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비오스 화산의 문둥이들 [이재원의 노동이야기]-13

베스비오스 화산의 문둥이들

 

이 재 원(한철연 회원)

 

지하철을 타면 귀신같이들 알고 자리를 비켜준다.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꼭 필요한 때에만 불러 쓰고 버려도 되는 목수가 되었다. ‘너는 나이가 들어서, 어차피 장기간 일 할 처지가 못되는 목수이다’, 라는 뜻으로 땜빵 해달라는 말을 받아들인다. JJ가 기존 목수 세 명이 빠져나갔으니, 땜빵해 달라고 연락해 왔다. 나 외에 L씨가 땜빵하러 갔다.

P 하천 수중보, 도로 쪽 벽체 공사이다. 가을 바람은 좋고, 주변 경치도 좋다. 옹벽은 양 끝은 1미터, 중간 3미터, 길이 약 100미터이다. 그 중간에 하천을 가로지르는 보를 만들 것이다. 옹벽 높이 상부는 30센티미터, 하부는 헌치, 헌치 위로 40센티미터이다. 아래, 위 두께가 달라서 거푸집을 지탱해 줄 규격품 타이가 없다. 이런 경우 막 타이라고 해서, 거푸집 양 족을 관통시킨 기다란 쇠 볼트 양 족에 나비너트로 거푸집을 고정시켜 인장력을 유지하는 공법을 쓴다. 나를 부른 사람은 JJ였으나, “전주 이 씨 적손”이라고 자기를 소개하는 이와 손 맞춰 일했다. 바탕 콘크리트는 이미 완성되었다. 우선 바탕 콘크리트 위에 천변 쪽 직선 옹벽 폼을 짜 올렸다.

그 다음에는 땜빵 두 인간이 손 맞춰, 벽체에 가로, 세로 철봉 지주대를 세우는 작업을 했다. 우선은 가로 지주대를 반생이로 고정시킨다. 그 다음에는 세로 지주대를 막볼트 양 쪽에 세워 역시 반생이로 고정시킨 후, 막볼트를 조여주었다. 그 다음에는 보가 일직선이 되도록 ?’도리’를 잡아주었다. L은 벽체 위로 올라가서 추를 본다. 나는 터파기 한흙 위에 비스듬히 ‘도다이’, 지주터를 설치한 후, 지주터와 벽체에 철제 서포트를 걸치고, L의 신호에 따라 시우나 빠루를 이용해 수직이 되도록 서포트 밑면을 밀어준다.

 

1. 개발의 평가 기준, 그리고 악인들

한철연 논술학교 시절 예상에 없었던, 그리고 당시로서는 짭짤한 수입 덕분에 방학 때마다 이곳 P하천 상류, 물 맑고 산 좋은 곳에서 지냈다. 동네 청년과 어울려 물고기 잡고 버섯 따고 몸에 좋다는 약초 캐어 먹었다. 지금도 그를 따라다니며 배웠던 송이버섯 있는 곳, 싸리버섯 있는 곳, 더덕 있는 곳을 찾아갈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산불이 나서 소방용 헬기가 뿌린 소화제 때문에 그 산에서 나오는 것들을 먹을 수 없다. 물고기 잡는 것도 특이했다. 밤에 랜턴을 물에 비추면 물고기가 돌 틈에서 자고 있었다. 청년은 톱 끝으로 중택이를 가격했다. 중택이 넣고 끓인 라면은 진미였다.

처음 P보의 용도를 들었을 때에는 ‘보가 만들어지면 물놀이하기 좋겠다’라고만 생각했다. 얼마 전에 여행했던 연천강 보도 생각 났다. 사람들이 연천보 근처 물 맑은 곳에서 텐트 치고 야영도 하고 낚시질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왜 수중보를 만드는지 궁금해졌다. 물은 흐르는 것 아닌가? 농업 용수를 쓰기 위해서 만드는 보라면 좋다. 시민들에게 맑은 수돗물을 공급하기 위한 것이라면 더욱 좋다. 그러나 4대강 사업에서 보듯, 입찰 업체들이 담합하도록, 오직 기업들의 이익만 챙겨 주고 녹조 라테를 만들었으되 아무 쓸모 없는 흉물을 만드는,? ‘삽질’을 위한 삽질이라면 공무원들은 “제발 놀아야 한다”.

개발의 논리가 ‘발전’이라는 수식어로만은 안 된다. 어떤 개발이든, ‘이 개발에 의해서 어떤 공익이 있는가’를 따져야 한다. 거대 토목 공사들, 이를테면 김제 만경제방, 인천 영종도 간척사업, 오이도 제방, 천수만 간척사업을 보자. 서해바다 곳곳을 틀어막은 제방들은 물고기들을 멸절시켰다. 이들 사업들이 공익이 있는가의 여부는 아예 따지지 않았다. 공익 보다는 거대 재벌들에게만 이득을 주었다. 원주민들은 생계 터를 잃어버렸으며, 국민들은 자원을 잃어버렸다.

P천의 보는 어떤 공익이 있는가? 이 곳 도시는 거대 담수호에서 수돗물을 끌어온다. 지금가지 농업용수는 해결되고 있었다. 보가 세워지면 보 아래 동네는 생활용수가 새 물로 희석되지 못하여 썩은 냄새를 풍길 것이다. P천은 거대 도시를 관통해 흐르기 때문이다.

공익과 관련해서 또다른 질문을 하게 된다. 지난 정권 시절 해외 투자 캐나다 유전은 1조원에 서사 900억에 되팔았단다. 기업은 이윤에 매진한다고 해서 어떤 일이든 이윤을 위한 행위는 묵과할 수 있는가? 누군가가 부정을 저지른 것이 확실한데, 이런 것들을 여론화 하지 않고 수사도 하지 않는 이 사회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더구나 해외 투자 43조원이란다(정관용의 박완용의원 인터뷰: “그리고 얼마 전에 한신대의 경제학과 고기영 교수가 자원외교 실적을 쭉 정리를 해 봤더니 총 43조 원이나 들였었는데 별 결실이 없다, 이런 분석을 했거든요”(노컷뉴스, CBS인용)>.

누군가가 빼돌린 것이 확실한 거래조차 언급하지 않는 이 책임을 최우선으로 져야할 사람들은 신문방송과 그 기자들이다. 이들이 정보에 가장 근접해 있으며, 말해야 하는 것이 그 임무임에도 보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이들이 가장? ‘악인’이다. 사실을 말해야 하는데 침묵한다면 그는 악인임에 틀림 없다. 또한, 4대강 사업을 적극 홍보한 학자연 하는 교수들이 악인이다(이들에 대해서는 ([한겨레 21], 제 949호 참조).

 

2. 발명

나비 몰트 조이기는 답답하다. 빨리 해야만 일 능률이 오르지만, 아무리 부지런하고 손재주 있는 사람도 한계가 있다. 일명 ‘타타기’라 불리는 기계도 있다. 그러나 이곳 현장에는 그 기계가 없었다. 자신을? ‘전주 이 씨 적손(嫡孫)’이라고 소개하는 이 씨가, “각목으로 돌리는 거 만들어올까?”, 한다. 나는 무심히, “그래. 만들어 와” 라고 대답했다. 아, 그가 만들어 온 이 연장이 쏙 맘에 들었다. 각목을 잘라 너트에 맞게 홈을 판, 간단한 이 연장은 요령 있게 사용하면 손보다 몇 배 빨랐다.

의식의 흐름은 발명의 기쁨과 함께 기억에 깊이 자리잡은 상처들를 발라내었다. 그것은 미장들이 쓰던 보온 몰탈과, 이를 특허 낸 그 제품과 연관된 기억, 그리고 부끄러움인지, 상처인지, 세태에 따라 막 산 것인지, 억압인지 알 수 없는 내 상처들과 연관되어 있다.

올 봄, 공중파 방송에서 아파트 부실공사 문제를 다루었다 특히 실내와 실외온도 차에 의해 시내 내벽에 물기가 생기는 결로 문제를 심각히 고발했다. 결로는 곰팡이를 증식하고, 원인 모를 호흡기 질환의 원인이 된다고 했다

신축 아파트 현장은 입주 예정 주민들이 의심하는 표적이 되었다. 동호회를 구성하고, 자기들이 입주할 아파트 내부 공사 현황을 사진 찍어 게시판에 올리면 서로 토론들이 벌어진다고 했다.

아파트 공사 담당자들은 현장에 들어오려는 주민들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이들에게 공사 현장이 인터넷에 회자된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주민 통제는 일당에 비해 비교적 쉬운 일이었다. 용역회사에서 뽑힌 나를 포함한 네 명을 기존 경비원들과 함께 현장 주 출입구에 배치했다. 나는 입주 예정인들의 질문에 잘 대답할 수 있었다. 방수 전문회사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시공 방식으로는 결로를 피할 수 없다고는 아가리가 찢어져도 말 할 수 없었다.

콘크리트 외벽은 겨울 냉기를 전달할 수밖에 없다. 전에, 그러니까 지금 특허되어 상품화된 보온 몰탈이 나오기 전, 직접 집을 짓는 이들 중에 건축에 감각있는 이들은 몰탈 시멘트와 스티로폴을 부수어, 결로가 생길 수 있는 부분들을 세심하게 발라줌으로써 결로를 해결했다. 보온이 되면서, 냉기들은 차단되면서 습기가 생긴다 해도 다시 외벽이 건조해 지면 보온 방수층에 섞인 몰탈을 따라 다시 습기가 분출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미장들이 스티로폴을 부수어 몰탈과 섞어 바르는 것을 흉내내어 특허를 내었다. 특허품 공장을 세워,? ‘보온 몰탈’이라는 상품으로 대단한 매출을 올리고 있다.

현재 공사 방식은 스티로폴을 내벽에 붙여 단열효과를 노리지만, 세밀하게 작업을 하지 않는 이상 천정 외벽, 슬라브와 벽체 부분이 만나는 부분의 결로를 피할 수는 없다. 이 현장에서도 보온 몰탈을 쓰지만, 엉뚱하게도 화장실과 벽체에 스티로폴을 댈 수 없는 부분에만 발라서, 반듯하지 않은 벽체의 보양 효과를 위해서만 쓰고 있었다.

 

3. 상처들

아파트 준공이 가까워지면서 조경 팀이 활발히 작업을 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조경 작업을 눈여겨 보앗다. 어떻게 저토록 큰 나무들을 옮겨 심어서 살릴 수 있을까?

3년 여에 걸쳐서 고향집 앞 밭에 나무를 심었다. 나무를 키우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잘 크는 나무가 있고, 키우기 어려운 나무가 있었다. 특히 감나무를 수십 그루 살리지 못했다. 나무 심는 법을 묘목 상회에서 배워서 심었으나, 묘목이 잘못 되었는지, 아니면 심는 방법이 틀렸는지, 살리기 쉽지 않았다.

조경팀? ‘부반장’으로부터 이런 저런 조경 지식을 주워들었다. 식재에는 무엇보다도 나무가 물을 빨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식재와 전지, 두 가지가 중요하다. 전지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옮겨 심은 나무는 뿌리를 잘랐다. 따라서 뿌리가 빨아들여 공급해야 하는 나무 전체의 부피를 줄여주어야 한다. 가지의 전지 요령은 손바닥, 사람 손바닥 모양을생각하며 잘라 나간다. 큰 나무를 심는 경우 약 절반 정도를 잘라준다. 그 다음은 물이다. 적어도 두 차례 흠뻑 물을 줘야 한다.

전지하는 노인이 유난히 내 눈을 잡아 끌었다. 사다리를 이용해? ‘간신히’ 나무를 기어오르는가 싶다. 그러나 나무에 올라간 순간은 사람이 달라진다. 나무 하나를 모두 해결할 때까지 내려오지 않았다. 쉬는 것도 나무 위에서, 참도 나무 위에 걸터앉아 먹었다. 노인의 행동을설명하는 조경회사 현장 소장의 설명도 마음에 들었다. “나무와 대화하는거요, 저 노인은.” 이라고 말하고는, “나무와 대화해 보지 않았어요?”라고 나에게 반문했다.

나도 나무와 대화해 보았다. 아니, 나무를 숭배라고는 못해도, 두려움을 느끼기는 했다. P천 상류, 호두나무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산을 오르다 보면 거대한 참나무를 만나게 된다. 하늘 높이 드리운 나무의 어깨는 어느 산중턱의 산어깨와도 닮아있었다. 자연이 주는 숭고함이란 말로 표현 불가능하기 때문에 신비의 언어를 필요로 한다. 인간은 그저 나무 밑에서 입만 벌리고 있을 뿐이다.

조경팀 일이 바빠지자,? ‘부반장’은 나를 자기 팀에 불러주었다. 나는 즉각 주민통제 일을 그만두고 조경 팀에서 일했다. 그 현장 조경 일이 끝날 때까지 일을 ‘배웠다’.

조경 팀에 합류하기 전, 주민 통제 일이 쉬웠던 탓에 계속 일을 하러 나갔다. 시간을 보내는 것이 문제였다. 메모를 시작했다. 일종의 치유책으로 노동의 세계에서 정신적으로 상처받은 일들부터 메모하기 시작해서, 소설 쓸 재료들까지 두 권에 기록했다.

사건 후 몇 개월이 지난 지금도? ‘지나치게 참혹해서’ 아직도 세월호 이야기는 못 하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 사건 직전 까지는? ‘노동과 일상의 신비’ 라는 주제로 에세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내장팀 천정 공사 현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임금이 작다거나 일이 힘든 것이 주는 상처들 이외에 또다른 상처들도 남는다. 못 볼 것을 보거나 못들을 이야기들도 듣는 상처들 말이다.

신참이 기존 팀원들에게 밥한 끼 사는 것은 여반사이다. 친목 속에 현장 부드러움이 생기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물산 풍부한 이곳 장날을 잡아서 내가 한 턱 냈다. 알을 품은 쭈꾸미, 뻘밭처럼 부드러운 꼬막, 식감 좋은 갑오징어를 사서 숙소에서 한 판 벌렸다. 일차가 있으면 이차가 있는 법이요, 불행이도 나에게는 유흥비가 있었다. 노래방에 갔다. 아가씨들이 왔다. 나는 맥주에 취했다. 주인에게, 가장 이쁜 아가씨를 맨 나중에 들여보내라고 했다. 우선 고참들이 손짓으로 아가씨들을 자기 옆에 앉혔으며, 가장 예쁜 아가씨가 내 옆에 앉았다.

화장실을 갔다가 일행의 방을 간신히 찾았다. 실내가 어두웠다.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켰다. 그토록 허겁지겁, 사람들은 주둥이를 맞대거나 젖을 더듬거나 보듬어 안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에 절망이 온 듯한 몸짓들이었다.

“베스비오스 화산이 폭발했다. 용암이 흘러내리자 그곳 섬에 갖힌 뭉둥이들은 피할 곳을 찾아 바다로 뛰어들었다. 이것이 허무하다는 것을 안 문둥이들은 다른 방법을 찾았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짝을 지어 그 짓을 하기 시작했다(윤흥길).”

웬일인지, 노동판의 사람들은 정상적인 가족이 없다. 오죽한 사람들이면 이토록 미친듯이 행동할까 만서도 그들은 자기들의 고통만 생각한다. 오직 자기 자신의 고통만 고통으로 인식할 뿐인 사람들은 다른 모든 것은 중요치 않다. 인간은 마치 쾌락에 열중 하듯이 자기 고통에 열중한다. 인간을 극단적으로 개인화시키는 이 고통의 밤에는 죽음이 차라리 나을른지 모르는 절망 뿐이다.

 

4. 극단적 개인들과 분노 없는 관용

P천 보 이틀 일하고 28만 8천원을 받았다. 첫 날, 일이 끝나자, 오야지가 일당을 나누어주었다. 이것은 아주 묘한 현상인데, 당일 돈 주는 대신 용역비 10퍼센트를 일당에서 떼고 주었다. 막걸리 잔을 앞에 두었을 때 JJ가 말했다. 오야지가 말하더란다. “내일부터 사람 줄이자….” JK는, “안 된다. 인원 줄여 일하면, 남은 사람들이 고생하게 된다”고 말했단다.

기껏 2-3일이면 끝나는 공사이다. 오래 현장에 붙어있는 사람은 오야지와 친분이 있어 함께 다닐 것이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노동자는 일회용이다. 말 그대로 일용 노동자이다. 헛…

며칠 여행했다. 그 와중에 두 사람과 인터뷰를 했다. 담뱃불을 빌리며 넌지시 말했다. “이거 2천원 올라, 4천 7백원 하면 담배 피워야 되요, 끊어야 되요?” 대형 마트 지점장이라는 이는,“‘복지를 위해“ 세수가 필요하니 담배 피워야 한단다. 나는, ”이명박이가 숨켜논 것을 뺏어서 복지비 하는 게 났지 않나”고 물었다. 상대는 내가 묻지도 않은 말을 잘도 풀어주었다.

“사대강 사업을 지금 당장 평가할 수 없다. 몇 십 년 몇 백 년 후에 나타난다. 선거 공약의 이행 차원이었으므로 국민이 이 사업을 찬성한 것이다.”

공정무역 커피코너에 계신 분에게 앞 인터뷰 걸과에 대해 묻자,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원래 선거 공약은 운하건설이었다. 반대가 심하자 공약을 철회했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 밀어붙인 것이 사대강 사업이다.

몇 십 년 몇 백년 기다릴 필요 없다. 선진국에서 한 경험을 우리 상황에 간접경험으로 선취할 수 있다. 민주주의란 공론의 장을 활성화해야 하는 것인데, 이것이 없이 밀어붙인 결과가 사대강 사업이다.”

침묵을 강요당하는 고통이 있다. 정치적 폭력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고통에서는 그것과 거리를 두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브레히트). 격정 없는 이는 그리스인의 운명의 신 ‘모이라’, 프로이드의 무격정, 또는 상류층의 이상으로서의 운명의 여신 ‘아낭케’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저항을 거부함으로서 살아남으려는 개인화된 이 고통의 밤에는 변혁은 없다. 그 반대의 편에는 양심, 행동하는 지성이 있다. 거리를 유지함으로서 살아남는 이들은 고통 가운데에서 쾌락을 보는 순교자들의 매저키즘과 같다. 그들이 침묵 속에서 우주를 보든 말든, 프랜시스코 교황의 말대로 “고통당하는 이들 앞에 정치적 중립은 없다”는 행동 원칙이 우선이다.

 

 

이윤추구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의 생산활동 [노동이야기]-12

이윤추구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의 생산활동

?[노동이야기]-12

 

이 재 원(한철연 회원)

?1.?주인과 노예

겨울의 막바지,?봄이 오고 있다. P건설현장이다. H?인력회사에서 열 명 정도 함께 갔다.

아침 조회가 끝난 후 조별 모임을 했다.?나는 헬멧과 안전벨트는 이곳 하청화사에서 받았으나 각반을 준비하지 못했다.?나는 반장에게 딱 걸렸다. “당신은 돌아가.”?라고 반장이 말했다.?나는, “알겠습니다.?좀 여쭙겠습니다”라고 운을 떼었다.?반장이 말해보라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생존할 권리가 있지요?”?다시 반장이 수긍했다.?나는 거칠게, “돌아가라 하면 나는 무었을 먹고 살지?”라고 말했다.

내 딴에는 인권과 정의에 대해 말 한 것이었다.?인권 차원에서 모든 이는 생존권이 있다는 것,?이에 따라서 노동할 권리를 빼앗는 것이 정의롭지 않다는 의미였다.?그리고 사람을 기계의 부속품쯤으로 대하는 현실에 대한 저항이었다.?하기야 어떤 이들에게는 노예가 넘쳐나는 현실에서 더 이상 노예가 필요 없을 것이다.

그 날은 어찌 어찌 일했다.?함께 일하러 간 노인으로부터 들었다.?전에도 한번 모두 쫓겨 온 적이 있었다 한다.?그 와중에도 내 편을 들어 준 사람이 있었단다.?그러자 반장이, “모두 돌아가고 싶으냐”라고 했단다.?노인은 그 소리를 듣고,?또다시 쫓겨 가는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단다.?그 날은 분위기 썰렁해서인지,?모두들 쉬지도 않고 일했다.

나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좋다.?노동은 인간 구원의 수단이자 해방의 도구로서,?노동을 통한 자기실현 과정에 있는 인간의 자기표현을 보여주는 낭만적인 글이요,?노동이 인간을 어떻게 소외시키면서도 인간을 고양시키는지 말해주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싸워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의 노예가 된다.?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처럼 비취진다.?주인이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노예는 주인에게 봉사한다.?그러나 어느 순간 변증법적 역전이 이루어진다.?노예는 노동하면서 물질 법칙을 알게 되고 자연을 이용할 줄 알게 되면서?“일종의 ?자유(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되찾게 이러한 변증법적 전환에 의해서 노예의 노동은 노예에게 자유를 되찾아 준다.?그러나 주인은 물질시계의 혹독함을 알지 못한다.?왜냐하면 그는 자신과 세계의 중간에 노예를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노예는 노동을 통하여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된다.?그러나 주인은 노예 없이는 살 수 없는,?노예의 노예가 된다.

며칠간의 아파트 천정공사 무임노동과 일주일간의 저임금 노동도 이 변증법을 믿기에 시작한 것이었다.

외국인?L과 둘이서 지방이서 일하는 천정 시공 작업 팀에 합류하기로 했다.그러나 우리를 일 시켜주기로 한 팀장?Y의 제안을 듣고,?현명한?L은 즉시 자기는 일을 포기하겠다,?돌아가겠다고 말했다.

팀장은 처음 며칠간은 무임금 노동으로 일을 배우라고 했다.?그것도 우리가 목수이므로,?일을 이해하기 때문이라는 전제였다.?일을 배운 다음에는 때려먹기ㅡ일 한 만큼 공임을 받으라고 했다.

그러나?L이 돌아가자 상황이 변했다.?나는 졸지에 팀장?Y의 시혜대상이 되고 말았다.?나는?Y가 주는 대로 임금을 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2.?제골치기,?일명 때려먹기의 역사

농촌의 작업은 예전에는 모두 협동 작업이었다.?논의 김을 맨다 하자.?어렸을 때 본 광경이 눈에 선하다.?어디에서 그처럼 모여 들었는지 마을 앞 논들에 사람들이 가득,?일렬로 늘어서 이 논 저 논 할 것 없이 한꺼번에 김을 매어 나갔다.?그리고 내가 노동할 나이가 되어서는 모를 심거나 벼를 벨 때,?물결치듯 작업해 나가는 것을 배웠다.?앞 물결이 나아가면 뒤 물결이 밀려오듯,작업속도가 늦은 사람을 옆 사람이 조금씩 도와주다 보면 작업 대형이 비슷해진다.

고향 농민들 중에는 객지로 품을 팔러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그들이 배워온 작업방법이?<제 골 치기>이다.?누군가가?“제골 치기 해보자”고 제안 한다면 작업하는 사람들은 밭두둑 하나씩 맡아 오직 자기가 맡은 작업만 해 나간다.?다행히 이런 작업 방식은 그저 장난에 그쳤다.

사진-이재원

사진-이재원

제골치기는 지주들이나 마름들이 작업농민 등골 빼 먹기 위해 개발한,?농민 노동의 작업능률을 올리기 위한 방식이다.?지금도 남아있는 소작농 계약서에서 추측할 수 있다.?남쪽 지방의 지주들이 소작농과 맺은 계약에 지주는 소득의?7할을,?소작농은?3할씩 나누게 되어 있다.

풍성한 대지의 소작도 정작 당시의 농민들에게는 혜택이 아니라 저주였다.그토록 민란이 자주 일어난 것도 이유가 있다.?그리고 떨거지,?떼거지의 역사도 이런 소작 방식 때문이었다.?풍년 들면 소득의?3할로 근근이 연명하지만 흉년 들면 농민들은 먹을 것이 없다.?굶어 죽으나 난리를 일으켜 죽으나 죽는 것은 매 한가지 아닌가??또는 저항 대신 흉년 들지 않은 동네로 줄지어 얻어먹으러 고향을 떠나간다.?그리고 해를 넘겨 다시 농사지을 철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온다.?지주 일가의 신화 뒤에는 이처럼 농민들의 등골을 빼 낸 역사가 있다.

제골치기가 건축 작업 현장에 들어온 지는 정확치 않지만 오래 된 모양이다.일본인들이 말했다는,?노동판에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조선 놈들 우께(도급노동)?주면 죽을까봐 겁난다.”

어쨌든 때려먹기는 인간개인의 능력과 구성원들의 합의와 협동을 고려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건축 현장에서는 원청에서 하청으로,?하청에서 각 노동자에게?<때려먹기>식 노동 계약이 이루어진다.?벽돌공의 도급 노동은 한 장당?150원,?미장은 한 석방 얼마,?목수 내장 공사 한 세대당 얼마,?이런 식의 때려먹기가 현장의 현재 모습이다.?그 분야에서 기능이 떨어지는 사람은 자신의 밥 값 치르기에도 바쁜 구조가 때려먹기이다.

 

3.?천정 시공

천정 시공은 시간 가는 줄 모른다.?끊임없이 생각하면서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무척 복잡하지만 방 천정 공사 작업 순서를 간단히 요약해 보련다.

우선 각재와 석고보드 등,?작업 재료를 작업 장소에 옮겨놓는다.

시공 레벨(높이)?지접에 먹금을 놓는다.

방의 커튼 박스를 짜,?먹선에 맞춰 창틀 위에 고정시킨다.

먹선을 따라 벽체에?3cm?각재로 반자 돌림을 고정시킨다.

반자틀을 기준으로 해서 우물 정자 형 반자틀을 만들어준다.

천정에 콘크리트에 못 밖는 타카를 사용하여 달대를 달아,?반자틀을 고정시킨다.

반자틀에 석고보드를 붙인다.

거실 천정 작업은 방 천정 작업보다 한 공정이 더 있다.?등받이 틀을 추가해야 한다.

도급작업은 대개 한 세대에 한사람이 들어가서,?혼자서 작업한다.

20년 전에는 이와는 다른 작업 방식이었다.?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눈빛으로 의견을 주고 밭으며 작업했다.

때려먹기 식의 노동에는 동료도 없다.?마치 월터 하프당크의 판화?“선차”(旋車?:Tretmuuhle)1)의 노예처럼,?소외되고 고독한 인간이 반자틀에 끼어있을 뿐이다.

그림출처 도로테 죌레, 사랑과노동,박재순 역, 한국신학연구소, 1987

1) 그림출처
도로테 죌레, 사랑과노동,박재순 역, ?한국신학연구소, 1987

그것이 문제였다.?혼자 작업하는 경우,?작업자들의 이야기는,?답답하기 짝이 없다고 했다.?외톨이 작업 과정 때문일까,?작업이 끝나면 그들은?“저렇게 먹어도 사람이 살 수 있는가”,?생각이 들 정도로 소주를 마셔 댓다.

내가 효자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적어도 술 먹는 방식은 술 배울 때 선친이 당부한 것을 평생 따랐다.

<소주와 양주는 마시지 말아라.?맥주와 막걸리는 마셔라.>

왜 이렇게 나를 가르쳤는지 모르는 채 이 당부를 지켰다.?소주는 안 마셨다.한 잔에 기절한다.?선물 들어온 양주는 좋아하는 사람을 주었다(이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늙어서야 그 의미를 알았다.?소주,?독한 술일수록 중독이 빨리 된다는 것,?그리고 양주는 가짜가 많아 몸을 해친다는 의미이다.?고독하지 않다면 노동자들이 그토록 몸을 해치도록 술을 마시지는 않아도 될 것이다.

 

4.?정의에 대한 동의를 구하기 어려운 시대,?그리고 봉사노동

나는 우께,?때려먹기 천정 공사에 적응하지 못했다.?내가 기능이 떨어지고 작업 속도가 늦은 것이 큰 이유였다.?또한?6시 반에 시작해서 늦도록 작업하는 탓에 체력과 관절이 견디지를 못했다.?강도 높은 노동에 비해 내가 차지할 돈이 작았다.?능력대로 돈을 받는 사회라면 나는 때려먹기 노동자 축에 끼지도 못하는 셈이었다.?따라서 나는 노동하지만 노동자는 아닌,?이상한 존재일 것이다.

노동자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기고 죽음으로 이 사회의 부당 노동 정책에 저항했다. “부의 불균형과 노동에 대한 비정당한 대가….?이건 자본주의가 아니야.?부의 균형,?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이게 자본주의,?민주사회인데.”(고 이남종씨 메모-한겨레신문)

인간 권리,?존엄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모든 인간은 생존이 보장되어야 한다.?이것은 민주주의에 해당하는 언사이다.?이에 비해?“능력에 따라서”?분배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입장이 될 것이다.?그러나 도급 노동,?때려먹기는 외향적으로는 능력에 따라서 임금을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능력급도 아니고 인권의 입장에서 분배하는 것도 아니다.?그 출발점에서 원청,?하청,?재하청의 원환구조 끝에 자리 잡은 착취 구조가 있다.?애저녁에 공평한 분배 구조가 아니다.

이러한 시대에 사회 구성원들 간에 정의에 대한 동의 구하기가 참으로 어렵다.?출발이 공평하지 못한데,?계약 자체가 불평등을 가진 채 출발하는데 누가 이러한 노동 계약을 정의롭다고 할 것인가?

나는 극악한 시대에 있었던 노동 운동에 대해서 생각해본다.?대 공황기 미국에서 있었던 사례이다.?캄보디아 한국 회사에서 저임금 노동자에게 총을 쏘았듯이,?굶주린 노동자들에게 회사가 고용한 총잡이들이 총알 밥을 먹이던 시대(포드 자동차)에, <노동 나눔 운동>이 있었다.?이 구성원들은 노동이 필요한 사람에게 무상으로 일을 해 주었고,자발적으로 녹색혁명을 이루는 노동에 참여했다.?봉사 노동이었지만,?이 노동이 사람들을 구했다.?뉴딜 정책은 이처럼 일하려는 사람들의 의사를 반영한 것이었지,?거저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봉사노동의 분야는 지금도 무궁무진하다.?병든 사람,?늙은 사람 등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돌봄 노동도 있다.?또는?<아름다운 가계>에서 보듯이,?소외된 이들을 돕기 위한 봉사노동도 있다.?문제는 봉사노동에 대한 최소한의 생활비를 누가 제공할 것이냐의 여부이다.?간신히 이 문제에 대해 한마디 한다면,?정신을 나누는 노동이 있다면 자기의 소유를 나누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마르크스의?<발췌>에서 보듯,?이윤추구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활동은 우리를 삶의 표현으로,?인간적인 욕구 충족으로,?인간 공동 본질 실현으로 인도한다.?이는 변증법적 구조를 갖는 논리이다.

이윤추구로서의 노동이 아니라면,?각 사람은 노동을 통해 자신과 타자를 상호 인정하게 된다.?왜냐하면 노동하는 사람은 노동을 통해 자신의 개성을 표현할 것이고,?이처럼 자기 표현으로서의 노동은 그에게 창조하는 기쁨을 맞볼 것이다.

상대방은 이 사람의 노동의 생산물을 향유하며,?기쁨을 느낀다.?모든 창조하는 이는 바로 이처럼 누군가가 자신의 생산물을 기꺼워하는 것에 기쁨을 느낀다.?이것이 노동하거나 창조하는 자의 진정한 욕구이다.

따라서 노동하여 창조한 사람이나,?이 생산물을 향유하는 사람은 상호간의 존재를 보충해 주는 사람이 된다.?서로서로 각 사람의 사유,?사랑 안에서 상호 승인한 셈이다.

극좌 [노동이야기]-11

극좌 [노동이야기]-11

이 재 원(한철연 회원)

 

 

 

1. 극우와 극좌

아시시의 프랜시스의 경구를 실천할 수 있을까?? “필요한 것은 네가 써라. 남는 것은 타인의 몫이다.”

타인 지배와 관련한 또 다른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성가대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한 젊은 수도사가 그에게,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 악보집을 자기 개인 소유로 하기를 청했다. 프랜시스가 말했다.

“그대는 지금은 책 한 권을 소유하기를 원한다. 그 다음에는 다른 것을 소유하기를 원할 것이다. 나중에 그대는 이렇게 말 할 것이다. ‘형제여, 이리 와서 이것을 나에게 집어 다오.'”

프랜시스는 소유욕이 지배욕과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꿰 뚫어본 셈이다.

지배와 소유의 원칙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 극우적 성향이라면 소유와 지배에서 벗어나는 성향은 극우의 반대인 극좌가 틀림없다. 노동 현장에는 극우적 성향이 지배적이다. 만약에 극좌적 성향의 노동 현장을 만들 수만 있다면 좀 더 인간적인 노동세계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2. 팀장들

겨울에 목수일 얻기란 대단히 어렵다. 팀장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 이를테면 일 잘 하고 고분고분 자기 말 잘 듣는 사람들만 뽑아 데리고 간다.

나는 팀장이 좋아할 목수는 못 된다. 일찌감치 인력회사 사장에게 조공일 하기를 지원했다. 월급소장보다는 어대충 귀여운 용역회사 여사장에게 부탁했다. 나보다 나이 한 참 어린 여 사장은 나를 “재원씨, 재원씨”하며 불러 일을 보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름 대신 내 옷깃을 끌어, 그것을 일 보내는 신호로 삼기도 한다. 가끔 농담도 한다. 이를테면 여사장이 나이 많은 사람에게 일 관계로 전화를 했으며, 그런 이야기가 화제에 오를 경우, 나는 “노인에게 전화해서 뭣에 써요? 젊은 남자에게 전화해야지–” 라는 식의 개그다. 성적 수치심을 주지 않는 한도에서 농담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뿐만 아니라, 약간 즐거운 상상도 가능하게 한다.

목수만 팀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조공도 팀장이 있다. 팀장을 지명하는 것은 대개 현장의 반장들, 또는 용역회사에서 팀장을 지명하기도 한다. 현장의 입장이든 용역회사의 입장이든 팀장을 지명해야만 인력 관리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용역회사는 팀장에게 “어디 현장 몇 명”이라고 알려주면 팀장은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을 뽑아 데리고 간다. 그런데 이 팀장에 임명된 사람들의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가 심상치 않다. 두목노동자도 아니고 보수를 더 받는 것도 아닌데, 전횡을 휘두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웃과 잘 지내야 하지만, 팀장들과 잘 지내기란 나로서는 어려웠다.

이곳저곳으로 일 하러 다녔다. 오피스텔, 학교 신축, 아파트 현장에서 조공으로 일했다. 조공 일은 목수 일에 비해 힘이 딱 절반밖에 들지 않는다. 목수 일은 진을 빼지만 조공 일은 수월하기 짝이 없어서 일 년 내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진-이재원

신축 22층 오피스텔은 분양가가 평당 천만 원이라 한다. 건물주는 전문으로 오피스텔을 짓는 사람이란다. 땅을 사고 자본 있으면 건물은 그야말로 저절로 올라간다. 건축회사 하나를 지정해서 건축 계약을 한다. 이 회사를 가리켜 원청이라고 한다. 원청회사는 5데마의 하청회사와 계약을 한다. 5데마는 토목과 목수, 철근과 콘크리트, 조적을 포함한 미장을 가리킨다. 원청회사는 다시 5데마와 하청 계약을 맺는다. 건축법에는 원청과 하청만 있다. 그런데 그게 애매해서, 특수한 경우에는 재하청도 허가하는 예외 조항을 두고 있다. 지금 모든 하청회사는 재하청을 준다. 직접 고용이란 건축 관련 분야에서 [없다]. 그리고 재하청은 회사 간의 제 살 깎아 먹기의 온상이다. 경쟁의 모든 하중은 개별 노동자들이 받는다.

JH 현장은 일할 만 했다. 눈 오면 눈 쓸고, 콘 타설하면 온도를 올리기 위해 난로 불을 피워야 한다. 회사의 반장은 나에게 매일 자기 현장에 일 나오기를 청했다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할 뿐만 아니라, 노가다 짬밥(경력)이 있어서 일머리를 알아 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용역회사 팀장 YH였다. 그의 행위 – 그는 타인을 지배하는 행위를 당연시했다 – 에 대해 바른말 하자, “너는 빠져라”고 했다. 나는 그가 일 안 나오는 주말에만 JH로 일 하러 갔다. 용역회사 사장이 “아저씨, JH가요”라고 말해도 YH가 있으면 뒷짐 지고 일 하러 가지 않았다. 보고 싶은 사람 못 보는 고통이 가슴을 에듯, 껄끄러운 사람과 함께 하루를 보낸다는 것 역시 지옥임을 다 알기 때문이다.

제임스 조이스가 말하듯, 이런저런 면에서 ‘흥미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 노동자들 간에 어린 아이 같은 일이 벌어진다. P 아파트 현장에 조공으로 갔다. 이곳에 몇 번 왔다. 어느 사이엔가 상황이 변했다. 전에는 용역 팀장을 지명하지 않고 일 했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엔가 이곳 용역팀장 X가 작업지시를 하고 있었다. 정화조 해체 작업과 자재정리였다.

나는 평소대로 자재 나올 분량을 예상하여 정리할 부재의 바닥 받침목을 깔고 그 위에 품을 쌓고 있었다. 용역 팀장이, 다시 받침목 깔 장소를 지정해 주었다. 그러나 그의 지적은 옳지 않았다. 그가 지정한 장소에도 받침목을 깔아야 한다. 그러나 내가 받침목 놓은 장소에도 역시 필요하다. 지하, 지금해체작업을 하는 공간에서 부재들이 많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사정을 말하자, 그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니, 내가 하는 작업 지시를 그렇게 고까워하면 나는 어떻게 작업을 시킨단 말이오?” 말 소리로 보아 X는 외국 동포였다. 이런, 사람들이 모두 나와 X를 쳐다보았다. 아하, 나만 몰랐을 뿐, 바로 옆에 회사 반장이 지켜보고 있었다. X팀장은 반장에게 나를 고자질한 셈이었다. 반장이 작업자 전원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한 마디 훈시를 했다.

“내가 시키는 일이 못 마당하면 이 현장 안 나오면 됩니다.”

그리고 나를 지목해서 말했다.

“마찬가지로 아저씨도 팀장 지시하는 것이 맘에 안 들면 안 나오면 됩니다.”

나는 큰 소리로, “네” 라고 말했다.

Y는 경증 뇌성마비 장애인이다. 젊다. L은 고관절 환자이다. 늙었다. L은 아픈 몸을 이끌고 먹고 살기 위해 일하러 온다. 나는 두 사람 모두 함께 일 해 본 적이 있다. L과 함께 일하러 가면, 그가 힘들지 않는 일 하도록 도와주었다. 순전히 말풍선이기는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L씨, 옆에 서 있어. 내가 다 하께”라고 말하기도 했다.

P현장에서는 오늘 따라 자재를 밑에서 위로 올리는, 일명 되치기 작업이었다. 하필 Y와 L이 한 조가 되어 일했다. L이 허리 아파서 자주 쉬었다. Y는 항상 쫓긴다. 자기 신체의 핸디캡도 있어, 일 해치운 분량이 늦어지면 일하러 오지 말라는 소리를 들을까 걱정이기 때문이다. 팀장이 채근하는 눈빛을 보이자 Y는 기어코 팀장에게 L을 고자질하고 말았다.

“저 아저씨가 일을 안 해요”라고.

밥그릇 싸움이라는 말이 아주 적절한 경우가 있다. 대개 일거리가 없는 겨울에는 교대로 일 나간다. 용역회사 소장이 일 나갈 사람을 지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선착순으로 사람들을 태우는 차를 타면 일 나가는 경우도 있다. 75세의 월남 참전용사 김 노인은 아주 일찍 와서 노란봉고차에 올라타 있다. 나도 두 번 그 차에 타 보았다. 그러나 도저히 일찍 올라탈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밥그릇을 뺏는 셈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온 사람은 일을 못 나가게 된다.

일 못나가는 사람들의 스트레스는 크다. 김 노인의 가계부를 보자. 월세 30만원, 겨울 연료비 30만원, 부인 병원비, 약값, 생활비가 기본으로 필요하다.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찍 와서는 노란 봉고차에 올라탄다.

3. 두 건축회사들

학교 신축현장, 국내 굴지의 전자회사 에어컨 설치 작업에 조공으로 배치 받아 갔다. 네 명이 갔다. 용역 소장은 내게, ‘아침밥을 사 먹고는 영

사진-이재원

수증을 회사에 제출하라’고 했다.

현장에 도착해서 두 명은 기초 안전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쫓겨갔다. 그 기초안전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 신분이 불확실하다는 뜻이다. 한 명은 혈압이 높았다. 따라서 세 명 쫓겨오고, 나만 남아서 일했다. 늙은 것이 힘만 좋아서 노동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다리 한 쪽 달아 매어놓는다 해도’ 하루를 보내는 것은 일도 아니다.

일이 끝나면 용역회사에서 주는 일일 공수 싸인을 받아가야 한다. 그것을 증거로 용역회사는 파견한 회사에서 돈을 받는다. 대기업 S전자 과장은 아침밥 영수증을 보고 말했다.

“이것은 내가 판단할 문제를 넘어서네요. 일은 한명 했는데 4인 밥값에 사인해 줄 수는 없어요. 현장소장님 오실 때가지 기다려 주세요.”

소장이 왔다. 문제를 설명 듣고는 내게 말했다.

“식사 한 명 분만 싸인해 줄께요.”

현장소장에게 말했다.

“일 못하고 간 사람들 차비는 못 주더라도, 부잣집에서 숟가락 하나 더 놓으십시오.”“부잣집을 떠나서, 기초 교육 안 받은 사람 보내면 안 되는 것, 혈압 환자 보내면 안 되는 것 알면서 보낸 용역회사 잘못입니다. 용역회사 가서 받으세요.”

나는 하릴없이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대기업 P건설에서 ‘안전기원제’를 올렸다. 작업자들은 세 시 반에 일을 마치고 강당으로 모였다. 성균관 집례관이 기원제를 주도했다. 봉행, 신위봉헌, 분향, 술 올리기, 축문독촉, 그리고 참석자들의 성의 표시와 배례 순서로 이어졌다. 나도 담배 한 가치(지갑을 집에 놓고 나왔다) 놓고 배례했다.

음식을 푸짐하게 차렸다. 한 200명 충분히 먹을 만한 양이었다. 떡은 작은 트럭으로 한 차정도? 되었다. 고기와 막걸리도 푸짐했다.

기원제는 내게 익숙하다. 현장을 돌아다니며 흔치 않게 보기 때문이고, 몇 십년 전, 매 해 농민과 공장 여공 조동조합 합동 기원제를 지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이 가장 진실한 것이다. 민주주의 염원 기원제는 당시의 우리들에게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것이었다. 출근 투쟁으로 마루타처럼 매맞는 여공과 전경환이가 해 먹은 도입우 여파로 거덜 난 농민들에게 간절한 것은 민주주의였다.

젊은 농민들은 음복 후 여공들이 내 뿜는 막걸리 세례를 얼굴에 맞고는 오히려 희희낙락했다. 노-동 기원제는 가난한 사람들의 축제의 장이었고, 연대의 장이었다. 상호 위로와 치유의 장이었다. 이들의 기원제는 경직된 건축회사의 기원제와는 영 달랐다.

지금은 성균관 집례관이 기원제를 집도하지만, 예전이라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건축 현장에는 무당이 집도하는 ‘고사’를 지냈다. 고사 비용은 무척 비싸다. 현장 소장의 주머니 돈이 아니라, 하청 회사의 부조금들이다. 대기업 현장 소장은 돈을 지불한 대가를 받는다.

어렵게 인터뷰한 새끼무당의 이야기는 ‘을화’의 내용과 같았다. 고사를 집도하는 늙은 무당이 있다면 여러 명의 젊고 아리따운 새끼 무당들이 있다. 보수를 두둑이 받은 새끼무당 중 하나는 대개 몇 개월간 현장소장의 애인이 된다.

4. 여성 건축노동자들

H 건설현장에서 여자목수가 경량철골, 내장 일을 하고 있었다. 여성으로서는 조금 무겁게 여겨질 대형 타카를 어깨에 메고 작업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한 팀이 되어 우께(도급노동)하면 도합 40만원 선일 것이다.

S 건설 현장에서 페인트 여공이 기둥에 테이핑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바삐 움직였다. 나는 기둥 주변의 장애물들을 치웠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자마자 일당이 얼마인지 물었다. 그녀는 10년차, 9만원을 받는다고 했다.

여공들은 대개 타일 조공, 페인트, 도배, 드물게는 내장목수 조공도 있다. 방수, 마감청소, 이사 청소도 여성들의 몫이 크다. 타일 여공 일당이 가장 높다. 부부가 함께 일한다면 하루 도합 40-50 만원을 받는다. 그만큼 타일 일이 어렵다. 오랜 숙련 과정이 필요해서 기능을 익히기도 어렵다.

중년 여성들의 일거리라야 식당밖에 없다. 그러나 식당의 노동은 해 본 사람만 안다. 일 자체도 고단하지만 손님들 접대하기란 보통 일이 아니다. 감정노동까지 겸해야 하기 때문이다. 건축여공들은 이구동성으로 식당 노동은 할 게 못된다고, 끔찍하다고들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여공은 H누나이다. 모든 면에서 나보다 나았기 때문에 연하이지만 누나라고 불렀다. 기능이 뛰어나서 반장을 제외하고는 임금이 가장 높았다. 그녀의 자랑은 지방대학 박사과정인 아들이었다. 아들이 학위를 받으면 아주 좋은 차를 사 주는 것이 그녀의 꿈이었다. 그녀의 집에도 가 보았는데, 동해안 큰 냇가 주변에 넓직한 단층 슬라브였다. 집은 가족들이 모이는 명절 때를 제외하고는 별로 쓰지도 않았다. 30여 년의 오랜 노동으로 그녀의 손마디 마다 관절염이 있었다. 아픈 손으로 아주 야무지게 작업했다. 그녀는 육체를 초월하는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가? 술 취한 동료가, 함께 일하던 동료가 성 추행하려는 바람에 그녀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제기랄, 그 뒷수습을 하러 내가 내려가서 고생했다. 피해 여성이 고소하면 회사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가해 남성에게 술을 진탕 사 먹이자, 술술 뱉아냈다. 거대 현장이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이라서 단 두 명만 일했단다.

“지가 내 마누라라도 되나, 모든 힘든 일은 다 내가 했다. 그러고도 품값이 나와 똑 같다. 떼돈 벌면서 내게 무엇을 해 주는가?”

술 취해 방어 능력이 없는 여성에게 그랬단 말이지? 너보다 힘없는 여성에게 그랬단 말이지?

나는 H누나의 경우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가해자의 ‘욕망이 증오로 바뀌었는가, 증오가 욕망의 옷을 입었는가?’ 아니면 노동의 고통이 다른 식의 보상을 찾도록 했는가?

몇 십 년 전에는 건축 현장에 여성도 목수를 했다. 남자들과 똑 같이 못 주머니 차고 일했다. 여자라 해서 머뭇거리거나 ‘여자인 양’ 하는 법이 없었다. 남자들이 어깨에 메고 나른다면 그녀들은 판넬을 머리에 이고 날랐다.

미모는 죄가 아닌데도 여성들에게는 항상 천형처럼 붙어 다닌다. 아르바이트하던 미모의 외국 여성이 내게 털어놓은 이야기가 있다. 아주 친한 동료였다.

“배운 사람이나 못배운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돈 많은 사람이나 다 똑같아요. 왜 그렇죠?”

왜 그러냐는 물음은 만나는 남성들 모두 성을 요구한다거나 유혹한다는 뜻이다. 건설 현장에도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이 돌았다. 대개 여공들은 남편이 아파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는 경우가 많다. 친척을 따라 일한다면 별 문제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오야지들이 여공에게 성 상납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것이 사실인 듯해서, 어떤? 부인이 여럿인 오야지들이 이었다.

합의와 동의하에, 사랑하는 사이라면 문제될 것 없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성상납은 이 나라에 희망 없음의 상징이다.

다른 모든 사랑의 이야기처럼 아가서를 읽다 보면 사랑의 신비와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결코 성을 사소한 문제로 생각할 수 없다. 도대체 강제적 성 관계를 시도하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강제란 사랑하는 사이에서 있을 수 없다. 만약 폭력에 길들여진 관계라면 사디즘과 매저키즘으로 뒤엉킨 관계일 것이다. 사랑의 신비는 생 떽쥐베리가 말하듯, “그 사람을 향해 나아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 사람을 품에 안으려는 욕구”이다. 이런 욕구만이 사랑은 너와 나만 아니라, “제3의 것”을 바라보게 한다. 사랑은 그 자체로 “초월적”힘이 되며 프랑스 60운동에서 보듯, 혁명을 가능하게 한다.

 

 

의식노동[노동이야기]-⑩

의식노동[노동이야기]-⑩

이 재 원(한철연 회원)

 

 

1. 만추(晩秋)

브레히트는 묻는다. 신화로 가득 찬 ‘아름답고 견고한 저 테베의 상들은 누가 지었는가?’ 사람들은 대답할 것이다. ‘테베의 왕들이 지었겠지.’

어르신을 따라서 한적한 시골에서 며칠을 보냈다. 새벽달에게 농담하다(고 쓰고는 애인 생겨 달라고 떼쓰다고 읽는다). 아침 물안개를 즐기고 알을 품는 논병아리를 구경하며 보냈다. 한적한 곳에서는 노래도 불렀다. 고추잠자리 가성이 안 올라가서 며칠 연습했다.

매 끼니를 얼마나 잘 먹었는지, 죄책감까지 들 정도였다. 죄책감의 근거는 만나로 연명하던 광야인 즉 누가 한 수저 더 먹으면 다른 사람은 굶는 떠돌이 히브리인들의 삶에서 그들 지도자들의 ‘먹기를 탐하는 자, 목에 칼을 댈지라’는 경고이다. 어르신의 냉엄한 눈초리인즉 호된 꾸지람을 듣다 보니 나를 괴롭히는 귀신들이 도망갔다-상처들이 치유되는 깊은 시간이었다.

그 지방의 명찰을 구경 갔다. 절은 새로 개축했다. 숙련공들의 솜씨가 잘 드러나는, 목재들의 이음은 틈새 하나 없었고 3포 양식의 화려한 건축물이었다. 20년 전 절 짓는 비용은 평당 천만 원이었다. 단청 공사를 하고 있었다. 단청공들은 작업 조건에 따라서 때로는 누워서, 때로는 앉거나 서서 작업하고 있었다. 20년 전 단청 공사 가격은 300만원이었다. 지금의 비용은 추정도 못하겠다.

절 뒤켠에 단아한 황토방이 있었다. 만추의 주변 경관과 참으로 잘 어울렸다. 누구라도 그 곳에서 머물러 살고 싶도록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스님은 이것을 ‘내가’지었다고 했다. 공장에서 목재를 깎아다가 현장에서 짜 맞춤하는 공법이라면 평당 약 3백만 원, 목수와 인부들이 직접 작업한다면 건축 비용을 추정할 수 없다.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 1956)

 

자본주의의 꽃을 금욕의 상징인 절에서 본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부처님께 절 공양하는 것이 많은 신도와 스님들의 소원이라는 것을 들었다. 새로 지어도 고풍스러운 매력을 지니는 전통 건축양식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러나 테베의 성을 지은 것은 왕들이 아니듯이, 절을 공양하는 것은 헌금한 사람이나 스님들이 아니다. 오막살이를 보면 그 속에 사는 가난한 가족들을 생각하듯이, 신축 절을 보면 온 몸이 아픈채 노동하여 가족을 부양하는 목수들과 퇴역쟁이들을 생각한다.

스님과 차 마시는 자리에 동석할 수 없었다. 돈 냄새가 진동해서라면 내가 너무 애큐트(acqute)한가? 주지스님은 야생의 버려진 사슴을 주워다 기른다 했다. 사람 손을 타고 큰 사슴은 사람들을 잘 따랐다. 나는 또다시 스님의 자기 신비화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야생 사슴이 길거리에 내버려져 있을 턱이 없기 때문이다. 스님 자신이 추측의 단초를 주었다. 근처 사슴 농장에서 이 아이(사슴) 시집보내, 새끼 한 배를 내었다고 했다.

오래 전 일이다. 집에서 키우던 염소가 새끼를 낳고 죽었다. 어린 것들을 가족들이 우유 먹여 키웠다. 얘들이 사람을 얼마나 잘 따르는지, 배고프면 마루앞에 와서 매애-하고 울었다. 귀엽다며 욕심 많은 사람이 한 마리를 가져갔다. 다른 한 마리는 성장하자, 집 어딘가에 묶어놓았다. 사람이 다가가면 개가 주인에게 애교 부리듯이 커다란 뿔을 조심스럽게 들이밀거나, 두 발로 서서 펄쩍펄쩍 뛰었다.

‘일부작 일부식(一不作 一不食)’을 실천하는 스님이 계셨다. 그가 정치력이 넓어져, ‘절(국립공원) 입장료 받지 말자‘는 운동을 했다. ’중이 손이 없나 발이 없나, 부처님이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일해서 먹고 살라‘고 일갈했다. 이 운동 발전하면 절에서 헌금 받지 말자라는 주장으로 번질지도 모를 참이다. 그는 종단에서 쫓겨났다. 그 후 진보파 스님이 종권을 잡자 승첩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몇 십 억 헌금 뒤에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을 본다. 누구는 극락 가기 위해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타인을 자기 도구로 삼는다. 이는 기독교, 천주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 건축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2. 노동자의 자기방어 기제들-원인들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다. 누군가는 내가 이슬만 먹고 사는 사람으로, 돈 필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소소히 돈 들어갈 데가 많다. 서사 작업도 해야 하고 독서도 하고 술도 마시려면 돈 들어간다. 남는 돈은 친구 발전을 위해 쓰기를 바란다. 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 일하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띄엄 뛰엄 일해도 워낙 사람이 없다보니 용역회사에만 가면 일감이 있었다. 윤 씨, J를 포함해 여럿이서 기존 현장에서 바라시 작업을 했다. 공정표에 바라시는 콘크리트 타설 후 15일 지난 후 해야 한다. 그러나 이곳 현장은 어제 콘 타설했다. 조심스럽게 해체작업 한다 해도 양생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콘크리트는 잘 굳지 않을 것이다.

바라시는 우선 갓다(카터, 쇠로 된 절단기)를 이용해 형틀 짜면서 여기 저기 묶은 반생이를 끊는다. 이 작업은 쉽지 않다. 큰 갓다로 하면 무거워 팔이 아프다. 작은 갓다로 하면 힘이 들어 팔이 아프다. 끊고 또 끊어내다 보면 다 끊겠지, 하는 생각으로 작업해 나갔다. 그 다음인 즉 하리(보)의 형틀과 상판(슬래브)을 이어주기 위한 목재를 털어낸다. 하리 패널들을 연결해 주는 핀을 제거한다. 만약 핀을 재거한 다음 헌치를 털면 갑자기 폼들이 밑으로 쏟아지게 된다. 작업 순서를 뒤바꾸면 위험하다. 삿보도(지주 동바리)들을 가로 세로로 이어주는 후리도메 철봉들을 제가한다. 동바리는 정확히 15일 후에나 제거하게 된다.

하리통 바라시 작업 후에 다른 사람들이 자재를 정리하는 동안, 김 팔뚝이(나의 팔뚝 두 배를 가졌기 때문에 김 씨에게 붙여진 별명)와 손을 맞춰 벽체 해체 작업을 했다. 그는 젊고 공손했으며 바라시 전문으로, 유능하기 짝이 없어, 저녁에는 애인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한다고 했다. 우선 벽체의 다대(거푸집을 똑바로 세우기 위한 철봉)를 제거한다. 한 사람은 철봉을 잡고, 다른 사람은 철봉을 고정시킨 반생이나 후크, 즉 철봉을 폼에 고정시킨 재료를 제거한다. 다대(세로)철봉을 폼에서 분리시켜 정리한 다음, 같은 방식으로 요꼬(가로) 철봉을 제거한다. 벽체 폼 핀을 제거한 후, 한 사람은 폼을 잡아주고 다른 사람은 빠루(바라시 대)로 단단하게 벽체에 붙은 폼을 떼어내 정리한다.
해체란 것이 높은 곳에서 아래로 재료들을 내리는 것이라서 중력은 가중된다.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작업하는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하다 다치는 사람은 무능하다. 두 달 전 공정 때, 언어장애인 Y가 다쳤다. 무식하나 힘 좋고 시키는 대로 막일하는 그를 사장(오야지)으로 호칭했다. Y가 오른 손 엄지손가락 큰 뼈 금이 가고 작은 뼈 골절 후 몇 개월이 지났다. 그의 엄지는 움직이지 않는다. 산재를 청하기 위해 관리자들에게 서류에 사인을 부탁했다. Y에게 돌아온 대답은 ‘반장 해임’이었다. 산재 난 현장은 보험료가 올라가고 하청에서 불이익 받기 때문이다. 이런 정책 덕분에 유리한 것은, 즉 산업자원부뿐이다.

화병이 났다. 노동하면서 일 때문이 아니라 공손하지 못하거나 교양 없는 사람들의 말 때문이다. 노동자로서 원색적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각양의 사람들을 만나는 행운을 누리는 데에는 비용이 든다.
레미콘 공장 신축 현장이다. 평택항에서 일했던 팀이 옮겨왔다. 팀장이 작업을 지시하며 나와 J를 향해 말했다. “이씨, 타이 빼먹지 말고 다 꽂아. 저번 (평택항) 옹벽 핀 네 개 안 꼽았어.” 내가 물었다. “옹벽 터졌나요?” 터지지는 않았단다.

J가 나에게 말했다. “거봐요. 내가 핀 잘 꽂으라 했죠?”

순간, 처녀들이 시집가기 위해 안방 가는 그날까지 ‘승질’ 더럽다는 소리 듣지 않기 위해 상대 남자에 대한 불만에도 주둥이 꾹 다물고 있듯 하기는 어려웠다. 나는, “아, 씨발 너도 함께 핀 꼽았잖아” 하고 내 쏘고 말았다.

사정은 이렇다. 나와 J가 작업한 구간을 바라시하던 정씨가 폼과 폼을 연결하는 핀이 빠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행히 바대(폼 외부를 가로, 세로로 연결시키는 철봉)가 핀 빠진 곳에 붙어있어서 콘크리트가 터지지는 않았다. 출 퇴근길은 지루하다. 정씨는 심심파적으로, 재미있게, 핀 빠트린 노동자들을 조롱했다. “개쌔끼들이 손이 얼었나봐”, 이런 식으루다가.

J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나를 방패막이로 쓴 것은 천하고 비겁하다. 노동자들이 자기방어기제를 쓰는 이유는 한 가지 이유이다. 팀에서 찍히면 일하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팀을 떠나, 다시 외톨이로 이 현장 저 현장 떠돌아 일을 다니기로 했다. 야비한 인간들과 어울려봐야 득이 될 턱이 없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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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하는 사람들의 책임 한도

평택 항 작업 현장 앞 도로에는 이른 아침부터 수입 곡물을 운반하는 차들이 늘어서 있었다. 이 현장은 수입 곡물 터미널 신축이다. 일하는 사람들은 이 건물이 무었을 하든 관심 없다. 일해서 품값을 받아 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무기 공장에서 일해도 되는가? 원자력 발전소 신축 일 해도 되는가? 지엠오 곡물 수입 건축물을 지어도 되는가?

무기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기 때문에 무죄인가? 박그녀는 외국에 있었으므로 진보당 해산 청구 국무회의에 전자 싸인을 했으므로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것인가? 내가 원자력을 짓는 것이 아니라, 높은 사람들이 시켜서 일했을 뿐이지, 원자력 주변에 많이 태어나는 지진아들에 대한 책임이나, 반감기 수억 년의 방사능 폐허에 대한 무한 책임져야 하는 후손에 대한 책임은 없는가?

일하는 사람들의 책임한도에 대해서 물을라 치면 노동자의 가치라는 문제와 떼어놓을 수 없다. 노동하는 나는 단순히 생산력의 도구인가, 아니면 나는 생각하고 계획할 수 있는 존재로서 노동하는가의 여부이다. 전자라면 자본에 착취당해도 싸다. 후자라면 범죄와도 같은 노동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에서 오신 손님이 앞에서의 여행에 함께 했다. 그는 국내에서 회자되는 지엠오 식품이니, 광우병 쇠고기니 하는 논의들에 대해서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일상 그것들을 아무 문제없이 먹기 때문이다.

지엠오 식품이나 쇠고기가 미국과 한국의 잣대가 다르다는 설명을 하기란 요령부득이었다. 미국에서는 지엠오 식품이 없다. 이것을 허가 안하기 때문이다. 유독 국내에만 건너오는 것이 지엠오 농산물이다. 쇠고기 역시 미국에서 유통되는 것은 월령이 낮다. 송아지가 성우가 되면 바로 시장으로 간다. 우리 식탁에는 월령에 상관 없는 고기가 올라온다. 그러나 자국 시장에는 송아지에서 갓 성우가 된 고기를 유통시킨다 . 그러니 그 나라 사람들은 동양 어느 나라에서 벌어지는 촛불 시위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엠오 농산물은 광우병과 같이 위험하거나 더 위험성이 크다. 자신들을 ‘자연의’라고 칭하는 사람들인 즉, 야마기시 학원의 영향을 받아 인체에 자연 치유 능력이 있다고 믿는 이들이 어떤 새로운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엠오 농산물은 우선 인체의 약한 부분인 관절, 물렁뼈를 친다. 2년간 지엠오 밀을 먹인 쥐에게서 종양이 솟아났다(한겨레 21). 종래의 실험용 쥐 검사는 6개월이었다. 그렇다면, 지엠오 곡물을 먹고 큰 축산물들은? 그러한 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지엠오 농산물로 만든 식용유, 밀가루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건강은?

미국 손님은 미국이 사람과 동물에게 그토록 해로운 물건을 다른 나라에 파는 부정의한 나라가 아니라고 믿는 듯 했다. 그러니 지엠오 논쟁이니,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 부정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 이해시킬 수 없는 부분은, 보수주의자 손님이 미국 공무원의 자국 이익을 위한 행위, 도덕적 불감증 문제였다. 미국의 어느 판사는 한 미간 쇠소기 비밀협상이 끝난 새벽에 일어나 스위스 은행에 동결되어있던 이명박 회사 자금 해제 서류에 싸인을 했다(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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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데모크라시-국민의 독재

미국 손님으로부터 자신이 가꾸는 정원 손질에 대해 들었다. 정원에 여러 가지 나무들을 심었다. 그 곳에서 풀이 자라면 야단난다. 이웃에서 곧바로 신고가 들어간다. 그러면 벌금을 내야 한다. 따라서 보름에 한 번 꼴로 풀을 베어주거나 잔디밭의 잡초를 제거해야 한단다.(황금광 시대),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의 부정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네들의 민주주의란 부러울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국민의 독재란다. 공동체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지, 개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민주주의란다. 수많은 이민족들이 함께 사는 곳이라서 질서 유지를 위해서라도 민주 독재가 더욱 철저하단다.

노동 현장에서는 노동자에 의한, 노동자를 위한 노동이란 꿈도 못 꾼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일을 지시하는 사람들의 강제가 휠씬 많다. 노동자는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요, 명령은 관리자들이 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딱 잘라 정신노동자와 육체노동자라는 이분법이 작용한다.

곡물하치장 공사이후 유치원 신축 공사장을 갔다. 직영 목수 8명이 있었고, H인력에서 가끔 보는 이들 3명과 함께 갔다. 오야지가 일하는 우리들 주변에 지켜 서서 사사건건 일을 지시했다. 수시로 일의 방식을 바꿔 지시하기도 했다. 하루가 무척 길었다. 오야지의 말이 스트레스가 되기 때문이다. 하루가 무척 길었다. 오야지의 말이 스트레스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 날은 J도 함께 갔다.

누군가가가 말했다.

“저 오야지와 함께 일하기는 힘들겠어.”

압권은 함께 일하러 간 X노인의 궁시렁이었다. 오야지가 안 듣는 곳에만 가면 노인이 한 마디씩 했다.

“너는 손이 없냐 발이 없냐, 네가 해라 이자식아.” “너는 기본이 틀려먹었다 이자식아. 아침 밥도 안 멕이고 (쉴)참에 라면 주는걸 보고 알겠다.” “가만 있으면 알아서 할 터인데 아주 나쁜 놈이구먼.” “이제 퇴근한다 이눔아, 나는 너와 일 안할란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노인이 말했다.

“못주머니 차고 함께 일하는 오야지하곤 일 할 만 하지만, 못주머니 안 차고 지시만 하는 사람과는 일하기 힘들다. 함께 일하는 사람은 품값도 더 쳐준다. 목수 힘든 거 알기 때문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X노인이 사회성이 부족해 보일 수도 있다. 오야지와 잘 지내지 못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X노인의 생각에는 일하는 사람들의 자존심이 반영되어있다. 오야지는 자기는 일 시키는 사람, 정신노동자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목수 편에서는 노동 자체가 무의식적이 아니라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하는 작업이다. 가장 효과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찾아 작업한다. 따라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가 불필요하다.

기왕에 원자력 발전소 이야기가 나왔다. 몇 년 전에 완공된 신고리 원자력 발전소 4개 는 아직 가동을 못하고 있다. 원자력발전소 부품 비리와도 관계있는 모양이다. 원자력 안전위원장이라는 사람이 인터뷰한 내용을 보았다(노컷 뉴스). ‘발전소를 당장 세울 만큼의 문제될 부분은 없다… 심각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했다. 산업통상부 장관은 전수조사결과 지금까지 ‘심각한 문제는 없다고 들었다’고 했다. 누구인지 정확치 않으나, 어느 인터뷰이는 비리 품목의 부품들은 ‘외국에서도 사용한다‘고 말하더란다.

통속적 인간인 나는 스즈키 인트루더를 탔다. 다른 사람들이 그러하듯, 돈을 만지자 맨 처음 이것을 샀다. 국산 오토바이의 성능에 항상 불만을 가지고 있다가, 지축을 울리는 그 소리와 미소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애인 같은 모습에 반해서 샀다. 우연히 오토바이에서 국산 600CC용 부품을 발견했다. 정품이 아닌 비품을 사용한 오토바이는 생명의 문제와 연관 있다. 크게 손해 보고 원 주인에게 되팔았다. 개인 생명 달린 오토바이와 원자력사고를 비교할 수 있으랴만, 내 경험에서 할 수 있는 유비는 이것 뿐이다.

부정으로 검사를 통과한 원자력 부품에 대해 ‘별 문제 없다’고 말하는 이들은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윤리불감증 정도를 넘어서 범죄가 확실한, 국정원과 군 사이버 사령부(기무사)의 선거 개입까지도 무조건 편드는 사람들이 이정권의 수혜자나 언제든지 신분 상승 기회가 있다고 믿는 엘리트들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음에 놀랬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메말라 빠진 한 마디밖에 할 수 없다. 방송과 언론이 국민 의식을 장악하고 오랜 반공 교육을 통해 주입받은 것들이 작용하고 있다고.

무엇인가 혁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혁신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확실한 것은 민주주의부터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재 투쟁의 시기가 지났다면 다시 올 투쟁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일 게다.

읽어주신 분들게 감사 드린다…….

 

 

가을 프롤레타리아트[노동이야기]-⑨

가을 프롤레타리아트[노동이야기]-⑨

이 재 원(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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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하러 오가는 길

H인력으로 가는 새벽길은 이 도시의 번화가를 거쳐 간다. 우선 밤을 새워 일하는 커피 전문점 종업원들을 본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젊은이들이 모이는 나이트클럽이 있다. 토, 일요일은 새벽까지 클럽 앞에서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다. 한 눈에 보아도 알 수 있는, 남녀들이 만들어내는 각양의 그림들을 목격한다. 큰 길을 건너면 뒷길 형을 한 번화가이다. 여기에서도 술 취한 젊은이들의 각양의 행태를 본다. 편의점 데크마다 남녀들이 엉켜 쓰러져 잠들어있다. 시청의 젊은 청소원의 작업과 폐지 줍는 정신지체 부부의 작업이 겹치기도 한다.

퇴근길에도 이들 부부를 만난다. 각양의 폐지더미와 함께 길목 한켠에 앉아, 스피커와 같은 고물들에서 쇠붙이와 나무를 분리하는 작업도 한다.

나는 이들의 작업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싶은 충동을 참는다. 차마 핸ㅡ폰을 들이댈 수 없다.

십 수 년 전, 광부를 그리는 떠돌이 화가, 나중에는 천주교 공소의 주임이 되어 그림을 그리던 화가의 말을 들은 적 있다.

“갱도를 올라온 광부들이 한숨을 푹 쉰다. 차마 그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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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데마찌-J의 절망

평택 항 현장은 며칠째 최소 인원만 일하러 간다. 어느덧 구조물 마무리 공사 시기라서 H인력 일감이 뚝 떨어졌다. 비도 자주 오가는 통에 더욱 일 할 날들이 드물어졌다. 반장들은 평소 일하던 이들 중 성실한 사람 몇 명만 데리고 갔다. 나는 나대로, J는 J대로 일을 한 참 안했다. 전화로 ‘오늘은 일 나가자’고 합의했으나, 우리는 오늘도 일거리를 찾지 못했다.

평택 항에 일 나가던 이들 중 간택되지 못한 윤씨, 정씨, J와 나는 둘러서서 잡담을 나누었다. 정씨와 J는 경마장에서 만나 밥도 먹고 마권을 사기도 했단다. 그 둘은 지금 수중에 한 푼도 없다. 기적 같은 이는 윤 씨이다. 그는 여름에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현장에서 보는 윤 씨는 시체와도 같았다. 햇빛에 그을은 얼굴은 핏기 하나 없고 눈은 초점 없는 생선의 그것 같았다. 금방 쓰러질 것 같이 보였다. 왜 그리 열심히 일하느냐고 묻자 “손자 키우려고”, 또는 “무조건 일 나오는 거야”라고 했다.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 관절은 어떠냐고 물으면, “아픈 데는 없어, 아직까지는”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체력을 타고 태어났다. 오래 된 3층짜리 작은 상가가 그의 소유이다-노동하여 건물주가 되다니, 대단하다.

뒤늦게 윤 씨만 팔려나가고, 나머지는 돌아가야 한다. J가 “소주 한 잔 사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한 참을 걸어 은행 근처 편의점 파라솔에 자리 잡았다. 나는 컵 라면을, J는 ‘휴식시간’을 안주삼아 소주를 마셨다. J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번에는 들어주기 곤란할 정도의 이야기를 했다.

?이재원

“형님이 양주 사주던 날까지 경마에서 꼴아 박은 돈 생각하면 참 후회막급이네. 방세라도 줄 걸…”

보름 전 일이다. 그는 모아둔 돈을 가지고 경마장에 갔다. 돈이 바닥났다. ‘성질났다’. 집에까지 걸어와서는 신용카드 빛을 내어 다시 경마장으로 갔다. 그리고는 다 쏟아 부었다. 그날 저녁, J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 술을 사주며 나는, “인간이 귀신을 어찌 이기겠나. 할 수 없지”라고 했다. 내가 귀신을 믿어서가 아니다. <정념>인 즉 ‘한 대상에 대한 정신활동의 집중화’, 고착화(Katexis)라는 것이 신적인 힘들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뜻이었다.

그토록 허망하게 돈을 낭비한 후에 일하기 싫은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경마에 집착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그의 비극적인 가정사가 있고, 학력과 관계없는 무학에 가까운 난독증도 있다. 즉, 그는 지식과 경제, 양자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인 셈이다. 그에게 듣는 가장 행복한 날들은 할머니가 생선을 구워, 그것을 뜯어 그의 밥 수저 위에 올려주던 어린 시절이었다.

최소한의 윤리도 걷어치우고 도박을 조장하는 경제정책의 뒤켠에 사람들의 희망 없음이 있다. 정선 카지노 동네 호텔에 묵는 사람들은 한밤중에 천정에서 커다란 손이 나와 휘젓는 통에 기절초풍한다는 이야기부터 중고 좋은 차를 샀는데 사고 났다는 <카더라>까지, 도박의 결과 목숨까지 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보도가 흔하지 않은가. 십 수 년 전 사설 경마장 설립에 50억 들어야 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는 도박 자체가 (범상하지 않은) 자본의 산물이라는 증거요, 또 몇 천 만원 배팅한다는 강남 애마부인 이야기들과는 다른, 사행성 폭력 자본에 절망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위협을 무릅쓰고 돈 안되는 투자를 하는 자본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J는 오늘 방세를 내야 한다. 그러나 돈이 없다. 그가 말했다.

“아무래도, 일해서 (품삯을 받으면) 찜질방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아. 지난번 방세 밀렸을 때 주인이 심하게 뭐라 하더라구.”

당연히 방 얻어 사는 것이 찜질방에 있는 것보다 좋다. 우선 마음대로 식사를 해 먹을 수 있다. 잠도 편히 잘 수 있다. 그는 겨울을 대비해 난방용 유류도 한 드럼 사 놓았다. 찜질방에 들어간다면 겨울나기를 준비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도 유류나 식량을 산다는 등의 계획을 세워 살기가 어려울 것이다. 나는 간신히 한마디 했다.

“H인력에 나오는 그 잡부, 찜질방에서 90일 살았대. 내가 90일 동안 며칠 일했느냐 물었더니 15일 일을 했대. 찜질방에서 잠을 잘 못자기 때문에, 일하기 힘들어. 일하면 방세부터 줘. 일부분이라도…”

J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얼마나 더 고생을 해야 하나? 이렇게 살다가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냥 살아야지 뭐, 혹시라도 반장이 된다면 형편이 나아지겠지. 반장이 되면 여자도 생기겠지, 생활이 안정될 테니까.”

K팀장은 자기 쓰고 저축하는 돈을 제외하고, 한 달에 5백 만원을 부인에게 준다. 하루도 일을 빠지지 않는, 18년간 군 생활을 한 김 노인은 한 달에 연금 3백만 원 받는다. 당연히 그는 개인주택을 지닌 부자이다.

J가 팀장이 될 수 있을른지는 의문스럽다. 술과 경마가 그를 방해하며, 난독증이 건축도면 읽는 것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일용 노동자로 산다는 것 자체가 계획을 세워 사는 일이 어렵다. 나 역시 어떤 사람의 삶을 서사화하려는 작업을 시작했으나, 들쑥날쑥한 경제 형편으로 작업을 완성하지 못한 채로 있다. 자료들 프린트 자체가 않좋기도 하지만, 독서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소주 한 병을 다 마신 J가 말했다.

“소주 한 병 더 사주고 형님은 가세요. 나는 더 앉아 있다가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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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따

평택 항 현장은 3층 사무동과 2층 지휘 동을 짓고 있다. 공사는 더디다. 날씨는 35도를 향한다. 망치질 몇 번 하면 숨이 헐떡거린다.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어느 순간 쓰러질지 모른다. 쓰러지면 심장이 멈추고 뇌사한다.

?이재원

천정을 슬래브로 가리지 않는 오픈구를 되나우시, 부적합 시공 고치는 작업했다. 유독 내가 이 일을 주도하는 L에게 간택되었다. 힘도 좋고 일도 잘 하는 L은 <그 사람이 현장 일 다 한다>는 칭찬을 듣는다. L이 BT 아시바 위에서, 나는 밑에서 필요한 재료들을 올려주었다.

우선 기존 하리(보) 폼을 뜯어내어 아래로 내렸다. 그 다음 새롭게 치수를 맞추기 위해 작은 폼들을 올려 주면 L이 가와바리, 속고 위에 품을 붙였다. 그리고는 시다 오비끼(직사각형의 9센티미터 목재)를 하리통 위에 각목으로 임시로 이어붙인 다음, 시다 오비끼 아래에 삿보도를 세워 받쳤다. 다시 삿보도 위에 네다로 각재와 철봉을 깐 다음, 그 위에 합판을 깔아 슬래브 판을 완성하였다.

성격이 급한 것인지, 일을 빨리 하려는 욕심 때문인지, 내가 조금만 더디면 L은, “형님 이거이거…”라고 소리쳤다. 일반인들은 거리를 걷기에도 힘든 날씨이다. 한 숨 돌리면서 일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작업 중간에 땜빵작업을 한다. 하리통 빈 곳을 각재와 합판을 이용하여 이어 짜기 해야 한다. 나는 정신이 나가, 땜빵으로 짠 패널을 하리 통에 이어붙이며, 연결 불가능한 빈 곳에 헛못질까지 했다.

사람들은 모두 짜증스러워 했다. 인간이 천사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어떤 일이든 곤란하거나 잘 안 되는 일은 다른 사람의 핑계를 댄다. 재미있게 일해야만 일이 쉽고 능률이 오른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감정을 주체 못한다. 날씨 탓이 크다. 함께 일하면서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방에게 화를 낸다. 손 맞춰 일하는 이들의 감정 까지도 받아야주어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그 와중에 나는 현장에서 따를 당했다.

IMF 당시 어느 은행 지점장이 강제 해직 당했다. 가족들이 그를 노숙자들 속에서 찾아냈다. 그는 집 주소는 물론 자기 이름도 잊고 있었다. 모든 것이 노동과 연관된 우리의 삶에서 직업인 즉 자기의 아이덴티티이다. 해직당한 이는 종교적 파문과 같은 정신상태가 되는 것이었고, 자기 자신인 즉 이름을 잊어야만 살 수 있었던 셈이다.

따돌림을 당한다는 것은 이와 비슷하다. 따 인 즉 노동세계에서 밀려날 위기를 겪는 순간이요, 당하는 이는 현장에 계속 일하러 나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따는 예전에는 어느 현장에나 있었던 일이다. 그래서 목수들은 외톨이로 현장에 나가지 않았다.

J와 손 맞춰 일 할 때는 별 일 없었다. 내가 부족한 부분을 J가 잽싸게 말로, 또는 행동으로 보완해 주었다. 그러나 J가 일 안하는 동안, 갈수록 나와 다른 목수들의 실력 차이가 났다. 목수 현장을 몇 십 년 떠났던 내가 평생 목수만 해 온 사람들과 문제해결 능력이 같다면 그들 목수들을 무시하는 것이리라.

돼지띠 노인은 내게, ‘이 씨는 반생이 틀게 하지 마’라고 말했다. 또, ‘이 씨는 도리반생이 못 박지 마’라고 하기도 했다. 또 다른 사람은 나와 함께 일하다가, ‘당신 목수 얼마나 했어?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라고 말하기도 했다. 매일 하는 일들을 하지 말라니, 이는 왕따인 셈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도리반생이 못 박는 것, 반생이 트는 것을 재산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이 재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나에게 이런 저런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은 왕따 시키는 것이다. 정히 내가 작업하는 것이 불안하다면 정확히 알려주고 확인하면 될 일 아닌가?”라고 받아쳤다.

따를 시키는 사람, 갑은 따를 당하는 사람, 을에게 항상 은근한 경쟁심을 가지고 있다. 갑질 함으로써 현장에서 자신은 스스로 안심하는 심리가 있다. 내가 당하기 이전의 따 대상은 외국인 K였다.

별 생각이 다 났다. 나는 왜 이토록 힘들게 노동하는가? 좋은 노동세상을 꿈꾸기 위해서인가? 다시 학자로 돌아간다면 어떨까? 그러나 내가 다시 몇 년간 책 읽을 형편이 되는가?

견뎌야 했다. 따를 무시하고 내 할 일을 묵묵히 했다. 내가 일 안 나올 수도 없었다. 공기는 한정되어 있으나 날이 너무 더워서 사람들이 일을 하러 오지 않았다. 현장은 항상 사람들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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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희망의 사제들

가을이 다가오자 현장에는 활기가 넘쳤다. 여름에 한 달 걸릴 일을 온도가 낮아지자 15일 정도면 해치웠다. 현장들마다 마무리 공사로 들어갔다. 덩달아,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일거리가 줄어들었다. 정씨나 J, 그리고 나 같이 자주 일나오지 않던 이들이 가장 어려운 시기이다.

?이재원

그 와중에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일 할 생각 않나고 술 마시게 되는 사회적 사건들이 터졌다.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증거들은 왕따를 당하거나 고독보다 더 절망스러웠다. 4대강 비리를 볼 때와는 또 다른 절망감이었다. 소련 KGB와 자신들의 업무를 비교하는 국정원 직원의 대답(뉴스타파)을 들으며, 민주주의는 불가능할 것 같은 절망을 느끼기도 하였다. KGB가 고르바쵸프 당시 국가안전위원회를 꾸려 사실상의 쿠테타를 일으켰듯이, 관료들이 안전이라는 신념을 조직의 이득인 즉 사적 욕망 충족 수단으로 이용한다면 내란 구성과 똑같이 위험하다. 안전을 개인 욕망으로 만드는 순간 제지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민족과 국가를 제1원리로 하는 파시즘의 안쪽에는 정치 경제 파시스트들의 자기보호 계기가 작동한다.

사람들에게 술도 사주고 통닭도 사주며 대화했다. 그러나 정치관련 대화는 안 하늬만도 못했다. 권력 언론들이 파쇼 자본주의를 고착화하기 위하여, ‘기차 바퀴는 박달나무로 만든다’고 떠들어 대면, 진상을 알아볼 생각도 안하거나 그저 맹목적으로 현 체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라 수용하고 재확대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희망>이 가장 위대한 것이라 했다. 간신히 해석하자면 ‘하느님의 나라는 정의로울 것이다’라는 희망만이 ‘하느님은 전능하다’라는 믿음보다 위대하다고 했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나이가 젊다고 청년이 아니요 백발이라서 노인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가진 사람만이 청년’이라고 했다.

경제도 민주화되는 세계에서만 사람들은 계획을 세워 삶을 살 정도가 될 것이다. 지금처럼 건설 방식이 도급과 하도급 형식이라면 업자들은 배부를 것이지만 일반 노동자의 풍요는 기대할 수 없다. 임금이 생존비에도 못 미친다는 증거가 배우자 없는 노동자들이다. 임금이 생존비 이상 올라간다면 노동자도 자식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경제정책과 임금 정책에서 노동자의 삶의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 <자본>에 따라서, 노동자의 노동력에 임금을 준다면, 실제 생산한 노동의 그 가치에 따라서 임금을 받을 수 있다면 틀림없이 노동자가 살 만 한 세상이 될 것이다. 이런 정책은 오직 <정의로운 자본주의>에서만 가능하다. 구성원의 진정한 행복을 기획하는 사회가 욕망에 기초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노동이야기]- ⑧

프롤레타리아트[노동이야기]- ⑧

이 재 원(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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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사람을 다 책임질 수 있단 말인가?

평택 항 수입물류 공장 공사현장이다. 바닷바람은 육지보다 체감기온 5-6도정도 낮다. 산소가 많은 바닷가 공기 덕분에 일해도 힘든 줄 모르겠다. 목수 2인 1조로 일해서 더욱 좋다.

며칠 간 J와 손을 맞춰 일했다. 일도 잘 할 뿐 사람이 젊잖다. 고향도 같다. 목수 두 사람이 모이면 그중에 실력이 나은 사람이 있다. 힘으로나 실력으로나 J가 나보다 났다. 따라서 일머리를 J가 이끌었다. 나는 육체 뿐 아니라 머리까지 편했다.

일 끝난 후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혼자서는 주문 받지 않는 물 회(회 국수)가 가장 럭셔리한 메뉴이고, 국수나 국밥 등을 함께 먹었다. 그의 개인사는 듣지 않아도 알 듯 했다.

눈이 가는 곳에 마음이 있다. 처음 J와 손을 맞춰 지하에서 바라시(해체)하는데, 그가 담배를 피우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담배를 내밀자, 그는 3일간 담배를 못 피웠다고 했다. 그는 한 달을 방구석에서 헤매다가 돈이 떨어지자 무작정 H인력을 찾아왔다고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그는 스크린 경마장을 즐긴다. ‘비가와도 눈이 와도 말은 달린다’는 명언을 했다. 얼마를 넣고 가도 한 순간에 없어진다고 했다. 지름 신이 임하는 순간 뭉칫돈을 거는 탓이다.

바라시를 끝내고 가와바리, 즉 공중에 걸쳐놓은 속고 위에 폼을 붙이는 작업도 둘이 함께 했다. 나는 조기, 폼에 적절한 치수를 재어 못 두 개를 밖아 J에게 건네준다. J는 내가 밖아 놓은 못 두 개를 지지 삼아 패널을 속고에 고정되도록 못을 박았다. 우리는 혼자 하는 사람들보다 두 배 이상 작업을 했다. J는 계산도 빠르고, 작업도 차분하게 했다.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함께 작업하니까, 작업 지시하는 반장이 아예 우리 둘을 항상 함께 작업에 배치했다.

ⓒ 이재원

J와 손 맞추어 일 하던 중, 나는 평택 항 현장의 최고참, 돼지띠 노인에게 간택 당했다. 그는 어제까지 외국인과 손을 맞춰 일했는데, 두 사람은 소란하기 짝이 없었다. 의사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이요, 외국인이 노인에게 불평하기 때문이었다. 노인이 다리를 보여주는데, 퉁퉁 부어있었다. 노인은 나에게 재료는 물론 소모품도 모두 갖다 달라고 했다. 몇 일간 노인과 함께 일하는 동안, 내 별명은 졸지에 <데모도>가 되었다. 노인의 주문에 따라 움직이는 내 편을 들어준 별명이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 벽체를 보강하는 일종의 보, 통칭 ‘눈썹’을 ‘되 나우시’, 즉 부적격 작업을 고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노인은 아래에 있고, 나는 보위로 올라갔다. 폼을 뜯어내는데 벽체가 바람에 몹시 흔들렸다. 기분 나쁜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간신히 뜯어내고, 다시 정확한 치수대로 눈썹을 이어냈다.

점심 직전에 비가 내린 날이다. 한 30분을 비 맞으면서 일했다. 땀에 젓은 옷이 비에 젖어 무척 짜증이 났다. 작업을 중단하고 용역회사에 돌아와 돈을 받은 J가 총총히 사라졌다. 그는 좀 전에 넌지시 내게 물었었다.

“이제부터는 무엇을?…”

나는, ‘상명대 도서관에…’라고 응답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일요일이다. 그의 발걸음으로 봐서 늦은 경마장 행이라고 짐작했다.

몇 년 전에 만난 노동자는 <바다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한 달에 두어 번, 돈을 모아서 도박장에 간다. 어느 경우에는 차비도 없어, 주변 사람에게 ‘차비 좀 달라’하면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평택 항 일이 없는 날, J와 학교 신축 공사 현장에 팔려나갔다. 학교 건축은 80년대 말, 90년대 초 건축회사 수석 목수로서 내 전문 분야였다. 따라서 현장이 고향 같았다. 예전 식으로 슬래브 작업을 했다. 횡 800센티, 종 360 센티 슬래브 여섯 칸 작업이다. 하리, 기둥 형틀을 세웠고 하스라, 즉 보 형틀을 올려놓은 상태였다.

우선 J와 시다 목을 준비했다. 슬래브 종대 치수보다 40-60 센티 정도 짧게 오비끼를 자른 후, 여기에 삿보도를 끼워 받치기 위해 3인치 항 대못을 네 개 박아둔다.

슬래브 하스라 위에서 다른 두 사람이 각목을 횡으로 길게 매달아, 시다 목을 받을 준비를 한다. 준비가 되자, J는 시다 목을 슬래브 위 사람에게 올려주고, 나와 다른 한 사람이 삿보도를 받쳤다. 구름 속에 있던 햇빛이 드러나자, 갑자기 숨이 ‘컥’ 막히는 듯 한 기분이었다.

그다음 시다 위에 네다 재료를 배열한다. 두께 5센티 각 파이프를 30센티 간격으로 깔고, 이음매 부위에 각재를 깔아, 시다와 못으로 고정시킨다. 그리고 그 위에 수지 알판이나 베니야 알판을 못으로 고정시킨다.

알판 슬래브 작업은 십 몇 년 만에 처음이다. 오직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슬래브 깔아갈 때는 물결 흐르듯이 작업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한 쪽부터 한 사람이 한 칸씩 깔아 가면, 그 다음 사람이 하리 통 치수를 맞추면서 다음 칸 슬래브 작업을 해 나간다는 의미이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 작업을 도와주다가, 간신히 작업 방식을 파악하고는 J의 조언을 참고로 맨 마지막 슬라브를 깔아나갔다.

J는 하루 쉬고 경마장에 가겠단다. 도박, 광신과 세뇌를 클리닉 하는 방식에 대해 ‘줏어들은(口耳之學)’ 적이 있다. 나는 J가 경마장 간다고 한 날 새벽에 메시지를 했다. “경마장 가지 말고 강릉 가서 물 회나 먹고 오자.” 잠시 후 그가 전화로, ‘오늘은 경마장, 강릉은 다음에 가자’고 했다. 나는 도서관에 앉아 있다가, 시장으로 갔다. 오리 한 마리, 낙지 두 마리, 전복 세 마리를 샀다. J가 TV에서 보았다며, 이것들을 함께 끓인 음식을 먹어보고 싶다는 말을 기억했던 것이다. 다시 전화했다. J가 당장 오겠다고 했다.

그는 ‘난생 처음 이토록 맛있는 음식을 먹어 본다’고 했다. 옥에 티는, 그가 오리 뼈를 덕수가 십여 년 전 수학여행에서 사다 준 은도금 재떨이에 버렸다는 것이다. 식사 후 그는 총총히 경마장으로 갔다. 나는 혼잣말을 했다. ‘너(나)여, 모든 사람을 책임질 수 있는가?’

대학원 시절, 유학 간 약혼녀로부터 파혼을 선고받은 친구가 빠친꼬에 빠지는 것을 보았다. 그를 따라 빠친꼬장에 가 보았다. 그는 크게 돈 욕심을 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상처를 잊으려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
노동자들이 도박에 빠지는 것은 자기 고뇌에 대한 응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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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性愛)과 경제, 그리고 두목노동자

인간 내면에 대해서는 항상 더러운 이야기만 하게 된다. 전에 가본 적이 있는 H인력에서 멧세지가 왔다. ‘목수 일 많습니다. 일 나오세요.’ H인력은 하루에 100명 정도의 목수를 현장에 보내고 있었다. 나는 평택 항에 고정으로 일 나가기 전까지 땜빵용, 그러니까 고정으로 한 현장에서 일하던 목수들이 안 나올 때 그 현장에 투입되는 인력으로, 이곳저곳 현장을 돌아다녔다. 원룸 현장에서 외국인 Y와 함께 일했다. 나는 그를 <따거>라 불렀다. 키가 크고 힘이 좋은 이를 지칭하기 좋은 이름 아닌가. 그가 서투른 한국 말로 내게, ‘내일 비 와. 애인(자기에게 소개시켜 줄 여성) 있어?’라고 말했다. 나는 ‘없어’라고 말했다. 그가 재차, ‘애인 줘’라고 말했다.

이튿날 비가 왔다. Y와 점심때 국밥집에서 만났다. 그는 머리고기와 소주 두 병을 해 치웠다. 잘 통하지 않는 대화로 애먹고 있을 때, 한국말을 잘 하는 Y의 친구가 왔다. 친구로부터 시원하게 Y의 심중을 들을 수 있었다. Y는 곧 고국으로 돌아갈 참이다. 고민이 있으니, 방금 한국에 온 친구 때문이다. 친구는 목수 일은 되지만, 한국말을 못해서 어디현장에서 일을 시켜줄 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자기 친구를 데리고 일 다녀 달라는 것이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대답을 못 했다.

두 사람이 모국어로 한 참을 이야기했다. 나는 무료해,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었다. 이것이 실례되지 않을 듯 했다. 그만큼 그들은 할 이야기가 많았다.

그들이 나가자고 했다. 어슬렁거리며 따라가자, 콜라텍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J의 친구가 말했다.

“내내 일 하면서 고생하다가, 이런 곳에 와서 기분을 풀지요. 언니들 바글바글 해요.”

플로어에는 할머니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들의 옷차림은 전문 댄서와 같았다. 현실은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적나라하다. 눈치를 보아 하니, 파고다 할머니들이 많은 듯 했다. 노동할 수 없는 여성들은 경제력 있는 남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파고다 할머니들에 비하면 일용 노동자조차도 아주 높은 계급이다.

나는 다시 책을 꺼내 읽었다. Y의 친구가 ‘책은 집에 가서 읽어요, 여기에서는 그냥 놀아요’라고 했다. 다시 둘러보니, 외국어를 하는 젊은 여성들도 많았다.

술 취한 Y가 집요한 내면을 드러내었다. 말끝마다 새끼손가락을 들어올리고, <애인>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아마도 hook-up body만 중요한 곳에서 ‘아름다운(젓가슴, 사랑, 육체)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플로어의자에서 사람들이 끈적거리는 눈으로 다른 사람들의 뒤를 쫓았다.

60대의 O목수는 좋은 차를 몰고 다닌다. 우람한 몸에 성질도 장기(長氣)해서, 화내는 것을 본 적이 없는 호인이다. 그 역시 <땜빵>이라서 나는 그의 차를 타고 몇 군데 현장에 일하러 갔다. 그 역시 말끝마다 <여자친구>였다. 외국인 여자 친구와 아라비아 지역 까지 여행을 다녔다. 여자 친구는 몇 년간 출국 했다가, 이제 며칠 후면 한국에 들어온다고 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노동자들에게 감정과 성,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는 답이 없다. ‘손 맞인 즉 땡기는 맛이 없어 유흥업소 여성은 사양’하고 자기만의 창녀를 갖기 위해, 입에 담기에도 꺼려지는 인간 종들이 <장자연>을 만드는 세계에서 경제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빼았기는) 것이 현실이다. 더 얻은 사람이 있다면 빼앗기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경제적 형편 대문에 사랑을 빼앗긴다는 것은 소설이 아니다. 이런 저런 사정, 특히 경제적 형편 때문에 남편을 버리고 돈 벌러 나왔다는 이야기는 항용 듣지 않는가. ‘생식 능력만 있는 이’(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의미이다)가 성적 상대를 빼앗긴다는 것은 그에게 행복 추구권리, 사랑을 통한 감정 충족 까지도 박탈당한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진다.

노동자들은 반장에게 비 호감적이다. 단지 반장이 우리보다 돈을 더 많이 번다는 것에 대한 질투만은 아니다.

반장 급은 일을 시키고, 목수들이 일하는 것을 감시한다. 일반 목수들이 자주 쉬어야 하지만, 반장들은 한 달 내내 일 할 수 있다. 일당도 더 많이 받는다. 책임이 큰 만큼 돈 많이 버는 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진리를 탐구하는 이들이 일신의 영달을 위해 태도를 바꾼다면 그것은 <변절>이다. 그러나 반장이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도 아니니 그가 노동자 편이 아니라 사용자 편이라고 해서 변절이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의도를 해석하자면, 반장들이 미운 이유는 ‘한 사람의 노예 상태를 다른 사람의 완전한 인간적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서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평택 항 현장에는 반장이 두 사람이다. 월급 받는 총 반장은 모든 데마, 철근, 콘크리트, 형틀을 총괄한다. 목수 반장에게 작업지시를 하는 것도 총 반장이다. 그리고 일당 노동자 목수 반장이 있다. 반장들이 정확히 일하면 ‘되 나우시’는 없다.

지금도 항용 그렇지만, 옛날이라야 몇 십 년 전만 해도 거짓말처럼 돈 잘 버는 오야지들은 애인이 있었다. 대충 서너 사람이 기억난다. 잡철 오야지의 여성은 아기를 안고 현장에 함께 왔다. 현장에서 그녀가 하는 것은 아이를 어르는 일이다. 어느 목수 오야지는 젊은 여성에게서 얻은 아이를 키우기 위해 은퇴할 나이가 훨씬 넘도록 일했다. 둘 이상의 여성을 거느린 미장 오야지는 오통으로 항상 허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애인인 여성들로부터 두목 노동자의 ‘카리스마에 반했다’는 이야기를 우회해서 듣곤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어느 여성의 결정을 이끌어주는 남성다움에 반했다는 것인 즉, 그 여성이 일종의 매저키스트적이거나 자기 독립적(자기중심적이 아니라)이지 못한 여성들일 것이다. 그러한 결합이 바람직할 리 없다. 다만, 그 여성들이 경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면, 그러니까 파고다 할머니들이 엄존하는 현실에서 타인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는 여성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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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외국인 노동자와 내국인의 임금

목수들이 아주 흔히 화제를 삼는 것이 외국인 노동자와 내국인 인건비에 관한 것이다. 80년대부터 현장을 떠나지 않았던 O씨가 말했다.

“90년대만 해도 2000년 도에는 목수 품값이 일본이나 미국 수준이 되리라고 예상했다. 당시에는 젊은 사람들이 목수 일을 배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점점 임금이 올라가는 추세였다. 그런데 갑자기 IMF터지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오면서 품값이 오히려 떨어졌다. 여행 비자든 방문비자든 개의치 않고 현장에 와서 일하는 통에 완전히 망했다.”

87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면서 건축노동자들의 품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공공연히, ‘노태우가 우리 형편을 좋게 해 주었다’고 말했다. 지금이야 5,1.6프로의 보수층이 있지만, 권력 지지 기반이 없던 당시로서는 정치가들이 기층노동자들에게 어느 정도 잘 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보다 정보도 많고 똑똑하다. 중소기업 협회 등에서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 인건비가 싼 나라를 만들려고 불철주야 노력한다.

한 나라의 경제가 발전하고 인건비가 비싸지면 값 싼 노동력을 외국에서 끌어들여온 역사는 길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라 당대의 노동자들이 처한 절실한 문제였다. 노동 시간이 짧아지고 인건비가 오를 만하면 자본가들이 가난한 나라의 값 싼 노동력을 끌어들이는 통에 노동자들이 국제적으로 단결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가난한 나라의 값 싼 노동력이 만들어 내는 것은 생 떽쥐베리가 분노하듯이 <살해된 모차르트>들, 짐짝처럼 실려 있는 폴란드 노동자들이 탄 기차의 교육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만이 아니다. 자국과 타국 노동자들의 빈곤의 공평화도 만들어낸다.

일회용 인간?[노동이야기]- ⑦

일회용 인간?[노동이야기]- ⑦

이 재 원(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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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정당하다

며칠째 이곳 J읍 인력에서 일을 얻고 있다. 몇 일 비가 온 후 날이 개었다. 오늘은 컨테이너 짐 하차, 일명 까대기 작업을 했다. 인력사무실에서 운동선수와 나, 둘이서 이 고추장 공장에 배치 받았다. 그는, “부지런히 까대고 일찍 집에 가자”고 했다. 공장에서는 오전에 일을 마치기를 요구한단다. 컨테이너 기사도 바삐 짐을 내려줘야만 다시 일하러 갈 수 있단다. 중국에서 제조해 컨테이너로 운송해 온 고추장, 20킬로 박스 한 컨테이너당 천 개씩 도합 2천개를 하차해야 한다.

박스를 파레트에 60개 씩 쌓아 올리면 지게차가 운반해 갔다. 운동선수는 숨도 안 쉬고 작업을 계속했다. 나도 보조를 맞춰나갔다. 그는, 자기는 지구력이 없어서 일찍 일을 못 마치면 지쳐 나가 떨어진다고 했다. 첫 번째 컨테이너를 비울 때까지 딱 한 번 쉬었다. 그것도 공장 직원(아줌마)이 커피를 갖다 주었을 때이다.

두 번째 컨테이너 작업을 할 때, 그가 갑자기 주저앉았다. 근육에 경련이 왔단다. 무심코 작업하는데, 나도 온 몸에 경련이 일었다. 나는 주저앉지는 않았다. 심장만 뛰면 계속 움직이리라, 생각하고 끝까지 달렸다.

오전 열 시 반, 마지막 박스를 파레트에 올리자, 지게차 기사가 창고 정리 좀 하고 가라 했다. 나는 단번에, 못하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운동선수의 차에 앉아있었다. 지게차 기사가 와서, “이라와요, 잠깐만 (정리) 하면 돼”, 하고 나를 불렀다. 나는 지게차 기사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어른이 초등학생을 이용해 먹냐?”

창고에서 25킬로짜리 고추 마대를 운동선수와 둘이서 여덟 파레트 쌓아주었다. 이 정도 일 도와주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지게차 기사는 자기 할 일을 용역 노동자에게 떠 넘기는 것이니 이용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내가 그토록 짜증을 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까대기하며 운동선수로부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는 성미가 무척 급해서, 박스를 반듯하게 쌓아 올리되, 딱 한 번에 파레트 위에 놓아야만 한다. 내가 박스를 바로잡기 위해 조금이라도 꼼지락 거리면 작업시간이 늦어질 뿐만 아니라, 자기까지도 보면 힘이 빠진다고 야단이었다.

동정질까지 당했다. 작업 도중 나이를 묻길래 솔직히 대답했더니, “와, 대단하시네요. 나는 그 나이에 아저씨처럼 힘 쓸 거 같지 않아요”하고는 태도를 바꿔 “천천히 하세요”라고 했다. 동정과 모욕은 백지 한 장 차이 아닌가.

이튿날도 까대기 작업에 배치 받았다. 이번에는 파트너가 바뀌었다. 회사원인 그는 야간작업이어서 일하러 왔다 한다. 내 나이를 듣고는 아예 나의 작업 속도에 보조를 맞추었다. 도리 없이 다시 동정당했다. 어제보다는 작업하기 덜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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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누가 이들의 편이 되어줄 것인가?

비 오기 4일 전, 그러니까 J 용역에 처음 온 날, 자동차 도색 공장에 일하러 갔다. 액티비티 카본, 활성탄을 교체하는 작업이다. 도색 과정에서 페인트 냄새를 잡아주는 것이 활성탄이다. 실내 작업장의 공기를 활성탄 박스를 거치도록 강제 송풍하면 페인트 냄새가 없어진다. 정수 과정에서 쓰이는 등, ‘활성탄’ 쓰임새로 보자면 친환경 느낌을 준다. 그러나 작업자들에게는 이것이 노역이다. 쓰리 엠 마스크를 쓰지만 소용없다. 방진복을 입지만, 미세 가루는 방진복을 뚫고 들어온다. 또한 건조한 활성탄 가루가 습기를 찾아, 눈의 진액과 만나면 눈 주위에 달라붙는다.

일곱 명이 한 조가 되어서, 24칸, 사용한 약 천개의 활성탄 자루를 꺼낸 후 높이 1.5미터, 길이 3미터, 폭 2 미터의 박스에 다시 담는다.

꺼낼 때, 두 조가 되어, 한 사람이 3층에 설치된 박스 안으로 들어가 활성탄 자루를 꺼내 주면 다른 사람이 이것을 받아 옮겨 지상 1층으로 던진다. 아래 사람들이 이것을 항공마대에 담아 지게차로 폐기장으로 옮긴다.

네 개의 큰 박스에 칸막이가 24개이다. 폐기할 활성탄 자루를 다 꺼낸 후에는 다시 칸막이에 새로운 것으로 다시 담는다.

크레인으로 활성탄이 담긴 항공마대를 들어올려 3층 난간에 살포시 내려놓는다. 그러나 크레인은 항공마대를 완전히 내려놓아서는 안 된다. 3층 난간이 낡아서 중량에 못 이겨 무너져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장까지 달려들어 두 칸을 한꺼번에 작업한다. 한 칸에 각기 한 사람씩 두 칸에 들어가면 나머지 사람들은 항공마대로부터 탄 자루를 꺼내 손에 손으로 전달해 칸에 넣어준다. 항공마대에서 탄 자루를 꺼내 전달하는 반장은 빛의 속도이다. 크레인을 빨리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크레인으로 들어 올려 작업하는 곳은 그나마 수월했다. 그러나 크레인이 닿지 않는 칸이 있다. 엘리베이터로 2층까지 올린 다음 2층에서 3층까지는 계단을 통해 받아치기한다. 2층에 두 명이 계단으로 올리면 계단에 늘어선 세 명 사람들이 위로 전달 전달해서 맨 위 3층에 있는 사람에게 전달한다. 우즈베키스탄 사람 A는 4-5킬로의 활성탄 자루를 공놀이하듯 한 손으로 빙글 돌려 올렸다. 나는 한 손으로는 들어 올려 전달하기 어려웠다. 두 손으로 받아, 머리 위로 치켜 올려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가슴은 터질 듯 뛰고, 숨은 턱 끝까지 닿았다. 이렇게 1000개를 올리고 나니, 새삼 체력 좋은 유전자를 남겨주신 조상에게 감사할 것 밖에는 없었다.

중국동포 형제 중 동생이 활성탄 박스로 들어가 새 것을 담는 중이었다. 형이 버럭했다. 빨리빨리 하라는 뜻이다. 덥고 먼지 많이 나는데 작업을 서둘러 끝내야 한다는 거다. 둘이 싸울 듯 했지만 그들은 형제이다. 열받은 동생이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작업했다. 더운 박스 속에서 답답했던 것이다. 나는 아찔했달까, 그가 걱정스러웠다. 활성탄이 호흡기를 통해 폐로 들어가면 인간의 장기는 그것을 해소해 내지 못한다. 그냥 폐에 붙어있게 된다.

그가 진폐증 진단을 받았다 하자.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다. 회사는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들, 이를테면 작업자를 채용하고 월급과 보험을 책임지느니, 외주를 줘서 이런 일들을 해치운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작업자들이 임시직이었다지 않는가. 도장회사는 도급 주는 것으로 그들의 할 일을 다 한다. 그 와중에 용역 노동자들은 보호받을 길 없는 신세가 된다.

진폐 진단이 날지라도 동생 이 씨는 하소연할 곳이 어디에도 없다. 도장회사를 상대로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 그는 이 회사 직원이 아니요, 가끔(작년에도 한 번 왔었다) 와서 일했을 뿐이다.

회사는 D반장에게 도급을 주었다. 다시 말해서, 문제가 생기면 D반장이 책임지라는 뜻이다.

안전장구도 문제이다. 활성탄 같은 고농도 분진 작업시 특수 방진 마스크는 필수이다. 또한 김서리지 않는 고글을 작업자에게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도급 맞은 반장이 한 번 쓰라고 비싼 장비를 사 줄 리 없다. 아주 형식적인 마스크, 청소할 때나 쓰는 M3를 제공했다.

회사는 큰 돈을 벌면서도 귀찮은 공사에 있어서는 어느 것 하나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직영노동자를 고용한다면 4대 보험, 산업재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고, 작업 시간은 지금 용역 노동자들이 하는 것 보다 두-세 배 늘어날 것이다.

물어야 한다. 자본주의적 방식이 오직 이윤 극대화만 중시해야 하는지, 법인 회사가 하도급 주고 그 비용을 지불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 한 것인지. 용역 노동자들의 작업 환경을 방치하는 것이 과연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인지.

이튿날은 비가 왔다. 나는 활성탄 다시 작업을 하러 가면 쓰려고 보안경을 샀다. 가서, 쓰고 버리는 인간들이 당하는 고통을 지켜보리라.

활성탄 작업이 끝났다. 다들 화장실로 들어가 얼굴을 씻었다. A가 세수한 나를 보고, “예뻐요, 예뻐요”라고 했다. 거울을 보았다. A가 빈 말을 한 것은 아닌 듯하다. 얼굴은 그런대로 탄가루가 씻어졌으나 속눈썹 부위는 탄가루가 붙어있었다. 쌍꺼풀인 늙은 내 눈 주위는 눈 화장한 할머니급 여인의 그것처럼 (예뻐) 보였다.

형제 중 동생이 내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형님, 어려우시죠?” 나는 그의 행동이 순수한 호의임을 알아차렸다. 이해상관 없는 호의는 정신병도 치료하지 않는가. 나는 편히 그에게 어깨를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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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배 농장 노동

까대기 이틀하고 무릎과 허리가 몹시 아파, 사흘 쉬었다. 다시 배 농장에 배치받아, 몇 일 간 지베레린 처리 작업을 했다. 배는 구슬만 했다. 배나무와 배를 연결하는 가느다란 꼭지에 지베레린을 발라 주면 배를 추석 때쯤 출하할 수 있다. 지베레린은 성장 촉진제이다. 이것을 칠하고 나서 적과 후 배에 봉지를 씌워주면 배가 크고 껍질은 얇되, 빛깔이 예쁘고 당도도 뛰어나다.

하여튼 좋아 보이는 것은 먹지 않는 것이 좋다. 가난한 밥상이 최고다.

지베레린은 차약과 비슷하게, 튜브에 담겨있다. 이것의 뚜껑을 열고, 그 위에 차솔 두 개를 겹친 것 같은 꼭지를 설치한다. 꼭지에 지베레린을 새어나오도록 한 후, 배 꼭지에 밀어넣으면 목적하는 위치에 약품이 발라진다.

작업은 쉬웠으나 조심할 것이 많았다. 지베레린이 배에 닿으면 배가 썩는다. 닿지 않도록 조심하되, 칠하지 않은 채 지나쳐서도 안 된다. 특히 배 잎사귀에 가려져 있는 것들을 빼 놓기 쉽다. 이것을 조심해야 한다.

여덟 사람이 일하러 갔다. 두 사람은 특별했다. 한 사람은 중국동포 여성으로, 제빵사이다. 다른 한 사람은 함께 까대기 한 회사원이다. 두 사람은 오늘 휴일이라서 일하러 왔다고 했다.

배 농장 부부는 사람들이 좋았다. 이 농장 4천 평, 도합 6개의 배 농장이 있다고 했다.

사진 ?이재원

이튿날에는 배밭 전문 여성 노동자들 11명과 함께 작업했다. 여성노동자 팀장이 우리 용역 노동자들까지 작업 지휘를 했다. 그들은 하루 일당 5만원을 받는다 했다.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을 관찰할 수 없었던 나는 그들의 작업과 정서를 열심히 훔쳐보았다. 웃고 떠드는 와중에 싸움도 잦았다. 특히 ‘억측’을 하는 여성들이 어려웠다. 한 쪽이 길고 반대 쪽이 짧은 배나무 밭 두둑이 있다 하자. 긴 쪽을 맡게 된, 억측을 즐기는 여성 작업자들이, ‘꼭 나에게만 어려운 곳을 주는 군’이라는 식으로 불평했다.

억측하는 사람 자신을 할퀴고 주변 사람까지 해치는 것이라서, 억측을 자주 하는 사람은 친구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나를 포함해서 그 누구도 억측하는 여성 노동자와 맞대기(일찍 자기 두둑을 끝낸 이들이 아직 끝내지 않은 배 두둑의 맞은편으로 가서 작업해오는 것)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고개를 쳐들고 배 씨알을 찾으려니 눈이 무척 아팠다. 일을 끝날 때 쯤 되어서는 고개를 쳐들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배나무 그늘과 그 녹색의 푸르름 때문에 일 년 내내 일하라 해도 일 할 수 있을 듯 기분이 좋았다.

여성 노동자들은 몇 일 후 배 봉지를 씌우는 작업을 시작한다. 아침 5시부터 저녁 8시까지 약 한 달 간 일한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3천개를 싸면 하루 15만 원 정도 번다. 진위를 가릴 수 없으되, 여성 작업자들은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끼려, 그냥 나무 위에서 소변을 본다고 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그렇게 돈 벌다가 몸을 망가트린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장마 전까지만 일하고, 7-8월 달에는 어디 틀어 박혀 내 계획에 따라 시간을 쓸 생각이다. 일이 없을 때까지 열심히 일을 따라 다녔다. 술을 안마시니 돈이 그대로 모여 있어 틀어박힐 경비는 충분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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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옘병(화염병) 맞을 놈들

k씨가 얼마 전 교회 장로가 되었다. k씨는 양 어금니가 없다. 식사하는 모양이 자연스럽지 않고 무척 어려워 보인다. 단무지도 씹어 삼키지 못하고 우물거리다가 뱉아 낸다. 그는 집이 근처인데도 중국 동포 형제들과 함께 용역사무실 숙소를 쓴다.

k는 장로되면서 천만 원을 교회에 냈다.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서인가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옘병 받아야 할 목사이군”이라고 중얼거렸다. 용역노동자, 한 푼 안 쓰고 모아야 일 년에 천만 원 저축할까 말까 하다. 점심 식사하는 중에 한 말이었는데,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마뜩치 않았다.

k씨에게 은근히, 아무렇지 않은 듯 물었다.

당신 소속 교회 장로는 몇 명인가?

-61명이다.

장로들 직업은 대개 무엇인가?

사장들이다.

장로되려면 교회에 내는 돈이 있는가?

-장로 장립식 행사비는 낸다. 그러나 그 외에 돈을 내는 것은 자유이다.

목사가 당신 직업을 아는가?

-다 안다.

당신이 노가다 하는 것도 아는가?

-물론 안다.

당신 어금니 다구앙도 못 씹는데, 교회 돈 내지 말고 이빨 치료하는 것이 더 옳지 않은가?

-남의 사생활에 대해 왜 그렇게 알려 하는고?

노동자들의 삶에 관심이 많은 푼수라서.

들은 이야기이다. 기지촌 여성들이 미국에 많이 갔다. 그들이 과거를 세탁할 길은 한인 교회 집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먹을 것 안 먹고 집사 되기 위해 헌금했다더라. 헌금 많이 하고 장로인 k는 구원받는 앞자리에 위치할까? 내 눈에는 하느님과 일대 일의 통로를 가진다는 특징을 가진 교회의 목사가 장로 장사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예수는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자와, 죄 없는 자가 아니라 죄 있는 자와 함께 있”었다(공지영).

인간 증오의 토대-지배(쫒겨 돌아오다) [노동이야기]- ⑥

?인간 증오의 토대-지배(쫒겨 돌아오다)[노동이야기]- 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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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 원(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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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항에서 일하다 쫓겨 돌아왔다. 사정은 이렇다. 오랜만에 비가 왔다. 오전부터 함께 일하는 이들, 새우등 배 씨, 전 씨 알 씨와 막걸리를 마셨다. 장항 항구와 여기 저기 거리 구경도 하다가, 밥집에서 점심 식사하며 또 마셨다.

평일에는 모두들 일이 끝난 후 저녁 식사에 술들을 고파 했다. 그러나 누구도 “술 한 잔 마시자”라고 말 못했다. 유일하게 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공사 책임자이지만 아주 가끔일 뿐, 좀체로 술 한 잔 하기 어려웠다.

막걸리 앞에서 나는 발 달린 비지밥통이다. 점심에 술 마신 후에는 걸을 수가 없었다. 동료들에게 부축해 주기를 부탁했다. 여관으로 왔다. 사 들고 온 막걸리를 한 잔씩 더 하기로 했다. 방 문 앞에 와서 부축했던 이들이 나를 들이 밀었다. 그 순간 중심을 읽고 앞으로 넘어지며 막걸리 병에다 눈을 박았다.

이튿날 일하러 갈 수가 없었다. 정신은 몽롱했으며, 눈은 끔찍했다. 현장에서는 누가 다치는 것에 크게 신경 쓴다. 얼굴에 상처 있으면 누가 볼까무서워 공사 책임자가 우선 꺼린다. 거기에다 문자로 공사 책임자에게 헛소리까지 했다. 그의 답문 메세지는 화가 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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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캐릭터들

장항에 오기 전에는 이 팀과 홍성에서 경사면 공사를 했다. 나의 임무는 ‘열차 감시원’이었다. 공사 중에 열차가 오가면 휘슬을 불어 노동자들이 대피하도록 한다. 처음에는 이 일만 했다. 그러나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현장에서 감시원 노릇만 할 수는 없었다. 한 발 한 발 일에 적시다 보니 나중에는 열차 감시보다 작업자가 되어 있었다.

지하수가 흐르거나 비가 오면 선로의 자갈에 물이 고인다. 이 물들은 약한 지면이나 낮은 경사면에 몰리고, 이 물들이 선로 경사면을 파먹게 마련이다. 따라서 자주 경사면을 보수해 줘야 한다. 포크레인이 작업을 하지만 장비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은 순전히 인력으로 해야 한다.

ⅰ) 포크레인이 진입할 길을 만들기 위해 휀스를 철거한다.

ⅱ) 포크레인이 무너진 경사면을 흙으로 채운다.

ⅲ) 작업이 끝나면 그린 망을 씌우고 풀씨를 뿌린다.

ⅳ) 휀스를 원위치대로 복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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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레인 김 사장은 오랫동안 경사면 작업을 했다. 가파른 둔덕에 장비를 고정하면 작업할 때는 완전히 누운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하루 종일 쉬는 법이 없었다. 그는 저녁이면 끙끙 앓는 소리를 했다. 그는 공사 책임자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했다. 4.5톤 트럭을 운전해 자질구레한 짐들을 가지러갈 때면 들어줄 수 없을 정도로 불평을 했다. 그러나 사장 앞에서는 활짝 웃는 낯빛으로 응대했다. 나는 일종의 감정노동도 겸한 셈이다.

나는 주로 휀스 작업을 했다. 몇 년 전에도 해 본 일이라서 손에 익숙했다. 주로 중국동포 새우등 배 씨와 우즈베키스탄 동포 알 씨와 손을 맞춰 일했다.

새우등 배 씨는 나이가 무척 많아 보였다. 그러나 연변에서 농사꾼이었다는 그는 일 하는 데 익숙했다. 왜 그처럼 나이 많아 보이느냐는 농담 섞인 질문에도 화내는 법 없이 재미있게 답했다.

“아이들 잘 먹이려고 일 하다가 이렇게 늙었지.”?

그는 15년 전에 상처한 이후로 아이들을 혼자 키웠다고 했다. 지금은 모두 장성했다. 배 씨의 고향 친구 전 씨에 의하면, 배 씨가 아이들을 키우며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배 씨가 일하는 것을 보자면, 하루 종일이라도 삽질 할 기세이다. 작은 체구에 끈질기게, 부지런히 일했다.

가장 오랫동안 내 기억을 괴롭힌 것은 홍성에서 일할 때의 안전관리자였다. 그는 고위 공직자 출신이었다. 그는 내 임금의 세 배일 것이다. 거기에다가 이상한 내역으로 백 만원을 더 받는다고 했다.

그와 처음 만난 날, 명언만 뱉아내는 그의 발언에 그의 성격에 이상한 느낌을 갖기는 했다. “우리 일반인들은 운동권을 사기꾼으로 안다”는 멘트에서부터 “전두환 같은 사람이 나와서 (운동권을) 쓸어버려야 한다”고 했다. 나중에는 말끝마다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종북좌파”였다. “종북좌파는 북한에 가서 살아야 돼”라고 덧붙였다.

북한 핵실험 이후 그의 명언은 품격을 더 했다. “지금이라도 본때를 보여줘야 해”로 시작해서, ‘골통 보수’가 아닌 ‘보수 꼴통’인 자기들이야말로 ‘애국자’라고 했다. 1993년인가, 북한이 핵실험할 때 미국방장관이 인터뷰한 내용을 이야기했다. 미국이 북한을 공격할 가능성을 검토했다. 그러나 전쟁 나면 한국군 수십 만, 미군 5만여 명이 전사할 것이요, 이에 대한 정치적 부담이 미국으로 하여금 북한 핵실험 응징을 포기했다. 또한 전쟁 나면 한국은 지금의 경제력을 포기해야한다는 반박에, 그것은 “종북좌파”들이 만든 말일 뿐이라며, 지금 북한을 응징하지 않으면 대대로 북한에 눌려 살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우리 나라의 진정한 안전과 관심사들”에 관해서는 읽을 생각도, 들을 생각도, 기억하지도 않으려 하는 그의 무식을 탓했다.

자기 의견에 맞지 않으면 모두 고무줄 논리로 종북좌파라고 매도하는 그의 인간증오의 원인이 되는 트라우마가 뭔지 그의 이야기에서 찾고 싶었다. 그가 고위 공직에 있을 때 노조와 맞부딪혔다. 그는 당시 “무척 고생했다”라고 말했다. “전두환 때는 편했어. 노조가 힘이 없었거든. 그런데 노태우 때부터 힘이 세진거야. (노조가 자기를) 원수 대하듯 대드는 통에 무지 고생했다.”

노조가 약했을 때는 (그가) 편했다는 말을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부정적인 내용이 더 클 것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랬다. 야만과 공적 살인, 인간의 권리를 짓밟히는 시절이 그에게 좋았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자면, 다른 사람들을 짓밟은 토대 위에서 그의 공직생활이 좋았다는 의미 아닌가?

내 주변에서 우파를 만난 적 있다. 고향이 대구인 그 사람, 단 한 명이다. 귀중한 모임이 있었다. 그가 하는 이야기는 그가 공부한 것이나 글 쓰는 내역(윤리학)과 달라 무척 갈등했다. 결국 나는 그 모임을 포기해야만 했다.

홍성에서 처음에는 나, 포크레인 김 사장, 안전관리자와 여관방을 함께 썼다. 안전관리자가 여관에 들어와 보고는, 내게 ‘공사책임자에게 방을 따로 얻어달라’고 이야기하라고 말했다. 특유의 사람을 매너지(manergiment)하는 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다른 방으로 옮겨 앉았다.

안전관리자는 아침에 역장(이나 공사관리 공무원)과 미팅을 했다. 가끔 그와 함께 역에 나갔다. 우연찮게 풀무 전공부 홍 선생님을 역에서 뵈었다. 홍 선생님이 사모님께 나를, ‘교수님’이라고 소개했다. 홍 선생님은 노동에 관심이 많으시다. 나는 더 이상 강의는 안하고 노동한다고, 글도 쓴다고 근황을 이야기했다. 홍 선생님은 내가 혼자가 아니라, 웹진(인즉 동료들)과 함께 글 쓴다는 사실을 축하하고 격려해 주었다.

안전관리자와 나는 저녁 식사에 거의 항상 막걸리를 반주 삼았다. 두 세병 막걸리 값은 그가 냈다. 그의 숙부는 건국 후 초대 정부 부서의 총장을 지냈다. 그의 숙부도, 그의 부친도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연금, 개인연금, 건물세 등을 받는다. 여기 일 안 해도 먹고 살 만큼 큰 돈을 가지고 있단다. 그러나 그는 일 년에 7개월 이상을 일한다고 했다. 그는 노동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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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여덟 명이 한 팀이다. 공사 책임자인 사장, 포크레인 김 사장, 안전관리자, 나, 일을 진행하는 박 씨, 새우등 배 씨, 전 씨, 알 씨다. 포크레인이 못 들어가는 곳의 경사면이 무너져 있다면 마대에 흙을 담아 축대를 쌓는다. 흙은 경사면 아래에 있고 무너진 곳은 몇 미터 높이에 있다. 흙을 담아 사람과 사람 손을 통해 위로 전달한다. 그 작업이 힘들었다. 작업 경험이 많은 박 씨는 팀장 노릇을 했다. 다른 작업자들은 그에게 꼼짝 못했다. 배 씨만이 “일 시키면 사장이야”라고 불평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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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에도 경사면 보수 작업을 했다. 그 때에도 일을 마치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했다. 정확히 표현할 수 없지만, 노가다 판에는 이상한 폭력이 있다. 말이 공손하지들 못하다. 특히 나쁜 사람들이 아닌데, 말은 폭력적이다. 그것을 견디기 힘들었다. 이것은 내 문제일 수 있다.

군대 제대 후 한 6개월을 아직 군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항상 다리를 오그리고 자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일종의 ‘폭력 노출증’에 시달렸던 셈이다. 무엇인가 압박해 오는 질서를 지금도 참지 못한다. 은근한 폭력, 주먹이 아니지만 분위기와 말투, 쓰는 용어들이 폭력적이다. 특유의 충청도 서부 사투리 때문일 수도 있다. 또는 노가다 판의 생리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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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장항으로 옮겨 와서는 보도 벽돌을 들어내고 벽돌보다 넓은 점자 보도블럭으로 교체하는 작업이다. 장항에 와서는 모두 여관에서 잔다. 공사 책임자 사장, 박 씨, 새우등 배 씨, 전 씨, 알 씨, 나, 그리고 안전관리자 김 씨 형님이 새로 가세했다.

ⅰ) 빠루를 이용해 벽돌을 걷어올린다.

ⅱ) 손수레에 담아 항공마대로 벽돌을 옮긴다.

ⅲ) 벽돌을 빼 낸 자리에 다시 보도블럭을 심는다.

ⅳ) 크레인을 이용해 항공마대를 밖으로 옮긴다.

ⅴ) 항공마대에 담긴 벽돌은 폐기장에 갖다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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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이 벽돌을 걷으면 배 씨와 나는 항공마대로 옮기는 일을 했다. 3일간 벽돌을 옮겨 나르다 보니, 형광 천을 붙인 안전조끼를 보기도 싫어졌다.

벽돌을 다 걷은 후 보도블럭을 다시 심는 작업이다. 세 사람이 수레를 이용해 보도블럭을 날라오면 박 씨가 보도블럭을 심었다. 다리를 불편히 하는 박 씨에게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안 아프다면 이 나이에 사람이 아니지, 참고하는 거지”라고 말했다. 나는 보도블럭을 심는 박 씨를 앞 서 나가며 모래를 손보았다. 박 씨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보도블럭을 심어 보았다. 열 장도 심지 못 해 허리가 끊어지듯 아파왔다. 내일 비가 온댔지, 육체가 일기예보를 해 준다. 그리고 다음 날, 내가 술 취해 쫓겨오게 된 날이다. 아침부터 비가 왔다.

폐기물 비용은 비싸다. 폐기장에서는 벽돌을 부수어, 모래와 흙을 분리한다. 생생한 벽돌을 돈 주고 부순다니, 아깝다. 민표에게 메세지 했다. “안녕, 나 장항역. 재활용 벽돌 무제한.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운임 부담해 가져가면 좋지.”

민표가 자기 친구를 통해 벽돌을 처치해 주었다. 회사는 폐기물을 재활용 처리한 덕분에 몇 백 만원 이득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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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홍성에서의 안전관리자가 하던 말들을 곱씹게 된다.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록 이 시대의 노동하는 인간들의 고통을 더 생각하게 된다. 대조적인 두 가지 예가 생각난다.

나는 강사 하던 대학교에서 1급 공무원 출신이 교수로 취임하는 것을 보았다. 2천년 초반 교육법이 바뀌면서 만들어진 제도 덕분이었다. 한 두 명이 아니었다. 정치 계열에 특히 그런 사람들이 많이 왔다. 학생들이 가장 큰 피해자였다. 함께 식사한 (고위 공무원 출신) 사람들로부터 강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대개는 자기의 경험을 이야기한다고 했다. 그들의 경험이 필요하다면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수란 학문을 가르치는 것이지 경험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국회의원 빽이면 돈 들고 가는 인간보다 우선 교수가 되는 학교였다.

이해할 수 없던 것은 89년이었다. 나는 전교조 노동자 선생을 교장이 징계위원회에 회부한 (해고하는) 현장 농성장에 있었다. 권력의 강요라고 말할 수 없었다. 노동조합 자체가 징계위원회(학교 이사들)에게 불리하다는 상황을 즉각적으로 알고 실천한 것이다. 새파란 젊은이들을 자른 이들은 모두 이 지방에서는 유력한 인사들(돈 많고 잘 사는)이었다. 노동조합이 없다면 ‘자유로운 닭장 속의 여우’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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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대지[노동이야기]- ⑤

인간의 대지[노동이야기]- ⑤

이 재 원(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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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0년도의 품삯으로 고정되다

아파트 주차장 공사 현장이다. 바닥 슬래브에 이미 기둥(하스라)을 심었다. 양 옆 지상에 노출되는 주차장 거푸집을 완성했다. 이곳은 특이하게도 공장에서 하스라를 완성한 형태로 가져와서는 크레인으로 들어올려, 제 자리에 심고 난 후 슬래브 콘크리트를 타설했다. 남은 부분은 램프(지하 주차장 자동차 길)로, 앞으로의 공사 순서는 다음과 같다. 지상에서 보(하리)와 슬래브를 짜, 크레인으로 들어 올려 완성된 형틀에 이어 짜 맞춘다. 하리와 슬래브를 바닥에서 짜서 크레인으로 들어 올린다는 발상은 아주 새로운 노동 방식으로, 크레인이 널리 보급되면서 시작되었다. 자재를 일일이 사람이 들어 올려 짜 맞추던 예전 방식에 비해 공기가 무척 단축된다.?

오늘 새벽, 목수 일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서울 용역에 갔다. 소장이 말했다.?

“십만 원 받고 목수 조공 갈래요? 내일은 팀(목수) 보내 줄 테니 …”

나는 두말 않고 고개를 끄떡였다. 서울 용역에서 철근공이라는 성정동 사람과 나, 둘이서 현장에 ‘팔려’ 나갔다. 철근공은 나이가 많았다. 그는 평생 철근 공을 했으나, 일당 10만원을 받는다고 했다. 이유를 물었다. 그는 ‘늙어서 (누가 써주지 않는다)’라고 했다. 현장에 기존 팀원 7명이 있었다. 현장은 산세 좋고 주변은 탁 트인 남향이었다. 지세가 사람을 편하게 하는가보다. 마음도 쾌적했다. 광 씨가 지휘를 하고, 김 군, 성정동, 나를 포함한 네 명이 하리 통을 짰다. 현장에서 치수 표준은 mm단위이다. 7400길이에 높이 450의 하리 통이다.

ⅰ) 90 각재(오비끼)를 600 길이로 잘라, 900 간격으로 바닥에 배열한다.

ⅱ) 90×50 각재(투바이)를 올려 ⅰ)과 못으로 고정한 후, 이음새를 50×50 각재로 연결한다.

ⅲ) 각 파이프를 1 위에 올려, 움직이지 않도록 파이프 양 옆에 빗 못으로 박아준다.

ⅳ) 400으로 자른 합판을 ⅱ)의 위에 올려, 투바이에 30만 물리도록 작은 못으로 박은 후, 굵은 못(8cm)을 ⅰ)과 ⅱ) 부분에 겹쳐 박는다. 반대쪽도 이 과정을 반복한다. 이 때 합판 양 끝 부분을 투바이에서 80이 남도록 밖으로 밀어내야 한다. 80 부분을 이미 완성된 슬래브 하리에 올려 연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ⅴ) 눕힌 양 모서리에 45cm×120cm 폼을 7장 올려붙인다.

ⅵ) 3cm 삼각형 멩끼를 ⅳ)의 안쪽 아래, 코너 부분에 박는다.

ⅶ) 패널 아래쪽에 구멍을 뚫은 다음 6번 반생이를 꽂아놓는다. 철근 작업 후 반생이를 조일 것이다.

 

못 박기 시작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팔목이 아팠다. 오래 일을 안 한 탓에 근육이 놀랬다. 굵은 못이 나뭇굉이에 걸려 잘 들어가지 않았다. 두 손으로 망치질하는데, 성정동이 말했다. “거 뭐야, 두 손으로, 츳…”

괘씸했다. 두 손으로 못 박는 기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두 손 망치질은 콘크리트 못 등 단단한 곳에 못 박을 때 요긴하다. 이 기술은 절 지으며, 한 자짜리 대못을 함마로 때려 박을 때 익혔다. 두 손으로 망치질 하는 목수는 드물다.

처음에는 김 군을 “애기야”라고 불렀다. 고등학교 막 졸업한 앳된 얼굴이었다. 그러나 곧 출산을 앞 둔 애기아빠였다. ‘애기가 애기를 낳는군.’ 그가 하리 통 밖에서 안으로 손을 넣어 멩끼를 박았다. 그것이 무척 불편한 자세이다. 내가 하리 통 속으로 들어가서 박았다.

그토록 식욕이 당기는 점심은 오랜만이었다. 평소에는 풋내 때문에 잘 먹지도 않던 봄채소 무침(김치)은 달디 달았다. 밥과 생선 두 토막, 국을 남김없이 다 먹었다.

식사 끝낸 후 현장 불 옆에 쉬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팀원들이 왔다. 재료가 떨어져, 오전 작업이 끝이란다. 내일도 데마찌란다.

 

서울용역 소장이 4만 5천원을 주며 말했다.

“내일 꼭 나오세요, 그런데 목수 맞아요?”

“네.”

소장이 재차, “정말 목수 맞아요?” 라고 말했다. 나는, “옛날 목수, 오야지급, 다른 일 하다가 작년부터 목수일 하기 시작 했어요” 라고 덧붙였다. 소장이 다시, “내일 꼭 나와요, 나는 사람을 이리저리 돌리지 않아요, 한 현장만 보내요”, 라고 했다. “그거 좋네요.”

매일 이곳저곳 팔려 다니면 항상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주변 환경이 익숙해 질 때까지 스트레스를 받는다.

밤새 잠을 설쳤다. 소장의 ‘목수 맞느냐’는 말이 스트레스를 주었다. 오랫동안 일 안한 탓에 복잡하게 현대화된 공정을 따라잡기 힘들다. 시스템 동바리 등, 작업해 보지 않은 일을 만나면 눈치껏 해야 한다. 말이 눈치껏이지, 누가 핀잔이라도 준다면 참고 일하기 어렵다. 밤 새 꿈을 꾸었다. 새벽에 일어나 생각했다. 먹고 사는 것이 이토록 힘든가?

아침 일찍, 서울 용역에 갔다. 전에 함께 일했던 김 씨를 만났다. 그의 말은 나를 더욱 겁먹게 만들었다. ‘현장에서 일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장이나 기사가 득달같이 용역회사에 전화한다. 왜 이런 목수도 아닌 사람을 보냈느냐… 그러면 온 동네가 시끄럽다. 자기도 어떤 사람 소개했다가 우세만 당했다.’

온양 터미널 현장에 여덟 명이 갔다. 어제 함께 일했던 평 반장과 씨와 이 씨도 함께 갔다. 지하 3층을 올리는 중이었다. 땅 속 깊숙한 곳에 현장이 있었다. 목수 작업은 깔끔했다. 그러나 일 분량이 많지 않았다. 하리 통을 다 만들어 올리고 땜빵만 남아 있었다. 땜빵도 30여 군데 뿐이었다. 여덟 사람이 일 할 분량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 몇 명이 사무실로 커피 마시러 갔다. 사무실 기사가 말하더란다. ‘목수 네 사람만 보내라 했는데, 이처럼 많이 왔느냐. 데스라 네 명만 올리겠다. 알아서 하라.’

함께 간 목수들이 웅성웅성 말이 많은 와중에 평 반장이 자기는 돌아가겠다고 했다. 나도 그 뒤에 줄을 섰다. 이 씨를 포함해 셋이 돌아왔다. 평 반장의 진단인 즉, 서울 용역 소장이 터미널 현장을 ‘잡으려고’ 시위차 목수를 많이 보냈다고 했다.

이 씨가 버스표를 샀다. 버스가 터미널에 도착했다. 나는 차 한 잔 하라고, 내 거처로 그들을 이끌었다. 길을 가면서, “회사에서 일해도 돈을 잘 받을 수 있느냐, 예전에는 돈 받기가 어려웠다”라고 물었다. 이 씨가 어두운 얼굴로, “돈 받기 어려우니까 다들 용역회사에 나가는 건데…” 라고 말했다. 노동자들은 뻔 히 일당에서 10프로를 떼이며 용역회사에 나가 일 한다. 이 씨의 표정은 이런 사정에 대해 말하는 셈이다. 평 반장은 매일 일당을 지급하는 식으로 목수들을 데려다 쓴다고 했다.

평 반장은 한껏 내 거처를 부러워했다. 그는 1천만 원에 20만원 월세를 산다. 그러나 그는 실질적으로 많은 돈을 굴린다. 적어도 목수 일당 서너 달을 줄 수 있는 돈이다.

평 반장이, 용역회사 거치지 말고 자기 팀으로 들어오라고 제안했다. ‘그날그날 10만 원씩 주마, 곧 다음 현장으로 옮긴다, 그 때 돈을 올려 주겠다.’ 나는 늙은 철근공의 말을 생각했으며, 지방에 가서 일 할 경우 생기는 경비를 생각했다. 나도 평 반장에게 제안했다. ‘계단을 시켜다오.’ 계단은 일이 많은 대신 무거운 것을 나르거나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육체의 부담이 적다. 이어 말했다. ‘대신 자주 와서 치수 잘 맞추고 있는지 질문하고 감독만 해 주라.’ 이 씨가 웃으며 말했다.

“참 어렵네.”

 

2. 돈 떼어먹고 도망간 두목노동자

 

오전에는 하스라 통을 마저 끝낸 후, 오후에는 슬래브를 짰다. 슬래브 칫수 가로 7400, 세로 3600 넓이의 슬라 13개를 짜야 한다.

ⅰ) 바닥에 6m 강관 파이프 두 개를 깔고, 6번 반생이 네 개를 그 아래에 끼워놓는다.

ⅱ) 시다 오비끼를 3000으로 9개를 잘라, 강관 파이프에 적정 간격으로 배열한다.

ⅲ) 시다 오비끼 양 옆과 중간에 900×500 각재와 사각 파이프를 올린 후, 가네(직각)를 만든다. 이 과정이 중요하다. 직각이 틀어지면 슬래브 짜 맞춤이 어려워진다.

ⅳ) 이 위에 합판 을 300씩 밀어낸 다음, 각재 위에 못으로 고정한다.

ⅴ) 합판(세로 910, 가로 1820) 세 장을 세로로 늘어놓고, 870으로 잘라 붙이면 3600이 된다. 이어서 합판 아홉 장과 합판 땜빵 12를 끼워 넣으면 7400이 된다. 이 과정에서 반생이를 합판 위로 올려 빼 놔야 한다. 그래야만 반생이에 크레인 고리를 걸어, 들어 올릴 수 있다.

 

?이재원

오늘 노동자들의 화제는 단연 돈 떼어먹고 도망간 ‘창수’라는 목수 오야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현 씨가 도망간 오야지를 변명했다. 창수 씨는 매일 하청회사(협력회사라 부른다)에 데스라(일일 공수)를 올렸다. 인원수만 올렸다. 그런데 하청회사가 돈 계산하면서 갑자기 일 한 노동자 명단을 내어놓으라 했다. 창수가 명단이 없다고 하자, 하청회사가 돈을 안 주었고, 창수 씨만 독박 쓰고 도망갔다는 것이 요지였다. 새빨간 거짓이지만, 참고 분석해 보면 이렇다.

ⅰ) 건축법 상 원청회사가 협력회사에 일감을 주면, 협력회사는 도급(재하청)을 주어서는 안된다. 원청회사는 관리자만 두고 있다.

ⅱ) 하청회사도 건축 담당 기사와 관리자만 고용하고 오야지들에게 재 하청을 준다.

ⅲ) 목수를 투입하는 큰 오야지가 따로 있다. 그가 재하청업자이다. 큰 오야지는 평 씨처럼, 여러 명의 두목노동자를 불러 일을 시킨다. 창수 씨는 작은 규모의 재 하청업자였다.

 

창수 씨의 경우,

ⅰ) 하청회사가 창수 씨로부터 데스라를 받을 때 노동자 명단이 아니라 인원수만 받았다면, 애저녁에 돈을 떼어먹으려 한 짓이다. 임금 못 받은 노동자가 노동부로 가서 하소연한다 해도 일 한 증거가 없으니, 노동부에서도 막막할 것이다.

ⅱ) 창수 씨가 회사 데스라에 노동자 명단을 올렸다면, 그는 돈 받아 도망갈 셈이었다.

둘 다 동일한 원인이 있다. 하청과 재하청의 고리가 그것이다. 그런데 다시 의문점이 더 생긴다. 창수 씨는 어떻게 하청회사에서 노임을 한꺼번에 받아, 개별 노동자에게 나눠주는 역할을 했을까? 그리고 원청회사는 왜 이것을 묵인했을까?

도급노동을 주지 말라는 법도 애매하기 그지없다. 이를테면 특허 노동의 경우는 도급노동을 허용한다. 또한 누군가 내부 고발해서 도급노동을 하청 준 것으로 법정에 섰다 하자. 재하청 준 협력회사는 벌금을 내는 것으로 끝이다. 임금을 못 주었다 치자. 하청 업자는 ‘돈이 없어서 못 주었다, 돈 벌어서 임금 주겠다, 지금까지 받은 돈은 자재비 등등에 썼다’, 라고 하면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하청회사는 유한 책임만 지고 있다. 공사에서 손해 보았다면 자기 돈을 털어 보상할 이유가 없다. 하청회사에 중요한 것은 공사에 대한 책임뿐이지 임금이 아니다. 또, 하청회사가 재 도급 업자에게 임금을 준 것도 애매하다. 법정에서 시비가 가려진다면, ‘관례상 오야지에게 노동자들 임금을 주어왔다, 오야지가 노동자에게 다시 돈을 주는 것이 관례다’, 라고 하면 그 또한 처벌 방법도 기준도 없다. 도둑놈들이 행세하는 세상이니, 기회만 있다면 도둑들이 생길 것이다.

 

3. 기계와 함께 하는 노동

오전에는 하리 통을, 오후에는 슬래브를 제 자리에 위치시켰다. 크레인이 하리 통을 매달아, 이미 작업해 놓은 슬래브 양 옆에 이어 붙이는 작업이다. 지상에서 하리와 슬래브를 짜서 들어 올린다니, 사람들 참 똑똑하다.

평 반장이 슬래브를 크레인에 매달아 현장으로 유도하면 양 옆에 한 사람씩 서서 하리 통을 잡아 제 자리에 위치시킨다. 크레인이 잡시 멈춰 선 사이, 슬래브 아래에서 하리 통 아래에 삿보도(철제 지주대)를 받친다. 슬래브를 짜면서 베갯목에 대못을 박아 놓았다. 우선은 하리 양 끝을 받친 후, 중간을 받치고, 나머지를 받친다. 네 명이 삿보도 작업을 했다. 광 씨가 진두지휘를 하고, 김씨, 김 씨 친구 조공, 그리고 나 넷이서 작업했다. 크레인은 계속 하리를 날라왔고, 우리는 바삐 작업을 서둘렀다.

요령들이 없어 힘들게 삿보도 작업들을 한다. 삿보도 아랫부분을 직선으로 제 자리에 위치시킨 후, 속 강관을 끄집어 올려 베개목 못에 끼운 후, 겉 강관과 핀으로 연결한 후, 나사를 돌려 적절한 높이로 올리는 식이다. 그런 식으로 작업하면 무척 힘들다. 요령을 부리면 작업이 조금 쉽다. 삿보도 아랫부분을 제 자리에 위치시킨 후, 삿보도를 비스듬히 하여 속 강관을 뽑아내, 흘러내리지 않도록 단단히 잡아 수직으로 세운 후 못에 걸리도록 들어 올리면 조금 힘이 덜 든다. 중력 법칙에 적응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어렵기는 여전하다. 고개를 위로 향하고 작업하는 통에, 팔과 다리, 허리는 물론 목까지 아프다. 광 씨가 잠시 쉬는 시간에, 삿보도 받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작업일 듯 하다고 말했다.

점심 먹으러 가면서 목을 아래로 숙이고 걸어갔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 천정 벽화를 그리면서 항상 고개를 쳐들고 일했다. 그는 고개(목)가 아파, 쉴 때나 평상시에는 고개를 숙이고 다녔더란라.

오전에 하리 통 여섯 개를 걸었다. 오후에는 슬래브를 정치시키는 작업이다. 생 떽쥐베리의 아름다운 소설 『인간의 대지』에는 노동자로서 부럽기만 한 노동들이 나온다. “사막에 간다는 것은…하나의 샘을 우리의 종교로 만드는 것이다.” 정원을 가꾸듯 사막에 샘을 파는 행위이다. 사막에 사는 사람들이 물을 깃기 위해서는 며칠을 걸어야 하며, 우물이 있는 곳을 찾아낸다 해도 “낙타 오줌이 섞인 흙탕물이 나올 때까지” 모래를 파내야 한다. 그 샘을 찾기 위하여 “청춘이 스러지는 것을 겁내지 않는 것”이 인간이다. 사막에 사는 이가 유럽의 수풀 우거진 샘을 보고는 말했다. 인간의 노력 없이 모든 풍요로움을 허락하는 신이란 “속이는 신”이다(6,사막에서).

노동자로서 더욱 부러운 장면이 있다. “하룻밤 동안 인간을 얼음덩어리로 만드는 안데스 산” 속에 불시착했다가 일주일 만에 살아 돌아온 기요메가 말한다. “동료들은 내가 걷고 있는 줄로 생각한다. 그들은 모두 나를 믿는다. 그러니 만약 내가 걷지 않는다면” 나는 동료의 기대를 저버리는 “못난이다”.

조립식 노동, 삿보도를 받치는 노동에는 동료가 없다. 잠시잠깐 쉬면서 함께 모여 담배를 피운다. 그 뿐이다. 다시 흩어져, 불연속적이고 분리된 존재로 노동한다. 노동의 영감도, 창조성도 없다. 끝없는 노역으로서의 노동만 존재한다. 고독한 인간이 삿보도 사이에 끼여 있다. 생 떽쥐베리는 대지에 선 인간 노동의 목표를 분명히 제시한다.

“우리가 이런 도구들을 통해서 찾아내야 하는 것은 자연, 정원사나 항해사, 혹은 시인의 자연”이다(3, 비행기). 시인의 노동, 정원사의 노동이라니, 얼마나 황홀한가. 그는 대지와 결혼할 것이다.

 

4. 진화의 과정과 의사의 노동

슬래브 작업을 마치자, 그 다음 날 부터는 일이 쉬웠다. 벽체 반생이를 조이거나 도리잡기, 즉 건물의 수직과 수평, 일직선이 되도록 형틀을 잡아주는 작업 등이었다. 평 반장 팀은 원래 옆 건물로 가서 작업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곳 공기가 늦어지는 바람에 이곳 주차장 공사를 돕고 있다. 따라서 일감이 많지 않았다. 하루건너 하루 일 하는 식이라서 노동자들 불만이 많았다. 나는 몸을 만들 기회이므로 대체로 만족했다. 무릎이 아파, 쉬는 날 병원에 갔다. 의사가 말했다. “관절에 변형이 시작되었네요. 노동을 해야 하지만 관리의 차원에서 병원 자주 오세요.”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중력법칙을 이기고 두 발로 서도록 진화해 왔으니, 관절 변형이 오는 것도 진화의 과정이지.’

옛날 목수들이 하는 이야기가 있다. ‘젊었을 때 일 안하고 노는 것이 보약 한 첩과 같다.’ 물론 일을 많이 하면 관절이 빨리 달아 없어질 것이다. 덕수가 전화로, “힘든 일은 하지 마세요”라고 했다. 나는, “일하든 안하든 나이 들면 관절은 사그라지게 마련이야. 힘든 일이든 쉬운 일이든 크게 문제 안 돼. (다 진화의 과정에 있는 거야),”라고 대답했다.

그 와중에,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의사를 만났다. 어금니를 뺏다. 마주대하는 이가 없으니 시간이 지나면서 반대 편 어금니가 이가 솟아날 것이다. 여러 의사들에게, ‘솟아나지 않을 방법’을 문의하고 다녔다. 하나같이 임플란트를 하라고 했다. 아니면 빠진 옆 이를 삭감하여, 브릿지 형식으로 어금니를 하나 달아내라 했다. 이를 삭감한다고 생각하자 우울해졌다. 임플란트는 죽어도 하기 싫었다. 죽을 먹고 살거나, (이가 새로 솟기를 기다릴 참이다). 발품을 팔고 다닌 끝에,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의사를 만났다. 솟아날 이를, 맞물리는 치아가 있는 옆 이와 한데 묶어놓는 것이다. 그 분의 노하우인데 공개해서 어떨는지… 만약, ‘기술이 돈’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공개한다 해도 기꺼워하시리라.

노동자가 노동을 두려워하랴[노동이야기]- ④

노동자가 노동을 두려워하랴[노동이야기]-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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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재 원(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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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폐기물 공장의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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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에 의하면 외국인 근로자가 근로연수생 명목으로 들어올 때 1500-3000달러를 들여야 한다. 그 비용이 희한하다. 중소기업협동조합에 200만원 이상, 송출회사, 대사관 부로커들이 ‘먹는다’.

그들은 자기 조국을 위해 일 할 수도 있었다. 그들을 키워준 것은 그들의 이웃과 가족이다. 교육받고 일 할 준비 했으나 그곳에는 일자리가 없어 외국에 왔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보이지 않는 차별들을 감수한다.

겨울에는 일이 없다. 몇 개 있는 일자리는 대단히 열악한 것으로, 일 년 내내 그곳을 마다하지 않고 나갔던 외국 사람들의 몫이다. 내국인들은 그곳에 하루 일 갔다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용역회사가 일 배치하는 패턴이 있다. 자주 오는 사람이 우선이고, 어떤 현장에 계속 나가는 사람에게 그 현장에 우선권을 준다. 나 같이 가끔 가는 이들은 금, 토요일에나 일이 돌아온다.

노동자들도 천차만별이다. 금, 토요일은 경마장에 간다. 일주일 일 했으니 주머니들 두둑히 가지고 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차비도 안 남기고 다 쓰고 온다.

이번 겨울, 나는 용역회사에 나가 하루 일했다. 방수회사에서는 겨울이라서 외부 공사를 전면 중단했다. 일한 날, 중국동포 두 명, 키르키즈스탄에서 온 사람들 두 명, 나 이렇게 5명이 폐기물 처리공장으로 배치되었다.

중국 동포 김 씨는 특별한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술을 좋아해서, 현장에서 고철을 주워가는 고물상 주인이 항상 현장에 사다 놓는 소주를 아침부터 마신다. 그는 앞 서 말한, 열악한 환경의 현장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몇 년째 다니고 있다.

키르키즈스탄에서 온 둘 중 한 명은 작년에도 같이 일적 적 있다. 푸른 눈에 키가 크다. 그에게, ‘카레이스키(혼혈)’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아리안’이라고 답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리스 철학의 원류와 니체의 [비극의 탄생] 해석의 문제로, BC 15세기 그리스에 들어와 아티카 문화를 발전시킨 고대 ‘아리안’들에 대해 관심 관심이 있어, 지금도 그에 관한 책들을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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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하는 일은 항상 똑같다. 컨베어 벨트 옆에 마련한 의자에 앉아 쓰레기 주어내는 일 네 사람, 컨베이어벨트에 올리기 전 폐기물에서 미리 나무 토막 등 큰 쓰레기를 모아 버리는 작업이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일 한 적 있다. 쇠붙이 등을 골라내는 전기 자석 장치에 의해 콘덴샤가 폭발하면 대단히 놀라게 된다.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나고 불이 붙기도 한다. 또한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올라오는 것들은 만지는 것 자체만으로, 아니 보는 것만으로도 파상풍 걸릴 듯하다. 여름이면 악취가 진동한다. 겨울이면 차가운 얼음덩어리 쓰레기를 주워내는 통에 손에 동상 걸리는 듯하다.

이렇게 처리된 쓰레기는 태워 스팀으로 만들어 옆 제지공장에 보내고, 남은 모래와 자갈은 다시 사용한다. 플라스틱과 물렝이(연질의 플라스틱)는 재사용 분리하지 않는다. 쓰레기들과 함께 연료를 분사해 태운다. 그 과정에서 스팀을 만들어 옆 한솔제지에 공급한다.

나는 컨베이어벨트의 처음 공정, 포크레인이 쓰레기더미를 파내 흩어놓으면 굵은 쓰레기를 주워내는 곳으로 배치되었다. 작업할 것들은 산허리를 파헤치고 나온 생나무들, 집을 허문 뒤 나오는 목재들이었다. 컨베이어벨트 작업보다는 비교적 쉽다. 포클레인 기사는, ‘왔다갔다 하지 말고 잘 주어 내. 이거 하려고 (용역회사에서 작업자) 부른거니까’, 라는 등 잔소리도 심했다. 하우스 덮개 같은 큰 물건은 쇠스랑으로 찍어 끌어내었다.

태국에서 온, 이름을 이야기하는데 도통 외울 수 없는 이와 함께 일했다. 옹박이라 이름 붙였다. 바싹 마른 몸매에 순박한 눈을 가지고 있다. 그 몸에서 기운이 얼마나 센지, 내 몸통 반 만 한 나무도 휙 집어던진다. 옹박은 회사에서 월급 주는 것이 아니다. 고물상에서 이곳에 한 사람 배치했다. 고철을 주어 모으되, 쓰레기도 주워낸다.

그의 자존심을 세워 주는 일은 비교적 간단하다. 무에타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 말에서 한 단어만 알아들었다. “무에타이!”, 하더니, 시범을 보인다. 팔끔치로 가격하고 무릎을 들어올려, 밖으로 뺀 자세에서 상대 옆구리 가격하고는, 번개같이 뒤돌아서며 상대의 머리를 가격하는 흉내를 낸다. 몇 년 수련했느냐는 내 질문에 그는 손가락 세 개를 내 보였다. 3년 수련할 경제력이 있다면 그도 태국에서는 비교적 경제 형편이 좋았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그의 시범 답례로 양가 태극권을 시연했다. 그가 내가 시연한 것이 태권도냐고 했다. 내가 태극권이라고, 중국 기(氣) 운동이라고 말해도 이해하지 못했다.

상명대에 가장 좋은 만화도서관이 있다. 각국의 만화들이 있다. 평소, 도서관으로 걸어가서 만화도 보고 책도 보다가 점심 먹고 나서는 한적한 곳을 찾아 태극권을 했다. 운동 안하고 나이 들면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꾸준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태극권을 돈 내고 배운다는 것은 노동자에게 불가능하다. 비용뿐만 아니라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태극권 선생도, 중국 사람이라고 해서 아무나 태극권 할 줄 아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문화도 향유할 수 있는 사람, 부자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무에타이 덕분에 점심 먹으며 나에 대한 태국 사람들의 호의어린 눈길을 감지할 수 있었다. 옹박이 마구 자기 친구들에게 말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 없을지라도, 내가 무에타이를 좋아한다, 태국 사람들 무술 최고다, 라고 했다는 등의 말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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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계단 짜기?

어디에나 가난이 펼쳐져 있다. 집 뒤에 목욕탕 겸 찜질방이 있다. 용역회사에서 만났던 사람들 몇 명을 본다. 잠잘 곳이 없어 찜질방에서 생활한다 해도 그들은 노동하는 사람, 노동자이다.

40대 신씨는 힘이 좋아 6미터짜리 강관을 두 개씩 메고도 날아다녔다. 어느 노인은 ‘저녁은 대개 빵으로 해결한다’고 했다. 덜 쓰고 저축하기 위해서다. 잘 먹지 못하는 탓에 그는 체중이 50킬로도 안 나가 보였다.

찜질방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함께 일했던 김씨이다. 그와 손 맞춰 며칠을 함께 계단작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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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거푸집 짜는 것은 3차원의 사고를 필요로 한다. 평면도를 보고 입면을 생각하고 다시 전체 계단을 상상해야 한다. 김씨와 함께 만들었던 계단 도면은 높이 580cm, 상하 계단넓이 사이 20cm를 뗀, 한 쪽 넓이 120cm 양 넓이 합 260cm, 오도리바(계단참) 네 개의 비교적 큰 지하계단이다.

ⅰ) 계단 오름 방향 하부 벽체 거푸집을 준비한다. 계단을 향해 마주선다면 오른쪽이 오름 측이 된다. 후미당 세움 벽체 넓이 180cm, 높이130cm으로 합판을 잘라 준비하고, 여기에 계단 시작부 높이 30을 더해서 높이 160cm이 되도록 판넬을 만든다.

ⅱ) 계단벽체(후미당 하부), 전면, 좌측에 준비한 판넬과 철재 폼을 이용하여 외부 거푸집에 고정시킨다. 철재 폼은 타이가 잘 맞는다. 그러나 목재 판넬은 외부 폼과 이가 잘 맞지 않는다. 따라서 세파타이(안밖의 이가 맞지 않는 부분에 쓰는 변형타이)를 사용한다.

각 벽체가 콘크리트 타설시 밀리지 않도록 강관파이프를 가로 세로로 고정시킨다.

ⅲ) 상방향 후미당(계단 밑바닥)을 올릴 작업을 한다. 아시바(밭침대)를 설치하면서 시다오비끼(밑밭침) 9cm, 네다(횡목) 9cm을 고정시킨 후, 치수대로 합판을 잘라 후미당을 완성한다.

ⅳ) 첫 번째 오도리바를 설치한다. 아시바를 사용하여 시다와 네다를 설치한 후, 가로260cm, 상방향 96cm, 하방향 130cm이 되도록 합판을 잘라 고정시킨다.

지금까지 한 작업을 네 번 반복하면 네 개의 오도리바와 계단 총 높이(590cm)의 계단하부 거푸집이 완성된다.

이제 계단 상부거푸집을 짜 올려야 한다.

ⅴ) 계단 상부 벽체 거푸집(사끼리)을 설치한다. 보폭, 보고 부분을 계단모양이 나오도록 나나미(사끼리)로 잘라 판넬을 짜 붙이는 작업이다. 이 때 철재 거푸집폼을 사용하여 공중에 떠올린 상태로 외부 거푸집에 고정시킨 후, 그 아랫부분에 베니야를 잘라 판넬을 짜 붙인다. 일곱 계단을 높이와 폭에 맞도록 잘라 판넬을 짠 후, 세파타이를 이용해 외부 거푸집과 기존 설치한 계단 상부 폼에 고정시킨다.

이 때 각 보폭 보고 계단 콘크리트 두께 15cm가 나오는지(이 부분이 허공에 떠 있어야만 콘크리트가 이 부분에 들어간다)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ⅳ) 전방 벽체를 다음 오도리바(세 번째 오도리바) 높이까지 설치한다. 대개 폼 치수가 부족하거나 남는다. 부족하게 폼을 올린 후, 치수 높이까지 합판을 잘라 판넬을 짜서 보강한다. 오도리바에서 콘크리트 타설할 치수 15cm를 허공에 띄워, 외부 거푸집에 폼을 고정시킨다.

ⅶ) 내림계단(두 번째 오도리바로 올라가는 법면-왼쪽 방향) 벽체(사끼리)를 설치한다. 이때 콘크리트를 타설했을 때 오도리바 세로 방향이 140cm가 나오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작업(ⅴ, ⅳ, ⅶ)을 한번 더 반복하면 계단 내부 벽체 거푸집이 완성된다.

ⅷ) 계단폭 120cm가 되도록, 그리고 콘크리트 높이 15cm를 채울 수 있는 높이로 법면 네 군데에 게꾸미 고정대를 설치한다.

목수가 작업을 끝내면 철근공이 작업을 한다 철근작업이 끝나면,

Ⅸ) 완성된 계단 거푸집에 콘크리트를 채울 폭 26cm, 높이 17cm 간격으로 게꾸미(계단 밭침)를 설치한다.

일 끝나면 김 씨와 나는 거의 매일 ‘슈퍼 했’다. 나는 대개 맥주나 막걸리를, 그는 소주를 마셨다. 그는 당시에 목수 송출회사의 숙소에서 기거했다. 목수 송출회사란 두목 노동자가 만든 회사로, 용역회사와 다르다. 목수 예닐곱 또는 열 명이 소속돼 있어 두목 노동자가 이들을 시켜 작은 현장에서 도급노동도 하고, 대 건설회사 직영 형식으로 목수들을 ‘대여’한 다음, 회사에서 팀장 수당을 받는다. 도급노동이 불법이므로 대기업 건설회사들이 찾아낸 방법으로, 일종의 파견노동 형식을 제공하는 것이 송출회사의 역할이다.

하루는 김씨가 술 취한 채 일하러 왔다. 온전한 날에도 가끔 의견 충돌하는데, 술 취한 그와는 불안해서 함께 일 할 수 없었다. 나는 반장에게, ‘말 못할 사정으로 집으로 가야겠다’고 말하고는 그냥 돌아왔다. 그 뒤로 그 회사에 일하러 가지 못했다. 기본급 받는 회사에서 일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김씨에게는 남쪽에 가족이 있었다. 그의 사정을 듣자면, 아이들 공부 중이라서 겨울이 가장 문제라고 했다. 여느 노동자처럼 겨울 일 못하면 생활비는 빛이 되어, 다음 해까지 그 영향을 미친다.

지금 그는 송출회사 숙소를 나와, 용역회사에서 일을 다닌다고 했다. 일 다니며 이곳 찜질방을 숙소로 삼는다. 그는 올 겨울 내내 일했다. 오늘만 쉬는 중이다. 내가, “겨울에 일해서 다행이네요, 겨울에 일하면 힘들기야 하지…” 라고 말하자, 그는 “억지로 일하는 거지요, 일 시작해서 아침 열 시 까지는 손이 시려워 어찌할 줄 모르죠”라고 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나는 김씨의 의중을 알 수 있다. 일 없는 것이 문제이지, 노동자가 고생하는거야 문제될 거 없다. 김씨는 겨울에 일할 수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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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거푸집 기능사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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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가 내게 물었다.

“어떻게 지내세요?”

“그냥 놀아요. 용역회사 가끔 나가봐도 일이 없어요.”

“일 안하고 어떻게 살아요? 생활비는?”

“거푸집 기능사 자격증이 있어요. 그 덕분에 회사에서 기본급을 받아요.”

“그 자격증이 어떻게 소용되죠? 어떤 식으로 시험을 봐요?”

“우리 포스코 현장에서 일한 적 있잖아요, 거기 형틀 반장이 있었어요. 도면 들고 다니며 스미(먹줄) 놓은 거 대조하거나,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라고 지시하던 사람이 형틀목공 기능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죠. 연줄이 있다면 그 사람처럼 월급쟁이 할 수도 있죠. 또는 회사에 소속해서 일 할 수도 있어요. 각종 공사 응찰시 기능공 자격증이 필요하거든요. 기본급이 얼마 안되는 대신, 일하면 일당을 따로 받는 식이죠.”

거푸집 기능사 자격증 시험은 5시간 30분을 준다. 시험 문제는 ‘현치도를 작성한 후, 내경 480 cm, 외경 530cm, 높이 560cm의 원형 거푸집 반쪽을 짜라’고 했다. 시험문제 도면은 수직재 16개, 띠장 12개, 연결재 9개가 있다. 필요한 재료를 받았다. 현치도를 그리기 위한 켄트지랑 목재들이다.

ⅰ) 자와 콤파스를 사용해서 켄트지에 내경 480, 외경 530이 되도록 수직재와 띠장, 연결재를 평면화 해서 그린다.

ⅱ) 현치도 위에 띠장 재료를 올리고, 컴파스를 사용해서 도면에서 따 올린 후, 직소톱을 이용해서 자른다. 연결재도 같은 식으로 원형이 되도록 잘랐다. 작업 순서대로라면 수직재를 자동대패로 가공해야 하지만 수험생들이 자동대패에 몰려있어 시간을 벌기 위해 띠장과 연결재를 먼저(우선) 가공했다.

ⅲ) 자동대패를 이용하여 수직재를 두께 25mm, 넓이 52mm로 가공했다.

ⅵ) 기계대패로 수직재를 외경52cm, 내경 48mm로 마름질했다. 대패질하기 편하도록 현치도보다 1mm씩 줄였다.

작업중 어떤 사람이 와서, ‘자기 기계대패가 고장났으니, 다 썼으면 내것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는 ‘실어도(초짜)’다. 기계대패는 힘주어 쓰면 탄소가 타서 금방 고장난다. 타인 연장을 빌려 쓰면 탈락이다. 그 사실을 말해 주었는데, 그럴지라도 빌려달라 했다. 초짜가 시험보러 오는 이유는 여러가지이다. 외국인일 경우 기능공 자격증으로 비자를 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ⅴ) 수직재를 560mm씩 자른 후, 이것을 네 개씩 띠장 상단 중단 하단, 세 개에 고정시켰다. 고정시키는 과정이 중요하다. 수직재 이가 잘 맞지 않으면 불합격이다. 서로 맞을 때까지 정교하게 대패질했다.

ⅵ) 띠장에 연결한 수직재 모듬, 도합 네 개를 연결재로 고정시켰다.

형틀이 완성되었다. 점검해 보니 합격 가능했다. 시험문제, 현치도, 형틀을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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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사 자격증 덕분에 기본급 받는다거나 회사 관리자가 되는 것이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이를테면 그 자격증으로 원자력 발전소 건설공사를 수주했다 하자. 이런 건물 때문에 고생하는 후손들은 몇 십 년, 몇 백 년 후 이렇게 말 할지도 모른다. “배고파서 원자력 발전소 건설 일을 했다고? 속없는 인간들이 살았었군. 굶어 죽었어야 옳지. 그래, 배고프다고 무기공장에서도 일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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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 안하는 겨울, 노동자는 운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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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력은 쓰지 않으면 아주 빨리 사그러진다. 일주일만 방구석에 쳐박혀 있어보라. 걷기에도 힘들어진다. 석탄 캐는 노동자가 옷에 석탄가루로 더러워지는 것을 두려워하랴만, 일을 하래도 몸이 안 따라주면 애달프다. 평소 육체를 단련해두지 않으면 안된다.

노동하기 위한 운동은 맨손 체조가 제일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불필요한 근육은 노동하기 불편하다. 근육이 걸리적거려서 두터운 옷 입은 듯, 움직이기 둔하기 때문이다. 끌로드 르 르슈의 영화 [우리와 같은 타인(Les Uns et Les Autres-사랑과 슬픔의 볼레로)]에 맨손체조하기 좋은 동작들이 있다. 이 영화는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를 중심에 두고, 2차 대전의 와중에 있는 네 예술가의 인생 여정을 사실과 상상을 교차하여 그리고 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글렌 밀러, 에디뜨 삐아프, 루돌프 누레예프가 그들이다. 감독이 가장 큰 공로자임은 말 할 것도 없지만, 작곡가까지 포함하여 걸출한 여섯 명의 천재가 등장하는 셈이다.

르 르슈의 영화 초반과 후반부, 유니세프 자선 공연에 위 네 사람의 예술가들(과 후손들)이 볼레로를 연주하고 누레예프 역의 배우가 차라리 운동에 가까운 춤을 춘다. 춤의 요점은 하체에 있다.

두 발바닥을 밖으로 벌려, 왼 발은 오른 쪽에, 오른 발은 왼 쪽으로 교차시킨 다음, 무릅을 적당히 굽히고 앞 뒷발 을 편히 벌린다. 발 뒷끔치를 볼레로 리듬에 맞추어 오리내리기를 반복한다. 때로는 앞, 뒷발을 좌우로 움직이기도 한다. 배우의 손동작을 따라 하기에 여의치 않아, 스트레칭하듯 자세를 취한다.

볼레로가 중요 모티프가 되는 영화가 또 하나 있다. 줄리 앤드류스가 주연한 [텐]이다. 또다른 여주인공은 볼레로가 성애(性愛)에 가장 적합한 음악으로 묘사한다. 음악이 어떻게 감성을 자극하는지, 어떻게 엑스타시(Ex-tasis)를 가능하게 하는지 여부는 각 사람의 정서에 따라 틀리겠으나, 어쨌든 감성해방의 기능이 있음은 분명하다.

볼레로 체조(춤)는 온 몸이 뻐근할 정도로 운동량이 많다. 그러나 이 동작이 지루하지 않은 이유가 음악 때문이다. 이렇게 열심히 운동하다가 안죽겠다고 떼쓸까봐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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