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평화는 아직 오지 않았다. [베를린에서 온 편지 6]

한국의 평화는 아직 오지 않았다-
베를린 평화 페스티벌의 한국 포럼. [베를린에서 온 편지 6]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 글은 독일 한글문화신문 <풍경>(http://www.punggyeong.de/ko)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8월 14일부터 17일까지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는 베를린 평화 페스티벌(Friedensfestival Berlin)이 열렸다. 행사 마지막 날이자 일요일인 17일, 참석자들은 세 개의 서로 다르지만 연결되어 있는 한반도와 관련된 이슈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날 오후 무대에서는 한반도 관련 쟁점들이 연속적으로 다뤄지면서, 참석자들에게 한국에서 여전히 진행중인 전쟁과 폭력의 문제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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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페어반트(Korea Verband)에서 주최하는 오후 행사는 행사장 중앙 무대에서 15시에 시작되었다. 오프닝을 알리는 “두들소리”의 사물놀이 공연이 끝난 뒤,이어“북한-남한. 마침내 분단 61년만에 평화협정 체결인가? 분단 독일의 심장부에서 열리는 좌담회 (Nordkorea-S?dkorea. EndlichFriedensvertragnach 61 Jahre der Teilung Koreas?!:Podiumsgespr?chimHerz des ehemalsgeteiltenDeutchlands)“라는제목의토론회가열렸다. 기조발제를맡은한반도와 아시아 전문가 라이너베르닝(Rainer Werning) 박사는 한반도의 불안정이 오늘날에도 가속화되고 있으며, 이것은 동아시아 전체에 걸친 위기의 일환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나아가 한국 정부는 이 위기를 관리할 능력이 없으며 오히려 강경대북정책으로 인해 이 위기를 낳는 주범이 될 뿐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또 한국 내에서 국가보안법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정치적 반대자들을 탄압하는 데 이용되고 있을 뿐이라는 점도 독일인 청중들에게 소개했다. 이는 정전협정 체제인 한반도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냉전이 어떻게 정치적 억압으로 활용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로 제시된 것이다. 이어 발제를 맡은 임민석 교수는 한반도 위기의 주범은 미군의 주둔과 미국의 패권전략이라고 비난하면서 정전협정을 끝내고 평화협정으로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미일 군사동맹이 동북아시아에서 위기를 조장하고 있다며 이에 적극 협조하는 한국 정부를 비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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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회가 끝난 뒤 프리랜서 기자 정옥희씨가 연단에 올라 독어와 영어로 한국의 세월호 유가족들의 단식투쟁 소식을 전했다. 연설에서 그녀는 세월호 사고의 발생 원인을 밝히고 정부의 책임을 묻는 특별법이 제정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립적인 조사위원회를 구성해야만 진실을 밝히고 희생자 가족들의 억울함이 풀릴 뿐 아니라, 이와 같은 사고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도 덧붙였다. 그녀뿐 아니라 몇몇 한국인 참석자들이 노란 종이 배를 접어 전시하고 행사장 곳곳에서 이곳을 찾은 독일인들과 외국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서명을 받았다.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 지 여러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독일인들은 세월호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고, 유가족들이 단식투쟁을 벌인다는 소식에 놀라워했다. 한국인 참석자들이 나눠준 유인물을 읽고 서명에 동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 중국인 관광객은 세월호 사건은 알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언론에서 듣지 못해 모르고 있었다면서, 건네받은 영어 유인물을 꼼꼼히 읽고 서명을 했다. 어느 독일인 목사는 서명을 한 뒤 세월호 희생자들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해주기도 했다.

이어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인 이옥선 할머니가 행사장에 도착했다. 먼저 무대 위에서는 이옥선 할머니의 발언을 듣기 전, 일본인 무용수 카즈마모토무라(KazumaMotomura)씨의 퍼포먼스가펄쳐졌다. 참석자들은 슬픈 선율 속에서 폭력의 고통을 형상화한 그의 퍼포먼스를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이어 무대에 오른 이옥선 할머니는 “여성의 미래를 위한 치욕의 극복(?berwindung der Schamf?r die Zukunft der Frauen)”이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일본이 저지르는 참담한 만행들을 고발하고 여전히 위안부 징발을 인정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는 일본 정부를 성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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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 위에 앉은 할머니는 작고 여윈 몸이었지만 불편한 몸을 감수하며 진실을 알리고자 자신의 마지막 힘을 불사르는 모습이었다. 이제 마이크로 큰 목소리를 내는 것도 쉽지 않을만큼 몸이 쇠약해진 할머니가 거동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와 진실을 알리려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한국인들도, 독일인들도 그리고 우연히 이곳을 찾은 다양한 국적의 방문객들도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할머니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경청했다. 특히 발언의 말미에 할머니는 본인이 위안부로서 매우 수치스러우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본인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말하는 게 얼마나 수치스러운지 모른다고 말을 꺼냈다. 할머니는 그러나 일본이 진실을 인정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는 한 이러한 발언을 계속 할 것이며, 그래야만 두 번 다시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와 같은 발언은 참석자들에게 이옥선 할머니의 용기와 강인함에 대해 각인시켰고, 참석자들은 모두 뜨거운 박수로 이러한 용기에 응답해주었다.

이날 이옥선 할머니의 행사에 참석하러 온 일본인 프리랜서 기자 타이치로카지무라(TaichiroKajimura)씨는 오늘 행사에서 큰 감동을 느꼈다며, 이옥선 할머니의 발언이 매우 인상적이었고 나아가 이러한 활동들이 아시아에서 인권 향상을 위한 운동들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행사에 온 파티야 자사리(FatijaJasari)씨는 행사가 끝난 뒤 이옥선 할머니를 찾아와 긴 대화를 나누며 할머니를 위한 기도를 해주기도 했다. 그녀는 이옥선 할머니처럼 강인한 여성은 처음 본다며, 이러한 강인함에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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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행사에서 다뤄진 한국과 관련된 세 주제들, 즉 한반도의 상시적인 전쟁위기, 세월호 참사와 유가족들의 투쟁,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한국 사회의 과거, 그리고 오늘날 한국 사회가 처한 현주소를 이곳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 그대로 표현해주고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남북한의 군사적 긴장은 언제나 정치적 권력에 의해 권력의 유지수단으로 악용되어 왔다. 한국 사회에서 국가는 언제나 북의 위협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민주주의를 제약하고 사회 전체를 군사적 기지로 만들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정작 300명의 학생들과 승객들이 차디찬 바다에 빠져 있을 때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부는 골든 타임 동안 손을 놓아버렸고, 그 뒤엔 아예 구조작업 자체를 민간업체에 위임했다. 그 피해 유가족들이 특별법을 제정해 진상을 규명해달라고 애원할 때조차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것은 경찰의 폭력뿐이었다. 위안부로 징발된 성노예 피해자들이 과거사를 부정하는 일본에 항의하며 목놓아 외칠 때에도 국가는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3억 달러 무상차관이라는 싼 값에 일본에 대해 더 이상 어떤 배상도 묻지 않겠다고 서약했다. 지금 아베 정권이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은커녕 과거사를 부정하고, 나아가 평화헌법을 개정함으로써 군국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동안, 한국 정부는 일본의 식민지배를 미화하는 국사 교과서의 검정을 통과시키고, 이 교과서를 옹호한 사람들이 주요 장관 후보자들로 지명됐다. 국민을 억압하는 국가는 존재하지만 공적 권위를 갖는 정치체로서 국가는 한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강한 국가권력 속에서 정작 다수 대중들은 국가 없는 국민으로 살고 있는 한국의 이 역설적 상황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고민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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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평화 페스티벌은 한국에 과연 진정한 평화가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했다. 그리고 많은 참석자들은 긍정적인 대답을 내리지 못한 것 같다.

베를린 평화 페스티벌이란?

평화를 촉진하며, 국제 연합(UN)의 목적 그리고 각국의 평화 의무를 알리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베를린 평화 페스티벌은 올해 6회째를 맞이했다. 이번 행사는 알렉산더 광장에서 열렸으며, 나흘간 수많은 예술가들의 전시와 공연, 각국 민속축제와 전통음식 축제, 학술적 좌담회 등 많은 행사들을 통해 평화의 중요성이 전달되었다. 독일의 무기수출 반대, 그리고 1989년 동독 정권을 붕괴시킨 시민혁명, 9.11 테러와 이라크 전쟁, 시리아 위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등이 토론회의 주제들이었다. 내년에는 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여러가지 행사들이 열릴 에정이다. 1월 15일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아우슈비츠 해방을 기념하는 행사가 개최되고, 5월 8일에는 종전 70주년 기념 행사가 열릴 전망이다. 내년 7월 15일부터 9월 21일까지는 베를린부터 예루살렘에 이르는 평화자전거 행진이 있을 예정이다.

나는 사해(四海)에 솥단지 하나 걸어 놓고 살아도 된다 [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5

나는 사해(四海)에 솥단지 하나 걸어 놓고 살아도 된다 ?[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5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나는 괜찮았다.?처음에는 몸이 아프니 마음이 아프더라.?그래서 날마다 울었다.?이 병이 왔을 때에는 뭐가 뭔지 몰라서 안 울었고,?소록도에 갈 때도 언니가 있으께,?내가 있어야 불쌍한 우리 언니 돌보아 줄 수 있으께 안 울었다.?온 몸이 아프고 죽을 것처럼 열이 나고 덜덜 떨리니까 겁이 나고 그렇더라.?남들은 다리 없이 어찌 살거냐고 하고,?우리 아버지는 내 꼬라지 보고 그 길로 화병을 얻어서 돌아가실 때도 한을 품고 가셨다.

나는 그냥 어리벙벙했다.?얼굴도 수건으로 안 덮어주고 수술하는 걸 보다가 졸도했는데,?깨어나서 보니 시원하더라.?얼매나 몸이 아프고 힘들었는지 슬프고 울고 그런 거 없었다.?너무 아픈 데가 없어지께 후련하고 가뿐하고 그랬지,?뭐.?그런데 살다보니 눈물이 날 때가 더러 있더라.?지금도 몸이 아프모 눈물이 안 나는데,?마음이 아프모 눈물이 난다.?왜 그럴꼬??소록도 생각해도 눈물이 나.?그때 생각하모 마음이 아파.?자꾸 아파.

소록도에 있을 때에는 여름이고 겨울이고 옷은 광목이었다.?틀린 거는 겨울이 되모 검은 물들인 옷을 입은 기다.?참 추웠다.?배도 고팠어.?배급을 주는데 맨날천날 모자라.?나는 어리다고 밥도 마이 안 줬어.?그래서 칡을 마이 묵었다.?칡이 억시기 많아서 물칡은 안 묵고 끊어 버리고 했다.?거기서 죽는 거는 사는 것보다 쉬워.?죽으모 제대로 장례도 안 지내주고 함부로 한께 사람 뼈가 예사로 있어.?왜 저 앞에 텔레비전에도 나오는 것 같던데,?그거 사실이다.?그때도 쇠꼬챙이로 아무 데나 땅을 부시모 뼈가 나오제.

밤에 바다를 보모 퍼런 빛이 번득여.?사람 뼈에서 나오는 인이 그리 보이는 기라.?아이가,?그냥 버리는 게 아니고 화장을 하는데,?제대로 안 돼서 그래.큰 도람통 같은 기 있는데,?죽으모 거기다가 넣고 화장하는데,?요새같이 그리 안 되지.?납골당이 있기는 있었어.?큰 뼈는 납골당에 넣고 납골당이 차모 지하실에 따로 보관했다.?그라고 자잘하게 나오는 거는 바닷가에 버리기도 했거든.?어떤 날은 뼈에 파래가 끼인 채로 해변가에 뒹굴어 다닜다.

양추자 - 시모임

바닷가에 자주 나갔지.?먹을 기 있다 아이가.?나는 소록도에 가서 반지락을 처음 보고 알았다.?우리집이 있던 거제도는 물살이 세서 반지락이 없어서 몰랐다.?파도에 껍데기만 밀리오고 했거든.?소록도에는 많았다.?그거 주워서 삶아 묵고는 했다.?그라고 파래가 많았거든.?파래를 뜯어서 그 우에다가 강냉이 가리를 솔솔 뿌리 갖고 쪄묵었다.?허허,?맛은 무신 맛.?파래강냉이 떡이지.?파래만 찌모 안되니까 쌀가리 대신 강냉이 가리를 쪼끔 뿌리서 묵는 긴데,?그기라도 실컷 묵었으모 했다.

그거를 묵고 나모 침이 질질 흘러.?몰라,?이상하대.?파래만 묵으모 속이 데리고 침이 질질 나와.?속이 마이 데린다.?처음에는 괜찮은데 자꾸 먹다 보모 데리다 못해 침이 질질 흘러내리.?산나물도 마이 뜯어서 그리해서 묵는데,산나물은 속이 고달퍼.?산에서 나는 거는 마이 묵고 자꾸 묵으모 속이 고달프고,?바다에서 나는 거는 속이 데린다.?그 이유는 몰라.?한 방에?10명씩 살았는데,?나만 그런 게 아이고 거의 다 그랬어.?그래도 묵을 기 워낙 없으니 바닷가에 가모 널린 기 파래고 옥수수 가리는 배급이 나온께 그거라도 해 묵고 허기를 달랬어.?묵고 나서 침이 흐르고 속이 데리도 그기라도 많이 묵고 싶었어.

곡식이 귀해서 그랬지 묵을 거는 그거 말고도 제법 있었제.?산에 소나무 안 있나.?소나무도 묵었다.?허허 아이다.?무신 아무 소나무를 꺾어 묵노.?니도 참 말이 안 된다.?소나무 솔잎에 새순이 안 드나.?그 새순이 올라오는 거(가지)?밑에 있는 가지를 꺾어서 껍데기를 벗기모 안에 또 껍데기가 나와.?그 껍데기를 이로 긁어서 묵으모 맛이 괜찮아.?작년에 올라온 새순 위(가지)에 또 새순이 올라 오모 올해 거는 놔두고 작년 걸 꺾어 묵었다.

소나무는 꽃도 묵고 이파리도 묵는다.?참 고마운 나무제.?송진도 묵는데 그거는 흐르고 난 뒤 사나흘 지나모 꼬들꼬들해지거든.?꼬들꼬들해진 걸 뜯어 묵는데,?꼭꼭 씹으모 껌처럼 된다.?배가 고플 때 그기라도 꼭꼭 씹고 있으모 좀 낫다.?씹으모 껌같이 되는 기 피비(삘기)다.?니도 피비는 묵어 봤고나.맞다.?거제도에 참 피비가 많다.?소나무는 묵으모 배가 부르고 그거는 묵으모 더 허기가 나.?풀도 나무도 생긴 대로 다 다른 기라.?굶어 죽으란 법은 없어서 천지에 묵을 거를 흩어 놓고 안 있나.?그기 자연이다.

16살에 다리 끊고 나무다리로 그리 그리 살았는데, 19살에 중매로 결혼했다.?옆에서 중매해줬는데, 29살 묵은 노총각이었다.?암만 노총각이라해도 내를 봐라.?좋은 마음으로 내 도와준다고 장가들었다. “어임주”?우리 영감 이름이다.?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산청이 고향이다.?산청초등학교 다닜다카더라.?소록도에서 나와 갖고 함안 정착지에서 살다가 여게(성심원)로 온 것도 다 그런 인연이제.?부부로 사십칠팔 년을 살아도 싸움 한 번 안했다.법도 없이 살 사람이다.

2007년?10월에 갔다.?내가 폴도 마이 아프고 다리도 좀 그렇고 해서 그런지 나를 마이 위해 줬다. 2007년 들어 좀 샐샐했제.?기운도 빠지고 해도 그래도 나는 그리 갈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그날 저녁에 밥을 참 맛있게 묵더라.그러고는 생전 안 하던 짓을 하는 기라.?밥을 한 그릇 더 주라는 기라.?내가 무신 밥을 또 묵을라카노 하면서도 한 그릇 더 퍼주니까 암 말도 안하고 그 밥도 깨끗이 비우더니,?고마 자다가 안 가나.?응,?자다가 그리 갔다.?평생 그리 고생하고 배도 마이 곯았는데,?그래도 가는 길은 편하게 가서……얼매나 배 곯고 살았으모 가는 길에는 배 안 고플라고 두 그릇 든든하게 묵고 갔을꼬.?가는 동안은 배 안 고팠을 기다.

19살에 결혼은 했는데, 26살에 살림 났다.?결혼은 해도 낮에만 같이 있고 어두워지모 합숙하는 방에서 잤제.?방이 없었어.?어짜다가 누가 죽어서 혼자 되는 집이 있으모 그때는 혼자 된 사람은 합숙하고 그리 빈방에 살림을 내줬거든.?결혼했다고 딴 방을 줄 형편이 안됐어.?그래서?26살까지는 낮에만 부부지.?그래도 부부가 되니까 낮에 와서 힘든 일도 도와주고 좋대.?좋더라.하하하.

그래서 아이가 안 생긴 거 아이다.?그놈들이 단종수술을 해서 아를 못 낳았다.?소록도에서는 젊은 남자가 들어오거나 어리서 와도 사내 구실할 나이가 되모 모조리 단종수술을 했거든.?강제로 했다.?단종대가 따로 있었다.?붙들어 가서는 뭐 제대로 마취도 없이 묶어 놓고 했지.?그래서 원통하고 분하다.자식도 없으니 천지간에 나 뿐이라.?명절이 제일 서럽다.?평소에는 모리고 살지.?명절이라고 주변에 그래도 자식이 찾아오고 자랑하는 거 보모 서럽고 인자 그만 살고 싶다.

임신한 여자가 들어오모 강제로 낙태시켰다. 10개월이 되어도 아를 낳게 하는 기 아이라 낙태시켰다.?병원 지하에 강제 낙태시킨 태아들을 보관하는 데가 있었다.?나는 봤다.?병에 보관되어 있는데,?머리카락이 새카만 태아도 들어 있었다.?우찌우찌해서 아를 낳아도 바로 보육시설로 보내진다.?엄마가 울고불고 해도 소용없다.?놀래기는 와 그리 놀래노??거는 그런 거 예사다.?지금이야 뭐 천국이다 어쩌다 하지만,?우리 살던 옛날 소록도는 사람 사는 데가 아이다.

언젠가 남편이 그러더라. “우리 이 몸으로 돈 많이 벌었다.?참 일 많이 했다.”?그러대.?참 열심히 살았다.?죽어라고 일만 했다.?시동생이 아를 다섯 명이나 두고 먼저 갔다.?동서는 가출했버맀고 하니까 시어머니가?‘조카도 자식이다’?하대.?그 아이들을 시어머니가 키우는데 양육비를 보탰다.?말하자모 그 아이들 다섯 다 거두고 시어머니 생활비를 대줬다.?조카가 자라서 취직했을 때는 작은 차도 한 대 뽑아줬다.?둘째 질부는 가까이서 복지사로 일한다.?조카들이 가까이 있어도 안 온다.?그 시어머니도?2008년도에?98세로 돌아가셨다.

소록도에서 나와서 함안 농장으로 왔거든.?와서 보이까 우리 시어머니가 아들도 없이 손자 다섯을 데리고 살고 있는데,?나라로부터 아무 도움도 못 받고 살고 있는 기라.?하기사 누가 나서서 아들 하나는 죽고 하나는 몹쓸 병 걸리 있고,?며느리는 집나가고 없는 촌 할멈한테 관심을 두겄노.?우리 영감이 면사무소에 참 뻔질나게 다니고 항의도 하고 애원도 하고 해서 생활보호대상자가 됐다.?우리가 보태주는 것도 한계가 있고,?그래도 그 돈이라도 나라에서 나오니까 밥은 안 굶고 손자들 공부는 시킸다.

60년 도에 소록도에서 통마늘 농사 지어서 서울에다 팔았는데,?얼추?1년에 한 천만 원씩은 되는 것 같더라.?그때는 보상 없었다.?무임금 노동이라고 들어 봤제??그런 기다.?돈 달라고 말도 못한다.?참 일 마이 했다.?불쌍한 우리 언니가?85년도에 죽었다.?그리 가엾고 또 가엾게 살다가,?나 생매장 안 시킬라고 내 배위에 엎어져서 그리 울던 큰 언니가 결국은 갔다.?언니가 죽자 우리도 소록도에서 나왔다.?그때는 우리가 나가고 싶다 하모 내보내주고 했다.?가운데 언니는 외동딸 하나 낳고 부산에서 살고 있다.?건강할 때는?1년에 한 두 번 씩 왔다 갔는데,?인자 늙고 몸이 안 좋은께 오도 못한다.

사회에 나와서 정착촌으로 갔는데 거가 함안 농장이다.?처음에는 짐승을 키웠는데,?품삯으로?50만원을 받았다.?기분 좋지.?일하고 돈을 받으니 아침부터 밤까지 참말로 열심히 했다.?죽기 살기로 일해서 우리 명의로 된 짐승도 사고 그리 했지.?니 보다시피 내 폴이 이렇다 보니 크게 힘쓰는 일은 영감이 했다.?나도 하는 데까지 힘을 보태도 다리도 나무 다리고 폴도 이리 해 갖고 뭐 그리 큰일을 했겄나.?밥하고 집안 일 하는 것도 참 힘들고 어렵더라.

학교??응,?다닜다.?소록도에서 학교를 다닜다.?집에서는 국민학교?4학년까지 댕깄는데,?소록도에 중학교가 생기서 들어가서 배웠다.?영감 만나 결혼하고 나서 학교 갔지.?재밌더라.?영감도 다니지 말라는 말은 안 해.?소록도 교회 안에?1960년도에 야간 성경 고등학교가 생깄다.?그게도 댕기고 있었는데,?고마?63년도부터 학생들 보고 오마도 공사에 가라카대.?오마도 공사에 학교 학생들을 죄다 데리고 가서 일 시킨다고 학교를 보내주나,?못 가게 하는 기라.?해뜨모 학교가 아이라 오마도로 갔다.?그래서 고등학교는 저절로 없어졌지.?그 길로 공부는 끝났다.?오마도 이야기는 안 하고 싶다.?참 마이도 죽고,?흔적도 없이 갔다.?일하다가 바다에 빠져 죽고 파도에 휩쓸리 갖고 죽고 일하다가 죽고……

97년도에 여게 성심원으로 왔다.?더 이상 일도 힘들고 조카들도 얼추 크고 하니까 영감이 이리 오자고 하더라.?그래서 시어머니하고 조카들 단도리 좀 해 주고 돈?○○○원 들고 여게 와서?201동에 살림을 풀었다.?그때는 성심원이 지금하고 좀 달랐다.?응,?그렇지.?지금이 더 좋아졌지.?영감이 죽고 나서도 한참 동안 밥해묵고 있었다.?근데 폴이 이리 덜렁거리고 힘이 없은께 밥 한 끼 하는 것도 너무 힘들고 고달파.?관절 때문에 팔에 기브스도 했는데,?밥을 제대로 해 묵을 수가 있어야지.?밥 한 끼 묵는 기 어찌나 고되던지 말도 못한다.

여게 요양사에 방이 없어서 못 들어오고 있다가 작년(2013년) 10월에 들어 왔다.?아이고,?암만 낫지.?밥 주제,?청소해 주제,?목욕 시켜 주제,?이런 데는 없다.?내가 시를 하나 썼는데 한번 봐라.?직원한테 불러주고 직원이 이리 종이에 옮겨서 갖다 놨다.?여게다가 내가 곡을 붙이서 노래 해 보꾸마.

 

성심원 구름이 두둥실

멀리 멀리 퍼지네.

너는 아느냐

성심원을……

나그네 천국이라는 걸

(중략)

성심원 바람이 두리둥실

온 세계에 퍼지니

너는 아느냐……

성심원이 장애인 동산이라는 걸

-2014년?4월?4일 구술-

 

이거는?4분의?4박자로 불러야 된다.?샤프(샵, #)를 넣어서 센트(크레센도)로 불러야 한다.?알지.?샤프와 센트는 높고 강하게,?프렛은 낮게 불러야지.내가 이래봬도 성가대 경력?30년이다.?소록도에서 교회 다닐 때도 노래 부르고,?천주교 다니고 나서도 노래 불렀다 아이가.?이거는 얼마 전에 소록도 갔다 와서 지어 봤다.?혼자 지어 갖꼬 혼자 노래 부르고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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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심원은 우리 같은 나그네의 천국이다.?성심원이 좋다.?그런데 소록도에 가니까 예날 생각이 나고 눈물이 나대. (성심원)요양사에서 옆방 사람하고 맘이 안 맞아 속이 상해?‘나갈까’?하는 생각이 든다 한께 전에 같이 소록도에 있던 사람들이 오라고 하더라.?잘 지내던 사람들이 좀 남아 있더라.?다 안 죽고 살아 있더라.?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다 못 만나고 왔다.?그게는 방도 항상 준비돼 있다 카더라.?벽지도 새 거고 방마다 에어컨도 있고……그게서 살다가 성심원으로 가고 싶으모 가도 된다고 그라더라.

소록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병원이다.?그게는 워낙 이름이 알려져 있으니까 봉사자들이 많아서 아픈 사람들은 방마다 밥도 갖다 주고 하더라.?여게는 직원들이 밤낮으로 안 뛰어 다니나.?참 고맙고……?말로는 고마운 맘을 다 표시 못하제.?나한테는 우리 성심원 직원이 가족이다.?나는 사해에 솥단지 하나 걸어 놓고 살아도 된다.?돈 필요 없다.?나는 생활보호대상자라서 아파도 병원에서 돈 안 받는다.?이 나이 되고 보이 자식 하나 못 남긴 것,?그것만 억울하다.?나 죽고 나모 우리 영감이나 나나 누가 기억하겄노.

옛날에 우리 아부지가 그러는데,?내 사주가 남자 같았으모 사모관대를 쓸 사주인데,?여자로 태어나서 국록을 먹는다고 했단다.?큰 기와집 밑에서 전깃불 아래에서 산다고 했다는데 딱 맞다.?그 말을 모리겄나??내가 지금 나라에서 주는 돈으로 묵고 사니 국록을 받아 묵는 기고,?소록도에 가니까 전깃불이 있더라.?그라고 지금 성심원,?이 큰 집이 내 집 아이가.?기와집이라는 거는 진짜 기와집이 아이고 큰 집이라는 뜻이라.?니도 참,?그리 못 알아 듣나?

울 아부지 함자는?‘양재만’,?울 엄마는?‘김순이’,?나 때문에 화병 걸린 우리 아부지는 일흔일곱에 돌아가시고 울 엄마는 이부지 뒤에 가셨다.?나는 원래1941년?3월?27일(음력)에 태어났는데,?호적에는?12월?10일로 되어 있다.?이유를 모리지,?왜 틀리게 되어 있는지.?내 밑으로 남동생이 다섯 명 있었다. 5남?4녀이다.?내 밑으로 아들이 줄줄이 나왔제.?내 이름 덕 좀 본 기라.?이런 이야기도 인자 다 부질없다.?세상이 허무하다.

요 앞에 날이 따시모 경호강에 가서 앉아 있으모 낚시하는 사람들을 제법 만난다.?고기 잡는 모습을 보모 참 사는 모양이 다 다르다.?어떤 사람은 내가 물어도 대답도 안 하고 본 척도 안하고,?어떤 사람은 대답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먼저 말을 걸기도 한다.?어떤 사람은 잡은 고기 다 가져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잡은 고기를 놓아주고 빈 바구니 들고 간다.?잡았던 고기를 놓아 주모 고기가 물에 들어가자마자 파드득 놀래서 꼬랑댕이를 흔들며 가는 기 귀엽다.?그런 사람은 고기를 낚는 게 아이고 강가에 서서 세월을 낚는 기라.

그나저나 인자 나 시모임에 안 갈란다.?왜는,?그냥 안 갈란다.?처음에는 시를 모린다 하고 안 쓰던 사람들도 인자는 다 시를 써 와서 읽고 하는데,?나는 니 보다시피 연필을 쥘 수가 있나,?글을 쓸 수 가 있나.?머리속에 기억해놔도 그마 자고 나모 다 잊어버린다.?직원들도 바쁜데 내가 생각날 때마다 어찌 자꾸 써주라고 하노.?그리하모 안 된다.?사람이 미안한 거를 알아야지.내 생각만 하고 그라모 안 된다.

니가 서운하다고??그래도 안 갈란다.?뭐 내가 안 간다고 서운하노.?다른 사람들도 안 있나.?마이 서운하다고??섭섭하다고??맘이 안 좋다고??알겄다.생각해 보꾸마.?그래도 자꾸 신경이 쓰이고 그렇다.?나만 가만 있는 것 같고……?내 다시 생각해 볼게.?니가 그리 서운다 하모 그것도 내가 잘못하는 기제.?응,?응,?알겄다.?알았다고.

 

“내 얼굴은 큰 바위 얼굴 같다”[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 -4

“내 얼굴은 큰 바위 얼굴 같다”[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 -4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풍경3학교에서는 오지 말라고 해도 그래도 실실 가니까 또 별 말이 없어. 그래서 좀 더 다녔다. 응, 오다가다 가다말다 했제. 큰 언니는 얼굴에 표가 자꾸 나. 나는 7살에 병이 들었다카는데 내가 스스로 안 거는 아매도 초등학교 1학년 때였지 싶다. 뭐 병이 들었다 해도 그기 무슨 병인지 얼매나 심각한 건지는 몰랐제. 바닷가에 있는 바위는 넓고 크다 아이가. 바닷가에 놀러가서 큰 바위에 어짜다 닿으모 그 부위가 빨갛게 불키는 기라.

그리 긁었던 기억은 없다. 집에 와서 엄마한테 말하모 엄마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밤에 그 왜 큰 가마솥 안 있나? 그 솥 밑에 붙어 있는 검정을 긁어 와서 잘 때 되모 불킨 데에 솔솔 흩어서 뿌려주더라. 그라모 다음 날 아침에 보모 그 불킨 기 흔적도 없어. 그래도 바위에 닿으모 또 불키고, 검정은 그때뿐이고…. 그래도 그기 유일한 약이었던 것 같다. 그거 말고는 소록도 가기 전까지 약을 묵거나 바른 기억은 없어.

시간이 가니까 불키는 것 말고도 인자 무릎 우로 종기가 한두 개 나는 기라. 그래도 안 보이니까 그런 건지 그럭저럭 슬슬 다니고 때로는 친구들하고 놀기도 했다. 아매도 국민학교 4학년 때였지. 바닷가에서 친구들과 바위를 펄쩍 거리며 옮겨 다니며 노는데 그만 바람에 치마가 훌렁하고 날리는 기라. 친구들이 그만 봤다. 다리에 소소하게 빨갛게 불키 있는 거를. 치마를 얼른 덮었는데 친구들이 더 이상하게 여기는 것 같대.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학교에 가니까 역시 담임이 나오라쿠는 기라. 친구들이 담임에게 말했지, 뭐. 담임이 치마를 걷어보더마 인자 진짜 학교 오지 마라하고 집에 가라고 하더라. 그래서 집에 왔지 뭐, 어짜겄노. 오지 말라는데, 안 가야지. 또 언니하고 나하고 둘이서 산에서 놀다가 해가 지모 내려오고 그랬다. 뭐 먹었냐고? 산에 가모 묵을 거 천지다. 다래가 꼭 목화송이처럼 하얗게 보이는데, 그런 기 여기저기 많았다. 밥만 없지 묵을 거는 많아서 언니하고 나는 산에서 있는 게 편했다.

그런데 인자는 그것도 안 된다고 하더라. 산에 가는 것도 눈치가 보여서, 자꾸 눈치가 보이더라. 사람들이 자꾸 소록도에 가라고 하는 기라. 우리 아버지 엄마도 어쩔 도리가 없어. 버틸 재간이 있어야지. 면사무소에서도 오고 지서에서도 오고 마을 사람들은 내내 ‘왜 안 보내노? 언제 보낼 끼고?’ 하면서 우리 엄마 아버지를 자꾸 뭐라카고 한께 우리 부모님도 버틸 재간이 없었어. 언니하고 나 안 보내고 데리고 있을라고 얼매나 애를 썼다고. 그래도 더는 못 버텨. 성한 둘째 언니하고 내 밑으로 줄줄이 있는 남동생들을 생각하모 안 보낼 수도 없는 기라.

내가 12살 때, 1952년도에 소록도로 갔다. 동생들이 있으니까 아버지 엄마는 못 오고 나하고 언니하고 둘이 손잡고 갔다. 부모님은 좀 있다가 우리 보러 왔제. 언니라 해도 정신이 그러니 내가 언니 손을 꼭 잡는 기 아이고 우리 언니가 내 손을 꼭 잡고 다녔다. 견내량 다리를 건너 버스 타고 가다가 들키모 아무 데나 차 세우고 내리라 하고 그라모 내리고, 그래서 언니하고 손잡고 걷다가 차가 오면 손들어서 타고, 또 쫓겨 내리서 걸었다. 묻고 물어서 처마 밑에 자고 해서 이틀 만에 소록도에 닿았다. 여관에 갔는데 나가라 해서 길에서 잤다.멀면 멀고 가까우면 가깝고, 게가 그렇더라.

내가 갔을 때에는 소록도에 마을이 7개 있더라. 어데, 소록도는 구역을 나누어서 병 상태에 따라서 다리게 살게 해. 병 상태가 양호한 한센인은 중환자들이 있는 부락에 가서 시중을 들어야 해. 나는 나이가 어리도 병상태가 양호하다고 중환자들이 있는 부락에 가서 시중을 들어라 하데. 가서 물도 떠 주고 밥도 멕여 주고 잔심부름도 하는데, 제일 못할 기 대소변 수발드는 기라.

그 사람들은 화장실을 못 가. 혼자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중환자들이 있는 부락이었거든. 우리 언니는 정신이 온전치 못하니까 일은 안 했제. 나는 병표가 마이 안 나고 그리 안 깊어서 굳이 소록도로 안 가도 되는데 우리 언니 혼자 못 보내니까 같이 간 거거든. 우리 부모님이 큰 딸이 걱정돼서 막내딸을 딸리 보내면서 맘이 어땠을꼬. 동네 사람들도 언니보고 난리지 나보고는 그리 안 했어.

밤새 요강에 오줌을 싸고 그래. 그라모 나는 아침에 일찍 해뜨기 전에 일어나서 그 요강을 비워야 돼. 그래도 다행인 게 똥은 딴 데 쌌어. 똥은 거름이 되거든. 오줌도 따로 모았어. 아무 데나 버리모 안 되고 그 모아 놓는 데에 갖다 버리야 하거든. 밤새 요강이 가득 차니까 어두컴컴한 새벽에도 일어나야 해. 빨리 안 가모 욕도 하고 난리가 나. 내가 빨리 요강을 비워야 또 싸지. 모아 놓는 데는 사람들이 있는 데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어. 그게까지 오줌이 가득 찬 요강을 들고 가모 오줌이 막 내손으로 손목으로 타고 흘러내리.

손이랑 손목에 오줌이 마를 날이 없더라. 그때 겨우 12살인데…. 겨울이 너무 힘들었어. 날은 춥지. 요강은 무겁지. 오줌이 가득 찬 요강을 두 손으로 받치 들고 저 멀리까지 가모 팔이랑 다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아무리 살살 걸어도 오줌은 출렁거리고 흘러 내리. 아무리 빨리 걷고 빨리 움직이도 거리가 멀고 하니까 요강을 비우고 가모 욕이 들려. 내가 안 가모 오줌을 못 싸니까 오줌이 누고 싶은 사람은 참으면서 욕이 나오는 기지. 하하하. 욕 듣는 기 싫어서 빈 요강을 들고 종종거리기도 하고 뛰기도 했어.

한겨울에는 손목이랑 손가락이 얼어 터지는 것 같애. 그라고 요강을 씻는 것도 내가 했거든. 그때 따신 물이 있나. 그냥 찬물에 씻는데 너무 춥고 손이 시린께 오줌 냄새도 안 나. 누가 나를 씻기 주는 것도 아이고, 맨날 손이랑 손목이 틀어서 보기 숭했어. 겨울에는 튼 데가 터지서 피도 나고 가렵기도 하고 그렇는 기라. 그게 오줌이 흘러 내리모 따갑고 씨리고, 그라다가 딱지가 앉고, 어짜다 딱지가 떨어지모 또 피도 나고 그랬어.

더러버도 어짤 기야. 안 하모 안 되는데. 소록도에 간 이상 나가지도 못해. 온통 바다인데 어데로 가. 바다 속으로 들어가? 인자 그때 마음은 기억이 잘 안 나. 그냥 마음이 아파. 12살짜리 계집애가 오줌 가득 든 요강을 들고 찬바람 속을 발발 떨고 가던 기억만 또렷하고 자꾸 떠올라. 그래도 그기 있던 사람들이 나 어리다고 마이 예삐해 주고 잘 해줬다. 오줌을 참고 있으모 성을 내도 평소에는 참 따뜻하게 대해줬어.

어데로 가나 성질머리 더러운 사람은 있어. 그런 사람들 성질낸 거는 기억할 필요가 없다. 내가 잘하나 잘못하나 성질 내는데 거기에 동조할 필요가 없는 기라. 그 사람 천성이라. 그런 사람은 잘해 주도 툴툴 못해 주모 성을 뭐같이 낸다. 그런 사람의 성질에 내가 움직이 봤자 나만 손해라. 그냥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넘겨야 해. 세상만사 내 뜻대로 되는 기 어딨노.

풍경2내가 살던 부락에서는 식당에서 밥을 먹었어. 환자들이 스스로 밥을 못하니까 단체로 밥을 해서 줬거든. 나도 식당에서 밥 먹었제. 그때 내 나이가 16살이었어. 날짜도 안 잊혀져. 4월 27일 주일이었어.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이 점심시간까지는 시간이 남았다고 가서 나물을 뜯어 오라 카더라. 요강 비우는 것보다는 나물 뜯는 일이 안 좋나. 오랜만에 홀가분하게 가서 나물을 뜯다가 시간 가는 줄 몰랐어. 놀래서 허겁지겁 갔는데 그래도 점심시간에는 좀 늦었어. 마이 안 늦고 쪼금 늦었어.

그래도 규칙을 어긴 게 돼서 감독관한테 불리 가서 종아리를 맞았어. 근데 좀 세게 때려졌는가봐. 그만 뼈가 부러졌던가봐. 종아리도 좀 터지고. 자꾸 덧나. 진물도 나고 안 낫는 기야. 그래도 오줌 요강은 들고 다녔제. 워낙 중환자도 많고 나는 부모도 없이 정신없는 언니하고만 있응께 자꾸 일을 해야제. 아팠지. 얼매나 아팠다고. 그게는 사지 있는 사람은 아프다고 봐 주는 것 없어.

날이 지나가니까 온몸이 불덩어리라. 열이 너무 심해서 어떤 날은 까무라치기도 하고 그랬어. 보다 안 되니까 다리를 끊자 하대. 치료법이 뭐가 제대로 없었어. 살면 사는 기고 못 살고 죽으모 죽는 운명이지. 의대가 있는 데에 병원이 있었어. 아이라, 지금 겉은 의대가 아니고 진짜 의사는 몇 안 되고 거기서 흰 가운 입고 의사 도와 일하는 젊은 사람들이 있는 데를 의대라고 불렀어. 해부도 하고 그랬제.

수술실 천장에 커다란 거울이 있었어. 둥글고 큰 거울인데 수술대 위에 누워서 보면 내 얼굴까지 다 보여. 수건으로 얼굴도 안 덮어줬어. 전신마취가 어데 있노. 그냥 허리 아래만 마취해. 수술하면서 저거끼리 웃는 소리, 말하는 소리 다 들어. 그라고 기계 덜그덕 거리고 다리 자르는 소리도 들리고 보였어. 봤지. 거울로 보다가 기절해버렸지, 뭐.

눈 뜨니까 당가에 거꾸로 매달아 놨어. 오른 쪽 다리가 없대. 링겔도 없고 눈 뜨고 물이라도 넘기모 사는 기고 안 그라모 죽는 기라. 나중에 이야기 들은께 몇 시간 동안 눈도 안 뜨고 못 깨어났어. 사람들이 죽었다고 해부실로 옮길라고 했는데, 우리 언니가 가슴이 따뜻하다고, 아직 안 죽었다고 내 가슴 위에 엎드려서 안 비켰어. 사람들이 나를 못 옮겨가게 내 위에 팍 엎어져서 “우리 동생 안 죽었다.”고 울고불고 했던 모양이야. 울 언니가 날 살린 셈이지.

열이 너무 마이 나고 오랫동안 열에 시달리고 나니까 얼굴 살이 축 늘어지대. 그냥 살이 축 늘어지고, 지금 나 봐라. 얼굴이 이리 축 처져서 바위 얼굴 같다 아이가. 웃기는 와 웃노? 내가 예삐다고? 니 거짓말도 잘 한다. 눈도 깜짝 안하고 입도 안 삐뚤어지고 그리 거짓말을 하나? 허허허 우리 아버지가 나 다리 잘리고 난 뒤에 와서 내 얼굴 보더니 “얼굴이 큰 바우 얼굴 같다.” 이라대. 그래가 내가 보니까 진짜 그렇더라. 그 전에는 좀 예뻤겠제? 처음에는 시간이 좀 지나모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안돌아 오더라.

며칠 누워 있었던 것 같애. 열도 내리고 몸을 좀 움직일만 하자 또 요강 비우러 다녔지. 옳은 치료도 없고 누가 있어서 나를 돌봐 주겄노. 우리 언니야 내 옆에 껌딱지 마냥 붙어 있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이라. 목발이 어데 있노? 나무 작대기 하나 주워서 그거 짚고 절뚝거리고 다녔지 뭐. 맞을 때 양쪽 종아리를 맞았거든. 응? 점심시간에 늦었으니까 맞았지. 그게는 규칙이 하도 엄해서 딱 정해진 대로 움직여야 해.

왼쪽 다리도 마이 아팠어. 그래도 그 다리로 안 움직이모 어떻게 해? 누가 밥 먹여주나? 작대기 짚고 오줌이 흐르는 요강 들고 아픈 다리에 힘을 주고 절뚝거리고 다니다 보니 그마 왼쪽 다리도 탈이 났어. 너무 아프고 또 열이 나. 봄에 오른쪽 다리 자르고 난 후로 여름 내내 떨리기도 하고 열도 나고 춥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슬펐냐고? 잘 모리겄다. 슬펐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 살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해 가을에 왼쪽 다리도 마저 잘랐다. 방법이 없었다니까. 요새하고 달랐어. 그라고 그게는 소록도다. 소록도가 어떤 데인지 알기나 하나? 지금 소록도는 그때 소록도가 아이다. 지금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모 우리 인생 아무도 모린다. 나도 가끔씩은 꿈이던가 생시던가 싶기도 하다. 어찌 다녔냐고? 처음에는 엉덩이로 밀고 다니다가 좀 있으니까 나무다리를 해 주더라. 응, 그때도 의족이 있었다.

지금 의족하고는 마이 달라도 걸어 다닐 수는 있었다. 나무로 동구랗게 홈을 파서 그게다 다리를 넣고 끈으로 묶어 다녔다. 처음에는 무겁고 불편해도 그게 아니모 못 걷는다 아이가. 그라께 열심히 연습했다. 나무다리로 다니면서 심부름도 하고 요강도 비우고 우리 언니도 돌봐주고 그리 했다. 나 때린 사람도 미안타 하더라. 그리 될 줄 몰랐다고, 일부러 그리 한 거는 아이라고 하더라. 그라모 됐지. 일부러 그라는 사람이 어데 있노. 미안하다고 했으니까 됐다. 으응, 원망 안한다.

갑자기 사진은 무신 사진이고? 에이, 안된다. 니 얼굴 베린다. 커다란 내 얼굴이 니 옆에 있으모 니 얼굴 베리서 안 된다. 너무 붙이지 마라. 얼굴을 저리 좀 옆으로 해봐라. 니 얼굴이 고운데 나 때문에 베리모 어짤라고 자꾸 옆에 붙어쌌노. 사진? 올리도 된다. 누가 나를 알겄노? 어데다 사진을 낸다꼬? 내 이야기하고 같이 올린다고? 그리해라. 괜찮다. 응,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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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는가 [베를린에서 온 편지 5]

베를린은 어떻게 과거를 기억하는가 [베를린에서 온 편지 5]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훔볼트 대학교의 나치 희생자 추모비

<사진1> 훔볼트 대학교의 나치 희생자 추모비

재작년 겨울이었다. 학교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뒤 따스한 커피 한 잔을 손에 쥐고 학교 본관건물 뒷마당을 걷고 있었다. 눈이 내려 교정 전체가 새하얗게 뒤덮여 있었다. 본관 뒷마당 한쪽 구석에는 히틀러 파시즘에 맞서 저항하다 죽음에 이른 훔볼트 대학교 학생들을 추모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비석 역시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런데 이날 비석 바로 앞에는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꽃다발이 높여 있었다. 새하얀 눈에 덮인 비석과 꽃다발의 풍경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애잔하게 추위에 떨고 있었지만, 색색의 꽃송이들은 지금도 누군가 희생된 자들, 쓰러져간 자들을 추모하고 있음을 꿋꿋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파시즘과 세계대전, 유태인 학살 그리고 분단과 냉전이라는 독일 현대사의 흔적들을 잊지 않고 간직하려는 독일인들의 노력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어느 곳을 가더라도 벽에서는 파시즘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벽화를, 거리에서는 조각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바로 이렇게 과거의 비극적인 사건들의 흔적들을 보존하려는 베를린의 노력은 이 도시가 현재 전 세계인들로부터 각광을 받는 새로운 현대예술의 메카이자 관광도시로 급부상하게 된 원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예컨대 베를린에서 가장 대표적인 관광지라고 할 수 있는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Kaiser Wilhelm Ged?chtniskirche)는 이 도시를 새로 찾은 사람들에게 어떤 느낌으로 전달될까?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

<사진2>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

거대한 교회와 호화로운 궁전이 주요 관광지로 손꼽히는 여느 유럽 도시들과는 달리, 베를린의 전통적인 관광지인 이 교회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을 맞아 파괴된 상태 그대로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1895년 완성된 이곳은 프로이센 황제 빌헬름 2세가 독일 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한 그의 할아버지 빌헬름 1세를 기리기 위해 만든 교회다. 독일 통일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계기로 독일은 소연방들로 분열되어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봉건적인 잔재 속에서 낙후된 상태를 타파하고 급속한 근대화와 공업화를 이룩하여 유럽 최강대국으로 급부상하였다. 이 카이저 빌헬름 교회는 이러한 독일 통일과 그 이후 독일의 번영을 상징하는 건축물이었으며, 그에 걸맞게 113m의 높이와, 2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큰 교회당을 가진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대국 독일의 위용을 자랑하던 이 교회는 2차 대전 당시의 폭격으로 크게 훼손되었고, 처참하게 무너져버린 예배당과 잘려나간 첨탑의 꼭대기는 급격한 근대화 이후 군국주의와 제국주의, 나아가 파시즘과 전체주의를 향해 치달아 결국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며 폐허와 분단이라는 처참한 상태로 전락해버린 현대 독일의 역사에 대한 독일인들의 트라우마를 반영하는 이미지로 남게 되었다. 이 트라우마를 가리기 위함이었는지, 전쟁 이후 서베를린 당국은 도시 전체의 재건에 맞추어 교회 역시 재건축을 시도했다. 그러나 서베를린 시민들은 2차 대전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교회를 훼손된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해 시당국의 재건축 계획을 좌절시켰다. 결국 이 교회는 오늘날까지도 폐허가 된 자신의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전쟁의 참상을 널리 알리기 위한 기념 교회로 관리되고 있다. 그것은 독일이, 그리고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과거를, 그리고 자신들이 겪어야 했던 역사적 비극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홀로코스트 기념비

<사진 3> 홀로코스트 기념비

시내 중심에 위치한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er Tor)은 베를린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독일의 분단과 통일을 상징하는 이 건축물 바로 옆에는 지난 2005년 세워진, “살해된 유럽의 유태인들을 위한 기념비”, 일명 “홀로코스트 기념비”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축구장 두 개 크기인 13,100 m² 면적의 부지 위에 총 2711개의, 서로 다른 크기로 죽은 자의 관을 형상화한 모양의 조각들이 세워져 있고 관광객들은 각 조각상들 사이로 이동하면서 이곳을 관람할 수 있다. 이곳이 지어질 때 ‘과연 시내 한 복판에, 그것도 그렇게 넓은 땅 위에 꼭 유태인 기념비를 지어야 하는가?’ 하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바로 이렇게 시내 중심이자 베를린을 상징하는 브란덴부르크 문과 독일 연방의회 건물 바로 인근에, 그것도 드넓은 부지 위에 조성된 이 기념비들은 독일이 21세기에도 여전히 과거의 비극을 잊지 않고 여전히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노이에 바헤

<사진 4> 노이에 바헤

이 홀로코스트 추모비에서 멀지 않은 곳이자 (서울의 종로처럼) 베를린에서 가장 중심가라고 할 수 있는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 거리에는 훔볼트 대학교, 국립 오페라 극장, 베를린 돔과 같은 주요 역사적인 건물들이 몰려 있다. 그런데 관광객들로 늘 붐비는 이러한 역사적 유적들 한 가운데,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조각상이 건물 안쪽에 전시되어 있다. 보통 노이에 바헤(Neue Wache)라고 불리는 이 건물의 내부에는 독일의 저명한 사회주의자이자 여성 반전 예술가인 케테 콜비츠(K?the Kollwitz)가 조각한, 쓰러진 병사 아들을 안고 있는 피에타상이 놓여 있다. 일체의 조명이 없는 커다란 건물 내부에는 어둠이 깔려 있고 오로지 입구와 천장의 틈새를 뚫고 온 햇빛만이 이 피에타상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다.

“우리가 전쟁에 내보내려고 아이를 낳은 건 아니다!” 라는 말을 남긴 콜비츠는 그 자신이 당시 열여덟이던 둘째 아들을 전쟁터에서 잃어버린 어머니였으며, 이 피에타상은 따라서 콜비츠 자신의 내면을 형상화한 것이기도 하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강한 호소력과 무게감은 이러한 그녀 자신의 슬픔과 상처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쾰른의 콜비츠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그녀가 만든 반전 판화에는 “전쟁은 결코 다시는!(Nie wieder Krieg!)”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는데, 그 스스로 자식을 잃어버린 어머니로서 전쟁의 폭력과 광기를 비판하고 반전을 호소하는 그녀의 메시지는 시대를 초월해 그 호소력을 조금도 상실하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이 발사한, 시신의 뼈까지 태워버리는 악마의 무기 백린탄을 실은 미사일이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난민촌 아이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우크라이나 반군이 군항기로 오인해 저격한 민간 비행기에 탄 2백여 명의 승객과 승무원들이 전원 사망했다는 기사가 나오는 이 순간에도 케테 콜비츠가 조각한 피에타 상의 어머니는 아들의 주검을 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반제 회의가 열린 저택

<사진 5> 반제 회의가 열린 저택

6백만 명의 유태인과 소수자들을 학살한 홀로코스트라는 참담한 비극이 탄생한 곳은 베를린 남동쪽에 위치한 커다란 호수 반제(Wannsee) 인근의 별장이다. 1942년 1월 20일, 나치 친위대(SS)의 제국보안국 국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는 나치 당, 친위대, 경찰의 고위 간부들을 이곳으로 소환한다. “유태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을 논의하는, 이른바 “반제 회의(Wannsee Konferenz)”의 시작이었다. 이 별장은 지금은 유태인 기념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나치의 거물급 고위직 간부들이 아우슈비츠, 다카우 등 죽음의 수용소에서 행해진 가스실 대량학살이라는 끔찍한 “최종해결책”이 논의된 곳이라서 그런지, 이곳의 정문을 들어서면 음산하고 오싹한 느낌을 피할 수가 없다. 내부에서는 나치 시기 선전부 장관 괴벨스(Goebbels) 등에 의해 이뤄진 유태인 혐오 연설을 소개한 당시의 신문 기사, 유럽 전역에서 희생된 유태인들의 현황 등이 전시되어 있고 관람 코스의 맨 끝에는 이곳에서 유태인 대학살을 결정한 나치 친위대와 게슈타포의 최고 사령관 하인리히 히믈러(Heinrich Himmler)를 비롯한 나치 전범의 후손들이 자신의 할아버지, 선조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것들이 글과 영상의 형태로 전시되어 있다.

반제 회의에서 회의록을 작성한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점령지역 유태인들뿐 아니라 동맹국, 중립국, 적국 등지의 유태인을 모두 합쳐 총 1천 1백만 명의 유태인들을 제거할 계획을 수립했다. 하인리히 히믈러를 비롯한 대부분의 회의 참석자들은 전쟁 이후 열린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전범재판을 받지만, 회의록 작성자이자 유태인 수송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도주하여 아르헨티나에서 생활하다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 요원들의 집요한 추적 끝에 체포되어 이스라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다.

이 재판을 기록한 한나 아렌트는 오로지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하고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며 무죄를 주장하는 아이히만에게서 “악의 평범성”을 발견하고, 전체주의적 지배란 이처럼 무반성적이고 모든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벗어난, 자율적 판단 능력을 상실한 주체들이 등장하는 “익명의 지배”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우리가 익명의 지배라는 현대 사회의 메커니즘이 강요하는 악의 평범성에서 벗어나 반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분명한 평가와 관점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한 한 사회의 노력은 끔찍한 과거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다.

반제 저택의 유태인 기념관에서 본, 하인리히 히믈러의 손녀가 진술한 내용은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학교에서 자신의 친할아버지를 나치 범죄자로 배울 때 친구들이 자신의 얼굴을 쳐다본 순간을 기억하는 하인리히 히믈러의 손녀는, 그러나 자신은 나치 정권을 수립하고 유태인 대학살에 기여한 자신의 할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으며, 독일이 두 번 다시 이러한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행한 잘못들이 낱낱이 알려져야 하고 자신도 이 일에 동참할 것이라 말한다. 과연 한국에서 친일파 조상을 두고 그들의 권력과 재산을 물려받아 지금도 기득권 지배세력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할 용기를 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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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내가 사는 동네의 이웃집 대문 앞에서 찍은 것이다. 독일의 가정집이나 공공건물 앞에서는 이러한 작은 장식들이 바닥에 새겨져 있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그 건물에 살다가 나치에 의해 수용소로 끌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희생자들을 기념하는 기념물이다. 사진에 나온 집의 경우엔 1891년생인 아르투어 단넨바움이 1920년생인 딸 일제, 1925년생인 게르다와 함께 살다가 셋 모두 테레지엔슈타트에 있는 수용소로 끌려가 결국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나치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을 하나하나 기억하며 그들의 죽음을 추모하는 독일의 자세는 오늘날 과거사를 정당화하고, 이를 군국주의적 헌법 재해석과 재무장으로 연결시키고 있는 일본의 아베 정권과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만이 아니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주장한 사람이 국무총리 후보가 되고, 일본 식민지배를 미화한 극우 성향의 교학사 역사교과서를 옹호한 사람이 교육부 장관 후보가 되는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은 사회 전체의 노력이 아니라 이해관계를 둘러싼 갈등과 투쟁의 쟁점이 된다. 지나간 일 무엇 하나도 이 땅에서는 쉽게 기억되지 않는다. 현재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끊임없이 과거를 미화하거나 망각하려고 시도한다. 이에 맞서 ‘잊혀져선 안 될 것 들’을 ‘잊지 않기 위해’ 싸워야 하는 현실은 그 자체로 비극이다. 그러나 역사를 망각하는 한, 비극적인 역사는 끝없이 되풀이될 것이다. 비극의 재발을 막기 위해, 우리는 역사를, 과거를 기억하기 위해 싸워야 하는지도 모른다. ‘기억하기 위해 싸우기.’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과거를 대하는 자세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재원 단편소설-가장 간절히 바라는 것이 가장 진실한 것이다[철학을 사랑한 소설]

이재원 단편소설-가장 간절히 바라는 것이 가장 진실한 것이다[철학을 사랑한 소설]

이재원(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설화산에 산재한 여러 암자와 굿 당,?그리고 절마다 모셔진 미륵들과 그 옛날 미륵에게 소원을 빌던 사람들의 관계를 생각하면 고보살,?혹은 연화의 소원과 그녀에게 현신(現身)했다는 미륵의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옛 사람들은 특별히 정으로 형체를 조성하지 않은 돌에도 미륵이라 이름 붙였다.?미륵 관찰자가 되어 조금만 관심을 갖는다 해도 미륵이라 지칭하는 돌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미륵은 미래 세계에 도래할 부처이다.?불자가 아니라면 우선 미륵이 도래한다는 세계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을지도 모른다.?누가 이 태평성세에 미륵 세계에 관심을 가질까??그러나 현실이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있다면 미륵 부처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미륵은 더 나은 세계를 바라는 사람들의 부처이다.?고통당하는 사람은 지금의 현실보다 더 나은 세계를 바랄 것이다.?이 때 미륵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더 나은 현실을 주관하는,?따라서 당대 세계를 주관하는 부처로 변모된다.

이렇게 해서 인간 삶과 유리된 사상이나 종교는 없다는 주장이 가능해진다.?그것이 교조화될 때에만 본래의 생명을 잃고 인간 삶과 유리하게 된다.?사실 봉건시대에 농민 혁명이 일어나면 그 중심에 미륵 사상이 있었다는 주장은 아주 흔하다.

내가 지금 이야기하려는 용화사 미륵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주 우연이다.?내 인생에서 중요한 일도 아니다.?다만,?이야기꾼으로서의 어떤 직감 같은 것 때문이었다.

미륵님이 절을 세운 분에게 현신,?현몽하여 땅에 뭍혀 있던 부처를 찾아내 모시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그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순전히 사람을 관찰하는 입장에서였지,?종교적 관심이 아니었다.?꿈에 미륵이 현신한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이 가장 컸다고 말 할 수 있다.?앞에서도 언급했듯이,?행복한 사람이 미륵을 생각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그녀는 무엇을 생각하고 바랐는가??어떤 염원을 하면서 살았길래,?삶에서 어떤 질곡을 만났길래 미륵불을 만났을까??이런 관심은 특히 사람들이 고통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관심이기도 했다.

나는 한동안 노동의 노역에서 벗어나 있었다.?설화산 월정사 밥을 얻어먹으며 책 읽거나 아무 일도 안 하거나,?잠자고 싶으면 자고,?취하고 싶으면 취하고,?걷고 싶으면 산길을 걷고는 했다.?그러다가 사람을 만나면 말 붙이기를 좋아했다.

월정사 주변 밭을 가꾸는 노인과도 자주 이야기했다.?노인이 쓰는 사투리로 보자면 이 지방 사람은 아니다.?그러나 노인의 이야기 내용을 보자면 동네에서 오래 살았다.?노인을 도와 함께 밭의 잡풀을 뽑기도 했다.?노인의 이야기는 줄거리를 잡기 쉽지 않았다.?그러나 내가 아는 월정사 정보는 모두 그에게서 들은 것이다.

노인에 의하면 원래는 만신이 월정사를 일으켰다.?그리고는 월정사를 팔고 안성 어디에 가서 절을 크게 일으켰다는 것,그 후임으로 오신 지금의 스님은 대단히 성실해서 아침,?저녁 예불을 쉬지 않는다는 것 등이다.?말끝에 노인은?“용화사 시님 굿이야말로 보기 좋았지러”,?했다.?나는 한참만에야 그 이야기의 뜻을 알아 차렸다.?그리고는 되물었다.

“스님도 굿을 해요?”

“아,?하디.?굿 해 달래는 사람이 있으믄 하디.?미력(미륵)?앞에다?(음식)?진설 하고서리 밤새 했디.?사람덜이 백설치듯 했디.?미력 파내고서리.?거 박씨덜이 섬기던 미력이었거덩,용화사 짓고는 스님이 되었디.”

“미륵을 파내요??땅 속에 있었던 것을 파내었다는 말씀인가요?”

“파냈디.?미력이 현신(現身)해서 파냈디.?시집 갔더래서,?시님이.?미력이 자꾸 선몽하니끼니 시집 못살고는 나와서 용화사 지었디.”

“미륵이 현몽을 했다면 꿈에서 보았다는 뜻인가요?”

“꿈인디 생새인디는 모르디.?현신해서,?선몽해서리 절 지었디.”

“지금도 살아계세요?”

“몇 년 전 죽었디.?지금은 동생이 살고 있디.”

나는 미륵이 현몽하여 스님이 찾아냈다는 이야기가 궁금했다.?그러나 할아버지에게 그 일을 상세히 듣기는 어려웠다.무엇보다도 할아버지의 이야기 내용을 선 후 순서를 맞추어 이해하기 어려웠다.?제정신으로 말하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기도 했다.?그러나 궁금증을 풀 만 한 상대가 별로 없었다.댓걸음에 용화사로 달려갔으나 절은 텅 비어 있었다.

월정사에서는 예불이 끝나면 신도 몇 명이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절에서의 식사라 하면 무엇보다도 조계사의 점심 공양이 생각난다.?점심 공양 법회에는 세 부류의 대중들이 있다.?법당에 모인 신자들은 찬불가 대원들이다.?법당 마당에 자리를 펴고 앉은 이들은 일반 불자들이다.?그리고 마당 한켠을 가로지르는,?공양간을 향해 길게 줄 지어선 이들은?<밥 줄>로 불리운다.?배식 받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다.식사는 물론 무료이다.?몇 천 명의 대중이 모두 불자는 아니다.?남루한 차림의 사람들도,?아주 지저분한 옷차림의 노숙인으로 보이는 이도 있다.?또는 수입이 없어 점심 얻어먹으려는 사람들도 있다.?그 동네만 아니라 인근의 빈민들에게 하루도 거르지 않는 조계사 점심은 유명짜하다.?한 끼니만 먹고 산다고 하는 사람들을 그곳에서 흔히 보고 들었다.?조계사에도 미륵이 있다.?북문 앞,?커다란 돌덩이가 미륵이다.

월정사 식사는 조계사의 그것만큼이나 소박하다.?공양에 참여하는 이들은 이 동네,?박 씨 성 집안 할머니들이 대부분이다.?이곳이 박 씨 집성촌이기 때문이다.?나는 대개 남자들과 함께 식사했다.?그러나 그 날은 구태여 할머니들 틈에 끼어 식사하면서 넌지시 질문했다.

“용화사 미륵이 땅에 묻혀 있었는데,?스님 꿈에 현몽하여 파내었다는 것이 무슨 이야기예요?”

할머니들이 질세라 한마디씩 한다.

“스님이 시집가 살았지유.?그런디 미륵님이 현몽하시더래유.”

“미륵님은 돌로 만들었으니 얕히 묻히면 넘어지거든.?그래서 넘어지지 않게 깊이 묻었거든.?그런데 스님이 미륵님 발 밑을 더 파낸 거지,?잘 보이도록.”

“토사 밀려있지,?나무랑 풀이 엉켜있지,?꼴이 아닌디,?스님이 파내고 다듬어 지금처럼 단장했지유.”

“우리 동네 사람 누구나 미륵님을 섬겼지유.?우리 큰시숙이 미륵뎅이거든유,?박치성씨라구,?치성 들여서 낳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래유.?시어머니가 치성 디리구 미륵님이 선몽허셔 태어나셨대유.?그분두 무슨 일이 날라치먼 미륵님이 선몽허셨대유.”

“오호,?시숙님이 용화사 스님이 절을 지을 수 있도록 도와주셨나요?”

“맞아유,?용화사 출입이 잦았지유.?그러나 저간 사정은…”

설화산 상봉 아래쪽에서 세 갈래 줄기가 뻗어내리다가 작은 봉우리가 다시 솟아올라,?돌머리 마을 뒤까지 이어져 있다.월정사와 용화사는 지척으로,?남쪽을 향한 첫 번째 봉우리가 완만히 내려앉으며 형성된 평평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설화산에 대한 또 다른 주장도 있다.?이 또한 우연히 들은, 환경운동 하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설화산처럼 처참하게 뭉개지는 산은 호서 지방에서 그 하나로 충분했으면 좋겠다.?산신령도 떠났을 것이다.?그 산에서 어찌 살겠는가?”

설화산 동남쪽은 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그러나 북쪽은 완전히 망가져있다.?수십 년간 골재 채취하기 위한 석산개발 탓이다.?환경운동가의?<산신령>이란 말,?그리고 산신령이 떠났다는 말도 허투로 들을 일이 아니다.?이 또한 사람들의 삶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산이 인간 삶에 요긴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병 치료하러 산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는 무수하고 산에 들어가면 굶어죽지 않는다는 옛 사람들의 이야기도 산이 인간 삶에 꼭 필요하다는 반증이다.?북쪽 산은 사막처럼 망가지고 흉측해졌다.?멀리서 보면 천 길 낭떠러지만 드러내고 있다.

석산 주변에 분진이 많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당대의 사람들이야 할 수 없이,?오갈 데 없어서 산다 하지만,?누구도 그곳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자의 반,?강요에 못 이겨 사람들은 떠났다.?사람들이 떠난 폐허가 된 곳에서 산신령으로 대변되는 일상적 신비로움도 떠나고 만다.

그러나 이 환경 운동가와 미륵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나의 바람은 참혹해졌다.

“천국에서야 모두 평등하다지만,?미륵이 미래 뿐 아니라 현세에서 용화세계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은 헛된 희망을 사람들에게 주는 것일 뿐이다.”

나는 두 번 다시 이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용화사 미륵은 천 년의 이끼를 쓰고 있다.?두상은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다.?그러나 신체는 별로 다듬지 않았다.?언뜻 보면 하체는 그저 평범한 돌덩이 같다.?그러나 여러 번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미륵의 신체에도 정교하달 것까지야 없지만,?정성들여 다듬은 흔적이 있다.?이를테면 법복 자락을 표현하려 쪼은 선이 있다.?법복,?도포의 선은 어깨에서 무릎까지 흐르고 있다.?소맷동은 무릎 근처에서 다시 솟구쳐 가슴 앞,?두 손 모은 손목에까지 이어진다.?미륵을 쪼은 석공이 그 나름대로 정성을 들여 작업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랬다.?과거 어느 한때,?설화산 골짜기 박씨 종산 어귀에 미륵이 숨 쉬고 있었다.?나무와 풀숲이 가리고 있었으나 거기 이토록 친근감을 주는 미륵,?돌덩이가 있었다.

용화사 주변을 둘러보다가,?법당 옆에서 앞서 보지 못했던 고연화보살의 행적을 기록한 현판을 찾아낼 수 있었다.?이름을 보자면 현판을 쓴 사람은 스님 같지는 않다.?현판에는 최보살의 약력이 적혀 있었다.

<속명 고연화,?법명 청심화(靑心花)는?1928년 충남 광천에서 태어나 열여덟 살에 결혼했으나 결혼 생활을 청산하고 명산대천을 찾아 기도하며 전통 종교를 섬기던 중 여기 용화사를 지어 부처님께 바치니 이를 축하하여 현판을 드린다.?오서산인 금천.>

현판의 내용은 할머니들이 한 이야기와 조금 다르다.?고보살은 시집을 나와 곧바로 여기 용화사로 온 것이 아니다.?명산대천을 찾아 수련했다면 면벽하는 스님의 공부 방식과도 다르다.?월정사에서 보게 되는 동네 할머니에게 용화사 오기 전의 스님의 행적을 묻곤 했으나,?더 이상 신통한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그 대신에 근동에 미륵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나는 일삼아 미륵 순례를 시작했다.

어느 마을,?어느 산 귀퉁이,?어느 절에나 미륵이 있었다.?더러는 세련되어 보이기도,?더러는 그저 돌덩이와도 같았다.가장 세련된 형태의 미륵은 송암사에 있었다.

송암사 미륵은 대웅전 앞 반듯한 터에 자리잡고 있었다.?그러나 분위기는 용화사 미륵과 완전히 달랐다.?송암사 미륵은 아주 잘 다듬어진 것이었다.?이목구비가 뚜렷했을 뿐 아니라,?신체의 균형도 적절했다.?한눈에 보아도 불교가 번성했던 시기의 것이요 솜씨 있는 석공이 정성들여 다듬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자주 송암사에 들렸다.?여러 번에 걸친 묘각(妙覺)?노스님과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겠다.

송암사는 고찰이 아니다.?노스님에 의하면 송암사가 생긴 것이 육십 년 전이라고 한다.?그렇다면 이토록 오래 된 미륵이 여기에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스님이 추측하는 미륵에 대한 유래는 다음과 같았다.

이곳 송암사는 원래 큰 절터였으리라는 것이다.?이처럼 뛰어난 조각품은 대단히 드문 것으로,?대규모 불사가 있던 시절에나 형성이 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그러나 불교를 중시하던 시대가 지나고 절은 점차 쇠락하다가 드디어 없어졌다.?특히 이조 말엽,?한양에서 큰 벼슬을 하던 이 씨 성을 가진 양반이 이 근처에 자리를 잡고 집성촌을 이루자,?절터 돌들마저 마을을 세우는 데 쓰였다.?이 씨 집성촌 마을을 돌아가며 조성한 석축을 볼라치면 부도에나 쓰였음직한 돌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짐작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송암사 노스님은 자신이 이곳에 터를 잡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평생 선방을 떠돌다가 칩거할 토굴을 찾았다.?평소에도 기도 발 잘 받는대서 설화산을 맴돌았으며,?마침 처분하기를 바라는 이 절을 인수해서 개축했다는 것이다.

노스님과 절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돌아가신 용화사 스님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지 물었다.

“고보살!?잘 알아.?내가 여기 오기 전 보살 한 분이 송암사에 있었지.?그분하고 고보살이 함께 동사(同事)한 적이 있었지.그래서 내가 고보살,?잘 알지.

동사하다가,?언제부터인가 고보살이 여기는 인연이 아니라 하고 여기서 나가 용화사를 지었지.?용화사 가서도 한참 머리를 쪽을 진 채로 살았어.?나중에야 머리를 깎았지.”

“쪽지고 살았다니,?그게 무슨 말이예요??스님이라면 당연히 머리를 깎고 살지 않나요?”

“보살이란 여러 가지 의미를 갖거든.?불자 여신도를 가리키는 의미지.?그런데 스님은 아니지만 수도하는 여자에게 붙이는 이름이기도 하지.?고보살이 신 기운(神氣),?무당들한테 있는 신기운이 있었다는 것이지.?그러니까 불교 승려라기보다는 불교와 무속을 혼합하여 섬기는 사람,?보살이었다는 거지.”

“이를테면 무당 같은 것인가요?”

“무당과도 다르지.?무당은 절에 와도 산신당에만 가거든.?고보살은 부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거든.?무당은 신 기운을 가지고 있지.?보살수업은 아주 다양해서 불교와 무속 모두 수용하기도 하지.?일종의 종교 혼합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그래서 보살이라 부르면 무당과는 차별화되는 것이지.”

“고보살이라고 해야 하나,?아니면 현판에 적힌 대로 청심화스님이라고 해야 하나,?하여튼 그 용화사 스님이 신기가 있었다는 말이군요.?그렇다면 시집살이를 안하고 나온 것도 신기운 때문이었나요?”

“저간의 사정은 확인할 수 없지.?그러나 시집살이를 못 한 것은 남편이 일찍 죽었기 때문이었지.?그러나 신기가 있는 사람이 정상적으로 시집살이 할 수 있겠어??지금도 자주 결혼생활 청산하고 혼자 사는 사람들을 보잖아?”

“그렇겠네요.?부잣집이라서 며느리 병치레를 할 수 있는 집이라면 몰라도.?그런데 고보살은 여기 송암사에서 왜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한 거죠?”

“무엇인가 갈등이 있었겠지.”

“이를테면 어떤 갈등인가요?”

“원래 땅주인은 고 보살이 아니었거든.?여기 송암사 계시던 보살이 남편과 사별한 후 이곳 땅을 마련했지.?고보살은 자식이 없었지만 어린 남동생이 있었고,?송암사 보살은 자식이 둘 있었거든.?그러나 아이들이 성장하자 의견이 잘 안 맞았겠지.”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은 당연하잖아요.?그런데 그게 왜 문제가 되죠?”

“원래 무슨 일이든 다 그래요.?입에 풀칠은 해야 하는 게 우선이지.?처음에는 그럭저럭 해 나갈 수 있었을 거야.?그러나 아이들 커지고 점점 더 입에 들어갈 것,?몸에 걸칠 것이 커지겠지.?자연히 보살 두 사람 머물기에는 이모저모로 절이 좁았겠지.?그러니까 두 동사자의 의견이 맞지 않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고 보살은 이곳이 인연이 아니라고 떠난 거겠지.”

“그렇다면 고보살은 이곳 송암사 재산 형성이나 불사에 조금도 기여하지 못했나요?”

“송암사 자리가 원래는 미륵님만 계신 산이었겠지.?두 동사자가 풀을 치우고 마지(부처님에게 올리는 공양식)나 올릴 만큼 미륵님 주위를 다듬었지.?매일 기도하러 오르고 내리기 힘드니까 아예 초막을 짓고 기거했을 것이고.?미륵님이 영험하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초막에서 서까래 올린 집을 지을 수 있었거든.?또 신도들을 주로 상대한 것이 고보살이었거든.?그러니까 고보살이 송암사를 일으키는 데 기여한 것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

“고보살이 쫓겨난 셈일 수도 있겠군요.?아니면 독립해서 돈을 혼자 만지고 싶었나?”

“뭐 그렇게 돈,?돈 할 것은 없고,?인연이 아닌데 어쩌겠어.”

“조금 어려운 질문인데,?이런거예요.?돌머리 마을 사람들은 고보살 꿈에 미륵이 현신해서 절을 지었다고 알고 있거든요.그런데 왜 하필이면 미륵님이 고보살한테만 현신했나??현신하는 데 특별한 매카니즘은 없는가,?또 어떤 연유로 그렇게 평생 염불하며 살았는가??이런 것이 궁금해요.”

“아 그야 우리 모두 다 불심이 있는 것 아닌가??공덕을 드리면 미륵님도 현신할 수 있는 것이고.?우리 모두 부처님을 만날 수 있는거지.”

“그게 납득되지 않아요.?고보살이 꿈에 미륵을 보았다면 반드시 그 이유가 있을 거예요.?그 이유가 뭘까?”

스님은 대답 대신 되물었다.

“그래 처사는 왜 그런 일에 관심이 많우??무슨 일을 하우?”

내 직업이 뭘까??뭐라고 대답해야 하나??수입과 신분이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강사도 직업에 들어가나??나는, ‘강사예요’?라고 말했다.

스님이 물었다.

“무엇을 강의해요?”

나는 우물거리는 소리로, “철학이요”라고 답했다.

스님이 말했다.

“고보살 전쟁으로 남편이 일찍 죽었지.?가족 잃은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기는 참으로 어려워.?사람마다 틀릴 수 있지만서두.?이런 이야기는 참 곤란하지만,?가족 잃고 실성한 사람 여럿 봤어.?고보살이 탈속하게 된 계기를 여러 번 들었지.?남편 여의고 나서 정신없이 걸었다는게야.?목적도 없이,?밥 먹는 것도 잊은 채…?닿은 곳이 오서산이었다지.?고보살 친정이 광천이거든.?오서산은 광천에 있고.?아는 곳이란 한정되어 있게 마련이니,?실성한 듯,?친정 동네로 갔는지도 모르지.?그곳 산에서 보살 수업을 하면서 어느 정도 아픔을 치유했는지 모르겠어.“

나는 박치성에 대해서 동네 할머니들한테 들은 것이 있었다.박치성이 박 씨 종 터를 고 보살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이야기였다.?나는 노스님에게 마을 할머니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짧게 하고 나서 박치성이고 보살에게 땅을 나누어 준 이야기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다.?노스님이 말했다.

“종산을 잘라 파는데 웬 말들이 없겠어??박치성씨가 나서서 자기 종친들을 설득했겠지.”

나는 갑자기 어떤 묘한 생각이 나서 다시 스님에게 물었다.

“박치성씨가 용화사 스님을 좋게 생각하셨나보죠?”

“고보살이이 총명하기야 짝이 없었지.?송암사 동사자와 헤어져 시집으로 들어가서는 동생을 공부시키며 인근 아이들을 함께 모아 가르쳤지.?박치성씨가 고보살을 예뻐했던 것은 사실이지.?그러나 박치성씨가 막되어 먹은 사람이 아니지.?고보살을 박치성씨가 많이 도와준 것은 사실이로되,?어떤 흑심으로 도와준 것은 아닐 거야.”

나는 다시,?용화사에서 본 현판을 생각하고는 오서산인 금천에 대해서 물었다.

“용화사 현판을 쓴 이가 오서산에서 살던 사람인가 봐요,?오서산인 금천이라고 썼거든요.?고보살과 금천이 어떻게,?어떤 관계였는지 혹시 아세요?”

“잘은 몰라.?뭐 친정 사람들이 금천이라는 사람 소문 듣고 그와 딸 병세 의논했을 수도 있고,?연화가 금천으로부터 일편 병 치료 받고 일편 수업 하구,?그런 식의 관계였는지 모르지.”

송암사 노스님의 대답이 그럴 듯 하고 또 자신감이 있는 어투여서 나는 미륵이 현신했다는 고보살의 꿈을 끈질기게 화제로 꺼냈다.?그리고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물었다.?노스님은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떤 사람이 무슨 일로 괴로워한단 말이지??그 사람이 잠을 자고 일어나서는,?아 잠자고 일어났더니 조금 괜찮네,?그러거든??꿈도 그런 거야.?그러니까 꿈이란게 감정을 누구려 주는게야.?고보살두 그런 경우가 아니겠나??송암사에서 고보살이 과부보살과의 관계가 바늘방석이라면 당연히 꿈꾸겠지.?괴로우니까 괴로움을 눅이려고.?과부는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읇었을 게고,?고보살이 귀찮었겠지.?그런 눈치 알고 고보살이 고민한다지만,?마땅히 수도할 곳이 없다??여기 저기 토굴 자리를 찾다가는,?들었거나 알고 있었거나,?용화사터 미륵님을 기억해 냈겠지.?그리고 고 보살은 자기 갈망을 꿈으로 보게 되겠지.”

나는 혼잣말처럼 조그맣게 말했다.

“그러니까,?꿈에 미륵이 현신한다는 것은 현재의 고통을 치유하는 것이요,?동시에 현재의 소망을 꿈으로 표출한 것이라는 말씀인가요?”

무엇인가 미진했다.?이야기꾼으로서의 내 상상력을 보탠다 해도 미진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친정에서 돌아와 미륵 앞에 토굴을 꾸린 연화의 변한 모습에 박치성은 놀란다.?특별히 영민했던 연화는 눈에만 이상한 광채를 발할 뿐 초췌하기 짝이 없다.?그러면서도 연화는 애잔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박치성은 미륵 앞에 앉아있던 연화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박치성은 꿈을 꾼다.

미륵 앞에 연화가 앉아 있다.?박치성이 그 자리에 함께 있다.미륵이 연화에게 묻는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연화가 대답한다.

“누구에게 나를 빼앗기지 않고 살도록 도와주세요.”

박치성은 몸 둘 바를 모른다.?연화의 소원이 자기의 속마음을 드려다 보는 것 같지 때문이다.?혹시나 박치성의 열정 때문에 수도생활을 하지 못할는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연화가 미륵에게 그런 소원을 말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그는 자기의 감정이 새삼 두렵다.?혹시 어떤 식으로든,?착취적 의도는 없었는지 새삼 자신을 돌이켜 본다.

미륵이 연화에게 대답한다.

“내 너를 불쌍히 여겨 소원을 들어주마.”

박치성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리를 뻗고 다시 잠에 빠진다.?미륵이 옆에 있으니 자기가 어떤 두려운 행동,?이를테면 연화를 안아 본다거나 하는 행동은 안 하리라고 안심하는 것이다.

나는 고 보살이 틀림없이 미륵님과 만났으리라,?친견했으리라 생각해 본다.?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아내,?실성한 여인은 정신을 차리자 송암사 미륵 앞으로 돌아왔다.?전쟁 없는 세계가 미륵의 세상이다.?미륵이 그를 불렀을까,?그녀의 소망이 미륵을 현몽하도록 했을까?

어쨌든 그녀는 다시 미륵 앞으로 돌아왔다.

연화가 동사자 과부와 송암사를 일으킨다.?몇 년이 지나 과부와 갈등을 빚어 고민하던 연화는 지금의 용화사 터 미륵을 만난다.?그리고는 미륵을 찾아 소원을 빈다.?연화의 처지는 다급하다.?사이가 벌어질 대로 벌어진 과부 보살과 대면하기 정말 괴롭다.?이제 연화는 매일 용화사 자리 미륵을 꿈꾼다.?이 터가 꼭 필요하지만 근동에 쩡하게 세력을 떨치는 박씨 문중을 향해 땅을 팔거나 나누어 달라는 말을 꺼낼 수도 없다.?꿈에 현몽하는 미륵만이 연화의 위로요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연화는 날마다 눈뜨면 미륵 터로 달려간다.?기도하는 연화의 몸은 땀에 젖는다.?인적이 드문 저녁나절이면 연화는 미륵 옆 개울에서 목욕한다.

무료함을 달래려 산천경개를 구경하러 산책길에 오른 박치성은 우연찮게 목욕하는 연화의 벗은 몸을 본다.?연화는 여전히 그 빛나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박치성은 이제 아득히 그의 정념 속에서만 잠자던 연화에 대한 감정이 되살아난다.?박치성은 연화의 주위를 맴돈다.?용기를 내어,?그리고 견딜 수 없어 연화에게 다가간다.?그리고 연화와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날이 갈수록 박씨 종손의 고통은 더해 간다.

이윽고 연화의 소원을 알게 되자 박씨 종손은 이제는 더더욱 사랑을 고백할 수 없다.?박치성은 자기네들 종 터를 염원하는 연화에 대한 자기의 우월한 지위를 결코 이용할 수 없다.그의 양심과 그가 가진 사상이 그의 내면의 감정을 다잡아 주는 것이다.

박치성은 이제 밤마다 꿈을 꾼다.?연화가 미륵과 함께 있다.박치성이 옆에 있다.?연화는 그를 향하여 자세를 바로잡는다.?그러고는 말한다.

“제가 비록 쪽을 지고 살되,?출가한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선생님 또한 이를 모를 리 없소.?어려서는 남편 잃은 제가 병들었고,?어른이 되어서는 수도에 몸을 들인 터라 남자를 알 기회가 없었으되,?저 또한 목석은 아니외다.?선생님을 원하기도 합니다.?그러나 선생님과 연을 맺게 되면 간신히 다잡은 나의 수도생활을 포기해야 하오.?그리고 수도생활을 포기한다면 내가 정상인으로 살 수 없다는 점이 문제가 되오.?그러니 어쩌겠소.?고통을 알지만 선생님이 나를 잊을 수밖에.”

박치성은 꿈속에서 눈물을 철철 흘린다.?연화가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고마워서,?그리고 연화 자신의 처지가 딱함에도 불구하고 연화를 사랑하는 자기의 고통을 알아주는 것이 고맙고,?또 이룰 수 없는 사랑이 애닯아서이다.

박치성은 문중의 어른들을 설득하기 시작한다.?몇 평 안 되는 땅을 나누어준 들 박씨들이 묏자리 쓸 곳이 없는바 아니요,?우리 박씨들이 섬기던 미륵이라 하나 누가 더 가까이서 보살핀다 하면 우리 문중에 득이 되면 될지언정 손해볼 리 없다는 식이다.

그리고 마침내 연화는 박씨 종산 미륵 터 옆에 자리를 잡는다.?비록 고연화가 절 이름을 내세를 뜻하는 이름이되 미륵님이 가진 현세적 의미와도 통하는 용화사라 붙였지만,?미륵은 연화와 박치성 측에서 보자면 현세에서 분명한 도움을 준 부처이다.?연화와 박씨 종손은 삶의 고통과 사랑의 고통을 미륵님 덕분으로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혁명이었다.?혼자 사는 여자를 차려진 밥상으로 아는 현실에서 남 녀 간의 우정이 비록 에로스의 유혹을 받을지라도,?평등 세상을 향한 걸음일 터일 것이니.

 

“내 고향은 거제도라네”[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 -3

“내 고향은 거제도라네”[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 -3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나가 7살에 병이 들었다. 내 우로 언니가 둘 있었는데, 큰 언니가 먼저 병이 들었다. 울 언니는 얼굴에 병 표가 마이 나서 학교도 못 가고 집에만 있었고, 나는 병 표가 얼굴에는 안 나고 다리에 나더라. 그것도 무릎 우로 나서 치마로 감추모 안 보였다. 큰 딸도 한스러운데 셋째 딸까지 그 험한 병에 걸리고 보이 울 아부지 엄마 맘이 어땠겠노. 내가 펄쩍거리고 뛰다가 행여라도 다리에 난 병 표가 들킬까봐 울 엄마는 나보고 뛰지도 못하게 했다.

7살에 병이 들어도 나는 내가 병든 줄을 몰랐다. 우리 집에서는 아무도 나를 환자 취급 안 했거든. 어린 기 병 걸린 게 맘이 아파서 내말은 무슨 말이든지 전부 다 들어줬다. 국민학교도 갔다. 집에만 있을 때는 몰랐는데 학교를 가니까 자연적으로 알게 되더라. 나도 모리게 자꾸 손이 치마로 가서 잡고 있었제. 펄쩍 거리고 뛰다가 다리 병표가 들킬까 무서버서 체육시간이 되모 자꾸 뒤로 가는 기라.

하루는 공부 마치고 집에 갈라고 하는데 담임 선생님이 부르더라. 가니까 손을 펴 봐라, 손을 뒤집어 봐라 하데. 요리조리 보다가 고마 치마를 걷어 보라는 기라. 나는 안 걷을라꼬 자꾸 움찔움찔 했다. 그래도 어짜겄노 그마 다리 병표를 봤는 기라. 담임 선생님은 아무 소리 안 하고 “내일부터 집에 있어라.” 하고 나가더라. 응, 그 말은 인자 학교 오지 말라는 기지. 혼자 터벅터벅 걸어와서 말하니까 울 엄마도 집에 있으라카더라. 그 길로 학교도 못 가고 집에만 있었다.

뭐라고? 원망스럽지 않냐고? 모리겄다. 그때는 내가 큰 죄를 지은 것만 같고 또 선생님이 오지 말라니까 가모 안 되는 걸로 생각했고. 그래도 그때는 울 엄마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괜찮았다. 학교는 우리 아버지가 우기서 보내줬다. 엄마는 문맹이다. 내 우에 작은 언니는 나하고 큰 언니 때문에 참 마이 힘들었다. 가운데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밖에 나가모 잘 놀아주지도 않고 그랬다.

대성당 앞 벚나무

대성당 앞 벚나무

집에만 있으께 참 심심하더라. 학교를 안 갈 때는 몰랐는데 다니다 안 다니니까, 아이고 그 참 심심하데. 동네 아(이)들이 학교 갈 때는 집에 있다가 길에 아(이)들이 안 보이모 산으로 놀러갔다가 바닷가로 내리왔다가 그리 하다가 또 아(이)들이 학교서 올 때쯤 되모 집에 콕 들어왔다. 죄 지은 것도 없지만 어린 맘에 산으로 바닷가로 쏘다니면서 사람들 눈에 안 보일라고 애 마이 썼다.

큰 언니는 얼굴에 볼긋볼긋하게 나더라. 얼굴에 그리 나께 할 수 없이 학교도 못 가제. 집에 있으께 병이 나도 자연히 밥을 해 묵게 되는 기라. 작은 언니는 학교 가고 나는 어리고, 또 내 밑에 남동생은 마이 어린 기라. 아부지하고 엄마는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밖에서 일을 했다. 그라니까 큰 언니가 엄마 노릇을 해 줬제. 병들어도 언니가 집에 있으께 부모님도 그리 부지런히 날뛰었고, 우리 식구는 밥 안 굶고 쌀밥도 묵고 했다.

하루는 언니가 물양동이를 이고 우물에 물을 뜨러 갔다 아이가. 근데 우물가에 있던 여자들이 언니를 보고 소리 지르고 물을 끼얹고 난리를 피웠는 기라. 와 그랬겠노. 물 못 떠가게 그라제. 병 걸리 갖고 물뜨러 오께나 저거한테 병 옮는다고 그 난리를 피웠제. 여자들이 떼거지로 달리 들어서 언니를 이리저리 흔들고 옹기를 집어 던지고 물을 바가지 채로 갖다 붓고 물담아 이고 다니는 옹기를 발로 차고…… 휴우 휴이….

물에 흠뻑 빠져갖고 혼이 나가서 들어왔는데, 그날로 언니가 병이 났다 아이가. 그만 시도 때도 없이 발작을 하는 기라. 여자 셋만 있으모 그마 혼이 나가는 기라. 그마 셋이 지나만 가도 그래. 그라이 집에만 있는데 울 부모 맘이 어땠겠노. 어데 가서 따지지도 몬하고 누구한테도 말 몬했다. 그날 들일 갔다가 들어오셔서는 언니 그 꼴 보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앉아 쉬지도 않고 일만 하더라.

나는 나이가 없어서 그때는 그 심정을 몰랐제. 한참 살고보이 인자는 생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힌다. 이 병은 옮는 기 아이다. 우리 식구 여섯 중에 큰언니하고 나만 걸린 거 보모 모리나. 걸릴라 쿠모 다 안 걸맀겄나. 내 밑에 남동생은 나보다 나이가 마이 적었다. 엄마는 일 나가서 안 들어오고 동생은 배가 고파서 운다. 달래도 안 되고 배가 고프니까 자꾸 칭얼거리기도 하고……

암죽을 먹이야 하는데 나도 얼라 아이가. 어찌 해야 할지 몰라서 생쌀을 입에 넣고 씹었다. 꼭꼭 씹어서 먹이기도 하고, 내가 씹은 쌀을 밥그릇에 담아 겨우겨우 불을 때서 끓여 먹이기도 했다. 내가 어리지만 생쌀을 그대로 주모 안 되겄고 굶길 수도 없고 그래서 그리 했는데, 그래도 내 맘 한 구석에 겁이 나서 엄마가 들어 오모 그 말을 못 했다. 말할 용기가 없는 기라. 혹시라도 어린 남동생이 병에 걸리모 어짜노 싶어서 조마조마했다.

그래도 그 동생은 병 안 걸리고 건강하게 잘 산다. 이기 옮는 병이모 우리 남동생은 걸리도 내가 쌀을 씹어 먹인 만큼 병이 걸리야 하는 거 아이가. 큰언니? 그때는 우물가에서 그 일을 당한 후로 병이 점점 들어서 그냥 멍하니 있는 기라. 아가 울어도, 그거를 암죽을 끓이가 먹이야 되는데 그것도 안 될 정도로 그리 병이 깊어가더라고. 내 맘에 쌀을 씹어 먹이모 그기 암죽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천방지축 뭐가 뭔지도 잘 모르고 날 새모 산에 간다. 산에 가모 봄이면 진달래가 온 천지다. 그거 뜯어서 입에 넣어 보모 싸~ 한 기 맛이 있었다. 맨날천날 산으로 들로 바닷가로 다니다가 배고프모 집에 와서 밥 한숟가락 묵고, 동생 울모 업어주고 그랬다. 나는 별로 힘들지도 않고 학교 안 가는 게 그리 서럽지도 않더라. 심심한 거 하고 친구들 옆에 가기 힘든 것만 빼모 그리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 큰언니가 자꾸 문제가 생기는 기라. 우물가에서 그라고 온 뒤로 대문 밖을 안 나가는데 얼굴에 나는 기 더 표가 나. 점점 마이 나고, 나는 얼굴에는 안 나는데 왜 그리 얼굴에 나는지. 병 표도 마이 나고 정신도 나가고, 동네 사람들 눈에 우리 언니는 같은 동네에 있으모 안 되는 사람인기라. 저거 때문에 언니가 정신이 그리 됐는데……

내 눈에도 언니가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더라. 집에 있다가도 갑자기 소리 지르고 벌벌 떨고, 그라모 나는 어째야 할지 몰라서 덩달아 겁이 나고 그랬다. 아마 우리 부모님 마음이 마음이 아니었을 기라. 지옥이 따로 있겄나, 그기 지옥이지. 하기사 그보다 더한 지옥이 기다리는 걸 나는 몰랐지.

사람들이 처음에는 모린 척 하다가 점점 수군거리고, 언니를 소록도로 보내라는 기라. 우리 부모님은 애써 못들은 척 해도 마이 힘들었제. 가까이 지내서 걱정하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니까 “인자 아(이)들을 그마 보내야 안 되겄나?”하고, 집에 오는 것도 좀 뜸해지는 것 같더라. 그때는 순경이 병자들을 잡아가기도 하고 그랬다.

그라다가 인자는 순경이 우리 집으로 온다. 뭐하러 오겄노?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에 문디 있다고 신고하니까 순경이 나오지. 빨리 잡아서 보내라고 신고하는 거지. 아버지 엄마는 들일하다가도 멀리서 순경이 우리 집으로 가는 거 보이모 어떤 때는 소리치고 어떤 때는 쫓아온다. 그라모 나하고 큰언니는 뒷산으로 내빼는 기라. 그냥, 그냥 산으로 들어간다. 언니하고 쪼그리고 있다가 해지모 집으로 들어가제.

하루는 집에 있는데 순경하고 동네사람들이 몰리 오는 기라. 아버지가 대문 앞에서 “아(이)들 없다. 왜 이라노?”하고 두 팔을 쫙 벌리고 버티고 서서 큰 소리를 지르는 기라. 응, 우리보고 빨리 달아나라는 뜻이지. 언니하고 나는 뒷문으로 돌아서 또 산으로 간다. 가다가 보니까 우리 아버지가 앞으로 퍽 고꾸라지고 있는 기라. 순경이 집안으로 들어 올라고 아버지를 사정없이 밀친 기라.

성심원 산책로

성심원 산책로

마음이 아프고 눈물 나고 그런 것 보다 큰언니하고 나는 겁에 질려서 계속 산으로 산으로 들어간다. 정신이 나간 언니 손을 꼭 잡고 안 잡힐라고 정신없이 뛴다. 온 몸이 덜덜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 어데 나무 밑에 덤불 밑에 쪼그리고 그리 있다가 어두워지모 엉금엉금 내려 왔다. 해가 있으모 못 내리오제. 동네사람들이 우리 보모 그냥 안 두지. 어짜든지 우리를 동네에서 쫓아 버리야 저거가 병 안 걸린다고 생각했으니까. 어떤 때는 어두워져도 안 가고 우리 집 마당에 버티고 있기도 하고.

응? 아이다. 다른 집에도 병자가 있었다. 그때 그리 흔한 병도 아이지만 드문 병도 아니었다. 그 사람들? 다 소록도로 가든가 집을 떠나든가 했제. 우리는 아버지가 어짜든지 멀리 안 보내고 옆에 가까이 두고 병을 낫게 할라고 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큰언니하고 나를 어데 보내라고 해도 못들은 척하고 버틴 거지. 그라고 우리 집이 그래도 좀 먹고 살았거든. 그라니까 아주 함부로 하지는 못했제. 그래도 결국은 떠나왔제.

고향? 생각 마이 나제. 어릴 때 떠나와도 이상하게 기억이 잘 난다. 봄이 되모 도다리 쑥국이 일품이다. 니가 어째 도다리 미역국을 아노? 니도 거제도라고? 거제도 어데고? 고향 사람 만났네. 맞다. 도다리 넣은 쑥국하고 미역국은 지금도 생각난다. 희한하게 쑥하고 도다리가 어울린다. 된장 약하게 풀어 넣고 캐온 쑥하고 싱싱한 도다리가 있는 국은 봄이 되모 생각난다. 미역국도 도다리 넣고 끓이면 국물이 진하고 참 시원타.

하이고, 너거 할머니도 숭어 간 맛을 알았네. 숭어 간, 그거 안 묵어 본 사람은 모린다. 나도 어릴 때 숭어 어장이 옆에 있었다. 어린 마음에 숭어 간을 한번 훔쳐 묵어 봤는데, 맛있는 기라. 몇 번 훔쳐 묵었지. 하하 흠, 참 맛이 있다. 숭어 한 마리에 간은 한 개제. 꼭 밤톨 맨치 생긴 게 싱싱한 숭어 간은 탱탱하다. 소금에 콕 찍어 묵으모 쫄깃한 기 참 맛이 있다. 보통 탁주하고 같이 묵는데, 술도 사람에 따라 발효하는 기 다른 기라.

누룩도 보통 요새 파는 누룩이 아이다. 그 누룩이 곡식 아이가. 물에 불리서 만들어 윗목에 두모 한 3일 뒤에는 발효하는 기라. 어데, 3일 후에 발효되는 기 정상이다. 더 오래 두모 술맛도 없고 술 색깔도 안 좋다. 그런데 더 빨리 발효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 갖고 술을 담가도 담가는 사람에 따라 술이 잘 익기도 하고 잘 안 익기도 한다. 술이 사람에 따라 다리게 발효되는 기지. 말하자모 술이 사람 가리는 기라.

칼치 회 묵어 봤나? 그거는 안 묵어 봤고나. 칼치는 바다에서 올라 오모 바로 죽는다. 칼치 잡는 배에서나 맛볼 수 있다. 그래도 금방 잡아갖고 금방 들어 오모 묵어도 괜찮다. 칼치는 반짝반짝한다. 맞다, 그렇제. 칼치는 비늘을 벗기야 된다. 칼치 비늘은 호박잎으로 마무리 하모 된다. 호박잎으로 몇 번 쓱 문지르모 된다. 뼈채 썰어서 된장에 함께 묵으모 그 맛이 기차다. 고소하고 참 맛있다. 에이, 고등어 회는 비리다. 비리서 별로라.

내 노래 한 번 해볼까?. “서러운 내 인생 흐르고 흘러가도 잊혀지지 않고 이 내 몸이 서럽고 서러워 한 세상 살아도 서러운 세상”. 나는 노래하는 기 좋다. 가수가 되고 싶은 적도 있었는데, 옛날에는 한 번 부르모 한 번에 몇 곡씩 연달아 불렀다. 노래를 부르고 있으모 서러움도 잊어뿌고 눈물도 안 나고 괜찮다.

니는 차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여게 뭐할라꼬 오노? 니가 차가 있어야 하는데, 그기 걱정이다. 저게 박카스 있다. 박카스 묵어라. 저게 마이 안 있나. 한 개만 묵지 말고 마이 가져가라. 고마 한 박스 가져가라. 목마르고 할 때 묵으모 좋다. 또 갖다 준다. 걱정하지 말고 가져가서 차 가면서 묵어라. 뭐 할라고 또 온다고, 안 와도 된다. 니가 너무 힘들다 아이가. 내 걱정 하지 마라.

다원적 맑시즘과 그 미래 – 에티엔 발리바르의 대담에 다녀와서 [베를린에서 온 편지 4]

다원적 맑시즘과 그 미래 – 에티엔 발리바르의 대담에 다녀와서 [베를린에서 온 편지 4]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프랑스 정치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tienne Balibar)가 베를린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설렜다. 나는 이미 2011년 5월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서 열린 국제 심포지움에서 그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자신의 강연만 마치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며칠간 이어진 다른 강연을 거의 대부분 참석해 청중석에서 모든 연사들에게 진지하게 질문하고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던 진지한 노학자의 모습을 나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베를린 일정 중 가장 이목을 끌었던 것은 6월 13일 열린, 그와 그의 오랜 지적 동료이며 베를린 자유대학교(FU Berlin) 철학과 명예교수인 (그리고 나의 부지도교수이기도 한) 프리더 오토 볼프(Frieder Otto Wolf) 사이의 대담이었다. 두 노(老) 거장들의 우정어린 대화 속에 진행된 이번 행사는 발리바르가 1993년 집필한 책 『맑스의 철학(La philosophie de Marx)』이 오토 볼프의 변역으로 최근 독일에서 새로 출판된 것을 기념해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 지역에 위치한 인문학 서점 b_books에서 열린 것이었다.

 발리바르와 오토 볼프의 대담이 열린 b_books

<사진1> 발리바르와 오토 볼프의 대담이 열린 b_books

발리바르에 대해서야 국내에 이미 잘 알려진 터라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만, 프리더 오토 볼프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독일에 얼마 되지 않는 알튀세르 학파의 일원으로 1970년대 이래로 알튀세르, 발리바르와 지속적인 교류 속에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 나갔으며, 최근에는 알튀세르의 『자본을 읽는다(Lire le Capital』를 최초로 독어로 완역(기존의 번역은 영어판, 한국어판과 마찬가지로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글만을 번역했을 뿐 랑시에르, 마슈레 등 다른 저자들의 글은 번역되지 않았으며 숱한 오역으로 많은 지적을 받아왔다)했을 뿐 아니라, 알튀세르 전집을 편집, 발간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는 정치적 실천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어서 1984년부터 89년까지, 그리고 1994년부터 99년까지 두 차례 녹색당 유럽의회 의원을 지낸 적이 있으며, 현재 독일 휴머니즘 연합(Humanistischer Verband Deutschlands) 의장을 역임하고 있다.

 에티엔 발리바르(좌)와 프리더 오토 볼프(우)

<사진 2> 에티엔 발리바르(좌)와 프리더 오토 볼프(우)

발리바르는 최근 부흥하고 있는 새로운 조류의 맑스주의 정치철학들(지젝. 바디우, 랑시에르 등)에 대해 언급하며 자신의 강연을 시작했다. 오늘날 이 철학자들의 부흥과 대조적으로 자신이 『맑스의 철학』을 집필한 1993년은 동구권의 붕괴 이후 ‘맑스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급속도로 지적, 실천적 영역에 확산되고 그 자리에 푸코, 페미니즘, 후기식민주의 등 새로운 이론 조류들이 부상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21세기에 맑스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자신의 저작 의도였다고 말했다.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동시에 20세기에 지배적이었던 공식적 맑스주의 조류들에 대한 비판을 전제하는 일이다. 그는 기존의 전통적 맑스주의 철학 조류의 결정적 문제는 맑스의 ‘철학’을 다른 저작들로부터 고립시켜 이해하려 했다는 데에 있다고 말했다. 특히 ‘정치경제학 비판’의 경우 물신주의를 비롯한 일부만이 논의 주제로 부각되었을 뿐이며, 이러한 몇몇 철학적 관점들이 맑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부터 분리되어 고찰되었다. 이러한 공식적 맑스주의의 극단적으로 위험한 사고는 특히나 구 소련을 중심으로 맑스주의를 ‘체계화’하는 것으로 귀결되었으며, 발리바르 자신은 이에 대항하기 위한 ‘반체계적 서술’에 몰두했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공식 맑스주의의 체계화 경향이 그 물질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맑스주의라는 유기적인 이념과 담론이 당형태의 운동으로 고착화되는 데에서 발견된다고 지적했다. 자신의 ‘반체계적 서술’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그는 원래 이 책의 제목을 “맑스의 철학들”이라는 복수형 표현으로 정하려고 했다고 한다. 이는 맑스의 사상이 하나의 동일한 체계로 고정될 수 없으며, 따라서 맑스의 사상을 체계화하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해야 한다는 그의 사고가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철학’이라는 단어를 복수로 사용하는 것이 워낙 일상적 언어용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편집자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현재와 같은 단수 표현으로 제목이 정해졌다고 한다.

이처럼 발리바르는 ‘맑스주의’라는 굳어진 사상체계도, 또 맑스의 사상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시도도 모두 거부한다. 그의 관점에서 맑스 이론의 대안은 오히려 맑스의 사상 자체를 ‘변형’하는 데에 있다. 발리바르는 미셸 푸코가 『사물의 질서』에서 맑스의 경제학 비판을 (근대)철학적인 역사 개념이자 19세기적인 진화론 패러다임으로 규정하며 비판한 이래로 맑스의 현재성에 대한 물음이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고 말한 뒤, 오늘날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승리를 거둔 상황에서 자본주의 비판으로서 맑스의 사상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맑스의 이론을 계승하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맑스가 말한 것으로 돌아가자’가 아니라 ‘맑스가 제공한 도구들을 통해 다시 한 번 시작하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맑스가 자본주의 비판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관념 역시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발리바르에게 있어 ‘맑스의 현재성’에 대한 물음은 ‘다원적 맑시즘’의 재구성이라는 과제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어진 대담에서 프리더 오토 볼프 역시 이 책이 갖는 가장 큰 매력은 ‘단수로서의 철학’이라는 관념에 종말을 고했다는 데에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특성 상황에 대한 반성적인 이해로서 다수여야 하며, 이는 정치적 행동과 관련을 맺으며 실천적 결론으로 이어져야 한다. 철학은 마지막 단어를, 궁극적인 답을 갖지 않는다. 언제나 철학에 의해 사유되지 않는 것, 담론화되지 않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며, 반성활동을 통해 이를 도그마로 만들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또 그는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에 의해 1960년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 ‘자본을 읽자’ 운동의 성과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이 지적 운동은 맑스 이론을 단지 재발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맑스 사상의 재구성에 기여했고 이는 특히 (헤겔을 차용한) 기존 맑스주의의 논리적 형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 ‘상이한 사회에 대한 상이한 지배분석의 필요성’이라는 결론으로 나아갔다.

 발리바르의 강연을 듣기 위해 온 청중들

<사진3> 발리바르의 강연을 듣기 위해 온 청중들

청중토론 시간에 나는 지젝, 바디우, 네그리, 아감벤 등 현재 유행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맑스주의 내지 비판적 철학이론들에 대한 바디우의 견해를 물었다. 나는 (발리바르의 제자이기도 한) 진태원 선생이 한국에서 이 철학 이론들을 “좌파 메시아주의”라고 비판한 뒤 촉발된 논쟁을 발리바르에게 소개하고 이에 대한 그의 의견을 듣고싶다고 말했다. 발리바르는 나의 질문이 매우 중요하다며 친절하게도 무려 20분가량을 할애해 아주 상세히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혀주어 나를 감동시켰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새로운 조류의 비판적 이론들을, ‘맑스주의의 죽음’이 선언된 상황에서 철학적 담론의 에너지를 결정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훌륭한 시도들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이 저자들 중 누가 옳은 사람이고 누가 거부해야 할 사람인지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인 일이다. 발리바르는 이 저자들이 모두 훌륭하고 발리바르 자신보다 뛰어나다며 (매우 겸손하게) 그들의 이론들을 옹호했다. 그러나 이들이 훌륭한 이론가들이라고 해서 그들의 사상 전체에 동의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덧붙였다.

그렇다면 이들 사상가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하게는 맑스의 이론을 계승하려는 시도들에 있어서 그 사상적 자원이 다양할 수 있다는 점이 언급됐다. 이는 맑스만이 비판의 유일한 원천이 아니라는 그의 모두발언 결론과 연결되는 주장이다. 즉, 맑스의 이론을 계승하려는 시도들은 푸코, 한나 아렌트, 들뢰즈 등 다양한 형태의 담론들로부터 얼마든지 비판적인 에너지를 수용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정치적 상상력’을 확장할 수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단순화된 기존 1세대 맑스주의의 변형과 재창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오늘날 맑스의 사상을 계승하려는 사람들은 전통적 맑스주의와 달리 “정치적인 것의 이질성”을 사고해야 한다. 이 “정치적인 것의 이질성”은 우리가 맑스 자신으로부터 수용해야 할 어떤 것이다.

‘메시아주의’에 대해서 발리바르는 맑스 자신의 사상에도 ‘메시아적인 것’의 요소, 즉 에른스트 블로흐가 “희망의 원리”라고 부른 것이 깃들어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메시아주의적 흐름은 궁극적으로 인간 자신이 새로운, 다른 형태의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종말론적 열정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메시아주의적인 열정으로 정치적인 것에 대한 분석을 대체하고 현재의 상황을 보상받고자 하는 시도 자체에 대해서 자신은 매우 비판적이라고 고백했다.

이어 내 질문에 대해 프리더 오토 볼프 역시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그는 1960년대 학생운동의 경험을 소개하며, 다양한 형태의 메시아주의적인 정치 조류들은 실천적으로 반드시 분파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말하면서 여기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또 최근 유행하고 있는 철학 이론가들의 사상은 각자가 가진 장점들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각 이론가들의 장점들을 중첩해서 이해할 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나는 맑스 이론의 현재화와 재구성은 무엇보다도 도그마적 체계화에 대한 거부와 다원성에 대한 인정, 그리고 자본주의 비판의 사상적 원천을 넓게 개방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발리바르의 설명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맑스주의의 다원성’에 대한 강조는 맑스의 사상을 하나의 체계로 고정시키고자 했던 20세기의 공식적 맑스주의와 결별할 수 있는 결정적인 출발점일 것이다. 다만 나는 메시아주의에 대한 판단에 대해서는 몇 가지 점을 덧붙이고 싶다. 맑스주의와 메시아적 사상의 결합은 맑스주의를 기독교 신학과 조화시키려고 했던 블로흐뿐 아니라 벤야민과 아도르노 같은 유대인 지식인들에 의해 유대교적 메시아주의의 이념을 변혁적 정치와 결합하려는 시도들에 의해서도 이미 선취된 것이었다. 벤야민은 그의 “역사철학 테제”에서 사적 유물론과 신학이 결합을 새로운 역사 인식의 필수적 과제로 제시한 바 있다. 이는 물질적 이해관계에 의해 조직된 사회와 이 이해관계를 둘러싼 투쟁들 그리고 이 투쟁들로 구성되는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이 현존의 ‘초월’이라는 신학적인 이념과 결합되지 않으면 손쉽게 현재 상황에 대한 타협과 옹호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역사적 경험(특히 제2인터내셔널의 교조화와 소련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체계화)으로부터 비롯한 성찰이다. 아도르노 역시 유물론과 신학은 그 목적에서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헤겔의 ‘규정적 부정(bestimmte Negation)’ 개념을 구약성경에서 강조되는 ‘우상숭배 금지원칙(Bilderverbot)’과 결합시켜서 현실의 모순적인 논리를 비판하고 극복할 수 있는 비판이론의 방법론으로 새롭게 제시한다. 즉 비판이론은 긍정적인 규범적 당위(예컨대 칸트)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기존 사회에 존재하는 규범들이 현재의 사회에서 실현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실현이 사회의 구조적 결함으로 인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즉 내재적 비판으로써만 진정한 비판을 수행할 수 있다. 이 내재적 비판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러나 현존하는 사회의 변화, 즉 ‘초월’에 있는 것이다. 나는 유물론적 이론이 이렇게 초월에 대한 이념을 수용함으로써만 일관된 비판적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쉽게 물리쳐선 안 된다고 본다. 이 때문에 나는 정치를 메시아주의로 환원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발리바르와 오토 볼프의 생각에 동의하지만, 메시아주의적 요소와 유물론적 정치 이론이 결합되는 것(이는 다른 말로 “‘구원’과 ‘해방’의 결합”이라고 부를 수 있다)을 그 자체 부정적으로 판단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청중의 질문에 대한 발리바르의 답변 중에서 흥미로운 것을 하나 더 소개해보자. 발리바르가 “최종심급에서의 경제결정”이라는 알튀세르의 개념을 비판하며 ‘최종심급’에 대한 사유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한 것에 대해 어떤 청중은 “최종심급에 대한 관념 없이 어떻게 비판과 정치가 가능한가?” 하고 물었는데, 발리바르는 이에 대해서도 매우 자세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었다. 그는 “최종심급에서의 경제결정”이라는 알튀세르의 관념이 그 당시 맑스주의 전통 내에서 포기할 수 없는 유물론의 시금석이었으며, 이를 폐기할 경우 마치 관념론에 굴복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맑스주의 내에 만연해 있었다고 지적한다. 당연하게도 맑스주의자들이 ‘최종심급’이라는 관념을 거부하지 못한 것은 계급투쟁을 정치적 변화의 핵심으로 배치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알튀세르가 이 유물론의 시금석을 지키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비판한) 그람시가 도달한 문제의식(최종심급이라는 관념의 거부)보다도 훨씬 후퇴한 영역에 머물고 말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물론 알튀세르는 (엥겔스에게서 차용한) 수려한 문장을 덧붙임으로써 이 관념의 문제를 상쇄하고자 했는데, 그것은 “최종심의 고독한 순간은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알튀세르가 봉착한 이 두 문제를 모두 봐야 한다고 말했다. 즉 이 상반된 정식화는 계급투쟁과 그 중요성을 정치의 영역에서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이 유일한 결정심급이라는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는 두 가지 과제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발리바르가 보기에 그러나 ‘최종’ 심급이라는 표현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으며 이는 무엇보다도 그 표현이 마치 하나의 사회가 수직적인 축과 결정구조를 통해 구조화되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는 데에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그는 이 표현을 포기해야 하며, 지배구조의 다원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회 영역이 동일하게 결정력을 갖는다’는 식의 다원주의적인 표상을 수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중층결정 과정에서 각 사회적 영역들이 교차하면서 만들어가는 지배적 구조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이다.

발리바르와 오토 볼프, 그리고 청중들이 함께 대화와 토론으로 만들어간 이 대담회는 오늘날 급진 정치철학의 재구성에 대해 고민하는 신구세대의 의견 교환의 장이었다. 젊은 세대는 ‘오늘날 과연 당이 필요한가? 페미니즘과 맑스주의는 어떻게 긴장 없이 공존 가능한가?’ 같은 새로운 질문과 의견들을 전달했고, 두 노 학자들은 새로운 세대의 문제의식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관점에서) 몇몇 과도한 편향들에 대해서 자신들의 비판적 의견을 전달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철학의 거장들과 젊은 세대의 지식인 및 활동가들이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격식 없이 자신들의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이 ‘키치’적인 철학 행사는 그 자체로 나에게 몹시 새로운 경험이었다. 나아가 두 노 학자들이 자신들의 변함없는 오랜 우정을 과시하며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는 모습은 흐뭇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철학을 자신의 삶으로 선택한 사람에게 그것은 동시에 존경과 경탄의 감성이 드는 광경이기도 했다. 베를린의 어느 여름날에 펼쳐진, 인문학적이며 또한 급진적인 풍경이었다.

맑스와 엥겔스의 베를린 생활 [베를린에서 온 편지 3]

맑스와 엥겔스의 베를린 생활 [베를린에서 온 편지 3]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맑스 엥겔스 포럼. 냉전 시절 동독 정부가 동베를린 지역에 만든 건축물로 오늘날 베를린의 관광명소로 분류되고 있다.

맑스 엥겔스 포럼. 냉전 시절 동독 정부가 동베를린 지역에 만든 건축물로 오늘날 베를린의 관광명소로 분류되고 있다.

맑스는 그의 생애에 걸쳐 총 4차례 베를린을 방문한다. 첫 방문은 그가 베를린 대학교, 즉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Friedrich-Wilhelm-Universit?t, 오늘날의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기 위함이었다. 처음 본에서 학업을 시작한 그는 1년 뒤인 1836년에 베를린을 방문해 1841년까지 머문다. (맑스는 베를린 대학에서 학업을 마치지 못했고,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예나 대학에 제출했다.) 그 후 1848년에 잠시 기차 환승을 위해 베를린에 들른 기록이 있다. 1861년에는 당시 프로이센의 국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사망과 빌헬름 1세로의 왕위계승을 계기로 기존의 정치범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면이 이뤄졌는데, 맑스는 이 당시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프로이센 시민권을 얻고자 했다. 때마침 페르디난트 라쌀레의 제안으로 베를린에서 공동의 신문을 창설할 계획으로 일주일간 라쌀레의 집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복잡한 법적 문제로 맑스의 프로이센 시민권 취득은 실패했고 그는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야 했다.) 1874년 말에는 막내 딸 엘리노어와 함께 베를린을 여행했다. 그의 마지막 방문이었다.

맑스는 베를린 대학교 법학과 학생이었지만 그의 주된 관심은 철학, 특히 베를린 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다 1831년 사망한 헤겔 철학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당시 베를린 대학교 법학과 교수이며 헤겔 법철학을 편집, 출간한 에두아르트 간스(Eduard Gans) 교수 밑에서 헤겔 철학을 공부한다. 또 1838년에는 브루노 바우어의 소개로 ‘박사 클럽(Doktorklub)’에 가입해 청년헤겔학파의 일원이 되기도 한다.

맑스가 살던 당시 왕립 도서관이 있던 자리에 현재 베를린 훔볼트 대학 법학과 건물이 있으며, 앞에는 베벨 광장(Bebel Platz)이 있는데, 이곳은 1933년 권력을 장악한 나치 세력이 유태인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책을 쌓아놓고 불태워버린 곳으로 유명하다. <공산당 선언>을 비롯한 맑스의 서적들 역시 당시 대거 불태워졌다. 현재 이곳에는 텅 빈 서고만 남아 있는 지하 도서관을 땅 위에서 볼 수 있도록 해놓았는데, 이는 나치에 의한 분서갱유 사건으로 학문이 탄압받았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전시물이다.

현 훔볼트 대학교 법학과 건물과 베벨 광장

현 훔볼트 대학교 법학과 건물과 베벨 광장

참고로 이 법학과 건물의 도서관에는 동독 정부 시절 제작된 6미터 높이의 거대하고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아직 남아 있는데, 그 중심에는 레닌이 서 있고 그 옆에 맑스와 엥겔스의 얼굴이 보인다. 이곳은 레닌이 1894년 이 건물(당시에는 왕립 도서관)에서 공부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현 훔볼트 대학교 법학과 도서관의 레닌 창문

현 훔볼트 대학교 법학과 도서관의 레닌 창문

그가 공부했던 베를린 대학교의 명칭은 이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바뀌는데, 훔볼트 대학교는 냉전 시절 동베를린 지역으로 편입되어 동독 정부의 지배를 받았다. 동독 정부는 맑스주의를 홍보할 목적으로 훔볼트 대학 본관에 맑스의 <포이어바흐 테제>의 마지막 문구인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변혁해 왔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혁하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금속으로 제작해 벽에 전시하였다. 통일 직후 이 글귀를 벽에서 철거할지 말지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대학 측은 이 글귀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며 그대로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훔볼트 대학교 본관에 전시된 맑스의 포이어바흐 테제.

훔볼트 대학교 본관에 전시된 맑스의 포이어바흐 테제.

그는 베를린에 공부하며 거주지를 총 6차례 옮겼는데, 그중 그가 그의 약혼자 예니 폰 베스트팔렌의 오빠이자 맑스의 정치적 동료인 에드가 폰 베스트팔렌과 함께 거주했던 3번째 집이 가장 유명하다. 루이제 거리 60번지(Luisenstraße. 60)에 위치한 이 집에 동독 정부는 맑스가 살았던 곳임을 표시하는 현판을 걸어두었는데, 지금은 이 건물이 예술 아카데미 기록관(Das Archiv der Akademie der K?nste)으로 편입되면서 현판이 철거되었다. 현재 베를린의 맑스 엥겔스 전집 편찬위원회는 맑스라는 인물의 역사적 의미를 감안해 이 현판을 다시 제작해 전시하자고 당국에 건의하고 있다.

맑스가 살던 집 건물에 붙어 있던 현판

맑스가 살던 집 건물에 붙어 있던 현판

엥겔스는 언제 베를린에 머물렀을까? 맑스가 베를린을 떠난 지 수개월 뒤인 1841년 9월 엥겔스가 베를린에 온다. 군대에 자원한 엥겔스는 포병으로서 베를린 대학 근처에 있는 Am Kupfergraben에 주둔한 병영에 거주하며 종종 베를린 대학의 철학 수업을 청강했으며, 브루노 바우어가 이끄는 청년 헤겔학파와도 교류했다. 동독 정부 시절엔 시내 중심에 위치한 그가 살던 집에 커다란 현판이 붙어있었지만, 지금은 재개발이 진행되어 건물이 소실되어버렸다. 1년 뒤 엥겔스는 쾰른을 거쳐 맨체스터로 이주해 아버지가 운영하는 사업을 물려받기 위한 교육을 받으며 그곳의 노동자들의 생활을 관찰한 뒤 정치적으로 급진화하기 시작한다.

베를린에 남아 있던 맑스의 흔적들은 대부분 동독 정권 시절 정권 홍보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그러한 흔적들 중 상당수는 오늘날 소실되어 더 이상 기념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비록 동독이 무너졌지만 맑스에 대한 독일인들의 자부심은 여전히 대단해서, 베를린에만 칼 맑스 거리(Karl Marx Straße), 칼 맑스 대로(Karl Marx Allee) 등 맑스의 이름을 딴 지명들이 여전히 남아 있고 곳곳에 맑스의 흉상과 얼굴 조각상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맑스를 기념하는 장소들과 지명들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자는 주장들도 우파들로부터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들은 맑스와 독재를 동일시하며, 동독이 사라진 현재 맑스를 기념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고 묻는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과 달리 맑스의 사상은 동독 정권의 독재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동독 정권의 국가 이데올로기가 아닌 맑스 사상의 비판적이고 변혁적인 핵심을 연구하고 실천적으로 계승하려는 노력들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현재 독일의 연구자들은 맑스 엥겔스 전집(MEGA)을 발간하며 동독 국가 이데올로기와 다른 맑스 사상의 새로운 내용들을 세상에 공개하고 있다.

맑스가 죽은지 130여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불평등과 착취, 억압이 지배하며, 새로운 형태의 위기가 재생산되는 이 시대에는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맑스의 사상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여전히 베를린에 “더 많은” 맑스 기념시설들이 필요한 이유다.

“내 이름은 양추자입니다”[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 -2

“내 이름은 양추자입니다”[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2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고향

?

빨간 색 뽈통 소쿠리 가득 담기면

주물러 붉은 물 빼고

남은 씨는 고운 햇살에 말려

찧으면 나오는 붉은 가루로

개떡 만들어 주던 이웃은 어디로 갔을까.

?

어머니 몰래 가져간 밥 한 그릇과

바꾸었던 칡수제비 한 그릇 먹고

함께 놀던 친구들은 잘 있을까.

?

목화송이마냥 하얗게 부풀어

베어 먹으면 새콤달콤한 동백꽃

구름이라도 끼이면

끝도 없이 가물거리던 그 작은 섬들

?

산이라도 그대로

바다라도 그대로

날 기다리며 있을 것 같은

한번은 가보고 싶은

잊을 수 없는 그 곳!!

-양추자, 2014년 2월 18일 구술한 것을 수정-

20140122_091652참말로 이상하고 얄궂다. 무신 시를 쓰고 읽자고 자꾸 찾아 오노? 말은 하는데 시는 모린다. 뭐 안 쓰도 된다하이 한번 해 보자. 내 이야기 들어가꼬 뭐 할끼고? 나는 서럽고 서러워서 그라고 억울해서 말하고 싶지 않다. 그란데 또 이야기하고 싶기도 하다. 내 맘을 나도 모리제. 이래 뵈도 내가 노래는 참 잘한다. 소록도에 있을 때에도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라 하모 뜻도 모르는 유행가를 몇 곡씩 불어 제낐다.

고향? 우리 겉은 사람한테 고향이 어딨노. 태어나서 8살 묵을 때까지 살았다. 나는 거제도 바닷가 동네에서 태어났제. 위로 언니가 둘 있었고 아래로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내 고향은 앞에 바다가 있었고 뒤에는 산이 있었는데, 그 산에는 참꽃이 얼매나 붉게 피었는지 모린다. 참꽃 피몬 벚꽃도 피제. 아참, 머루도 참 많았다.

머루보다 뽈통이 더 많았는데, 그 뽈통은 워나게 커서 몇 개만 따 묵어도 금방 배가 부르고는 했다. 뽈통 알제? 큰 거는 손가락 마디만 하다. 없는 집에서는 그 뽈통으로 개떡을 만들어 묵었제. 산이라고 해도 바다 가까이에 있는데, 뽈통나무를 타고 올라가 흔들모 열매가 우두둑 떨어진다. 금방 소쿠리가 찬다 아이가. 참 재미있었다. 뽈통은 약간 떫으면서도 단맛이 난다.

우리 옆에 집에 살던 아가 그 뽈통을 한 소쿠리 따 가모 그 집 어매는 소쿠리 채 뽈통을 주무르는 기라. 그러면 뽈통 살은 빠지고 포루스럼한 씨가 남아. 씨는 포루스럼하고 하얗는데 그 씨를 빻으모 벌건 가리가 나오는 기라. 하모, 가리 색깔이 벌겋제. 그 가리를 체에 몇 번씩 거르모 밀가루 같다. 그게다가 쑥을 찧어 섞어 버무리서 커다랗게 만들어 찌거든. 그게 쑥개떡이라. 그게 너무 맛있어 보이제. 그래서 우리 어매 몰래 솥에 있는 밥을 한 그릇 가져가서 개떡하고 바까서 묵었다 아이가. 참 맞을 짓 했제.

어떤 때는 칡가리 수제비하고 밥하고 바까 묵기도 하고…… 아이고, 칡은 크기가 내 다리만 하다. 큰 칡을 도구통에 넣고 찧어서 물에 담가 놓거든. 시간이 지나모 밑에 칡가리가 가라앉는다. 그라모 물은 버리고 가라앉은 것을 돗자리 펴고 그 위에서 말린다. 그기 칡가리다. 그 말린 가리를 반죽해서 밭에서 나는 푸성귀를 섞기도 하고 그냥 칡가리만 갖고 반죽해서 뚝뚝 뜯어 끓는 물에 넣어 끓이모 수제비 아이가. 칡수제비는 시커멓다. 암만 생각해도 그리 맛있는 거는 요새까지도 별로 없는 것 같네.

칡 알제? 그 칡이 가리 칡도 있고 물 칡도 있다. 가리 칡은 꼭 생긴 게 고구마 같다. 이 칡이 큰 거는 참 크다. 웬만한 사람 다리만 한 것도 있고, 더 큰 것도 있다. 큰 칡은 손으로는 못 떼내고 톱으로 자르는데, 그때 옆에서 보모 칡가리 날리는 게 보인다. 이 가리 칡은 가리가 많아서 묵고 나모 입안이 터분한데 달착지근한 게 맛은 있다.

물 칡은 가리 칡보다 좀 작은데, 이거는 그냥 손으로 죽죽 찢으모 찢기거든. 입에 넣고 씹으모 물하고 찌꺼기가 입안에서 따로 논다. 단물만 빨아묵고 찌꺼기는 뱉아 내지. 그때는 묵는 게 귀해서 그런 것도 맛있었다. 요게 성심원의 클라라의 집에 있을 때 박군이 칡을 참 잘 캤다. 바로 그 옆이 산이거든. 툭하면 산에 가서 칡을 캐오는데, 참 잘 캐오더라.

우리 집이 있던 거기는 한 열대여섯 가구가 살고 있었다. 내가 시방도 한 집 두 집 셀 수 있다. 논이 거의 없었는데, 아마 한 집 정도 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란데 우리집에는 쌀밥이든 보리밥이든 항시 밥이 있었다. 그 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애를 썼겠노 싶다. 논이 거의 없다보니 주로 강냉이하고 고구마를 마이 키웠다. 강냉이랑 고구마 참 마이 묵었다. 지금은 고구마 안 묵는다. 안 묵고 싶다.

바닷가에는 언제나 염소가 있었다. 그 염소들은 바닷가 바위 위를 폴짝폴짝 다님시로 여게저게 풀을 뜯어 묵다가 희한하게 해 지모 들어오는 기라. 산에는 소가 있고 바닷가에는 염소가 있는데, 해가 안 떨어져도 비가 오모 들어온다. 짐승도 생각은 있는 기라. 비라도 올라고 구름이 끼이모 섬들이 끝도 없이 가물가물하제. 실눈을 뜨고 봐도 섬은 기냥 가물거리고 있는 기라. 날이 맑으모 대마도가 아른아른 비치고, 어떤 때는 훤하게 보이기도 하고……

그 산이라도 그대로, 그 바다라도 그대로 있겄제. 나는 이리 변해도 그 산은 그 바다는 안 변하고 그대로 있겄제. 사람들은 나를 모린 척 해도 그 산은 그 바다는 나를 기다릴 것 같다. 내 친구들은 아즉도 살아있을까. 이때쯤 되몬 동백꽃도 따 묵고 했는데…… 커다란 동백꽃을 따서 빨아 묵으모 새콤달콤하다. 동백꽃 안에 고인 물을 빨아 묵으모 새콤달콤해.

미처 꽃이 되다 만 동백꽃은 뒤꽁지가 목화솜처럼 부풀어 있거든. 말하자모 사람으로 치모 장애자라. 씨가 온전하게 못돼서 장애자가 된 기라. 거기를 베어 묵으모 참 달다. 좀 새콤하기도 하고, 그 맛이 생각난다. 같이 꽃을 따 먹고 뛰놀던 내 친구들, 영이, 성이, 동열이, 재열이 다 거기 살고 있겄제. 나만 여게 있다. 친구들 이름은 그대로 적지마라. 갸들한테 해가 가모 어짤기고. 친구들 이름은 바리게 적지 마라.

우리 동네에 나무소년이 있었다. 그 이름은 내가 그냥 그리 불렀다. 열서너 살 쯤 우리 동네로 이사를 왔는데, 지지리 가난했다. 맨날 지게 지고 산에 가서 나무 해 와서 그 많은 식구를 멕여 살렸다. 나는 학교에 갈 때 갸를 만나고는 했는데, 내가 머리를 푹 숙이고 지나치고는 했다. 마음이 참 안 됐더라고. 아부지는 병들어 누워있고 어매는 능력이 없고, 어린 여동생만 둘이 있었다. 그리하니 땅뙈기도 하나 없고 맨날 산에 가서 나무 주워 와서 묵고 사니 얼매나 가난하겄노.

그런데 세상에는 법이 없다. 남의 산에 가서 나무하다가 들키모 두드려 맞고 나무도 뺏기고, 그래도 다음 날에는 또 남의 산에 가는 기라. 내가 소록도에 있을 때 우리 어매가 와서 갸가 죽었다고 안 하나. 남의 산에 가서 땅에 떨어져 있는 나무를 주워오다가 들켜서 얼매나 맞았는지 집에 와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단다.

세상에 무슨 법이 있노. 그게 법이가? 땅에 떨어진 나무 좀 주워 그 많은 식구 멕여 살리는 그 얼라가 무슨 죄가 있다고 죽을 만치 때리노. 땅에 떨어진 나무도 임자가 있는 갑다. 나는 그 아가 안 잊어진다. 자꾸 생각이 안 나나. 이상하제. 울 언니가 전에 와서 말해주는데 여동생 둘이는 그대로 그게 살고 있다카더라.

그래도 참 가보고 싶다. 근데 그기 왜 그리 안 되노. 아이고, 잊을 수가 없다. 얄궂게 왜 안 잊혀질고. 생각이 자꾸 난다. 내 고향은 거제도 함목이다. 동부면 갈고지 함목이다. 산양도 기억나고 도당포도 기억나고 구조라, 장승포도 놀러 다녔다. 쌍나리라고 있었는데…… 쌍나리는 내 외갓집 동네 이름이다. 통영다리를 지나서 한참 가모 나온다. 산을 타고 돌아가야 나오는데 산비탈이라서 돌이 떨어지모 그대로 바다에 첨벙하고 떨어진다. 그리 멀고 험한 동네도 외갓집이라고 힘든 줄 모리고 걸어서 놀러 다녔다.

건강하던 그 때의 내 이름은 막딸이었다. 언니 둘하고 나까지 연달아 딸이 태어나니까 우리 집에서는 이제 딸은 그만 놓으라고 막딸이라고 불렀는데, 내 밑으로 남동생이 태어났다. 나는 이름을 막딸로만 알고 있었는데, 울언니하고 소록도에 가서 아부지가 서류에다가 ‘추자’라고 적더라. 그때 알았다. 내가 추자, 양추자인 걸. 모리제, 원래 추잔데 아들 놓으라고 막딸이라 한긴지 이름이 없는데 적으라 하니까 ‘추자’라고 적은 긴지.

새로운 글을 시작하며[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

새로운 글을 시작하며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지리산 자락에 성심원이 있습니다. 한센인들이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자들과 수녀, 그리고 사회복지사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모여 살고 있는 곳입니다. 마을이 한창 번성할 때에는 한센인만 600여 명에 이르렀지만, 지금은 생의 끝에서 150여 명의 한센인과 수십 명의 장애인이 모여 함께 살아갑니다. 성심원이 있는 곳의 원래 지명은 ‘풍현마을’입니다. 뒤로는 지리산이 있고 앞으로는 경호강이 흐른답니다. 그리고 성심원 내의 그 어딘가에는 지리산 둘레길로 들어가는 오르막 길이 있습니다. 대성당 앞에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벚나무가 있지요. 성심원의 옛모습을 보려면 조금은 가파른 지리산 자락을 잡고 올라가야 하지만, 이 벚나무는 성심원 입구에 있는 철선과 함께 성심원의 오랜 시간을 말해줍니다.

이 글들은 성심원에 계신 한센인들의 구술을 옮긴 것입니다. 그 분들의 삶은 좀 더 건강하고 좀 더 편안한 삶을 추구했던 비한센인들과 전체 국민의 안녕을 염려했던 정부 정책에 의해 훼손되고 소실되었지요. 그럼에도 그 분들은 가파른 지리산 자락에 몸을 숨기기도 하고 경호강물에 울음을 삼키기도 하면서 모진 세월을 견뎌 왔습니다. 이제 그 분들에게 남겨진 시간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의 삶을 기억하고자 이 글들을 씁니다. 기억하는 이 없이 마치 처음부터 있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그렇게 그 분들을 떠나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