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 ⑯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4-5(341a~ 342e) : 소크라테스, 기술 일반의 특성을 토대로 트라쉬마코스를 비판하다.

(전 시간에 이어 계속)

 

* 전 시간 342a-b의 내용은 341d에서 “그 각각의 기술에도 그 기술이 최대한 완벽하게 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이익이 있나요?”라는 소크라테스의 물음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을 담고 있다. 이 부분은 엄밀론에 입각하여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기술 자체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엄밀한 의미의 기술 자체’를 나타내는 아래와 같은 표현들 즉 ‘그 자체’αὐτὴ, ‘온전한ὅλος 것’. “틀림없는 것ὀρθὴ οὖσα, ‘아무런 훼손도 없는 것’ἀβλαβὴς, ‘순수한 것’ἀκέραιός이란 말들은 완전자로서의 형상eidos 개념을 연상시킨다. 물론 이 부분을 곧바로 형상에 대한 언급으로 연결시키기에 무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 시각에서 이 부분을 음미해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제1권이 단순히 전기 대화편의 성격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본격적으로 형상론이 제기되는 중기 대화편의 성격을 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곳에서 언급된 기술 자체를 형상론적인 시각에서 간략하게 한 번 음미해보기로 하자.

우선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의술 그 자체’αὐτὴ ἡ ἰατρική는 현실의 기술이 아니고 오히려 현실의 기술들이 기술로서 규정되는 근거이자 본질 즉 자기 동일자로서의 기술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런 결함poneria이나 과오hamartia가 없는, 탁월성aretē이 이미 구현되어 있는 완전자이며 그에 따라 어떤 것에 의존하거나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자체적이고도kata auto 순수하며akeraios 자족적인autarkēs 존재이다. 이에 반해 다만 그것을 분유(分有)metechein하고 있는 현실의 개별 기술들은 그 분유에 근거하여 비록 그 기술로는 불리어지지만 결함을 안고 있어 늘 다른 기술에 상호 의존하면서 끝없이aperaton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다. 요컨대 그것들은 원천적으로 자체 존재로서의 규정성peras을 획득하지 못한 채 가변적 계기들 내지 측면들만 가진 무규정자apeiron로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기술임’과 ‘기술 아님’ 즉 반대적인 것tounantion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존재 쪽 극단치인 동일성tauton에서부터 무(無) 쪽 극단치인 타자성heteron 사이에서 끊임없이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는 필연ananchē 속에 던져져 있는 것들이다. 이것은 이러한 기술들 내부에 존재 쪽 운동성과 무(無) 쪽 운동성이 생성과 소멸, 형성과 해체를 두고 무한 투쟁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완전자로서 기술 자체는 이미 본질로서 기술 대상의 이익을 미리 살피고skepsomenes 제공하여ekporiusēs 최대한 완벽하게 해주는 성질 내지 탁월성ἀρετῆ을 구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성질은 개별 기술들 내부에도 분유되어 있다. 이것은 개별 기술들 각각 내부에 자신의 탁월성을 향해 다가 갈 수 있는 능력dynamis이 가능성으로 이미 내재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문제는 개별 기술들이 그러한 내적 가능성을 어떻게 자각하고 있느냐이다. 철학이 요구되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철학은 존재 쪽 운동성으로서 영혼psychē의 힘을 강화시키는 기술이자 앎이다. 요컨대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자신 안에 앎의 능력이자 견인력으로서 참된 영혼이 자리함을 깨닫고 자체존재로서의 형상eidos에 대한 앎ἐπιστήμη을 변증술dialektikē을 통해 획득하여 개인의 정의로서 그 영혼의 탁월성을 구현해내고 동시에 나라의 정의로서 타자의 영혼의 탁월성을 구현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과 나라 모두 행복eudaimonia해지는 것이다. 철학자왕은 다만 그 철학의 공부와 정치적 실천의 극단에 서 있는 하나의 본paradeigma이자 지표인 것이다.

 

[342c]

*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언급을 토대로 의술이나 마술(馬術)ἱππικὴ 등 그 어떤 기술도 기술이 아닌 그 ‘기술이 관여하는 대상에’ἐκείνῳ οὗ τέχνη ἐστίν 이익이 되는 것을 생각한다고 말한다. 트라쉬마코스는 그 말에 동의를 표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이어서 기술들은 그것들이 관여하는 대상을 ‘관리하고 지배한다’고 말하자 마뜩치는 않지만 마지못해 동의한다.

*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가 ‘기술이 대상의 이익을 미리 생각하고 제공한다’고 말했을 때만 해도 뭔가 미심쩍기는 했지만 소크라테스가 예시하고 있는 기술이 병을 고치는 의술 또는 안전한 항해를 담보하는 키잡이 기술이라는 점에서 일단 동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기술이 대상을 관리하고’ἄρχουσί 지배한다’κρατοῦσιν고 말하자 그제에서야 소크라테스의 기술에 대한 예시들이 통치술을 염두에 둔 것임을 직감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논의가 자신의 동의를 토대로 진행되어 온 이상 그 또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342d]

*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별 다른 언급 없이 기술이라는 말 대신에 전문지식ἐπιστήμη(epistēmē)이란 말을 꺼내들어 ‘그 어떤 전문지식도 더 강한자의 편익을 생각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더 약한 자이며 제 관리하는 자의 이익을 생각하며σκοπεῖ 지시한다ἐπιτάττει’고 말한다. 그러자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기술이 결국 통치술임을 확인하고 마침내 대항을 시도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앞에서(341c) ‘엄밀한 의미의 의사나 키잡이를 이야기하면서 기술의 대상을 ’관리한다‘, ’통솔한다‘라는 말을 이미 사용했고 그 말에 트라쉬마코스도 동의했음을 환기시킨다.

 

[342e]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키잡이와 통솔자는 자신에게 이익이 아니라 선원이자 통솔을 받는 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미리 생각하고 지시한다는 점을 재확인한다. 이에 트라쉬마코스는 또 할 수 없이 동의하고 만다. 결국 엄밀한 의미의 기술이 통치술임이 드러난 이후에 전개된 소크라테스와 트라쉬마코스의 막판 줄다리기도 이렇게 소크라테스의 의도대로 마무리된다.

* 마침내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은 논의를 토대로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반대되는 결론을 내놓는다. 즉 ‘통치를 맡은 자는 자신이 통치자인 한 καθ᾽ ὅσον ἄρχων ἐστίν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생각하거나 지시하지 않고 통치를 받는 쪽 그리고 자신이 일해 주게 되는 쪽에τὸ τῷ ἀρχομένῳ καὶ ᾧ ἂν αὐτὸς δημιουργῇ, 이익이 되는 걸 생각하거나 지시한다’는 것이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마치 쐐기라도 박듯이 “그(통치자)가 말하는 모든 것도, 그가 행하는 모든 것도 그 쪽(시민)을 염두에 두고서 그 쪽에 이익이 되고 적절한 것을 염두에 두고서 말하고 행하오”라는 말로 이 부분에 대한 논박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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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밀한 의미의 기술과 관련한 지금까지의 문답에 대해 몇 가지 음미해보기로 하자.

 

1) ‘통치자는 자신이 통치자인 한’καθ᾽ ὅσον ἄρχων ἐστίν 이라는 말(342e)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치자’를 나타내기 위해서 반복해서 사용되는 표현이다.(cf. 341a) 이 말은 현실 통치자가 따라야 할 규범의 원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직분의 고유성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통치자가 통치자인 한에서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직분, 본분 이외에 다른 것을 수행할 수도 그리해서도 안 되며 만약 그 본분에서 벗어날 경우 그는 이미 통치자도 전문가도 지식인도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회적 직분들 혹은 개인의 영혼 내부에 있는 기능들 또한 자기의 고유한 직분과 기능을 온전하게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직분상의 고유성이 무너지면 그 개인은 물론 공동체도 결코 온전하지도 정의롭지도 못하다. 소크라테스의 엄밀론은 통치자를 비롯한 전문가의 직능상의 고유성을 규정함과 동시에 다양한 사회적 직분 내지 직능들의 적도(適度to metrion)를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2) * 소크라테스는 기술이 하는 일들을 표현하면서 다양한 말들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만 해도 ‘미리 생각한다’σκεψομένης(342a-b, 342c, 342e) ‘제공한다’ἐκποριούσης(341d-e, 342a) ‘관리한다’ἄρχουσί(342c-d), ‘지배한다’κρατοῦσιν (342c), ‘지시한다’ἐπιτάττει(342d-e) 등 여러 가지 표현을 쓰고 있다. 이 말들은 사실 일반 기술 관련한 일에 대한 표현으로는 다소 어색한 말들이다. ‘관리한다’, ‘지배한다’, ‘지시한다’라는 말이 대상에 대한 기술의 우위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특히 ‘지배한다’와 ‘지시한다’의 원어 κρατέω와 ἐπιτάττω가 강제와 명령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게다가 이 말들은 플라톤에게서 기술과 대상 간의 권력관계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자아낸다. 플라톤이 말하는 통치술은 대상인 시민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일종의 섬기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궁금증은 일반 기술에 대한 예시를 발판으로 통치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한 소크라테스의 주도면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진 것임이 밝혀지면서 어느 정도 해소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러한 표현들은 여전히 플라톤의 통치술과 어울려 보이지는 않는다.

* 그래서였을까? 플라톤은 흥미롭게도 그와 같은 강제와 우위를 함축하는 말들과는 꽤나 다른 그 반대를 함축하는 말들 즉 ‘미리 생각한다’σκεψομένης(‘관심과 사려를 다해 살핀다’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제공한다’ἐκποριούσης, ‘그 쪽을 염두에 둔다’πρὸς ἐκεῖνο βλέπων는 말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이 말들은 통치술이 대상인 시민을 지배하고 강제하는 위계상 우위의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시민을 위해 철저히 봉사하고 섬기는 기술임을 새삼 확인해준다. 그러나 이 또한 다른 궁금증을 자아낸다. 뭔가 앞서 사용한 표현들과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염두에 둔다’βλέπω는 표현은 타자에 대한 진지하고도 다함이 없는 관심과 걱정을 담은 시선(視線)으로서 하이데거(M. Heidegger)의 ‘돌봄과 염려’(Sorge) 개념까지 연상케 한다. 그렇다면 플라톤이 통치술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는 말들이 가지고 있는 위와 같은 이중성 내지 상충성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말들을 서로 상충되지 않고 서로 어울리는 말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플라톤이 말하는 통치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래와 같은 방법 밖에 없어 보인다. 즉 플라톤이 말하는 통치술과 관련한 관리와 지배, 지시라는 말들을 시민에 대한 섬김과 봉사, 이익을 담보하기 위한 정치적 집행 차원의 말들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그 말들을 기술의 대상으로서 시민의 이익을 위한 통치자의 적극성과 능동성을 보여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다.

* 결국 플라톤이 말하는 통치술의 성격은 실제로 그처럼 반대적인 요소를 엮는 방식으로 비로소 우리에게 제 모습을 드러낸다. 플라톤의 통치술은 그저 대상을 바라만 보고 있지 않다. 플라톤에게 있어 통치술은 수차례 반복해서 강조되고 있듯이 적극적인 관리와 지배의 기술인 동시에 대상에게 이익을 온전하게 제공하는 실행 능력이자 앎으로서 그 자체로 이미 선성(善性)τὸ ἀγαθὸν과 이타성을 본질적 속성으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아무리 엄격한 의미에서의 통치 기술을 말하는 것이라 해도 과연 현실에서 부분적이나마 그러한 능력에 준하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부모들이 다 그렇지는 않지만 부모의 행동 양태를 들여다보면 분명 그러한 능력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자식들을 가진 부모들은 하나같이 자기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돌보며 밤낮으로 늘 자식을 염두에 두고 있고, 자식의 이익이 되는 것을 미리 살피고 생각하며 자식을 위해 늘 퍼줄 생각만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또 부모는 이이들을 또 단속도 하고 지시도 하고 명령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플라톤에게서 통치자와 시민의 관계는 일상에서 부모와 지식간의 관계와 매우 유사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부모는 그러한 일들을 본능에 따라 자기 자식들에게 행하지만 플라톤의 통치자는 그것을 철저히 이성에 따라 타자들 즉 시민들 모두에게 행한다는 점이다. 부모의 ‘사적인 가정(家政)’은 본능에 기반하고 있지만 플라톤의 ‘공적인 국정(國政)’은 기술 즉 전문지식과 선의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이성적 사유와 실천의 힘을 생물학적 본능 수준의 힘조차 능가하는 힘으로 고양코자 한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발상은 근본적이고도 혁명적이다. 우리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가히 이성과 도덕의 화신으로 부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 이런 점에서도 많은 비평가들은 플라톤의 정치이론을 그 자체로 실현 불가능하고 비현실적인 이상으로 평가하고 그의 관념성을 비판한다. 특히나 앞서와 같은 플라톤 통치술의 특성들은 플라톤의 정치이론이 동양의 봉건적 정치철학의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폄하되는 주된 이유이다. 실제로 그의 통치술은 군왕과 백성의 관계를 부모 자식 사이로 여기는 동양의 성왕론 내지 왕도정치론과도 매우 유사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한마디로 부성주의(paternalism)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플라톤의 통치술은 대상인 시민들을 정치적 주체가 아닌 수동적 팔로우어로 설정하고 있고 정치이념에 있어 전체주의는 물론 철저히 전문가 주의, 소수 엘리트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비판은 현대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 매우 타당한 비판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현대 민주주의는 선한 정치에 대한 믿음 보다는 악한 통치에 대한 우려와 의심에서 출발하고 있고, 그에 따라 비록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는 해당 전문가의 역할이 존중될 지라도 유독 정치 영역에서만은 전문가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치 지도자로서 자신이 정치의 전문가라고 자칭하는 자들은 경계와 의심의 대상이 된다. 게다가 나라의 지도자로 자처하는 소수 엘리트 집단들의 독단과 아집 그리고 그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20세기의 비극적 정치 현실의 주범이자 근본 원인이었음을 고려하면 그 비판이 내포하는 플라톤 정치이론에 대한 혐오와 폄하 또한 충분히 이해가 된다.

* 그러나 플라톤의 통치자가 갖는 철두철미할 정도의 반성적 지성과 선의에 입각한 고도의 이타성과, 히틀러와 스탈린을 비롯한 20세기 독재자들의 무반성적 독단과 정치적 야욕을, 전체주의와 소수 엘리트들의 지배라는 잣대로 단순 등치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순수하게 텍스트에 기초해서 바라보면 그의 통치술은 시민들 각자의 고유한 본성과 그에 수반하는 다양한 욕망들을 현실 조건으로 전제하고 그것들의 조화와 그것을 통한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비해, 현대 자유주의 정치이론은 근대 이후 자본주의적 인간관이 유포한 인간 본성의 획일성 즉 모든 사람들의 욕망이 이기적이라는 전제를 두고 그들의 배타적 갈등을 다수의 견해를 기준으로 조정하고 타협하는 데 그 목표를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욕망이 화폐로 환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극히 획일적이며 물신주의적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인간 욕망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플라톤이 다원주의적이고 화폐라는 물신이 최고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는 현대 자유주의가 오히려 전체주의적이다. 하기는 플라톤이 전제하고 있는 인간 본성 자체의 다양성을 부정하고,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당연한 전제로 받아들이면서, 그 획일적인 이기적 본성의 효율적인 구현을 위한 수단적 욕망의 다양성만을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마치 외눈박이처럼 그렇게 비판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러한 점에서도 현대 자유주의 정치철학이야말로 근대 자본주의가 그 욕망을 증폭시키는 기재로 고착된 이래 패배주의적이고 무반성적인 현실 안주의 정치철학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 이런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플라톤의 통치기술에 대한 사유는 오늘날 민주주의가 기반하고 있는 또 다른 측면 즉 자연법의 이념과 현대 민주주의가 과제로 삼고 있는 정치적 주체들의 지성화와 정치권력의 도덕성 그리고 인간의 본성 그 자체의 개별적 고유성과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철학적 기초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도 소크라테스가 논박을 마무리하며 언급한 말 즉 “그(통치자)가 말하는 모든 것도, 그가 행하는 모든 것도 그 쪽(시민)을 염두에 두고서 그 쪽에 이익이 되고 적절한 것을 염두에 두고서 말하고 행하오” καὶ πρὸς ἐκεῖνο βλέπων καὶ τὸ ἐκείνῳ συμφέρον καὶ πρέπον, καὶ λέγει ἃ λέγει καὶ ποιεῖ ἃ ποιεῖ ἅπαντα.라는 말은 트라쉬마코스는 물론 오늘날의 마키아벨리스트들의 주장까지 완전히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의 통치 모럴의 표상이자, 정치 지도자들이라면 그 누구라도 반드시 가슴에 안고 있어야 할, 통치자의 도덕성과 언행일치를 담은 신성한 강령이 아닐 수 없다. 플라톤의 정치이론의 핵심이 다름 아닌 정치권력의 지성화에 있고 현대 민주주의 또한 그것을 핵심과제로 안고 있는 한 오히려 현대 민주주의는 플라톤을 반성의 시금석으로 새롭게 뒤돌아보지 않으면 안 된다.

4) 342d에서 소크라테스가 대항을 시도하는 트라쉬마코스의 동의를 얻기 위해 앞서 엄밀한 뜻의 의사는 ‘몸을 관리하는 자’σωμάτων ἄρχων임을 합의했다고 말을 하고 트라쉬마코스도 그에 동의하고 있는데 앞서 합의한 부분(341c)과 비교해보면 합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앞에서 합의한 내용은 엄밀한 뜻의 의사는 ‘환자들을 돌보는 자’ἢ τῶν καμνόντων θεραπευτής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말 역어로만 보면 두 말의 차이점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돌보는 자’θεραπευτής가 그리스어 원래 의미로는 지배자나 관리자와 관계된 말이 아니라 오히려 ‘신들을 섬기는 사람’, ‘궁정 신하’, ‘시중꾼’의 의미를 갖는 말로서 위계 상 앞의 말과 반대의 성격을 갖는 말임을 고려하면, 일단 합의 내용의 불일치는 차치하고서라도 왜 플라톤이 그 말을 별다른 언급 없이 같은 말로 사용하고 있는지 궁금증이 드는 게 사실이다. 게다가 내용상 다른 의미를 갖는 그 말을 위계에 민감한 트라쉬마코스가 왜 같은 말로 받아들였는지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지나칠 수도 있는 이러한 소소한 표현들과 텍스트의 맥락들 모두 우리가 앞에서 살폈듯이 플라톤 자신 이미 시민에 대한 통치와 지배, 헌신과 섬김을 하나의 통일적 의미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5)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별 다른 설명 없이 기술을 전문지식이라는 말로 대체시키고 있다. 이것은 기술이라는 실천적 활동이 기본적으로 앎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플라톤이 왜 이 국면에서 굳이 기술 대신 그 말을 꺼내든 것인지 의문을 품어 볼 수 있다. 전문 지식의 원어 ἐπιστήμη(epistēmē)가 ‘실재에 대한 앎’, ‘참된 앎’의 뜻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살폈듯이 그의 엄밀론이 형상론의 함축도 갖고 있음을 전제하면 아마도 그것은 장차 다루게 될 ‘실재에 관한 것’을 여기에서도 이미 염두에 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4-6(343a~344c) : 트라쉬마코스 현실론으로 돌아와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다.

 

[343a]

* 결국 소크라테스와 트라쉬마코스가 동의한 엄밀론에 따라 논의를 진행한 결과 ‘정의에 대한 정의가 정반대로 바뀌었음’ὅτι ὁ τοῦ δικαίου λόγος εἰς τοὐναντίον περιειστήκει이 모두에게 명백하게καταφανὲς 드러난다. 그러자 트라쉬마코스는 크게 당황해하며 답변 대신 소크라테스를 마치 코를 흘리면서도 보모τίτθη의 돌봄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으로 비유하면서 그 때문에 돌보는 목동ποιμήν과 돌봄을 받는 양πρόβατον의 관계조차 모르는 사람이라 힐난한다.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보살핌과 피보살핌의 관계를 알지 못하고, 설사 알고 있다 해도 보모나 목자 같은 보살피는 자들이 대상의 이익이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보살핀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을 말한다.

*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목동과 양 이야기를 꺼내든 이유를 묻고 그에 대해 트라쉬마코스는 자신의 모든 공력을 다 쏟아 붓는 기세로 아주 길게 자기 생각을 토해 낸다. 트라쉬마코스는 애초 현실론에 입각하여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고 주장했다가 비판에 부딪치자 소크라테스와 함께 엄밀론의 입장에서 논의를 진행하다가 그것이 또 비판에 부딪치자 다시 현실론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 또한 임기응변적으로 바뀌는 그의 태도의 비일관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용적으로 이 부분(343b~344c)은 트라쉬마코스의 속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곳으로서 소크라테스가 앞으로 <국가> 전체의 논의를 통해 넘어서야할 높고 거대한 악의 봉우리가 된다.

 

[343b]

*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가 목동들이 양이나 소를 보살피는 목적이 주인이나 자신의 이익이 아닌 다른 것에 있다고 믿고 있으며, 게다가 참된 뜻에 있어 통치자들이 목자가 양을 대할 때와는 뭔가 다르게 자신의 이익이 아닌 다른 것을 위해 밤낮으로διὰ νυκτὸς καὶ ἡμέρας 생각한다고 믿고 있다고 비난한다. 양치기가 양을 보살피는 것은 실제로는 양도 주인도 아닌 자기의 이익 때문인 것처럼, 통치자도 피지배자가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해 통치를 한다는 것이다. 여전히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것이다.

* 여기서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참된 뜻에 있어 통치자들’οἳ ὡς ἀληθῶς ἄρχουσιν은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와 다른 ‘있는 그대로의 현실 통치자들(real rulers)’을 말한다. 그는 자신도 동의한 ‘엄밀한 의미의 통치자’를 스스로 저버리게 되자 그런 식으로 교묘하게 말을 바꾸어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가 말하는 ‘참’τἀληθῆ의 기준은 그 자신 스스로 고백하고 있듯 소크라테스와 정반대이다. 그가 이어서 펼치는 긴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살피기로 한다.

 

* 참고로 342a-b 부분에 대한 박종현 역본은 지나치게 직역에 가까워 쉽게 읽히지가 않는데다가 일부는 불분명하다. 그래서 이 부분을 학당 초고를 토대로 필자가 다시 고쳐서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342a> “그럼 이건 어떤가요? 의술 자체αὐτὴ ἡ ἰατρική는 결함이 있는가ἐστιν πονηρά,요? 아니면 다른 어떤 기술이건 어떤 훌륭함ἀρετῆ을 추가로 필요로 하는 것ὅτι προσδεῖταί τινος ἀρετῆς인가요? 이를테면 눈은 시력을 필요로 하고 귀는 청력을 필요로 하며, 그런 까닭에διὰ ταῦτα 그것들에게는 그것들의 이익τὸ συμφέρον을 살펴주고 제공해줄σκεψομένης τε καὶ ἐκποριούσης 어떤 기술이 필요하듯이, 기술 자체에도 어떤 결함이 내재해있어서ἐν αὐτῇ τῇ τέχνῃ ἔνι τις πονηρία 각각의 기술에는 그것에 이익이 되는 것을 살펴줄 다른ἄλλης 기술이 필요한 것이며, 살펴주는 그 기술에는 다시 그런 종류의 다른 기술이 필요해서 이런 사태가 끝이 없게ἀπέραντον 되는 것인가요? <b> 아니면 각각의 기술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기가 이익을 살피나요?ἢ αὐτὴ αὑτῇ τὸ συμφέρον σκέψεται; 그도 아니면 각각의 기술은 자신의 결함을 보충하고ἐπὶ τὴν αὑτῆς πονηρίαν 자신의 이익을 살펴줄 어떤 기술을 더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인가요?οὔτε προσδεῖται; 그 기술이 자기 자신이든 다른 기술이든οὔτε αὑτῆς οὔτε ἄλλης 말이에요. 그리고 그 이유가 기술은 어떤 것이든 결함도 없고 잘못도 없기 때문이고οὔτε γὰρ πονηρία οὔτε ἁμαρτία 또 어떤 기술도 그것이 대상으로 삼는 것 이외의 다른 것에 이익이 되는 걸 찾는 게ζητεῖν 적합하지 않기 때문οὔτε γὰρ προσήκει인가요? 그런가 하면 각각의 기술은, 그것이 엄밀하고 완전하게 그것 그대로의 것인 한에서ἕωσπερ ἂν ᾖ ἑκάστη ἀκριβὴς ὅλη ἥπερ ἐστίν, 제대로 된 것ἐστιν ὀρθὴ οὖσα,으로서 훼손이나 섞임이 없기ἀβλαβὴς καὶ ἀκέραιός 때문인가요? 엄밀한 뜻으로τῷ ἀκριβεῖ λόγῳ 그것을 살펴 보세요.σκόπει. 사태가 이런가요 안 그런가요?οὕτως ἢ ἄλλως ἔχε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