이곳 터널은 이미 완공 되었으나, 시공한 토목회사는 구조물의 거푸집을 해체하면서 일어난 이음매 파열 부분들을 보양했다. 준공 검사시 파열이 일어나면 공사 부적합 판정을 받는다. 이를 피하기 위해 시멘트 보양을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안전하지 못하다. 강한 진동에 의해 보양부분이 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시멘트 보양물이 떨어지면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기차에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보양물을 제거하는 것이 오늘 작업의 내용이다.

철로 위에 대차바퀴를 앞뒤로 올린다. 총 네 바퀴가 된다. 전에는 대차 바퀴가 쇳덩이였다. 그래서 하나 올리기에도 힘에 버거웠다. 지금은 바퀴를 플라스틱으로 만들었다. 가벼웠다. 밀차 위에 안전발판을 놓는다. 이렇게 해서 대차가 완성된다. 대차 위에 작업 노구들을 싣는다. 작업장까지는 한참을 밀고 가야 한다.

팀장이 도면을 대조하여 작업 부분을 지적해 준다. 작업자들은 우선 1미터 20센티 높이의 비티 아시바(발판)를 설치한다. 낮은 곳은 세 단, 높은 곳은 네 단을 세워야 한다. 네 단을 세우면 까마득하다.

대차에 싣고 온 발전기를 내려 전기선을 연결한다. 그리고 발전기를 가동해 치핑기를 사용하여 보양 부분을 제거한다. 보양물을 떼어내는 치핑 작업시 작업자의 미는 각도가 잘못되면 큰일 난다. 그래서 팀장은 이 작업에 경험 많은 작업자를 시킨다. 작업자 여럿이 교대로 올라가 일을 했다. 까대기, 다른 말로는 치핑기계는 흔들림이 심하다. 독일산 힐티에 노미를 달아 보양 부분과 파열 부분을 제거한다.

비티 아시바는 흔들림이 심하다. 강관을 이용해 보강하면 흔들림이 덜하겠지만 한 군데 작업 시간이 짧아서 자주 옮겨야 한다. 따라서 일 많은 보강 대신 사람의 힘으로 흔들림이 덜 하도록 잡아준다.

이 회사의 노동 조건은 비교적 좋다. 휘몰아 일하도록 작업자를 독려하지 않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팀장은 원래 두목노동자(도급사장)이다. 그러나 이 현장은 상황이 다르다. 도급을 맡을 만큼 계산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업이 많고 복잡하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는 팀장을 포함한 모든 작업자들은 일당을 받고 일하는, 직영 일급 노동으로 전환한다. 직영 노동은 도급 노동에 비해 작업자들에게 부담이 덜하다. 두목 노동자가 손해를 본다면 회복하기 어렵다. 따라서 도급 노동은 조금이라도 더 작업 속도를 내야 한다. 그만큼 노동자는 힘이 든다. 직영 작업은 우선 이 부담이 줄어든다. 그러나 두목 노동자에서 관리자로 변신한 팀장도 작업자처럼 부담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모쪼록 직영작업이라 해도 회사에 이득이 있어야만 한다. 또한 고객인 원청회사의 요구사항도 들어줘야 한다. 그에게는 스트레스 받는, 고된 작업이다. 그러나 팀장은 이 회사에서 적어도 15년 이상 일했다. 신용이 있는 사람이라서 회사에서 거의 다 믿어주니 그는 비교적 일하기는 쉽다.

길을 떠난다는 것은 항상 즐겁다. 돈이 문제일 뿐이다. 어제 회사의 전화를 받고 길 떠날 때는 즐거웠다. 길 떠나는 것이 왜 즐거운지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떠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서 그렇지 않을까?

인간은 존재한다. 그냥 내던져 있다. 그러나 그는 그냥 내던져진 존재가 아니다. 그의 삶의 방식은 항상 떠나는 자(Ex-istence)이다. 한 군데 머물러 있다면, 정체되어 있다면 그는 안정감에 의해 썩어질 수도 있다. 구르는 돌은 이끼가 끼지 않으며, 호머의 〈배회하는 바위들〉은 고통스럽지만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인간은 지평선을 걸어가는 존재가 아니던가? 걸어갈수록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걷지 않는다면 주변 경관의 변화를 볼 수 없다.

어제 홍성역에서 카드를 내미니 잔액 부족이라 했다. 지갑 깊숙이 넣어 둔 5만원 지폐를 내밀었다. 천안에서 기차를 바꿔 탄 후 열차 까페에서 조심스럽게 잔액 부족이었던 카드를 내밀었다. 한 캔 한 캔 한 것이 네 캔을 마시니 목적지에 도착했다. 경치도 좋고 가을빛도 좋았다. 강폭이 넓디넓은 낙동강도 지나쳐 갔다.

그러나 마냥 좋을 수는 없는 것이 인간사이던가. 총괄 관리팀장 A와 팀장 B는 전에 일하면서 부딪힌 적이 있다.

여관에 짐 풀고 김밥 집으로 저녁식사 하러갔다. B팀장이 들어왔다. 고개를 꾸뻑하는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는 뜨아하게 내 손을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손을 ‘쬐끔’만 내밀었다. 그리고는 저 쪽 자리로 갔다. A팀장이 들어왔다. 얼굴을 뚜렷이 기억 못했던 터라 그의 인사에 조금 시간이 지난 후 답했다. 그 역시 반기는 표정이 아니다. 분위기가 어색해서 밥이 제대로 넘어가지도 않았다. 그나마 전에 보았던(함께 일했던) 김씨(D반장)가 인사해 주었다.

식사 후 만화를 빌려왔다. 분위기가 도대체 식당이나 여관 어디에 머물 수 없어, 도피 겸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A팀장이 여관 계단에 앉아 있었다. 그가 이야기를 꺼냈다.

“이 차장이 전화해서는 사람 보낼테니 일 시키래요. 그래 여기 현장, 재료도 없고, 11명 왔는데 있는 사람도 처치곤란이다. 바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더 필요하지는 않다는 거죠. 그러나 이 차장은 (보내는 사람) 무조건 일 시키래요. 그러니 분위기 감안해 줘요. 전에 알던(불편했던) 사람이고 아니고의 여부가 문제가 아니라, 현장에 사람이 별로 필요하지 않다는 거죠. 그런데 소장님인 줄은 몰랐죠. 더욱이 불편해요.”

내가 대답했다.

“그런 것 같았습니다. B 팀장 인사하는데, 영 좋은 표정이 아니더군요. 짐작은 했습니다.”

일하는 사람으로서 어디 간들 환영받으랴만, 그라우팅 팀에서 타 그룹에 대한 배척은 일리가 있다. 대개 젊은 축에 속하는 사람들이 그라우팅을 한다. 그리고 똘똘 팀웍을 이루고, 일을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에서 뭔가 끈끈한 관계가 형성된다. 나이 많은 노동자들이 이 팀에는 없다. 무엇보다도 말하기 쉬운 상대, 비슷한 연배이거나 팀장이나 반장보다 나이 어린 사람을 쓴다. 회사의 명령이 아니라면 나를 쓸 이유가 없다.

그러나 팀장이나 작업자, 그리고 내가 불편하다 해서 횡하니 떠날 수는 없다. ‘뭉개고 “개겨” 앉을’ 밖에 없다.

 

어젯밤 빈 집에서 잠을 잘 못 잔 탓에 몸은 고단했다. 일찍 쓰러져 잠들었다.

아침 역시 김밥집이었다. 나는 라면을 시켰다. 라면을 즐겨 먹을 수만 있다면 끼니 걱정이나 맛있는 음식 걱정 안 해도 될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식사를 끝내고 작업차에 올라타자, A팀장이 말했다.

“왜 라면만 드세요, 다른 것도 좀 드시지.”

“촉망중이라서 무얼 먹을지 영…” 하고 얼버무렸다.

점심이 일품이었다. 팀장이 찾아내, 오늘 처음 식사하는 집이라 했다. 말로만 듣던 갈치 속젓을 쌈채에 싸 먹으니 깊은 맛이 있었다. 고향이 바닷가인 탓에 온갖 젓갈을 즐겨 먹었으며, 지금도 좋아하는 음식이다. 입이 짠 것이나 소금 섭취를 많이 하면 몸에 안 좋다는 것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포만감, 맛있는 음식은 행복하게 한다. 저절로 혼잣말을 했다. ‘신난다.’ 식당 주인이 들었나보다. ‘왜요?’라고 물었다. ‘배불러서요’라고 답했다. 주인이 웃었다.

오후 작업은 견출이었다. 내가 오기 전 작업자들은 4인치 그라인더를 사용하여 구조물 회사(토목회사)에서 보양한 터널 벽체를 3일에 걸쳐 면 정리를 했다. 그러나 면이 고르지 못할 수밖에 없다. 그라인더 면 처리 한 부분을 특수 재료를 사용하여 말끔히 표면처리하는 작업이 견출이다.

ⅰ) Y군이 견출 재료를 희석한다. 시멘트 성분이되, 강도가 강하도록 처리한 메탈에 접착제를 물과 희석하여 잘 섞는다.

ⅱ) 반장 C와 D가 작업자들에게 일을 분담시킨다. 나는 중요하지 않은 일을 맞았다.

ⅲ) 희석한 견출액을 벽체에 바른다. 바르기 위한 준비작업이 필요하다.

우선 높은 곳 벽체를 칠하기 위해 비티 아시바를 설치한다. 견출액을 칠하되, 반듯하게 칠하기 위해 칠 할 부분에만 사각이 되도록 테이프를 붙인다.

ⅳ) 칠하는 것이 간단치 않다. 고루 발라 펴야 하되, 칠한 자국이 남아서도 안 되고, 붙질 흔적이 남아서도 안 된다.

ⅴ) 일부 작업자는 비티 아시바 위에서, 다른 작업자들은 낮은 곳을 칠했다.

잠시 쉬는 시간에 재료를 희석하는 Y군과 이야기했다. 이 팀에서 일하기 3년차라 했다. 군대 가기 전 2년, 군 제대 후 1년 일했다.

그는 일해서 번 돈으로 전문대 건축계열 학과를 졸업했다고 했다. 그가 일 하는 것을 보면 조금도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무거운 것도 번쩍, 시멘트도 번적 든다. 그는 기운이 좋다.

십 년도 지난 일이다. 함께 공부하던 동료들과 방학 중에 이 회사에서 알바한 적 있다. 당시 팀장의 이야기가 기억난다. ‘시상에 교수님들이 워쩐 일이래유. 노가다하러 오구.’ 아마도 강사였던 모양이다. 관절로 고생하던 이 선생은 지금도 강사를 한다. 그때보다 형편이 나아졌다. 그는 이름도 생소한, 방학에도 일정액의 급여를 받는 강사 교수 노동자이다.

후배 서선생은 알바하러 왔다가 사기당할 뻔 했다. 함께 일하던 사람, 우씨와 친해졌다. 그는 살아온 이야기도 하고 회사 돌아가는 이야기도 했다. 서선생은 무엇보다도 우씨로부터 일을 배우는 조공 처지였다. 서선생이 간조(일당을 한거번에 받는 것)했다. 우씨가 돈을 빌려달라 했다. 방학도 끝이 나 서선생은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알바를 마쳐야 했다. 우씨에게 돈 돌려달라 했다. 곧 주마던 우씨는 다음날부터 보이지 않았다. 몇 달 후에 서선생이 어렵게 그 일을 나에게 이야기 했다. 나는 회사에 이야기했다. 다행히 우씨가 받을 돈이 있어, 회사는 직권으로 우씨의 돈을 서선생에게 돌려주었다. 아니라면 서선생은 힘들게 일 한 일당을 날렸을 것이다. 우씨는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후문을 들었다.

 

저녁식사 한 후 여관에 돌아왔다. 대개 지방에 가서 일 할라치면 여관방 하나에 빼곡하게, 그야말로 발 뻗기 힘들게 한 방에서 자는 것이 상례이다. 이 회사가 노동자의 복지에 신경 쓴다는 것은 여관에서도 드러난다. 작업자 두 세 명이 방 하나를 쓴다.

함께 방을 쓰는 이씨는 33살이다. 여러 직업을 전전했으되, 이 팀에 들어온 것은 한 달 남짓하다고 했다. 대개 건축 관련 노동자는 겨울에 일이 없다. 이씨는 그라우팅은 겨울에도 일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는 겨울에도 한 달, 20일 이상 일하기를 기대했다. 나는 마음 속으로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발문에서 이야기했듯이, 기공 목수 1년에 통상 200일밖에 일 못한다. 그라우팅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일거리는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무릎이 아프고 발목이 아파서 욕조에 물을 받아 온찜질을 했다.

 

이튿날도 견출작업이다. 우선 되나우시(부적합한 작업 재시공)를 했다. 어제 칠한 부분이 원래의 벽체보다 짙은 회색이 나왔다. 따라서 흰 색깔 나는 재료를 섞어 다시 칠한다.

나도 벽체 낮은 부분을 칠했다. 건축 견출 전에 해보았다. 그러나 접착제가 섞인 재료를 곱게 칠하기란 쉽지 않았다. 팀장이 와서 지도해 주고, 반장이 와서 지도해 줘도 곱게 붓질이 되지 않았다.

작업은 힘들다고는 할 수 없다. 반장들도, 작업자들도 서두르지 않았다. 우선 잘 칠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라고 당부했다.

일 끝나고 터널을 나오며, 작업자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22살 작업자가 어제 친구가 와서 노래방을 갔더랬다. 자기 또래의 아가씨들이 도우미로 왔다. ‘야 너 뽕 넣었냐?’하고 젖가슴에 손을 넣었다. ‘왜 이래’ 하고 반응하며 거부하는 아가씨에게 서울로 춤추러 가지고 했다. 아가씨가 담에 전화하마고 했다. 그날 밤 친구에게 아가씨가 술 취한 채 전화가 왔다. 그 다음 이야기는 못 들었다. 아가씨도 외로웠나보다. 아니면 손님들에게 받는 스트레스가컸던지.

돌아오는 차에서 앞서의 노래방 이야기를 들었던 C반장이 한마디 했다.

“남자들이 그렇게 밝히는데, 여자들이 (혼자 남아) 있겠나.”

그는 7년 연애하던 여성과 헤어졌다. 일방적으로 끝났다. 노가다(육체노동자)와 결혼해 줄 여성은 없다. 그는 이제 결혼을 포기한 상태이다.

도우미, 감정 노동하는 이들을 만나보았다. 이혼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반드시 아이를 키운다. 한결같이 아이만은 잘 키우고 싶다는 바람이다. 아이 키우는 데 돈이 많이 들어간다. 그리고 커리어 우먼, 전문직을 제외하고 여성들에게 일자리는 한정되어있다. 이른 나이에 강제퇴직당하거나 배운 것 없는 남성들의 일자리가 한정되어 있듯이, 젊은 여성이건 중년여성이건 식당, 서빙, 드물게 공장노동이 있다. 도우미는 비교적 수입이 괜찮다고 들었다. 젊은 여성이라면 당연히 편하고 수입 좋은 곳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

실험이라면 이상하고, 교육의 힘을 실감한 적이 있다.

억환이가 노래방 좋아하는 것 모르는 사람이 없다. 노래를 가수 이상으로 잘 부를 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탓에 즐겨 노래방 간다. 축농증 수술 후에 약간 코먹은 소리를 내긴 하지만 여전이 고음 좋고, 감정 좋다. 노래 잘하는 나 역시 노래방을 즐긴다. 술 한 잔과 친한 친구에게 노래방은 좋다.

돈 잘 벌던 약간 젊은 목수에게 도우미 부르는 것은 (금전적으로) 문제가 없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도우미 Y 부인이 우리와 자주 어울렸다. 그녀는 직업을 바꿀 기회와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의기투합한 우리는 그녀의 직업을 바꾸는 것을 도와주기로 했다. 목표는 당시 수요가 폭발하던 ‘논술교사’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홍선생의 답변을 기금도 기억한다.

“논술교사가 그리 쉽게 되겠나.”

그녀는 주경야독했다. 주간에는 공부하고, 야간에는 노래방에서 일했다. 한가했던 나는 그녀의 수업을 도와주었다. 물론 그녀는 끈질기게 논술 교육기관을 다니는 한 편, 나와 계획한 커리큘럼을 2년 넘게 소화했다.

전직한 그녀는 성공했다. 학원 취업에는 타고 난 용모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력이 있어야 논술선생을 할 수 있다. 전직한 그녀는 1년만에 3-4개 학원을 뛰고 있으며,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한다고 알려왔다. 때로는 나에게, 나이를 상관하지 않는 논술 교육기관의 일거리를 소개해 주기도 했다.

적절한 교육만 받는다면 여성들에게 일거리는 충분히 있다. 문제는 누가 교육비를 대느냐 하는 것이다. 답은 하나다. 모든 이에게 동등한 출발기회를 만들어줄 책임이 있는 ‘국가’가 그 일을 해야 한다.

저녁 식사 후, 씻고는 죽은 듯이 잠들었다.

 

새벽녘이면 기막히게 잠이 깬다. 핸드폰 시계를 켜면 칼같이 5시 55분이다. 바삐 서둘러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사시간에 맞출 수 있다.

오늘은 어느 정도 작업한 후(점심 식사 후), 세 팀으로 나눠질 것이다. 한 팀은 D반장 인솔 하에 서울로, 또 한 팀은 B팀장 인솔 하에 울산으로 갈 것이다. 따라서 오늘 저녁 남는 이는 네 명일 것이다.

견출작업을 위해 아시바에 올랐다. 함께 아시바에 탄 이로부터 붙질 잘 못한다고 크게 핀잔을 먹었다. 반장 C가 작업하는 아시바에 올랐다. 그가 작업요령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내 작업이 만족스럽지 않은 듯, 그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잠시 뜸을 들인 후 다시 작업방식을 설명했다.

ⅰ) 붓을 견출액에 적시되, 3분의 1가량만 묻힌다.

ⅱ) 넓게 칠하려 하지 말고 한 뼘 정도만 칠한다. 견출액을 묻힌 붓을 칠할 부분에 살짝 묻혀, 아래로 내린 다음 위로 올려 칠하고 다시 내려 칠한다.

ⅲ) 다음번에는 앞에서 칠한 부분과 따로 놀지 않도록, 즉 한꺼번에 칠한 것처럼 마지막 붓질에서 위로 올려준다.

점심 식사 후 휴식 시간에 현장 주변 감나무 밭을 구경했다. 노인 한 분이 감나무 일을 하는지, 그늘에 앉아 쉬고 있다. 보통 3-4년 생이라는 내 키보다 작은 나무들이 한 20개 씩 감을 안고 있다. 물감이라고 부르는 대봉이다. 감을 많이 매단 채, 나무 두 그루가 말라죽어 있다. 노인은, 느티나무가 감나무를 죽였다고 했다. 말인즉슨, 느티나무가 감나무 먹을 양분과 수분을 빨아들여 감나무가 진 탓에 죽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햇빛이 부족해서 죽은 듯 했다. 식물은 보통 일조량의 70퍼센트가 필요하다고 한다.

네 사람이 남으니 현장이 조용해졌다. 견출 일이 끝난 후, 내일 A팀장이 지수작업(지하 구조물에 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는 작업)할 현장으로 와, 잠시 구경했다. 팀장은 사진과 현장 위치를 대조했다. 화이바(플라스틱 헬멧)가 머리를 조여, 아팠다. 화이바를 머리 뒤로 걸쳐 쓴 순간, 원청 회사 관리 직원에게 ‘딱’ 걸렸다.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안전교육 받았어요?”

나는 순간 당황하여, “네”라고 말했다. 그가 반말 수준으로 재차 말했다.

“헬멧을 그렇게 쓰라 해?”

순간,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 사람들 뒤로 숨듯, ‘꼬리’를 내렸다. 그의 말투는 난폭한 수준이었으며, 눈빛은 사나웠다. 나는 뒤돌아서서 ‘오직 지도의 대상으로만 사람을 대하는 인간’라고 생각했다.

 

시간 참 잘 간다. 일 끝나면 식사하고 자고, 일하고 자고, 순식간에 나흘째다.

오늘은 인젝션 작업이다. 작은 균열에 콘크리트 접착제, ‘에폭시’를 주입한다.

이 작업을 20년 전에 해 보았다. 만조가 되면 비오듯 물이 쏟아지는 해수면 이하의 터널 공사장이었다. 30여 명이 달려들어 밤 낮 없이 지수작업과 균열작업을 했다. 나는 두어 달 동안 그곳에서 일했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그 엄청난 물을 다 막았다는 것, 그리고 시골스런 생맥주집에 노래방 기계가 있어, 해변을 바라보며 노래 부르던 것, 그리고 가수 이상으로 고음이 올라가던, 목청 좋은 서빙 아가씨의 노래, 그리고 지금은 이 회사에서 일하지 않는,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다.

교각(다리 기둥)은 어쩌면 구조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앞에서 말했듯, 콘크리트 양생 과정에서 교각에 잔 균열이 생긴다. 그라우팅은 미국에서 발전시킨 콘크리트 보수 방법이다. 들은 이야기로는 미국 건축 교범에는 엄격한 보수 규정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균열을 보수할 수는 없다. 보수 비용도 문제이려니와 그 효과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교각 보수 시범 시공하는 작업이다.

작업순서는,

ⅰ) 씰링 작업과 좌대 붙이는 작업이 첫 날 일이다. 주사기를 걸어둘 좌대를 균열 부위에 붙인다. 교각 균열 부분을 따라 씰링을 한다. 이 작업은 실링제 주제와 경화제를 2대 1로 덜어내 잘 섞은 다음, 균열부위를 따라 발라주되, 좌대를 붙일 부분, 약 2-3 센티미터 떼어 놓는다.

ⅱ) 씰란트 주제와 경화제를 1대 1 비율로 판대기에 덜어내 잘 섞은 다음, 헤라를 사용하여 좌대 가장자리에 발라준다. 이 때, 씰란트제를 많이 바르면 좌대 구멍이 막힐 수 있다. 적당량을 발라 주는 것이 중요하다.

ⅲ) 씰란트를 바른 좌대를 균열부위, 씰링 안 한 부위에 붙여준다.

하루가 지나면 씰링제와 씰란트제가 굳어진다. 그 위에 균열 보수제를 넣은 주사기를 매단다. 그러면 균열을 따라 보수제가 교각 콘크리트 안으로 스며든다. 보수제는 콘크리트와 콘크리드를 강하게 결착시켜준다.

또 주사기의 균열 보수제는 다시 하루가 지나면 굳는다. 좌대를 분인 후 사흘만에 마무리 작업을 한다. 우선 좌대와 주사기를 떼어내고, 4인치 그라인더로 씰링제와 씰란트를 제거한다.

주입작업은 물량이 많든 적든, 반드시 3일이 필요한 작업이다.

오전에 좌대와 씰링작업을 끝냈다. 오후에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보수를 요구하는 사진과 현장을 대조했다. 작업 현장을 찾아내는 것도 일이다. 팀장의 일이긴 하지만, 작업자들도 알아야만 작업 준비를 쉽게 할 수 있다.

현장을 돌아다니는 자동차 길은 예뻤고, 가을 햇볕은 맑고 청명했다. 논둑, 밭둑마다 감나무가 심겨져 있었는데, 주먹보다도 큰 감이 주렁주렁, 황금빛을 띤 채 매달려 있었다.

일찍 일이 끝나, 도서관으로 갔다. 디지털 미디어실 사용 예약에 딱 한 대 남은 컴퓨터는 한글 프로그램이 작동되지 않았다. 이층 컴퓨터는 2007 한글이되, 원인 모를 이유로 작동되지 않았다. 직원에게 물으니, “프로그램을 사지 못해서요”, 라고 답했다. “아 씨”라고 혼잣말 하고 내려와 다시 디지털 방에 들르니, 10분 후 컴퓨터 한 대가 빈다고 했다. 담배 한 대 피우고 들어가 컴퓨터 작업을 했다.

직원인지, 자원봉사자인지 알 수 없는 이가 데스크에 앉아있다. 전화를 하는데 상식이하로 떠든다. 사적 이야기도 많다. 뒤에 앉은 아저씨가 한마디 했다.

“시작됐다. 몇일 안 보인다 했더만.”

프린터를 하려 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한숨을 쉬고 도서관을 나왔다. 모든 이에게 그렇겠지만, 나에게는 귀중한 시간이다. 도서관에서 노동하는 이들이 좀 더 성실히 일 해 준다면 이처럼 헛걸음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여관으로 걸어갔다. 시장을 지나는데, ‘전어회’라는 간판이 보였다. 살이 통통하게 찌는 가을 전어는 맛있다. 1킬로를 회 떠서 여관으로 갔다. 이씨가 술을 사왔다. 잘 먹었다.

술자리 끝난 후, 방으로 돌아왔다. 뒤따라 A팀장이 내 방에 들어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빠듯한 식사 비용 문제, 팀장으로서 겪는 스트레스이야기 끝에 예전에 내가 B와 부딪혔던 이야기가 나왔다.

몇 년 전, 나는 이 회사의 관리자(현장소장)를 했다. 당시에는 작업자였던 B팀장이 균열보수를 하러 내려와 있었다. 직영 노동자 5-6명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현장이었다. 보수 팀 중에 L씨 형제가 있었다. 균열 보수 일거리가 마땅치 않은 이들은 손이 비는 날에는 우리 일을 지원해 주었다. 형제 중 형이 내 눈에 들었다. 요즘 말로 천연기념물, 자기 이득을 챙기겠지만, 어쨌든 성실하게 개인 이익 생각 안하고 일하는 사람이었다. 형제와 나는 약속을 했다. 형제의 동생이 팀장이었다. 수입이 될 일거리 보장해 준다면 우리 일을 전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했다. 나는 일거리를 보장했다. 그러나 지금의 B팀장, 당시에는 A팀장의 구성원이었던 이가 말했다. “L씨 형제를 보내야 하겠다. (균열 보수) 일거리는 없고, 두 팀이 나눠 먹기는 어렵다.”

나는 L씨 형제와 한 약속을 지켜야 했다. 일거리를 두 팀이 나눠먹도록 조정하려 했으나, 본사의 관리자가 직접 조정을 자처하고 나서는 통에 그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지금의 B팀장이 물러나야 했다.

A팀장 이야기로는 그(B)가 지금도 그 일을 잊지 못한다는 것이다. A팀장이 말했다.

“물론 소장님이야 (L 형제와) 약속을 지키려 했다지만, B에게는 밥그릇 문제가 달린 것이었죠. 아직도 그 응어리는 남아 있을 겁니다. B가 껄끄러워 할지라도 (당신이) 이해야 됩니다.”

지나보면, 현장을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남에게 못할 일도 했다. 도대체 현장 분위기, 태업을 일삼는 이들과 함께 일하기는 쉽지 않다. 당시에 네 명인가를 해고했다. 비록 그들이 해고 고용보험을 타먹었을지라도, 지금 만난다 해도 그들은 나를 원망할 것임에 틀림없다.

 

오늘은 주입 작업이다. 좌대와 씰링제는 잘 굳었다. 에폭시 주제와 경화제를 희석하여 주사기에 넣는다. 병원에서 하듯이, 주둥이를 에폭시에 넣고 손잡이를 잡아다녀, 주사기 안에 에폭시가 들어가도록 한다. 다음 고무줄을 이용하여 주사기를 좌대에 고정시킨다. 그러면 에폭시는 균열을 따라 콘트리트 속으로 들어간다.

약하게 씰링한 부분에서 에폭시가 새어 나왔다. A팀장이 어제 씰링작업을 한 반장에게 이 부분에 대해 ‘쫑코’ 주었다. 간단히, “왜 이렇게 새냐?”라고만 말했다. 반장은, “두껍게 (씰링)했는데” 라고 혼잣말인 듯 말했다.

나는 주사기를 좌대에 고정시켰다. 어느 부분은 주사액이 금방 없어진다.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동공이 균열 안에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빈 주사기를 빼 내고 충진제가 들어찬 주사기로 대체한다. 무심코 빈 주사기를 에폭시가 들어차있는 주사기로 바꾸는데, 반장이 와서 난리를 쳤다. ‘옆 주사기 자리에서 충진액이 새는데 왜 주사기를 바꾸느냐. 시키는 일만 해라’는 요지였다. 그리고 말 끝에 노가다가 자주 쓰는 육두문자를 덧붙였다.

반장이 잘못 보았다. 세 개의 주사기가 비었으되. 에폭시가 계속 균열 틈에서 새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한 20 센티미터 쯤 흘러내렸을 뿐이다. 더 이상 에폭시가 새어나오지는 않는다는 듯이다.

나는 변명하지 않았다. 반장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 것이다. 또, 변명이란 어느 경우이든 자기를 방어하려는, 정신이 약한 사람들의 짓거리가 아닌가.

그러나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나 원 참”하고 혼잣말을 했다.

 

오늘 작업은 인젝션 부분 면 처리(그라인더) 작업이다. 오전 작업하면 끝이다. 즐겁기 짝이 없다.

점심 국이 맛있었다. 겉보기에는 배추 김치와 콩나물 국이다. 그러나 국물을 한 번 뜨니 보통 음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국 말아서 밥 한그릇 뚝딱 해치웠다.

식사를 끝내고 나오며 주방을 향해 “예술 많이 하세요”라고 말했다. 서빙하는 여성이, ‘그렇게 맛있던가요, 콩나물국이?’라고 답했다. 억양이 강한 경상도 사투리이다.

오후에 일하는데, 덕수에게 전화가 왔다. 인터넷 신문 들어가서 (내가 기고한 것) 읽어 보았는데,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왜 문단을 이렇게 썼는지, 앞 뒤 문장이 연결 안 되어, 내가 썼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편집자가 기고한 글을 다듬는 것은 뭐라 말 할 수 없는 부분이다. 따라서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낼 수도 있고, 책임질 수 없거나 검증할 수 없는 단락을 잘라낼 수도 있다. 결국 필자의 몫도 있으되, 편집자의 권리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그 글을 조금 서둘러 쓰기는 했다. 그러나 상징적으로 말 한 부분이나 요설(?)이라 할 부분들이 뭉텅이로 잘려나가 있었다. 지면을 조정하려 했거니, 하고 넘어갔으나, 덕수의 말을 들으니, 조금 기분이 언짢았다.

덕수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사흘 만에 쓰셨다니 이해가 가요. 다음에는 시간을 충분히 잡아서 잘 쓰세요.”

나는 웃으며 그러마고 했다.

저녁 식사 후 컴퓨터방에서 타이핑하는데, 덕수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웹진에 노동일기 쓰기로 해서 작업한다고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덕수가 중고 노트북 컴퓨터 사 보내겠다고 제안을 했다. 여관에서 컴퓨터 작업하면 더 좋을 듯 했다. 나는 다음달 10일, 간조하면 컴퓨터 값을 보내기로 하고는, 컴퓨터를 사기로 했다.

한 시간도 안 되어 인터넷으로 노트북을 사서, 택배로 보낸 후 덕수는 다음과 같이 메세지를 보냈다.

“글도 한번 멋지게 써 보세요. ㅎㅎ 틈틈이 써 두셔서 나중에 책으로 엮을 만하게요.”

 

발주처 사정으로 몇 일간 터널 견출 작업을 못했다. 오늘부터 다시 견출 작업이다. 서울로 갔던 팀들도 합류해, 9명이 작업을 했다. 항상 일을 준비하는 시간이 길다. 전에 다녔던 길에 울타리를 치거나 길을 없애고 자연스럽게 언덕을 만들고 있다. 작업 도구와 재료들을 차에 싣고, 비교적 가까운 터널 쪽으로 갔다. 그리고 일일이 사람 손으로 대차가 다닐 수 있는 곳까지 날랐다. 백시멘트 30포, 메탈 20포, 물통 6개, 아시바 2조, 시멘트와 메탈을 믹서할 커다란 플라스틱 통 2개 등, 옮기는 데만 40여 분이 걸렸다. 목수 노동에 비해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서울 갔다 온 팀원, 대전 산다는 젊은이에게 물었다. “집이 대전이라든데, 서울로 일하러 가면 어디서 자는가.” 그는 “숙소(에서 잔다)”라고 말했다. 다시 물었다. “몇 명이 숙소를 쓰는가.” “여덟 명”이라고 답했다. 재차 물었다. “재미있겠네, 여럿이 함께 지내니.” 그는 “재미없어요”라고 답했다.

숙소 생활 한 적이 있다. 여럿이 함께 쓰면 도대체 개인 생활이란 없다. 항상 다른 이를 배려해야 한다. 그 중에 못된 인간, 폭력적 인간이라도 하나 낀다면 지옥이다.

작업 끝내고 대차에 작업도구와 재료들을 싣고 나오면서, 짐을 싣고 오는 포크레인과 교차했다. 잠시 후 짐을 부렸는지, 포크레인이 되돌아 나왔다. 기사는 약간 서두르는 기색이 있었다. 크랙션을 누르길래 우리가 잠시 대차를 멈추자 포크레인은 우리를 추월해 갔다. 도로가 아닌 길을 저렇게 서둘러도 되는가, 하는 순간, 포크레인이 균형을 잃고 옆으로 넘어졌다. 바삐 그 쪽으로 걸어갔다. 포크레인 기사가 깨진 유리창을 밀고 기어나왔다. 기사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다행히 다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운전석에서 기사의 신발을 꺼내 주었다. 옆으로 누운 기름통에서 경유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퇴근 시간이 바빠서였을까, 서두르던 그는 한 순간에 크게 손해를 보았다. 운전석 유리창을 갈아 끼워야 하고, 차를 일으켜 세우려면 다른 포크레인을 불러야 한다.

저녁식사 하러 식당에 들렀다. 식당주인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식당을 운영하는 것이 고된 일인 줄 알지만,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일하는 줄 알지만. 식당주인이 장비 기사나 건축노동자에 비해 비교적 안전한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식사하며 팀장이 말했다. “앞으로 5일간 누구 한 사람도 일을 빠져서는 안 된다. 술 먹는 거 말 안하겠지만, 어떤 이유로든 작업에 빠지지는 마라. 5일 내에 반드시 작업을 끝내줘야 한다. 거듭 부탁한다. 건강 챙겨 일해 주기 바란다.”

노트북이 도착했다. 외관은 깔끔했다. 유에스비 장치가 잘 작동되지 않아 애먹었다. 어찌어찌 해서 사용할 수 있었다. 좋다.

 

아침부터 두 팀으로 나눠 작업을 시작했다. 지수, 균열보수팀 4인은 A 팀장이 인솔해 가고, 나머지 6명은 견출작업장으로 갔다. 재료를 어제 올려놓았으므로 빈 손으로 터널로 가는데, 무척 편했다. 그러나 작업이 지루해졌다. 그만 좀 했으면 싶다. 천안으로 돌아가 책을 읽거나 놀고 싶다.

또는 목수일 다니고 싶기도 하다. 목수일은 비록 힘들지라도 지루하지는 않다. 항상 새로운 일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계속 일이 바뀐다. 그러나 견출은 항상 같은 작업이다. 그러나 시간은 잘 갔다. 잘 칠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리라.

민씨와 아시바에 올라 작업했다. 오른 손을 써서 칠하는데 어깨부터 팔꿈치, 손목이 아팠다. 민씨 작업하는 것을 보노라니, 오른손과 왼 손을 번갈아 사용했다. 나도 왼 손으로 칠해 보았다. 어색하긴 하지만 제법 칠할 수 있었다. 교대로 칠하면서 오른 손을 조금 쉴 수 있었다. 그러나 속도가 문제였다. 다른 사람들은 오늘 안으로 세 번째 터널을 끝내려고 열심이다. 그러니 마냥 왼손으로 칠할 수만은 없었다.

점심 먹으러 나오며 들국화를 한 아름 꺾었다. 말려서 베갯닛에 넣어야겠다.

몇 년 전에는 가을마다 들국화를 꺾어 말렸다. 애 엄마에게도 보내 주고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모두 좋아했다. 애엄마가 덕수에게 들국화 베갯닛을 해 주었는데, 매번 그 베개를 쓰더라는 기억이 떠올랐다.

감기 기운을 느낀 것은 점심 먹는 중이었다. 콧물이 나오고, 코가 맹맹했다. 감기기운을 이기려고 미역국을 두 그릇 먹었다.

잠깐의 휴식시간이 있었다. 들국화를 한 아름 더 꺾었다.

오후 작업하는 터널은 바람이 세게 불었다. 길이가 짧고 양 끝은 골짜기를 이루어서 저절로 바람이 만들어지는 지형이었다. 가슴이 서늘했으나 일을 시작하자 곧 추위를 잊을 수 있었다.

B팀장이 견출액을 섞어주었다. 반장 둘, 나를 포함한 작업원 셋, 여섯이서 일하는데 작업 속도가 무척 빨랐다.

원청회사 안전원이 왔다. 시험 운행이 있을 예정이란다. 100킬로미터로 달릴 것이므로, 운행 차선에서 작업하지 말기를 당부했다.

열차는 계속 달리는 것이 아니라, 약 천여 미터씩 왕복했다. 백 킬로미터로 달리는 소음이 엄청났다. 양 손으로 귀를 얼른 막았다.

일 끝나고 현장을 나오며 작업자 한 사람이 길 옆 감나무에서 여러 개를 따, 가방에 담았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지방 오면 이런 맛이라도 있어야지.”

저녁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A 팀장이 말했다.

“소장님 일정이 어떻게 되시는지, 여기 끝나고 전라도 쪽으로 보내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가지요”라고 했다. 옆에 앉아있던 이씨가, “지리산 가신다면서요.”라고 했다. 나는 엉겁결에, “하루쯤 지리산 구경하고 가지요 뭐. 여기까지 와서 지리산 구경 안 하다니…” 했더니 단번에 A팀장의 응답이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지리산 구경 못하는 우리들….” 나는 열없어서, “지리산 간다고 하면 ‘그래 너 잘났다’라고 할 테니, 다리 아파 하루 지체해서 간다든가”라고 얼버무렸다.

여기 현장 끝나면 A팀은 바로 서울로 옮겨 일해야 한다. A팀장이 덧붙였다. “전라도 현장도 무척 바쁜가봐요, 남은 시간이 열흘이라나” 라고 했다. 나는 속으로, 지리산은 다음으로 미뤄야겠다고 생각했다.

밤늦게 통닭이 들어왔다. 어젯밤, 멤버들 모여 포커했다. 15만원 잃은 사람 덜 억울하도록 딴 사람이 통닭을 샀단다. 도박과 저축은 배우지 않아도 재미있으니, 배우지 말라는 옛 사람의 말이 있다고 한다.

통닭에 막걸리를 데워서 마셨다. 이씨는 드라마를 꼭 챙겨본다. 드라마가 끝나자, 〈세상에 이런 일이〉를 본다. 장애인 부인을 돌보는 남자 이야기가 방송되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질문을 내게 돌렸다. “아저씨 좋은 세상 만들려고 (글을) 쓰신다면서요?”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중얼거렸다. “옆 사람을 배려해야지. 말로만 하는 사람은 안 돼. 저런 사람들이 있어야 세상이 좋아져.”

몇 일전, 컴퓨터가 도착한 이후로 매일 밤마다 타이핑하는 나를 보고, 이씨가 물었다.

“무얼 쓰세요? 왜 쓰세요?”

그 때 나는 얼버무린 듯하다.

“뭐,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어서)…”

방금 이 씨의 말을 듣는 순간 뜨끔했다. 좀 전에 막걸리를 데우며 가스 냄새를 풍겨서인가? 등산 배낭에서 가스버너를 꺼내 조립하여 가스를 켜니, 잘못 조립되었는지, 가스냄새가 났다. 이씨가 말했다.

“가스 냄새 나요. 다음에 해요.”

나는 말없이 버너를 들고 나가 복도에서 막걸리를 데워왔던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른다. 나는 적어도 방을 쓰는 모든 면에서 그를 배려한다. 그러나 무심한 것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A팀장은 가끔 이씨를, ‘4차우너 인간’이라고 부르곤 했다.

 

오늘도 두 팀으로 나눠 일을 시작했다.

나는 낮은 곳을 칠했다. 쪼그려 않아 일하기 불편해서 두 무릎을 땅에 대고, 않아 칠했다. 오른 손이 아프면 왼손으로 칠했다. 비교적 잘 칠해졌다. 무엇보다도 희석액이 부드럽게 섞여, 일 하기가 편했다. 모두들 열심히 칠했다.

견출 팀은 오전 작업이 일찍 끝났다. 터널 하나를 다 끝냈다. 옮겨놓은 재료가 많이 남았다. 이제 다른 터널로 옮겨야 한다. 대차를 설치하고 시멘트와 메탈, 아시바 대, 물통, 자잘한 물건들을 차 댈 수 있는 곳까지 옮겨놓았다. 차에 실어 옮기는 것은 점심 식사 한 후에 하기로 했다. 문제는 차가 짐 옮겨놓은 곳까지 올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울타리를 치기 위해 말목을 밖아 놓아서 차가 들어오기에 방해가 된다.

D반장과 작업자 E 간에 내기가 벌어졌다. D반장은 차가 들어올 수 있는 쪽에, 작업자 E는 못들어오는 쪽에 5만원을 걸었다. 궁금해 견딜 수 없다며, D반장이 차를 운전해 오기 위해 갔다. 한 참 후 차가 들어왔다. 누군가가, “D에게 아이스크림 사라고 하자”라고 말했다. E는 “만원만 깎아 달래야지”라고 말했다.

농협 마트에 들러 각자 하나씩 자기 먹을 것을 골랐다.

D반장에게 B팀 숙소에 대해 물어보았다. “B팀장 혼자 숙소를 꾸려나가는가, 아니면 회사에서 도와주는가.” 대답은 이랬다. “회사에서 도와주지 않는다. 숙소를 쓰는 사람들이 얼마씩 나눠 부담한다.” 회사에서 비용 부담 안 해주는 것이 이해가 갔다. 회사 숙소 개념이라기보다는 함께 방을 쓰는 셈이다.

점심 식사 후 잠시 쉬었다가 차에 짐을 실었다. 한 차에 못 실을 듯했던 짐, 엄청나게 많아보이던 짐을 다 실었다. 옮겨간 곳은 작업 구간도 작고, 일거리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시험운행 중이라서, 한 쪽 차선은 작업할 수 없었다. 일찍 끝내고 들어왔다.

이씨에게, 먼저 씻겠느냐고 묻자, 자기는 오래 씻으니 나에게 먼저 씻으라 했다. 욕조에 물을 틀어놓고, 잠시 타이핑 하는데, 이씨가, “언제 씻을거냐”고 물었다. 짜증이 섞여있었다. 타이핑을 중단하고, 목욕탕으로 갔다.

A팀장이 내 방으로 왔다. 그는 어렵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곳 작업은 예상대로 마칠 수 있을 것 같아요. 전라도 현장이 바쁘다 하니, (나는) 거기 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회사에서는 최차장과 내가 조율해서, 적절한 시기에 소장님을 전라도로 보내라 했거든요.”

그리고는 최차장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저녁식사하러 순대국 집으로 갔다. 나는 막걸리 세 병을 사서 테이블마다 한 병씩 돌렸다. 내 나름의 소박한 작별인사였다.

 

 

내 안의 나를 만나러 가는 길[치유시학]

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1. 한 마리의 귀뚜라미?

날씨는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한낮이라도 웃옷을 걸치지 않으면 서늘함이 느껴지는 계절인데, 할머니의 방문 앞에 귀뚜라미가 한 마리 앉아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꼼짝을 하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 마루를 손으로 살짝 두드려도 미동조차 없었다. 나는 그날 아픈 아이를 혼자 집에 두고 할머니를 찾아갔기 때문인지 그 귀뚜라미 한 마리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인기척을 느낀 할머니가 문을 열었다. “김선생이가? 안 들어오고 그서 뭐하노?” “귀뚜라미가 꼼짝을 안 하네요. 얼어 죽었을까요?” 나의 물음에 할머니는 크게 웃었다. 처음 듣는 웃음소리였다. 언제나 소리 없이 얼굴만 웃었는데, 그날은 크게 웃었다. 하지만 공기를 가볍게 날리는 웃음소리가 아니라 내 주변의 공기들을 무겁게 가라앉히는 웃음이었다.

“어제 밤에 그리 울더라. 그런데 니는 보이나? 나는 안 보여서 어디 간 줄 알았네. 인자 앞도 잘 안 보인다.” 할머니는 백내장으로 시야가 맑지 못하다. 밤새 울던 귀뚜라미가 방문 앞 마루에 있었지만,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할머니는 그렇게 큰 소리로 웃었던 것이다. 눈 앞에 있는 사물을 볼 수 없는 날이 올 때, 나도 그렇게 큰 소리로 웃을 수 있을까?

감기는 낫지 않고 있는데 날씨가 계속 추워지자 할머니의 눈에는 눈곱이 떨어지는 날이 없는 듯이 보였다. 그날따라 할머니의 눈에는 커다란 눈곱이 매달려 있었지만, 그마저도 전혀 감각을 못 느끼고 있었다. 나환자들의 친구로 불리는 폴 브랜드는 고통을 신이 준 선물이라고 했다. 폴은 오랫동안 한센인들을 돌보고 치료하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여 병이 깊어지는 줄도 모르는 그들을 보며 고통이 얼마나 큰 선물인가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통이 꼭 몸의 감각에 의해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견뎌야 하는 마음의 고통은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갑자기 추워지는 날씨 탓인지 그날따라 할머니의 모습에서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가 없었다. 나날이 쇠약해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바늘에 찔리는 것과 같은 아픔이 밀려왔다.

 

2. 고향의 가을?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의 상념에 잠겨 말없이 앉아 있었다. 침묵을 깬 것은 할머니였다. “김선생, 집에 뭔 일 있나?” “아뇨” “왜 말이 없노?” 나는 할머니에게 당신 때문에 내 마음이 너무 아파서 말을 할 수 없노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다. 이상하게 당신의 고통이 나에게로 옮겨 와 내가 너무 아프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리고 매주 당신을 마주 하고 앉는 이 시간이 이제 너무 힘들다고 투정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나를 속였다. 웃으면서 “가을이 오니 심란하네요.”하며 가을 탓으로 돌렸다. “하이구, 니도 가을 타나?” “왜요? 저도 여자인데요.” 우리 둘은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렇다. 할머니도 여자고 나도 여자이다. 이 세상 모든 여자가 마음속에 비밀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비밀이 불쑥불쑥 밖으로 나오려고 하면 수다스러워지거나 말이 없어지는지도 모른다.

“어머니, 제가 어릴 적에요, 나무가 요술을 부리는 줄 알았어요.” “왜? 나무가 니보고 뭐라카더나?” “그게 아니고, 나뭇잎이 색깔이 변하잖아요. 그것도 이상한데 어떤 것은 빨갛고 어떤 것은 노랗긴 한데 안 예쁜 것도 있고, 신기하잖아요.” “니는 그런 것도 아직 기억하나? 나는 그런 기억이 없다.” “옛날에는 기억이 다문다문 남아 있었던 것 같은데, 인자는 어릴 때는 없고 그냥 한 덩어리로 기억이 남아 있다.”

가을 하늘은 푸르고 맑기만 하더라

산천초목에는 붉은 물 든 단풍들이

장관이더라.

한 고개 내려와 보니

은행나무 잎에는

노리고도 노란 색깔 위에

황금빛을 나타내며

흐르는 잎마다 주워서 책 속에 넣던

옛 추억이 떠오르네.

뒤돌아보니 금수화꽃은

우리 한반도 지도처럼

차분하게도 피어 있더라.

온 들에서는 코스모스가 피었고

길에도 피어 색색가지로

자기를 나타내며

뽐을 내고 웃고 있는 그 모습이

교만해 보이더라.

-부분-

할머니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유난히 나무가 많고 꽃이 많았다. 계단을 한 칸씩 내려올 때마다 나무가 다르게 보였다. 초등학생이었을 때 할머니는 그 풍경이 좋아서 계단마다 서서 나무들을 둘러보았다. 때로는 계단을 오르내리기도 했다. “다리 아픈 줄도 몰랐다. 얼마나 좋은지 심심하면 계단에 갔제.” 학교는 배움터이자 놀이터였다.

할머니 기억 속의 고향 가을은 황금빛이었다. 황금빛 은행나무, 나지막이 피어 있는 금수화(금당화) 등은 많은 시간이 지나도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자연의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기억이 있다. 시간의 벽 속에 갇혀 원래의 모습 그대로 기억되어 있는데, 할머니에게 고향의 가을은 변하지 않는 기억 중의 하나였다.

이러한 기억들은 잊혀지지 않고 그대로 지속되어 현재의 삶에 문제를 일으키거나, 아니면 삶의 문제를 풀어줄 수 있는 해결의 열쇠가 되기도 한다. 마쓰시타, 어머니 그리고 아들에 대한 기억은 할머니의 삶을 고통 속에 빠지게 했다면, 어린 시절의 고향에 대한 기억은 할머니에게 삶의 휴식을 주고 있었다.

 

3. 고통의 강을 건너?

처음 썼던 시에서 자연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이 밤도 뒹구르며/몸부림칠 때/눈물이 강이 되어/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다면,에서 자연은 할머니에게 행복했던 시간을 되돌려주고 있었다. “꽃도 많고…. 가을이 되어도 코스모스는 있는 기라.” 60여 년 전에 피었던 코스모스는 할머니 집 마당 앞 공터에도 피어 있다. 그러나 할머니에게 코스모스는 같은 코스모스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치게 되는 문제들은 시간이 흐르면 잊혀지거나 그 의미가 퇴색한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기억이 있다면 그 기억은 고통이 되거나 행복이 된다. 할머니에게 기억은 고통이자 행복이기도 했다. 우리에게 기억이 없다면 삶은 어떤 양상을 지닐까?

살아가면서 생활의 규칙이나 법은 그대로 지키면 되지만 마음은 지킨다고 지켜지는 게 아니다.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은 또렷하게 각인되어 현재의 삶을 고통 속에 머무르게 한다. 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내 마음이지만 내가 다스릴 수 없고, 자꾸 떠오르는 기억을 지울 수도 없다.

잃어버린 것, 가지고 싶었지만 가질 수 없었던 것을 생각하며 마음이 슬퍼할 때, 나에게 남겨진 것을 생각하고 기뻐할 수 있다면 상처나 고통 같은 단어는 없어지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현재 남겨진 것보다 잃어버린 것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한다. 그럼에도 현재의 불행과 나의 고통을 인정하고 그것들의 면면을 들여다 볼 때 고통과 슬픔의 실체를 바로 볼 수 있게 된다. 진정한 부정이란 이런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부정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이며 그 과정은 험난하다. 혼란과 고통의 바다에서 스스로 삶의 중심을 잡고 희망의 키를 돌려야 하지만, 당장 살아나가야 하는 시간들은 눈앞에 있고, 해야 할 일은 너무나 많다. 할머니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몸으로 낳은 두 아이를 떠나보내야 했고, 그 아이들을 생각하며 딸 하나를 가슴으로 낳아 키웠다.

눈을 뜨면 새벽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돼지우리를 치우고 닭을 기르며 계란을 팔아 생을 이어갔다. 아무도 상처 주지 않았지만 삶 자체가 상처가 되는 시간들이었다. 누구에게나 상처받지 않을 권리가 있지만, 스스로 받는 상처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상처는 더 깊이 파고들어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런데 자신의 모든 것을 상실한 채 휘몰아치는 시간의 강을 건너 할머니는 이제 어린 시절 뛰어놀던 고향의 자연으로부터 쉼터를 발견하고 있었다. 9번 째 시에서 할머니는 비로소 행복했던 유년의 시간을 찾고 있었다. 할머니는 혼란과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자신이 누구였는지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4. 유년의 기억 속으로?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묻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길이 낯설고 힘들지라도 자신을 오랜 시간 동안 어둠속에 가두었던 고통과 상처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다면, 오히려 그 얼굴에서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자신의 모습이 고통 받는 타자의 얼굴에서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로 다가올 때, 상실했던 자신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할머니는 지금 잊고 있었던 유년의 기억을 통하여 어둠 속에 갇혀 있던 또 다른 자기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운동장 옆에는

전부 벚꽃나무가 줄을 서서

너무나도 아름답더라.

친구들과 사진 찍던

그 추억이 떠오르며

선생님과 기념촬영도 했건만

모교가 잊혀지지 않고

사무치도록, 꿈속에서도 그리워지네.

-부분-

할머니가 그리워하는 대상은 병과 타인의 질시 같은 오염된 기억이 아니라 순수하고 맑은 유년의 기억이었다. 고통과 상처는 우리가 결코 약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들의 오만과 교만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우리는 고통으로 아파하고 잃어버린 것으로 절망한다. 그러나 고통과 상실로 다시 일어서기도 한다. 고통은 고통을 경험한 사람이 가장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은 우리들의 삶을 변화시킨다. 고통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이므로 마치 가뭄에 뿌리가 타들어가는 아픔을 이기고 싹을 틔우는 잡초처럼 우리를 강하게 단련시킨다. 할머니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아들을 떠나보내고 어머니를 여의는 고통과 슬픔의 강을 건너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첫발을 디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