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자기를 괴롭히는 생각의 습관을 버려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6-2

?<자기를 괴롭히는 생각의 습관을 버려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6-2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지금의 행동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인가?

문제는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때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험공부하기 싫다고 하지 않으면 성적이 낮게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에도 철학적 설명이 가능하다. 인간이 하고 싶은 생각 방향이나 행동 방향은 늘 자신에게 편한 방식이다. 그런데 자신에게 편한 방식으로 했을 때 원하는 결과가 나오는 경우는 별로 없다. ‘하고 싶은 대로의 행동’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대로의 행동은 그 행동에 맞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지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원하는 결과가 나오게 하려면 ‘그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을 투입해야 한다. 좋은 시험성적을 원하면 ‘시험공부’라는 원인을 투입해야 하는 것이다.

코넬 대학 존슨 경영대학원의 마케팅 행동과학과 교수(?2014 Samuel Curtis Johnson Graduate School of Management)

코넬 대학 존슨 경영대학원의 마케팅 행동과학과 교수(?2014 Samuel Curtis Johnson Graduate School of Management)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때 원하는 결과가 나온다면 우리가 이렇게 머리 쓰면서 살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편한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놓고는 자신에게 이로운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이런 것을 두고 철학에서는 ‘소망적 사고(wishful thinking)’라고 한다.

소망적 사고란 생각을 하고 싶은 대로 끌고 가는 것을 말한다. 마땅히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인 이유 없이 자신의 소망에 따라 생각을 이어가는 것이다. ‘철학’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머리가 아파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의 방식은 대체로 소망적 사고인데, 철학은 이 소망적 사고를 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소망적 사고를 해도 별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굳이 소망적 사고를 하지 못하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망적 사고를 하면 일단 마음은 편해지지만 이후에 지속적으로 불편이 야기되고 합리적인 해결이 안 되어 문제가 더 장기화되기 때문에 소망적 사고를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이 소망적 사고는 결국은 나를 더 힘든 길로 몰아가고 말기 때문이다.

(출처: http://skyfm.tistory.com)

(출처: http://skyfm.tistory.com)

어느 날 로또가 될 것이라고 믿는 것, 지금까지 나를 괴롭혀 온 사람이 나를 불편하지 않게 해줄 것이라고 믿는 것, 어딘가에 나만을 헌신적으로 사랑해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 믿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소망적 사고이다. 오히려 로또가 되는 것은 번개 맞는 확률보다 낮고, 지금까지 나를 괴롭혀 온 사람은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생각패턴과 행동패턴을 바꾸지 않을 것이며, 내가 그 혹은 그녀를 헌신적으로 사랑하지 않는 한 나만을 헌신적으로 사랑해줄 사람은 없다는 것이 진실이다.

소망적 사고의 문제를 타인과 갈등을 겪을 때를 예로 들어 생각해보자. 갈등상황에서 우리는 ‘그 사람은 제발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내가 원하는 행동을 하고 그는 그가 원하는 행동을 하는데, 결과는 나의 행동은 그의 마음에 들지 않고 그의 행동은 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나는 그의 마음에 맞게 행동을 바꾸고, 그는 나의 마음에 맞게 행동을 바꾸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상대방의 마음에 맞게 내 행동을 바꿀 의사가 없다. 거꾸로 내 행동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상대방이 야속할 뿐이다.

우리는 내 행동을 변화시키기보다는 상대방이 나의 행동을 마음에 들어해주기를 바라게 된다. 그러면서 동시에 상대방이 내가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면서 마음에 들어해달라고 요구하면 화를 내게 된다. “도대체 너는 왜 내 마음에 드는 행동을 그리도 안 해주느냐?” 하면서 원망을 한다. 그 사람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굉장히 원망하면서도 자신은 그 사람의 마음에 맞게 행동을 변화시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경우에는 자신이 행동하는 대로 상대방이 받아들여주길 원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상대방의 행동을 그대로 수용해주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이중논리이다. 자신에게 적용하는 논리와 타인에게 적용하는 논리가 일치하지 않을 때 이중논리를 구사한다고 한다. 상대방이 나의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기를 바라면서도 나는 상대방의 행동을 그대로 수용해줄 의사가 없다. 나는 되고 너는 안된다는 식이기 때문에 이중논리라고 한다. 우리는 이러한 이중논리를 마음 편하게 구사하면서 상대방은 마땅히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행동을 바꾸어야 하고 또 마땅히 내가 하는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갈등을 겪는다는 것은 내가 하는 행동과 상대방의 마음, 상대방의 행동과 나의 마음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을 내 행동에 맞추거나 내 행동을 상대방의 마음에 맞추어야 한다. 그러면 어느 편이 쉬운가? 상대방의 마음은 내가 어찌 할 수 없다. 내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은 나의 행동뿐이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나의 행동이지 상대방의 마음이 아니다.

바랄 수 없는 것과 바랄 수 있는 것을 잘 구분해야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려면 원하는 결과를 가져올 원인을 투입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해오던 대로 행동하면서 다른 결과,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던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바란다. 자신이 하기 쉬운 행동을 해놓고서는 원하는 결과가 나타나기를 비합리적으로 소망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유지해온 습관대로 행동하면 그동안 겪어왔던 결과만 다시 반복될 뿐이다. 그래서 바랄 수 있는 것과 바랄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능력은 아주 중요하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나의 행동패턴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상대방의 마음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것은 감나무 아래에서 감이 떨어지길 바라고 입을 벌리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바랄 수 있는 것과 바랄 수 없는 것을 잘 구분해야 유효한 고민, 필요한 고민을 할 수 있다. 바랄 수 있는 것과 바랄 수 없는 것을 잘 구분하면, 바랄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면 그것을 얻어낼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고, 바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쓸모없는 바람을 가지는 것을 그만 중단하게 된다.

바랄 수 없는 것에 대해서 그것이 바랄 수 없는 것임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면 그 바람의 정도가 약해진다. 예를 들어보자. 만약에 여러분의 6살짜리 조카가 “저는 맛있는 건 많이 먹고 싶은데, 화장실은 정말 정말 가기 싫어요.”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실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화장실에 가야 또 다음에 다른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위와 장을 비우게 될 것임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는 여러분은 그런 허황된 소망을 가지지 않는다. 이와 같이 논리적 불가능성을 인식하면 인식할수록 쓸모없는 바람에 덜 휘돌리게 되기 마련이다. 바랄 수 없는 것이 왜 바랄 수 없는 것인지를 논리적으로 인식하고 나면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느라 들이는 시간과 노력을 줄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어느 설문조사에서 남자들은 세련되면서도 검소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세련되려다보면 소비를 많이 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검소하기는 어렵다. 남자들은 말할 것이다. 그러니까 감각이 좋아서 저렴한 비용에 세련되게 하고 다니면 되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세련되려면 옷이며 액세서리 구두 등을 다양하게 착용해보고 감각을 키워야 하는데 검소하게 한다고 해도 얼마나 검소할 수 있겠는가? 이 두 가지 특성을 동시에 가지기는 실로 어려운 것이다.

설사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여자가 성격이 안 좋다면? 결국 남자들은 그 세련되고 검소한 사람이 성격도 좋고 외모도 좋고 데이트비용도 내며 애교까지 많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는 여자들이 책임감 있고 소신 있으며 나에게만 다정다감하고 그러면서도 근육질에 키까지 큰 남자친구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책임감 있고 소신이 있으면 원칙을 지킨다는 것이고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라면 설사 자신의 여자 친구라 할지라도 그 원칙을 어길 경우 비판을 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여자친구에게만 다정다감하겠는가? 여자친구에게 다정다감한 사람은 다른 여자에게도 다정다감하기 마련이다. 어떻게 다정다감함의 특성을 한 명에게만 발휘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발휘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런 사람이 실제로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 사람은 나에게 만족할까? 내가 원하는 특성을 가진 그 사람은 나보다 더 괜찮은 사람을 원하기 마련이다. 바랄 수 없는 것은 바라지 않을 수 있도록 생각을 조절하고, 바랄 수 있는 것은 효과적으로 잘 얻어내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현명한 길이다. 바라봤자 되지도 않는 일을 바라느라 정작 필요한 일은 하지 못하는 우매함은 이제 그만 날려 버려야 한다.

<자기를 괴롭히는 생각의 습관을 버려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6-1

<자기를 괴롭히는 생각의 습관을 버려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6-1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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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백작(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 1828년 ~ 1910년)은 러시아의 위대한 소설가이자 시인, 개혁가, 사상가이다. 러시아 문학과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사진출처: www.hemovac.com)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백작(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 1828년 ~ 1910년)은 러시아의 위대한 소설가이자 시인, 개혁가, 사상가이다.(사진출처: www.hemovac.com)

 

고뇌 없는 인생은 발전이 불가능하다. 고뇌야말로 정신이 향상되어가는 과정이다.

–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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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자신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을 잘 알면 그 스트레스를 조절하려고 노력하게 되고 조절을 위한 방안을 강구해내게 된다. 그런데 문제가 심각해지는 경우는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자신이 무엇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 스트레스를 받는지 모르는 경우이다. 스트레스 관리에서 문제가 되는 유형의 사람은 스트레스를 견디는 데 에너지를 쓰느라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때는 그게 힘든 줄도 몰랐다.”고 말하는 경우는 견뎌내야 한다는 확고한 전제 때문에 힘들거나 말거나 그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는 소리가 된다. 이는 자기 자신의 상태를 완전히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한 인간 인식의 특성 때문이다. 인간의 인식은 항상 상황이 벌어지는 T1시점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그 시점이 지난 T2시점에서야 이루어진다. 상황이 벌어지는 시점에는 당황해 ‘이게 뭐지?’ 하다가 상황이 종료된 시점에서야 ‘아 그렇구나!’ 하고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원래 나 자신이 스스로를 ‘내가 이러이러하다’고 객관적으로 인식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어렵게 말해 인간은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기 어렵다. 타인에 대해서는 파악이 쉽다. 저 사람이 지금 이러이러한 문제에 직면해 있는데 사태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한 쪽으로 편향적으로 잘못 파악하고 있구나 하는 것까지 알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에 대해서는 그러한 객관적 파악을 하기 힘들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나 자신을 객관으로 두고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즉 메타차원(상위차원)에서 자신에 대해 인식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현재의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거의 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객관적인 파악이 가능하다. ‘그 때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일이 벌어진 시점이 지난 지금, 어느 정도 객관적인 인식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즉 제대로 된 인식은 사건 발생 시점이 지나야 가능해지는 것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로마 신화에서 미네르바와 항상 함께 다니는 신조(神鳥)인 부엉이를 말하는데 지혜의 상징이다. (출처:wikipedia)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로마 신화에서 미네르바와 항상 함께 다니는 신조(神鳥)인 부엉이를 말하는데 지혜의 상징이다. (출처:wikipedia)

그래서 헤겔은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되어서야 난다.”고 말했다. 미네르바는 지혜의 여신을 지칭한다. 헤겔의 이 말은 ‘인식은 항상 한 발 짝 늦게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일이 벌어지는 당시에 객관적으로 인식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어떠한 문제에 얼마만큼이나 스트레스 받는지를 파악하지는 못하면서 타인의 스트레스에 대해서는 상당히 객관적으로 인식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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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를 견디는 데에만 골몰하다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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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타인의 스트레스에 대해 전해들을 때 보이게 되는 반응에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뭘 그런 것 가지고 스트레스 받느냐’는 반응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나와는 다르게 반응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뭘 그걸 가지고 스트레스를 받느냐 생각하지만 오히려 진실은 ‘그러한 것에 스트레스 받는 것이 그 사람의 특성이다’라는 것에 가깝다. 그 사람으로서는 그것에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어서 받는 것이다. 스트레스 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 사람도 그것에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지만 그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것이다. 즉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존재방식 때문에 그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나는 저런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견뎠을까’ 하는 의문을 보이는 반응이다. 이 경우 ‘그 사람은 왜 그런 스트레스의 근원을 빨리 해결하지 않고 계속 견디고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사람은 스트레스를 우선 견디려고 하기 때문에 당시에는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받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나중에서야 자신이 그런 큰 스트레스를 받고 어떻게 살았는지가 스스로도 의심스러워지게 되곤 한다. 생각해보라. 우리는 지금 그 때로 돌아가 그렇게 다시 하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할 자신이 없는 그런 일들을 헤쳐 나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래서 주변에서 “너무 힘든 것 아니냐?”고 말해주면 그 때서야 ‘정말 이게 힘든 건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때 남들도 힘들어할 일이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기도 한다. ‘내가 힘들다는 것을 의식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는데 나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이 자리에 있었으면 힘들었을 일이었구나, 힘들어한 내가 이상한 게 아니구나!’ 하면서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또 어떤 때는 누구나 힘들 일이었다는 사실에 억울함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힘들 수밖에 없었던 일을 내가 겪어내야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나기도 하는 것이다. 나 자신이 인내력이 부족하거나 어떤 나의 고유한 특성 때문에 힘들었다면 모르겠지만 누가 그 일을 겪어도 그 일은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 내가 왜 그러한 일을 겪었어야 했는지 억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여하간 스스로 어떤 일에 얼마만큼의 스트레스를 받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남들 같으면 받지 않을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도 있고, 남들 같으면 많이 스트레스 받을 일인데도 잘 넘기는 경우가 있다. 본인이 너무 견디려는 사람은 아닌지 혹은 너무 견디지 않는 사람은 아닌지 살펴보자. 너무 견디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좀 쉽게 쉽게 살아라.” 하는 소리를 듣게 마련이다. 너무 견디지 않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너 때문에 못살겠다. 생각 좀 하면서 살아라.” 하는 소리를 듣게 마련이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무시하면 안 된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못 보는 나의 모습을 봐주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를 만나는 사람 세 명이 똑같이 말하면 그 말을 들으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나보다 더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조건에 있는 사람들의 말을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그 말을 들어 넘기는 것이 고통스러울지라도 그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어쩌면 그 말이 고통스럽다는 것 자체가 그 말이 진실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스트레스를 너무 견디려고만 해서도 안 되고, 스트레스를 너무 견디지 않으려고 해도 안 된다. 그 정도를 알 수 없다면 주위 사람에게 물어보자. “내가 스트레스를 너무 견디나요, 아니면 너무 안 견디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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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탓만 해도 안 되고 남 탓만 해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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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잘못할 수 있다. 타인의 잘못은 무시하고 자신의 잘못에만 골몰하면 열등감에 빠지지 않을 사람이 없다. 무언가 잘못되었을 때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이 실수와 잘못을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질문하는 편이 낫다. 그런데 이럴 경우에 남 탓을 하고 싶은 심리구조상 남 탓을 자꾸 하고 싶게 된다. 내 탓은 생각하려고 노력해도 생각이 잘 안 나지만 남 탓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자꾸만 생각나는 법이다. 물론 우울증을 앓는 경우에는 반대가 된다. 내 탓만 생각나고 남 탓은 생각나지 않는다.

건강한 인식은 내 탓과 남 탓을 현실에 맞게 하는 것이다. 내 잘못이 어느 정도이고 남의 잘못이 어느 정도인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즉 남 탓을 해야 하는 부분은 어디까지이고 내 탓을 해야 하는 부분은 어디까지인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파악해놓고 나면 변화시킬 수 있는 것과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변화시키면 되고, 변화시킬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변화시킬 수 없음을 받아들이면 마음이 편해진다.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두고 왜 변화되지 않느냐고 원망해봐야 변하지 않는다.

인간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두고 변화되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다. 주어진 환경과 타인의 행동은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환경은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타인의 행동에 대해서도 이러저러한 요청은 할 수 있지만 내가 근본적으로 뜯어고칠 수는 없다.

생각해보라. 내 행동도 내가 고치기 힘든데 남의 행동이 나의 말에 의해서 고쳐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현실적인가?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키기 힘드니까 우리는 자꾸 남이 변하기를 바라게 된다. 그 편이 나에게 가장 편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이 돌아가는 방식은 이렇게 자기 마음이 편해지는 방식이다.

변화시킬 수 있는 부분은 변화시키려 노력하고 변화시킬 수 없는 부분은 수용하면 된다는 말이 너무 맞는 말이라서 진부해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에서 철학카운슬링이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은 ‘변화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에 대한 판단을 나의 욕망에 맞추어 비틀어서 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변화시킬 수 없는 부분을 두고 변화되기를 바라느라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렇게 바라기만 하고 있는 편이 나의 에너지가 덜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우매한 일이다. 변화시킬 수 있는 나를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으면서 변화시킬 수 없는 남만 붙잡고 통사정하는 우리 마음의 비논리를 잘 직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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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욱의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철학자의 서재]

신기욱의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철학자의 서재]

이병수(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교수)

 

“역사적으로 각인된, 우연한, 경쟁적”이라는 분석틀

 

▲ (신기욱 지음, 이진준 옮김, 창비 펴냄) ⓒ창비

▲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신기욱 지음, 이진준 옮김, 창비 펴냄) ⓒ창비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신기욱 지음, 이진준 옮김, 창비 펴냄)는 미국에서 한국학 연구의 중심인물로 활동하고 있는 스탠포드대학교 신기욱 교수의 2006년 저서(『Ethnic Nationalism in Korea: Genealogy, Politics, and Legacy』)를 2009년 창비에서 번역 출간한 책이다.

저자 신기욱은 서문에서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는 혈연에 기초한 단일민족주의 내지는 의식”이며 “한국인의 단일민족주의를 이해하지 않고는 20세기 한국사회와 정치의 변화를 제대로 읽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한 저자는 단일한 민족의식이 도대체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가를 질문하면서 그 역사적 형성과정을 확인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20세기 한반도의 역사를 통해 다양한 집합적 정체성들 가운데 어째서 공통의 혈통을 강조하는 종족적 민족주의로 귀착했느냐를 탐문한다.

요컨대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를 혈연에 기반을 둔 종족적 민족주의로 보면서, 종족적 민족주의의 역사적 기원과 형성, 그리고 기능에 대해 총체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1990년대 이래 한국 민족주의의 억압적, 배타적 기능에 대한 문제제기가 본격화되면서 민족주의 논쟁이 전개되었지만 한국 민족주의를 역사적인 맥락에서 실증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는 드물었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서구의 민족이론에 의존하지 않고, 19세기 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근현대사의 구체적인 전개과정에 기반을 두고 한국 민족주의를 논하고 있다. 서구의 민족이론에 더불어 한반도 근현대사의 역사적 경험들을 동시에 섭렵함으로써 이론적 고찰과 경험적 자료의 활용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구의 주류 민족이론들의 한반도적 적합성에 대해서도 진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이는 특히 민족의 기원에 대한 원초주의적 견해와 근대주의적 견해의 한계점들을 극복하려는 저자의 시도에서 잘 드러난다.

 

저자는 한민족의 기원에 대한 국내학자들의 견해를, 첫째 단일한 혈통을 자연적이고 운명적으로 간주하는 원초주의적 견해, 둘째 한민족을 조선왕조 말기에 도입된 근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산물로 보는 근대주의적 견해, 셋째 두 입장을 논박하며 서구와는 다른 한민족의 역사적 경험의 특수성(장기간의 중앙집권적 국가 등선재하는 역사적 유산)을 강조하는 견해 세 가지로 정리한다. 그는 세 입장이 모두 한계를 지닌 것으로 보면서 새로운 분석틀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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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저자는 무엇을 민족 형성의 “결정적 요소”로 보는가? 저자에 따르면 우연한 민족의 구성에서 결정적 요소는 경쟁적인 정치의 결과다. 따라서 저자는 자신의 분석틀을 “민족은 특히 대내외의 논쟁적인 정치의 결과, 역사적으로 각인되고 구조적으로 우연한 상황에 놓여 있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구조의 산물”로 요약한다.

요컨대 저자의 입장은 전근대적 유래를 지닌 종족적 유산의 규정력을 인정한다는 측면에서(역사적 각인) 위의 두 번째 견해와 차이가 나며, 그 규정력을 약화시켜 우연적으로 본다는 측면에서(우연한 상황) 세 번째 견해와 차이가 난다. 그리고 이 역사적 각인과 우연한 상황을 정당화하는 민족 형성의 결정적 요소가 “이중적인 경쟁적 논쟁”이다.

그는 민족개념이 처음부터 혈통에 기반을 두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보면서 한국의 민족주의가 종족적으로 되어가는 역사과정을 이중적 경쟁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민족은 인종, 계급 등 초민족적인 집단 정체성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민족개념에 대한 여러 해석들 가운데 종족적 민족개념이 경쟁에서 이겨 지배적인 것으로 정착되었다고 본다. 즉, “20세기에 인종지향적인 한민족 개념이 출현하고 지배하게 된 것은 민족세력과 초민족 세력 사이의 논쟁과 민족 개념에 대한 논쟁이라는 이원적 논쟁과정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 책의 1부와 2부는 민족적인 것과 초민족적인 것의 경쟁, 민족개념 자체를 둘러싼 경쟁이라는 이중적인 경쟁의 틀에 따라 서술되어 있다. 저자의 “역사적으로 각인된, 우연한, 경쟁적”이라는 분석틀은 매력적이지만 그 분석틀의 성공 유무는 일차적으로 이런 이중적 논쟁이 한반도 근현대의 역사적 사실과 합치하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역사적 사실과의 합치 여부보다는 이 책의 핵심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종족적 민족주의”에 대한 규정과 “종족성과 시민성의 관계”에 대한 저자의 관점,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만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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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적 민족주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선 저자는 종족적 민족주의를 혈통에 바탕을 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민족개념에 대한 우리의 통념적 이해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현재 우리의 종족성이 어떻게 규정되고 있는지는 강한 혈통주의적 특징(더불어 대한민국 중심주의)을 지닌 재외동포재단법에서 찾을 수 있다.

 

“‘재외동포’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외국에 장기체류하거나 외국의 영주권을 취득한 사람이거나 국적에 관계없이 한민족(韓民族)의 혈통을 지닌 사람으로서 외국에서 거주, 생활하는 사람”을 말한다.(재외동포재단법, 제2조)

 

▲ 단재 신채호

▲ 단재 신채호

그러나 식민지 시기 민족담론은 아직 혈통적 단일성에로 한정된 민족주의적 지향성을 갖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학자들은 다종족설을 상식으로 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다종족 구성, 주종족 주도론’은 일찍이 한말에 신채호가 ‘독사신론’에서 말한 바 있다. 단일한 혈통에 기초한 민족이라는 ‘단일민족론’은 해방 이후에 비로소 본격적으로 대두된다. 이는 해방 후 국내외적 정세가 민족분단의 가능성을 높이는 가운데 단일민족은 결코 분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혈연을 중심으로 한 단일민족설보다는 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같은 종족의 후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한국의 민족주의가 종족적 민족주의의 성격이 강하다고 표현할 경우, 그것은 혈연보다는 풍속·습관과 같은 문화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를 뜻하는 방향에서 사용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다음으로, 저자는 종족적 민족주의를 통해 20세기 한반도에서 등장한 다양한 민족주의를 통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종족성의 전일적 지배를 강조하는 저자는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의 민족주의적 현상을 획일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다시 말해 다양한 형태의 민족주의를 종족적 민족주의와 동일시하는 과도한 환원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예컨대 백남운, 이광수, 김일성, 박정희의 민족주의는 혈연에 기반을 둔 종족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등가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주의가 자기완결적인 논리구조를 갖추지 못한 채 다른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는 이차적 이데올로기이며, 진보성과 아울러 침략성의 양면성을 갖는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도 민족주의의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특징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해방 후 한반도에는 남북한 각각의 국가에 의해 주도된 두 개의 국가주의적 민족주의, 그에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을 목표로 한 자유주의적 민족주의, 민중이 주체가 된 민중주의적 민족주의 등 다양한 민족담론이 존재한다.

이처럼 종족적 민족개념은 사회주의, 자유주의, 국가주의와 모두 결합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종족적 민족개념이 마치 불변적으로 지속되는 것처럼 다루고 있다. 정치적, 이념적 지향성을 무시한 채 혈연적 종족성이라는 유사성을 근거로 20세기 한반도에 등장한 다양한 민족주의를 통시적으로 적용, 평가하는 시각은 역사적 다양성을 배제하는 과도한 환원주의로 여겨진다.

셋째, 저자는 종족 민족주의의 역사적 기능을 축복이자 저주인 “양날의 칼”로 설명하면서 서구의 주요 민족주의 이론들의 한반도적 적합성 문제를 제기한다. 저자에 따르면 한스 콘 이래 서구의 민족주의 연구자들은 정치적 민족주의를 시민적, 통합적, 건설적인 것으로 보는 반면, 종족민족주의를 위험하고, 분열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 보는 강한 전통이 있다. 저자는 유럽적 경험에 바탕을 둔 이러한 이분법적인 본질주의 시각이 한국의 종족 민족주의가 지닌 다양하고 복잡한 역할과 기능을 간과한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20세기 한반도 역사에서 종족 민족주의는 일제하 반식민주의의 기능을 했고, 남북의 근대화 과정에서 통합적 기능을 수행했으며, 나아가 통일과정의 초기 단계에서 두 체제의 부드러운 통합을 촉진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축복) 그러나 동시에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중요한 정체성들을 억압했고, 자유주의의 빈곤을 초래했으며, 남북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저주)

그러나 “양날의 칼”의 비유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책 곳곳에 되풀이해서 종족 정체성의 부정적인 성격을 부각시키고 시민적 민족정체성을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는 “혈통 중심의 민족 개념을 재고해야 한다. 외국인 이주민과 혈통을 떠나 민주국가의 동등한 시민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시민적 민족 정체성’이 필요하다. 통일 이후의 사회통합 논리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논의의 출발점에서 시민 정체성과 종족 정체성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종족 정체성의 양면적인 역할과 기능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의 도처에서 시민적 정체성을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을 보면, 과연 저자가 한스 콘 이래의 본질주의적 시각을 제대로 극복했는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이 문제는 종족성과 시민성이 결합될 수 없다는 그의 관점과 밀접히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종족성과 시민성의 결합을 위하여

 

‘민족’은 순전히 언어, 역사 등의 문화적 단위로도, 순전히 정치적 단위로도 정의될 수 없으며, 양자가 결합한 범주로 이해될 수 있다. 민족의 역사는 정치공동체의 역사와 분리될 수 없지만, 민족은 정치 공동체로 환원되지 않는 종족적 기반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 현실에서 모든 민족은 종족적 특성들과 시민적 특성들을 동시에 갖게 마련이다. 종족성과 시민성은 서구의 민족국가에서도 한 번도 완전히 분리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양자가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종족성을 배제하고 시민성을 중심으로 민족 정체성을 구성하려는 시도가 지닌 한계는 분명하다. ‘시민 민족주의’에서와 같이 시민성을 중심으로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려는 전략이 현실적 차원에서 불가능에 가까운 이유는 종족적인 기반에 의한 동기부여 없이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연합은 추진력을 갖고 실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족적 민족”(ethnic nations)과 “시민적 민족”(civic nations)의 구분 시도는 우리 학계의 민족논의에서 종족적 민족개념이 한국 민족주의의 성격을 강력히 주조(배타성과 획일성)했다는 점만 부각시키는 경향과 관련이 깊다. 하지만 종족성이 중요한 행위의 원천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체로 어떤 정치적 행위를 낳는 것은 아니다. 종족성은 당대의 정치적 조건과 불가분하게 엮여 있으며 다른 이데올로기들과 결합할 때에만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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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저자는 여러 민족주의의 정치적, 이념적 지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종족적 민족개념이 지배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처럼 다루고 있다. 예컨대 지배세력의 공식적 민족 개념과 1980년대의 민중적 민족주의는 “민족의 종족적 토대에는 동의했지만, 민족에 대한 정치적 개념이 전혀 달랐”다. 정치적 민족 개념이 달랐을지라도 종족적 민족성의 토대를 건드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직 정치적 양상만이 논쟁의 대상이었을 뿐, 양자는 동일한 종족적 개념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족성과 정치 공동체가 한 번도 일치해 본적이 없는 20세기 한반도의 역사는 특정 민족주의 개념의 지배를 위협하는 근본 요인이자 시민적 민족과 종족적 민족의 이분법의 적용불가능성을 보여준다. 20세기 한반도의 종족 정체성은 특정한 정치 경제적 조건 속에서 다양하게 변용되었다. 따라서 남북 그리고 디아스포라는 기존의 민족 정체성 모델에 딱 들어맞게 이해될 수 없다. 문화적 다양성과 민주적 권리를 강조하는 시민적 정체성이나 혈연 언어 전통 등을 강조하는 종족적 정체성은 그 어느 것도 20세기 한반도 역사에서 진행되어온 다양한 국적, 법적 지위, 언어차이, 관습의 현지화 등 민족 정체성의 다양한 변용을 설명하기 어렵다. 한반도의 민족 정체성은 종족적 요소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해당 거주국(남과 북 그리고 해외 디아스포라)의 정치 경제적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변용된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남과 북은 과거의 문화전통 가운데에서 각자의 정치 경제적 체제에 맞는 국민적, 인민적 서사들을 교육과 언론매체를 활용한 국가주의적 기획 아래 동원하였다. 분단은 남북 모두 민족 내부의 적대적 타자라는 의미를 상대에게 부여하였고, 민족 서사와 민족 문화의 정체성에 균열을 가져왔다. 북은 사회주의 대가족 제도를 주장하면서 한민족의 혈통을 강조해 김일성에 대한 충효 그리고 김정일로의 권력 승계를 위한 도구로 민족주의를 활용했다. 남 역시 민주화와 경제발전에 힘입어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의 국가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대한민국 민족주의’가 강화되어왔다. 해외 디아스포라 역시 해당 거주국의 정치 경제적 조건 속에서 종족 정체성의 상당한 변용을 겪었다. 거주국 정치 경제 체제의 객관적 조건에 제약되면서 디아스포라는 자신의 생존과 적응을 위해 특정 전통을 선별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을 통해 종족 정체성을 재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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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개인의 자유와 시민적 성장을 억압한다는 이유로 민족 이해에서 종족성을 배제하려는 논리는 한반도와 해외 디아스포라의의 복합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일면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민족을 정치 공동체로만 규정할 경우, 중국 조선족은 중국민족이며, 일본으로 귀화한 재일 조선인은 일본민족이며, 한국 국적을 취득한 필리핀 이주 여성은 한국 민족이며, 북한 주민은 한 때 같은 민족이었지만 정치 공동체가 상이한 이상, 더 이상 한국 민족이 아니게 된다. 이런 논리가 복합적 정체성 때문에 실존적 고민과 사회적 갈등을 겪고 있는 남과 북의 주민 그리고 디아스포라 당사자들에게 과연 납득될 수 있을까?

▲ 1998년 월드컵 당시 서울 광화문에서 응원 중인 붉은 악마ⓒhttp://blog.gwangju2015.kr/trackback/657

▲ 1998년 월드컵 당시 서울 광화문에서 응원 중인 붉은 악마ⓒhttp://blog.gwangju2015.kr/trackback/657

시민적 민족은 자유와 평등의 보편적 가치를 지니며, 종족적 민족은 피해의식과 인종주의적 폐쇄성을 지닌다는 이분법적인 접근이 아니라, 복합적으로 교차하고 있는 종족 정체성의 현실 속에서 새로운 정치 경제 공동체를 사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종족성을 부인하고 시민적 연대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종족성과 시민성을 결합하려는 사유이다.

종족적 정체성과 정치적 정체성의 결합을 사유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한반도의 종족 정체성이 특정한 정치 경제적 조건 속에서 다양하게 변용된 사실을 우선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20세기의 한반도 역사에서 비롯된 종족 정체성의 다양한 변용들을 단일 정체성으로 통합해야 할 정체성의 분열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민족 개념을 사유하는 출발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민족개념을 사유한다는 것은 단일한 민족국가를 추구하는 기존 민족주의의 틀이나 민족국가를 해체하는 탈민족주의의 틀이 아니라, 식민주의적 억압과 남북의 적대로 인한 상처를 극복하는 자주적 민족국가를 지향하면서도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담은 정치 공동체를 사유하는 사회 철학적 과제와 근본적으로 맞닿아 있다. 달리 말해 이는 남과 북이든 특정 공동체에 의한 민족개념의 일방적 전유가 아니라, 해당 국가의 정치 경제적 틀을 넘어 남과 북 그리고 디아스포라를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전망과 관련된다.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철학자의 서재]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철학자의 서재]

신우현(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사물놀이의 무아지경

 

이제는 오래된 이야기처럼 보인다. 70년대부터 시작해서 90년대 중반까지 대학에서는 민족문화를 보급하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다. 각 대학 동아리에는 민요를 부를 수 있는 노래패가 만들어지고 풍물패가 만들어졌다. 이제 대학 축제의 메인 무대는 당연히 아이돌이지만, 그때는 달랐다. 연예인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축제가 열렸던 것이다. 본격적인 공연의 전조는 풍물패가 어김없이 차지했다. 모든 사람들을 한 곳에 모으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낚시질을 하는 것이지만 어깨춤이 절로 묻어나는 신명나는 한 판 놀이였다. 이제는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김덕수사물놀이ⓒJinho.Jung

김덕수사물놀이ⓒJinho.Jung

사물놀이에 대해서 좀 더 말하고 싶다.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공연이 TV를 통해 방영된 적이 있었다. TV를 통해서 보지만 그 짧은 공연은 사람들의 넋을 빼놓기 안성맞춤이다. 리듬은 변주를 거듭한다. 느리게, 빠르게, 때에 따라서는 휘몰아치는 번개처럼 청중을 압도해 버린다. 그렇게 한참을 넋을 놓고 있으면 어김없이 뒤통수를 치듯 징이 울리며 청중을 흔들어 깨운다. 현장에서 그 공연을 본다면 김덕수를 비롯한 사물놀이 공연단의 모습은 무아(無我)에 빠져 있는 듯할 것이다. 실제로 김덕수는 공연하고 있을 때 자신은 꽹과리에 몸을 빌려줄 뿐, 자신이 연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악기가 자신의 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모습은 자신은 잊고 다른 사람과 협연하면서 일종의 공명을 일으킨다. 최소한 그 연주동안 모든 성원들은 자신을 잊는다. 그러면서 타자들과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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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런 공연은 무대에서 펼쳐지지만 원래는 장터를 비롯한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어우러지는 대동놀이였다. 대동놀이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신분을 말할 필요가 없다. 어떤 사람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화합하면서 어우러진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모습은 지워지고 타자와 소통하는 대동의 춤. 블랑쇼의 글을 읽고 있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이런 대동놀이다.?

 

▲ (모리스 블랑쇼 지음, 이달승 옮김, 그린비 펴냄). ⓒ그린비

▲ <문학의 공간>(모리스 블랑쇼 지음, 이달승 옮김, 그린비 펴냄). ⓒ그린비

프랑스의 문학자인 모리스 블랑쇼가 사물놀이에서 시작된 대동놀이를 본다면 뭐라고 했을까? 이번에 소개할 책은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이달승 옮김, 그린비 펴냄)이다. 이 책은 무척이나 어렵다는 평판을 듣는다. 이 책 뿐 아니라 블랑쇼의 모든 책이 어렵다. 혹독하게 문장도 길고, 중요하게 다루지 않은 개념을 중심 개념에 놓고 있으니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비록 그는 자신의 이해지평에서 어렵게 사태나 개념을 설명할 수밖에 없지만, 그 내용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고 정감이 간다. 만일 그가 우리의 대동놀이 모습을 보고 있었다면 경탄을 했을 것이라고 본다. 서구에서는 무아의 경지라는 말도, 윤회에서 비롯되는 죽음에 대한 인식도 낯설고 어려울 수밖에 없다. 블랑쇼 역시 이런 개념 자체가 낯선 환경에서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강강술래와 같은 공동체의 놀이를 경험하고 그것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블랑쇼의 얘기가 정겹게 느껴질 것이다.

 

예술가의 고독

 

그가 <문학의 공간>에서 처음으로 제시하고 있는 개념은 고독이다. 고독감은 다른 사람과 떨어져서 홀론 존재한다는 느낌에서 비롯된다. 과연 혼자서 무엇을 할까? 혼자서 하는 놀이가 있어야 시간이 잘 간다. 블랑쇼는 이 부분을 잘 파악했다. 그에게 고독이란 무엇에 대한 몰입으로 나타난다. 문학가의 경우 작품에 몰입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가의 작품은 독자들에게 본질적인 고독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거의 모든 예술가들은 고독에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창작 활동에 몰입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몰입으로 완성된 고독을 통해 치유를 시작한다. 말하자면 고독은 더 이상 고립이 아니라 세상과 소통하는 하나의 열쇠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도 예술가에게는 우울함이 있어야 한다고 얘기했다. 우울함은 자신 안으로 들어가서 자신과 대화를 나누면서 극대화된다. 그 과정을 통해서 예술가들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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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onny Rollins. ⓒWikipedia

▲ Sonny Rollins. ⓒWikipedia

이와 관련해서 꼭 얘기하고 싶은 사람이 소니 롤린스(Sonny Rollins, 1930~)라는 재즈 뮤지션이다. 소니 롤린스는 1950년대 데뷔한 미국의 유명한 재즈 색소폰 연주자이다. 그 시대는 춤을 추기 위한 재즈에서 벗어나서 갑자기 어려운 멜로디가 나오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때 많은 재즈 뮤지션들이 별처럼 쏟아졌다가 한꺼번에 사라졌다. 그 이유는 약물 때문이다. 재즈 뮤지션들은 마약을 하고 즉흥 연주를 하면서 재즈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다가도 약물 부작용으로 소리 없이 사라져 갔다. 거의 유일하게 약물에 의존하지 않은 사람이 소니 롤린스이다. 물론 그도 젊은 시절 마약에 손을 댔지만, 보석기간 중 약물 복용 혐의로 강제로 재활원에 갇히게 된다. 이를 계기로 그는 약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다른 뮤지션과는 달리 아직까지도 활동할 수 있게 됐다.

그의 활동 중에 독특한 이력이 있다. 1950년대 그는 이미 최고의 뮤지션 대열에 합류했다. 그런데 갑자기 1959년부터 3년 동안 잠적해 버린다. 새로운 동갑내기 라이벌인 오넷 콜먼(Ornette Coleman, 1930~)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잠적기간 동안 롤린스는 요가를 통해 명상하면서 밤이면 인적이 드문 뉴욕의 다리 위에서 색소폰의 매혹에 빠져 연습을 거듭했다. 아마도 그 시간은 그에게 가장 고독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혹독한 고독의 시간 속으로 빠져드는 동안 그는 아마도 세상이 자신의 존재마저 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블랑쇼는 이런 말을 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시간의 부재의 매혹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분명 고독의 본질에 다가서고 있다. 시간의 부재란 순전히 부정적인 양상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 주도를 할 수 없는, 긍정 이전에 이미 긍정이 되돌아와 있는 그러한 시간이다.”(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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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랑쇼가 문학에 대해서 말하듯이 음악에 대해서, 혹은 소니 롤린스가 잠적한 사건을 말한다면 위와 같은 맥락에서 말했을 것이다. 롤린스가 잠적한 사건은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롤린스가 부재한 시간을 의미한다. 즉 롤린스는 색소폰의 매혹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는 시간을 보냈다. 철저한 고립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몰입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세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망각되는 부재의 시간을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의 시간과는 떨어져 있는 시간은 과거로 기억되는 시간도 아니고 현재의 상태로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의 시간에서 한걸음 떨어진 깊이의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도식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몰입된 시간은 그런 계열화된 시간과는 다르다. 물리적으로 같은 것이 반복되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과는 다르게 양으로 표현할 수 없는 질적인 시간도 존재한다. 질적인 시간은 같은 시간이라도 심리적으로 다르게 느껴지는 시간과 유사하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1시간과 재밌는 영화를 볼 때의 1시간은 물리적으로는 같지만 심리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전자의 시간은 매우 지루하지만, 후자는 매우 빠르게 지나간다. 그런데 후자와 같은 시간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을 잊고 무엇엔가 몰입해 있어야 한다. 이처럼 몰입은 시간의 부재를 경험하는 예가 된다. 마찬가지로 소니 롤린스가 몰입한 시간은 계기적으로 주어지는 시간과는 다르게 자신의 내면을 파고드는 깊이의 시간이자 나를 잃어버리는 무아의 시간이기도 하다. 또한 블랑쇼가 말하는 현전을 위한 ‘자발적 죽음’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렇게 보낸 공백의 시간은 그로 하여금 다시 최고의 작품을 탄생시키게 한다. 물론 예로 든 롤린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많은 예술가들이 그런 몰입을 통해서 작품을 만들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술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에게조차, 몰입은 자신 안에 있는 새로운 나를 만드는 작업이다. 블랑쇼가 <문학의 공간>에서 말한 고독과 몰입은 시간과 연결되어 작품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임과 동시에 누구에게도 해당될 수 있는 새로운 소통의 방식을 주장하는 것이다. 예술가의 작품이 더 이상 예술가의 것이 아니라 감상자의 것이 되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죽음 앞에서

 

이렇게 정리하면 특별히 어려울 것도,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처럼 보이지만, 현대 프랑스의 사상계는 블랑쇼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문학의 공간> 뿐 아니라 그의 모든 저작을 관통하고 있는 화두는 ‘바깥’이다. ‘바깥’이란 말은 상식적으로 보면 ‘안’과 대립된다. 그런데 블랑쇼가 말하는 바깥은 이런 의미와는 다르다. 그에게 바깥은 타자와 소통하는 공간이다. 흔히 소통을 한다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과 만나서 대화를 주고받는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하지만 블랑쇼에게는 복잡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불행과 고통의 연속이다. 가장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은 이 세계에서 고통과 함께 부조리함을 느끼게 해준다.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방법은 타자와의 소통이다. 그런데 이 과정을 블랑쇼의 생애와 연결해서 살펴보자.

 

블랑쇼의 삶을 살펴보면 무척이나 흥미로운 경험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 경험 중 눈에 띄는 두 가지 사건을 제시해 보자. 먼저 2차 대전 중 죽음의 공포 속에서 극적으로 생존했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화가 있다. 1944년,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나치의 퇴각이 이루어지는 시기, 블랑쇼는 자신의 집 앞에서 총살형을 당할 위기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아주 극적으로 레지스탕스가 그 일대를 선제공격하기 시작했다. 블랑쇼는 이 전투 때문에 극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의 생은 덤으로 생존한다고 간주했다.

 

“당신은 이미 이 년 전에 죽었어야 할 사람이므로 앞으로 남은 수명은 모두 덤으로 사는 것입니다.”(<죽음의 선고>(고재정 옮김, 그린비 펴냄) 중에서)

 

그리고 그는 저작에서 끊임없이 ‘죽음’의 문제를 분석하고 있다. 물론 이 죽음의 문제는 당시 유행했던 실존주의 철학, 혹은 현상학의 영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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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른 하나의 특이한 경력은 68 혁명 중 ‘학생-작가 행동위원회’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그는 잡지 <위원회>에 익명으로 글을 남기게 된다. 이미 당대의 유명한 문필가였던 그가 자신의 이름조차 버리고 평등한 위치에서, 그것도 자신의 제자밖에 되지 않는 학생들과 동등하게 ‘익명’으로 활동했다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다.

 

“68년 5월의 행동위원회와 시위대에서는 친구는 아니지만 나이차도 이전의 명성도 무시한 채 너와 나로 말하는 동지들이 있었다.”(“Pour l’amiti?” 중에서)

 

행동위원회에서 블랑쇼는 익명을 주장했지만, 대다수의 작가들은 익명의 동지 관계를 포기했다. 그렇지만 블랑쇼는 익명성을 마치 문학적 체험으로 느꼈다. 문학적 체험은 작가의 체험이 더 이상 작가의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 무한하게 열리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작가는 깊은 사색의 시간을 통해서 작품을 만들지만, 그 작품은 더 이상 작가의 것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온전히 작가의 체험을 공유하는 독자의 것이고, 모든 이의 것이 된다. 이런 블랑쇼의 경험은 모든 권력을 포기하고, 주체의 익명성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두 가지 경험은 그의 주요 테마인 ‘바깥’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로 작동한다. 프랑스 철학에서 ‘바깥’이라는 말은 푸코와 데리다 철학의 주요 테마가 된다. 또한 이 용어는 그대로 들뢰즈에게서 다시 사용된다. 뿐만 아니라 낭시나 아감벤과 같은 당대 철학자에게도 끊임없이 회자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앞서 바깥은 소통의 공간이라는 말을 했다. 그런데 그 소통의 공간은 완전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고통과 좌절을 경험하는 곳이다. 오히려 완전한 바깥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자아의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완전한 소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죽음’이라는 테마와 만나야 하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상황을 <문학의 공간>에서는 키릴로프의 사례로 분석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소설 <악령>에서 신의 죽음을 알리는 인물로 키릴로프를 등장시킨다. 키릴로프는 신이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공개 자살을 선택한다. 이는 자기의식의 순수한 현전 가능성을 분명하게 밝히는 예에 해당한다. 이로부터 블랑쇼는 죽음 안에 놓여 있는 자아의 분열을 분석한다. 자신 안에 놓여 있는 타자. 이 타자는 소통을 위한 근원적 공간이 된다.

 

이 근원적 공간은 마치 문학 혹은 글쓰기의 시원을 이루는 역할을 한다. 앞서 사례로 제시했던 김덕수나 소니 롤린스의 경우처럼 물리적인 죽음이 아닌 자신의 세계로 빠지는 무아지경은 어쩌면 블랑쇼가 말하는 바깥을 가장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즉 타자와의 근원적 공간은 현전을 위한 죽음이라는 내밀성으로부터 시작해서 타자의 내밀성과 만나는 지점이 바로 소통의 공간이고, 바로 예술의 공간이 된다는 의미이다.

 

 

 

 

<자기를 자기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자>[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⑤

<자기를 자기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자>[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⑤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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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들에게 거짓이 되고 싶지 않다면, 우선 자기 자신에게 진실해야 한다. – 셰익스피어

이현주목사ⓒegosio.com

이현주목사ⓒegosio.com

이현주 목사의 『이아무개의 마음공부』라는 책에는 인도철학책에 있는 다음의 내용이 인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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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사람 안에는 모두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들어있다. 그 다이아몬드에는 깎여진 면이 수천 개 있는데 면마다 때와 먼지로 덮여 있다. 그 면들을 닦아서 맑게 하고 마침내 찬란한 무지개 색깔을 비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영(soul)이 할 일이다. … 사람들 간의 차이란 닦여진 면의 수가 다른 것일 뿐이다. 모든 다이아몬드는 다 같고 모든 다이아몬드가 다 완벽한 것이다.”

내가 수천 개의 면으로 된 다이아몬드라고? 다이아몬드라면 빛이 나야 하는데 나의 어디에서 빛이 난다는 거지? 그러면 그 수천 개나 되는 면에 모두 먼지가 앉아서 나는 내가 다이아몬드임도 모르고 산다는 말인가?

이 생각은 불교의 사유방식과도 연관된다. 불교에서는 중생이 중생인 이유는 스스로가 부처임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생이란 ‘무명에 휩싸인 부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 무명만 거두어내면 되는데 그 무명을 거두어내지 못해서 스스로를 중생이라고 생각해 괴로워하면서 산다는 것이다. 먹구름 뒤에는 푸른 하늘이 있는데 사람들은 먹구름만 보고 하늘이 검다고 말하고, 거울에 때가 끼었을 뿐인데 때를 닦아낼 생각은 하지 않고 더러운 거울이라며 버리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고 보니 사람마다 빛이 나는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측면에서 빛이 나고 다른 사람은 저러한 측면에서 빛이 난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이 빛이 나는 측면을 보고 ‘나는 왜 저러지 못하지?’ 하는 열등감에 시달린다. 그리고 어떤 때는 다른 사람의 먼지 앉은 면을 보며 안심한다. ‘봐 저 사람도 저런 면이 있지. 나만 이상한 것은 아니야.’ 하면서 안심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들 사이의 차이란 ‘닦여진 면의 차이’라는 말이 된다. 어떤 사람은 1020개 면의 먼지가 닦여 빛이 나고, 어떤 사람은 100개 면의 먼지가 닦여 있고, 어떤 사람은 10개 면의 먼지가 닦여 있고, 어떤 사람은 한 면도 닦이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닦여진 면이 많은 사람은 빛이 많이 날 것이고, 닦여진 면이 적은 사람은 빛이 적게 날 것이다.

그런데 어찌 되었든 다이아몬드라고 말해주니 기분이 좋기는 하다. 결국은 우리는 닦으면 되는 존재라는 말 아니겠는가? 이 말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한 면도 닦이지 않은 사람은 먼지만 뽀얗게 앉아 있어 빛이 전혀 나지 않기 때문에 본인도 옆 사람도 다이아몬드인 줄 모르고 살기는 하지만 기실은 우리 모두가 다이아몬드라는 말이 되니까 말이다. ‘나는 다이아몬드가 아니야.’ 하면서 괴로워하면서 사는 것보다는 ‘나는 다이아몬드일 거야.’ 하면서 자신을 닦으며 사는 쪽이 남는 장사일 것이다. 설사 다이아몬드가 아닐지라도 닦다보면 다이아몬드 비슷해질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 다이아몬드임을 믿고 먼지를 열심히 닦는 선택을 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그러면 그 수천개면이 다 닦인 존재가 있을까? 만약에 있다면 그 후보는 예수나 석가모니쯤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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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다이아몬드에 앉은 먼지에 신경 쓰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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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서 먼지가 앉은 면을 보는가, 빛이 나는 면을 보는가? 타인에게서 단점을 보는가, 장점을 보는가? 우리의 마음에는 타인의 단점과 어두움에 대한 친화성이 있다. 타인의 단점을 봐야 내가 그 사람보다 못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어 안심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 일단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다른 사람의 단점부터 보게 된다. 인간 인식의 한계상 단점부터 보게 되지만 이 때 타인의 단점에 안심하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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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열등감을 묻어버리기 위해 타인의 단점을 자꾸 보아 버릇하면 타인과의 관계가 엉킨다. 누가 자신의 단점을 보는 데에만 유능한 옆 사람을 좋아하겠는가? 우리가 타인의 단점을 보게 되면 마음 안에 은근히 그 사람을 무시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을 무시하는 방식의 표정을 짓거나 행동을 하게 된다. 인간에게는 자신을 무시하는 기운을 기가 막히게 알아채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당연한 결과로 인간관계가 나빠지게 된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나 나나 어느 만큼 못났고 어느 만큼 잘났을 뿐이다. 우리는 흔히?늘 어떤 사람의 못난 면을 보고 무시하거나 그게 아니면 잘난 면을 보고 주눅 든다. 인간에 대한 성숙한 이해란 그의 잘난 면과 못난 면을 함께 보고 통합해서 이해하는 것이다. 성숙한 인간은 자신의 잘난 면과 못난 면을 함께 보고 통합해서 이해한다. 그리하여 그러한 사람에게는 잘나고 못나고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된다.

그도 나도 수천면체 다이아몬드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천개의 면을 열심히 잘 닦아내는 것뿐이다. 남의 다이아몬드에 얼마나 먼지가 앉아 있는지에 관심가지지 말자. 내가 거기에 관심 가진다고 내 다이아몬드에 빛이 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남의 빛나는 면들을 보며 부러워하는 데 그치지 말자. 타인의 빛나는 면들을 보면서 나의 먼지 앉은 면을 닦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기만도 짧은 세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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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쉽고도 가장 어려운 질문,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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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나는 어떤 다이아몬드인가? 어떤 다이아몬드이고 싶은가? 어떻게 닦아야 나는 다이아몬드가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 나다운 나여야 가장 아름다운 다이아몬드가 될 것이니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세상에서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질문이다. 나의 직업? 나의 학력? 나의 나이? 나의 성별? 무엇이 나인가? 일단 ‘나’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나의 ‘자기개념’이다. 우리는 타인이 나를 무시할 때 이 자기개념이 손상되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각자가 자기다울 때 편안함을 느낀다. 나에게 나 답지 않은 것이 강요될 때 소외감을 느낀다.

나는 나다울 때 행복을 느끼는데 도대체 어떤 때 내가 나다운 것인지를 알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는 보통 타인의 인정을 받을 때 충족감과 행복감을 느낀다. 그런데 타인의 갈채를 받는 스타들은 타인의 갈채 속에서도 외로워한다. 그 외로움은 대중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이미지를 좋아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생겨난다. 내가 정말 나다울 때는 내가 나를 의식하지 않는다. 나에 대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게 된다. 그 때는 그저 나일 뿐이다. 내가 정말 나다울 때는 나는 자유롭다. 내가 나다운 때에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다.

내가 나다울 때는 나라는 존재도 잊고 시간도 잊는다. 그러나 거꾸로 나라는 존재를 잊고 시간을 잊었다고 해서 내가 나다운 시간을 보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게임이나 도박 등을 할 때 나라는 존재를 잊고 시간을 잊지만 그 때 ‘나답다’고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 런 문제로 헷갈릴 경우에는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 나라는 존재도 잊고 시간의 흐름도 잊었는데 그 시간이 끝난 후 허무감이 엄습한다면 그 시간을 나는 중독현상으로 보낸 것이다. 그런데 그 시간이 끝난 후 설명하기 어려운 충만감이 느껴진다면 그 때 나는 나다운 시간을 보낸 것이다.

게임을 했는데 게임의 운영에 나의 고유성이 반영되어 게임이 끝난 후에 충족감을 느끼게 된다면 그 사람은 게임에서 자아실현을 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프로게이머가 되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특별한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게임이 끝나고 나면 허무감을 이기기 힘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의 생활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다시 게임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하게 된다. 현실에서는 성취감을 쉽게 얻을 수 없는데 게임은 중간 중간이라도 어느 정도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니까 게임에서 손을 떼기가 어려워진다. 그리하여 게임이 끝난 후 느껴지는 허무감을 잊기 위해 다시 게임에 몰두하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이렇게 현실에서의 생활에 도움이 안 되는 집중현상은 중독일 가능성이 높다.

내가 나답지 않은 행동을 할 때 마음 안에서는 어떠한 불편의 신호가 울려 퍼진다. 무언가 ‘이게 아닌데’의 마음이 있다. 청소년들이 주목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할 때 말썽을 피우고 폭력을 행사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부모와 사회에 알리고자 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청소년들은 친구들과 함께 있는 군중심리에 사회가 금하는 행동을 한다. 그러면서도 마음 안에는 ‘이게 아닌데’의 마음이 있다. 그래서 말썽 피운 학생들을 보면 도저히 그런 행동을 했을 것 같지 않은 착한 얼굴의 학생들이 꽤 있다.

나를 나답게 하는 일이 무엇인지, 내가 어떨 때 나다워서 충족감을 느끼는지는 다양한 경험을 해봄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 다양한 경험을 해보면서 어느 때 내가 가장 편안하고 자유롭게 느끼는지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그 경험 속에서 이것을 평생 계속 한다고 해도 할 수 있겠는지를 물었을 때 “Yes”라는 대답이 나온다면 그것이 나답게 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래에서 자신의 고유성을 잘 발휘하는 사람은 노래를 할 때 자유를 느끼고 시간을 잊는다. 손재주가 있는 사람은 무언가를 만들 때 시간을 잊고 무아지경에 빠진다. 그리고 그 물건을 잘 만든 자기 자신에 대해 뿌듯함을 느낀다.

나를 나답게 하는 일은 사회적 보상이 적게 주어져도(즉 보수가 적게 주어져도) 하고 싶어진다. 돈 때문에만 하는 일은 나를 나답게 하는 일이 아니다. 돈만 아니면 그 일을 하지 않고 싶다면 그 일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 아니다. 나답게 하는 일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그 일을 평생 해도 후회가 없겠느냐?(그 일을 하면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고 자기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가?)’와 ‘(생계 문제는 해결된다는 전제에서) 경제적 보상이 주어지지 않아도 그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느냐?’라고 정리할 수 있다.

청년들의 경우에는 여러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해보면 어떤 유형의 일에 자신의 재능이 잘 펼쳐지는지를 확인해볼 수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인간은 자신의 재능이 잘 펼쳐지는 영역에서 일을 신나게 잘 할 수 있다. 맥주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도 다양한 술손님들을 만나면서 이런 유형의 손님들에게는 이런 식의 대응을 하는 것이 좋고 저런 유형의 손님들에게는 저런 식의 대응을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깨달아 아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사람 대하는 일을 하는 것이 적절할 수 있다.

다양한 책을 읽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어떤 때 내가 나라는 존재까지 잊을 정도로 집중하는지 어떤 때 내가 가장 생기발랄해지는지를 확인해보는 것이 자기를 자기답게 하는 것을 알아가는 방법이다. 나의 경우에는 강의가 내가 원하는 대로 잘 되거나 글이 내가 원하는 대로 잘 써질 경우에, 대체로 나의 생각을 적절한 언어로 표현할 때 충족감을 느낀다. 그 언어가 타인에게 전달되어 의미를 낳으리라 믿어질 때, 의미를 낳을 수 있도록 전달하고 있다고 확신하게 될 때 충족감을 느낀다. 내가 추구하는 의미는 나의 강의를 듣거나 나의 글을 읽는 사람이 보다 더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에 있다. 그 때 나는 내가 살아 있다고 느낀다. 내가 살아 있다고 느끼는 때, 그 때가 내가 나로 존재하는 순간이고 나다운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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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만들어가는 그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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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운 나’와 관련된 철학 개념이 바로 실존이다. 실존은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문제 삼을 수 있는 인간 존재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동물은 ‘나는 왜 이렇게 생겨먹었지? 왜 이것밖에 안되지?’ 하는 고민을 하지 못한다. 인간만이 이러한 고민을 한다. 이러한 고민은 일차적으로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고민이라는 느낌이 들겠지만 역으로 인간이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기에 꿈도 꿀 수 있는 것이다. 현재의 모습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모습을 지향하는 능력 때문에 꿈도 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꿈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과 다르기를 기대하는 것’이므로 말이다.

인간이 다른 존재와 구분되는 특성은 자신의 삶 전체에 대해 반성하면서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지를 고뇌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만 이러한 실존적 성격이 있다. 사실 여러분들이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라는 제목에 끌려서 이 책을 펼치게 되는 것 자체도 여러분 안에 실존으로서의 특성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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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 독일의 철학자ⓒbetterworldbooks.com

카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 독일의 철학자ⓒbetterworldbooks.com

인간 안에는 스스로의 결단을 통해 자기의 존재를 형성해나가는 측면이 있는데 이 측면을 실존철학에서는 ‘실존으로서의 자기’로 본다. ‘실존으로서의 자기’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그냥 ‘실존’이라고 하면 ‘실존’이라는 존재자가 따로 있는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물론 철학자들도 굳이 ‘실존으로서의 자기’라고 표현하지 않고 그냥 간편하게 ‘실존’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앞에서 ‘이게 아닌데’의 느낌이 인간에게 있다는 말을 했다. ‘이게 아닌데’의 느낌은 내가 실존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때 받게 되는 느낌이다. 인간에게는 실존으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경향성이 있다. 실존으로서 존재할 때 나는 자아실현이 된다고 느낀다. 자아실현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이 내 안에 있는 것을 바깥으로 끄집어낸다는 의미는 아니다. 실존철학자 야스퍼스의 경우에는 ‘드러남으로서의 실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내 안에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이 있고 그 가능성이 실현되는 방식은 ‘드러남’이라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이를 ‘존재를 일으키는 드러남’이라고 표현한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당신은 내향적인가, 외향적인가?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일수록 이 두 성향이 섞여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런데 처음에 이 단어를 활용해 자신을 내향적이라거나 외향적이라고 규정할 때는 어땠는가? 아마도 스스로 내향적이라는 규정에 맞추어 외향적인 특성을 도외시하거나 외향적이라는 규정에 맞추어 자신 안에 있는 내향적인 특성을 무시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점점 자기 자신을 알아가게 되면서 ‘어 나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나? 이건 외향적 특성 아닌가? 내가 내향적인 것만은 아니네.’ 혹은 ‘이건 내향적 특성 아닌가? 내가 외향적인 것만은 아니네.’ 하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어떤 하나의 일관된 특성이 나에게 있어서 그 특성이 일정한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알 수 없는 심연으로서의 나’이고 그 ‘나’가 세상과 만나는 방식에서 내향적인 특성으로 드러나는 때도 있고 외향적인 특성으로 드러나는 때도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 ‘알 수 없는 심연으로서의 나’가 세상과 만나는 방식 자체가 내가 누구인지를 드러내준다. 그러니까 세상과 만나면서 만들어지는 나의 모습이 나를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내향적이니 외향적이니 하는 규정 속에서 내향적 혹은 외향적인 방식으로 나를 만들어가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 불편해지면 더 편해지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즉 내향적으로 행동하려 했는데 그게 불편해서 외향적으로 행동하기도 하고 외향적으로 행동하려 했는데 그게 불편해져서 내향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여기서 ‘이건 아니다’라는 식으로 불편을 느끼는 것은 나의 ‘알 수 없는 심연’에서의 울림이다. 나의 마음의 결인 것이다.

나의 마음의 결이 어떻게 생겼는지, 나의 마음의 생김새가 어떠한지는 나도 다 알 수 없다. 세상과 만나는 방식에서 이러저러한 부딪침에서 나의 마음 생김새를 느껴갈 뿐이다. 나는 나의 마음 생김새를 느끼면서 또 행동들 속에서 나를 만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존재를 일으키는 드러남’이다. 행동으로 존재를 구성해가기 때문에 ‘존재를 일으킨다’고 표현하는 것이고, 그것이 세상과 만나는 방식에서 표현되기 때문에 ‘드러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 하나 하나가 다시 나를 구성한다. 여기서 그 행동 하나 하나를 결정하는 것에 주목한 철학자들이 바로 실존철학자들이다.

장폴 사르트르(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 1905~1980),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작가ⓒmirror.enha.kr

장폴 사르트르(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 1905~1980),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작가ⓒmirror.enha.kr

인간존재의 본질이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자기 자신의 독자적 결단을 통해서 그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형성한다고 보는 데에 실존철학의 특징이 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J.P.Sartre)의 선언이나 “인간은 자유 그 자체이다.”는 야스퍼스의 선언은 실존철학의 근본입장을 잘 드러내준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것의 의미는 인간 실존은 이미 주어진 본질에 따라 그 본질을 실현하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가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이 어쩌니 저쩌니 해봐야 나의 실존이 가장 1차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자유 그 자체이다’는 야스퍼스의 선언은 말 그대로 인간은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존재, 스스로를 결정하는 자유의 존재라는 의미이다.

나는 유전적 요인에 의해, 주어진 환경에 의해, 사회시스템에 의해 결정된 존재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나는 내가 결정하는 존재이다. 유전적 요인과 주어진 환경, 사회시스템이 유사해도 각자 각자는 다르게 행동한다. 왜 다르게 행동했는가를 물으면 그 당사자도 대답하기 어려워진다. 자신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를 무의식적 요인에 의한 것으로만 설명하기도 어렵다. 각자의 알 수 없는 심연의 고유성, 유전적 요인, 환경적 요인, 사회시스템 등의 변인이 만나 복합적으로 작용해 ‘나’가 구성된다.

나는 구성되는 동시에 스스로를 구성한다. 유전적 요인, 환경적 요인, 사회시스템 등의 변인은 나를 구성하기는 하지만 그 구성에 반기를 들고 저항하고 그 구성을 조직해 나가는 것은 ‘나의 알 수 없는 심연’이다. 그러니까 알 수 없는 심연의 고유성, 유전적 요인, 환경적 요인, 사회시스템 등의 변인의 복합체가 나인 것이다. 이 네 변인 사이의 역학관계가 어떠한지 까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여러 가지 학문이론으로 이 변인 사이의 역학관계를 알고자 노력할 뿐이다.

알 수 없는 심연의 고유성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려는 학문이 실존철학이고 유전적 요인을 통해 인간을 설명하려는 학문이 생물학이고 환경적 요인과 사회시스템 등의 변인을 통해 인간을 설명하려는 학문이 각종 사회과학인 것이다. 이러한 학문을 통해 인간을 이해해도 여전히 남는 것은 ‘내가 원하는 나’로 살려면 ‘내가 원하는 나’가 되기 위한 각종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경우에는 무의식이나 유아기의 애착관계를 통해 인간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나 정신분석을 통해 지금의 내가 왜 이러한 마음 생김새를 가졌는지가 밝혀진다 해도 여전히 남는 문제는 지금의 나는 ‘내가 원하는 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의 나를 형성한 것이 유아기의 잘못된 애착관계라고 해도 내가 지금 유아기로 돌아갈 수 없는 바에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유아기의 잘못된 애착관계’에 대해 내가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뿐이다. 그 ‘유아기의 잘못된 애착관계’를 원망하면서 남은 인생을 낭비할 것인지, 그 ‘유아기의 잘못된 애착관계’에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해서 자신의 원하는 모습을 향해 나아갈 것인지의 결정 말이다. 더 많이 후회하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후회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삶을 살 것인가는 나의 결정에 따른 일이다.

설사 생물학이 맞고 사회과학이 맞고 정신분석학이 맞다 해도 얼마만큼이나 맞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이 학문들을 신뢰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이 학문들의 결론으로 인해 결정당해서 우울해지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설사 이 학문들이 실제로 상당히 타당하다고 해도 나는 ‘그러한 요인들에 의해 결정된 존재’로 살 때보다 ‘내가 결정하는 나’로 살 때 더 행복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분명하지 않은가? 나는 내가 만들어가는 존재로 살 때 행복하므로 열심히 나 자신을 ‘내가 원하는 나’로 만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나’로 살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질문,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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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네그리 외 <탈정치의 정치학>[철학자의 서재]

안토니오 네그리 외 <탈정치의 정치학>[철학자의 서재]

김범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2008년 촛불의 진짜 ‘배후’!

 

자율의 이중성

 

5공화국 시절 중고등학생들에게 ‘자율’이라는 말은 환영과 동시에 엄청난 부담감을 안겨주었다. 전두환 정권의 포퓰리즘은 프로스포츠, 국풍사업뿐 아니라 학생들의 두발 자율화, 교복 자율화를 들고 나왔다. 그 당시 학생들은 그 자율화를 반겼다. 교복은 학생들을 억압해왔던 ‘상징’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 ‘상징’이 무너지는 것은 학생의 인권 신장이라는 막연한 즐거움을 안겨줄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 자율화는 학교의 권위, 교사의 권위 앞에서 다른 방식으로 코드화되어 학생들을 억압했다. 아무리 두발 자율화라고 하지만 머리 긴 것은 용납이 안 된다. 그리고 여지없이 ‘바리깡’을 들고 교실을 감시하는 교사. 결국 자율은 또 다른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의식을 주입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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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3일 시청앞 광장 촛불 집회ⓒWikipedia

이런 자율의 이중성은 학생들의 두발이나 교복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자율주의’라는 말은 아마도 2008년 촛불집회 때문에 널리 보급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해 5월, 6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광장에 모였다. 그리고 그 현상은 아직도 우리 사회 변혁을 진단하는 변곡점으로 파악된다. 촛불문화제의 모습은 여느 시위 문화와도 달랐다. 행사를 주도하는 단체도 없고, 모인 주체도 특정한 하나의 집단으로 말할 수도 없는 형태였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아줌마, 넥타이를 매고 나온 회사원, 교복 차림으로 나온 고등학생들, 심지어 질서와 안전 지킴이를 자처하고 군복을 입고 나온 예비군까지. 그들은 다양한 정보를 공유했고, 수준 높은 지식으로 소통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을 ‘다중지성’ 혹은 ‘집단지성’이라 칭했다. 그리고 그 집단지성은 즐겁게 놀면서 싸우고, 자율적으로 움직였다.

제발 해산하자는 말을 듣지 않은 채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과 횡단보도 놀이를 하며 거리를 활보했던 사람들. 이러한 자율은 매우 다양한 형식으로 분화되었다. 쌍용자동차, 기륭전자의 싸움에 화답했고, 밀양 송전탑과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저지 등에도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새로운 매체인 팟캐스트를 통해서 소수자들의 목소리, 사회 정의의 목소리를 담았다. 이름도 없는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특이한 개체들로 모여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집단의 자율은 제도적 폭력 앞에 다시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는 공권력이라는 구실로 물리적인 폭력이 행사되었다면, 지금은 재편된 제도를 이용한 경제적인, 혹은 정신적인 폭력이 자율을 억압하고 있다.

 

다중지성과 자율의 이론적 모델?

 

탈정치의정치학

▲ <탈정치의 정치학 : 비판과 전복을 넘어 주체성의 구성으로>(안토니오 네그리 외 지음, 워너 본펠드 엮음, 김의연 옮김, 갈무리 펴냄) ⓒ갈무리

여기서 자율주의는 안토니오 네그리가 행했던 ‘아우토노미아(autonom?a)’를 번역한 말이다. 시기적으로 보자면 1968년 이후 70년대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형태의 노동 운동 과정에서 등장하는 일련의 운동, 특히 네그리가 이론적 중심이 된 모델이 바로 아우토노미아(자율)다. 우리나라에서는 2008년도 촛불집회 때문에 아우토노미아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이 내용이 국내에 소개된 것은 이미 90년대부터였다. 주로 조정환, 윤수종 등이 적극적으로 번역하고 소개했다. 이번에 소개할 책은 안토니오 네그리 등이 쓰고 김의연이 번역한 <탈정치의 정치학>(갈무리 펴냄)인데, 그 내용은 아우토노미아 영역에서 활동하는 이론가들의 논쟁을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기에 앞서 여러 이론적 상황들을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 명의 저자가 쓴 책이라면 일정한 흐름이 있는데, 불행하게도 이 책에서는 그런 흐름을 감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 책의 매력에 빠지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 책에 접근하기 위한 기본적인 문제 상황과 이론적 배경을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1990년대 이른바 ‘한국의 좌파’는 공황상태에 빠져야 했다. 독일이 통일되고, 소련이 몰락하고, 독립 국가들이 탄생하는 급격한 변화의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폐해를 말하기 위해 그 반대편에 있었던 집단이 필요했으니 그 집단이 사라진 것은 매우 큰 충격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자본주의 체제의 절대적 승리라는 주장에 넋을 놓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분명 자본주의는 구조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자본주의도 완전체가 아니라 투석 치료를 받아야하는 신부전증 환자일 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마르크스를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서구의 마르크스주의의 스펙트럼을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재조명하게 되고, 국내 소개하게 되었다.

 

먼저 마르크스의 <자본> 분석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류가 있었다. 그래서 알튀세르를 비롯한 프랑스 사회철학자들의 이론이 도입되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아예 마르크스주의와 결별을 선언한 그룹도 탄생하게 된다. 소위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계열이 그것이었다. 물론 이런 부류 외에 전통적으로 존재해왔던 스탈린주의를 배격한 마르크스-레닌주의나 레닌조차 배제한 마르크스주의 등의 관점들이 존재한다. 이런 스펙트럼에서 자율주의는 어느 편에 속해 있을까?

 

마르크스를 넘어선 마르크스

 

이 책을 엮은 본펠드는 자율주의를 ‘이단적 마르크스주의’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 의미는 ‘정통’에 대한 지위를 거부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의 저자는 여러 명이고, 그래서 이 저자들 모두가 이런 입장이라고 단언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스스로 이단적 마르크스주의라는 멍에를 쓴 이 모든 글에서 공통적인 흐름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 위기를 인정하지만, 포스트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이론을 ‘마르크스를 통해서’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재확인시켜주는 부분이 이 책의 3장 ‘맑시언의 범주들, 자본의 위기, 그리고 오늘날의 사회적 주체성 구성’이다. 이런 공통적인 흐름은 이 ‘이단’이 단순히 마르크스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마르크스를 넘어서 마르크스로 향한다는 역설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여전히 자본 안에서, 그리고 자본에 대항하면서 자본을 넘어서는 노동의 역량을 긍정한다. 그리고 이것이 마르크스의 중심적 개념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율주의의 이론적 배경을 좀 더 알아두어야 한다. 이 책의 매력에 빠지기 힘든 것은 바로 배경 지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다. 먼저 노동의 역량에 대한 부분을 보충 설명해 보자.??

 

Baruch Spinoza(1632~1677)ⓒWikipedia

Baruch Spinoza(1632~1677)ⓒWikipedia

스피노자 철학에서 핵심 개념 중 하나로 ‘코나투스(conatus)’가 있다. 이 말은 ‘생을 지속시키려는 힘’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철학사에서 오랫동안 이단으로 취급받던 인물이다. 그런데 프랑스를 중심으로 스피노자를 재해석하기 시작한다. 그중 스피노자의 ‘역량(potentia)’이나 ‘정동(affect)’ 따위의 개념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고 중요 개념이 된다. 네그리를 비롯한 자율주의 사상가들도 이런 해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물론 네그리가 프랑스 사상가는 아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정치적 박해 때문에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여기서 가타리, 알튀세르를 비롯한 여러 철학자들과 만남을 가졌다.)

 

특히 네그리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개념을 특정한 개체에 한정시키지 않고 집단에 활용했다. 그래서 집단적 코나투스에 해당하는 ‘다중의 역량’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이는 명목상의 권력을 비판하고, 모든 권위에 대한 부정과 저항의 의미를 담을 수 있다. 이를 근거로 자본의 권력과 부도덕한 권력에 대항하여 세계를 재구성할 수 있는 주체성의 힘을 발견하게 된다. 이 집단의 힘은 강할 수는 있지만, 결코 사회 변혁이라는 구도로 배치된다는 보장은 없다. 여기에는 반드시 독특한 주체 개념이 상정되어야 한다.

 

네그리는 <전복의 정치학>(최창석·김낙근 옮김, 인간사랑 펴냄)에서 주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지적이면서도 프롤레타리아적이고 다양하면서도 평등에 대한 집단적 요구를 하며 정치적 타협을 하면서도 생존과 투쟁을 위한 윤리적 결단을 추구하는 주체.”

 

비록 포스트모던한 사상가들이라고 하는 인물들 중 일부는 주체에 대해서 개체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있거나 주체 중심의 사고를 거부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변화의 중심을 이끌어갈 수 있는 주체는 필요하다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이성주의의 그림자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개념이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이 제국의 논리에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이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신의 고유한 역량을 탈정치의 윤리적 성격으로 정립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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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주체들은 노동의 조건 자체가 변화되는 상황과 함께 연구된다. 자율주의에서는 이러한 변화와 연관해 ‘비물질적 노동’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 말은 스피노자의 정동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도 ‘감정 노동’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업을 비롯해서 정신적 에너지를 소비하는 노동이 증가하고 있다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과거에 이런 노동은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지 않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정보화 사회에서는 새로운 생산 패러다임을 갖게 만들었으며, 이런 패러다임은 생산의 탈중심화, 탈장소화를 가능케 했다.

 

이런 노동의 양식은 자본의 운동 방식을 재탐색하게 한다. 이 책에서는 1장 ‘태초에 절규가 있었다’와 8장 ‘자본이 운동한다’에서 자본 권력이 아니라 불복종적인 노동의 역량을 다루고 있다. 또한 7장 ‘발전과 재생산’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소통과 접속의 확장을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서 자율 공간의 창출에 공헌하는 주체성에 대한 논의를 분석한다.

 

형용모순처럼 보이는 탈정치의 정치

 

일상에서는 정치에 무관심한 것이 탈정치인 것으로 각인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중립적인 태도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하지만 자율주의에서의 탈정치란 이렇게 정치에 무관심한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인간을 규정하는 말 중에서 ‘사회적 동물’이라는 정의가 있다. 원래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던 말을 번역한 것인데, 정확한 번역이 아니라고 비판받고 있다. 적절한 번역 용어는 ‘정치적 동물’이다. 이 말은 인간이 고대 도시 국가인 폴리스에 거주하는 동물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혹은 경제적인 것)을 엄밀하게 구별하게 된다. 공적인 것이란 폴리스 전체와 관련된 일이고, 사적인 것이란 먹고 사는 문제, 즉 경제적인 것으로 한정된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즉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이 서로 구별될 수 있을까? 자본주의는 경제 체제인데 어떻게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제외하고 공적인 것을 말할 수 있을까?

 

자율주의에서 탈정치는 엄밀하게 보자면 공통적인 것의 복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공통적인 것에는 사적 소유 관계와 신자유주의적 전략들에 대립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 자본은 자신의 소유 관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국가라는 허울을 쓰고 있고, 이 국가들은 다시 자본의 논리에 맞춰 제국주의적 성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먹고사는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의 모든 성원들에게 공통적인 것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탈정치는 역설적으로 매우 정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책에서는 이런 고민을 10장 ‘정치적 공간의 위기’와 13장 ‘공적 공간의 재전유’ 등에서 만날 수 있다.

 

자율주의의 문제의식과 추이를 조금만 이해한다면, 이 책엔 우리 현실과 비교해서 사색의 깊이를 더할 내용이 많다. 자율에는 반드시 통제가 뒤따라왔다. 그런 의미에서 자율이 통제 사회 안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발전하기 위해서, 집단들의 역량을 강화시킬 수 있는 가치의 전유가 필요할 것이다. 이런 고민을 통해서 현재 우리 사회에 놓여 있는 통제 사회의 징후를 차단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런 고민을 깊게 만들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책은 자율주의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친절하지 않다. 이 책을 재미있게?읽기 위해서는 조정환이 쓴 <아우또노미아>(갈무리 펴냄)나 윤수종의 <안토니오 네그리>(살림 펴냄)와 같은 책을 미리 읽어보길 권한다.

 

 

 

 

<나르시시스적 공상으로부터 깨어나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④-2

<나르시시스적 공상으로부터 깨어나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④-2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잘못에 대해서는 집착하지 말고 반성하자

 

?‘틀리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를 잘 검토해보면 그것 자체가 교만임을 알 수 있다. 자기 자신이 틀리지 않을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틀렸다는 것 자체에 대해 그리도 분노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자기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 잘못을 계속해서 반복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잘못을 수용하려다보면 그 잘못을 끊어내지 못하게 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이와 같이 잘못을 했을 때 피해야 하는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가 있다. 하나는 그 잘못으로 인해 너무 화가 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너무 느슨하게 ‘그럴 수도 있지 뭐’로 용인하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화를 내면 다시 그런 일을 하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기는 하지만 너무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다른 사람의 실수에도 상당히 경직된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렇다고 너무 느슨하게 어떤 실수에도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해.’ 하면서 용인해버리면 반성이 안 되어 다시 동일한 잘못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 양 극단의 태도 사이에서 적정한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화내지 않으면서 잘못의 내용만을 깊이 의식해야 한다. 잘못을 했을 때 그것이 잘못임을 깊이 의식하고 다시 이 잘못을 하지 않으려면 어떠한 점을 조심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한 후 다시 하지 않도록 조심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이 좋다. 자책이나 후회를 하지 말고 반성을 하자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어떤 문제가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문제와 어떻게 적절하게 관계설정을 할 것인가이다. 문제없는 사람은 없으니 나는 나의 문제와 함께 잘 살아내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려 들지 않게 되고 대신에 완전하거나 자족감을 주는 이미지에 자신을 투사하려고 애쓴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게 되기 때문이다.

완전하거나 자족감을 주는 이미지에 자신을 투사하려고 애쓴다는 것은 완전하거나 자족감을 주는 이미지를 자신의 마음 안에 심어놓고는 자신이 그 이미지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자꾸만 확인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잘났다’는 전제에 매여 자신의 열등한 부분을 보지 않기 위해 타인의 열등한 부분을 찾아내고 타인을 아래로 쳐다보는 태도를 취하며 안심하려 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참으로 슬픈 시도이다. 누구와 비교해보아도 다른 사람에게는 나보다 잘난 부분이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약점은 언제나 발견되게 마련이라 이는 영원히 성공할 수 없는 시도이다. 이러한 시도는 스스로를 소외시킨다. 이는 결국 자신의 진짜의 모습을 볼 용기가 없어서 자꾸만 허상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으면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게 된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으면 자신이 잘났음을 확인해야만 안심하는 심리구조를 가지지 않게 된다. 그러니까 나르시시르적 공상에 매인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스스로를 열등하게 느끼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자신의 진실에 접근할 자신이 없는 사람이 나르시시스적 공상에 지나치게 빠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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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ho and Narcissus-John William Waterhouse

John William Waterhouseⓒko.wikipedia.org

자신의 단점을 볼 수 있는 용기를 가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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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건강한 자기애를 가진 사람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의 단점을 무시하지 않는다.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함께 볼 용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단점을 볼 용기가 없어서 스스로에게 나르시시스적 허상을 자꾸만 덧씌우려 하지 않는다.

건강한 자기애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수용해 장점은 유지하고 단점은 극복하려 노력하지만 그러한 단점을 가진 자기를 혐오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들은 자신의 단점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단점을 보지 않으려 너무나 무의식적으로 노력하게 되고 자기가 원하는 자기상을 유지하기 위해 정신적 에너지를 과도하게 사용하게 된다. 나르시시스트들은 자신의 단점을 볼 용기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의 단점과 화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사람들은 싫어한다. 오히려 자신의 단점과 잘 화해하는 사람을 멋있다고 느낀다. 누군가가 단점을 가지고 놀림거리로 삼아도 “그래! 나 그런 단점 있어! 그게 뭐 어때서? 단점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의 당당한 태도를 취하면 그 사람을 멋있게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쪽에서는 별 말 없이 던진 말인데도 그 말에 열등감을 느끼고 피해의식을 가진 반응을 보이게 되면 그런 사람을 대하는 것이 불편해지고 힘들어진다. 자신의 단점을 당당하게 수용하는 사람은 멋있게 느끼게 되지만 자신의 단점에 주눅들어하고 수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 사람이 오히려 더 우스워보이게 된다.

인간이란 존재는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점을 줄이고 장점을 확대해나가는 것뿐이다. 그런데 나르시시트들의 경우는 그럴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진실된 자기를 만나지 못하고 거짓된 자기상에 매달린다. 그래서 타인이 자신의 문제를 지적하면 받아들이지 못하고 건강한 자기애를 가진 사람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하고 힘들어하게 된다.

열등감에 시달린다는 것은 내가 우월해야 하는데 우월하지 못해서 화가 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람이 잘 하는 부분과 내가 잘 하는 부분은 달라. 그 사람이 잘 하지만 내가 못하는 부분도 있고 그 사람이 못하지만 내가 잘 하는 부분도 있는 거야. 내가 잘 하는 부분이 없다면 지금부터 발전시키면 돼! 걱정한다고 해서 내가 발전하는 것은 아니니까 걱정하는 데에 시간을 쓸 필요는 없어. 모든 것을 잘 할 수는 없는 거야. 완벽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야.’의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만약에 자신이 나르시시스적 공상에 시달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이 문장들을 핸드폰에 저장해놓고 하루 한 번씩(혹은 자신감이 떨어질 때마다) 거울을 보며 자기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현대는 우리에게 나르시시스적 공상을 가질 것을 권유한다. 소중한 나를 위해 물건을 소비하라고 속삭인다. 성공이 전부라고 부추긴다. 그러나 성공은 소수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한 실패자로 낙인 찍혀 살아간다. 무한경쟁의 사회에 살아가면서 우리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사회적 인정을 받기는 어렵다. 그래서 원하는 만큼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하는 우리는 사회적 인정을 받는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그 나르시시스적 공상을 충족시키기도 한다.

사생팬이니 이모팬이니 하는 것은 모두 그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현실의 자기는 너무나 초라하지만 내 대신 내가 받고 싶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주는 그 사람이 있어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기 힘들다. 그 스타와의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대리만족이기 때문에 그러한 행동이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누구나 어느 측면에서는 못났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잘난 면을 잘 발전시켰을 뿐이다. 그 사람에게 못난 면이 전혀 없다는 착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나에게도 못난 면이 있을 수 있고 타인에게도 못난 면이 있을 수 있다. 존경하고 싶은 사람의 결여에 너무 마음 다칠 필요도 없고 나 자신의 못난 면에 너무 절망할 필요도 없다. 누구나 다 어느 만큼은 못났고 어느 만큼은 잘난 것일 뿐이니까 말이다.

다른 사람을 열등하다고 평가해야만 나 자신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타인과 나의 각각의 유일무이한 존재 가치를 인정해주면 남과 나를 동시에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남과 나는 다르기 때문에 타인의 독특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나의 독특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의 독특성과 타인의 독특성을 그 자체로 존중해주면서 나 자신은 물론 다른 이들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자. 그래서 자기 자신과 타인에게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되자. 그러면 옆 사람들이 나의 미소를 되받아 주어 행복해질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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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의 <사당동 더하기 25>[철학자의 서재]

조은의 <사당동 더하기 25>[철학자의 서재]

?오상현(숭실대학교 강사)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나는 스댕 요강과 1986년을 기억한다”

 

우연한 기회에 <사당동 더하기 25>(조은 지음, 또하나의문화 펴냄)라는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난에 대한 스물다섯 해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나타내듯, 사회학자인 저자가 바라본 25년 가난의 기록들을 그림을 그리듯 잘 표현했습니다. 서평을 쓸 생각에 책을 읽다가 계획을 바꿨습니다. 사당동 사람들은 저자의 연구 대상이기 이전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제 자신에 대한 기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서평은 서평이 아닙니다. 그저 어린 시절의 지독한 가난을 기억하는 한 젊은이의 고백입니다.

 

“엄마랑 아빠는 진짜 힘들게 살았다. 너희 두 남매만 집에 남겨두고 일하러 갈 적엔 마음이 정말 …….” 사당동 시절을 떠올리던 엄마는 눈물부터 흘린다. 이제는 아줌마보다 할머니에 가까워진 이 여인의 눈물 앞에 나는 말을 잃고 말았다. 애당초 인터뷰를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사당동’은 한숨과 눈물의 다른 이름일 테니까.

 

사당동 더하기 요강

 

▲ (조은 지음, 또하나의문화 펴냄). ⓒ또하나의문화

▲ <사당동 더하기 25>(조은 지음, 또하나의문화 펴냄). ⓒ또하나의문화

부모님은 내가 네댓 먹었을 때 서울로 상경했다. 첫 번째 도박이었다. 농사를 지어 먹고 살던 시골에서 위로 형과 누이를 셋이나 두었고, 아래로 동생 둘을 두었던 아빠. 여기에 엄마와 자식 둘까지 거두어 먹이려면 농사일만으로는 답이 안 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택한 것이 서울행, 원래 잃을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 중대한 선택을 쉽게 하는 법이다. 그런 선택이란 사실 강요되는 것이니까.

사당동을 생각하면서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첫 번째 물건은 ‘요강’이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요강을 ‘방에 두고 오줌을 누는 그릇’이라고 정의하는데, 실제로는 똥도 눈다. 멀쩡한 화장실을 놔두고 왜 요강을 방에 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모르는 소리다. 요강을 방에 두고 쓰는 것은 화장실이 없어서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라는 사실. 우리 집은, 아니 우리 방은 (어차피 단칸방이었으니까) 반지하로 주인집을 떠받치고 있었는데 화장실은 그 주인집 마당에 있었다. ‘쾅’하고 대문 여닫는 소리가 주인집을 거슬리게 할까봐 해질녘이면 요강이 등장했다. 마치 해가 지면 나타나는 달과 같았던 은빛 스댕의 요강.

 

‘아이들을 방 안에 둔 채 문을 잠가 두고 일 나가는 경우도 흔했다.'(132쪽) 정말 그랬다. 맞벌이가 아니면 버티는 것조차 까마득하게 먼 시절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가시던 엄마가 잘 놀고 있으라고 손을 흔들며 문을 닫으면, 이내 ‘철컥’하고 자물통 잠기는 소리가 났다. 밤이 되어 다시 그 자물통 소리가 날 때까지, 잠긴 방 안에 남겨진 (둘의 나이를 합쳐도 겨우 열 살 남짓이던) 남매가 하루 종일 할 수 있는 일은 단 두 가지다. 아직 중천에 이르지도 않은 해가 어서 빨리 서녘으로 지기만을 바라는 일, 그리고 남겨진 밥상을 비우고 텅 빈 요강을 채우는 일이었다. 넘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당동 더하기 산동네

 

아빠는 사당동 대부분의 아저씨들처럼 ‘노가다’를 다녔다. 내게는 ‘목수’라는 전문직에 종사했었다고 포장했지만 사실 건설 현장의 일용직 노동자였던 셈이다. 여러분이 한 번은 가 보았을 ‘예술의 전당’이나 ‘동작대교’를 짓는 일에 참여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서울 사람들은 이처럼 사당동 아저씨들의 덕을 한번쯤은 본 셈이다. 나중에는 둔촌동에 있는 시장에서 경비 일을 했다. 경비라는 직업도 사당동 아저씨들이 많이 하는 일이었다. 어쨌든, 아버지의 망치질은 여전히 경이로운 수준이라 환갑이 넘은 지금도 망치질은 손수 한다. 나는 장성한 아들이지만 나서지 않는다. 핀잔 섞인 눈총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작은 효라고 믿기 때문이다.

 

“일터 옮기는 일은 이들의 자의적 선택처럼 보이지만 자의처럼 보일 뿐 타의일 때가 더 많다. 이들의 직장은 거의 영세 업체들이어서 수시로 주인이 바뀌거나 부도가 나서 문을 닫는다. 또한 어차피 오래가지 못할 직장이기 때문에 월급이 조금이라도 많거나 노동 조건이 좋은 곳이 나오면 주저 없이 옮긴다.”(153~154쪽)

 

▲ 이 책의 토대가 된 사당동의 한 가정에 대한 긴 관찰을 영상으로 풀어낸 다큐멘터리 (조은, 박경태 감독)의 한 장면. 철거촌의 현장. ⓒhttp://indiespace.kr

▲ 이 책의 토대가 된 사당동의 한 가정에 대한 긴 관찰을 영상으로 풀어낸 다큐멘터리 <사당동 더하기 22>(조은, 박경태 감독)의 한 장면. 철거촌의 현장. ⓒhttp://indiespace.kr

엄마는 사당동 대부분의 아줌마들처럼 다양한 일을 했다. 남성시장 어귀에서 양말 장사도 했었고, 겨울이면 산동네를 돌아다니며 찹쌀떡이나 메밀묵을 팔았다. 당시 엄마의 나이는 20대 후반이다. “찹쌀떡~ 메밀묵~”을 외치며 산동네의 인적 드문 밤길을 홀로 다녔을 엄마다. 떡과 묵이 잔뜩 담긴 나무통의 무게보다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삶의 무게가 더 했을 그때, 그녀를 지탱해준 것은 나와 동생의 얼굴이었을 것이다. 이후 엄마는 가발공장엘 나가 미싱사로 일했다. 남성시장에서 아빠랑 같이 포장마차도 했었단다.

 

동작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에 입학할 무렵이 돼서야 우리 남매는 감금에서 해방되었다. 어엿한 초등학생이 되었기에 알아서 문도 잠그고 학교에도 갈 수 있었다. 당시 사당동의 인구밀도는 상상을 초월해서 2부제 수업은 기본이었다. 오후반 수업을 받을 때, 한번은 집에서 놀다가 학교 갈 시간을 놓쳤다. 1학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내 울다가 어떤 삼촌이 학교에 데려다 주었다. 사실 지각을 한 것인데 사정을 들은 담임선생님이 없던 일로 해주었다. 그 덕에 나는 초중고 12년 동안 결석은 물론이거니와 지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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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동 더하기 교통사고

 

’86 아시안 게임’이 한창이던 그 때, 사당동의 하늘에도 색색의 애드벌룬이 둥둥 떠 있었다. (<사당동 더하기 25>의 저자가 연구를 시작한 시점이 바로 이때다.) 바람에 날리는 그 풍선을 따라가다 나는 생애 최악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다리뼈가 종아리를 뚫고 삐져나온 상황이었다고 들었다. 사고를 낸 아저씨는 이미 의식을 잃은 나를 안고 가까운 병원으로 뛰었다. 사당동 아이들은 늘 이런 사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시유지에 아무렇게나 지은 집들이나 축대는 언제 무너질지 아슬아슬했고, 구불구불 좁은 길에는 사각지대가 많아서 차 사고도 빈번했다.

 

가해자 아저씨는 적어도 양심적인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두 군데 병원에서 ‘다리를 절단해야만 한다’는 진단을 받았음에도 애써 나를 세 번째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 세 번째 병원이 고석주 정형외과다. (자리는 옮겼지만 지금도 이수역 근처에 있다.) 당시 원장선생님은 다른 곳과 달리 일단 수술을 해보겠다고 했단다. 만약 실패를 한다면야 어쩔 수 없겠지만 7살 아이의 다리를 어떻게 쉽게 자르겠냐며. 휴대폰도 없던 시절, 길가에 뿌려진 아들의 핏자국을 따라 정신없이 당도한 병원에서 부모님의 하늘은 무너졌을 것이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20년 뒤에 나는 42.195킬로미터 마라톤 풀코스를 5시간 15분 만에 완주했다.

 

아들에 대한 미안함이 컸던 모양이다. 석 달 넘게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내게 아빠는 컬러텔레비전을 선물했다. 그렇게라도 미안함을 표현하고 싶었으리라. 생애 첫 텔레비전을 나는 보물처럼 아꼈다. 지금 생각해보니 당시 우리 살림에 텔레비전이란, 상상도 못할 물건이었다. 그 신통방통한 텔레비전을 통해 ’86 아시안 게임’을 실컷 볼 수 있었는데, 내가 교통사고 당시를 정확하게 1986년으로 기억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 텔레비전은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 집에 있었다.

 

100일을 넘기고서야 나는 퇴원을 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큰 사고를 당하고 석 달 열흘 만에 나오는 것은 무리였을 테지만, 병원비가 만만치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시골에 살던 아주 어린 시절, 나는 감기로 오랫동안 앓았던 경험이 있다. 피를 토할 정도였으니 감기보다 더 심한 병이었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그저 나는 감기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병원비가 모자라 엄마는 하나뿐인 결혼 패물이던 금가락지를 내다 팔았다고 한다. 더 이상 내다팔 물건이 없는 가난한 자들에게 병원은 오래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텔레비전을 되팔 수는 없었을 테니까.

 

사당동을 떠나다.

 

철거를 앞두고 부모님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대부분의 사당동 사람들이 같은 고민에 놓였다. 또 다른 사당동으로 옮기거나 근처 위성도시로 떠나야 하는 그런 상황 말이다. 또 철거를 당할 바에야 근처 지방으로 옮기는 게 나을 듯 했다. ‘안양, 시흥 등 서울 근처 위성도시로 빠져나간 경우도 상당했다.'(147쪽) 우리는 안양을 선택했다. 두 번째 도박이었다. 모은 돈을 모두 털어 철물점을 차렸지만 장사가 잘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비록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그곳에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만 했지만 아빠에겐 ‘내 사업’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우리 가족은 작은 방 하나가 딸린 가게로 이사했다. 역시 단칸방이었고 화장실도 밖에 있었지만 적어도 주인집의 눈치를 보지 않고 화장실에 갈 수 있었다.

 

나는 이 시절을 행복으로 기억한다. 안양 호계동으로 이사한 뒤로는 늘 가게(집)엔 아빠와 엄마가 있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었고, “학교 다녀왔습니다.”라고 할 수 있었다. 가난은 마치 그림자처럼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것이어서, 그 뒤로도 엄마는 꽤 오랫동안 하나뿐인 그 방에서 이런 저런 부업을 했다. 미싱을 돌려 가발을 만들기도 했고, 어떤 때는 전자부품을 끼우는 일도 했다. 전자부품 끼우는 일은 나도 참 열심히 했었는데, 파란색 플라스틱 가루가 많이 날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일을 하고나면 꼭 그 고약한 가루들이 밥 위로 올라와서 밥을 먹다가도 몇 번씩은 집어내야 했다. 귀찮아서 그냥 씹어 넘긴 일도 많았지만.

 

4학년이 되던 첫 날, 그러니까 1990년 3월 2일에 호계동으로 이사했는데, 그해 2학기에 나는 부반장으로 당선되었다. 부반장이 되고 얼마 뒤가 내 생일이었는데 나는 무턱대고 우리 반 아이들을 죄다 초대했다. 심지어 담임선생님까지. 네 식구 편히 눕기도 어려웠던 단칸방에 그 많은 아이들과 선생님을 초대할 발상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없는 살림에 무슨 음식으로 생일상을 차리겠는가? 1990년 그 해 생일에 30명이 넘는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왔다. 물론 천사 같았던 담임 홍금숙 선생님도 오셨다. 그날 엄마와 아빠는 열 마리가 넘는 통닭 값을 대야 했지만 나는 그날 받은 생일 선물(주로 노트나 연필)을 중학교 다닐 때까지 썼다.

 

당시 친구들을 적어도 내가 단칸방에 산다는 이유로 놀리지는 않았었다. 생일 초대에 응해준 친구들 중에는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와 잘 어울렸다. 찻길 하나만 건너면 논밭이 펼쳐졌기에 개구리도 잡고 흙장난도 많이 했다. 이후 그곳은 수도권 신도시를 대표하는 ‘평촌’이 되었고, 나는 그곳에 새로 들어선 범계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가난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했지만, 얼마 뒤에 ‘부끄럽진 않아도 내세울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라고 고쳐 생각하게 되었다. 으리으리한 68평대의 아파트에 사는 친구 집에서 생일파티를 하고 나오면서였다. 단칸방으로 돌아온 그날 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 <사당동 더하기 22>의 한 장면. ⓒmovie.naver.com

▲ <사당동 더하기 22>의 한 장면. ⓒmovie.naver.com

 

다시 사당동으로

 

이듬해, 철물점으로 악착같이 돈을 모은 부모님은 의왕시 변두리에 21평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물론 융자를 많이 끼고 샀으며 오래도록 갚아야 했다. 어쨌든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처음으로 단칸방을 벗어났다. 그러나 여유도 잠시,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자본은 밑바닥 경제까지 잠식해나갔다. 철물점도 예외는 아니어서, 대형마트에 밀려 점차 손님이 줄었고 대신 부모님의 한숨이 늘어갔다. 내가 안양시청에서 공익근무요원을 하던 때, 우리는 충남 공주로 내려와 떡방앗간을 시작했다. 세 번째 도박이었다. 또 다시 제로에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다시 또 10년이 넘게 흘렀고, 떡방앗간은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목수였던 아빠의 빈틈없는 철저함과 악착같이 살아서 얻은 엄마의 넉넉한 마음이 근원이었다. 공주로 내려올 당시, 집안이 어려워 내놓았지만 팔리지 않았던 탓에 우리의 첫 ‘내 집’은 그대로 남았다. 나는 지금 부모님의 눈물과 피땀으로 얻은 그 집에서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가난의 냄새는 무어라고 표현하기 어렵다. 그 냄새는 어쩌면 찌든 때처럼 그들 삶 깊숙이 박혀 있어 좀처럼 씻어 내기 힘들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303쪽)

 

그렇다. 가난이란 좀처럼 벗어나기 어려운 굴레다. 지금 우리 가족이 이만큼이나 살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세 번의 도박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또한 아빠가 (비록 오른쪽 집게손가락 한 마디를 잃었지만) 건설현장에서 크게 다치지 않아서이고, 엄마가 (비록 미싱일 덕에 지금은 양쪽 눈이 성치 못하지만) 집을 나갔다거나 일수놀이에 돈을 떼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며, 우리 남매가 (비록 교통사고의 흉터를 훈장으로 남겼지만) 죽거나 큰 병에 걸리지 않아서이다. 억세게 운이 좋은 경우이기에 예외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예외는 예외일 뿐.

 

어떻게 우리 사회의 빈곤을 끊을 수 있을까?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되고 게으른 사람은 가난해 진다’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거짓이라는 것쯤은 이제 부연이 필요 없는 명제가 되었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 양극화는 가속화되고 있으며, 생활고를 이유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이웃들은 늘어만 간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우리 사회는 아직도 분배보다는 성장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다. 공자 이래로 2500년 동안 우리는 늘 분배보다는 성장을 꿈꾸었고, 그래서 늘 부족하다고 여겼으며, 더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흙에 묻혔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적은 것을 걱정하지 않고, 고르게 (분배)되지 못함을 걱정하며, 가난한 것을 걱정하지 않고 편안치 않을 것을 걱정한다.’고 들었다. 고르게 (분배)되면 가난함이 없어지고, 조화를 이루면 부족함이 없어지고, 편안하게 되면 (마음을) 기울일 일이 없어지는 법이다.”(孔子曰, … 丘也聞有國有家者, 不患寡而患不均, 不患貧而患不安. 蓋均無貧, 和無寡, 安無傾.)” (<논어>, ‘계씨’)

 

나는 내일도 모교 강의를 하러 가기 위해 사당동을 지날 것이다. 인연은 인연인가보다. 지독한 가난의 냄새도, 은빛 스댕 요강의 기억도 이제는 가물거리는 추억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이웃의 가난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때마침 지방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거짓말로 현혹하는 사람들을 걸러낼 시간이다.

 

 

<나르시시스적 공상으로부터 깨어나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④-1

<나르시시스적 공상으로부터 깨어나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④-1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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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로 메이(1909~1994), 미국의 실존주의 상담사ⓒLearnHub.com

롤로 메이(1909~1994), 미국의 실존주의 상담사ⓒLearnHub.com

마음속 깊이 진실로 자기를 아끼는 사람은 겸손하게 행동하는 데 반해 마음속에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자만심이라는 위안을 필요로 한다. – 롤로 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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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기를 원한다. 자신이 하루 학교를 가지 않으면 친구들이 모두 전화를 해대며 나를 걱정해주기를 바란다. 자신이 하루 회사를 가지 않으면 그 다음날 출근했을 때 사람들이 모두 내가 없어서 일을 처리할 수 없었다면서 내가 없으면 회사가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하루 학교를 안 갔을 때 가장 친한 친구 한 명이라도 전화를 해주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루 회사에 결근했을 때 업무내용 확인차 전화 한 번 오고 다음 날 출근했을 때 멀쩡히 어떻게 어떻게 처리했노라고 전달해주는 것으로 끝이다. ‘나여야 한다.’고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세상은 ‘너가 아니어도 별 상관은 없어.’의 태도이다.

나는 세상의 일부다. 그런데 세상의 일부인 나는 세상이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불평하곤 한다. 이는 나의 생각의 폭을 넘어서는 세상이 나의 생각의 폭 안에 들어 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세상은 늘 나의 생각의 범위를 넘어서게 되어 있다. 나같은 사람이 수십억 명 모여서 만들어내는 곳이기에 세상은 늘 나의 생각을 벗어난다.

그래도 옳고 그름이라는 게 있지 않냐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물론 인간다움을 저해하는 모든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인간다움이 어떠한 것이냐에 대한 합의는 어렵다. 여기서 상대주의를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그 옳고 그름도 따지고 보면 내 입장에서의 옳고 그름일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다움의 가치를 존중한다는 원칙은 유지하면서 그 방법론과 관련해서 너무 자기 방식을 고집하려다 보면 세상을 나의 폭에서 제한하려는 우를 범하게 될 가능성이 높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세상은 나의 상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많고 많은 변인들이 복합적인 작용을 일으키는 곳이기 때문에 내 눈에 옳은 것이 진짜 옳다는 보장도 없고 내 눈에 옳지 않은 것이 진짜 그르다는 보장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내 수준에서 인간다움의 가치를 높이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내가 생각한 방식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에 지나치게 스트레스 받고 세상에 대한 원한을 가지는 것은 나 자신에게도 세상에도 좋은 일이 아니다. 내가 세상의 현실의 복잡한 변인을 다 파악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즉 나의 생각의 폭이 좁기 때문에 세상이 내 생각대로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나의 좁은 생각의 폭 안에 세상이 들어온다면 그 세상은 나만 자유롭고 다른 모든 사람의 자유는 억압되는 곳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상이 내 생각대로 되어야 한다는 전제는 사실 상당히 자기중심적인 태도에서 가지게 되는 전제이다. 그런데 인간 누구나 가지게 되는 전제이기도 하다. 세상을 원망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려면 이 전제로부터 놓여 나야 한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 전제로부터 얼마나 빨리 졸업하느냐의 문제만 남아 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다 내 생각대로 움직여주길 바란다면 나는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박탈하고 싶어 하는 셈이다. 그래서 라이프니츠는 이 세상을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고 한 것 같다.

생각해보라. 모두의 자유를 존중하려면 이러한 모습의 세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에 조물주가 계시다면 그 조물주는 이 피조물들의 자유를 지나치다싶게 인정해주는 조물주이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의 자유의지까지 인정해주니 말이다. 원칙적으로 누군가의 자유의지가 다른 누군가의 자유의지를 제한할 수 없게 만들어놓지 않았는가 말이다. 물론 세상을 사는 인간들이 이러저러한 사회제도로 누군가의 자유의지는 쉽게 실현되도록, 누군가의 자유의지는 쉽게 실현되지 않도록 구조화해놓기는 했지만 말이다.

여하간 분명한 것은 나는 세상의 일부고 세상과 나를 비교해볼 때 극히 미미한 변인일 뿐인 나의 마음에 맞게 세상이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내 맘 같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스스로에게 되뇌자. ‘세상은 나보다 큰데 어떻게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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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사고’에 빠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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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것이 내 마음대로 되었으면 좋겠고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나를 귀하게 여겼으면 좋겠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잘 되었으면 좋겠다. 이것이 누구나 가지는 실현될 수 없는 희망이다. 나는 이를 ‘100% 사고’라고 부른다.

우리는 100%를 바란다. 한 명이라도 나를 싫어하는 것 같으면 얼마나 괴로워지는가를 생각해보라. 나는 세상 모든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세상 모든 사람은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는 것이 인간의 심리이다. 심리학에서 비합리적 전제라고 정리해놓은 것 중에 특히 중요한 것에는 다음 4가지가 있다.

1. 인간은 모든 사람에게서 항상 사랑과 인정을 받아야만 한다.

2. 인간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고 유능하고 성취적이어야 한다.

3. 어떤 사람은 악하고 나쁘며 야비하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비난과 저주와준엄한 처벌을 받아야만 한다.

4. 일이 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은 끔찍스러운 파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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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cissus, Caravaggio(1573~1610)

Narcissus, Caravaggio(1573~1610)

내가 모든 사람을 좋아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할 수는 없다. 그런데 분명히 그렇다는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가 나를 싫어하는 것 같으면 굉장히 신경이 쓰인다. 이런 내용을 강의하러 다니는 나 자신도 전체적으로 상당히 좋은 강의평가에 한두 명이 약간만 안 좋은 소리를 해도 그것이 마음에 걸린다. 우리의 마음 생김새가 그러한 모양이다.

물론 선천적으로 이러한 100% 사고에 잘 시달리지 않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100% 사고에 매이지 않는 사람보다는 매이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사실 이 100% 사고는 스트레스의 원천이다. 이 100% 사고만 하지 않아도 많은 심리적 부담을 덜어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80%에 만족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80%에 만족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는 잘 비판해내지 못하면서도 타인에 대해서는 잘 비판해낸다. 그런데 그 나의 비판력으로 타인을 보면 타인에게서는 약점을 엄청 많이 찾아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나는 내가 원하는 부분을 채워주지 못하는 타인을 보며 실망하게 된다. 자칫하면 우리는 80점인 사람을 -20점으로 대하게 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나의 마음에 안 드는 점에 주목하다보면 나의 장점은 모두 잊고 마치 내가 단점만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80%에 만족하자는 생각은 사실 사람들이 말하는 ‘팔자’라는 것을 통해서 얻은 깨달음을 통해서 할 수 있었다. 팔자(八字)라는 것은 나의 생년월일시에 오행, 즉 화수목금토의 다섯 종류의 글자가 모두 8개 정해지는 것을 말한다. 연월일시 4가지의 갑자에 해당하는 오행이 무엇이냐에 따라 나의 팔자가 확인된다. 그런데 이 오행의 다섯 글자가 골고루 들어가는 것이 좋은데 칸이 8개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8개의 글자밖에 가질 수 없다. 그래서 다섯 글자를 골고루 2개씩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렇게 팔자를 산출하는 방식에서도 인간에게는 아쉬운 부분,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팔자 산출 방식을 보며 ‘인간에게는 100%가 불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는 학문상의 객관적인 근거는 없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 생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은 타인에게는 100%를 요구하면서도 자신에게서는 약점을 보지 못하기 쉬운 존재라는 엄연한 사실 때문이다. 인식의 편향성에 따라 자신은 100%가 아니면서도 타인에게 100%를 요구하게 되면 인간관계에서는 갈등만 커질 수밖에 없다. 서로 참으로 이상한 사람이라며 상대방의 단점에만 골몰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 야스퍼스(Jaspers)의 말대로 타인이 신이나 성자 같아야 한다는 본능적인 요구는 모든 관계를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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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괴롭히는 완벽에의 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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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에의 허상은 늘 우리를 괴롭힌다. 만약 스스로에게 어떠한 부족함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린다면 우리는 혹시나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끝없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이 잘못된 전제가 우리를 고통의 나락으로 빠뜨리는 것이다.

언젠가 집근처 골목을 지나면서 수도 없이 틀리는 피아노 연주를 듣게 되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니 틀리는 부분이 상당히 줄어들게 되었다. 더 세월이 지나니 이제는 몇 개의 음만 빼고는 틀리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드디어 전혀 음이 틀리지 않는 연주를 기대해볼 수 있게 되었는데 결국 나는 완벽한 연주를 듣지 못했다. 하도 연습하는 것을 듣다 보니 나도 같이 연습하는 심정이 되었고 완벽하게 연주되는 것을 꼭 한 번 들어보고 싶었지만 연주하는 사람이 꼭 한두 음에서 틀리곤 했다. 한 두 음만 틀리지 않으면 되는데 틀리고 말 때에는 듣는 내가 다 안타까운 심정이 되곤 했다.

ⓒhttp://anngabriel.egloos.com/

ⓒhttp://anngabriel.egloos.com/

그 엄청난 연습량을 목격하며 도대체 피아니스트들은 평생 동안 완벽한 연주를 얼마나 하게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피아니스트들이 곡을 연습할 때 틀리지 않고 연주하는 경우보다는 틀리면서 연주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런데 틀릴 때마다 틀린다고 괴로워한다면 그 사람은 제대로 연주 연습을 하지 못할 것이다. 연습과정에서 수많이 틀려봐야 연주회에서 틀리지 않고 연주해낼 수 있을 것이다. 설사 당일에 틀리지 않고 연주를 해도 연주한 당사자는 음은 틀리지 않았지만 어느 부분에서 연주기법 상의 실수가 있었다면서 또 괴로워하겠지만 말이다. 삶이 이렇다.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도 어딘가에서는 문제가 발생한다.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와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의 확률게임은 0.0001 vs 99.9999의 게임인 것이다.

인생이 그런 것 같다. 수도 없이 시도하고 결과를 마음에 안 들어하고, 그러면서도 계속 시도하고, 그러다가 어느 날 자기가 원하던 것과 조금 비슷한 결과를 얻게 되면 어느 정도 기뻐하고, 그러면서도 또 아쉬워하고…. 완벽한 연주 한 번을 하기 위해서 연주자는 수없이 틀린 연주를 하며 그 틀린 음들을 견뎌야 한다. 틀린다는 사실 자체를 견뎌야 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완전히 틀리지 않게 연주하기 전에는 연주 자체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면? 그것은 실질적으로 연주를 아예 하지 않겠다는 소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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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③-2

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③-2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잘 설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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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anyone’의 한 명에 불과한 존재로 여겨지는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쓰며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게 된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야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단 비교를 시작하면 우리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인간마다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나 나보다 나은 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이런 면에서 나보다 뛰어나고, 저 사람은 저런 면에서 나보다 뛰어나다. 항상 내게 없는 능력이 다른 사람에게 있기 마련인 것이다.

이런 식의 비교 속에서 자꾸만 자신에게 절망하게 되면 화가 나게 되고 그러다보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미워지고 인간 자체에 대한 혐오를 느끼게 된다. 자신에 대한 실망은 자신에 대한 분노로 바뀌고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자기 자신을 학대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은 자신의 주변 사람들도 학대하는 방식으로 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를 공격하는 사람이 자기 주변 사람들은 공격하지 않겠는가? 알코올 중독이 되어버린 가장은 자신에 대한 실망이 지나쳐서 중독자가 된 것이고 중독자가 되어 다시 또 가족들에게 인정을 못 받게 되니까 가족들을 폭력으로 학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사회구성원들을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시키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한 사회구성원의 행복도는 낮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경제 순위는 13위인데 행복체감순위가 97위라는 것은 우리가 경제적 요인외의 다른 측면에서 사회구성원의 행복도를 상당히 저해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순위를 매기는 경쟁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가시적인 성과는 단기적으로 나타나지만 이 과정에서 바로 행복이 희생되고 있는 것이다.

꾸미기_유럽2013.01 192비교는 인간을 불행하게 한다. 이렇게 비교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확인받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만 현대인들은 자신의 고유성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쓸 데 없이 타인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빠진다. 그러나 A에게는 A의 장점이 있고, B에게는 B의 장점이 있으며, 나에게는 나의 장점이 있는 법이다. 즉 우리 모두 각자의 장점의 내용은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비교를 부정확하게 하면서 각자의 장점을 제대로 인식해내지 못해 불행에 빠져버리곤 하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된다.

우리는 타인의 장점과 나의 장점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장점과 나의 단점을 비교하고서는 열등감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즉 ‘그 사람에게는 이런 장점이 있고 나에게는 이런 장점이 있구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은 그걸 잘 하는데 나는 왜 그걸 못하지?’의 의문을 가지는 것이다. 그 사람의 장점과 나의 장점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사람의 장점과 나의 단점을 비교하니 일이 더 커진다.

내가 모자라는 부분에 신경을 쓰다보면 그 부분에서 잘하는 남이 더욱더 눈에 띄게 마련이다. 잘나고 싶고 잘 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남이 잘 하는 게 눈에 잘 보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교를 하게 될 때는 자신이 그 사람의 장점과 나의 단점을 비교하는 식으로 잘못된 비교를 하지는 않는지, 그 사람이 가지지 않은 장점을 내가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를 제대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잘못된 비교 속에서 열등감에 시달리는 고통을 줄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열등감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내가 어디에 열등감을 느끼는가 하는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는 정보이다. 어차피 열등한 면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으니 나는 나의 열등한 면을 열심히 바꿔나가면 되는 것이다. 이미 생긴 열등감이라면 그 열등감을 분석해서 자신의 약점을 파악하고 자신을 계발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것이 열등감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이다. 열등감을 느끼느라 고통스러웠는데 그 고통을 통해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다면 정말 손해 보는 것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아들러 역시 열등감을 ‘창조성의 원천’으로 보았다. 열등감을 느끼기 때문에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나에게 단점이 있어서 큰 일이다.’라고 생각하면 문제는 아주 복잡해진다. 나에게는 나의 성향이 있고 그 성향이 나쁘게 발휘되는 때는 있을 수밖에 없다. 성향이라는 것이 좋게만 발휘되고 나쁘게 발휘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은 날씨가 변하지 않고 늘 똑같기를 바라는 것처럼 허황되다. 우선 나의 성향은 성향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나는 ~~한 사람이다.’라는 선언을 스스로에게 해야 한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성향이 좋은 방향으로 발휘되도록 발현방식을 조절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단점이 있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과도한 비약을 해서는 곤란하다. 누구에게나 성향이라는 것은 있고 그 성향이 나쁘게 발휘될 때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젤름 그륀(Anselm Grun) 신부

안젤름 그륀(Anselm Grun) 신부

안젤름 그륀(Anselm Gr?n) 신부의 말대로 자신의 가치를 느낀다는 것은 모든 종류의 약점과 한계 속에서도 자기만의 고유한 가치를 의식함을 의미한다. 그는 『자기 자신 잘 대하기』라는, 우리에게 위로를 많이 주는 책에서 “나는 나에게, 내 실수와 약함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과 공감한다. 나는 그것들에게로 향한다. 그것들은 있어도 된다. 사랑하는 이의 눈길 아래에서 그것들은 변화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나의 약점이 ‘있어도 된다’는 것은 중요하다.

약점이 없는 사람은 없다. 나에게는 이러한 약점이, 타인에게는 저러한 약점이 있을 뿐이다. 약점의 종류가 다를 뿐 약점 자체가 없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만 크게 보고서는 타인들이 모두 자신의 약점만 쳐다보며 비난할 것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그러나 타인들은 그렇게까지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내가 나의 약점에 당당한 태도를 취하면 타인도 나의 약점을 더 이상 물고 늘어지지 않는다. 내가 나의 약점에 신경 쓰면 오히려 그 태도가 타인의 공격성을 자극해 계속 공격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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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치는 내가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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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를 듣는 대부분의 사람은 위안을 얻는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니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보면 사실 근거가 없는 얘기이다.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또 철학은 삶의 범위를 벗어난 것에 대해서는 유의미하게 언급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철학적으로 따져 묻는 것은 별로 적합한 일이 아니기는 하다. 철학은 따져들 수 없는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다루어서도 안될 것이다.

17살의 쇼펜하우어는 “이 세상은 선한 존재자의 작품일 수 없다!”고 일기장에 썼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깨달음을 전제로 해서 이 고통의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철학적으로 고민했다. 살다보면 조물주의 악취미에 대해 절망하는 때가 있다. 왜 존재하게 해서 이 고생을 하며 살게 만드느냐는 원망이 솟구칠 때이다. 사실 ‘세상의 이 모든 것이 왜 존재하는가?’, ‘왜 무(無)가 아니고 유(有)인가?’는 철학의 제1질문이다. 이 역시 답을 유의미하게 낼 수 없는 문제이지만 인간이면 묻게 되는 질문이다. 삶의 이유 자체에 대해서는 철학이 주는 답이 없다. 물론 철학자들은 답을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이러저러한 이유를 찾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이유가 아니기 때문에 나의 삶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쇼펜하우어의 경우에는 20대 초반에 삶은 불쾌한 것이라고 결론짓고 ‘불쾌한 인생에 대해 사색하며 지내기로’ 결정한다. 수많은 철학자들의 철학을 접하다보면 그들의 철학 자체가 이유 없이 시작된 인생을 자기 나름대로 유의미하게 살다 가려고 노력한 흔적임을 느끼게 된다. 각자의 성향에 따라 체계적이고 정밀한 철학을 구축하기도 하고 문학적이고 울림이 있는 내용의 철학을 구축하기도 하지만 설명되지 않는 인생을 자기 나름대로 설명해내려는 그 노력이 가상하게(!) 느껴질 때도 많다. 여하간 분명한 것은 자기 삶의 이유는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 인생의 색깔은 자기가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평생 빈민운동에 헌신한 아베 피에르(Abbe Pierre)신부님

평생 빈민운동에 헌신한 아베 피에르(Abbe Pierre)신부님

아베 피에르 신부님은 인간의 삶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고 허락된 짧은 순간이라고 하는데 인생에 대해 이보다 더 맞는 답은 없는 것 같다.(지금 나는 논리적 설명없이 비약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비약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사랑할 줄 아는 존재로 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인 논리를 펴는 편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 자체에게서 사랑이 자연스럽게 저절로 나오지는 않는다.

사랑은 자기중심적 논리를 극복하는 것이다. 물론 에로스에 입각한 남녀 간의 사랑의 경우 일정 기간 스스로 이 자기중심적 논리를 파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당사자 중에 한 명이라도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소홀한 것 같이 느끼게 되면 그 사랑이 아주 쉽게 파괴되어버리고 마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 사랑에도 계산이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는다. “내가 너를 어떻게 길렀는데!”라는 말은 내가 손해를 보았다는 비명이다. 이 역시 사랑이 인간에게서 자연스럽게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그래서 주고도 잊어버리는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인간은 준 것과 받은 것 중 준 것을 훨씬 더 잘 기억하는 편파성의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는 능력과 노력이 요구된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능력과 노력, 그리고 상대방의 고유성을 수용해주고 인정해주는 능력과 노력, 즉 전체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력과 인내력이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관계가 부부관계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남녀간의 사랑이기 때문에 주고 받는 대차대조표를 많이 신경쓰게 되고 성별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는 데도 상당한 노력이 든다. 또 부모 자식처럼 본능적으로 연결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많은 노력이 든다.

인간은 누구나 손해에 민감하다. 그런데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는 사랑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상대방이 나 때문에 손해본 부분은 의식하지 못하면서도 내가 상대방 때문에 손해본 부분은 너무나 잘 의식하고 기억하는 인간의 인식구조상 사랑을 지속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1등 신랑감, 1등 신부감을 거론하는 데 부모의 유산까지도 감안하는 시대에,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느끼지조차 못하겠다는 시대에 자신이 손해 입는 것을 뻔히 목도하면서 상대방을 참아주는 일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면 이혼률이 높아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지금 대학생들을 보면 4명 중 한 명은 부모님이 이혼을 하신 상태에 있다. 나는 학생들에게 자주 말한다. 이혼한 부모님을 원망하지 말라고 말이다. 내가 결혼생활을 15년 넘게 해보니 이혼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이다. 이혼이 자연스럽다. 자신이 잘 하고 상대방이 못한 것만 기억하고 상대방이 잘 한 것과 내가 잘못한 것은 의식하기 어려운 인간의 인식구조상 이혼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오히려 결혼이 참으로 부자연스럽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상대방의 생활습관과 가정환경 그리고 상대방 부모님의 비합리성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방의 존재 자체의 어두움 등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인내하며 결혼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말한다. 이혼한 부모님을 원망하지 말고 결혼을 유지하고 계신 부모님을 존경하라고 말이다.

꾸미기_DSCN0699인간이 정말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인간을 가장 편안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 사랑임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노래는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그런데 기실 사랑받는 가장 빠른 방법은 사랑을 주는 것이다. 당신은 주변 사람중에 누구를 가장 사랑하는가? 아마도 당신을 가장 사랑해준 사람일 것이다. 설사 당신이 괴롭힐지라도 당신에 대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당신조차 당신의 가치를 의심할 때에도 당신을 믿어주는 사람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사람을 두고 ‘가치가 있네 없네’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누가 감히 인간의 존재 가치를 결정하겠는가? 나의 존재가치는 나만 결정할 수 있다. 내가 가치 있게 살려고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 매일 필요가 없다. 사회가 인간의 가치를 등급화해서 그렇지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만든 돈에 다시 인간이 노예가 되어버리는 아이러니한 현상 속에서 인간은 타인을 인간으로 대우하기보다는 나에게 얼마만큼의 화폐를 제공해줄 수 있는 존재인가를 계산해서 ‘가치 있는 존재/가치 없는 존재’로 나누어 대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모두는 자신의 가치에 대한 의심을 경험하게 된다. ‘내가 얼마나 소비할 수 있는가’로 스스로의 가치를 가늠하는 체제에서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의심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나의 가치를 내가 믿고 내가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가치 없는 존재란 없다. 존재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다. 존재하고 있는 나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나의 가치에 대한 판단을 타자에게 맡겨버려서는 안 된다. 나의 가치는 내가 나 스스로를 믿고 나를 만들어나가는 데서 생기고 유지되는 것이므로 내가 만들어가기 나름이다. 나는 내가 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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