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③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6. <국가>의 구성과 전체 구도

 

<국가>는 전체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편지들>을 제외하면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이렇게 여러 권으로 나누어진 대화편은 <국가>와 <법률>(12권) 뿐이다. <국가>가 그처럼 10권으로 나누어진 것이 플라톤 자신에 의한 것인지 혹은 그 이후 사람들에 의해서인지,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일부 고전 문헌학자들은 <국가>가 처음에는 6권으로 출간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플라톤 대화편의 전체 목록에 대한 가장 오래된 정보를 전해주고 있는 기원후 1세기 트라쉴로스에 따르면 <국가>와 <법률>은 각각 10권, 12권으로 분할되어 있다. 내용상 구분의 필요성은 차치하고서라도 <국가>와 <법률>이 그렇게 여러 권으로 분할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 왜냐하면 두 대화편의 분량은 다른 대화편과 달리 각기 당시 파피로스 두루말이(卷, biblion, volumen) 한 권의 최대 분량(장당 약 가로 37㎝, 세로 23㎝ 크기의 파피로스 20-30개 정도를 이어 붙인 분량)을 크게 넘어서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콘퍼드(F. M. Cornford)는 <국가>가 10권으로 구성된 것은 고대의 제본 기술상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그것을 논의의 내용과 구조와 연관 지어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1)

콘퍼드의 이러한 주장은 일부는 맞고 일부는 동의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제2권에서 4권까지, 제5권에서 7권까지, 제8권과 9권까지는 콘퍼드의 지적대로 각 권의 구분이 무색할 정도로 화제의 연속성이 뚜렷하지만. 제2권, 제5권, 제8권, 제10권 서두 전후를 보면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화제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내용상의 구분이 분명하게 포착되고 있기 때문이다. (1) 우선 제2권 서두에서는 1권에서 트라쉬마코스로 부터 해방된 소크라테스의 소회가 언급되자마자 글라우콘의 새롭게 도전적인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화제가 전환되고 있다. (2) 그리고 제5권 서두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고 부정의한 나라와 개인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자, 폴레마르코스가 아테이만토스와 귓속말을 나눈 이후 돌연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또 한 번 화제가 새롭게 전환된다.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 사람 모두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에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으니 계획된 논의를 이어가기 전에 일단 그 점부터 답해달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소크라테스가 직면한 ‘세 가지 파도’(451c-474c)이다. 그리하여 제5권에서 7권까지 그들의 요구에 답하는 방식으로 <국가>의 핵심적인 사상이자 플라톤 철학의 백미이자 가장 난해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철인정치론, 이데아론과 좋음의 이데아 그리고 혼의 전환과 상승, 변증술이 극적으로 제시된다. (3) 그리고 제8권 서두에서는 4권 끝에서 이어가기로 했던 주제로 다시 돌아와 또 한 번 화제가 전환되고 이후 9권까지 부정의한 나라와 개인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리하여 애초 계획한 대로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 부정의한 나라와 개인 그 어느 쪽이 행복한지가 거론되고 이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에 관한 모든 논의가 하늘에 본(paradeigma)으로 바쳐진 것이라고 언급되면서 제9권이 마무리된다. (4) 그리고 제10권에서 시인들과 시의 본질, 영혼 불멸과 정의에 대한 보상을 거론한 후 에르(Er)의 이야기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제10권은 608b, c를 경계로 시인 비판과 영혼 불멸 및 정의의 보상 등으로 내용이 분명하게 양분되어 있어 콘퍼드는 이 부분도 둘로 나누어 <국가>를 내용상 모두 여섯 부분으로 구분하고 있지만, 제10권은 내용상 제1권에 상응하여 제시된 하나의 마무리로서 내적 단일성을 갖고 있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제1권이 소크라테스가 앞으로 다룰 도전과 과제이고 제2권에서 9권까지가 그 가운데 넘어서야할 가장 큰 도전으로서 트라쉬마코스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답변이었다면, 제10권은 나머지 도전과제라 할 수 있는 폴레마르코스의 대화에서 제기되었던 시인의 문제와 케팔로스와의 대화에서 제기되었던 선한 사람이 맞이하게 될 사후세계와 보상 문제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답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2) 정의로운 삶과 행복은 폴레마르코스가 생각하듯이 당대 사람들 모두가 삶의 지표로 여기고 있었던 시와 시인들의 가르침에서는 본질상 결코 담보될 수 없는 것이며, 삶의 보상과 사후 세계에서의 혼의 불멸 또한 케팔로스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재산에 기대서나 가능한 나름의 생활방식이나 기복신앙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론의 내용대로 진실로 참된 덕과 지혜를 수반한 정의로운 삶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한 것임을 소크라테스는 마무리 삼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국가>의 내용 흐름은 마치 큰 산행을 하는 형세와도 같다. 처음 출발점에서는 산행의 이유와 목적을 점검하고(제1권) 준비를 갖춘 후 이상국가의 건설이라는 목적을 향해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의 기본 틀과 덕을 논하며 오르막길을 올라(2권-4권) 정상에 이르러 철학의 기치 아래 이상국가의 핵심이자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철인 정치, 혼의 전환과 상승, 변증술의 토대를 구축하고(5권-7권) 내리막길에 들어서서는 현실의 관점에서 부정의한 나라와 개인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도착점을 앞두고 정의의 우월성을 마지막으로 비교 판정한 후(8권-9권) 산을 내려와 몇 가지 남은 과제들을 정리하고 영혼의 불멸을 음미하며(제10권) 산행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 <국가>의 권별 기본 구도

요컨대, 앞에서 살핀 화제의 흐름과 전환을 고려하면 <국가>의 권별 기본 구도는 크게 다섯 부분(제1권/제2,3,4권/제5,6,7권/제8,9권/제10권)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그처럼 크게 다섯 부분으로 구분하는 것에 대해서는 플라톤 연구자들 사이에서 거의 이의가 없다. 그러나 각 부분 별 세부 단락과 그곳에 표제를 다는 방식은 학자들마다 다양하다. 각자 단락을 나누는 기준과 그 내용을 해석하는 관점들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본 강사가 제시한 권별 기본 구도와 표제 그리고 그 세부 단락과 표제 또한 모종의 일반화된 구분이 아니라 국내외 여러 유수 학자들이 제시한 것들을 토대로 본 강사 나름의 관점에 따라 정리· 종합해서 재구성한 것이다.3)

각주 1) M. Cornford, The Republic of Plato, Oxford, 1941. p. v.

각주 2) 에필로그 제10권이 프롤로그 제1권과 상응관계에 있다는 점은 제1권이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듯 별도의 대화편이 아니라, 플라톤의 주도면밀한 전체 기술 계획에 따라 쓰여 졌음을 보여준다.

각주 3) 국내 학자로는 아래 책 참고. 김영균, <국가 : 훌륭한 삶에 대한 근원적 고찰>, 살림, 2008. 김인곤, <플라톤 국가>, <철학사상> 별책 제3권 제8호,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8.

 

Ⅰ. 프롤로그 : 도전과 과제(제1권)

Ⅱ. 정의의 수립: 정의로운 국가와 정의로운 개인(제2권-제4권)

Ⅲ. 정의의 실현 조건 : 철학과 철학자왕(제5권-제7권)

Ⅳ. 부정의와 현실 비판 : 부정의한 국가들과 부정의한 개인들(제8권-제9권)

Ⅴ. 에필로그 (제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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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프롤로그 : 도전과 과제 – 정의에 관한 견해들 검토(제1권)

Ⅱ. 본론 1 : 정의의 수립 – 이상국가의 건설(제2권-제4권)

     A. 터파기와 준비 : 문제제기, 방법, 국가의 기원

     B. 정의로운 국가와 정의로운 개인

Ⅲ. 본론 2 : 정의의 실현 조건(제5권-제7권)

  1. 난관과 고려사항, 가능성
  2. 정의의 실현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
  3.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

Ⅳ.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현실국가 분석(제8권-제9권)

  1. 부정의한 국가들와 부정의한 개인들
  2. 정의의 우월성 – 정의와 행복

Ⅴ. 에필로그 : 시의 본질, 혼의 불명, 정의에 대한 보상(제10권)

 

 

7. <국가>의 전체 내용 세부 구분과 해당 쪽수 및 섹션

 

Ⅰ. 프롤로그 : 도전과 과제 정의에 대한 견해들 검토(1)

 

1. 도입부(327a-328b)

2. 케팔로스의 노년과 재산(328b-331d)

   1) 노년의 즐거움과 생활방식(328b-329d)

   2) 자유와 평화, 생활방식 그리고 재산(331c-d)

3. 폴레마르코스의 정의(331b-336a)

   1) 정의는 각자에게 갚을 것(합당한 것)을 갚는 것이다.(331b-332b)

   2) 시모니데스 정의관 비판(332b~334b)

   3) 기능과 훌륭함(덕) – 정의는 사람을 나쁘게 할 수 없다(334c~336a)

4. 트라쉬마코스의 정의(336b-354c)

   1) “정의는 강자(지배계급)의 이익이다” 검토(338a-347e)

  1. 트라쉬마코스의 등장,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336b~339a) :
  2. 강자의 실수 가능성과 엄밀한 의미의 강자(339b~341a)
  3. 소크라테스의 비판과 트라쉬마코스의 속내(341a~ 344c)
  4. 트라쉬마코스의 현실론 비판과 통치자의 보수(344d~ 347e)

   2) “부정의는 정의보다 강하고 부정의한 삶은 행복한가?” 검토(348a-354c)

  1. 트라쉬마코스 : 정의는 고상한 순진성이고 부정의는 덕과 지혜이다.(348a~350c)
  2. 소크라테스의 비판 : 능가 개념, 정의가 덕과 지혜이다.(349b~350c)
  3. ‘부정의는 강하고 부정의한 삶은 행복하다’라는 주장에 대한 검토(350d~354a)
  4. 마무리와 탄식(354b-354c)

 

Ⅱ. 본론 1 : 정의의 수립 이상국가의 건설(24)

 

A. 터파기와 준비 : 문제제기, 방법, 국가의 기원 (357a-374e)

1.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근본적인 문제 제기(357a-367e)

   1) 글라우콘의 재반론

  1. 좋은 것의 세 가지 종류, 정의는 약자들의 협약(357a-359b)
  2. 귀게스의 반지, 부정의 찬양 (359be-362c)

   2) 아데이만토스의 보완과 요구(362d-367e)

2. 정의를 잘 찾기 위한 방편 : 소문자와 대문자 비유(367e-369a)

3. 국가의 기원과 발달: 원초국가(참된 나라, 돼지들의 나라), 호사스런 나라(369b-374e)

 

B. 정의로운 국가와 정의로운 개인(375a-445e)

1. 정의로운 국가의 수립(375a-434d)

   1) 수호자의 교육(376e-412b)

  1. 시가 교육(376e-403c)

     * 무엇을 말해야할 것인가(376e-392c)

     * 어떻게 말해야할 것인가(392c-398b)

     * 가사, 선법, 리듬(398c-401a)

     * 시가 교육의 목적(401b-403c)

    b. 체육 교육(403c-412b)

   2) 수호자가 갖추어야할 조건들(412b-427c)

  1. 수호자들의 선발과 자격. 건국 신화.(412b-415d)
  2.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 사유재산의 금지.(415d-421c)
  3. 수호자들의 임무(421c-427c)

   4) 정의로운 국가의 주요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427d-434c)

2. 정의로운 개인과 영혼(434d-445e)

   1) 혼의 세 부분(434c-441c)

   2) 정의로운 개인의 주요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441c-445e)

 

Ⅲ. 본론 2 : 정의의 실현 조건 철학과 철학자 왕(7)

 

A. 난관과 고려사항, 가능성 : 3개의 파도(449a-474c)

1. 도입부(449a-451c)

2. 첫 번째 파도 : 남자와 여자 양성에서 동일한 직무와 동일한 교육(451c-457b)

3. 두 번째 파도 : 처자의 공유. 전쟁에 관한 일(457b-471c)

4. 세 번째 파도 : 철학자와 권력(471c-474c)

 

B. 정의의 실현 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474c-502c)

1 .철학자에 대한 정의 : 이데아론에 의거한 규정(474c-480a)

2. 철학자의 자질(484a-487a)

3. 철학이 비난 받는 현실(487b-497a)

   1) 철학이 쓸모없게 되는 이유(487b-488e)

   2) 철학이 타락하는 이유(488e-495b)

   3) 철학이 당하는 수치와 철학자의 현실 도피(495c-497a)

4. 철인 정치의 실현 가능성(497a-502c)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1. 최상의 배움 : 좋음(善)의 이데아(502c-506b)

2. 좋음의 이데아와 태양의 비유(506b-509b)

3. 선분의 비유(509c-513e)

4. 동굴의 비유(514a-521b)

5. 혼의 전환과 참된 실재에로의 상승을 위한 교과목들(521c-541b)

   1) 예비 교과목(521c-531c)

    * 수와 계산. 지성의 활동(521c-526c)

    * 기하학(526c-527c)

    * 입체 기하학(528a-d)

    * 천문학(527d-528a, 528e-530c)

    * 음악 이론(음계론)(530c-531c)

   2) 본 교과목 : 철학적 문답법(변증술 : 디알렉티케)(531c-535a)

   3) 교과목들의 대상과 부과 방법, 시기와 구체적 프로그램(535a-541b)

 

Ⅳ.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현실국가 분석(89)

 

A. 부정의한 국가들과 부정의한 개인들

1. 도입부 : 원래 문제로 복귀. 고찰의 방법과 순서(543a-545c)

2. 최우수자 통치로부터 명예정에로의 체제 변동, 명예정과 명예정적 인간(545c -550c)

3. 과두정과 과두정적인 인간(550c-555b)

4. 민주정과 민주정적인 인간, 필요한 욕구와 불필요한 욕구(555b-562a)

5. 참주정과 참주정적인 인간, 불법한 욕구 (562a-576b)

 

B. 정의로운 삶의 우월성 – 정의와 행복(576b-592b)

1. 부정의한 삶이 아니라 정의로운 삶이 행복하다(576b-588a)

   1) 정치체제와 개인이 상호 대응된다는 것에 대한 증명(576b-580c)

   2) 혼의 세 부분에 기초한 증명(580c-583a)

   3) 참된 쾌락과 거짓 쾌락의 구분에 기초한 증명(583b-583a)

2. 부정의가 아니라 정의야말로 이익이다(588b-592b)

 

Ⅴ. 에필로그 : 시의 본질, 혼의 불멸, 정의에 대한 보상(10)

 

1. 시가·연극의 본질에 관한 고찰(595a-608b)

   1) 흉내(모방)과 진리의 관계(595a-603b)

   2) 시에서의 모방 : 이성이 아닌 감정의 모방(603c-605c)

   3) 시의 모방이 혼에 미치는 영향(605c-608b)

2. 혼의 불멸과 정의에 대한 보상(608c-612a)

   1) 혼의 불멸과 혼의 본래 모습(608c-612a)

   2) 현생에서의 정의에 대한 보상(612a-613e)

3. 저승에서의 정의에 대한 보상, 에르의 이야기(614a-621d)

“근대 부르주아는 어떻게 시민이 되었는가? 도시공간의 출현, 커피하우스, 살롱”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기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③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기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③

  1. 8. 6. 서교동 한철연 강의실

 

제3강. “근대 부르주아는 어떻게 시민이 되었는가? 도시공간의 출현, 커피하우스, 살롱”

 

강연 : 한길석(가톨릭대 교수)

후기 : 김상애(한철연 회원)   

 

* 근대에 커피하우스와 살롱의 공간에서 재건된 부르주아적 시민과 고대적 시민이 어떻게 다른지 고찰해 본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민주주의‘는 사실 2000년의 공백을 거쳐 18세기에 다시 등장한 정치체제입니다. 한길석 교수의 이번 강의에서는 “근대 부르주아는 어떻게 시민이 되었는가?”라는 제목으로 고대 그리스와는 매우 다른 사회구조적 배경을 가졌던 근대 민주주의의 등장배경에 대해 알아보고, 공영역[public sphere, 공론장]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토의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준 하버마스의 이론을 검토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폴리스(polis)라는 고대그리스의 매우 단순한 사회구조에서 시민(즉 성인 남성)이라면 곧 정치가였던 것과는 달리, 민주주의의 (재)등장 이전의 근대 사회에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오직 왕과 귀족들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왕과 귀족들의 정치자금을 대던 부르주아들이 권위, 그리고 자신의 욕망에 대해 깨닫게 되면서 혁명을 일으키고 이러한 체제는 뒤바뀝니다. 근대 부르주아들이 정치적 세력이 된 것이지요.

 

이들이 정치적 세력을 키울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커피하우스나 살롱과 같은 공영역에서 벌인 자립적 활동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기엔 커피숍이나 사랑방은 그저 수다나 떠는 사적 영역인 것 같은데, 근대인들의 커피하우스는 다양한 문헌들을 접하고 활발한 토론을 하며 여론을 형성하던 정치적 공영역이었습니다.

 

근대 민주주의 형성에 큰 기여를 한 이 공영역은 점차 축소됩니다. 공영역의 핵심은 국가로부터 자율적이었다는 것인데, 국가가 개인의 복지욕구를 해소해주는 기관이 되면서 국가에 복무하는 체제 순응적 인간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는 처음에 비관적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체코 프라하에서 시작되어 주변의 여러 국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소비에트에 대항한 민주화운동, 그리고 그것이 이끌어낸 변화들을 지켜보면서 하버마스는 정치적 공영역의 순기능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정치적 공영역이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가능성을 되짚어본 것이지요.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여, 결국엔 부패한 대통령을 탄핵으로 이끈 토의민주주의의 모델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대통령의 국정농단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판적 문제의식을 가졌고, 정부에 민주적 의지를 반영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만한 문제가 아닌 다른 사회문제들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좀처럼 정부에 가닿지 않는다는 것은 하버마스의 약점인 듯합니다.

 

민주주의를 완성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이제, 모두가 문제라고 인식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사회문제들에도 귀 기울이는 것이 아닐까요?

 

8월 13일(월)에는 4강 “프랑스 혁명과 광장에 선 시민”이 이어집니다.

많은 참석 바랍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②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2

  1. 부제 소개

 

그런데 기원전 1세기 초 알렉산드리아의 문법학자인 트라쉴로스(Trasyllos)는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정리하면서 이 책의 제목을 그냥 <폴리테이아>가 아니라 <폴리테이아, 혹은 정의에 관하여. 정치적 대화편>(politeia ē dikaiou, politikos, Diog. L. III. 60)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그의 <정치학>에서 플라톤의 그 책을 <폴리테이아>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트라쉴로스가 뒤에 붙인 <정의에 관하여>라는 제목은 나중에 붙여진 제목이자 일종의 부제로서, <국가>의 내용과 관련하여 원제목이 가지고 있는 부족함을 보충하려는 의도에서 덧붙여진 것이라 하겠다.1) 그러나 플라톤의 <국가>의 기본 주제로 다루어지고 있는 ‘정의’(dikaiosynē)라는 개념 자체가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내용상 ‘나랏일에서건 개인의 내적 영혼에서건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상호 의존적인 요소들의 최선의 균형과 조화 그리고 질서를 구현해내는 기능(ergon)이자 덕(aretē)으로서 제시된다는 점에서 최소한 플라톤의 정치철학에서 그 두 가지 제목의 실질적 차이는 생각만큼 그리 크지 않다 할 것이다. 플라톤이 그리는 이상국가의 ‘폴리테이아’ 즉 시민적 생활 방식은 나라일의 측면에서건, 개인의 내적 영혼의 측면에서건 결국 각 기능의 최선의 조화와 공존을 담보하는 덕이자 원리로서 ‘dikaiosynē’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2)

참고로 이러한 <국가>의 제목과 부제와 관련한 문제는 일찍이 고대 시절부터 논쟁이 되어 왔는데 프로클로스(Proklos)가 전하고 있는 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 <국가>의 제목과 관련한 프로클로스의 논의

 

앞서 살폈듯이 플라톤의 <국가>의 제목에 ‘정치체제’와 ‘정의’가 병기된 이래 일찍이 기원 후 5세기경부터 그 두 가지 제목 중 어느 쪽이 <국가>의 진정한 주제(ho skopos, ē prothesis)인가에 대해서 고대 학자들 사이에서도 크게 논쟁이 되었다. 5세기의 신플라톤 학파의 철학자 프로클로스(Proclus de Lycie 412년-485년)가 남긴 플라톤의 <국가>에 관한 주석서3)에는 그 양쪽 주장과 프로클로스 자신의 견해가 간명하게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오늘날 우리가 <국가>의 요체를 이해하는데도 많은 시사점을 안겨 준다.

프로클로스는 우선 <국가>의 주제를 ‘정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점을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1) 이 대화편 제1권에서 케팔로스나 폴레마르코스, 트라쉬마코스가 처음 제기되고 있는 물음은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2) 이에 비해 ‘정치체제’에 관한 고찰은 그러한 ‘정의’에 대한 고찰을 보다 더 잘 들여다보기 위해 나중에 도입된 것이다. 즉, ‘정의’와 ‘정치체제’라는 두 개의 논제 가운데, 전자는 목적(ou heneka)이고 후자는 수단(heneka tou)이다. (3) 대화 인물 소크라테스 자신 또한 본래의 문제가 ‘정의’에 대한 것임을 수차례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420 b-c, 427d, 434d-435a, 445a-b, 427b, 484a-b, 548d, 588b 참고)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정치체제’가 주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거를 프로클로스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1) 분명히 문제 제기의 순서는 ‘정의’ 쪽이 앞서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주도적인 문제라서가 아니라 ‘정치제제’에 관한 고찰에 앞서 미리 길을 열어주고 그곳으로 이끄는 예비적 역할을 하기 위해 제기된 것이다. (2) <폴리테이아>라는 제목(ē epigraphē)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그 밖의 사람들의 저술에도 인용되어 있듯이 극히 오래된 유래를 갖고 있고, 플라톤 자신이 붙인 제목이다. 그리고 그것은 <파이돈>, <알키비아데스>와 같이 인물 이름에서 따온 것도 아니고 <향연>과 같이 상황으로부터 따온 제목도 아니며, <소피스테스>나 <정치가>와 같이 다루어지는 주요 문제 그 자체를 염두에 두고 붙인 제목이다. 이것은 이 대화편에서 주도적으로 추구되는 문제가 ‘정치체제’에 대한 것임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 밖에 (3) <법률>(739b 이하)이나 <티마이오스>(17b 이하)에서 언급되고 있는 내용들도 그 점을 뒷받침해준다.

그러면 이러한 두 개의 입장을 두고 프로클로스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는 말하길, “이상과 같은 사안에 대해 이 양자는 각기 다르게 주장하고 있지만, 우리로서는 양쪽 사람들의 주장 모두를 함께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의 견해는 내용의 측면에서 보면 서로 다르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나는 그 책이 목적으로 하는 주제는 ‘정의’임과 동시에 ‘정치체제’이기도 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이것은 주제가 두 개 있다고 하는 의미가 아니고 이것들 두 개는 서로 동일한 사안이라고 하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한 개인의 영혼에 있어서 정의로운 것은 잘 통치된 국가에 있어서 정의로운 정치체제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고 정의로운 정치체제 또한 개인의 영혼에 있어서의 정의를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서 서로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는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프로클로스가 이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제시하고 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국가의 3계층과 영혼의 3구분이라고 하는, 국가와 개인 영혼과의 구조상의 대응이다. 그러므로 정의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당연히 ‘정치제제’에 대해서 말하게 되어있고, 제대로 ‘정치제체’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반드시 개인 안에 내재된 politeia로서 ‘정의’에 대해 말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따라서 또 논자들이 문제 삼고 있는 ‘정의’로부터 ‘정치체제’로의 화제 이행에 관한 해석과 관련해서도 “그 이행은 결국 ‘정치체제’의 문제로부터 ‘정치체제’로의 이행 즉, 개인 내부에서 고찰되는 ‘정치체제’로부터 다수 대중에서 고찰되는 ‘정치체제’로의 이행이며, 그리고 ‘정의’의 문제로부터 ‘정의’의 문제로의 이행 즉, 소규모의 ‘정의’로부터 보다 분명한 ‘정의’로의 이행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한 쪽이 주도적(proēgoumenon)이고, 다른 한 쪽이 부수적으로 딸려가는(empipton) 것이라는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폴리테이아’라는 제목과 ‘정의’에 대한 탐구라고 하는 것은 서로 적절히 합치(ounadein)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politeia라는 제목에는 분명 ‘정의’의 본질 그 자체가 다름 아닌 ‘올바른 이치에 따라 사는 영혼의 정치체제’라는 것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론으로 제목이 붙여지지 않았던 것은 단지 politeia라는 말 쪽이 dikaiosynē(정의)라는 말보다 더 잘 알려져(gnōrimōteron) 친숙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그리 된 것일 뿐이라고 프로클로스는 결론짓고 있다.

물론 프로클로스의 결론이 플라톤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정의’와 ‘정치체제’라고 하는 두 개의 논제가 서로 유기적인 연관을 갖고 있음은 분명하다고 할지라도, 그 자체로 그것이 곧 양자가 – 나라에서건 개인의 영혼에서건- 서로 동일한 것임(allēlois ta auta)을 말해주는 것도 아니다. <국가>의 진정한 주제가 ‘정의’인가 ‘정치체제’인가에 대한 물음은 영혼과 결부된 그의 정의에 관한 주장이 서로 다른 정치체제들과의 연관 속에서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느냐에 따라 지속적으로 논쟁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할 것이다.

각주 1)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술을 보면 “플라톤의 <politeia>”로만 나온다. (<Politica> B1, 1261 a6, B5. 1264b29, E10. 1316a1, Θ7. 1342b32 Δ5. 1293b1, <Rhetorica> Γ 4. 1406b32) 로마 시대에서는 이 politeia를 그대로 로마자로 옮겨 politia라고 부르고 의미상으로는 라틴어의 respublica 및 civitas로 풀었다.(cf. Cicero, De divinitatione I. 29, II. 27). 우리가 오늘날 접하는 영어, 불어권의 제목 ‘The Republic’, ‘La République’은 피치노(Marsilio Picino) 이래 근세 라틴어 역본에서 많이 쓰인 Republica를 그대로 제목으로 사용한 학자들(G. A. F. Ast, G. Stallbaum)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 Civitas로 번역한 학자들(C. E. C. Schneider)도 있었다. 그리고 독일어 역본에서는 Der Staat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국가’라는 제목도 그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또 “공화국”이라는 호칭은 영역본을 보고 번역한 데서 온 것으로서 원제목의 의미와도 책의 내용과도 맞지 않는 제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울루스 겔리우스(Aulus Gellius)의 <앗티카의 밤(Noctes Atticae>(13,3)에서 이 책은 <국가 통치의 최선의 형태에 관하여>(de optimo statu reipublicae divitatisque administrandae)라는 이름으로 “플라톤의 저작”이라고 소개되고 있고, 플라톤 자신도 <법률> V. 739b에서 “첫 번째(이상적인) 국가와 정치제제, 최선의 법률”이라는 말로 이 <국가>에 실린 이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각주 2) 그런데 우리가 사용할 우리말 텍스트 <국가>를 옮긴 박종현 선생과 일부 연구자들은 이 책의 부제로도 쓰인 ‘정의’ 즉 dikaiosynē가 앞서 살폈듯이, 사회적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개인의 내적 영혼과 관련해서도 사용된다는 점에서, dikaiosynē를 사회적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우리말 ‘정의’(正義)로 옮기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dikaiosynē는 <국가>에서 나라가 그 고유한 구실을 제대로 수행하게 만드는 기능(ergon)의 의미와 함께 개인이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하게 만드는 덕(aretē)과 그 덕이 실현된 훌륭한(agathon) 상태 모두를 아우르고 있다는 점에서도 dikaiosynē는 ‘정의’라는 역어보다는 훌륭한 상태 일반으로서 순수 우리말인 ‘올바름’으로 옮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하물며 dikaiosynē는 나라는 물론 강도 집단이 자신들의 고유한 일을 잘 해내게 만드는 경우에도 요구되는 덕목이라는(351c)는 점에서도 정의라고 옮기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주장에 잘못된 점이 있다고 판단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국가>에서 dikaiosynē가 근본적으로 정치생활과 시민생활을 동일시하는 그리스인들의 시민적 덕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다가, dikaios하다고 일컬어지는 개인의 내면적 삶의 방식 또한 근본적으로 사회적 삶과 뗄 수 없는 유기적 관계를 갖는 것으로 제시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리고 그러한 내적 통일성이야말로 플라톤의 dikaiosynē가 갖는 매우 핵심적이고도 고유한 특징이라고 본다면, ‘올바름’이란 말로 그 특징과 의미를 온전하게 담아내기에는 다소 부족하다고 판단된다. 물론 정의라는 말이 우리말에서는 개인의 내면적 덕성에까지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말 또한 일정 부분 모자람이 있으나, 앞서 살폈듯이 플라톤에게 있어 개인의 삶 자체가 사회적 삶과 불가분의 연계를 갖는 한, 개인의 삶의 방식에도 ‘정의’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이 갖는 사회적 성격을 적극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장점도 있다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 강사는 dikaiosynē를 ‘정의’로 옮기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고 판단한다. 강도 집단과 관련해서도, 해당 내용은 기본적으로 ‘어떤 집단이 공동으로 일을 도모할 경우 서로에 대해 부정의한 짓을 저지른다면 결국 ‘합심과 우애’가 무너져 일을 그르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문맥에서 ‘나라나 군대, 강도단이나 도둑의 무리 또는 다른 어떤 집단(351c)’이란 표현 속에 포함되어 단 한 차례 언급되고 있는데다가, 정의가 갖는 ‘덕’과 ‘지혜’의 측면보다는 집단 구성원에게 요구되는 ‘합심과 우애’(homoia kai philia)의 측면을 드러내기 위한 차원에서 인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정의’라는 역어를 배제해야하는 결정적인 근거로까지 여겨지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우리말 ‘의리(義理)’라는 말에도 ‘옳을 의(義)’자는 들어있듯이 아마 플라톤도 트라쉬마코스 부류의 눈높이에 맞추어 설사 강도들이라도 그들이 공동의 일을 도모하는 한, 합심과 우애로서의 최소한의 정의는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사례의 하나로 포함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강도단은 불법적 집단이라서 ‘정의’라는 말이 맞지 않는다는 지적은 ‘올바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 할 것이다. 강도들 또한 올바른 자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올바름’이란 말은 나라나 개인 모두에 두루 사용할 수 있고 덕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장점이 있고 그래서 매우 안전한 선택이기도 하지만, 플라톤의 의도한 dikaiosynē의 사회 통합적 성격을 부각시키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어떤 의미에서는 오히려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다고 할 것이다. 앞에서 ‘폴리테이아’의 의미가 우리말로 온전히 옮기기 힘든 것처럼, dikaiosynē 역시 플라톤이 의도한 바를 우리말로 온전히 담아내기 힘들다면, 그래서 어차피 역어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면, 안전하지만 너무 포괄적인 우리말 ‘올바름’ 보다는 플라톤의 근본 의도를 보다 적극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정의’라는 역어가 보다 바람직하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학술 연구사적 측면에서도 플라톤의 <국가>가 이른바 ‘정의’, ‘justice’ 관련 문제를 다룬 최고의 고전이자 최초의 고전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원어 dikaiosynē의 특징적 의미를 살린다는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학술적 조회를 위한 개념어 차원에서도 ‘정의’라는 역어가 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무엇보다도 dikaiosynē’라는 말에는 전쟁과 정치투쟁으로 점철된 그리스 사회에서 그리스인들이 흘린 피의 냄새가 깊숙이 배어있다. 그러나 본 강사가 보기에 최소한 그것을 절감함에 있어 ‘올바름’이란 역어는 ‘정의’라는 역어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아무려나 어떤 역어가 더 원래 의미에 가까운가의 문제는 <국가>를 우리말로 옮기는 역자들의 관점과 선택의 문제로 여전히 남아있고, 박종현 선생의 역본 또한 앞으로 나름의 독보적인 관점과 가치를 하나같이 보전하게 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다만 본 강좌에서는 우리말 텍스트로서 박종현 선생의 <국가>를 선택하여 진행하되 – 천병희 역본은 <국가>의 문학성을 돋보이게 하는 장점이 있고, 박종현 역본은 <국가>의 철학적인 의미를 보다 잘 살려낸 역본으로 판단된다. 정암학당 역본은 그 두 개의 장점을 모두 담아내기를 기대한다. – dikaiosynē’의 역어만은 ‘정의’라는 말을 사용하려고 한다.

각주 3) Proclos, In Platonis Rempublicam, ed. G. Kroll, vol. I, pp. 7-14

 

 

  1. 집필시기

 

<국가>는 단지 분량만 보아도 버넷(J. Burnet, 1902)판 텍스트로 396쪽, 스테파누스(Stephanus 1578)판 쪽수로 294쪽을 상회하는 장편이고 그 내용의 풍부함, 사상의 힘은 물론 생동감 있는 필치까지 함께 어우러져있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작품들 가운데 가히 최고의 걸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 <국가>가 쓰여 진 시기가 연대 상으로 정확히 몇 년쯤인지 즉 플라톤이 몇 살 때쯤 이 대화편을 저술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왔다. 또 이 대화편이 장편인 만큼 특정 부분, 특히 제1권의 경우 문체론적으로 전기 대화편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전기 대화편을 닮아 있어, 아예 집필 연대가 다른 별개의 독립적인 대화편으로 추정하기도 하고, 혹은 플라톤이 <국가>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그것의 일부 내용을 고쳐 <국가>라는 하나의 대화편에 포함시킨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4)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가설들은 오늘날 거의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다. 상당한 객관성을 표방하고 있는 오늘날의 연구 성과에 의하면, 우리가 읽고 있는 <국가>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매우 긴 대화편이어서 당연히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집필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저작 연대는 대체로 기원전 377-367년 무렵, 그러니까 플라톤의 나이 50-60세 사이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5) 그러니까 관례에 따라 플라톤의 저작을 전기, 중기, 후기로 크게 나누면 <국가>는 중기의 저작에 속한다고 하겠다.

<국가>의 집필 시기로 거론되는 이 시기는 플라톤이 이탈리아와 시켈리아 여행에서 아테네에 돌아와 아카데메이아를 창설(기원전 388/7년 경 플라톤 나이 40세 무렵)한 지 10 여년 이상이 경과한 시기이다. 그리고 이 시기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양대 세력이 패권을 다투면서도 최소한의 공존을 유지하였던 이전 세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그리스 사회 전체의 역량이 크게 약화되면서 내부적으로 큰 혼란과 분열로 치닫고 있었던 때였다. 아테네는 기원전 404년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배 이후 장벽과 제해권을 잃었음은 물론 인구 또한 전쟁 이전의 3분의 1수준으로 줄어들어 60여 년 후 338년 멸망에 이르기까지 혼란스런 민주정 치하에서 내분을 거듭하며 재기가 쉽지 않았고, 스파르타 역시 장기간의 전쟁으로 힘이 다 소진되었음에도 과도한 확장욕으로 주변국들과 마찰을 빚어 기원전 395년부터 9년간의 코린토스 전쟁을 치르며 더욱 수렁에 빠져 들었다. 스파르타는 이후 기원전 371년 레욱트라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테베에 패배함으로써 결국 지역 군소 국가로 전락,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리고 기원전 377년 제2아테네 동맹(델로스 동맹 100주년) 이후 테베가 새로운 그리스의 맹주로 부상하였으나 기원전 362년 펠레폰네소스 원정 중 에파미논다스가 전사하면서 점차 세력이 위축되고 말았다. 게다가 나라와 세력들마다 궁지에 몰리면 페르시아를 끌어들임으로써 그리스 사회의 내분과 혼란을 부채질하고 있었던 데다가, 결정적으로는 북방의 마케도니아가 신흥 강국으로 떠올라 남진함에 따라 아테네와 스파르타 양대 세력에 의해 유지되던 전통 그리스 사회 전체는 급격하게 해체와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 절대 절명의 시대에 플라톤은 당면한 아테네의 비극적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앞장서 갑론을박하던 이소크라테스와 데모스테네스와 달리 아카데메이아에 쳐 박혀 교육과 저술에 전념하며 이상 국가를 써 내려 가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우리는 나중에 그의 대화편에 나타나 있는 사상 내용과 플라톤의 생애를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플라톤이 왜 아테네와 그리스 사회가 몰락에 접어든 이 절대절명의 시기에 <국가>와 <법률>을 집필하게 되었을까 혹은 집필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를 짐작할 수 있는 정황들과 근거들을 살펴보게 볼 것이다.

각주 4) <국가> 제1권이 <트라쉬마코스>라는 이름을 가진 독립된 대화편으로서 <카르미데스>, <라케스>와 같은 시기에 쓰여 졌다고 보는 학자들은 아래와 같다. K. F. Hermann, F. Dȕmmler, H. von Armin, P. Friedlȁnder 등이 있다. 또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국가>가 나오기 이전에 기원전 388/7년경에 별도의 다른 <국가> 이를테면 <국가>초벌본이 있었다고 추정하는 학자(M. Pohlenz)도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가설들에 대해서 J. Adam, A. E. Taylor, P. Shorey 등은 하나같이 반대 혹은 강한 회의를 표명하고 있다.

각주 5) 젤러(E. Zeller)는 기원전 375년경으로 추정하고 있고 빌라모비츠(Wilamowitz)는 기원전 374년 혹은 그보다 약간 뒤로 추정하고 있다. 테일러(A.E. Taylor)는 <일곱번째 편지>에 철인왕 사상이 표명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플라톤이 40세가 된 직후 즉 기원전 383년 전후에 쓰여졌다고 주장하지만 필드(G.C. Field), 로스(W. D. Ross), 디에스(Diés) 모두 받아들이지 않는다. 쇼리(P. Shorey)는 기원전 380-370년 사이에, 디에스는 기원전 375년 전후에, 필드(G.C. Field)와 크로스, 우즐리(R. C. Cross & A. D. Woozley)도 기원전 375년 경 집필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1. 대화 상정 시기

 

그런데 플라톤은 이 <국가>를 집필하면서 극중 대화가 이루어지는 시기를 언제로 상정하였을까. 유감스럽게도 이 점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일치하지 않는다. 우선 19세기 초 베크(A. Boeckh)가 일찌기 <국가>의 대화 상정 연대를 기원전 410년 또는 411년으로 추정한 이래, 죠위트(B. Jowett)와 캠벨(M. Campbell), 아담(J. Adam), 쇼리(P. Schorey) 등 유수 플라톤 학자들이 그에 찬동하면서 410-411년 설은 꽤 유력한 가설로 여겨졌다. 그러나 <국가>에 담겨 있는 시대 관련 언급들, 등장인물들의 역사적 활동 그리고 관련된 기타 전승들이 전하는 내용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아, 그 이후 <국가>의 대화 상정 시기는 기존의 410년 설에서부터 멀리는 430년 설까지 학자들 사이에서 계속 논란이 되고 있다. 사실 <국가>에 담긴 아래와 같은 몇 가지 내용만 보더라도 그 시기를 특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최소한 기원전 429년 아테네에서 역병이 돌던 시기 또는 그 이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케팔로스가 아직 생존 인물로 등장한다는 점, 또 플라톤 자신의 언급으로만 보자면 최소한 기원전 425년 이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프로타고라스와 프로디코스도 아직 생존인물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600c,d) 그리고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가 메가라 전투에서 수훈을 세웠다고 하지만 그 메가라 전투가 언제 벌어진 전투인지 특정하기 어렵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소크라테스가 케팔로스에게 ‘자신은 아직 노년에 이르지 않아 앞서 간 사람들한테서 그 길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장면(328e)은 본 대화편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가 아직 60세에 가까운 고령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 등 등은 모두 대화상정 시기를 확정하는데 논란의 요소들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정확한 시기는 확정하기 어렵다 해도 그 대안들이 가리키는 시기는 모두 고대 그리스 사회를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한 펠로폰네소스 전쟁(431-404) 기간의 한 가운데이었음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투퀴디데스가 전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오랜 기간 그 전쟁이 야기한 그리스 사회의 내분과 혼란상은 물론 전쟁 과정에서 벌어진 이루 형용하기 힘든 가혹하고 잔인하기 짝이 없는 참혹상을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 대화상정 시기로 개연성이 높은 410년~420년 전후의 상황 이를테면 기원전 416년 멜로스 시민에 대한 인종 청소급 대학살에 대한 아테네 주변국들의 공포와 불신, 특히 알키비아데스의 선동에 따라 추진되었다가 그의 배반과 민회의 판단 착오로 결국 4만 여명의 병력과 아테네 5년 예산 정도의 재정을 일시에 날려 버린 기원전 413년 시칠리아 원정의 참담한 실패, 그 이후 기원전 412년 아테네 동맹군의 반란, 기원전 411년 일시적인 과두정의 등장과 기원전 406년 아르기누사이 해전 후 벌어진 섣부른 장군들의 처형, 기원전 404년 식량 공급 항로의 차단에 따른 굴욕적인 항복에 이르기까지 근 10 여 년 동안의 기간은 아테네 사람들 모두에게 그 이전까지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극도의 정치사회적 불안과 히스테리, 경제적 피폐함을 안겨다 준 그야말로 가장 엄혹하고도 비참한 시기가 아닐 수 없었다. 플라톤은 그런 시기의 온갖 혼란상을 겪어가며 청년으로 자라났고 또 여전히 내분과 혼란이 거듭되던 중년 시절 그 혼란의 시기를 되돌아보며 그 시기를 배경으로 <국가>를 저술하고 있었던 것이다.

 

<참고> 펠로폰네소스 전쟁 약사(기원전 431~404)

 

*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양대 세력인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서로 패권을 다툰 전쟁으로 그리스 역사에서 가장 비참한 전쟁이자 그리스 사회를 몰락으로 이끈 전쟁.

* 전쟁 발단의 배경 – 페르시아 전쟁 승리(기원전479년) 이후 페리클레스가 아테네를 제국화하며 급속하게 성장과 발전을 거듭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스파르타의 반발. 특히 아테네의 경제적 성장과 함께 아테네의 민주정이 그리스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소수의 귀족들이 다수의 헤일로타이를 억압하는 사회구조를 유지하던 스파르타에게 큰 위협이 됨.

* 아테네 동맹 – 에게 해 동북부 해안 주변 섬나라와 연안 국가로 이루어진 아테네 제국

* 펠로폰네소스 동맹 – 스파르타의 주도하에 결성된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중부 내륙지방 강국들의 군사 동맹.

연 도

(BC)

일어난 사건
480 아테네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 함대 격파
479 페르시아 전쟁 종결. 479 아테네, 스파르타 연합군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승리
475 테미스토클레스 아테네 성벽 재건
470 반스파르타파 데미스토클레스 도편 추방, 친스파르타파 키몬 정권
461 급진 민주주의자 에피알데스 암살, 페리클레스 부상, 키몬 도편추방
465 스파르타, 헤일로타이 반란. 동맹군 소집, 아테네 중장보병 4,000명 파견하였으나 반란 지원 의심하여 귀환조치. 아테네, 도망 헤일로타이 나우팍토스에 정착시킴.
460 아테네에 두려움 느낀 아이기나, 펠로폰네소스 동맹 가입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사(前史)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460-446)
458 아테네 코린토스 지협 봉쇄. 스파르타, 도리스 지원 차 도해(渡海) 했다가 해로 차단당함. 스파르타 방향을 바꾸어 테베의 지원을 받아 보이오티아 지역 타나그라 공격. 타나그라 전트에서 스파르타 승리했으나 큰 피해입고 육로로 철수
457 페리클레스 실권 장악, 아테네 오이노피타 전투 테베 격퇴 후, 테베 제외한 보이오티아 대부분을 아테네 속국화. 아이기나 항복, 아테네와 페이라이에우스 외항 장성 건설, 아테네 공세 강화.
454 460년 이후 진행된 이집트 반란 지원 차 떠난 원정 실패(이집트, 페르시아 지원으로 이미 반란군 진압, 이후 페르시아 군에게 포위당한 후 패배. 델로스 동맹에 충격, 내부 단속.
451 도편추방 당했던 키몬 귀환, 스파르타와 휴전 협정, 페르시아와 전쟁 재개, 키프로스 전쟁 승리, 이후 키몬 전사
447 테베, 재기하여 코로네이아 전투에서 아테네에 승리 후 보이오티아 전체 수복. 이후 에우보이아 반란. 아테네가 진압하려 간 사이 메가라 반란. 코린토 지협 봉쇄 해제. 아테네 에우보이아 철수
446 스파르타 아테네 침탈 후 복귀하자, 페리클레스(495-429), 에우보이아 잔혹 진압.

페리클레스 주도로 아테네와 스파르타와 30년 평화 조약

443 아테네 페리클레스 장군직 임명, 내치에 주력. 이후 12년 아테네 문화적 전성기
440 사모스, 델로스 동맹 반란, 스파르타, 협정에 따라 불개입
436 에피담노스(이오니오스만 서북쪽, 알바니아 두러스)에서 민중파(현재 식민지배 코르퀴라)가 귀족파(식민 건설자인 코린토스파) 추방하자 귀족파 요청으로 코린토스 개입 후 코르퀴라와 코린토스 간 분쟁 일어남.
433 아테네가 전략적 요충에 위치한 코르키라 민중파 지원 -> 코린토스군 철수. 스파르타와 코린토스 등 그 동맹국들은 아테네의 침략 행위를 비난. 아테네 코린토스 식민시 포테이다이아 압박. 포테이다이아, 스파르타에 구원 요청
432 코린토스 펠로폰네소스 동맹국 소집 요구, 페리클레스 양보 거부, 분쟁 해결을 위한 외교적 노력도 모두 실패. 스파르타 대 아테네 전쟁 결의
<펠로폰네소스 전쟁>(431-404)
431 마침내 스파르타의 동맹국 테베, 아테네의 동맹국인 플라타이아이를 공격 전쟁 시작. 플라타이아 아테네 지원 요청하고 결사 항전 했으나 지원이 늦어져 함락, 플라타이아 시민 학살. 아르키다모스가 이끄는 스파르타 동맹군이 아티카를 침공. 페리클레스, 우세한 동맹군과 싸우기를 거부하고, 아테네 시를 굳게 수비하면서 우세한 해군력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적의 해안과 선박을 집요하게 공격. 페리클레스 소개 작전.6) 페리클레스 전몰자 추모 연설.
430 아테네 역병(페스트? 장티푸스?) 발생
429 페리클레스역병으로 사망. 민간인만이 아니라 군인의 대다수도 전염병에 희생.

스파르타 그리스 서부에 있는 아테네의 기지들을 공격 격퇴 당함. 바다에서도 패배.7)

428 아테네의 속국들 반란 진압, 레스보스 섬의 수도 미틸레네를 장악- 남자들을 학살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노예로 만들기로 의결, 이튿날 마음을 돌려 반란 지도자들만 처형
425 아테네 시칠리아 지원군 폭풍으로 스파르타 인근 필로스 정박 후 요새 구축. 스파르타 필로스 탈환 작전 중 정규시민(전체 3500명) 120명 포함 440명 스팍테리아섬에 같힘. 스파르타 위축.8)
424 델리온 전투 브라시다스가 이끄는 스파르타군, 칼키디케에서 중요한 승리. 트라케 지역 아테네 사령관 투퀴디데스 추방 당함, 아테네 속국들 잇따라 반란
422 클레온 트라케 진격,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브라시다스와 아테네의 지도자 클레온 양 강경파 모두 전사. 온건파 니키아스가 평화조약 제안.
421 니키아스 평화조약. 이후에도 양국은 작은 도시국가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애씀, 그 수 외교적 책략에서 소규모 군사작전. 불안정한 평화
419 아르고스와 스파르타 평화 협정 종료, 아르고스, 만티네이아, 엘리스 등과 스파르타 무력화 시도.
418 아르고스 동맹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스파르타에 패배.
416 아테네 멜로스 재공격, 시민 학살.9)
415 * 아테네 시칠리아 원정10) 시켈리아 소도시 세게스타의 구원 요청을 명분 삼아 주전파 알키비아데스 선동.

* 원정 전날 헤르마(헤르메스신을 새겨 넣은 사각 열주) 다수 파괴, 알키비아데스를 음해, 출정 후 궐석재판에서 신성모독죄로 소환. 알키비아데스 스파르타 망명.

* 시라쿠사, 스파르타군의 도움(열등자 모타게스 출신 활약)으로 아테네의 봉쇄 뚫고 전열 정비 반격.

*스파르타 공식적으로 전쟁 선포, 니키아스 평화조약 깨짐

413 아테네 증원된 뒤에도 다시 패배. 라마토스 전사, 해군마저 참패, 후퇴하다가 전멸, 니키아스 포로로 잡혀 처형, 7,000명 포로 노예화(함선 216척, 병력 4만명, 5년 예산 4500달란트 망실), 스파르타 알키비아데스 조언으로 아테네 북방 데켈레이아 요새 구축하여 북방 식량 보급로 제압. 아테네 시민 25,000명에서 9,000명 수준으로 축소, 함선 100척 수준.
412 * 아테네 동맹시들의 반란, 아테네 레스보스, 사모스 반란 진압 식량 보급 해로 유지11) 스파르타 페르시아 지원 받아 로도스 등 동맹시로 편입
411 * 아테네 정치적 혼란, 과두정 쿠데타. 과두 정치체제 온건 정권으로 바뀐 후 실각 민주정 회복.12)

* 아테네 해군 식량보급해로 확보 위해 헬레스폰토스 파견 키노세마 해전, 아비노스 해전 승리, 퀴지코스 해전 승리하여 보급로 확보 성공. 양측 모두 군사적 큰 손실. 퀴지코스 해전 이후 스파르타 평화협정 제안, 아테네 거부. 알키비아데스 귀환,

407 스파르타 뤼산드로스 페르시아 총독 지원을 받아 함대 90척 복구, 총 170척 규모 구축.
406 *스파르타, 노티움 해전에서 아테네 알키비아데스 함대 격파

*스파르타의 칼리크라티다스, 아테네 코논의 70척 함대 격파.

*미틸레네항에 고립된 코논을 구하기 위해 100척 함선 급조하여 총 155척 출동

* 아테네 해군과 스파르타 칼리크라티다스 120척 함대, 아르기누사이 해전. 아테네 대승(25척 상실, 70척 격파).

* 승전 후 시신 수습 방기 사유로 아테네 장군 8명 중 6명 처형(페리클레스 아들 페리클레스 포함) 유능 해군 지휘관 축소. 전의 위축

405 스파르타 뤼산드로스 복귀 후 페르시아 키로스 왕자의 후원을 받아 해군 재건. 헬레스폰토스 해협 해상로 확보, 아테네 식량 보급 해로 확보 위해 아이고스포타모이로 파견 했으나 대패. 165척 함선 상실, 12척만 탈출.
404 아테네, 스파르타 해군의 봉쇄를 뚫지 못하고 멜로스에서 아테네가 자행한 학살 떠올리며 6개월간 공포와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조건 수용 항복. 조건 : 장성 해체, 함대 해체, 제국해체, 이후 30인 과두정 수립, 테베와 코린토스 등 구 동맹국들 스파르타의 전후 아테네 처리에 불만. 아테네 민회참석 자격 시민 15,000명으로 감소, 코린토스 전쟁 이후에도 25,000 정도 복구.(전쟁 이전의 3분의 1정도로 인구 축소)
<전쟁 이후>

스파르타 아테네 제국 흡수하였으나 제국 유지용 공물로 제국 구성 도시로부터 반발 삼. 제국으로부터 들어오는 공물로 내부 계층 분화 가속화

각주 6) 스파르타는 거의 매년 아티카 반도 침공하여 아테네 인근 농지를 유린하고 황폐화시켰다. 그러나 아테네 주작물인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는 훼손 되었다 다시 살아나 쉽사리 황폐화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스파르타의 경우 수적으로 우세한 헤일로타이(스파르타의 국유 노예)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감시해야 했기 때문에 아티카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스파르타군의 아티카 원정은 가장 길었을 때도 고작 40일 정도에 불과했다. 한편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시민들을 설득하여, 스파르타의 공격이 있을 때마다 모든 농민을 아테네 성벽 안으로 피신시키고 대신 델로스 동맹의 함대를 대규모로 동원하여 펠로폰네소스의 해안지역을 유린하기로 하는 전략을 세웠다. 비록 스파르타군이 아테네 주변의 농지를 약탈했지만, 강력한 아테네 해군이 해운을 통한 식량 공급선을 지켜주었고, 또한 항구에서 하역된 식료품은 항구부터 아테네 도심까지 세워진 장벽을 따라 안전하게 운반되었기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초토화 작전에도 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각주 7)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좁은 시내로 몰리자 위생 상태와 영양상태가 모두 악화되어 BC 430년 아테네에 수차례 역병이 발생하여 아테네 주민의 1/3 가까이(7~8만명)가 사망했다. BC 429년에는 지도자 페리클레스마저 역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러나 아테네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BC 429년 나우팍투스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는 등, 바다에서는 해상권을 유지하였다. 페리클레스가 죽은 후 아테네는 주전파인 클레온이 실권을 잡아 보다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게 된다.

각주 8) 스파르타는 아테네가 질병과 재정 악화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BC 427년 플라타이아이 시를 점령한 것을 제외하고는 크게 전세를 뒤집지 못했고 오히려 그 후 몇 년 동안은 아테네인들이 더 공세적이었다.

각주 9) 멜로스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참가하지는 않았으나 주민들이 대부분 도리스인들이어서 종종 스파르타 함대의 출입을 허용하였다. 이에 아테네는 이전 공격의 실패를 교훈 삼아 재차 멜로스를 공격하여 점령 후 시민들 대부분을 죽이고 여성들은 노예로 팔아버렸다. 점령 과정에서 멜로스인들과 아테네인들과의 대화는 정의와 힘의 관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유명하다. 멜로스인들은 정의에 의거 항복할 수 없고 시민들에 대한 처리 또한 정의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아테네인들은 ‘정의는 힘 있는 자가 정하는 것’이며, ‘약자는 힘 있는 자가 만든 정의에 순응할 때 행복과 안정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아테네는 결국 시민 대부분을 학살하고 나머지는 노예로 팔아 넘겼다.

각주 10) 시칠리아의 작은 도시들은 아테네와 같은 이오니아인들이 세웠지만, 시칠리아의 가장 강력한 도시 시라쿠사는 스파르타와 같은 도리아인이었다. 시라쿠사에게 위협을 받던 작은 시칠리아 도시들은 강력한 아테네를 끌어들여 시라쿠사를 견제하고자 하였고, 아테네에게 있어서도 시라쿠사는 언제든지 스파르타와 연계될 수 있는 잠재적 적국이었기에, 아테네가 전쟁 중에 이곳에 진출할 이유는 충분했다. 뿐만 아니라 시칠리아는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었다.

각주 11) 이 와중에 에우보이아와 헬레스폰토스의 도시들까지 반란에 가세했다. 아테네는 전쟁 초기에 자신들의 재산과 가족을 에우보이아로 상당수 이주시켰기 때문에 에우보이아의 반란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헬레스폰토스 해협은 아테네의 식량보급항로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그럼에도 아테네는 심각한 재정난에 빠져 있었다.

각주 12) 아테네 상류층은 아테네에 민주정이 들어선 이후 지난 100년간 민주정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상류층 출신인 페리클레스 사망 이후 하층민 출신들이 정권을 장악하여 부자들의 전쟁 부담금을 급격하게 올리자 결국 불만이 폭발하였다. 쿠데타 후 무보수로 일하는 400명이 권력을 독점하였는데 이는 하층민의 정치 참여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권력의 집중도를 두고 과두파 내에서 의견 차이가 발생하여, 소수에 의한 통치를 고집하는 급진파와 대중의 정치 참여 확대를 원하는 중도파로 분열되었다. 한편 당시 아테네의 가장 강력한 군사 세력이었던 사모스 섬의 아테네 함대는 쿠데타 소식을 듣자 민주정을 지지하고 스파르타와 계속 전쟁을 수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알키비아데스의 만류로 아테네 함대가 본토로 쳐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스파르타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중도파가 힘을 얻게 되었다. 상황이 불리해지자 급진파는 스파르타에 평화협상을 제안하는 동시에 항구에서 농성을 했는데, 결국 중도파에게 격파되어 추방당했고, 이로 인해 짧았던 400인 과두정은 막을 내렸다. 한편 아테네의 배신자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로 망명하여 과두정 쿠데타를 지원했지만, 쿠데타 이후에는 오히려 민주정을 지지하는 사모스 민중에 영합하여 사모스 함대 사령관이 되어 이후 BC 406년 노티움 해전까지 아테네 함대를 지휘하였다.

 

 

  1. 등장인물

 

소크라테스(Sokratēs)기원전 469-399년)

이 대화편은 소크라테스가 1인칭으로 전날 있었던 대화를 어떤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소크라테스가 상대하고 있는 사람을 발언 순서대로 살펴보면 폴레마르코스의 시종, 폴레마르코스, 글라우콘, 아테이만토스, 케팔로스, 트라쉬마코스, 클레이토폰이 있으며 발언은 하지 않지만 대화 자리에 함께 있는 사람으로서는 뤼시아스, 에우튀데모스, 카르만티데스 등이 거론되고 있다(328b)

 

케팔로스(Kephalos)

폴레마르코스, 뤼시아스 및 에우튀데모스의 아버지이다. 시켈리아 섬 시라쿠사이에서 뤼사니아스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페리클레스의 상업 장려 정책에 따라 아테네로 이주하여 이후 30년간 부유한 거류외인으로서 페이라이에우스에서 살았다.(cf. Lysias 12. 4) 그의 재산은 반 정도는 상속한 것이고 반 정도는 자신이 벌어들인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330b) 그는 아테네 굴지의 재산가로 3채의 집을 소유하고 있었고 무기(방패) 제조업을 경영하면서 120명의 종업원을 고용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정도의 고용 규모는 당대 최대 규모로 평가된다.

생존연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것은 없지만 기원전 404년에는 이미 고인이었던 게 확실하다. 케팔로스는 대략 기원전 429년 아테네에서 역병이 유행할 때 죽었으며 폴레마르코스 형제가 투리오이로 이주한 것은 그 이후로 추정된다.(Pauli-Wissoa, Realenziclopedie. s.v. Polemarchos) 이 대화편에서 케팔로스는 고령의 인물로서 그의 아들 폴레마르코스의 집에서 소크라테스를 만나 노년에 관해서 함께 대화를 나눈다. 플라톤의 대화편의 등장인물로서 상공인이자 거류외인으로서 케팔로스 만큼 비중 있게 그려진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당대의 신흥 상업 세력을 대표하는 케팔로스와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유발시켜 <국가> 전체 논의의 주제를 구성하는 실마리가 된다. 이미 고인이 되었음이 분명한 그를 정의라는 주제를 풀어가는 단초를 제공하는 인물로까지 무리해서 등장시킨 까닭이 따로 있는 것일까? 그 또한 우리의 흥미를 끈다.

 

폴레마르코스(Polemarchos)

케팔로스의 장남이자 뤼시아스와 에우튀데모스의 형(328b)이다. 뤼시아스의 생존 연대는 통상(플루타르코스, <10명의 연설가들의 생애> Vitae Decem Oratorium, III Lysias 835c, sqq. 및 Dionys, Halicarn., Lysias 1. 참고) 기원전 459-378년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형인 폴레마르코스가 태어난 해를 기원전 460년 정도로 잡으면 소크라테스보다 나이가 9살 정도 적은 사람이 된다. 그러나 이 뤼시아스의 연대에 관해서는 아주 다른 견해가 있어서(Fr. Blass, Attische Beredsamkeit I, 341 sqq 참고) 그것에 의거하여 폴레마르코스가 태어난 해를 기원전 450년경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Th. Lenscchau, in Pauli-Wissoa, s,v, Polemarchos) 그의 부친 케팔로스는 시켈리아 섬 시라쿠사이 사람이었지만 아테네로 이주하여 아테네 외항 페이라이에우스에 살았다. 거류외인으로서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나 마침내 큰 부를 이루었기 때문에 폴레마르코스도 윤택한 환경에서 아테네의 훌륭한 청년들의 모임에도 참석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부친의 사후 동생들과 이탈리아 남부 신흥도시 투리오이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토지와 시민권을 얻어 살았지만 아테네 군의 시켈리아 원정 실패(기원전 413년)로 더 이상 투리오이에 머물기가 어려워 기원전 412년에 아테네로 돌아와 가업을 다시 경영하며 페이라이에우스에서 살게 된다.

그러나 그의 집안이 소유하고 있었던 재산이 안타깝게도 그를 파멸로 이끈다. 기원전 404년 아테네의 패전 후에 들어선 30인 과두 정권이 재정의 궁핍함을 타개하기 위하여 강력한 조치의 일환으로 폴레마르코스를 체포하여 처형한 후 그의 전 재산을 몰수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간신히 생명을 건진 동생 뤼시아스가 노년에 행한 연설(Lysias XII : Contra Eratosthenem 8-19)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폴레마르코스가 소크라테스를 잘 따랐다는 것은 <국가> 서두 부분을 봐도 짐작이 된다. 대화 역시 폴레마르코스의 집에서 이루어진다. 그 자신도 아버지 케팔로스의 뒤를 이어받아 소크라테스와 정의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고(331e-336a) 그 후 트라쉬마코스와 소크라테스가 서로 논쟁할 때 소크라테스의 입장에 동조하여 트라쉬마코스 편에 서 있는 클레이토폰과 말씨름도 잠깐 벌인다.(340 a-b) 게다가 제5권 도입부에서는(449b) 아데이만토스와 귓속말을 나누면서 논의 주제를 부인과 자식들에 관한 문제로 전환시키는 역할도 한다. 동생 뤼시아스가 연설가로 나오는 <파이드로스>에서는 뤼시아스와 대조를 이루면서 “마침내 철학 쪽에 마음을 두는”(257b) 사람으로 언급되고 있다.

 

트라쉬마코스(Thrasymachos)

흑해 입구에 있는 칼케돈 출신의 연설가이자 소피스트이다. 연대는 뤼시아스와 비슷하다고 언급되고 있지만(Dionysios, Halicarn., Lysias 6) 뤼시아스가 태어난 해가 기원전 459년인지 여부가 확실하지 않고 약간 시대가 아래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소크라테스보다는 최소한 10살 이상 아래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 가운데 일부만 전해지고 있는 <잔치꾼들>Daitaleis에도 그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 작품이 427년 공연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학자들은 그가 그 시기 전후에 아테네에서 수사학을 가르쳤음이 분명하다고 믿고 있다. 게다가 당대 연설기술과 관련한 여러 책에서 그의 이름이 인용되는 것으로 보아 그는 당시 그 수사학 분야에서 상당히 명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설기술 비판을 주제로 하는 <파이드로스>에서도 비록 비판적이기는 하지만 일단 그를 아테네에서 성공한 연설가라고 언급하고 있고(261c, 266c-d, 269d, 271a), 아리스토텔레스도 <소피스트 논박>에서 그가 수사학 이론의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사람으로 언급하고 있다. 참고로 그 내용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수사학의 시초를 발견했던 사람들은 수사학 전체에서 아주 적은 부분만을 발전시키는 데 지나지 않았지만 오늘날의 명성이 자자한 사람들은 그것을 조금씩 발전시켰던 여러 사람들의 계보 말하자면 후계자들로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그러한 상태에까지 그것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즉 최초의 발견자 다음에 티시아스가 오고, 트라쉬마코스는 티시아스 다음에 오고 그리고 테오도로스는 트라쉬마코스 다음에 계속 이어갔지만,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수사학에 대해서 각자 많은 기여를 이루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식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서 별로 놀랄 일이 못되는 것이다.”(183b 31-32, <소피스트 논박> 김재홍 역, p.239)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도 트라시마코스가 재치 있는 직유법에 능하다고 언급하고 있고(III 11, 1413a5-10), 헤로디코스라는 사람이 그에 대해 ‘이름 그대로(thrasys) 논쟁에서 늘 건방졌다’고 말했다는 내용도 전하고 있다.(II. 23, 1400b17-23)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도 아이올리스의 소도시 퀴메(Kymē)에서 민주정을 전복시킨 사람으로 트라쉬마코스라는 이름이 나오지만, 시기 관련한 전후 내용의 맥락상 우리가 말하는 같은 인물로 보이지는 않는다.(V. 1304b-1305a)

이밖에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뉘시오스는 트라쉬마코스가 ‘다양한 수사적 기술을 가졌고 순수하고, 섬세하며, 창의적이고,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고 전하면서도 그가 소책자나 과시용 연설문 외에 후세에 남길만한 어떤 책도 쓰지 않았다는 점에서 ‘예리하고 똑똑한 뤼시아스에는 못 미치는 2급 연설가’라고 평하고 있다.(<peri Isaeos> 20) 그리고 그는 트라시마코스가 아테네의 보수적인 상류층 한 젊은이를 위해 써준 연설문의 서두로 보이는 제법 긴 조각글 하나를 전해 주고 있기도 하다(Fr. 85B1 DK). 그리고 비잔틴의 <수다>(Suda)에는 그가 플라톤과 이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는 기록도 있으나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 모든 전승에도 불구하고 그곳 어디에서도 <국가> 제1권에 실린 정의에 관한 그의 대담한 주장과 연관된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어쩌면 플라톤은 <국가>에서 자신이 반드시 혁파하지 않으면 안 될 대상의 하나가 소피스트들인 한, 그 대표로서 기원전 5세기 대화상정 시기 전후해서 이름을 날리던 트라쉬마코스를 소환했을지도 모른다.

 

클레이토폰(Kleitophōn)

아리스토뉘모스의 아들이며 아테네 정계에서 활동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테네 정치 체제>(Athēnaiōn politeia)에서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말기의 아테네 정치 정황과 관련한 그의 행동에 대해 두세 번 언급되어 있는데 그곳에 나타난 행적으로 미루어 보면 그는 넓은 의미에서 민주파에 속하면서 그 중에서 보수파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국가>에서 그는 트라쉬마코스를 지원하여 소크라테스를 지지하는 폴레마르코스와 맞서고 있다. 트라쉬마코스에 관한 그의 입장은 <클레이토폰>에서도 드러나 있다. 기원전 405년에 상연된 아리스토파네스의 <개구리> 에서 아이스퀼로스와 논전을 벌이던 에우리피데스는 아이스퀼로스와는 대조적으로 자신에게서 섬세하고 정치한 교양을 배우는 “나의 제자”로서 클레이토폰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

 

글라우콘(Glaukon)

아리스톤의 아들이자 플라톤의 형, 아데이만토스의 남동생이다. 아데이만토스와 함께 본 대화편의 주요한 등 인물로 등장하며 특히 제2권의 처음부터 중요한 문제를 제기한 이래 끝까지 아데이만토스와 교대로 소크라테스의 이야기 상대역을 맡고 있다. 덧붙여 이 두 명의 형제는 <파르메니데스>의 서두 부분에도 나오고, 그들의 의붓 형제(아버지가 다른 남동생) 안티폰을 소개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글라우콘의 생존 연대에 관해서는 자세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국가>에서(368a) 그는 아데이만토스와 함께 메가라 전투에서 무훈을 세웠다는 경력이 언급되고 있다. 이 메가라 전투는 투퀴디데스(<역사> 제4권72)에 기록되고 있는 기원전 424년의 전투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아담(368a의 주)과 그 밖의 사람들이 말하듯이, 디오드로스(13의 65)에서 언급되고 있는 기원전 409년의 메가라 전투일 수도 있다. 그 어느 경우이건 당시 벌써 병역에 복무하여 무훈을 세울 정도의 나이였다면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는 기원전 427년에 태어난 막내 동생 플라톤과는 나이 차이가 상당히 컸다고 생각된다. 이 메가라 전투에 대해 기원전 424년 설을 취할 경우 플라톤은 아직 3살 무렵이 되고, 기원전 409년 설을 취할 경우라 해도 플라톤은 18살 정도가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글라우콘은 매우 조숙하여 약관의 나이 20세 무렵 친구나 집안사람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나랏일에 참가하여 의회에서 연설을 시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소크라테스를 만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드디어 생각이 깨이기 시작했다고 한다.(크세노폰 <소크라테스의 추억> 306). <국가>에서도 그는 “만사에 대해 언제나 제일 담대한” 자로 언급되고 있다.(357a), 그 점은 그가 경쟁심(philonikia)이 있다는 점에서 명예정적인 경향에 가깝다는 언급에서도 엿볼 수 있다.(548d) 이 밖에 그의 성격이나 인품에 대한 언급으로서는 글라우콘이 시가에 대해 능히 말할 수 있는(398c) 자라는 부분도 있고, 사랑에 민감한 사람(474d)라는 부분도 있다. 게다가 459a에는 “내가 자네 집에서 사냥개들과 굉장히 많은 혈통 좋은 새들을 보았다”라는 말도 나온다.

3세기에 저술된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2의 124)에는 ‘아테네인 글라우콘’이 9개의 대화편이 실린 한 권의 책과 그 밖에 위작으로 보이는 32개의 대화편을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인물은 <국가>에 나오는 글라우콘과 동일인물로 보이긴 하지만, 그러나 그 저작(대화편)이나 그 외의 철학적 활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다.

 

아데이만토스(Adeimantos)

아리스톤의 아들, 플라톤의 맏형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돕기 위해서 법정에 온 몇 명 가운데 한 명으로서 아데이만토스와 그의 남동생 플라톤을 언급하고 있다.(34a) 아데이만토스는 맏형으로서 아마도 어린 동생 플라톤을 감독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아리스톤은 플라톤이 어린 시절 죽었다.) 글라우콘을 소개할 때 언급했듯이 플라톤과 연령 차이가 상당히 크다.

제1권이 끝남과 동시에 그때까지 활발하게 논의에 참가하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제5권 앞부분 작은 막간 장면에 잠간 등장했다가 이후 모두 조용히 듣기만 하는 사람들로 그려진다. 이에 따라 제2권 이후 소크라테스를 상대하는 사람은 아데이만토스와 글라우콘 뿐이다. 이것은 플라톤이 불필요한 논의 전개를 가능한 한 억제하고, 자신의 주요 사상을 방해받지 않고 전개 해 나가기 위해 소크라테스에게 ‘호의와 격려로 다른 사람들보다 적합한 답변을 해주는’(474a-b) 사람으로서 소크라테스와 친한 이 형제를 대화상대로 특정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플라톤 역시 그 자신 어떤 논지를 펼치든 이의를 달지 않고 품어줄 인물로 가족을 염두에 두었고 결과적으로도 이 기념비적 대작을 통해 형들의 이름을 명예롭게 후세에 남길 수 있었다.

 

* 대화 상정 시기를 410년쯤으로 잡으면 소크라테스(469년생)는 59세, 트라쉬마코스(455년생, 459년생?)는 40대 중반, 글라우콘(445년생. 440년생?)은 35, 30세?, 폴레마르코스(최대 460년생, 최소 450년생?) 최대 50세, 최소 40세, 플라톤(427년생)은 17세

 

* 대화 상정시기를 420년으로 잡으면 소크라테스(469년생) 49세, 트라쉬마코스(455년생, 459년생?) 35세, 글라우콘(445년생, 440년생?) 25세, 20세?, 폴레마르코스(최대 460년생, 최소 450년생?) 최대 40세, 최소 30세, 플라톤(427년생) 7세

“동양 고대 민본주의와 시민(民本과 民主)”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기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②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기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②

2018. 7. 30. 서교동 한철연 강의실

제2강. “동양 고대 민본주의와 시민(民本과 民主)”

강연 : 배기호(충북대 강사)

후기 : 정선우(한철연 회원)

 

  • 춘추전국시대에 제안된 민본주의적 통치 원칙의 규범적 의의를 살펴보고 그것이 과연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과 공존할 수 있는지 살펴본다.

 

“동양에 민주적 전통은 있는가? ‘민주(民主)’와 ‘민본(民本)’은 어떻게 다른가? 민본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한 가치와 이념일 수 있는가?”

 

오늘 강의는 이러한 물음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배기호 교수는 순자(荀子, BC 298~BC 238) 철학을 중심으로 고대 유학 전통에서 민본 사상을 끄집어내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주목하여 설명했습니다. 성악설에만 가려져 있던 순자 철학에서 ‘위’와 ‘아래’의 문제를 깊게 파고듦으로써 ‘아래로부터의 정치적 참여’라는 메시지로 고대 유학 사상을 재구성한 것이지요.

 

오늘날 정치적 주체가 된 ‘아래’는 ‘위’를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견제하고 감시해야 하며, 정치 주체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해 권리와 더불어 의무를 자각해야 하고, 공동체의 일원이자 주인으로서 의식 수준을 고양할 필요가 있습니다.

 

순자 철학을 비롯한 고대 유학을 현대적으로 재-음미해본다면, 더 이상 수동적인 대상이 아니라 능동적인 주체로서의 ‘아래’에게 그에 걸맞은 책임과 역할을 요구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임금은 배고, 백성은 물이다”라는 순자의 말은 강조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심지어 고대 유학에서조차 백성들이 단지 통치 대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라의 근본이 됨을 밝히는 말이 됩니다.

 

순자 철학을 중심으로 민본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우리 현실과 연결 지으면서 시민의 정치 참여가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 있는지가 논의 되었습니다. “길거리의 사람들도 모두가 성인이 될 수 있다”라는 순자의 말을 통해, ‘시민(임)’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시민적 활동, 즉 참여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며, 그것이 누구에게나 해당하고 열려 있다는 점에서 민주적 이념과 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습니다. 요컨대, 고대 유학이 표방하는 바를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맞게 변형하고 적용한다면, 시민의 정치 참여를 북돋우고 올바른 공동체 문화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가능성 말입니다.

“서양 고대 그리스에서의 민주 시민의 탄생”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기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①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기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①

2018. 7. 23. 서교동 한철연 강의실

제1강. “서양 고대 그리스에서의 민주 시민의 탄생”

강연 : 김성우(상지대 교수)

후기 : 김상애(한철연 회원)

 

  • 고대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 역사를 개관해 보고 그것의 현재적 의미와 실현 가능성을 가늠해 본다.

 

우리 역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달성하기 위해 희생을 감내하며 투쟁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흘린 피는 지금 우리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 수 있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체제로서 민주주의는 과연 결함 없는 완벽한 정치체제일까요? 과거 세계 대전과 대량학살을 일삼았던 독일의 히틀러, 그리고 현재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를 내세우면서 분리주의를 옹호하는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당선된 것이 모두 민주적 절차인 투표를 통해 정당하게 얻어진 것입니다. 이를 생각하면 민주주의에 대한 물음은 커집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재작년 전국을 뒤흔든 국정농단 사건, 최근 연이은 정치인들의 성폭력 문제들, 그리고 제주도를 통해 입국하려는 난민들을 둘러싼 문제들은 민주주의의 결함들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민주주의는 결함 없는 완벽한 정치체제라고 단언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맞닥뜨린 민주주의의 결함이 그 자체 본질적인 문제이므로 민주주의를 폐기하고 새로운 정치체제를 채택해야할까요? 아니면 그 결함이 민주주의 자체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 실현과정에서 발생한 수정 가능한 외적인 문제로 반성과 변혁이 필요한 것일까요?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 1기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첫 번째 시간, 김성우 교수는 민주주의의 결함에 대한 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Plato, BC 427~BC 347)과 현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에서 찾아봐야한다고 얘기합니다. 민주주의가 발생한 고대 그리스 사회로 돌아가 이 문제를 고민해보고, 이 시스템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아렌트의 새로운 이해를 엿보았습니다. 같은 주제에 대해 플라톤은 독재자의 등장과 그에 대한 예속과 같은 결함은 민주주의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보았다고 합니다. 반면에 아렌트는 “이소노미아(isonomia)”, 즉 평등한 자유로부터 민주주의의 본질을 찾았습니다.

 

아렌트가 주목한 이소노미아는 장자의 ‘무치(無治)’와도 관련 있습니다. 이소노미아의 주 특징은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없다는 것, 인간의 평등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나간다는 것입니다. 장자의 무치주의는 비록 이소노미아와 다르게 ‘인위’보다 ‘자연’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지배와 피지배의 계급사회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이소노미아와 비슷합니다.

 

강의가 끝난 뒤에는 시민대학에 참여해주신 수강생들의 열띤 토론 시간을 가졌습니다. 위에서 제기한 문제, 즉 “민주주의체제에서 발견된 결함은 본질적인 것인지, 수정 가능한 외적인 것인지” 뿐 아니라, “현대사회의 문제점들을 이소노미아와 무치주의로 극복할 수 있을지”, 그리고 “철학자와 그가 제시한 철학의 에토스와 파토스를 시대적 한계와 어떻게 관련지어 생각해야할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과연 이소노미아는 멀리 있는 것일까요?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①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1

<아래>

  1. 개강일 : 2018년 8월 1일(수요일)부터 매주 수요일 상설 강좌로 진행
  2. 장 소 : 사단법인 정암학당 서울연구실(서초구 방배동 795-25)
  3. 강 사 : 이정호(정암학당 이사장,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명예교수)
  4. 대 상 : 학당 회원, 방송대 동문, 일반 시민
  5. 텍스트 : 플라톤의 <국가>, 박종현 역주, 서광사
  6. 방 식 : 텍스트를 천천히 읽어가며 90분 강의한 후 질의응답시간을 갖는다. 정치철학적 문제를 중심으로 강의하되 회원들의 관심사에 맞추어 진행한다.

 

[서 론]

  • 강좌의 취지

철학사를 통해 플라톤 철학만큼 많이 다루어진 철학도 없을 것이다. 그에 따라 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에 대한 크고 작은 나름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 플라톤의 <국가>와 관련해서는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주어지는 경로를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경우 플라톤에 관한 철학사나 해설서 등에 의존해 있고, 직접 플라톤이 쓴 작품 자체를 통해, 있는 그대로의 플라톤을 만나는 경우는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사실 플라톤의 작품들이 워낙이 방대하고 형식과 내용 또한 체계적이지도 평이하지도 않은데다가 플라톤의 우리말 역본 자체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부분 중역본이어서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래서 본 강의는 무엇보다도 플라톤의 텍스트를 천천히 읽어가면서 철학 작품이자 문학 작품이기도 한 그의 텍스트를 인문학적 감수성을 가지고 그 드라마틱한 역동성을 직접 체험해가면서 그의 생각과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직접 만나보고 함께 생각해보는 것을 기본 목적으로 한다. 사실 플라톤 철학 전문 연구자들은 플라톤의 텍스트를 학술적인 관점에서 분석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주 임무로 삼고 있지만, 어떤 동기에서건 플라톤 철학을 알고 싶어서 여기 이 자리에 오신 일반 독자 분들로서는 플라톤의 텍스트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보다는 플라톤 텍스트를 자기가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직접 읽어가면서 플라톤과 주체적으로 만나보고 그것이 나와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음미해보는 것이 보다 큰 관심사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어쩌면 독자 분들이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플라톤을 직접 만날 수 있도록 도와 드리는 것이 우리와 같은 플라톤 전문 연구자들이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려나 우리 모두 연구자들이 힘들여 번역한 플라톤의 우리말 역본을 펼 때마다 “아! 플라톤이 한국말을 배워 나의 상황과 여건과 요구에 맞추어 친절하게 자기 생각을 들려주려 내 곁에 와 있다.”고 상상하면서 그의 음성, 생각, 고민, 표정을 읽어내고 그 속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나의 삶과 철학을 근본에서 다시 음미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이를 위해 텍스트를 함께 읽어가면서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의미를 찾아가되 동시에 그것을 최대한 자기 생각과 연관 지어 음미해보는 시도도 병행했으면 좋겠다. 본 강사부터도 그런 태도로 텍스트를 읽어가려고 한다. 그러므로 청자들은 강의를 들으며 시각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는 플라톤의 생각, 본 강사의 생각을 자유롭게 자기 식으로 이해하고 고민해가면서, 주체적으로 자기 생각의 깊이와 의미를 하나하나 차근차근 형성해 나갔으면 한다. 물론 강좌에 참여하는 분들의 그러한 노력과 기대에 제대로 부응하기에는 강사의 역량이 크게 부족하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고민하고 노력하면서, 처음 설정한 강의의 기본적인 취지를 변함없이 잘 견지해가며 강의를 진행하려 한다. 그리고 방침상 최대한 플라톤 철학 전체에 대한 논의는 줄이고 천천히 텍스트를 읽어가며 세세히 음미하는 방식으로 진행은 하겠지만, 군데군데 플라톤 철학 전체에 대한 이해가 요구될 경우에는 적절히 그와 관련한 설명과 토론도 병행할 것이다. 다만 제목을 비롯하여 집필시기, 대화상정 시기 그리고 그 시기들의 역사적 배경과 등장인물 등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나름의 관점에서 먼저 설명을 드리고자 한다.

앞으로 텍스트를 매우 천천히 자세하게 읽어가기 때문에 전체를 빨리 독파하고픈 청자들에게는 답답하고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이 책을 다 읽어내는 데 수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청자들과 강사 모두 플라톤의 <국가>를 이러한 공개강좌의 형식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내려는 시도가 아마도 처음이기도 한 만큼, 한 번쯤 도전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최대한 즐겁게 함께 읽어 나가기로 하자.

 

  1. 제목 소개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통상 우리가 <국가>로 옮기고 있는 책의 그리스어 원제목은 폴리테이아(politeia, πολιτεια)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제일 먼저 나오는 게 ‘시민적 삶’(civic life), ‘시민의 조건과 권리, 시민권’(the condition and rights of citizen, citizenship)이라는 뜻이다. 또 그 말의 동사적 어원인 politeuō라는 말을 함께 찾아보면 ‘시민으로 살다’(to live as a citizen), ‘나랏일에 참여하다’(to take part in the government)라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것은 ‘폴리테이아’라는 말의 일차적인 의미가 기본적으로 ‘시민생활과 정치생활을 하나로 여긴 고대 그리스인들의 삶의 방식’임을 잘 보여준다. 물론 ‘폴리테이아’라는 말에는 우리말 제목과 역어가 보여주듯이 제도로서의 ‘국가의 정치체제(the constitution of a state), 정부 형태(a form of government), 정치 조직(civic polity)’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플라톤의 <폴리테이아>라는 책의 제목을 소개하면서 ‘삶의 방식’으로서 그 말의 일차적 의미부터 꺼내 드는 것은 ‘폴리테이아’라는 말의 의미를 통상 우리가 생각하듯이 단순히 ‘정치체제’라는 뜻으로만, 특히 오늘날 법률적·제도적 의미에서의 정치체제 같은 것으로 이해할 경우, 플라톤의 <국가>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국가>에서 ‘폴리테이아’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위와 같은 중층적 의미를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해, 아예 ‘폴리테이아’라는 표현 자체를 ‘시민의 사회적 정치적 삶의 방식’과 ‘시민으로서 개인의 내적 삶의 방식’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함께 사용하여, 그것들이 결코 구분될 수 없는 하나의 통일적인 ‘시민의 생활방식’임을 적극적으로 천명하고 있다. 즉 플라톤에게 ‘시민적 삶의 방식’이란 폴리스의 안전과 가치의 구현을 위한 ‘정치적 활동 방식으로서 폴리테이아’임과 동시에, 시민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능력과 자질을 극대화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보전하기 위한 ‘개인의 내적 삶의 방식으로서 폴리테이아’였던 것이다. 물론 앞에서 언급한 대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기본적으로 시민생활이 곧 정치생활이었다는 점에서 폴리테이가가 갖는 복합성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느 정도 드러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플라톤은 삶의 방식의 두 가지 측면이 갖는 유기적 통일성을 영혼론이라는 자신의 고유한 관점을 토대로 더욱 부각시켜, 그의 정치사상의 요체로서는 물론 <국가>의 논의 전체를 풀어나가는 기본 토대이자 중심축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앞으로 책을 읽어가며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관건이자 기반이 된다.

요컨대 플라톤의 <국가>의 원제목으로서 ‘폴리테이아’는 굳이 풀어서 말하자면 ‘나랏일에서건 개인의 내적 영혼에서건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상호 의존적인 요소들을 가장 바람직하고 훌륭한 상태로 조직해내는 원리 내지 활동 방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을 다스림 일반이라는 확장된 의미에서 ‘정치체제’라는 말로 바꿔 말하자면, 플라톤의 폴리테이아는 ‘나라를 다스리는 통일적 운용원리이자 방식으로서 법률적·제도적 정치체제’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내부에 자리하고 있는 다양한 욕망들을 통일적으로 다스리고 운용하는 이른바 영혼 내부의 심리적 정치체제’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플라톤은 <국가>에서 과두정, 민주정, 참주정 등 개별 폴리테이아를 지시하는 개념들을 가지고 과두정적인 사람ho oligarchikos, 민주정적인 사람ho dēmokatikos, 참주정적인 사람ho tyrannikos 등 개인의 생활방식을 표현하는 말로도 함께 사용하고 있다. 그곳에서 폴리테이아는 개인의 내적 생활방식 즉 개인들 각각의 내적 영혼들 간의 관계를 조직하는 원리 내지 방식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있어 이른바 통치 또는 다스림(archein)이란 나랏일에서건 개인의 영혼에서건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각기 다른 계층 내지 기능들의 ‘최선의 조화와 공존’을 위한 활동인 것이다. 이 두 가지 내적·외적 정치체제는 앞으로 상호 밀접하고도 유기적인 연관관계를 맺으면서 플라톤의 정치철학의 고유한 특색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 주겠지만, 미리 언급하자면 우리가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영혼의 정치철학’으로 부르고, 또 ‘정치철학이자 도덕 심리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폴리테이아’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위와 같은 복합성 내지 중층성에서 연유한다고 할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②’에서 계속…

다시 쓰는 서양 근대 철학사 [철학자의 서재]

다시 쓰는 서양 근대 철학사

-다시 읽는 스피노자부터 칸트까지,

스포일러 없는 서평 추구

 

 

 

스펙이나 쌓는 저렴한 삶은 살지 않겠다 해놓고 보니, 취직이 안 되어, 어쩔 수 없이? 공부를 시작하면서 특히 철학 관련 책들을 읽을 때는 정말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어서 고생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 같은 비전공자들은 그래서 철학 서적들을 읽을 땐 2차 문헌이라고 하는 안내서나 입문서들을 통해 읽거나 할 수 밖에는 다른 묘수가 없다. 스피노자니 칸트니 헤겔이니, 다 그렇다. 말하자면 내 방에 과외 선생님이 필요한 건데 이 책은 내게 그 역할을 해주었다.

 

스피노자의 <에타카>는 읽다가 읽다가 버티고 버티다가 그냥 포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책은 스피노자에 대해 쉽고도 재밌게, 가령 스피노자가 어떻게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려고 했는지를 보여준다. 스피노자는 어떤 것이 그 자체로 ‘쉽다’거나 ‘어렵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거미에겐 쉬운 거미집 짓는 일이 인간에게는 어려울 것이며 인간에게 쉬운 일을 거미는 하지 못할 것이다. 인간은 산수를 못하는 거미에게 무능력하다고 하겠지만 그건 인간중심적 사유방식에서 나온 생각일 뿐이다. 사실 거미와 인간에게는 공통의 척도가 있을 수 없다. 인간은 다만 자신의 편리대로 사물을, 대상을 바라볼 뿐인 것이다. 인간은 신까지도 자신의 이해 방식으로 이해하려 한다.

 

스피노자하면 ‘신 즉 자연’이라는 말부터 떠오르지만 사실을 고백하자면 이 말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른다. 스피노자의 ‘신의 자연화’는 자연이 인간의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다거나 자연이 오묘한 설계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해체하기 위한 말이었다(p. 103). 이렇게 되면 신이 인간에게 특별히 도움을 주기 위해 인간 신체의 기관들을 창조한 것도 아니고, 자연은 따라서 신의 설계가 아니라 다만 기계적 기술의 결과라는 말이 된다. 오늘날 읽어도 이런 스피노자의 생각들은 대단히 현대적이다. 칸트나 헤겔은 또 어떤가. 물론 그 전에 홉스, 로크, 흄, 루소를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인간이 자연상태에서는 전쟁상태이기 때문에 개인의 권한을 국가나 군주에게 양도해야 한다는 게 홉스의 기본적 생각이다. 여기서 군주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개인이 원하는 바가 곧 군주가 원하는 바’라는 점에서 개인과 군주는 한 몸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런 공동체가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이건 끝나지 않은 질문인 것 같다. 너(지배자)와 내가 하나인 상태, 균열이나 분열 없이 그런 상태가 가능한가. 아주 작은 집단조차 뜻이 안 맞아 분열하고 갈라서는 데 말이다.

 

근대에 들어서며 폴리스(시민들이 의논하면서 공동으로 실천하던)가 사라지고 이제 사람들은 각자의 생존과 행복이라는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게 되었다(p. 172). 홉스의 사회이론은 이런 시대에 탄생했다. 홉스는 국가가 없는 상태를 상상했다. 그게 ‘자연상태’이다. 하지만 홉스는 왜 자연상태를 상호부조의 상태가 아니라 전쟁상태라고 단정 지은 걸까. 홉스의 자연상태는 하나의 가상 상태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홉스는 인간에게 자연권이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쓸 수 있는 힘을 말한다(p. 174). 따라서 이런 상태의 인간들이 ‘국가’가 없다면 전쟁의 상태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이 이렇게 이기적이만한 걸까. 최근에는 이기적 성향이 인간 유전자 속에 자연적으로 입력되어 있다는 주장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를 정당화하는 자연적 증거로 제시되지만 인간이 이기적 본성을 지니고 있는지 어떤지는 자명하지 않다(p. 181). 아마 홉스는 근대의 시작을 지켜보면서 인간이 이기적 본성을 지닌 것처럼 보였을 것이고 그래서 인간이 나면서부터 무한한 이기적 권력욕을 지닌다는 ‘생리학적 본성론’을 가정했을 것이다(같은 곳).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국가들이 이제는 전쟁 상태에 놓여 있게 되었다는 데 있을 것이다. 트럼프는 전쟁을 못해 안달이라도 난 것 같다. 홉스에게 이성이 이기적이면서 사적인 반면, 로크에게 이성은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상호 존중하는 공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p. 206). 둘 다 자본주의와 더불어 근대 부르주아 정치 이념이 태동하던 시기에 활동했지만 말이다. 홉스에게 시민사회의 목적이 죽음을 피하고 사회를 유지하는데 있었다면, 로크에게 그것은 ‘재산의 보존’이었다(p. 209). 로크에게 시민은 자유로운 인격적 주체가 아니라 ‘재산을 소유한 자’들이었다. 로크는 스스로 공적 이성을 중시했지만 그 이성은 ‘재산을 가진 시민의 이성’이었던 것이다.

 

루소는 로크의 주장과 달리 ‘소유’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또 루소는 홉스식으로 자연상태를 전쟁상태가 아니라 자유롭고 평등한 독립적 존재들의 세계로 묘사한다(p. 276). 이런식으로 루소와 로크, 홉스의 정치, 사회이론을 논쟁적으로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건너 뛸 뻔 했다. 루소로 가기 전에 흄이 있었다.

 

흄, 하면 인과론을 비판했다는 건 어디선가 들어본 것도 같은데 인과론을 왜 비판했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비가 오면 땅이 젖는다. 이걸 문제 삼을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흄에 따르면 그건 우리의 반복적 경험에 따른 믿음이지, 직접 지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p. 251). 막말로 내일 태양이 안 뜰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우리의 이런 습관적 인식을 흄은 비판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동일한 나라고 가정된다. 하지만 나는 우울한 나, 함빡 웃고 있는 나, 설레는 나, 떨리는 나, 화난 나, 이런식으로 존재할 뿐 ‘불변하는 나’라는 ‘실체’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또 대번 이런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어제의 나가 오늘의 나가 아니라면 어떤 책임도 물을 수 없게 되는 것 아닌가. 대답은 각자 마련해 보시길. 너무 많은 걸 스포일러 할 순 없잖은가.

 

그래서 칸트까지만 간략 소개할까 싶다. 헤겔은 소중하니까 남겨두는 걸로. 흄이 없었다면 칸트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칸트는 흄을 넘어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할 만한 생각의 전환을 가져온 철학자 아닌가. 기존에는 객관 대상에 의거하여 주관이 인식을 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칸트는 주관에 의해서 객관이 성립된다는 인식 방법상의 대전환을 이루었다(p. 308).

 

칸트는 인간의 인식, 주관, 내면 세계에 대해 탐구하면서 여기에서 인간의 해방, 즉 ‘자유’를 발견한다. 자연적 존재로서 경향성을 지닌 인간 존재는 결정론적 인과법칙의 지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인간은 그런 경향성, 인간의 자연성을 넘어서 도덕법칙을 추구할 수 있으며 이때 자신의 생명도 돌보지 않고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지하철 선로에 뛰어들 수 있다.

 

칸트에게는 자연보다 ‘자유’가 우위이다. 하지만 자연의 세계와 자유의 세계는 분명 다른 세계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인데 저 두 세계를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게 칸트의 고민이었다. 그래서 칸트가 거기서 찾아낸 것이 ‘판단력’이다. 판단력은 자연과 자유의 영역 사이에 중간항(p. 319)으로, 이 판단력의 매개를 통해서 인간은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 판단력의 영역, 즉 ‘미적 체험’에서 인간은 저 두 세계(자연과 자유)를 통일할 수 있으며 이때 인간은 ‘자유’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칸트는 인간이 아름다움을 느낄 때 다른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인간에게 공통감(p. 323)이라는 게 있어서 충분히 그런 감정을 함께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거칠게 정리가 되었지만 이렇게라도 한번 근대철학사를 훑어보는 일도 필요한 것 같다. 큰 산의 형태를 한 번 보고 나무를 하나씩 살펴보는 재미랄까. 물론 중요한 일은 직접 스피노자를 읽고, 칸트를 헤겔을 읽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무턱대고 칸트를 펼쳐들었다간 낭패를 보게 된다. 이게 우리가 칸트 입문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

 

이 책은 꼭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사전처럼 공부하다가 펼쳐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수학 정석이 집합 부분만 새카만 것처럼 모든 책의 서문만 까맣게 된 책들이 많은 건 나 뿐일까. 그래서 요샌 아예 중간이나 뒤에서부터 책을 보기도 한다. 그러면 어떤 책은 궁금해서 앞을 볼 수 밖에 없게 되기도 한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 아니던가. 잘 정리된 서양근대철학사 한권쯤은 읽어야 할 것 같은 계절이다.

 

by 엄진희(시인, 문학평론가)

대학원에서 한국현대문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안내] 영화 <길> 공동체 상영 9월30일 토 3시

 

안녕하십니까? 한철연 학술 1부 입니다. 

9월에 한철연 공동체 영화 상영을 안내합니다.

한국 사회의 주요 적폐 중 하나가 사학 재단의 각종 비민주적 행태, 비리 문제입니다. 

우리 한철연 공동체 회원 다수가 대학 교육에 몸담고 있는 만큼 사학 재단 문제는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이슈라 할 것입니다. 

이에 사학 민주화 투쟁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길>>을 상영하고자 합니다.

<<길>>은 오랜 세월 사학 재단의 횡포로 몸살을 알아온 상지대 40년 사학 민주화 투쟁사를 다룬 다큐입니다. 

한국 사학 재단이 안고 있는 각종 문제를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난 7월 지병으로 별세하신 故박종필 감독과 함께 이 영화를 만든 박주환 조감독과의 토론의 자리가 이어집니다. 

회원 여러분과 가족, 친구를 초대합니다. 

 

– 한국 철학 사상 연구회 2017년 9월 월례회 공지 

일시 : 9월 30일(토), 오후 3시

장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 

내용: <<상지대 사학 민주화 투쟁 40년의 기록 – 길>> 상영 및 관람 후 박주환 조감독과의 토론

비용: 회원, 비회원 모두 3000원

(잘 아시다시피 한철연은 순수 학술 단체로 재정상 문제로 전액을 후원하지 못함을 양해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 아래 언론 보도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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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대 사학민주화 투쟁 40년의 기록-길>>

비대위-`다큐인’ 제작 나서 
내달 서울 이대역서 시사회

【원주】원주 상지대 사학분쟁 민주화 운동이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된다.

상지대비상대책위원회는 다큐멘터리 제작집단 `다큐인’과 상지대 사학분쟁과 관련한 다큐 영화 `상지대 사학민주화 투쟁 40년의 기록-길’을 제작 중이라고 18일 밝혔다.

다큐 영화 길은 40년간 상지대 사학분쟁에 대한 눈물과 웃음이 교차하는 이야기를 상지대 구성원들의 인터뷰와 재연, 기록영상 등으로 그린다.

2002년 `장애인 이동권 투쟁 보고서-버스를 타자’를 연출했던 박종필씨가 프로듀서로 참가했고 뉴스타파 시사다큐멘터리 `목격자들’을 연출한 남태제씨가 연출을 맡았다.

텀블벅(Tumblbug) 인터넷 소셜 펀딩업체에서 3,000만원 후원을 목표로 한 달 동안 후원자를 모집했으며 지난 14일 최종 마감 결과 104% 초과 달성해 337명이 총 3,144만7,900원을 후원했다. 

영화는 내부시사를 통해 다음 달 12일 서울 이화여대역 앞 필름포럼 1관, 15일 오후 7시30분 원주영상미디어센터 모두극장에서 각각 시사회를 할 예정이다.

강원 일보- 김설영기자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오시는 길 : 2호선 합정역 2번출구, 도보10여분, 태복빌딩 3층

[안내]한철연 3월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 안내

한국철학사상연구회 3월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 안내

 

  “B급 철학자들과 함께하는 정치수다”

–  [B급 철학](알렙)의 필자들과 함께하는 난상 시국토론

 

 

1. 일시 및 장소 : 2017년 3월 25일(토) 오후2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세미나실

 

2. 토론 주제 : 2017년 대한민국의 정치를 논하다. 광장의 ‘정치’가 단순히 ‘통치’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또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촛불혁명(?)은 과연 진정한 변혁을 가져올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선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3. 진행방식 안내

– 처음 시도하는 편안한 파티 다과식 난상토론 : 생맥주 1잔, 간단한 안주와 다과.

– 단순한 책소개가 아니라, 책에서 논의된 주제들과 연관된 질문을 미리 선별해서 필자들과 공유 토론하고, 참석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하는 자유로운 토론의 장.

– 사회 및 진행 : 조은평(웹진 편집주간) / 이지영(학술1부장)

– 토론자 : [B급철학]의 필자 3인

  : 유현상(숭실대 강사), 한길석(가톨릭대강의교수), 박종성(호원대 강사)

 

– ※ 추신 : 토론회를 마치고 참여한 외부 회원분들 중 5명을 선정해서 [B급철학](알렙) 책을 선물로 드립니다.

 

* 본 토론회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학술1부와 웹진 (e)시대와 철학의 공동기획으로 진행합니다. 앞으로도 1년에 2회 정도 월례발표회 대신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기획을 마련할 예정입니다. 한철연 회원님과 독자님들 및 철학에 관심을 가지 모든 분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오시는 길 : 2호선 합정역 2번출구, 도보10여분, 태복빌딩 3층

 

카오스와 코스모스 [철학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조광제의 [철학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사전] (생각정원, 2012) 

 

철학, 80개의 기초개념들

1. 철학 개념들의 탄생

오늘 첫 강의에는 고대 철학에서부터 지금까지 힘을 발휘하는 중요 개념들을 살피고자 한다.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말이 있다. 개체 발생은 수정란에서 완전한 태아가 되기까지의 과정이다. 그리고 계통 발생은 원시 생물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의 진화 과정을 말한다.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고대철학의 개념들로부터 오늘날 철학의 개념들로 발전해 온 것은 계통 발생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고, 낮은 수준에서 익힌 개념들로부터 높은 수준에서 익히게 되는 개념으로 발달은 개체 발생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가능하면 고대철학에서부터 오늘날 철학에 이르기까지의 순서에 따라 앞으로 80개의 철학의 기초 개념들을 살피고자 하는데, 오늘이 그 첫 시간이다. 오늘 강의의 큰 제목은 ‘철학 개념들의 탄생’이다.

 

 

1.1. 카오스

다들 알다시피, 카오스(chaos)는 코스모스(cosmos)와 대립된다. 그런데 카오스는 코스모스에 비해 신화적인 성격이 강하다. ‘카오스’는 헤시오도스(Hesiodos, 기원전 8-7세기 활동)의 <신통기>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카오스는 모든 신들이 태어나는 모태이다. 땅과 하늘, 어둠과 밝음, 낮과 밤 등 올림포스 이전의 시원적인 신들이 카오스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카오스가 철학적으로 전이된 것은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기원전 610-546)의 ‘무한자’(apeiron <아페이론>)라 할 수 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이 무한자에서 모든 것들이 생겨난 것으로 본다. ‘apeiron’은 ‘peras’ 즉 한계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한계는 어떤 형태를 만들어내는 근본 요인이다. 카오스를 흔히 ‘혼돈’이라고 하지만, 그 특성은 바로 무정형(無定型, formlessness)이다. 형태가 없다는 것은 아직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은 인식할 거리가 전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형상’(形相, eidos, form)에 대한 설명을 통해 더욱 세밀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카오스가 혼돈된 것이기 때문에 무정형한 것이 아니라, 무정형하기 때문에 혼돈된 것이다.

무정형하다는 것은 그 속에 도대체 통일성을 갖춘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일성을 갖추었다는 것은 주변의 다른 것들과 구분되면서 그 나름으로 하나의 단위를 이룬다는 것이다. 카오스에서 통일성을 갖춘 것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카오스에서 의미와 가치 그리고 그에 따른 목적 등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미와 가치 그리고 목적은 인간을 비롯한 상상 가능한 모든 인격적인 존재(예컨대, 신들이나 천사 및 악마 등)의 삶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인들이다.

따라서 카오스는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의 상상에서 빚어지는 모든 인격적인 존재들을 넘어선 ‘그 너머의 존재’를 가리킨다. 인간의 인식과 판단을 전혀 허용치 않는 가장 최초의 근원적인 존재가 바로 카오스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바탕에 근본적인 것으로 깔려 있는 존재가 바로 카오스이다. 그래서 카오스는 존재론에서 가장 심층의 깊이를 지닌 심연으로서 작동한다. 인간을 넘어서 있으면서 동시에 인간을 비롯해 모든 존재들을 안팎으로 관통하고 있는 근본적인 존재가 바로 카오스이다.

카오스를 생각한다는 것은 존재론의 출발이다. 하지만 카오스를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생각을 넘어선 곳에서 존재론이 출발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인간은 자신을 형성한 근원적인 바탕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충동을 지니고 있다. 그 충동은 바로 존재론적인 근본 충동이다.

현대에 와서 이 충동은 사회역사적인 코드 체계를 완전히 벗어나 발가벗은 사물 자체 혹은 실재 자체의 영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카오스는 플라톤의 게네시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의 순수 질료,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물 자체,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의 순수 지속, 사르트르의 순수 즉자,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의 살, 레비나스(Immanuel Levinas, 1906〜1995)의 일리야,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의 실재, 들뢰즈(Gille Deleuze, 1925〜1995)의 기관들 없는 몸 등의 개념으로 이어지면서 그 원형의 역할을 한다. 그런 만큼 카오스는 존재론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근본 개념이자, 우리 인간의 근원적인 충동을 부채질하는 근본 개념이라 할 것이다.

이와 관련된 예술에서의 예를 들자면, 1940년대 2차 세계 대전 중에 생겨난 ‘앵포르멜’ 유파를 들 수 있다. ‘앵포르멜’은 ‘inforemel’이라는 프랑스 말을 우리말로 음역한 것이다. 형태 혹은 형식이 없는 예술 양식을 일컫는다. 1950년대 말에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크게 융성한 것이 앵포르멜 회화 양식인데, 이는 대체로 물감 자체의 원형적인 질감 자체에 의존해서 우발성에 의존해서 그려내는 그림이다. 회화에서 앵포르멜은 도대체 그 어떤 질서잡힌 의미나 가치를 찾을 수 없는 한계 상황에서 느끼는 막연함을 그 자체로 표현하고자 한다. 그 바탕은 카오스가 아닐 수 없다. 카오스를 향한 존재론적인 욕망이 예술적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앵포르멜 미술 양식인 것이다.

 

 

1.2. 코스모스

 우주 발생론에 의하면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생겨난다. 하지만 카오스가 따로 있고 코스모스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카오스가 코스모스로 변한 것이다. 카오스가 코스모스로 변한다는 것은 무정형의 상태에서 정형의 상태로 된다는 것이다. 정형의 상태가 된다는 것은 카오스 전체가 그 자체로 단 하나의 정형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무정형의 카오스가 형태를 갖춘 온갖 것들로 된다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니까 코스모스는 일정한 형태를 갖춘 온갖 것들의 전체를 일컫는다 할 수 있다.

일정한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일정한 본성(nature)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돌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돌의 본성을, 식물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식물의 본성을, 동물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동물의 본성을, 인간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본성이라고 번역되는 ‘nature’는 자연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이 ‘nature’는 라틴어 ‘natura’(나투라)에서 온 것이고, 라틴어 ‘natura’는 그리스어 ‘physis’(퓌시스)를 번역한 것이다. 퓌시스는 본래 뭔가를 성장시키는 힘을 말한다. 카오스가 코스모스가 되었다는 것은 한편으로 카오스가 퓌시스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떤 것이 ‘nature’ 즉 본성을 갖추었다는 것은 다른 것이 되지 않고 바로 자기 자신을 유지하고 생장시킬 수 있는 힘을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카오스가 코스모스가 되면서, 그 속에서 일정한 형태와 본성을 갖춘 각각의 것들이 생겨났다는 것은 그 각각의 것들이 스스로를 유지하고 생장시킬 수 있는 것들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각각의 것들이 각기 나름의 퓌시스를 발휘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항상 다른 것들과의 작용을 주고받는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가까이 하고, 자신을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멀리 함으로써 각기 자신을 유지하고 생장시키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화와 상극이 나오게 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거대한 조화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상극마저도 크게 보면 조화의 한 방식인 것이다. 그래서 코스모스를 일체의 것들의 조화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코스모스는 각각의 것들이 어떻게든 조화롭게 다 같이 유지되고 생장할 수 있는 관계들의 총체라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일정하게 질서가 있을 수밖에 없다. 카오스의 무정형은 달리 말하면 무질서이다. 코스모스에서의 정형의 조화는 달리 말하면 질서이다. 코스모스 속에서 각기 나름의 본성을 지니고서 존재하는 일체의 것들이 조화를 이룬다고 했다. 그 모든 본성들 간의 질서 잡힌 관계가 바로 질서의 총체인 코스모스인 것이다. 그래서 코스모스는 한편으로 본성들 간의 질서 잡힌 체계라 할 수 있고, 그래서 코스모스는 자연(본성, nature)라고 불리기도 하는 것이다.

코스모스를 이루는 존재의 바탕(原質, arche)은 카오스이다. 꼭 그러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카오스는 코스모스의 원질의 내용이고, 코스모스는 카오스를 색다르게 구성하는 형식이다. 말하자면, 카오스와 코스모스는 다른 것이면서 같은 것이다. 원질의 내용으로 보면 같은 것이고, 그 형식에 있어서만 다른 것이다. 카오스는 형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고, 코스모스는 형식을 제대로 갖춘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떠오르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의 이행이다. 그것은 도대체 코스모스를 이루는 질서, 즉 형태 혹은 본성이 어디에서 왔느냐 하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플라톤은 형태 혹은 본성이 카오스의 외부로부터 왔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말한 형상들 즉 이데아들이 바로 카오스의 외부로부터 카오스에 주어진 것들이다. 그런데 카오스 자체에서 발휘되었다고 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런 입장을 취한 인물이 바로 들뢰즈(Gille Deleuze, 1925-1995)다. 그는 그래서 ‘카오스모스’(chaosmos)라고 하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다. ‘카오스모스’는 들뢰즈가 우주론에 있어서 어떻게 반플라톤주의를 정립하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되는 과정이 카오스 외부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카오스 자체의 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여기면서 그 중간 과정을 일컬어 카오스모스라고 하기 때문이다.

모든 통치자들은 사회적인 코스모스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통치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사회적인 카오스이다. 카오스는 도대체 어떻게 접근해서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강력한 사회적 코스모스를 지향하게 되면 자칫 파시즘적인 사태가 벌어진다. 개개 사회 구성원들의 자유란 통치자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카오스이기 때문이다. 가장 강력한 사회적 카오스가 바로 혁명이다. 그러고 보면, 자유와 혁명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아 불행한 것은 혁명 이후 혁명의 주동자들이 오히려 강력한 코스모스를 지향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요구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다. 일반 대중들이 혁명에 의한 독재가 아니라, 혁명에 의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적절한 카오스적인 측면을 허용하는 사회적인 코스모스야말로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의 형태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