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서울 시민청 강좌]-2

강의 2 :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강지은 (건국대 강사)

소비없는 세상은 상상불가능하다. 소비를 주도하는 유행의 본질에 대한 분석과 쇼핑을 통해 얻는 자유와 구속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해본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의 <편지13>, <편지16>, <편지17>, 참조

<참고>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13> 신용카드로 얻은 자유
<편지16> 유행에 관하여
<편지17> 쇼핑하라!

<차례>
1. 옷장에 옷은 가득한데 왜 항상 입을 옷이 없을까요?
2. 쇼핑하세요! 이번이 마지막 기회!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3.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가 아니고 ‘더 열심히 일해라’

1. 옷장에 옷은 가득한데 왜 항상 입을 옷이 없을까요?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항상 드는 생각입니다. 입을 옷이 없습니다. 진짜 옷이 옷장이나 서랍에 없는 게 아닌데 입을 옷이 없습니다. 도대체 이건 뭔가요.
아마도 그 이유는 유행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딱히 유행에 민감하지 않아도 저런 생각을 하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통이 좁은 바지를 입고 다니는데 나 혼자 나팔바지를 입고 지하철을 탔다고 생각해보세요.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있겠죠. 아마 그 날 하루는 굉장히 마음이 불편할 겁니다. 유행은 돌고 돈다고 하지만 돌아오는 지점이 정확하게 같지는 않습니다. 살짝 변형이 되어 돌아오죠. 예전에 유행했던 나팔바지가 다시 유행한다고 예전 바지를 꺼내 입고는 못돌아다닙니다. 색상이든 바지폭이든 무언가 변형되어 돌아왔기 때문이죠.
저는 진짜 유행이란 걸 쫒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철마다 돈써야죠, 신경써야죠. 가뜩이나 팍팍한 삶에 유행이란 건 도대체 무엇이길래 우리를 괴롭게 할까요.

지그문트 바우만은 유행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하여 재미있게도 물리학에서 꿈꾸어왔지만 포기했던 기계장치인 ‘페르페투움 모빌레 Perpetuum mobile’를 비유해서 설명합니다. 페르페투움 모빌레란 스스로 유지되서 영원히 움직이는 기계장치인데요. 물리법칙에서는 불가능한 기계장치죠. 기계장치란 저항을 만나면 추가적으로 외부에서 동력을 제공해주어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이 기계장치의 원리가 사회학으로 넘어오면 실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인데 그 영역이 바로 ‘유행’이라는 것입니다. 유행은 영원할 것이라는 거죠. 그런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게오르그 짐멜은 인간의 너무도 강력한 인간의 두 가지 욕구나 열망들 때문에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처럼 문제가 되는 두 가지 인간의 욕구나 열망들이란 바로 ‘보다 큰 전체의 부분이고자 하는 열망’과 동시에 ‘개성이나 독특성을 추구하려는 욕구’, 이 두 가지를 의미한다. 무언가에 소속되어 일체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꿈과 동시에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하는 꿈, 또한 사회적인 지원에 대한 욕망과 동시에 자율성에 대한 강한 욕망, 모방하려는 충동과 동시에 구분되려 애쓰는 충동말이다. 결국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손을 맞잡고 있는 그 안전에 대한 욕구뿐 아니라 그 맞잡은 손을 다시 놓아 버리려는 자유에 대한 욕구도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이다. …….따라서 짐멜이 말한 대로 “유행이란 사회적인 평준화를 추구하는 경향과 개인적인 톡특성을 추구하는 경향 사이에서 타협을 보장하는 독특한 삶의 형태이다.”….. 사실 돌이켜 생각하면 그 타협은 ‘안정된 상태’일 수 없다. …….그 타협은 절대 그대로 가만히 유지될 수 없기에 반드시 영구히 재협상되어야 한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16> 142쪽.
짐멜이 말하고자 하는 유행의 본질은 어찌보면 모순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너무나 핵심을 짚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모두 무엇을 입든 절대 남들보다 튀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늘 염색을 하지만 튀는 색을 하지는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백화점에서 예쁜옷을 골라서 사입었지만 그 옷을 나만 샀을리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하철을 탔을 때 건너편에 앉은 사람과 똑같은 옷을 입은 나를 발견하면 굉장히 기분이 안 좋습니다. 개성이 무너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유행이란 그 사이에 존재합니다.

“더는 그 무언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라는 계율도 바로 “항상 새롭고 가장 최근에 인기를 끄는 그 무언가에 머물러야 한다!”라는 계율만큼이나 반드시 꼼꼼하게 살피고 열심히 지켜야만 한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16> 142쪽.

바로 이것입니다. 작년에 사입은 옷을 붙들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새로 산 옷을 입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2. 쇼핑하세요! 이번이 마지막 기회!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많이 들어본 멘트이시지요?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드십니까? 저는 마음이 급해집니다. 주로 TV홈쇼핑에서 쇼호스트들이 하는 방송멘트인데 아주 높은 톤으로 외쳐댑니다. 화면의 방송마감 시계는 몇 분 안 남았습니다. 카드를 꺼내서 결재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마치 제가 햄릿이 된 듯한 기분입니다. 삶의 고뇌가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때로는 몇 분 남았는데 완판! 글자가 화면 가득 뜹니다. 아차, 안타까운 순간입니다. 쇼호스트들은 시청자들에게 영원히 만날 기회가 없음을 섭섭해하며 다음 상품 방송으로 몇 분 일찍 넘깁니다. 몇 번 이런 경험을 한 TV홈쇼퍼들은 중독구매 혹은 강박구매 증상을 보이기도 합니다.
TV홈쇼핑 같은 경우 텔레비전을 보면서 물건을 구경하고 감정이입하고 상상하는 시간이 시청자로 하여금 굉장한 만족감을 줍니다. 사실 직접 물건을 만질 수도 없고 고를 수도 없는데 그보다 더한 선택의 기회를 받은 듯한 착각을 하게 되죠. 쇼핑의 만족감은 어디까지일까요. 결재를 하는 순간 끝입니다.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는 계속 홈쇼핑을 시청하고 계속 결재를 해야 하는 중독증상을 보이게 되는 것이죠. 백화점의 명품 쇼핑이라고 다를 것이 없습니다. 여성들의 선망인 명품가방의 만족감은 얼마나갈까요. 구경하고 고르고 결재하고 집에 들고 가서 한 일주일 정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든 상품의 만족감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쇼핑을 하는 상품들이 과연 치약이나 비누 쌀처럼 사용가치가 있는 것들 뿐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우리는 명품가방, 예쁜 그릇처럼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기호가치를 충족시켜주는 것들을 더 많이 소비하면서 살아갑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소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입니다. 소비지상주의사회입니다. 9.11테러 이후 미국이 부시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보낸 첫 메시지는 “다시 평상시처럼 쇼핑하는 일로 되돌아가라”였습니다. 좋게 생각하면 다시 정상적인 삶으로 되돌아가라는 요청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좀 더 분석적으로 생각해보면

쇼핑이 모든 고통이나 불행을 치유하고 그 어떤 위협도 물리치고 밀쳐내며, 그 모든 기능 불량 상태도 수리하는 방법, 곧 아마도 유일무이하고 다른 무엇보다도 분명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아마도 쇼핑몰을 정기적으로 돌아다니는 일이야말로 이러한 모든 근심거리들에 대한 해결책일 것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17> 150쪽.

현대인에게 쇼핑몰이든 시장이든 백화점이든 쇼핑하러 돌아다니는 일은 일상에서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마저 여의치 않다면 TV나 스마트폰이 우리의 쇼핑을 도와줍니다. 게다가 요즘은 쇼핑할 때 내가 돈을 쓴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 세상이 왔습니다. 마트나 백화점에서 쇼핑할 땐 직원에게 신용카드를 건네주고 단말기에 카드를 긁는 모습이나마 보기라도 하지요. 스마트폰 결제시스템은 그저 등록해놓은 카드의 비밀번호만 누르면 일사천리로 결제가 이루어집니다. 복잡하게 일일이 카드 고유 넘버나 카드 뒷면의 세 자리 숫자 따위를 누를 필요조차 없습니다.
카드 결제를 마치는 순간 쌓여있던 근심걱정도 눈 녹듯 사라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스트레스 날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뒤에 따라올 또다른 스트레스는 애써 외면합니다. 모두 무엇인지 아시죠? 바로 카드 결제일입니다.

3.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가 아니고 ‘더 열심히 일해라’

예전에 신용카드가 우리의 지갑을 채우기 이전을 기억하시지요? 물건을 구입하려면 현금을 꺼내서 대금을 지불하던 시절이 있었지요. 돈쓰는 재미가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돈 버는 재미도 있었지요. 월급을 봉투에 받던 시절을 지낸 분도 있으실겁 니다. 두툼한 월급봉투의 맛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모를겁니다. 그 땐 무엇을 구입하든 쉽게 턱턱 구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지갑을 열어서 현금을 꺼내야했기 때문이었죠. 또 지갑에 현금이 없으면 무엇을 구입할 수도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90년대 후반 신용카드가 등장한 이후 소비의 패턴이 180도 달라졌습니다. 지갑에서 현금이 사라지고 당장 현금이 없어도 물건을 구입하고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공식적으로 전 국민이 빚지고 사는 세상이 된 것이죠. 카드광고가 텔레비전을 도배하다시피 했는데 그중에서 인상깊었던 광고멘트가 바로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였습니다. 기억나시죠? 카드 광고들을 보면 사람들이 스포츠와 레저를 즐기고 멋진 식당에서 식사를 합니다.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여유있는 시간도 보내죠. 사랑하는 사람에게 깜짝 파티도 해주더군요. 그것이 모두 카드 덕분이라네요. 그렇다면 카드로 미리 선결제하고 나중에 지불했을 텐데요. 만약에 통장에 잔고가 없다면 다른 카드에서 돈을 빌려 갚는 돌려막기라도 해야 합니다. 수입은 한정되어 있는데 무리한 지출을 한 모양입니다. 이번 달은 대리운전이라도 해서 결제하지 못한 부분을 메꿔야하겠네요. 돌려막기할 카드가 없는 사람은 카드를 새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지갑엔 보통 서너 장 이상의 카드가 꽂혀 있지요. 열심히 일하고 또 열심히 카드로 즐긴 당신은 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용불량자가 되어 사회생활이 힘들어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비패턴이 언제부터 시작될까요. 신용카드를 처음 발급받은 때부터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아이들도 비슷한 전처를 밟고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신용카드로 우리는 자유를 얻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지만 결코 자유는 아닌 것 같습니다. 신용카드가 없던 시절에는 빚지고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 같은데 요즘은 모두가 빚지고 사는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무언가를 사기 위해 돈을 모으던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시기에 단지 ‘살기 위해 대출 받는 사람들’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일까? 바로 사람들이 가장 취약한 시기, 다시 말해 유년기에서 성인으로 탈바꿈하는 시기야말로 이러한 일이 벌어지기에 가장 알맞은 시기이다. …… 바로 이러한 시기야말로 대출회사가 이들의 약한 정곡을 노려 공략하기에 가장 적절한 때이다. 아직은 성숙하지 않은 젊은이의 머릿속에 심어져 있던 이 세상의 지도에서 부모들이 차지하던 자리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이다. 대부업자들은 바로 이러한 상황이야말로 부모 자리를 대신해서 슬며시 그 젊은이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다시없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긴다.
…….
게다가 이런 젊은이들이 대출회사의 공략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하는 다음과 같은 상황도 한 몫을 한다. 점점 더 많은 나라에서 대출회사가 각 나라 정부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 이에 따라 각 나라 정부들은 학생들이 그 어떤 학과나 학부를 선택하든지 간에 모든 단과대학이나 종합대학에서 ‘신용거래와 관련된 생활기술’을 이론과정 뿐 아니라 실습과정으로도 배울 수 있게끔 필수 교과과정으로 도입하고 있다는 점 말이다. 더구나 이제는 어느 정도 공부를 하려 한다면 어쩔 수 없이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물론 어느 정도는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지만 말이다. 그런 식의 학자금 대출은 받기 쉽기 때문에 매우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만, 분명 잘못될 여지가 많으며 더구나 되갚기 쉬운 듯이 매력적으로 유혹하지만 결국에는 기만적인 속임수일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보통 평균적인 학생이라면 여학생이든 남학생이든 간에 엄청난 빚을 떠안은 채 학업을 끝마치게 되며, 조만간 그 누구라도 다른 수많은 대학 졸업자들과 마찬가지로 빚이 쌓여 도저히 되갚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점도 깨닫게 될 거시이다. 더구나 떠안게 된 그 빚이란 것도 실상 대출 받은 돈에 대한 이자를 지불하기 위해 더 많은 빚을 져야만 할 것이라는 사실만을 의미할 뿐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13> 114~116쪽.

현대사회는 소비하지 않고는 단 하루도 존재할 수 없는 사회입니다. 오죽하면 일부 사회운동가들이 ‘Not Buy Day’운동을 외치겠습니까. 하지만 지금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간다면 소비하지 않고 살기는 그저 공허한 외침일 뿐입니다. 시스템을 바꾸기 위한 궁리를 여기저기서 하는 것 같습니다. 서울에서 농사도 짓고 벌도 키우는 실험도 하더군요. 세상은 소비의 천국, 선택의 자유가 있는 자본주의 사회인 것은 맞지만 내손에 쥔 돈이 없을 때 이곳은 지옥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텅빈 지갑 때문에 힘겹습니다. 이제 다른 시스템을 궁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볼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고독할 시간을 잃어버린 서울, 서울시민들 [서울 시민청 강좌] -1

필자의 허락을 얻어 [서울시 시민청]에서 올 여름 진행된 강의의 강의록을 총 5회에 걸쳐 연재 합니다. 흔쾌히 원고를 넘겨주신 필자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강의 1 : 고독할 시간을 잃어버린 서울, 서울시민들

강지은(건국대 강사)

우리는 왜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가에 대해 현실사회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분석을 시도한다. 더불어 스마트폰을 통해 매일 접하는 SNS가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에 관한 반성도 함께 모색해 본다.

<참고>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2>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5> 트위터, 혹은 새들처럼

<차례>
1. 왜 우리는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가
2. SNS는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3. 왜 사람들은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에 포스팅하며 사람들과 소통하고 만족감을 느낄까?
4. 고독을 잃어버린 서울 사람들

1. 왜 우리는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가

우리에게 스마트폰이 일상생활이 된 지 얼마쯤 되었을까요. 이젠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스마트폰이라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기는 합니다만 제 기억엔 5년 남짓 된 듯 싶습니다. 제가 스마트폰을 언제부터 사용했는지는 정말 가물가물 기억이 나지 않지만 스마트폰과 관련해서 아이와 기억나는 큰 사건은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처음 사준 스마트폰이 2011년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아직 어린 줄만 알았던 아이가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소설을 15권이나 엄마 몰래 읽은 것이었어요. 이미 또래들에게 인소(인터넷소설) 읽기가 유행처럼 번졌던 건데 저는 몰랐던 거죠. 지금 중년 분들은 예전에 읽었던 하이틴로맨스라는 얇은 로맨스소설이 인소의 원조쯤 되겠죠. 예전에 저희들은 고교생 때나 되어 읽던 걸 저희 딸은 스마트폰 덕분에 초등학교 때 접한 거죠. 처음엔 아이가 당장 타락이나 한 것 마냥 속상하고 그랬는데, 세상이 그러니 차라리 저도 한 번 인소를 읽어 보자 싶더군요. 그리고는 아이와 대화를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다행히 아이는 제가 상상하는 타락은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후 5년이 지난 2016년 현재 스마트폰은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진화를 거듭한 듯 보입니다. 당시에는 없던 소셜네트워크가 전 세계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고 또한 새로운 시장을 형성가고 있으니까요. 아무튼 저희 아이는 그 때부터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살았습니다.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한 물건인데 손에서 놓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당시에도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인소가 유행하고 남학생들 사이에서는 소소한 게임들이 유행했었던 듯합니다. 당시엔 조잡했던 게임이었겠지만 지금은 모바일 게임 시장이 pc게임 시장과 맞먹을 정도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고 보아야하겠죠. 지하철을 타면 스마트폰 게임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지금 현재 전 세계적으로 단연 1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게임은 ‘포켓몬고’겠죠. 포켓몬고는 새로운 증강현실(AR)을 바탕으로 하는 게임입니다. 저는 해본적은 없지만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 몰이를 하고 있는가봅니다. 우리나라는 정식으로 출시도 되지 않았는데 속초에서 어찌 어찌 된다고 하니 유저들이 몰려가는 대소동까지 있었다죠. 아무튼 스마트폰의 진화는 무한대인 듯합니다. 아무튼 당시 인소의 유행이 지난 후엔 카카오톡이 주도하는 SNS가 아이들을 사로잡더군요. 이제 아이의 스마트폰은 단톡방의 알림이 울리고 아이는 수시로 스마트폰을 확인하고 답을 달기를 반복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또 하나의 문화가 되어 아이들에게 기쁨도 주었지만 상처도 주었습니다. 카카오톡의 상태메시지는 은근히 타인을 욕하거나 따돌리는 메시지창이 되기도 하고, 오프라인의 왕따는 온라인에서도 역시 왕따가 되어 단톡방에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은 재미와 연대 두 가지를 제공하는 신기한 상자임에 틀림없는 모양입니다.
아이들의 스마트폰 풍속도가 이러하다면 어른들의 스마트폰 풍속도는 어떻게 변했을까요. 물론 아직 2G폰을 가지고 계신 어르신도 계시긴 합니다. 저희 친정어머니도 그런 분들 중의 한분이십니다. 폴더폰 기억나시지요? 그걸 아직도 가지고 계신데 저희어머니 말고 많은 어르신들이 스마트폰으로 자식과 카카오톡으로 사진도 주고받고 친구분들과 소통도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휴대전화의 역사는 스마트폰의 변천사보다 조금더 앞섭니다. 언제부터 휴대폰이 소위 공짜폰으로 전면 보급되었는지 기억나십니까? 제 기억으로는 97년이었습니다. 제가 결혼하던 해인데 남편만 휴대폰을 한 대 장만했습니다. 당시 만해도 남편만 장만하면 됐지 뭐 저까지 덩달아 사겠다고 나서기가 좀 거시기 한 그런 때였습니다. 아직 대학원생이라 금전적 여유도 없었구요. 처음 우리집에 온 남편의 휴대폰은 크기는 손 크기 만해서 작을 뿐만 아니라 창도 작은 그런 폰이었죠. 그러던 것이 점점 작아지더니 어느 순간 창의 크기가 커지다가 컬러가 등장하고 창을 손가락으로 터치할 수 있는 터치폰이라는 것이 등장했습니다. 그야말로 신세계였습니다. 버튼이 아니라 화면을 터치해서 조작을 하는 기술은 스마트폰의 기술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터치폰의 기술을 기반으로 해서 곧 애플은 아이폰을 출시하고 전 세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처음엔 도대체 애플리케이션, 앱이 뭐야? 핸드폰을 쓰면서 왜 요금말고 또 돈을 결재해? 궁금한 것도 많았죠. 하지만 곧 익숙해졌고 세계는 스마트폰 천국이 되었습니다.

2. SNS는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익숙해진 스마트폰 안에는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등의 SNS 즉 소셜네트워크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가 중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2>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한번 함께 보면서 노철학자가 어느 부분에서 현대인들의 모습에 놀라고 걱정을 하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미국 고등교육신문의 웹사이트(chronicle.com)에서 한 달에 무려 3000여건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10대 소녀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이 정도로 문자메시지를 많이 보냈다는 것은 그 소녀가 하루 평균 100여건의 메시지를 보냈거나 깨어 있는 동안 매10분마다 거의 한 번꼴로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침이든 대낮이든 한밤중이든, 주중이든, 주말이든, 수업시간이든 점심시간이든, 숙제시간이든, 심지어 양치질하는 시간이든’ 가리지 않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결국 그 소녀는 10분 이상은 계속 누군가와 이야기한 셈이고, 이는 그 소녀가 혼자서만 지내본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생각과 꿈, 걱정, 희망 같은 것들을 고민하면서 홀로 있어 본적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소녀는 이제 다른 친구들이 없을 때, 과연 사람들이 자기 혼자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하는지, 혼자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하며 웃거나 울어야 하는지 거의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소녀는 혼자서 지낼 수 있는 기술을 배워볼 만한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한 셈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2> 24~25쪽.

어떠십니까? 누가 생각나십니까? 물론 자녀분들이 많이 생각나시지요? 본인 스스로가 생각나시기도 하구요. 저는 식당갔을 때 보았던 남의 집 유아들이 더 생각납니다. 부모님들은 스마트폰에서 나오는 영상이 뽀로로이기 때문에 아이에게 큰 해가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문제는 영상이 아니라 손에 쥔 것 자체가 스마트폰이라는 것이죠. 스마트폰에 길들여지면 잠시도 심심한 것을 참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잠시도 심심한 것을 못참는 현대인은 수시로 SNS에 접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올린 포스팅에 누가 좋아요를 눌렀나 확인하러, 좋아요가 몇 회나 올라갔나 확인하러, 또 그냥 다른 포스팅 둘러보러 등등의 이유로 들락날락 거리는 시간이 생각해보면 하루의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꼭 페이스북, 트위터에만 접속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날씨가 도대체 왜 이렇게 덥지? 궁금하면 그것도 무엇이 해결해주나요. 스마트폰입니다. 스마트폰의 인터넷에 접속하면 네이버에 날씨가 나옵니다. 메인화면엔 그날그날의 탑뉴스들이 뜨죠. 내가 원하는 연예기사나 다이어트, 음식 뉴스들이 줄을 잇습니다. 그러면 또 그것들을 읽느라 시간이 흘러갑니다. 스마트폰은 누군가와 접속하게도 해주지만 그저 온라인과 내가 접속하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나는 접속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바로 오늘 서울 시민의 현주소가 아닐까 합니다.

3. 왜 사람들은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에 포스팅하며 사람들과 소통하고 만족감을 느낄까?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는 SNS를 하시는 분도 있으실 것이고 하고 있지 않으신 분들도 있으실텐데요. SNS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빠른 의사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트위터의 앰블램은 참새같은 새모양이지요? 시도 때도 없이 짹짹거리며 지저귀는 새처럼 아무 때나 내가 이야기하고 싶을 때 포스팅을 하는 곳이 트위터입니다. 남이 댓글을 달든 말든 그건 나중 문제입니다. 하지만 SNS의 속성상 댓글 없는 포스팅은 공허합니다. 내가 포스팅을 하자마자 누군가가 재빠르게 댓글을 달아주고 리트윗을 해주면 그야말로 짜릿한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내가 올린 포스팅은 순식간에 전 세계(친구가 전세계에 퍼져있다면) 혹은 전국으로 퍼질 수도 있지요. 페이스북도 속성은 비슷합니다. 트위터는 짧은 글을 간단하게 포스팅한다면 페이스북은 사진과 함께 좀 더 긴 글도 올릴 수 있다는 점이 다르죠. 페이스북에선 좋아요가 몇이나 올라가는지가 관심사인 것 같아요. 페이스북 개인페이지 말고 회사나 상업성을 띤 페이지들은 그 페이지들의 좋아요나 공유만을 관리해주는 업체도 있습니다. 페이스북의 좋아요는 그야말로 ‘인정’이라는 내면적 속성의 숫자화 또는 외면화입니다. 남에게 인정받는 것이 예전만큼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그런데 인정이 숫자로 표시되는 장소가 바로 페이스북 등의 소셜네트워크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오기가 어려운 것이지요.
그런데 인정받기 위해서는 칭찬받을 만한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물론 세상엔 착한 사람도 많고 훌륭한 사람도 많습니다. 문제는 나만 빼고 그런 것 같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럼 뭘 포스팅해야 할까요? 도대체 나를 스스로 생각해보면 내세울게 하나도 없는데 말입니다. 하는 일도 변변히 잘 돌아가는 게 없습니다. 거울을 보아도 영 마음에 드는 얼굴이 아닙니다. 아…….인정은 받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내가 가진 최고만 보여주는 것입니다. 식당도 제일 비싼 곳에 갈 때만 사진을 찍어 포스팅을 합니다. 변변치 않은 식당에 가면 사진찍기는 없습니다. 셀카도 오늘 화장발이 잘 받은 날만 찍습니다.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상 받아온 날은 페이스북에 포스팅하는 날입니다. 나는 최고의 것을 포스팅하지만 남들이 보기에 그것은 나의 일상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남들은 나를 부러워하면서 좋아요를 선물하겠죠. 나 역시 마찬가지로 남들이 최고의 모습을 포스팅 한 곳에 부러워하면서 좋아요를 선물합니다. 그러면서 마음 한구석에 상처를 받습니다. 사실 남들에 비하면 내 모습은 참 별볼일 없으니까요.
다시 좀더 인정에 대해서 생각해볼까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서 좋아요를 대체로 많이 받는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당연히 유명인 또는 연예인들이겠죠. 그만큼 노출이 많이 된 사람들이니까요. 나와 그들이 친구는 아니지만 언젠가 유명인들의 SNS에 들어가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그 많은 좋아요와 댓글들. 사람들은 그들을 부러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SNS 포스팅을 하면서 그런 연예인들과 같은 주목을 받고 싶은 심리가 생기는 것이죠. 지그문트 바우만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유명한 인간 존재증명이 이제 ‘나는 보여진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에 밀려 쫒겨날 것이라고 예견합니다.(『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5> 51쪽) 왜냐하면 사람들이 나를 보면 볼수록, 즉 사람들이 나를 보려고 선택하면 할수록 점점 더 내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납득시켜주는 증명처럼 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SNS를 자주 하면 할수록 사람들이 점점 더 나를 많이 방문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유명인들처럼 잘 알려진 사람들과 비슷한 부류가 될 기회를 갖는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 철학자의 생각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정신적 영향력을 증가시키는 한 가지 방식’이 바로 소셜네트워크 활동인 셈이지요.
그러나 SNS가 진짜 자신의 정신적 영향력을 증대시켜줄까요? 철학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유명인의 흉내내기에서 그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확장해보면 사회의 영역 어디에서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결국 실제 권력을 쥐고 있는 부류 즉 보여지는 부류(유명인, 연예인)와 권력이 없는 부류 즉 보는 부류(일반인, 소외계층)의 삶은 어디에서도 뒤바뀌지 않는다는 진리 말입니다. 거기에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페이스북의 친구 1000명이 어떤 의미가 있느냐 따지고 든다면 또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친구인 듯 친구 아닌 친구같은 너” 바로 페이스북 등의 SNS 친구이지요.

4. 고독을 잃어버린 서울 사람들

어쨌거나 SNS 이전과 이후는 고독의 측면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요. SNS 이후에 연락 않던 친구들과 연락을 하게 된 경우가 많아졌다는 점은 참 좋습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만이죠. 한 번 연락하고나니 딱히 보고 싶은 생각도 없는 친구들이 또 많기도 한 것이 사실이기도 하고, 그냥 조금 친한 친구들도 있고요. 한동안 동창들끼리 네이버 밴드 많이들 하셨죠. 카카오톡 단체톡도 하시고요. 이런 온라인 모임들이나 개인적인 접속들은 직접 만나지 않으면서도 근황을 알 수도 있고 대화도 할 수 있고 내가 귀찮으면 접속을 중단할 수도 있고, 어찌 보면 현대인에게 안성맞춤인 참 편리하고 깔끔한 만남입니다. 그러다보니 또 내 손안의 핸드폰이 채팅창의 알림을 울려주면 안들어가 볼 수가 없지요.
그런데 이러한 만남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의 인간관계가 풍부해졌다고 느끼거나 나의 정신세계가 확장되었다고 느껴지기보다는 공허감을 느낄 때가 훨씬 많지 않으십니까? 지그문트 바우만이 걱정하는 내용을 함께 들어볼까요.

당신은 즐겁게 독서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창밖을 응시하면서 당신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세계를 상상해보는 일을 점점 덜하게 되었을 것이다. 당신은 당신과 아주 가까운 주변에 있는 진짜 사람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일도 점점 덜하게 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멀리 있는 친구들이 접속하려고 버튼을 클릭해올 때, 과연 누가 정작 가족과 이야기하기를 원하겠는가?……결국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당신이 그러한 고독의 맛을 결코 음미해본 적이 없다면 그 때 당신은 당신이 무엇을 박탈당했고 무엇을 놓쳤으며 무엇을 잃었는지조차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편지2> 31쪽.

오늘부터 시간을 정해 스마트폰은 가방에 넣어두고 창밖을 바라보거나 책 읽는 시간을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삶을 고뇌하는 라이더를 위한 철학 [철학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철학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코너를 새로 시작하려 합니다.  먼저 흔쾌히 출판책의 원고 사용을 허락해 주신 저자 조광제 선생님과 ‘생각정원’ 출판사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앞으로 조광제 선생님의 원고를 바탕으로 한철연 회원 필자분들과 함께 공동 프로젝트 형태로 코너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한 개념어에 대한 원본을 바탕으로 여러 회원분들의 추가글 또는 논쟁, 토론을 함께 담아내는 나름 리좀 같은 개념어 코너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봅니다.


우선 아래는 [철학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사전](생각정원, 2012)의 서문에 해당하는 조광제 선생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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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삶을 고뇌하는 라이더를 위한 철학 안내서 

단 한 번 주어진 나의 인생을 제대로 살려고 하다 보면 작은 일에서부터 큰일에 이르기까지 궁금하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른바 육하원칙이라고 해서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라는 의문사들을 앞세운 질문 형식들이 정착된 것은 이러한 궁금증이 삶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근본적인가를 말해 준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북한의 수령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했다. 특히 동북아시아를 중심으로 세계적인 사건이 벌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누가 그러한 평가를 하는 것일까? 그러한 평가에서 핵심은 무엇일까? 언제부터 그런 평가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을까? 어디에서부터 그러한 평가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을까? 어떻게 해서 그러한 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을까? 왜 그러한 평가를 하게 되었을까? 특히 한반도 분단 상태를 견디고 있는 당사자인 우리 남한 주민들로서는 향후 이 사건으로 인해 생겨날 일들에 대해 첨예한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 사건이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에 미칠, 군사 ‧ 외교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전반의 변화에 대해 과연 우리가 주도적인 방향타 역할을 할 수 있는가이다.
만약 이러한 문제를 철학적인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사건은 하나의 현상이다. 그런데 과연 ‘현상’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지 않고서는 이 사건이 하나의 현상이라는 말을 제대로 피력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그리고 ‘사건’이라는 말조차 엄격하게 파고들면 무엇인지를 알기가 쉽지 않다. 어쨌든 이 사건의 향방에 대해 한반도 주민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주체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주체적’ 혹은 ‘주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이에 관해 정확하고 면밀한 논의를 할 수 있을까? 주체와 대립되는 ‘객체’ 혹은 ‘대상’이 무엇인가도 알아야 할 것 같다. 그와 더불어 ‘능동성’과 ‘수동성’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 것이다.
북한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인데도, 이 사건이 미치는 국제적인 파장이 결코 만만치 않다고 할 때, 하나의 사건이 여러 사건들을 폭넓게 야기하는 셈이다. 그런가 하면 그렇게 해서 생겨난 국제적인 파장은 다시 한반도를 향해 영향을 미친다. 사건을 둘러싸고서 확산과 수렴이 순환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의 사건이 여러 사건들을 폭넓게 야기하면서 동시에 다시 되돌아와 사건의 진원지에 영향을 미치는 사태에 대해, 그 구조와 성격을 알지 못하고서 이 사건으로 인해 벌어지는 국제적인 정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구조’는 무엇이며, ‘성격’은 무엇이란 말인가? 또한 ‘수렴’은 무엇이며, ‘확산’은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의 사건이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일어났던 관련 사건들과 또 앞으로 일어날 관련 사건들에 의거해서 의미를 갖는다. 이때 ‘……에 의거해서’라는 말은 ‘……을 지평으로 해서’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즉 “하나의 사건은 여러 다른 관련 사건들을 지평으로 해서 의미를 갖는다.”라는 바꿀 수 있다. 이때 ‘지평’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서 이런 말을 피력하거나 이해할 수는 없다. ‘지평’(예컨대 한반도에서 동북아, 동북아에서 세계 전체)은 항상 그 속에서 문제가 되면서 의미를 갖는 ‘주제화된 대상’(예컨대 김정일의 사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때 ‘주제화됨’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대상이 됨’은 무엇인가, 그리고 ‘주제화된 대상과 지평 간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등을 모르고서는 이러한 말을 제대로 피력하거나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피력하고 이해한다 할지라도 피상적일 수밖에 없고, 다들 피상적인 설명과 이해를 통해 제대로 소통을 이루었다고 착각을 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설명과 이해가 혼돈된 상태에서 제대로 질서를 갖춘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관련되는 기초 개념들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흔히 혼돈은 ‘카오스’이고, 질서를 갖춘 것은 ‘코스모스’라고 한다. 과연 ‘카오스’는 무엇이며, ‘코스모스’는 무엇인가? 이를 근본에서부터 파악하는 것은 철학의 몫이다. 그뿐만 아니라, 흔히들 말을 하고 그 말을 이해하고 또 그렇게 이해된 말을 바탕으로 자기 나름의 말을 한다고 할 때, 그 말이 제대로 기능하고 정확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 말을 할 때 그 말을 하고 이해하는 당사자들이 거기에서 활용되는 기초 개념들에 대해 가능한 한 정확하게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올바른 소통이 이루어지고, 올바른 소통을 통해서 바람직한 효과를 낳을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철학은 ‘설명’이 무엇인지, ‘이해’가 무엇인지, 그리고 ‘바람직함’이 무엇인지, ‘효과’가 무엇인지, 또 ‘행동’이 무엇인지 등을 근본에서부터 알고자 한다. 심지어 ‘앎’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
하나의 대대적인 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감하게 된다. 비단 대대적인 특별한 사건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소한 사건도 제대로 깊이 있게 알고 보면 대단히 중요한 사건일 수도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굳이 나비 효과와 같은 사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소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대대적인 큰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은 어쩌면 역사의 기본적인 법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생은 사건의 연속이다. 인생은 결코 나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다. 나의 삶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주어져 있으면서 계속 새롭게 다변화해 나가는 사회역사적인 전체의 환경과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영위된다. 나와 나 아닌 것들 간의 부단한 상호작용이 곧 삶의 역정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 즉 ‘자아’는 무엇이며, 나 아닌 것 즉 ‘타자’ 무엇이며, ‘자아와 타자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어쩌면 인생을 논할 때 가장 근본적인 기초 개념들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나이고자 하는 것을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확대시킬 수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늘 자기이고자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이고자 할 때, 항상 자기가 아닌 것들과 영향을 주고받는다. 자기임을 전문적으로 ‘자성’(自性)이라고 하고, 자기가 아닌 것들을 ‘타자’(他者)라 하고, 타자들과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를 ‘대타적’(對他的)이라 하고, 그러한 대타적인 관계를 통해 자기에게 형성된 것을 ‘대타성’(對他性)이라고 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한다는 것은 결국 자성과 대타성의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렇듯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기초적으로 작동하는 주요 개념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그 개념들 역시 존재하는 것이기에 그 나름의 존재, 즉 그 나름의 자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 나름의 자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개념들과의 관계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즉 대타성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의 개념이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의 개념을 이해할 때, 다른 개념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여러 다른 개념들로써 하나의 개념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개념은 완전하게 설명될 수도 없고 이해될 수도 없다. 설명되어야 할 개념(피설명항)을 설명해 주는 개념들(설명항) 역시 다시 설명되어야 할 개념(피설명항)들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대략 설명했지만,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을 알면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모든 사태들이 의미를 갖는 것은 인간들을 통해서이고, 특히 그 인간들의 말을 통해서다.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을 바탕에 깔지 않고서는 그러한 말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을 가능한 한 정확하고 깊이 있게 그리고 폭넓게 이해하고 있으면 인류가 형성 ‧ 축적해 온 온갖 예술 문화적인 보고(寶庫)들을 나의 삶의 자양분으로 삼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된다. 여러 장르의 문헌들에서 예사로 쓰이는 것이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이 아닌가. 그 문헌들의 맥락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여 우리의 삶을 더욱 살지게 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근본적으로 보면,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은 인간 사유의 기초적인 뼈대를 형성하고 있기에, 어떤 사유를 하건 더욱 논리적이면서도 근본적으로 사유할 수 있도록 한다. 말하자면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을 익힌다는 것은 모든 사유를 위한 기초적이면서 근본적인 두뇌 체조라 할 수 있다.
우리 모두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을 익혀 나의 개인적인 삶을 풍부하고 깊이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공동체의 삶을, 나아가 전 인류적인 공동체의 삶을 풍부하고 깊이 있게 하는 데 기여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공동체의 삶이 없이는 나의 삶이 없고, 나의 삶이 없이는 공동체의 삶이 없다고 하는 근본적인 사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있어서도 바로 이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소략한 이 책은 저자가 일해 온 <철학아카데미>의 2011년 봄 학기에 진행한 강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책의 문장들 중 실제 강의 상황을 느끼게 하는 대목들이 나오더라도 괘념치 마시길 바란다. 당시 강의에 참여한 많은 수강생들에게 특별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이를 알고서 책으로 출판하고자 제안을 하고, 또 솔선수범해서 애써 멋진 책을 만들어 준 출판사 <생각정원>의 대표 박재호 선생께 마찬가지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2011년 12월 21일, 녹번동에서
저자 조광제

[한철연] 10월 철학자의 서재 live 안내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선생님들과 독자님들께

안녕하십니까? 한철연 학술1부입니다.

10월 월례 발표회를 공지합니다. 10월은 철학자의 서재 live로 진행합니다.

진행은 버틀러의 저서 『혐오 발언』을 가지고 유민석 선생님이 하십니다.

“혐오와 혐오 발언”은 일베, 메갈리안 등의 활동이 촉발시키고 쟁점화되며 최근 한국에서 중요한 화두가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주제인만큼 회원 선생님들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 일시 : 10월 21일(금), 오후 6시

* 장소 : 한국철학사상 연구회

* 주제 : 버틀러의 『혐오 발언』 – “혐오 발언에 대한 대항은 가능한가”

* 진행 : 유민석 선생님(서울시립대)

 


<아래는 유민석 선생님이 보내주신 철학자의 서재 live 내용 개요입니다>

법학자들과 운동가들은 혐오 발언이 말하는 것 뿐 그것이 행하는 것에 근거하여 혐오 발언에 대한 금지를 종종 추구해왔다 (랭턴, 1993).
그들에 따르면 혐오 발언은 일종의 언어적인 따귀로, 표현의 자유의 보호를 받는 ‘그냥 말’이 아니며(매키넌),
수신자의 복부를 강타하고 종속적인 지위로 못박아 두거나(마츠다),
열등한 자로 서열을 매기고, 그들을 향한 차별을 정당화하며 사회적 약자들을 발언 불가능하도록 침묵시킨다(랭턴).

그러나 말은 의도된 대로 항상 행위하지 못한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주디스 버틀러는 잠재적으로 고통을 주는 말을 심문하고 수복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말에 대한 금지가 아니라 말에 대한 반복에 위치시키면서 (1997)
“아무도 상처를 반복하지 않고서는 상처를 극복할 수 없다”(p.102)고 주장했다. (Eichhorn 2001)

『격분하기 쉬운 말Excitable speech』에서 버틀러는 포르노와 인종차별적 혐오 발언은 어떤 형태의 법적 제재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몇몇 페미니스트들과 반인종주의 이론가들을 비판한다.
버틀러가 인용하는 이론가들―레이 랭턴, 캐서린 매키넌, 그리고 마리 J. 마츠다―는 모두 발화의 규제에 대한 “평등equality” 논증의 어떤 형태를 제공한다.
즉 만일 말이 억압된 집단 구성원을 종속시키고, 주변화하거나 피해를 준다면, 말은 규제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J. L. 오스틴의 언어 행위 이론을 사용하면서 그리고 말의 열린 본성을 강조하면서, 버틀러는 이러한 논증들을 거부한다.
궁극적으로 버틀러는 그 같은 규제는 그렇지 않았다면 혐오 발언을 “재의미화resignigying”하고 “재상연restaging”함을 통해
이러한 말에 대한 도전을 불러일으켰을 자들을 침묵시키도록 작동할 수 있기 때문에 혐오 발언에 대한 어떤 규제를 실행하는데 반대할 것을 조언한다. (Schwartzman 2002)

혐오 발언이란 무엇이며, 혐오 발화자는 누구일까?
혐오 발언에 대한 대항은 가능한가?
버틀러는 어째서 혐오 발언에 대한 발화수반행위론에 반대하며, 혐오 발언에 대한 국가 규제나 처벌을 반대하는가?
주디스 버틀러가 『혐오 발언 Excitable Speech』에서 개진한 발화효과행위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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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사상연구회 오시는 길 : 2호선 합정역 2번출구, 도보10여분, 태복빌딩 3층

크기변환_한철연약도

[한철연] 2016년 9월 월례발표회 안내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선생님들께

안녕하십니까? 한철연 학술 1부입니다.

세상을 삶아 먹을 듯했던 여름의 기세가 하루 아침에 꺾이고 거짓말처럼 가을이 찾아왔습니다. 학술 활동에 탄력 붙으시길 바랍니다.

9월 월례 발표회를 공지합니다. 9월에는 남기호 선생님께서 헤겔 관련 연구 논문을 발표해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가을의 정취를 한철연에서 헤겔과 함께 즐겨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회원 선생님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10월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도 기대하실만 자리일 것입니다)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6년 9월 월례회 공지

*일시 : 9월 23일(금), 오후 6시

*장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

*발표자 및 논문 제목: 남기호 선생님(제주대)

: <매개된 직접성의 변증법 – 헤겔의 『철학백과요강』(1827) 예비개념을 중심으로>

*논평자: 이정은 선생님 (연세대)

 

<논문 개요>

본 발표는 『철학백과요강』 재판 예비개념 부분에서 전개된 헤겔의 변증법을 객관적 사유의 구조로서 분석한다.

헤겔에게 논리적인 것이란 존재와 직접적으로 매개된 객관적 사유규정들이다.

먼저 칸트 이전의 순진한 형이상학에서 객관적 사유규정은 대립 의식 없이 직접적으로 설정되었다.

그러나 이 사유규정은 유한한 것으로서 다른 객관적 사유규정과 대립된 것으로 밝혀진다.

그 다음으로 순진한 경험론과 비판 철학은 객관적 사유규정들을 자신들의 타자와의 대립 속에서 매개된 것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타자와 대립된 매개는 제약된 유한성을 의미한다.

끝으로 형이상학화하는 경험론 내지 직접지의 철학은 이러한 매개 자체에 대립하는 무한한 직접성을 주장하지만,

이는 유한자와 분리된 공허한 비약으로 귀착한다.

이에 반해 매개 자체의 지양을 통해 설정되는 직접성은 자신의 유한성을 극복하는 객관적 사유의 변증법을 가능하게 한다.

이와 같은 객관적 사고의 세 발전 입장들은 각각 논리적인 것의 추상적 오성적 측면, 변증법적 부정적-이성적 측면, 사변적 긍정적-이성적 측면에 해당한다.

본 발표는 이렇게 칸트 이전 볼프 형이상학, 칸트의 비판철학 그리고 야코비의 직접지의 철학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통해

헤겔 변증법의 기본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논의하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직접적 규정의 매개와 이 매개 자체의 지양을 통한 직접성의 무한한 긍정적 규정 가능성의 관점에서

헤겔의 객관적 사유의 변증법은 매개된 직접성의 변증법으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 10월 철학자의 서재 Live 예고

일시 : 10월 21일 (금) 오후 6시

진행 : 유민석 선생님(서울시립대)

주제: 주디스 버틀러의 <혐오 발언>

유민석 선생님은 버틀러의 <혐오 발언>의 역자이십니다.

근래 대한민국 사회를 강타하고 있는 현상이 각종 혐오 발언과 페미니즘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을 자리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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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민주주의 권리 주체의 대응 매뉴얼’은 존재하는가? [철학자의 서재]

외부 필자가 우리 한철연과 인연이 많은 알렙 출판사에서 나온 새책  [당신은 민주국가에 살고 있습니까?](김영수 지음, 알렙, 2016)을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우리에게 ‘민주주의 권리 주체의 대응 매뉴얼’은 존재하는가? 

송진완(논술개그 실장)

http://cafe.naver.com/nonsulgag/588

친구 따라 강남간다는 말처럼, 나는 20여 년 전에 친구따라 신림동에서 고시공부를 한 적이 있다. 고시원에 자리를 잡고, 용하다는 학원가를 전전하며 각종 고시과목의 족집게 강의를 듣는게 일상이었던 시절이다.

고시과목이 주로 ‘법’과 관련이 있다보니 찾아듣던 학원 강의도 대부분 헌법, 행정법, 민법 등이었다. 그런데 내가 법학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독 ‘헌법’과 ‘행정법’의 특징과 차이점이 기억에 남는다. 헌법 강의 교재인 각종 [헌법학 원론]들은 그 압도적인 두께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다루는 내용은 매우 추상적이다. 주로 민주주의의 핵심원리와 역사상 헌법학자들의 이론에 대한 소개에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한다. 그에 반해 행정법 책은 두께는 조금 얇아도 그 내용은 매우 방대하고 복잡하고 그러면서도 법체계가 매우 논리정연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고시공부 시절 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는바, ‘행정법은 국가의 것이고, 헌법은 국민(‘인민’이 더 정확한 용어겠지만…)의 것이다’라는 결론이다. 이러한 결론을 조금 더 자세하게 다듬으면 다음과 같다.

국가는 국민을 (합법적으로) 통제하고 착취하기 위해 ‘합법적이고 논리정연한 매뉴얼’ 즉, 행정법 체계가 필요했지만, 국민에게는 ‘두리뭉실하고 관념적인 권리장전’ 즉, 헌법학 원론만을 제공함으로써 권리의 작동체계가 매뉴얼화 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위와 같은 거친 논증의 핵심은 결국, 현실 민주주의는 국가에게만 유독 유리한 지형에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현실 공산주의가 붕괴한 이면에도 똑같은 문제가 놓여있지 않은가? ‘당’은 체계적인 착취매뉴얼을 갖고 있지만 ‘인민’에게는 고작 ‘인민의 이름으로’라는 선언뿐이지 않은가. 공산주의라는 말이 경제시스템을 정의하는 차원일 뿐이지 공산주의 국가도 대부분 ‘민주공화정’을 표방한 이상, 권력과 권리의 불균형을 극복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균형은 독재왕정이 민주공화정으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어쩔수 없이 받아들여야만하는 ‘현상’인가? <당신은 민주국가에 살고 있습니까?>(알렙출판, 2016)의 저자 김영수 교수는 단호히 ‘아니’라고 말한다. 권력의 주체인 국가에게 ‘전가의 보도’인 행정법이 있듯이, 권리의 주체인 국민도 ‘관념적인 선언’ 이상의 ‘체계화된 권리 매뉴얼’을 연구하고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여년 전에 어느 고시생이 발견한 ‘행정법과 헌법 체계 사이의의 불균형 현상’은 정치학자인 김영수 교수에 의해 매우 세련된 진보적 민주주의 이론으로 ‘의식화’된다. 다음을 보자.

“(중략)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민주 국가에 살고 있는가? ‘민주 국가’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단 한번이라도 고민해 보신 적이 있는가? 만약 당신이 이런 질문을 케케묵은 것이라고 여기는 순간, 이미 민주화된 국가에서 ‘민주’가 무엇이고, ‘국가’가 무엇인가를 왜 고민하느냐고 되물을 것이다. 되묻는 질문 속에 자기 스스로를 ‘무지의 폭력자’로 만드는데도 말이다. (중략)” <당신은 민주국가에 살고 있습니까?> 머리말 중에서

권리의 주체인 우리가 ‘헌법학 원론’에서 강제된 좁은 의미의 ‘선언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천적인 민주주의 매뉴얼’을 가져야 한다고 자각하는 순간 민주주의와 민주주의 국가는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자각이 무엇인지 짚어주고 자각 이후의 행동강령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1부. 현상 : 민주주의 배반하는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원초적 자각을 촉구한다. 시민혁명 대신 일제강점기를 맞이하면서 민주주의의 선언적인 본질조차 학습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대한민국 국민들이 반드시 자각해야만 하는 현실 현상을 제시한다.

[2부. 허상 : 행복을 짓밟는 국가, 국가를 소유한 가난뱅이]는 구체적 자각을 촉구한다. ‘헌법학 원론’이 가리고 있는 현실 민주주의의 허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3부. 상상 : 민주주의 상상하는 민주주의]는 방안을 제시한다. 권리 주체인 국민이 행정법 체계에 대항할 수 있는 고성능 무기를 고안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지금까지는 진보적 시민단체에게나 어울린다고 치부하고 외면해왔던 생소한 개념들은 이 책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필수적인 실천적 개념으로 전환된다.

우리가 권력 주체로서 착취의 매뉴얼을 꿈꾸지 않는 이상, 우리가 권리 주체로서 좀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면 ‘민주주의 권리 주체 대응 매뉴얼’은 반드시 필요하지 않겠는가? 이 책이 그 꿈의 길잡이가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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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알렙 출판사

 

[서평] 해방 후 3년: 건국을 향한 최후의 결전

해방 70년-분단 70년이 되는 해에 ‘해방 후 3년’을 돌아보는 이유

조한성, 『해방 후 3년: 건국을 향한 최후의 결전』, 생각정원, 2015

 

 

조배준(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원)

 

분단과 전쟁으로 귀결된 ‘가능성의 역사’

1945년 이후 육십갑자가 지나고 십년이 더 흘렀다. 당시 한반도 민중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날’은 일제로부터 ‘해방(解放)’되었다는 환희를 느끼기에 충분했지만, 점령군이 된 강대국들 사이에서 민족의 미래를 온전히 우리 손으로 만들어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기에 불안감도 엄습했을 것이다. 식민지 상태를 벗어났더라도 진정한 주권을 확보한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까지 예상되는 수많은 난관을 짐작해보면 그들에게 진정한 광복(光復)은 요원했으리라. 그런데 정부는 올 해가 ‘광복 70주년’임을 강조하면서도 그 숫자가 동시에 ‘남북분단의 역사’를 가리킨다는 것은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8.15 해방 이후 정확히 3년이 되는 날에 대한민국이 건국되기까지, 즉 적대적 분단시대가 도래하기까지 한반도의 사람들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이념들의 정글을 어떻게 통과했을까. 암울한 식민지 터널의 끝에서 염원하던 해방이 도래했지만, 우리는 왜 분단이라는 또 다른 터널로 다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이처럼 독립의 완결과 분단의 극복은 서로 중첩되고 연결된 역사적 과제로서 우리에게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문제로 남아 있다. 친일청산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한 상태에서 후대 세대에게 민족국가의 진정한 독립을 운운하기가 어렵다면, 진정한 광복 역시 한반도의 분단이 지속되는 한 완수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의 역사를 한국만의 관점에서 거칠게 요약하자면 ‘건국․압축성장․민주화’의 과정이겠지만, 한반도 전체로 보자면 그것은 곧 ‘분단․전쟁․적대적 대립’이 낳은 구조적 산물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 통일된 민족 국가의 건설로 나아가지 못하고 서로 다른 두 체제로의 분단을 저지하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해방 후 3년’은 남북이 각각 성공한 ‘건국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분단으로 귀결되고 만 ‘실패의 역사’이다.

그런데 이 책의 필자(조한성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는 그 실패의 역사에서 ‘가능성의 역사’를 확인하려고 한다. 그는 “해방 후 3년은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꿈꿀 수 있었고, 어느 때보다 많은 것을 만들 수 있었”던 시기라고 강조한다. 물론 그 해방공간의 이야기 속에서 미래적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안에 일치된 노선이나 어떤 합의점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저마다 신봉하는 가치를 절대시하고 너무나 다른 민주주의‘들’을 말했으면서도 그 실패의 역사에는 새로운 사회 구조를 지향했던 강렬한 열망이 숨어 있다. 그런 점에서 그 혼돈의 과정은 각 민족 지도부의 시행착오와 좌충우돌 또는 점령군의 전횡과 억압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곳곳에서 야만적 폭력이 횡행했지만, 적어도 당시는 개인적 삶과 정치공동체의 혁신을 함께 꿈꿀 수 있을 정도의 희망은 존재하던 시기였다.

그런 점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의 조국을 ‘헬(hell) 조선’이라는 말로 요약하는 젊은이들이 태반인 2015년의 한국에서 그 시대가 품었던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삶을 위한 희망”은 간절하게 그리운 것이다. ‘자살률 세계 최고, 출산율 세계 최저’로 대변되는 오늘날 한국 청년 세대들의 절망적 시대 인식을 극복하기 위한 돌파구는 단지 정권교체로 일어나는 역사적 진보나 퇴행의 수준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 인민들과 정치공동체를 위한 보다 근본적인 미래 전망 속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에게 민족의 통합을 말하는 것은 먹고사는 문제에 치여 뜬 구름 잡는 얘기로 간주되고, 국가 시스템은 위급한 상황에서 개인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점을 새삼스레 확인시켜 주고, 정치는 혐오나 냉소의 대상이 되어 가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이른바 ‘역사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이 찬란한 ‘광복 70년’의 해에 한국현대사의 출발점은 다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7인의 민족지도자, 그들의 선택과 분열의 한계

필자는 해방 후 정치 지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7명의 민족지도자들, 즉 여운형, 박헌영, 송진우, 김일성, 이승만, 김구, 김규식이 어떤 정치적 열망 혹은 야망을 표출하며 새로운 국가의 건설로 나아가려 했는지를 추적한다. 필자는 이 7명의 언급 순서는 “해방 후 활동을 개시한 순서나 귀국한 순서”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들이 대표하는 각 세력의 제반 조건 및 활동 방향의 배경과 그 결과를 요약하며,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종료 시점까지 즉, 분단으로 가는 폐쇄회로에 갇히기 전까지 그들의 ‘차이’를 강조한다.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을 미리 준비하며 자주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국내에서 노력했던 여운형, 일제강점기 한국 최고의 공산주의 이론가이자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였던 박헌영, 국내 우파 민족주의 세력을 대표하던 송진우, 항일무장투쟁의 전설적인 지도자로 이름을 떨치던 소련군 장교 출신의 젊은 지도자 김일성, 미군정의 적극적인 후원을 이끌어내며 급부상하고 있었던 이승만, 임시정부를 이끌며 중국에서의 독립운동 세력을 대표하던 김구, 중도우파 입장을 대표했던 김규식의 존재는 오늘날의 한반도엔 존재하지 않는 다양한 정치적 세력들을 대변한다.

물론 이 책은 서술 과정에서 때로는 논리적 비약이나 압축을 부득이하게 보여줄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제한된 분량의 대중교양서에서 각 인물들의 성취와 한계를 분명히 제시하기 위해서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보다 저자가 더 경계하고 있는 점은 ‘해방 후 3년’은 우리 민족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이 이미 그 운명이 결정되어 있었다는 시각이다. 냉전의 서막을 알리며 한반도에서 맞붙은 두 강대국 사이의 힘겨루기 속에서 어떻게 분단을 피할 수 있었겠냐는 논리이다. 미소의 분할 점령과 모스크바 3상회의, 미소공동위원회 등 세계 질서 재편의 흐름 속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한 우리 민족의 지도자들도 그저 강대국 입장의 대리인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저자는 비록 그 ‘세계 체제의 규정력’이 막강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해방 후 3년의 역사는 우리 민족이 미․소가 만든 세계 질서와 끊임없이 충돌하며 우리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조금씩 방향을 바꾸고 조금씩 변화를 일으키면서 하나하나 소중하게 만들어간 역사”라고 강조한다.

여러 단체와 조직이 서로 다른 정치적 이상을 지향하며 난립하며 경쟁하던 당시 상황에서 저자는 민족통일국가가 수립될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시점으로 정당통일운동과 정부통합이 시도되었던 해방 이후의 4개월여 시간을 꼽는다. ‘각정당행동통일위원회’라는 상설 회의기구가 만들어졌던 데에서 보듯이 당시 단일한 정치적 의결기구를 건설하기 위한 열기는 뜨거웠다. 하지만 좌우익으로부터 조정자 역할을 위임 받게 된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우익인사로만 채우면서 이 정당통일운동의 성과와 가능성을 지워버렸다. 그 후 중경 임시정부와 조선인민공화국의 좌우익 ‘통일합작운동’이 기대를 받기도 했지만, 큰 뜻으로 화합하지 못하고 단기 정략적인 입장만을 내세운 각 세력의 태도로 인해 역시 유의미한 성과를 만들지 못했다. 또한 신탁통치에 대한 격렬한 입장의 대립 이후 한국민주당, 국민당,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이 참여한 ‘4당 합의’도 우익 정당들의 중도이탈로 수포로 돌아갔다. 여운형과 김규식으로 대변되는 좌우세력이 다시 만났던 ‘좌우합작운동’에서도 박헌영이 주도한 좌익 세력의 비타협적인 입장은 걸림돌이 되었다.

이처럼 통합된 힘을 창출하지 못했던 연속된 분열과, 지리멸렬하게 소멸해 버린 자생적 정치역량의 표출 가능성을 돌아보면서, 저자는 민족의 역량이 결집될 수 있었던 기회의 상실을 탄식한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공전되면서 ‘예정된 미래’로서의 분단이 다가올 때, “우리 민족이 하나로 뭉쳐 합의를 종용했다면 미국과 소련이 자신들의 의견을 고집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물론 각 세력의 합치된 의견이 단일한 정치력으로 승화되었다고 해서 극동지역에서 맞붙은 세계체제의 강고한 규정력을 극복할 수 있었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 역사적 성과는 이후의 분단 극복 과정과 통일의 전망을 위해서 중요한 자산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추측해볼 수 있다. 당시 이념적 대립을 넘어 민족적 합력이 단기간이나마 창출될 수 있었다면, 외세의 영향이나 체제의 통합보다 사람들 사이의 통합이 분단 극복의 과정에서 최우선이라는 민족적 가치가 명징하게 부각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한반도는 식민지 상태를 벗어나자마자 미소의 동아시아 전략에 종속된 극단적 이념 지향의 미로 속에서 전선의 최전방이 된지 2년도 채 안 되어 잿더미가 되었다.

 

대한민국 탄생 시기의 과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

이런 점에서 해방 후 3년은 오늘날 세습 통치와 수령론에 근거한 극단적 폐쇄사회인 북한 체제와, 반세기 넘게 친일친미기득권 세력의 후예들이 건국세력의 적통을 참칭하며 여타의 다른 세력을 ‘좌빨종북’으로 매도하는 한국정치사의 근원적 모순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바탕이 된다. 건전한 보수 민족주의 세력, 열려 있는 사회주의 세력, 중도좌․우 세력 등이 한반도의 정치 지형에서 설 자리를 완전히 잃게 되고, 극단적인 체제경쟁과 적대적 군사대치가 각 통치 세력들에게 활용되기도 한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3년간의 정치적 진통이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해방공간의 정치 지형이 응축하고 있던 공화의 이념, 민주주의의 다양한 논리들의 스펙트럼을 다시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 ‘공화’와 ‘민주’의 개념이 아주 제한적이고 편향적인 의미로 축소되어 통용되는 문제의 극복과도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이러한 분단의 지속 과정에서 두 체제가 적대성과 이질성을 동시에 키워 온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 분단은 우리 삶과 국가의 특징적 ‘변수’로서가 아니라, 너무나도 익숙한 제반 조건으로 간주되기 일쑤이다. 북한을 불가해한 타자로 대상화시켜 ‘통일대박론’의 도구적 가치로서만 이해하는 것이 훨씬 더 간편한 사고방식이며, 분단이 남긴 상처를 극복하는 문제와 통일을 연결시킨다는 생각은 아주 낯선 생각인 것이다.

물론 필자가 다소 민족 개념을 엄밀하지 않게 남용한다는 점은 지적되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이 책만의 아쉬움이 아니라 계속 함께 고민할 화두로 남겨 두어야 할 것이다. 서평을 마무리하며 저자의 서술 의도를 다시 한 번 옮겨 본다. “해방 후 3년의 역사에서 우리의 출발점과 도착점을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선택한 것과 선택하지 않은 것을 찾아내고, 역사의 가능성을 돌이켜보는 것”을 통해 “그들의 삶 속에서 ‘역사의 가능성’을 확인하자. 그리고 지금, 우리의 선택은 어떤 역사를 가능하게 할 것인가?” 대학에 적을 둔 일반 학자들이 연관성 높은 기존의 논문을 아주 포괄적으로 엮어 출간하면서 전문학술서를 표방하는 데 비해, 민족지도자들의 ‘선택’을 비교적 공정한 시각에서 비교하면서도 선명하게 유지된 필자의 문제의식은 광복 70년을 맞이하는 올 해에 더 각별하게 다가온다.

국정 역사교과서의 부활이 가시화된 요즘, 머지않아 ‘대한민국의 탄생’이 어떤 역경과 희생 속에서 이루어졌는지를 강조하며 그것을 젊은 세대에게 어떻게 전달하는 것이 ‘객관적이냐’의 문제가 다시 뜨거운 논쟁 속에 휘말릴 것이다. 해방 후 3년, 어렵게 탄생했고 숱한 과제를 안고 있던 당시 신생 대한민국에서도 “새로운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싸움은 독재와 민주주의의 싸움이자 분단과 평화통일의 싸움이었다. 그 싸움은 민주주의 원리가 작동하는 한, 지지부진하더라도 결국은 국가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 분명했다. 그것이 신생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앞에 놓인 운명이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민주주의의 확산과 발전, 친일세력과 기획주의자들에 대한 과감한 역사적 청산, 봉건적 잔재와 부정부패를 일소한 시민사회의 발전, 부가 독점적으로 세습되지 않는 민주적 경제발전, 한반도 평화의 유지와 민족통일의 달성. 이 과제들은 비극적이게도 70여년 전과 다름없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숙제이며, 지속가능한 대한민국 앞에 놓인 문제들이다.

해방 후 3년

[서평] 판문점 체제: 사회적 연대로서의 평화를 위한 지구사적 탐구

판문점 체제: 사회적 연대로서의 평화를 위한 지구사적 탐구 

김학재, 『판문점 체제의 기원: 한국전쟁과 자유주의 평화기획』, 후마니타스, 2015.

 

 

조배준(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연구원)

 

 

1. 한국전쟁과 한반도 분단을 바라보는 새로운 패러다임

오늘날 판문점은 한국전쟁의 기억과 고통을 상기시키는 상징적 장소이자, 어느덧 70년이 된 남북분단과 60년 넘게 지속되는 정전체제의 당위성을 강화시키는 현장으로 대중에게 각인되어 있다. 한반도의 적대적 분단체제는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마음의 장벽’을 더욱 단단하게 쌓아왔는가. 지금까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대부분 ‘전쟁’의 준비와 발발에서 시작되어 ‘정전’ 상태의 지속으로 해명되는 프레임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남북의 기득권 세력은 늘 평화를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과거의 전쟁을 적대적으로 기억하게 만들고, 다시 시작될지 모르는 전쟁을 강압적으로 준비하는 과정을 통해 체제 내부를 단속하고 강화시켜왔다. 그런데 판문점으로 상징화되는 분단체제와 한국전쟁의 성격을 새롭게 바라보기 위해 ‘전쟁의 기원’이 아닌 ‘평화의 기원’을 고찰해볼 수는 없을까. 이 책의 저자는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을 발전시켜나가면서 한국전쟁의 과정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결론에 이르러서는 뒤르켐의 생각에서 기초하는 ‘연대로서의 평화’를 제안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현재 독일 베를린자유대학교 동아시아대학원 박사후 전임연구원인 김학재의 박사논문인 이 책은 이처럼 한국전쟁을 보다 거시적 안목에서 바라보면서 한반도의 분단 지속을 재인식할 수 있는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저자는 지구사(Global history)의 관점에서 유엔의 활동 및 국제법, 그리고 근대 자유주의의 기획 안에서 한국전쟁의 추이와 분단 체제의 성격을 추출해내고 있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미국이나 유엔은 한국전쟁을 잊고 있지만, 한국전쟁에서 고착화된 한반도의 정전 및 분단체제를 극복해나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주변국을 비롯한 당대의 세계와 소통해야 한다. 물론 저자는 세계와 대화하기 위해 우리는 민족사의 틀을 벗어나 세계의 주요 흐름을 총체적인 맥락 속에서 인식하는 지구사의 위치에서 이 문제를 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러한 포착은 한국전쟁 및 정치사연구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 한반도 분단 상황의 극복에도 참신한 시각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나아가 논자는 한국전쟁에 관한 이러한 시각을 한반도 문제의 재인식만으로 한정하지 않고, 한․중일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를 타개하고 실질적인 협력과 평화를 구축할 수 있는 보다 적극적인 지평으로 활용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을 갖고 이 책을 보게 되었다.

이처럼 ‘전쟁의 기원’이 아니라 ‘평화의 기원’이라는 기획이 중요한 이유는 논자가 보기에 무엇보다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성찰할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 있는 것 같다. 저자의 이러한 시도는 오늘날의 우리 삶의 방식과 체제의 유지를 ‘새롭게’ 인식하는 데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역사 속의 한국전쟁이 아니라, 여전히 지속되는 현재의 문제이자 평화로운 미래를 희망하기 위한 현실적 과제로 한국전쟁을 바라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 및 결과에 주목했던 1세대의 연구를 보다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그 전쟁의 결과가 근대적 자유주의 기획의 영향권 안에서 어떤 지점에 위치해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20세기의 세계사와 한국사의 접점을 새롭게 구상해보기 위해서도 이 연구는 가히 새로운 패러다임의 초석을 놓았다고 할만하다. 바로 이러한 지점들에 대한 기대와 전망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한 소장 연구자의 이 도전적인 박사논문에 석학들이 찬사를 보내고 있으리라.

 

2. ‘판문점 체제’의 성격과 실천적 과제

저자는 아시아 패러독스의 핵심 기반 중 하나인 ‘한국전쟁 군사 정전 체제’를 뒤집어 인식하여, ‘판문점’으로 표상되는 전쟁의 위협을 오히려 ‘하나의 특수한 평화체제로서 판문점 체제(Panmunjom regime)’라고 부르고 있다. 냉전의 가장 대표적인 유물인 판문점이 갖고 있는 의미를 전복하여 기존의 것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재사유하는 전략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금껏 지속된 ‘판문점 체제’는 겉으로는 정전을 표방하면서도, 속으로는 서구의 자유주의 진영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해서 만들어낸 기이한 평화 기획으로 재사유된다. 그래서 이 개념은 전쟁이 종식된 것이 아니라 잠시 중단된 것으로 간주하면서 “냉전적 적대관계를 60년 넘게 보존하고 있는 한반도의 현실은 역사적으로 희귀한 현상”이라고 지적하는 저자의 문제의식을 담아내기 위해서 도출된 것이자, 민족사의 딜레마가 세계사적 맥락과 연계되기 위한 이론적 발판이 된다. 즉 특수한 역사적 사례를 보편적 세계사 안에 위치시키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이처럼 한국사와 세계사의 접점을 마련하고 한반도의 분단을 지속시키는 한국전쟁과 정전체제를 세계에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일종의 보편적 개념화 전략을 취한다. 외국의 학자들이 백낙청의 ‘분단체제’나 박명림의 ‘53년 체제’란 개념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공통 지반’으로서 국제법과 국제기구를 중심으로 한국의 정전체제를 재인식하는 것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그래서 ‘제네바 체제(1954)’나 ‘반둥 체제(1955)’와 함께  ‘판문점 체제(1953)’가 비교될 수 있었던 것은 지역적이고 특수한 ‘사례’의 고유명사에서 출발했지만, 그 저변에는 “근대적 자유주의의 변질과 냉전체제의 구축”이라는 세계사적 맥락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내셔널 히스토리’를 ‘글로벌 히스토리’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완하는 것이다. ‘왜 우리는 한국전쟁을 겪을 수밖에 없었는가’에만 주목하는 것을 벗어나, ‘왜 우리는 아직도 전쟁의 연장선인 정전체제에서 살고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가’라는 물음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전자와 후자가 만나서 공유할 수 있는 이론적 지평의 확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판문점 체제’란 유럽의 역사가 전쟁 과정을 통해 수립했던 ‘베스트팔렌 체제’부터 ‘베르사유․샌프란시스코 체제’처럼 냉전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평화 체제였다는 것이 저자의 인식이다. 저자는 오늘날에도 판문점 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배경을 미국이 취하고 있는 국제 전략의 선회 속에서 인식한다. 냉전 초기에 미국은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통해 전쟁을 억제하려는 ‘홉스적 평화 기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모든 면에서 중국에 추월당할 것이 우려되는 오늘날에는 다시 국제법이나 규범들을 강조하는 ‘칸트적 평화 기획’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사례로서 저자가 들고 있는 것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무기를 수출하거나 보급하고 있는 미국이 주도하여 유엔에서 2013년 4월 ‘재래식 무기’ 수출을 억제하고 공동으로 관리하는 협약에 118개 회원국들이 서명한 사건이다. 과도한 비용이 드는 재래식 전쟁의 수렁에서 벗어나 첨단 무인 무기의 개발과 압도적인 정보력의 우위를 통해 국제 질서의 패권을 유지하면서, 칸트적인 수단도 적절히 활용하여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판문점 체제는 “그 협약에 찬성한 미국, 반대한 북한, 기권한 중국”의 태도에 의해 요동치면서도 굳건히 지속된다. 전쟁 당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첨예한 갈등 지대인 한반도는 주변 국민국가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복합적으로 대립하고 충돌하면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체제는 평화를 지향하는 칸트적 기획과 홉스적 기획 사이의 갈등과 공존이라는 기묘한 관계로 유지된 ‘모순적 체제’이다. 저자는 이에 대해 “판문점 체제는 처음부터 국제법과 국제기구 및 여러 국가들의 기획과 협상의 산물이며, 당시에 해결되지 못했던 문제들이 현재까지 방치되어 있기 때문에 존속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인식 위에서 저자는 판문점 체제의 성격을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첫째, 60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불안하고 유동적인 임시 군사 정전 체제”이다. 판문점 체제는 국가 사이의 권력이 균형을 이룬 질서도 아닐뿐더러, 당사국 사이의 타협으로 체결된 불완전한 평화 협약 체제에도 미치지 못하는, 단지 주변 강대국들이 기존 질서에서 얻어 온 이해관계의 강박에 의존하며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국제적 보편성이 결여된 협소한 군사 동맹 체제”이다. 판문점 체제는 칸트식 국제 연방이 가지는 권위와 홉스식의 세계국가의 힘에 의존한 질서 구축이 모두 실패한 후, 더 이상의 소모전을 막기 위해 마련된 군사적 동맹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셋째, 자유주의적 제도를 물신화한 “냉전적 반공-자유주의 체제”이다. 판문점 체제는 정치 이념이자 공화국의 운영 원리로서의 자유주의에 의해 마련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우월한 문명론으로 격상시키고 다른 모든 대항․대안 이념들을 문명/야만의 이분법으로 배제하는 극우적 자유주의에 기초한 체제라는 것이다. 넷째, “동아시아 사회의 요구를 회피하고 유예시킨 탈정치적 군사․경제 질서”이다. 판문점 체제에서는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된 이후에 청산할 문제와 전후 처리할 문제 같은 한국전쟁 당시 표출된 다양한 갈등과 모순이 민주적 정치 과정으로 해결되지 못한 채 묵살되었고, 그것들은 단지 군사와 경제라는 특화된 기능에 근거한 양자 관계들로 대체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분리된 평화와 특수한 발전주의 기획의 상징”이다. 판문점 체제는 보편적 평화와 정의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양자 군사동맹 체제의 결탁이라는 아주 제한된 평화와 적대적이고 경직된 체제경쟁을 가속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전쟁의 결과물로서 판문점 체제의 이러한 성격은 이 체제가 서구 자유주의 사상에서 두 가지 평화 구축 모델인 칸트의 안정적인 영구 평화 체제도 아니고, 홉스 식의 국가 간 타협에 의한 불완전한 평화 협약 체제도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즉 국제 연방 체제의 ‘권위’에 근거하지도 않고, 패권국가의 ‘힘’이 수립한 체제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판문점 체제’는 유럽의 보편적 국제 질서와는 구별되는 오늘날 동아시아의 특수한 성격, 즉 저자가 ‘동아시아 패러독스’라고 지적했던 “지역 전반에 걸친 불안한 권력 균형 상태”를 확대재생산하는 원형이 된다. 그렇다면 현재의 불안하고 협소한 일시적 평화 상태를 좀 더 완성된 평화 체제로 전환하고,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판문점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목표는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에 대해 아래의 다섯 가지를 제시하는데 그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임시 군사 정전 체제인 판문점 체제는 전투의 부재를 의미하는 부정적 의미를 벗어나, 평화를 지향하고 적대성을 완화하는 긍정적 의미를 통해 적극적 평화 체제로 나아가야 한다. 둘째, 경쟁적 군사 동맹 체제 간 군비경쟁을 억제하기 위해 공동 안보 기구가 수립되어야 한다. 셋째, 탈정치적이고 일방적인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넘어 포괄적 합의에 기반한 동아시아 협의 체제가 필요하다. 넷째, 적대적이고 배제적인 냉전 자유주의 체제와 배제적 민족주의는 지양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외주의와 인정 투쟁을 넘어 평화와 정의의 보편성을 고양시켜야 한다.”

 

3. 한반도 분단의 극복과 동아시아의 실질적인 평화를 위해

이러한 인식 위에서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추구할 새로운 평화의 기준은 기존의 국제법과 국제기구의 권위에 의존하는 칸트적 방식이나, 내전에 대항해 안보를 강조하며 파워게임을 강조하는 홉스적 방식이 아니라고 진단한다. 이제 필요한 평화 전략은 “교류와 접촉을 통해 관계와 사회를 형성하고, 관계의 구조적 불평등을 극복하며 사회정의라는 가치의 달성을 지향하는 사회적 평화”라는 것이다. 저자는 그동안 ‘권위의 부재’를 통해 판문점 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다면 이제는 자유주의의 기만적 이념을 넘어서, 뒤르켐이 강조했던 ‘연대’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강력한 국가의 건설이나 보편적 국제법의 구축이 아니라, 사회 내부의 분업이 활성화되면서 발전하는 사회적 연대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 간의 갈등과 평화의 문제로 사태를 인식하는 ‘정치철학적 고려’에서 사회 자체에서 평화의 동력을 구상하는 ‘사회철학적 성찰’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뒤르켐은 개인들을 규합하는 전통적 민족주의 또는 다른 집단의식뿐만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개인주의만으로는 현대사회의 복잡한 갈등을 해결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서로 연대 의식을 가진 기관들이 충분히 접촉하고 그 소통의 과정을 지속하면서, 공통의 규범을 형성해가면 어디에서도 ‘아노미’ 상태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사회 내부의 연대를 강화하여 자연스럽게 완전한 평화를 요구하는 상태를 상정하는 뒤르켐에서 연유한 이 새로운 평화 전략은 한국전쟁이 초래한 판문점 체제의 ‘평화’가 얼마나 반사회적․반연대적인 것이었는지를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저자가 최종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당연시했던 “자유주의적 평화 추구에서 사회적 연대를 통한 평화 추구로 그 방향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방향은 단지 한국전쟁의 종식과 한반도 분단의 극복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 연대 네트워크’의 구축을 지향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뒤르켐을 빌려와 저자가 제시하는 해법은 결국 국가 간 연대와 국가 내부의 사회 연대가 동시에 파괴되고 있으며, 국제적인 차원에서 지역적인 차원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붕괴된 사회적 연대의 현실이 오늘날의 판문점 체제를 영구화시키고 있다는 생각에 도달하게 만든다. 논자도 저자의 이러한 생각에 공감하며 남북의 지도자들이 이러한 인식적 지평을 공유한다면, 남북이 그 동안의 이념적․제도적․무의식적 분단을 극복해나가는 진정한 통일에 다가갈 수 있고, 그 모든 통일의 과정이 동아시아 평화 구축과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변화의 가능성이 열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전망을 해본다.

물론 주지하다시피 유엔은 국제적 참전과 정전협상의 핵심적인 당사자이지만 60년 넘게 이 불안한 체제의 특성을 방치해왔다. 저자가 어느 인터뷰에서 지적한 것처럼, 한국인이 유엔 사무총장으로 재직하고 있지만 동아시아의 평화 구축을 위한 한국의 정전협상에 관한 유엔의 공식적인 해석은커녕, 향후 연구와 국제 활동을 위한 관련 자료의 취합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의 조건이다. 그래서 냉전 이후 끊임없이 지속된 미국의 국제관계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과 앞으로 더욱 첨예해질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을 고려하자면, ‘유엔을 통한 해결 노력’에만 의존하는 것이 과연 한국이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지는 의문스럽다. 앞으로 한국은 미국과 중국의 눈치를 동시에 보면서 또 다른 국제관계의 굴레에 다시 종속된 채 한반도 평화 체제의 구축을 기대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지 우려스러운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보편적 평화와 보편적 정의에 대한 지향의 부족으로 인해 판문점 체제가 내포하고 있던 부정적 유산들이 고착화”되는 것을 우려하지만, 논자의 시각은 조금 다르다. 한반도 문제에 관해 지금까지 한국에서 문제가 된 것은 아시아적 가치와 제도에 대한 보편적 차원의 인식이 부족했던 점이 아니라, 냉전시대의 종식 이후에도 한국정치외교사에 관해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비판적으로 재구성하기를 주저했던 주류 학계의 편협함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한반도 문제를 바라보는 한쪽에서는 미국 중심적․의존적 시각을 보편적 관점으로 수용하는 입장이오히려 과잉되어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과도하게 축적된 민족주의적 입장을 대항 담론으로 구축하게 되었다. 결국 전향적인 역사 인식이 국가의 실천적 지향과 결합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보편성과 특수성의 조화에 관한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물론 ‘특수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지구적 차원으로 문제를 확장하기 위한 ‘보편성’의 추구가 자칫 또 다른 종속적 시각에 매몰될 우려가 있는 것은 비단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근대성’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라는 문제 자체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경험한 ‘근대’의 비극과 그것에서 연유하여 지금도 계속 이어지는 이 고난의 역사가 단지 우리 민족국가의 불완전함과 정치적 주체의 무능력함에서만 연유한 것이 아니라, 서구적 합리성이 내포하고 있던 역사적 모순들의 비극적인 중첩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인식은 한국의 미래 세대가 전 지구적 연대 속에서 추구해나갈 평화를 상상하기 위해 아주 중요한 자극이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판문점 체제’라는 창을 통해 광복-분단 70년을 맞이한 오늘날의 한반도가 그 동안 각자의 체제 유지를 위해 활용했던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이데올로기의 근원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다소 단적으로 말하자면, 남북이 구축해 온 분단체제는 모두 판문점 체제, 즉 근대 자유주의 패러다임의 실패가 폭로된 이 기이한 국제질서에 편승하고 기생한 결과였다. 서울시 한 가운데에 있는 전쟁기념관에서 보듯이 그 동안 한반도의 두 국가는 평화가 아닌 전쟁을 기념하며, 공포와 증오의 정치, 안보에 대한 의존을 통해서 기존 체제를 존속시켜 온 사회였던 것이다. 평화를 전쟁의 가면쯤으로 여기는 것을 당연시해 온 남북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벗어나, 미래의 남북 지도자와 인민들이 가져야 할 진정한 ‘보편적 전망’의 출발은 한반도의 분단 문제가 단지 ‘통일로 인한 경제적 손익계산서’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인 평화 구축의 문제임을 자각하는 데 있을 것이다.

 

판문점 체제의 기원1

 

 

<철학, 죽음을 말하다>[철학자의 서재]

<철학, 죽음을 말하다>[철학자의 서재]

 

 

박종성(호원대학교 외래교수)

 

[철학자의서재]가 “이시대와 철학”에서 새롭게 연재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제때에 죽도록 하라!

 

 

죽음이라는 삶의 그림자

낙엽이 떨어지고 눈이 내리는 계절이다. 우리는 그 앙상한 나무를 보며, 떨어진 낙엽을 보며 지나간 시간을 다시금 느끼며 자신의 삶으로 시선을 옮긴다. 생명을 다한 것은 죽음이다. 생명을 다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죽음일 것이다. 죽음에 대한 시선은 다시금 나의 삶에 대한 성찰로 전환된다. 그런 계절이다. 상황이 인간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일까? 물론 가을이 되고, 겨울이 와야 죽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삶과 함께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상 속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인식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죽음은 인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올해 우리는 너무나 많은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다. 사회적으로는 너무나 가슴이 저미는 세월호 참사,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사고, 판교 환풍구 추락사고, 개인적으로는 가까운 이들의 죽음일 것이다. 죽음은 삶의 그림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피할 수도 없는, 모두가 직면하고야 마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다큐 <님아, 그 강을 건너지마오>가 역대 독립영화 최고 관객수를 넘어서 300만을 넘었다. EBS <다큐 프라임> ‘데스’에서도 죽음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죽음이란 어떻게 다가오는 것일까? 죽음이란 삶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너무나 많은 참사와 사고가 많았던 한 해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을지도 모른다.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다시금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삶의 태도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철학, 죽음을 말하다>(산해, 2012)는 11명의 학자들이 11명의 철학자들이 말하는 죽음에 대한 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지면에서는 11명의 철학자들을 모두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 중 필자의 가슴에 남은 철학자들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나머지 글들은 독자가 음미하는 것이 좋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음미한 맛은 모두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철학 죽음을 말하다

 

“검토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필자가 이 책을 통해 소화시킨 철학자들의 죽음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소크라테스는 현세적 삶을 중시하여 죽음을 무시하거나 내세적인 것에 충실하여 현세적 삶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에게 철학은 무지를 자각하는 것처럼 죽음에 대한 무지를 자각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는 “검토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잠자고 있는 자신의 영혼을 일깨우는 것이 철학인 것이다. 무지의 자각은 논박(elenchos)을 통해 궁극적으로 상대방을 당혹스러운 상태(aporia)에 처하게 하여 무지를 자각하는 과정을 말한다. 결과적으로 그에게 죽음은 죽을 운명의 인간이 죽음을 대비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이다. ‘죽음의 수련’은 결과적으로 삶의 태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시작은 죽음을 사유하는 것이다. 죽음의 사유는 플라톤에게서도 영혼의 돌봄으로 이어진다. 플라톤에게 영혼은 죽지 않은 것이며 생명의 원리인 반면, 육체는 물질적이고 죽는 것이다. 그리고 영혼의 본래성은 지성적인 능력이고 육체의 본래성은 감각적인 앎이다. 그런데 영혼의 본래성을 방해하는 것은 성적인 즐거움, 육체적인 즐거움, 소유욕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가 처한 삶의 환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감각적이고 소유욕을 증대시키며 체제를 움직이고 있는 현실이 우리의 삶의 환경이다. 자본주의 체제라는 것은 이렇듯 욕망의 체제로 굴러가는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며 자본주의 체제를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쇼펜하우어의 죽음에 대한 사유에서도 읽어 낼 수 있었다. 그에게? 인간 행위의 동인은 이기주의(Egoismus), 악의( Bosheit), 그리고 동정( Mitleid)이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인간은 맹목적인 삶의 의지(Wille)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의지, 욕망 때문에 번뇌, 고통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삶의 의지를 물질적 부, 돈에 두고 있다면 그것은 맹목적 의지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맹목적 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또 다른 삶의 의지의 긍정인 것이다. 나아가 이 맹목적 삶에의 의지의 부정은 인간애(caritas)이다. 인간애는 ‘그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말고 오히려 네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을 도우라’를 의미한다. 결국 그가 추구하는 인간은 동정(Mitleid)을 가진 자이다. 동정은 타자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그에 참여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삶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하는 현실이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는 끊임없는 욕망을 부추기고 무한 경쟁으로 삶을 옥죄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는 인간애를 실현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쇼펜하우어의 죽음에 대한 사유는 또 다시 현실의 변혁과 이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맹목적 의지의 부정은 삶의 구원(Erl?sung)이기 때문이다. 또한 맹목적 의지의 소멸은 일상세계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실존의 변화를 실현하여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해탈(Erl?sung)이 가능해 지기 때문이다. “검토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본주의는 검토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제때에 죽도록 하라, 타자의 얼굴과 만나라

니체(Nietzsche)는 인간을 신체(Leib)적 존재로 이해한다. 이것은 이원적 해석을 벗어나기 위한 전략적 개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이성과 육체, 그리고 힘의 의지(Der Wille zur Macht)가 공존하는 총체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에게 삶의 목적은 초인(Der ?bermensch)인데, 초인은 고정될 수 없는 인간, 현 상태의 유지(erhalten)가 아니라 지속적인 상승(steigen)을 추구하는 인간이다. 이는 힘의 의지(Der Wille zur Macht)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초인은 자신을 넘어서고 극복하는(?ber-sich-hinaus-gehen, sich-?berwinden) 자기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는(sich-schaffen) 삶을 영위하는 인간이다. 이는 인간 개개인이 구현해야 할 실존적 이상이다. 니체는 “제때에 죽도록 하라”,“그러나 결코 제때에 살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제때에 죽을 수 있겠는가?”라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말한다. 제때 삶을 사는 것은 삶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거나 삶의 열등함으로 인해 죽음을 의욕 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야 할 때 살려고 하지 않거나 그냥 죽지 않는 것이며, 삶에 가치를 부여하며 긍정하며 사는 것, 이것이 니체가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니다. 이것이 제때에 죽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세월호 참사는 제때 죽지 못하게 만든 사회적인 죽음이다. 제때에 죽지 못한 삶, 다시 말해 제때에 살지 못한 사회적 죽음인 것이다. 이 모든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타자의 죽음을 생각할 수 있다. 타자의 죽음은 레비나스(Levinas) 철학에서 중요한 내용이다.

레비나스는 죽음은 인식론에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윤리학적 차원에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존재론은 존재자의 존재를 전제로 하여 존재 근거와 존재 방식을 탐구하는 것인데, 죽음은 존재에 속하는 것이 아니고 존재 영역을 넘어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타자가 철학의 제1원리이다. 타자와 죽음의 철학은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문제의식이며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사유의 한계에 대한 비판이다. 언제나 타자의 죽음은 나의 죽음을 앞선다. 그가 보기에 존재론적 철학은 ‘타자’를 ‘자아’의 영역으로 환원하여 자아의 지배하에 두는 ‘자아’ 우위의 철학이다.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것처럼 죽음 현재에 속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속하며, 따라서 선취를 통해 앞질러가서 사로잡을 수 있는 그런 ‘현재의 미래’가 아니다. 미래의 죽음을 현존재 안으로 들어온 죽음으로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타자의 타자성에 접근할 수 있는 방식은 윤리적 접근이며 이는 타자와의 만남, 타자의 얼굴과의 만남이다. 기아 빈곤, 전쟁, 테러, 어린이 여성, 노약자들은 타자의 얼굴이며, 이들의 얼굴은 “제발 저를 죽게 내버려두지 마세요!” “제발 저를 죽이지 마세요! 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세월호 참사라는 사회적인 죽음, 송파구 세 모녀의 죽음을 생각할 수 있다. 타자의 얼굴에 우리가 응답하는 것이 남겨진 자들의 과제이자 책무일 것이다. 국가는 이 타자들의 얼굴에 얼마만큼 응답하고 있는가! 지금의 현실에서 그 답은 부정적이다. OECD 34개 국가 중 죽음의 질 지수가 최하위인 현실에서 죽음의 사유는 더 긴요하게 요구된다. 지난 9월에 이미 3명의 노동자가 월성 핵발전소에서 목숨을 잃었고 어제 27일에 노동자 3명이 질식사하였다. 비단 이것만이 아니다. 안전하지 않은 국가에서 제때 죽을 수 없는 것이고 이것은 제때 살지 못하는 것이다.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삶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음을 기억하는 것은 삶의 변혁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생명보다 이윤을 더 큰 가치로 추구하는 사회에서는 죽음으로 질주하는 타자의 얼굴들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현재를 즐겨라)이다. 즉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현재를 즐기고 이용’하기 위한 것이다. 현재를 즐기고 이용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와 국가는 타자의 얼굴에 보다 적극적으로 응답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사회와 국가는 변혁되어야 한다. 제때에 죽도록 하라! 그러기 위해서는 타자의 얼굴과 만나야 한다!

 

 

 

푸꼬의 <성의 역사(Histoire de la sexualit?)>[철학자의 서재]

푸꼬의 <성의 역사(Histoire de la sexualit?)>[철학자의 서재]

 

류종렬(철학아카데미)

 

[철학자의서재]가 “이시대와 철학”에서 새롭게 연재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성의역사1성(sex)에 관한한 의학(생물학)적으로 지식이 지배하고 권력을 행사할 수도 있을지라도 성관심(sexualit?, 애정관심)은 지식과 권력에 연관 속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 포함된 것보다 더 많을 것이다. 애정관심은 남녀만의 것도 아니고, 한 생명체와 다른 생명체(나나니 벌과 난초, 도착자들) 사람과 사물 사이에도 있다. 푸꼬의 철학적 여정을 보면 애정관심의 문제거리는 지식과 권력과는 다른 차원임을 알 수 있다. 왜 성관심은 지식과 권력이 아닐까하는 문제거리를 나는 막대자석에 비유한다. 근세철학이 맘과 몸, 영혼과 신체의 관계를 두 시계처럼 서로 다르지만 같이 갈 수 있는 것으로, 학문적 표현으로 평행론이라거나 번역가능성이거나 한쪽으로 환원가능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또는 그보다 더 높은 하나로 치환가능한 것쯤으로 여긴다. 좌석은 남극과 북극이 둘 다 같은 힘(역량)을 표현하지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연관을 맺는다. 두 방식은 방향만이 반대일까? 간단히 막대자석을 반으로 잘라보라, 그러면 두 개의 성(sex)처럼 따로 남성과 여성처럼 남극과 북극이 따라 현존할까? 잘라진 반토막은 또 다시 두 개의 극을 갖는다. 하나의 관심을 잘라낸다고 다른 하나로서만 존속할 것이라고 사유될 수 없고, 상대적인 것은 거의 자동적으로 생성한다. 다른 표현으로 기의(한 극)가 활동하는 순간, 기표(다른 극)는 만들어진다, 즉 생성한다. 부정성을 거쳐서 지양이라기보다 부정성도 실재성이며 단지 배제된 관심으로 무시되었을 뿐이며, 이는 여성, 소수자, 이석기에서도 마찬가지다. 둘 사이에 평행도 번역도 환원도 아닌 방식으로 생성한다는 가정은 인간의 사유를 모독하는 것일까?

우리가 푸꼬에게 다시 물어볼 수 없지만, 그의 학문적 여정을 다시 보면 심각한 고민을 했을 것이라는 것을 들뢰즈을 빌지 않아도 가능하다. 그로서는 지식의 고고학을 탐구 해 나가면서 보니, 지식이 권력의 행사와 같은 보조를 맞추었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보기에 푸꼬는 과거를 탐색하는 고문헌학자에서 새로운 지도를 그리는 지도제작자를 이행하였는데, 당시의 주변 학자들이 그에게서 ‘신의 죽음’보다 더한 ‘주체의 상실’을 보았다고 할 때, 푸꼬는 자신의 의도와 관계 없이, 왜 다른 사람들이 주체의 부재로 읽었을까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권력의 행사에서 피권력자(배제자)는 주체가 아니게 되고, 지식이 개별자의 것이 아니면 인간조차도 배제자(소외자)가 된다. 은연중에 지식의 총체로서 상층이라는 기표를 인정하게 되면, 당연히 거기에 대응하는 기표로서 개인 또는 인민은 기표의 권능을 지닐 것이라고 여겼지만 실제로는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대응도 평행도 아니고, 그의 비판자들 말대로 개인은 피지배자로 놓이게 되어 아니러니에 빠진다.

푸꼬는 지식과 권력처럼 성관심에서도 같은 관계가 성립하는지에 대해 그의 3부작의 첫 작품 <성의 역사 1: 앎의 의지(La volont? de savoir, 1976)>에서 고민하면서 시작한다. 억압 기제로서 권력을 성관심에 관한한 그 작동(기술방식)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당연히 지배 기술(techn?)은 여기서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여긴 것에서 문제거리를 보았다. 그런데 성에 관해서만은 그 억압이 구체적으로 실행된 것은 과거 서양에서는 고백문화가 전부가 아닌가 한다. 성관심은, 성을 다루듯 기계적 장치로만으로도, 생물학적으로 둘 사이의 상대적 연관을 맺는 매체로서도, 그리고 정치적 쟁점으로서 규제와 규율의 강화에서도 인구조절의 정책에서도 설명될 수 없는 다른 것이 있다. 역사의 구체적 고문헌을 파고 들어가 보면 통제와 규율보다 더 많은 성관심을, 권력의 그물에 잡히지 않은 더 많은 애정관심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한다. 애정 관심은 자기의 목표 추구처럼 일정한 완성에 이르면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확장의 추구, 즉 회오리 같은 추구로서 자기완성의 길로 가는 과정이라는 소크라테스적 욕망과 더 많이 닮았다는 것이다.

푸꼬는 첫 권을 쓰고서(1976년) 그 자신이 6가지 주제를 다룰 것이라고 예고했다. 1. 앎의 의지 2. 살과 신체, 3. 어린이들의 십자군, 4. 여성, 어머니, 히스테리, 5. 도착자들, 6. 인구와 종족 이다. 이러한 방향은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고, 긴 시간(8년)을 고민하여 두 권(제2권과 제3권, 1984년 그가 죽기 직전에)을 내면서 스스로 방향을 수정할 수밖에 없음을 밝힌다. 지식의 진보라는 방향, 권력의 표출이라는 방향과 달리 셋째 방향전환이 필요하다. 즉 “자기와 관계가 어떤 형태와 양태들을 취하는 지”를 탐구하는 “주체”의 문제로 전환이다. 들뢰즈가 푸꼬를 존경하여 쓴 <푸꼬(1986)>의 제2부 ?위상학?에서 “다르게 사유하기”라는 용어를 부각시켰듯이, 푸꼬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대신에, 어떻게 그리고 어느 만큼까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지를 알려고 하는 것”(제2권 번23쪽)에서 주체의 진솔한 위상을 찾아야 할 것으로 보았다. 우리가 보기에는 애정관심에서는 ‘다르게 생각하는’ 번역가능하지 않는 상대를 만날 수밖에 없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푸꼬는 이 상대를 제3권에서 ?자신과 타인?이라는 소제목에서 타인들의 범주들로 다룬다. 우리는 그의 저술의 순서에 따라서 타인과 관계 이전에 제2권에서 자기의 설정을 먼저 다룬 이유를 짐작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지식은 바깥의 대상이다. 인간이라는 상대도 바깥으로 두었을 때 지식을 통한 지식에 의한 지배는 가능하다. 우리는 이런 철학을 주지주의철학이라 부른다. 그런데 자기가 자기에 대한 지배 또는 배려에서도 대상으로 위상을 설정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의 다이몬,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에서 기억, 베르그송의 지속은 같은 고민이었을 것이다. 인격에 관한한 대상화(기표)이전에 자기 현존(인격성, 기의)이 먼저이고, 게다가 이 현존을 타자처럼 대상화로 다루기가 매우 곤란하다는 것이다. 한 사람은 묻기를 하다 보니 아이러니로, 다른 사람은 고민을 하다고 오류가 있더라고 믿자 하며 넘어가고, 또 한 사람은 운동하고 있는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기나긴)? 과정 전체를 “하나”로 위상을 정하자고 한다. 이 하나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으며, 하나가 자기 삶의 선택을 다른 하나(분신, 아바타, 기표)로 표출한다. 이런 생각은 주지주의에 대립되는 본성주의(le Naturalisme, 자연주의)라 하자. 푸꼬는 우선 그러한 방식을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볼 것이고, 자기 위상의 설정으로 주체화의 양식의 길 즉 자기완성의 길에 주목하였다. 그다음으로 다루어야 할 것으로 크리스트교 안에서 자기완성의 길일진 데 애석하게도 다음 차례로 남겨 놓고 죽었다.

자기완성을 애정관심에서 보면 네 가지 개념을 다룰 수 있다고 한다. “우선 아프로디지아, 쾌락의 개념. 그것을 통해 우리는 성적 행동에서 무엇이 ‘윤리적 실체’로 인식되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다음으로 크레시스, ‘활용’의 개념. 이 개념을 통해 우리는 쾌락의 실천이 도덕적 가치를 부여 받기 위해 따라야 했던 복종의 유형을 파악할 수 있다. 엔크라테이아, ‘제어’의 개념. 이 개념은 스스로를 도덕적 주체로 세우기 위해 자기 자신에 대해 가져야만 하는 태도를 정의해준다. 마지막으로 소프로쉬네, ’절제’의 개념이다. 이 개념은성의역사2 수행 중에 있는 도덕적 주체를 특징짓는 것이다.”(2권 51쪽) 여기서 성관심의 쾌락, 극기, 절제에 관한한 조화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서 고대 철학의 주제인 듯하지만, 제2권의 주제인 “쾌락의 활용”에는 다른 의미가 들어있다. “때에 맺게”(카이로이스) 이용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얼핏 때에 어긋나게 라는 니체의 ‘반시대’를 떠올일 수 있다. 반시대도 부정성이 아니라 실재성이므로,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은 48%의 부정성이, 51.6%만큼이나 시대의 적절함이며 때에 맞음이기도 하다. 여기서 언급은 카이로이스가 자기 배려에 중요한 계기이다.

그는 고문헌학자답게 성관심과 자기 배려를 다룰 세 가지 기술(techn? 조절 방식)을 다룬다. 스스로를 자신의 육체에 대한 적절한 결합과 배려의 기술로서 양생술, 자기 관리를 잘하는 것만큼이나 가축과 노예처럼 여성에 대해서도 통제와 지배의 기술로서 가정관리술, 대리자로서 자유로운 활동을 예비하는 소년을 스스로 지혜를 갖추어가는 기술과 훈련으로서 연애술, 세 부분을 학문적으로 다룬다. 이런 내용을 검토하고 나서, 주체의 진정한 활동은 사랑행위로부터 사랑의 본질로, 명예의 문제로부터 진리의 사랑으로 가듯이, 타인과 관계에서도 불균형으로부터 일치로 나간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자유인들이 중요시한 연애술 중에서 소년애도 덕목의 발현으로부터 지혜로 이행을 여러모로 검토한다. 그 성관심에는 즐거움을 활용하고 그것에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는 자기 극복의 노력이 필요하며 또한 그 훈련이 중요하다. 소년은 장차 자유시민이 되기 부족하여 종속되거나 넘쳐서 독재적이 되어서 안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언제나 절제(소프로쉬네) 또는 조화(아르모니아)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성관심의 문제가 플라톤의 소클라테스의 연애술(사랑의 욕망)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과 같은 것으로, 사랑의 권장은 문제에 답을 찾는 것이라기보다 문제거리의 꺼풀을 벗기는 과정이다. 욕망의 실현은 자기의 꺼풀을 벗는 것으로 자기에 대한 자기 스스로를 파악하는 것이다. 답을 모른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찾아가는 소크라테스의 여정일이지 모른다.

“자기 속에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의 방식은,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에서처럼 지속하는 기억의 총체가 무매개적으로 실재함을 다루는 것도,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서처럼 꿈을 분석하여 무의식을 실재적 존재로 인정하는 것도 또 다른 한 방식일 것이다. 현상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긍정성으로 있는 것을 찾는 것이다. 부정성의 실재성으로 전환. 푸꼬는 이 여정을 고대의 아르테미도로스의 <꿈 해몽>을 통해 방법을 들여다본다. 꿈은 질서를 주체에 맞는 상태로 표현하기보다, 어쩌면 떠돌이 거지(부족한 자)의 일시적 표현같이 우의적이고 신탁적인 경우가 더 많다 점이다. 푸꼬는 이 책을 빗대어, 꿈의 해석이 윤리적 형식을 갖추게하는 측면이 있다기보다, 고대 꿈의 해석을 통해 성관심을 인식하고 평가하는 방식을 본다. 그 속에는 애정 관심들이 지속성을 지니고 상관성을 정리해 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에 대한 관심”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보기에, 어둠에 있는 아페이론이 자기 생성으로서 시뮬라크르로 등장하는 실재성이 “자기 관심”이 아닐까? 우리가 보기에 푸꼬에서 애정관심에 관한 자기 설정, 자기의 역할과 훈련, 그리고 자기극복 등을 제2권에 다루었던 것도, 자기에 대한 관심 즉 “자기 배려”(제3권의 제목이다)때문일 것이다.

푸꼬의 관점을 맘과 몸 연관에서 보면, 몸은 외적 표현(표시, 시뮬라크르)이라면, 맘은 내면의 본성(자연)으로서, 자연 속에서 자기 배려라는 ‘달리 사유’는 푸꼬를 깊이로(심층으로) 향하게 된다. 우리가 보기에, 그 내면의 본성이 물질적(유물론)이고 자연적(자연주의)이며, 이것의 외화된 표현(껍질)이 물체로서 형식(형상론)이며 표상적(주지주의)이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유물론과 형상론은 전도된 것으로 나타난다. 소위 말하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관심은 ‘자기에 대한 관심’은 개인 하나에 대해 전념하는 것이 아니성의역사3라, 자기와 연관있는 모든 것에 대한 전념을 말하는 것으로, 사유(맘)와 실천(몸)은 분리되지 않은 밀접한 관계로서 다룬다. 이 주제들 잘 들여다보면, 사실은 소크라테스의 욕망의 탐구와 사회적 실천의 양면성(이원성이 아닌 이중성)을 함께 하는 바로 자기의 배려이다. 즉 소크라테스의 앎과 함(지행합일)을 구체적 실천의 지표로 삼은 것은 스토아학파일 것이다. 스토아학파의 오이케이오시스(O?k?iosis ο?κε?ωσι?, 헌신)는 살아있는 존재가 자기에 속하는 것. 즉 자기 존재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소개된 번역어는 헌신이지만, 푸꼬의 번역의 “자기 배려”가 더 적당할 것 같고 나아가 “자기 치유”도 같은 의미이다. 소크라테스가 당대에 지식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 배운 것도 자기의 배려이며, 그들을 찾아가서 논쟁 끝에 피상적 지식을 넘어서 지정한 지식(총체적 배려, 인민들 삶의 절제, 도시 전체의 정의 등)에 추구는 ‘자기 치유’의 방식이다. 성관심도 개별적으로 답을 얻듯이 쾌락을 얻는 것도 아니고, 타인과 논쟁에서 이기듯이 성적관계도 이기는 것도 아니고, 수사학이나 논변술로서 자기 자랑과 허풍이 아니라 자기 극복이자 지식 추구이듯이, 성관심도 얻거나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훈련으로 자신의 극복에 있으며, 도시와 개인의 조화로운 절제 이듯이 성관심은 상대의 자유와 완성하려는 인격의 배려에 있다. 이 점에서 푸꼬는 고대의 소년애에 대해 잘 다루고 있다. 여성과 노예는 가정관리의 대상이니 제외하고, 자유 시민으로 자라 도시를 담당할 소년에게는 자신처럼 소년(타인)을 배려하여, 그도 자기의 인격완성의 노력과 지혜를 소년(타인)에게 전하는 사랑과 배려가 필요하다. 즉 소년애의 사랑은 타인의 자유와 지혜 추구의 길이 된다. 푸꼬는 제3권을 쓰고 다음 4권에서 크리스트교 사랑을 쓴다고 했지만, 여기서 어느 정도 만족했으리라. 즉 주체의 탐구는 주체의 자기 배려, 자기 훈련과 자기 극복, 그리고 회오리처럼 점점 커져가는 방식으로 자기 탐구의 확장은 성관심의 문제거리들 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지식과 지혜들의 추구욕망과도 같은 방식으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푸꼬는 “주체”를 다루면서, 은연중에, 진솔한 지식의 탐구로서 “철학”을 밝히게 되었다. 주체의 주체화 과정이 “철학”이며 욕망의 추구이며 애정관심을 포함한 진정한 “사랑”이다. 그 사랑은 누구나를 배려하는 “자유”로 향하는 것이 아닐까? 푸꼬는 역사적 고문헌을 통해 새로운 지도그리기가 이쯤에서 자유를 향한 주체의 위상을 그려 놓지 않았을까?

띠리(Bruno Thiry)는 <성의 역사(Histoire de la sexualit?)>에서 “윤리적 요청에 따라서 그 자체로 ‘사유 속에서 자기의 훈련’을 만족 시키며, 한 사상가는 자기가 [현재] 있는 것과 다른 것이 되면서도 자기에 충실하게 남는다. [자아의 이중화 현상을 이어가는] 푸꼬는 이런 것을 그의 고유한 이름으로, 철학, 이라 부른다.”고 평했다. 나로서는, 맘과 몸의 이중화의 부조화를 끊임없이 조화롭게 만들기(생성)하는 노력과 훈련 그리고 배려가 삶이며, 그 표면의 시뮬라크르 등장이 ‘철학’이라 본다. 푸꼬는 말년에 인격의 이중화 작업을 깨닫고서 철학의 진정한 아이러니를, 소크라테스처럼, 맛보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