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레타리아트[노동이야기]- 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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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트[노동이야기]- ⑧

이 재 원(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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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사람을 다 책임질 수 있단 말인가?

평택 항 수입물류 공장 공사현장이다. 바닷바람은 육지보다 체감기온 5-6도정도 낮다. 산소가 많은 바닷가 공기 덕분에 일해도 힘든 줄 모르겠다. 목수 2인 1조로 일해서 더욱 좋다.

며칠 간 J와 손을 맞춰 일했다. 일도 잘 할 뿐 사람이 젊잖다. 고향도 같다. 목수 두 사람이 모이면 그중에 실력이 나은 사람이 있다. 힘으로나 실력으로나 J가 나보다 났다. 따라서 일머리를 J가 이끌었다. 나는 육체 뿐 아니라 머리까지 편했다.

일 끝난 후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혼자서는 주문 받지 않는 물 회(회 국수)가 가장 럭셔리한 메뉴이고, 국수나 국밥 등을 함께 먹었다. 그의 개인사는 듣지 않아도 알 듯 했다.

눈이 가는 곳에 마음이 있다. 처음 J와 손을 맞춰 지하에서 바라시(해체)하는데, 그가 담배를 피우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담배를 내밀자, 그는 3일간 담배를 못 피웠다고 했다. 그는 한 달을 방구석에서 헤매다가 돈이 떨어지자 무작정 H인력을 찾아왔다고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그는 스크린 경마장을 즐긴다. ‘비가와도 눈이 와도 말은 달린다’는 명언을 했다. 얼마를 넣고 가도 한 순간에 없어진다고 했다. 지름 신이 임하는 순간 뭉칫돈을 거는 탓이다.

바라시를 끝내고 가와바리, 즉 공중에 걸쳐놓은 속고 위에 폼을 붙이는 작업도 둘이 함께 했다. 나는 조기, 폼에 적절한 치수를 재어 못 두 개를 밖아 J에게 건네준다. J는 내가 밖아 놓은 못 두 개를 지지 삼아 패널을 속고에 고정되도록 못을 박았다. 우리는 혼자 하는 사람들보다 두 배 이상 작업을 했다. J는 계산도 빠르고, 작업도 차분하게 했다.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함께 작업하니까, 작업 지시하는 반장이 아예 우리 둘을 항상 함께 작업에 배치했다.

ⓒ 이재원

J와 손 맞추어 일 하던 중, 나는 평택 항 현장의 최고참, 돼지띠 노인에게 간택 당했다. 그는 어제까지 외국인과 손을 맞춰 일했는데, 두 사람은 소란하기 짝이 없었다. 의사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이요, 외국인이 노인에게 불평하기 때문이었다. 노인이 다리를 보여주는데, 퉁퉁 부어있었다. 노인은 나에게 재료는 물론 소모품도 모두 갖다 달라고 했다. 몇 일간 노인과 함께 일하는 동안, 내 별명은 졸지에 <데모도>가 되었다. 노인의 주문에 따라 움직이는 내 편을 들어준 별명이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 벽체를 보강하는 일종의 보, 통칭 ‘눈썹’을 ‘되 나우시’, 즉 부적격 작업을 고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노인은 아래에 있고, 나는 보위로 올라갔다. 폼을 뜯어내는데 벽체가 바람에 몹시 흔들렸다. 기분 나쁜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간신히 뜯어내고, 다시 정확한 치수대로 눈썹을 이어냈다.

점심 직전에 비가 내린 날이다. 한 30분을 비 맞으면서 일했다. 땀에 젓은 옷이 비에 젖어 무척 짜증이 났다. 작업을 중단하고 용역회사에 돌아와 돈을 받은 J가 총총히 사라졌다. 그는 좀 전에 넌지시 내게 물었었다.

“이제부터는 무엇을?…”

나는, ‘상명대 도서관에…’라고 응답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일요일이다. 그의 발걸음으로 봐서 늦은 경마장 행이라고 짐작했다.

몇 년 전에 만난 노동자는 <바다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한 달에 두어 번, 돈을 모아서 도박장에 간다. 어느 경우에는 차비도 없어, 주변 사람에게 ‘차비 좀 달라’하면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평택 항 일이 없는 날, J와 학교 신축 공사 현장에 팔려나갔다. 학교 건축은 80년대 말, 90년대 초 건축회사 수석 목수로서 내 전문 분야였다. 따라서 현장이 고향 같았다. 예전 식으로 슬래브 작업을 했다. 횡 800센티, 종 360 센티 슬래브 여섯 칸 작업이다. 하리, 기둥 형틀을 세웠고 하스라, 즉 보 형틀을 올려놓은 상태였다.

우선 J와 시다 목을 준비했다. 슬래브 종대 치수보다 40-60 센티 정도 짧게 오비끼를 자른 후, 여기에 삿보도를 끼워 받치기 위해 3인치 항 대못을 네 개 박아둔다.

슬래브 하스라 위에서 다른 두 사람이 각목을 횡으로 길게 매달아, 시다 목을 받을 준비를 한다. 준비가 되자, J는 시다 목을 슬래브 위 사람에게 올려주고, 나와 다른 한 사람이 삿보도를 받쳤다. 구름 속에 있던 햇빛이 드러나자, 갑자기 숨이 ‘컥’ 막히는 듯 한 기분이었다.

그다음 시다 위에 네다 재료를 배열한다. 두께 5센티 각 파이프를 30센티 간격으로 깔고, 이음매 부위에 각재를 깔아, 시다와 못으로 고정시킨다. 그리고 그 위에 수지 알판이나 베니야 알판을 못으로 고정시킨다.

알판 슬래브 작업은 십 몇 년 만에 처음이다. 오직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슬래브 깔아갈 때는 물결 흐르듯이 작업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한 쪽부터 한 사람이 한 칸씩 깔아 가면, 그 다음 사람이 하리 통 치수를 맞추면서 다음 칸 슬래브 작업을 해 나간다는 의미이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 작업을 도와주다가, 간신히 작업 방식을 파악하고는 J의 조언을 참고로 맨 마지막 슬라브를 깔아나갔다.

J는 하루 쉬고 경마장에 가겠단다. 도박, 광신과 세뇌를 클리닉 하는 방식에 대해 ‘줏어들은(口耳之學)’ 적이 있다. 나는 J가 경마장 간다고 한 날 새벽에 메시지를 했다. “경마장 가지 말고 강릉 가서 물 회나 먹고 오자.” 잠시 후 그가 전화로, ‘오늘은 경마장, 강릉은 다음에 가자’고 했다. 나는 도서관에 앉아 있다가, 시장으로 갔다. 오리 한 마리, 낙지 두 마리, 전복 세 마리를 샀다. J가 TV에서 보았다며, 이것들을 함께 끓인 음식을 먹어보고 싶다는 말을 기억했던 것이다. 다시 전화했다. J가 당장 오겠다고 했다.

그는 ‘난생 처음 이토록 맛있는 음식을 먹어 본다’고 했다. 옥에 티는, 그가 오리 뼈를 덕수가 십여 년 전 수학여행에서 사다 준 은도금 재떨이에 버렸다는 것이다. 식사 후 그는 총총히 경마장으로 갔다. 나는 혼잣말을 했다. ‘너(나)여, 모든 사람을 책임질 수 있는가?’

대학원 시절, 유학 간 약혼녀로부터 파혼을 선고받은 친구가 빠친꼬에 빠지는 것을 보았다. 그를 따라 빠친꼬장에 가 보았다. 그는 크게 돈 욕심을 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상처를 잊으려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
노동자들이 도박에 빠지는 것은 자기 고뇌에 대한 응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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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性愛)과 경제, 그리고 두목노동자

인간 내면에 대해서는 항상 더러운 이야기만 하게 된다. 전에 가본 적이 있는 H인력에서 멧세지가 왔다. ‘목수 일 많습니다. 일 나오세요.’ H인력은 하루에 100명 정도의 목수를 현장에 보내고 있었다. 나는 평택 항에 고정으로 일 나가기 전까지 땜빵용, 그러니까 고정으로 한 현장에서 일하던 목수들이 안 나올 때 그 현장에 투입되는 인력으로, 이곳저곳 현장을 돌아다녔다. 원룸 현장에서 외국인 Y와 함께 일했다. 나는 그를 <따거>라 불렀다. 키가 크고 힘이 좋은 이를 지칭하기 좋은 이름 아닌가. 그가 서투른 한국 말로 내게, ‘내일 비 와. 애인(자기에게 소개시켜 줄 여성) 있어?’라고 말했다. 나는 ‘없어’라고 말했다. 그가 재차, ‘애인 줘’라고 말했다.

이튿날 비가 왔다. Y와 점심때 국밥집에서 만났다. 그는 머리고기와 소주 두 병을 해 치웠다. 잘 통하지 않는 대화로 애먹고 있을 때, 한국말을 잘 하는 Y의 친구가 왔다. 친구로부터 시원하게 Y의 심중을 들을 수 있었다. Y는 곧 고국으로 돌아갈 참이다. 고민이 있으니, 방금 한국에 온 친구 때문이다. 친구는 목수 일은 되지만, 한국말을 못해서 어디현장에서 일을 시켜줄 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자기 친구를 데리고 일 다녀 달라는 것이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대답을 못 했다.

두 사람이 모국어로 한 참을 이야기했다. 나는 무료해,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었다. 이것이 실례되지 않을 듯 했다. 그만큼 그들은 할 이야기가 많았다.

그들이 나가자고 했다. 어슬렁거리며 따라가자, 콜라텍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J의 친구가 말했다.

“내내 일 하면서 고생하다가, 이런 곳에 와서 기분을 풀지요. 언니들 바글바글 해요.”

플로어에는 할머니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들의 옷차림은 전문 댄서와 같았다. 현실은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적나라하다. 눈치를 보아 하니, 파고다 할머니들이 많은 듯 했다. 노동할 수 없는 여성들은 경제력 있는 남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파고다 할머니들에 비하면 일용 노동자조차도 아주 높은 계급이다.

나는 다시 책을 꺼내 읽었다. Y의 친구가 ‘책은 집에 가서 읽어요, 여기에서는 그냥 놀아요’라고 했다. 다시 둘러보니, 외국어를 하는 젊은 여성들도 많았다.

술 취한 Y가 집요한 내면을 드러내었다. 말끝마다 새끼손가락을 들어올리고, <애인>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아마도 hook-up body만 중요한 곳에서 ‘아름다운(젓가슴, 사랑, 육체)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플로어의자에서 사람들이 끈적거리는 눈으로 다른 사람들의 뒤를 쫓았다.

60대의 O목수는 좋은 차를 몰고 다닌다. 우람한 몸에 성질도 장기(長氣)해서, 화내는 것을 본 적이 없는 호인이다. 그 역시 <땜빵>이라서 나는 그의 차를 타고 몇 군데 현장에 일하러 갔다. 그 역시 말끝마다 <여자친구>였다. 외국인 여자 친구와 아라비아 지역 까지 여행을 다녔다. 여자 친구는 몇 년간 출국 했다가, 이제 며칠 후면 한국에 들어온다고 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노동자들에게 감정과 성,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는 답이 없다. ‘손 맞인 즉 땡기는 맛이 없어 유흥업소 여성은 사양’하고 자기만의 창녀를 갖기 위해, 입에 담기에도 꺼려지는 인간 종들이 <장자연>을 만드는 세계에서 경제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빼았기는) 것이 현실이다. 더 얻은 사람이 있다면 빼앗기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경제적 형편 대문에 사랑을 빼앗긴다는 것은 소설이 아니다. 이런 저런 사정, 특히 경제적 형편 때문에 남편을 버리고 돈 벌러 나왔다는 이야기는 항용 듣지 않는가. ‘생식 능력만 있는 이’(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의미이다)가 성적 상대를 빼앗긴다는 것은 그에게 행복 추구권리, 사랑을 통한 감정 충족 까지도 박탈당한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진다.

노동자들은 반장에게 비 호감적이다. 단지 반장이 우리보다 돈을 더 많이 번다는 것에 대한 질투만은 아니다.

반장 급은 일을 시키고, 목수들이 일하는 것을 감시한다. 일반 목수들이 자주 쉬어야 하지만, 반장들은 한 달 내내 일 할 수 있다. 일당도 더 많이 받는다. 책임이 큰 만큼 돈 많이 버는 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진리를 탐구하는 이들이 일신의 영달을 위해 태도를 바꾼다면 그것은 <변절>이다. 그러나 반장이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도 아니니 그가 노동자 편이 아니라 사용자 편이라고 해서 변절이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의도를 해석하자면, 반장들이 미운 이유는 ‘한 사람의 노예 상태를 다른 사람의 완전한 인간적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서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평택 항 현장에는 반장이 두 사람이다. 월급 받는 총 반장은 모든 데마, 철근, 콘크리트, 형틀을 총괄한다. 목수 반장에게 작업지시를 하는 것도 총 반장이다. 그리고 일당 노동자 목수 반장이 있다. 반장들이 정확히 일하면 ‘되 나우시’는 없다.

지금도 항용 그렇지만, 옛날이라야 몇 십 년 전만 해도 거짓말처럼 돈 잘 버는 오야지들은 애인이 있었다. 대충 서너 사람이 기억난다. 잡철 오야지의 여성은 아기를 안고 현장에 함께 왔다. 현장에서 그녀가 하는 것은 아이를 어르는 일이다. 어느 목수 오야지는 젊은 여성에게서 얻은 아이를 키우기 위해 은퇴할 나이가 훨씬 넘도록 일했다. 둘 이상의 여성을 거느린 미장 오야지는 오통으로 항상 허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애인인 여성들로부터 두목 노동자의 ‘카리스마에 반했다’는 이야기를 우회해서 듣곤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어느 여성의 결정을 이끌어주는 남성다움에 반했다는 것인 즉, 그 여성이 일종의 매저키스트적이거나 자기 독립적(자기중심적이 아니라)이지 못한 여성들일 것이다. 그러한 결합이 바람직할 리 없다. 다만, 그 여성들이 경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면, 그러니까 파고다 할머니들이 엄존하는 현실에서 타인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는 여성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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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외국인 노동자와 내국인의 임금

목수들이 아주 흔히 화제를 삼는 것이 외국인 노동자와 내국인 인건비에 관한 것이다. 80년대부터 현장을 떠나지 않았던 O씨가 말했다.

“90년대만 해도 2000년 도에는 목수 품값이 일본이나 미국 수준이 되리라고 예상했다. 당시에는 젊은 사람들이 목수 일을 배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점점 임금이 올라가는 추세였다. 그런데 갑자기 IMF터지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오면서 품값이 오히려 떨어졌다. 여행 비자든 방문비자든 개의치 않고 현장에 와서 일하는 통에 완전히 망했다.”

87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면서 건축노동자들의 품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공공연히, ‘노태우가 우리 형편을 좋게 해 주었다’고 말했다. 지금이야 5,1.6프로의 보수층이 있지만, 권력 지지 기반이 없던 당시로서는 정치가들이 기층노동자들에게 어느 정도 잘 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보다 정보도 많고 똑똑하다. 중소기업 협회 등에서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 인건비가 싼 나라를 만들려고 불철주야 노력한다.

한 나라의 경제가 발전하고 인건비가 비싸지면 값 싼 노동력을 외국에서 끌어들여온 역사는 길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라 당대의 노동자들이 처한 절실한 문제였다. 노동 시간이 짧아지고 인건비가 오를 만하면 자본가들이 가난한 나라의 값 싼 노동력을 끌어들이는 통에 노동자들이 국제적으로 단결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가난한 나라의 값 싼 노동력이 만들어 내는 것은 생 떽쥐베리가 분노하듯이 <살해된 모차르트>들, 짐짝처럼 실려 있는 폴란드 노동자들이 탄 기차의 교육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만이 아니다. 자국과 타국 노동자들의 빈곤의 공평화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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