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글 – 19세기 동아시아 [좌충우돌 우리철학 읽기] (2)

좌충우돌 우리철학 읽기 : 두 번째 글

19세기 동아시아

 

박영미(한철연 회원)

 

사진1 ‘흑선’ │ 출처 위키피디아

 

 

  1. 새로운 시대

 

동아시아의 근대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밀접하게 연관되어 한 국가에 국한해서 이야기하기 어렵다. 또한 한 중 일의 비슷하면서도 다른 근대의 모습은 함께 봤을 때 우리 자신을 보다 잘 볼 수 있게 하기도 한다. 동아시아 근대를 이야기 하면 항상 전제되는 물음이 있다. ‘근대란 무엇인가?’ ‘근대의 시작은 언제인가?’ 사실 이 두 물음은 하나이다. ‘근대를 어떻게 규정하는가’로부터 ‘근대의 시작이 언제인지’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의 동아시아 근대에 관한 이야기를 이 물음으로부터 시작하지는 않겠다. 『코렐젝의 개념사 사전』 서두에서 수십 년간의 개념사 연구에서 ‘근대’ ‘근대적’ ‘근대성’처럼 자주 다루어졌던 개념은 없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근대’는 오랫동안 끊임없이 논의되고 있고 그만큼 그 정의가 매우 넓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 개념으로부터 글을 시작하는 무모한 도전(?)은 하지 않으려 한다. 시대에 대한 규정으로부터가 아닌 이전과는 분명히 다른 사건들과 사유들을 읽고 분석하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근대’를 구성하고자 한다. 그러다보면 연재의 마지막쯤에 우리의 근대에 대해 얼마간 정리해서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을까?

19세기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사건은 서양이 가진 물리적 힘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함선의 출현과 그들과의 충돌(전쟁)이다. 그렇기에 동아시아 3국은 모두 예외 없이 근대의 기점을 서양과의 충돌에 두고 있다. 1840년 중국과 영국의 아편전쟁, 1853년 일본에 대한 미국 페리함대의 개항 요구, 1860~70년대 한국과 프랑스 미국 일본의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이다. 특히 함선에 포함된 거대한 철제 증기선은 누구도 보지 못했던 배였다. 일본에서는 이 배를 ‘흑선黑船’이라고 불렀다. ‘검은 배’라는 명명은 단순히 색을 묘사한 것만이 아니었다.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공포, 즉 거대한 힘을 목도한 후의 무서움과 그 힘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투영된 것이었다. 각기 시기는 달랐지만 한 중 일이 경험한 사건은 동일했다. 그러나 대응은 동일하지 않았다. 공포는 동일했지만 그 배경과 강도는 달랐기 때문이다. 일본은 서양 제국주의의 힘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기에 더 두려워했고, 중국은 자신의 힘을 과신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며, 한국은 무지했거나 중국에 기댈 수 있다고 믿고 아무런 대비 없이 문을 걸어 잠갔다.

 

 

  1. 19세기 동아시아가 걸었던 길

19세기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서양과 전면적으로 충돌 한 것은 중국이었다. 아편 매매를 둘러싼 중국과 영국의 대립은 결국 1840년 아편전쟁을 야기한다. 중국은 광주부터 영파 상해에 이르는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패퇴한 후 마침내 1942년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남경조약에 조인하고 개항을 한다. 이후 청조 타도를 외친 태평천국운동(1851~1864)에 의한 내적 충돌과 두 번째 아편전쟁(1860)으로 영 ·프 연합군에 의해 북경의 원명원이 불타는 외적 충격을 겪고서야 중국은 비로소 본격적으로 변화를 모색한다. 1860~90년대 초반의 양무洋務운동과 1890년대 중반 이후의 변법變法운동을 통해 본 중국의 서양 수용과 변화의 양상은 비교적 단계적이고 점진적이다. 양무운동은 체제의 안정과 부국강병을 목표로 제한적인 서양의 기술의 수용과 변화만을 허용했고, 서구 열강의 지배가 가속화되고 결국 일본과의 전쟁(청일전쟁)에서 패한 후에야 서양과 같은 근대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전면적인 서양의 수용과 개혁이 시도되었다. 이때 양무운동을 이끈 집단은 청조의 관료들이었고, 변법운동을 이끈 집단은 젊은 지식인들이었다. 변법운동도 결국 실패했지만 이들의 도전과 한계는 중국 사회 전체의 틀을 바꾸기를 꿈꾸고 실행한 혁명(신해혁명)을 배태한다.

중국이 개항과 그 이후에도 서양과 계속 충돌했던 것에 반해 일본의 개항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1853년 에도 만에 미국 태평양 함대 사령관 페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출현한다. 페리는 이듬해 초 다시 와서 국교를 수립할 것과 기항지를 제공할 것을 요구했고, 막부는 요구를 수용해 1854년 미일화친조약을 맺고 1858년 미일통상조약을 체결한다.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것에 대해 당사자였던 청이나 조선에 비해 일본은 큰 위기의식을 가졌다. 당시 국제 정세 정보를 수집하면서 서구 열강의 움직임과 아편전쟁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고, 농민 분규와 재정 악화로 어려움에 직면했던 막부는 쇄국을 포기하고 개항을 결정한다. 그리고 적극적 개국開國론자들과 내정 개혁을 주장하는 양이攘夷론자들에 의해 빠르게 변화한다.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250여 년간 유지되었던 막부체제에서 일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로 전환하고, 막부-번 체제의 한 축이었던 지방 권력과 무사 중심의 신분 제도 및 징병 제도를 폐지한다. 그리고 곧바로 서구 여러 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그들의 문명을 직접 보며 새로운 국가 건설을 구상한다(이와쿠라 사절단). 1889년 메이지헌법을 제정하고 입헌군주제 국가를 건립한 후, 러일전쟁 한국병합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길을 걷는다.

중국과 일본에 비해 서양이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조선은 뒤늦게 서양과 여러 차례 충돌하고 일본에 문을 연다. 국경을 접하게 된 러시아는 1864년 압록강을 건너와 통상을 요구했고, 1866년 천주교도를 대대적으로 탄압했던 병인교난에서 이루어진 선교사 살해의 책임과 조약 체결을 요구하는 프랑스 해군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한다(병인양요). 같은 해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불탄다. 이 두 사건을 계기로 서양 군대의 위력을 실감한 조선은 서양의 기술을 통한 군비강화를 꾀한다. 그렇지만 1871년 최신 무기로 무장한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했을 때 조선군은 구식 총포와 활로, 무기가 없는 자는 맨주먹으로 싸웠다(신미양요). 이때는 중국은 자강自强을 위해 양무운동에 힘쓰고, 일본은 스스로 자신들의 정치체제를 바꾸던 시기였다. 고종의 친정을 계기로 쇄국을 유지하던 조선의 대외정책은 비로소 변화했고, 1876년 일본 1880년대 서양 열강과 잇달아 조약을 체결하며 굳게 닫혔던 문을 연다. 준비되지 않은 채 맞이한 거대한 변화는 이미 임계점에 이른 내부의 문제들을 증폭시켰다. 내적 외적 갈등은 계속 중첩되었고(임오군란 갑신정변),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갑오개혁은 당시 조선이 직면했던 문제들이 무엇인지, 그 해결 방식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줬다. 뒤늦게 변화의 필요를 자각하고 여러 집단에서 나름의 노력을 했지만 위태롭게 서 있다 미끄러지기 시작한 한국은 멈추지 못하고 피식민被植民에 이른다.

 

사진2 신미양요의 미군 │ 사진출처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147126

 

 

  1. 시대를 이끈 힘에 관한 단상

 

19세기 동아시아가 걸었던 길을 한 걸음 물러서 보다보면 이 시대를 이끈 힘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궁금함이 생긴다. 가장 먼저 눈이 가는 것은 일본의 이와쿠라 사절단이다. 일본은 흑선에 가졌던 공포가 컸던 만큼 그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메이지유신을 통해 빠르게 정치체제를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1871년에는 미국과 유럽에 조약 개정 교섭과 시찰을 위한 사절단을 파견한다. 목표했던 조약 개정은 실패했지만 사절단은 1년 10개월 동안 서양 12개국을 돌며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직접 보고 이를 통해 자신들이 건립하고자 하는 새로운 국가를 기획했다. 100여 명의 사절단에는 젊은 관료들뿐 아니라 46명의 유학생이 포함되었다(여성 5명). 그 다음으로 눈이 가는 것은 중국의 변법운동이다. 청일전쟁의 패배, 일본의 근대적 발전에 자극 받은 강유위를 중심으로 한 젊은 지식인들은 중체서용中體西用의 양무운동을 비판하며 서양의 정치와 사상의 수용을 통한 중국 사회의 변화를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1898년 무술변법으로 실현되었으나 결국 보수파에 의해 좌절된다. 변법운동은 좌절됐지만 이후 강유위 엄복 양계초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국가가 주도했고 변법운동은 지식인들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는 않지만, 능동적으로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실천한 위로부터 작동한 시대의식이었다는 점은 같다.

한국에도 이들과 동일한 인식과 실천을 한 이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눈에 띄는 것은 동학농민전쟁이다. 새로운 시대의 한 축을 관료나 지식인뿐 아니라 농민도 담당한 것이다. 19세기 중반 농민 반란의 빈번한 발생은 동아시아의 공통적 현상이었다. 하지만 1894년 동학농민전쟁처럼 농민이 전면에 나와 국가와 충돌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동학농민전쟁과 자주 비교되는 중국의 태평천국운동은 농민이 주도하지는 않았다). 종교적 성격과 목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반박도, 이전의 농민 반란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반박도 모두 어느 정도 타당하다. 여기서 우리가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은 19세기 동아시아의 격변에 서양과의 충돌이라는 외부적 요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한국 중국 일본 모두 심각한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를 가지고 있었고 이들이 내부적 요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위로부터 작동한 시대의식은 외적 요인을 시대의 중심에 놓고 이를 통해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지만, 정치 경제 사회적 모순을 혹독하게 겪어야 했던 농민들에게 이와 같은 해결 방식은 너무 요원했고 상황은 절박했다. 동학농민전쟁에서 농민들은 직접 교조 신원부터 그들이 겪고 있는 부당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의 요구 그리고 척왜양斥倭洋까지 주장했다. 이는 위로부터 작동한 시대의식과는 분명 다른, 자생적으로 변화의 필요성을 체득하고 실천한 아래로부터 작동한 시대의식이었다.

 

 

 

▪ 우리 근현대의 공간2 : 인천 개항 박물관

인천 개항 박물관은 개항기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이곳에는 개항 이후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여러 근대문물과 관련 자료가 정리되어 있다. 바로 옆 건물이 인천 개항장 근대 건축 전시관이고, 멀지않은 곳에 인천 차이나타운이 있다.

 

사진3 인천개항박물관1 │ 사진출처 필자

 

사진4 인천개항박물관2 │ 사진출처 https://www.incheonopenport.com/museum/111

 

사진출처 필자

사진출처 필자

사진출처 필자

사진출처 필자

새로운 철학적 글쓰기를 향한 거침없는 도전? 이종철 선생님의 『철학과 비판 – 에세이 철학의 부활을 위해』를 읽고서

새로운 철학적 글쓰기를 향한 거침없는 도전?

이종철 선생님의 철학과 비판 에세이 철학의 부활을 위해를 읽고서

 

연효숙(한철연 회원)

 

철학자는 기술자, 아이들, 놀이꾼, 장사꾼처럼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불편한 글쓰기의 효과는 어디까지 미칠까? 고통, 폭력과 죽음에 직면하여 철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종철 선생님(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상임연구원)의 신간 『철학과 비판-에세이 철학의 부활을 위해』는 460여 쪽의 분량으로 제법 두툼한 책이다. 사실 『철학과 비판』이라는 큰 제목은 철학 전공자에게는 낯설지 않은 개념이어서, 처음엔 시큰둥했다. 그런데 부제가 흥미롭다. 에세이 철학의 부활? 여러 철학자의 이름이 떠올랐다. 저자가 염두에 둔 철학자들은 몽테뉴, 파스칼, 마르크스, 벤야민, 니체 그리고 아도르노 등이다. 이들의 글쓰기는 저자 말대로, 논문 형식을 빌지 않고 자유로운 글쓰기를 통해 삶과 현실에 대해 정신적 통찰을 보여 준다. 이러한 점들이 이 책에도 구현되고 있는가?

책 전체를 넘기다 보니 눈에 확연히 들어오는 점이 있다. 거의 주석과 참고문헌이 없다. 일단 어떤 전문적인 철학 연구서나 논문들 묶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말랑말랑한 신변잡기? 일기와도 같은 글쓰기? 이런 의문을 갖고 책을 읽어 나갔다.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이 책은 대중서처럼 보이지만 전문적인 식견의 수준을 지닌 책이었다. 대중서와 전문 연구서의 모호한 갈림길에 있는, 그 경계에서 왔다 갔다 하는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운 책이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철학이 현실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자신의 주장을 일관되게 써 내려가고 있다. 이 현실은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삶의 현장이다. 철학이 대중에게 외면받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현실에서 동떨어져 알 듯 모를 듯 현학적인 말로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기 때문이다. 탁상공론을 떠나 전제와 구속에 얽매이지 않고 창의적으로 생각하며 공리공담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연구 공간의 섬에 고매한 척 홀로 떠있는 고독한 철학자가 아니라, 기술자, 아이들, 놀이꾼, 장사꾼처럼 현실적으로 사유할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일갈한다. 충분히 공감되는 이야기이다. 현실을 떠난 사유,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간섭받고 자신의 고민과 민낯을 삭제하여 동, 서양 텍스트 수입 오퍼상으로 전락한 철학 전공자들에게 퍼붓는 저자의 목소리, 귀 기울이고도 남는다. 다만 철학 전공자들이 몸담은 또 다른 진공 같은 현실에 이 목소리는 잘 스며들지 않는다.

저자는 글을 쉽게 쓴다. 술술 잘 읽힌다.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글이 쉬우면서도 깊이와 창의성이 있다. 에세이 철학의 부활을 꿈꾸는 이 책은 대중들의 눈높이에는 약간 높을 수 있으나 문턱은 높지 않다. 전문가들은 왜 이렇게 글을 쉽게 쓰지 못했을까? 그렇다고 철학의 특정 분야에 한정된 몇몇 전문가들만이 이해하는, 암호 같은 글들을 써 왔던 철학 전공자들을 폄훼할 필요는 없다. 종종 논문 심사를 위해 철학 전공자들의 논문들을 읽을 때, 나도 숨이 턱턱 막힐 때가 있다. 비전공자들은 읽기조차 어려운 암호 같은 글들이 계속 만들어지는 이유는 기성 학계가 요구하는 수준과 관행이 있기 때문인데, 아마 에세이 철학 글쓰기를 하면 거의 탈락일 것이다. 저자처럼 에세이식으로 논문을 쓴다면 어떠한 연구비 지원도 받지 못할 것이니 말이다. 이것이 우리를 옥죄는 또 하나의 현실이자 딜레마이다.

이종철 지음, 『철학과 비판 – 에세이 철학의 부활을 위해』, 도서출판 수류화개, 2021년 6월 1일 발간.

또 하나 인상 깊은 ‘글의 효과’ 중, 글의 최대 효과는 ‘불편함을 주는 것’이라는 대목이 있다. 정말 공감이 간다. 불편하고 심지어 불쾌감을 주는 글은 처음에는 분노의 감정이 일지만, 다시 곱씹어 생각하면 나를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글쓰기는 잘 시도하지 않는다.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인심을 잃어서까지 공격적으로 글을 썼다가는 이 업계에서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이다.

서양 철학 전공인 나는 십여 년 전부터 동아시아, 동양 철학, 한국, 중국, 일본 등에 관심을 가졌다. 나는 서양에서 일어난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은 대충 얼개를 다 알고 있는데, 동아시아, 한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특별히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다. 그러다가 문득 서양 철학의 텍스트를 열심히 연구해 왔던 나 자신의 공허한 모습을 뒤늦게 보게 되었다. 서양 철학의 공부가 다 헛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서양 철학 연구에서 ‘나의 고민과 문제’와 ‘우리의 현실’을 절실하게 적시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동아시아, 한국의 현실과 역사에 관심을 가진다고 해서 나의 고민과 문제가 현실에 저절로 반영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현실을 외면해 온 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돌아볼 계기는 충분히 될 것이다. 저자의 생각도 이런 맥락과 통하지 않을까 싶어서 ‘동아시아 사상’의 대목이 훨씬 더 잘 읽힌다. 물론 서양 철학을 거의 평생 연구해 온 저자에게 동양 철학의 고매한 수준을 기대할 필요는 없다. 왜 서양 철학 연구자인 저자가 『논어』, 『주역』, 『장자』와 같은 동양고전에 관심을 가졌는지, 저자에게 불교는 또 어떤 의미인지를 가늠해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또 하나 울림을 주는 대목은 ‘고통, 폭력과 죽음’에 대해 쓴 대목이다. 이제까지 철학은 이성과 진리, 논리 등에 대해서만 이야기했고, 감성, 죽음, 고통, 폭력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했다. 철학이 이런 문제들을 외면해 왔지만, 저자는 고통, 참사, 폭력 등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여기에는 밥벌이의 고단함도 같이 묻어 나온다. 저자가 철학 연구를 계속하면서도 생활의 기반을 지원해 주는 확실한 철밥통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번역 작업에서 빚어지는 저자의 고단한 노동, 생활고 등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을’들의 노동이 다 고단하듯이, 비정규직 철학 연구자들에게 밥벌이를 위한 노동은 정말 지겨우나 필수적인 우리의 또 다른 현실이기도 하다.

에세이 철학의 부활을 향한 저자의 도전과 모험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저자는 철학 하는 집단, 전문가 철학 전공 연구자들의 관행을 얼마나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가? 한국사회의 탐구에서, 특히 ‘한국학자들의 이중성’, ‘일본철학사전’ 등의 논평에서 그 논조의 강도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논평에 대해 기성 학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전처럼 그저 침묵과 무시, 무관심으로 치부해 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책은 일단 작지만, 반향이 있어 보인다. 독자들의 반응인지, 철학 전공자들의 반응인지는 아직까지 잘 분간되지 않는다. 이 반향이 불씨가 되어 더 멀리 퍼져 나가 들불처럼 번질 것인지, 불씨가 파삭 사그라들지는 좀 두고 봐야 할 것이다.

주석 없는 철학적 글쓰기는 가능한가? 이렇게 글쓰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글쓰기는 대중적인 글과 전문적인 글쓰기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말하는 것인가? 업계와 비업계 사이의 경계인의 위치에서 쓰는 글쓰기를 말하는 것일까? 저자의 이러한 시도는 과연 무모한 시도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글쓰기의 한 문화로 자리 잡을 것인가? 이에 대해 나 자신도 자신 있게 답을 내놓기는 힘들다. 자신의 문제로 철학 하고자 했던, 철학의 출발점에서 가졌던 나의 문제의식이, 철학 전문 전공자로 키워지면서 희미한 기억처럼 빛바래졌고, 현실은 또 냉혹했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저자처럼 에세이 철학을 시도할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저자는 우리의 철학의 현실에 커다란 파문을 던진 것은 분명하다. 그 파문이 찻잔 속의 미동에 그칠지, 거대한 파도가 될지는 그 누구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에세이 철학을 향한 글쓰기는 불안, 두려움, 고통에 직면해 있는 현대인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을까? 철학이 대중들에게 외면받는 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대중들에게 전혀 공감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감정, 고독, 불안, 두려움 등에 대해 공감과 위안을 원한다. 물론 다른 인문사회 과학에서도 이런 문제들에 많은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철학은 어떤가? 여전히 철학 전공자들은 자신만의 높은 울타리 속에서 타인의 고통, 약자, 소외된 자, 이민자, 국외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해 온 것은 아닐까? 이런 소리 없는 아우성들을 듣지 않으려는 기성 철학에서 벗어나기 위해 에세이 철학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저자에게 되묻는다.

에세이 철학은 시대의 목격자, 고발자, 기록인의 역할을 담지(擔持)할 수 있을까? 철학 연구자들의 자화상으로 보이는 한 대목이 특히 눈에 띈다. 1980년대에 탄생한 여러 철학회의 탄생 비화를 적은 기록은 그 시대 철학을 하던 청년들의 고민을 생생하게 담아서 진한 울림을 준다. 내가 속한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탄생 비화에 대한 기록도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다. 1989년 ‘사회철학연구실’과 ‘한국헤겔학회’가 만나서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탄생하고, 다른 여러 학회로 이합집산 되었던 기록을 저자가 전하고 있다. 나도 이 과정에 잠깐 참여한 기억이 있다. 벌써 30년도 넘은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그 당시 우리 젊은 시절, 그 시대의 치열한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어서 감회가 새롭다.

이제 남는 문제와 물음은 제자리이다. 철학은 무엇이고 철학자는 누구이며 그 역할은 무엇인가? 예전에 어떤 선배한테 들은 이야기가 퍼뜩 떠오른다.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 주석 없이는 한 줄도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즉 권위 있는 철학자들의 책을 인용하지 않은 채, 오롯이 자신만의 이야기와 주장을 쓸 수 없었다는 고백이다. 그 이야기가 지금까지 나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은 여전히 유효한 숙제이기 때문이다. “철학함”은 “나의 철학함”인가? 그래서 많은 동·서양 문헌들을 소개하고 진열하여 지식을 파는 오퍼상이 되기를 멈추고 “진짜 철학자 되기”가 가능할 것인가? 이것이 에세이 철학의 목표일까? 저자의 바람대로 ‘에세이 철학’이 부활할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에세이 철학의 부활을 응원하면서, 저자가 주장하는 철학의 비판적 기능, 더 신랄하고 적나라한 고발 등을 통해 새로운 철학적 글쓰기를 위한 논쟁의 불씨가 훨훨 타오르기를 희망해 본다.


▼ 위의 글에 대해 『철학과 비판』의 저자 이종철 박사가 쓴 답글 바로가기

투명하고 무거운 / 사랑의 모양은 네모 [유운의 전개도 접기]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왔다.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투명하고 무거운 / 사랑의 모양은 네모

 

이유운

 

투명하고 무거운

 

 

그러면 우리는 도래하자

이해할 수 없는 시제와 선언

 

    “나는 나의 기원 이런 말들은 자주 소리내어 말할 필요가 있었다 사랑하는 입술을 매만져본다 아직 멸망이 오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아서 멍든 복숭아와 풋내가 나는 무화과의 껍질을 벗기는 네 손을 본다 춤추는 나무나 빛무리 같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아무것도 미워하지 않아

 

    네가 만진 나의 부분들은 아주 단단해졌어 나는 이걸 사랑이라고 자랑하고 다닌단다 이제 네가 만지지 않은 부분은 눈동자 뿐 연약하고 언제나 젖어 있는 이 검은 동그라미

 

돌아가는 테이프

오토리버스

또 돌아가는 테이프

멈추는 장면마다

어디선가 자라온 사랑으로 불거진 네 손가락 마디

 

손이 데일 것 같이 차갑기도 한

너무 가깝게 있어서 만지기가 어려워

 

    둥근 어깨. 깨무는 둥근 이. 남는 둥근 자국. 모두 만지며 사랑이 둥글다고 배우는. 둥글고 슬픈 학습

 

무릎을 꼭 붙이고 함께 앉아 있다

기울어진 모양으로

내기 하자. 더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일어나기로.

 

 

 

    사랑의 모양은 네모

 

 

    어렸을 적 가장 좋아하던 영화 세 편을 나열하면 지금의 인생과 취향을 알 수 있다는 말이 한창 트위터에 돌았었다. 나는 그 말이 조금 꺼림직하고 소름이 끼쳤다. 뭐, 당연하게도 그 명제의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그런 거다.

    그 말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부터 내가 좋아하는 영화 세 편을 꼽아 보자면 《8월의 크리스마스(1998년, 허진호 감독)》, 《클래식(2003년, 곽재용 감독)》,《해피투게더(1997년, 왕가위 감독)》다. 너그럽게 다섯 편까지 허락해준다면 《퐁네프의 연인들(1991년, 레오스 카락스 감독)》과《쉬리(1999년, 강제규 감독)》도. 이 영화들로만 보면, 지금의 나는 내가 농담처럼(사실 아니지만) 자주 하는 말인, 나를 ‘사랑의 헐값에 팔아넘기는’ 어른처럼 자란 것 같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지원이 정원에게 ‘왜 결혼 안 했어?’ 라고 물었을 때, 정원이 웃으면서 ‘너 기다리느라고.’하고 대답하는 장면이다. 미소를 지으며 이 말이 꼭 사랑 고백이 아니라는 것처럼 가볍게 대답하는 정원의 얼굴. 나는 정원의 그 얼굴과 목소리에서 진한 사랑과 그리움을, 그토록 짙고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투명하게 말할 수 있는 표정을 보았다. 그때부터 나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오래도록 투명하고 무거운 사랑의 모양을 가질 수 있는 어른. 하트 모양이 아니라 네모난 사랑의 모양을 가지고 있는 어른.

 

    나는 나에게 처음으로 사랑의 모양을 알려 준 어른과 그가 나를 사랑한 풍경을 떠올린다.

 

    정성스레 닦고 말린 오래된 선풍기가 돌아가는 사아악, 사아악 소리. 꼭 숲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 같다. 비가 오고 있다. 축축한 여름. 바람과 나를 찾는 숨이 함께 분다. 손톱을 깎고 버린다. 저것을 주워 먹고 내가 될 다른 존재들에 대해서 아직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어린 내가 있다. 마루에 볼을 대고 눕는다. 차가운 바람. 햇빛이 따갑지 않아서 눈을 가늘게 뜨면 그 사이로 나뭇잎과 창문 살의 모양과 색으로 빛이 들어온다. 나보다 먼저 태어난 손이 내 눈꺼풀 위로 손차양을 만들어준다.

 

    내 눈가에 얼룩처럼 남은 기미와 주근깨를 만져본다. 그렇게 그 손이 나를 자주 가려주었는데도 햇빛과 시간의 자국은 생겼다. 아무리 내가 어딘가 숨는다 하더라도 사랑이 나를 찾아내듯.

 

    나는 이렇게 사랑받고 컸다. 이 때는 아직 사랑의 모양이 없었다. 빛무리처럼 춤을 추고 있을 뿐이었다.

 

    어렸을 때 살던 오래된 동네의 그보다 더 오래된 건물에는 유호철물이 있었다. 일층에는 유호철물, 이층에 진실다방과 당구장이 있었고 삼층에는 전당포와 창문에 검은 종이를 바른 알 수 없는 방이 있었다. 그 위로는 철문이 항상 굳게 닫혀 있어서 한 번도 올라가 보지 못했다. 가끔 그 위로 올라가려고 하면 이층의 진실다방 이모가 고개를 내밀고 나를 불렀다.

거기 가면 안 돼.

뭐 있는데?

    진실다방 이모는 대답 대신 모나카를 줬다. 어른들은 진실을 감추는 댓가로 나에게 단 것들을 줬다. 진실다방 이모만 그런 건 아니었지만 나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진실다방 이모의 멋쩍은 웃음과 그가 주었던 모나카의 단 맛이 떠오른다. 혀가 떫다. 진실다방 이모의 기울어진 아몬드 모양의 눈. 움켜쥐면 타원 모양으로 우그러질 것 같은 그 모양이 사랑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유호철물은 주인 아저씨 아들의 이름이 유호라서 유호철물이었다. 유호는 나보다 아홉 살이 많았고 차이나 칼라 교복을 입었다. 유호는 종종 나를 자전거 뒷좌석에 태워줬다. 유호의 자전거는 쌀집 자전거여서 뒷좌석이 판판하고 바른 모양이었다. 그 뒷좌석에 앉아 유호의 등에 얼굴을 대면 햇빛 냄새가 났다. 나는 유호가 햇빛으로 만들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유호는 내가 종종, ‘난 커서 너랑 살 거야.’라고 말하면 곤란한 것처럼 웃었다. 어린 내 앞에서 거짓말은 하기 싫고 솔직해질 필요도 없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나를 볼 때 보통 유호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8월의 크리스마스》를 좋아하는 이유는 유호와 정원이 닮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둘 다 살구비누를 쓸 것 같다. 비누로 머리를 감아 뻣뻣해진 머리카락 끝에서 여름 냄새가 날 것만 같다.

 

    유호의 등에서 나던 햇빛 냄새가 이상할 정도로 나이가 들면서 점점 뚜렷해진다. 나는 시력이 나빠서 안경을 쓰지 않으면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둥근 알사탕 모양처럼 보인다. 그런 모양으로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사랑이 처음 만들어졌다.

 

    나는 언제나 누군가를 사랑했고 무언가를 사랑했다. 쉽게 사랑하고 자주 사랑했지만 어떤 사랑의 형태에도 능숙해본 적은 없다. 그래서 내가 받아온 사랑의 연원을 떠올릴 때마다, 이토록 희고 단단한 사랑을 받아왔는데 왜 지금의 나는 그런 사랑의 모양을 가지지 못했는지 나를 탓하고는 한다. 어린 눈 위로 손차양을 만들어주는, 거짓말 대신 모나카를 주는, 등에서 햇빛 냄새가 나는 그런 사랑과 내 마음의 모양이 달라서 가끔 놀란다.

 

    아직까지는 둥근 모양이 되는 사랑을 배우고 있다. 학습의 과정은 자주 슬프고 오래 사랑스럽다. 점차 네모낳게 단단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 나의 마음은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지 않고 바닷가에 한참 서 있던 사람의 어깨처럼 엉망으로 껍질이 벗겨진 모양이다. 하지만 이렇게 훼손된 마음도 섬세하게 마련할 수 있다. 나는 이 훼손된 마음을, 섬세하게 마련한 모양을, 시라고 부른다.

 

 

 

 

 

이유운 withwho_@naver.com

그렇다고 해서 온종일 사랑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화여대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인류 최후의 존재들과 나누는 ‘테스형’의 삶 이야기 ② [내게는 이름이 없다]

인류 최후의 존재들과 나누는 ‘테스형’의 삶 이야기 ②

 

글: 행길이

 

“내가 언제 악법도 법이라고 했냥?!”

 

덩치가 친구들을 모아놓고 시시덕거리며 놀고 있었어요. 얼마 전부터 사이가 틀어진 똘똘이가 그 앞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가만보니 똘똘이는 고급 브랜드 점퍼를 입고 있군요. 덩치는 똘똘이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어깨동무를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야, 똘똘이 너 오랜만이다. 새 옷 샀니? 우린 친한 친구니까 그 옷 좀 같이 나눠 입자. 친구끼리는 모든지 함께 나눠 쓰기로 정했거든.” 똘똘이는 억울했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이건 내꺼라구.” 그러자 덩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흥, 아까도 말했다시피 친구끼리는 무엇이든 나눠 쓴다는 규칙을 만들었어. 그렇지 얘들아?” 주변의 덩치패들은 킥킥대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는게 어딨어. 그건 부당한 규칙이라구!” 어처구니가 없어진 똘똘이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호오, 부당한 규치~익? 역시 똘똘이는 똑똑해서 어려운 말도 잘 쓰네. 그럼 네가 잘 아는 소크라테스 할아버지가 한 말을 일러주지. ‘악법도 법이다.’ 나쁜 규칙도 지켜야 한다는 뜻이지. 그러니까 그 옷 내놔.”

‘아니, 힘만 센 덩치가 어느새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지?’ 당황한 똘똘이는 새 옷을 빼앗기고 말았답니다. 힘 없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똘똘이는 생각했어요. ‘정말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는 이상한 말을 했을까?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부당한 일을 그대로 두고 본 위선자가 되는 건데?’ 똘똘이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1. “널 고발한다. 소크라테스.”

 

아테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행위를 점점 거북하게 여기기 시작했어요. 소크라테스는 고대 민주주의가 자주 빠지게 되는 잘못을 지적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당시 아테네인들은 집단적으로 결정한 사항은 의심하지 말고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부당하더라도 말이죠.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태도는 대중의 독재에 아부하는 것일 뿐 진정한 정치는 아니라고 비판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다수의 의견에 반대하는 반민주주의자로 보인 것이죠.

더구나 젊은이들이 소크라테스의 문답법(dialektike)을 흉내내면서 어른들을 골려먹고 기성 사회에 도전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소크라테스를 따르던 이들은 당시 아테네에서 촉망받았던 젊은이들이었어요. 이들 중 한 명이었던 알키비아데스(Alkibiades)는 적국으로 도망가 아테네를 위기에 빠뜨리는 매국 행위를 하다가 이국에서 암살당했습니다. 아테네인들에게 이것은 충격이었죠. 그들에게 똑같은 일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어요. 아테네 사람들이 보기에 이들을 가만 놔두다가는 사회가 혼란해질 것 같아 보였어요. 그래서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법정에 고발했습니다. 아테네인들에게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고유한 정치 전통에 대한 믿음을 흔들고 젊은이들의 머리 속에 불순한 생각을 집어넣은 원흉으로 보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테네의 적이라기보다는 진실한 친구이고자 했어요. 소크라테스는 재판정에 나가 자신을 변론했습니다. 당시에는 아테네 시민이라면 누구나 검사나 변호사가 되어 어떤 사람을 고발하거나 자신을 변호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판결은 아테네 시민들의 투표로 내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2. “날 사형시키려거든 맘대로 하세요.”

 

그에게 재판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시민들이 진실(진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제 정신을 차리는 것이 더 중요했죠.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재판을 변론장이 아닌 철학적 토론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시민들은 당황스러웠어요. 소크라테스가 이상한 방식으로 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배심원의 정서에 호소하면서 무죄 판결을 청하는 수사술(rhetorike)을 펼치지 않았어요. 오히려 소크라테스는 재판에 임하는 시민들의 영혼에 켜켜이 쌓인 잘못된 상식을 지적하면서 그들을 깨우치려는 변증술을 펼쳐나갔습니다. 이것은 시민들의 비위를 상하게 만들었어요. 당시는 배심원의 판결이 곧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민을 교육하려는 소크라테스의 이런 행동은 시민들에게 법 위에 군림하려는 오만함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시민들의 심사를 뒤틀리게 만들었습니다.

 

“아테네인 여러분! 여러분은 제가 성가신 질문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그만두면 풀어주겠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제안을 거부합니다. 저는 늘 해오던 대로 말하고 돌아다닐 겁니다. ‘그대들은 재물을 얻기 위해 의논하는 데에는 힘쓰지만 지혜와 영혼이 훌륭해지는 것에 대해서는 노력하지 않습니다. 부끄러운 줄 아시오.’라고요. 만일 당신들이 훌륭함을 지니고 있지 못하면서도 그걸 갖고 있는 양 거들먹거리면 저는 당신들에게 끝까지 질문하고 캐묻고 심문할 것입니다. 저는 재물보다는 자기의 정신이 제대로 박혀있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설득하고 돌아다닐 것입니다. 이는 제가 여러분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봉사입니다. 아테네인 여러분! 저를 무죄 방면하든 유죄 선고를 내리든 맘대로 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저의 행동은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요. 몇 번이고 죽는다 해도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소크라테스는 시민들이 법의 이름으로 내리는 판결을 따르기를 거부했습니다. 그것이 정의보다는 재물을 탐하는 정신에 기초하여 내려진 나쁜 판결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이 다수의 힘을 근거로 하여 힘 없는 자를 압박하는 폭력에 다름 아닌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악법도 법인 이상 두말없이 따라야 한다고 말했겠습니까?

 

3. “잘 들으세요, 나는 정의로운 법질서를 존중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정의롭지 않은 법의 판결은 존중할 마음이 없다고 말한 덕분에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소크라테스보고 몰래 탈옥하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를 거부합니다. 나라에서 내려진 판결이 잘못됐다는 이유로 그것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행적은 겉으로 보기에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입장을 내보인 것으로 볼 여지를 줍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렇게 단순하게 볼 수는 없어요.

우리는 억울한 판결을 받았다고 생각되면 세 번까지 재판을 받을 수 있어요. 세 번째 재판에서도 진다면 그 판결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세 번에 걸친 재판에서도 부당한 판결은 나올 수 있어요. 과거 우리나라에도 그런 일이 많이 벌어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탈옥을 하지 않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악한 판결이 정당했다고 인정했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그들은 결코 악한 판결을 정의롭다고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들이 존중한 것은 바로 오늘 내려진 악한 판결이 아닙니다. 재판의 기회를 부여하고 있는 민주적 법제도와 그것을 가능하게 한 사회 질서를 존중하고 신뢰하고 있을 뿐이었어요.

소크라테스도 마찬가지였어요. 그가 순순히 독배를 마신 까닭은 판결의 정당성을 수긍해서가 아니어요. 그가 살아왔고 살고 있었던, 그에게 수많은 권리와 자유를 제공해 주었던 아테네의 정의로운 법질서와 법의 정신을 존중해서였어요. 어렵죠?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법의 본래 정신에 대해서 한 번 알아봐야 해요.

 

4. 야수는 죽어야 한다.

 

서양에서 법이라는 것은 서로의 영역이 어디까지인지 표시해 주는 울타리에서 기원하고 있어요. 이것은 힘 센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것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처럼 법은 힘의 독점을 막기 위해 마련된 거랍니다. 여기서 법의 정당성이 확보돼요.

넓디 넓은 목초지의 울타리는 혼자서 세우기 힘들죠? 그래서 모두가 힘을 합쳐 울타리를 세웁니다. 법도 마찬가지여요. 공동체 모두의 힘을 합쳐서 법질서를 엮어나가요. 누구든 다른 사람을 함부로 지배해서도 안 되고 해를 끼쳐서도 안 돼요. 법질서는 이런 정의로운 마음을 담아 한땀 한땀 엮은 거랍니다.

그런데 가끔 자기 힘만 믿고 법의 울타리를 넘어서 자기 욕심만 챙기는 이들이 있어요. 이런 이들은 울타리를 넘어서 양을 물어가는 늑대와 같은 취급을 받아요. 그들은 사회의 혼란을 가져오는 야수와 같기에 처벌을 받습니다. 공동체의 약속인 법질서 자체를 무시하고 자기 욕심만 채우려 한다는 것은 모두의 적이 될 각오를 하는 것과 같답니다. 그래서 공동체에서 영원히 추방하거나 심하면 죽여 버리기도 해요.

 

5. “다시 한 번 말합니다. 나는 정의로운 법의 정신을 준수할 뿐입니다.”

 

그런데 어느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양치기 개들 중 몇 마리가 양고기 맛을 알게 돼서 남의 양을 잡아먹고 시치미 뚝 뗄 때는 어떻게 하죠? 동료였던 많은 이들이 야수가 되어 이웃 사람의 양을 탐할 때는 어쩌죠? 당시 아테네 사람들도 법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을 위협하거나 다른 나라를 멸망시키는 야수 같은 짓을 종종 벌였답니다. 이것은 법질서 자체가 악해서 벌어진 문제가 아니어요. 법질서를 악용하는 이들의 부도덕함이 문제죠.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인들이 잠시 현혹된 부도덕한 정신을 고발하고 싶었을 뿐이었어요.

소크라테스에게 아테네의 법질서는 애초부터 악하지 않아요. 그는 아테네인들의 법질서가 정의를 지향하고 있다고 믿었어요. 그는 아테네인들이 자기에게 부당한 판결을 내렸다고 해서 아테네의 법 원칙이 악하다고 주장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아테네인들이 정의로운 법 원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당한 판결이 나왔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는 아테네의 법을 준수합니다. 그것이 악한 법이라도 법이기에 따른 게 아니었어요. 아테네의 정의로운 법 원칙과 법 정신을 존경하고 그것의 회복을 신뢰했기 때문에 독배를 마신 거여요. 법 원칙이 나쁜 게 아니라 그것을 제대로 이해 못한 사람들이 잘못을 범했을 뿐이라는 거죠. 그는 뼈 속까지 아테네의 정치 및 법질서를 신뢰한 사람이었어요.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87년

 

6. 잘 가요, 소크라테스

 

사형 선고를 받은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작별을 고합니다.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어요. 나는 죽으러 가고 여러분은 살러 갈테죠. 하지만 우리들 중 어느 쪽이 더 좋은 곳으로 가는지는 아무도 모른답니다. 신을 제외하곤 말이죠.”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으로서는 너무도 담담한 말입니다. 사실 소크라테스는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나지도, 아테네인들의 무지를 깨닫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자기에게 실망하지도 타인을 원망하지도 않았죠. 소크라테스는 어느 누구보다도 지혜로웠지만 자기의 지혜를 내심 자랑스러워하며 과신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재판에서의 패배를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오직 진리만을 추구하며 살아온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고귀하고도 용감한 모습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멋진 사람이 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밝혀주는 사람이 되길 바래요. 안녕 여러분, 안녕 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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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봄 제60회 정기학술대회(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과 공동학술대회) 안내

총무부에서 곧 있을 제 60회 봄 정기 학술대회에 대해 알립니다.

이번 학술대회는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과 공동주최로 2021년 6월 5일 토요일 오후 12시 50분에 시작합니다.
《민주주의와 포퓰리즘, 그 해석의 정치철학적 스펙트럼》이라는 시의성 있는 주제 아래 2부에 걸쳐서 총 여섯분의 발표와 여섯 분의 논평이 준비돼 있습니다.
모든 발표 및 논평이 끝난 후에는 종합 토론 시간이 이어집니다.
(자세한 내용은 첨부해 드린 포스터를 참고해 주십시오.)

코로나 바이러스 유행으로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가 격상됨에 따라, 이번 학술대회는 온라인(Zoom)방식으로 진행합니다.

[Zoom 회의 ID: 912 8735 3888 / 암호: gkscjf2021 (한철2021)]

비록 온라인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이번 공동 학술대회 역시 열정적이고 활기찬 분위기 속에서 개최될
것을 기대합니다.

많은 회원께서 참석하셔서 자리를 빛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변에도 학술대회 참여를 적극 독려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학술대회 당일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4월 월례발표회 영상 “‘우리, 인민’은 누구인가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로서 인민주권-”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4월 월례발표회 “‘우리, 인민’은 누구인가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로서 인민주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학술1부에서는 2021년 2월부터 6월까지 [민주주의와 민주주의‘들’ 1]이라는 기획주제 아래 총 5번의 월례발표를 기획하였고 이번 4월이 세 번째 발표입니다.

 

기획 : 인민주권과 민주주의의 가능성

주제 : ‘우리, 인민’은 누구인가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로서 인민주권-

발표자 : 한상원(충북대학교)

토론자 : 한길석(중부대학교)

일시 : 2021년 4월 29일(목) 오후 4시 – 6시

장소: 온라인 줌 회의실

 

동영상 링크 https://youtu.be/5X84rqeDiTI

에고이스트의 또 다른 의미와 나답게 산다는 것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에고이스트의 또 다른 의미와 나답게 산다는 것

 

박종성(한철연 회원)

 

우리는 에고이스트의 의미를 흔히 일반적으로 ‘이기적인 사람’, ‘자기의 이익만을 꾀하는 사람’으로 이해하고 ‘이타주의자’와 대립하는 의미로 알고 있고 이러한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그런데 슈티르너는 에고(ego)와 같은 의미로 ‘egoistisch, persönlich, eigen’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그에게 에고와 관련된 의미는 ‘나다운, 나답게, 자기다운, 자기만의, 자신의’이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에고이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눈이 필요하다. 그는 일반적이고 굳어진 개념보다는 새로운 의미로 에고를 이해하고 있다. 사소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아주 흥미롭고 중요한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민족주의, 국가주의가 시퍼렇게 살아있어서, 살아가는 동안 자기다움이 짓눌리고 있기 때문이다. 에고이스트는 자기다운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살면서 한번쯤 “너 참, 인간답지 않다.”라는 말을 듣는 경우가 있다. 또는 이런 말을 남에게 해본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슈티르너가 보기에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인간답지 않는 인간’은 ‘인간다운 인간’(Menschlichen)을 꿈꾸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인간다운 사람과 자기다운 사람(Egoist)을 대조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답지 않는 인간(das Unmenschliche[unhuman])이 자기다운 사람이다. 또한 자기다운 사람은 유일자(Einzige)이다. 우리는 이러한 점을 그가 사용하는 아래의 문장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유일자로서의 자기다운 사람(das Egoistische als das – Einzige)”(162), “인간답지 않은 인간, 즉 자기다운 사람”(142) ‘인간답지 않은 인간’, 혹은 ‘자기다운 인간’(egoistischen Menschen)(376)

 

이제 분명한 것은 에고이스트는 ‘자기다운 사람’이란 뜻이다. 이와 관련하여 에고이즘도 이기주의가 아니라 자아주의로 번역하였다. ‘자아주의’는 ‘자기 찾기’, ‘자기에게 유용함’(376)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그는 자아주의와 대립하는 개념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아주의와 사제직의 전쟁, 현세에 마음이 있는 사람과 성령에 마음이 있는 사람의 전쟁”(401) 슈티르너가 보기에 ‘인간다움’은 어떤 정신이다. 자기다운 사람은 정신을 ‘덧없음’으로 과소평가한다. 이러한 사람은 정신을 덧없는 것, 유한한 것, 무상한 것으로 평가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자기답게’(egoistisch)(350) 사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너의 모든 힘, 너의 능력을 가져와서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것이다.(350) 그리고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알고 있는”(208) 것이다. 자아주의는 나다움과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따라서 자아주의는 이기주의가 아니라 개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개성이라든가 개별화(Einzelheit oder Vereinzelung)에 거주하는 일치하지 않은 비동등성과 자기다운 비동등성”(108). 결국 자기답게 사는 것은 개성과 개별화 즉 비동등성, 곧 차이에 대한 인정이다. 나아가 자기다운 사람은 관념의 어떤 도구 혹은 신의 그릇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의 말을 확인해 보자.

 

“자기다운 사람은 자신을 관념의 어떤 도구 혹은 신의 그릇으로 간주하지 않고, 어떤 소명도 인정하지 않으며, 인류가 더 발전하는 목표를 위해 자신이 존재한다고 상상 따위도 하지 않기에 그러한 목표를 위해 눈곱만큼도 기여할 생각이 없다. 그는 그저 스스로의 삶을 살아 나가고 펼쳐 나갈 뿐, 그로써 인류가 잘될지 나쁘게 될지 따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339)

 

과연 우리는 관념의 도구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자아의 그릇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말이다. 관념의 도구, 신의 그릇으로 살아가는 것, 인류를 위해 살아가는 것, 그것은 자기다운 감정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두 가지 감정을 구분하면서 자기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차이는 감정이 나를 고취하였던(eingegeben) 것인지, 단지 감정이 나를 자극하였던(angeregt) 것인지 이다. 나를 자극하였던 감정들이 자기 자신의 감정, 자기다운 감정들이다. 왜냐하면 나를 자극하였던 감정들은 나에게 감정을 각인하지 않았고, 받아쓰거나 따라하도록 불러주지 않았으며, 강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70)

 

그러니까 고취하는 감정과 나를 자극하는 감정을 구분하면서 후자를 자기다운 감정으로 간주한다. 그의 글에서 고취하는 감정을 확인해 보자. 그것은 어떤 현실의(wirklich) 내가 어떤 “자유로운 시민”, 어떤 “국가의 시민”, 어떤 “자유로운 혹은 진정한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하여, 국가를, 국민을, 인류를 그리고 그 밖의 유사한 모든 것을 자기 내면에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그럴싸하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믿는 것이며 ‘어떤 낯선 나’를 받아들여서, 그리고 바로 그와 같은 ‘어떤 낯선 나(eines fremden Ichs)를 위한 헌신’을 받아들여서 진리를 보고 내 자신의 현실성(Wirklichkeit Meiner)을 본다고 그럴싸하게 거짓말을 하는 것을 믿는 것이다.(247) 민족의식이 고취되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렇다면 고취하는 감정은 무엇일까? 그것은 신들림이다. 그것은 미친 것이다. “만약 ‘신들림’(Besessenheit)이라는 말이 당신을 불쾌하게 한다면, 그렇다면 이 말을 선입관(Eingenommenheit)1이라고 부르자, 그렇다, 그 이유는 정신이 당신을 사로잡기(besitzt) 때문이고 모든 ‘고취’(Eingebungen)는 정신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열광(Begeisterung) 그리고 황홀(Enthusiasmus)이라 부른다. -부진하고 철저하지 못한 방법으로 멈출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완전한 황홀(Enthusiasmus)은 –광신(Fanatismus)이라 불어야 한다고 덧붙인다.”(48)

잠시 ‘Begeisterung’ 단어에 주목해 보자. 맑스는 <자본>에서 “노동의 불길이 죽은 사물에 새로운 ‘영혼을 불어넣고’(begeisten)”(강신준, 292-293)라고 쓴다. 맑스가 사용한 이 단어는 헤겔도 사용하였다. 메럴드 웨스트팔에 따르면 ‘begeisten’는 헤겔이 만든 단어이다. 학문적 노고를 통해 진리에 이르는 정신적 활동이 ‘begeisten’이다. 이와 달리 열정에 휩싸인 상태{begeistern(Begeisterung)}는 진리를 인식할 수 없는 열정에 휩싸인 상태, 열정에 휩싸여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슈티르너에게 이 단어는 앞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신들린 사람(Besessener)과 연결된다. ‘인간다운 사람’이라는 관념의 도구로 살아가는 것이 신들린 사람, 미친 사람이다. 신들린 사람과 대립하는 사람은 유일한 사람, 자기다운 사람이다.

자기다운 사람과 사랑의 문제를 살펴보자. “자, 어떤 개인에 자기다운 충동(Trieb)이 충분한 힘을 갖지 못한다면, 그는 가족의 요구에 어울리는 결혼을 하고..,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가족을 공경’한다.”, “이와 반대로 그의 혈관에서 자기다운 피가 충분히 이글거리며 부글부글 끓는다면, 그는 가족에 ‘범죄자’가 되는 것을 더 좋아하고 가족의 법에서 벗어날 수 있다.”(242) 슈티르너가 보기에 자기다운 사랑이 아닌 것은 “자발적 사랑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더 높은 본질의 자기 사랑”,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다운(egoistisch)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다운 사랑이다.”(341)

자기다움과 국가의 관계는 어떨까? 국가는 신성하지 않는 사람을 야만인, 자연스러운 인간, ‘자기다운 사람’으로 간주한다.(263) 그래서 국가는 욕망하는 사람을 길들이고자 애쓴다. 국가는 구속이 없는 욕망을 발산하는 사람에게 “자기다운 사람”(egoistische Mensch)이라고 욕한다.(350) 슈티르너는 자아주의와 인간다움(Humanität)은 같은 의미이었어야만 했다(200)고 아쉬워하며 말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슈티르너는 새로운 인간다움을 주장하고 있다. 그에게 새로운 ‘인간다움’은 자기다움이다. 자발적이고 자신을 소중히 여기며, 더 높은 본질에 신들리지 않은 사람이다. 에고이스트는 자기다움이고 에고이즘은 자아주의이다. 자기다운 사람이 유일자이며, 더 이상 인간다움이 아니라 자기다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아래의 글은 맑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슈티르너의 ‘기도’라고 비꼰 부분인데, 필자는 자기다운 사람의 ‘선언’이라고 본다. 원문은 시의 형식은 아니다. 하지만 자기다운 사람의 ‘선언’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시의 형식으로 변형하였다. 아래의 글로 이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그러나 인간답지 않는 인간이 결연한 용기로 자기 자신에 등을 돌리면서, 동시에 평온을 어지럽히는 비판가를 외면하고, [162]비판가의 항의를 건드리거나 다루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어떨까? “당신은 나를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라고 부른다.”고 비판가에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당신이 보기에 실제로 인간답지 않는 인간이외다.

나는 인간답지 않은 인간이외다. 왜냐하면 오로지 당신이 나를 인간다운 사람과 대립시키기 때문이외다.

내가 내 자신을 이러한 대립에 매료되도록 하는 한에서만, 나는 내 자신을 경멸할 수 있었나이다.

나는 경멸당할만한 사람이외다. 왜냐하면 내가 나의 ‘보다 나은 자아를 내 밖에서 찾았기 때문이외다.

나는 인간답지 않는 인간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인간다운 인간’을 꿈꾸었기 때문이외다. 나는 인간다운 인간의 ‘참된 자아를 갈망하고 항시 ‘가엾은 죄인’으로 남아 있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을 닮았나이다.

나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만 나 자신을 생각했나이다.

나는 충분히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이 아니었고 충분히-유일한 사람도 아니었나이다.

바로 지금 나는 나 자신이 인간답지 않는 인간으로 여겨지기를 중지하나이다.

그리고 나를 인간에 비교하여 측정하거나 측정 당하는 일을 그만두고, 나보다 높은 어떤 것도 인정하기를 중단하나이다.

그럼 –잘 가시게, 인간다운 비판가여!

나는 이제까지 단지 인간답지 않는 인간에 불과했나이다.

하지만 이제부터 더 이상 인간답지 않는 인간이 아니외다.

오히려 유일자이외다.

그렇다, 당신이 몹시 싫어하는, 자기다운 사람이다.

하지만 자기다운 사람은 인간다운 사람과 인도적 사람, 그리고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은 사람에 견주어 자기다운 사람 그 자체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외다.

오히려 자기다운 사람은 –유일자로서의 자기다운 사람과 비교하여 자기다운 사람 그 자체를 평가하나이다.”

글의 마지막으로 질문을 던져보자! 인간답지 않은 인간의 인간성은 무엇인가? 독자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필자: (다음에 쓸 글의 주제는 “그렇다면 나답게 사는 것은 혁명일까 반역일까?”이다.)


  1. 이 말은 54쪽, 78쪽에 나온다. eingenommen은 ‘편견에 사로잡힌’이라는 형용사이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3월 월례발표회 영상 “서양철학 1세대와 자유주의 없는 민주주의 – 오래된 미래로서의 한반도 민주주의”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3월 월례발표회

 

링크: https://youtu.be/R77mYJeYhQs

한철연 학술1부에서 기획한 2021년 2월부터 6월까지의 월례 발표회는 [민주주의와 민주주의‘들’ 1]이라는 기획 아래 총 5번의 발표가 기획되었습니다.
이번 3월 월례 발표회는 조배준 선생님의 발표와 유현상 선생님의 토론으로 진행됩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3월 월례 발표회

* 기 획: 자유주의 VS. 민주주의
* 주 제: “서양철학 1세대와 자유주의 없는 민주주의 – 오래된 미래로서의 한반도 민주주의”
* 발 표: 조배준(건국대학교)
* 토 론: 유현상(숭실대학교)
* 일 시: 2021년 3월 26일 (금) 오후 4시 – 6시

인류 최후의 존재들과 나누는 ‘테스형’의 삶 이야기 ① [내게는 이름이 없다]

인류 최후의 존재들과 나누는 ‘테스형’의 삶 이야기 ①

 

글: 행길이

 

아, ‘테스형!’

 

‘네 주제를 알아!!’

 

똘똘이에게는 요즘 한창 연예인이 될 꿈에 부푼 덩치라는 친한 친구가 있습니다. 어느 날 덩치는 똘똘이 앞에서 그동안 열심히 익힌 솜씨를 보여준 후 이렇게 말합니다. “어때? 이만하면 이번에 열리는 TV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적어도 톱 텐에는 들 수 있겠지?” 내심 덩치의 솜씨에 감탄하던 똘똘이는 이 말을 듣자 갑자기 배알이 뒤틀려서 이렇게 비아냥댑니다. “흥, 소크라테스가 한 명언도 몰라? 네 자신을 알아야지. 주제 파악이나 좀 하라구. 무식한 딴따라같으니라구.” 심술궂은 이 말에 화가 난 덩치는 주먹을 날렸어요. 똘똘이는 ‘객관적’ 사실을 알려준 호의를 주먹질로 보답한 덩치가 원망스러워요. 순간 똘똘이는 무지한 아테네 시민들에게 느꼈던 소크라테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역시 진리를 외치는 자는 고독한 거야.” 이렇게 되뇌이며 똘똘이는 집으로 돌아갔답니다. 친구의 무지함을 깨우쳐주려 했다가 우정을 해친 똘똘이는 과연 지혜로운 걸까요? 그는 과연 무지에서 벗어난 이일까요? 아무래도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의 참뜻은 똘똘이가 생각하는 의미가 아닌 것 같군요.

 

1. ‘너 자신을 알라’=무지(無知)의 자각(自覺)

 

옛날 아주 먼 옛날,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천 4백 여 년 전, 지중해 유역의 머나먼 나라 그리스의 아테네라는 도시에 소크라테스(Sokrates)라는 현자가 살았습니다. 여러분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주 못생겼으며 구질구질한 옷차림으로 매일같이 시장 바닥을 돌아다니면서 곤란한 질문으로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는 식의 이야기말입니다. 바가지를 긁던 그의 아내 크산팁페(Xanthippe)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죠. 하지만 우리에게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이 말은 흔히 “함부로 까불지 말고 네 주제 파악이나 해라”라거나 “나쁜 규칙이라도 그것이 규칙인 이상 잔말 말고 지켜야 해”라는 식으로 해석되고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은 소크라테스가 이런 심술궂은 말을 했다는 게 믿어지나요? 정말 그는 이 두 ‘명언’을 남긴 사람일까요?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른들은 아마 “무슨 소리야! 소크라테스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다구. 난 그걸 교과서에서 배웠는 걸!!”이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틀렸답니다. 두 말 모두 소크라테스가 한 게 아니어요. 소크라테스가 남에게 면박이나 주고 부당한 규범을 강요하는 영감탱이였다면 그토록 오랫동안 존경과 사랑을 받지는 못했을테니까요.

원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소크라테스가 만들어 낸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당시 그리스 사람들이 늘 되뇌이고 있었던 상식적인 격언이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사용하는 사람들이나 그것이 활용되는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달라집니다. 델포이(Delphoi) 신전의 무녀들은 신전 입구에 이 말을 걸어놓고 신탁을 요청하는 이들의 금언으로 삼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당시 사람들과 다르게 해석하면서 자기 삶의 경구로 삼습니다. 그는 신전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경구를 ‘자기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항상 자각하고 있어라’는 의미로 풀이했죠. 이것을 어려운 말로 ‘무지(無知)의 자각(自覺)’이라고 한답니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지혜로운 자라고 칭송을 받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실제로는 무지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의 가르침을 경건하게 따르는 삶을 살고자 했던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자각’하라는 신의 뜻을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델포이 신전의 가르침대로 살라고 권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이 남달랐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미움을 사게 한 원인이었죠.

‘소크라테스’ 출처: 위키피디아

 

2. 델포이 신탁

 

아마도 조각가였을 거라고 짐작되는 소크라테스는 당시에 특출한 지혜를 가진 이로도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친구 카이레폰(Chairephon)은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찾아가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지혜로운지 알아보고자 했습니다. 신탁을 이랬습니다.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자는 아무도 없다.” 친구로부터 신탁의 내용을 전달받은 소크라테스는 기뻐하기는커녕 혼란에 빠졌어요.

 

“내가 지혜롭지 않다는 것은 나 자신이 잘 아는데, 신은 나를 가장 지혜로운 자로 지목하다니…. 이건 대체 무슨 뜻일까? 하지만 신이 거짓말을 한다거나 틀린 말을 할 리는 없을 테고… .”

 

자기는 무지하다고 믿고 있었지만 소크라테스는 일단 신의 말대로 살아보기로 하였습니다. 신앙심 깊은 소크라테스는 신이 자신을 지혜로운 자로 보고 있는 이상 이 말을 거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신의 뜻대로 살면서도 자신의 의혹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을 찾아가자. 그래서 그들이 정말 지혜로운지 시험해보자.”

 

그는 우선 가장 지혜롭다는 정치인을 찾아가서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정치인 중 누구도 지혜로운 답변을 내놓지는 못했어요. 이어서 그는 라케스(Laches)와 니키아스(Nikias)와 같은 이름난 장군들을 찾아다니면서 진정한 용기란 무엇인지 알면 가르쳐 달라며 여러 가지를 끈덕지게 묻습니다. 그러나 이들도 소크라테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있는 사람이 아님이 판명되었어요. 이어서 그는 작가들에게 아름다움의 의미에 대해 집요하게 물었습니다. 당시 작가들은 가장 훌륭한 통찰력을 지닌 이들로 여겨졌어요. 하지만 이들도 자기가 쓴 작품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자기 작품을 지혜를 가지고 짓는 게 아니라 타고난 끼나 우연히 얻게 되는 영감에 의해서 지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속 시원한 답을 내놓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탁이 옳았음을 알게 되었어요. 그가 생각하기에 자기는 영명한 지혜는 갖고 있지는 않지만 최소한 지혜롭다고 거드름 피우는 사람들이 모르는 한 가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자각’이라는 겸손한 지혜를 다른 사람들도 갖도록 권하면서 돌아다녔어요. 사람들이 그의 깨달음을 쉽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전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경구를 이용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신전의 경구를 ‘무지의 자각’이라는 철학적 성찰로 해석한 거죠. “우리들은 스스로 지혜롭고, 탁월하며, 용기있는 이들이라고 자부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요. 그런 우리의 모습을 깨닫고 진짜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함께 진지하게 노력합시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깨달음이었어요.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자각을 통해 스스로를 되돌아볼 기회를 제공하고, 더 건강한 아테네 사회를 위해 사람들이 노력하도록 만들고 싶었던 거예요.

 

3. 전쟁과 내전

 

소크라테스가 이런 충고를 하고자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아테네는 이웃 나라 스파르타와 전쟁 중이었어요. 한 때 대제국 페르시아의 침략을 함께 물리친 두 동맹국은 강력한 적을 물리치자 서로 세력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27년 간 계속된 펠로폰네소스전쟁이 바로 그것이었어요. 이 전쟁에서 아테네는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약소국을 침공하는 등 부당한 짓을 여러 차례 저질렀습니다. 그 와중에 국론은 분열되고 민심은 사나워지기 시작했어요. 내란도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고향을 떠나야 했답니다. 사람들은 이제 정의보다는 이기심과 욕망을 채우는 데에 급급해졌어요. 아테네인들이 자랑했던 빛나는 자유의 영혼은 점점 부패하고 추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테네인들의 정신이 부패하여 사회가 무너져 가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답니다. 아테네를 사랑한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신전의 경구를 빌어 영혼의 빛을 잃고 헤매고 있는 아테네인들이 자신의 무지를 깨닫기를 바랐던 겁니다.

 

4. “힘 센 놈이 정의로운 거야!”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아테네 사람들은 자유로운 삶을 위한 연합이라는 정의로운 정신을 점점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점차 오직 힘만이 정의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죠. 힘 있는 자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곧 정의로운 행위라는 것입니다. 정의로운 법과 제도라는 것도 결국에는 권력(힘)을 가진 이가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휘두르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거죠.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Thrasymachos)와의 논쟁에서 이런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조목조목 지적합니다. 정의의 의미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거듭할수록 자기의 무지가 드러난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트리다가 결국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립니다. 분명히 현실에서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이 들어맞는 것 같은데, 소크라테스와 함께 논리적으로 따지고 보니 그것은 틀린 게 분명해보였던 까닭입니다.

아마도 소크라테스와 정의에 대해서 대화하는 아테네 사람이었다면 트라시마코스가 아닌 누구라도 화를 내며 돌아섰을 것입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자국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져 이웃나라를 부당하게 멸망시키는 일을 저질러 놓고도 그것이 정의에 어긋나는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바른말을 하는 소크라테스가 얄미워보였겠죠.

 

5. “나는 굼뜬 말을 깨우는 등에라네”

 

소크라테스의 대화 여행이 거듭될수록 사람들은 점점 소크라테스를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지혜롭고 덕망있는 자로 한껏 뽐내던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질문 공세를 받고 순간 전기에 감전된 듯이 멍해져 버렸답니다. 그리곤 어느새 무지한 자로 전락하게 된 자기를 발견하게 되죠. 이렇게 질문을 통해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여 진지한 탐구의 자세를 갖게 하는 대화의 방법을 문답법(dialektik)이라고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에 걸려든 이들은 황급히 말꼬리를 잡아 소크라테스를 논박해 보려 했지만 그때마다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공격을 미끄러운 뱀장어 마냥 요리조리 피해가곤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소크라테스는 밉살스런 전기뱀장어같이 보였어요. 소크라테스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습니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가 점점 깊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테네 사람들을 조롱하고 그들의 믿음을 비웃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이 아니었어요. 신탁의 말을 확인해보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우선은 집단적 이기주의에 눈이 멀어가고 있는 아테네 사람들의 영혼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었죠.

소크라테스는 그리스인 특유의 위대한 정신을 잊고 점점 자신의 적이었던 페르시아의 추악함을 닮아가는 아테네인들이 걱정스러웠어요. 그에게 아테네는 ‘혈통은 좋지만 이제는 욕심 때문에 살만 뒤룩뒤룩 쪄서 잠만 자려고 하는 말’ 같아 보였어요. 소크라테스는 이 뚱뚱이 말을 깨워 다시 뛰게 하기 위해 따끔한 자극을 선사하는 등에가 되기로 했답니다.

 

6.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의 의미

 

여러분도 이제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의 의미를 잘 알게 되었을 테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지어낸 게 아닙니다. 다만 그는 자기의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좀 더 친근하게 전달하기 위해 그리스(헬라스) 사람들이 잘 알고 있던 델포이 신전의 경구를 활용했을 뿐이었어요.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사람들이 무지를 스스로 깨달아 다시금 영혼의 눈을 떠서 훌륭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도록 유도하고 싶었어요. ‘우리 앞에 있는 문제의 해답은 나도 잘 모르고 당신도 잘 모릅니다. 우리 아는 척은 이제 그만둡시다. 겸손한 마음으로 이 문제의 해답을 함께 고민해보는 친구가 되자구요.’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하고 싶은 말이었어요. 그러니 이제는 친구를 비아냥대거나 비웃는 마음에서 이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되겠죠?

 

②편에서 계속…

 


2편 가기

한철연을 비롯한 27개 철학 학회 <미얀마 민주화 지지 성명서 발표> 2021.04.12. 기사 링크

한국철학사상연구회(한철연, 회장 연효숙)을 비롯한 27개 철학 학회가 함께한 한국철학자연합대회 주최 <미얀마 민주화 지지 성명서 발표>가 지난 2021년 4월 12일(월) 오후 4시부터 4시 20분까지 줌(zoom) 온라인 회의로 진행되었습니다. 성명 발표는 이중원 한국철학회 회장이 맡았습니다.

이어서 미얀마 민주화 지지 성명서 발표에 대한 기사가 『교수 신문』(http://www.kyosu.net)에 <철학 27개 학회 “미얀마 군부는 즉시 폭압을 중지하라”>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습니다.

한철연을 비롯하여 한국철학계가 한국 내 사태가 아닌 국제 사회 이슈에 직접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한국어와 미얀마어로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대한민국 정부도 미얀마 민주화 지지하고 미얀마 군부 제재하는 데 동참하라”는 주장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한철연은 미얀마 민중의 민주화 투쟁을 지지하며 민주주의 회복을 간절히 기원합니다. 미얀마 군부는 즉각 폭압을 중지하고, 대한민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미얀마 사태의 해결을 위한 활동에 적극 동참하길 요구합니다.

아래 기사 원문 링크(출처 주소)를 클릭하여 성명서 내용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 교수신문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64349