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좌 [노동이야기]-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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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좌 [노동이야기]-11

이 재 원(한철연 회원)

 

 

 

1. 극우와 극좌

아시시의 프랜시스의 경구를 실천할 수 있을까?? “필요한 것은 네가 써라. 남는 것은 타인의 몫이다.”

타인 지배와 관련한 또 다른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성가대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한 젊은 수도사가 그에게,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 악보집을 자기 개인 소유로 하기를 청했다. 프랜시스가 말했다.

“그대는 지금은 책 한 권을 소유하기를 원한다. 그 다음에는 다른 것을 소유하기를 원할 것이다. 나중에 그대는 이렇게 말 할 것이다. ‘형제여, 이리 와서 이것을 나에게 집어 다오.'”

프랜시스는 소유욕이 지배욕과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꿰 뚫어본 셈이다.

지배와 소유의 원칙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 극우적 성향이라면 소유와 지배에서 벗어나는 성향은 극우의 반대인 극좌가 틀림없다. 노동 현장에는 극우적 성향이 지배적이다. 만약에 극좌적 성향의 노동 현장을 만들 수만 있다면 좀 더 인간적인 노동세계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2. 팀장들

겨울에 목수일 얻기란 대단히 어렵다. 팀장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 이를테면 일 잘 하고 고분고분 자기 말 잘 듣는 사람들만 뽑아 데리고 간다.

나는 팀장이 좋아할 목수는 못 된다. 일찌감치 인력회사 사장에게 조공일 하기를 지원했다. 월급소장보다는 어대충 귀여운 용역회사 여사장에게 부탁했다. 나보다 나이 한 참 어린 여 사장은 나를 “재원씨, 재원씨”하며 불러 일을 보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름 대신 내 옷깃을 끌어, 그것을 일 보내는 신호로 삼기도 한다. 가끔 농담도 한다. 이를테면 여사장이 나이 많은 사람에게 일 관계로 전화를 했으며, 그런 이야기가 화제에 오를 경우, 나는 “노인에게 전화해서 뭣에 써요? 젊은 남자에게 전화해야지–” 라는 식의 개그다. 성적 수치심을 주지 않는 한도에서 농담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줄 뿐만 아니라, 약간 즐거운 상상도 가능하게 한다.

목수만 팀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조공도 팀장이 있다. 팀장을 지명하는 것은 대개 현장의 반장들, 또는 용역회사에서 팀장을 지명하기도 한다. 현장의 입장이든 용역회사의 입장이든 팀장을 지명해야만 인력 관리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용역회사는 팀장에게 “어디 현장 몇 명”이라고 알려주면 팀장은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을 뽑아 데리고 간다. 그런데 이 팀장에 임명된 사람들의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가 심상치 않다. 두목노동자도 아니고 보수를 더 받는 것도 아닌데, 전횡을 휘두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웃과 잘 지내야 하지만, 팀장들과 잘 지내기란 나로서는 어려웠다.

이곳저곳으로 일 하러 다녔다. 오피스텔, 학교 신축, 아파트 현장에서 조공으로 일했다. 조공 일은 목수 일에 비해 힘이 딱 절반밖에 들지 않는다. 목수 일은 진을 빼지만 조공 일은 수월하기 짝이 없어서 일 년 내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진-이재원

신축 22층 오피스텔은 분양가가 평당 천만 원이라 한다. 건물주는 전문으로 오피스텔을 짓는 사람이란다. 땅을 사고 자본 있으면 건물은 그야말로 저절로 올라간다. 건축회사 하나를 지정해서 건축 계약을 한다. 이 회사를 가리켜 원청이라고 한다. 원청회사는 5데마의 하청회사와 계약을 한다. 5데마는 토목과 목수, 철근과 콘크리트, 조적을 포함한 미장을 가리킨다. 원청회사는 다시 5데마와 하청 계약을 맺는다. 건축법에는 원청과 하청만 있다. 그런데 그게 애매해서, 특수한 경우에는 재하청도 허가하는 예외 조항을 두고 있다. 지금 모든 하청회사는 재하청을 준다. 직접 고용이란 건축 관련 분야에서 [없다]. 그리고 재하청은 회사 간의 제 살 깎아 먹기의 온상이다. 경쟁의 모든 하중은 개별 노동자들이 받는다.

JH 현장은 일할 만 했다. 눈 오면 눈 쓸고, 콘 타설하면 온도를 올리기 위해 난로 불을 피워야 한다. 회사의 반장은 나에게 매일 자기 현장에 일 나오기를 청했다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할 뿐만 아니라, 노가다 짬밥(경력)이 있어서 일머리를 알아 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용역회사 팀장 YH였다. 그의 행위 – 그는 타인을 지배하는 행위를 당연시했다 – 에 대해 바른말 하자, “너는 빠져라”고 했다. 나는 그가 일 안 나오는 주말에만 JH로 일 하러 갔다. 용역회사 사장이 “아저씨, JH가요”라고 말해도 YH가 있으면 뒷짐 지고 일 하러 가지 않았다. 보고 싶은 사람 못 보는 고통이 가슴을 에듯, 껄끄러운 사람과 함께 하루를 보낸다는 것 역시 지옥임을 다 알기 때문이다.

제임스 조이스가 말하듯, 이런저런 면에서 ‘흥미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 노동자들 간에 어린 아이 같은 일이 벌어진다. P 아파트 현장에 조공으로 갔다. 이곳에 몇 번 왔다. 어느 사이엔가 상황이 변했다. 전에는 용역 팀장을 지명하지 않고 일 했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엔가 이곳 용역팀장 X가 작업지시를 하고 있었다. 정화조 해체 작업과 자재정리였다.

나는 평소대로 자재 나올 분량을 예상하여 정리할 부재의 바닥 받침목을 깔고 그 위에 품을 쌓고 있었다. 용역 팀장이, 다시 받침목 깔 장소를 지정해 주었다. 그러나 그의 지적은 옳지 않았다. 그가 지정한 장소에도 받침목을 깔아야 한다. 그러나 내가 받침목 놓은 장소에도 역시 필요하다. 지하, 지금해체작업을 하는 공간에서 부재들이 많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사정을 말하자, 그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니, 내가 하는 작업 지시를 그렇게 고까워하면 나는 어떻게 작업을 시킨단 말이오?” 말 소리로 보아 X는 외국 동포였다. 이런, 사람들이 모두 나와 X를 쳐다보았다. 아하, 나만 몰랐을 뿐, 바로 옆에 회사 반장이 지켜보고 있었다. X팀장은 반장에게 나를 고자질한 셈이었다. 반장이 작업자 전원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한 마디 훈시를 했다.

“내가 시키는 일이 못 마당하면 이 현장 안 나오면 됩니다.”

그리고 나를 지목해서 말했다.

“마찬가지로 아저씨도 팀장 지시하는 것이 맘에 안 들면 안 나오면 됩니다.”

나는 큰 소리로, “네” 라고 말했다.

Y는 경증 뇌성마비 장애인이다. 젊다. L은 고관절 환자이다. 늙었다. L은 아픈 몸을 이끌고 먹고 살기 위해 일하러 온다. 나는 두 사람 모두 함께 일 해 본 적이 있다. L과 함께 일하러 가면, 그가 힘들지 않는 일 하도록 도와주었다. 순전히 말풍선이기는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L씨, 옆에 서 있어. 내가 다 하께”라고 말하기도 했다.

P현장에서는 오늘 따라 자재를 밑에서 위로 올리는, 일명 되치기 작업이었다. 하필 Y와 L이 한 조가 되어 일했다. L이 허리 아파서 자주 쉬었다. Y는 항상 쫓긴다. 자기 신체의 핸디캡도 있어, 일 해치운 분량이 늦어지면 일하러 오지 말라는 소리를 들을까 걱정이기 때문이다. 팀장이 채근하는 눈빛을 보이자 Y는 기어코 팀장에게 L을 고자질하고 말았다.

“저 아저씨가 일을 안 해요”라고.

밥그릇 싸움이라는 말이 아주 적절한 경우가 있다. 대개 일거리가 없는 겨울에는 교대로 일 나간다. 용역회사 소장이 일 나갈 사람을 지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선착순으로 사람들을 태우는 차를 타면 일 나가는 경우도 있다. 75세의 월남 참전용사 김 노인은 아주 일찍 와서 노란봉고차에 올라타 있다. 나도 두 번 그 차에 타 보았다. 그러나 도저히 일찍 올라탈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밥그릇을 뺏는 셈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온 사람은 일을 못 나가게 된다.

일 못나가는 사람들의 스트레스는 크다. 김 노인의 가계부를 보자. 월세 30만원, 겨울 연료비 30만원, 부인 병원비, 약값, 생활비가 기본으로 필요하다.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찍 와서는 노란 봉고차에 올라탄다.

3. 두 건축회사들

학교 신축현장, 국내 굴지의 전자회사 에어컨 설치 작업에 조공으로 배치 받아 갔다. 네 명이 갔다. 용역 소장은 내게, ‘아침밥을 사 먹고는 영

사진-이재원

수증을 회사에 제출하라’고 했다.

현장에 도착해서 두 명은 기초 안전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쫓겨갔다. 그 기초안전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 신분이 불확실하다는 뜻이다. 한 명은 혈압이 높았다. 따라서 세 명 쫓겨오고, 나만 남아서 일했다. 늙은 것이 힘만 좋아서 노동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다리 한 쪽 달아 매어놓는다 해도’ 하루를 보내는 것은 일도 아니다.

일이 끝나면 용역회사에서 주는 일일 공수 싸인을 받아가야 한다. 그것을 증거로 용역회사는 파견한 회사에서 돈을 받는다. 대기업 S전자 과장은 아침밥 영수증을 보고 말했다.

“이것은 내가 판단할 문제를 넘어서네요. 일은 한명 했는데 4인 밥값에 사인해 줄 수는 없어요. 현장소장님 오실 때가지 기다려 주세요.”

소장이 왔다. 문제를 설명 듣고는 내게 말했다.

“식사 한 명 분만 싸인해 줄께요.”

현장소장에게 말했다.

“일 못하고 간 사람들 차비는 못 주더라도, 부잣집에서 숟가락 하나 더 놓으십시오.”“부잣집을 떠나서, 기초 교육 안 받은 사람 보내면 안 되는 것, 혈압 환자 보내면 안 되는 것 알면서 보낸 용역회사 잘못입니다. 용역회사 가서 받으세요.”

나는 하릴없이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대기업 P건설에서 ‘안전기원제’를 올렸다. 작업자들은 세 시 반에 일을 마치고 강당으로 모였다. 성균관 집례관이 기원제를 주도했다. 봉행, 신위봉헌, 분향, 술 올리기, 축문독촉, 그리고 참석자들의 성의 표시와 배례 순서로 이어졌다. 나도 담배 한 가치(지갑을 집에 놓고 나왔다) 놓고 배례했다.

음식을 푸짐하게 차렸다. 한 200명 충분히 먹을 만한 양이었다. 떡은 작은 트럭으로 한 차정도? 되었다. 고기와 막걸리도 푸짐했다.

기원제는 내게 익숙하다. 현장을 돌아다니며 흔치 않게 보기 때문이고, 몇 십년 전, 매 해 농민과 공장 여공 조동조합 합동 기원제를 지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이 가장 진실한 것이다. 민주주의 염원 기원제는 당시의 우리들에게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것이었다. 출근 투쟁으로 마루타처럼 매맞는 여공과 전경환이가 해 먹은 도입우 여파로 거덜 난 농민들에게 간절한 것은 민주주의였다.

젊은 농민들은 음복 후 여공들이 내 뿜는 막걸리 세례를 얼굴에 맞고는 오히려 희희낙락했다. 노-동 기원제는 가난한 사람들의 축제의 장이었고, 연대의 장이었다. 상호 위로와 치유의 장이었다. 이들의 기원제는 경직된 건축회사의 기원제와는 영 달랐다.

지금은 성균관 집례관이 기원제를 집도하지만, 예전이라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건축 현장에는 무당이 집도하는 ‘고사’를 지냈다. 고사 비용은 무척 비싸다. 현장 소장의 주머니 돈이 아니라, 하청 회사의 부조금들이다. 대기업 현장 소장은 돈을 지불한 대가를 받는다.

어렵게 인터뷰한 새끼무당의 이야기는 ‘을화’의 내용과 같았다. 고사를 집도하는 늙은 무당이 있다면 여러 명의 젊고 아리따운 새끼 무당들이 있다. 보수를 두둑이 받은 새끼무당 중 하나는 대개 몇 개월간 현장소장의 애인이 된다.

4. 여성 건축노동자들

H 건설현장에서 여자목수가 경량철골, 내장 일을 하고 있었다. 여성으로서는 조금 무겁게 여겨질 대형 타카를 어깨에 메고 작업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한 팀이 되어 우께(도급노동)하면 도합 40만원 선일 것이다.

S 건설 현장에서 페인트 여공이 기둥에 테이핑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바삐 움직였다. 나는 기둥 주변의 장애물들을 치웠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자마자 일당이 얼마인지 물었다. 그녀는 10년차, 9만원을 받는다고 했다.

여공들은 대개 타일 조공, 페인트, 도배, 드물게는 내장목수 조공도 있다. 방수, 마감청소, 이사 청소도 여성들의 몫이 크다. 타일 여공 일당이 가장 높다. 부부가 함께 일한다면 하루 도합 40-50 만원을 받는다. 그만큼 타일 일이 어렵다. 오랜 숙련 과정이 필요해서 기능을 익히기도 어렵다.

중년 여성들의 일거리라야 식당밖에 없다. 그러나 식당의 노동은 해 본 사람만 안다. 일 자체도 고단하지만 손님들 접대하기란 보통 일이 아니다. 감정노동까지 겸해야 하기 때문이다. 건축여공들은 이구동성으로 식당 노동은 할 게 못된다고, 끔찍하다고들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여공은 H누나이다. 모든 면에서 나보다 나았기 때문에 연하이지만 누나라고 불렀다. 기능이 뛰어나서 반장을 제외하고는 임금이 가장 높았다. 그녀의 자랑은 지방대학 박사과정인 아들이었다. 아들이 학위를 받으면 아주 좋은 차를 사 주는 것이 그녀의 꿈이었다. 그녀의 집에도 가 보았는데, 동해안 큰 냇가 주변에 넓직한 단층 슬라브였다. 집은 가족들이 모이는 명절 때를 제외하고는 별로 쓰지도 않았다. 30여 년의 오랜 노동으로 그녀의 손마디 마다 관절염이 있었다. 아픈 손으로 아주 야무지게 작업했다. 그녀는 육체를 초월하는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가? 술 취한 동료가, 함께 일하던 동료가 성 추행하려는 바람에 그녀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제기랄, 그 뒷수습을 하러 내가 내려가서 고생했다. 피해 여성이 고소하면 회사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가해 남성에게 술을 진탕 사 먹이자, 술술 뱉아냈다. 거대 현장이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이라서 단 두 명만 일했단다.

“지가 내 마누라라도 되나, 모든 힘든 일은 다 내가 했다. 그러고도 품값이 나와 똑 같다. 떼돈 벌면서 내게 무엇을 해 주는가?”

술 취해 방어 능력이 없는 여성에게 그랬단 말이지? 너보다 힘없는 여성에게 그랬단 말이지?

나는 H누나의 경우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가해자의 ‘욕망이 증오로 바뀌었는가, 증오가 욕망의 옷을 입었는가?’ 아니면 노동의 고통이 다른 식의 보상을 찾도록 했는가?

몇 십 년 전에는 건축 현장에 여성도 목수를 했다. 남자들과 똑 같이 못 주머니 차고 일했다. 여자라 해서 머뭇거리거나 ‘여자인 양’ 하는 법이 없었다. 남자들이 어깨에 메고 나른다면 그녀들은 판넬을 머리에 이고 날랐다.

미모는 죄가 아닌데도 여성들에게는 항상 천형처럼 붙어 다닌다. 아르바이트하던 미모의 외국 여성이 내게 털어놓은 이야기가 있다. 아주 친한 동료였다.

“배운 사람이나 못배운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돈 많은 사람이나 다 똑같아요. 왜 그렇죠?”

왜 그러냐는 물음은 만나는 남성들 모두 성을 요구한다거나 유혹한다는 뜻이다. 건설 현장에도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이 돌았다. 대개 여공들은 남편이 아파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는 경우가 많다. 친척을 따라 일한다면 별 문제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오야지들이 여공에게 성 상납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그것이 사실인 듯해서, 어떤? 부인이 여럿인 오야지들이 이었다.

합의와 동의하에, 사랑하는 사이라면 문제될 것 없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성상납은 이 나라에 희망 없음의 상징이다.

다른 모든 사랑의 이야기처럼 아가서를 읽다 보면 사랑의 신비와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결코 성을 사소한 문제로 생각할 수 없다. 도대체 강제적 성 관계를 시도하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강제란 사랑하는 사이에서 있을 수 없다. 만약 폭력에 길들여진 관계라면 사디즘과 매저키즘으로 뒤엉킨 관계일 것이다. 사랑의 신비는 생 떽쥐베리가 말하듯, “그 사람을 향해 나아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 사람을 품에 안으려는 욕구”이다. 이런 욕구만이 사랑은 너와 나만 아니라, “제3의 것”을 바라보게 한다. 사랑은 그 자체로 “초월적”힘이 되며 프랑스 60운동에서 보듯, 혁명을 가능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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