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 ⑱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Spread the love

플라톤의 <국가> 강해

 

4-6(343a~344c) : 트라쉬마코스, 현실론으로 돌아와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다.

(전 시간에 이어 계속)

 

* 앞서 살폈듯이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권력지상주의와 부정의 찬양론을 담고 있다. 사실 트라쉬마코스가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말한 직후 그것의 의미를 묻는 소크라테스에게 정치적 강자들의 경우를 내세울 때만 해도 그의 주장은 자기 이익의 극대적 실현을 위한 권력지상주의로 비쳐졌고 그 단적인 경우가 참주정이라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참주정 찬양론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정작 트라쉬마코스의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앞의 주장을 살펴보면 트라쉬마코스는 오히려 일상의 사회적 이해관계에서 부정의의 정의에 대한 우위 즉 일반적인 부정의 찬양론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고, 다만 그것의 우위를 판정해주는 가장 단적인 사례로서 가장 부정의한 권력인 참주와 참주정을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권력지상주의와 일반적인 부정의 찬양론 모두 철저히 자신의 이익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고 그런 점에서 트라쉬마코스의 입장 또한 달라진 것도 아니다. 다만 문제는 그가 표방하는 권력지상주의와 부정의 찬양론이 하나의 나라에서 하나의 입장으로 동시에 양립되기는 힘들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그 권력을 총동원하여 시민을 기만하고 착취하는 정치적 강자들의 경우,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시민들이 불법으로 이익을 챙기고 부정의를 일삼도록 결코 내버려 둘리는 없기 때문이다. 정치적 강자의 정의와 시민의 부정의는 둘 다 이기심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만 사회적 관계에서는 이기심은 그 자체로 서로에게 배타적인 데다가 특히 강자에게는 독점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이 이미 현실적으로는 기회주의 이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에 서 있는 자들 모두가 철저히 이기주의자로서 일관되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한, 참주가 지배하는 현실에서는 참주에게 충성하는 것이 유리하므로 철저히 참주 편에 서서 시민을 착취하는데 앞장 설 것이고, 참주정이 쇠할 때는 참주 몰래 부정의를 저지르는데 몰두하다가 또 시민들이 득세하면 시민들 편에 서서 부정의를 선동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할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주의자들이 현실에서 어떻게 처신하건 앞서 우리가 살폈듯이 트라쉬마코스 자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권력지상주의와 부정의 찬양론 모두를 함께 내걸고 시종일관 줄기차게 일관된 소신으로 강변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그의 주장이 기본적으로는 어떻게든 남을 누르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부정의 찬양론 위에 서 있되, 기회가 되면 권력에 빌붙어 약자들의 부정의 찬양론도 탄압하며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권력지상주의를 함께 표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동시에 그의 주장 자체가 공동체의 안전과 평화는 안중에도 없는 반도덕주의적 입장이자 그야말로 공동체 파괴주의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 그런데 눈여겨 볼 것은 앞서 그가 쏟아낸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트라쉬마코스의 극단적이고도 파괴적인 이기주의는 국가 차원과 개인 차원을 가리지 않고 막무가내 하나의 원리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트라쉬마코스의 입장 자체가 철저히 모든 국면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장과 대척점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거울에서 실물과 허상이 모든 면에서 서로 대응되면서 모든 내용에서 정반대인 것과 같이 소크라테스와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은 철저히 대립해 있다. 이런 점에서도 <국가> 제1권에서의 트라쉬마코스의 입장은 앞으로 전개될 <국가>의 논의를 통해 소크라테스가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될 안티테제로서 플라톤의 주도면밀한 서술 계획 아래 제시된 것이 아닐 수 없다. 실로 인간 삶의 이익과 행복의 문제는 그만큼 총체적이고도 전면적인 것이고 부정의한 현실에 대한 투쟁 또한 그만큼 총체적이고 전면적인 것이다.

4-7(344d~ 345e): 소크라테스의 분노와 재반론

 

[344d]

* 트라쉬마코스는 그의 속내를 마치 ‘목욕탕에서 일하는 사람’βαλανεύς들이 물을 쏟아 붇듯 우리의 귀에다 많은 말을 한꺼번에 쏟아 넣고서는καταντλήσας 자리를 떠나려 한다. 그러나 동석한 사람들은 그러도록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소크라테스도 ‘그것이 과연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 충분히 가르쳐 주거나 우리 스스로 알게 되기도 전에’πρὶν διδάξαι ἱκανῶς ἢ μαθεῖν εἴτε οὕτως εἴτε ἄλλως 떠날 생각이냐고 묻고 간청하다시피 말을 한다.πάνυ ἐδεόμην τε καὶ εἶπον

* 트라쉬마코스는 대화에 관심이 없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자리를 뜨는 자이고 소크라테스는 어떻게든 사람들에게 다가가 대화를 나누면서 ‘충분히 가르쳐 주거나 스스로 알게 해주는διδάξαι ἱκανῶς ἢ μαθεῖν 사람’이다.

 

[344e]

 

*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에게 묻는다. ‘혹시 선생은 우리가 사소한 것을 결정하려 꾀하고 있지 각자가 어떻게 삶으로써 가장 유익한 삶을 살 수 있게 될지 그 삶의 방식을 결정하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시오?’ἢ σμικρὸν οἴει ἐπιχειρεῖν πρᾶγμα διορίζεσθαι ὅλου βίου διαγωγήν, ᾗ ἂν διαγόμενος ἕκαστος ἡμῶν λυσιτελεστάτην ζωὴν ζῴη;

* 소크라테스의 이 말에는 정의와 관련하여 소크라테스가 논하고 싶어 하는 핵심이 무엇인지가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정의에 관한 문제는 곧 우리를 가장 유익한 삶, 행복한 삶으로 이끄는 ‘삶의 방식 일체’(the whole way of life)ὅλου βίου διαγωγή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그 문제는 결코 사소한 것일 수 없다. 이것은 곧 <국가>의 테마이다.

*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가 전혀 우리에게 마음을 쓰지 않을οὐδὲν κήδεσθαι 뿐만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우리가 모름으로써ἀγνοοῦντες 더 나쁘게χεῖρον 살게 되든 또는 더 훌륭하게βέλτιον 살게 되는 전혀 개의치 않는οὐδέ τι φροντίζειν 것 같다고 질타한다. 이에 트라쉬마코스도 당황한 듯 짧게 반문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멈추지 않는다.

————————–

* 그런데 앞에서 트라쉬마코스가 정의를 정치체제와 정치적 강자와 관련하여 거론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의에 관한 논의의 핵심으로 소크라테스가 언급한 ‘삶의 방식’은 언뜻 개인적 차원의 삶의 방식으로 느껴져 다소 의아스러움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래서 그 말 대신 ‘가장 유익을 가져다주는 정치의 방식 즉 정치체제’를 언급했어야 더 어울리지 않을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이곳에서 언급된 ‘삶의 방식’을 정치의 방식 즉 정치체제로만 제한하여 이해할 경우 오히려 플라톤의 진의가 왜곡될 수 있다. 사실 <국가>에서 정의 문제를 논의하는 기본 흐름을 보면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 가운데 누가 더 행복한가?’ 즉 개인 차원의 정의와 행복 문제로 시작했다가 소문자보다 대문자로 보는 게 더 나을 수 있다는 이유로 나라에서의 정의와 행복의 문제로 확대된 후, 논의의 말미에 다시 개인의 정의와 행복의 문제로 돌아온다. 이것은 정의로운 삶의 문제를 탐문함에 있어 플라톤이 얼마나 개인의 행복을 중대하게 여기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도 여기에서의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는 결코 오늘날 자유주의 정치철학자들이 생각하듯이 개인의 이익과 행복을 국가나 특정 집단의 이익에 종속시키는 전체주의 사상가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플라톤의 정의론이 반대로 개인주의적 정의론이라고 오해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강해를 시작하면서 이 책의 제목과 부제에 들어 있는 ‘폴리테이아’politeia와 ‘디카이오쉬네’dikaiosynē라는 말이 갖는 복합적이고도 중층적인 함의를 살펴본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플라톤은 <국가> 전체를 통해 정치적 삶과 개인적 삶 가운데 어느 것을 우위에 두거나 구분하지 않고 그것들 각각의 고유성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상호 의존적으로 밀접하고도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물론 개인주의와 전체주의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현대 정치철학적 관점에서는 플라톤은 여전히 전체주의자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자유주의적 정치철학이 개인주의에 매몰되어 오히려 인간의 인간다운 삶의 소외를 속수무책 방관하고 오히려 인간의 삶과 문명을 황폐화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제 스스로를 되돌아보면서 플라톤적인 정치철학이 갖는 내적 가능성과 의미도 진지하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곳에서 정의와 관련하여 논의의 핵심으로 거론된 ‘삶의 방식’은 개인들 각각의 삶에 어느 것이 가장 이익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인가를 함축함과 동시에 ‘삶의 방식들 일체’란 말이 함축하고 있듯이 이미 개인들의 정치적 삶의 방식 즉 정의로운 정치체제의 문제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345a]

* 소크라테스 자신은 그의 주장을 납득할 수 없다οὐ πείθομαι고 말한다. 그리고 하물며 부정의를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μὴ διακωλύῃ 멋대로 저지르게 내버려 둔다 할지라도 부정의가 정의보다 더 득κερδαλεώτερον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설사 부정의를 남 몰래하든 싸움을 벌이든 부정의를 저지를 힘이 있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우리 중에도 있으며 결코 나 혼자만은 아닐 것οὐ μόνος이라고 선언한다.

————————-

*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결연한 거부가 담겨있는 이 부분은 그가 혐오하는 소피스트의 웅변조의 연설같은 느낌마저 든다. 344d에서 시작해서 345b 중간까지 이어지는 그의 말에는 분명 무지의 지와 겸손을 앞세우며 늘 차분하게 대화를 이끌던 평소의 모습과 다른 모습이 담겨있다. 그 말 속에는 트라쉬마코스에 대한 절망과 분노가 녹아있다.

*사실 트라쉬마코스가 가장 부정의한 자로 예시하고 있는 참주조차 대놓고 부정의를 저지르지는 못한다. 법을 내세우는 기만의 방법으로 몰래 자신의 이익을 취할 뿐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참주조차 감히 넘보지 못할 정도의 가장 유리한 조건 즉,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부정의를 저지르도록 내버려 둔다 할지라도 결코 그는 ‘부정의가 정의보다 이익이 된다고 자신을 설득하지는 못할 것’ἄδικος μέ γε οὐ πείθει ὡς ἔστι τῆς δικαιοσύνης κερδαλεώτερον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혐오와 반대의 정도가 얼마나 큰 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 트라쉬마코스를 질타하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보면 여러 곳에서(345e) ‘성의를 보이시오’προθυμοῦ, 345b, ‘납득시켜 주시오’πεῖσον, ‘345b 견지하시오’ἔμμενε, ‘속이지 마시오’μὴ ἐξαπάτα) 등 명령어가 사용되고 있고, ‘전혀’, ‘아무런’ 등 완전부정을 뜻하는 οὐδείς라는 표현도 여러 번(344e, 345a) 등장할 정도로 말투 또한 결연하고 단호하다. 다그침에 가까운 질문과 명령어만이 아니라 말의 길이도 이제까지 그가 한 말 가운데에서 가장 길다. 아마도 <변명>정도라면 모를까 어떤 대화편에서도 이 부분만큼 소크라테스의 결기어린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은 거의 없을 듯싶다. 공관복음서에서 장사치들로 들끓는 성전에서 분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연상된다면 과언일까?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라는 말에서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부정의와 타협할 수 없다는 그의 비장한 결의가 엿보인다. 그리고 동시에 그 말에는 어떤 극단적인 부정의 상황에서도 정의로운 사람들이 반드시 존재하며 그들은 용기로써 늘 함께 연대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 또한 담겨 있다. 사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열매를 맺으려 한다. 재생산을 위해서이다. 하물며 부정의한 자들은 열매가 보장되지 않는 일은 도모할 생각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람들은 반드시 이기는 싸움만 하지 않는다. 싸워야 마땅하기 때문에 그들은 싸운다. 그래서 그들의 싸움은 아무런 열매도 맺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정의는 열매를 맺지 않는다 해도 끝없이 재생산되는 신비 아닌 신비, 결코 마르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곧 부정의한 자들이 원천적으로 정의로운 사람들을 당해낼 수 없는 이유이자 증거이다.

 

[345b]

*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다그침에 이제까지 자기가 한 말에 설득되지 않았다면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말하고 억지로 머리(영혼)속에 집어넣어 드릴까요?εἰς τὴν ψυχὴν φέρων라고 대든다. 트라쉬마코스는 자기주장만 일방적으로 늘어놓는 데만 능할 뿐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고 나아가 그 말을 논리적으로 검토하거나 서로 의견을 나누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의 다그침을 어떻게든 피해가려는 그의 태도에는 말투와 달리 다소 겁을 먹고 움츠려든 느낌이 든다.

* 억지로 머릿속에 집어넣겠다는 것은 대화와 설득을 중시하는 소크라테스에게는 가장 혐오스런 말이자 모욕적인 말이다. 그야말로 무례하고 파렴치하다. ‘결코 그러지 마시오.’μὰ Δί᾽ μὴ σύ γε라는 말에는 트라쉬마코스를 압도하고 남을 정도의 단호함이 배어있다.

* 이에 소크라테스는 본래 그가 해오던 대로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검토하여 논박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다시 논박을 시작하는 그의 모습은 여전히 단호하다. 통상적으로 소크라테스는 문답법적 검토에 앞서 상대방의 동의를 먼저 구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곳에서 동의는 고사하고 논박에 앞서 트라쉬마코스에게 먼저 말 바꾸는 태도부터 고치라고 야단치듯 다그친다. ‘말한 것은 견지하라ἔμμενε. 혹시, 견해를 바꿀 시에는 그걸 명백히 바꾸되 우리를 속이지 말라ἡμᾶς μὴ ἐξαπάτα.’

*소크라테스는 <고르기아스>에서도 자기 편한 대로 말을 바꾸는 칼리클레스에게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고르기아스> 499b~c cf. 334e, 340b~c

 

[345c]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가 바로 앞에서 한 말 가운데에서도 말을 바꾼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앞에서 살폈듯이 트라쉬마코스는 처음에는 현실적인 의미에서의 통치자의 행태에 입각해서 정의를 이야기했다가 비판에 부딪치자 자기가 말하는 통치자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치자였다고 말을 바꾸고 또 그것이 비판에 직면하자 양치기의 예를 내세워 다시 현실적 의미에서의 통치자로 돌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그가 예로 들고 있는 양치기 기술과 관련한 문제부터 검토하기 시작한다.

* 우선 트라쉬마코스가 예로 든 양치기ποιμήν는 서로가 동의한 엄밀론에 입각하면 엄밀한 의미에서의 양치기를 염두에 두고 한 이야기가 아니다. 트라쉬마코스가 양을 살찌우는 것πιαίνειν은 양들의 최선의 상태τὸ τῶν προβάτων βέλτιστον를 염두에 두어서가 아니라 마치 자기가 접대 받을 손님인 양 성찬εὐωχία으로 올라올 양고기를 염두에 두고 양을 치고 있거나 아니면 마치 자기가 돈벌이꾼χρηματιστής인 양 나중에 돈을 벌기 위해 팔 것을 염두에 두고 양을 치는 것이라는 것이다.

 

[345d]

* 그러나 앞서 기술에 관한 논의에서 트라쉬마코스도 동의했듯이(342b~c) 양치기 기술이 적어도 양치기 기술인 한, 그 기술이 양들의 보살핌에 있어 최선의 것τὸ βέλτιστον이 되기 위해 갖추어야할 미흡함이 없는 완벽한 기술임이 분명하다. 그러한 한, 양치기 기술의 관심사는 스스로의 이익 아니라 그 기술의 대상ἐκεῖνος을 위해 최선의 것을 제공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

* 기술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대상의 이익을 도모한다는 것은 342a~b의 논의를 통해 플라톤에 의해 자세하게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플라톤의 이러한 주장과 관련하여 전쟁술과 수렵술의 예를 들어 기술이 그 기술의 대상을 반드시 이롭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의가 제기될 수 있다. 전쟁술은 전쟁의 대상인 적군을 해치는 것이고 수렵술 또한 수렵의 대상인 동물을 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단 타당한 비판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대상’에 해당하는 원어 ἐκεῖνος(이 말은 ‘내가 마주하고 있는 내 바깥 쪽 저것’that person or thing there을 뜻한다.)의 의미를 단순히 외부의 실체적 대상이 아니라 즉 ‘기술이 마주하는 과제로서 저것’ 즉 기술이 관여하는 일차적인 과제 내지 목적object의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대상을 실체적 대상으로만 한정할 경우 이를테면 의술이나 제약술의 대상은 다 ‘병든 사람’이라는 점에서 서로 다른 기술임에도 대상간의 고유한 차이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술의 고유성에 맞추어 대상의 고유성도 살린다면 이를테면 통치술의 경우, 통치술이 도모하는 대상은 ‘시민의 안전과 행복’이고 기술이 제공하는 이익은 ‘시민의 안전과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고 또 수렵술의 경우도, 수렵술이 도모하는 대상은 ‘동물의 포획’이고 기술이 제공하는 이익은 ‘동물의 포획이 잘 이루어지게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 이러한 기술 모두 일단 외부 대상에 적용되는 것이고 나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도 기술은 기술 대상의 이익에 관여한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일관성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려나 플라톤의 기술론은 통치술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그 나름의 유비적 타당성을 갖는 것이고 위와 같은 해석 또한 최대한 플라톤을 일관성 있게 이해하려는 사람들로서는 나름의 타당성을 갖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입장과 관점에 따라 기술 관련 언급 자체의 일관성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4-8(345e~346e): 기술과 그 기술에 수반되는 보수획득술은 구분해야 한다.

 

[345e]

* 소크라테스는 모든 다스림ἀρχή은 그것이 다스림인 한, 공적이든 사적이든 다스림을 받는 쪽 그리고 돌봄을 받는 쪽ἀρχομένῳ τε καὶ θεραπευομένῳ을 위한 최선의 것을 생각하는 것τὸ βέλτιστον σκοπεῖσθαι이라고 서로 동의했음을 트라쉬마코스에게 환기시킨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에게 ‘그럼에도 나라들에 있어서 통치자들이 즉, 참된 통치자ἀληθινὸς ἄρχων들이 자진해서ἑκόντας 통치를 하는 줄로 생각하는가?’를 묻고 트라쉬마코스도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며μὰ Δί᾽ οὔκ 그 점은 자신도 잘 알고 있다εὖ οἶδα’ 동의를 표한다.

*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참된 통치자들’은 트라쉬마코스가 343c에서 말한 현실에서의 통치자들이 아니라 트라쉬마코스도 동의한 적이 있는(341b)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치자들’이다. 그리고 ‘참된 통치자들이 자진해서ἑκόντας 통치를 하는 줄로 생각하는가?’라는 소크라테스의 물음은 앞에서 그가 설명한 대로 ‘통치술이 통치술인 한, 통치자의 이익과는 무관하므로 강제라면 몰라도(347c) 그런 자리를 자진해서 맡지 않는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물음에 대해 트라쉬마코스 역시 ‘참된 통치자들이 자진해서 통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점은 잘 알고 있다’라고 답을 한다. 트라쉬마코스도 소크라테스가 말한 대로 참된 의미의 통치술이 대상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것이라면, 그런 통치술은 맡아봐야 자기에게 좋을 것이 없는데 왜 자진해서 맡겠느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소크라테스나 트라쉬마코스 모두 일단 참된 통치자건 아니건 누구라도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은 기피한다는 것을 공히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소크라테스의 경우는 점차 밝혀지겠지만 통치의 대가로 주어지는 권력과 명예는 훌륭한 사람들οἱ ἀγαθοὶ에게 수치스러운ὄνειδος 것으로서 그들 자신에게 결코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어서 통치를 기피한다는 것이고, 트라쉬마코스의 경우는, 소크라테스의 말 대로 참된 의미의 통치술이란 게 그저 시민의 이익만 도모하고 자기 이익과 상관없는 것이라면, 그런 통치는 누구도 자진해서 맡지 않는다는 것 즉,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자진해서 맡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트라쉬마코스의 이러한 생각은 현실에서의 통치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참된 의미의 통치와 달리 자기에게 가장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므로, 위와 정반대로 자격이 되건 안 되건 누구라도 자진해서 그 일을 맡으려 한다는 것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통치술 자체와 자기 이익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트라쉬마코스의 잘못된 생각을 깨기 위해 또 다시 질문을 던진다. 즉 소크라테스는 앞서 예시한 다스림과는 다른 다스림(관직)들τὰς ἄλλας ἀρχὰς의 경우를 들어 다스림 자체는 자기 이익과 무관한 것이고 오히려 다스림을 받는 자의 이익임을 재차 밝힌다. 즉 일반 다스림의 경우 하나같이 ‘자진해서 다스림을 맡지 않고 보수를 요구 한다μισθὸν αἰτοῦσιν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 자체로 통치술이 가져다주는 이익이 자기의 이익이 아니라 다스림을 받는 자와 돌봄을 받는 쪽의 이익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즉 다스림 자체는 자기 이익과 무관하므로 관직을 맡은 사람들은 별도의 보수를 따로 요구하는 것이다. 이로써 트라쉬마코스가 통치술과 보수를 얻는 기술이 별개임을 알지 못하고 하나로 붙여서 잘못 생각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 혹자는 통치술이 자기 이익과는 무관하더라도 통치술 자체가 시민의 이익을 위한 것이므로 훌륭한 사람들은 무상으로라도 통치를 맡아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사람들이 통치를 기피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비록 통치 능력은 가지고 있지만 통치술 자체가 자기가 좋아하는 철학을 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기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의 이익을 위한 참된 통치는 반드시 훌륭한 사람들이 맡아야 하므로 그들에게는 강제ἀνάγκη와 벌ζημία이라는 방식으로 통치가 맡겨진다. 그리고 이러한 강제와 벌을 받아들이는 배경에는 통치를 맡지 않을 경우, 자기보다 못난πονηροτέρου 사람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수치심αἶσχος이 자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들에게 주어지는 강제는 적극적인 보상μισθός은 아니지만 수치심의 면제라는 혜택도 있다는 점에서 소극적인 의미에서 보상이기도 한 것이다. 강제로서 벌과 보상이 연결되는 지점도 이곳에 있다. 그러나 여전히 훌륭한 사람역시 사람인 한, 자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꺼려하므로, 최소한 다른 훌륭한 사람이 통치를 맡아 수치심의 면제가 담보되는 한, 자신은 최대한 통치를 맡기를 기피하려 한다. 그래서 훌륭한 사람들은 통치를 맡지 않으려고 서로 싸우기도 한다. 물론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이 통치를 맡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강제된다면 그 역시 다른 훌륭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이익에 부합하지 않더라도 그 일을 맡아 시민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보수 획득술의 문제를 다루는 다음 시간에 자세히 다루어지게 될 것이다.

 

[346a]

*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앞서와 같은 논박을 토대로, 다스림이 위와 같듯이 다른 기술들도 각각 다른 능력δύναμις을 가지고 각기 자기 기술의 대상의 이익을 제공하는 것임을 밝힌다. 의술ἰατρικὴ 은 건강ὑγίεια을 제공하고 조타술κυβερνητικὴ은 항해할 때 안전σωτηρία을 제공하듯 다른 기술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렇듯 통치술과 보수를 획득하는 기술 즉 보수 획득술은 각기 다른 것을 제공하는 다른 기술이라는 것이다.

 

 

0 replies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
Feel free to contribute!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